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2호 | 2007.05.10
대추리의 봄을 기억하며 동아시아의 평화를 그려 본다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 국제회의, 또 하나의 출발점
벌써 일 년, 그러나 여명의 황새울은 계속되고 있다
1년이 지났다. 경찰청 인권위원조차 ‘피바다’라 불렀던 ‘여명의 황새울’ 작전으로 대추분교 창문마다 그려진 마을 사람들의 이름과 얼굴이 찢겨나간 지 어느새 1년이 흘렀다. 80년 광주 이후 처음으로 군부대를 동원하여 사람들을 짓밟고 5월 4일 하루에만 524명을, 다음 날 밤에는 집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100여명을 연행했던 야만의 폭거가 지나간 1년 이제 대추리에는 주민들도 평화광장도 들지킴이 문무인상도 파랑새를 든 소녀도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지금까지 여명의 황새울은 끝나지 않았다. 경기도 파주에서는 1100만 평에 달하는 전술 훈련장 확장 사업으로, 평화의 섬 제주에서는 12만평 규모의 해군기지 건설로 얼굴을 바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제에 의해 그리고 미군기지 건설로 인해 삶의 터전을 빼앗겨 버린 평택의 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1982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쫓겨났던 무건리 주민들은 우방국 군대가 함께 사용하는 훈련장 확장을 위해 또다시 쫓겨나게 되었다. 후보 시절 화순항 기지 문제를 전면 재검토하겠노라 약속했던 노무현은 7천 톤급 이지스함 3척을 비롯 20여척의 군함이 정박할 수 있는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고 있으며 공군기지 30만평을 추가적으로 제공하는 문제를 제주도정과 국방부가 협의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취임 초부터 미국의 든든한 동맹임을 자처하며 명분조차 없는 전쟁에 민중들을 내 몰아온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미국의 군사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쟁 기지 건설을 밀어붙이는 것 말고 국가가 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동북아시아 군비경쟁의 도미노
최근 미군이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5세대 전투기 F-22를 배치하면서 동북아시아 국가들의 차세대 전투기 도입이 가속화되고 있다. 일본은 앞으로 5개월 내에 교체 전투기 기종을 결정할 계획이며 F-22 전투기 100대 도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1월 자체 개발한 최신예 전투기 ‘J-10’을 공개, 최근 60대를 실전 배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2015년 실전 배치를 목표로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 J-13과 J-14를 자체 개발 중이다. 러시아는 극동 지역에 320기의 전투기와 110기의 폭격기를 배치하고 있다.
전투기뿐만 아니다. 중국은 지난 4월 다섯 번째 ‘베이더우 항법위성’을 쏘아 올렸고 인공위성 요격 실험에 성공해 미국의 미사일방어(MD) 체제와 경쟁하고 있다. 중국은 또한 작년 10월 러시아제 함재기 50대 도입 추진이 알려진 후 항공모함 구축과 미국과 유럽 전역을 사정거리에 두고 있는 신형 미사일, 최신형 구축함 배치 사실도 공개했다. 미국의 대테러전쟁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일본은 작년 12월 방위청을 방위성으로 승격시키면서 군비증강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신형 이지스함 건조와 함께 차세대 잠수한 건조 프로그램을 추진할 예정이며 기존의 이지스함에 MD 시스템을 개수할 예정이다. 이를 위해 무기수출 3원칙(1967년 ▲공산권 국가 ▲유엔결의로 금지된 국가 ▲국제분쟁 당사국 또는 분쟁 우려국 등 3개항에 해당되는 국가에 무기 및 관련 기술 수출을 금지 원칙이 수립되었고 1976년 무기의 수출을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원칙으로 확대. 일본은 현재 미국과 MD에 한해서만 공동개발.연구만 이 원칙의 예외로 하고 있다)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이 동유럽 MD 체제를 추진하는 것에 맞서 핵 및 첨단 미사일 증강, 이동식 미사일 배치 확대, 핵 잠수함 이동배치 등의 군사적 조치로 강력하게 대응하고 있다.
자국의 일방적 군사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이 추진 중인 미군 재배치와 미사일 방어체제 구축, 신무기 개발은 동북아시아의 군비경쟁을 부추겨 민중들의 평화적 생존을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북한의 핵 불능화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이러한 상황은 우리에게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지난 6자회담에서 ‘9․19 공동성명 초기 이행조치 합의(2․13합의)’가 이루어지면서 정부와 언론은 마치 북한의 핵만 사라지면 한반도,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평화가 보장될 것인 양 호들갑을 떨었다. 이런 식의 이른바 ‘북한 위협론’은 반세기에 걸쳐 남한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전가의 보도였고 한국과 일본, 미국의 파괴적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미국의 일방적 군사패권을 정당화하는 알리바이가 되어 왔다.
북한이 되었건 다른 어느 나라가 되었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그 자체로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핵무기와 같은 절멸의 무기 개발과 군사력 경쟁이 촉발되는 근본적인 원인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처음부터 동아시아에서 자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북한을 고립․봉쇄하고자 한 미국의 호전적 대외 전략이며, 핵 보유국의 독점적 지위를 보장하기 위해 ‘평화를 위한 원자력’이란 미명으로 민중을 기만하는 NPT 체제의 한계다. 이 속에서 6자회담과 같은 국가 간의 외교협상 틀은 표출된 갈등을 일시적으로 ‘관리’할 뿐이며, 미국의 일방적이고 호전적인 대외 전략이 계속되는 한 동아시아는 언제나 전쟁의 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외교 협상이 아니라 민중의 연대와 투쟁이 필요하다
최근 진행된 한미전시증원연습(RSOI)이나 한미기동훈련(Foal Eagle), 베트남 전 이후 최대 규모가 될 것이라는 올 여름의 태평양 군사 훈련 등은 미국의 호전적 군사 전략이 결코 변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수호하기 위한 미국의 군사세계화는 민중의 안전과 평화를 파괴할 뿐이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그리고 레바논 파병에 이르기까지 남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을 보조하고 미국의 패권 전략에 봉사할 뿐 민중의 평화적 생존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철저하게 짓밟았고, 이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신자유주의의 야만과 전쟁의 폭력으로 점철되고 있다.
북한의 핵 실험 이후 동북아시아 주변 국가들은 군사력 확장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정한 국가의 군사력 확장은 지배계급이 공포를 확산시키고 군비 경쟁의 악순환 구조에 주저 없이 뛰어들 수 있게 하는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외교 협상의 진전과 2․13합의 이행을 기다리는 것으로 동아시아의 평화는 보장되지 않는다. 자주국방이라는 명목 아래 추진되고 있는 한국군 군사력 증강 시도에서부터 주한미군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미군 재배치 문제 등 동아시아에서 군사적 긴장을 유발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근본적인 원인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이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직접 행동이 절실한 때다.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 국제회의의 의의
지난 몇 해 동안의 반전평화 운동은 전쟁의 세계화에 맞서 민중의 평화와 정의를 세계화하기 위한 대장정의 출발이었다.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파괴와 학살에 맞선 민중들의 실천은 여러 계기들을 통해 만나고 있다. 지난 3월 에콰도르 키토에서 진행된 ‘외국 군사기지 철폐 국제회의’와 같은 교류와 연대의 성과를 이어받아 실질적인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핵 없는 동아시아, 미국의 군사패권으로부터 자유로운 동아시아’라는 기치로 오는 5월 26, 27일 양일간 고려대학교에서 진행되는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 국제회의’는 반전평화 운동의 전진을 위한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한국을 비롯한 일본과 중국, 태평양 너머 하와이와 미국의 사회운동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경험을 교류·확장하고, 동아시아의 핵 위험과 군사주의의 확대라는 현실 속에서 반전반핵평화 운동의 역할과 과제를 논의하는 자리가 준비되고 있다.
미국의 군사 패권 전략과 남한 지배세력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대추리에서 자행되었던 야만적인 국가 폭력은 이제 파주 무건리에서, 그리고 제주 화순에서 재현되려 하고 있다. 이것은 일부 지역이나 남한만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수호하기 위한 군사 세계화에 평화적 생존을 위협받고 있는 전 세계 민중들의 공통된 문제일 수밖에 없다. 동북아시아에서 확산되고 있는 군비 경쟁의 도미노를 멈추고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유일한 길은 동북아시아 반전평화 운동의 연대를 확장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들의 상호 신뢰를 세계화하여 지배계급이 선동하는 증오와 공포를 종식시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광폭한 폭력에 맞선 민중들의 연대와 교류 확장의 자리로서 ‘반전반핵평화 동아시아 국제회의’에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