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2 여름. 17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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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독자에게

사회진보연대 국제이주팀 |

1. 노동자연대의 논평에 대하여

 
 
노동자연대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사회진보연대가 발표한 소책자 『우크라이나에 평화를』(2022.03.31.)과 《사회운동포커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2022.04.04.)에 대해 논평하는 기사를 냈습니다. 강동훈 기자 명의로 발표된 기사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에 진보성이 있는가”(2022.04.20.)의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회진보연대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강대국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 사라진 상태로 오인하고 있으나, 이는 카우츠키가 이야기한 ‘초제국주의론’의 변종으로 생각되며, 노동자연대가 보기에 냉전과 그 이후에도 제국주의 국가 간 경쟁은 계속되어 왔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도 그 연장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규칙 기반 질서’는 미국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앞세운 제국주의에 불과하며, 미국 주도의 ‘규칙 기반 질서’에 진보성을 부여하면서 러시아 비판에만 매진하는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은 길을 잃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좌파들이 한목소리로 미국을 규탄했던 것과 달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는 이와 비슷한 논쟁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영국의 정치평론가인 폴 메이슨과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알렉스 캘리니코스 간 논쟁에서 캘리니코스가 주장한 것도 노동자연대와 정확히 같은 내용입니다. (폴 메이슨이 먼저 SWP의 성명을 비판했기 때문에 선후는 다릅니다.) 트로츠키주의 분파들 내에서도 러시아 옹호 입장에서부터, 반미/반러, 러시아 규탄 등 다양한 스펙트럼의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이해나 국제질서에 관한 개념들을 들여다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되어 ‘필자가 독자에게’ 지면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2. 오독 혹은 오해 

 
 
먼저 노동자연대의 의도적인 오독을 먼저 지적하겠습니다. 노동자연대는 “사회진보연대는 이번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미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본질을 폭로해야’ 한다는 좌파 일각의 주장이 ‘너무나 도착적인 인식’이라고 주장한다”라고 사회운동포커스의 문장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저 문장만 보면 마치 사회진보연대가 미 제국주의에 대한 투쟁을 백안시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글 전체의 핵심은 오히려 인용된 문장 앞에 언급된, “이번 침공을 계기로 러시아의 침략을 비난하는 대신”에 있습니다. 

한국 사회운동 진영에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신중한 접근을 넘어서, 침략자인 러시아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거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의 이유로 든 궤변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러시아의 전쟁범죄나 전황에 대한 가짜뉴스를 퍼트리거나, 심지어 우크라이나를 미국의 꼭두각시로 비난하는 입장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습니다.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민주노총 성명서(「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을 중단하고 즉각 철군하라!」, 2022.03.30.)를 두고 기회주의적이라고 비난하며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의 진실’과 같은 내용을 배포하는 《민플러스》 같은 소위 ‘진보언론’이나, 비슷한 주제로 조합원 교육을 진행한 일부 민주노총 가맹조직도 있습니다. “러시아 철군 요구는 기회주의적 발상”, 《민플러스》, 2022.04.04. / “우리가 몰랐던 우크라이나 사태의 3가지 진실”, 《민플러스》, 2022.05.09. / “젤렌스키 자산 6억 달러, 월급 78만 달러, 연 수입 1억1천3백만 달러”, 《민플러스》, 2022.05.16. / “우리가 몰랐던 우크라이나와 ‘나치’ 관계”, 《민플러스》, 2022.05.26. 등. 

과거에는 이들과 미국의 패권적 행태에 대한 비판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반미’가 실제로는 인권, 민주주의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전혀 기반하고 있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 셈입니다. 심지어 트로츠키가 소련을 비판할 때 쓴 표현인 ‘타락한 노동자 국가’조차 못 되는, 오늘날의 러시아를 이렇게 비호하는 것은 냉전 시기의 진영 논리에도 미달합니다. 

이러한 입장과 실천은 매우 위험할 뿐만 아니라, 진보적 사회운동의 존재 이유를 근본에서 뒤흔드는 것이라는 점에서 지금 가장 우려스러운 흐름입니다. 그래서 글의 제목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부터 글 말미까지 일관되게, 나토의 동진이나 미국의 패권적 행태는 그 자체로 비판의 대상이지만, 이를 핑계 삼아서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규탄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나토를 비판하고 미국의 세계 전략을 비판하고 무장한 세계화를 비판하는 것과 러시아 규탄은 배치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노동자연대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런데도 노동자연대가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을 논평하면서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까지 언급한 것에는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을 친미, 친제국주의로 형상화하려는 의도와 함께 노동자연대의 제국주의에 대한 독특한 이해가 깔려있다고 생각합니다. 
 
 

3. 고전적 제국주의와 탈냉전 시대의 지정학적 경쟁

 
 
노동자연대는 식민지 국가들이 독립한 상황은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구 제국의 해체를 통해 자유무역 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의 결과일 뿐이며, 냉전과 냉전 이후에도 제국주의적 경쟁은 계속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는 사회진보연대가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에 속아 그 안에서 진행된 제국주의 경쟁을 보지 못한다는 지적으로 이어집니다. “사회진보연대는 미국이 만들려 한 국제질서는 강대국들 사이의 군사적·지정학적 경쟁이 사라진(또는 사라져 가는) 질서라고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언급이 그것인데요,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지만, 제국주의의 의미를 매우 확장하여 이해하는 노동자연대에 있어서는 피할 수 없는 오류이기도 합니다. 

노동자연대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이 IMF와 세계은행을 통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를 창조했고, 다른 국가들도 이러한 국제질서에 합류해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미국은 여기에 제국주의적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나토를 창설하였기 때문에, 소련 붕괴 이후에도 해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설명이 카우츠키의 ‘초제국주의’론에 가까워 보이긴 합니다만, 노동자연대는 이 모든 상황을 제국주의의 새로운 단계로 이해합니다. 

노동자연대가 인용한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설명에 따르면, 2차 대전 이전의 제국주의 시기를 첫 번째 고전적 제국주의, 냉전 시기를 두 번째 제국주의인 초강대국 제국주의, 냉전 해체 이후의 시기를 세 번째 단계의 제국주의라고 합니다. 제국주의 등장 이후 현재까지 그 대결 양상과 방법이 변했을 뿐 전부 제국주의로 파악하자는 것입니다. 실제로 캘리니코스는 아주 구체적으로 현재 제국주의 국가를 미국, 중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6개국으로 파악합니다.
 
노동자연대는 이렇듯 형용사가 아닌 개념으로서 제국주의를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론은 고전적 제국주의와는 분명히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변화된 경쟁의 양상에 대해 제국주의라는 개념을 사용해야 필연적인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전후 식민지 국가들의 독립과 자유무역의 확립, 브레튼우즈 체제(금본위제)의 해체와 중국의 부상,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러시아 우크라이나 침공까지 모든 과정을 (단계를 구분했다고는 하지만) 제국주의적 경쟁이라고 부를 요량이라면, 강대국 간의 지정학적 경쟁이라는 일반적인 용어로 부르면 안 될 이유는 뭘까요? 캘리니코스도 지정학적 경쟁이 ‘수천 년 동안 지속돼’ 왔다는 인식은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제국주의라는 명명이 무엇이 중요한가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노동자연대에는 정치적 입장을 가르는 큰 준거점이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노동자연대는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미국의 제국주의와 러시아 제국주의가 맞붙는 대리전이기 때문에 둘 다 패배해야 한다는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경쟁이 본질적으로 제국주의적 경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고, 이를 제국주의적 경쟁으로 보는 이유는 자신들의 새로운 제국주의 개념에 따르면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지정학적 경쟁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종의 순환논증에서 제국주의냐 아니냐를 제외하면 중요한 판단지표가 없기 때문에 제국주의 명명이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노동자연대의 주장에 구체적인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중 하나는 노동자연대가 사회진보연대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나토의 동진이 있습니다. 노동자연대는 미국이 러시아의 반발을 불러올 것을 알면서 나토 동진을 결정했고, 이는 러시아와의 제국주의적 경쟁을 염두에 둔 것으로 파악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현실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아니라 자신들의 내러티브에 맞게 현실을 취사선택한 결과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토의 동진은 역설적으로 러시아가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주류 학계와 외교정책 입안자 사이에서 나토 동진에 대한 우려는 꾸준히 제기되어 온 문제였습니다. 동진이 가져다주는 이점은 모호하지만, 러시아를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는 확실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단계적으로 나토의 동진을 추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경제적, 군사적으로 러시아는 미국에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차와 2차 나토의 동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크게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반발하지 않았다기보다는 반발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1차 나토 확대에는 소련 붕괴 이후 혼란이, 2차 나토 동진 시에는 경제위기가 러시아를 집어삼키고 있었으니까요. 러시아는 애초에 지정학적 경쟁의 대상도 아니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에티엔 발리바르가 말한 대로, “서방은 ‘체제’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생각에서, 경제적, 이념적, 군사적, 그 모든 면에서 승리의 결실을 거두려 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정권을 바꿔가며 동유럽 국가들의 나토 가입을 추진한 것은 신자유주의적 세계시장의 규율을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고, 러시아의 반발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러시아의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나토의 동진이 러시아를 포위하기 위한 제국주의적 행보라고 해석하는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삼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4. 소위 ‘규칙 기반 질서’와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에 대하여

 
 
우리는 소위 ‘규칙 기반 질서’에 대한 언급을 몇 차례 했었고, 이를 매개로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긍정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있습니다. 일단 ‘규칙 기반 질서’는 1990년대 이후 많이 쓰이기 시작한 어휘이며, 미중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특히 많이 언급되었다는 점을 확인하겠습니다. 반면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는 2차 대전 전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념으로 흔히 민족자결주의와 자유무역을 바탕으로 하는 세계질서로 이해됩니다. 

자유주의적 국제질서는 민족국가에 부여된 주권을 기반으로 하는 베스트팔렌 조약의 ‘질서’와 영미가 주도한 ‘시장개방, 국제기구, 협력적 안보 공동체, 법치’ 등을 핵심으로 하는 ‘자유주의적 비전’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질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금본위제, 안보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얄타 체제’에서 출발했습니다. 미국과 소련이 공히 동의했던 ‘얄타 체제’는 강대국이 무제한적인 무력 투사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도록, 집단안전보장체제를 구성하는 것을 핵심으로 합니다.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국가의 공존을 보장하는 질서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련은 얄타 체제를 미국과 함께 설계하고 유지하는 주체였고, 러시아는 소련의 국제적 유산과 지위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리고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지금까지 주로 주장해 왔던 것은 얄타 체제로의 복귀, 즉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예전에는 사회주의였고, 지금은 권위주의일까요?)를 가진 국가의 공존을 인정하는 질서였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면서 러시아는 스스로 주장하던 바를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는 애초에 독립국가가 아니었다는 궤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소련 붕괴 이후 미국의 패권적 행보가 비판받는 것은 미국이 ‘자유주의적 비전’을 가지고 타국을 침략하고, 경제정책을 강요하면서 자기 자신이 주창하는 원칙을 자신의 이익에 따라 쉽게 깼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러시아가 ‘탈나치화’를 주장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은 미국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들었던 이유보다 하등 나을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노동자연대는 질서 그 자체를 제국주의와 등치시키면서, ‘단일한 강대국들도 규칙을 준수하도록 만들려는 미국과 약소국을 침략하는 미국은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을까’라는 번지수를 잘못 찾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노동자연대의 전후 국제질서에 대한 몰인식과 과도한 일반화는 ‘우크라이나의 친제국주의적 민족자결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까지 나가는 근거가 되었다고 봅니다. 

레닌은 당내 투쟁 과정에서 민족 문제에 깊이 천착하였으며, 급진적 민족자결주의를 원칙적으로 확립합니다. 하지만 레닌은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무조건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고 구체적인 사안에서는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노동자연대가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는 ‘친제국주의적 민족자결권’도 이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노동자연대의 근거가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돕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 전쟁이라는 것인데, 일방적으로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주장입니다. 아무리 사회주의 역사의 논쟁을 끌어오고, 모든 지정학적 경쟁을 제국주의로 명명하여,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분쟁을 제국주의 간 대리전으로 만든다고 하더라도 우크라이나의 자결권을 인정하지 않는 노동자연대의 입장은 혁명적 패배주의의 문제의식보다는 진영 논리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5.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의 세계사적 의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국제질서의 위기라고 분석하는 것이, 제국주의 충돌로 분석하는 것과 어떤 실천적인 차이가 있는지 궁금해하실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전쟁과 국제 정세의 변동을 기존의 질서가 붕괴하고 있는 국면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반면 노동자연대는 지금의 위기가 지난 70년 동안 작동해온 제국주의라는 동일한 논리의 연장선상이라는 입장을 가진 것으로 이해됩니다. 지난 70년 동안 강대국 간 직접적인 무력 충돌이 없었고, 자유무역은 규범으로 자리 잡았으며, 2번의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유럽에 통합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세계는 보호무역주의가 득세하고 있고,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을 경험했으며,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독일은 재무장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는 기존 질서의 붕괴입니다. 이 질서는 다시 돌아오기 바랄 정도로 정의롭지도 않았고, 복구가 가능할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기존 질서를 뛰어넘는 대안 없이, 그저 붕괴에 그치거나 대안에 못 미치는 전망만이 제출된다면, 이는 야만을 낳을 것입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20세기 초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지금이야말로 발리바르의 말처럼 “국제주의냐 야만이냐”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될 때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를 기존 질서의 붕괴 상황으로 파악하지 않고 전후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제국주의 경쟁의 연장선으로 보는 인식 아래에서는 그러한 질문을 던지기 어렵습니다. 발리바르는 2002년 프랑스의 진보 저널 《콩트르 탐》(Contre Temps)과의 인터뷰에서 아래와 같은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계급투쟁과 국제주의의 관계가 무엇인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용어를 동일시하는 것이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음을 인정하도록 강제되고 있습니다. 노동자 계급이 진보적인 방식이 아니라, 반동적인 양식으로 현재의 위기 상황에 반응할 위험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계급투쟁의 어떤 경향들이 국제주의의 요청들과 모순될 위험도 존재합니다.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있습니다. 우리는 계급투쟁도, 국제주의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둘의 결합이 자명하다는 것을 더 이상 믿을 수도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계급투쟁이나 국제주의에 대한 끈을 놓는다면, 어떤 형태의 야만이 나타날 것입니다."


홍콩의 민주화 시위와 미얀마 군부 쿠데타 반대 시위에 대해 “‘친미반중’ 대중운동은 지지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접근했던 흐름, 그리고 지금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명확히 확인되고 있는 흐름이 바로 발리바르가 이야기했던 그러한 위험일 것입니다. 한국 사회운동 전반이 노동자 국제주의라는 원칙을 버리면서 이를 계급투쟁의 이름으로 포장하려는 시도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사회운동이 더 나은 미래를 기획하고 행동하는 대신, 퇴행을 옹호하고 반동을 선동하는 것은 우리의 대안일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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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국제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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