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비정규투쟁의 현재와 과제
1. 들어가며
#. 1
2005년 9월, 또다시 두 명의 열사가 우리 앞에 있다. 그러나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2003년 10월 이용석 열사와 2004년 2월 박일수 열사 투쟁의 과정 속에서 분노하고 투쟁했던 동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9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우리는 또다시 비정규직의 현실을 인식해야만 했다. 사람이 죽었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공분은 예전보다 잘 조직되지 않았다. 그것은 누구 말처럼 열사냐 아니냐의 논란 때문도, 투쟁을 조직하기 어려운 시기적 곤란함 때문도 아니다. 이를 통해 비정규 문제를 해결할 활동가들의 노력이 과연 있는지가 문제다. 이런 이유로 하반기 투쟁은 힘있게 가지 못하고 있다. 어떤 것이 주요 전선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하고, 어떤 쟁점도 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특히 비정규 투쟁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외로운 투쟁이 되고 있다. 우리의 투쟁도 어느 순간부터 국회 일정과 법안 상정을 중심으로 계획되고 배치된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공세적 투쟁이 없는 가운데 정권의 움직임이 없으면 투쟁도 하지 않는 기이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더 빨리 추진되고 그 안에서 비정규직은 계속 양산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실천 계획을 찾기 어렵다.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비정규노동법 개악안이 아직 유효하고 일하는 노동자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인 현실에서 노동법 개악 저지를 넘어 비정규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입법안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고 쟁취해야 하는데도 운동사회 내에서도 별다른 관심이 없다. 여전히 이 문제는 그들(비정규직)만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왜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지 못할까? 비정규직 투쟁이 계속된 지 6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전체 운동의 과제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애초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문제로 사고하게끔 의제가 잘못 선정된 것일까? 이 글은 이런 고민에서 시작한다.
#.2
지난 몇 년간의 행보를 보더라도 비정규직 투쟁은 중요한 의제였다. 2003년 이용석 열사의 분신과 전비연(준)의 결성부터 2004년 박일수 열사의 투쟁과 열린우리당 점거 등으로 촉발된 비정규노동법개악저지투쟁 등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물론 그 당시 투쟁에서도 정규직 노동조합이 관심을 보인다거나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이 투쟁이 중요하다고 인식했고, 이 문제를 사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조차 찾기가 어렵다. 비정규직 투쟁의 적합한 매개고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터놓고 말해 '노동법개악저지투쟁은 한물 간 것 같다', '비정규직 단위 사업장의 문제는 직접 개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이 심각한 건 알겠는데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2005년 노동운동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비정규직 투쟁의 현실이 어떠한지, 비정규직 투쟁의 원칙이라고 나름대로 천명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면서 우리의 고민을 풀어보자.
2. 비정규 투쟁의 현재
정규직·비정규직 연대의 현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공동 투쟁은 가능한 것인가?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 정규직·비정규직 연대투쟁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 시작한다(물론 엄밀히 말해 지금까지 논의의 초점은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보다는 정규직이 어떻게 비정규직 투쟁에 복무해야 하는지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부터 공동투쟁을 시작해보자).
정규직·비정규직 연대투쟁에 대한 원칙은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 글은 또 다시 진부한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칙이 왜 지켜지지 않았는지, 2005년 우리의 투쟁이 서있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회적인 문제로서는 비정규직 문제가 형식적이나마 고민이 되고 있지만, 단위 사업장에서는 여전히도 비정규직 문제가 중요 문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어떤 지역에서는 정규직노조가 지역의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는 열심히 연대투쟁을 하고 다녔는데 막상 자기 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한다니 나 몰라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이게 단위 사업장의 현실이다.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이라는 것이 실현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벽들이 많다.
정규직 노조의 경우 비정규직 문제를 사고하더라도 시혜의 관점으로 접근하거나 뒷전으로 미루기가 일쑤다. 예를 들어 약간의 기금을 마련한다든가, 임금·단체협상에서 비정규직 임금을 조금 올려주길 요구한다든가,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요구를 제기하더라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미루거나 추상적인 언급 정도로 합의해 버리는 식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서 대리주의와 극단적 분리주의 경향이 나타난다. 대리주의는 직접고용인 계약직 노동자의 투쟁뿐 아니라 간접고용인 사내하청 노동자의 투쟁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사내하청에서는 '정규직과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다'는 극단적 분리주의 경향도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올해 이러한 정규직·비정규직 연대 투쟁의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는 사례는 철도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과 하이닉스, 현대자동차 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헌신적으로 함께 싸운 경우고, 나머지 둘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로 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철도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은 무척 헌신적으로 투쟁에 복무했다. 철도 서울지방본부가 투쟁을 다 이끌었다고 해도 될 만큼 정규직·비정규직 연대 투쟁의 모범 사례로 꼽을 수 있지만, 지난해 금호타이어 노조 투쟁처럼 많은 한계가 남는다. 한 마디로 말해 정규직노조의 노력은 있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주체 형성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이 있었지만, 이 투쟁은 정규직·비정규직 연대 투쟁이라기보다 정규직이 수행한 비정규직 투쟁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들이 무척 어려웠고 정규직 노조가 이만큼 열심히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할 때 쉽게 말할 수는 없더라도, 이 사례에서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열심히 들어주고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장 성과가 남지 않더라도 투쟁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의 주체로 단련될 수 있는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이닉스와 현대자동차의 사례도 정규직-비정규직의 연대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 둘 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일하는 사내하청이며, 사내하청 사업장은 다른 어느 곳보다 연대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알다시피 하이닉스의 사내하청 노조는 민주노총이고 정규직노조는 한국노총이어서 연대하기가 어려운 요소가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는 불법파견 투쟁을 놓고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의 갈등이 타협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첨예했다. 작년 5월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넣은 후 작년 말 불법파견 판정이 나왔지만, 불법파견 진정을 함께 한 것 외에 단 한 번의 실제 공동투쟁도 없었다. 정규직-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을 위해 결성한 <원하청 연대회의>는 결성 처음부터 어떤 합의도 없었고, 때로는 비정규직 투쟁의 발목을 잡는 기구가 되었다. 연대회의가 세운 “공동결정, 공동투쟁, 공동책임”의 원칙은 회의록의 문구로만 남을 뿐 각자결정·각자투쟁·책임전가로 얼룩진 채 정규직노조의 임단협 합의로 사실상 불법파견 투쟁은 끝나버렸다.
현대자동차말고도 올해 사내하청의 대부분은 독자노선을 선택했다. 사내하청은 대공장이라기보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일하는 까닭에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내하청의 정규직노조 가입보다 독자적인 노동조합 건설이 두드러지는 현상은 고민의 여지를 크게 남긴다. 그런데 문제는 사내하청 노조의 독자노선 자체가 아니라 독자노선으로 가면서도 정규직노조에 기대는 대리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노조가 힘이 없고 사내하청 노동자가 조합원으로 가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각종 탄압을 받거니와 심한 경우 계약해지를 당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대리주의를 비정규직 스스로가 극복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투쟁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규직-비정규직 연대의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정규직 노동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규직 노동운동이 연대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는 여러 고민 거리가 남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가 투쟁의 과정에서 주체로 남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연대는 대등한 주체가 모여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때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의 역할은 비정규직을 연대의 동지로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와 함께 임단협 시기의 최종교섭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고 실질적인 해결 방향을 잡는 것도 필요하다.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추상적으로 언급하는 수준으로 적당히 합의하면서 '나는 역할을 다 했다'라고 면피할 것이 아니라 얘기를 꺼냈으면 책임지고 정규직 조합원들 하나라도 설득하고 나서야 한다.
비정규직의 조건에 알맞은 투쟁과 조직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정규직-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의 근거가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 진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정규직 위주의 투쟁 방식이 비정규직 투쟁을 진전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규직노조는 일상적인 임단협을 통해 내부에서 문제를 푼다. 그러나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조건이 다르다. 정규직의 투쟁 방식이 따로 있고 비정규직의 투쟁 방식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투쟁을 하더라도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투쟁의 방식, 투쟁 주체의 조직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교섭조차 어려운 비정규 노조의 현실을 감안하여 당장 성과가 미진하더라도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의 주체가 양성되고 스스로 설 수 있는 방향으로 투쟁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대부분 정규직의 힘으로 성과를 남기는 방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비정규직에게는 한 명이라도 더 뭉치고 한 명이라도 더 주체로 세우려는 고민이 필요한데, 정규직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대신(?) 처리해 주면서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정규직노조가 임단협 과정에서 보이는 태도와 인식이다.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임금만 올려주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서, 전반적인 구조조정이나 외주화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정규직 자신의 문제만 임단협에서 풀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비정규직의 본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비판이 간간이 제기되곤 하는데, 비정규직 투쟁의 매뉴얼이 없다는 문제도 있다. 엄밀히 말해 매뉴얼이 전혀 없다기보다 조건이 다른 정규직 노동운동의 투쟁 방식이 비정규직에게 그대로 적용되면서 비정규직과 맞지 않는 방식의 투쟁이 진행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정규직노조 투쟁 양식에서 보이는 한계와 문제점까지 고스란히 전파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공간에 있지 않는 특수고용의 경우는 어떠한가? 최근 특수고용 노동자의 투쟁에서는 몇몇 단위를 중심으로 투쟁이 배치되면서 동력이 약한 단위의 투쟁은 점점 유실되고 있다. 물론 한 자리에 모여 위력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식만 고민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남기는 게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방식은 아니다. 여전히 조직되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이들의 조직화 방안을 함께 고민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는 힘있는(?) 비정규직의 동원에만 급급하다 보면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다각도의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비정규직 내부의 위계화
자본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 이데올로기가 비정규직 내부에서도 똑같이 관철되고 있다.
그나마 직접고용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고민이 있고 정규직 노동운동도 계약직노동자를 포괄하여 투쟁을 만든다. 하지만 간접고용 노동자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실태조차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직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조차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간접고용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일부 사내하청에서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1차 하청 노동자를 정규직화나 노동조건 개선의 대상으로 삼고 나머지는 내버려두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2·3차 하청 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이나 정규화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1차 하청노동자가 다른 2·3차 하청노동자보다 은근한 우월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특수고용 노동자들도 다른 노동자들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특수고용 사안이 아닌 다른 간접고용 노동자 투쟁에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이러한 비정규직 내부의 위계화 역시 비정규직 연대의 근거를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몇 년째 비정규직 연대투쟁의 상으로 지역 비정규 연대체 건설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지역 비정규 연대체 건설이 어려운 원인의 하나는 비정규직 내부의 위계화로 인한 내부 소통과 이해의 부족이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실용주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운동의 장기적 과제보다 현실적인 이익을 보고 투쟁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이 있고, 일상적으로 고민하면서 단련되는 게 아니라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 계약해지나 고용불안으로 시작하다보니 눈앞의 이익이 중요하게 보이고, 따라서 단기적이거나 실용주의적인 해결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법적 소송에 기대는 경우도 많다. 제대로 된 노조의 형태도 만들지 못하는 경우에 이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노조가 힘이 없고 노동자 단결력에 대한 신뢰가 없다보니 법적인 투쟁에 기대기 때문이다. 법적인 소송은 투쟁의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전술은 될지언정 이것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다. 이런 경우 법적 소송이 잘 안 풀리면 노조 역시 잘 지탱되지 않는다.
3. 정규직-비정규직을 넘어 노동기본권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을 만들자는 것이 하나의 원칙이었다면, 다른 하나의 원칙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운동이 공동투쟁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노동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일단 비정규직 노동운동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노동기본권을 지켜낼 무기를 마련하는 일이다. 비정규직에게 노동자 의식을 심어 줄만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교육 체계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또한 노동조합 조직화도 어렵지만 노동조합의 유지가 더 어려운 비정규 노동자의 조직화 경로에 대한 여러 고민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투쟁에서 남는 것은 결국 주체의 형성이다. 비정규직 투쟁의 불안정성을 볼 때 어떠한 성과보다 주체를 남기는 것이 의미가 크고, 투쟁의 주체가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투쟁의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게 투쟁의 과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즉 교육, 연대투쟁, 자기 결정과 집행의 모든 과정이 투쟁을 통해 형성되어야 하며, 바로 이런 기제 속에서 투쟁의 주체들이 성장할 수 있다.
정규직의 경우는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안전판으로 보지말고 함께 할 주체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규직 조합원보다 정규직노조 활동가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정규직노조 활동가들의 대중을 핑계로 삼지 말고, 이를 극복하여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게 운동이고 활동가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많지는 않지만, 정규직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으로 기여하며 투쟁하는 경우에도 정규직 노동운동이 열심히 문제를 들어주고 대신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장 성과가 남지 않더라도 투쟁이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주체로 형성되는 장이 되도록 고민해야 한다. 비정규직 스스로가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정규직 노동자 대중들이 끊임없는 선전과 교육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는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지녀야 할 태도를 넘어서 운동의 실내용과 방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정규직·비정규직을 넘어 노동기본권 쟁취를 중심 과제로 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정규직·비정규직 할 것 없이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함께 만들기 위해서는 폭넓은 노동자 의식에 기초해 노동기본권을 지켜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양희은의 노래 '작은 연못'의 가사에서처럼 연못 안의 붕어 두 마리는 함께 할 공동 운명을 지닌 것이다. 서로 싸우다 한 마리가 죽으면 그 죽은 물고기가 썩어 연못도 썩고 나머지 한 마리 역시 결국 살 수 없게 된다. 비정규직이 내 문제가 아니니까 죽도록 방관하는 것은 결국 썩은 연못을 만들어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동기본권을 지켜내는 것이 내가 숨쉬고 내가 살아갈 연못을 지키는 일임을 인식하자.
정규직 노동운동은 내 일이냐 남의 일이냐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의 문제로서, 비정규직 노동운동 역시 극단적 분리주의와 실리주의를 넘어 자신들의 투쟁을 노동기본권을 지켜내는 문제로서 인식할 때 연대의 접점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인식하는 과정이 전체 노동자에게 필요한 일임을 자각해야만 서로가 대리주의적인 방식을 버리고 노동자 계급의 문제로 함께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
#. 1
2005년 9월, 또다시 두 명의 열사가 우리 앞에 있다. 그러나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2003년 10월 이용석 열사와 2004년 2월 박일수 열사 투쟁의 과정 속에서 분노하고 투쟁했던 동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9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죽음으로 우리는 또다시 비정규직의 현실을 인식해야만 했다. 사람이 죽었지만 이에 대한 사회적 공분은 예전보다 잘 조직되지 않았다. 그것은 누구 말처럼 열사냐 아니냐의 논란 때문도, 투쟁을 조직하기 어려운 시기적 곤란함 때문도 아니다. 이를 통해 비정규 문제를 해결할 활동가들의 노력이 과연 있는지가 문제다. 이런 이유로 하반기 투쟁은 힘있게 가지 못하고 있다. 어떤 것이 주요 전선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하고, 어떤 쟁점도 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특히 비정규 투쟁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외로운 투쟁이 되고 있다. 우리의 투쟁도 어느 순간부터 국회 일정과 법안 상정을 중심으로 계획되고 배치된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공세적 투쟁이 없는 가운데 정권의 움직임이 없으면 투쟁도 하지 않는 기이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더 빨리 추진되고 그 안에서 비정규직은 계속 양산되고 있는데도 이에 대한 실천 계획을 찾기 어렵다.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비정규노동법 개악안이 아직 유효하고 일하는 노동자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인 현실에서 노동법 개악 저지를 넘어 비정규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는 입법안을 우리의 손으로 만들고 쟁취해야 하는데도 운동사회 내에서도 별다른 관심이 없다. 여전히 이 문제는 그들(비정규직)만의 문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왜 비정규직 문제가 우리 모두의 과제가 되지 못할까? 비정규직 투쟁이 계속된 지 6년이 되어 가는데 아직도 전체 운동의 과제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애초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문제로 사고하게끔 의제가 잘못 선정된 것일까? 이 글은 이런 고민에서 시작한다.
#.2
지난 몇 년간의 행보를 보더라도 비정규직 투쟁은 중요한 의제였다. 2003년 이용석 열사의 분신과 전비연(준)의 결성부터 2004년 박일수 열사의 투쟁과 열린우리당 점거 등으로 촉발된 비정규노동법개악저지투쟁 등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물론 그 당시 투쟁에서도 정규직 노동조합이 관심을 보인다거나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그러나 활동가들은 이 투쟁이 중요하다고 인식했고, 이 문제를 사회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모습조차 찾기가 어렵다. 비정규직 투쟁의 적합한 매개고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터놓고 말해 '노동법개악저지투쟁은 한물 간 것 같다', '비정규직 단위 사업장의 문제는 직접 개입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비정규직이 심각한 건 알겠는데 지금 무엇을 해야 하나'라고 생각하는 게 2005년 노동운동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시작해보자. 비정규직 투쟁의 현실이 어떠한지, 비정규직 투쟁의 원칙이라고 나름대로 천명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점검해보면서 우리의 고민을 풀어보자.
2. 비정규 투쟁의 현재
정규직·비정규직 연대의 현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공동 투쟁은 가능한 것인가?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 정규직·비정규직 연대투쟁이 과연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 시작한다(물론 엄밀히 말해 지금까지 논의의 초점은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보다는 정규직이 어떻게 비정규직 투쟁에 복무해야 하는지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 함께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부터 공동투쟁을 시작해보자).
정규직·비정규직 연대투쟁에 대한 원칙은 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 글은 또 다시 진부한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 끝나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원칙이 왜 지켜지지 않았는지, 2005년 우리의 투쟁이 서있는 현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사회적인 문제로서는 비정규직 문제가 형식적이나마 고민이 되고 있지만, 단위 사업장에서는 여전히도 비정규직 문제가 중요 문제로 부각되지 못하고 있다. 일례로 어떤 지역에서는 정규직노조가 지역의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는 열심히 연대투쟁을 하고 다녔는데 막상 자기 사업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한다니 나 몰라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스꽝스러울지 몰라도 이게 단위 사업장의 현실이다.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이라는 것이 실현되기에는 너무도 어려운 벽들이 많다.
정규직 노조의 경우 비정규직 문제를 사고하더라도 시혜의 관점으로 접근하거나 뒷전으로 미루기가 일쑤다. 예를 들어 약간의 기금을 마련한다든가, 임금·단체협상에서 비정규직 임금을 조금 올려주길 요구한다든가,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문제에 관한 요구를 제기하더라도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뒤로 미루거나 추상적인 언급 정도로 합의해 버리는 식으로 나타난다.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에서 대리주의와 극단적 분리주의 경향이 나타난다. 대리주의는 직접고용인 계약직 노동자의 투쟁뿐 아니라 간접고용인 사내하청 노동자의 투쟁에서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사내하청에서는 '정규직과는 절대 함께 할 수 없다'는 극단적 분리주의 경향도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올해 이러한 정규직·비정규직 연대 투쟁의 현실을 극명히 드러내는 사례는 철도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과 하이닉스, 현대자동차 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헌신적으로 함께 싸운 경우고, 나머지 둘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비정규직 문제로 연대하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철도 새마을호 여승무원 투쟁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은 무척 헌신적으로 투쟁에 복무했다. 철도 서울지방본부가 투쟁을 다 이끌었다고 해도 될 만큼 정규직·비정규직 연대 투쟁의 모범 사례로 꼽을 수 있지만, 지난해 금호타이어 노조 투쟁처럼 많은 한계가 남는다. 한 마디로 말해 정규직노조의 노력은 있었지만, 비정규직 노동자의 주체 형성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이 있었지만, 이 투쟁은 정규직·비정규직 연대 투쟁이라기보다 정규직이 수행한 비정규직 투쟁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조건들이 무척 어려웠고 정규직 노조가 이만큼 열심히 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충분히 감안할 때 쉽게 말할 수는 없더라도, 이 사례에서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열심히 들어주고 대신 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장 성과가 남지 않더라도 투쟁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의 주체로 단련될 수 있는 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이닉스와 현대자동차의 사례도 정규직-비정규직의 연대의 현실을 정확히 반영한다. 둘 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일하는 사내하청이며, 사내하청 사업장은 다른 어느 곳보다 연대의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알다시피 하이닉스의 사내하청 노조는 민주노총이고 정규직노조는 한국노총이어서 연대하기가 어려운 요소가 있었다. 현대자동차의 경우에는 불법파견 투쟁을 놓고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의 갈등이 타협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첨예했다. 작년 5월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가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넣은 후 작년 말 불법파견 판정이 나왔지만, 불법파견 진정을 함께 한 것 외에 단 한 번의 실제 공동투쟁도 없었다. 정규직-비정규직의 연대투쟁을 위해 결성한 <원하청 연대회의>는 결성 처음부터 어떤 합의도 없었고, 때로는 비정규직 투쟁의 발목을 잡는 기구가 되었다. 연대회의가 세운 “공동결정, 공동투쟁, 공동책임”의 원칙은 회의록의 문구로만 남을 뿐 각자결정·각자투쟁·책임전가로 얼룩진 채 정규직노조의 임단협 합의로 사실상 불법파견 투쟁은 끝나버렸다.
현대자동차말고도 올해 사내하청의 대부분은 독자노선을 선택했다. 사내하청은 대공장이라기보다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 일하는 까닭에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의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사내하청의 정규직노조 가입보다 독자적인 노동조합 건설이 두드러지는 현상은 고민의 여지를 크게 남긴다. 그런데 문제는 사내하청 노조의 독자노선 자체가 아니라 독자노선으로 가면서도 정규직노조에 기대는 대리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비정규직 노조가 힘이 없고 사내하청 노동자가 조합원으로 가입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각종 탄압을 받거니와 심한 경우 계약해지를 당하는 현실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대리주의를 비정규직 스스로가 극복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투쟁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규직-비정규직 연대의 과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정규직 노동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규직 노동운동이 연대를 실현하기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는 여러 고민 거리가 남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 스스로가 투쟁의 과정에서 주체로 남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연대는 대등한 주체가 모여 공동의 문제를 해결할 때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규직 노조의 역할은 비정규직을 연대의 동지로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이와 함께 임단협 시기의 최종교섭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고 실질적인 해결 방향을 잡는 것도 필요하다.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문제를 추상적으로 언급하는 수준으로 적당히 합의하면서 '나는 역할을 다 했다'라고 면피할 것이 아니라 얘기를 꺼냈으면 책임지고 정규직 조합원들 하나라도 설득하고 나서야 한다.
비정규직의 조건에 알맞은 투쟁과 조직화 방식을 찾아야 한다
정규직-비정규직의 공동투쟁의 근거가 사라지고 있다는 위기 진단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정규직 위주의 투쟁 방식이 비정규직 투쟁을 진전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규직노조는 일상적인 임단협을 통해 내부에서 문제를 푼다. 그러나 비정규직과 정규직은 조건이 다르다. 정규직의 투쟁 방식이 따로 있고 비정규직의 투쟁 방식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투쟁을 하더라도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투쟁의 방식, 투쟁 주체의 조직화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교섭조차 어려운 비정규 노조의 현실을 감안하여 당장 성과가 미진하더라도 비정규직 노동자운동의 주체가 양성되고 스스로 설 수 있는 방향으로 투쟁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대부분 정규직의 힘으로 성과를 남기는 방식으로 접근하다 보니 문제가 생긴다. 비정규직에게는 한 명이라도 더 뭉치고 한 명이라도 더 주체로 세우려는 고민이 필요한데, 정규직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문제를 대신(?) 처리해 주면서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더 큰 문제는 정규직노조가 임단협 과정에서 보이는 태도와 인식이다. 임단협에서 비정규직 임금만 올려주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하면서, 전반적인 구조조정이나 외주화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고 정규직 자신의 문제만 임단협에서 풀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비정규직의 본질적 문제는 해결되지 못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비판이 간간이 제기되곤 하는데, 비정규직 투쟁의 매뉴얼이 없다는 문제도 있다. 엄밀히 말해 매뉴얼이 전혀 없다기보다 조건이 다른 정규직 노동운동의 투쟁 방식이 비정규직에게 그대로 적용되면서 비정규직과 맞지 않는 방식의 투쟁이 진행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정규직노조 투쟁 양식에서 보이는 한계와 문제점까지 고스란히 전파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같은 공간에 있지 않는 특수고용의 경우는 어떠한가? 최근 특수고용 노동자의 투쟁에서는 몇몇 단위를 중심으로 투쟁이 배치되면서 동력이 약한 단위의 투쟁은 점점 유실되고 있다. 물론 한 자리에 모여 위력적인 힘을 보여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방식만 고민되는 게 문제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남기는 게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방식은 아니다. 여전히 조직되지 못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수도 없이 많다. 그런데 이들의 조직화 방안을 함께 고민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는 힘있는(?) 비정규직의 동원에만 급급하다 보면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다각도의 고민이 필요한 시기다.
비정규직 내부의 위계화
자본의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열 이데올로기가 비정규직 내부에서도 똑같이 관철되고 있다.
그나마 직접고용 비정규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고민이 있고 정규직 노동운동도 계약직노동자를 포괄하여 투쟁을 만든다. 하지만 간접고용 노동자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실태조차 파악되지 못하고 있다. 직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조차 간접고용 노동자에 대해서는 우리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간접고용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일부 사내하청에서 정규직 노조는 비정규직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했다는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1차 하청 노동자를 정규직화나 노동조건 개선의 대상으로 삼고 나머지는 내버려두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2·3차 하청 노동자들은 노동조건 개선이나 정규화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1차 하청노동자가 다른 2·3차 하청노동자보다 은근한 우월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특수고용 노동자들도 다른 노동자들과 자신들이 다르다고 생각하며, 특수고용 사안이 아닌 다른 간접고용 노동자 투쟁에는 소홀한 경향이 있다.
이러한 비정규직 내부의 위계화 역시 비정규직 연대의 근거를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 몇 년째 비정규직 연대투쟁의 상으로 지역 비정규 연대체 건설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지만, 지역 비정규 연대체 건설이 어려운 원인의 하나는 비정규직 내부의 위계화로 인한 내부 소통과 이해의 부족이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실용주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운동의 장기적 과제보다 현실적인 이익을 보고 투쟁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노동조합이 있고, 일상적으로 고민하면서 단련되는 게 아니라 대부분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 계약해지나 고용불안으로 시작하다보니 눈앞의 이익이 중요하게 보이고, 따라서 단기적이거나 실용주의적인 해결책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법적 소송에 기대는 경우도 많다. 제대로 된 노조의 형태도 만들지 못하는 경우에 이런 경향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는 노조가 힘이 없고 노동자 단결력에 대한 신뢰가 없다보니 법적인 투쟁에 기대기 때문이다. 법적인 소송은 투쟁의 과정에서 참고할 만한 전술은 될지언정 이것으로 승부를 볼 수는 없다. 이런 경우 법적 소송이 잘 안 풀리면 노조 역시 잘 지탱되지 않는다.
3. 정규직-비정규직을 넘어 노동기본권을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정규직·비정규직 공동투쟁을 만들자는 것이 하나의 원칙이었다면, 다른 하나의 원칙은 비정규직과 정규직 노동운동이 공동투쟁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노동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다.
일단 비정규직 노동운동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노동기본권을 지켜낼 무기를 마련하는 일이다. 비정규직에게 노동자 의식을 심어 줄만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교육 체계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또한 노동조합 조직화도 어렵지만 노동조합의 유지가 더 어려운 비정규 노동자의 조직화 경로에 대한 여러 고민이 필요하다.
비정규직 투쟁에서 남는 것은 결국 주체의 형성이다. 비정규직 투쟁의 불안정성을 볼 때 어떠한 성과보다 주체를 남기는 것이 의미가 크고, 투쟁의 주체가 투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동운동은 투쟁의 주체를 만들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결정하고 집행까지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게 투쟁의 과정에서 이뤄져야 한다. 즉 교육, 연대투쟁, 자기 결정과 집행의 모든 과정이 투쟁을 통해 형성되어야 하며, 바로 이런 기제 속에서 투쟁의 주체들이 성장할 수 있다.
정규직의 경우는 비정규직을 정규직 고용의 안전판으로 보지말고 함께 할 주체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정규직 조합원보다 정규직노조 활동가들이 그렇게 인식하는 경우가 더 많다. 정규직노조 활동가들의 대중을 핑계로 삼지 말고, 이를 극복하여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게 운동이고 활동가가 책임져야 할 몫이다.
많지는 않지만, 정규직 노동운동이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으로 기여하며 투쟁하는 경우에도 정규직 노동운동이 열심히 문제를 들어주고 대신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장 성과가 남지 않더라도 투쟁이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주체로 형성되는 장이 되도록 고민해야 한다. 비정규직 스스로가 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정규직 노동자 대중들이 끊임없는 선전과 교육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인식하도록 하는 문제도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지녀야 할 태도를 넘어서 운동의 실내용과 방향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정규직·비정규직을 넘어 노동기본권 쟁취를 중심 과제로 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정규직·비정규직 할 것 없이 비정규직 철폐 투쟁을 함께 만들기 위해서는 폭넓은 노동자 의식에 기초해 노동기본권을 지켜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양희은의 노래 '작은 연못'의 가사에서처럼 연못 안의 붕어 두 마리는 함께 할 공동 운명을 지닌 것이다. 서로 싸우다 한 마리가 죽으면 그 죽은 물고기가 썩어 연못도 썩고 나머지 한 마리 역시 결국 살 수 없게 된다. 비정규직이 내 문제가 아니니까 죽도록 방관하는 것은 결국 썩은 연못을 만들어 자신도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노동기본권을 지켜내는 것이 내가 숨쉬고 내가 살아갈 연못을 지키는 일임을 인식하자.
정규직 노동운동은 내 일이냐 남의 일이냐가 아니라 노동자로서 기본적인 권리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의 문제로서, 비정규직 노동운동 역시 극단적 분리주의와 실리주의를 넘어 자신들의 투쟁을 노동기본권을 지켜내는 문제로서 인식할 때 연대의 접점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인식하는 과정이 전체 노동자에게 필요한 일임을 자각해야만 서로가 대리주의적인 방식을 버리고 노동자 계급의 문제로 함께 투쟁을 준비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