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해도 가난한 이유
가난은 죄다
세상은 인간답게 살아보라고 한다. 살아서 밥벌이 하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 참여하라고 한다. 자립해서 가족도 건사하고, 노동의 보람도 느끼고, 법도 지키고, 웰빙을 구가하라고 한다. 7억 원짜리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세상에, 평당 몇 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재산세 몇 푼에 조세저항을 하는 천국의 뒷골목 그늘에서 한 달 10만원 남짓 떨어지는 기초법 수령액에 몸을 떨고, 오늘 일하고 돌아서면 내일 일자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세상은 살아보라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현실은 그리 살만하지 않다. 한 해에 ·1만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 몇 배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연간 10만 명씩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한다.
비단 일자리가 없어서 그렇다고? 지난해 여자비정규직 노동자 하위 10%의 평균 시간급은 2234원 (최저임금은 시간당 2510원)이었다. 남녀를 합쳐도 비정규직 하위 10%의 평균 임금은 시간당 2392원. 주당 40시간 노동하는 걸로 계산하면 월급여가 43만원이다. 인색한 국가가 인정하는 최저생계비상의 소득기준은 4인 가족인 경우 105만원이다. 일하나 안하나 어차피 먹고 살 수 없다. 그게 빈민, 실업자, 불안정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대가다.
이제는 모두가 피해자의 대열에 동참했다. 해외소비는 넘치고 면세품점은 불야성인데, 정작 시장에서 물건을 사야할 사람들의 지갑은 텅텅 비어있다. 영세 상인들이 죽고, 중소기업이 죽고, 다음에는 내수시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죽고, 솔직히 말하자, 결국 없는 놈들은 모두 죽게 돼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이다. 그것도 이제는 너무 심해져서 그나마 내수시장에 별 보탬도 안되는 부자들에게 소비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차피 싸구려 내수소비는 거의 안하겠지만, 그나마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애가 타는 심정이다. 이제는 그나마 부자들이 가외로 소비해주지 않으면, 지금 상태조차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여기에서 전설적인 구호가 등장한다. “부자가 더욱 부자가 되어야 가난한 사람들도 먹고 산다“는 것. 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등장한 이 신화가 이제 이 땅에서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금의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더 가난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다른 말로 해서 갈 길은 아직 멀었다. 바닥에 떨어지려면 아직도 한참은 남은 것이다.
일해도 먹고 살 수 없다
IMF때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의 구호는 “일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일자리를 달라!! 그런데 지난 3년 연속 도시근로자 가운데 하위 20%는 적자 가계를 꾸리고 있었다. 해마다 소득보다 지출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동안 빚내서 먹고 살거나, 그나마 없는 재산 팔아서 목숨 이어갔다는 얘기다. 지금 이런 일자리들은, 거저 주어도 먹고 사는데 보탬이 안 된다. 지금 세상이 우리에게 허용해주는 이 안락한 일자리들은 죽어라고 일해도 먹고 살만큼의 돈이 안 된다. 뼈 빠지게 일하고, 눈이 벌겋게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니고도 우리의 노동능력이 떨어져서, 세련되게 말하면 ‘시장 경쟁력이 떨어져서’ 먹고 살 재간이 없다. 인간 경쟁력으로 말해서, 우리는 가장 최하품, 싼맛에 들여오는 ‘중국산 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위 20%라구? 대략 줄잡아도 우리나라 인구 가운데 5백만이다. 아프거나, 늙거나, 너무 어리거나, 집안사정상 도저히 그런 일조차도 할 수 없는 4백만을 제외하고도 5백만이다. 어림잡아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중 1천만은 정부 눈치 보며 목숨 부지하거나, 허덕거리면서 일해도, 살기가 너무 힘들다.
가난에서 극빈으로 이어지는, 그나마 먹고 살던 사람들조차 아래도 떨어지는 이 악순환은 여기에서 끝나야 한다. “우리도 다 같은 사람“이라는 보편적 인류애에 호소하는 것으로는 이 냉정한 시스템의 작동을 멈출 수 없다. ‘인간답게 살 권리’는 이 눈치 저 눈치 다 살피며 측정하는 정부 예산 장부의 복잡한 회계방식 속에서, 시장 경제의 냉정한 비웃음 속에서 재단되고 요리되고 있다. 정부 계산으로도 실제 기초법 대상자의 절반 미만인 140만 명만이 수급권자로 지정되어 있다. 나머지 절반은? 민간단체의 구호에 기탁하거나, 이웃의 호의에 기대고 있다. 아니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 140만 명조차도 차마 민망스러워서 수급권자 신청서류 앞에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최저생계비의 혜택을 받는다. 4인 가족 기준에 1백5만원에, 각종 보험료와 추정 소득을 공제하면, 그것을 ‘생계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천연덕스러움에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다.
그 최저생계비로 살라고? 당신이 한번 살아보라.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면, 우리는 일할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그 쥐꼬리만한 소득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부정수급은 복지병이 아니라, 살기 위한 방편이다. 부정수급자들 때문에 정작 대상자들이 혜택을 못 받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 걸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은총’을 베풀고서는 감히 은총을 속였다고 말하지 말라. 국가의 은총은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도 누구나처럼 살아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 땅의 국민이다. 인간답게 살 권리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는 헌법을 준수하라! 정부 예산이란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돈이다. 빈민, 실업자, 불안정 노동자는 이 땅의 국민이다. 국가의 ‘최저’ 생계비는 어디까지 내려가야 ‘최저’란 말인가? 예산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말라. 정부는 IMF 당시 공적자금으로 150조가 넘는 돈을 쏟아 부었다. 우리는 최소한 그중에 100조원은 허공으로 날아갔음을 안다. 결국은 그 돈들이 허공을 거쳐 누구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는지도 알고 있다. 비정규와 불안정 노동으로부터 거둬들인 돈을 환수하라. 아니, 그 돈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라. 그것은 시혜나 복지가 아니라, 우리의 권리이기 이전에, 국가의 의무이다.
멈춰라, 내리고 싶다!
현재의 빈곤과 실업의 문제의 핵심은 결국 노동시장의 양극화에 있다. 구조조정에 미쳐 기업들은 짜르고 또 짤랐다. 아니, 가장 먼저 시범을 보인 것은 바로 정부였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이제 일하는 사람들 10명 가운데 6명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의 4대 보험 가입률은 40%에도 못미친다. 아파도 병원에 못가고 해고되어도 실업수당도 못받는다. 노후는 아예 상상에도 없고, 그저 오늘을 살고 내일은 기약이 없다. 사실은, 오늘도 살지 못한다. 오늘을 살기에도 모자란다. 정부가 인정하는 최저임금 이하의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5%선이다. 법은 어디에 있는가? 그나마도 주당 40시간 미만 사업장은 최저임금 기준액 적용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른바 주당 36시간 이하의 노동을 하는 ‘단기간 노동’ 활성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일자리가 부족하다. 그렇다. 정말로 일자리가 부족하다. 그래서 정부는 일자리 창출이 최대의 과제라고 선언했다. 정부의 민생문제 염려에 감사한다. 그렇지만, 정부가 말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보자. 정부는 임금이 높아서 해외로 빠져나간 제조업 공동화가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일자리 부족의 원인은 더 싼 임금을 찾아 해외로 나간 제조업 공동화가 주범이 아니다. 청년실업은 정부와 금융 산업 등에서 이른바 ‘양질의 일자리’가 파괴되고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일자리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빈곤층의 실업은 내수시장과 서비스 부문의 축소 때문이다. 왜 내수시장은 축소되었나? 일차적으로 기업들이 투자하지 않아서 내수시장이 불황을 겪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기업들 또한 이윤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데 투자할 리가 없다. 이윤이 날 자리가 없다는 것은 기업이 생산해낸 것을 소비할 여력을 가진 집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해서 국내시장에서 상품을 소비할 사람들의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말이다. 수출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내수가 불황인 이유는 경기순환만을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결국 소득구조가 불평등하다는 뜻이고, 이는 소득분배의 가장 주요한 통로인 노동시장이 심각하게 왜곡되었음을 뜻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자리가 비정규, 불안정 노동으로 바뀌어 갈수록 노동시장은 양극화되고 소득구조는 왜곡된다. 정부가 실업문제를 걱정하느라, ‘비정규직이라도’ 양산하도록 이끌어나가면 나갈수록, 왜곡된 소득구조 하에서 빈민층은 늘어나고, 다시 내수시장의 축소로 이어지며, 결국은 다시 부자들의 소비에 구걸하고, 부자와 기업가들이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세금을 감면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데 앞장서고, 이는 다시 빈곤과 불안정 노동의 확대로 이어진다. 정부는 벌써 이런 방향을 가속화하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비정규직 차별 금지라는 명분으로 파견노동을 확대하고, 불완전노동을 확대시키려 하고 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빈곤계층과 실업자, 불안정노동자들만의 일은 아니다. 이 시장만능의 논리가 사람들의 뇌세포를 지배하는 한, 오늘은 단단해 보이는 중산층의 지반조차도 내일은 모래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오늘은 무사해 보이는 정규직 노동자의 작업복도 내일은 걸레처럼 버려질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프다. 복지병 때문이 아니라, 근로의욕 결핍증이라는 퇴행성 사회심리질환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몸이 아프다. 살기 힘들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병이 들었다. 지금은 단지 우리만의 병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질환은 세상으로 번져갈 것이다. 홧김에 사람을 죽이고, 밤길은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집 앞에 놓인 우유병이 배고픈 실직자의 손에 의해 온데 간데 없어지고, 건물 옥상에서 누가 몸을 던질지 몰라 길 바깥쪽으로만 피해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의 절망은 빈곤과 살려고 애를 써도 살 수 없는 삶 속에서 꽃피어 오른다. 지금은 우리의 병이지만, 이제는 세상의 병이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내일 세상은 더 나쁜 소식들을 듣게 될 것이다. PSSP
세상은 인간답게 살아보라고 한다. 살아서 밥벌이 하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 참여하라고 한다. 자립해서 가족도 건사하고, 노동의 보람도 느끼고, 법도 지키고, 웰빙을 구가하라고 한다. 7억 원짜리 자동차가 굴러다니는 세상에, 평당 몇 천만 원짜리 아파트가 재산세 몇 푼에 조세저항을 하는 천국의 뒷골목 그늘에서 한 달 10만원 남짓 떨어지는 기초법 수령액에 몸을 떨고, 오늘 일하고 돌아서면 내일 일자리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세상은 살아보라고 한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현실은 그리 살만하지 않다. 한 해에 ·1만 명씩 스스로 목숨을 끊고, 그 몇 배의 아이들이 버려지고, 연간 10만 명씩 절대빈곤층으로 전락한다.
비단 일자리가 없어서 그렇다고? 지난해 여자비정규직 노동자 하위 10%의 평균 시간급은 2234원 (최저임금은 시간당 2510원)이었다. 남녀를 합쳐도 비정규직 하위 10%의 평균 임금은 시간당 2392원. 주당 40시간 노동하는 걸로 계산하면 월급여가 43만원이다. 인색한 국가가 인정하는 최저생계비상의 소득기준은 4인 가족인 경우 105만원이다. 일하나 안하나 어차피 먹고 살 수 없다. 그게 빈민, 실업자, 불안정 노동자들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대가다.
이제는 모두가 피해자의 대열에 동참했다. 해외소비는 넘치고 면세품점은 불야성인데, 정작 시장에서 물건을 사야할 사람들의 지갑은 텅텅 비어있다. 영세 상인들이 죽고, 중소기업이 죽고, 다음에는 내수시장이라는 거창한 이름이 죽고, 솔직히 말하자, 결국 없는 놈들은 모두 죽게 돼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악순환이다. 그것도 이제는 너무 심해져서 그나마 내수시장에 별 보탬도 안되는 부자들에게 소비 좀 해달라고 애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차피 싸구려 내수소비는 거의 안하겠지만, 그나마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애가 타는 심정이다. 이제는 그나마 부자들이 가외로 소비해주지 않으면, 지금 상태조차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여기에서 전설적인 구호가 등장한다. “부자가 더욱 부자가 되어야 가난한 사람들도 먹고 산다“는 것. 80년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등장한 이 신화가 이제 이 땅에서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다. 앞으로도 지금의 부자는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더 가난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다른 말로 해서 갈 길은 아직 멀었다. 바닥에 떨어지려면 아직도 한참은 남은 것이다.
일해도 먹고 살 수 없다
IMF때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의 구호는 “일자리를 달라!”는 것이었다. 일자리를 달라!! 그런데 지난 3년 연속 도시근로자 가운데 하위 20%는 적자 가계를 꾸리고 있었다. 해마다 소득보다 지출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동안 빚내서 먹고 살거나, 그나마 없는 재산 팔아서 목숨 이어갔다는 얘기다. 지금 이런 일자리들은, 거저 주어도 먹고 사는데 보탬이 안 된다. 지금 세상이 우리에게 허용해주는 이 안락한 일자리들은 죽어라고 일해도 먹고 살만큼의 돈이 안 된다. 뼈 빠지게 일하고, 눈이 벌겋게 일자리를 찾아 돌아다니고도 우리의 노동능력이 떨어져서, 세련되게 말하면 ‘시장 경쟁력이 떨어져서’ 먹고 살 재간이 없다. 인간 경쟁력으로 말해서, 우리는 가장 최하품, 싼맛에 들여오는 ‘중국산 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위 20%라구? 대략 줄잡아도 우리나라 인구 가운데 5백만이다. 아프거나, 늙거나, 너무 어리거나, 집안사정상 도저히 그런 일조차도 할 수 없는 4백만을 제외하고도 5백만이다. 어림잡아 이 땅에 사는 사람들 중 1천만은 정부 눈치 보며 목숨 부지하거나, 허덕거리면서 일해도, 살기가 너무 힘들다.
가난에서 극빈으로 이어지는, 그나마 먹고 살던 사람들조차 아래도 떨어지는 이 악순환은 여기에서 끝나야 한다. “우리도 다 같은 사람“이라는 보편적 인류애에 호소하는 것으로는 이 냉정한 시스템의 작동을 멈출 수 없다. ‘인간답게 살 권리’는 이 눈치 저 눈치 다 살피며 측정하는 정부 예산 장부의 복잡한 회계방식 속에서, 시장 경제의 냉정한 비웃음 속에서 재단되고 요리되고 있다. 정부 계산으로도 실제 기초법 대상자의 절반 미만인 140만 명만이 수급권자로 지정되어 있다. 나머지 절반은? 민간단체의 구호에 기탁하거나, 이웃의 호의에 기대고 있다. 아니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 140만 명조차도 차마 민망스러워서 수급권자 신청서류 앞에서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는 최저생계비의 혜택을 받는다. 4인 가족 기준에 1백5만원에, 각종 보험료와 추정 소득을 공제하면, 그것을 ‘생계비’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천연덕스러움에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다.
그 최저생계비로 살라고? 당신이 한번 살아보라. 조금이라도 힘이 있다면, 우리는 일할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그 쥐꼬리만한 소득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부정수급은 복지병이 아니라, 살기 위한 방편이다. 부정수급자들 때문에 정작 대상자들이 혜택을 못 받고 있다고 말하지 말라. 그 걸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은총’을 베풀고서는 감히 은총을 속였다고 말하지 말라. 국가의 은총은 턱없이 부족하다. 우리도 누구나처럼 살아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이 땅의 국민이다. 인간답게 살 권리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국가는 헌법을 준수하라! 정부 예산이란 국가와 국민을 지키기 위한 돈이다. 빈민, 실업자, 불안정 노동자는 이 땅의 국민이다. 국가의 ‘최저’ 생계비는 어디까지 내려가야 ‘최저’란 말인가? 예산이 부족하다고 말하지 말라. 정부는 IMF 당시 공적자금으로 150조가 넘는 돈을 쏟아 부었다. 우리는 최소한 그중에 100조원은 허공으로 날아갔음을 안다. 결국은 그 돈들이 허공을 거쳐 누구의 호주머니로 들어갔는지도 알고 있다. 비정규와 불안정 노동으로부터 거둬들인 돈을 환수하라. 아니, 그 돈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라. 그것은 시혜나 복지가 아니라, 우리의 권리이기 이전에, 국가의 의무이다.
멈춰라, 내리고 싶다!
현재의 빈곤과 실업의 문제의 핵심은 결국 노동시장의 양극화에 있다. 구조조정에 미쳐 기업들은 짜르고 또 짤랐다. 아니, 가장 먼저 시범을 보인 것은 바로 정부였다. 그리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으로 채웠다. 이제 일하는 사람들 10명 가운데 6명은 비정규직이다. 비정규직의 4대 보험 가입률은 40%에도 못미친다. 아파도 병원에 못가고 해고되어도 실업수당도 못받는다. 노후는 아예 상상에도 없고, 그저 오늘을 살고 내일은 기약이 없다. 사실은, 오늘도 살지 못한다. 오늘을 살기에도 모자란다. 정부가 인정하는 최저임금 이하의 급여를 받는 노동자들이 전체 노동자의 5%선이다. 법은 어디에 있는가? 그나마도 주당 40시간 미만 사업장은 최저임금 기준액 적용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른바 주당 36시간 이하의 노동을 하는 ‘단기간 노동’ 활성화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일자리가 부족하다. 그렇다. 정말로 일자리가 부족하다. 그래서 정부는 일자리 창출이 최대의 과제라고 선언했다. 정부의 민생문제 염려에 감사한다. 그렇지만, 정부가 말하지 않고 있는 것들을 보자. 정부는 임금이 높아서 해외로 빠져나간 제조업 공동화가 주범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일자리 부족의 원인은 더 싼 임금을 찾아 해외로 나간 제조업 공동화가 주범이 아니다. 청년실업은 정부와 금융 산업 등에서 이른바 ‘양질의 일자리’가 파괴되고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일자리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빈곤층의 실업은 내수시장과 서비스 부문의 축소 때문이다. 왜 내수시장은 축소되었나? 일차적으로 기업들이 투자하지 않아서 내수시장이 불황을 겪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기업들 또한 이윤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데 투자할 리가 없다. 이윤이 날 자리가 없다는 것은 기업이 생산해낸 것을 소비할 여력을 가진 집단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해서 국내시장에서 상품을 소비할 사람들의 주머니가 비어있다는 말이다. 수출이 사상 최대의 호황을 누리고 있는 이 시점에서 내수가 불황인 이유는 경기순환만을 가지고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결국 소득구조가 불평등하다는 뜻이고, 이는 소득분배의 가장 주요한 통로인 노동시장이 심각하게 왜곡되었음을 뜻한다. 우리 사회에서 일자리가 비정규, 불안정 노동으로 바뀌어 갈수록 노동시장은 양극화되고 소득구조는 왜곡된다. 정부가 실업문제를 걱정하느라, ‘비정규직이라도’ 양산하도록 이끌어나가면 나갈수록, 왜곡된 소득구조 하에서 빈민층은 늘어나고, 다시 내수시장의 축소로 이어지며, 결국은 다시 부자들의 소비에 구걸하고, 부자와 기업가들이 더 많은 소비를 할 수 있도록 세금을 감면하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데 앞장서고, 이는 다시 빈곤과 불안정 노동의 확대로 이어진다. 정부는 벌써 이런 방향을 가속화하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이번 정기국회에서 비정규직 차별 금지라는 명분으로 파견노동을 확대하고, 불완전노동을 확대시키려 하고 있다. 이 끝없는 악순환을 이제는 끊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빈곤계층과 실업자, 불안정노동자들만의 일은 아니다. 이 시장만능의 논리가 사람들의 뇌세포를 지배하는 한, 오늘은 단단해 보이는 중산층의 지반조차도 내일은 모래처럼 무너져 내릴 것이다. 오늘은 무사해 보이는 정규직 노동자의 작업복도 내일은 걸레처럼 버려질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아프다. 복지병 때문이 아니라, 근로의욕 결핍증이라는 퇴행성 사회심리질환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몸이 아프다. 살기 힘들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병이 들었다. 지금은 단지 우리만의 병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질환은 세상으로 번져갈 것이다. 홧김에 사람을 죽이고, 밤길은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당신 집 앞에 놓인 우유병이 배고픈 실직자의 손에 의해 온데 간데 없어지고, 건물 옥상에서 누가 몸을 던질지 몰라 길 바깥쪽으로만 피해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사회의 절망은 빈곤과 살려고 애를 써도 살 수 없는 삶 속에서 꽃피어 오른다. 지금은 우리의 병이지만, 이제는 세상의 병이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면, 내일 세상은 더 나쁜 소식들을 듣게 될 것이다. PS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