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2 겨울. 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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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대투쟁에서 IMF 구제금융위기 이전까지

1987년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①

박준형 | 회원, 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

[연재의 취지와 구성]

지금의 한국 민주노조운동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부상하고, 전노협, 민주노총을 건설하며 성장한 운동의 유산이다. 1970년대 이전에도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들이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3저 호황으로 정점에 이른 한국경제의 성장과 산업노동자 인구의 팽창을 배경으로 하여, 민주화 운동과 급진화된 정치·사회운동과 결합해 민주노조운동이 새로운 단계를 맞았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1980년대 정세에서 시작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1990년대 본격화된 금융화, 세계화와 재벌의 과잉투자라는 조건에서 더욱 성장하며 조직적으로 민주노총 건설에 이르렀다. 민주노총은 건설 후 불과 1년여 만에 엄청난 규모의 총파업을 조직하는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96~97년 총파업에서 저지한 듯했던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은 불과 1년여 만에 IMF 구제금융위기를 맞아 다시 실행되었다. 그 이후 민주노조운동은 변화된 정세에서 산별노조 건설과 정치세력화 운동을 중심으로,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와 사회공공성 운동을 시도하면서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이 2000년대 후반 대체로 한계에 봉착한 가운데, 2008년 세계금융위기가 발생한다. 이 위기는 신자유주의 개혁의 한계와 한국과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고용위기와 구조조정에 맞선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은 변화된 정세에서도 기존의 투쟁 방식을 반복했다. 이미 기존의 운동노선이 한계에 봉착한 가운데, 노선의 전환이나 새로운 시도도 지체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2008년 광우병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에서 시작해 총선·대선에서 반복된 “범민주진보 진영”의 “야권연대”가 2010년대 내내 핵심적인 대응방식이 된다. 그 결과 2016년 “촛불항쟁”을 거쳐 2017년 이후 민주당 문재인 정권이 집권한다. 문재인 정부는 그동안 제기된 민주노조운동의 여러 요구를 수용했지만, 그 요구는 왜곡되거나, 한계를 보이거나,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노동정책을 비롯한 전반적인 국정운영이 실패한 결과 5년 만에 정권이 교체되었다. 민주노조운동의 요구도 결과적으로 실패한 셈인지만, 문재인 정부의 무능과 한계 때문인지, 노조운동에도 한계는 없었는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입장은 찾기 힘들다.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가져오는 고용불안과 저임금·장시간 노동, 노동자 사이의 격차 심화를 노동자 스스로 단결과 투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 민주노조운동의 투쟁이었다. 그러나 현재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상황을 볼 때, 헌신적 투쟁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애초 목표를 의미 있게 달성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기업, 고용형태별로 크게 벌어진 임금격차는 사회 양극화의 중요한 원인일 뿐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도 더 어렵게 만들었다. 민주노조운동이 이러한 과정을 막아내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이를 심화하는 구조를 함께 만들어온 것은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났는가? 여기에 이르는 과정에 어떤 일들이 있었나? 이 글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노동운동사를 돌아보면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 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 1987년 이후 노동운동사를 돌아본다. 이번 글에서는 먼저 1980년대 중반부터 민주노총 건설과 96~97년 총파업까지를 다룬다. 이어질 두 번째 글에서는 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와 노동자운동의 대응부터 2008년 세계금융위기 직전까지의 상황을 다룬다. 세 번째 글에서는 2008년 위기와 이명박 박근혜 보수정권의 집권에서 문재인 정부 집권 직전까지를 다룰 예정이다. 마지막 네 번째 글은 문재인 정부 시기 노동자운동의 대응을 정리하며, 종합적인 평가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2021~2022년 동안 진행된 사회진보연대 내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노동운동사 세미나 논의를 토대로 쓰였다는 점을 밝힌다. 198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는 노동운동사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풍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제기된 쟁점을 모두 담지는 못했고, 오류와 누락도 있을 것이다. 이는 필자의 책임이다.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이 교차하는 역사]

특정한 시공간에서 노동자운동의 발전은, 당시의 자본주의 경제, 사회의 성격을 반영한다. 노동자운동은 산업구조와 이에 따른 노동시장 상황, 노사관계 성격을 조건으로 하여 형성된다. 따라서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경제사) 속에서 노동자운동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검토하며, 이에 대응하면서 노동자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의 발전과 함께 어떤 정치적, 이념적 입장을 발전시켜왔는지를 역시 함께 평가할 필요가 있다.

한편, 노동자운동은 노동조합운동만이 아니라, 노동단체와 정치운동 등 여러 범위를 포괄한다. 이를 크게 보아,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과, 정치단체(정당·정파)의 활동을 포함한 “정치적 노동자운동”으로 구별하여 평가할 수 있다. 1980년대 이후 한국 노동자운동의 전개 과정에서도 이 두 가지 성격의 운동이 서로 관계를 맺으며, 협조하거나 갈등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구별을 지양하는 운동으로서 “사회운동 노조주의”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기존 운동의 구조를 대체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만이 아니라, 정치적 노동자운동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자는 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노동자운동을 노동조합 중심으로 발전시킨 경우다. 영미의 비즈니스 노조주의 뿐 아니라 전후 유럽의 사민주의 코포러티즘적 노조주의도 사회경제적 요구를 중심으로 했다는 점에서 이 사례로 볼 수 있다. 후자의 운동은 정당이 우위에서 노동조합운동을 지도하는 노선으로, 독일과 러시아에서 주로 진행된 운동 유형이다. 물론 정당이 노동조합의 결성을 지원하거나 지도한 19세기 후반 독일 사민당 사례와, 노동조합을 정당 노선의 전달벨트로 본 러시아 혁명 이후의 유형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 아리기와 실버가 제시하는 노동자운동의 유형도 참고할 수 있다. 이들은 생산의 공간에서 구조적 힘을 무기로 투쟁하는 ‘사회적’인 운동경로(미국이 이념형)와 정당의 노동조합에 대한 통제를 우선하는 ‘정치적’인 운동경로(소련이 이념형)를 제시하는데, 각각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과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87~2022, 35년 역사의 개관]

노동자운동의 두 경향은 서로 교차하면서 역사를 만들어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부터 1990년 전노협 건설을 거쳐 1995년 민주노총 건설에 이르기까지, 노조는 전투적 경제주의로 발전하는 한편,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형성과 붕괴의 과정을 겪는다. 이 시기에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1989년 전국노동운동단체연합(전노운협) 결성과 분열, 1991년 PD 3파 통합 후 진정추, 진정련을 거치며 단계적으로 붕괴한다. 이 과정에서 노조운동의 전투적 경제주의도 차츰 사회경제적 노조주의로 변모한다. 정치적 노동자운동이라는 한 축이 붕괴한 상황에서, 지역차원의 중소영세 사업장 노조가 다수이고 사회운동적, 정치적 성격이 강하던 전노협이 약화되고, 기업별 경제투쟁에 주력하던 대기업노조들이 주도하는 민주노총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어쩌면 필연적이었을지 모른다.

민주노총이 건설된 1995년부터 IMF 구제금융위기가 시작되는 1998년까지는 민주노총 건설과 함께 “사회개혁적 노조주의” 성격이 강화된다. 점차 전투적 노조주의는 상대화되고 코포라티즘에 접근한다. 민주노총 초대 집행부는 건설 직후부터 노사정 협상(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개위)에 참여한다. 그러나 노개위 합의 실패와 1996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통과, 잇따른 96~97 총파업으로 노사정 타협은 물론 김영삼 정부도 결정적인 위기에 빠진다. 그러나 불과 1년 만에, IMF 구제금융위기를 제대로 된 정세 인식 없이 맞은 민주노총은 노사정 합의를 번복하면서 혼란이 가중된다. 1998년 노사정 합의 과정을 겪으며 민주노총에서는 일체의 노사정 협상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이 형성된다. 

1998년 내내 노사정 합의를 개정하기 위한 민주노총의 수차례 총파업 시도가 실패한 가운데,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계속된다. 이때부터 “IMF 조기 졸업”을 선언한 2001년 즈음까지 정리해고, 민영화 저지 등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노조의 방어 투쟁은 격렬하게 계속된다.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반대(반세계화) 입장도 노동자운동에 수용된다. 이 시기에는 산별노조 진보정당 양날개론이 노동자운동 내에서 광범위한 합의를 얻어 본격적으로 추진된다. 

노무현 정부가 집권한 2003년에서 2007년까지 산별노조 진보정당 건설은 나름대로 조직적 성과를 만들어간다. 보건의료노조는 산별교섭을 실제로 시도한다. 금속노조는 집중적인 산별전환 사업을 벌여, 2006년에는 완성차 노조도 산별노조로 전환한다. 공공노조와 운수노조도 2006년 말 건설된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에 원내에 진입한다. 산별노조 진보정당의 양 날개는 적어도 이 시기에는 상당히 성공한 것으로, 또 미래에 더욱 성공해갈 것으로 보였다. 또한 이 시기에 노조운동 안에서 미조직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전략조직사업이라는 개념이 도입되고 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이 활성화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대응 과정에서 사회공공성 운동도 출현한다. 한편 노사정 협상을 둘러싸고 민주노총은 격심한 내홍에 휩싸였다. 돌아보면 총연맹이 노동시장과 노사관계 제도의 변화를 어떤 식으로든 실현할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한 논란이었다. 그러나 결국 조직적 합의는 형성되지 못한다. 이후 보수정권 시기에는 노사정 협상의 전망은 상실되고 총연맹은 정책적 협의 기능보다는 ‘투쟁본부’ 기능 중심으로 기운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한 2008년은 마침 세계금융위기가 시작된 해였다. 이때부터 박근혜 정부가 끝나는 2017년까지, 노동자운동은 경제위기와 보수정부 집권 시기라는 변화된 조건에 처한다. 민주노총은 주요 산업·업종에서 산별노조를 건설했으나, 정작 산별교섭은 실현하지 못하고 “무늬만 산별”로 정체된다. 이 시기에 민주노동당은 정파 갈등 속에 붕괴하고 복수의 진보정당 간의 이합집산이 혼란스럽게 계속된다. 결국 2000년대 노동자운동 내 합의였던 산별노조 진보정당 노선이 비슷한 시기에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가 발발한다. 이후 10년간 노동조합운동의 상층은 반보수 전선에 역점을 둔다. 한편 산별노조와 노동조합의 현장은 합의된 전략적인 목표 없이 보수정권이라는 비우호적인 정세에서, 노조 사수 투쟁이나 정리해고 저지, 노동법 개악 저지 같은 방어 투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문재인 정부가 집권한 2017년~2022년 시기에는, 이제까지 민주노총이 요구하던 정책인 최저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과 일자리 확대 등이 나름대로 정부 정책으로 수용되고, 정권 초반에 속도감 있게 추진된다. 그러나 이 정책들은 시행 과정에서 지지부진해지거나 경제위기를 가속한 원인으로 비판받게 되면서 동력을 상실하고 곧 한계에 봉착한다. 문재인 정부의 노동정책은 소득주도성장론이라는 경제정책과 맞물려 추진되었다. 양대노총과 전문가 등 노동계는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갖지 못하고 사실상 지지한다. 한편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 참여 시도는 모두 실패하고 만다. 경사노위 참여 안건은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되고, ‘코로나19 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대표자회의’ 합의도 실패하고 이를 추진한 김명환 집행부는 사퇴한다. “촛불혁명”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진보정당 운동도 더 위기에 처한다. 정의당은 조국사태, 공수처 설치와 선거법개정, 검수완박 법안 추진과 같은 국면에서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민주당과의 구별이 희석된다. 지난 2010년대 초반부터 야권연대에 몰두하던 노선의 뒤늦은 후과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의 위기와 함께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소멸해간다.

이제 본격적으로 1987년 노동자대투쟁부터 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까지 노동자운동의 역사를 검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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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 이전까지

 
 
1980년대 중후반, 한국 자본주의는 중대한 변화를 겪는다. 1970년대 후반, 각국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을 불러온 경제위기는 가혹한 긴축과 구조조정을 거쳐 1980년대 중반 가라앉기 시작한다. 1970년대 말 경제위기 과정에서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붕괴하고 전두환 신군부가 집권하게 되었던 한국은, 신자유주의 개혁은 지체되는 가운데 호황 국면에 진입한다. 특히 대외적 조건(3저 호황)으로 인한 경제호황은 제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크게 팽창하는 조건을 형성한다. 이와 함께 1970년대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계승하면서도 1980년 광주항쟁을 거치며 급진화된 학생운동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대거 노동현장 진출을 감행한다.

1984년부터 시작된 유화국면에서 야당(신민당)의 총선 승리와 1985년 인천 5.3운동, 구로동맹파업과 대우자동차노조 파업은 1980년대 후반 투쟁의 전초전이었다. 결국 1987년 대선을 앞둔 야권과 민주화운동 세력의 투쟁은 87년 6월 항쟁으로 집결된다. 군부독재 세력은 대중적 압력에 밀려 6.29 선언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다.

경제호황 시기 기업의 수익성이 늘어나고 신규채용이 확대되는 와중에도, 군사독재를 등에 업은 반인권적 현장통제와 임금억제에 짓눌려있던 노동자들의 분노는 6월 항쟁 이후 폭발한다. 1987년 7월 울산지역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해 9월까지 울산에서 부울경 지역으로, 그리고 수도권으로 번지면서 전국으로 확산한다. 이 투쟁은 곧 지역적 노동자운동의 연대체(지노협)와 전국적 연대체 건설(노동법개정투쟁본부)로 이어진다. 지노협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과정에서 건설된 마산창원지역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을 시작으로, 1988년 진주, 서울, 인천, 전북, 경기남부, 1989년 광주, 성남, 부산, 부천, 대구로 이어진다. 이렇게 급속히 전국적 투쟁전선을 정비한 노동자운동은 1990년 전노협을 건설한다. 비제조업 부문에서는 업종별 조직을 구성하는데, 1989년 말까지 사무금융노련을 시작으로 출판, 화물, 언론, 시설관리, 전문기술, 지역의보 등 조직이 건설된다. 이들은 이후 일부는 전노협에 합류하고 일부는 업종회의로 결집한다. 업종회의는 전노협에 조직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12개 사무, 전문, 서비스 부문 노조 협의체와 연합체가 1989년 구성한 연대조직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은 반격에 부딪힌다. 1989년부터 경기침체가 진행되면서, 노태우 정권은 노조운동에 대한 탄압 기조를 분명히 한다. 1990년대 산업구조의 개편은 전노협의 주력 기반이던 중소영세기업의 쇠퇴, 수출대기업의 확대로 이어진다. 노동조합은 탄압 속에서 치열하게 투쟁했지만, 전노협은 조직적 타격을 받는다. 이후 ILO공대위와 전노대를 거쳐 민주노총이 건설되지만, 전노협 운동의 정신을 계승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된다.

한편,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노동자운동에서 두드러졌던 정치적 노동자운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60~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반독재민주화 투쟁의 전통과 1980년대 급진화된 지식인, 학생운동의 전통 속에서 정치적 노동자운동이 성장했다. 1980년대 초중반부터 노동현장에 진출한 이른바 학출(학생출신) 활동가들은 1995년 구로동맹파업,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이념과 조직을 발전시킨다. 이들의 목표는 변혁적 이념으로 노조운동에 개입하면서, 독자적인 정치운동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반 정파들의 이합집산을 거쳐 (합법) 진보정당 운동을 건설하고자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더구나 당시 소련 해체를 거치며 변혁적 이념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민주노총 건설은 이러한 조건에서 1995년 11월에 이루어졌다. 건설 직후 노사정 협상(노개위)을 진행하다 결렬된 이후, 지금도 전설로 언급되는 초유의 96~97년 총파업을 진행한다. 총파업은 개악 노동법을 저지했으나, 그 성과는 1년도 안 되어 곧 1998년 2월 노사정 합의에서 부정된다. 이번 글은 87년 노동자 대투쟁부터, 역사상 초유의 96~97년 총파업까지를 다룬다. 불과 1년 후의 IMF 구제금융위기와 이어진 불행에 대한 평가도 필요한 만큼, 이 시기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자 한다. 
 
 

2.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민주노조운동”의 형성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의 경제발전 전략은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와 육성이었다. 베트남 전쟁과 7.4 남북공동성명 이후, 남북한 체제 대결과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이 경제발전 전략으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중화학공업에 대한 과잉투자는 세계경제위기와 맞물려 79년 경제위기로 이어진다. 당시 경제위기는 YH 노동자들의 투쟁,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과 부마 항쟁을 거쳐 정치위기로 발전한다. 그 결과는 10.26 사태와 박정희 정권의 붕괴였다.

1970년대 말의 격변을 거쳐 1980년대 초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재벌 구조조정과 같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한다. 그러나 곧 이은 3저 호황으로 재벌 구조조정은 중단되고 오히려 재벌은 급격한 투자 확대로 태세를 전환한다. 3저 호황 과정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재벌 제조업 대기업을 중심으로 미숙련·반숙련 청년 노동자의 고용이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 기업에서 전근대적인 노무관리와 저임금 상태는 개선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3저 호황의 정점인 1987년, 정치적 기회와 결합한 노동자 대투쟁을 거쳐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한다. 이러한 새로운 노동조합의 성장과 진출은 정권에 순치된 기존 한국노총 체제를 위협한다. 정권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민주노조운동”이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3저 호황은 중화학공업화와 재벌 중심의 경제체제를 배경으로 발생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특히 한국의 중화학공업 대공장은 남성노동자 중심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87년 투쟁을 주도하게 된다.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이 노동자운동을 주도한 데는 특수한 산업구조가 존재했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특수한 조건을 간과하고 당시의 경험, 즉 중화학공업 대기업 남성노동자의 전투적 기업별 투쟁을 노동조합운동의 이상적 형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 노동조합운동은 대기업 기업별 노조의 전투적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당시 노동법이 강제하던 노동조합 형태와 맞물려 이러한 노조운동의 전개는 결국 기업별 노조 체제를 한국 노사관계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남기고 말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전사(前史)로 중요한 것은 1985년에 있었던 구로동맹파업과 대우자동차노조의 파업이었다. 두 파업은 노동자운동의 두 경향을 미리 보여준 사건이었다. 먼저, 구로동맹파업은 중소기업사업장의 지역연대파업이었다. 구로동맹파업은 경제적 요구와 함께 정부의 탄압에 의한 ‘노조 존립 위기’의 상황에서, 탄압의 수단이 된 제반 악법의 개정·폐지라는 정치적 요구를 함께 제기했다. 각 사업장에서 생존권을 지키려는 ‘경제적 요구’가 정부의 탄압에 대항하는 ‘정치적 요구’와 결합한 것이다. 현장에 기반을 두면서도 사업장을 넘은 동맹파업과 함께, 투쟁의 요구를 사회적으로 제기하는 농성과 시위를 결합한 투쟁을 전개했다.
 

구로동맹파업은 김문수, 심상정 등이 주도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결성의 계기가 된다. 이는 구로동맹파업이, 사회변혁을 지향하는 대학생, 지식인 출신의 활동가들이 노동자운동과 융합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하다. 서노련은 노조의 연대체라기보다는 활동가들의 결집으로서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성격이 짙었다. 서노련은 공안탄압 과정에서 해체되지만 이러한 활동경험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 서노협 건설에도 이어진다. 서노협이 합류하는 전노협도 정치적 노동자운동에 상당히 개방적으로 운영된다.

한편, 1985년의 또 다른 중요한 투쟁으로는 대우자동차노조의 파업이 있다. 이 투쟁에는 중화학공업 재벌 대공장 남성노동자 파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의미가 있다. 파업농성 투쟁은 높은 임금인상을 쟁취하면서 승리로 마무리된다.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커다란 사회적 파급력을 가진다는 점도 확인시켰다. 한편 투쟁 확산을 우려한 사용자들의 양보로 인천지역 타 사업장의 임금도 따라 오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대기업노조의 선도적 투쟁을 통해 일종의 ‘낙수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지금도 노조운동에 주류로 남아있는 관념도 형성되기 시작한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통합된 ‘지역노동시장’이 분해되는 1990년대를 거치면서는 변화될 것이었다.
 
 
 

3. 3저 호황과 87년 노동자 대투쟁의 폭발

 
 
그런데 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학출 노동자들이 다수 포진했던 서울·경인지역보다 재벌 제조업 대기업 사업장이 많은 울산을 포함한 동남권 공업도시에서 먼저 폭발한다. 이 지역은 1980년대 말 3저 호황 과정에서 생산이 급속히 확대된 지역이었다. 동년배 청년층 노동자들이 대거 채용되면서 집단적 행동이 발생하기 쉬운 조건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호황의 와중에도 노동자들의 처우는 거의 개선되지 못했으며 노무관리도 군사적, 전근대적인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불만이 쌓여갔다. 이는 급격한 대중적 투쟁이 분출하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조건에서 87년 6월 항쟁과 6.29 선언을 통한 국가권력의 후퇴는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불러온다. 

6.29 선언 직후인 7월 5일 현대엔진에서 현대계열사 최초로 노조가 결성된 후 울산의 현대 계열사 전체로 노동조합 설립 물결이 퍼져나갔다. 7월 15일 미포조선, 7월 27일 현대중전기, 8월 1일 현대정공 등 현대계열사 사업장에서 노조가 결성된다. 이후 울산을 넘어 부산, 마산 등 영남권으로 투쟁이 파급되고, 이어 서울, 경기, 인천으로 확산한다.

동남권 지역에도 활동가들의 현장 조직화가 있었으나 수도권보다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였다. 80년대 중반, 현대엔진의 고적답사반, 현대자동차의 독서회와 같은 현장 소모임은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토론하면서 주체적인 준비를 해나갔다. 그러나 이들 모임은 수도권에 집중된 학출 활동가들이 추구한 급진적인 정치적, 이념적 지향을 가진 조직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학출 등 정치적 활동가들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보다는 오히려 대투쟁 이후 울산에 투신하여 조직사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활동가 중 상당수는 90년대 초 울산의 노동현장을 떠나게 된다. 

87년 대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과 근로조건 개선, 민주노조 인정을 요구하고 상당 부분 쟁취한다. 이때 노동자들의 요구는 체제변혁을 요구하는 정치적 성격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경제적 성격이 핵심이었다. 새로 결성된 노동조합은 기업주와의 교섭, 즉 임금제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협약체결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또한 기업 총수를 축출하는 것이 아니라 교섭당사자로 직접 나설 것을 요구했다. 결국 1987년을 주도한 것은 이념을 압도한 거대한 경제투쟁의 파도였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경제적 요구로 분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 투쟁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완전히 배제한 가운데 작업장을 지배하던 통제구조를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심대한 정치적 의미가 있었다. 또한 억압적 국가권력을 등에 업은 사용자들이 강요한 저임금 체제를 분쇄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이 최우선 과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당연한 상황적 조건이기도 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이와 같은 운동양식이 지속되는 것이 적절한가라는 질문을 앞으로의 과정을 살펴보며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87년 이후에는 국가와 자본은 작업장 안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이 시기 분출된 노동조합의 투쟁이 정치적 성격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88년 들어 본격화된 노동법 개정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은 사업장을 넘어 제도에 대한 요구를 정부, 국회를 상대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운동은 전국적인 조직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지역적이고 전국적인 노동조합의 연대구조가 급속히 발전한다. 1988년 3월에는 ‘노동조합탄압저지 전국노동자공동대책협의회’(전국공대협), 10월에는 노동법 개정을 위한 ‘전국노동법개정투쟁본부’(전국투본)가 건설된다. 11월에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최초의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 노동자 대회’가 연세대학교 노천광장에서 개최된다. 이후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그해 12월 ‘지역 업종별 노동조합전국회의’(전국회의)를 결성한다. 이는 지노협과 업종별 협의체를 망라한 연대체였다. 전국회의는 1989년 12월,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 그리고 곧 1990년 1월 22일 전노협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2년여 만에 전국적 조직의 건설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4. 전노협 건설
 


드디어 1990년 전노협이 건설된다. 1990년 1월 22일, 눈 내리는 수원 성균관대 율전캠퍼스에서 기습적으로 창립대의원대회가 개최된다. 민정당, 민주당, 공화당의 3당 합당도 같은 날 진행된다. 민주노조 총단결과 함께 ‘범보수연합’이 결성된 것이다. 전노협 결성이 상징하는 노동자계급 단결의 한쪽에서는, 체제 위기를 정비하기 위한 지배계급의 정치 재편이 이뤄지고 있었다.
 

한편, 이러한 대중적 투쟁의 분출은 정치적 노동자운동에도 당연히 영향을 주었다. 6월 항쟁이 한창이던 상황에서 결성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평가하면서 대중운동과 “노동자계급의 올바른 사상인 과학적 사회주의와의 결합”을 주요한 목표로 제시하게 된다. 이를 위해 인민노련은 노동현장에서 활동을 전개한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 민주노조운동은 지역적 단결체로서 각 지역에서 지역노동조합협의회(지노협)를 건설한다. 이러한 운동은 전노협 건설(1990년 1월)로 이어진다. 민주노조 대단결의 토대를 놓은 것이다. 전노협은 창립선언문에서 “노동자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사회구조의 개혁과 조국의 민주화·자주화·평화통일을 앞당기는 데 있다”는 기본목표를 천명한다. 또한 선언문은 “업종별·산업별 공동투쟁과 통일투쟁을 발전시키는 속에서 기업별노조 체계를 타파하고 자주적인 산별노조의 전국중앙조직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제시한다. 당시 민주노조운동의 지향, 경제투쟁을 넘어선 정치투쟁의 방향과 산별노조로의 조직발전 지향을 집약했다.

하지만 울산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노동조합은 전노협에 합류하지 못하고, 사무전문직을 포함한 업종회의도 전노협과 통합하지는 않는다. 이들 민주노조운동이 모두 결집하는 것은 1991년 한국의 ILO 가입을 계기로 조직된 ‘ILO기본조약비준및노동법개정을위한전국노동자공동대책위원회’(ILO공대위)와, 이어서 구성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에 이르러서다. 이들 연대체는 이후 민주노총(준)으로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정권은 집중적으로 전노협을 탄압한다.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의 ‘3저 호황’이 1989년 상반기에 끝나고 하반기부터는 경기침체로 반전되기 시작하자, 노태우 정권은 더욱더 강경하게 노동탄압에 나선다. 1986~1988년까지 연 12% 수준의 경제성장률이 1989년에는 6.9%로 하락한다. 1989년부터는 임금 상승률은 높아지지만,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감소하면서 기업들의 채산성이 악화된다. 노태우 정권의 노동탄압 심화는 이러한 조건에서 일어난 것이다. 1990년에 노태우 정권은 조직범죄를 척결하겠다며 “범죄와의 전쟁”을 내세웠는데, 노동현장에서는 공안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용도로 활용되었다. 마침 1989년 4월 문익환 목사의 방북은 공안정국 형성의 명분이 되었다. (물론 당시 방북이 적절한 정세적 실천이었는지에 대해서는 통일운동 측면에서 별도의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정권은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발전모델을 제시하기보다는, 1987년 이후 급격한 임금상승으로 인한 노동비용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과거 개발독재 방식의 노조탄압을 선택한 것이다.

전노협 간부에게 구속, 수배는 일상적인 일이었고, 전노협 가입 조직에 대해서는 노동청이 탈퇴를 압박한다. 1990년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 와해 대책”을 마련하는데, 제3자 개입 처벌, 핵심 인사 구속 및 수배, 전노협 가입 노조에 대한 업무조사, 관련 행사 원천봉쇄 등 전방위적이었다. 

특히 노태우 정권은 대기업노조가 전노협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집중적으로 탄압한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울산지역의 대기업노조들도 집행부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전노협 가입을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등 울산의 대기업노조들은 ‘민주집행부 집권 → 전투적 투쟁 → 어용 집행부로 교체’가 반복되면서, 안정적인 민주집행부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탄압 와중에 발생한 것이 ‘대기업노조연대회의’ 참가자 구속과 이때 구속된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 박창수 열사의 사망 사건이었다(1991년). 

이렇게 노태우 정권은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이 강한 전노협을 중심으로 노동자운동이 재편되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려 했다. 이에 따라 전노협은 1990년 건설 당시보다 1994년에 이르면 조합원이 상당히 축소되는 상황에 이른다. 결국 전노협을 중심으로 “민주노조 대단결”을 실현하고 산별노조 건설과 제2노총을 건설하고자 했던 시도는 달성되지 못한다. 결국 전노협은 민주노총 건설의 여러 주체 중 하나가 되고 만다.

지역적 연대, 즉 지노협을 통한 전노협의 건설은 기업을 넘어 지역적 공동투쟁과 단결을 통해 노동자 간 격차를 축소하는 실천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당시 노동조합 지역운동의 의의는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정한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지역’이 아니라, 기업을 넘어선 연대가 실현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당시 산업과 노동시장의 사회적 조건에 따라 그 연대의 범위가 특정한 ‘지역’들이 된 것이다. 지역을 중심으로 연대조직을 건설하는 운동은 아직 지역 차원에서 기업별 일자리 이동이 가능했던 당시 노동시장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발전경로일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현대그룹의 대기업노조가 주도하던 울산에서는 지노협이 건설되지 못하고, 대기업노조들이 결국 대부분 전노협에 결합하지 못한다. 이는 기업별 투쟁을 중심으로 성과를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에 비해 지노협·전노협 운동은 초기업적 지향이 강하게 드러났다. 이러한 지역적 연대의 경험은 이후 금속산별노조를 지역에 근거해서 건설하는 지향으로 계승된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업적 단결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지노협은 사업장을 넘어 공동투쟁을 전개했지만, 이는 본질적으로 기업별 교섭 체제에서 주로 임금인상을 쟁취하기 위한 연대투쟁이었다. 지역, 업종별로 사용자단체가 구성된 상황도 아니었으므로 초기업 교섭이 시도된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일상적 교류를 통한 교육, 문화, 정책 등 연대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했지만, 노사관계를 초기업적으로 형성한 것은 아니었다. 지노협이나 전노협은 지역적, 전국적 투쟁본부로서 역할이 강했다. 이러한 노조운동의 전통은 이후 산별노조 건설 이후에도 민주노총이 대정부 교섭 기구보다는 투쟁본부 성격이 부각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전노협이 기업별 조직을 유지하면서 공동투쟁이 최선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전노협 조직발전 논의 과정에서 핵심 쟁점은 ‘금속산별’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에 있었다. 지역별 공동투쟁만이 아니라 산별노조 건설로 나아가고자 한 것이다. 전노협의 조직발전 논쟁은 이후 민주노총 가입을 어떤 단위로 할 것인지, 금속연맹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으로 1998년 통합 금속연맹 건설 때까지 계속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노동자운동도 지역적 연대운동의 강화에 기여한다. 노동자운동의 정치단체들은 지노협·전노협 건설에 매진하면서 지역적 토대를 근거로 기업을 넘어선 운동으로 나아간다는 노동자운동의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정치적 성격이 강한 노동단체, 사회운동도 적극적으로 연대했는데, 각 지역의 노동운동단체가 결집한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의 여러 노동운동 단체들은 지노협과 전노협의 투쟁에 일상적으로 결합한다. 전국노운협은 “민주노조운동이 계급적 대중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선진노동자를 광범하게 조직하며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을 확대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건설되었다(1888년 6월). 인민노련도 노동자운동의 노선을 제시하면서 지역적 연대의 강화를 주문한다. 이러한 노조운동 안팎의 정치적 개입은 초기 노조운동이 지역을 중심으로 초기업적 연대투쟁을 펼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쇠퇴 이후 이렇게 이념적 근거를 갖는 실천적인 혁신 시도도 대체로 약화해간다. 전노협 해산과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지역운동을 강화하는 문제의식과 실천은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민주노총 건설 경로를 둘러싼 조직발전 논쟁 당시의 “전노협1안”, “전노협2안”, “업종회의안”은 모두 산별연맹을 중심축으로 하며 지역조직은 보조축으로 설정한다는 합의로 수렴된다. 논쟁의 쟁점은 “전노협 중심론”(전노협1안), 혹은 “전노협 한계론”(전노협2안과 업종회의안)으로 일별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전노협 한계론”이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조직적 우세를 점했다고 할 수 있다.

조직노선에 대한 절충은 산별노조 건설로 나아간다는 합의를 확인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지역으로부터 연대와 이를 기반으로 한 전노협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남겼다. 그 결과 산별연맹 및 그룹별 조직(현대, 기아, 대우)은 민주노총 가맹조직으로, 지노협은 산하조직으로서 민주노총 지역본부로 재편되며 전노협은 해산한다. 조직적으로도 1993년 전노대 결성 과정에서 노동운동단체의 참여가 배제되는 결정이 이루어지며 정치운동, 사회운동과의 조직적 연계도 약화한다. 전노협의 성격이 사회운동노조와 가깝고 정치적 노동자운동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었다면, 민주노총 건설을 전후한 시점부터 한국의 노동조합은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으로 전환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199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와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1989년~1990년대 초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중소기업의 해외 이전과 같은 산업 구조조정이 전개된다. 이는 전노협의 주력이던 지역 공단의 제조업 중소기업 노동조합에도 타격을 주게 된다. 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는 제조업의 해외 이전이 가속된다. 이와 동시에 국내 산업구조는 3저 호황의 결과 재벌 대기업의 집중성이 강화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노동시장 조건도 변화한다. 여전히 제조업 투자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생산인력 부족에 대응하기 위해 대기업은 소수의 핵심노동자에 대해서는 장기근속을 유도하는 한편, 주변 업무에 대해서는 외주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점차 생산 공정의 하청계열화가 심화되며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기업의 임금격차도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 노동자들은 고용안정과 연공임금제를 실현하지만, 하청기업에서는 짧은 근속기간에서 비롯된 고용불안과 함께, 임금체계 자체가 부재한 상태가 이어진다. 노동조건에 불만을 가진 노동자들이 자주 이직하면서 근속기간이 짧아져 연공임금제도 적용하기 어려웠다.

재벌 대기업은 1990년대 초 경제위기를 거치면서도 1990년대 중반까지 성장을 계속한다. 특히 금융자유화를 활용해 해외로부터 단기자본을 차입하여 투자를 확대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력은 오히려 부족해진다. 이러한 노동시장의 상황과 노동조합의 임금투쟁을 통해 높은 수준의 임금인상이 이루어진다. 대기업이 노동자들을 기업 내에 묶어두기 위해, 또 노동조합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연공급 임금체계가 발전한다. 노동조합도 사용자와 중간관리자의 자의적인 인사배치와 임금결정을 반대하면서, 임금산정 기준이 근속기간이라는 단순한 요소로 설계된 연공급을 선호했다. 이후 대기업이 주도하는 민주노조운동은 이러한 임금체계를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중소기업에서는 연공급을 안정적으로 도입하기 어려웠고 매우 불안정한 고용 상황이 지속된다. 노동자 입장에서도 장기근속을 노리기보다는 임금이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게 유리했기 때문에 고용의 이동성이 높았다. 결과적으로 1990년대 초부터 대기업(원청)·중소기업(하청)의 임금 수준과 임금체계, 고용안정 수준의 분기가 심화된다. 이미 1988년 들어서부터 대기업일수록 임금인상률 타결 수준이 높은 현상이 시작된다. 물론 중소기업(하청)의 임금인상률도 상대적으로는 낮지만, 아직은 절대적인 수치가 높은 편이었고 노조의 임금투쟁을 통해 임금인상이 가능했다. 그러나 대기업을 추격할 수는 없었다. 이후 살펴보겠지만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에는 더욱 격차가 벌어진다. 대기업은 회사 내에서도 장기근속을 유도하는 숙련노동자 외에 비숙련·반숙련 부문에서는 사내하청(사외공)까지 광범위하게 활용하기 시작한다.

1990년대 초, 1987년부터 이어진 급격한 임금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정부와 노총·경총은 임금 가이드라인 합의를 추진한다. 1990년에는 “10% 일 더하기 운동”, “한 자릿수 임금인상” 정책을 추진하고, 1991년에는 공공기관과 대기업을 특별관리하는 ‘선도 부문’으로 지정하여 압박하기 시작한다. 1992년에는 시간 외, 성과급 등 각종 수당을 포함하여 인상률을 관리하는 “총액임금제” 정책을 추진하며 임금인상을 억제하기 위해 압박한다. 1993년 문민정부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도 1993~1994년에 “노총·경총 임금 합의”라는 노사정 합의 방식으로 사실상의 임금 가이드라인을 추진한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는 현장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이후 한국노총 탈퇴운동의 계기가 된다. 노사정 합의 방식은 이때 이후에도 1996년 노개위, 1998년 노사정위원회를 거치지만 매번 불안정한 역사를 반복한다. 정부가 임금억제를 위해 시작했다는 ‘원죄’와 함께 노사정 3자의 합의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역사가 이 시점부터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후발주자로 출발한 공공부문노조는 1990년대 초중반 일련의 민주집행부 당선과 공동투쟁을 통해 더욱 활성화된다. 임금억제를 위한 정부 주도의 임금 가이드라인은 민간부문에서는 실패했지만, 공공부문에서는 정부 지침을 통해 영향을 주었다. 임금억제로 인한 임금인상 지체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불만을 더욱 키우고 결국 공동투쟁이 촉발된다. 당시 한국 최대 규모의 노동조합이었던 한국통신노조(1994년)를 포함한 공공부문노조에 민주 집행부가 들어서고, 철도·지하철노조의 전투적 투쟁이 전개된다(1994~1995년 전기협·전지협 파업과 한국통신노조, 조폐공사노조의 투쟁). 이러한 투쟁은 이후 공공부문 노조가 민주노총에 합류하는 조직적 토대가 된다. 이들 노동조합은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공노대)를 거치며 연대를 강화하고, 이후 민주노총에 합류하면서 공공연맹(1998년)을 건설한다. 

이 시기 형성된 노동자운동 노선은 “자주성 민주성 연대성 투쟁성 계급성”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지금도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으로 노동조합 교육에서 강조하는 지향이다. 1987년에서 1997년까지, 노동자 대투쟁과 전노협에서 민주노총 건설의 시기는 경제성장과 함께 높은 임금인상이 가능했다(앞의 ‘[표] 협약임금 인상률과 명목임금 상승률 추이’ 참고). 또한 높은 기업별 고용 이동성으로 인해, 설사 기업이 망해도 아직은 다른 일자리를 용이하게 얻을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조건에서는 “끝까지 투쟁하면 승리한다”는 관념이 적합했다. 반면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 노동시장은 더 이상 이러한 조건이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형성된 노동조합 투쟁의 관념은 변하지 않았다.
 
 

6. ‘노동운동 위기 논쟁’, 어떤 위기였나

 
 
1990년대 초반 경제위기와 구조조정 과정에서 ‘노동운동 위기 논쟁’이 진행된다. 일단의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된 주장들은 노동조합의 전투적 경제투쟁이 노동자운동을 국민들로부터 고립시켜 위기에 빠지게 만든다는 것이다. 김형기, 박승옥, 최장집 등 ‘위기론자’들은 ‘전투적 조합주의’의 특징이 “엘리트주의적이고 분파주의적인 리더십 구조”, “관념적 급진주의로 치달은 운동이념”, 그리고 “전투적 투쟁 일변도의 운동방식”이라고 비판한다. 

변혁적 운동진영은 대체로 이러한 비판을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자운동의 변혁성을 약화하려는 시도라 반비판했다. 당시 정세에서 전투적 투쟁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대한 방어 투쟁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에서 전투성을 문제삼는 것은 사후적 평가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더구나 위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일상적인 노조탄압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노동자운동의 이념을 하향 평준화할 뿐이라고 반박했다. 실제로 당시 위기론자들은 이후 코포라티즘을 수용하고, 신자유주의 노동개혁과 유사한 방안을 받아들일 것을 제시한다. 이는 급진적인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노조와 분리하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결국 위기 논쟁은 노동조합운동 이념의 탈각이나 전환을 예고하는 것이었고, 노동조합운동도 이념을 지녀야 한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실용주의적이거나 코포라티즘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위기론을 제기한 활동가와 전문가들의 문제제기는 완전히 허구적인 것만은 아니었고, 토론과 논쟁, 대안 마련이 실제로 필요한 부분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운동 위기론’이 횡행하던 1990년대 중반에도 노동자들의 투쟁 결의와 변혁적 잠재력은 높았고, 마치 상층간부들만 올바른 노선을 취했다면 위기나 후퇴는 없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얼마나 타당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노동자운동 주류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초를 거치면서 경제위기가 실제로 진행되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산업과 노동시장의 조건이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기론자들과의 논쟁에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한 대안이 도출되어야 했다. 그러나 위기론자들과 논쟁하는 과정에서, 노동자운동의 주류에서는 기존 노선(전투적 경제주의)을 정당화하고 고수하고자 하는 편향이 더 강화된다. 당시 정세 분석을 통해 객관적인 위기를 인정하면서도 코포라티즘적 대안이 아닌 다른 대안을 제시했어야 했던 정치적 노동자운동(PD)도 대응하지 못했다. 1991년경부터 정당 건설에 주력하며 노조운동 현장에서 철수하면서 의미 있는 비판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1990년대 초 짧은 침체 뒤에 곧 경기가 회복되면서 과잉투자가 진행되고 임금인상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상황을 노동자운동이 ‘위기’로 인식하기는 어렵기도 했다. 실제 위기는 곧 1997년 말에 닥칠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구조의 변화는 노동자운동 지형의 변화와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초 전노협 위기론과 민주노총 건설은, 노선적인 전환만이 아니라 전노협에서 재벌 대기업과 공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노동자운동의 조직적 중심이 변화하고 있었던 현실을 반영한다. 비록 전노협 선거에서 조직발전 방안에 대한 쟁점이 부각되기도 했으나, 전노협도 민주노총 건설 흐름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미 대체로 노동조합 부문 간 역관계는 변화하고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구호로 수렴되었다. 노선적 측면에서는 민주노총 건설론이 제시한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 노선이 주도권을 잡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민주노총이 건설되는 1995년에는 이미 코포라티즘을 대체할 수 있는 운동전략(변혁노선을 가진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경향)이 점차 약화한 조건이었다. 결국 민주노총은 준비위원회 단계부터 김영삼 정부가 제안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 참여를 준비해간다. 민주노총 건설에는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이러한 노사정 협상에 대응한다는 배경도 있었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는 결국 소련 붕괴(1991년)에 이르는 구사회주의권 붕괴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국내에서는 변혁적인 정치적 노동자운동 세력이 이합집산(PD 3파 통합)하면서, 동시에 합법정당 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신노선’으로의 노선 전환을 진행하던 시기였다. 이들 정파의 노동자운동 활동가들은 1991년경에 대거 단위노조와 지노협 현장을 떠나 정당 건설 운동에 집중한다. 한편 같은 시기에 소련 붕괴(1991년) 이후 좌파 지식인들 상당수는 포스트구조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민주노총 건설이라는 조직의 커다란 재편은 운동노선의 변화를 동반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급진적 이념의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노조운동에 대한 개입에서 철수하는 상황이었다. 노동자운동에 관여하던 활동가들조차 정당 건설 운동에 매진하며 민주노총은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의 성격이 강화된다. 그러나 정당 건설 운동은 총선 패배와 소련 붕괴 이후 이념적 혼란의 과정에서 그 자체가 약화하는 것은 물론, 노조운동에 대한 개입력도 상실한다.

결국 1990년대 전반기에는 “민주노조 총단결”이라는 구상에 근거하여 진행된 전노협과 업종회의, 대공장 노조 간 연대의 모색과 민주노총 건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분화 및 합법정당 건설까지 일련의 과정이 동시에 진행된다. 이를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과 노동자정치운동이 서로 독자적인 정체성을 강화하고,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민주노총 건설은 기존에 사회운동적 성격이 강하던 전노협 이념으로부터의 변화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창우는 민주노총 건설 과정을 “전노협 청산”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지역을 기반으로 한 공동투쟁으로 임금격차를 축소하고, 사회운동적으로 발전하고자 했던 지향의 약화를 “전노협 정신의 청산”이라는 비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은 전노협이 포괄하는 제조업 사업장의 비중이 상당히 축소한 상황이었다. 이미 수출중심 경제구조와 재벌기업의 성장과 함께 노조운동 안에서도 주도권을 재벌 대기업 노동조합(이후 현총련, 대노협을 결성하고 민주노총에 가입)이 확보한 상황에서, 전노협 중심의 금속산별노조를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라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7. 민주노총 건설

 
 
전노협은 건설 과정부터 “민주노조 총단결”을 목표로 했지만, 아직 1987년 이후 새롭게 형성된 민주노조운동을 모두 포괄하지는 못하는 상황이었다. 정권의 탄압이라는 외부적 요인 외에도, 민주노조운동이 하나의 조직으로 결집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공감대도 충분치 못했다. 아직은 공동투쟁을 통한 연대의 강화가 필요했다.

민주노조운동의 연대투쟁은 ILO공대위를 거쳐 공동의 조직건설을 논의하는 것으로 발전한다. 1991년 ILO공대위 건설과 노동자대회를 거쳐 “민주노조 총단결” 구호가 대중적으로도 확산된다. 

민주노총 건설이 전노협 이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조직적 과정이어야 한다는 점은 곧 산별노조 건설 전망에 대한 논의로 연결된다. ILO공대위에 참여한 전노협, 업종회의, 현총련, 대우그룹노조협의회(대노협) 네 단위가 민주노총에 가입할 때에는 산별노조로 재편하여 합류하며, 따라서 전노협도 금속(제조업) 산별노조로 조직을 발전해야 한다는 과제가 도출되었다. 이미 1990년대 초반 정권의 탄압으로 인해, 기업별노조로는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대응하기 어려우므로 조직적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확산되고 있었다.

ILO공대위 이후, 민주노조 총단결의 조직발전 전망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1993년, 새로운 조직의 틀로 ‘전국노조대표자회의’(전노대)가 건설된다. 전노대는 전노협과 업종회의뿐만 아니라 현대그룹노동조합총연합(현총련), 대우그룹노동조합협의회(대노협)까지 포괄하면서, 한국노총과는 다른 제2노총을 건설할 수 있다는 전망을 확인하게 된다. 1994년 임투에서는 노총·경총 임금합의에 대한 반대투쟁과 함께 “어용노총 탈퇴 및 맹비납부 거부운동”을 통해 중간층 노조의 한국노총 이탈을 끌어낸다. 1994년 전지협 파업, 1995년 한국통신 민주집행부 건설과 공공부문노동조합대표자회의(공노대) 건설은 더욱 좋은 조건을 형성한다. 전노대는 1994년 11월 13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민주노총준비위원회(민노준) 발족을 선포한다.

이후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 출범까지 조직발전 논쟁이 이어진다. 이는 전노협에서 먼저 진행되던 논쟁의 맥락과도 유사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체로 산업(업종)별을 중심으로 하고 지역 및 그룹별 조직을 보조축으로 한다는 안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그룹별 조직은 이후 지역조직[지노협]과는 달리 결국 가맹조직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민주노총 건설 초기에도 여전히 ‘대산별론’과 ‘소산별론’의 논쟁이 계속된다. 특히 금속산업이 문제였다.

금속산별노조를 조직하는 데 있어서 소산별의 입장은 업종단위(조선, 자동차, 금속일반)를 중심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산별의 입장은 업종별 단위는 분과사업으로 편제하고 중심축은 단위노조가 직접 가입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96~97년 총파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투쟁 이후 현장별로 조직력이 약화되는 휴유증을 겪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 산업별 단결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결국 1997년 3월 현총련이 민주노총 임시 대대에서 금속 3조직 통합을 전격적으로 제안하면서 통합논의가 본격화된다. 1997년 3월, 금속 3조직 대표가 모여 11월 전국노대 이전에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한다는 내용으로 합의하면서 1998년 2월에 통합 금속연맹이 출범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대산별연맹을 건설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상황은 금속산업 내 조선, 철강, 자동차 등 업종을 넘어선 단결이라는 쟁점보다,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영세기업의 단결이 가능한가라는 문제로 드러나게 된다.
 

민주노총은 1995년 11월 11일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창립대의원대회를 갖고 출범한다. 민주노총에는 15개 산업(업종)조직과 10개 지역본부, 2개 그룹조직이 가맹하고 단위노조 861개에 조합원 41만 8,154명이 참여했다. 민주노총 결성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어려 갈래로 형성되어온 ‘민주노조 총단결’의 일차적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금속산업에서는 현대차, 현대중공업, 기아차 등 수출대기업노조가 참여하고, 공공부문에서도 한국통신, 서울지하철, 의료보험, 전교조가 참여하면서 조직적 위력을 확인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기업노조의 주도는 나중에 문제가 될 것이다.)
 
이렇게 더욱 커진 조직적 위상을 통해 사회적으로도 더 큰 힘, 발언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이러한 측면은 건설 직후부터 이어진 노개위 논의와 96~97년 총파업으로 드러난다. 조직적으로는 산별노조 건설을 전면화하는 의미가 있었다. 앞서 전노협 내 논쟁을 살펴본 것처럼, 민주노총 건설은 산별노조 건설을 동시적인 과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건설 시점까지 산별노조 건설 방향은 혼란한 상태에 있었고, 산별노조가 건설되는 과정에서 민주노총 역할은 모호한 상황이었다.

권영길 위원장의 민주노총 1기 집행부는 “사회개혁적 노동운동”을 방향으로 제시한다. 이는 노사협조주의 배격과 사회개혁을 지향하고 있으나 혁명적 조합주의는 아니며, 이념적으로는 정치성과 투쟁성을 강하게 띤 경제적 조합주의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한편에서 전투적 경제주의와, 또 한편에서 정치 사회운동과 연대를 통한 사회운동 노조주의라는 양자와의 단절이었다.
 
 

8. 1990년대, 신자유주의 노동개혁과 96~97년 총파업

 
 
1980년대 말 3저 호황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이 중단되었다는 점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이 과정에서 노동시장의 신자유주의 개혁도 역시 지체된다. 노태우 정부는 노동개혁을 재추진했지만, 경기침체를 맞아 임금억제와 급진화된 노조운동을 탄압하는 데 몰두하던 상황에서 제대로 추진될 수 없었다. 

정부의 시도는 1991년 ILO 가입 및 김영삼 정부가 주도한 1995년 노개위 논의로 이어진다. 김영삼 정부는 집권 후반부 개혁 프로그램으로 노동개혁을 추진하며, 이를 위해 1996년 들어 노사정 협의 기구로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구성한다. 노개위의 구성은 탄압 일변도의 정책만으로는 노사관계를 개혁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최소한 상급단체의 복수노조, 즉 현실의 노조운동을 인정하면서 타협체계를 재구축하려는 시도였다. 물론 그 대가는 고용, 노동시간에서 신축화를 제도적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1996년 4월에는 경상수지 적자가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그 위기감이 정부의 노동법 개정 추진 의지를 강화한다. 정부는 변화된 경제·국제환경에 대처하려 여러 정책을 추진하는데, 특히 WTO 체제와 OECD 가입이 문제였다. 이미 경제지표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해 그 원인인 한국경제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를 고쳐야겠다는 의도가 나타난 것으로 평가된다.

민주노조운동 진영은 이러한 흐름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에 대한 조직적 대응이 ILO공대위 구성과 이후 민주노총 건설(1995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준비위 상황에서 이미 노개위 (준비)논의에 참여하며, 1996년 내내 협상이 진행된다. 집권 정치세력의 변화, 신자유주의 개혁과 문민화는 노조운동의 방향에 이러한 방식으로도 영향을 주었다.

1996년 4월, 정부는 “노사관계개혁방안 보고대회”를 열고 ‘신노사 관계 5대 원칙’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한다. 다음 달 현승종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고, 공익위원 20명, 노측 5명(민주노총 2명), 사측 5명, 3개 분과로 구성된 대통령 직속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를 발족한다. 노개위는 11월 14차 회의에서 개혁안을 의결하지만, 이미 민주노총은 10월 9차 회의부터 불참한 상태였다. 당시 협의는 광범위한 쟁점에 대해 나름대로 깊이 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기는 했으나, 노사정이 합의하기에는 무리였다. 정부도 노사 간 간극을 조정하는 가운데, 양자를 만족시킬 대안을 제시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노개위 합의는 실패한다. 노사정 모두가 합의에 이를 준비가 되지 못했다. 당시 논의에서 민주노총은 민주적이고 자주적인 노조활동을 위해 복수노조 허용, 공무원·교사의 노동3권 보장 등 노조법을 개정하는 데 초점을 두었으며 노동유연화는 저지한다는 입장이었다. 정부 측은 정리해고 법제화, 변형근로제(현행 탄력근로제), 근로자파견제 도입 등 개별적 근로관계법을 유연하게 개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협상 과정에서 집단적 노사관계와 개별적 근로관계의 개정을 맞바꾸는 식의 협의 가능성도 타진되지만, 민주노총이 정리해고제를 수용할 수는 없었다. 협상을 주도한 정부도 노사정의 입장을 조율하고 현실화할 능력이 없었다.

1996년 11월 들어 결국 합의에 실패하자, 정부여당(신한국당)은 합의에 실패한 정부 측 개혁안(공익위원안)을 토대로 일방적 입법화를 추진한다. 정부여당은 결국 1996년 12월 26일 새벽에 일방적으로 날치기로 입법한다. 노동법 날치기 통과 직후, 민주노총 집행부는 명동성당에서 총파업 돌입 기자회견을 열고 즉각 전국적인 총파업 돌입을 선언했다. 2월 28일까지 진행된 초유의 양대노총 총파업에서 하루 이상 참여한 노조는 531개, 조합원수는 404,054명에 달했던 것으로 집계된다(당시 민주노총 조합원의 약 85% 참여).

1996년 노사정 협상 과정에서 민주노총 역시 협상 결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총파업을 꾸준히 준비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파업이었다. 1년간 ‘1조합원 1교육’을 포함한 전조직적 조합원 조직화 사업이 진행되었다. 민주노총도 이 협의가 원만한 합의로 마무리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정부 측의 구상과 민주노총의 접근은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파업의 결과 개악 노동법은 철회(연기)된다. 민주노총 건설 초반의 에너지가 일시에 분출한 것이다. 당시 대중적인 파업 투쟁은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에 장기간 패배해온 서구의 노동자운동이 보기에는 신자유주의 노동개혁에 저항하는 놀라운 사건이었으며, 한국 노조운동이 국제 노동자운동에서도 주목받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바로 같은 시기에 진행된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 경제 정세가 변화하고 있었다. 즉 3저 호황의 조건을 역전하는 1995년 역(逆)플라자 합의로 인한 대외교역 조건의 변화, OECD 가입으로 대표되는 금융개방과 세계화의 심화, 지체된 재벌 개혁과 단기외채 과잉차입(과잉투자)이다. 이러한 경제적 조건은 결국 1997~1998년 IMF 구제금융위기로 이어지고 만다. 이미 1990년대 중반이 되면 1980년대 말 형성된 노동체제(노동시장 제도와 노사관계)가 현실에서 작동하거나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개혁은 지체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부여당이 굳이 1996년 말 날치기까지 강행했던 이유도 정리해고 도입이 OECD 가입을 위한 규제완화 패키지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노사정 합의를 형성하지 못한 무능을 날치기 법안 통과로 해결해보려했던 김영삼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결국 이 모순들은 총파업이 종료된 그해 말, 불과 몇 개월 후 IMF 구제금융위기를 통해 폭력적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그러나 당시 노동자운동 역시 정치, 경제 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위기를 맞았다.

1997년에는 주요 기업들이 무너지면서 경제위기를 예고한다. 진로, 대농에 이어 7월에는 재계서열 8위였던 기아그룹이 위기에 빠져 ‘부도유예협약대상기업’에 선정된다. 기아그룹이 위기에 처하자 기아차노조는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기아그룹이 소유가 분산되어 있다는 이유로 “국민기업”이라고 주장하고 “기아 살리기 국민운동본부”를 구성한다. 운동본부는 기아차 정상화와 정리해고 반대, 국민기업화, 공기업화를 주장한다. 노조입장에서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대응이었다. 경영위기 상황에서 노조가 기업 내의 고용안정 방어 투쟁에 주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기아차 위기의 원인이 과잉투자였다는 점에 대한 비판, 또 단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경제의 위기로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기아차노조는 물론 민주노총 역시 무지하거나 무관심했다. 국민경제가 위기 상황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고, 위기의식도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대안도 마련하기는 어려웠다. 결국 기아그룹은 법정관리 상태에서 매각협상, 구조조정을 거쳐 1999년 현대그룹에 합병된다.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고용을 실현했던 대기업에서도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이 이어진다. 중소기업은 1990년대에도 고용불안이 잦았지만, 정리해고와 구조조정은 이들 대기업 노동자가 별로 경험하지 못한 사태였다. 이전에 안정적인 직장을 가졌던 남성노동자(노동운동을 주도한 대기업 노동자)의 상대적 불안정화(해고와 비정규직 고용)는 전체 노동시장의 고용불안 문제를 가시화한다. 이전에도 계속 불안정한 위치에 있었던 도시하층노동자와 여성노동자들의 상태는 그대로였는데, 이들의 문제는 그 이전에는 부각되지 않았다는 역설이 있다. 
 
 

9. 정치적 노동자운동의 분화

 
 
이 시기의 정치적 노동자운동은 전노운협의 결성(1988년)과 분화(1990년),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창준위’(1991년 7월) 결성을 주목해야 한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구성된 ‘노동조합탄압저지 전국노동자공동대책협의회’(전국공대협)(1988년)는 상설 공동투쟁체가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전노운협을 결성한다. 각 지역의 노동운동단체들로서 이들은 지노협 활동에 결합하고 지원활동을 전개한다. 전노운협은 전노협 건설 이후 1990년 하반기 들어 조직노선을 둘러싸고 논쟁한 끝에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과 분화한다. 이어 합법정당 건설 운동이 부각되면서 여기에 참여하는 활동가들은 정당 운동으로 이전한다. 바로 한사노당 창준위이다.
 

1991년 들어 인민노련, 노동계급, 삼민동맹 등 ‘비합법 정파’ 조직들이 통합하면서 한사노당 창준위를 결성한다(이른바 ‘PD 3파 통합’). 이들이 통합한 후 채택한 길은 한사노당(주대환 위원장)이 제시한 ‘신노선’이었다. 구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새로운 사회주의의 상을 구성하고 합법정당 운동을 전면화하자는 것이었다. 한사노당 창준위 쪽 흐름은 1992년 14대 총선을 위해 많은 노선적 양보를 감수하면서도 민중당과 통합였으나, 총선 실패 후 민중당은 선거법에 따라 해체된다. 정치세력화의 가능성에 대해 노동자운동 안에서도 회의가 확산된다. 이 시기 한사노당 창준위 구속자, 수배자들이 공안당국에 제출한 탄원서가 큰 논란이 된다. 합법 정당 노선이 변혁 노선의 포기라는 의심이 확산된다. 탄원서가 사회주의 혁명 노선의 포기, 우경화를 보여주면서 노동자운동 내 위신도 추락한다. 전노협은 이러한 논란 속에서 민중당 지지 입장도 조직적으로 채택하지 않는다. 정치적 노동자운동과의 거리가 확인된 셈이다. 

한편, 한사노당의 정당 건설 노선과는 달리 대중조직을 통한 정치활동 전개를 강조하는 흐름도 강력하게 존재했다. 전노운협의 주류는 전위정당 혹은 합법정당 건설보다 노조운동에 대한 개입을 통해 대중적 기반 강화와 함께 정치의식을 고양하는 방향을 주장한다. 그러나 한사노당의 실험이 진행되던 비슷한 시기(1993년)에 ILO공대위를 재편한 전노대 결성 과정에서 전노운협을 비롯한 노동운동단체들이 참여 조직에서 배제되면서 노동조합 중심의 운동이 강화된다. ILO공대위는 중앙과 지역에서 노동단체들을 포괄하고 있었으나, 애초 논의과정에서 제시된 ILO공대위 확대강화가 아니라 전노대 결성으로 안이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동단체들을 배제하는 것으로 결정된 것이다. 

1995년 9월, 한사노당의 맥을 이었던 진정추는 민중정치연합 내 통합파와 통합하며 진보정치연합을 창립했으나, 같은 해 1996년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는 개혁신당에 합류하는 방식으로 노회찬 등 일부가 통합민주당(꼬마 민주당)에 합류하면서 이 과정 역시 파행을 겪는다. 그러나 이런 시도에도 별다른 성과를 남기지 못하고, 1996년 총선이 이후 진보정치연합은 통합민주당에서 철수한다. 이후 1997년 제15대 대선을 앞두고 민주노총은 대선 대응기구인 ‘건설국민승리21’을 구성한다. 이미 왜소화된 진보정당 추진세력은 이 과정을 주도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합류하며, 이후 민주노동당 건설로 이어진다.

노동조합운동이 민주노총 건설로 정비되는 과정에 정치적 노동자운동, 혹은 정당지향 노동자운동은 이합집산을 거치면서 계속 축소되어 왔다. 결국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 사회경제적 운동노선 하에 구상된 민주노총의 권영길 위원장의 대선 출마와 ‘국민승리21’ 건설 운동이 진보정당 건설을 주도하는 상황이 되었다. 민주노동당은 정당운동이 독자적으로 발전했던 19세기 독일 사민당보다는, 노총이 자신의 정치활동을 위해 정당을 건설하고 지배하는 20세기 영국 노동당 모델에 가까웠다. 독일 노동자운동이 정치적 노동자운동을, 영국이 사회경제적 노동자운동을 대표하는 모델이라고 할 때,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후자에 가까운 성격이 강화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2000년대 초반의 짧은 성공을 거쳐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

※ 다음 호에는 IMF 구제금융위기 이후의 노동자운동의 전개를 다룬다.
 
 
 
주제어
정치 경제 노동 노조 이론 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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