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운동

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5.11.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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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조운동! 아직 절반의 희망은 남아 있다

조대환 | 이윤보다 인간을
* 이 글은 <이윤보다 인간을>의 공식 입장이 아니고, 필자의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된 글입니다. 이윤보다인간을 홈페이지: http://red.jinbo.net

1. 들어가기 전에: 눈물이 말라버린 민주노조운동

오늘 우리의 슬픔은 어디서 시작하는가? 그것은 열사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부터다. 생면부지 열사들의 죽음 앞에 한없이 울며 자본과 정권에 맞섰던 노동자들의 모습은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류기혁 열사의 죽음 앞에서 오열한 노동자가 몇이나 될까? 박일수, 류기혁 열사의 죽음을 놓고 열사냐, 아니냐를 분석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눈물이 말랐는가! 이제 누구도 생면부지 노동자들의 죽음에 눈물 흘리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함께 눈물 흘리고 싸웠던 이유는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세상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눈물 흘리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함께 만들어 가는 세상, 공유하고 있는 세상이 없다는 이야기다. 열사의 정신으로 투쟁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눈물은 죽은 열사와 지향이 같을 때 흘릴 수 있다. 노동자들이 새 세상에 대한 목표가 동일할 때 가능하다. 그런데 이 정신이 사라진 시대는 더 이상 남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 나를 희생하는 운동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죽음을 자신의 삶과 투쟁에 연결시키는 것도 쉽지 않아지고 있다.
여기에다 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눈물 흘리도록 설득하고 이끌어야할 (단위노조와 상급단체 모두를 포함하는) 노동운동의 지도부가 오히려 '왜 눈물을 흘려야 하는지'를 묻고 있다. 왜 열사여야 하는지를 묻는 것은, 왜 투쟁해야 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은 투쟁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삶은 계층에 따라서 투쟁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노동자들이 아직도 노동해방의 세상을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면 민주노조운동에 눈물은 마르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가야할 길과 반대로 뛰어가는 지도부의 비리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2. 강승규 사태와 민주노조운동의 원죄

강승규 사태의 표면적인 문제는 개인의 비리와 민주노총 상층부의 노사협조주의 노선이다. 또한 노동조합의 관료주의도 핵심적인 문제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어느 한 순간에 바꿀 수 없을 만큼 커다랗게 자라온 근원적인 내부 문제들이다. 이번 사태에 대한 대안으로 여러 사람들이 아래로부터의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무엇부터, 어떻게 혁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답이 많이 부족하다. 아래로부터 혁신이라는 것은 아주 근원적으로 내재한 노동운동의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그러나 "현장대중에게 권력을!", "계급투쟁정신!", 이런 구호만으로는 역시 뭔가가 부족하다. 여전히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노동해방 정신을 잃지 않고 있는 민주노조운동도 조직구조를 지도와 피지도가 성립되는 당 조직 형태로 두고 있다. 민주노총도 마찬가지고 현장조직도 마찬가지다. 이런 지도, 피지도 관계에서는 권력이 현장대중에게 갈 수 없다.
중앙이나, 상부 관료들은 민주 없는 집중으로 민주집중제를 말하고 있다. 반대로 현장조직이나 활동가들은 이런 상층관료의 행태를 비판하면서 민주주의 있는 집중을 말한다. 그러나 집중은 다른 생각과 다양한 대중들의 자발성을 억압한다.
이 두 가지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강승규 사태로 비롯된 비리 문제의 원인과 대안을 찾더라도 해결은 요원하다. 이것이 강승규 사태에 대해서 도발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이유다.

2-1. 노동조합 교육의 문제

민주노조운동 초기부터 지금까지 등장하는 노동조합 교안에는 대부분 "노동조합은 대중조직이다" "노동조합은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계급조직이다)"는 문구와 "생활과 근로조건을 개선시키기 위해 일한다"는 말이 들어 있다. 어느 조직, 어느 시대고 별로 변한 것이 없다. 변한 것이 있다면 오직 '신자유주의'라는 단어가 추가된 것이다.
이 변하지 않는 교안들에서 사회운동을 위한 노동조합의 역할, 자기가 행복하게 살기보다는 남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이타성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사라졌기보다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문구로 전락해 버렸다. 교안을 만들 때 그냥 형식적으로 읽는 수준, 자료집에 첨가하는 정도가 이타성과 사회운동을 바라보는 노동조합의 현실이다. 대중조직으로서 노동조합에 이타성을 강조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전혀 불가능하지도 않다. 이타성이 없는 노동조합에서 제2, 제3의 강승규는 언제든지 나타난다.

2-2. 민주노조운동에서 민주화운동의 약발은 유통기간이 끝났다

누구나 군부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절차라도 확보하려고 했던 시대가 있었다. 배고픔과 노동조건에 별반 차이가 없었고 '공돌이', '공순이'라는 무시에서 탈출하고 싶은 시대가 있었다. 이런 시대정신이 노동해방 이데올로기와 만나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 자체로 정당했다. 시민사회에서도 언제나 정당성을 인정했다.
그런데 이제 노동해방이 무엇인지가 현장에서는 아주 모호하고 미약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시민사회에서는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더 이상 특권을 부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민주화운동 세력의 일부는 제도정치 안으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제 노동자들 각각의 조건은 많은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의식구조와 사회를 바라보고 행동하는 정치지향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화운동 이상의 이데올로기를 생산하지 못한 노동조합운동은 노동해방 정신을 모호하게 이어갈 수밖에 없다. 노동해방 정신이 사라진 노동조합은 권력, 부정-부패 앞에서 나약하다. 이제 노동조합운동은 노동자들을 사회모순에 저항하고 이타적인 투쟁에 나서도록 조직해야 한다. 이것이 노동조합의 정당한 투쟁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야 한다. 노동조합은 사회운동성을 찾아야 한다.
노동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이 민주화운동을 넘어서는 또 다른 정의를 실천할 때, 그것을 대중 이데올로기로 만들 때만이 다시 시민사회에서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이것이 민주화운동의 약발에 눌려 있던 진정한 노동해방 정신을 되찾는 길이다.

2-3. 사회운동을 포기한 민주노조운동

사회적 합의(주의)기구, 사회적 교섭이 운동 판을 뒤집어 놔서 사회운동이란 단어가 도매금으로 개량주의 취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사회운동은 노동조합이 잃어버린 자기 분신이다. 노동운동이 노동조합운동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별도의 특권 있는 운동이 아니다. 사회운동을 하는 운동의 한 형태일 뿐이다. 사회운동은 사회혁명을 위해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실천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운동은 조합주의와 경제주의가 발붙일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의 노동조합은 사회운동성을 완전히 잊고 조합의 이익과 무관한 사회적 투쟁은 외면하고 있다.
이것은 전노협이 실천했던 사회운동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며 결국 민주노총이 조합주의와 경제주의로 달려가는 상황을 만들었다. 지금 그런 민주노총에서 경제주의자, 조합주의자가 넘쳐나고 있다. 운동의 이익, 사회의 이익을 채우려는 고민이 없고 집단의 이익을 채우려는 자들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길로 빠지기 쉽다.

2-4. 여성주의 없이 흘러온 민주노조운동

이번 사태를 접하면서 노동운동의 혁신, 혹은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면서 가장 많이 하는 얘기가 있다. 바로 계급성과 자주성이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하나가 계급성과 자주성에 가려져 있다. 여성주의가 계급성과 자주성에 가려져 있는 한 노동운동을 쟁점을 해결하지 못하며, 여성주의를 우회해서는 노동운동의 혁신도 없다.
우리는 노동조합의 비리, 자본과 유착관계를 이야기 하지만 그 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노동조합 대표자들과 회사관리자들과의 유착관계는 대부분 성적 서비스를 매개로 이뤄진다. 룸살롱이나 단란주점 문화가 대표적이다. 이곳이 여성을 상품화하고 성적 대상화하면서 부패한 노조관료와 회사 관리자가 담합하는 자리다.
그렇다면 관료가 아닌 현장 노동자들은 떳떳한가! 울산 대공장에서 노래방문화, 조합원들의 회식문화는 무엇을 말하는가? 계급성과 자주성이 썩어빠진 반여성적 행태를 저지했던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강승규와 자본가들이 친목을 쌓았던 장소가 어디였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이번 사태의 본질이 강승규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현장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계급성과 자주성으로 치환되지 않는 본질적인 여성주의 문제이며 노동조합이 방기해온 원죄 중 하나다.

3. 강승규 사태에서 민주노조운동의 쟁점

3-1. 기획수사일 때는 무죄인가? 지도부 공격은 정파적인가?

이번 사건에서 기획 수사라는 점을 강조한다고 해도 전체 노동운동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는 없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여전히 민주화 과정의 특권세력으로 노동조합운동을 바라보는 것이다. 무너질 것은 과감하게 무너져야 한다. 정권과 자본이 쥐고 있는 건수(?)가 어디 이번뿐이겠는가? 그 모든 것을 기획수사라는 방패로 막아서기에 노동조합의 관료주의, 부패는 너무 깊다. 대중들은 기획수사라고 해서 노동조합을 더 동정하지도 않고 기획수사가 아니라고 해서 더 비난하지도 않는다. 이미 노동조합의 비리구조나 권력집중 현상은 조직 내부의 대의제 방식으로 제재하기 어려운 수준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조운동을 사수하고자 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한편 이번 사건 직후 벌어진 몇 가지 정치흐름(각 조직의 지도부 사퇴요구, 비상시국토론회, 민주노총 사무총국 활동가들의 사퇴 등)이 정파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정파적이라는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정파 때문에 민주노총 지도부에 문제제기 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묻히는 것은 옳지 않다. 대중조직 지도부가 현실에 존재하는 문제를 제기했다고 정파적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이 더 정파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정파적이지 않기 위해서는 객관적 잣대를 가지고 비리 문제를 인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비리 문제는 상층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공장 중심의 현장에까지 퍼져 있다. 각 대공장 집행부나 현장조직은 민주노총 내 계파나 정치조직과 무관하지 않다. 제 식구 감싸기 없이 공정한 칼날로 단죄할 수 있을 때 정파주의 논쟁은 종식될 것이다.

3-2. 개인 비리인가, 조직의 비리인가?

강승규 비리 사건을 바라보며 논쟁하는 여러 쟁점 가운데 개인비리라는 의견과 조직비리라는 의견이 분분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조직의 비리는 아니지만 조직과 무관하지 않다. 여기서 조직은 정파조직에 국한되지 않고 민주노조로 불렸던 민주노총 전반에 걸친 '구조와 조직'이다.
사실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비리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단위노조에서, 산별연맹과 총연맹에서 두렵고 증거가 없어서 말 못 하던 폭탄들이 서서히 터지고 있을 뿐 이번 사태는 결코 예상치 못했던 일이 아니다. 문제는 왜 이렇게 조직 전체에 비리가 만연해 가고 있는 이유다. 이런 이야기는 대중들이 민주노총 전체를 비리조직으로 사고하게끔 할 가능성이 있는 두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핵심을 돌려 말하는 것은 우리운동에 아무런 득도 되지 않는다.
개인비리로 사고하면 민주노총이 발표한 '노동조합 비리 근절 종합대책'이나 대책기구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결코 개인비리가 아니기에 기구를 만든다고 해결되지도 않고, 민주노총의 종합대책은 충분한 재발 방지책도 아니다. 노동조합의 정신이 무엇인가, 노동조합의 비리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발생하는 구조와 조직문화가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고는 비리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3-3. 민주노조운동의 도덕성이 중요한가! 노동운동 혁신이 중요한가!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단순한 문제가 아니며, 강승규 개인의 문제, 특정 정파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문제는 도덕성 때문이다. 대중들에게 비리집단이라는 비판, 넓게 보면 자본과 정권에 비해서, 좁게 보면 한국노총에 비해서 도덕적 우위를 지켜온 민주노총이 도덕성에 손상을 입는 것은 사망선고에 준하는 치명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의 문제로 이야기하기보다는 개인 또는 단위노조의 문제로, 현장 전반의 문제로 이야기하기보다는 상층권력의 문제로 말한다. 그러나 문제를 이렇게 회피하다가는 노동운동의 혁신은 요원하다. 노동조합운동 전체와 관련된 이번 문제를 회피한다고 노동운동의 도덕성이 더 높아지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도덕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의 근본을 넘어서고자 하는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은 근본적인 지점들을 치유하고 파헤쳐 들어가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체 민주노조운동과 현장운동에 까지 칼날을 들이대는 과감함이 필요하다.

3-4. 노동운동 전체 전략과 무관한가?

현장 문제를 혁신한다는 것은 현장 문화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체 노동운동에 흐르고 있는 일반적인 지형을 점검하고 바꿔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노동운동 전반에 흐르는 큰 줄기는 산별노조와 민주노총-민주노동당 양날개론이다.
이 두 가지 커다란 노동운동 전략이 비리사건과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을까. 산별노조는 점점 위로 집중되는 노동조합의 권력구조, 집중된 권력을 바탕으로 자본과 교섭을 독점하거나 타협하는 모습을 역사에서 보여 왔다. 이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구조 담합의 일상적인 가능성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산별노조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이런 문제는 예전부터 줄기차게 제기되어 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강승규 사건이 터지기 전이나 터진 후에도, 혁신을 이야기하면서도 산별노조를 진리라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민주노동당이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의 집권은 아직도 어렵지만 최소한 허무맹랑하지는 않다.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은 더 높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조합 정치의 최고 정점에 올라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안정적인 의회 진출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민주노총에서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쉽다. 민주노총에서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서구에서 진행한 산별노조만큼 적당한 구조도 없다.
민주노총 지도부와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미묘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다.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탄생시켰지만 민주노동당이 수권을 목표로 하는 이상 노동해방을 대중적으로 표방하는 민주노총은 부담스럽다. 또한 민주노동당에게 외면당하면 민주노총 지도부의 정치생명은 끝난다. 지도부에서 현장으로 돌아갈 초심이 있다면 모를까! 따라서 민주노총은 점점 의회정치가 만족하는 조직운영, 민주노동당이 만족하는 조직운영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계급성, 자주성이 무감각해지고 집중된 권력은 방향을 잃고 손쉽게 흔들린다. 한번 흔들린, 부패의 맛을 알아버린 관료는 다시 헤어나기 어렵다.

4. 하루아침에 바꿀 수 없다면 하나씩 버려라 그리고 성찰하라

지면 상 활동가들의 문제는 많이 언급하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활동가들도 썩어가고 있는 노동조합운동의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스스로 성찰하지 못하고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활동가들이여 성찰하는 삶을 갖자!
그러면서 우리 운동에 대해서 한 번 더 곰곰이 생각해 본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차이는 계급 사이에서만이 아니라 계급 안에도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은 짧은 시간 동안 많은 길을 걸어왔다. 많은 것을 쟁취했지만 여전히 바꿔야 할 세상 역시 넓다.
그런데 자본에 의해 분할된 노동자들은 너무 많이 변했다. 이제 착취당하면서도 평등하지 않은 즐거움을 너무 많이 알아 버렸다. 낮은 수준으로 평등해지 것에 대한 두려움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전국의 활동가들은 너무 많이 지쳐있거나 너무 많이 운동을 떠났다.
노동조합에도 기득권이 있다고 하면 사치일까! 그러나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이다. 민주노총 60만 조합원 사업장의 조건이 각각 다르고 그 조건에 따라서 민주노총 내부의 권력이 다르다. 60만 조합원과 민주노총 밖에 있는 미조직 노동자들의 삶이 다르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부정, 부패 사건의 본질적인 해결책은 대책기구로도, 신고 센터로도, 종합대책으로도 부족하다. 구조적인 혁신이 필요하며 구조적인 문제의 핵심은 노동조합운동의 형태와 조직구조, 전략의 문제다. 노동조합운동의 형태와 조직구조 전략은 이해관계의 산물이다. 결국 이해관계를 포기하지 않고는 현재 구조를 혁신할 수 없다. 현재 구조를 혁신할 수 없다면 강승규 사태와 같은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혁신하기 위한 혁명이 불가능하다면 기득권과 낡은 구조를 천천히 하나씩 버려 나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노동해방 정신으로 돌아가기 위한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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