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의 무기, 현대화폐이론
마르크스적 비판
현대화폐이론(Modern Monetary Theory, 이하 MMT)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특히 이 이론은 미국 민주당 내 몇몇 유력 인사들의 정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지난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 소위 ‘샌더스 열풍’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대표적이다. 2016년 샌더스 캠프에서 수석 경제자문역을 맡았던 스테파니 켈튼 스토니브룩 대학교 교수는 MMT 이론의 핵심이론가다. ‘녹색 뉴딜’로 인기몰이 중인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즈 민주당 하원의원도 MMT 이론을 지지하는 입장이다. 최근 샌더스 의원이 2020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자, MMT를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 되고 있다. 폴 크루그먼, 래리 서머스와 같은 유명한 주류경제학자들이 워싱턴 포스트, 뉴욕타임즈 등에 MMT 비판 글을 기고한 것이다.
MMT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 화폐의 본질은 세금 지불수단이다. 시민의 절대적 의무인 세금납부는 정부가 발행한 화폐로만 이뤄질 수 있다. 상품을 구매하는 교환수단으로서 화폐의 기능은 세금 지불 수단에서 파생된 것이다. 정부는 화폐를 부채 증서로 발행하고, 민간은 그 화폐를 자산으로 보유한다. 국가의 화폐 발행 능력에 한계는 없으며, 국가 지출은 세수에도 제약받지 않는다. 정부가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재정적자를 늘려도, 이는 민간자산 증가로 귀결된다. 정부는 적자재정으로 완전고용과 민간자산 증가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대부분 현대화폐이론의 입문서 격인 『균형재정론은 틀렸다』(L. 랜덜 레이, 책담, 2017.)에 정리되어 있다.
MMT는 수십 년 전부터 존재했지만, 유독 지금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이유가 있다. 2007~09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대침체(Great Recession)가 회복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만이 대규모 감세정책을 통해 단기적 호황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유럽과 일본은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심지어 미국도 위기 이전으로 돌아갈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앞날이 보이지 않는 저성장 시대에 대중들은 ‘환상적 해결책’을 원하고 있다. MMT는 국가가 무한정 돈을 풀어서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그릇된 관념을 이론으로 체계화해서 대중에게 설파한다. 포퓰리즘 정치이론을 경제학적 용어로 바꿔 쓴 것이다.
하지만 MMT는 경제학적 오류가 많다. 비단 주류경제학의 관점에서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도 틀렸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 저성장의 시대에 ‘환상’에 불과한 MMT가 확산되는 것은 위험하다. 만약 어떤 정치세력이 MMT를 내걸고 집권한다면, 곧바로 그 약속을 뒤집어야만 할 것이다. 실현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리자가 채택한 이론’이라고 선전하는 『균형재정론은 틀렸다』의 표지는 그런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시리자는 당선 후 MMT가 아니라 유럽중앙은행이 요구한 긴축재정 정책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이해를 돕기 위해 세부적인 내용들은 과감히 생략하고 뼈대만 훑고자 한다. 또 브뤼노프, 폴리, 윤소영이 정리한 마르크스의 화폐금융론을 이론적 근거로 삼는다.
마르크스의 화폐금융론과 자본주의 금융시스템
먼저 용어부터 정리하자. 이 글에서는 마르크스의 화폐금융론에 따라 화폐와 신용을 엄격히 구별한다. 단, 실제 자본주의 화폐금융 시스템에서는 화폐와 신용의 구분이 모호한 지점들도 존재한다.
마르크스 화폐이론에서 화폐의 본질은 사회적 총노동이 생산한 총부가가치를 표현하는 ‘보편적 등가물’이다. 폴리가 쓴 『자본의 이해』에 나오는 예를 들어보자. 미국에서 5천만 명의 생산직 노동자가 총 830억 시간을 일했고, 2조 5000억 달러의 부가가치를 생산했다고 가정하자. 즉, 2조 5000억 달러만큼의 새로운(‘부가’) 상품을 만들어서 시장에서 팔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1시간의 노동은 30달러만큼의 부가가치를 만들어 냈고, 반대로 1달러는 1/30시간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1달러의 화폐가 얼마만큼의 노동시간을 표현하는지 결정하고 화폐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공식적으로 화폐는 국가의 부채다. 다만 현재의 관리통화제도에서 국가가 이 부채를 갚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화폐는 실제 상품과 서비스 거래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소량의 현금 거래에서만 쓰일 뿐이다. 자본가나 노동자가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은 대부분 은행이 발행한 신용, 즉 예금 잔고다. 새로운 신용은 은행이 대출을 실행하는 순간 생성된다. 그러나 은행이 제한 없이 무턱대고 신용을 만들 순 없다. 두 가지 제한이 있다. 첫 번째 제한은 바로 이윤율이다. 예컨대 이윤율이 낮은 상황에서는 대출을 받으려는 자본가나 노동자가 적기 때문에 대출을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다. 두 번째 제한은 바로 국가의 관리·감독이다. 국가는 통화정책, 금융감독 등을 통해 은행의 신용 발행을 제한한다. 예컨대 자기자본의 5배까지만 대출을 할 수 있게 해준다든가, 예금액의 몇 배수만큼만 대출할 수 있게 강제하는 규칙 등이 그것이다.
그렇다면 화폐와 신용은 어떤 관계일까? 몇몇 결정적 순간에 신용은 화폐로 지불·결제되어야 한다. 대표적으로 세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예금자가 현금을 인출할 때다. 둘째, 은행 간 결제가 필요할 때다. 예컨대 서울은행이 인천은행에 10억 원을 지불할 때는 신용으로 지불할 수 없고, 화폐로 지불해야 한다. 셋째, 은행 또는 예금자가 정부와 거래할 때다. 정부에게는 신용이 아니라 화폐로 지불해야 한다. MMT는 세 번째 경우를 화폐의 존재이유로 특권화 하지만, 실제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도 중요하다.
보통의 경우에 신용이 화폐 양보다 훨씬 더 많다. 예컨대 1960년대 미국에서는 신용의 양이 화폐의 3배쯤 됐다. 은행과 은행, 은행과 정부 간 거래는 서로 줄 돈과 받을 돈을 상계하고 나면 실제 상품과 서비스 거래에 쓰인 신용의 1/3 정도만 화폐로 지불하면 됐던 것이다. 그러나 남은 신용 채무는 반드시 화폐로 결제되어야만 한다. 결국 화폐가 최종적으로 모든 결제와 지불을 보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사례를 들어 설명해보자. A 자본가가 상품 생산에 필요한 기계와 재료를 사기 위해 서울은행에서 100만 원을 빌린다. 이 100만 원은 신용이다. 서울은행은 A자본가에게 100만 원의 신용을 ‘사전인정’해주었다. 이후 A자본가가 상품 생산과 판매에 성공하게 되면 이 신용은 시장에서 ‘인정’받게 된다. A 자본가는 B 자본가에게서 기계와 재료를 구입한다. A는 인천은행에 있는 B의 계좌로 대금을 보낸다. 이때 A은행은 ‘화폐’ 100만 원을 B은행으로 보낸다. 신용이 화폐로 결제된 것이다. 화폐는 국가가 직접 보증하고 관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가가 100만 원에 대해 ‘사회적 가인정’을 한 것이다.
여기서 A 자본가가 상품 생산에 성공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과정에서 부가가치가 생겨나기 때문에 생산된 상품은 300만 원 어치가 된다. 이 상품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순간, 100만 원의 신용은 사회적으로 인정된다. 300만 원 어치의 상품은 대개 신용으로 지불된다. 그런데 현재 사회에는 서울은행이 발행한 100만 원의 신용 밖에 없다. B가 A의 상품을 100만 원 어치 산다고 해도 200만 원이 모자란다.
여기서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생긴다. 만약 이윤율이 상승하는 경제성장 국면이라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C가 충남은행에서 200만 원을 대출 받아 A의 상품을 구입한 후 그것으로 다시 상품을 생산하면 된다. C가 생산한 상품은 나중에 A가 살 수도 있다. 즉, 자본주의 금융시스템이 적절한 시기에 신용을 공급하고 회수해 상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과 지연을 완충한다는 것이다.
반면 이윤율이 하락하는 경제위기 국면이라면 문제가 생긴다. 아무도 대출을 받지 않아 상품을 유통할 신용이 부족해지는 것이다. 만약 위기가 더 심화되어 서울은행이 대출해 준 기업이 줄줄이 파산한다고 가정해보자. 서울은행이 가진 화폐가 동나게 된다. 다른 은행으로부터 들어올 돈은 없고 나갈 돈만 많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화폐를 빌려서 다른 은행에게 지불할 수 있겠지만, 더 이상 빌릴 수 없게 되면 서울은행은 파산하게 된다.
이때 구원투수로 등장하는 게 바로 국가다. 국가는 기준금리 조작과 국채 사고팔기를 통해 신용의 양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기준금리를 낮추면 신용이 증가한다. 국채를 사들여도 신용이 증가한다. 여기에는 복잡한 이유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설명을 생략한다.
물론 국가가 구원에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단기적 경기변동에 의한 위기라면 구원에 성공할 수 있지만, 장기적 이윤율 하락에 의한 위기라면 구원에 실패한다. 그리고 이런 구원은 인플레이션이라는 결과를 낳는다.
마르크스주의의 시각에서 볼 때, 물가는 노동생산성과 화폐 가치에 반비례한다. 물가가 하락하고 증가하는 현상을 두 가지 경우를 들어 살펴보자. 첫째, 화폐가치가 일정한 경우 노동생산성이 증가해서 물가가 하락하는 것이다. 노동생산성 증가는 시간당 생산할 수 있는 노동생산물의 양이 증가하는 것이다. 스마트폰이 처음 나왔을 때 가격보다 지금 가격이 훨씬 낮은데, 이는 디플레이션과 무관하다. 노동생산성이 증가했기 때문에 물가가 떨어진 것이다. 둘째, 노동생산성이 불변인 상태에서 화폐 가치가 감소해서 물가가 올라갈 수 있다. 이 경우를 인플레이션이라 한다. 즉, 노동생산성과 무관하게 화폐 가치와 물가가 함께 변동하는 경우를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이라고 하는 것이다. 화폐 가치는 기본적으로 국가의 지불능력에 비례한다. 국가의 예상되는 지불능력에 비해 너무 많은 화폐를 발행하는 경우에 화폐가치가 하락할 수 있다.
1950~60년대 미국은 단기적인 경기침체가 올 때마다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사용했다. 결과적으로 생산되는 부가가치, 또는 노동생산성 증가율에 적합한 신용량보다 더 많은 신용이 발행되었다. 이는 신용의 가치를 떨어뜨렸지만, 노동생산성과 이윤율이 증가하는 국면이었기 때문에 완만한 물가 상승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1970년대 들어 이윤율과 노동생산성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화폐 가치의 하락과 맞물려 급격한 물가상승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1953년 1달러의 화폐가치는 1/30 노동시간, 자동차 1대가 3만 달러였다고 가정해보자. 자동차 1대의 가치는 1000 노동시간에 해당한다. 노동생산성이 상승해서 1963년에 자동차 1대의 가치가 500 노동시간으로 하락했다. 그런데 화폐가치도 하락해서 1달러가 1/60 노동시간이 되었다. 그러면 자동차 1대의 가격은 3만 달러로 동일하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비례한다고 가정해보자. 물가는 변동이 없었지만 임금이 두 배로 올랐으니 자동차를 한 대 몰던 노동자는 자동차를 두 대 몰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상황을 가정해 보자. 1973년 1달러의 화폐가치가 1/30 노동시간, 자동차 1대가 3만 달러(1000 노동시간)다. 1983년이 되었지만 노동생산성이 제자리여서 자동차 1대의 가치는 그대로 1000 노동시간이다. 그런데 화폐가치가 하락해서 1달러가 1/60 노동시간이 되었다. 그러면 자동차 1대의 가격은 6만 달러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노동생산성에 비례한다면 임금은 오르지 않았다. 자동차를 한 대 몰던 노동자는 자동차를 몰 수 없게 된다.
마르크스의 화폐금융론을 대략적으로 살펴봤으니, 이제 MMT에 대한 비판을 전개해보자.
MMT식 ‘화폐’에는 실물경제의 기초가 없다
『균형재정론은 틀렸다』를 보면, MMT는 화폐에 대한 이론이므로 실물경제에 대해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바로 MMT의 약점이 숨어있다. MMT는 화폐가 실물경제의 기초를 가지지 않고, 단순히 국가의 신용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즉 노동과 상품 생산 없이도 국가가 보증만 하면 화폐가 생성된다고 주장하는 셈이다.
MMT는 정부가 적자 재정을 펼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정부의 적자로 인해 발생한 부채가 곧 민간의 자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근거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모든 ‘금융자산’과 ‘금융부채’는 모두 상계될 수 있다. 예컨대 B라는 자본가가 A은행에서 100만원을 빌렸다고 가정하자. B에게는 100만원의 금융부채(빚)가, A은행에게는 100만원의 금융자산(대출계약)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금융자산과 금융부채의 양은 같으니 민간부문 전체 차원에서 순금융자산은 0이다. 이제 이걸 민간부문과 정부부문의 수준에서 바라보자. 정부가 빚을 내거나, 세수보다 더 많이 지출해서 적자 재정을 운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정부는 ‘금융부채’가 생기지만, 민간에는 금융자산이 생긴다. 민간이 부유해지는 것이다. 정부는 적자가 쌓이지만, 어차피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낼 수 있으니 문제가 없다. 오히려 정부가 흑자를 낸다면, 민간이 가난해진다.
MMT식 설명에서는 상품 생산 과정이 없다. 앞서 들었던 사례를 통해 살펴보자. A 자본가가 서울은행에 빌린 돈을 상환하면 A 자본가에게서는 100만 원 현금이 없어지고, 은행은 100만 원의 대출계약이 사라진다. 소위 ‘금융자산’과 ‘금융부채’가 상계되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A 자본가도, 은행도 남는 게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남은 게 있다. 노동 과정에서 만들어 낸 노동생산물과 부가가치, 그에 기초한 임금과 이자와 세금과 이윤이 남았다. 물론 A가 생산한 상품을 모두 판매하려면 신용이 더 필요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 화폐량 증가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신용은 화폐로 지불·결제되어야 하는 결정적 순간들이 있기 때문이다. MMT는 화폐량이 증가했으니 국가의 부채가 증가했고, 민간의 부가 증가하지 않았냐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인과관계를 거꾸로 설명하는 것이다.
부가가치가 생겨나고 노동생산물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민간의 부가 증가했고, 이를 토대로 화폐량과 국가 부채가 증가한 것이다. 부가가치 생성과 상품 생산 없이 화폐량만 증가하는 경우엔 화폐가치가 하락할 뿐이다. 예를 들어 노동생산성이 자동차 1대당 1000 노동시간으로 변화가 없었는데, 화폐량이 2배로 증가해서 화폐가치가 1/30에서 1/60으로 감소했다는 앞의 가정으로 돌아가보자. 국가의 부채는 2배로 증가했지만, 자동차 가격도 2배로 오른다. 노동생산성에 비례해 받던 노동자의 임금은 변함이 없으므로, 노동자는 자동차를 살 수 없게 된다. 물론 예외적으로 화폐량이 증가하지만 물가가 상승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뒤에서 설명한다.
노동생산성 증가 없는 MMT식 해법은 인플레이션만 유발한다
MMT의 주장대로 국가의 화폐 발행능력에 제한이 없어서 세금을 걷지 않고, 화폐를 발행해 지출하는 경우를 가정해보자. 여기서는 노동생산성이 변화하지 않는 상황을 가정한다. 그러면 물가가 오르고 화폐가치가 하락하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여기에 대해서 MMT 측의 반박도 있다.
첫째, MMT는 경제 가동률이 100%가 아닌 이상 화폐를 공급하면 수요 증가로 가동률이 상승한다고 주장한다. 즉 화폐 공급만큼 상품생산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MMT는 완전고용과 가동률 100%의 이상적 경제가 구현되지 않는 한, 통화공급으로 상품가격만 상승하는 인플레이션 상황은 걱정할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자본축적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가동률은 단기적으로 수요에 따라 상승, 하락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다. 왜냐면 가동률이 상승할 경우 자본은 새로운 투자를 단행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가동률이 유지되는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윤율 하락이다. 이윤율이 하락하는 국면에서는 자본투자 자체가 정체하면서 수요를 증가시켜도 생산이 증가하지 않는다.
이런 장기적 이윤율 저하 국면에서는 노동생산성도 정체되기 때문에 화폐를 공급하면 화폐가치가 하락하고 물가만 오른다. 가동률은 장기에서 변수가 되지 못한다. 이윤율 하락 국면에서는 단기적으로 경기부양이 이뤄지더라도 그 기간이 점점 더 짧아진다. 생산 그 자체의 문제를 화폐 공급으로 해결하진 못한다.
둘째, MMT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면 국가가 국채를 팔고 세금을 올리면 된다고 주장한다. 국채를 팔면 이자율이 올라가고, 기업과 가계가 대출을 줄여 투자와 소비가 감소한다. 세금을 올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투자와 소비가 감소한다. 따라서 인플레이션을 금방 억제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건 긴축정책이다. 인플레이션을 유발시켜 놓고, 긴축정책을 펼친다는 건 약 주고 병 주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할 혼란과 손실은 막대할 것이다. 최악의 경우, 국채 판매가 실패할 수도 있다. 인플레이션이 발생한 국가의 국채는 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긴축정책이 실패하면 초인플레이션, 자본 도피, 경제 위기가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셋째, 대외부채만 없으면 인플레이션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문제가 없다는 주장이다. 큰 폭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대외부채다. 급격한 환율변동이 발생하면서 달러를 구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국가에 따라 외환위기나 외채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래서 MMT는 대외부채를 내지 말고 그냥 국가가 화폐를 발행해서 쓰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부가가치 창출 없는 통화 발행은 인플레이션만 발생시킨다. 대외부채를 대신해서 자본을 확충할 수 없다. 또 수입에도 어려움을 겪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 국가 중 수입 없이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국가는 없다. 제아무리 땅이 넓어도, 기술력이 좋아도 반드시 수입해야 하는 원자재나 정밀기계가 있다. 인플레이션은 수입 자본재 비용을 높여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넷째, 미국이 2007~09년 금융위기 이후 막대한 달러를 발행해 수량 완화를 실시했는데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수량 완화와 MMT식 적자재정은 차이가 있다.
2007~09년 금융위기 당시 수량 완화는 중앙은행이 파산 위기에 처한 민간은행의 자산을 매입해준 것이었다. 국채도 샀지만, 이례적으로 국채가 아닌 부도난 채권(주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때문에 부도가 났다)도 매입했다. 매입비용은 세금 징수가 아니라 화폐를 발행해서 마련했다. 여기서 MMT의 주장이 나온다. 화폐를 발행해서 은행 자산도 매입해 주었는데, 왜 일자리 창출은 못하냐는 것이다.
그러나 수량 완화 정책으로 늘려준 게 ‘은행’이 가진 화폐라는 게 중요하다. 이 화폐가 사회에 풀려 인플레이션에 영향을 미치려면 은행이 대출을 실행하고 신용이 증가해야 한다. 실제 상품과 서비스 거래는 대부분 신용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은행 대출은 은행이 보유한 화폐 증가량에 비례해서 증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은행에 쌓여있는 화폐가 유통되는 신용보다 많아지는 상황이 발생했다.
반면 MMT가 주장하는 일자리 창출은 다르다. 정부가 노동자를 고용하면, 임금은 노동자의 시중은행 계좌로 들어간다. 이 임금은 상품과 서비스 거래에 바로 이용된다. 노동생산성이 증가하기 어려운 현재의 이윤율 하락 국면에서, 물가상승과 인플레이션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MMT는 기축통화 발행국의 특권적 사례를 일반화 한다
비록 인플레이션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지난 2007~09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의 수량 완화 정책은 엄청난 규모였고, 매우 이례적이었다. 중앙은행이 부실 채권까지 사주는 경우는 미국 역사 상 사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전통적 통화정책이라고 한다. 이는 당시 상황이 얼마만큼 심각했는지를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조금 비틀어서 생각해 보면 왜 다른 국가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일까? 한국은 아니었지만, 은행이 심각한 부실채권 때문에 파산한 국가들도 많다. 그 국가들은 왜 화폐를 발행하여 은행을 살려주지 못했을까?
미국이 수량 완화 정책을 시행하고도 외환위기를 겪지 않는 이유는 달러화가 기축통화로서 갖는 특권적 지위 때문이다. 세계의 대부분의 나라들은 수출과 수입 대금을 지불하기 위해 달러를 쓸 수밖에 없다. 또 금융위기를 예방하고 급격한 환율 변화를 막기 위해서는 미국 국채를 준비자산으로 보유할 수밖에 없다.
다른 국가가 수량 완화 정책을 미국만큼 시행했다면 국채 가격이 폭락하고, 자본 도피가 발생하고, 심각한 외환위기를 겪었을 것이다. 본래 채권의 부실화로 인한 손실은 해당 은행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런데 부실채권을 달러로 바꿔주는 일은, 달러 또는 미국 국채를 들고 있는 모든 경제주체와 이 손실을 나누는 일이다.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가 이런 일을 했다면 그 국가의 화폐나 국채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곧 그 국가에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외국인들은 당연히 국채를 포함한 모든 자산을 팔아 외국으로 도피할 것이고, 내국인도 법적 강제가 없다면 통화를 더 안전한 자산(외국 통화나 귀금속 등)으로 바꿀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비전통적 수량 완화 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경제적, 군사적으로 세계 헤게모니 국가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강력한 산업생산력을 가지고 세계경제를 이끌어 나갔다. 따라서 달러가 기축통화로 기능할 수 있었다. 관리통화제도에서 화폐의 가치란 일차적으로 국가가 가진 부의 가치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산업생산력이 떨어진 지금까지도 기축통화에는 달러 외의 대안은 없다. 지난 30년 간 구축해놓은 금융세계화 체제 덕분이다.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는 수출을 통해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 국채로 바꿔 비축하고 있다. 산유국들도 마찬가지로 석유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로 미국 국채를 매입하고 있다. 따라서 달러가 기축통화로서의 지위를 잃고 가치가 폭락한다면, 세계경제가 붕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화폐가치의 크기가 국가의 지불능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달러의 가치도 궁극적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걸 함의한다. 이렇듯 미국의 지불능력이 완전하지는 않은 상황에서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군사력이다. 미국의 압도적인 군사력은 미국이 산업생산성 하락을 겪고도 세계 헤게모니 국가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하고 있다.
MMT는 ‘달러 발권이익’의 존재를 부인한다. 미국이 통화를 발행해서 쓰듯이, 다른 국가들도 통화를 발행해서 쓰면 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못하는 게 아니라 안하고 있다고 한다. 외국에서 돈을 빌려오지 않고, 환율 변동에 무감각해지면 얼마든지 통화를 발행해 지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외부채가 하나도 없고, 외국에서 반드시 수입해야 할 상품이 없는 국가가 존재하는가? 없다. 미국처럼 하고 싶어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미국도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미국은 1970년대 산업부문 이윤율 하락 이후, 금융세계화를 통해 이윤율을 반등시켰다. 그러나 2007~09년 금융위기를 계기로 금융세계화 모델이 위기를 맞았다. 언젠가 미국의 세계 헤게모니와 기축통화 발행국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릴 수 있다.
특히 재정위기 발생 가능성이 중요하다. 재정위기 발생 시 국채 이자를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국채 가격 폭락과 달러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미국은 이미 재정위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 1979년 미국의 단기국채에 대한 부도가 발생했다. 그 결과 달러가치가 하락하면서 1980년 초에 금값이 온스당 2400달러까지 상승했다. ‘금으로의 도피’가 발생한 것이다.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상실하면, 미국은 더 이상 비전통적 수량 완화 정책으로 손실을 나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미국 주류경제학자들은 보호무역주의와 감세로 점철된 트럼프식 경제정책을 경계하고 재정위기의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폴 크루그먼과 래리 서머스 같은 유명한 경제학자들이 MMT의 주장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MMT식 포퓰리즘이 아닌, 냉철한 정세 판단
MMT의 거두 스테파니 켈튼은 이탈리아에서 겪은 일화를 소개하며, MMT의 대중적 인기를 자랑한다. MMT 학파가 이탈리아의 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적이 있었다. 학술대회는 대형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몰려드는 인파로 인해 발표자들이 연단에 오르는 데 애를 먹었다는 것이다. MMT의 주장을 경제학적 검증 없이 듣는다면 당연히 혹할 수밖에 없다. 세금 한 푼 걷지 않고도 모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준다니, 얼마나 황홀한 주장인가.
MMT 학자들이 ‘록스타’와 같은 인기를 얻은 나라답게 이탈리아는 현재 포퓰리즘 정당들이 집권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2007~09년 금융위기와 유럽재정위기 이후 계속 1%대 경제성장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집권에 성공한 포퓰리즘 세력은 얼핏 보면 MMT의 주장과 유사한 두 가지 경제 정책을 주장하고 있다.
첫 번째는 소위 ‘이탈렉시트’(Italexit), 즉 이탈리아가 EU를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MMT 역시 그리스 재정위기의 해법으로 EU 탈퇴와 주권통화 발행을 주장한 바 있다. 현재 이탈리아 제1정당인 오성운동은 총선 과정에서 이탈렉시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2018년 5~6월 내각 구성 과정에서도 오성운동은 이탈렉시트를 주장해 온 경제학자 파올로 사보나를 경제장관으로 추천했다. 이 때문에 5~6월 거치면서 국가부도 가능성을 반영하는 신용부도스왑(CDS) 스프레드가 약 3배 증가했다. 최종적으로 이탈리아 경제장관으로 임명된 지오바니 트리아가 이탈렉시트 논의는 하고 있지 않다고 밝힘으로써 위기를 수습했다.
두 번째, 적자 재정을 주장한다. 이탈리아 정부의 부채는 현재 GDP의 130%에 이른다. EU는 한해 재정적자 규모를 GDP대비 3% 미만, 누적부채는 GDP대비 60% 미만으로 억제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전 정부에서는 2019년 예산안 예상 재정적자 규모를 0.8%로 감축하겠다고 EU 집행위원회에 약속한 바 있다(2018년 재정적자 예상치는 1.6%). 그러나 현 정부는 2.4% 재정적자가 예상되는 예산안을 제출했다. 결국 EU가 제재 가능성을 경고하고 협상에 들어갔고, 2.04%로 조정된 예산안이 의회를 통과했다.
이탈리아 정부는 확장 재정 정책이 경제를 성장시켜 결국 재정적자를 줄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확장된 재정이 기본소득, 연금개혁 폐기 등에 주로 쓰이기 때문에 경제성장 효과가 크지 않을 거라고 예측한다. 오히려 부채 증가로 인해 정부 부채에 대한 이자율이 상승하여 GDP 성장률을 떨어뜨릴 거라는 예측이 더 많다. 시장의 우려를 반영하여, 예산안이 발표된 10월 이후 이탈리아 국채 신용부도스왑 스프레드가 다시 크게 증가했다.
MMT는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서도, 주류경제학의 입장에서도 경제학적 근거가 없다. 따라서 포퓰리즘 세력은 MMT를 집권에 활용하지만, 실제 실행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MMT를 실행에 옮기려는 낌새만 보여도 국가 부도 위기를 맞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변하지 않은 상황에서 화폐를 이용해 사회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 브뤼노프와 폴리도 자본주의 신용시스템을 통해 화폐자본을 ‘사회화’하려는 시도는 환상에 불과하며, 실행가능하지 않다고 비판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용 공급을 통해 지속가능한 자본주의를 만들어보려는 MMT 이론이 아니다. 사면초가의 어려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냉철한 정세 판단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