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5 봄. 1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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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문명화'를 위하여: 18세기 영국 계몽주의의 이야기

『근대 세계의 창조: 영국 계몽주의의 숨겨진 이야기』

김영진 | 정책교육국장

 

『근대 세계의 창조: 영국 계몽주의의 숨겨진 이야기』

지은이: 로이 포터

출판사: 교유서가

출간일: 2020.1.16.

 

 

1. 서론

 

현재 한국은 ‘총성’ 없는 내전이라 봐도 무방할 만큼 극심한 사회 분열 상태다. 지난 몇 년간 정부여당과 야당의 갈등은 국정을 거의 마비시켰다. 국정 마비의 책임에 대해 양자는 상대방의 탓을 하며 갈등을 지속했다. 작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상황을 한층 심화했다. 이후 초유의 권한대행 탄핵, 서부지법 난동, 헌법재판소를 둘러싼 여러 논란을 보면, 한국 사회가 단순히 분열한 상태를 넘어 퇴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마저 든다.

 

만일 우리 사회가 퇴보하고 있다면 왜 그런 것일까? 퇴보를 저지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 기준은 무엇이어야 할까? 일반적으로 전현대와 현대를 가르는 기준이자 그 역사적 분기점은 계몽주의(enlightment)의 등장으로 여겨진다. 현대사회의 사상적 기초가 계몽주의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성의 빛’이라는 뜻을 가진 계몽주의는, 칸트에 따르면 “계몽이라는 빛은 편견이나 다른 사람의 지도에 의한 왜곡 없이 자신의 이성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만든 미성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계몽주의의 역사는 일련의 사상가들에 의해 주도되어 오늘날의 세계를 구성하는 데 수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받는다. 대체로 계몽주의의 역사는 데카르트, 베이컨부터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로 이어지는 사상가와 그 사상들의 현실적 체현으로서 미국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을 거쳐 완성되었다고 설명된다.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사회사 연구자인 로이 포터의 저작 『근대 세계의 창조: 영국 계몽주의의 숨겨진 이야기』는 이러한 계몽주의 해석과 역사서술에 의문을 제기하며, ‘고유명사로서 계몽주의’가 아니라 ‘복수의 계몽주의’(enlightments) 중 하나로서 영국의 계몽주의가 갖는 고유의 역사에 주목한다. 포터는 그간 계몽주의에 대한 역사서술이 프랑스 계몽철학자(philosophes) 중심의 단일 서사였음을 지적한다. 에른스트 카시러의 『계몽의 철학』(1951)이래로, 계몽주의 역사서술에서 영국 사상가들의 기여가 무시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계몽주의의 역사는 철학과 이성을 주 무기로 삼은 프랑스 계몽사상가가 기독교의 지배에 맞선 역사였던 것으로, 그리고 미국혁명과 프랑스혁명의 ‘민주주의 혁명’에서 정점에 달했던 것으로 서술된다. 이런 서사에서, 영국은 반혁명의 보루이자 계몽주의가 부재했던 나라로 여겨진다. 한편, 포터는 계몽주의가 억압과 폭력의 도구이며 이른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낳았다는, 계몽주의에 대한 또 다른 해석도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해석은 주로 포스트모더니즘 연구자가 주장했다.

 

포터는 이러한 계몽주의에 대한 두 해석, 즉 신화화와 악마화가 사후적 판단으로 계몽주의의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렇기에 계몽주의, 특히 영국의 계몽주의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간의 계몽주의 역사서술에서 조명받지 못한 영국의 여러 사상가와 지식인의 활동을 추적하고 정리하면서, 영국 계몽주의가 갖는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책의 목적이라고 밝힌다.

 

포터는 영국 계몽주의의 주무대가 1688년 명예혁명부터 19세기 초 프랑스혁명까지의 ‘장기 18세기’까지라고 본다. 그리고 계몽주의를 이끈 핵심 주체는 절대주의 왕정이 전복되고 상업사회가 발달하던 당시의 사회변화를 이해하고 탐구하고자 한 계몽지식인이라고 본다. 이들은 명예혁명으로 안착된 ‘1688년 질서’를 존중하면서, 개인을 중심에 놓고 집단적 안정과 개인적 안정의 조화를 추구하고, 능력주의를 토대로 하는 사회적 이동성을 신뢰했다. 포터는 이를 영국 계몽주의의 핵심 특징으로 강조한다.

 

이 글은 포터의 『근대세계의 창조』의 주요 논점을 시기별로 소개한다. 먼저 명예혁명까지의 역사를 살펴본 후, 저자가 강조하는 초기 영국 계몽주의의 핵심 기여자인 뉴턴과 로크를 중심으로 영국 계몽주의 담론의 특징을 살펴본다. 이어서, 18세기 중반 이후 상업사회의 발전을 둘러싼 논의를 소개하고 계몽주의 담론이 어떻게 상업사회를 옹호했는지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특히 애덤 스미스의 논의를 중심으로 정리한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후반부에 설명하는 후기 계몽주의의 특징을 살펴보고, 프랑스혁명을 계기로 도전받는 영국 계몽주의를 검토하면서 저자의 결론을 제시한다.

 
 

2. 명예혁명을 지키기 위한 합의

 

1) ‘1688 질서’에 대한 합의

17세기에 들어선 스튜어트 왕조 시기 영국의 역사는 주권을 둘러싸고 왕과 의회 사이에 벌어진 지속적인 갈등의 역사였다. 왕과 의회 사이의 갈등은 급기야 대규모 유혈사태와 장기간의 내전(1642~1651년)으로 이어졌다. 내전의 결과 국왕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의회파의 수장이었던 크롬웰이 주도하는 공화정이 성립됐다. 그러나 공화정은 크롬웰의 독재로 실패하였으며, 크롬웰이 죽자 1660년 왕정이 복고되었다. 그러나 왕정은 정치보복을 자행하고 검열을 강화하며 절대주의와 가톨릭교 중심의 정책을 추진했다.

 

1685년 즉위한 제임스 2세는 자의적인 권력 행사와 친가톨릭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런 행보는 고위 귀족, 성직자, 의회 의원 모두의 반감을 샀다. 결국 1688년 휘그와 토리를 망라한 의회 인사들은 네덜란드 오라녜 가문의 빌럼(오렌지공 윌리엄)에게 군사를 이끌고 제임스 2세를 축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윌리엄이 1만 5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영국에 상륙하자, 고립된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다. 윌리엄과 부인인 메리(제임스 2세의 딸)는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국왕에 공동으로 즉위하고, 의회의 요구에 따라 △ 정기적인 의회 소집 △ 의회의 권한 강화 △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관용 △ 인신의 자유를 명시한 권리장전에 서명했다. 이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없었기에, 이 사건은 ‘명예혁명’으로 불린다.

 

입헌군주정을 확립한 ‘명예혁명’으로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내전은 종식되었으나, 영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한쪽에선 스튜어트 왕가의 복귀를 바라는 이들이 있었다. 1715년과 1745년에 일어난 대규모 반란인 재커바이트 반란은 영국에 큰 위협이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가톨릭교도가 다수인 아일랜드나 프랑스와의 갈등이 커졌고, 입헌군주정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자를 비롯한 여러 ‘파당’이 내부적으로 존재했다. 분열된 세력이 난무하는 위기의 시대에, 영국의 계몽주의자들은 1688년 명예혁명으로 합의된 질서를 옹호하고자 했다. 포터는 영국이 한 세기 동안 이어진 참혹한 내전을 경험하면서, 다른 유럽 군주정과는 다른 계몽주의적 정체성을 이끌게 되었다고 본다.

 

포터는 영국 계몽주의의 발전이 상업사회의 발전과 함께하며 서로를 추동했다고 본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발전하던 상업사회의 중심지는 런던이었다. 상업과 금융이 발달하면서 영국은행이 1694년 창립됐고, 새로운 금융시장과 증권거래소가 설립됐다. 많은 상인과 지식인은 궁정이 아닌 ‘런던 시티’로 모였다. 시티를 중심으로 지식인들은 상점, 극장, 거래소에 모여 정보를 교환했다. 포터는 그 중에서도 커피하우스를 강조한다. 왕정복고기부터 시티 내 증권거래소나 세관 건물 주변에 형성되기 시작한 커피하우스는 국내외 뉴스를 주고받는 정보교환소 역할을 했다. 동인도회사와 금융기관의 고객들은 초기엔 사업에 관한 정보를 교환했으나, 이내 신문이나 팸플릿을 진열하고 시사에 관한 토론도 진행했다. 해상 보험의 중심지인 롬바드가의 로이드 커피하우스가 대표적이다.

 

커피하우스에서 토론하는 지식인이 늘면서 토론클럽이나 예술클럽을 비롯한 여러 클럽이 등장했다. 클럽은 현대적인 생각과 가치들을 선보이고 정치적, 예술적 신조를 과시했다. 예를 들어, 견습생, 직인, 장인으로 구성된 프리메이슨 클럽은 영국의 헌정주의를 찬양하면서 친목, 자유, 문명적 행위를 장려했다. 프리메이슨 클럽은 1717년 여러 런던 지부를 통합한 대지부를 형성한 후, 영국 전역으로 지부를 늘려 18세기 말엔 300개가 넘는 지부를 세웠다. 이들 클럽은 극장이나 박물관과 같은 현대적 문물을 소개하는 다양한 플랫폼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림] 17세기 말 잉글랜드의 커피하우스

익명의 작자가 그린 1690~1700년대 런던 지역 커피하우스의 내부 모습. 1652년 런던 최초의 커피하우스인 ‘파스쿠아 로제’가 등장한 뒤로, 런던 시티를 중심으로 커피하우스가 늘어났다. 초창기에는 주로 사업 정보를 교환하는 장소였던 커피하우스는 점차 주요 뉴스와 정치적 토론의 장으로 변했다. 1675년 찰스 2세는 커피하우스 완전 폐쇄를 시도하려다 강한 저항에 부딪히자 이를 철회했다. 커피하우스는 18세기에 들어설 무렵에 이르면 런던에만 1천~3천여 개가 있을 만큼 번성했다. (자료출처: 대영박물관)

 

포터는 잉글랜드에서 커피하우스와 클럽의 발전이 인쇄와 출판 문화의 발전에 힘입어 가속화된 점에 주목한다. 왕정복고기에 도입된 검열법(면허법)은 1695년에 소멸됐다. 이에 런던, 요크, 옥스브리지의 인쇄업자들은 탄압당할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인쇄와 출판이 폭증했다. 1660~1800년 사이에 약 30만 종의 단행본과 소책자가 잉글랜드에서 출판되었고, 부수는 도합 200만 부에 달했다. 신문과 잡지 발행 역시 급증했는데, 1713년에 250만 부 안팎이던 신문 판매부수는 1770년대가 되자 1200백만 부를 넘겼다. 18세기 후반엔 주요 도시마다 자체 신문이 생겼다. 영국 전역에 늘어난 출판물은 각종 유행과 뉴스를 보며 여론을 형성하는 공중과 시민사회를 창출했다.

 

포터는 특히 18세기 초 리차드 스틸과 조지프 애디슨이 창간한 정기간행물 《태틀러》(1709)와 《스펙테이터》(1711)를 강조한다. 《스펙테이터》는 가격이 1페니에 불과한 저렴한 일간지였는데, 로크를 비롯한 새로운 철학자의 사상을 소개하고 대중화하면서 공중 일반에 계몽주의 가치와 교양을 소개했다. 《스펙테이터》의 성공 이후 여러 정기간행물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발전했다. 한편, 출판 문화의 발전 속에서 저술가라는 새로운 직업이 나타났다. 이전까지 출판물에 대한 권리는 스테이셔너스 컴퍼니라는 독점회사가 갖고 있었다. 그러나 1710년 제정된 저작권법은 출판물에 대한 저자의 배타적 소유권과 저작권을 일정 기간 보호받을 수 있게 했다. 저작권에 따른 이익을 나누어 얻기 위해, 출판업자들은 인기 있는 작가들과 독점 계약을 맺고자 했다. 그에 따라 출판업자들을 후원자로 둔, 성직자계급이 아닌 지식인이 등장하였다. 염가판 출판물이 등장하고 지방에서도 서점과 도서관이 확대되면서, 지식인과 공중 일반이 연결된 문필 공화국이 출현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계몽주의를 지향한 엘리트들은 내전 이후에 새로운 미래를 주조하고자 했다. 그들은 가톨릭의 신학적 독단론(전제정의 위협)과 칼뱅주의의 폭력적 ‘열광’(아래로부터의 무질서) 양자 모두를 경계했다. 또한, 고전고대 시대가 좋았다는 르네상스 시기의 복고적인 인문주의 대신, 문명이 발전하는 ‘현대’에 대한 진보적이고 새로운 시각을 만들고자 했다. 포터는 그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아이작 뉴턴과 존 로크에 주목한다. 뉴턴이 형이상학이 아닌 경험과학을 바탕으로 진리를 쌓아 올리는 ‘건축장인’(master builder, 도편수)으로서 과학자를 대표한다면, 로크는 그들을 위해 터를 닦고 지식으로 가는 길을 막는 장애물을 없애는 ‘막일꾼’(under labourer)으로서 철학자를 대표했다.

 

2) 영국 계몽주의를 정초한 뉴턴과 로크

(1) 현대 과학을 정립한 뉴턴

 

과학은 이전까지 수수께끼였다.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와 같은 선구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성서의 권위를 위협하고 신의 섭리를 대체한다는 이유로 종교로부터 공격받고 조롱받았다. 그러나 1662년 창립된 영국 왕립협회는 이런 시선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베이컨으로 대표되는 경험주의 철학과 방법론이 조명받았고, 아이작 뉴턴은 본격적으로 새로운 과학과 계몽주의를 결합했다.

 

뉴턴은 1642년 태어나 1667년 트리니티 칼리지 연구원이 되었다. 이때 그는 이미 미적분학의 기초를 정리한 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1684년 물리학자 에드먼드 헬리를 만난 것을 계기로 2년간 태양계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다. 그 결과 1687년 출간된 책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프란키피아’)다. 『프란키피아』는 케플러의 천체궤도 법칙과 지상에서의 운동을 다루는 운동학을 결합한 새로운 역학을 제시했다. 태양계에 대한 종합적 설명과 함께 뉴턴은 보편 동인으로서 ‘보편중력’(모든 물질이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으로, 질량에 비례하고 거리에 반비례한다)이라는 일반화를 도출했다. 뉴턴의 물리학과 우주론은 자연현상을 보편적인 법칙으로 분석하고 규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는 계몽지식인들에게 인간사회 역시 보편적 법칙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준 점에서 계몽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703년 뉴턴은 왕립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1727년 죽을 때까지 회장직을 맡았고, 자신의 후견을 받은 일단의 후배들과 제자들을 육성했다. 데이비드 그레고리, 존 케일, 프랜시스 혹스비와 같은 수많은 그의 제자들은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을 비판하는 뉴턴의 과학이론의 적극적인 옹호자로서, 뉴턴의 과학이론을 대중화하는 강연 및 시연회를 여러 차례 진행했다. 예를 들어, 윌리엄 휘스턴은 1713년 세인트 마틴스레인의 더글라스 커피하우스에서 수학과 과학에 대한 열변을 토하며 뉴턴의 과학을 소개했다. 왕립학회 공식 실험가이자 뉴턴의 추종자인 드사귈리에는 뉴턴의 과학강좌를 21강짜리로 제공하여 상류층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이 강연은 지방으로 퍼져나갔고, 뉴캐슬에선 ‘유료 역학 강좌’가 실시되었다.

 

뉴턴의 『프란키피아』는 명예혁명 직전에 저술되었기에, 그의 우주론은 명예혁명이 이룬 입헌군주정을 정당화하는 데에 널리 활용되었다. 예를 들어, 드사귈리에는 뉴턴의 물리학을 정치에 적용한 책 『뉴턴적 세계체계: 최고의 정부모델, 우화적 시』(1728)을 내놓으며 영국의 입헌군주정을 찬양했다.

 

“행성들을 그토록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게 만드는 힘은 그(입헌군주)가 말하길 조화와 서로 간의 사랑이다. 법칙으로 강제되는 그의 힘은 여전히 그들을 자유롭게 놓아두며 명령하지만 그들의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다” (책, 227쪽)

 

뉴턴의 자연과학은 이렇게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가와 하나의 동맹을 형성했다. 과학을 통해 세계를 보편적 법칙의 지배를 받으면서 자기조정을 통해 균형을 찾는 시스템으로 이해한 계몽주의자들은 위기에 대한 ‘공포’보다는 ‘진보’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2) 현대적 인간관을 제시한 철학자 존 로크

 

포터는 존 로크를 현대적 유형의 핵심 철학자로 본다. 청교도 가문 출신인 로크는 급진 휘그파인 셰프츠베리 백작의 주치의 겸 비서로 활동했다. 그러나 셰프츠배리 백작이 몬머스 공작의 반란에 휘말리면서, 그와 함께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났다. 네덜란드에서 휘그 망명객들과 교류한 그는 명예혁명이 끝난 후 잉글랜드로 귀국했다. 귀국 후엔 ‘준토 휘그’(윌리엄 3세와 앤 여왕 치세에서 국정운영에 주도적이었던 휘그 분파)로서 국가재정 관료로 활동했다. 그러면서 로크는 17세기 영국 내전을 몸소 체험했다. 당시의 종교적 불관용은 이단과 불신을 낳았고, 이는 참혹한 내전으로 이어졌다. 명예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교회법정은 무신론, 불경, 이단을 죄목 삼아 죄인을 6개월까지 투옥할 권한이 있었으며, 불온하다고 판단한 서적을 불태울 수 있었다. 로크는 종교적 갈등과 분열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간관을 제시하고자 했다.

 

로크는 『인간오성론』(1690)에서 다양한 인류학적 증거를 통해 인간의 다양한 믿음과 관습들을 설명하면서, 생득적인 진리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즉, 인간의 관념과 진리들은 신이 주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생득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로크는 인간지성을 주관적인 믿음으로서 ‘동의’와 객관적 현실로서 ‘지식’으로 구별하고 맹목적 신뢰가 아닌 ‘판단’을 요구했다. 로크는 ‘지식’을 직관적 지식과 감각과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개연적 지식으로 나눈다. 그러면서 개연적 지식이야말로 인간이 입수할 수 있는 진리의 주요 본체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인간은 외부 사물에 대한 경험적 감각(sensation)으로 단순한 관념을 형성하고, 반성(reflection)을 통해 그러한 단순한 관념을 재구성하면서 복잡한 지각과 사고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원래 관념들은 … 모두 이러한 극소수의 일차적인 원래 관념들, 다시 말해 연장(extension)이나 고체성(solidity), 이동성(mobility), 즉 이동하는 능력으로 환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들은 우리의 오감에 의해 우리가 몸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다. 지각이나 지각능력, 사고 원동력(motivity), 즉, 이동시키는 능력, 이것들은 반성에 의해 우리가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는 것이다.” (책 120쪽)

 

인간의 사고가 형성되는 과정을 뉴턴의 역학에 유비해 설명한 로크는, 감각과 반성을 통해 형성한 인간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렇게 지식의 한계를 존중함으로써 지식을 더욱 촉진할 것을 제안했다. 로크는 선험주의를 기각하면서, 지식은 개연적이며 앞으로 나아갈 경험적 탐구에 달려있다는 태도를 견지했다. 따라서 그는 견해의 차이를 ‘타락’으로 보아서는 안 되며, 인간의 인식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로크의 인식론은 종교적 관용과 교육에 대한 강조로 이어졌다.

 

로크는 『관용에 관한 서한』(1689)에서, 종교적 정설을 강요할 군주의 권리를 부정했다. 그러면서 ‘신앙’은 양심의 문제로서, 권력이 미치지 않는 영역임을 강조했다. 또한 『교육론』(1693)에서는 아기의 마음을 ‘사람이 마음대로 빚거나 원하는 형태로 만들 수 있는 밀랍이나 백지’에 비유하며, 아동에 대한 책임감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육의 목표는 물리력을 통한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이성을 통한 자제력 증진에 있음을 강조하며, 경험을 통해 배움에 목마른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크는 명예혁명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였다. 그는 왕권신수설을 옹호한 로버트 필머의 『왕권론』(1680)을 반박하며 『통치론』(1690)을 통해 명예혁명으로 성립한 입헌군주정을 옹호했다. 로크는 정치적 정당성이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라 구성원의 ‘동의’에 의해 나오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더는 나뉠 수 없는 단위로서 ‘개인’(individual)이 자신의 육체, 정신, 노동으로 얻은 소유물에 대한 권리를 갖는다는 소유적 개인주의를 주장했다.

 

“비록 땅과 모든 열등한 생물은 인류 공통의 것이지만, 모든 인간은 저마다 자기 자신이라는 소유물을 갖고 있다. 이 보잘것없는 인간은 자신을 제외한 어느 것에도 권리가 없다. 그의 육체의 수고, 그의 손이 해낸 작업의 결과물은 온전히 그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이 제공하고 남겨둔 상태에서 그가 추출한 것은 무엇이든, 그는 자신의 노동과 결합시키고 그 자신의 것과 섞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을 그의 소유물로 만든다.” (책 296~297쪽)

 

소유에 기반한 개인주의를 통해, 로크는 누구도 다른 개인의 생명, 자유, 소유를 침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런 권리와 소유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발적 동의’에 따라 정치사회, 즉 국가(정부)를 구성한다. 로크는 정부가 정당하게 기능하는 한, 유보된 인민 권력, 즉 인민의 저항권이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만, 군주가 그러한 개인적 소유를 현격히 파괴하려 한다면 인민에게는 그것에 저항할 권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렇게 로크는 명예혁명을 정당화하며, 동시에 명예혁명 이후 성립한 입헌군주정 질서를 옹호했다. 그의 주장은 《스펙테이터》와 같은 매체를 통해 영국 공중 전반에 소개되었고, 케임브리지 대학이나 스코틀랜드의 주요 대학에서도 로크의 저서를 교과목으로 채택했다.

 
 

3. 상업사회의 발달과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1) 상공업의 발달과 도덕경제 비판

18세기 영국은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고 이를 국가재정으로 확충하는 데 성공했다. 영국은 1680년대에 징세청부업을 폐지하고 점진적으로 물품세 위주로 조세 재정을 개혁하면서 상업과 무역의 발전을 조세 수취의 증가로 연결했다. 또한, 안정적인 국가재정을 바탕으로 정부가 영구공채를 발행하는 데 성공하고 이를 보증하는 영국은행이 설립되면서, 국가가 부채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동인도회사나 금융기관이 성장할 수 있었다. 특히 로버트 월폴을 중심으로 하는 의원내각제가 이 시기에 형성되어 정치적 안정이 더해지면서, 상업사회가 더욱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이 시기 계몽주의 담론의 초점은 이렇게 발전하는 상업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였다.

 

상업과 과학의 발달에 따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으로서 ‘개량’이 강조되었다. 개량은 특히 인클로저 운동으로 나타났다. 토양과 농업에 대한 과학적 접근법이 대두되면서 수확량이 증가하였고, 농업은 점차 제조업의 형태로 경영되기 시작했다. 동시에 농업에서 파생된 각종 도구를 만드는 제조업에서 혁신이 이루어졌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혁신은 모직물, 철강을 비롯한 각종 산업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대니얼 디포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1719)의 주인공이 난파선에서 건져낸 도구들과 무기로 수완을 발휘해 역경을 헤쳐 나가는 모습은 그러한 발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상업의 발달은 여가와 오락산업의 발달로도 이어졌다. 이전까지 소수의 부자 귀족만의 전유물이던 커튼, 카펫, 접시가 널리 보급되었다. 작업장이 곧 상점이던 이전과 달리, 전문 소매 직판점이 생겼고, 파인애플과 같은 해외의 이국적 상품이 들어오면서 ‘쇼핑’이라는 오락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사랑과 쾌락의 장소로서 행락지와 정원이 발달했다. 플레저 가든이나 복스홀과 같은 공원에 산책로와 조각상이 배치되었고, 많은 젊은이가 악단의 음악과 함께 춤을 추거나 밀회를 즐겼다.

 

본래 지역사회 행사 또는 궁정과 귀족 후원자만의 독점적 영역이던 스포츠 경기 역시 대중화되었다. 맨주먹 권투시합, 크리켓, 경마 경기가 인기를 끌었으며, 돈을 받는 전문 선수가 등장했다. 또한, 콘서트와 음악 행사 역시 발전했다. 예를 들어 헨델의 <수상음악>(1711)이 복스홀에서 초연되었으며, 유럽 대륙의 음악가가 런던에서 콘서트 투어를 열기도 했다. 개선된 우편 도로와 역마차 서비스와 같은 교통의 발달은 이러한 여가와 상업문화를 영국 전역으로 퍼뜨렸다.

 

이러한 상업과 문화의 발달은 식자층 사이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기독교도는 전통적으로 부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황금은 천하고, 탐욕은 사악하며, 노동을 통하지 않은 이익은 고리대금이라고 여겼다. 이로부터 모두가 아담의 자식이기에 공통의 부(commonwealth)는 공동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중상주의가 나타났다. 스튜어트 왕조 시기의 경제적 관념을 지배한 중상주의자들은 국가 경제를 집안 살림에 비유했다. 이들은 국가의 부를 수출 초과로 발생한 무역수지 흑자로서 금이나 은과 같은 화폐의 양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중상주의자는 화폐량을 늘리기 위해 국가가 상품경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수출을 장려하고 수입을 제한할 것을 주장했다.

 

상업사회의 발전에 대한 또 다른 부정적 태도는 신해링턴주의로 대표되는 공화주의였다. 내전기 인물이자 반(反)스튜어트 휘그파였던 제임스 해링턴은 ‘시민적 전통’을 강조했다. 그는 『오세아나 공화국』(1656)에서, 잉글랜드에 이상적인 헌정을 위해선 집행권(행정권)자의 임기에 제한을 두어야 하며, 국가가 재산을 배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해링턴의 주장은 공화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공화주의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형성된 사상으로, 군주제 반대를 지향하며, 공적 시민의 정치적 참여와 덕성(virtù)을 강조한다. 그리고 공적 덕성이 약화될 경우 자유가 전복되어 전제정으로 타락할 수 있다고 본다. 해링턴의 주장은 18세기에 부활하여 주로 토리파에 수용되었다. 이들은 급격한 경제발전과 사치가 시민의 공적 덕성을 손상시키고, 계층간 적대를 강화하며, 국가를 타락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상업사회 발달을 옹호하는 계몽주의자는 경제에 대한 도덕적 개입을 강조하는 ‘중상주의’와 공적 덕성의 약화로 인해 민주정이 타락할 수 있다는 ‘공화주의’ 양자에 맞서, 상업사회의 발전을 설명할 새로운 이론적 작업을 요구받았다. 이를 수행한 것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였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은 상업사회의 무절제에 대한 도덕적 공격으로서 ‘도덕경제’에 맞서, 상업사회를 설명하고 옹호하고자 했다.

 

2)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애덤 스미스

(1)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발흥

 

포터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기원보다는 그 내용과 여파에 초점을 맞춰 소개한다. 18세기는 스코틀랜드에도 큰 변화가 나타난 시기였다. 스튜어트 왕조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공동 왕조가 된 17세기 이래로, 스코틀랜드는 중앙 권력이 사실상 부재한 가운데 존 눅스를 중심으로 하는 장로교회가 교육 운동을 주도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내전기를 거치면서 스코틀랜드에서도 큰 갈등이 나타났다. 국왕의 예배의식 통합 강요에 맞서 ‘국민서약’ 운동이 전개되었으나, 여기에 참여한 많은 스코틀랜드인이 박해받았다. 동시에 장로파와 주교파 사이의 갈등이 1689년 관용법이 제정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장로파와 주교파 모두 칼뱅주의 교리를 수용했다. 그러나 주교파는 중앙집권적인 가톨릭 주교제도를 따르는 영국국교회 제도를 받아들이지만, 장로교회는 그렇지 않다는 차이가 있었다.)

 

명예혁명 이후에도 위기가 있었다. 1707년 스튜어트 왕가의 혈통이 끊어질 것을 우려한 잉글랜드는 통합법을 제정해 스코틀랜드와 통합왕국을 형성하기로 결정했다. 스코틀랜드도 1680년대부터 지속된 경제불황을 타개하고자 이를 수용했다. 그런데 여기에 불만을 가진 스코틀랜드 고지대(북부지역)의 저발전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된 재커바이트가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했다. 종교적 갈등도 마찬가지였다. 중세 마녀사냥이 잔존했으며, 스코틀랜드 장로교 강경파는 다른 신학을 주장하는 이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 장로교 강경파는 중도파의 도전을 받았다. 휴 블레어 목사와 윌리엄 로버트슨 목사를 중심으로한 중도파는 광신과 지나친 종교적 열정을 멀리하며, 신학 논쟁을 회피하고 잉글랜드 문필가들의 글을 배우고자 했다. 특히 에든버러대학 학장인 윌리엄 로버트슨이 1763년 장로교회 총회장이 되면서, 교회는 점차 세속적 가치를 확산하는 데에 적극적이게 되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통합으로 인한 경제적 성장의 효과를 보고 있었다. 잉글랜드와의 관세장벽이 사라지고 대규모 투자 자본이 유입되었다. 모든 공동지의 인클로저를 허용한 1695년 법으로 농업 개량 역시 확대되었다. 소득과 소비가 크게 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면서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갈등도 점차 완화되었기에, 스코틀랜드의 지식인은 발전하는 상업사회에 대한 연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 지식인에게 잉글랜드는 지향해야 할 미래 사회의 표준이었다. 그들은 잉글랜드의 지식인과 교류하며 잉글랜드를 배웠다. 대표적으로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는 잉글랜드에 유학을 가 그곳의 식자층과 교류했다. 그들은 무력으로 정치적 독립을 쟁취하자는 재커바이트의 반란을 단호히 거부하며, 더 나은 경제적 발전을 위한 문명화에 호소했다. 1746년 컬로든 전투에서 재커바이트가 스코틀랜드의 수도인 에든버러를 침공하고 점령하자, 에든버러의 중도파 성직자와 지식인은 시민군에 자원하여 잉글랜드군과 함께 재커바이트에 맞서 싸웠다. 전투에 참전한 중도파 지식인들은, 재커바이트의 반란을 극복하기 위해선 잉글랜드와 적대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잉글랜드의 문명화에 적극 동참해 그 문명을 한 차원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1745년 재커바이트 반란 이후 스코틀랜드 계몽지식인들은 대학과 담론공동체를 중심으로 상업사회와 문명의 발전을 설명하고 정당화하는 사상을 정립했다. 15세기에 설립된 중세 대학인 글래스고, 에든버러, 세인트앤드루스 대학은, 18세기부터는 중도파 지식인의 주도 하에 뉴턴과 로크의 사상과 저작을 적극적으로 교과과정에 반영했다. 특히 이 시기 스코틀랜드의 대학은 전임교수제도를 확대 운영하고 강의 수강료제도를 도입하면서 혁신을 꾀했다. 또한, 인문교과목을 일반시민도 들을 수 있게 공개했다. 이는 각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지식인이 교수로서 안정적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보장했으며, 동시에 향학열이 있는 학생이 스코틀랜드의 대학으로 모이도록 했다. 무엇보다 저렴한 등록금과 기숙사비 덕분에, 하층민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담론공동체 역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대학에서 강의하던 계몽지식인들은 대학 내에서 강의, 연구, 저술 활동을 하는 것 외에도 서로 모여 토론하는 문화를 주도했다. 대표적인 모임으로 명사회와 사변협회가 있었다. 명사회는 원래 데이비드 흄과 헨리 흄에 대한 교권주의적 장로교파의 비난에 대응하기 위한 중도파 지식인의 모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회원이 늘었으며 지역에서 지식인 운동을 주도했다. 데이비드 흄과 애덤 스미스가 모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으며, 많은 대중이 명사회 모임의 발표나 강연을 방청하고자 에든버러로 모였다.

 

사변협회는 1764년 스코틀랜드 대학생의 토론모임에서 출발했다. 그러다 점차 여러 문필가와 목사가 모임에 합류하면서 계몽주의를 전파하는 모임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출판 운동을 전개해 당대의 계몽지식을 집대성하고자 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판을 거듭하면서 스코틀랜드를 넘어 해외로 널리 퍼졌으며 볼테르, 벤자민 프랭클린과 같은 유럽과 미국의 지식인에게도 널리 읽혔다. 사변협회의 대표적인 인물은 에든버러대학에서 철학 강의 교수를 맡던 듀갈드 스튜어트였는데, 그는 흄과 스미스를 비롯한 선배 계몽주의자의 이론적 논의를 대중적으로 요약하고 소개했다.

 

이외에도 재커바이트 봉기를 다룬 역사소설 『웨이벌리』를 저술한 월터 스콧이나 1790년 평론지 《에딘버러 리뷰》를 창간한 프랜시스 제프리가 있었다. 이들의 저술 활동은 19세기 영국 총리 글래드스턴을 비롯한 많은 정치가와 문필가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림] 소설 『웨이벌리』 표지

스코틀랜드 계몽지식인인 월터 스콧의 소설 『웨이벌리』(1814)는 역사소설의 효시로 꼽힌다. 이 소설은 1745년 재커바이트의 난을 배경으로 다룬다. 주인공 웨이벌리 대령은 고지대를 상징하는 여성 플로라에 반해 재커바이트에 가담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스코틀랜드와 하노버 왕조를 상징하는 브레드워딘의 딸 로즈와 결혼한다. 『웨이벌리』는 한편으론 전통의 소멸을 두려워하면서도 내란의 비극을 고발하며, 잉글랜드와 합병한 이후 스코틀랜드가 번영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는 당시 계몽의 가치를 보여주는 소설로 큰 인기를 얻었다.

 

(2) 애덤 스미스의 도덕철학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가는 새롭게 발전하는 상업사회에서 인간의 도덕적 행동이 어떻게 타락하지 않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숙고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뉴턴과 로크의 방법을 원용하여, 인간과 사회를 법칙을 통해 이해하고자 한 학문으로서 ‘도덕철학’(moral philospohy)을 발전시켰다. 스코틀랜드 도덕철학은 도덕성에 대한 초월적 기준을 기각하고 대신 경험적 접근을 채택했다. 또한, 도덕의 궁극적 원천을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서 찾았다. 사람마다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서로 공감할 수 있으며, 그러한 감정의 사회적 상호작용을 통해 관습과 제도가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관습과 제도는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만큼, 환경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난다고 판단했다. 스코틀랜드 사상가들은 인간 사회의 현상으로부터 원인을 추론하고, 그렇게 추론한 원인으로 다시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적 방법을 공유했는데, 듀갈드 스튜어트는 이를 ‘이론적 역사’(theoretical history)라고 불렀다.

 

그중에서 현대 상업사회를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이론화한 인물은 애덤 스미스였다. 그는 글래스고대학에서 했던 강의를 바탕으로 저작을 출판했는데, 주로 부와 자유, 상업사회에서 정치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지혜를 다루었다. 먼저, 스미스는 『도덕감정론』(1759)에서 상업사회에 맞는 인간의 사회성과 도덕에 대해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이면서도 타인의 행동과 감정을 자신에 대입하는 ‘공감’(sympathy)을 할 수 있다. 공감을 통해 개인은 타인에게 부끄럽지 않고 존경받기를 바라는데, 이는 경험과 학습을 통해 어떤 감정이나 행위가 적절한지를 판단하는 ‘불편부당한 관찰자’로서 양심을 전제로 한다. 양심을 통해 개인은 좋은 행위를 하고 좋은 감정을 표현하고자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규칙을 형성한다. 규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좋은 것이자 장려해야 하는 규칙으로서 ‘자혜’(benevolence)와 하지 말아야 할 규칙으로서 ‘정의’(justice)다.

 

스미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혜보다는 정의에 더 강한 의무감을 가진다.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보았을 때 보편적으로 느끼는 공감의 감정으로서 분노가 일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정의에 관해선 일반적 규칙이 형성되는데, 그것이 바로 ‘법’이다. 즉, 인간 사회는 공감에 기초한 정의를 통해 일반적 규칙으로서 법을 만들고 사회의 질서를 유지한다. 다른 한편, 사회 번영의 원리 역시 공감에 기초한다. 부와 지위는 행복을 주기에 인간은 그것을 추구하고 타인과 경쟁한다. 그러나, 부와 지위에 대한 야심을 추구하는 것은 ‘불편부당한 관찰자’에 의해 형성된 규칙(정의)으로서 공정(fairplay)의 제약을 받는다. 즉, 정의에 의해 제어된 야심과 이익 추구가 사회를 번영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스미스의 정의론은 상업사회에서 인간의 사익추구가 공동체의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기존의 경제관념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스미스는 『법학강의』에서 ‘정의’라는 미덕과 그것에 기초한 정부형태의 역사를 설명했다. 그는 법과 제도의 역사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인류의 생존양식(mode of subsistence)의 진화에 관한 이론적 역사를 정립했다. 스미스는 법이 그 사회가 처한 단계 또는 시대에 따라 다르다고 보았고, 인류의 생존양식의 역사를 수렵, 목축, 농업, 상업의 네 단계로 나누었다. 그는 각 단계를 따라 인류의 역사가 진보한다고 보았다. 특히 상업사회에서는 인간의 거래성향과 교환성향이 자유롭게 발휘되어, 분업을 통한 상호의존성을 수립하여 전체적으로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했다.

 

생존양식 네 단계 중 가장 발전된 사회인 상업사회에서의 풍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책이 바로 『국부론』(1776)이다. 스미스는 국부를 왕실의 재산이나 귀금속 더미가 아니라, 한 나라의 민간이 소유한 전체 부(national wealth)로 여겼다. 그러면서 민간의 부를 공감에 기초한 설득성향과 교환성향의 결과로 보았다. 인간은 서로를 설득하기 위해 언어를 교환하며, 나아가 자신의 소유로서 노동과 타인의 노동을 교환한다. 그리고 더 많은 교환을 위해 생산성을 높이는 과정에서 분업과 자본축적이 발생한다. 분업과 자본축적의 발달은 개인이 타인의 노동생산물로 삶을 꾸리며 ‘모든 사람이 어느 정도는 상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게 되는데, 스미스는 이런 세상을 ‘상업사회’로 정의했다.

 

스미스는 상업사회에서 부의 자연스러운 증진 과정으로서 농업, 제조업, 외국무역으로 이어지는 ‘자유의 자연적 체계’(system of natural liberty)를 설명했다. 그러나 스미스는 실제 유럽의 역사가 농업과 분리된 사치품 제조업, 식민지 개척과 원거리 무역에 의존하며 성장한 ‘비자연적 경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외국과의 경쟁에 우위를 점하기 위해 국가가 특정 제조업자나 상인에게 특혜를 주고 상대국에 규제를 부과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스미스는 부의 원천에 노동과 소비를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개인의 자유로운 경제적 활동에 대한 국가의 규제에 반대했다. 따라서 스미스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식민지 개발에 반대하고, 타국과의 무역 경쟁을 위한 공채 발행에 반대했으며, 미국 독립전쟁에서 미국의 독립을 승인하고 자유무역 조약을 체결할 것을 주장했다.

 

스미스는 당대의 공화주의도 비판했다. 그는 개인의 정치적 행동으로 자유를 유지하라는 애덤 퍼거슨의 주장과 교역으로 인해 시민적 덕성이 타락한다는 루소의 주장에 모두 반대했다. 스미스는 공공선은 ‘일반의지’에 의존하지 않으며, 각 개인의 특수의지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촉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정의와 법이 보장하는 자유 속에서 인간사회가 각자의 이익 추구를 통해 번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국부론』에서 스미스는 상업 발전의 한계로서 정상상태(stationary state)를 언급한다. 스미스는 시장의 제한성과 같은 이유로 이윤율이 하락하여 경제성장이 멈추는 정상상태가 나타나며, 이후 이윤율이 계속 하락하여 퇴보상태(declining state)로 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와 같은 스미스의 도덕철학은 전통적인 ‘도덕경제’를 대체하는 ‘정치경제’로 발전했다. 포터에 따르면, 개인의 행복과 물질적 번영을 연결하며 자기이익 추구를 합리화한 스미스와 계몽지식인의 노력은 점차 성장하던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전통적인 도덕적 반감을 대체했다. 그 결과, 계몽주의는 인간을 공적 미덕이 지배하는 공민이라는 의미의 ‘호모 키빌리스’(homo civilis)에서 개인적인 이기심과 품성이 지배하는 경제인이라는 의미의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로 바꾸었다.

 
 

4. 영국 계몽주의에 대한 도전

 

1) 후기 계몽주의의 내적 도전

계몽주의는 발전한 상업사회를 설명하며 개인의 세속적 행복 추구를 점차 최고선으로 수용했다. 그러나 계몽의 보편성으로부터 ‘배제’되었다는 정체성을 가진 주변적 집단이 점차 계몽주의에 내적 도전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계몽주의는 기존의 이상으로부터 이탈하거나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포터는 1750년 이후 본격화된 이러한 ‘내부의 계몽주의’로서 ‘후기 계몽주의’(late enlightenment)를 소개한다.

 

초기 계몽주의 시대의 지식인은 열정을 종교적 열광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유동적이고 개방적인 사회에서 증가하는 개인의 심적 고통이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고약한 세상을 살아가기엔 너무 감정이 풍부한 인물을 다룬 감성 소설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비정한 세상에 마음의 상처를 입는 남녀를 주인공으로 하는 멜로 소설이 유행했다. 주인공의 곤경과 좌절로 극대화되는 ‘낭만적 사랑’은 많은 사람의 공감과 상상적 동일시를 이끌었다. 지식인 사이에선 소설이 현실과 허구를 혼동하며 사회적 탈선을 일으키는 독자를 키운다는 비판이 커졌다. (물론 메리 헤이스의 『에마 코트니』(1796)나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1813)과 같은 소설은 주인공의 자아 성찰을 통한 정신적 성숙을 보여주며 자아의 이름으로 규범에 도전하는 개인주의를 심화하기도 했다.)

 

감성으로서 소설의 유행은 특히 여성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개인의 해방에도 불구하고 법과 현실에서는 가부장제가 여전히 존재했다. 이러한 모순적인 현실은 많은 여성이 사회에 참여하도록 했다. 1770년대부터 런던에선 여성 토론협회나 혼성 토론협회가 우후죽순 생겼고, 여성 필자가 출판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세기로 넘어갈 무렵엔 거의 모든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여성이었다.

 

여성 지식인이 늘면서 다수의 계몽지식인은 여성교육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도 동등한 이성적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여성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성교육이 어떤 교육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캐서린 매콜리는 성품에는 성적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며 남녀 공통교육을 옹호한 반면, 메리 에스텔은 여성 고유의 관조적 영혼을 육성하기 위해 여성만의 교육기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기존 여성교육의 결함을 지적하며 종속적인 여성교육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성 문제와 함께 인종과 종족 문제가 여러 도덕적 논란을 야기했다. 영국이 해외로 팽창하면서 아프리카나 서인도제도에서 여러 부족을 발견함에 따라, 이들을 연구하는 인류학이 발전했다. 인류학은 대체로 원시에서 문명으로 인간이 진보한다고 보았고, 비유럽인 원주민은 진보하지 못하고 정체된 것으로 여겼다. 계몽지식인들은 한편으로 비유럽인 원주민을 멸시하면서, 문명화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이들에 대한 식민지배를 정당화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예속에 대한 비판으로서 노예제 비판이 점차 거세졌다. 원주민에 대한 양가적 태도는 후기 계몽주의 일각에서 문명을 비판하며 원주민을 ‘고귀한 미개인’으로 낭만화하는 경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포터는 계몽주의가 마주한 더 큰 난제로 ‘민중’ 문제가 있었다고 강조한다. 초기 계몽지식인은 대체로 진보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갖고 민중 문제에 접근했다. 《스펙테이터》나 《젠틀맨스 매거진》과 같은 잡지는 ‘교양인’을 소개하면서, 민중 역시 미래에 교양인이 되기를 촉구했다. 또한, 토머스 베도스와 같은 계몽지식인은 민중의 거친 습관을 교정하기 위해 음주와 매춘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펼쳤다. 동시에, 계몽지식인은 강력한 처벌이 아니라 갱생과 감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아이가 교육을 통해 성장한다는 로크의 관념을 바탕으로, 민중 역시 교육으로 성장할 수 있다고 보며 향상심을 강조했다.

 

그러나 민중 역시 계몽될 수 있다는 믿음은 극빈층 구제 정책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졌다. 잉글랜드는 1601년부터 구빈법으로 빈민을 구제하고자 했으나, 갈수록 빈민이 늘어나고 이들을 관리하는 비용이 크게 늘면서 여러 비판이 제기되었다. 점차 빈민의 게으름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구호의 조건으로서 노동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구빈원 노역소의 노동생산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빈민 구제 정책에 대한 비판은 더욱 커졌다. 조지프 타운센드의 『구빈법 논고』(1786)는 인구과잉이 문제라고 지적하며, 빈곤을 구제하기 위한 정부의 개입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킨다고 주장했다. 그의 비판은 맬서스의 『인구론』(1798)에서 더욱 구체화 되었다. 맬서스는 빈곤층을 줄이기 위해선 장기적으로 빈민 구제책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프랑스혁명의 외적 도전

후기 계몽주의는 점차 1688년 명예혁명으로 성립된 질서 자체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마지막 30년간 이어진 정치적 억압, 사회적 부패, 산업화로 인한 불평등의 확대는 영국의 체제에 대한 많은 비판을 낳았다. 무엇보다 정치적 급진주의가 등장했다. 1776년 아메리카 식민지의 독립선언은 급진 지식인이 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이들은 신생 공화국인 미국을 새로운 미래 사회의 모델로 간주하면서 영국의 헌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80년 설립된 헌정 지식 촉진 협회의 대표적 활동가였던 존 카트라이트는 『선택하라』(1776) 소책자를 발간하고 연례의회, 무기명 투표, 남성 보통선거와 같은 급진적 강령을 주장했다. 이들의 강령은 1785년 윌리엄 피트 수상의 의회개혁법안으로 이어졌다.

 

프랑스혁명은 영국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반대와 비관의 목소리로 심화했다. 프랑스혁명 초기 민중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을 때만 해도, 다수의 영국 지식인은 절대왕정에 종지부를 찍은 1688년 명예혁명이 프랑스에서도 일어난다고 보고 환호를 보냈다. 예를 들어, 리차드 프라이스는 명예혁명을 기리는 연설에서 “갈수록 커져가는 빛과 자유에 맞서려고 더 이상 애쓰지 마시오. 인류에게 권리를 회복시키고 악폐를 시정하겠다고 동의하시오”라고 외치며 프랑스혁명을 지지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내 프랑스혁명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은 에드먼드 버크였다. 버크는 『프랑스혁명에 관한 성찰』(1790)에서, 프랑스혁명의 본질이 문명이 아니라 파괴와 분노임을 지적했다. 그는 “일정한 변화의 수단이 없는 국가는 그 보존의 수단도 없다.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모두가 합의하는 것이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프랑스가 그간 쌓아올린 문명을 프랑스 혁명가가 앞장서서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버크의 비판은 여러 급진주의 지식인의 비판을 받았다. 대표적 인물은 토마스 페인이었다. 페인은 『인간의 권리』(1791)에서 프랑스 구체제의 부패를 폭로하고 이에 맞선 인민의 대의를 옹호했다. 그는 모든 시대와 세대는 각자 독자적으로 행동할 자유가 있으며, 주권은 궁극적으로 인민에게 있으므로 귀족 중심의 정부를 남성 보통 선거권에 기초한 대의 정부로 교체할 것을 주장했다.

 

이후 프랑스 혁명가와 민중이 루이 16세를 처형하고 영국에 혁명 전쟁을 선포하자, 영국 내의 급진주의자들은 궁지에 몰렸다. 게다가 프랑스에서 이어진 산악파의 공포정치는 기존에 프랑스혁명을 지지하던 이들이 더 이상 혁명을 지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프랑스혁명이 영국에 미칠 여파를 우려한 피트 수상과 의회는 자코뱅주의가 영국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영국은 1794년 4월, 인신보호법 발효를 정지하고 토마스 하디와 같은 급진주의 지도자를 반역죄로 기소했으며 공공 집회를 금지했다. 1795년에는 밀 가격이 급등하면서 불경기가 닥쳤고, 1798년 아일랜드에서 자코뱅파와 협력한 반란이 일어나면서 혼란이 계속됐다.

 

포터는 프랑스혁명이 촉발한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공포가 영국 계몽주의에 대한 여러 이데올로기들의 도전과 분화로 나타났다고 본다. 한쪽에선 급진주의가 등장했다. 급진주의자들은 계몽의 특정한 논리를 극단으로 밀고 나가면서, 역설적으로 계몽을 거부했다. 예를 들어, 고드윈은 정부의 폐지를 추구했다. 그는 개인적 판단에 대한 침해는 모두 전횡이므로 최소화되어야 하며, 개인의 이성이 유일한 입법가라는 결론을 내렸다. 토머스 스펜스는 공동소유권을 생득권이라고 주장하면서 사유재산을 비판하고 토지를 국유화할 것을 주장했으며, 기존의 알파벳이 소수의 전유물이기에 평등주의적 원칙에 근거한 알파벳으로 개정하자고 제안했다.

 

다른 한편, 영국의 질서와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무한한 진보라는 계몽주의의 가치에 의문을 제기하는 보수주의가 등장했다. 버크는 원자론적 개인주의에 맞서 협조적 전통주의를 주장했고, 영구적인 진보가 가능하다는 관념을 비판했다. 그러나 버크가 계몽주의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버크는 1688년 명예혁명으로 정착한 개인적 자유를 핵심 가치로 하는 영국의 헌정질서와 안정된 상업질서로 구성되는 ‘문명’을 지키고자 했다. 진보를 수용하되 그에 수반된 파괴적 측면을 경계하고, ‘문명’의 보수와 ‘향상’을 목표로 했던 것이다. 즉, 버크는 계몽주의의 준거가 되는 명예혁명을 바탕으로 프랑스혁명을 비판한 것이다.

 

“통치에 위대한 원리들이나 자유에 대한 생각들에서 새로운 발견은 거의 없었으니, 그것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해되어온 것이다”고 말한 버크는 영국 헌정의 역사성을 강조하면서, 이와 대비되는 프랑스혁명의 자의적인 통치자 선택과 파면이야말로 또 다른 형태의 종교적 열광일 따름이라고 비판했다. 극작가이자 브리스틀 교사였던 해나 모어는 프랑스혁명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 『폭동: 빵 반 덩어리가 빈손보다 낫다』(1795)에서 페인으로 대표되는 급진주의자를 조롱하며 잉글랜드의 법과 자유를 옹호했다.

 

톰 : 난 자유를 원해

잭 : 자유? 누가 자네한테 영장이라도 발부했대? 이봐, 기운내, 자네가 대체로 정직한 사람이라는 건 내가 틀림없이 보증하지. 물론 로즈 앤드 크라운에서 술을 마시고 말을 너무 많이 하긴 하지만 말이야

톰 : 아니, 아니. 난 새로운 헌정체제(constitution)를 원해.

잭 : 그래? 난 자네가 끝내주게 건강한 체질(constitution)인 줄 알았는데? 그럼 얼른 의사를 불러야겠네.

톰 : 아픈 게 아니야. 나는 자유와 평등, 인간의 권리를 원한다고

잭 : 아, 무슨 말인지 이제 알겠군. 자넨 수평파(영국 내전기의 급진파)이자 공화주의자이구먼! 틀림없어. (책 704쪽)

 

계몽주의에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 인물은 맬서스였다. 맬서스는 『인구론』에서 인류의 완전성을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무한한 진보는 내재적으로 파멸을 낳을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며, 계몽주의에 맞서 자신을 현실주의자로 내세웠다. 진보적 낙관에 대한 회의는 19세기를 전후로 계몽주의가 마주하기 시작한 난제였다. 이렇듯, 프랑스혁명을 거치면서 영국의 계몽주의 이데올로기들은 수많은 새로운 이데올로기들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계몽’이라는 구호가 더는 선전되지 않았다. 포터는 이에 따라 그간의 계몽주의 역사서술에서 영국 계몽주의가 저평가되었다고 본다.

 

3) 소결: 영국 계몽주의의 장기지속

포터는 영국에서 계몽주의가 도전을 받았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유럽 대륙의 계몽주의와 구별되는 영국 계몽주의의 특징을 두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영국 계몽지식인은 근대세계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일단 계몽을 이룩한 뒤에 세속적으로 개혁 질서를 구체화하며 이를 옹호하고자 했다. 둘째, 공적인 덕성을 강조하는 공화주의를 비판하며 개인의 삶과 자유, 개인의 완전한 자기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포터는 이러한 영국 계몽주의의 두 가지 핵심 특징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영국 사회에 깊숙이 뿌리박혔다고 강조한다. 자본주의에 대한 세속적 정당화는 19세기에도 사회 개량적이고 도덕적으로 교화된 미래를 약속하며 자유주의와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로 이어졌고, 이후의 현실 변화에 맞춰 지속적으로 변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터는 계몽주의가 단순한 ‘진보’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모순과 투쟁의 이야기였다고 언급하며 글을 마친다.

 

포터가 계몽주의의 역사에서 강조하고자 한 영국 계몽주의는 뉴턴과 로크의 사상과 1688년 명예혁명의 질서를 기초로 형성되어, 애덤 스미스로 대표되는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로 발전한 사상체계다. 상업사회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사회의 진보와 개인의 향상심의 조화를 추구하는 영국 계몽주의는, 상업사회를 진보와 발전이 아니라 타락으로 보고 공공선과 공적 덕성을 강조하는 공화주의를 수용한 프랑스 계몽주의와 달랐다. 양자의 차이는 프랑스혁명과 그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프랑스는 ‘공화국’으로 대표되는 인민 전체의 의지로서 ‘일반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구체제와 장기간의 내전을 지속했다. 왕정과 공화정이 반복적으로 교체되는 가운데,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고 경제 발전 역시 지체되었다. 반면, 영국은 내전기와 프랑스혁명에서 나타난 혁명과 반혁명의 공포에 대응해 ‘개인’과 ‘세속적 삶’이라는 영국식 계몽주의의 핵심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변화한 정세에 맞는 개혁을 통해 계몽주의에서 자유주의로의 이행을 본격화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영국은 곡물법을 폐지하고 금본위제를 도입하면서 경제적 자유주의를 완성했고 자본주의의 발전을 촉진했다. 또한, 선거법을 개정하고 정당정치를 발전시키며 헌정 개혁 요구에 대응했다. 그 결과, 산업자본주의와 자유주의적 헌정을 안착하는 데 성공한 영국은 19세기 세계 자본주의의 표준이자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었다. 나아가, 영국의 계몽주의는 장기 18세기 영국을 넘어 현대사회에서도 보편적 기준인 ‘현대성’으로 자리 잡았다.

 
 

5. 결론: ‘혁명의 문명화’를 위하여

 

포터가 강조하는 영국 계몽주의의 ‘현대성’은 오늘날 크게 위협받고 있다. 자본주의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등장한 신자유주의 정책개혁 역시 한계에 다다르면서, 정치는 정책 합의나 쇄신보다는 당파적 분노를 자극하며 양극화되었다. ‘지켜야 할 과거’와 ‘밝혀갈 미래’ 모두 희미해지면서, 변화 자체에 대한 공포가 커졌다.

 

이런 가운데 인민주의는 ‘인민주권’을 앞세우며 시민적 자유로 대표되는 현대성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역시,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사회상은 없어진 채, 음모론과 공포가 만연하다. 사회가 진보할 수 있다는 신뢰가 사라지고 개인의 발전과 향상이 공포에 기반한 집단적 행동으로 대체된다면, 내전적 상황이 장기화하며 사회 전체가 퇴행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극단적 갈등을 감축하고 사회가 다시금 진보하기 위해선 공포를 넘어서는 혁신이 필요하다. 그리고 혁신의 기준으로 현대사회의 핵심이자 명료한 준칙인 ‘기본권’과 그 바탕인 계몽주의에 주목해야 한다.

 

계몽주의에 주목하는 이유는 한국의 현대사가 현대성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역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19세기 후반 대내외적으로 국가 존립이 위태로운 위기 상황에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계몽’보다는 ‘구망’(救亡,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그렇기에 자유, 정의, 민주주의와 같은 현대적 사상과 제도를 도입하면서도, 그 근간이 되는 계몽주의를 충분히 검토하고 숙지하지 못했다. 특히 개화기 한국과 중국의 지식인은 전제정에 맞서는 과정에서 공동의 덕성을 강조하는 공화주의에 대한 공감대가 넓었다. 그 결과,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우선시되었으며, 개인에 기반한 권리의식은 부차화되고 국가에 의한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했다. 최근 한국 정치가 내전에 가까운 상태로 치달은 것도 이러한 현대성이 미약한 가운데, ‘국가 존망’의 관점을 앞세워 정치를 토론이 아닌 투쟁의 장으로 사고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 계몽주의의 역사를 살펴보면, ‘구망’과 ‘계몽’이 반드시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영국 역시 내전을 겪었고, 내전 후에도 갈등이 있었다. 그러나 내전을 반복하지 않고자 한 계몽지식인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고 합의하고자 했다. 영국의 계몽지식인은 종교나 주권을 비롯한 집단의 가치를 앞세워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탄압했던 역사가 장기간의 복수와 분노로 이어졌음을 알았기에, 정의의 제약하에 다양한 개인이 공존할 수 있는 시민사회를 강조했다. 나아가, 개인이 향상심을 바탕으로 능력을 발전시키고 부를 창출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해시키고자 했다. 영국 계몽주의는 개인을 중심에 두고 사회와의 공존을 지향했다는 점, 입헌정치와 자본주의 경제라는 구체적인 현실을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여러 도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은 1688년의 명예혁명을 선언이 아닌 현실로 만들며 ‘혁명의 문명화’를 이루어냈다.

 

이는 최근 한국이 마주한 위기에도 시사점을 준다. 내전적 정치 문화가 심화하면서 현대성의 근간인 개인주의의 원리와 원칙이 부차화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선 계몽주의의 원칙을 제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회의 집단적 가치는 개인이라는 가치와 집단으로서 인류의 진보와 조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정치적 이견은 제로섬 게임을 전제하는 비방의 대상이 아니다. 더 나은 대안을 위한 토론을 거쳐 개인과 집단의 더 나은 성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는 언제나 추상적 관념이 아닌 구체적 현실의 제도와 관습을 대상으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가 로크의 소유적 개인주의를 비판하면서도, 개인의 완전성을 실현하기 위해 개인적 소유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재건’하는 것을 지향했음을 고려한다면,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자도 영국 계몽주의가 주는 교훈을 숙고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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