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호 | 2014.04.01
의료민영화를 저지한 스페인의 ‘하얀 물결’
스페인 의사들에게서 배우는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 방향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3월 10일 박근혜 정부의 원격의료와 의료영리화 정책에 대항하여 하루 집단휴진을 단행했다. 지난 해 정부가 발표한 4차 투자활성화 대책과 원격의료 허용을 위한 의료법 개정안에 대해 의협은 의료 서비스가 양극화될 것이며, 원격의료로 의료체계가 붕괴되어 의료접근성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이러한 의협의 입장은 정부의 의료정책이 민중의 건강에 미칠 영향에 대해 우려하고 반대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예전과는 결을 달리 한 것이다. 이전까지 자신의 이해관계에만 주로 집중했던 의사들이 이러한 긍정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많은 국민들은 이들에게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일주일 뒤인 3월 17일, 의협은 보건복지부와 ‘2차 의정협의’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광범위한 의료영리화 정책인 보건의료부문 투자활성화대책을 철회하라는 의협의 요구는 협의 결과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의협은 ‘국민과 함께 하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정부 측과 두 차례의 밀실 합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경제적 이해관계가 달린 몇 가지 합의를 이끌어냈을 뿐 국민의 뜻과 달리 의료민영화 정책을 묵인해주었다.
이런 의협의 태도는 최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일어난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에서 지역 의사들의 역할과 대조적이다. 보건의료인, 청소노동자, 환자, 지역주민 등 수만 명이 넘는 민중들이 참여한 이 의료민영화 저지 투쟁에는 ‘하얀 물결’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 별명에 걸맞게 마드리드 의사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의료민영화 투쟁, ‘하얀 물결’
스페인은 국가가 조세를 통해 의료비를 보장하고 공공병상 비중이 74%에 달하며, 공공의료에 대한 만족도도 높은 나라이다. 하지만 2012년 스페인 마드리드 국민당(PP) 자치정부는 20개 중 6개의 공공병원, 268개 중 27개의 일차 의료센터 및 4개의 전문 진료센터를 민간에 매각하는 의료민영화 계획을 발표했다. 의료서비스에 대한 지역 정부의 책임을 포기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에 대항하는 민중들의 ‘하얀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하얀 물결’은 2012년 11월 2일 처음 나타났다. 30만 명의 환자를 책임지고 있는 de la Princesa 병원을 민간 노인의학 센터로 바꾸려는 계획에 항의하며 직원, 환자, 지역주민이 무기한 농성을 시작했다. 농성은 정기적인 대중 집회와 보건의료 영역 전반의 파업을 일으켰다. 결국 정부는 de la Princesa 병원에 대한 결정을 뒤집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었다. 물결은 이미 퍼지고 있었다.
첫 시위 이후, 매달 3번째 일요일마다 마드리드의 거리에는 수만 명이 넘는 ‘하얀 물결’ 시위가 진행되었다. 그들의 슬로건은 “공공의료를 팔아넘기지 마라! 공공의료를 지키자!”였다. ‘하얀 물결’은 파업, 농성, 집회, 공청회와 세미나, 청원, 모금, 병원매각으로 이득을 볼 민간 기업 앞 시위 및 마드리드 고등법원 앞의 연대 투쟁 등의 다양한 운동으로 15개월간 이어졌다. 의사를 포함한 보건의료 노동자, 환자, 지역주민들이 함께 움직여 강력한 물결을 이루어냈다. 심지어 노인들, 휠체어를 타거나 산소 호흡기를 단 환자들도 함께 거리로 나왔다.
2013년 4월, 공개적인 입찰 없이 선정된 민간 기업의 매각계획에 3,120명의 구조조정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민중의 저항은 더욱 확대되었다. 이 투쟁은 단지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2013년 5월, 약 100여개의 지역 단체와 의료민영화에 반대하는 연대체들은 자치정부의 의료민영화 계획에 대한 주민투표를 조직했다. 약 100만 명이 참여한 이 투표에서 주민의 94%가 의료민영화를 반대했다.
투쟁의 성공에 주요했던 또 하나의 요인은 법적 전략이었다. 2013년 6월, 마드리드 법원은 의료민영화 과정에서 이전 두 보건부 장관이 벌인 부정부패에 대한 소송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저지른 악행은 협박, 공공재정에 대한 범죄, 문서 위조, 뇌물, 절차 왜곡, 사기와 횡령의 혐의 등으로 수도 없이 많았다. 다음 달인 7월, 마드리드 고등법원은 현재 마드리드 국민당 정부의 민영화를 중단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마드리드 보건부의 예산절감 계산은 그저 가설에 불과하고 현실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의료민영화는 헌법상 보장된 의료접근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드리드 국민당 정부는 항소했으나 2014년 1월 27일, 마드리드 고등법원이 정부의 항소를 거부하고 의료민영화 조치를 전면 중단시키면서 마침내 15개월간의 투쟁은 민중의 승리로 돌아갔다. 결국 마드리드 주지사는 민영화 계획을 철회하였고, 민영화 계획을 설계한 보건부 장관은 사퇴하였다. 마드리드 곳곳의 병원과 건강센터에서는 “그래, 우린 막을 수 있어!”라는 외침이 울렸다. 승리는 보건의료 노동자, 환자, 지역 협회, 좌파 정당, 시민연대가 단결한 결과였다.
‘하얀 물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마드리드 의사들
마드리드 의사들은 이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마드리드 의사들은 의료재정 삭감이 공공의료 서비스 질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며, 이를 반대하기 위해 마드리드 전문의 연합(Madrid Association of Specialist Physicians, AFEM)을 만들었다. 의료민영화 계획이 발표되었을 때, 마드리드 전문의 연합은 5주간 집단휴진을 단행했다. 뿐만 아니라 마드리드 전문의 연합은 “휴진하지 않는 날”을 정해서 진료하고, 이 날 벌어들인 돈으로는 법률 전문가를 고용하여 이전 마드리드 의료민영화 과정의 위법성에 대해 조사하였다. 결국 이전 두 보건부 장관에 대한 소송이 이루어졌고, 이는 이번 의료민영화 소송을 준비하는데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또 마드리드 전문의 연합은 정부가 발표한 민영화 계획을 통해 절감할 수 있는 금액이 과장되어 있음을 분석하였으며, 보건경제학자들과의 연구를 통해 공공의료시스템을 전혀 매각하지 않고도 정부의 민영화 계획보다 더 많은 재정을 절감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기반으로 마드리드 전문의 연합은 민영화 계획 중단 소송을 제기하였고, ‘하얀 물결’이 승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이데올로기에 관심 없었던 전문직들의 메시지를 모아내는 데 성공했고, 사회적 희망을 만들어냈다. 또 개인주의에서 탈피하여 하나된 목소리로 뭉쳤다. 우리는 매각 중단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좀 더 양질이며, 의료비가 낮은 보건의료체계를 이루기 위한 작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Patricia Alonso, 노인의학 전문의
대중과 함께하는 투쟁만이 정부와 자본의 의료민영화 공세를 막아낼 수 있다
의료영리화 반대 투쟁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얻었던 의협은 2차 의정협의 결과 발표 후 국민들의 비판 여론에 직면했다. 더구나 며칠 지나지 않아 정부가 협의결과 중 일부를 번복하면서 의협에서는 파업 재 진행을 논의하겠다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스페인 의사들의 투쟁 사례를 되새기자. 의사들은 정부의 원격의료 및 의료영리화 정책 철회 요구를 끝까지 견지해야 한다. 이는 적정한 진료 조건을 향한 의사의 정당한 요구일 뿐만 아니라, 민중 건강권 보장을 위한 길이기도 하다. 보편적인 국민의 이해와 함께하며 광범위한 대중적 투쟁을 만들어가는 것만이 폭력적인 민영화 정책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