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을 사유하는 시 최종천 「투명」을 읽고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예술의 형태에서 ‘노동’은 거의 자취를 감춘 듯하다. 물론 예의 민중문학의 정서적 잔영은 존재하며, 생계노동을 겸해 창작활동을 꾸리는 노동-창작자도 분명 적지 않다. 하지만 해방의 기획 속에서 당파적 투쟁의 도구라는 소임을 견디며 때때로 그 한계를 넘어서던 노동문학은 어디로 갔는가. 90년대 초반부터 시작된 ‘변화’에 내용-형식 양면에서 무력하게 십여년을 경과한 지금, 남은 것은 외롭고 아프고 가난한 것을 감싸는 연민의 감성구조뿐이 아닐까. 우리는 많은 노동시인들이 자연으로, 어머니로, 신화적 기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리듬과 어법이 조금씩 다를지라도 그 회귀지점들이 그리 멀지 않는다는 것도 더불어 눈치챌 수 있었다.
당연히도 회귀의 선택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동안 숨 가쁜 당면과제에 밀린 자기성찰의 기회를 찾는다면 그 회귀는 더 넓고 깊은 곳으로의 새로운 하방(下放)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넉넉히 긍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 많은 경우 자신의 현실을 이끌고 미지의 과거를 찾아가는 시간의 이주(移住)가 아니라, 과거를 가두고 길들여 익숙한 현실로 만든 뒤 그 안에 안존하는 공간의 정주(定住)를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문학에 국한된 것은 아니며, 장르를 불문하고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을 도모하려 했던 모든 실험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 자체로 회귀하는 시 한편을 만난다. 이를 ‘노동시’로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오늘날 노동자를 시적 화자로 삼거나 노동의 주객관적 상황을 해명해서도, 창작자의 알려진 이력이 용접공이어서도 아니다. 이 시는 노동을 통해 노동의 본질로 육박한다.
혀로 빛나게 핥아놓은 밥그릇에는
허기가 가득 차 있다
허기는 투명하지만 잘 보인다
뼈가 앙상한 것을 보면
이빨은 이제
밥그릇도 씹어먹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개들이
씹던 목줄을 뱉어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 손가락을 철망 안으로 넣어주었을 때
녀석은 절대로 물지 않았다
내가 밥을 준다는 투명한 의식이
녀석을 밥그릇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것이다
-최종천 「투명」 중에서
의례적인 분석적 독해를 거부한다는 듯이 이 시의 구조와 표현은 단순하고 선명하며, 화자의 어조 또한 어떤 장치나 배경 없이 담담하다. 여기서 반생명적 계급적대와 지배-피지배의 연쇄관계를 읽어내는 것은 쉽고 자연스럽다. 시인은 오직 그러한 시적 전언을 위해 이 시를 쓴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투박한 진술 이면에 관습적으로 배어 있을 일말의 분노나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상을 자기 세계로 무리하게 인입하는 잠언투의 환언어법에 기대는 것도 아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이 판명함의 정체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허기가 그런 것이라 한다. 투명하지만 잘 보이는 것. 묶인 개가 감지하는 지배-피지배의 모순은 그에게 동물적인 허기로 감각될 뿐이지만, 다음 순간 그 허기의 원인과 메커니즘이 생생하게 현상한다. 어떤 지적 필터나 감정적 매개 없이도, 아니 바로 그 덕분에 직관적인 명석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는 주인-노예의 관계를 인식하고 먹이를 주는 시인의 손을 물지 않는다.
하루에 두 끼나 세 끼를 주고 싶지만
나는 사장의 명령에 따라 한 끼만 주고 있다
나는 회사의 수위
개는 밤에 내가 할 일을 대신한다
사원들이 퇴근할 때, 개집 문을 열어놓아
불투명한 밤을 투명하게 밝혀놓아야
안심하고 잠잘 수가 있다
간밤에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감들 사이에서 녀석이 잡아놓고
다 먹지 않은 의문 하나가 피를 흘리고 있다
-최종천 「투명」 중에서
개의 허기는 시인의 지배전략에 의해, 그리고 그것은 더 큰 지배자의 명령에 따라 조종되는 것이다. 허기는 보상심리와 목적의식성을 불러일으키고 야성적 공격본능을 이끌어낸다.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순치된 개가 더 많은 순종을 위해 본능을 가동하는 이 장면은 기실 어떤 복잡한 장치와 제도도 뛰어넘는 창조적 주체화/신민화(臣民化)의 양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장 의문을 던진다. 개는 과연 누구의 어떤 지배를 받고 있는가. 중간자로서 시인은 사장의 명령을 초과달성하는 개의 행위에서 신민을 넘어서는 주체의 숨겨진 영역을 발견한다. 그것은 규정될 수 없기에 잠재적이고 두려운 것이다. 허기가 투명하고 가시적이라면 이 의문은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이다. 허기는 결국 의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받는 임금은 아주 적다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
그러니까, 개밥 정도인 것이다
개의 그 깊은 낮잠 속에 고여 비치는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최종천 「투명」 중에서
그 의문은 게을러지거나 굶어죽을 정도가 되면 쉽게 망각될 것이다. 우리는 경멸과 슬픔 속에서 때때로 이를 확인한다. 투명하고 잘 보이는 세계의 모순이 불투명하고 잘 보이지 않는 의문을 품는 와중에 삶은 이어진다. 피로한 잠이 육체를 감싸더라도 정신은 드물게 빛을 발한다. 시는 이렇게 분노와 슬픔과 회한의 시간을 지나, 노동을 사유하기 시작한다.
당연히도 회귀의 선택 자체가 부정될 수는 없다. 게다가 그동안 숨 가쁜 당면과제에 밀린 자기성찰의 기회를 찾는다면 그 회귀는 더 넓고 깊은 곳으로의 새로운 하방(下放)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넉넉히 긍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 많은 경우 자신의 현실을 이끌고 미지의 과거를 찾아가는 시간의 이주(移住)가 아니라, 과거를 가두고 길들여 익숙한 현실로 만든 뒤 그 안에 안존하는 공간의 정주(定住)를 목격하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문학에 국한된 것은 아니며, 장르를 불문하고 사회적 실천으로서의 예술을 도모하려 했던 모든 실험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 자체로 회귀하는 시 한편을 만난다. 이를 ‘노동시’로 부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오늘날 노동자를 시적 화자로 삼거나 노동의 주객관적 상황을 해명해서도, 창작자의 알려진 이력이 용접공이어서도 아니다. 이 시는 노동을 통해 노동의 본질로 육박한다.
혀로 빛나게 핥아놓은 밥그릇에는
허기가 가득 차 있다
허기는 투명하지만 잘 보인다
뼈가 앙상한 것을 보면
이빨은 이제
밥그릇도 씹어먹을 수 있으리라
나는 개들이
씹던 목줄을 뱉어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내 손가락을 철망 안으로 넣어주었을 때
녀석은 절대로 물지 않았다
내가 밥을 준다는 투명한 의식이
녀석을 밥그릇 안에 가두어놓고 있는 것이다
-최종천 「투명」 중에서
의례적인 분석적 독해를 거부한다는 듯이 이 시의 구조와 표현은 단순하고 선명하며, 화자의 어조 또한 어떤 장치나 배경 없이 담담하다. 여기서 반생명적 계급적대와 지배-피지배의 연쇄관계를 읽어내는 것은 쉽고 자연스럽다. 시인은 오직 그러한 시적 전언을 위해 이 시를 쓴 것처럼도 보인다. 하지만 투박한 진술 이면에 관습적으로 배어 있을 일말의 분노나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대상을 자기 세계로 무리하게 인입하는 잠언투의 환언어법에 기대는 것도 아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이 판명함의 정체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허기가 그런 것이라 한다. 투명하지만 잘 보이는 것. 묶인 개가 감지하는 지배-피지배의 모순은 그에게 동물적인 허기로 감각될 뿐이지만, 다음 순간 그 허기의 원인과 메커니즘이 생생하게 현상한다. 어떤 지적 필터나 감정적 매개 없이도, 아니 바로 그 덕분에 직관적인 명석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는 주인-노예의 관계를 인식하고 먹이를 주는 시인의 손을 물지 않는다.
하루에 두 끼나 세 끼를 주고 싶지만
나는 사장의 명령에 따라 한 끼만 주고 있다
나는 회사의 수위
개는 밤에 내가 할 일을 대신한다
사원들이 퇴근할 때, 개집 문을 열어놓아
불투명한 밤을 투명하게 밝혀놓아야
안심하고 잠잘 수가 있다
간밤에 없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일감들 사이에서 녀석이 잡아놓고
다 먹지 않은 의문 하나가 피를 흘리고 있다
-최종천 「투명」 중에서
개의 허기는 시인의 지배전략에 의해, 그리고 그것은 더 큰 지배자의 명령에 따라 조종되는 것이다. 허기는 보상심리와 목적의식성을 불러일으키고 야성적 공격본능을 이끌어낸다. 생존하기 위해 스스로 순치된 개가 더 많은 순종을 위해 본능을 가동하는 이 장면은 기실 어떤 복잡한 장치와 제도도 뛰어넘는 창조적 주체화/신민화(臣民化)의 양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장 의문을 던진다. 개는 과연 누구의 어떤 지배를 받고 있는가. 중간자로서 시인은 사장의 명령을 초과달성하는 개의 행위에서 신민을 넘어서는 주체의 숨겨진 영역을 발견한다. 그것은 규정될 수 없기에 잠재적이고 두려운 것이다. 허기가 투명하고 가시적이라면 이 의문은 불투명하고 비가시적이다. 허기는 결국 의문으로 이어진다.
내가 받는 임금은 아주 적다
게을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굶어죽지 않을 정도
그러니까, 개밥 정도인 것이다
개의 그 깊은 낮잠 속에 고여 비치는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최종천 「투명」 중에서
그 의문은 게을러지거나 굶어죽을 정도가 되면 쉽게 망각될 것이다. 우리는 경멸과 슬픔 속에서 때때로 이를 확인한다. 투명하고 잘 보이는 세계의 모순이 불투명하고 잘 보이지 않는 의문을 품는 와중에 삶은 이어진다. 피로한 잠이 육체를 감싸더라도 정신은 드물게 빛을 발한다. 시는 이렇게 분노와 슬픔과 회한의 시간을 지나, 노동을 사유하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