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어떻게 실패하는가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관점에서 살펴본 대만과 한국의 헌정사 비교
1. 들어가며
지난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사태 이후 한국정치의 극심한 혼란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그런 가운데 한편에서는 국회의 신속한 비상계엄 해제 결의와 시민의 새로운 광장 정치 문화를 상찬하며 한국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권위주의와 우파 포퓰리즘의 부상을 강조하며 한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빠졌다고 우려한다. 언뜻 보아 엇갈리는 듯한 한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평가들을 어떻게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중첩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민주화 내지는 민주정의 발전을 평가할 필요가 있다. 보통 한국의 민주화는 1980~90년대 탈냉전기에 나타난 세계적인 ‘제3의 민주화’ 물결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군부독재 또는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라는 틀로 설명된다. 이러한 틀에서 민주화를 가늠하는 핵심 지표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민주주의의 확대’다. 즉, ‘민주화’란, 기본적으로 정치적 다원성을 부정하면서 보통선거에 의한 통치자의 교체를 완전히 또는 상당히 제한하는 기존의 정치체제에서, 민의를 반영하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정치체제로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기준으로 할 때, 아시아에서는 한국과 대만, 필리핀과 태국이 비슷한 시기에 민주화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내지는 민주정의 발전은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민주주의의 확대만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사실, 2000년대 이후 많은 민주화 연구는 ‘제3의 민주화’ 물결로 민주화에 성공한 대다수 나라가 ‘민주주의 공고화’로 나아가는 데에는 실패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필리핀은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직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유력 정치가문과 정치엘리트가 다시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민주정이 과두정으로 변질된 것으로 평가된다. 태국은 2006년 군부쿠데타로 민주정이 다시 전복되었으며, 이후에도 반정부시위와 군부의 정치개입이 지속되면서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대만과 한국은 민주정이 아직까지 본질적으로 변질되거나 전복된 것은 아니지만, 국제정세의 변화 속에서 국론분열과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는 가운데 통치구조를 비롯해 정치문화와 시민의식의 측면에서 민주주의 발전이 정체되거나 심지어 퇴보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그렇다면 왜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가 민주주의를 공고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거나 위기에 빠지는 것일까? 헌정주의 비교연구는 ‘헌정주의 없는 헌법’이라는 관점에서 이를 설명한다. 즉, 많은 나라가 헌법은 제정하지만, 정작 그 근간이 되는 헌정주의를 헌법에 반영하지 못하고 실제 정치과정에서 헌정주의를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민주정의 위기와 퇴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민주정이 질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헌정주의에 대한 정치엘리트와 시민사회의 확고한 이해와 실천이 필요하다.
나아가, 이러한 관점은 2007~09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경제위기와 정치위기가 만성화하는 가운데, 한편으로 인민주권을 절대화하며 비(非)자유주의적 민주정을 지향하는 인민주의가 발호하고 다른 한편으로 북한·중국·러시아를 중심으로 자유주의에 도전하는 권위주의 정권이 강화되는 최근 국내외 정세에서 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권력의 자의적 권한행사를 법의 지배, 정치제도, 관습으로 제한하는 헌정주의가 미약한 민주정은 인민주의와 권위주의의 도전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에 우리에게 익숙한 ‘민주화 관점’을 넘어, ‘헌정주의 관점’에서 민주정의 발전과 위기를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이 글은 먼저 헌정주의 비교연구가 구별하는 헌법과 헌정주의의 종류를 정리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역사적 과정과 지정학적 조건이 한국과 유사한 대만의 헌정사를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헌정주의 없는 헌법’이라는 관점에서 대만헌정사와의 비교를 통해,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와 민주정의 위기를 평가하는 시사점을 도출해본다.
2. 헌정주의 없는 헌법?
1) 헌정주의란 무엇인가
‘헌정주의 없는 헌법’은 20세기, 특히 2차 세계전쟁 전후로 아프리카, 중동,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지역의 신생독립국이 헌법은 제정하지만 정작 그 헌법에 헌정주의를 반영하지는 못하는 문제를 설명하는 표현이다. 쉽게 말해, 헌법을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만, 그 헌법을 헌정주의에 부합하도록 만들고 실제로 그에 따라 통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헌정주의(Constitutionalism)란 무엇일까? 지난 겨울호 글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듯, 헌정주의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통치 및 공동체의 모든 생활이 헌법에 따라서 영위되어야 한다는 정치원리”다. 여기서 통치가 ‘헌법에 따라서 영위되어야’ 하는 이유가 중요하다. 영국에서 헌정이 발원하고 발전한 역사를 살펴보면, 국왕의 자의적 권력 행사를 제한함으로써 영국인의 타고난 권리(인신·사상·소유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방지하는 것이 ‘헌정’이고, 그 핵심 원칙 중 하나가 ‘법의 지배’(rule of law)이며, 이를 제도화하고 재생산하기 위해 의회가 최고의 주권기관으로서 입법권을 행사하는 ‘의회의 지배’가 공고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헌정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인신, 사상, 소유를 침해받지 않을 자유라는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권력의 자의적 행사를 입법과 정치제도와 관습으로 제한하는 헌정을 지향하는 것이다.
미국은 이러한 영국의 헌정을 계승하면서도, 인민주권을 반영하는 한편 입법·행정·사법의 삼권을 보다 명확히 분립하고 이를 성문화한 ‘헌법’을 제정했다. 이는 주권자인 인민이 선거와 정치참여(그리고 최종적 수단으로서 저항권 행사)를 통해 자신이 선출한 대표자를 문책할 수 있는 권한을 헌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이는 한편, 삼권을 각기 다른 기관에 부여해 견제와 균형을 추구하는 권력분립제도를 명시함으로써 헌정주의를 더 명확하게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볼 때, 미국 헌정의 핵심은 법의 지배 원리를 정부에 적용하는 ‘법적 헌정주의’와, 양원제·권력분립·연방제를 통해 정치적 의사결정을 제도화하고 행정부가 입법부와 유권자에 소명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정치적 헌정주의’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 헌정 모델은 19세기 유럽을 거쳐 20세기 세계 전반에 확산되어, 오늘날 거의 모든 국가가 헌법을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헌법은 ‘정부를 구성하고 설정하는 한편 정부의 자의적인 권력 행사를 제한하는 근본적인 성문법’이라는 본래의 목적 이외의 목적으로 도구화되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말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인해, 대내적으로는 피지배층의 도전에 의해 위협받는 왕조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통치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최고통치자(군주)가 헌법을 제정하고 이를 신민에게 하사하는 ‘흠정헌법’(欽定憲法)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2차 세계전쟁 전후로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의 탈식민화로 탄생한 많은 신생 국가가, 새로 획득한 주권과 독립을 선언하고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헌법을 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헌법은 인민의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거나 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문제의식과 실질적 작동방식을 결여한 채, 통치자의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2) 뢰벤슈타인과 사르토리의 헌법 분류
이러한 ‘헌정주의 없는 헌법’이라는 문제를 자세히 규명하기 위해, 헌법학 연구에서는 헌정주의를 기준으로 하여 다양한 헌법과 헌정의 종류를 구별하고 비교하는 시도가 나타났다. 예를 들어, 20세기 초 독일의 법학자 카를 뢰벤슈타인은 헌법 규범과 실제 현실 사이의 일치 정도를 기준으로 헌법을 △ 규범(normative) 헌법 △ 명목(nominal) 헌법 △ 의미론적(semantic, 또는 모조) 헌법으로 분류했다.
먼저, ‘규범 헌법’은 앞서 설명한 헌정주의 관점에 충실하며 실제 정치적 과정의 역학에서 효과적으로 준수되는 살아 있는 헌법이다. 다음으로, ‘명목 헌법’은 조문 자체는 훌륭하지만, 국가가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한계로 인해 실제 현실에서는 준수되지 않는 헌법이다. 다만 뢰벤슈타인은 통치자와 피치자가 궁극적으로는 규범 헌법을 지향하고 기대할 경우, 명목 헌법은 규범 헌법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교육적 목표가 있는 헌법이기도 하다고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의미론적 헌법’은 (명목 헌법과 정반대로) 현실에서 실제로 완전히 적용되지만, 그것이 정치권력의 자의적 권한행사를 제한하는 헌정주의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통치자의 권력을 공고화하고 영구화하는 도구로 쓰이는 헌법이다.
20세기 말 이탈리아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 역시, 뢰벤슈타인과 비슷한 맥락에서 헌법을 △ 보장 헌법(garantiste, 또는 본연의[proper] 헌법) △ 명목 헌법 △ 가장 헌법(façade, 또는 가짜[fake] 헌법)으로 분류한다. 먼저, ‘보장 헌법’은 뢰벤슈타인의 규범 헌법과 같은 의미다. 다음으로, 사르토리의 ‘명목 헌법’은 뢰벤슈타인의 (명목 헌법이 아니라) 의미론적 헌법과 같은 의미다. 즉, 현실에서 실제로 작동하지만, 헌정주의와는 관련 없이 제한되지도 통제되지도 않는 권력 체계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헌법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헌법’은 겉으로는 ‘진정한 헌법’의 모습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함정 헌법’인 것을 의미한다. 즉, 조문은 흠잡을 데 없지만, 실제 현실에서 자유를 보장하는 제도와 정치문화가 부재하기 때문에 그저 죽은 글자에 불과한 헌법을 말한다.
[표] 뢰벤슈타인과 사르토리의 헌법 분류
뢰벤슈타인과 사르토리는 헌법 규범(헌정주의)의 존재 여부와 실제 현실 적용 여부를 기준으로 헌법을 분류한다. 여기서 ‘헌정주의를 따르지만 실제 현실에서 적용되지는 않는 헌법’에 주목해볼 수 있다. 뢰벤슈타인의 명목 헌법은 여러 현실적 조건으로 인해 헌정주의가 미처 실현되지 ‘못하는’ 상태이므로 통치자의 선의를 전제로 하여 향후 규범 헌법으로 발전할 수 있는 교육적 효과가 있는 헌법을 말한다. 반면, 사르토리의 가장 헌법은 통치자가 헌법을 준수할 의지가 없어서 헌정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상태이므로 본질적으로 위장에 불과한 헌법을 말한다. 물론 현실에서는 사르토리가 말하는 명목 헌법과 가장 헌법이 종종 중첩되는 사례도 많을 것이다.
뢰벤슈타인의 명목 헌법과 사르토리의 가장 헌법은 인권 보호, 권력분립, 정기적인 의회와 선거, 법치주의, 사법부 독립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다지 준수되고 실행되지 않는 경우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헌정주의 없는 헌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 정부가 법 집행 능력이 없거나, △ 행정부에 비해 입법부와 사법부가 실질적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거나, △ 정당이 미약하고 헌법적 절차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거나, △ 헌법 시행을 감시하고 촉진할 독립적인 언론이나 시민사회가 미약하거나, △ 기존 권력 보유자가 헌법의 절차나 제도를 조작하여 권력을 유지하려는 경우를 말한다.
다만, 뢰벤슈타인의 명목 헌법과 사르토리의 가장 헌법은 그러한 헌법 규범과 현실의 불일치가 나타나는 원인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해당 국가의 실제 사회경제적 조건이 미비하여 헌정주의가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는 (따라서 향후 규범 헌법으로 발전할 기대와 교육적 효과가 있는 헌법은) 뢰벤슈타인의 명목 헌법에 해당한다. 반면, 권력 보유자나 통치자가 헌법을 준수할 의지가 없는 경우는 (따라서 교육적 효과는 없으며 본질적으로 위장에 불과한 헌법은) 사르토리의 가장 헌법에 해당한다. 물론 사르토리 역시, 현실에서 명목 헌법과 가장 헌법이 상당히 중첩되는 혼합형 유사 헌법도 종종 존재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3) 아시아의 민주화와 헌정주의
2000년대 이후 홍콩의 헌법학자 앨버트 첸(陳弘毅)은 이러한 뢰벤슈타인과 사르토리의 헌법 분류를 바탕으로, 주로 21세기 아시아 지역에서 헌정주의의 성취를 평가하기 위해 헌정주의 또는 헌법과 관련된 실천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는 ‘진정한 헌정주의’(genuine constitutionalism, GC)다. 이는 뢰벤슈타인의 규범 헌법과 사르토리의 보장 헌법에 해당하는데, 헌정주의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성취한 정치체제를 의미한다.
둘째는 ‘공산주의/사회주의 헌정주의’(communist/socialist constitutionalism, CC)다. 이는 뢰벤슈타인의 의미론적 헌법과 사르토리의 명목 헌법의 구체적 사례라고 할 수 있는데,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에서 유래한 당-국가에 의한 통치체제와 이를 정당화하는 성문헌법을 의미한다. (첸은 권력의 자기제한과 견제장치가 없다는 점에서 이를 ‘헌정주의’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셋째는 ‘혼합 헌정주의’(hybrid constitutionalism, HC)다. 이는 헌정주의 내지는 자유주의 요소와 권위주의 요소가 공존하는 것으로, 당의 통제를 받지 않는 정치·경제·사회 영역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사회주의 헌정주의’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뢰벤슈타인의 명목 헌법과 사르토리의 가장 헌법 내지는 혼합형 유사 헌법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첸은 1990년대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탈냉전이 이루어진 이후 오늘날에 이르는 세계에서는 ‘진정한 헌정주의’가 사실상 자유민주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고 말한다. 이에 따라, 그는 이 시기 아시아 지역에서 이루어진 민주화란,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사회주의 헌정주의’ 또는 ‘혼합 헌정주의’에서 ‘진정한 헌정주의’로의 전환, 달리 말해 당-국가 체제 또는 권위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동시에, 첸은 그러한 민주화 과정에서 헌정주의와 민주주의가 많은 부분 중첩되지만, 결코 동일하지는 않은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인민주권을 바탕으로 인민의 자기통치와 자기결정에 따라 정치를 행하는’ 사상이자 제도다. 특히, 일당독재, 군부독재, 권위주의 정권에서 억압되었던 정치적·시민적 자유를 추구한 아시아의 민주화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지를 반영하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확립과 확대를 주로 의미했다.
반면, 헌정주의는 ‘헌법에 따라 정치권력의 행사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제도를 설계하고 실제로 정치과정에서 이를 운영하는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헌정주의 비교연구는 △ 입법부와 행정부의 관계 △ 법치주의와 사법부 독립성 △ 헌법심사 △ 정당제도와 선거제도를 중심으로, 헌법과 그에 따른 실제 정치과정이 주권자의 자의적인 권한 행사를 제어하고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지에 주목한다. 첸은 이러한 관점에서 2000년대를 전후로 아시아 15개 국가와 1개 사법권(홍콩)에서 헌정주의의 성취를 검토하면서, 아시아 역시 명목헌법 내지는 가장헌법의 문제, 즉, ‘헌정주의 없는 헌법’이라는 문제를 넘어설 과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 |
1889년 메이지헌법 제정부터 2차 세계전쟁까지 일본의 헌정은 ‘혼합 헌정주의’(HC)라고 할 수 있음. 메이지헌법은 천황이 신민에게 하사한 것으로서, 주권을 인민이 아니라 천황에게 부여했고 시민적, 정치적 권리는 엄격하게 제한됨. 동시에, 헌법에 따라 의회가 설립되었고 영국식 의원내각제가 안착됨. 그러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30년대에는 사르토리의 ‘가짜 헌법’에 가까웠음. 2차 세계전쟁 이후 1949년 제정된 새로운 헌법은 인민주권, 의회주의, 인권, 사법심사, 평화주의를 긍정함. 이는 현대에 가장 오랫동안 살아남은 헌법 중 하나이며, 현실에서 완전히 실행되고 있다는 점에서, ‘혼합 헌정주의’(HC)에서 ‘진정한 헌정주의’(GC)로 진보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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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
한국은 1948년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했으나, 40년간 9번의 개헌을 경험함. 이 기간에 헌법은 대체로 민주주의, 헌정주의, 권위주의가 섞인 ‘혼합 헌정주의’(HC)라고 할 수 있음.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결과 달성한 1987년 자유민주주의 헌법은 대통령직선제와 헌법재판소를 도입함. 2000년대 이후 헌법재판소가 부상하면서 높은 수준의 헌법적 적극주의를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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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
대만은 1980년대 말부터 ‘혼합 헌정주의’(HC)에서 ‘진정한 헌정주의’(GC)로 이행하기 시작함. 1991년부터 2005년까지 7차례의 헌법개정은 국가의 성격과 구조를 상당히 크게 바꾸면서 조용한 혁명을 달성함. 2000년대에 분점정부 상황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갈등에서 헌법재판소가 판단을 내리는 일이 잦아지면서 높은 수준의 헌법적 적극주의를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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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지화되지 않은 국가인 태국은 1932년 입헌군주정을 실시함. 태국의 헌정사는 군사통치와 민간통치 간의 잦은 진동으로 요약할 수 있음. 이 과정에서 17개의 헌법이 등장했다가 사라졌음. 1997년 헌법은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헌법이자 광범위한 국민적 합의에 따라 제정된 헌법이었지만, 2006년 군사쿠데타로 폐기됨. 2007년 새 헌법과 함께 민간정부가 등장했으나, 군부의 정치적 영향력이 여전히 강하고 민주화 운동의 주역인 탁신을 둘러싼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의 지속적이고 폭력적인 대립이 심각함. 이런 점에서, 태국은 군부 쿠데타의 위협 속에서 위태로운 ‘혼합 헌정주의’(HC)라고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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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
필리핀은 미국의 영향력 하에서 1935년 헌법을 제정함. 1946년 독립 이후 25년 간의 자유민주주의 실험은 1972년 마르코스의 비상계엄령 선포로 중단됨. 1986년 ‘피플 파워’ 혁명 직후 1987년 아키노 대통령 집권기에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새롭게 제정함. 이후 정기적인 선거가 치러지긴 했지만, 정치적 불안정이 이어짐. 2001년 또 다른 ‘피플 파워’ 시위 이후 아로요 대통령 집권기에 선거 조작 논란, 의회의 탄핵 시도, 쿠데타 시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아로요 대통령은 견제와 균형을 무너뜨리는 네 차례 비상계엄을 선포함. 이 시기에 대법원은 정치적으로 논쟁적인 사안에 대한 판단을 요청 받았음. 필리핀은 ‘진정한 헌정주의’(GC)에 가깝지만, 피플 파워 혁명과 쿠데타 시도를 고려할 때 ‘혼합 헌정주의’(HC)라고 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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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
인도네시아는 자유민주주의 전후로 권위주의 지배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필리핀과 유사함.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후 헌법을 공포하고 의회 제도를 확립함. 그러나 1957년 수하르토가 계엄령을 선포한 이후 권위주의 통치 기간이 1998년까지 이어짐. 1955년 이후 처음으로 1999년에 자유선거가 다시 실시되었으며, 2002년까지 헌법수정을 통해 자유민주주의 헌법을 지향함. 2004년 대선으로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짐. 인도네시아는 가장 인구가 많은 무슬림 국가 중 하나인데, 정치행위자가 종교적 갈등을 비폭력적이고 헌법적인 과정을 통해 해소하겠다는 약속을 비교적 잘 지키고 있음. 이런 점에서 인도네시아는 ‘혼합 헌정주의’(HC)에서 ‘진정한 헌정주의’(GC)로 이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아직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말하기에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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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아시아 주요국 헌정주의에 대한 첸의 비교 요약
3. 대만헌정사 ①: 대만의 민주화와 헌법개정
대만은 한국과 큰 틀에서 비슷한 현대사를 경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해방 이후 일종의 분단을 겪었으며, 미국의 역개방 정책을 바탕으로 수출지향공업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서 민주화로 이행하는 과정을 밟으며 오늘날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특히 헌정주의 연구의 관점에서, 대만의 민주화와 그 이후의 헌정사는 한국의 사례와 비교할 때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만의 민주화 과정과 그 이후 민주주의 발전 여부를 분석하며 이를 한국과 비교하려는 시도는 20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이러한 시도 대부분은 대만과 한국에서 공통적으로 민주화 이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지체되고 있다는 우려를 바탕으로,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먼저 지난 겨울호에서 살펴본 한국헌정사의 요지를 정리하고, 한국의 1987년 개헌 국면과 비교할 수 있는 대만의 민주화 과정과 그에 따른 개헌 과정을 살펴본다.
1) 헌정주의를 결여한 한국헌정사
지난 겨울호에서는 헌정주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국헌정사를 검토했다. 구체적으로는 제헌 시기, 내각책임제 정부였던 제2공화국 시기, 1987년 개헌과 현행 헌법 체제의 성립 시기를 중심으로,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제도적 결함에 주목하며 한국 정치의 위기를 분석하고자 했다. 한국헌정사에서 제왕적 대통령제의 원형은 해방과 분단 이후 제헌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당시에 헌정주의에 따른 제헌 논의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분단과 극심한 사회적 혼란이라는 상황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강력한 대통령제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관철된 것이다. 이후 한국전쟁을 전후로, 이승만 대통령은 경찰과 반공주의 대중운동을 동원해 국회를 무력화하고 권위주의적 독재로 나아갔다.
1960년 4·19혁명은 이러한 이승만 정권을 타도했고, 6월 개헌으로 내각책임제의 제2공화국이 수립됐다. 그러나 민주당 신파와 구파가 심각하게 분열하여 갈등하는 가운데, 이승만 정권 시기의 반민주 행위자를 처벌하는 문제를 두고 ‘혁명 주체’의 의지를 받들어 소급입법에 따라 범법자를 처벌하는 것을 금지하는 헌법 23조 규정을 무효로 하는 헌법개정이 필요하다는 강경파가 득세했다. 혁명 세력이 혁명 완수를 명분으로 상대 세력을 사실상 절멸하기 위해 소급입법까지 가능케 한 것은, 실상 시민에 대한 국가의 강압과 다수에 의한 소수의 권리 침해를 법의 지배를 통해 방지하고자 하는 헌정주의와 대립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민주주의와 헌정주의 사이의 혼란과 주요 정치세력의 극심한 갈등 속에서 제2공화국은 이내 5·16 군사쿠데타로 무너졌다.
이후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내각제는 더 이상 대안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박정희의 유신체제와 전두환 신군부의 독재를 거치면서, 군사독재 타도와 민주화를 향한 열망은 이제 대통령직선제를 향한 열망으로 표현됐다. 이에 따라, 1987년 개헌안에서도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가 유지되었다. 1987년 헌법에서 통치구조와 관련한 조문이 1963년 제3공화국 헌법의 조문과 거의 같다는 사실은, 한국의 민주화가 권력구조 측면에서는 사실상 ‘유신 이전으로의 복귀’에 불과했음을 드러낸다.
그 결과,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정치는 대통령직을 둘러싼 극한 대립으로 점철되었고, 정당은 대통령 또는 유력 후보자의 사당(私黨)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통령이 속한 정당과 국회 다수당이 일치하는 단점정부에서는 집권세력의 자제와 제한 없는 권력 행사라는 문제가 나타났고, 여소야대의 분점정부에서는 대통령과 국회라는 두 헌법기관 사이의 극단적 교착상태라는 문제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원한의 정치와 정치양극화가 심화했고, 권력분립을 통한 상호 견제라는 헌정주의 원리는 대통령과 국회(특히 야당)가 서로를 부정하기 위해 활용하는 문구로 전락했다. 나아가, 극단화된 정치양극화는 정치인의 비리와 범죄 혐의에 대한 수사기관의 수사와 이에 대한 법원의 판결, 그리고 탄핵과 헌법소원을 심리하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포함하는 사법부와 법치주의까지 잠식하기에 이르렀다.
이번 비상계엄 사태와 대통령 탄핵 국면은 이렇게 쌓여 온 한국 정치의 결함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법의 지배에 따른 권력의 제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정강과 정책에 기반한 정당 간의 경쟁, 독립적인 사법부라는 헌정주의의 원리를 각 정치의 주체, 특히 유권자 시민이 신뢰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향하지조차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대만의 민주화 과정
대만 헌법의 시작점은 1946년 제정된 중화민국 헌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해혁명 이후 1912년 건국된 중화민국은 혼란 속에서 정식 헌법을 제정하지 못하고 임시약법만을 시행하다가, 항일전쟁이 마무리되고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본격화된 다음인 1946년 12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화민국 헌법을 제정했다. 통치구조 측면에서, 중화민국 헌법은 쑨원의 삼민주의를 반영하여, 정부를 오권분립에 따라 입법원, 사법원, 행정원, 감찰원, 고시원으로 구성했고, 그 상위에 정부를 통제하고 민권을 실현하는 헌법기구로서 국민대회를 두었다.
구역대표제와 직업대표제에 따라 전국에서 선출된 대표로 구성되는 국민대회는 △ 총통 선출과 파면 △ 감찰원이 제출하는 총통과 부총통 탄핵안 의결 △ 헌법 개정 △ 입법원이 제출하는 헌법 수정안과 영토 변경안 의결 기능을 가졌다.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는 국가원수인 총통은 오권을 총괄하며 △ 군 통수권 △ 외국과의 조약 체결·선전포고·강화권 △ 법률 공포권 △계엄령과 긴급명령 발포권 △ 행정원 원장과 사법원·감찰원·고시원 원장과 부원장 임명권을 가졌다. 총통의 임기는 6년이며 3선 이상은 불가능했다. 당시 공산당과 민주동맹이 국민대회 선거에 불참했기 때문에, 1947년 구역대표제와 직업대표제로 선출된 3045명의 1대 국민대회 대표는 대부분 국민당원이었고, 1대 총통 선거에서 장제스가 압도적 득표수를 얻어 당선되었다.
이러한 통치구조는 국가원수인 총통과 행정부 수반인 행정원장이 분리되어 있고, 행정원장은 총통이 입법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며, 행정원은 입법원에 책임을 지도록 하였기 때문에 큰 틀에서 이원집정부제(준총통제)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전이라는 상황에서 실제로는 총통의 권한이 매우 강력하게 작용했다. 게다가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지자, 국민대회는 1948년 4월, 공산당을 토벌해야 한다는 이유로 총통에게 입법원의 동의 없이도 계엄령과 긴급명령을 발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통과시켜 헌정을 사실상 중단했다. (이에 따라 12월 대륙 전역에 계엄령이 선포됐고, 이듬해 5월 타이완성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이 조치는 본래 2년 한시로 시행되는 것이었으나, 1949년 12월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이 대만으로 정부를 철수한 ‘국부천대’ 이후에도 국민대회를 통해 계속해서 시한을 연장했다. 1960년에는 총통의 연임을 1회로 제한하는 헌법 조항 적용을 동원감란시기에는 중지한다는 조항이 추가되어, 사실상 장제스의 종신집권을 가능하게 했다. 1954년에는 사법원이 헌법 해석을 통해 중국대륙 수복이 이루어질 때까지 국민대회, 입법원, 감찰원의 선거를 정지함으로써, 기존 국민대회 의원, 입법위원, 감찰위원을 종신직으로 만들었다. (다만 1969년부터는 몇 차례 보궐·증원선거가 시행됐고, 지방선거는 계속해서 유지됐다)
헌법이 중지된 계엄령 하에서 국민당은 사실상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서 국가와 사회의 거의 모든 부문을 통제했다. 소련식 당-국가 체제를 지향한 국민당 정권에서, 정부는 사실상 당의 집행부 역할을 했고, 입법원은 국민당 정부가 제시하는 법안에 찬성하는 역할을 하는 데 그쳤다. 자본과 노동을 비롯한 사회의 다양한 부문의 요구는 입법원이 아니라 당 조직을 통해 조율되었다. 한편, 망명세력인 외성인(外省人)으로서 국민당은 대만 전체에 대한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기존의 한족 주민인 본성인(本省人) 지역 파벌을 조합주의 체제로 포섭했다. 특히 국민당은 경찰을 장악하고, 지방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하는 지역 파벌 정치인을 지원하는 한편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파벌은 다양한 방식으로 견제하고 처벌했다. 국민당에 충성한 지역 파벌은 그 대가로 금융 혜택이나 지역 사업 특혜와 같은 보상을 얻었다. 요컨대, 민주화 이전 대만의 정치체제는 헌정이 정지된 상태에서 초법적 권력을 지닌 총통과 국민당이 지배하는 당-국가 체제 또는 권위주의 체제였다.
이러한 국민당의 권위주의적 일당독재는 1970년대 후반부터 대내외적 위기에 처했다. 먼저, 냉전이 완화되는 데탕트 국면에서 대만의 국제적 지위가 위태로워졌다. 1971년 유엔총회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면서 유엔에서 중국 대표권과 상임이사국이 베이징 정부로 교체되었고, 1979년 미국과 중국이 수교 조약을 맺으면서 대만과 미국 간의 상호방위조약이 파기됐다. 이에 따라 국민당이 통치 정당성으로 내세웠던 ‘대만 주도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서, 국민당 외부에서 대만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재야 정치세력인 ‘당외’(黨外)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외는 국민당의 부정선거를 폭로하고 대중투쟁을 주도하면서 『메이리다오』나 『80년대』와 같은 잡지를 발간하는 한편, 1980년 입법원 보궐선거로 일부가 의회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비정상적인 계엄을 철폐하고, 정지된 헌법을 부활시키며, 총통 선거를 직선제로 바꿀 것을 요구했다. 다양한 분파로 민주화 운동을 이어가던 당외는 1980년대 후반 미국 정부·의회와 관계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고, 필리핀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전반에서 민주화 운동이 확산된 것을 계기로 1986년 9월 대만 최초의 자생적 야당인 민주진보당(민진당)을 창당했다.
1970년대까지도 중리 사건(1976), 교두 사건(1978), 메이리다오 사건(1979) 등으로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던 국민당은, 1980년대 말부터는 점진적인 민주화로의 이행을 추진하는 방향으로 대응했다. 1987년 7월 장징궈 총통이 38년간 이어진 계엄령을 해제한 데 이어 10월에는 대만 주민이 중국 대륙의 친척을 방문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1988년 장징궈 사후 총통이 된 리덩후이는 1989년 복수정당제를 인정했고, 1990년에는 여야 정치인을 비롯한 각계 주요 인사를 망라한 국시회의(國是會議)를 열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실체를 인정하는 새로운 양안관계를 구축한다는 계획과 개헌을 통해 민주화로 이행한다는 계획에 합의했다. 1991년 4월에는 국민대회가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을 폐지하기로 결의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대만의 민주화는 국민당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권위주의 세력이 민주화를 수용하고 주도하는 가운데 민진당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세력과 전략적으로 협의하는 ‘협약에 의한 민주화’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
메이리다오 사건은 대만 민주화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한국의 부마항쟁이나 광주민중항쟁에 유비할 수 있다. 천쥐를 비롯한 대만의 재야 민주화운동 인사는 1979년 8월 『메이리다오』(美麗島, Formosa) 잡지를 창간하고, 12월 10일 세계인권선언 기념일에 맞춰 가오슝시에서 집회를 주최했다. 국민당 당국이 이를 불허하고 강제 해산하면서 물리적 충돌이 일어났고, 이를 빌미로 주요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군사법정에서 내란죄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투옥되는 메이리다오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투옥된 주요 인사들과 이들을 변호한 변호인단이 모여 1986년 창당한 정당이 바로 민주진보당이다.
3) 민주화로의 이행을 위한 헌법개정
이러한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대만 헌법은 1991년부터 2005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개정되었다. 이는 곧 민주화에 적합한 헌정제도를 구축하려는 과정이었는데, 크게 보아 1차~4차 헌법개정 시기와 5~7차 헌법개정 시기로 나누어볼 수 있다. 먼저, 1991년 1차 헌법개정부터 1997년 4차 헌법개정까지의 핵심은 통치구조 개혁이었다. 첫째, 대만의 통치구조를 ‘준총통제’(semi-presidentialism)로 명시했다. 둘째, 총통, 국민대회 대표, 입법원과 감찰원 위원, 지방단체장을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하도록 했다. 특히, 총통과 부총통은 4년 중임제로 하여 1994년 첫 번째 직선제 선거가 실시되었다.
개헌 논의 과정에서 총통 직선제는 국민당과 민진당이 모두 동의하는 사안이었으나, 통치구조와 관련해서는 양당의 의견이 갈렸다. 국민당은 대체로 강한 총통제(대통령중심제)를 주장했고 민진당은 대체로 의원내각제를 주장했는데, 양당의 정치적 타협의 결과로 도출된 것이 바로 준총통제였다. 이는 큰 틀에서 1946년 중화민국 헌법의 통치구조를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다만 총통·행정부와 입법부의 관계에서 그때와 몇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총통이 행정원장을 임명할 때 입법원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고, 입법원이 행정원장 불신임을 의결할 경우 총통이 10일 이내에 입법원을 해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감찰원, 고시원, 사법원의 원장과 부원장, 그리고 헌법재판소 역할을 하는 15명의 사법원 대법관은 총통이 지명하고 국민대회(국민대회 폐지 후에는 입법원)의 동의를 얻어 총통이 임명하도록 했다. 반면, 입법원은 행정원장 불신임 제출권과 (본래 감찰원이 가졌던) 총통과 부총통 탄핵 제안권을 가졌다. 또한, 행정원장이 총통의 재가를 얻어 거부권을 행사한 법률안을 입법원이 재의결하는 정족수가 재적위원 3분의 2에서 과반수로 완화되었다.
민주화로의 이행 과정에서 헌법개정을 통해 통치구조를 준총통제로 명시한 핵심적인 취지는 초헌법적으로 총통에게 집중되었던 강력한 권력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입법부에 대한 총통의 우위는 대체로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총통과 행정원에 대한 입법원의 견제 권한이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입법부에 해당하는 입법원과 사법부에 해당하는 사법원이 총통과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 오권을 통솔하는 총통의 아래에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총통이 행정부 수반을 입법부의 동의 없이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며, 사법원장과 대법관을 비롯한 사법부에 대한 임명권을 강하게 갖는다는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그림] 대만의 준통총제 통치구조
대만은 민주화 이후 일련의 헌법개정을 통해 통치구조를 준총통제로 명시했다. 이는 큰 틀에서 1946년 중화민국 헌법으로 되돌아가, 국가원수인 총통과 행정부 수반(총리)인 행정원장을 분리하고, 행정원은 입법원에 책임을 지도록 하여 총통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을 분산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만의 준총통제는 실제로는 ‘강한 총통제’로 작동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평가된다. 이는 무엇보다 총통이 입법원의 신임 여부와 무관하게 행정원장과 주요 각료를 임명할 수 있으며, 사법원을 비롯한 다른 권부에 대한 임명권을 강하게 가진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국의 경우, (대만의 행정원장에 해당하는) 국무총리는 국회의 동의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그러나 한국 역시, 총리를 비롯한 내각과 행정부에 대한 대통령의 통제력이 강하며, 대법원장과 감사원장을 비롯해 주요 국가기관에 대한 임명권을 강하게 갖고 있다. 문재인 정부에 이르면 심지어 대통령실이 행정부보다 우위에 서서 국정운영 전반을 장악하여 ‘청와대 정부’라는 비판이 제기됐고, 윤석열 정부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개혁하겠다는 공약과 달리 불통과 독선으로 일관하다 야당에 맞서 비상대권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대만의 강한 총통제와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통치구조는 민주화 이후 양국에서 민주주의가 공고화되지 못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이는 행정부가 입법부에 책임을 진다는 헌정주의와 의회주의 원리를 충실히 반영하지 못하는 문제로 이어졌다. 즉, 총통이 입법원의 동의 없이 행정원장과 주요 각료를 임명할 수 있으므로 행정부에 대한 막강한 통제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입법원에 직접 책임을 지는 것은 총통이 아니라 행정원이기 때문에 입법부에 대한 행정부의 책임성이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발생한 분점정부 상황에서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교착이라는 문제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다음으로, 1999년 5차 헌법개정부터 2005년 7차 헌법개정까지의 핵심은 국민대회와 입법원을 개혁하고 선거제도를 변경하는 것이었다. 국민대회는 쑨원이 제창한 민권주의를 행사하는 기관으로서, 입법원, 감찰원과 함께 입법부에 해당하는 기관으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국민대회의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커지면서, 입법원을 중심으로 입법부를 일원화하자는 주장이 널리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2000년 6차 헌법개정으로 국민대회는 헌법개정안 재의결, 영토변경안 재의결, 총통과 부총통 탄핵안 의결이라는 세 가지 권한만을 갖는 비상설기관으로 축소됐다. 반면 입법원은 본래 국민대회의 권한이었던 총통의 국정보고 청취권, 총통의 사법원 대법관과 고시원 위원 지명에 대한 동의권을 갖게 되었다. 이후, 국민대회는 2005년 7차 헌법개정으로 최종적으로 폐지됐다. 이에 따라, 헌법개정안과 영토변경안 재의결 권한은 공민투표(국민투표)로 옮겨졌고, 총통과 부총통 탄핵안 의결 권한은 15명의 사법원 대법관으로 구성되는 헌법법정으로 옮겨졌다. (대만의 헌법법정은 한국의 헌법재판소에 해당한다) 이러한 변화는 입법원이 비로소 유일한 입법부로서 기능하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입법원 개혁은 선거제도 개혁과 연동하여 이루어졌다. 2005년 7차 헌법개정으로 입법위원 정수는 225명에서 113명으로 감소하고 임기는 3년에서 4년으로 늘어났다. 그러면서 입법원 선거(총선)와 총통 선거(대선)의 주기를 맞추어 동시에 실시하도록 했다.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병립제로 하여, 한국과 비슷하게 각 유권자가 지역구 후보자에 대한 투표와 비례대표구 정당에 대한 투표로 1인 2표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체 입법위원 113명은 지역구 대표 73명, 원주민 대표 6명, 비례대표구와 외국재류 대만주민 대표 34명으로 구성됐다. 이러한 입법원과 선거제도 개혁은 여야가 당시의 여론을 반영하여 합의한 바에 따라 이루어져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데, 결과적으로 기존의 국민당과 민진당 양당구도를 굳히는 방향의 개혁이었다고 평가된다.
요컨대, 대만의 민주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헌법 개정은 당-국가 체제 또는 권위주의에서 자유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었다. 민주화의 여러 요소 가운데 특히 다수의 의지를 반영하는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의 확립을 강조하는 관점에서 볼 때, 대만의 민주화는 한국의 민주화와 함께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1994년 처음으로 총통 직선제를 실시하였고, 2000년에는 민진당의 천수이볜 총통이 당선되어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처음으로 이루었으며, 이후에도 큰 틀에서 국민당과 민진당의 양당 구도 속에서 총통 선거와 입법원 선거가 비교적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대만의 헌정과 민주주의를 분석하는 많은 연구는 대만이 민주화에 성공한 이후 ‘민주주의 공고화’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분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민주화 이후 대만에서도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4. 대만헌정사 ②: 대만에서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문제
앞서 소개했던 첸의 주장을 상기해보자. 그에 따르면, 민주주의와 헌정주의는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서로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니다. 특히 아시아 지역의 민주화에서 주로 강조된 것은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민주주의로서 정치적 자유와 공정한 선거에 대한 요구였고, 이것이 대만과 한국에서는 대통령직선제 요구로 집약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정치권력이 시민적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법의 지배의 원리에 따라 권력의 행사를 제한하고 통제하며 이를 실제 정치과정에서 실제로 구현해야 한다는 헌정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비교적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2000년대에 이르러 대만의 ‘민주주의 공고화’가 지연되거나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지적으로 나타났다. 민주주의 공고화란 일반적으로 민주화 이후에 민주적 헌법을 제도화하고 그 규범과 절차를 사회 전반이 내면화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에서 민주주의 공고화가 지체되는 현상을 지적하는 연구들은 구체적으로 △ 통치구조의 결함 △ 의회정치의 미성숙과 대결적 정치문화 △ 법치의 위기 △ 시민사회와 시민의식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는 이 네 가지 측면을 중심으로 민주화 이후 대만에서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문제를 살펴본다. 물론 많은 차이점도 있겠지만, 이러한 대만의 사례에서 민주화 이후 한국에서 드러난 정치위기와 상당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강한 총통제’라는 통치구조의 결함
민주화 이후 대만의 미약한 헌정주의는 통치구조 측면에서 (한국과 유사하게) 강한 총통제 내지는 대통령중심제의 결함을 중심으로 드러난다. 대통령중심제는 1990년대 세계적인 ‘제3의 민주화’ 물결 속에서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가 민주주의 공고화에는 실패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지적된다.
이에 따르면, 대통령중심제는 본질적으로 대통령과 의회 모두 국민에 의해 선출된다는 이원적 정통성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특성이 신생 민주주의 국가에서 종종 나타나는 깊은 사회적 분열을 반영하는 양극화된 정당체제와 결합할 경우, 민주정은 한편으로 입법부와 행정부가 빈번한 교착상태에 빠지거나 다른 한편으로 극단화된 갈등을 대통령이 비상조치나 초법적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나타나면서 위협받게 된다.
이러한 대통령중심제의 결함 중에서 특히 대통령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한에 주목하는 경우, 그러한 권한을 총리에게 분산하는 이원집정부제가 ‘준대통령제’나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이름으로 현행 대통령중심제의 대안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에 따르면, 이원집정부제는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과 의회의 신임에 기초하는 총리가 대등한 행정권과 통치권을 갖는 통치구조다. 이는 대통령이 외교와 국방과 같은 외치를 담당하고 총리가 내치를 담당하는 이원집정부제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이원집정부제는 의회 다수당이 대통령이 소속된 당과 일치하면 대통령중심제로, 일치하지 않는 여소야대라면 의회중심제로 전환하면서 입법과 행정 사이의 교착상태를 유연하게 해소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러한 이원집정부제 역시 현실적으로 대통령의 권한이 총리보다 클 경우, 여전히 대통령으로 권력이 집중되고 분점정부 상황에서 입법과 행정 사이의 교착상태가 해소되지 않는 문제가 나타난다. 대만의 준총통제는 이러한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대만은 민주화 과정에서 헌법개정을 통해 통치구조를 ‘준총통제’로 명시했다. 그러나 많은 연구는 대만의 통치구조가 실제 운영방식에서는 ‘강한 총통제’(Imperial-Presidentialism)의 특성을 보인다고 지적한다.
무엇보다 이는 총통이 행정원 원장(총리)과 주요 각료를 입법원의 동의 없이 임명할 수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총통이 국가원수이자 행정부 수반으로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렇게 강한 총통제 하에서, 행정원장을 비롯한 내각은 입법원의 신임 여부와 관계 없이 총통에 의해 구성되면서도, 국정운영에 대한 책임은 입법원에 지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이중적 책임 구조는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통제를 모호하게 하며 권부 사이의 수직적 책임성을 결여하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지적된다.
또한, 대만의 준총통제에서는 총통이 소속된 당이 입법원에서 다수당을 형성하는 데 실패하여 분점정부가 형성될 경우, 행정부와 입법부 사이의 교착상태가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본래 이상적인 이원집정부제 모델은 총리와 각료가 실질적으로도 의회의 신임에 의존한다. 따라서 대통령이 소속된 정당이 의회 다수당을 형성하지 못할 경우, 대통령은 이에 순응하는 정치문화에 따라 의회 다수당을 중심으로 총리와 내각을 구성해야 한다. 이렇게 국가원수인 대통령과 행정수반인 총리가 서로 다른 정당인 ‘동거정부’ 상태가 되면, 대통령의 위상은 약화되고 의회 다수당이 내각을 구성하는 의원내각제적 성격이 강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대만은 준총통제이면서도 동거정부를 안정화하는 제도적 기제가 없는 가운데, 총통이 입법원의 동의 없이 행정원장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오히려 더 심각한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교착상태를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2) 의회정치의 미성숙과 대결적 정치문화
명목상으로는 ‘준총통제’이나 실제로는 ‘강한 총통제’라는 통치구조의 결함은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의 성숙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정치양극화와 대결적 정치문화를 오히려 심화했다. 특히 2000년 처음으로 총통 선거에 승리하여 집권한 민진당의 천수이볜 정권은 이러한 통치구조의 결함과 대결적인 정치문화가 결합된 대만의 정치위기를 현실화했다. 천수이볜 정권의 사례는 민주화 이후 집권에 성공한 ‘민주화 세력’이 (과거사 청산과 국가 개혁을 내세우면서) 오히려 ‘강한 총통’의 권한을 남용하며 입법부와 심각한 갈등을 겪고 헌정주의와 괴리된 정치문화를 보였다는 점에서, 한국의 노무현 정부와 유사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진당은 2000년 대만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최초로 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천수이볜 총통 집권기는 전형적인 여소야대와 분점정부 국면이었다. 우선, 천수이볜 후보가 과반을 밑도는 39.% 득표율을 얻는 데 그친 가운데 국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한 쑹추위 후보가 36.%, 국민당의 롄잔 후보가 23.% 득표율을 얻은 데서 알 수 있듯, 민진당의 총통 선거 승리는 국민당이 분열한 데 따른 것이었다. 또한, 직전의 1998년 입법원 선거 결과 입법원 다수당은 여전히 국민당(전체 225석 중 123석)이었고 민진당은 70석에 불과했다. 천수이볜 총통 집권 이후 치러진 2001년 입법원 선거에서도 민진당은 전체 225석 중 87석을 얻어 과반에 미달하는 다수당 지위를 얻는 데 그쳤고, 국민당이 68석, 쑹추위가 창당한 친민당이 46석을 얻었다.
[그림] 2000년 총통 선거에서 승리한 천수이볜 후보
천수이볜은 민주화 운동 이력, 집권기의 정치스타일, 이후의 행보 측면에서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에 비견된다. 그는 1979년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재판을 받은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변호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1987년 민진당에 입당하여 1989년 입법원 증원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1994년에는 타이베이 시장에 당선되면서 민진당을 대표하는 정치인 중 하나가 되었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을 탈당한 무소속 쑹추위 후보와 국민당 롄잔 후보가 분열한 데 힘입어 당선되면서, 대만 최초로 정권교체를 이룬 민진당 출신 총통이 되었다. 그러나 입법부가 여전히 국민당이 우위인 분점정부 상황에서, 천수이볜 총통은 소수정부를 자처하며 입법부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2004년 재선에 가까스로 성공한 직후에는 일가의 부패와 비리 의혹이 제기되며 대규모 반총통 시위에 직면했다. 결국 2008년 총통 선거와 입법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승리하며 정권이 교체된 이후, 천수이볜은 부정부패 혐의로 대법원에서 징역 19년형을 선고받았다. (사진출처: 대만 《자유시보》)
그러나 천수이볜 총통은 입법원 다수당인 국민당을 중심으로 행정원장과 내각을 구성하기보다는, 민진당을 중심으로 행정원을 구성하면서 ‘소수정부’를 자처했다. 그는 취임 직후 이전 국민당 정부의 국방장관이었던 탕페이를 행정원장으로 지명한 뒤 4개월만에 해임하고 민진당의 장춘샹을 행정원장으로 임명했다. 이는 입법원 다수당인 국민당이 행정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도록 유도하여 총통이 입법원을 해산할 수 있도록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으나, 국민당은 행정원에 대한 불신임안을 제출하는 대신 총통 탄핵안을 제출하는 것으로 대응하며 행정과 입법 사이의 교착상태가 형성됐다. 이후에도 천수이볜 총통은 네 차례에 걸쳐 입법원을 우회하여 행정원장과 각료를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교착상태를 이어갔다.
이후 2004년 총통 선거에서 천수이볜 후보는 50.% 득표율을 얻어, 49.% 득표율을 얻은 국민당의 롄잔 후보를 가까스로 누르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같은 해 치러진 입법원 선거에서 민진당이 전체 225석 중 89석만을 얻은 가운데 국민당이 79석, 친민당이 34석을 얻으며 계속해서 여소야대 국면이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국민당이 총통 선거 결과에 사실상 불복하면서, 야당 주도의 입법부와 민진당 행정부 사이의 당파적 대립은 천수이볜 2기 집권기에 더욱 악화했다.
대표적인 갈등은 감찰원 위원 임명 과정에서 드러났다. 본래 감찰원 위원 임명은 입법원의 동의를 얻어 총통이 임명한다. 민진당은 총통의 우위를 내세워 총통이 지명권을 행사하면 입법원은 이를 단지 인준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했고, 국민당은 입법원의 우위를 내세워 총통이 입법위원과 후보자 명단을 먼저 협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5년 1월 천수이볜 총통이 감찰원 위원 후보자를 제시했지만, 국민당은 천수이볜 총통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3년 가까이 감찰원 위원 임명 동의안을 입법원에 상정하지 않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민진당은 헌법재판소에 사법심사를 요청했다.
분점정부 상태에서 격화된 민진당과 국민당의 정치적 대립은 천수이볜 총통 일가의 비리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점에 달했다. 국민당은 2006년 6월 입법원에서 총통 탄핵안을 표결에 부쳤지만, 의결정족수 148표에 못 미치는 119표로 부결됐다. 그러자 10월에는 1백만 명에 이르는 규모의 반총통 대중 시위가 벌어지는 가운데, 천수이볜 총통은 자진사퇴를 거부하고 영부인의 국가 기밀 자금 횡령 혐의와 관련된 형사 수사에 대한 면책을 헌법재판소에 청원했다.
이는 결국 2008년 총통 선거와 입법원 선거에서 국민당이 모두 승리하여 정권이 교체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총통 선거에서는 국민당의 마잉주 후보가 58.% 득표율로 당선되고 입법원 선거에서는 국민당이 전체 113석 중 81석의 압도적 의석을 확보하면서, 분점정부에 따른 입법부와 행정부의 교착상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천수이볜 정권 시기에 나타난 극단적인 정치적 갈등과 양극화는 이후에도 대만 정치에 계속해서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표] 민주화 이후 대만의 총통 선거 결과(위)와 입법원 선거 결과(아래)
민주화 이후 대만에서는 분점정부 상황이 두 차례 발생했다. 첫 번째는 2000~2008년 천수이볜 총통 집권기였다. 이 시기에 여당인 민진당은 다수당이기는 했으나 과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야당인 국민당과 친민당의 의석을 합하면 과반이 넘었다. 두 번째는 현재 진행 중인 2024년 라이칭더 총통 집권기다. 총통 선거에서 라이칭더 후보는 과반을 밑도는 40%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입법원 선거에서 민진당은 다수당은 물론이고 과반 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단점정부 상황이었던 마잉주 집권기와 차이잉원 집권기와 비교할 때, 분점정부 상황에서 여야 간의 대립과 총통과 입법원 사이의 갈등으로 인한 정치위기가 훨씬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근본적으로 강한 총통제라는 통치구조의 결함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자료출처: 이동규 외, 「2024년 대만 총통 선거로 보는 대만문제: 전망과 대책」, 아산정책연구원 이슈브리프, 2024년 2월)
이렇게 2000년 대만에서 처음으로 민주적인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후 나타난 정치위기는, 헌법에 규정된 ‘준총통제’와 실제 현실에서 작동하는 ‘강한 총통제’ 사이의 괴리라는 통치구조의 결함이 천수이볜 총통의 기질적 결함이나 국민당과 민진당 사이의 대결적 정치문화와 결합하면서, 대만의 민주정이 헌정주의에서 이탈하고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실패하게 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민당과 민진당은 마잉주 총통 집권 후반기인 2015년에 통치구조를 개편하는 헌법개정안을 논의하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합의에 실패하고 준총통제를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다. 당시 국민당은 2016년 총통 선거에서 승리하기 어려워지자, 총통의 행정원장 임명에 대한 동의권을 입법원에 부여하여 총통의 권한을 축소하고 입법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의 통치구조 개편을 추진했다. 반면 민진당은 차이잉원 후보가 차기 총통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 유력한 상황에서, 총통의 행정원장 임명에 대한 입법원의 동의권을 부활시키는 개헌에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총통의 입법원 해산권을 실질화하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한편, 2014년 국민당 마잉주 정부에 저항하며 23일간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이 입법원을 점거한 해바라기 운동을 거치면서, 민진당은 국민당과 협력하지 않고도 단독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기도 했다) 이렇게 2010년대 중반 이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상대적 우위가 이어지는 가운데, 국민당이 총통의 권한을 축소하고 입법원의 권한을 강화할 것을 주장하는 반면 민진당은 이에 반대하는 구도가 현재 라이칭더 총통 집권기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로 인한 법치의 위기
(1) 헌법재판소의 부상과 정치양극화
민주화 이후 통치구조로 대통령제를 선택한 국가에서 격렬한 갈등을 겪으며 양극화된 정치는 종종 사법부, 특히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경향이 있다. 각각 직선제로 선출되어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대통령과 입법부라는 헌법기관 사이의 갈등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교착되면, 남는 ‘제도적’ 해결방식은 사법부의 판결이나 헌법재판소의 헌법심사뿐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치의 사법화라고 할 수 있는데, 대만과 한국은 민주화 이후 대통령중심제의 결함으로 인해 정치의 사법화가 심화한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대만에서는 앞서 살펴본 천수이볜 총통 집권기에 들어선 이후 총통과 입법원의 권한을 둘러싼 헌법심사가 11건이나 제기되었다.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이전 국민당 정부 시기에 추진했던 제4기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민진당 정부가 중단하자, 국민당은 정책 결정 권한이 입법원에 있고 행정원장은 입법원에 책임을 지게 되어 있으므로 원전 건설 중단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2001년 1월, 헌법재판소는 이에 대해 대법관 전원일치로, 총통이 기존의 정책이나 방향을 변경할 수 있다고 결정하면서도 입법원은 행정원의 주요 정책에 대한 공동의 결정권을 유지한다고 명시했다. 그러면서 행정원이 입법원에 원전 건설을 중단한 결정을 설명하고 입법원과 행정원 양측이 수용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2004년에는 총통 선거를 둘러싼 헌법소원이 제기됐다. 2004년 총통 선거는 매우 격렬한 갈등의 장이었는데, 천수이볜 후보가 선거 전날 마지막 유세장으로 이동하던 중 총격을 받아 다치는 사건이 발생했고, 결과적으로 여러 차례의 재검표 끝에 근소한 차이로 당선됐다. 국민당은 총격 사건이 천수이볜 측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하면서 선거 결과에 불복하는 한편, 입법원에서 극도로 당파적인 국민당 의원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특별법을 통과시켰다. 그러자 민진당은 입법원 산하 조사위원회가 사실상 수사권을 갖도록 하는 특별법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헌법재판소는 특별법에 따른 입법원의 조사 권한이 입법 범위 내에 있기 때문에 합헌이라고 결정하면서도, 입법부라는 지위를 고려할 때 조사위원회가 수사를 위해 검사를 비롯한 사법부 인력을 지휘하거나 감독할 수 없으며 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가 사법부의 결정을 취소할 수는 없다고 명시했다.
한국에서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이후 헌법재판소가 정치과정에서 중요한 주체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판결과 행정수도 이전 판결이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지만 ‘파면을 해야 할 정도로 중대하지는 않다’는 취지로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또한, 여야 합의로 통과된 신행정수도법에 대해서는 대한민국의 수도가 ‘관습 헌법’상 서울이라는 방식으로 헌법을 해석하며 위헌 결정을 내렸다. 당시 두 판결 모두 헌법재판소가 지나치게 적극적인 헌법 해석을 통해 국회의 의결과 입법을 뛰어넘는 판결을 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또한, 정치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의회와 정당이 실력 있게 해결하지 못하고 사법부의 판결에 의존하는 정치의 사법화가 본격화되었다는 비판 역시 제기되었다.
앞서 언급한 첸은 헌정주의 비교연구에서 헌법재판소의 사법심사가 얼마나 활발하게 잘 이루어지는지를 헌정주의 발전의 주요한 척도로 고려한다. 이는 첸이 민주화 이후 권력기관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헌법에 따라 제도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만이나 한국처럼 대통령중심제라는 통치구조에서 입법부와 대통령(행정부) 사이의 갈등과 교착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가운데, 민주화로의 이행과정에서 기존의 정치세력과 민주화를 주도한 정치세력 간의 대결적 정치문화가 강하게 작용하면서, 결국 ‘효과적인 중재자’로서 사법부 내지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정치가 의존하게 되는 현상을 헌정주의의 관점에서 긍정적인 발전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2000년대 대만에서 나타난 정치의 사법화와 헌법소원의 부상을 다룬 예지운롱과 장원전은 당시 대만의 헌법재판소가 양극화된 정치 구도 속에서도 비교적 원활하고 적절하게 주요한 판결을 했다고 평가하면서도, 승자독식의 총통제가 유지된다면 앞으로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더욱 심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치과정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사법부의 판결에 의존하는 현상이 정치의 사법화라면, 사법의 정치화는 사법부 자체가 정쟁의 중심이 되는 현상을 말한다. 예를 들어, 경찰이나 검찰의 수사와 기소, 법관의 임명과 판결을 두고 정치적 개입과 압력이 증대하면서 편향성 시비와 논란이 지속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지운롱과 장원전은 정치의 사법화나 사법의 정치화라는 문제에서 핵심 주체인 총통이 법관 임명권을 행사할 때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사법부 역시 사법적 자제와 전략적인 의사결정을 보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나아가, 이들은 무엇보다 성숙하고 견고한 시민사회가 민주주의와 헌정주의를 지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도 강조했다.
이후 10여 년이 지나 최근에 이르는 대만과 한국의 상황을 볼 때, 이들의 우려는 그대로 현실에서 드러나고 있다. 한국은 이재명 대표 사법리스크 방어를 위한 민주당의 극렬한 탄핵 공세를 거쳐,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헌법재판소가 정쟁의 한복판에 자리하게 되었다. 대만 역시 2024년 총통 선거에서 민진당의 라이칭더 총통이 당선되어 정권재창출에 성공했지만, 입법원 선거에서는 민진당이 113석 중 51석을 얻는 데 그치면서 (2000년대 천수이볜 총통 집권기 이후 처음으로) 다시 분점정부 상태가 나타났다. 이에 따라 총통의 사법원장과 대법관 임명, 총통견제법과 주민소환운동, 정부 예산안을 두고 국민당과 민진당, 입법부와 총통 사이에 정치적 갈등과 교착이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대만과 한국의 사례로부터, 민주화 초기에는 효과적인 중재자이자 최종적 결정자로 여겨지던 사법부와 헌법재판소 역시 종국에는 극단적 정치양극화에 잠식되고 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림] 2024년 5월 17일 대만 입법원 난투극
민진당은 2024년 총통 선거에서 승리했지만, 입법원 선거에서는 전체 113석 중 51석을 얻는 데 그쳐 과반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반면 야당인 국민당이 52석을 얻어 다수당이 되었고, 민중당이 8석을 얻어 제3당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분점정부 상태가 나타났다. 국민당은 민중당과 공조해 △ 총통의 입법원 국정연설 의무화 △ 입법위원에게 군, 기업, 개인의 기밀문서에 대한 접근 권한 부여 △ 입법원에 정보 제공을 거부하거나 청문회 소환을 거부한 개인을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5대 입법원 개혁법’(총통견제법)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입법원에서 의원 간에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법안은 5월 28일 재적 103명 중 58명 찬성으로 가결되었으나, 10월 25일 헌법재판소는 법안의 조항 대부분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이후에도 라이칭더 총통의 사법원 원장과 대법관 임명, 2025년 예산안 심사, 주민소환운동을 두고 여야 사이의 극심한 갈등과 입법원-행정원 사이의 교착이 점입가경으로 이어지고 있다. (사진출처: 《한국일보》)
(2) 민주화 이후 공동화된 법집행
다른 한편, 대만에서 민주화 이후 경쟁적인 정치구조로의 전환이 사법부뿐만 아니라 법집행 조직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을 증폭하면서 법치의 위기가 심화했다는 지적도 있다. (여기서 말하는 법집행 조직은 주로 경찰을 의미한다.) 민주화 이전 국민당의 권위주의 통치 시기에, 대만 경찰은 한편으로 정치적 반대세력을 탄압하면서 정권을 보위하는 데 기여하고, 다른 한편으로 지역사회에서 국민당의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해 지역 파벌이나 범죄조직과 유착하면서 법집행의 공정성을 상실한 ‘자의적 집행자’로 기능했다.
민주화는 이렇게 국민당 일당지배에 종속된 경찰의 자의적 법집행을 지양하면서, 정치권력의 동원과 이권세력의 포획으로부터 자유로운 공정한 법집행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그러나, 현실에서 민주화 이후 대만의 법집행은 법집행 조직에 대한 ‘정치적 동원’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는 가운데 ‘사회적 침투’가 심화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법치의 위기인 ‘공동화된 법집행’이 나타났다.
[표] 정치적 동원과 사회적 침투에 따른 법집행의 유형
사회학자 다이앤 데이비스는 정치세력의 수직적인 ‘정치적 동원’과 사회세력의 수평적인 ‘사회적 침투’라는 두 가지 요소를 기준으로 법집행 유형을 나눈다. 이에 따르면, 법집행 조직은 정치적 동원과 사회적 침투로부터 자유로울 때 ‘공정한 법집행’이 가능하다. 민주화 이전의 대만과 같은 중앙집권적인 권위주의 체제에서는 ‘자의적 법집행’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멕시코와 같은 지방분권적인 연고주의 체제에서는 ‘포획된 법집행’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보통 민주화는 법집행 조직의 정치적 독립성을 강화하여, 권위주의 체제에서 벌어지는 자의적인 법집행을 공정한 법집행으로 전환시킬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민주화에 따른 경쟁적 정치구조가 법치의 발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견해를 비판하면서, 정치권력의 파편화와 경쟁 증가가 오히려 법치의 위기를 낳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화로 등장한 경쟁적 정치구조가 법집행 조직의 독립성을 강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중앙과 지방에서 서로 경합하는 상이한 정치세력이 장악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대만은 민주화 이전 ‘자의적 법집행’에서 민주화 이후 정치적 동원이 새로운 형태로 강화되는 가운데 사회적 침투가 심화함에 따라 ‘공동화된 법집행’으로 변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료출처: 최경준, 「정치구조의 변화와 법치: 민주화 이후 대만의 경쟁적 정치구조와 법집행의 위기」, 『한국정치학회보』 51집 5호, 2017.)
먼저 정치적 동원의 측면을 살펴보자. 1990년대 성공적인 선거민주주의로의 전환 이후, 국민당은 중앙 정치와 지역사회에 대한 기존의 지배력이 약해지자,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부패한 수단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인, 경제인, 범죄조직과의 유착(이른바 ‘흑금’(黑金))에 더욱 의존했다. 경찰과 사법부는 이러한 국민당의 매표행위와 비리를 사실상 방치했다. 특히 1990년대 국민당 정권에서도 부패 집단이나 범죄 집단에 대한 수사와 처벌은 이들로 하여금 당과 정권에 협력하도록 강요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뤄졌고, 따라서 여전히 정치화되고 불공정한 방식으로 이뤄졌다.
2000년대 민진당 천수이볜 정권기에는 경찰을 비롯한 법집행 조직을 정파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민주화 시기에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과 당과 경찰의 분리를 주장하던 민진당은 집권 이후 오히려 경찰의 정치화에 앞장섰다. 무엇보다 대표적인 사례는 국민당을 겨냥하여, 기존의 법집행 조직을 통합해 영장 없이도 수색, 압수, 체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반부패조직을 창설하는 입법을 민진당이 시도한 것이었다. (이는 국민당 우위의 입법원에서 부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양당을 막론하고 정치인의 부패와 비리에 대한 수사와 기소 역시 정쟁화되었다.
2000년 9월, 타이베이 시장인 마잉주(국민당)는 천수이볜 총통이 법무부와 검찰을 동원하여 자신을 겨냥한 수사와 기소를 남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한편, 마잉주 역시 타이베이 시장으로서 지역 경찰을 동원해 천수이볜 정권에 보복하며 법치의 원칙을 저버렸다. 2006년 천수이볜 일가의 비리 의혹이 제기되자 10월 타이베이 시에서 수십만 명의 반총통 시위자가 현행법을 어기고 시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채 시위를 벌였는데, 타이베이 경찰이 마잉주 시장의 결정에 따라 이들을 체포하거나 처벌하지 않은 것이다. 민주화 이전의 법집행 조직이 오직 국민당에 종속되어 단일한 정치적 동원에 노출되었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양극화되고 서로 충돌하는 정치세력으로부터의 동원에 노출되는 더 위태로운 상황에 직면하게 된 셈이었다.
다음으로 사회적 침투의 측면을 살펴보자. 민주화로 경쟁적 선거가 이루어지면서, 지역 파벌과 범죄조직은 기존의 국민당뿐만 아니라 민진당이라는 다른 정치세력을 선택할 여지가 생겼고, 파편화된 정치권력에 침투할 영역이 넓어졌다. 지방의 범죄조직과 이권세력이 민주화 이전에는 국민당의 조력자 수준에 머물렀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주로 지방의) 선거정치에 깊숙이 침투하는 실질적 참여자로 변신했던 것이다. 이들은 심지어 지역의 주요 행정직이나 법집행 조직 자리에 당선되거나 임명되기도 했다. 따라서, 범죄나 비리와 연루된 지역 엘리트 정치인은 이들과 협력하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수사나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결국, 경찰이 평범한 사람이 저지르는 범죄만 처벌하면서 지방의 유지와 결부된 사건은 해결하지 못한다는, 법집행에 대한 불신이 시민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리고 이는 법의 지배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으로 이어졌다.
한국 역시 법집행 조직이 위로부터의 정치적 동원과 아래로부터의 사회적 침투에 취약하다는 점에서, ‘공동화된 법집행’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극화된 정치구도에서 유력 정치인의 비리나 위법행위에 대한 수사와 기소 자체가 정쟁화되는 한편, 정당체계가 무너진 자리에 정치기술자 내지는 선거기술자가 대거 참여해 이권을 나눠갖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한국에서도 법의 지배에 대한 불신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소결
대만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20세기 말 ‘제3의 민주화’ 물결로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에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화 이후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양국에서 과연 민주주의가 공고화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대부분 비판적인 평가가 제기된다. 대만의 경우, 무엇보다 헌법상 준총통제이나 실제로는 강한 총통제(대통령중심제)에 가깝게 작동하는 통치구조의 결함이 의회정치와 정치문화 그리고 법치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입법부와 총통이 이원적 정통성을 갖는 통치구조에서, 승자독식의 강한 총통제는 총통직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과 경쟁을 격화하며 종종 입법부와 행정부 사이의 교착상태를 낳는다. 특히 민주화 이후 집권에 성공한 민주화 세력이 과거사 청산이나 국가 개혁을 내세우며 강한 총통의 권한을 활용하고자 하면서, 민주화 이후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위기가 본격화된다. 이 과정에서 대결적 정치문화는 더욱 심화하며, 헌법과 헌정을 둘러싼 극단적 갈등은 최종적으로 사법부의 판결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종국에는 사법부 역시 정치양극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되고, 법의 지배에 대한 불신이 전반적으로 확산된다. 정치양극화를 극단화하고 헌정주의의 핵심 원리인 법의 지배를 침식하는 데 있어 대통령중심제라는 통치구조의 결함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정의 발전에 필수적인 시민사회와 민주적인 시민의식의 발전 역시 지체된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 대만과 한국에서는 시민사회와 사회운동이 활성화되었고, 권위주의 통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수용성은 낮게 나타나며, 체제로서 민주주의에 대한 만족도는 비교적 높게 나타난다. 그러나 정작 민주정의 핵심 제도인 의회, 정당, 법치에 대한 시민사회의 신뢰도는 매우 낮게 나타나는 모습을 보인다. 즉, 민주적 책임성이나 응답성의 부재, 권력남용이나 부패와 같은 비민주적 관행이 민주화 이후에도 유지되면서, 양국 시민의 태도가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낮은 신뢰와 낮은 정치적 효능감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요컨대, 대만과 한국의 민주주의는 권위주의로의 역류 가능성은 비교적 낮지만,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민주주의와 민주정의 위기가 점차 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림] 민주주의에 대한 대만의 시민의식 조사
‘아시안 바로미터 조사’(Asian Barometer Survey)는 한국, 대만, 일본을 비롯한 13개 국가와 지역을 대상으로, 시민사회의 정치문화나 정치참여와 같은 민주주의에 대한 만족도와 태도를 묻는 문항으로 진행되는 정기적인 설문조사다. 아시아 각국의 시민사회가 자국의 민주정과 민주주의에 얼마나 만족하는지, 민주주의 규범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조사로 평가된다. 이에 따르면, 대만은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과 만족도가 점차 높아지고 군부의 지배나 스트롱맨의 지배에 대한 반대 역시 높아졌다는 점에서, 권위주의로의 역류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정작 민주주의의 핵심 제도인 의회, 정당,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매우 낮은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2000년대의 정치양극화로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심화하면서,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가 상당히 감소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자료출처: Jack Chen-chia Wu, Mark Weatherall and Yu-tzung Chang, “How Taiwanese Citizens View Democracy: Change and Continuity in Democratic Attitudes and Values in Taiwan’s Democratic Consolidation”, ABS Working Paper Series No., 2012)
5. 결론
많은 민주주의 연구자는 1980~90년대가 탈냉전과 민주화의 시대였다면, 2000년대에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지체되는 시기를 거쳐 세계 금융위기 이후 현재에 이르는 2010년대와 2020년대는 권위주의의 확산과 민주주의의 퇴보가 두드러지는 시대라고 지적한다. 특히, 오늘날 세계적인 민주정의 위기는,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악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특징이 있다.
즉, 한편에서는 푸틴의 러시아나 트럼프의 미국과 같이 민주적 선거를 통해 집권한 지도자가 행정부의 권력을 지나치게 확대하고 서서히 자유와 법치를 훼손하며 권위주의로 역행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인민주권을 절대화하며 대의제를 부정하고 직접정치를 요구하는 좌우 양극단의 인민주의적 대중운동이 발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국 역시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를 거치며 두 핵심 정치세력의 비자유주의적 행태와 그에 호응하는 유권자에 의해 민주주의가 퇴행해 왔으며, 최근에는 정치양극화가 극단화되어 사실상 만성적인 ‘내전’ 상태에 이르렀다는 지적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다.
민주주의와 헌정주의를 구별할 필요성을 강조하는 헌정주의 비교연구는 이러한 정세에서 한국정치, 나아가 세계적인 민주정의 위기를 분석할 수 있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이 인민주권을 실현하고자 하는 정치이념이자 제도라고 한다면, 헌정주의의 핵심은 개인의 인신, 사상, 소유라는 보편적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권력의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입법과 정치제도와 문화로 제한하는 헌정을 지향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헌정주의가 결여된 민주정은 권위독재정으로 역행하거나 인민정으로 변질될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의 민주주의 연구는 권력자와 행정부의 과도한 권력 확대를 막는 것, 즉 ‘제한 정부’의 원칙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에 주목하는 한편, 인민주권의 이름으로 다원성을 부정하며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는 비자유주의적 대중운동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헌정주의 비교연구는 주로 통치구조, 의회·정당정치와 정치문화, 법의 지배, 시민사회와 시민의식의 측면에서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문제점을 제기한다. 특히 20세기 말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 중 대다수가 21세기에 들어서 민주주의를 공고화하는 단계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민주정이 전복되거나 변질될 위기에 처하는가에 주목하면서, 대통령중심제라는 통치구조의 결함과 결부된 정치양극화를 위기의 주된 요인으로 지적한다. 본문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만의 준총통제와 한국의 제왕적 대통령제에 고유한 결함이야말로 양국의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문제를 단적으로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2000년대 이후 양국에서 민주주의의 공고화와 민주정의 발전을 가로막은 핵심 요인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비록 본문에서 다루지는 못했지만, 2007~09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정세와 국제정세의 변화 역시 대만과 한국에서 정치위기가 심화하는 데 영향을 끼친 매우 중요한 요인이다. 금융위기 이후 장기침체와 소득불평등 확대로 인한 사회적 불만은 유권자의 정권 심판과 교체 심리의 바탕이 되었고, 기존의 정치세력은 책임 있는 대안을 내놓지 못하면서 단지 정권 재창출을 위해 그러한 사회적 불만을 동원하기에 바빴다. 그런 가운데 중국·러시아·북한을 중심으로 권위주의가 강화되면서, 냉전 시기의 지정학적 단층선을 따라 동아시아에서 대만 문제와 한반도 문제가 부각되었다. 이는 양국에서 대외정책 방향성을 둘러싼 국내 정치의 양극화와 이념분쟁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정치양극화가 국가정체성을 두고 격화한 상황에서 다시금 분점정부 상태가 발생하자, 대만과 한국 모두 입법부와 행정부 간에, 입법부 내의 정당 간에 극심한 정치적 갈등이 폭발하면서 헌정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오랫동안 사회운동은 체제의 반대자로서, 법치나 헌정을 단지 지배계급의 착취를 재생산하기 위한 위선이나 기만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면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제기하는 것을 사회운동의 최우선 과제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헌정에 대한 이러한 불신은 물론 한국의 현대사 전반이 ‘헌정주의 없는 헌법’의 대표적 사례이기에 발생한 현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한국 민주주의와 민주정의 위기를 헌정주의의 결여 내지는 비자유주의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면, 사회운동 역시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통치자의 권한을 법의 지배로 제한한다는 헌정주의의 원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2016년 촛불운동과 탄핵국면에서 개헌에 실패하면서,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통치구조의 결함을 해결하지 못했던 역사를 뼈아프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후 문재인 정부에서는 대통령실이 행정부보다 우위에서 국정운영을 주도하면서 ‘청와대 정부’라고 불릴만큼 제왕적 대통령제가 오히려 강화됐고, 적폐청산을 앞세운 ‘민주화 세력’의 자기제한 없는 권력 행사와 사법의 정치화로 인한 헌정주의의 위기가 한층 심화했다. 정권교체 이후 분점정부 상태가 나타난 윤석열 정부에서는 정치양극화가 극단화되면서, 야당의 무리한 탄핵 남발과 대통령의 초헌법적 권한행사라는 초유의 사태를 거쳐 내전을 방불케 하는 정세가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헌정 전반의 위기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면, 제왕적 대통령제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통치구조를 개편하는 것이 한국 민주정의 퇴보와 붕괴를 막는 데에 필수적임을 인식해야 한다. 누구나 민주주의와 헌정의 위기를 말하는 때에, 사회운동이야말로 정치양극화의 한 축을 자임하거나 체제의 반대파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헌정주의의 의미와 원리를 깊이 숙고하며 한국 사회에서 정치를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토대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를 모색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