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한국헌정사 ② 헌정주의를 결여한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

한국헌정사의 질곡을 낳은 제왕적 대통령제 개혁이 필요하다

김성균 | 정책교육국장

1. 서론

 
사회진보연대는 지난 몇 년에 걸쳐 사회주의 혁명사를 반성적으로 되돌아봤다. 이 과정에서 진보의 이상향을 추구한 혁명사에서 역설적으로 끔찍한 인권유린이 발생한 이유가 법치를 통한 인권의 보장이라는 헌정주의의 기본 문제의식을 놓쳤기 때문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헌정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이 추구한 바가 어떤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이에 지난 가을호에서 영국과 미국에서 헌정주의가 형성된 역사와 그 내용을 검토했다. 이번 호에서는 그 내용을 토대로 한국헌정사에서 주목할 만한 시기인 제헌 시기, 내각제 개헌 시기, 87년 개헌 시기를 살펴보면서 헌정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었는지 검토해보려 한다. 

헌정주의를 전제로 한국헌정사를 검토하려는 목적은 한국 정치의 결함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현 시기 정치비판을 구체화하고 심화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굳이 한국헌정사를 통해 이 작업을 하려는 이유는 제도적 측면에서의 결함에 중점을 두겠다는 의미며, 그 주된 대상은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다.

물론 세상 대부분의 일이 그러하듯 한국 정치의 결함 역시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하여 설명할 수는 없다. 제도의 결함을 짚는다고 하여, 형식적 제도가 완벽하게 갖춰지면 완벽한 국가가 건설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게 아니라는 점은 당연하다. 이는 제도 이외의 요소가 다양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리라. 뒤에 살피겠지만 한국 대통령제 성립에 있어 이승만이라는 개인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다. 또 민주정이라는 정치체제를 경험해 본 바 없는 당시 국민의 현실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적 측면의 분석이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제왕적 대통령제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 효과가 한국 정치의 질곡을 가져온 것만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통령직의 존재는 대통령과 그에 대항해 대통령이 되려는 인물이 각 계파의 보스로 군림하며 그의 의지를 따르는 정치 문화를 형성했다. 당연히 보스의 의지를 따르는 게 권력으로 가는 지름길이므로 다원적 사회의 요구가 제대로 반영될 리 만무하다. 이런 구조에서 정당이 제대로 성장할 수 없었다. 정당이 부실한데 국회가 제대로 기능할 수도 없었다. 인물 중심의 한국 정치, 파벌 정치가 끊임없이 폐해로 지적되지만, 근본적으로 개혁되지 않는 건 제왕적 대통령제가 구조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오늘날에는 이런 구조가 인민주의적 정치가에 취약하다는 문제까지 드러내고 있다. 정치권에서 오래 활동하며 정당성과 권위를 쌓아온 3김이 모두 퇴장하고, 그들에 의해 지배되던 정당과 국회는 주인을 잃어 고삐가 풀려버린 것처럼 더욱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기능하지 못했다. 안 그래도 낮던 정당, 국회에 대한 신뢰는 더욱 떨어지게 되고, 대중은 정치권 바깥의 신인에 기대를 투영하기 시작했다. 애초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헤쳐모이던 정치권은 인기 있는 정치 신인의 정치이념이나 정치적 지향, 정치력이 아니라 집권 가능성만을 보고 인물을 판단했다. 

그러나 다수의 평론가가 말하듯 정치란 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는 관계없이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한다. 대중의 인기를 끌 만한 말을 던지는 건 쉽지만 그것을 실제로 실현하는 건 말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한 정치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되돌아봤을 때, 이 과정을 훈련한 적 없는 인물이 정치적 해결을 단번에 해낸 경우는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제일 잘하는 것, 즉 여론을 동원해 제도적 기관을 압박하는 힘에 의한 정치를 통해 의지를 관철할 따름이었다. 정치양극화, 정치 실종은 이 과정에서 계속해서 강화해 왔다.

정당정치 역시 무너져 왔다. 정당으로서는 선거에서 승리해야만 하기에 대중적 인기를 끄는 인물을 영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인물은 기존 정치권에서 기반을 쌓아온 게 아니므로 자신의 사적인 인간관계를 당에 밀어 넣어 당을 장악한다. 이 과정에서는 이른바 ‘친-’이 붙느냐 마느냐, 즉 유력 대권주자와의 친소관계가 절대적 기준으로 작용한다. 이로 인해 그나마도 훈련된 정치인이 밀려나기 일쑤였다. 게다가 이런 과정은 대체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당장 2024년 4·10 총선에서 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행했던 이른바 ‘비명횡사’ 공천은 거대한 비판에 직면했었다. 그런데도 이런 폐해가 반복됐던 건 대통령이 가지는 막강한 권한 혹은 보스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에 따라 미래에 권력의 혜택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헌정질서가 중단될 수도 있었던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12월 3일 밤, 느닷없이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이다. 계엄선포의 대내외적 파장은 실로 엄청났다. 환율이 요동쳤고, 외신은 한국의 사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다. 헌정 중단이 현실화될까봐 모든 국민이 우려했다. 그런데 계엄선포 초기, 그리고 계엄 해제 이후 상당한 시간 동안 누구도 계엄선포의 이유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 엄청난 사태가 누구도 합리적인 이유를 파악하지 못할 정도로 비합리적으로 벌어졌음에도, 그것이 자신의 세계관에서만은 합리적 판단이라 여긴 1인의 권력자가 자신에게 부여된 막강한 권한을 남용함으로써 발생했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헌정질서 유지에 가하는 위협이 자칫 헌정질서 파괴라는 대혼란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걸 극적으로 보여줬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온존한 87년 체제는 어떤 식으로든 수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최근 사회진보연대는 한국 정치의 난맥상을 지속해서 비판하고 인민주의 정치의 위험을 경고했으며, 헌정질서 붕괴의 위험을 우려해 왔다. 한국헌정사에 대한 검토가 이런 문제의식을 심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다만 이번 글에서 건국 이후 모든 시기를 다루지는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의 원형이 형성된 제헌 시기, 유일한 내각책임제 정부였던 제2공화국, 그리고 현행 헌법 체제의 성립 과정을 보려 한다. 나머지 시기는 필요할 때 적절히 언급하도록 하겠다.
 
 

2. 제왕적 대통령의 원형 형성, 제헌에서 사사오입 개헌까지

 
제왕적 대통령제는 언제, 어떻게 등장했는가. 이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을 빼고 이야기하기 어려울 것이다. 헌법을 제정할 당시 이승만이 의원내각제로 성안된 초안에 극력 반대하여 하룻밤 새 대통령제로 권력 구조가 바뀌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1) 제헌헌법 초안의 기초과정

1948년 5·10 총선거로 제헌국회가 구성됐다. 국회 개원 전인 5월 27일 국회의원 예비 회의에서 제정된 국회 임시 준칙에 따라 국회 개헌 직후인 6월 1일, 헌법기초위원을 선정하기 위한 10인의 전형위원을 선정했다. 이들은 남한 8도와 제주도, 서울시를 대표하는 인물로 구성됐다. 6월 2일, 전형위원은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 3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기초위원은 능력과 정당 간 안배를 고려하여 선정됐다. 이렇게 조직된 헌법기초위원회가 6월 3일부터 22일까지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헌법기초위원회에서 제시한 헌법 원안의 기본 골자는 상징적 대통령, 실권형 내각, 국회에 의한 내각 통제를 특징으로 하는 내각책임제였다. 내각책임제는 제헌 당시 유일하게 규모나 조직 면에서 정당다운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대통령을 맡을 만한 상징적 인물은 부재했던 한국민주당(한민당)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안이었다. 그렇지만 한민당에 대해서는 지주계급의 정당, 친일 경력이 있는 인물의 정당이라는 대중적 인식이 존재했다. 게다가 5·10 총선거는 좌파와 중간파가 참여하지 않은 선거였다. 따라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있어서 이승만은 장차 수립될 정부의 정당성을 상징했다. 그랬기에 한민당은 부족한 정당성을 보완해 주는 인물인 이승만을 제도 내로 포함해야만 했다. 이에 대통령에 국무총리 임명권을 부여하여 국무총리를 통해 내각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할 가능성을 열어뒀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국무총리는 국회의 임명 동의를 받아야 했기에 국회를 대통령이 지배하지 못하는 한 그 권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 밖에도 국회는 입법, 제정(예산 및 조세), 인사(대통령 선출, 국무총리 임명 동의, 대통령 및 각료의 탄핵소추)에 관한 권한을 가졌다. 한민당은 이승만에게 대통령으로서 권한 행사를 열어두면서도 자신들의 협조를 구해야만 하는 구조를 설계했다. 이로써, 헌법 원안의 정부 형태는 국회에 대한 대통령의 지배력에 따라 실질적인 대통령제가 될 수도 있고 의원내각제가 될 수도 있도록 설계됐다.

현실적인 고려가 이와 같았다면, 헌법 원칙적 측면에서는 정치 안정과 독재 방지가 근거로 제시됐다. 헌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하던 유진오는 “대한민국이 대통령제를 채택해 국회와 정부가 대립하여 저물도록 옥신각신하고 앉아 있다면 나라를 망치기 꼭 알맞”다면서 “대통령제 헌법을 채택한 나라 중에 별 탈 없이 잘되어 나가는 나라는 미국뿐입니다. 미국식 대통령제를 쓰고 있는 중남미 제국에서는 국회와 정부의 대립상태를 합헌적으로 해결할 길이 없어서 툭하면 쿠데타 아닙니까?”라고 말했다. 물론 유진오도 대통령제가 반드시 혼란을 초래한다는 의미로 말한 것은 아니다. 대통령과 국회의 대립을 통제할 정도로 정치 문화가 성숙하면 괜찮다고 봤다. 그러나 신생 독립국인 한국에서 이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이를 제도적으로 방지하는 데 유리한 내각제가 낫다고 주장한 것이다. 또 내각제가 독재 방지에도 유효하다고 덧붙였다. 국회에 의해 정부가 교체될 수 있어야 대통령의 독재에서 기인하는 쿠데타나 혁명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2) 이승만의 개입과 대통령중심제 채택

큰 틀에서 이런 논의가 진행되던 와중인 1948년 6월 15일, 이승만은 헌법기초위원회에 출석하여 공식적으로 처음 “대통령책임제가 현 정세에 적합하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6월 21일에는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국회에 ‘전원위원회 개최안’을 제안했으나 이 제안은 부결됐다. 국회에서 승산이 없자 이승만은 21일 오후, “우리가 국권을 찾기 위해 40년 동안 싸워온 것은 백성에게 권리를 주자는 것이며, 정당에 권리를 주어서는 정당끼리 싸우느라 나라 경영은 하기 어렵다. 만일 이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나는 그러한 헌법 아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서 국민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일종의 반정부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정치적 협박이었다. 그날 밤, 서상일, 김준연, 조헌영 등 한민당 중진의원은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헌법 초안을 급하게 수정했다. 제헌헌법 초안은 이승만이 원하는 바에 따라 대통령중심제와 단원제를 골자로 하는 내용으로 수정됐다. 

이렇게 수정된 초안이 6월 23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고 이를 두고 논의가 시작됐다. 역시 가장 첨예한 쟁점은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책임제 중 어떤 권력 구조를 채택하느냐였다. 대통령제 옹호자는 당시의 정세가 급박하므로 헌법에 관한 법리적, 이론적 논의는 중단하고 대통령에게 전권을 주는 헌법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회와 정부를 서로 불신임하지 않게 하여 정치안정을 보장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승만을 비롯한 대통령제 옹호자가 말한 정세론의 핵심은 한반도가 해방 후 엄중한 정세, 위기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위기 상황이란 공산주의의 위협으로 인한 남한 정부의 침탈 가능성이었다. 

그렇지만 의원내각제 옹호자는 이런 의견에 이의를 제기했다. 무소속 김중기 의원은 “우리나라를 구하기 위한 헌법이라면서 토의도 말고 넘기자, 얘기도 말고 통과시키자는 분위기에 비애를 느낀다”고 말했다. 또 무소속 이문원 의원은 “헌법은 만년불멸의 대전”인데도 “(국회 논의가) 너무 정세론적으로 흐르는 데 유감이다”면서 오히려 인민이 원하는 헌법을 반드시 통과시켜 국가의 근본 성격을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소속 김장렬 의원은 “일국가의 헌법 설정에 대한 근본정신이 법리로 보는 원칙성과 그 국가의 정치적 현실로 보는 특수성을 혼돈시 하지 말고 엄격하게 구별”해야 한다면서 대통령제 옹호자는 정치 현실과 헌법제정의 원칙을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끝으로 조선민족청년단 강옥중 의원은 국회의 정부 불신임과 정부의 국회 해산이 국회와 정부가 각각 부패할 때 활용됨으로써 “정치를 언제든지 생생하고 언제든지 쇄신적인 그러한 정국을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서 내각책임제를 옹호했다. 

6월 23일 헌법 초안 상정 뒤 초반에는 이런 양측의 의견이 치열하게 대립하면서 헌법 통과가 우려될 정도의 상황이었다. 그런데 7월 5일부터는 심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8월 15일까지 정부 수립을 내외에 공표해야 한다는 정치적 상황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이승만이 깊숙이 개입했다.

7월 5일, 이승만은 8월 15일 정부수립 공포를 위해 “이다음에 형편 되는 대로 개정하기로 하고 대강만 명시하고서 여유를 두고서 이것을 공포하고 하루바삐 우리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헌법 조항에 대한 수정안이 대거 철회된다. 이것이 이승만의 압력에 의한 것이라 해석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지만, 최소한 ‘수정안 철회가 곧 정부 수립을 앞당긴다’는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은 분명하다. 실제로 이승만이 7월 5일 오후 2시 이후부터 사회를 보기 시작했는데, 그날 오전에는 제17조만 심의했을 뿐이었으나, 오후에는 제18조에서 제42조까지 통과됐다. 이튿날에는 제43조에서 제102조까지 통과됐다. 앞선 3일간 논의에서 제1조~제17조까지 논의한 것과 비교하면 제헌의원에게 상당한 압박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 한민당 이정래 의원은 “수정안 철회에 있어서는 찬성자의 의견도 듣지 않고 철회한다는 그런 폐단이 있어서 공기가 대단히 험악”하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수정안 철회는 계속해서 이뤄졌다. 결국 조속한 정부 수립이라는 명분으로 철저한 헌법 심의는 유보됐다.

이 논쟁에 대해 서희경은 양측이 양극단으로 치우쳐 있었다고 평가한다. 내각책임제 옹호자는 대체로 헌법을 “불멸의 대전” “국가 만년의 기본이념”으로 간주하면서 형이상학화하려 했다. 반면 대통령제 옹호자는 정치적 현실로 지나치게 경도됐다. 헌법 제정은 새로운 정치 질서의 창설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 정치 질서란 단순히 성문화된 헌법을 제정한다고 완성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미 정치 현실로서 존재하는 것을 헌법으로 선언한 것일 따름이라 말할 수 있다. 즉 헌정질서를 수립하는 과정은 해당 국가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 없으며, 그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해당 국가가 어떤 가치를 기본에 두고 가느냐를 숙고하고 논의하는 복합적 과정이다. 내각제 옹호자는 헌법 제정 과정이 정치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부분을 간과했고, 대통령제 옹호자는 헌법 제정이 ‘통합된 지혜’를 도출하는 과정임을 경시했다는 의미다.

1948년 당시 남한은 ‘준 내란’ 상태라고 할 정도로 물리적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2년 후에는 전쟁까지 발발했기에 대통령제 옹호자의 우려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위기 상황이라는 명분은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졌다. 위기 상황이기 때문에 헌법 조문의 의미를 깊이 논의하기보다는 일단 통과시켜서 정부를 구성한 이후에 수정하거나 제정하면 된다는 주장이 빈번하게 제기되었다. (바로 다시 언급하겠지만, 이승만이 가장 직접적으로 이런 주장을 펼쳤다.) 또 위기 상황이기에 대통령에게 지나치게 비대한 권한을 부여하려 하면서도 독재 가능성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낙관했다. 이런 주장에 따라 대통령은 비상조치권, 조약의 체결 및 비준, 전쟁선포 및 강화권, 법률안 거부권, 국군통수권, 계엄선포권을 가졌다. 비상조치권은 제한 규정이라도 존재했지만, 계엄령에 대해서는 어떤 제한 규정도 두지 않았다. 남북한 대치가 점점 더 격렬해지는 상황에서 대통령 1인에 의해 전쟁 개시가 가능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또 대통령을 국가 원수로 규정하면서 대통령이 3부의 위에 있는 듯한 위치가 됐다. 무엇보다 국회의 본질적 권한이라 할 수 있는 예산편성권과 법률안 제출권이 정부에 부여됐다. 실로 어마어마한 권한이 대통령에 부여된 것이다. 이로써 제왕적 대통령과 기생적 국회의 맹아가 형성됐다.
 

3)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 실질화

제헌헌법은 분명 대통령에 제왕적이라 할 만한 권한을 부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권한이 어떻게 활용되느냐는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한국 헌법은 대통령제지만 내각제적 요소를 많이 담고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제헌헌법부터 그러했다. 애초 내각책임제로 성안되던 헌법 초안이 몇몇 구절을 고쳐 대통령중심제로 되었기 때문도 있었겠지만, 한민당으로서는 대통령중심제로 가더라도 권력을 분점할 가능성을 분명히 고려했을 것이다. 

헌법 조항을 고려했을 때, 완전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제헌헌법 제66조는 “대통령의 국무에 관한 행위는 문서로 해야 하며 모든 문서에는 국무총리와 관계 국무위원의 부서(서명)가 있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또 제68조는 “국무원은 대통령과 국무총리 기타의 국무위원으로 조직되는 합의체로서 대통령의 권한에 속한 중요 국책을 의결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제73조는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명을 승하여 행정각부 장관을 통리감독”한다고 규정한다. 만약 총리와 국무위원이 본인의 헌법적 권한을 액면 그대로 활용해 “국무에 관한 행위”와 관련한 문서에 서명하지 않으면 대통령의 국무는 상당히 제약될 것이다. 따라서 대통령이 일방적인 의사결정이 아니라 총리의 권한과 국무원의 합의를 중시하며 협치하는 정치적 관행이 형성된다면 제헌헌법도 충분히 분권적으로 운용될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의 무제한적 권한 행사를 추구하며 국회와의 협치가 아닌 대결을 택했다. 첫 번째 국무총리 임명부터 대통령과 국회는 부딪쳤다. 윤치영의 회고에 따르면 이승만은 “국무총리 자리를 얻는다는 것은 정치세력을 구축하는 싸움의 시초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강한 감정을 유발할 수도 있는 이러한 파벌 싸움에 나는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즉 이 대통령은 국무총리 임명을, 정치세력을 구축하는 싸움의 시작으로 인식했다. 그러면서도 끼어들고 싶지 않다면서 세력, 싸움, 파벌에서 초월한 위치에 있고자 했다. 

이승만이 첫 번째로 지명한 이윤영 총리 인준안은 부결됐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는 담화 정치를 시작했다. 그는 담화에서 “국무총리 책임을 두 정당 중의 유력한 인물로 임명하지 않는 것이 민중이 바라는 바”라면서 국회가 총리 인준안을 부결한 건 당리당략에 따른 정당 이기주의라고 비판했다. 이에 더해서 국회가 원하는 ‘당파적’ 인물이 아닌 본인의 생각대로 초당파적인 인물을 임명하는 게 “민족이 원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민심에 기대어 가하는 이 대통령의 압박에 국회는 심각한 부담을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수립된 정부가 시작부터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는 것 또한 부담이었다. 결국 이윤영 임명안 부결 일주일 뒤, 이승만 대통령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지명했고, 통과됐다.

이후에도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와 대립하며 독단적인 국정 운영을 지속했다. 국무위원 인선은 국무위원이 “이 박사의 비서진”으로 채워졌다는 논평을 들을 만큼 독선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제헌국회는 민주적 정통성을 가지는 유일한 기관이었고, 대통령은 그런 국회에서 선출되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헌법 조항에서 “국무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한다”고는 했지만, 국무위원 인선을 비롯한 제반 국정 운영에서 국회가 지신의 의사를 반영하는 게 헌법 정신에 맞는 국정 운영 방향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런 부분을 완전히 무시했다.

또 대통령의 독선을 견제하기 위해 제정된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의 부서가 필요하다는 헌법 조항도 의도적으로 위반하면서 자신에 대한 견제 장치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했다. 게다가 이를 통해 이 대통령은 국무총리, 국회는 대통령과 같은 급이 아니라 하위의 지위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절차에 대한 존중은 곧 정부의 국회에 대한 존중, 국회의 정부에 대한 위신과 직결되는 문제다. 따라서 이를 위반한다는 건 국회를 더는 존중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민족의 지도자인 대통령과 국무총리·관계 국무위원이 대등하지 않은데, 대통령의 권한을 하위 주체의 서명을 받아 행사할 필요는 없다는 인식이었다.
 

4) 권위주의적 대통령의 완성,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

이렇듯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 견제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고 대통령의 권한을 확장해 갔다. 국회의 불만이 커지는 건 당연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서도 사사건건 대립하는 국회에 대해 불만이 없는 게 아니었다. 결국 이 갈등은 1952년 발췌개헌,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매우 폭력적으로 정리된다. 
 
(1) 1952년 발췌개헌
1950년 5·30 선거로 2대 국회가 개원했다. 그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중 국민방위군 사건, 거창 양민학살 사건 등 정부의 실정으로 국회의원의 반정부적 태도가 더욱 강화했다. 이대로라면 1952년 7월 국회에 의한 간선제라는 방식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재선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1951년 11월 30일, 이승만 정부는 정·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국회의원 다수는 이 개헌안에 반대했다. 우선 대통령 직선제는 독재를 초래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민국당 서범석 의원은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토양에서의 대통령 직접선거는 오히려 독재 세력을 양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의 직접 선출이 국민주권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이를 근본주의적으로 해석하면 국민의 의지를 체현한 지도자의 독재를 정당화하는 역설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한편, 양원제에 대해서도 여러 비판이 제기됐다. 우선 전시 상황에서 재정지출을 늘리는 상원을 지금 설치해야 하느냐는 반론이었다. 또 영국, 미국에서 상원은 각 나라의 역사적인 맥락에서 형성된 것인데, 한국에서는 이미 단원제로 시작한 마당에 굳이 설치할 이유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게다가 정부 개헌안에는 상원의 권한과 하원의 권한이 거의 차이가 없어 실제 의도는 국회의 권한을 약화하려는 게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됐다.

1952년 1월 18일, 정부 제출 개헌안은 예상대로 부결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결과를 수용하겠다고 했으나, 한 달 뒤, “국회의원을 소환하는 조건이 헌법에 없다고 말하나 소환하지 말라는 조건이 없으므로 민주국가의 주인 되는 투표자들이 자기 대표를 소환한다는 것은 이론으로나 법리적으로나 막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는 원외 세력을 동원해 국회를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1951년 7월부터 국회는 민국당을 중심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실정과 독재적 권력 행사를 비판하며 내각책임제를 주장했다. 이는 다수 국회의원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1952년 4월, 국회의원 123명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발의했다. 이에 맞서 5월, 이승만 정부는 대통령 직선제, 양원제를 담은 수정 개헌안을 다시 제출한다. 이로 인해 국회는 큰 갈등에 휩싸인다.

1952년 4월, 원외 자유당과 친여 단체는 내각책임제 개헌반대 세력을 결집하고 개헌반대 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전국 각지에서 국회의원 소환,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민의운동을 벌였다. 백골단, 땃벌떼, 민중자결단 등 단체의 이름으로 내각제 개헌을 주도한 의원들을 매도하는 벽보가 곳곳에 붙었다. 이중 민중자결단은 민중자결선언대회를 열고 부산 대통령 관저로 진출해 관저 앞 도로를 점거했다. 이 대통령은 이들의 대표를 만나 ‘애국충정’을 치하했다.

국회에서는 5월 25일, 다음 대통령 선출 시기인 7월을 앞두고 모의 투표를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25일 0시를 기해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결과는 발표되지 못했다. 이 계엄령 선포가 5·26 부산 정치파동의 시작이었다. 26일에는 47명의 국회의원이 헌병대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 구속됐다. 이들의 혐의는 국제공산당의 정치공작에 연루됐다는 것이었다. 국회는 비상계엄 해제와 의원 석방을 요구했으나, 20여 일 전 결성된 지방의회는 국회 해산을 결의하며 이승만을 지지했고, 지방의원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회의원 소환요구 철야시위를 벌였다. 김성수 부통령은 5월 29일 5·26 정치파동이 “헌법을 전복하고 주권을 찬탈하는 반란적 쿠데타”라고 강하게 비난하며 사임서를 제출했다. 또 대통령 직선제가 결국 이승만의 재선을 보장하고, 장차 국회도 그의 추종 세력으로만 구성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민주주의와 헌정을 위협한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비판받았다.

이승만은 국회가 민의를 무시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면 국회 해산을 중단하겠다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대통령과 국회가 극한 대립을 거듭하는 가운데 7월 1일, 임시국회가 개원하자 국회는 4월, 5월에 각각 발의했으나 공고 기일이 만료된 두 개헌안을 두고 협상을 시도했다. 두 개헌안에서 발췌하여 제3안을 만들고 이 개헌안을 통과시키자는 제안이었다. 이에 따라 발췌개헌안이 성안됐다. 발췌개헌안은 정부안을 기본으로 했기에 직선제와 양원제 실시가 핵심 내용으로 담겨있었고 내각책임제 개헌안 중에서는 국무위원에 대한 국회의 불신임권이 가미된 정도였다. 이 안은 7월 4일, 경찰과 군대, 테러단이 국회를 에워싼 가운데 1시간 반 만에 통과됐다. 다음날 이 대통령은 장외정치에 동원된 세력의 불법적 폭력적 행위를 ‘애국’이라 찬양하며 면죄부를 주었고, 국회의 개헌안 통과가 민의에 따른 것이라 주장했으며, 2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불과 한 달 뒤인 8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2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사진은 1952년 발췌개헌 당시 부산 국회 앞에 모인 민중자결단의 모습이다. 이들은 내각제 개헌을 주도한 의원을 비방하는 벽보를 붙이고, 민중자결선언대회를 열어 국회에 대해 성토하며 국회해산, 국회의원 소환을 주장했다. 더욱이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재선에도 기여했다. 1952년 7월 5일 발췌개헌안 통과 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7월 22일, 민중자결단 대표 323명은 각 지방에서 받은 340만 명의 연판장을 가지고 이 대통령을 방문해 대통령 입후보를 간청했다. 당시 언론은 “항상 민의를 존중하는 이 대통령은 이런 그들의 간청에 따라 대통령 후보자 지명에 승낙할 것으로 보인다”고 썼는데, 얼마 뒤인 8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은 2대 정·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이처럼 이승만 대통령은 대중을 동원해 힘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관철시켰다. (사진출처: 《뉴데일리》)
 
(2)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발췌개헌 전까지만 하더라도 원내 이승만 지지파 내에서도 의원내각제에 찬성하거나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대통령을 견제하는 국회의 수단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는 의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부산 정치파동을 거쳐 발췌개헌이 된 이후에는 일부 원외 자유당 인사가 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이승만 지지세력이 결집해 통합된 자유당이 출범한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 역시 자신에 반대하는 인물들에 대한 포섭과 배제 작업에 열중했고, 1954년 5·20 총선을 즈음해서 여당은 완전히 이승만 대통령에게 장악된다. 

5·20 총선에서 여당 지도부는 당내 공천 절차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공천했다. 공천을 받기 위해서는 “본인이 5·20 총선에 당선되면, 제3대 국회에서 초대 대통령에 대한 3선 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에 찬성한다”는 각서를 당 지도부에 제출해야 했다. 

야당에 대해서는 상당한 선거방해를 자행해 개헌에 방해가 되거나 차기 대권을 위협하는 인물을 제거하려 했다. 조봉암은 등록방해로 출마조차 하지 못했고, 신익희, 조병옥 등 민국당 거물급 인사의 선거운동원이 집단 구타를 당하거나 구속되는 등 탄압을 받았다. 신익희가 출마한 경기도 광주에서 선거운동을 취재한 한 기자는 “선거전이 시작됐는데도 사복경찰의 모습만 눈에 띄었을 뿐 야당 선거운동원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죽음의 거리를 방불케 하고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기술했다. 

총선 결과, 자유당은 114석을 획득했다. 무소속이 67석이었고 민국당은 15석을 획득했을 뿐이었다. 헌정사상 최초로 여당이 지배하는 국회가 성립했으나, 개헌 정족수인 정원 203석의 2/3(136명)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그러자 개헌 정족수 확보를 위한 자유당의 포섭과 위협이 시작됐다. 예를 들어 금전적으로 어렵던 무소속 국회의원에게 자유당은 융자를 제공했다. 세비를 담보로 재무부가 주선한 것이었다. 약점을 잡아 협박하기도 했다. 그런 공작 끝에 자유당은 개헌선인 136명을 확보한다.

1954년 9월 6일, 136인이 개헌안을 제안했다. 핵심 내용은 국민투표제 채택, 국무총리제 폐지, 대통령 궐위 시 부통령에게 권력 승계, 현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 폐지였다.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하는 장치(국무총리제, 임기 제한)는 철폐하고 국민투표제, 궐위 시 부통령에게 권력 승계와 같은 대통령 권한 강화에 유리한 사항을 추가하여 독재적 권력을 완성하려는 시도였다.

개헌안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개헌을 옹호했던 이들은 또다시 비상 상황이라는 명분을 들었다. 개헌안 제안자 윤재욱을 비롯한 개헌안 옹호자는 “내외다난하여 중대한 존망의 기로에서 대통령의 최적임자로서 건국 공적이 찬연한 초대 대통령”인 현 대통령의 “계속 재임을 국민이 원한다고 하면 이것을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터키의 케말 파샤와 같은 건국의 아버지는 아예 종신제로 한 사례도 있으며, 미국 루스벨트가 4선을 한 것도 유사 사례라 주장했다. 개헌반대론자는 비상 상황이라는 규정에 문제 제기하며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11월 27일, 제90차 회의에서 개헌안 표결이 이뤄졌다. 표결 결과 재적의원 203명 중 135명이 찬성하여 헌법 개정에 필요한 2/3(136표)에서 1표가 부족했다. 최순주 부의장은 부결을 선포했다. 그런데 합헌적 개헌 시도가 좌절되자 11월 29일 자유당은 야당이 총퇴장한 상태에서 ‘헌법개정안 정족수에 관한 건’을 표결 처리했다. 최순주 부의장은 지난 11월 27일 부결을 발표했으나 “이것은 정족수의 계산상 착오로서 이것을 취소”한다고 발언했다. 곽상훈 부의장은 이미 부결을 선포한 것을 취소하는 건 “불법”이라 주장하며 발언을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최 부의장은 발언을 취소하지 않았고 야당 의원은 퇴장했다. 이후 ‘헌법개정안 의결정족수와 제90차 회의록 수정’에 관한 동의안이 통과됐다.
 
이에 대해 김병로 당시 대법원장, 유진오 고려대 총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뉴욕타임스》도 “이 대통령의 종신제”라는 기사에서 이 사안을 신랄하게 규탄했다. 그러나 정작 국민적 저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발췌개헌 당시도 마찬가지였다. 발췌개헌 때는 오히려 관제 시위에 동원되어 국회를 압박하는 양상이 두드러졌다. 이 때문에 자금, 공권력 동원 등 권력 자원이 빈곤한 야당으로서는 대항수단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갖춰져 있던 민주주의의 제도는 아직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5) 이승만 대통령의 헌정 이해

사사오입 개헌에 이르러 이승만 대통령이 추구하던 권위주의적 직선제 대통령이 완성됐다. 몇 년 뒤 4·19 혁명으로 권위주의적 대통령제는 막을 내리지만, 한국헌정사에는 대통령중심제라는 경로의존성이 이미 형성되어 버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민주화가 이뤄진 현재까지도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대통령제가 채택되고 대통령의 권한을 확장하는 데 있어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아래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를 그의 사상과 관련해 간략히 추적해 보려 한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다 고종을 폐위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1899년 체포됐다. 이후 1904년 8월까지 한성감옥에 수감된다. 옥살이 도중인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근대국가 개혁을 고민하며 『독립정신』을 집필한다.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진력한 독립운동과 이후 15년간 그가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추구한 모든 사업은 그 원초의 발상이 모두 『독립정신』에 뿌리를 두었다”고 평가한다. 이 책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나, 그중 본 글의 주제와 직접 연관되는 정치제도와 백성의 권리를 다룬 부분에만 집중하고자 한다. 
 
(1) 이승만의 정치제도 구분 
이승만은 정치제도를 전제정체, 헌법정체, 민주정체 세 가지로 구분한다. 간단하게 말해, 전제정체는 전제군주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헌법정체는 입헌군주제에 가깝지만, 이승만에 따르면 군주가 주권을 가진다. 민주정체는 공화제, 특히 미국의 대통령제 정부형태를 의미한다. 

우선 전제정치는 조선을 쇠하게 하여 독립을 위태롭게 한 원인으로 지목된다. 전제정치에서 국력이 쇠하는 건 백성이 나라에 불만을 가져 국력의 쇠퇴를 방관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외세가 쳐들어와도 그 위기를 극복하기가 어렵다. 

헌법정체는 임금과 백성이 함께 다스리는 군민공치를 의미하며, 영국, 독일, 일본 등에서 시행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전제국가와 헌법국가에서 군주의 역할은 거의 동일하지만 차이점은 헌법정체에서는 의회라는 장치를 통해 통치권자로부터 국민의 권리를 보호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헌법정체에서 여전히 주권은 군주에게 있고 따라서 여전히 실질적 권한을 갖지만, 의회가 이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렇지만 이승만도 예시로 들고 있고, 입헌군주정의 대표 국가이기도 한 영국을 군주주권 국가라 볼 수는 없다. 명예혁명 이후 국왕의 권한을 의회가 실질적으로 통제하게 되었으며, 의회가 주권적 입법권을 가진다는 ‘의회의 지배’ 원칙이 정치적으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은 미국 독립 당시 영국 정치에 초점을 맞춰 민주정체와의 차이를 강조하려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끝으로 이승만은 민주정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민주정치라 하는 것은 백성이 주장한다는 뜻이라. 임금을 임금이라 칭호하지 않고 대통령이라 하며, 전국 백성이 받들어 천거하여 다 즐거이 추승(推昇, 천거하여 높은 지위에 올림)한 후에야 비로소 그 위에 나가며 그리하고도 오히려 염려가 있어 혹 4, 5년이나 8, 9년씩 연한을 정하여 (기)한이 찬 후에는 한 기한을 다시 연임도 하고 혹 다른 이로 선거하기도 하여 일국을 다스리게 하며 모든 관원의 권한을 구별하여 한두 사람이 임의로 못하게 하니 이런 정부의 주의가 세 가지니 1은 백성이 하는 것이오, 2는 백성으로 된 것이오, 3은 백성을 위하여 세운 것이라”. 즉 군주의 역할을 하는 대통령의 존재와 이 대통령을 백성이 선거로 선출하는 것, 그리고 대통령 임기의 제한이 민주정체의 요소다. 

이와 같이 세 가지 정체를 구분한 뒤 이승만은 민주정체가 “제일 선미한 제도”라고 극찬한다. 그렇지만 이것을 곧바로 추구하는 건 위험하다고 말한다. 급하게 민주정체를 추진하다가는 오히려 혼란만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정치의 제도가 매양 그 나라 백성의 정도에 달린 줄 먼저 알아야”하는데 “백성이 어두운 나라에서 혹 망령되게 행하려 하다가는 일국이 크게 어지러운 법이니 지금 남아메리카 중에 있는 여러 민주국이 해마다 난리 없”는 곳이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민주정체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학문과 교육으로 백성을 교화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정치제도를 설명한 바로 다음 장에서는 백성의 교화를 염두에 둔 듯 미국 국민이 누리고 있는 권리를 나열한다.
 
(2) 대통령에 대한 일관된 의지
그런데 이승만에게는 정치개혁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민족의 자주독립이 목표였다. 민주정체가 가장 선미한 제도인 이유는 위, 아래 모든 인민이 개화해 새로운 민주 정부를 수립하면 모두가 나라를 위해 힘쓰며, 외세의 간섭을 불러들이지 않을 정도로 국력 신장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민족의 자주독립이 상위의 목표라면, 민주정체가 성립된 이후라고 해도 독립이라는 문제를 가져와 민주주의의 한계를 설정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강력한 리더십을 추구한다. 독립에 위협이 된다면 그 세력은 배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리더십에 관한 생각은 1919년 4월 12일부터 14일까지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자유대회에서의 결의문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이 결의문을 기초한 사람은 이승만이 아니었으나, 초안을 이승만이 검토하고 찬동하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이 결의문 2항은 “우리는 백성의 교육 수준을 감안하되 가급적으로 미국의 정체를 본뜬 정부를 갖기를 제안한다. 앞으로 10년간 정부에 권력을 집중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백성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그들의 자치 경험이 축적되면 그들을 정부의 제반 업무에 참여시켜야 한다”고 명시한다. 

그리고 얼마 후, 서울에서 한성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한다. 한성정부는 헌법 수준이라 보기는 어렵지만 국체는 민주제, 정체는 대의제로 규정하는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한다. 이승만은 이를 보며 이제는 민주정체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집정관 총재를 수락한 뒤 이승만은 ‘대한민주국 대통령 겸 집정관 총재’라는 명의를 사용한다. 비슷한 시기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그를 총리로 추대하고 직을 수락한다. 그런데 이승만은 양쪽 임시정부 통합을 주장하는 동시에 대외적으로 자신의 직함을 ‘대통령’이라 칭하며 활동했다. (직함 사용 문제는 어찌어찌 조정되었으나, 이를 포함해 이승만은 상해 임시정부와 지속해서 갈등했고, 결국 1925년 임시정부 대통령에서 면직된다.) 이후 독립 때까지 외교노선을 통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 후 이승만은 강력한 반공노선을 취한다. 그가 보기에 각국의 공산당은 주체성이 없는 소련의 도구에 불과하며, 소련의 목적은 모든 나라의 공산화였다. 자주독립을 최우선으로 두는 이승만으로서는 소련의 도구가 되기 위해 정권을 장악하거나 혁명을 하는 공산당과는 협력할 수 없었다. 공산당은 결국 민주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혁명을 할 것이므로 공산주의는 다양성을 존중하는 공론의 장에 공존할 수 없다. 즉 자주독립을 위해 민주주의의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그런 공산당의 위협 속에서 겨우 독립 정부를 수립했는데, 여타 정치인들이 헌법 제정 논의를 빙자한 권력 다툼을 한다고 여긴 이승만은 정세론을 매개로 자신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관철한다.  이승만은 국회 논의를 축소하여 대통령중심제를 실현해 제헌헌법을 완성했다. 이후에도 개헌 국면마다 비상 상황임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정당화했다.

(3) 헌정주의의 결여
지난 호에서 헌정주의란 정부 권한에 법적 제한을 가하고 정치적 메커니즘을 통해 정부를 통제하는 걸 의미한다고 했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정부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막음으로써 권리를 보장하고자 함이었다. 제1공화국 헌정사는 이런 헌정주의의 문제의식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에 걸려있는 법적 견제 장치를 임기 내내 해체해 갔다. 심지어 본인의 임기 제한마저 철폐했다. 이를 위해 공권력을 동원했고, 관제 데모를 조직했으며, 여론에 호소하며 대의제의 원칙을 침식했다. 이 대목에서 『독립정신』에서 미국의 정치제도를 소개하며 “임금을 임금이라 부르지 않고 대통령”이라 부른다는 설명이 매우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이것이 단순히 조선 인민의 이해를 돕고자 하는 설명으로만 읽히지 않아서다. 이승만은 대통령을 그저 선출되는 왕으로 본 것이 아닌가. 정작 자신의 임기 제한을 철폐하고자 했다는 건 그런 의심을 더욱 짙게 만든다. 나아가 본인이 절대적 영도자라 생각했기에 ‘민족의 자주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독재를 정당화한 건 아닌가. 독재자는 누구나 나름대로 지고한 목표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절차와 제도의 준수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건 자명하다.  초대 대통령부터 민주적 절차를 간단히 무시하니 이후에도 비슷한 과오가 반복된 게 아닌가. (뒤에서 살피겠지만 심지어는 민주화를 이룩하는 87년 헌법 개정 과정에서도 절차적 민주주의는 무시됐다.)

또 이승만의 정치사상에서는 의회의 권한에 관한 구상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와 함께한 서재필의 경우 의회가 최고 권위를 가지는 정치제도를 선택해야 한다는 방침이 있었지만, 이승만이 주도한 문건에서 이런 입장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본인이 주도한 제헌헌법의 편제에서도 국회가 대통령에 앞서 나오듯, 입법권은 인민주권을 실현하는 본질적 권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미국의 건국자들도 공유한 생각이었다. 다만 의회의 강력한 권한도 견제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이를 적절히 견제하면서 집행의 효율성을 제고하고자 대통령직을 만들었다. 이승만이 이를 몰랐던 게 아니라면 의도적으로 의회의 권한에 관한 중요성을 무시한 게 아닌가.

끝으로 그가 찬미한 미국의 법 전통을 볼 때, 영미법계는 권리라는 게 단순히 선언하여 나열한다고 보장되는 건 아니라고 여겼다. 영국과 미국의 헌정사를 보면, 인민의 권리를 선언하는 게 아니라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실질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다. 구속적부심제도가 좋은 예시다. 권리를 나열함으로써 보장한다고 여긴 건 오히려 이승만도 비판한 프랑스혁명에서 나타났다. 관습, 전통을 일소하고 법으로 새로운 권리를 세워보겠다는 시도였고, 이는 ‘법의 지배’라기보다는 ‘법에 의한 지배’였다. 이런 관념이 전제되니 국민주권을 외치면서 본인의 모든 행위가 국민 권리 신장이며 따라서 국민의 의지라고 주장하기가 더욱 쉬워진 게 아닌가. 이는 프랑스혁명이 그러했듯 독재로 가는 길이었다.
 
(4) 파시즘적 일민주의 채택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은 파시즘적 이데올로기인 일민주의를 채택했다. 이는 헌정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범석이 이끌던 조선민족청년단은 이승만을 철저히 옹호하던 청년조직체로 해방 공간에서 강력한 조직 중 하나였다. 특히 이들은 군대와 다름없이 정복, 정모를 착용했고, 1개월간 교육과 훈련을 실시했다. 이들은 “국가지상(至上), 민족지상”이라는 표어를 내걸었는데, 이를 본 신익희는 “아주 시대착오적인 생각이야. 중국 장개석이 한때 이 문구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통치하다가 파시즘으로 낙인찍힐 것 같으니까 재빨리 팽개쳐 버렸는데 그것을 갖다가 내걸다니”라고 일갈했다. 

한편, 이론 부문에서는 조선민족청년단 부단장을 역임하고 초대 내각 문교부 장관이었던 안호상이 주된 역할을 맡았다. 그는 미국식 민주주의나 소련의 공산주의 모두를 반대하고 국가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 경향의 교육운동을 고집했다. 1947년 4월부터 안호상이 발간한 『조선교육』의 권두언은 다음과 같다. 

계급을 초월하고 소아(小我)를 청산하여 민족 대아(大我)에 삼천만의 총의가 몰려오는 날, 우리에겐 참다운 해방의 기쁨이 올 것이다. 오늘에 처한 지상명령은 ‘민족에로’밖에 없다.
- 1947년 9월호 권두언
 
시기상조인 민주주의와 파괴적인 공산주의 바람에 미친놈(美親派)과 소경놈(蘇敬派) 급성환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중략) 제1차 대전 직후 독일을 갱생 부흥케 한 것은 오직 독일 사람 자신이었다. 그 방도는 강력한 독재 정권을 수립하여 국내의 분파적인 모든 세력을 통일하고,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서 정치, 외교, 경제를 혁신하여 국권 회복을 도모할 도리밖에 없었다. 히틀러는 1933년 1월 30일 독일 정권을 잡고 나치스정책을 감행하였다.
- 1947년 11월호 권두언
 
안호상은 민주주의를 민족주의로 제한해야 한다고 봤고, 이를 일민주의로 체계화했다. 그는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제국주의일 뿐이므로 혈통과 운명을 공유하는 민족이 하나로 뭉쳐 사회개혁을 이루고 진정으로 독립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기조 아래 남녀·상하 간 인격, 도덕적 차별 철폐, 지방·파당 차별 철폐, 빈부·귀천 차별 철폐를 외쳤다. 또 단일 민족은 단일한 사상을 가져야 한다고 믿었고, 이런 동질적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봤다. 나아가 통일된 마음을 갖기 위해서는 정신적 구심점이 있어야 했는데, 단군사상과 단일 민족 사상을 철저히 수행하는 최고 통치자, 국가가 그것이었다. 이런 일민주의에 의해 이승만은 ‘국부’이자 ‘세계적인 반공지도자’, ‘민족의 태양’, ‘건국의 워싱턴’과 같은 존재가 됐다. 

곧바로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일민주의와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이라는 목표 아래 민주주의를 제한하는 기본노선이 매우 유사하다. 게다가 앞서 필자는 이승만이 스스로를, 민족을 이끄는 영도자로 인식한 게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했는데, 안호상은 이런 이승만의 인식을 아주 정확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게다가 그에 대한 법적 견제 장치를 없앨 때마다 등장했던 관제 데모는 이승만 대통령이 외양은 자유 민주주의를 채택했지만, 실제로는 파시즘적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파시즘적 통치를 수행했다는 강력한 근거다. 이와 같이 민족, 국가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절대적 영도자를 중심으로 뭉쳐야 산다는 노선이 헌정주의가 아님은 자명하다.
 
 

3. 헌정사상 유일했던 내각제 정부의 실패

 
1960년 3·15 부정선거로 4·19가 촉발됐다. 그리고 일주일 뒤인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가 단행된다. 곧바로 민주당 주도하에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성안되고, 5월 11일,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공고된다. 6월 10일에는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고, 논의를 거쳐 6월 15일, 개헌안이 통과됐다. 통과 당일 정부로 이송되어 그날로 개정 헌법이 공포됐다. 이로써 한국사에서 유일한, 그렇지만 매우 단명한 내각책임제 정부가 성립했다.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던 제2공화국은 매우 짧은 기간만 존속했지만, 헌정사의 차원에서 보면 내각제 정부가 수립되던 당시 형성된 쟁점은 결코 가벼이 보기 어렵다. 지금도 쟁점이 된다고 할 수 있는 민주주의와 헌정주의의 충돌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 쟁점을 둘러싸고 1960년에는 6월, 11월 두 번의 개헌이 이뤄졌다.
 

1) 1960년 6월 개헌, 내각책임제 정부의 수립

4·19가 발생하고 두 달여 만에 개헌안이 통과됐지만, 이 과정이 매끄럽지만은 않았다. 우선 민주당 내에서 입장차가 존재했다. 민주당 구파는 즉각 내각제 개헌을 주장했다. 그러나 신파는 이승만 정부 부통령이었던 장면이라는, 대통령 후보가 될 만한 인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신파는 내각제 개헌을 하되, 시일이 촉박하니 이번 1회에 한해 대통령제를 하자는 타협책을 제시했다.

이 지점에서 민주당 신파는 더욱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데, 자유당이 지배하는 국회는 개헌의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신파가 이 주장을 굽혀 내각제 개헌안이 빠르게 공고되기는 했지만, 쟁점은 여전히 남은 상황이었다.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은 여론의 압력이 매우 강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자유당으로서는 생존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자유당에 대한 보복 행위나 3·15부정선거 책임을 말단책임자까지 추궁하는 게 시정되지 않으면 총사퇴를 불사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민주당 구파로서는 개헌을 위해 필요한 2/3를 확보하는 데 있어 자유당의 협력이 필수적이었기에 사태 수습에 나섰다. 구파는 우회적으로 국회를 통해 4·19가 야기한 정치적 변화 요구를 수렴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체제를 만들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자유당은 일단 이를 수용해 내각제 개헌까지는 의원 총사퇴를 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신파는 자유당에 비판적 여론을 이용해 구파의 수습책을 어렵게 했다. 1960년 5월 14일 《경향신문》은 자유당의 총사퇴 주장을 정략적 목적에서 연유한 협박이라고 비판하며 내각책임제 개헌이 실패하면 현행 헌법에 따라 “우선 정·부통령부터 선출하여 정부를 수립하고 … 새로운 국회에서 내각책임제 개헌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신파의 방안이었다. 신파의 전략은 구파와 자유당의 제휴를 끊어 정국 주도권을 가지려는 것이었다. 자유당은 6월 1일, 105명이 탈당하며 사실상 붕괴했다. 다만 신파로서도 표면상으로만 개헌을 지지한다는 의심을 받아왔기에 의원총회에서 개헌을 꼭 한다는 결의를 하게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드디어 6월 10일, 본회의에 내각제 개헌안이 상정됐다. 내각제에 대한 반대의견은 한 명만 제기했다. 자유당 이욱동 의원은 개헌만능주의, 혁명 일색주의를 비판하면서 제도보다 그 제도의 운용이 본질이기에 내각제 자체가 만능열쇠일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사실 내각제적 운용을 가미해 대통령의 권한을 견제하면서 균형을 맞추려 했던 제헌헌법을 이승만 대통령이 어떻게 운영했는지를 돌이켜보면 제도의 운용을 강조한 이런 주장은 상당히 타당한 면이 있었다. 다만 당시 내각제에 대한 반대는 ‘민주 역적’으로 여겨졌으며, 더욱이 자유당 의원이라는 데서 이 의견이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더 큰 쟁점은 내각제를 찬성하는 주장 내에서 형성됐다. 크게 법률적 입장과 혁명적 입장으로 나눠볼 수 있다. 우선 민주당 신파 내 소장파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신파의 주요한, 이철승 의원은 개헌이 “혁명 주체의 의지를 받드는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요한 의원은 1952년, 1954년 헌법의 위헌성을 주장하며 앞선 두 헌법은 무효고 지금의 개헌은 1948년 제헌헌법의 개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주장을 수용한다면 특히 1954년 헌법하에서 실행되어 온 모든 정치 행위, 그리고 국회와 의원직 모두 무효가 된다. 그리고 이 체제에 참여한 정치인은 모두 위헌적 행위를 저지른 셈이 된다. 주 의원도 이를 의식해 모든 걸 무로 돌리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모순적 주장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철승 의원은 이런 입장을 오히려 더욱더 밀어붙여 4·19시기 국회는 혁명의 대상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혁명 주체만이 새로운 국가를 수립할 자격을 가졌고, 1954년 헌법을 근거로 하는 현 국회는 존립 근거가 없지만, 내각제 개헌으로 국민 앞에 속죄할 기회를 얻었기에 존재하는 것이라 주장했다. 또 이번 개헌의 근거는 ‘법률의 힘’이 아니라 ‘정치의 힘’에 있다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법률이 정치의 하위개념이라고 역설했다. 법률은 논리적으로 어떤 정치도 부정할 수 없으며, 극단적으로 정치가 헌법을 위반해도 그것을 위헌 행위로 판단하고 정지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만 여기서 이 의원은 그 정치란 ‘국민이 요구하는 정치’로 한정한다. (관련해서는 뒤에서 다시 다루겠다.)

이에 대해 정헌주 개헌안기초위원회 위원장은 일단 법률적으로 위 주장이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두 헌법을 무효로 선언할 권한을 가진 기관은 존재하지 않으며, 국회조차 그런 권한을 부여받은 바 없기 때문이었다. 또 4·19가 헌법 파괴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봤다. 근거로 이승만 대통령 하야 후 수립된 과도정부는 1954년 헌법에 근거한 것인데, 이에 대해 거부하는 의사가 표명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 개헌안은 완전히 새로 기초된 게 아니라 1954년 헌법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제시됐다. 끝으로 4·19가 정치적으로 이뤄진 것이 맞기는 하지만 그 수습은 법률로 이뤄지는 것이라고 답변했다. “법치국가에서 법률을 가지고 그 처리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정 위원장은 4·19가 헌정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는 행위였다기보다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와 부정선거로 발생한 헌정의 위기 상황을 시정하기 위해 인민이 저항권을 행사했다고 본 셈이다.
 

2) 1960년 11월 개헌

1960년 6월 15일 개헌안이 통과됐고, 당일에 공포됐다. 개헌 후 치러진 7·29 총선은 민주당의 압도적 승리였다. 그런데 참의원(상원)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한 자유당 출신 의원 20여 명이 당선됐다. 비록 자유당 출신이지만 선거를 통해 국민의 심판을 받아 의회에 입성했음에도 민주당은 이들이 상임위원장을 맡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 근거는 형식상 신임투표에 의해 당선됐어도 “실질적인 신임을 받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실질적 신임’은 대체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관한 쟁점이 불거졌지만, 결과적으로 상임위원장 비율은 이들의 의석수에 상관없이 민주당 위주로 분배됐다.

장면 내각 출범 후, 반민주행위자 처벌을 두고 6월 개헌 당시 법의 논리와 혁명의 논리가 대립하던 구도가 재현됐다. 계기는 반민주행위자에 대한 10·8 선고 공판이었다. 재판에 회부된 9명의 피고인 중에서 발포 명령 건에 대해 유충렬(4·19 당시 서울 시경국장)과 백남규(4·19 당시 시경 경비과장)에게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하고, 홍진기 전 내무부장관, 조인구 전 치안국장, 곽영주 전 경무대 비서관 등 나머지 사람에 대해서는 예상외로 가벼운 형량이 선고됐다. 

재판부로서는 혁명의 논리를 수용하되 법리에서 벗어나지 않은 판결을 내리려 한 것이었다. 일단 재판부는 3·15 부정선거사범에 대한 면소론은 부당하다고 지적했다. 당시 변호인 측은 형사소송법상 범죄가 발생한 후 법령이 개정되거나 폐지되어 그 형이 폐지되면 면소의 판결을 한다고 규정한 걸 근거로 들면서 피고인을 처벌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즉 내각제 개헌으로 정·부통령 선거법이 사라졌으므로 이에 따라 3·15 부정선거 행위를 처벌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면소에 대한 이러한 엄격한 해석은 소급처벌을 위한 개헌과 혁명입법을 피하려면 법적 절차에 문제가 있어도 불가피하게 면소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이 부분이 “혁명정신을 살려 최선을 다한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부정선거에 대한 공소시효 기산점에 관해서는 실정법의 논리를 따랐다. 당시 「대통령·부통령선거법」의 공소시효는 3개월이었다. (단 범인이 도피했을 때는 6개월.) 검찰은 공소시효 기산점을 3·15 선거일 다음날이라고 주장했지만, 변호인은 선거법 위반행위가 발생했을 때부터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판부는 변호인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일부 피고인에게 공소기각 또는 면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이 판결은 심각한 정치대립으로 발전했다. 10월 11일, 4·19 부상 학생과 희생자 유족을 포함한 혁명 주체 세력이 의회를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의회에서 연좌데모를 벌이고 의장석을 점령한 후 본회의를 중단시켰다. 언론도 10월 8일 선고를 비판하며 압박을 가했다. 결국 이들의 압박에 의회는 특별입법을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압력에 굴복한 의회는 점거 다음 날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임시처리법안」을 논의해 통과시켰다. 이 법은 특별입법까지 공판절차를 정지하고, 재판에 회부된 피고는 형사소송법상 구속 갱신 횟수 제한을 받지 않으며, 10월 8일 재판 결과 석방된 자를 즉시 재구속하도록 했다. 
 
1960년 10월 8일 선고 공판에 불복하는 4·19 부상 학생들이 의회 의사당을 점거한 사진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결국 소급입법을 금지한 헌법 조항을 무효화하는 개헌안을 통과시킨다. 이 개헌안 부칙에는 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할 수 있으며, 그들을 행정상, 형사상으로 처리하기 위한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소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도 아울러 담겼다. 개헌안이 통과됐으나 그것으로 논란은 종결되지 않았고, 의회도, 정부도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이는 제2공화국이 단명하는 한 원인이 됐다. (사진 출처: 국회기록보존소)

장면 내각은 출범 초기에는 앞서 정헌주 개헌안기초위원회 위원장과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장면 총리는 “소급법에 의하지 않고 현행법에 의해서 최중벌로 처벌해도 무방”하다고 인식했다. 집권 세력으로서 체제 내에서 안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가려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앞서 살펴봤듯 장면 총리를 따르는 신파는 급진적인 입장이었다. 이 때문에 장면 총리는 혁명적 입장에 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10월 9일에는 특별법 제정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는 것은 부득이”하다고 말하기도 했고, 자신의 회고록에서는 10월 8일 재판에 대해 “일반 국민 정서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해야 했다. 적어도 혁명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말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또 내각이 특별법 제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느냐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장면 내각은 혁명적 입장에 서긴 했지만, 이와 같은 오락가락한 입장은 정부의 신뢰를 떨어뜨려 혼란을 가중하는 요소가 됐다.

1960년 11월 10일, 의회는 각계 의견을 대표할 18명의 연사를 초청해 공청회를 개최했다. 대체로 혁명단체 대표는 “형벌 불소급의 원칙이니 뭐니 하면서 특별법 제정을 반대하는 것은 4월 혁명을 부정하는 처사”라고 규탄했다. 그런데 4·18 데모를 주도한 고려대 강우택 학생대표는 “특별법을 제정해서 지역 말단에 있는 사람까지 처벌하는 것은 민족분열과 사회 혼란을 조장할 뿐”이라 지적하며 “공민권 제한 자동 케이스는 삭제하는 게 좋을 것”이며 “현저한 반민행위자인지 여부는 재판을 받지 않고는 알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발언이 강경한 주장을 약화하지는 못했다. 

결국 입법 체계의 모순을 인지하면서도 민의원 법제사법위원회는 개헌안을 기초했고, 11월 19일, 소급법에 따라 범법자의 처벌을 금지하는 헌법 제23조 규정을 무효로 하는 헌법개정안이 상정됐다. 그리고 부칙에는 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하는 특별법 제정과 이 사건의 처리를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 검찰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11월 23일, 민의원에서 이 개헌안은 가결됐고, 즉시 참의원으로 이송되어 대체토론에 들어갔다. 참의원에서도 헌법을 단호히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강했다. 그렇지만 11월 26일 1차 투표에서는 정족수 미달로 유회됐다. 이는 정원 58명인 참의원에서 자유당 관련자가 31명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11월 28일 2차 투표에서는 결국 가결됐다.

그런데 개헌으로 모든 사안이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개헌 이후 특별법안을 실제로 입법하는 과정에서 법안을 둘러싼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소급입법이 허용됐다고 하더라도 세부 사안에서 계속해서 강한 대립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공민권 제한을 소급해 적용하더라도 자유당 관련 지위에 있던 것만으로 처벌하게 되면 지나치게 많은 인물이 적용받게 되어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다. 또 이를 심사할 특별재판소 설치는 기본권으로서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는 문제가 제기됐다. 이외에도 수다한 쟁점이 제기됐고, 해결은 쉽지 않았다. 장면 총리는 이 과정이 국민의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혼란한 상황이라고 인식했다. 그러나 그 혼란은 보기에 따라 꽤 심각한 것이었다. 4·19에서 5·15까지 1년간 약 2천 회의 시위가 있었고, 폭력적 양상을 보여 대부분 신문은 시위가 악화일로라고 보도했다. 사회질서는 거의 파괴된 상태로 방치됐다. 

게다가 정치권도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민주당 신파와 구파는 윤보선 대통령이 암묵적 합의를 깨고 장면을 총리로 지명하지 않으면서 실질적으로 분당됐다. 장면 내각이 출범한 이후에 구파는 신파에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고, 신파는 그런 구파가 권력욕에 따라 집요하게 방해만 한다고 비난할 뿐이었다.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정부 구성은 요원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아무리 혼란이 잠정적일 것이라는 장면 총리의 전망을 인정하더라도 그 시간이 대체 얼마나 걸릴 것이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이미 너무 길다고 생각하며, 이 혼란이 국가적 위기를 낳을 수 있다고 보는 세력은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정부는 끝내 안정을 이뤄내지 못하며 9개월간 4차례의 조각을 단행했다. 그리고 4차 조각 12일 후, 5·16 쿠데타가 발생했다.


3) 개헌 시기를 관통한 민주주의와 헌정주의 논쟁

1960년에 개헌을 두고 벌어진 논쟁은 민주주의와 헌정주의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내포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이념상 국민주권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국민의 (직접) 지배가 아닌 법의 지배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원리가 항상 조화롭게 작용하는 것만은 아니다. 이철승 의원과 같이 ‘국민이 요구하는 정치’는 법을 뛰어넘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이 요구하는 정치’는 사실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주장할 수 있는 바다. 이승만 대통령도 언제나 국민의 이름으로 자신의 정치 행위를 정당화했다. 오히려 국민주권주의가 자의적 권력 행사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활용된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봤을 때, 국왕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방지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형성된 원리가 법의 지배였다. 이를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면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인민의 자의적 권한 행사, 즉 다수의 의지라는 명분으로 행해지는 폭정을 견제하는 데 법의 지배가 필요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 헌정사를 잠시 떠올려보자. 미국의 건국자 역시 헌법을 논의하면서 인민주권을 전제했다. 그런데 건국자들은 인민주권의 원칙을 정치 권력이 어디에 있느냐를 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규범적 원칙으로 해석했다. 즉 시민에 대한 국가의 강압을 막아야 한다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 건국자들은 헌법을 논의하면서 ‘민주적 전제주의’ 방지, 즉 다수에 의한 소수자의 권리 침해 방지를 매우 세심하게 논의했다. 왜 그러했는가. 이는 소수자가 다수자가 될 가능성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다양한 이유로 다수와 소수는 나뉠 수 있지만, 소수가 다수가 될 가능성 자체가 차단된다면, 그건 다수에 의한 전제일 따름이었다. 혹여 소수가 더 나은 대안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다수가 될 가능성이 구조적으로 막혀있다면, 그래서 다수와 소수 간에 폭력적 수단 외에 조정 수단이 없다면 이는 사회 전체적으로 매우 큰 손해다. 심지어 사회의 존속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이런 원칙에 비춰봤을 때, 혁명 세력의 의회 점거, 엄벌주의, 그리고 엄벌주의를 현실화하기 위해 헌법의 불소급 원칙을 깨뜨린 것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이것이 사회적 갈등을 적절한 선에서 해결하는 방안이었는가에 관해서는 선뜻 그렇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혁명 세력은 사실상 상대방을 절멸하겠다는 입장을 혁명의 완수라는 명분을 들며 정당화하고, 체제 내에서는 그 방법이 마땅치 않자 기본 원칙인 헌법을 고쳐 관철하고자 했다. 법의 지배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에 가까운 행위였다. 또 불소급 원칙의 파괴 자체도 굉장히 극단적인 발상이다. 이는 차후 사회의 다수가 바뀌었을 때, 이전에 다수이던 이들을 엄벌주의에 따라 처벌할 수 있는 길을 연 것이었다. 더해서 소급입법이 가능해지면 모든 사회구성원이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현재는 범죄가 아니더라도 미래에 법이 바뀌면 불법 행위가 될 수 있고, 처벌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복수가 반복되는 사회, 행위의 기준이 무너진 사회. 어떤 것도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사회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평가가 4·19의 의의 자체를 부정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해두려 한다. 모든 역사적 사건에 공과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또한 하나의 사건에서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주변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다르게 평가해 봄 직한 지점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혁명 세력이 그 대의를 짊어지고 헌정과 법치의 실행, 공고화를 목표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가정적 생각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전쟁의 참화가 휩쓴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체제를 넘어서는 다른 대안을 대중에 설득해내는 게 매우 곤란하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더 세심한 논의가 필요한 게 아니었을까.
 
 

4. 1987년 개헌

 
내각책임제였던 제2공화국이 5·16 쿠데타로 무너진 후, 내각책임제는 대안으로서 지위를 ‘거의’ 상실했다. 살펴보겠지만, 제2공화국의 실패 이후 국민은 대체로 대통령중심제를 선호했고, 더는 내각제가 대안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다만 정치권에서는 여전히 내각제 개헌이 정치적 카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시기를 좀 건너뛰어 현행 87년 체제를 검토해 보자.
 

1) 헌법 개정 논의의 시작

1985년 2월 12일 총선에서 군사정권에 강경한 노선을 표방하던 신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한다. 이후 나머지 야당도 흡수하면서 총의석수 276석 중 103석을 차지하는 거대 야당으로 도약한다. 총선 결과를 기반으로 총선 5개월 후부터 야당은 개헌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호헌을 표명했다. 그러나 야당은 계속해서 정부를 압박했고, 결국 전두환 대통령은 재임 기간에 개헌할 용의가 있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1986년 6월 24일, 국회는 국회헌법개정특별위원회(헌특위) 구성을 결의했다.

그렇게 헌특위가 출범했지만, 여야 이견으로 순조롭게 가동되지는 못했다. 문제가 된 것은 공청회 실황 중계였다. 정부 여당은 생중계 자체를 거부했다. 개헌 열기가 직선제 열망으로 확산하는 걸 막고자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부분이 합의되지 않으면서 헌특위 활동은 개헌한다는 원칙에 합의한 것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지지부진했다.
 

2) 민주정의당의 내각제 개헌안

그렇지만 각 당은 개헌안을 마련하는 작업을 계속해서 추진했다. 우선 여당인 민정당은 민정당 차원의 헌법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논의를 시작했다. 당 헌법특위는 이전에 존재했던 정부형태를 분석하면서 “실정에 적합한 정부형태를 선택하자는 방침이지만, 대통령 직선제가 곧 민주화라는 야권의 도식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6월 4일, 헌법특위 관계자는 ‘수정된 내각책임제’로 갈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7월 7일에는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비롯한 정부 요직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정국운영방안 및 개헌방향에 관한 회의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야당이 내각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기존의 헌법으로 계속 갈 것”임을 주장했다. 이후 8월 18일, 민정당은 내각제 개헌 요강을 발표했다.

민정당 내각제 개헌안의 큰 특징은 수상이 막강한 권력을 보유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국내외 상황에 능률적으로 대처하려면 강력한 통치권을 결코 배제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제2공화국 실패에 대한 반성이라는 의미도 부여했다. 이에 따라 수상은 행정부 수반으로 내각의 의결에 따라 행정권을 집행하고 모든 정치적 책임을 지도록 했다. 또한 수상은 내각 각료 임면권, 군 통수권, 법률안 제출권, 계엄선포권과 더불어 실질적인 비상조치권도 가졌다. 대법원장 임명도 수상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해 사법부에 대한 인사 개입도 비교적 쉽게 했다. 

민정당의 개헌안에 대해 신민당은 “수상 독재체제”라고 비판했다. 이철승 의원은 “허울을 쓴 대통령중심제이며, 민주화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제도로서 수상의 영구 독재 위험성을 안고 있는 제도임이 명백하다”고 비판했다. 권한이 수상에게 집중돼 대통령이라는 이름을 수상으로 바꾼 것에 지나지 않기에, 현행 선거인단 선출 간선 대통령제가 국회 선출 수상으로 변형된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수상의 강력한 권한에 대한 견제 장치가 전무했던 건 아니지만, 소극적 견제 기능에 머물렀다. 외교·군사·비상조치·국민투표·국회해산·사면·감형·복권 등 주요 사안에는 반드시 내각회의의 의결을 거치도록 했으나, 각료의 임면권자가 수상이므로 적극적인 견제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또 국회 안정을 이유로 수상은 국회 구성 후 2년간은 국회를 해산할 수 없었지만, 반대로 국회도 수상 선출 후 2년간은 내각 불신임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정국안정이라는 명분을 고려한다고 해도 책임정치의 원리를 구현한다는 내각책임제의 핵심 취지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이런 내용은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안 보고에 적혀있는 “국가의 권력을 분산시킴으로써 국민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한다는 취지가 그들의 개헌안에서 구현되는지 의문스럽게 했다.

한편, 민정당 개헌안에 대해 일각에서는 전두환 대통령의 영구집권음모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기존 선거제도가 유지된다고 암묵적으로 전제하면서 내각제 개헌안을 제안한다는 게 근거였다. 당시 국회의원 선거제도를 간단히 정리하면 지역구 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 전국구(비례대표제)는 지역구 1당에 2/3 의석을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분명 집권 여당은 이른바 ‘여당 프리미엄’이라는 것을 가지는 만큼 이런 식의 선거제도는 여당에 유리하다는 문제 제기가 충분히 가능하다. 또 아무리 지역구 1당이라고 해도 2/3 의석을 배분한다는 건 비례성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지만 제1야당 역시 제도의 이점을 누릴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또 선거제도는 헌법 개정과 비교하여 제도의 수정이 쉬운 편이다. 대통령이 국회의원 의석수의 1/3을 지명하여 야당의 집권을 제도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면서도 대통령의 이런 권한을 헌법으로 부여한 유신헌법과 달리, 정치권 내 협상 여하에 따라 선거제도는 수정할 수 있었다. 민주화가 논의되는 당시에는 그 가능성이 더욱 크게 열려있었다. 실제로 이 시기에 지역구는 소선거구제, 전국구의원은 지역구 1당에 1/2을 배분하고 나머지는 지역구 의석수에 비례해서 배분하는 내용으로 선거제도 개편이 이뤄졌다. 이런 점들을 미뤄볼 때, 영구집권음모라는 비판은 다소 과한 측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3) 신민당의 대통령중심, 직선제 개헌안

신민당이 1986년 8월 8일 헌특위에 제출한 개헌안은 정·부통령제와 직선제를 골자로 한 안이었다. 대통령의 임기는 4년 임기에 1차 중임을 허용했다. 우선 대통령의 권한을 축소했다. 대통령 권한 축소와 관련해서 대통령 지위를 국가원수 지위에서 행정수반 지위로 변경했고, 국회해산권, 개헌발의권을 삭제했다. 비상조치권은 법률에서 명령으로 격을 낮췄다. 이는 권한의 범위를 한정하고 국회의 사후 통제를 강화하는 안이었다. 한편 국회 권한은 강화했다. 국정감사권을 부활하고 국회 회기 제한을 폐지했다. 재적의원 1/4의 동의만 있으면 언제든 국회를 열 수 있도록 규정했다. 대통령 탄핵발의 요건은 재적의원 1/3로 완화했다. 또한 헌법 편제상 국회를 대통령의 앞으로 뒀다. 국회의 권능이 대통령에 우선한다는 사실을 표하기 위함이었다. 

신민당이 이렇게 대통령중심, 직선제 개헌으로 방향을 확정 지은 건 1985년 8월 2일 임시전당대회를 앞둔 시점이었다. 원래 김영삼은 직선제를 원칙으로 하되 내각책임제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으나, 김대중과 동반자 관계를 확실히 하기 위해 내각책임제 단서를 철회하기로 합의했다. 대신 김대중은 김영삼계를 대표하는 이민우 총재를 재추대하기로 약속함으로써 당권을 양보했다.

이렇게 합의하고 당 차원의 개헌안을 제출하기까지 했지만, 정작 내부에서는 대권과 당권을 둘러싼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져 그다지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지는 못했다. 김영삼, 김대중 양자 모두 누가 대통령 후보가 되느냐에 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당시 이철승 의원은 이런 당의 상황에 대해 “양 김은 나중에 자신들이 집권하여 대통령제 하의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기 위해 역대 독재 정권에서 그렇게 시달렸으면서도 ‘양극은 통한다’며 보조를 맞추어 대통령제의 존속을 주장했다. … 눈앞에 집권의 가능성이 보이니까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 대통령제를 더욱 강조하게 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4) 개헌 과정의 비민주성

1987년에 들어서면서 전두환 대통령은 내각제 개헌을 강하게 밀어붙였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4월 13일 개헌 논의를 연기한다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호헌조치는 이미 2월부터 서울대 박종철 학생 고문치사 은폐, 조작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 대도시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양 김이 내각제 개헌에 대한 입장 차이로, 신민당에서 갈라져 나와 창당한 통일민주당도 강경 투쟁을 결의했다. 이후 6·10 항쟁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는 6·29 선언이 발표된다.

직선제 개헌이 받아들여지면서 이를 제도화하는 논의가 본격화된다. 6·29 선언 한 달 뒤인 7월 24일, 민정당과 통민당은 개헌 협상을 위한 기구로 부총재급의 8인 정치회담을 구성하기로 합의한다. 8인 정치회담은 민정-민주 각 4인 동수로 구성됐고, 민주당 측 인사는 양 김의 대리인이 각각 2인씩 참여했다. 민정당은 신민당과 국민당도 포함하는 회담을 제안했으나 통일민주당 측이 강하게 거부했다. 통일민주당은 신민당을 직선제 개헌을 일관되게 견지하지 않은 ‘배반자’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국민당은 “우리도 의원내각제 수용과 관련해 압력을 받았지만, 초지일관 대통령 직선제를 고수했다”고 항의했지만, 이런 주장은 묵살됐다. 이는 매우 비민주적인 처사로, 아무리 소수당이라 할지라도 두 당은 원내 의석의 20%(56석)를 차지하고 있었다. 간단히 무시해도 되는 숫자는 아니었다.

결국 통일민주당의 강한 거부로 8인 정치회담에는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이들의 계속된 항의로 7월 31일, 4당의 원내총무가 모여 민정당은 신민당, 국민당과 각각 별도로 4인 정치회담을 개최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회의가 개헌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8인 정치회담의 내용을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헌법개정은 국회를 중심으로 진행된 게 아니라 민정당과 통일민주당, 더 구체적으로는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3인의 핵심 대리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후 한 달간 정치회담이 이뤄졌다. 그런데 회담은 일체 배석자 없이 비공개로 진행됐다. 속기록도 남지 않았다. 이런 형식의 논의는 외부의 눈을 의식하며 불필요하게 원칙을 고수하거나 강경한 주장을 할 필요가 없어 신속하고 효율적이었지만 한국헌정사에 있어 가장 결정적이라 할만한 현장의 기록이 없다는 건 문제다. 8인 정치회담 종료 후 구성된 국회 헌법개정안 기초소위원회에서도 관련한 문제가 제기됐다. 최용안 의원은 국회 운영보다 정당 간 효율적 효과를 우선시했다면서 “부끄러운 헌특위가 될까” “당리당략 때문에 진리를 외면했다는 평가를 받지 않을까” 두렵다고 말했다. 신민당 한석봉 의원은 시간 제약을 인정한다 해도 8인, 4인 정치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이 기록으로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데 문제를 제기하면서 지금 이 헌법개정특별위원회(헌특위) 회의 속기록이라도 남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각 정당 헌법 시안만이라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요청은 받아들여져 회의록 부록에 정당 시안이 실리게 됐다. 민주화의 과정이 비민주적 밀실정치로 진행됐다는 비판을 피할 길 없는 상황에서 시안마저 남지 않았다면 민주화 과정을 평가할 하나의 근거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덧붙여 이런 발언과 관련해 각 당에서는 각 정당 개헌안 시안을 헌특위에서 토론하는 것, 헌특위 주체 공청회를 개최하는 것을 논의했으나 결론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9월 18일, 개헌안이 발의된 후에도 절차적 민주주의에 관한 문제 제기는 이어졌다. 신경설 의원은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결국 공청회도 열지 않은 헌법을 “국민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또 그는 “대통령병에 걸린 야당 지도자”가 간선제 반작용으로 생긴 “내 손으로 직접 대통령 한번 뽑아보면 좋겠다는 소박한 일부 국민의 여론”에 밀려서 야당의 최고 정강 정책이던 내각책임제를 스스로 뭉개는 과오를 범했다고 비판했다. 이철승 의원 또한 8인 정치회담이라는 당 기구를 통해 개헌이 졸속처리됐으므로 찬성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토론 후 10월 12일, 개헌안은 재적의원 272명 중 258명 투표, 254명 찬성, 4명 반대로 의결됐다. 
 

5) 제왕적 대통령제를 뒷받침하는 87년 헌법

비민주적 절차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87년 개헌이 대통령의 독재적인 권한을 거의 그대로 유지했다는 데 있다. 대통령의 비상조치권, 국회해산권을 없앤 것을 제외하면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은 거의 그대로 남았다. 특히 국회의 본래적 권한이라 할 수 있는 예산편성권, 법률안 제출권은 여전히 대통령에게 부여됐다. 또한 국가원수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하여 3부의 위에 대통령이 존재하는, 권위주의 시대 대통령의 지위를 유지했다. 왜 이런 형태의 개헌이 이뤄졌나. 87년 개헌은 8인 정치회담에서 결정됐고, 8인 정치회담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의 회의였으므로 이들의 인식이 어땠는가에 주목해 볼 수 있다. 
 
1987년 9월 1일, 개헌을 위한 여야 8인 정치회담이 타결돼 민정당 권익현(앞줄 왼쪽) 대표와 민주당 이중재(앞줄 오른쪽) 수석 대표가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민정당 윤길중, 최영철, 이한동 의원, 민주당 이용희, 박용만, 김동영 의원. (출처: 《한국일보》) 국회가 아니라 8인 정치회담이 개헌 논의의 주체가 된 명분은 1988년 2월 전두환 대통령 임기 만료 이전에 개헌을 완수해야 한다는 시급성이었다. 그러나 회담은 속기록도, 배석자도 존재하지 않은 가운데 정치세력간 ‘밀실 협상’으로 이뤄졌고, 소수정당은 개헌 논의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됐다. 민주화를 향한 결정적 한 걸음을 내딛는 과정이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심각한 결함을 가진 채 이뤄진 것이다.

일단 6·29 선언으로 권력 구조가 대통령 직선제로 정해졌다. (당연히 여론의 압력이 가장 큰 요인이겠지만) 이것을 정부 여당이 수용한 이유 중 하나는 양 김의 분열 가능성이었다. 정부 여당은 양 김이 모두 출마하면 노태우 총재의 당선 가능성이 커진다고 보고 있었다. 민정당 원내총무였던 이한동은 “그럼 김대중도 나오는 건 틀림없고, 김영삼 나오는 거 틀림없고, 김종필도 뭐 당 하나 만든다는 게 있고, 그러면 1노 3김이 붙으면 우리 직선제에도 승산이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고 인터뷰했다. 이렇게 큰 틀이 정해졌다.

가장 큰 규칙이 정해졌으므로 개헌을 논의하는 주체들은 나머지 사안은 부차적인 중요성을 갖는 것이라고 인식했다. 김영삼 총재는 “직선제가 이미 합의돼 개헌안의 90%가 사실상 타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사소한 문제에 구애될 것 없이 양보할 것은 양보하겠다”고 말했다. 비록 나머지는 “사소한 문제”였지만 임기 문제만큼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임기는 거의 마지막까지 논의됐다. 민정당 측은 6년 단임을 주장했다. 이는 전두환 대통령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민정당으로서는 “단임제는 어떻든 양보할 수 없는 최후의 마지노선”이었다. 김영삼 측은 임기 4년에 1차 중임 허용을 제시했다. 하지만 8인 정치회담이 진행되던 8월 중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단임제 수용가능성을 이야기하며 6년은 길다고 지적했다. 김대중 측 역시 단임제를 선호했다. 동교동계 김봉호 의원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대중은 6년 단임제 제안에 대해 “6년은 너무 길어. 그리고 연임은 노이로제에 걸려버렸어. 두 번 하면 세 번 하고 싶고, 그러니 무조건 단임으로 끝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6년은 기니 5년으로 하는 데 대해서는 별 이의 없이 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동교동계 이중재 의원은 “양 김 씨는 8년 임기로 이어질지 모르는 제도에 의해 상대방이 당선되는 걸 꺼렸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결국 임기 문제는 협상에 임한 주체가 모두 집권할 수 있는 형태로 결론이 지어진 셈이었다. 즉 6년 단임이 5년으로 줄어든 건 패배해도 기다리는 시간을 줄이자는 각 주체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다. 그렇기에 중임은 오히려 고려 대상이 되지 못했다.

끝으로 김영삼, 김대중 등 당시 정치 지도자가 민주화의 의미를 ‘유신 이전 상태로의 복귀’로 이해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유신체제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었고, 전두환 정부는 그것의 연장으로 봤다. 따라서 6·29 선언으로 상징되는 민주화는 정치적 경쟁이 나름대로 보장되던 유신체제 이전, 곧 제3공화국으로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여야 협상에서 이견이 생기면 제3공화국 헌법이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됐다. 8인 정치회담에 민정당 대표로 참여한 이한동 의원은 “협상 과정에서 문제가 있을 때나 특정 조항이 쟁점이 되었을 때, 3공 헌법이 모범답안 같은 기능을 여러 번 제공해 주었다”고 회고했다. 한편, 촉박한 정치 일정이라는 현실적 조건도 작용했다. 88년 2월 전두환 대통령 임기 만료 전에 개헌을 완료하고 선거까지 치러야 했다. 이에 8인 정치회담은 한 달 정도 만에 완료됐다. 이런 상황에서 제헌 수준의 헌법 개정을 논의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민정당은 그렇다 하더라도 양 김이 군정 기간에 마련된 헌법을 왜 받아들였는가는 의문이 남는다. 어쨌든 제3공화국 헌법은 군부 세력이 자신들의 집권을 수월하게 하고 권력을 집중하여 체제유지와 효율적 통치를 위해 강력한 대통령제를 도입한 결과다. 따라서 “박정희 군사정권의 ‘5차 헌법 개정’은 국민의 기본권을 신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군부 지배를 연장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강원택은 박정희 대통령 시기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1967년을 제외하고는 꽤 박빙의 승부였다는 점을 꼽는다. 이 시기 선거는 국가기관이 조직적으로 개입해 노골적으로 여당 지지를 확보하는 관권선거였음에도, 선거는 매우 치열했다. 이 때문에 선거 경쟁의 공정성만 보장된다면 자신이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양 김이 갖게 된 게 아니겠느냐는 추론이다. 김영삼의 표현대로, “무엇보다도 선거가 있게 한다”는 게 중요했다. 

결국 당대 정치지도자의 정치적 이익이 반영되어 형성된 결과가 87년 헌법이었다. 이만섭 한국국민당 총재는 후에 “의외로 개헌안이 쉽게 통과된 이면에는 당시 민정당이나 야당의 김영삼, 김대중 씨 모두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라면서 “오로지 권력 구조 및 대통령 선출 방식에만 집착하다 보니 나머지 문제에 관심을 덜 가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 문제라는 것은 사실 대통령중심제는 독재로 흐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처음 협상 과정에서는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줄이려고 했으나, 대통령 후보가 되려는 자 모두가 스스로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에 겨우 대통령의 ‘국회해산권’ 정도만 삭제했을 뿐, 나머지 대부분은 군사정권 때의 막강했던 대통령 권한을 그대로 내버려둔 점”이라고 회고했다. 

당대에도 독재적 대통령 권한에 대한 비판이 존재했다. 이철승 의원은 1987년 개헌에서 ‘군정 종식’보다는 ‘독재 종식’을 우선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직선제와 숙명적으로 연결된 대통령중심제는 승자 독선으로 전제를 낳았고, 그 전제는 생사결단을 요구하는 혁명적인 저항을 유발”한다고 역설했다. 즉 군정이 사라지더라도 직선제와 결합한 대통령중심제는 승자독식의 전제를 낳는다는 것이었다.
 

1963년 제3공화국 헌법과 현행 1987년 헌법에서 대통령과 국무회의와 관련한 조항을 비교해보면, 이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위의 표를 살펴보면, 조항이 거의 비슷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유사함은 김영삼과 김대중이 민주화를 유신 이전으로의 복귀로 사고했고,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권한과 관련하여 숙고하며 논의하지 못했다는 증언 혹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한편, 전두환 정권 시기의 제5공화국 헌법과 비교했을 때, 현행 헌법은 편제상 헌법 조문 순서가 정부, 대통령보다 국회가 우선하고, 대통령 선출 방식이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변화했으며,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 시 헌법상 기본권을 정지할 수 있는 비상조치권이 최소한으로 필요한 재정, 경제에 관한 긴급명령을 발하는 권한으로 축소됐고, 국회해산권이 삭제됐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매우 부족하긴 하지만, 대통령의 독재적 권한을 일부 약화하고, 국회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현행 헌법에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5. 1990년대 개헌 논의

 

1) 1990년 3당 합당

1987년 개헌으로 직선제를 성취한 이후 헌법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그리 크지 않았다. 또 1990년대까지 87년 헌정 체제에 심각한 문제가 발견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개헌 의제가 제기되기는 했는데,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한 3당 합당과 DJP연합이다.

1988년 총선 결과 여당인 민정당이 125석으로 1당을 유지했지만, 과반을 확보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노태우 대통령은 직선제에도 불구하고 당선되기는 했지만, 유권자 1/3의 지지만을 확보한 대통령이었다. 정부 여당의 정당성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의미였고, 이는 정국 운영이 험로를 겪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 정부 여당은 정계개편을 통해 분점정부 상황을 타개해 정국 주도권을 쥐려 했다. 

이런 정부 여당의 이해관계와 김종필, 김영삼의 이해관계가 적절히 맞아떨어졌다. 김종필은 여권과 함께 하며 권력 지분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싶어 했다. 이미 87년 단일화 실패, 대선 후 야당 통합 실패로 야권 단일화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기에 김영삼은 차기 집권 전략의 일환으로 민정당과의 합당을 실제적인 방안으로 고려했다. 그렇지만 김영삼으로서는 일종의 도박수였다. 그간 독재 세력의 대항마로서 쌓아온 정치적 정체성을 뛰어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대통령에 당선됐기에 그의 도박수는 성공했다.

그런데 창당 3개월 후 시점인 1990년 5월 7일, 민주자유당은 당 강령에 내각제를 넣을지를 당무회의에서 논의하며 개헌 논의를 공론화한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즉각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민자당 내에서도 김영삼이 이끄는 민주계는 부정적이었다. 이 문제가 당 내부에서 당권싸움으로 이어지다가 10월 25일, ‘내각제 개헌 합의각서’가 유출된다. 그 내용은 ① 의회와 내각이 함께 국민에게 책임지는 의회민주주의를 구현한다. ② 1년 이내에 의원내각제로 개헌한다. ③ 이를 위하여 금년 중 개헌작업에 착수한다는 것이었다. 원래는 합당 선언 당시 발표될 합의문이었으나 김영삼이 보안유지를 부탁해 공개되지 않았다.

합의서가 유출되자 김영삼은 사실을 시인하면서, 국민과 야당이 찬성한다면 논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약속이 국민 ‘위’에 있을 수 없다고 해명했다. 결국 이 논란은 11월 6일,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표 최고위원의 단독 회동 후 국민이 반대하는 내각제 개헌은 추진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며 일단락됐다. 아울러 김영삼 중심의 당 운영에도 합의했다. 이에 대해 박관용 의원은 “3당 합당으로 김영삼 씨가 대통령 후보가 된 게 아니라 그 속에 들어가 싸워서 쟁취한 것”이라 주장했다. 이는 애초 김영삼은 내각제 개헌 약속을 지키려 했다기보다는 대통령을 향한 여정에서 3당 합당이 현실적 길이었고, 이를 위해 내각제 개헌을 정치적 카드로 활용했다는 의미다.
 

2) 1997년 DJP연합

김대중은 이전부터 일관되게 대통령제를 옹호해 왔다. 1995년 새롭게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의 강령도 “수평적 정권교체를 궁극적 목표로 내세우고 이를 위해 대통령 직선제가 필수적”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그렇지만 1996년 총선을 앞두고는 “내각제를 주장한 정당이 대폭 진출하고 국민 여론이 그런 쪽으로 기운다면 선거결과와 국민 여론을 존중해 내각제를 검토할 수도 있다”면서 여지를 남겼다.

한편, 김종필은 1995년 민자당을 나와 내각제 개헌을 목표로 하는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창당했다. 그는 대통령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오만과 독단에 빠지기 십상”이라면서 “민도도 선진 수준으로 높아”졌으니 내각책임제를 채택해 교착된 한국 정치를 돌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민련은 곧 치러진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15개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4명을 당선시키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민자당 5곳, 민주당 4곳, 무소속 2곳. 이 선거에서 민자당은 나머지 기초단체장 선거 230곳에서 71곳에서만 승리했다. 특히 서울에서는 25곳 중 두 곳만 승리했다. 민주당은 전국 84개 지역에서 승리했다. 여당 민자당의 패배였다.)

1996년 총선에서 여당인 신한국당(민자당에서 당명 변경)은 과반 확보에 실패했고, 과반 확보를 위해 인위적인 정계 개편에 나선다. 그런데 이는 정치적 대립을 초래해 오히려 자민련과 국민회의의 접근을 유도했다. 1996년 5월에는 야당이 모여 신한국당에 헌법소원을 청구했고, 서울 보라매 공원에서 “4·11 총선 민의의 수호 결의대회”를 열어 인위적 정계개편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야권 대연합’을 언급했는데, 이는 DJP대선 연합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1996년 11월 1일부터 DJP대선 공조 협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 회동의 요지는 김대중이 내각제 개헌을 약속하면 양당은 단일후보를 낸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 약속을 이행할 보장 장치가 관건이었으므로 계속해서 막후 협상을 진행했다. 김대중으로서는 내각제가 내키진 않았지만, 지난 선거를 봤을 때, 김대중의 득표율은 호남을 중심으로 한 35% 내외임이 확인되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다른 세력과의 정치적 공조가 필수적이었다.

결국 여러 난관을 뚫고 1997년 10월 26일,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후보단일화에 합의해 DJP연합이 탄생했다. 합의는 “대통령 후보는 김대중, 국무총리에 김종필, 그리고 내각제 개헌을 공동정부 2년째인 1999년 12월 말까지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그해 말 15대 대선에서는 이 선거연합의 결과로 대전, 충청 지역에서 약진한 김대중이 당선됐다.

그러나 합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기된다. 명분은 김대중 대통령의 상황 변화론이다. IMF 외환위기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내각제 개헌 주장은 대통령직을 흔드는 것이라는 논리였다. 1998년 12월 18일, 정권교체 1주년 기념식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내각제 논의 중단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김종필 총재는 약속 이행을 촉구했다. 1999년이 밝자 자민련 의원의 불만이 고조됐고 의원 차원에서도 약속 이행을 말하기 시작했다. 반면 국민회의 측은 개헌 연기론을 주장했다. 가장 강력한 근거는 국민이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시 언론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내각제 지지도는 25.6%였는데, 대통령제에 대한 지지도는 46.6%에 달했다. (이것이 그나마 높은 수치였고 대체로 내각제 지지도는 10%를 넘지 못했다.) 또한 당시 개헌을 위해서는 한나라당의 협조가 필요했으나 이회창 총재는 내각제 개헌 논의가 공동정권의 장기집권 터전을 마련하려는 음모라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결국 현실적인 벽에 막힌 김종필 총재는 2000년 4월 총선을 내각제 개헌을 기치로 치를 것이며, 개헌 일정을 총선 이후로 유보했다. 그러나 이는 자민련의 정치적 명분에 치명상을 입혔고, 2000년 4월 총선에서 자민련은 의석수 55석에서 17석으로 추락한다. 김종필 총재 본인도 낙선한다. 

1990년대 내각제 개헌은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가진 정당에는 대선 승리를 위한 확실한 카드로 활용됐다. 한편, 그렇지 못한 정당에는 권력의 지분을 보장받기 위한 카드로 활용됐다. 이런 공동의 목표 아래 합당 혹은 연합을 이루는 데 개헌이 활용됐지만, 이내 합의는 폐기된다. 이런 과정은 유권자와 무관한 정치공작으로 진행됐다. 또한 이 과정에서 정치적 기만과 술책이 별다른 수치심 없이 사용됐다. 약속을 하고 합의문도 발표했지만, 별 거리낌 없이 약속을 파기했다. 
 
 

6. 2000년대 이후 개헌 논의

 
2000년대 이후 개헌 논의는 대체로 대통령이 국정 운영 동력을 상실해 가는 와중에 국정 주도권을 회복하려는 시도의 하나로 개헌을 제안하면서 이뤄졌다.
 

1) 노무현 대통령 시기 4년 중임제 원포인트 개헌 제안

2004년 총선으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과반수 의석을 확보했으나, 선거법 위반으로 소속 의원이 연이어 직을 상실해 과반이 붕괴했고, 2005년 4월 재보선에서 참패하며 이것이 확정된다. 더불어 정권 지지율도 하락하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반전하고자 2005년 8월 30일, 노무현 대통령은 야당에 대연정을 제안한다. 대통령은 형식적 국가원수로 대통령직만 유지하고 실질적인 권력은 연정의 총리와 내각에 넘긴다는 내각제적 권력분점 제안이었다. 

이 제안에는 물론 대통령 권한과 역할에 대한 생각, 국정운영 메커니즘의 문제점에 관한 노 대통령의 고찰이 담겨있기는 했겠지만, 정치공학적 측면에서 당시의 불리한 국면을 돌파하고자 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행정수도특별법 위헌판결, 부동산 가격 앙등으로 국정 지지도가 급락하는 상황에서 노 대통령의 진정성이 인정받기 어려웠다.

그런데 지지층 내에서도 대연정을 반대했다는 점이 대연정이 실패한 주요 원인이 됐다. 지지층은 한나라당과 권력을 나누는 시도에 대해 크게 불만을 표출했다. 결국 노 대통령 본인도 후에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이고 완전히 실패한 정책이었다고 인정하고 만다. 2005년 9월 7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노무현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담에서 대연정을 공식 거부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된다. 

이후 10월 재보궐 선거에서도 여당은 패배했고, 다음 해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광역단체장 15곳 중 1곳만을 확보하는 참패를 당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정국 주도권을 쥐기 위해 2007년 1월 9일, 대통령 임기를 4년으로 하고 1회에 한해 연임할 수 있게 하며,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주기를 일치시키는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한다. 이런 제안의 명분은 대통령의 짧은 임기로 국정과제 연속성이 단절되며 낭비가 심하고 시행착오가 거듭된다, 더욱이 분점 정부가 출현하면 국정은 더욱 불안정해진다, 따라서 동시 선거를 치르면 같은 당에서 대통령을 배출하고 다수당도 확보할 가능성이 크니 효율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 대통령 임기 중 개헌에 대해 모든 야당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야당은 노 대통령의 제안이 정국 주도권을 잡기 위함일 뿐이고, 만약 개헌을 하려고 한다면 원포인트가 아니라 포괄적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특히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은 단순히 정치권 내 논의만을 거쳐 “뚝딱하겠다”는 식으로 접근할 게 아니라 전 사회의 합의를 모으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제안 당시 이것이 국회에서 통과될 수 없는 조건이라는 점은 명백했다. 게다가 제안할 무렵의 대통령 지지율은 10%대였다. 통치 행위 자체가 어려운 수준이었다. 결국 그의 제안은 그대로 좌절됐다.
 

2) 이명박 대통령 시기 개헌 논의

이명박 대통령 시기에는 크게 두 번 개헌 논의가 부상했다. 우선 임기 초반,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인 6월 15일, 이명박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지역주의, 권력형 비리, 부정부패, 정쟁의 정치 문화를 언급하면서 “이런 고질적인 문제에는 대증요법보다는 근원적인 처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개헌을 시사했다. 이에 호응해 여권 일부에서 그 근원적 처방은 개헌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7월 9일에는 역대 국회의장이 모여 현행 대통령제는 바뀔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8월 31일, 국회의장 직속 헌법연구 자문위원회는 개헌안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는 양원제 국회로 변경하자는 제안, 정부 형태로는 분권형 대통령제와 4년 중임 대통령제를 논의해서 결정하자는 제안, 개헌 논의는 2010년 지방선거 전까지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며 국회가 논의와 발의를 주도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권고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 전반의 반응은 회의적이었다. 현실적으로 여야가 개헌방향에 합의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야당은 정부가 개헌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서 다음 지방선거를 개헌 이슈로 호도하려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지점은 차기 주자가 개헌에 공감대를 형성하지 않은 것이었다. 여당 내 친박계는 개헌에 소극적이었다. 오히려 대통령이 밀고 가는 것처럼 보이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도 개헌하려면 연방 수준의 국가 대개조를 해야 한다며 권력 구조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광폭 개헌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반대에 부딪치며 국회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는 가운데, 한나라당은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패배한다. 그렇지만 한나라당 내 개헌파 의원의 개헌 촉구는 계속됐다. 이는 친이계 여당 지도부가 개헌 주도권을 매개로 이명박 정부 후반기 국정운영을 주도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차기 대권주자인 박근혜 전 대표는 당시 여권 주류가 선호하는 분권형 대통령제에 반대했다. 박 전 대표는 정치를 하는 동안 줄곧 ‘대통령 4년 중임제’를 소신으로 이야기했다. 즉 권력 구조 개편보다는 임기에 초점을 둔 것이었다. 게다가 친박진영은 여권의 개헌 논의를 ‘박근혜 고립화’로 인식했다. 야당도 여전히 여권 주도의 개헌 논의에 부정적이었다.

한나라당 친이계 개헌파는 어떻게든 개헌을 밀어붙여 정국 주도권을 움켜쥐려 했다. 2011년 2월 8일 한나라당 개헌 의총을 열고 당내 개헌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국회 개헌특위 구성까지 밀어붙이려 했다. 그러나 의총에서 친박 의원은 침묵으로 이런 주장을 거부했다. 결국 의총은 개헌과 관련해 별다른 성과 없이 막을 내렸다. 

이후 2012년 말, 대선 국면에서 차기 대통령 주자들은 각각 개헌과 관련해 입장을 표명했다. 문재인 후보는 4년 중임 개헌안을 공약으로 제시했고, 박근혜 후보도 4년 중임, 정·부통령제 도입을 제시했다. 안철수 후보는 안을 제시하지는 않았고, 국민의 의사를 반영해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만을 밝혔다. 그러나 사실, 이때의 개헌 논의는 차기 대통령의 임기 단축이 전제되지 않는 한 생산적 논의가 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예를 들어, 여야 지도자 17인은 다음 정권에서 개헌을 한다면 2017년 19대 대선을 2016년 20대 총선과 함께 실시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 경우 대통령 임기를 1년 8개월 단축해야 했다. 문재인 후보는 이를 반대했으며, 박근혜 후보는 의견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 결국 개헌 논의는 그대로 일단락됐다.
 

3) 박근혜 대통령 시기 개헌 논의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13년 4월 12일,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이 합의해 국회 차원의 개헌 논의 기구를 구성하기로 했다. 차기 대권 후보가 마땅치 않은 제 세력이 개헌 논의를 통해 정국을 주도해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기는 했지만, 다수의 국회의원이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권력 구조를 개편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렇게 국회에서 논의가 이어지자, 여당 내에서도 비박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제기된다.

그러나 친박계는 개헌에 부정적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블랙홀 같은 개헌 논의는 부적절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국회는 개헌찬성론자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면서 국회의 대외 활동은 사실상 중단됐다. 더욱이 찬성론자 사이에서도 권력 구조에 관한 입장은 합의되지 않았다. 비박계 김무성 대표, 새정치연합 우윤근 원내대표는 대통령은 외치, 의회가 선출하는 총리는 내치를 담당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주장했다. 반면 문재인 의원은 대통령제를 유지하면서 4년 중임제나 정·부통령제 도입을 주장했다. 

그런데 김무성 대표가 주장한 분권형 대통령제에 대해 청와대 홍보수석이 부정적인 입장을 표시하자, 김 대표는 자신의 개헌 발언이 “불찰이었다”며 “대통령께서 이탈리아의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에 참석하고 계신데,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죄송하다”며 후퇴했다. 이후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개헌에 반대했다. 

그러던 중 ‘진박 논란’, ‘옥새파동’으로 상징되는 무리한 공천권 행사로 2016년 4·13총선에서 여당인 새누리당이 패배했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였다. 그러나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와 정치적으로 타협하기보다는 대결 구도를 유지했다. 애초 김무성 대표 개헌 발언도 그렇고,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해 “배신의 정치”라면서 끝내 사퇴시킨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박근혜 대통령에게 국회는 동등한 파트너가 아니었다. 

6월 13일에 정세균 국회의장이 다시 개헌 논의에 불을 지폈고, 새누리당에서도 호응이 있었다. 새누리당도 차기 후보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정권을 내주느니 권력을 분산하는 게 낫다는 구상이 있었다. 하지만 개헌 논의의 진척은 쉽지 않았다. 20대 국회 임기 내(2020년 5월까지)로 개헌하려면 새 대통령이 양보해서 임기를 맞춰야 했다. 게다가 여전히 박 대통령은 개헌에 부정적이었다.
 

4) 박근혜 대통령 탄핵국면

개헌에 부정적이던 박 대통령이 돌연 입장을 선회해 개헌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미르재단, 최순실 국정개입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태도 변화는 정치적 의도가 명백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것과는 별개로 국회의 개헌 흐름은 더욱 커졌고, 개헌모임에 참여한 의원 수는 개헌선을 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합의까지는 쉽지 않은 과정이 남았다. 우선 권력 구조만 고치는 원포인트 개헌인가, 아니면 기본권 내용까지 개정하는 포괄적 개헌인가의 쟁점이 있었다. 또 권력 구조를 두고도 4년 중임제(박근혜), 이원정부제(김무성, 이재오), 의원내각제(김종인) 등 의견이 갈렸다. 개헌을 누가 주도하느냐, 개헌안 적용 시기는 언제냐, 차기 대통령 임기 단축 문제도 쟁점이었다.

한편, 야권 대선 후보인 문재인, 안철수는 대통령의 개헌제안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정권연장을 위한 제2의 유신헌법이라도 만들자는 것이냐”고 비판했다. 안철수 의원은 “우병우·최순실을 덮으려는 것이 아닌지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여권 내에서도 유승민 의원이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반면 김종인 전 대표는 대통령의 제안을 환영하며, 최순실 문제와 개헌을 별개로 대응하자고 주장했다. 민주당 중진도 개헌 추진으로 중지를 모았다.

그러나 최순실의 대통령 연설문 사건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 내 개헌 추진’ 제안은 한순간에 동력을 상실했다. 연설문 사건에 더해 최순실이 국정 전반에 관여한 사실도 드러났다. 의혹에도 불구하고 새누리당 지도부는 개헌추진을 굽히지 않았지만, 결국 여당 내에서도 개헌 논의 유보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10월 30일, 새누리당은 “여야가 동의하고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거국내각’ 구성”을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야당도 거국 중립내각을 주장했다. 그런데 새누리당이 막상 이를 받아들이자, 야당은 갑자기 입장을 변경해 “최순실 사건 진실 규명이 먼저”라면서 선 검찰수사, 후 거국내각 논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박근혜 대통령은 전격적으로 김병준 총리 후보자 인사를 발표했다. 국회 다수 세력의 지지를 받는 인물을 세워 국회와의 대립을 완화하려는 의도였으나, 시기적으로 적절치 못한 인사권 행사였으며, 그 결정 과정 또한 일방적이었다. 야당은 이 인사로 “변화 가능성이 없다는 게 증명됐다”고 주장하며 하야를 요구했다. 

하야와 탄핵이 거론되기 시작하는 국면으로 접어들던 이때, 새누리당은 비박계를 중심으로 박 대통령의 ‘개헌 연계 퇴진론’을 주장했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국민적 동의를 토대로 새 헌법을 만든 뒤 그 헌법에 따라 박 대통령의 임기를 조정할 수 있다”고 했다. 더불어민주당 문희상 의원도 퇴진과 개헌을 연계했다. 국회 추천 총리로 과도정부를 구성해 현 시국을 수습하고 개헌으로 조기 대선을 치르자고 주장했다. 여야 원외 인사 150여 명이 모인 ‘나라 살리는 헌법개정 국민주권회의’도 임기 단축 개헌을 표명했다.

그러나 야권 유력 대선 후보인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와 안철수 의원은 개헌에 소극적이었다. 박 대통령에 대한 여론이 악화하자 야권 대선 주자는 탄핵에 무게를 뒀다. 11월 20일, 문재인 전 대표, 안철수 전 대표, 박원순 서울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재명 성남시장, 정의당 심상정 대표 등은 국회에서 회동을 갖고 “박 대통령의 범죄사실이 명백하고 중대해 탄핵 사유가 된다”고 밝혔다. 이들은 합의문에서 “탄핵 추진을 논의해 줄 것”과 “국회 주도 국무총리 선출 및 과도 내각 구성” 등 수습 방안을 야 3당과 국회에 요청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청와대 정연국 대변인은 탄핵 추진에 대해 ‘차라리 헌법·법률 절차에 따라 논란을 매듭지어달라’고 요구했다. 정면 대응 선언이었다. 이로써 개헌을 통한 퇴진은 대안이 아니게 됐다. 11월 21일, 민주당은 의원총회에서 탄핵 추진을 공식 결정했다. 국민의당도 탄핵을 당론으로 확정하면서 탄핵정국이 시작됐다. 

그렇지만 개헌 논의가 아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김종인 의원은 21일, “이런저런 핑계로 개헌 논의를 안 하려는 일부 정치 세력이 있다”면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문재인 전 대표는 같은 날 “지금 개헌을 말하는 것은 뭔가 순수하지 못한 정치적 의도가 있”다면서 개헌이 필요하지만, 다음 대선 때 후보들이 공약해 실현하는 게 맞는다고 주장했다. 더불어민주당은 24일부터는 개헌과 탄핵의 병행이 아닌 탄핵만을 본격 추진하겠다고 표명했다. 문 전 대표는 “야 3당이 합동 의원총회를 열어 전원이 탄핵안에 서명하고, 새누리당 의원을 상대로 공개적으로 발의 서명을 받아 누가 거부했는지 밝혀야 한다”고 압박했다.

사실 이런 선회의 배경에는 전날 김무성 전 대표가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면서 새누리당 내에서 탄핵 발의를 주도하겠다고 한 발언이 있었다. 당시, 이 발언은 탄핵과 개헌을 교환하자는 뜻으로 풀이됐다. 그러나 민주당은 개헌은 빼고 자신에게 유리한 탄핵 추진 쪽으로만 해석했다. 이에 민주당 비주류와 개헌파는 탄핵이 민주당 주류와 친문 측의 ‘조기 대선’과 ‘개헌파 진압’이라는 의도에 따라 추진된다고 비판했다. 

11월 24일에는 비박계, 비문계 의원 158명이 모여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과 국정 공백 해소를 위한 대책 마련 촉구 결의안’을 발표하면서 개헌 추진 입장을 재차 표명했다. 결의안에 참여한 158명은 대체로 권력이 집중된 대통령제, 패권 정치에 반대했다. 그러나 친박계는 마지막까지 대통령을 방어하려 “스크럼을 짜고 있”었고, 대통령도 이에 기대 현상 유지를 택하고 있었다. 결국 정기 국회 회기 마지막 날인 12월 9일에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5)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부터 문재인 정부 개헌안 부결까지

탄핵소추안 가결 3일 후, 여야 3당 원내대표는 2017년 1월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1987년 개헌 이후 처음이었다. 국회 개헌 추진 모임에 가입한 국회의원은 200명에 가까웠다. 정세균 국회의장은 개헌이 “대선보다 어떻게 보면 더 중요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2월 13일, 민주당 내 친문과 비문이 개헌 문제를 두고 충돌했다.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는 개헌 불가론을 주장했다. 그는 “지금은 개헌을 말할 때가 아니다”라며, “지금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촛불 민심이 요구하는 오래된 적폐들에 대한 대청소,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논의에 집중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그는 탄핵 심리 중이므로 개헌할 때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었지만, 실상은 조기 대선에서 정권 획득의 가능성이 커지자 다른 변수가 생기는 걸 경계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이전 국회의장들이 만들어놓은 헌법개정안도 다수 있었기에 개헌은 시간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에 가까웠다.

한편, 야권을 중심으로 ‘개헌을 위한 차기 대통령 임기 단축’ 쟁점이 다시 제기됐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이 확정되고 조기 대선을 실시할 경우, 대선 후보들이 “2022년까지 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2020년 4월 차기 총선에 맞춰 물러나”고 다음 국회의원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를 맞추는 걸 약속하자는 제안이었다. 조기 대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대선 전 개헌은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기에 차기 대통령의 임기를 줄이면서 개헌을 하자는 주장이었다. 문재인 전 대표는 임기 단축에 대해 “지금 그런 얘기를 할 단계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러나 문 전 대표를 제외하면 그간 개헌에 부정적이었던 안철수 의원을 포함, 김종인, 이재명, 박원순 등 거의 모든 인사가 개헌을 시급한 국가 현안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 개헌 그룹은 공론화 활동에 나섰다. 이들은 개헌에 소극적인 지도부를 비판했지만, 결과적으로 당내 개헌 동력을 얻지는 못했다. 추미애 대표, 우상호 원내대표가 이미 개헌에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시기 개헌 논의도 앞선 경험처럼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거부로 무산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 1월 3일, “개헌 논의 배경과 전략적 스탠스 & 더불어민주당의 선택”(이른바 ‘분권형 개헌 저지 보고서’)이라는 보고서가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이 보고서에는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주장 집단을 촛불 민심에 반하는 ‘야합’세력으로 몰아붙여야 한다”는 주장과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개헌을 매개로 합종연횡이 본격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반기문 총장 등의 이른바 ‘제3지대’가 형성되면 민주당을 패배로 이끌 수 있다”고 경계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기동민·박용진·이철희 의원 등 비문계는 물론 일부 친문계가 포함된 초선의원 20명이 진상 조사와 관련자 문책을 강하게 요구했다. “당 공식기구가 비문 결집 등의 표현을 쓴 것은 분열을 자초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당시 김용익 민주연구원장은 “어느 후보의 유불리 입장으로 쓴 게 아니”라고 해명했으나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2017년 1월 4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개헌특위)가 발족했다. 활동 기한은 2017년 6월 30일까지였다. 앞서 언급했듯 87년 이후 처음 설치된 개헌특위였다. 서희경은 이번이 87년 체제를 종결하고 제7공화국을 출범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말한다. 대체로 대통령이 주도해서 이뤄진 이전의 개헌과는 달리 이번 개헌은 국회가 주도하며 다수의 중지를 모아내 논의할 수 있었으므로, 과거의 시행착오를 다시 겪지 않으며 진정한 개헌을 이룰 수 있었다는 의미다. 개헌 찬성 여론도 반대와 비교해 두 배 정도 높았다. 개헌에 소극적인 문재인 전 대표 지지층에서도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과반이었다.

개헌에 계속해서 반대하던 문재인 전 대표도 2018년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를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제 모든 정치세력이 개헌 자체에는 찬성했다. 그러나 구체 논의에 들어가면 합의가 쉽지 않았다. 대선에서의 유불리, 각 세력의 정치적 이익에 따른 행보들이 개헌 논의를 방해했다.

어쨌든 개헌 논의를 지속하며 2월 21일, 국민의당,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은 3당 간 단일 개헌안 마련을 위한 협조를 약속했다. 세 당은 대선 전에 최대한 개헌안과 일정에 대해 단일안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세 당의 개헌안은 임기에 대한 부분은 달랐지만 대체로 분권형 권력 구조를 기본으로 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민주당의 동참이었다. 결국 개헌 정족수를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민주당 비문계 의원 30여 명이 2월 23일 “왜 민주당만 개헌에 대해 당론이 없느냐”면서 개헌을 압박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도 23일 의원총회를 열고 개헌 문제를 논의했다. 비문계와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이 힘을 합하면 정족수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던 3월 10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헌법재판소 재판관 전원 일치로 인용됐다.

2017년 3월 15일,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원내 지도부는 4년 중임 분권형 대통령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에 합의하고, 5월 9일 대선과 함께 개헌 국민투표 실시를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3월 28일 전까지 개헌안 발의를 마무리한다는 방침까지 정했다. 당시 3당의 의원 수는 165명이었으므로 발의는 가능했지만, 통과에는 민주당의 35명이 더 필요했다.

민주당 의원 중 적극적인 사람의 수는 3~4명이었다. 민주당 내 개헌파 초선의원은 당내 경선이 흘러가는 걸 보고 판단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또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 바른정당 유승민 의원도 개헌에 부정적이었다. 게다가 개헌이 문재인 후보를 견제하려는 정략적 성격을 가진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끝으로 당시 여론은 대선 후 개헌이 좀 더 높았다(대선 후 개헌 46%, 대선 전 개헌 33%). 개헌 자체는 70% 이상이 찬성했지만 제1당인 민주당이 반대하는 상황에서 개헌안의 국회 통과는 어려웠다. 대선 시기가 임박하자 민주당 의원은 유력 대선주자에 끌려갔다. 다른 당의 대선 후보도 대선 후 논의하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과거를 보면 대통령은 개헌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 차기 대통령도 그러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이번 기회가 무산되면 향후 더 큰 갈등과 분열을 겪을 수 있었다. 그러나 개헌보다도 대선은 더욱 강한 블랙홀이었다. 개헌은 2017년에도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공약 이행 차원에서 2018년, 대통령 발의라는 형식으로 개헌안을 제출했다. 이 안은 야당 의원의 불참 속에, 의결정족수에 미달해 자동으로 폐기됐다. 이렇다 할 공론화 과정도 없었고, 당시 국회 의석수를 봤을 때 통과될 가능성이 극히 낮음에도 국회를 설득하려는 실질적인 노력도 없었다. 개헌은 전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상대 당 국회의원에 대한 설득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헌법에 대한 인식이 매우 안일했든, 애초 개헌안 통과를 바라지 않고 공약했으니 요식행위 정도로 처리하려 했든 문제다. 

게다가 개헌안은 대통령 발의라는 형식을 취했다. 이런 형식은 입법은 입법부의 고유권한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처사다. 당연히 견제와 균형이라는 삼권분립의 취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입법부의 권한을 침해하는 제왕적 대통령의 상징이라 하겠다. 심지어 공식 행정부 라인도 아니고 비공식 라인인 민정수석이 “업무의 처음부터 마지막 발의까지 저희가 책임진다”며 개헌안 조문 마련을 주도했다고 자랑스럽게 밝히고 발표까지 했다. 이는 민주주의 책임정치에도 어긋나는 일이다.

내용도 문제였다. 민주화 이후 모든 권력이 대통령 1인에게 집중되고 승자독식의 전제가 반복됐다. 그 결과 정권마다 권력형 비리가 반복해서 발생했고, 일방적 국정운영과 이를 극한으로 반대하는 극단적 대립이 계속됐다. 대통령 탄핵소추도 두 번이 있었고, 박근혜 대통령의 탄핵은 인용됐다. 이런 폐해를 낳은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분산해야 한다는 게 역대 개헌 논의에서의 중론이었다. 

그러나 2018년에 제출된 개헌안에는 권력 분산과 관련한 내용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국회의 핵심 권한이며, 권한 분산에서 일 순위로 고려되는 정부의 예산편성권, 법률안 제출권은 큰 틀에서 유지됐다.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정원장, 국세청장 등 핵심 기관의 대통령 인사권은 전혀 축소되지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의 임기는 4년 연임으로 했다. 권한은 거의 줄지 않았는데 임기만 늘린 꼴이었다. 개헌안은 권력분산을 최소화하거나 오히려 대통령의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된 게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결국 2017년의 개헌국면도 이전과 같이 유력 차기 대통령 후보에 의해 개헌에 실패하며 마무리됐다.
 
2018년 3월 22일, 조국 당시 민정수석이 대통령 발의 개헌안을 발표하는 모습이다. (왼쪽, 진성준 당시 정무기획비서관, 오른쪽 김형연 당시 법무비서관.) 2018년 개헌안은 대통령 권한을 거의 축소하지 않으면서 임기는 4년, 연임할 수 있다고 규정해 실질적으로는 대통령 권한을 강화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사진 출처: 《경인일보》)
 
 

7. 결론

 
지금까지 한국헌정사의 주요 국면을 살펴봤다. 한국헌정사에서 헌정주의의 원칙이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건 정세론이라는 명분으로 대통령의 비대한 권력이 제대로 제한되지 않고, 국회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약해 권력분립을 통한 의사결정 구조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며 대통령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녔기 때문이다. 

법의 지배와 권력 분립을 통해 국가기관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방지하여 국민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헌정주의의 원칙은 초대 대통령이자 대통령중심제 채택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쳤던 이승만 대통령부터 결여해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본인의 권력을 견제하는 장치를 차례로 파괴했고, 임기 제한마저 철폐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는 결국 4·19로 종식됐다. 그러나 4·19 이후 개헌 국면에서 민주주의와 헌정주의의 충돌이라는 심각한 쟁점이 부각됐다. 결국 국민주권이라는 명분으로 소급입법이 가능하도록 개헌이 이뤄지면서 법의 지배라는 헌정주의의 원칙이 결정적으로 훼손됐다. 이는 사회가 유지되는 기준이 흔들리는 일로, 사실상의 무정부 상태를 초래했다. 결국 제2공화국은 성립 11개월 만에 5·16 쿠데타로 무너졌다. 

시간이 흘러 민주화 운동의 결과 1987년 개헌 국면이 열렸다. 그러나 이때도 헌정주의의 원칙은 그다지 중요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인들의 정치적 이해득실이 기준이 되어 협상이 이뤄졌다. 1987년 개헌 당시에 참고했던 제3공화국의 헌법이 군부통치에 유리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제정됐고, 행정 효율성을 위해 대통령에게 독재적 권한을 부여했음에도 이런 부분은 협상 주체에게 고려 요소가 아니었다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오히려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은 본인이 대통령이 된다면 좋은 요소로까지 인식된 게 아니냐는 의심마저 드는 증언들도 존재한다. 개헌 과정도 절차적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었다. 민주화의 과정이 비민주성으로 얼룩진 것이다. 결국 당대에도 비민주성에 대한 비판, 승자독식의 전제, 독재 종식이 먼저 됐어야 한다는 뼈아픈 비판이 제기됐다.

87년 개헌 당시 지적된 제왕적 대통령제 아래 승자독식의 전제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한국 정치에 질곡을 낳았다. 승자독식 구조 아래서 대통령 혹은 유력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이합집산이 반복됐다. 정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당도 대통령에 복종하고 그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다원적 질서를 반영한다는 정당의 기본기능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행정부를 견제하는 입법부(국회)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는 권력분립을 통한 상호 견제라는 헌정주의의 원리가 결여됐고, 제왕적 권력 행사는 반복적으로 문제를 일으켰다. 대통령마다 대통령 본인 혹은 측근이 비리에 연루됐고, 역대 대통령들은 언제나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했다. 급기야 올해는 윤석열 대통령이 이유를 알기 어려운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가 극적으로 표출됐다. 

제왕적 대통령제가 문제로 지적될 때마다 개헌이 쟁점으로 제기됐다. 그러나 개헌은 권력을 잡기 위한 공조 과정에서 제시할 수 있는 정치적 카드 정도로 활용됐다. 정작 공조가 이뤄져 권력을 잡으면 그 약속은 파기됐다. 3당 합당 내각제 비밀 합의도 그랬고, DJP연합의 내각제 합의 약속도 그랬다. 3김이 모두 정치권에서 퇴장한 뒤 첫 대통령인 노무현 대통령도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을 매개로 정몽준 후보와 공조했다가 단독 승리가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오자, 공조를 파기해 버렸다.

2000년대 이후 개헌 논의는 대통령이 국정주도권을 상실해 갈 때 이를 되찾아보겠다는 정치적 계산에 따라 제안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말기 원포인트 개헌 제안이 그러했고, 이명박 대통령 후반기, 박근혜 대통령 말기 분권형 대통령제 개헌 제안이 그러했다. 

개헌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가장 호기라 할 수 있었던 2016~17년에는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인 문재인 전 대통령이 개헌할 때가 아니라며 개헌을 반대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개선하는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어느 때보다 높았음에도 개헌에 미온적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집권 후에 개헌 요구를 유야무야 넘기려 제출한 것이 바로 2018년 대통령 발의 개헌안이었다. 2018년 개헌안은 대통령 발의라는 형식 자체가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 내용도 대통령의 권한은 거의 줄이지 않으면서 4년 연임제를 도입해 대통령의 임기를 늘리는, 실질적으로는 대통령 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이었다.

한국헌정사에서 나타난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 분산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권한 분산의 핵심은 국회와의 권한 분산이다. 물론 정당과 국회에 대한 신뢰도가 극히 낮고, 최근 이른바 ‘비명횡사’ 공천, 윤 대통령의 당무 개입 논란 등 정당 구조 역시 문제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는 반대로 권한이 없어서 책임도 적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대통령과 여당의 일방적 국정운영에 대항해 야당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극한의 반대 외에는 마땅치 않았다. 권한이 약했기에 선택지가 적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만약 권한이 주어졌다면 그에 따르는 책임이 부과될 것이므로 정략을 추구하는 게 뻔한 ‘지르기 식’ 정치적 결정을 마구 실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국회의원의 사익을 고려해서라도 그러할 것이다. 최소한, 대통령에게 속해있지만 본래 국회에 속해야 하는 예산편성권, 법률안 제출권은 국회에 부여하는 게 필요하다.

매우 극단적인 사건인 최근의 비상계엄 선포도 국회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 없이 국회를 가볍게 무시해도 될 존재로 여겼기에 발생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비상계엄 선포는 그 자체도 그렇지만, 국회를 포함해 정치활동을 금한다는 계엄사령부 포고령이나 병력이 국회로 진입해 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방해하려 했다는 게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대통령의 권한이라 항변하는 그 계엄법 어디에도 국회를 통제할 수 있다는 조문은 없다. 이는 국회의 입법권이 인민주권의 체현이며, 그것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폭정과 인권유린을 겪었던 데 대한 교훈이다. 이를 가벼이 여겨 자칫 헌정이 중단되어 과거로 돌아갈 위기가 발생할 수 있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국회에 권한을 부여하여 제 기능을 회복하고 책임정치를 구현하는 폭이 커지면 국회에 대한 신뢰가 제고될 여지가 생길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한국 정치의 난맥상이 조금은 개선될 수 있지 않은가 기대할 여지가 생길 수 있겠다. 최근의 계엄선포 사태를 겪으며, 제대로 된 견제와 균형이 헌정질서의 급격한 붕괴를 막는 데 기여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지 않았는가 한다. 한국헌정사에서도 특정한 목적이 정당하다는 걸 주장하며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기만 하는 것은 개혁의 밑거름이 되기 어렵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사회의 변화를 사고한다면, 한국헌정의 결함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이번 한국헌정사에 대한 검토가 그 계기를 제공했기를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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