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2023 여름.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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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선거연합정당의 문제점

진보정당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정치방침은 실패한다

정지현 | 노동위원장


1. 민주노총 정치·총선방침 안의 문제

 
2023년 들어 민주노총 집행부는 2월 정기 대의원대회와 4월 임시 대의원대회를 통해 「노동중심 진보대연합정당 건설안」을 정치·총선방침으로 제출했다. ‘진보 정치세력이 대단결 하는 노동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통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는 내용의 정치방침과 함께 내년 총선에 이를 실현하기 위한 총선방침을 제시했는데, △ 노동중심의 진보대연합정당을 만들어 지역과 비례대표 후보 선출을 추진한다, △ 후보 선출은 합의 정신에 기초한다, △ 총선 승리 후 복귀를 원하는 정당의 당선자들은 이를 보장한다는 내용이다.

본격적인 주장에 앞서 대의원대회에서 언급된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선거연합정당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노동자 정치세력화란 노동자 계급이 이념적·조직적으로 보수주의 혹은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분별  정립해 정치적·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기 위한 운동전략 전반을 의미한다. 연합정당은 각각의 당을 유지한 가운데 별도의 선거연합정당을 구성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정당법 제42조 2항은 이중당적 보유를 금지하고 있어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 4월 임시대대에서 선거연합정당을 둘러싸고 찬반 토론이 격렬히 진행된 데는 양경수 집행부가 제출한 안이 진보정당의 역사적 실패 과정에 대한 반성 없이 통합만을 강조했다는 데 원인이 있다. 따라서 이념과 전략 없이 추진한 정치세력화가 어떤 파국을 맞았는지 역사적으로 깊이 성찰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민주노총이 노동자시민을 대변해야 할 책임이 있고 사회구조 변혁을 추구하는 운동 조직이라면, 정치세력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힘 있는 노동자정당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넘어 그 힘이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고 어떤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할지를 주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20여 년간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과정에서 뼈아프게 성찰해야 할 진보정당의 역사를 돌아보고, 그 가운데 민주노총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진보정당의 역사와 성찰: 패권, 야합, 위장의 반복은 없어야 한다

 
1996년 12월 신한국당의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 통과에 맞선 96·97년 총파업을 계기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논의가 불붙기 시작했다.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논의는 19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 21’을 거쳐 2000년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면서 본격화된다. 민주노동당 창당은 진보정치연합을 비롯한 소위 평등파의 주도 아래 민주노총이 함께하면서 추진된다. 개인별로 꾸준히 결합해 왔던 소위 자주파는 2001년 9월 전국연합의 민족민주전선 일꾼전진대회에서 “3년의 계획! 10년의 전망! 광범위한 민족민주전선, 정당건설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하여 연방통일조국 건설하자”는 결의를 통해 조직적으로 대거 민주노동당에 합류한다. 민주노동당이 만들어지던 2000~2003년 당시에는 이 같은 정파연합에 대해 비교적 낙관적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서로 차이가 있던 정파들이 민주노동당으로 모일 수 있었던 데에는 정세적 맥락이 있었다. 19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혼란 속에서 정파별로 이념적 차이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고,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IMF반대 범국민운동본부’를 통해 반신자유주의 전선 구축이 필요하다는 초정파적인 공감대가 형성된다. 북한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도 당시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의 등장과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으로 북한과의 관계가 유화 국면이었고, 북한 사회의 변화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진보진영의 관점에서도 원내 입성을 통해 정치권력을 획득하면 운동 진영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 1995년 출범하여 어엿한 대중조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던 민주노총이 지지층과 재정을 뒷받침해 줄 수 있다는 판단도 민주노동당 출범에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다양한 정파 연합의 성격을 띤 민주노동당의 출범으로 형성된 정치세력화 논의는 의원 배출이라는 가시적 성과를 달성했지만, 그럴수록 당내 갈등은 점점 더 심화했다. 급기야 분열을 거듭하면서 민주노동당에서 통합진보당과 진보신당으로 한차례 분열되고, 그 뒤로는 통합진보당, 진보정의당, 노동당으로 분열한다. 현재는 민주노총이 지지하는 진보정당이 4개나 존재하고 있다. 

20여 년이 넘는 진보정당의 역사 중에서도 특히 2008년, 2012년, 2020년 세 가지 국면에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패권주의로 점철된 2008년 민주노동당의 분열 과정, 이념 없는 실리적인 야권연대가 공멸을 야기한 2012년 통합진보당의 붕괴 과정, 여전히 야권연대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해 일종의 위장술을 펼친 2020년 총선 과정에서의 비례위성정당 사태를 복기하는 일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줄 것이다. 각각 구체적인 과정을 살펴보자.
 

1) 민주노동당 분당의 원인, 패권주의와 북한에 대한 편향적 인식

① 패권주의 문제
민주노동당 출범 직후 대거 입당한 자주파는 당내 권력을 잡고자 했다. 자주파의 패권주의는 당내 권력을 비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장악하고자 했던 각종 시도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자주파는 위장전입과 같은 위법행위를 활용하거나 1인 다표제를 활용해 당직 장악을 시도했다. 2001년 지구당 편제가 시작되면서 지구당위원장 선거를 장악하기 위해 위장전입, 당비 대납, 집단 주소 이전이 광범하게 이루어졌다. 2002년 2월 자주파의 대대적인 당적 이동을 통해 용산지구당의 당권을 장악한 사건, 대의원대회에서 후보 인정이 무산되자 경기도지부 상근자가 허위공문을 작성하는 편법을 동원하여 후보 출마를 감행하려 한 의정부 갑 지구당 창당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당내 정파적 갈등과 긴장이 첨예해졌다.

또한 자주파는 다수파에 유리한 1인 다표제를 도입하여 주요 당직을 차지했다. 2004년 2월 12일 5차 중앙위원회가 관련 당규를 개정함으로써 도입된 1인 다표제는 최고위원을 선출하는 방식에 도입되었다. 1인 다표제는 원하는 만큼 선출직을 차지할 수 있어 다수파는 유리한 제도지만, 소수파는 아예 선출직을 못 맡게 될 수도 있어 불리했다. 예를 들어, 2004년 6월의 민주노동당 1기 최고위원회 선거에서는 최고위원 13인 가운데 자주파로 분류될 수 있는 위원이 10명이나 당선되었다.

당시 1기 최고위원회 선출방식은 여성명부 4표, 일반명부 3표를 행사하는 1인 7표제이지만 당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농민부문(최고위원), 노동부문(최고위원) 역시 각각 1표씩 투표할 수 있어 사실상 1인 12표인 셈이었다. 2006년 1월 민주노동당 2기 최고위원회 선출방식은 1기보다는 완화되어 여성명부 1표, 일반명부 1표를 행사했지만, 당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원장, 농민부문(최고위원), 노동부문(최고위원) 선출 방식은 유지되어 실제로는 1인 7표인 셈이었다. 따라서 여전히 다수파의 독식이 가능한 구조였다. 

자주파의 패권적인 공직 장악도 빈번했다. 민주노동당은 낮은 지지율을 보이던 2002년 대선과 달리 2004년 총선에서는 많은 의석수를 확보했다. 총선 성적이 상대적으로 괜찮았던 것은 선거제도 변경으로 정당투표가 가능해져서 비례대표 당선이 늘었기 때문이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개정된 정치관계법(선거법, 정당법, 정치자금법)은 ‘1인 2표 정당투표제’, ‘비례대표 후보 여성 50퍼센트’ 도입 등의 내용으로, 이로써 진보정당의 국회 입성 가능성이 훨씬 더 커졌다. 의석수 10명을 차지했던 2004년에는 2명의 지역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례대표로 당선되었다. 

이러다 보니 비례대표 쟁탈전이 점점 과열된다. 당직을 선점하고 비례대표의 앞번호를 배정받아야 당선될 확률이 높았기 때문에 비례대표를 선점하기 위한 경쟁에 불이 붙었다.
 
② 북한에 대한 편향적 인식의 파장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1차 핵실험은 1992년 남한과 북한이 채택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북한이 스스로 파기한 역사적 사건이라 대북정책 전반이 재설정될 필요가 있을 정도의 사건이었다. 북한의 핵실험 이후 민주노동당은 무수한 논란 속에서 갈등에 봉착한다. 

이에 진보성향의 단체들은 북한의 핵보유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제출했다. 10월 17일에는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시민사회 각계 인사 171명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북한 핵실험은 한반도 평화 정착에 역행하고, 동북아시아에 핵확산 도미노 현상을 초래할 수 있다”며 북한의 핵실험을 분명히 비판했다. 

북한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토론회도 잇따랐다. 10월 20일에는 인권운동사랑방, 사회진보연대, 노동자의 힘 등의 단체가 모여 “북 핵실험 국면, 민중운동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반핵은 평화와 인권을 위한 기본 전제”라는 의견을 필두로 핵실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이 쏟아져 나왔다. 11월 2일에는 참여연대, 환경운동연합, 한국YMCA 등의 단체가 모여 “북한 핵실험과 평화운동의 과제”라는 원탁토론회를 열기도 했다. 이 토론회에서는 다소간 의견차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참석자는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고 ‘반전반핵’ ‘반핵평화’ ‘반전평화’ 등 다양한 주장에서 순서를 매긴다면 가장 중요한 기치는 ‘반핵’이라고 의견을 모았다.

민주노동당 내부에서도 반전평화 특별결의문을 채택하고 북한 핵실험에 대한 반대 입장을 내기로 한다. 그러나 10월 15일 열린 민주노동당 중앙위에서 「한반도 평화실현을 위한 특별 결의문」 채택을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지게 된다. 핵실험에 반대하는 문구를 넣어야 한다는 최고위원들의 의견이 있었고, 논쟁이 계속되어 수정을 거듭했지만, 결국 중앙위는 ‘반대’는커녕 ‘유감’을 표명하는 결의안조차 채택하지 못하고 끝났다. 이는 자주파의 반대 때문이었다. 자주파는 북한의 핵실험은 미국의 대북정책이 초래한 결과이기 때문에 북한의 자위권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민주노동당은 10월 20일 최고위원과 시도당 위원장이 참석하는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북한 핵실험에 대한 당론을 확정하기로 한다. 하지만 최고위원회가 제출한 안을 놓고 논쟁은 여전했는데, ‘한반도 비핵화 실현’이라는 민주노동당의 기본 입장을 북한 핵실험 문제에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가 핵심 쟁점이었다. 결국 ‘북의 핵실험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분명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는 최고위원회 제출안에 합의하며 회의를 마쳤다. “반전평화 투쟁을 벌여나가기 위해서는 당내에서 우선 합의할 수 있는 수준에서 북 핵실험에 대한 입장을 타협해야 한다”는 다수의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였다. 

그리고 이 결정에 근거해 10월 24일, 민주노동당은 국회 본청 계단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반전평화 결의대회’를 열었다. 당시 국회의원인 권영길, 단병호, 심상정 의원을 비롯해 민주노동당 당직자 50여 명이 참석해 다음과 같은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북한의 핵실험은 한반도 비핵화, 나아가 핵보유국의 핵무기 감축 및 철폐를 주장해온 반핵평화 세력의 입지를 심각히 훼손했다. 한반도 비핵화는 어떠한 경우에도 양보할 수 없는 확고부동한 우리의 원칙임을 재차 확인하며, 북한의 핵무기 폐기와 한반도 비핵화, 핵감축과 궁극적 철폐를 위해 민주노동당은 모든 노력을 다할 것임을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천명한다.” 이로써 북한 핵실험을 둘러싼 갈등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다.

진보진영은 민주노동당이 북한의 핵실험을 반대하는 입장조차 신속히 천명하지 못한다는 것은 진보정당으로서의 책무를 방기하는 일이라고 비판했다. 희망사회당과 시민단체들도 민주노동당을 비판하는 내용의 논평을 냈으며, 《한겨레21》은 “진보는 판문점에서 멈춘다”는 글에서 “민주노동당의 북핵 인식이 대중들과 한참 동떨어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민주노동당은 북의 핵실험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끝내 내놓지 못했다. 진보정당의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인 ‘반핵’ 원칙이 북한 앞에서 흔들린 것이다”라며 민주노동당의 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민주노동당에서 북한에 대한 입장을 둘러싼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최기영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과 이정훈 민주노동당 중앙위원이 남한의 정치 동향 및 민주노동당 내부 성원의 인적사항을 담은 보고서를 북한에 보낸 일명 ‘일심회 사건’이다. 2006년 10월 26일 국정원은 이정훈 민주노동당 전 중앙위원과 최기영 민주노동당 사무부총장을 연행했다. 12월 8일 검찰이 수사 결과에 따르면, “장민호 등 일심회 조직원들이 열린우리당과 민노당 등 각 정당의 내부 동향이나 정책 방향 대선·총선·지방선거 등의 예측 자료와 결과 분석, 주요 정치인 신상 정보 등을 수집해 북한에 제공한 사실을 파악했다”와 “이들의 대북 보고문 가운데 수십 건이 국가 기밀에 해당한다”는 것이 구속의 이유였다. 이후 1년이 지난 2007년 12월 13일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이정훈은 징역 3년, 최기영은 징역 3년 6월형이 확정되어 상당 부분 혐의가 입증된다. 
 

이 사건의 파장은 민주노동당에 치명적이었으나 당 지도부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일심회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당 내부의 철저한 조사가 선행돼야 했지만, 민주노동당은 2006년 12월 초 관련자들이 구속되었을 때도 법정 판결이 나올 때까지 지켜보자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때 민주노동당의 지지율도 급속히 떨어졌다. 10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한 2004년 총선의 정당명부 비례대표에서 얻은 득표율은 12.9%였지만 이 당시 지지율은 4.2%였다. 이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바닥났음을 보여주는 지표였다. 외부에서의 비판도 상당했다. 내부 성찰과 반성도 없이 공안탄압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공당으로서 적절한 자세가 아니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민주노동당 내부에 이 사건이 미친 영향은 더욱 복잡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당에 대한 배신, 당규 위반 등 각종 쟁점이 불붙었다. 한편에서는 “국가보안법을 이용한 국정원의 마녀사냥이다”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인 만큼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을 가속화하고 관련자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분을 내려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연행된 당원들의 행위는 정치적으로 정당한 것이 아니어서 당이 발표한 공안탄압 중단 요구는 취소해야 한다” “당에 대한 배신행위로 규정해 진상 조사와 당규 위반에 따라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06년 12월 15일에서야 국회 기자회견장에서 당론으로 확정된 “소위 일심회 사건에 대한 민주노동당 입장”이라는 제목의 브리핑이 있었다. 하지만 대법원판결이 나올 때까지 내부 공방과 갈등은 지속됐다. 결국 2007년 대선 이후 갈등이 더욱 격화하여 일심회 사건은 분당의 주요 원인으로 작동했다. 
 
③ 17대 대선 평가를 둘러싼 갈등의 절정 
일련의 사태를 지나며 민주노동당은 2007년 17대 대선에서 참패했다. 2007년 대선은 당내 경선에서 자주파가 지지한 권영길 후보가 민주노동당의 대선 후보로 결정되었고, 개표 결과는 득표율 3.0퍼센트로 2002년 대선에서 얻은 득표율 3.9퍼센트에도 못 미쳤다. 이는 자주파의 패권주의로 인해 민주노동당이 보편적 노동자시민의 정서를 대변하지 못하면서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한 결과였다. 

민주노동당은 대선후보 당내 경선에서부터 선거 전략까지 어느 하나 문제가 되지 않은 것이 없었지만, 특히 대선 슬로건으로 제시된 ‘코리아 연방공화국’ 논란에서 패권주의 문제가 드러났다. ‘코리아 연방공화국’ 문제는 단순한 사안이 아니었다. 대선 시기에 민주노동당이 어떤 ‘국가비전’을 제시할 것인가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문제였다. 당시는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양극화 및 빈부격차 해소, 비정규직의 증가와 삶의 질 제고 등이 시대적 문제였다. 따라서 민생과 경제가 중요한 과제로 제시되었어야 했다. ‘코리아 연방공화국’이 당시 정세와 대선 국면에서 국가비전으로 적절한 것인가에 대한 반문은 타당한 지적이었다. 

이를 둘러싸고 선거 과정에서 민주노동당 내부의 문제제기가 계속 있었다. 우선, 민주노동당 정책위원회의 젊은 연구원들을 중심으로 2007년 11월 9일 “국가비전 코리아 연방공화국에 대한 정책연구원의 입장”이 제출된다. 이는 당시 정책개발단장을 맡은 이용대 정책위원회 의장에게 이의를 제기한 것으로, 입장문에는 “세부 공약작업을 하는 연구원들은 코리아 연방공화국의 ‘구체적 실체’가 무엇인지, 어떠한 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도 들은 바 없었을뿐더러 의견수렴 과정조차 밟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며 “‘코리아 연방공화국’이 다수의 반대와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진행되고 있는 것에 심각한 우려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강하게 성토했다.

더욱 놀라운 일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코리아 연방공화국’과 관련한 입장이 묵살된 것이다. 권영길 후보는 ‘코리아 연방공화국’이 경선과정에서 자신이 주장한 내용이지만, 당내 논란이 있는 만큼 신중하게 결정돼야 하고, 현재의 정세와 대선 국면에 적절치 않다는 견해를 밝히며 선대위에 간접적으로 우려를 전달했다. 결국 민주노동당 선대위는 배치 순서 등 일부 내용을 변경하여 공약집에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소략하게 넣기로 했다. 이렇게 논란은 공약집 한 편의 문구로 정리되는 듯싶었다. 

그러나 자주파는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고집했다. 결국 김선동 사무총장이 당의 공식 결정을 어기고 ‘코리아 연방공화국’을 대선 슬로건으로 담은 포스터를 찍도록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11월 24일 선대위 전략회의에서는 인쇄 중이던 대선 포스터 5만 부를 폐기하기로 한다. 이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킨 김선동 사무총장이 잠적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이렇게 치른 대선에서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자주파는 반성하지 않았다. 선거 참패의 책임은 전혀 지지 않고 오히려 2008년에 있을 18대 총선 비례대표 선출을 둘러싼 극심한 당내투쟁을 의도적으로 조성함으로써 국면을 전환하려 했다. 대선 참패 뒤 꾸려진 비대위가 당내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혁신안을 제출했지만, 자주파는 이를 거부하였다. 혁신안은 편향적 친북행위 관련자 제명, 패권주의 평가, 정파등록제 도입 및 1인 1표의 제도화, 정당법과 투명회계의 원칙에 근거한 재정운영의 현대화 방안, 제2창당과 재창당의 방안을 담고 있었다. 그동안 당내에 있던 많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미 있는 혁신안이었지만 자주파의 반대 속에서 어느 것 하나도 통과가 쉽지 않았다. 비대위는 전당대회가 다가올수록 혁신안을 수정하여 어떻게든 합의를 만들어 내고자 했으나 그마저도 거부당했다. 결국 2008년 2월 3일 전당대회에서 일심회 사건 관련자인 최기영 전 사무부총장과 이정훈 전 중앙위원의 제명여부를 두고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며 파국을 맞이한다. 자주파의 거부로 제명안이 부결되면서 마침내 민주노동당은 분당이라는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2) 통합진보당 폭력 사태의 원인, 야권연대가 가져온 파국

① 통합진보당에서 드러난 야권연대의 그늘
민주노동당이 분열하면서 진보정당은 잔류파가 남은 민주노동당과 탈당파가 만든 진보신당으로 나뉜다. 그러다가 2011년 통합진보당이 새로 결성된다. 민주노동당(잔류파), 새진보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 국민참여당이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을 결성하게 되는데 결성 자체로 문제가 있다는 평가가 많았다. 노무현과 참여정부를 계승하는 국민참여당을 진보대통합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고, 민주노동당 분당의 주요 원인인 패권주의와 북한에 대한 입장 차이도 해결되지 않아 우려가 컸다.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의 핵심 원인이었던 이른바 당권파의 패권주의 행태가 언급되었을 뿐 어떻게 해결하겠다는 대책은 없었고, ‘북한에 대한 태도’ 문제는 “북한 당국을 한반도 평화와 자주적 평화통일의 상대방으로 인정하되, 남과 북 정부 모두에 대해 자주적 태도를 견지한다”는 수준으로 논쟁 없이 정리되었다. 이처럼 통합진보당은 이념의 차이를 무시하고 봉합한 채로 결성된다. 결국 2012년 통합진보당 폭력 사태를 통해 우려가 현실로 드러난다. 이 과정을 통해 민주노동당 분당의 역사를 망각한 ‘진보대통합’의 결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통합진보당은 선거 당선에만 매몰되어 노골적인 야권연대를 추구했다. 통합진보당에서 야권연대가 쉽게 추진된 배경에는 각 세력의 노선에 있다. 민주노동당에 잔류하고 있던 ‘자주파’ 그룹은 1980년대부터 ‘민주대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야권연대를 지속해왔다. 자주파는 ‘민족민주운동의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주장하면서도 여건에 따라 태세를 돌변하여 범야권을 지지했다. 1997년 대선 당시에도 국민승리 21에 참여했다가 DJP 연합으로 김대중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커지자, 국민승리 21에서 나와 정권교체를 위한 활동에 돌입한 것이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진보신당 탈당파인 새진보통합연대의 노회찬, 심상정 그룹은 선거법 개정이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다는 명분으로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구했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진보신당의 야권단일화 여부가 논란이 되었던 경험이 야권연대가 불가피하다면 ‘정책적 대가’로서 선거법 개정을 받아내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의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선거 당선만을 위한 연합정당이었기에 선거를 위해서라면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도 버리고 가겠다는 거침없는 행보를 보였다. 대표적인 것이 강령 삭제 문제다. 초기 민주노동당 강령에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해방을 목표로 했던 사회주의 이념과 전통을 계승하되, 현존했던 사회주의가 지녔던 비민주성과 관료적 억압, 경제적 비효율성을 극복하는 체제”라고 명시한 넓은 의미의 사회주의 지향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2011년 통합진보당이 창당하면서 사회주의 지향의 강령을 삭제하고 야권연대를 성사시킨다. 이는 단기적으로 국회 의석수를 늘리기 위해 기존의 이념전략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어떠한 이념, 어떠한 체제를 지향할 것인지가 불분명하다면 진보정당은 과연 무엇을 위한 존재인지 의문이 남는다.

또한 민주노총 대의기구 할당 폐기도 문제되었다. 민주노동당 시절에는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와 함께 당 간부 중 일부 인원을 민주노총에 할당하는 제도가 있었다. 진보정당에서 노동 중심성을 담보하겠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이 제도는 통합진보당 결성 과정에서 사라진다. 국민참여당과 통합하고 민주당과 야권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과정에서 민주노총과의 조직적 연계를 뒷전으로 미뤄버린 것이 아닐까 하는 질문을  던져볼만한 대목이다.

통합진보당은 야권연대를 통해 2012년 19대 총선에서 지역구 7석과 비례대표 6석으로 13석의 의석을 확보하고, 정당 지지율도 10.3%라는 결과를 만들었다. 하지만 의석수 확보 말고는 어느 것 하나 진일보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더 큰 소용돌이가 몰아치기 시작했고 그 후폭풍은 진보진영 모두가 완전히 붕괴할 만큼 대단했다. 
 
② 계속된 부정 경선과 폭력 사태
2012년 총선은 그야말로 부정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부정 경선은 민주당과의 야권연대 경선 과정에서 드러난 이정희 대표의 관악을 선거 부정 의혹이다. 당시 통합진보당은 관악을 후보로 이정희 대표를 경선 주자로 내세웠다. 그러나 ARS 응답에서 나이를 조작하라고 지시하는 문자를 보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후 검찰조사에서 일반전화 190여 대를 설치해서 제삼자의 휴대전화에 착신 연결하도록 한 혐의가 드러났다. 부정으로 경선에서 이긴 사실이 확인됐음에도 이정희 대표는 후보를 사퇴하지 않고 강하게 버티다 압박에 못 이겨 결국 2012년 3월 23일 사퇴하지만, 그 자리에 통합진보당은 이상규 후보를 단일후보로 또 공천한다. 
 

두 번째 부정 경선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나타났다. 비례대표 투표에서 주민등록번호를 도용하고 조작한 대리투표와 이중투표가 확인됐다. 2012년 총선 이후 이 문제가 대대적으로 불거졌다. 당시 통합진보당은 비례대표로 6명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켰는데, 비례대표 1번, 2번, 3번으로 당선된 윤금순,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당권파는 부정선거를 인정한 당내 진상조사 결과를 거부했다. 각 세력이 서로에 대한 폭로를 이어가는 가운데 통합진보당은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에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비례대표 사퇴와 비상대책위 구성안을 표결에 부치자, 이를 거부한 당원들이 회의장에 난입하여 단상을 점거하고 회의를 진행하던 공동대표단을 폭행했다. 이미 민주노동당 내에서 갈등을 초래했던 자주파 내 당권파는 반성 없이 패권주의를 재연한 것이다. 중앙위원회 회의 직전 이정희 공동대표는 사퇴를 선언하고 회의장을 떠났다. 당권파 당원들은 회의 초반 성원 여부를 가지고 문제를 제기하더니, 참여당 계열의 중앙위원 자격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며 회의를 지연시켰다. 세 차례에 걸친 정회 끝에 심상정 공동대표가 첫 번째 안건인 강령 개정안 심의·의결 건이 통과됐다고 선언하자 당권파 당원들은 단상으로 뛰어들었고 폭력이 발생했다. 통합진보당의 연이은 부정 경선 논란은 결국 이렇게 폭력 사태로 마감되었다. 더는 진보정당 운동이 가능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③ 통합진보당 해산 과정에 대한 성찰
폭력 사태 이후 통합진보당에는 강기갑 혁신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지고, 7월 14일 당직선거를 통해 강기갑 지도부가 출범하게 된다. 과연 통합진보당 혁신이 가능할 것인가? 강기갑 지도부에 이목이 쏠렸다. 비대위는 7월 26일 의원총회를 열고 이석기, 김재연 의원에 대한 제명안을 상정한다. 당시 통합진보당에는 13명의 의원이 있었는데 당일 12명이 재석한 상태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다. 기권 5명을 제외하고 7명이 표결에 참여하여 찬성 6표, 무효 1표가 나왔다. 정당법 33조의 규정에 따르면 “소속의원 전원 1/2 이상 찬성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서 이날 제명안은 부결 처리된다. 부결 직후 당사자인 이석기 의원은 기자들에게 “진실이 승리하고 진보가 승리했다”고 말했지만, 이를 기점으로 진보당 쇄신은 물거품이 되었다는 평가가 다수였다. 민주노동당 때 일심회 사건 관련자를 제명하라는 요구가 부결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많은 사람이 통합진보당이 세 번의 쇄신 기회를 놓쳤다고 평가한다. 5월 2일 부정 경선 진상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 발표, 5월 12일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중앙위원회의 폭력 사태, 7월 26일 의원총회에서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부결이 그 계기였다. 세 번째 쇄신의 기회마저 사라지자, 실망한 사람들은 비통한 심정으로 당을 떠났다. 부정 경선 문제가 불거진 5월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조건부’로 철회한 민주노총도 8월 13일 제13차 중앙집행위원회 비공개회의를 열어 중집 성원 39명 가운데 27명의 찬성으로 통합진보당 지지 철회를 결정했다. 이후 민주노동당에서부터 함께 했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집단으로 대거 탈당했다. 결국 통합진보당 강기갑 대표도 2012년 9월 10일 대표직 사퇴와 탈당을 선언하며 당을 떠난다.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퇴와 탈당의 견해를 밝힌 강기갑 대표는 “진보정당 역사에 죄인이 된 저는 속죄와 보속의 길을 가고자 한다”며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석기·김재연 의원의 제명부결은 누군가에게는 승리였겠지만, 그 결과 통합진보당은 회복 불능 상태가 되었고 진보정당의 대중적 신뢰는 바닥을 치고 말았다. 

이 사태 이후에도 통합진보당에 남아있던 당권파는 9월 16일 임시대의원대회를 열어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강병기를 비대위원장으로 선출한다. 그리고 “새누리당의 재집권 저지와 정권교체 실현을 최우선의 목표로 하고, 조직적·대중적 기반을 복원·확대·강화한다”는 대선방침안을 통과시킨다. 이와 함께 5월에 있었던 부정 경선 관련 1차 진상보고서가 왜곡되고 편파적이었음을 확인하고 당기위에서 제명한 당원을 복원하는 등 진상보고서에서 제시한 바 있는 혁신방안을 무효로 했다. 한편, 통합진보당에서 탈당한 세력들은 진보정치 혁신모임 전국회의를 거쳐 ‘새진보정당추진회의’로 전환한 후 10월 21일 진보정의당을 창당한다.

당권파만 남은 통합진보당의 앞길은 순탄치 않았다. 2013년 8월 28일 국가정보원과 검찰이 이석기 의원을 포함한 통합진보당 현역 의원 및 당직자를 대상으로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른바 RO사건이라 불리는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2013년 9월 검찰은 이들을 국가기간시설 파괴 및 인명살상 방안 등을 모의하고, 북한 주장에 동조하는 발언과 함께 북한 혁명가요를 부른 혐의로 각각 내란음모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2015년 1월 22일 대법원에서는 내란선동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유죄로, 내란음모 혐의를 무죄로 각각 판단했다. 이석기 의원에게 징역 9년과 자격정지 7년을, 함께 기소된 통합진보당 당원들에게는 징역 3~5년과 자격정지 2~5년을 선고했다.

한편 박근혜 정부는 2013년 11월 5일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의 강령 등 당의 설립 목적과 일부 활동이 헌법 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안”을 제출한다. 이에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는 통합진보당의 정당해산심판을 결정한다. 또한 지역구 오병윤, 김미희, 이상규 의원과 비례대표 이석기, 김재연 의원 5명에 대한 의원직 박탈도 결정했다. 

정당 강령을 문제 삼아 정부가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하여 해산 결정에 이르게 된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진보진영은 정부의 정당해산 청구에는 한목소리로 비판하고 반대했음에도, 이들에게 연대의 힘을 보태는 데에 소극적이었다. 통합진보당 탄압에 대응하기 위해 꾸려진 ‘국정원 내란음모 정치공작 공안탄압 규탄 대책위’에 진보진영은 적극적으로 연대하지 않았다. 즉, 통합진보당이 진보정당으로서 대안적 정치활동을 마련하지 못하고 북한 문제에 편향적인 노선을 고수했기 때문에 진보진영에서도 거리를 두게 된 것이다. 또한 스스로 성찰하지 않고 모든 사태에 대해 공안탄압이라는 음모론으로 대응했던 통합진보당이 보여준 그간의 모습에 대한 진보진영 내부의 축적된 불신의 결과라 할 수 있다.
 

3) 비례위성정당, 노골화된 야권연대의 미망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민주노총도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을 철회했다. 그 후 민주노총이 지지하는 진보정당도 정의당, 민중당, 노동당, 변혁당, 녹색당 등 5개로 늘어났다. 2014년 이후 선거 시기가 다가오면 민주노총 지지정당에 투표해 달라는 선거방침이 나올 뿐 진보정당의 의미는 점차 퇴색해갔다. 그러다 2020년 총선에서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문제가 불거진다. 당시 논란이 되었던 비례위성정당 논의는 진보진영에도 파장이 컸다. 녹색당과 민중당이 범여권이 주도하는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하겠다는 태도를 내보이면서다. 이에 2020년 3월 17일 민주노총 정치위원회는 “비례위성정당 추진은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본질을 훼손하고, 더불어민주당과의 선거연합 또한 민주노총의 총선 방침에 어긋난다”는 이유에서 비례위성정당에 참여하는 진보정당에 대해 지지를 철회하기로 한다. 이를 바탕으로 3월 19일 중앙집행위원회에 해당 안건을 상정하기로 한다. 3월 19일 중집까지 녹색당과 민중당의 행보를 보면 다음과 같다.

녹색당은 2020년 3월 3일 “선거연합 제안에 대한 녹색당 입장문”을 통해 정치개혁연합(가칭)의 선거연합정당 참여 제안을 받았지만 “녹색당은 선거연합정당 참여 여부를 결정한 바가 없다”고 견해를 밝혔다. 녹색당의 공동운영위원장이었던 하승수 변호사가 정치개혁연합의 선거연합정당 추진을 주도한 데에 당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기 때문이다. 하승수 변호사는 “녹색당 위원장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입장을 밝히고, 2월 29일 당 공동운영위원장직을 사퇴했다. 녹색당은 전국운영위원회와 선거대책본부 명의로 낸 입장문에서 “정치전략적 목적의 명분 없는 선거연합은 참여하지 않는다” “녹색당은 당원들과의 충분한 소통과 합의 없는 선거연합은 참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하지만 녹색당은 이후 3월 12일 전국운영위원회를 통해 ‘당원 총투표 실시의 건’을 의결하여 전당원투표를 하고 비례연합정당에 참여를 결정하면서 기존 입장을 번복했다.

현재 진보당의 전신인 민중당은 3월 17일 이상규 민중당 상임대표가 국회 정론관에서 브리핑을 통해 “민중당은 비례대표 선거연합당에 참여할 것”이고, 3월 22일 중앙위원회를 소집하여 결론짓겠다고 밝혔다. 당시 민중당이 비례위성정당 참여 근거로 내세운 것이 바로 ‘선거연합당’이었다. 민주당의 위성정당이 아니라 선거연합정당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민주당은 3월 17일 복수의 비례대표용 연합정당 플랫폼 중에 ‘정치개혁연합’이 아닌 ‘시민을 위하여’에 참여하겠다고 밝히며 녹색당과 진보당을 배제한다. 그러자 녹색당은 비례위성정당 참여를 포기하게 된다. 민중당도 3월 19일 “비례연합정당 논의는 중단한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원칙을 굳건히 지키겠다”고 입장을 바꿔 비례위성정당 논의를 중단한다. 이렇듯 민주당이 민중당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비례위성정당 참여는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민중당은 민주당의 위성정당으로라도 원내 입성을 시도했을 것이다. 야권연대의 미망이 선거연합정당이라는 전술로 작동했던 것이다.
 
 

3. 정치세력화의 또 하나의 주체, 민주노총 

 
민주노동당의 분열, 통합진보당의 폭력 사태의 책임이 진보정당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총 역시 정치방침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문제를 되돌아봐야 한다. 특히 2012년 진보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철회 과정을 돌아보며, 과연 정치세력화의 주체로서 명확히 자기 역할을 했는지 복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민주노총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선거연합정당 논의를 봤을 때 실패한 역사에 대한 기시감이 들기 때문이다. 
 

1)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 철회와 야권연대

통합진보당 결성과 분열은 민주노총에도 심각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민주노총은 1996년부터 2012년 동안 고수해온 배타적 지지방침을 철회하고 마는데, 이는 민주노총 자신의 분열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배타적 지지방침의 철회는 통합진보당 분당에서 드러난 정파 갈등이 민주노총에 전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민주노총이 민주통합당과의 선거연합을 총선방침으로 결정한 것부터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기까지의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12년 민주노총 김영훈 집행부는 통합진보당 배타적 지지와 민주통합당(민주당의 전신)과의 선거연합을 총선방침으로 통과시켰다. 사실상 비례후보로 통합진보당을, 지역구 후보로 야권단일후보를 찍자는 의미였다. 이러한 총선방침은 절차와 형식과 내용에서 모두 상당한 문제가 있었고, 따라서 큰 반발에 부딪혔다. 김영훈 집행부는 민주노총 대대가 유회되고 방침을 정할 수 없게 되자, 중집에서 총선방침을 통과시키고 강행했다. 비상식적인 일이었고 절차상 중대한 하자였다. 

통합진보당 배타적 지지의 경우 김영훈 집행부는 큰 반대가 없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신자유주의 노선을 계승하는 국민참여당과 합당한 통합진보당을 진보정당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반대 여론이 상당했다. 그럼에도 집행부는 조직 내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총선방침을 강행했다.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은 더욱 문제였다. 민주노총은 야권단일후보를 지지하고 민주당과 정책협약을 맺게 된다. 민주노조 역사상 유례가 없는 민주당과 정책협약은 그 자체도 문제였지만 정책협약의 형식과 내용은 더욱 심각했다. 민주노총의 요구안을 정책협약의 내용으로 제시한 것이 아니라 민주통합당의 노동정책을 지지하는 방식이었고, 민주노총이 민주통합당의 당선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도 명시했다. “제19대 국회에서 민주진보 진영의 원내 제1당 의석 확보 및 교섭단체 구성 등 안정적인 의회 내 절대다수 의석 확보를 담보하는 총선 승리를 위해 적극 협력”이 그 내용이다. 심지어 민주노총 위원장이 민주당 유세에 참여하는 경악할 만한 일까지 발생한다.

선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앞서 살펴봤듯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 부정논란과 폭력 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민주노총 총선방침에 대한 성토가 쏟아졌고, 결국 민주노총은 통합진보당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게 된다. 이처럼 2012년 총선방침은 민주노총 스스로가 야권연대를 통해 정치세력화의 의미를 망가트린 과정이자 1997년부터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실현하기 위해 민주노총이 추구한 운동전략이 해체되는 과정이었다. 2012년의 행보를 통해 사실상 정치세력화 전략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2) 반복되는 정치세력화 논의의 실패

2012년 배타적 지지방침 철회 이후 두 차례의 대선을 앞두고 정치세력화 논의가 수면 위로 부상한다. 민주노총은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새로운 진보대통합과 민중단일후보를 위한 정치전략을 세우려 했으나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됐다. 2022년에는 민중경선을 통한 진보정당후보 단일화를 또다시 시도했으나 좌초되었다. 선거시기마다 등장하는 ‘선거연합정당’ 안, ‘민중단일후보’ 안이 번번이 부결된 이유를 돌아보자. 

2016년 8월 민주노총 정책대대에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해 내년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방침을 결정하자”(1안)는 의견과 “민주노총 주도의 진보대통합당을 건설해 공동투쟁을 벌이자”(2안)는 두 가지 안이 나왔으나 격론 끝에 의견을 모으지 못했다. “민주노총이 앞장서 사분오열된 진보정당을 하나로 모을 수 있고, 하나가 된 진보정당과 힘을 합쳐 공동투쟁을 벌여야 한다”는 의견과 “진보정당 단일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면 더 큰 분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의견이 팽팽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정치방침에 대해 전 조직적 토론을 거쳐 내년 정기대대에서 정치세력화 방안을 의결하자”(3안)는 취지의 중집 수정안이 제시되지만 결국 성원 미달로 유회된다. 

2017년 2월 민주노총 정기 대의원대회에서는 ▲ 2016년 사업평가 및 승인 결산, ▲ 정치전략, ▲ 대선투쟁 사업계획 등 9개의 안건이 제출된다. 그 중 ‘대선 시기 민중후보 전술’과 ‘2018년 선거연합정당 건설’ 방안을 담은 두 번째 정치전략 안건은 부결되고, 세 번째 대선투쟁 안건부터는 성원 부족으로 유회되었다. 정치전략 안건을 논의할 때 5개의 수정안이 제출돼 원안을 포함하여 치열한 논의가 있었지만 모두 부결되었다.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원안으로 제출된 정치전략 안건을 폐기하자는 의견, 대선이 얼마 안 남았더라도 그 전에 진보대통합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의견, 심지어는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을 지지해서 정권교체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2021년에는 다음 해에 대선을 앞두고 진보정당 공동대응기구를 발족해 진보진영 대선후보를 단일화하고자 했으나 최종적으로 결렬되었다. 선거인단 모집 등 대선후보 경선 방식 논의에서 합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번 대의원대회에 상정된 정치방침 안이 부결된 이유는 명확하다. 진보정당이 분열해온 역사 속에서 다수의 진보정당을 통합하는 ‘선거연합정당’ 창당이 과연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회의가 컸고, 자칫 선거연합정당 등 진보정당 단일화 시도가 민주노총의 분열까지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정치세력화의 주체로서 얼마나 책임감 있게 임해왔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일에 소홀했다. 그나마 2016년 민주노총 정책대대에 제출된 민주노총 정치전략 안에서는 “이전 시기의 ‘패권적 당 운영’ ‘상층 중심과 현장 대상화’ ‘의회주의와 대리주의’ 등 오류와 편향에 대한 성찰과 반성”이라는 내용이 언급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전략 안에도 분당의 원인인 북핵 문제 등 변화한 한반도 정세에 대한 입장의 간극을 짚거나, 통합진보당의 비례경선 부정 문제와 폭력 사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부족한 반성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이조차 성찰하지 않게 되었다.
 

3) 민주노총 정치세력화의 원칙과 방향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배타적 지지방침 철회 이후 민주노총 안에서 정치세력화 논의는 진척이 없었고 사실상 공백으로 남았다. 최근에는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 민주노총이 주도하여 진보정당을 모아내 소위 민주노총당을 건설하면 된다는 주장이 등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진보정당의 건설과 선거참여라는 좁은 의미의 정치세력화를 재현할 뿐이다. 따라서 민주노총 역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한 주체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려면 선거연합정당이라는 도식적인 설계가 아니라 원칙과 방향에 대한 깊은 숙고가 필요하다. 단지 선거만을 위한 정당 연합의 결말이 어떠한지는 이미 통합진보당 폭력 사태에서 확인했다.

우선, 민주노총은 민주대연합론과 과감히 선을 긋고 독자적 가치의 추구를 진보대통합의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2012년 총선에서 민주노총의 야권연대 행보가 진보정당이 자정하지 못하고 폭주하는 결과를 낳지는 않았는지, 민주노총 내에 부정적 파장을 일으키지는 않았는지 반성해야 한다. 1987년 대선 시기에 등장한 ‘정치세력화’라는 슬로건은 90년대를 거치며 진보정당의 건설과 선거참여라는 의미로 축소한다. DJ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벗어나 민중운동의 독자적인 정체성과 조직을 구축하자는 것이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즉 애초 정치세력화의 목표였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1996년 말 총파업 투쟁의 평가 과정에서 그 패배의 원인을 의회 내에서 노동자를 지지, 지원하는 정치세력의 결여라고 진단하면서 정치세력화의 의미를 축소한다. 민주노동당의 건설을 통해 민주노총 창립선언문에 명시된 정치세력화가 실현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민주노총은 “우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의원이 필요하다”는 근거로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관점은 독자적인 진보정당이 아니더라도 ‘우리 편’의 국회의원이라면 지지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원내 입성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기존 정당과는 다른 독자적인 노선 수립이었다. 민주노동당은 한국사회의 구조를 변혁하겠다는 이념과 전략을 분명히 하는 과정에서 창당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역사적 반성을 통해 ‘노동중심’의 의미를 숙고해야 한다. 이번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안이 진보대통합의 전제를 노동중심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과거처럼 단지 노동자 출신이 국회의원이 된다는 의미라면 새로울 게 없다. 민주노총이 스스로 혁신의 내용을 밝히고 한국사회 변혁을 주도하는 사회세력으로서 우뚝 설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 ‘노동중심’의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다. ‘노동중심’은 노동조합의 요구사항을 관철한다는 협소한 의미가 아니라, 보편적 노동자들의 삶과 현실을 대표한다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 민주노총이 전체 노동자를 대변하기 위한 다양한 요구를 개발하고 노동자 간 격차 해소를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민주노총은 민주노동당 시기에도 이미 나타났던 조합원들의 소극성을 극복할 방안이 무엇일지 생각해봐야 한다. 단지 지지방침을 정하고 수동적으로 표만 던지게 할 것이 아니라, 조합원의 정치의식을 어떻게 고양하고 주체적인 방식으로 정치세력화를 숙고할 수 있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자칫하면 현재 민주노총 집행부가 총선방침으로 제시하고 있는 선거연합정당이 오히려 정치투쟁을 수동적으로 전락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 

2023년 정치방침을 논의하는 이 시점에서 정치세력화의 당위만 주장하며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실패의 원인에 대한 진단이 필요하다. 민주노총은 왜 배타적 지지방침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는지 스스로 평가해야 한다. 또한, 야권연대와 실용적 선거연합이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반성해야 한다. 4.24 임시대대 이후 꾸려진 “민주노총 정치방침·총선방침 마련을 위한 논의기구”에서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과정에 대한 평가, 현실진단, 쟁점토론을 주로 논의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치열하게 과거를 반성하고, 충실히 논의해 쟁점을 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4. ‘노동중심 진보정치’는 진보정당·민주노총의 쇄신 없이 어렵다

 
다양한 진보정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선거연합정당이 묘안으로 비치지만, 그동안 논쟁의 역사와 현실의 상황을 보았을 때 실제로 실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현재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등은 선거연합정당에 부정적이거나 뚜렷한 찬성 입장을 보이지 않고 있다. 4.24 민주노총 임시대대를 앞두고 정의당 이정미 대표는 인터뷰를 통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밝혔다. “선거 대응용 가설정당 방식으로 당을 만드는 건 정의당은 물론 시민들도 납득하기 어렵다. 민주노총 조합원들도 이 안에 대해 찬반이 갈려 있는 상황이다. 녹색당도 부정적이고, 노동당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진보정당을 하나로 합치자고 했던 좋은 의도가, 민주노총 내부 분란까지 이어지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무리한 결정 시도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표한다.”

이보다 근본적으로 각각의 진보정당들이 추구하는 방향이 옳다고 볼 수 있는가라는 쟁점이 있다. 현재 유일하게 선거연합정당에 찬성의 뜻을 보이는 진보당은 ‘당 중심의 노동운동’을 주장한다. 2021년 진보당 중앙위원회는 ‘당중심 노동운동 전면화’를 채택하면서, ① 조합원 50% 입당 ② 의결단위를 통한 배타적 지지 확보 ③ 현장 당분회와 현장위원회 전면적 건설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당중심 노동운동, 집권을 위한 노동운동이 목표인 ‘당 중심의 노동운동’은 자칫 노동조합 운동의 기능 저하를 불러올 수 있다. 게다가 조합원을 진보당에 무리하게 입당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민주노총 조합원이 진보당에 가입하는 이유도 ‘든든한 우리 편’이 생겨서라지만, 지난 진보정당 역사를 보면 국회에 의원이 있어도 어느 법안 하나 막아내거나 관철하지 못했다. 겉으로는 진보정당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민주당의 을지로위원회에 의존하는 현실을 극복하지 않는다면, 단일한 진보대연합정당 건설은 의미 없는 일이다. 힘이 없으니 모이고, 힘이 부족하니 다른 손이라도 빌려 집권하여 이룩하자는 논리는 이제 그만 반복해야 한다.

한편, 정의당은 선거법 개정에 매달리는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정의당은 선거법 개정을 위한 ‘전략적 야권연대’를 서슴지 않으며,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도 민주당과의 공조를 원활히 유지하려 했다. 2019년 선거법·공수처법 패스트트랙 공조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같은 행동이 진보정당으로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정의당 자체의 입지 자체도 심각하게 훼손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진보당과 정의당 등 현재와 같은 진보정당의 상황에서는 선거연합정당은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옳지 못하다.

민주노총의 상태 역시 선거연합정당을 추진하기에 무리가 있다. 지난 몇 년간 대의원대회에서 정치방침이 논의될 때마다 찬반논란은 전혀 좁혀지지 않았다. 논의가 가능해지려면, 민주노총 스스로 정치세력화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당과 노조와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운동 조직으로서 민주노총이 진보정당과 상호발전을 꾀할 전략적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해 분명한 상이 있어야 한다. 지지방침에 따라 진보정당의 물적 동원부대로 그치는 게 아니라 민주노총 스스로 혁신하여 진보정당과 함께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북한 문제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 민주노총은 북한 핵문제를 비롯한 국제정세 전반에 관한 입장을 명확히 해야 한다. 현재 북한은 선제 핵무기 사용을 법제화해 남한을 향해 핵을 사용할 수 있다고 천명했으며, 중국과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동조하고 있다. 민주노총은 조합원만의 이익을 넘어 한국사회 노동자시민의 삶을 위해 국제정세와 북한 핵위기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민주노총은 친민주당 경향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분명히 해야 한다. ‘노동중심 진보정당’을 내세우면서 민주노총 후보가 민주당과 구별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면 민주노총이 추진하는 선거연합정당은 실패할 것이다. 민주노총이 당면한 과제를 제시하고 쇄신해야 정치세력화가 가능할 수 있다.

민주노총의 정치방침·총선방침 논의는 민주노총만의 과제는 아닐 것이다. 민주노총의 쇄신과 함께 진보정당 역시 한국사회의 구조를 변혁하겠다는 독자 이념과 그에 따른 전략을 가지고 노동자시민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 사회운동도 민주노총을 혁신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진보정당 운동 역사에 대해 평가하면서 함께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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