제 12호 | 2012.11.07
대한의사협회의 노동조합 결성 흐름 어떻게 볼 것인가
『의사노동조합』을 통해 보는 평가와 전망
포괄수가제 도입을 두고 날선 갈등을 빚었던 의료계와 정부 사이에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최근 대정부 투쟁을 선포했다. 의협은 11월 1일 전국 회원을 대상으로 '의협 투쟁 방향에 관한 설문조사'를 시작했고, 8일 전국 의사 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해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투쟁 로드맵을 확정한 후, 12일부터 본격적인 대정부 투쟁을 가시화 할 방침으로 알려졌다.
의협의 강경한 대응은 새로운 집행부 출범 후 의사노동조합 건설을 추진하고 있던 것에서 어느 정도 예상 가능한 것이었다. 노환규 의협 회장은 지난 6월 28일 ‘전공의의 현재와 미래를 위한 전국 전공의 결의대회’에서 의사노조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후 11월까지 지역·직능별 노조 결성을 추진하고 전국적인 조직을 건설할 것을 밝혔다. 의사노조 설립 필요성은 과거에도 제기된 바 있으나 의협이 공론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노환규 의협회장은 『의사노동조합』을 소개하며 의사노조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한 바 있고, 이는 의사노조 시도의 모티브가 되고 있다. 그레이스 버드리가 쓴 『의사노동조합』(한울출판사, 2000)은 의료의 황금기가 끝나가던 1960년대부터 관리의료의 지배가 본격화되는 1990년대에 걸쳐 의사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게 되는 사회적 요인과 노동조합에 대한 의사들의 인식을 살펴본다. 저자는 의사노조에 대해서는 ‘미국 의사·치과의사노동조합’(UAPD: Union of American Physicians and Dentists, 이하 UAPD)의 기원과 발달을 중심으로 검토하며, 더불어 전문주의에 대한 분석과 의사노조에 대한 저자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미국 의사노동조합의 등장 배경
미국의 의사노조는 사회의 변화 속에서 의료의 변화가 의사들의 전문주의를 위협하고 자율성을 제약할 때 활성화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에서 의사노조와 관련한 세 번의 물결이 있었다. 첫 번째는 1970년대 초반이다. 1960~1970년대 인권·여성·반전운동 등 대중운동에 의한 전문가적 권위 약화, 정부의 의료규제 정책, 힘을 키워가기 시작한 병원과 보험자본에 자율성의 위기를 느낀 의사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그러나 전문주의를 자신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는 의사들의 노조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노동조합과 파업에 부정적인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으로 쇠퇴한다. 두 번째는 1980년대 의료비 절감이 사회적 과제로 등장함에 따라 시작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의료정책의 패러다임을 의료접근성 개선에서 의료비 억제로 전환하며 시장경쟁을 도입했다. 의료계는 정부의 규제 완화를 기대하며 시장적 접근을 새로운 활로로 생각했으나 관리의료의 출현은 의사들의 자율성을 더욱 제약했던 것이다. 세 번째 물결은 관리의료의 성장에 따른 것이다. 1990년대 이후 인수·합병 등으로 관리의료조직의 규모와 영향력이 더욱 커짐에 따라 의사들의 결정권이 더욱 축소되었고, 다시 노동조합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노동조합에 비판적 입장이던 미국의사협회도 이 시기 들어 (파업을 하지 않는 조직이기는 하지만) 산하에 노동조합 결성을 선언하게 된다. 20세기 후반 미국 의사노조의 역사는 의료에 대한 사회적 통제수단으로서 전문주의가 약화됨에 따라 의사들이 자신의 자율성과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이라는 새로운 조직형태를 모색했던 과정을 보여준다.
의사노동조합 설립 및 성장의 쟁점 - 전문주의, 전문가 협회와 노동조합
UAPD의 설립·성장 과정에서 논쟁되었던 주요 쟁점은 ‘노동조합은 의사 전문주의와 상반되는 조직인가’하는 점과 ‘의사협회가 있는데 굳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는가’는 것이었다.
먼저 저자의 전문주의에 대한 견해를 살펴보자. 저자는 사회와 의사 집단이 전문주의를 받아들인 맥락을 설명한다. 관료제를 적용할 수 없는 의료서비스 제공 구조(광범위하게 흩어져 있는 단독 개원의들과 행위별 수가제가 중심인 의료공급체계)에서 의사들에 대한 사회적 통제의 수단으로 전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 또한 의사들은 전문주의를 통해 의료의 자율성을 보장받고, 대신 의료서비스의 질 개선을 위해 노력하며 동료 의사들의 의료행위를 감독할 것을 약속했다. 이는 전문직이 그 성원들을 엄격하게 관리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사회가 의료인에게 사회적 통제를 위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의료에 대한 전문가적 지배가 의료비 상승의 주요한 원인으로 지목되는 한편 의사 내부는 구조적 변화(집단진료의 증가와 세부전문화, 의사들의 의료행위에 대한 병원의 통제 강화)를 겪게 된다. 그에 따라 전문주의에 의한 의료의 사회적 통제는 쇠퇴하고, 대안으로 관리의료조직 및 병원 관리직이 의료를 시장적으로 통제하는 기전에 대두되었다. UAPD 설립·성장에 주도적 역할을 했던 마르쿠스는 ‘현시대에서 전문주의는 의사들이 의료현실을 직시하는데 방해물로 작용할 뿐이기 때문에 의사들은 이를 기각하고 노동조합주의를 받아들여야’ 하며, 그래야만 ‘노동자 계급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저자는 ‘의사협회가 있는데 굳이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하는가’는 쟁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60년대 이후 관리의료조직에게 의료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가는 상황에서는 기존의 전문가협회가 아니라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병원, 관리의료조직, 보험자본, 정부 등 커다란 보건의료조직에 맞서 전문가적 자율성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서 전문가협회 조직은 적절한 역할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문가협회는 모든 의사를 대표해야하는데다 전문가단체로서의 사회적 요구도 부여받아 문제 해결의 기동성을 발휘하기 힘들고, 법적으로 진료비·임금 등에 대한 단체교섭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UAPD가 의사들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하며 관리의료조직들과의 협상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저자는 UAPD 사례를 들어 의사노조의 존재 조건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첫 번째 물결 당시 건설된 UAPD는 소멸된 다른 의사노조들과는 달리 지속적으로 생존하고 성장했다. 저자는 그 이유를 노동조합과 전문주의의 이해가 반드시 상충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서 찾는다. UAPD는 노동조합이 전문주의를 향상시킬 수 있다고 설득함으로써 노동조합이 전문주의와 맞지 않는다는 의사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성공했으며, 파업보다는 법률자문·경영자문 등 전문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집중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의사노동조합의 존재조건
미국 의사노조의 역사를 한국 상황과 유비해서 살펴볼 여지가 많다. 먼저 의료체계의 커다란 변화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비슷하다. ‘개원의-행위별수가제’ 중심에서 ‘병원-의료비 통제기전’ 중심으로의 변화, 의료비 상승 압박에 의한 정부의 규제 강화, 정부의 재정 책임을 시장에 전가하기 위한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병원자본·보험자본의 성장에 따라 의사들의 자율성이 약화되는 한국의 상황은 시장적 통제 중심으로의 변화와 전문주의 축소를 먼저 겪은 미국의 상황과 유비된다. 사회적 인식 측면에서는 의료비 상승의 책임이 의사 집단에 있다는 인식을 한다는 점에서, 의사들의 인식 측면에서는 대부분 의사가 정부의 규제를 ‘좌파로부터의 위협’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이해를 자본의 이해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현재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보건의료체계 재편이 1970~1990년대에 걸쳐 미국에서 일어났던 상황과 유사하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의사노조 내지는 이와 비슷한 조직에 대한 요구는 한국에서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수입 감소와 의료행위의 자율성 축소에 대한 의사들의 불만은 이미 상당히 깊어지고 있다. 행위별수가제 하에서 의원 개원이 경제적 성공을 보장하던 시대는 끝나고, 대형병원 중심으로 의료가 재편됨과 동시에 정부·보험자본의 의료비 절감 노력이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만은 특히 젊은 의사들에서 더 심한데, 따라서 의협은 의사노조 결성의 핵심 동력을 전공의와 봉직의로 상정하고 있다.
아직 의사들의 불만이 노동조합 결성에 대한 광범위한 요구로까지 나아가지는 않고 있다는 점과 2006년 결성되었던 전공의 노동조합의 실패 등을 고려할 때 빠른 시일에 현실화될지는 불확실하지만, 의사노조의 존재 조건이 점점 강화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바람직한 의사대중조직의 전략: 의협의 시도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러나 미국의 경험을 그대로 대입하여 의사노조의 향방을 예측하거나 의사노조 결성 및 성장의 전략으로 삼기에는 무리가 있다. 미국과 한국의 의료체계에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공적보험 없이 고용을 기초로 운영되는 민간보험 중심 보험체계인 반면, 한국은 국민건강보험 중심의 보험체계이다. 또한 미국은 영리병원과 비영리병원이 혼재하지만 한국은 영리병원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 그래서 미국은 대부분의 병·의원이 관리의료조직과의 계약을 통해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한국은 모든 병·의원이 국민건강보험과의 관계 속에서 의료서비스를 제공한다. 따라서 진료비 협상 등 주요 교섭 대상은 미국과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 의사노조의 주된 상대는 관리의료조직과 그 모기업인 보험자본인데 반해, 한국 의사들의 협상·투쟁은 정부를 정조준하고 있다.
미국 의사노조의 협상·투쟁의 주요 대상이 의료보험자본을 중심으로 한 관리의료조직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물결 당시 미국의 의사들 역시 정부의 규제 완화를 기대하며 시장적 접근을 환영했지만, 관리의료조직이 등장함에 따라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던 것이다. 공적인 통제보다 민간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관리의료조직의 의료행위 통제가 의사의 자율성을 더 심하게 제약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미국의 역사를 참고할 때 현재 의사노조 흐름을 주도하는 의협·전국의사총연합(이하 전의총)의 입장과 행보는 우려스럽다. 보건의료체계 재편의 핵심적 방향과 그 의미에 대한 판단 없이 정부의 규제를 무력화시키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관된 입장과 전략 없이 요양기관 당연지정제 폐지를 주장하면서도 포괄수가제는 ‘의료민영화’ 정책이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고, 영리병원에 대한 입장 역시 불분명하다. 의협·전의총의 생각과 달리 의사의 자율성 확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공적 보험체계를 이탈하여 민간보험 중심 체계로 이행하는 것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게다가 보건의료개혁에 대한 대안 없이 직종의 경제적 이해에만 집착하는 모습은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할 뿐 아니라 의료체계의 왜곡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사실 한국 의료체계의 모순은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질곡으로 작용하고 있다. '3분 진료'는 환자에게 제공되는 의료서비스의 질 저하, 의사의 높은 노동강도를 동시에 반영하는 현상이며, 정부의 재정절감정책 및 의료민영화 정책은 의료보장성 저하, 의료행위의 자율성 감소라는 효과를 동시에 만들어낸다. 확장하고 있는 민간의료보험은 의료비의 폭등, 건강양극화, 수익성 중심으로 왜곡된 의료서비스 등 전 사회적인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포괄적 대안을 함께 만들어나가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나가는 것은 의사노조 성패의 관건이 됨과 동시에 의사노조의 사회적 의미를 판별하는 바로미터가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