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4 겨울. 18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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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 신화’를 파헤치다 ②

흘레브뉴크,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이진호 | 인천지부 사무처장
지난 가을호에 이어 흘레브뉴크의 책 소개 글을 이어 싣는다. 필자는 최근 푸틴이 부활시키는 ‘스탈린 옹호론’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이 책을 독해해보자고 제안한 바 있다. ‘문서고의 대가’ 흘레브뉴크는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내놓은 이 책을 통해, 스탈린 신화를 파헤칠 다양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지난 글에서는 스탈린이 당내 반대파에 대한 테러를 개시하며 권력을 차지하고, 폭력적인 농업집단화 속에서 ‘계급의 적’에 대한 테러를 강화해나가는 과정을 살펴봤다. 

흘레브뉴크는 테러가 ‘현대화’를 위해 불가피했다고 보는 스탈린 옹호론에 반박하며, 이 엄청난 폭력은 분명히 다른 대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한편, 키로프 암살을 계기로 벌어진 고참 볼셰비키에 대한 숙청은 소련 인민들에게까지 확대되기 시작한다. 이번 글은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대숙청과 2차 세계전쟁부터 말년의 스탈린까지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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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대숙청

 

1) 대숙청의 전개와 동기

1937년 8월부터 탄압은 수만 명 단위의 관료에서 수십만 명 단위의 일반 소련 시민으로까지 확대되었다. ‘대숙청’(Great Terror)이 시작된 것이다. 대숙청은 크게 ‘반소 분자’와 ‘민족’ 작전 두 캠페인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1937년 여름에 시작되어 1938년 11월 완료된 고도의 중앙집중적 ‘작전’이었다. 대숙청으로 약 160만 명이 체포되고 그중 70만 명이 총살당했다. 고문실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수는 알려지지 않았다. 약 1년 반 동안 매일 평균 1500명의 ‘적’이 살해되었다.

‘‘엔카베데 명령 00447호’에 따르면, 반소 분자’는 수용소와 유형지에서 복귀한 뒤에도 ‘반소 전복 활동’을 계속해 온 쿨라크였다. 이로 인해 명령 00447호는 흔히 ‘쿨라크 명령’이라고도 불리지만, 이 명령은 다른 수많은 집단에도 적용되었다. 과거 볼셰비키에 반대했던 당의 구성원, 과거 백군파, 생존한 제국군 장교,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적’까지 표적이 되었다. ‘반소 분자’ 작전과 병행하여 전개된 ‘민족’ 작전은 소련 내 폴란드인, 독일인, 루마니아인, 라트비아인, 에스토니아인, 핀란드인, 그리스인, 아프가니스탄인, 이란인, 중국인, 불가리아인, 마케도니아인을 대상으로 했다. 이상의 ‘표적 목록’은 스탈린 지도부가 현존하는 혹은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긴 모든 사람을 말살하거나 구금하는 것을 작전의 목적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대숙청은 스탈린의 통제 아래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 모스크바에서 각 도와 변경주(주와 비슷하지만 반자치적인 행정 단위를 지니고 있는 영토)의 엔카베데 본부에 인명 살상 할당량을 통보하면, 광역 단위의 엔카베데 수장들은 소지역(시나 구) 엔카베데 지부의 수장들을 불러 회의를 열고 행정 구역(구, 읍, 면, 촌락)별로 할당량을 분배했다. 다양한 ‘반소 분자’ 혐의자가 우선 목표가 되었다. ‘증거’는 주로 고문을 통해 획득했으며, 심문은 더 많은 이름을 짜내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런 작전은 무기한으로, 혹은 잠재적 희생자가 바닥날 때까지 계속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이 명령에는 ‘융통성’, 즉 지방에서 모스크바에 할당 인원수를 늘려 달라고 요청할 권리가 있었다. 이것이 사실상 의무임을 인식한 지방 관료들은 ‘더 많은 임무’를 모스크바에 요청했고, 모스크바의 승인과 독려로 최초 계획은 몇 배로 초과 달성되었다. 

흘레브뉴크는 스탈린이 대숙청의 ‘교시자이자 조직자’라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한다. 그는 여러 해 만에 처음으로 남부로 여름휴가를 떠나지 않고 모스크바에 머무르며 작전을 지휘했다. 우리는 그가 남긴 여러 지시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예조프 동무: 매우 중요. 우드무르트, 마리, 추바시, 모르도바 공화국을 철저히 조사해야 함. 빗자루로 쓸어버릴 것.” “예조프 동무: 잘했소! 계속 캐서 이 폴란드 첩자 쓰레기를 모조리 소탕하시오!” “‘검토’할 필요 없음. 체포해야 함.” “발터(독일인), 발터를 구타할 것.”

스탈린은 왜 이토록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는가? 이 시기 그의 발언은 적과 음모가 사방에 존재한다는 주장으로 가득하다. 1937년 6월 2일 국방 인민위원 평의회에서 스탈린은 “모든 당원과 신실한 비당원과 소련 시민은 자신이 목격한 일체의 허물을 보고할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가 있습니다. 설령 그중 5퍼센트만이 진실이더라도 그럴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단언했다. 1937년 10월 29일 야금 및 석탄 산업에서 최고 실적을 거둔 노동자들과의 특별 연회에서도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여러분에게 참으로 미안하지만, 나는 심지어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인민의 편인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이 발언은 공식 기록에서 삭제되었다. 대외무역 인민위원 아르카디 로젠골츠는 스탈린이 “정신 이상으로 여겨질 정도로 의심이 많다”고 묘사했고, 침착했던 이전과 달리 보고받을 때마다 “발작, 분노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렇다고 흘레브뉴크가 스탈린의 정신 이상에서 대숙청의 원인을 찾는 것은 아니다. 그는 내전을 경험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언제나 국외의 적과 국내 반혁명 세력이 협력하여 일으킬 반란 가능성에 우려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전쟁 대비를 위한 조치에는 국내 숙청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치 독일의 부상과 스페인 내전 발발, 일본의 만주 침략은 소련이 두 개의 전선에 둘러싸일 수 있다는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흘레브뉴크는 특히 스페인 내전에 주목한다. 게릴라전, 사보타주, 온갖 배신행위가 나타난 이 전쟁에서 ‘제5열’이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스탈린은 공화파의 패배가 내부 방해 분자들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을 보며 숙청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전시에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는 붉은 군대 병사 몇 개 군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 전선에서의 승리를 뒤엎는 데는 (…) 스파이 몇 명으로도 충분합니다.”

1937년 5월 4일, 《프라우다》에 ‘외국 정보기관의 약아빠진 유인 기법에 대하여’라는 글이 발표되었다. 국무로 외국에 파견된 소련인들이 외국 정보기관에 넘어간, 허위일 가능성이 높은 사례들이 주요 내용이었다. 스탈린은 이 글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1937년 6월 2일 스탈린은 국방 인민위원회 군사위원회 위원들에게 “그들은 소련을 제2의 스페인으로 만들고자 합니다”라고 말했다. 1937년 6월과 7월 소련 신문들은 독일 스파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체포된 소식과 함께, 스페인 도시가 내부 배신으로 함락되었다는 기사로 도배되었다. 

잠재적 제5열을 숙청해야 한다는 생각은 스탈린과 그 측근들 사이의 신조가 되었다. 권력을 노릴 고참 당원 노멘클라투라, 오랫동안 참고 기다린 과거의 반대파, 쿨라크와 굶주리는 농민들, 그리고 이웃 나라와 연결 고리를 지닌 많은 소수민족까지, 스탈린 지도부의 협소한 관점에서 ‘적’들은 너무 많았다.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은 최대한 많은 잠재적 적과 부역자들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스탈린의 머리에서 나온 무자비한 논리였다. 
 

2) 대숙청은 누구의 잘못인가?

스탈린은 대숙청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 책임은 모두 예조프에게 돌아갔다. 스탈린은 유명한 항공 기술자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조프―그는 썩어 문드러진 악당이었소! 인민위원회의에 연락해서 그자를 찾으면 ‘당중앙위원회에 갔다’고 하고, 당중앙위원회에 연락하면 ‘집무실에 있다’고 하고, 그래서 집에 사람을 보내 보면 술에 취해서 곯아떨어져 있기 일쑤였소. 무고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총살했습니다.” 실제로 1938년 말 1939년 초 대숙청이 잠잠해지자, 그 책임을 전가하는 캠페인이 전개되어, 예조프와 그 부하들은 제거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문헌 증거들을 통해 스탈린이 일상적으로 대숙청을 주도하고 감독했음을 알 수 있다. 

1938년 1월 17일, 스탈린은 예조프에게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사회혁명당 계파가 전부 적발되지 않았습니다 (…) 바쿠와 아제르바이잔의 모든 이란인에 대한 적발 및 체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 지금 그들은 바쿠의 발전소에 자리 잡고 석유 산업에 대한 방해 공작을 펴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욱 민첩하고 지능적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는 스탈린이 대숙청을 조직했으며, 예조프는 명령을 따랐다는 수많은 증거 중의 하나다. 그 ‘작전’은 1938년 11월까지 이어졌다. 

스탈린은 체포된 자들을 총살할지 수용소에 보낼지까지 직접 결정했다. 1937년 1월부터 1938년 8월까지 그는 작전 수행 보고 및 행동 승인 요청이 담긴 1만 5천 건의 ‘스페츠소옵셰니(특별 연락)’을 받았고, 여기에는 심문 기록(녹취록)이 첨부되었다. 예조프는 그에게 하루 평균 25건의 서류를 보냈고, 그를 290차례 방문하여 총 890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러나 스탈린은 결국 대량 말살을 중단하고 예조프와 그 부하들의 ‘탈선’과 ‘탈법’을 비난했다. 예조프를 제거하기 위한 조치가 시작되었다. 1938년 8월 베리야가 예조프 밑의 부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정치국은 엔카베데에 대한 결의안을 수립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었다. 왕년에 예조프가 전임자 야고다를 유죄로 만들었던 것과 똑같이, 이제 베리야의 심복들이 예조프의 부하들을 체포하여 불리한 증언들을 짜냈다. 1938년 11월 17일 정치국은 위선적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은 엔카베데의 작전 성공을 언급하면서도 그 ‘결함과 타락’을 비난했다. 예조프는 기소되어 엔카베데 내부 반혁명 조직 수장으로 지목되어 총살되었다. 대숙청의 마지막 단계는 주로 엔카베데 내에 있는 예조프의 고위 부관들을 겨냥했다. 
 

3) 스탈린 독재 체제의 완성  

대숙청 결과, 그나마 남아 있던 집단 지도 체제의 잔재가 모두 제거되고 스탈린 독재 체제가 완성되었다. 정치국원 5명이 총살되었고, 1명이 축출되었다. 1934년 제17차 전당대회 당시 총 139명의 중앙위원회 위원 중 102명이 총살당했고, 살아남은 대의원 중 3분의 1만이 1939년 제18차 전당대회에 참석할 수 있었다. 빈 자리는 젊은 인물들로 교체되었다. 1939년 3월 2세대 안드레이 즈다노프, 니키타 흐루쇼프가 정식 정치국원, 3세대 라브렌티 베리야가 후보국원이 되었다. 1941년 2월에는 3세대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 게오르기 말렌코프,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가 후보국원에 추가되었다. 이들은 스탈린에게 철저히 의지했고, 그의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

스탈린에 맞춘 새로운 비·반(半)공식적 제도가 형성되었다. 1938년 탄생한 ‘비밀 5인방’(스탈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 미코얀, 카가노비치)은 사실상 정치국과 같은 역할을 했다. 헌법과 무관하게 순전히 스탈린의 의지에 따라 의사결정이 좌우되었다. 밤에도, 낮에도, 스탈린의 집무실에서도, 다차(간이 별장)에서도, 영화관에서도, 만찬 중에도 국가 중대사가 결정될 수 있었다. 권력구조의 다음 단계는 스탈린이 통제하되 일부 권한을 위임한 지휘 기구들이었다. 당중앙위원회는 즈다노프와 말렌코프에게 맡겨졌다. 정부쪽은 1941년 3월 ‘소비에트 연방 소브나르콤(인민위원회) 사무국’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명백히 오랜 동지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보즈네센스키가 몰로토프 바로 밑의 수석 부총리가 되었다. 1941년 5월 4일의 정치국은 다가오는 전쟁에서 ‘통일성’을 보장하기 위해 스탈린을 소브나르콤 의장으로, 몰로토프를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또한 즈다노프를 당중앙위원회 간사국에 스탈린 대리로 임명했다. 

마침내 스탈린 독재 체제가 완성된 셈이었다. 꼭대기에는 독재자가 있었다. 당 총간사에 정부 총리 직함까지 추가되면서 절대 권력은 공식화되었다. 정치국의 지도 그룹은 그의 고문단이었다. 그 바로 아래층에는 즈다노프가 이끄는 당중앙위원회 간사국, 보즈네센스키가 이끄는 소브나르콤 사무국 두 지휘 기구가 있었다. 이들은 독재자의 양 팔 역할을 하며 일상적 국가 운영을 책임졌다. 이렇게 소련의 운명은 오로지 스탈린 한 사람의 손에 떨어졌다. 
 

4) 소결: 스탈린이 자행한 최악의 범죄

대숙청의 기원은 매우 논쟁적이다. 먼저, 스탈린 개인의 심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견해가 있다. 스탈린 전기작가 로버트 터커는 편집증에 시달린 스탈린이 진보를 가로막는 고참 볼셰비키로부터 인민을 구원하는 영웅으로 스스로를 상상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치 게티는 스탈린이 너무 바빠서 숙청에 사사건건 관여할 수 없었을 것이며, 폭력은 당과 국가 기구의 하급 수준에서 일어났다고 보았다. 돈 라우니는 대숙청을 소련 비엘리트층이 자신들의 승진을 막는 상급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비극으로 판단했다. 

이전 글에서 소개한 적 있는 파이지스는, 이러한 관점 중 몇몇 측면을 수용한다. 그는 시민들의 침묵과 방조, 더 나아가 적극적 고발이 대숙청에 기름을 끼얹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대숙청이 우연한 사건이거나 대혼란의 산물이라고 보진 않았다. 그는 흘레브뉴크와 유사하게 불안한 국제 정세와 전쟁이 대숙청에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하면서도, 키로프 암살과 부인 나데즈다의 자살로 더욱 심해진 스탈린의 편집증적 두려움이 영향을 끼친 측면도 있다고 본다. 피츠패트릭도 대중 참여로 대숙청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고 주장한다. 피츠패트릭은 자코뱅의 혁명적 테러, 레닌 때부터 이어진 혁명적 테러의 전통을 강조하며, 1920년대부터 점차 빈번해진 당내 숙청에서 대숙청의 기원을 찾는다. 

이러한 견해들과 비교할 때, 흘레브뉴크는 대숙청의 책임을 명확히 스탈린에게 돌린다. 여기에는 ‘스탈린 신화’ 비판이라는 그의 저술 동기가 한몫했을 것이다. 대숙청과 관련한 스탈린 옹호론에는 여러 판본이 있다. 먼저, 스탈린 스스로 주장한 예조프 책임론이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집단체포는 모두 예조프의 소행이었고, 스탈린이 이를 바로잡았다. 다음으로, 대규모 체포는 정부 하급 관료들의 소행이며, 스탈린은 이를 몰랐다는 주장이 있다. 최근의 스탈린 옹호론은 테러로 인한 희생은 인정하되, 어쨌든 테러는 전쟁 준비를 위해 불가피했던 것으로 본다. 흘레브뉴크는 스탈린이 대숙청을 주도했다는 명백한 증거들을 제시하며 이 주장들에 반박한다. 그의 주장대로 스탈린이 대숙청의 ‘교사자이자 조직자’라면, 첫째와 둘째 스탈린 옹호론은 가볍게 논파된다. 대숙청이 전쟁 준비를 위해 불가피했다는 셋째 옹호론의 경우, 1년 반 남짓한 기간 동안 70만 명이나 처형해야 할 불가피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대숙청은 전쟁 대비에 악영향을 미쳤다. 대숙청으로 능력 있는 지휘관들이 숙청되었고, 무능한 충성주의자들이 승진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붉은 군대의 약화는 히틀러에 대한 스탈린의 오판과 결합하여, 개전 초반 소련에 재앙적 피해를 불러왔다. 

공포의 시대에 인민들의 불만은 민원이라는 형태를 취했다. 1937년 1월에만 1만 3,000건의 민원이 검찰에 제기되었고, 1938년 2~3월에는 12만 건에 달했다. 그중 얼마나 스탈린의 책상까지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조차도 인민들의 절망과 비통으로부터 완전히 엄폐되지 못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이런 대규모 숙청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1938년 이후 탄압은 더 작고 일상화된 방식으로 계속되었다. 
 
 

8. 전쟁에서의 스탈린 

 

1) 휘몰아쳐 오는 전쟁

1930년대 후반 나치에 대한 공통된 우려에도 불구하고, 서구 지도자들은 스탈린보다는 히틀러와의 협상을 선호했다. 그 정점이 1938년 9월 30일 맺어진 뮌헨 협정이다. 민주 진영과 파시즘 진영이 공모하여 나치의 침략 방향을 소련으로 돌리려 한다는 스탈린의 두려움은 더욱 커졌다. 무언가 조치가 필요했다. 그 결과 독소 불가침 조약이 탄생했다. 이는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소련의 협조가 필요했던 히틀러가 먼저 제안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은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다. 또한, 소련과 독일이 동유럽을 분할해 가진다는 비밀 의정서가 작성되었다. 흘레브뉴크는 스탈린이 독소 협상 과정을 직접 통제했다고 강조한다. 이 협상은 소련 영토를 확장하고, 전쟁이 터질 유럽과 소련 사이에 완충 지대를 조성할 기회였다. 그리고 이는 몽골에서 소련과 충돌한 일본에 대해서 외교적 우위를 차지할 수는 기회이기도 했다.

이 협상을 두고 많은 논란이 있다. 무엇보다 반파시즘 정책에서 나치와의 동맹으로의 급선회는 소련 국내와 세계 공산주의 운동에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한편, 스탈린이 유럽에 공산주의를 퍼뜨리기 위해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히틀러와 협상을 벌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흘레브뉴크는 이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판단한다. 그는 스탈린이 엉망이었던 영국·프랑스와의 협상 과정을 겪은 뒤, 서방 국가들이 소련을 희생시키리라 확신했다고 보았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2차 세계전쟁이 시작되었고, 소련은 동유럽 점령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서부와 벨라루스 서부에서는 급격한 ‘소련화’가 이뤄졌다. 1940년 4월과 5월에는 주로 엘리트 계층에 속한 폴란드인 수감자 2만 1857명이 총살당했다. 1939년 9월 말과 10월에는, 발트해 연안 3국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라투아니아가 자국 영토 내에 소련 군사 기지를 구축하는 조약을 맺었다. 이러한 소련의 은밀한 팽창은 핀란드에서 암초에 부딪혔다. 핀란드는 소련의 가혹한 영토 교환 요구를 거부했고, 붉은 군대의 침공에 맹렬하게 저항해 독립을 유지했다. 히틀러는 이 ‘겨울전쟁’에서 소련이 졸전을 치르는 것을 보고 소련 침공 계획을 앞당겼다.

독일의 진군은 신속했다. 독일은 1940년에 몇 개월 만에 서유럽 국가들을 점령했고 몇 주 만에 프랑스를 항복시켰다. 1940년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삼국 동맹을 맺었다. 히틀러와 조약에서 합의한 영토를 점령한 스탈린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마주했다. 독일의 성공은 히틀러와의 관계를 더욱 중요하게 만들었지만, 점차 소련과 독일의 이해관계는 충돌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히틀러는 1940년 11월 소련에 삼국 동맹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이 제안에 신속히 응했으나, 베를린에서의 응답은 없었다. 1940년 12월, 히틀러는 소련 침공 계획을 최종 승인했다.
 

2) 개전의 충격

약 3분 뒤에 I.V. 스탈린이 전화를 받았다. 
나는 그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무력 대응 개시의 승인을 요청했다. 
I.V. 스탈린은 말이 없었다. 들리는 것은 그의 거친 숨소리뿐이었다.
“제 말을 알아들으셨습니까?”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내리실 명령이 있습니까?” 나는 대답을 재촉했다. 
-스탈린에게 독일군의 침공 개시를 보고한 주코프의 회고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기습 공격하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했다. 이미 독일이 침공을 준비하고 있다는 여러 첩보가 있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무시했다. 그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여 전선을 두 개로 만들 만큼 무모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히틀러는 이 점을 역이용하여 선전에 활용했다. 스탈린의 의중을 눈치챈 정보기관은 그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만 보고했다. 기습 전날에도 첩보가 들어왔으나, 스탈린은 이를 일부 독일 장군의 도발로 판단하고 무시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주코프로부터 독일군이 침공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스탈린은 즉각 반격하는 대신, 독일의 입장을 확인하려 했다. 몰로토프가 독일 대사 슐렌부르크를 찾아가자, 그는 선전포고문을 읽어주었다. “붉은 군대 전 병력의 대대적 집결 및 훈련이 독일 동쪽 국경에 제기하는 용인할 수 없는 위협을 고려하여, 독일 정부는 군사적 반격을 취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이에 대한 몰로토프의 답변은 당시 소련 지도자들이 품은 히틀러에 대한 환상을 보여준다. “그렇게 쉽게 파기할 거였으면 독일은 왜 불가침 조약에 서명한 겁니까?” 주코프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은 독일의 선전포고를 듣고 말없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길고 고통스러운 침묵이 이어졌다. 이내 스탈린은 침공 격퇴를 지시했으나, 그 명령에 서명하지는 않았다. 그는 라디오 연설도 거부했다. 그사이 6월 22일 하루 만에 소련은 1800기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고, 독일군은 수십 킬로미터를 진격해 들어왔다. 

스탈린은 완전히 망연자실했다. 그는 총사령본부 지휘 책임도 거부했다. 그는 반격을 시도하는 한편, 불가리아 대사를 통해 독일과 협상하려 했다. (그 정확한 결과는 알려져 있지 않다.) 또한, 수도 모스크바를 비우는 대대적인 철수 작전을 명령했다. 심지어는 붉은 광장의 레닌 묘에서 석관을 들어내어 시베리아로 옮기기로 했다. 6월 29일, 서부 전선이 큰 피해를 입고 벨라루스 수도 민스크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코얀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저녁 스탈린은 정치국원들과 직접 국방 인민위원부에 가서 장군들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자 참모총장 주코프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옆방으로 뛰쳐나갔고, 몰로토프가 그를 위로하러 뒤따라갔다. 그 모습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든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레닌이 우리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겼는데. 우리가, 그의 후계자들이 이 모든 걸 날려 버렸어.” 

다음날 스탈린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독재자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소련은 그가 없으면 작동할 수 없었다. 정치국 최고참 몰로토프가 앞장섰다. 그는 베리야, 말렌코프, 보로실로프와 함께 스탈린을 어떻게 끌어내어 직무를 수행하게 할지 고심했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스탈린의 다차에는 초대받은 사람만 방문할 수 있었다. 스탈린에게 그의 우울증이 나라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숙의 끝에 그들은 국방위원회 창설을 제안하러 가자는 구실을 고안해 냈다. 이 위원회에는 계획을 착안한 네 사람이 참여하며, 스탈린이 의장, 몰로토프가 부의장을 맡기로 했다. 이들은 미코얀과 보즈네센스키까지 불러 스탈린의 다차에 함께 갔다. 미코얀의 기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다차 작은 식당의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다. 그는 의문이 담긴 눈길로 쳐다보고 왜 왔느냐고 물었다. 베리야가 국방위원회 설립에 대해 설명하자, 스탈린은 딱 한 가지 반론을 제기했다. 미코얀과 보즈네센스키도 참여시키자는 것이었다. 베리야는 누군가는 인민위원회를 이끌어야 한다며 반론했고, 스탈린은 수긍했다. 

흘레브뉴크에 따르면, 이 에피소드에서 스탈린의 동료들은 그의 최고 권위를 최소 다섯 가지 점에서 침해했다. △ 그들은 초대받지 않고 다차에 찾아갔고 △ 그의 뒤에서 중요한 계획을 입안했으며 △ 그들이 합의한 조건대로 그 계획을 관철했고 △ 몰로토프를 2인자로 공식화했으며 △ 바로 얼마 전 스탈린이 스스로 자신의 수석 대리로 보즈네센스키를 선택했음에도 그를 배제했다. 스탈린 독재 역사상 매우 예외적인 정치적 타협이 나타난 것이다.

7월 3일 스탈린은 이례적인 라디오 연설로 그의 복귀를 알렸다. “동지여! 시민이여! 형제자매여! 우리 육해군의 전사들이여! 바로 그대들에게 나는 말합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그는 이 전쟁에 “소련 국가가 사느냐 죽느냐, 소련 인민이 사느냐 죽느냐”가 달렸다고 호소했다. ‘전 인민의’ 그리고 ‘조국의’ 전쟁이 선언되었다. 다른 한편, 초기 패전을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다. 서부 전선군 사령관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의 지휘 실책이 지목되었고, 그와 그의 부하들은 재판에 회부되어 총살됐다. 
 

3) 서투른 사령관 

개전 직후부터 1942년 1월 1일까지 소련군은 총 450만 명이 전사하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 중 230만 명은 전투 중 실종·생포되었다. 불충분한 전쟁 준비, 독일군의 군사적 우위와 기습 성공, 붉은 군대의 전반적 사기 저하가 막대한 피해의 원인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지도부의 무능이었다. 모스크바는 계속 나쁜 결정을 내렸다. 참모본부 지휘계통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군사 과학이 아니라 상식에 의존한 스탈린은 구체적 전략과 전술까지 개입했다. 무계획적인 반격은 엄청난 손실을 낳았다. 

계속된 패배에 스탈린은 자신이 늘상 쓰던 방법을 도입했다. 1941년 7월 군사 정치위원 제도가 부활했다. 1941년 8월 16일 ‘명령 270호’는 포로로 잡힌 자를 “모든 수단을 써서, 지상에서든 공중에서든” 사살할 것을 의무화했다. 그는 철수도 용인하지 않았다. 이는 전황을 악화시켰다. 가장 최악의 사례가 1941년 9월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의 패배였다. 스탈린은 철수를 제안한 주코프를 참모총장직에서 해임하면서까지 사수를 주장했으나, 결과는 키예프 함락과 엄청난 병력의 말살이었다. 이 패배의 영향으로 레닌그라드 봉쇄가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모스크바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거리까지 진격해왔다. 이 무렵 스탈린의 집무실에 불려간 공군 지휘관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가 남긴 회고가 있다. 

나는 스탈린의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숨 막힐 듯한 침묵이 흘렀다. 
“크나큰 불운, 크나큰 슬픔이 우리에게 덮쳤습니다.” 마침내 스탈린의 차분하지만 뚜렷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독일군이 바즈마 외곽의 우리 방어선을 뚫었습니다….” (…) “우리가 뭘 해야 합니까? 뭘 해야 합니까…?!”

엄청난 희생 끝에 모스크바에서 독일군을 격퇴하긴 했으나, 스탈린의 판단력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1942년 하계작전은 전략적 방어와 예비 병력 증강이 목적이었으나, 스탈린은 다수 전선에서 공세를 명령했다. 결과는 또다시 엄청난 패배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실패를 부하들에게 돌렸다. 그 절정이 1942년 7월 28일에 내려진 ‘명령 227호’였다. 이 명령은 매우 가혹했다. “공황을 조성하는 자나 겁쟁이들은 그 자리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상부의 명령 없이 전투 위치에서 후퇴하는” 지휘관은 “조국의 배신자다.” 형벌을 받는 죄수로 구성된 대대·중대가 설치되어 주로 총알받이로 활용되었다. 정규군으로 편성된 후퇴 저지 부대가 “공황 조성자”나 “겁쟁이”를 즉결 처분하는 임무를 맡았다. 명령 227호는 전혀 효과가 없었다. 독일군은 계속 진군해왔다. 1942년 1월부터 10월까지만 붉은 군대 550만 명이 추가로 전사하거나 다치거나 포로로 잡혔다. 


4) 승리와 보복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기점으로 1942년 말부터 전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그 처절했던 승리는 소련 전 인민의 영웅적 노력과 막대한 희생 덕택에 가능했다. 1943년 1월 18일에는 레닌그라드 봉쇄가 끝났다. 1943년 7월 5일부터 8월 23일까지 쿠르스크에서 이어진 대규모 전차전은 독일군의 승리 가능성에 종지부를 찍었다. 가을부터 독일군은 대규모 공세를 가할 능력을 상실했다. 1943년 11월 6일 붉은 군대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해방했다.

소련의 승리에는 여러 요인이 있다. 무엇보다, 마침내 스탈린이 바뀌기 시작했다. 1942년 10월 9일, 정치국은 ‘예디노나찰리예’(1인 책임제)를 수립하고 붉은 군대 내 군사 위원 제도를 폐지했다. 1943년 1월에는 1917년에 폐지되었던 차르 시대의 장교 견장이 부활했다. 몇몇 상급 지휘관들에게 원수 칭호가 수여되었다. 모두 지휘관의 권한과 위상을 높이는 조치들이었다. 

1943년 가을 무렵부터 참모본부도 작동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일과가 시작되는 오전 10~11시쯤 참모본부의 첫 번째 보고, 오후 4~5시에는 두 번째 보고를 받았다. 자정 무렵에는 참모본부 간부들에게 그날의 전황을 보고받았다. 전선 지휘관들은 모스크바로 불려가 면담을 했고, 회의에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런 변화는 소련군의 전쟁 운용 능력을 향상시켰다. 

서구 연합국은 나치에 대항하는 소련 인민의 싸움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미국이 무기대여법을 입안한 덕에,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서구 탱크와 비행기가 큰 활약을 했다. 붉은 군대가 전쟁 내내 몰았던 트럭은 미국산이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루스벨트에게 “무기대여법이 없었다면 승리가 대단히 지체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력을 분산할 서유럽의 ‘제2전선’은 금방 열리지 않았다. 이를 두고 스탈린은 자주 불만을 터뜨렸다. 그는 1943년 6월 처칠과 루스벨트가 프랑스 북부 전선 개시를 연기한다고 하자 이렇게 편지를 썼다. “이는 단지 소련 정부를 실망시키는 문제가 아니라, 연합국에 대한 소련 정부의 신뢰를 유지하는 문제임을 알리는 바입니다. 이 신뢰는 지금 심각한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결국 1943년 11월 테헤란 회담에 가서야 1944년 5월 프랑스 북부에서 제2전선 개시가 확정되었다. 

승리의 가장 결정적 요인은 전 인민의 희생과 노력이었다. 전쟁 기간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로 러시아 애국주의가 되살아났다. 러시아의 위대한 장군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미하일 쿠투조프의 초상화가 스탈린의 지시로 레닌의 사진과 나란히 집무실 벽에 걸렸다. 훈장에 역사 속 영웅들의 기념 상징이 추가되었고, 소련 훈장과 제국군 훈장을 함께 착용할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은 종교와도 화해했다. 1943년 9월 스탈린과 러시아 정교회 지도자들의 회동에서 18년간 금지된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선출, 신학 교육 과정 개설, 교회 신설, 체포된 사제 석방 이 승인되었다. 그는 종교를 통해 국가 통합이 가능하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러나 승리 뒤에는 잔혹한 보복이 이어졌다.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 중앙군을 궤멸시키고 소련 영토가 해방되자, 나치 부역자 처리 문제가 새롭게 부상했다. 짧으면 몇 주, 길면 3년 동안 강제로 혹은 자진해서 부역한 수천만 명이 있었다. 스탈린의 해결책은 ‘소련 재통합’을 위한 대규모 탄압이었다. 수많은 민족 집단의 대대적인 강제이주가 실시되었다. 1943년 말부터 1944년까지 칼미크인, 북캅카스의 일부 소수민족, 크림 타타르인과 더불어 크림에 거주하는 모든 불가리아인,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터키인, 쿠르드인, 그 외 몇몇 다른 소수민족까지 총 1백만 명 이상이 쓸려나갔다. 

전쟁범죄도 심각했다. 스탈린은 병사들이 소련 영토 내 시민들을 상대로 저지른 약탈, 강간, 심지어 살인 사건에 대해 거듭 보고 받았다. 외국 영토, 특히 독일에서의 범죄는 더욱 심각했다. 스탈린은 붉은 군대의 이런 행위에 관대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소련군 범죄에 항의한 밀로반 질라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베오그라드까지 싸워 가며 진군한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 그런 사람이 과연 정상적으로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지옥을 겪고 나와서 여자에게 조금 몹쓸 짓을 했기로서니 뭐가 그리 대수란 말입니까? (…) 중요한 건 그들이 독일군을 쳐부쉈고 - 잘 쳐부쉈다는 것입니다. 다른 건 전부 다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1945년 1월, 2월에 소련군은 베를린 입성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스탈린은 독일군이 서부 전선에서는 항복하지만 동부 전선에서는 결사 항전하는 것을 보고 의혹을 품었다. 그는 다른 연합군보다 빠르게 베를린을 점령하기 위해 무조건 진격을 명령했다. 베를린 작전에 참여한 병력 중 36만 명 이상이 전사·부상하거나 실종되었다. 5월 1일 새벽, 스탈린은 주코프 원수의 긴급 전화 메시지로 히틀러가 그 전날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5월 2일 베를린 수비대가 항복했다. 5월 8~9일 밤에 독일이 항복 문서에 공식 서명했다. 
 

5) 소결: 전쟁의 피해를 키운 스탈린  

전쟁은 일시적으로 정치적 타협과 스탈린식 통제의 완화를 낳았다. 미코얀은 이렇게 증언했다. “전시에 우리 지도부 내에는 어떤 연대감이 있었다. … 이 어려운 시기에는 총력이 요구됨을 이해한 스탈린은 신뢰의 분위기를 조성했고, 우리 정치국원들 한 명 한 명은 엄청난 업무량을 감당했다.” 그러나 위쪽과 달리 위계질서 아래쪽에서는 전혀 자유로운 분위기가 없었다. 

전쟁 기간 국가 폭력의 강도는 대숙청 시기와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일반적인 전쟁의 고초는 물론, 전선에서는 처형, 후퇴 저지 부대, 형벌 대대로 인해 고통을 겪었고, 민간인들은 체포, 처형, 집단 추방, 동원, 곡물 강제 징발, 농업 붕괴로 인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파시즘에 맞서 연합국의 승리로 귀결된 2차 세계전쟁에서 소련이 감당한 희생은 엄청났다. 이는 국가별 사망자 수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스탈린이 본인의 과오를 깨닫고 지휘관들의 의견을 존중하게 되면서 전황의 반전에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공보다는 과가 컸다. 소련의 승리는 그의 지도가 뛰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소련 인민들의 비상한 용기와 희생 덕택에 가능했다. 파이지스는 농민 출신이 대다수였던 소련 병사들이 고향과 가족을 위해 싸웠다고 지적한다. 공식 선전은 스탈린이나 혁명의 상징을 포기하고 ‘어머니-조국’에 대한 오래된 민족주의적 관념을 활용했다. 1941년에만 4백만 명의 사람들이 국민 의용군에 자원했다. 1백만 명이 넘는 징용 노동자들의 존재 역시 중요했다. 굴라크는 소련 탄약의 15%와 군복, 군 식량의 상당 부분을 생산했다.
 
 

9. 전쟁 이후  

 

1) 전쟁 이전 스탈린 체제로의 복귀

전쟁 승리로 스탈린은 1945년 6월 27일 대원수 직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쇠약해진 소련을 목도해야 했다. 전쟁으로 소련인 2천 7백만 명이 사망했으며 그 대부분이 젊은이였다. 수천 곳의 소도시와 마을이 폐허가 되었고, 상이군인이 수백만에 달했다. 1천만 명에 이르는 제대군인 처리와 평시 경제로의 이행도 어려운 문제였다. 전쟁 직후인 1946~1947년 닥친 기근으로 150만 명이 죽고 수천만 명이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영구적 장애를 갖게 되었다. 서부 우크라이나와 발트해 연안 국가처럼 전쟁 직전에 소련으로 흡수된 영토에서는 처절한 게릴라전이 벌어졌다. 

한편, 전쟁은 소련 시민의 눈과 귀를 열었다. 유럽 땅을 밟은 수백만 소련 시민은 그동안 자신이 정부의 공식 선전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쟁에서 싸운 수천만 농민들은 그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집단농장 체제의 해체를 꿈꾸었다. 사람들의 대화는 자연스레 전쟁 이후 ‘불온한’ 주제로 흘러갔다. 전후의 소련은 바뀔 것인가? 스탈린은 아직 이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는 국민에게 엇갈린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정부는 적지 않은 실책을 범했습니다. (…) 다른 나라의 인민이었다면 정부를 향해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너희는 우리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꺼져라, 우리는 너희 대신에 독일과의 휴전 조약에 서명하고 우리에게 평화를 보장해 줄 다른 정부를 세우겠다. 그러나 러시아 인민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 그리고 러시아 인민이 소련 정부에 보낸 이 신뢰는, 인류의 적 – 파시즘 – 에 대항한 역사적 승리를 이끌어낸 결정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러시아 인민이 보내 준 이 신뢰에 감사드립니다! 
- 1945년 5월 24일 붉은 군대 지휘관들을 위해 베푼 연회에서

그러나 스탈린은 곧 이런 발언의 위험성을 깨닫고 역공을 개시했다. 먼저 전쟁 피해와 패배 원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전쟁 희생자는 ‘700만 명’이라는 엉뚱한 수치로 공식화되었다. 전쟁 초반 붉은 군대의 처참한 퇴각은 의도적으로 독일군을 끌어들인 합리적 전투로 재평가됐다. 스탈린은 서방 동맹국의 이데올로기적 영향력에도 대응해야 했다. 스탈린은 1945년 가을 모스크바 동지들에게 “외국인에 대한 노예근성을 뿌리 뽑는 가차 없는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편지를 보냈다. ‘노예근성을 뿌리 뽑는 투쟁’은 구체적 캠페인으로 발전했다. 

탄압이 다시 시작되었다. 1946~1947년 기근에 대한 조치는 절도죄 처벌 강화였다. 빵 한 덩이를 훔친 부모들이 수용소 장기 징역형에 처해졌다. 1947년부터 1952년까지 200만 명 이상이 이렇게 유죄를 선고받았다. 굴라크는 꾸준히 자라났다. 1953년 250만이 넘는 사람들이 수용소, 유형지,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었고, 이른바 ‘특별 거주지’에 280만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전체 인구의 약 3%가 감금·유배 상태였다. 탄압은 우크라이나 서부나 발트해 연안 3국 같이 소련에 새로 흡수된 지역에 집중되었다. 

권력 상층부의 재정비도 이루어졌다. 서방에서는 고령인 스탈린의 후계자가 누구일 것인지에 대한 추측이 무성했다. 당연히도 스탈린은 이를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다. 그는 서방이 주로 후계자로 지목한 몰로토프를 격하시키고, ‘레닌그라드파’ 즈다노프, 보즈네센스키를 측근 그룹에 합류시켜 ‘7인방’을 만들었다. 군 지도부에 대한 탄압도 있었다. 주코프와 가까운 많은 장군들이 체포되고 주코프 본인도 수사 대상이 되었다. 주코프는 2등 직위로 좌천되었다. 

한편, 전후 인플레이션 해결을 위해 1947년 말 화폐 개혁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개혁 이전  590억 루블이던 시중 유통 통화량은 40억 루블, 구 루블화로 186억 루블이었던 예금 계좌 잔액은 새 루블화로 150억 루블이 되었다. 사라진 돈에 비해 물가 하락률은 근소했다. 빵값은 20퍼센트, 고기값은 12퍼센트 하락했고 일부 물품 가격은 오히려 상승했다. 소비자 구매력은 8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번에도 가장 큰 희생자는 농민이었다. 개혁은 리노크(농민들이 자기 텃밭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시장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의 농산물 가격을 끌어내렸다. 경제 지표는 살아났지만, 인민 대부분은 궁핍했다. 전후에도 스탈린 체제는 바뀌지 않았다. 
 

2) 냉전의 시작

서방 국가와 소련의 동맹은 전쟁 승리가 명확해지면서 이미 이완되고 있었다. 흘레브뉴크는 냉전에 대해, 뚜렷한 출발점이 있다기보다는 여러 우연이 결합한 점진적 과정에 가까웠다고 본다. 미국의 핵무기 독점, 스탈린의 동유럽 소련화 열망 같은 문제들은 서로에게 불신을 낳았다. 스탈린은 외교에서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강경한 주장은 몰로토프에게 맡기고, 자신은 가끔 끼어들어 서방 측의 체면을 살리거나 양보를 베푸는 편을 선호했다. 그러나 외교에는 한계가 있었다. 트루먼은 소련의 영향력 확장에 유럽 재건 계획 마셜 플랜으로 응수했다. 스탈린은 국제 공산주의 조직 코민포름 창설로 이에 대응했다. 세계가 ‘두 진영’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소련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의 유시프 브로즈 티토와의 갈등은 심각했다. 나치와의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권력을 쟁취한 그는 정치적 독립을 주장하며 1948년 봄 소련과 갈등했다. 스탈린은 반란을 꾀했으나 티토는 이를 신속히 물리쳤다. 한편, 1948년 독일에서도 소련과 구 연합국 간 대립이 빚어졌다.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 시도는 서방의 ‘베를린 공수작전’으로 실패로 끝났다. 1949년 4월에 나토가 수립되고, 독일은 분단되었다. 일련의 실패로 스탈린은 유럽 공산 블록에 강제적 조치를 도입했다. 위성국들에 숙청과 조작된 정치 재판이 등장했다.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에서 차례대로 주요 지도자가 숙청되고, 스탈린에게 충성하는 독재자가 권력을 획득했다. 스탈린은 이 모든 사건을 지휘했다.

유럽과 달리 아시아에서는 공산주의가 승리하고 있었다. 1949년 10월 1일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 승리는 냉전에서 소련의 입지를 강화시킴과 동시에 새로운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가장 큰 문제는 얄타 회담 결과 1945년 8월 국민당 장제스 정부와 서명한 우호동맹조약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조약이 보장한 소련의 막대한 이권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정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마오와 스탈린의 회담은 중국공산당의 승리 이후 1949년 12월 16일에 이루어졌다. 마오가 1945년 중소 우호동맹조약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스탈린은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는 소련이 기존 조약을 공식적으로 유지하길 원한다면서도, 중국에 유리하게 변경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조약을 무효화 한다면, 영미가 다른 조항들도 수정하려 들 거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다. 마오는 이해한다는 투로 대응했다. 이후 대화는 좀 더 기분 좋게 흘러갔다. 스탈린은 마오의 원조 요청에 응했고, 마오 저작의 러시아어 출판도 제안했다. 이 만남은 마오와 스탈린의 미묘한 신경전을 보여준다. 소련과 중국의 새로운 조약은 힘겨운 협상 끝에 1950년 2월 14일에야 체결되었다. 소련은 중국에 대한 거의 모든 이권을 잃은 대신,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인 중국을 자신의 블록에 포함하는 데 성공했다. 

한국전쟁은 제3차 세계대전의 위험과 함께 스탈린의 실용적 외교 정책이 드러난 사례였다. 스탈린은 본래 한반도 분단 정책이 최선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1950년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에서 항일무장투쟁에 함께했던 군인이 대거 북한으로 들어오고, 애치슨 선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면서, 기습 공격에 도박을 걸어볼 길이 열렸다. 김일성은 1950년 4월 모스크바로 와서 스탈린을 만나 세부 사항을 논의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이를 유럽까지 포함할 더 광범위한 소련 측 공세의 시작으로 판단하고 신속히 개입했다. 결국 스탈린과 김일성의 도박은 실패했다. 10월 13일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보냈다. “우리는 계속 저항하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봅니다. 중국 동지들이 군사적 참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당신은 중국 또는 소련으로의 완전 철수를 준비해야 합니다.” 스탈린은 북한을 포기할 생각도 있었던 것이다.

스탈린은 중공군이 참전한 후에도 공중 엄호만 제공할 뿐 조심스럽게 막후에 머물러 있으려 했다. 그에게 이 전쟁은 제삼자의 손을 빌려 미국을 약화할 기회였다. 스탈린은 휴전 협정에 서명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었다. 죽기 몇 달 전 그는 저우언라이에게 이를 솔직하고 냉소적으로 설명했다. “이 전쟁은 미국에 큰 두통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반면에 북한은 전쟁에서 발생한 사상자를 빼면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습니다. (…) 물론 한국인들을 이해해야겠지요―사상자가 많이 났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중대한 문제임을 그들에게 잘 설명해야 합니다.” 한국인들의 희생은 스탈린이 죽은 이후에야 끝났다. 
 

3) 독재의 단말마 

스탈린은 말년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대규모 프로젝트에 열정을 쏟았다. 이는 다시금 소련을 위기에 빠뜨렸다. 쏟아져 들어온 수많은 민원에는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1. 흑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서야 합니다. 
2. 흰 빵은 전혀 구할 수 없습니다. 
3. 버터도 식물성 기름도 없습니다. 
4. 상점에 고기가 없습니다. 
5. 소시지가 없습니다. 
6. 알곡이 전혀 없습니다. 
7. 마카로니나 기타 밀가루 제품이 없습니다. 
8. 설탕이 없습니다. 
9. 상점에 감자가 없습니다. 
10. 우유나 기타 유제품이 없습니다. 
11. 동물성 지방(라드 등)이 없습니다….
-1952년 말 한 철도역의 당 사무국 간사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 
 
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1952년 12월, 흐루쇼프가 주재하는 한 위원회에서 가축 수매가 인상이 논의되었다. 이는 스탈린의 심기를 자극했다. 그는 농촌을 쥐어 짜내는 기존의 체제를 바꾸려는 시도에 큰 의구심을 품었다. 미코얀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의 생각은 이러했다. “농민이 뭔가? 남는 닭이나 내놓고는 그만이지.” 흐루쇼프와 그의 동지들은 조용히 기회를 기다렸다.

스탈린은 죽기 직전까지 권력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레닌그라드 사건’은 소련 권력 상층부를 뒤흔든 최후의 숙청이었다. 1949년 2월 정치국 회의에서 쿠즈네초프, 보즈네센스키, 그들과 가까운 관료들은 레닌그라드 당 조직을 사조직화하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죄목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심지어 1920년대 지노비예프의 ‘반조직 행위’에 빗댄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1950년 9월, 보즈네센스키, 쿠즈네초프 등이 사형 선고를 받고 수백 명이 숙청에 휘말렸다. 이들과 친밀했던 몰로토프와 미코얀도 표적이 되었다. 몰로토프의 유대인 아내 젬추지나가 표적이 되었다. 그는 스탈린에게 이혼을 종용당한 끝에 1948년 말 이혼했다. 젬추지나는 당에서 축출되었다. 1949년 3월 몰로토프는 내무 장관직에서, 미코얀은 대외무역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레닌그라드 파 숙청 이후에도 스탈린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52년 10월 정치국을 폐지하고 두 개의 새로운 기구를 창설하자는 파격적 제안을 했다. 첫째는 ‘소비에트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로 25명의 정위원과 11명의 후보위원으로 구성되었다. 미코얀은 그 의미를 정확히 요약했다. “이제 필요하다면 스탈린의 눈 밖에 난 상임위원회 위원들을 제거하더라도 별로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다음 번 당 대회 때까지 25명 중 한 5~6명이 사라지더라도 엄청난 변화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정치국원 9명 중 5~6명이 사라진다면 이는 훨씬 두드러져 보일 것이다.” 둘째는 상임위원회를 지도할 사무국 설치였다. 그 명단에는 몰로토프와 미코얀이 제외되어 있었다. 아무도 스탈린을 계승할 자격이 없다는 의미였다. 

스탈린의 마지막 캠페인은 반유대주의와 연관된 ‘의사들의 음모’ 사건이었다. 1952년 10월과 11월, 크레믈 의료 감독 기관장 표트르 예고로프, 스탈린 주치의 블라디미르 비노그라도프 등 여러 의사들이 체포되었다. 그의 끈질긴 권력투쟁의 여정은 1953년 2월 28일 토요일 저녁 말렌코프, 베리야, 흐루쇼프, 불가닌을 최후의 만찬에 초대했을 때 종료되었다. 다음날 그가 뇌출혈로 마비된 채 쓰러져 있는 것을 경호원이 발견했고, 의심스러운 의사들을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놓고 고뇌가 시작되었다. 의사들은 3월 2일 아침에나 불려왔으나 이미 손쓸 도리가 없었다. 스탈린은 1953년 3월 5일 저녁 9시 50분에 사망했다. 
 

4) 소결: 소련 개혁을 막은 최고의 장애물 

소련 지도자들은 스탈린이 중태에 빠져있던 3월 2일부터 그가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 전제하고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3월 4일에는 신문에 스탈린 와병에 대한 최초 공식 발표가 실렸다. 3월 5일에는 스탈린이 죽기 직전 수립했던 권력 구조가 해체되고, 집단 지도 체제로 복귀했다. 스탈린의 국무총리직과 당중앙위원회 총간사직은 박탈되었다. 당시 회의에 참가했던 작가 콘스탄틴 시모노프는 “바로 그 자리, 상임위원회에서, 사람들을 짓누르고 속박했던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느낌이 있었다”고 남겼다.  

스탈린 사망 직후, 그가 말년에 벌인 정치적 사건 대부분이 재조사되고 피해자들이 풀려났다. 독재 체제의 두 기둥이었던 공안 기관과 굴라크는 크게 개혁되었다. 고문은 금지되었고, 많은 이들이 사면되어 수용소 재소자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 경제 개혁도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농업 개혁은 애초 계획보다 더 대규모로 시행되었다. 스탈린의 대규모 프로젝트들은 신속히 중단되었다. 군사 부문 투자도 줄어들었다. 여유가 생긴 예산은 농업과 사회 복지 부문에 돌려졌다. 스탈린식 산업화 체제 또한 서서히 해체되었다. 이를 통해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최소한의 혁신조차 방해했던 것이다. 
 
 

10. 결론 

 
흘레브뉴크에 따르면, 스탈린의 거듭된 실정은 독단을 가능케 했던 독재 정치, 경직되고 교조적인 그의 세계관, 그의 냉혹한 성격이 결합된 결과였다. 이미 1920년대 반대파들을 물리치고 최고 지위에 오른 스탈린은 대숙청 이후 유일무이한 위치에 오른다. 물론 제2차 대전 시기에 잠시 정치적 타협이 발생하긴 했으나, 종전 후 스탈린 독재체제는 복원된다. 소련에서 스탈린에게 감히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즉, 그가 내린 결정이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더라도 이를 제어할 장치가 부재했다. 또한, 언제나 ‘계급의 적’을 찾는 그의 조야한 세계관은 실제 현실의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를 무시하고 소련을 대립과 파멸로 몰아갔다. 이러한 독재 체제, 협소한 세계관과 결합한, 자신의 결정에 의해 수많은 인명이 사라져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의 현실주의적이고도 냉혹한 성격은 더욱 큰 참상을 낳았다.

푸틴 통치 하의 러시아에서 스탈린의 범죄는 다시 감춰지고 있다. 202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러시아 최대 인권단체 ‘메모리얼’은 2021년 12월 29일 ‘외국의 대리기관으로 활동하며’, ‘소련 시절의 역사를 왜곡·폄하해왔다’며 대법원 판결로 최종해산되었다. 메모리얼은 1988년 결성되어 소련 시절 자행됐던 소수민족 강제이주, 반체제 인사 불법구금, 시민에 대한 반 사법적 체포·구금·처벌의 증거를 찾고 이를 알리는 일을 해왔다. 메모리얼의 공동대표이자 인권 운동가인 올레그 올로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지난 2월 27일 징역형을 선고받고 구금되기도 했다. 최근에는 모스크바의 ‘강제 노동 수용소 역사 박물관’이 ‘화재 안전 규정 위반’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로 전격 폐쇄되었다. 이 박물관은 2001년 설립되어 관련 문서, 희생자들의 사진 및 유품 등을 모아 전시해왔다. 지난 9월엔 구소련 정치범 4천여 명에 대한 복권 조치가 취소되고, ‘조국의 반역자’로 재분류되었다.

최근 러시아의 상황을 보면, 스탈린주의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스탈린주의 비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고 필요한 셈이다. 흘레브뉴크가 제시하는 스탈린과 소련 사회의 실상을 통해, 우리는 아무 제한 없는 권력이 얼마나 큰 폐해를 몰고 올 수 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당파성에 치우쳐 당동벌이(黨同伐異, 하는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는 한패가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배척함)를 일삼는 현대의 정치 세태는 상상 속의 ‘계급의 적’을 찾아내려 애쓴 스탈린과 과연 얼마나 다른가? 암울한 자국 내 분위기 속에서 흘레브뉴크가 다음과 같이 남긴 우려를 우리 또한 유념해야 할 것이다. 우리 또한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위험은 없는가?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흘레브뉴크의 글을 인용하며 마친다. ●

“러시아 사회의 상당수가 스탈린 시대를 돌아보며 현 상황을 타개할 비책을 구하고 있다. 스탈린 제국의 위대함―평등, 부패와의 싸움, ‘적’에게 짓밟힌 그 머나먼 삶의 기쁨과 순수―에 대한 대중적 이미지가 파렴치한 언론인과 정치가들에게 이용되고 있다. 역사적 무지와 환멸과 사회적 불만의 결합이 친 스탈린주의의 거짓과 왜곡이 뿌리내릴 비옥한 토양이 될 위험은 얼마나 큰가? 21세기의 러시아는 과연 20세기의 실수를 반복할 위험에 처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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