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민주주의와 반미를!
광화문 촛불시위에서의 논쟁에 대해
반미열풍이 거세다. 두 여중생의 무참한 죽음이 있은지 6개월만의 일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제안과 참여로 시작된 광화문 촛불시위가 있고, 소위 '깃발논쟁'으로 불리는 약간은 낯선 논란이 진행중이다. 외형만으로 이 논란은 깃발을 든 운동조직대오와 일반 네티즌 참여자들간의 사소한 정서적 불일치일 뿐이다. 그러나 막상 시위현장에서 빚어진 이질적인 두 집단간의 어색한 만남과 사소한 정서적 불일치가 가지는 의미와 그 파장은 생각해 보면 볼수록 현장에서의 갈등이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그리 간단치않은 문제다. 범국민대책위 등의 웹게시판에 이 촛불시위를 최초로 제안했던 '앙마'라는 인터넷아이디의 네티즌은 이 논란에 대해 양쪽의 자성을 촉구하고 각 시위 참여자들 사이의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열려진 광화문이라는 공간을 '더많은 민주주의'의 광장으로 만들어갈 것을 호소하였다. 우리는 이같은 진심어린 호소에 전적으로 동감하면서, 소위 깃발대오로 분류되는 촛불시위 참가자의 일원으로서 제안자의 자성촉구에 화답하고, 더불어 현재의 광화문 촛불시위와 반미운동에 대한 우리의 바램을 피력하고자한다.
광화문과 미대사관, 깃발과 대중
광화문 촛불시위가 벌어지는 종로 교보문고 앞 광장은 현행 집시법상 집회금지장소다. 외국대사관 반경 100m이내 집회금지라는 반민주적 규정 때문이다. 지난주 12월7일 촛불시위대가 점령한 미 대사관 앞은 해방후 한번도 집회가 허락(!)된 적이 없는 성역이었다. 더구나 현행법상 모든 야간집회는 불법이다. 이런 점에서 광화문 촛불시위는 행사의 성사 자체만으로도 민주주의의 큰 진전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인 것이다. 하물며 이 모임은 단순한 추모로 그치지 않는 반미라는 대의아래 이루어지는 집단적인 정치행동이며, '소파개정과 부시사과', '살인미군 무죄판결 무효와 한국법정 처벌'이라는 요구사안 또한 명확한 반미집회였다. 다만 논쟁의 발단이 된 발화점은 깃발로 표상되는 운동조직대오의 생경한 몸짓과 말투, 문화로부터 조직되지 않은 참가자들이 느꼈을 법한 소외감과 위화감인데, 이는 매우 갈등적인 쟁점인 동시에 그 해결책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일견 부차적일 수 있는 문제다. 단지 앞이 보이지 않아 '깃발을 내리라'는 외침은 여느 운동조직들의 집회에서나 벌어지는 풍경이다. 깃발을 내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른바 운동권 사투리로 대표되는 운동집단의 운동문화는 '깃발대오' 스스로 반성하고 시급히 고쳐야할 숙제이다. 또 선두 연단에 한정된 발언권의 분산과 집회참여자들 사이의 자유로운 소통 또한 이른바 '깃발대오'들 또한 언제나 고민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해온 주제다. 깃발을 내리고 말고가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 진정한 문제는 집단적인 정치행동 형식을 띨 수밖에 없는 이같은 모임이 가지는 집단성과 개인성의 모순과 모임의 중심 대의인 '반미'를 둘러싼 집회참가자들간의 의식적이고 무의식적인 갈등과 그로 인한 불편함이다. 깃발은 단지 이 두 주제에 관한 깊고 넓은 갈라짐의 경계가 된 상징적인 매개물에 불과한 것이다.
집단적 정치행동의 조건과 집단성과 개인성의 모순
둘 이상의 사람이 모여 그들 자신의 이해를 넘는 대의를 실현하려고 공동의 행동을 실천한다면, 이는 이미 하나의 정치적 집단행동이다. 그리고 그같은 집단행동에는 집단을 형성한 각 개인들 서로간에 대의를 공유할 수 있는 상호 교통의 조건이 필수적일 것이다. 물론 그 대의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방식과 결론은 상이할 수 있을지언정 말이다. 우리는 이같은 정치적이고 집단적인 실천의 조건으로서 '합리적인 이성'을 중시하며, 이는 곧 형식적인 합리성에 그치지 않는 일정한 역사인식과 '공통개념'에 기반한 개인의 능동성과 집단적 실천을 결합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다. 이로써 필연적으로 집단적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일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실천이 가능한 유일한 길이 열리는 것이며, 어떤 집단적인 강제속에서 (자발적이건 비자발적이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냐에 상관없이) 개인은 자신을 잃고 소외됨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광화문에 운집한 깃발대오와 네티즌들간의 오고간 '깃발을 드냐 내리냐'는 식의 협소한 교통관계는 이들 두 대오 자체와 각 대오로 나뉜 시위참가자 (개인)자신들이 어떤 집단적 강제속에서 스스로를 잃어버린 결과라고 밖에 볼 수없다. 즉 네티즌은 자발적인 참여자이고 깃발대오는 개인참여자를 소외시킨 집단이라는 평가는 잘못된 사실에 기초해 있으며, 깃발대오와 비운동권대오라는 허구적으로 조작된 집단성이 사실인 듯 주어진 구분관념 때문에 어느 한편으로 그 성격을 제한당한 광화문 시위참여자 개개인 모두가 어느 만큼 스스로를 잃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위참여자들 자신들이 자신을 잃어버린 그만큼 광화문 시위의 정치적 실천은 실패했고, 그렇지 않은 만큼 성공했던 것이다. 우선 어느 깃발에도 속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시위에 참여한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반미'(집회의 대의)는 과연 그 개인참여자만의 순수한 결정이었을리 만무하며, 어떤 깃발에 속했던 개인도 그 깃발의 집단성에 자신을 완전히 내주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소위 [비정치적인 반미]라는 아이러니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비정치적인 반미(反美)]라는 아이러니
한국사회에서 '반미'만큼 정치적인 문제는 없다. 반미는 남한의 성립과 더불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온 가장 첨예한 정치적 쟁점중의 하나다. 그러니 도무지 우리로서는 [비정치적인 반미]란 이해할 길이 없는 아이러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피해갈 도리없이 노도와 같이 몰아닥친 반미열풍사태를 수습·교정의 대상으로 몰아가는 친미냉전적 정치세력과 보수언론의 이데올로기적 개입이 엄존함을 간과할 수 없는 현실이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반미와 소파개정은 별개의 문제라느니, 네티즌들의 자발적인 반미정서를 이념적으로 불순하게 이끄는 세력이 있다느니 하는 이데올로기 공세의 고삐를 한시도 늦추지 않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한계상황에 다다른 대중의 정치불신을 가장 적절히 이용함으로써, "정치는 싫어하지만, 반미는 좋아한다"는 이른바 '월드컵 반미세대'라는 조작된 반미정서를 탄생시켜냈다. 결국 그 자체로 한국 현대사에 대한 첨예한 쟁점을 내포하며, 하나의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이념일 수밖에 없는 반미는, 불순하고 구시대적인 '정치적 반미'와 반정치적 정서에 한없이 영합하는 정서적이고 신세대적인 '비정치적인 반미'로서 현실적으로 분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분열은 추모의 촛불로 하나됨에 부족함이 없던 광화문에서조차, 운동조직대오의 깃발과 폐쇄적인 운동문화 및 정치적 발언들을 매개로 대중들의 무의식적인 심리적 한계선을 자극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선을 돌파하기 위해서조차 오히려 현재 반미투쟁의 과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확장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파개정과 주한미군 철수
현재 투쟁의 요구는 네가지다. 살인미군 무죄판결 무효와 한국법정 처벌, 부시의 공개사과와 소파 전면개정이다. 이러한 요구를 관철시키는 것이 이번 투쟁의 목표임은 두말할 나위 없으며 이를 위해 모두가 나서고 있다. 지난 번 소파개정시에 주권을 침해하는 핵심적인 조항들은 그대로 둔 채 몇몇 지엽적인 개정과 법적 효력이 없는 선언적 문구를 집어넣는 기만적인 개정으로 그치고 말았고, 그나마 주고 받기식 개정으로 미국이 부분적으로 양보하는 듯 하면서 핵심부분에서는 오히려 개악된 내용으로 개정됨으로써 불평등성이 더 심화되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민중의 힘으로 이번에는 기어이 소파를 전면 개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말한 묘한 심리적 한계선 때문인지 주한미군 철수의 요구는 대중적으로 나오고 있지 못하다. 물론 소파가 개정되는 것은 이번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발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미군이 장기 주둔하는 상황이 변화하지 않는한 유사한 사건은 언제든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미군의 주둔 자체에 대해 근본적으로 대중적인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주한미군 철수가 이번 투쟁의 직접적인 목표가 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본질적인 문제라는 것이 충분히 드러날 수 있도록 논쟁과 토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반미를!
작금의 반미정서에 관해 우리가 가지는 또하나의 우려점은 민족적 자존심 회복에 국한되고있는 반미정서의 협소함이다. 미국처럼 힘있는 나라가 되고 싶지만, 발전의 전망을 상실한 위기의식의 탈출구로서 '반미'가 위치지어져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인 미국의 금융 제국주의와 군사 패권전략이 전세계 인민의 삶을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아야 한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동남아에서, 중동에서, 동구에서, 가까이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자국의 이해만을 위해 수많은 인민을 전쟁과 폭력으로 몰아 넣었는지 상기한다면, 그리고 지금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하에 이라크 침공을 일촉즉발 일으키려 하고 있고 북한에 대해 강경 일변도로 치닫는 것을 상기한다면, 반미는 반도의 '자존심'으로 그쳐서는 안될 국제주의적인 인권과 평화의 새로운 진전을 이루기 위한 피할 수 없는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이다.
12월 14일 시청 앞 10만 범국민 평화대행진이 개최된다. 우리는 더욱 더 많은 민주주의와 반미를 결합시켜야 한다.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주장을 발표하고 소통하면서, 정치의 공간을 더 크게 열어야 한다. 모두가 반미 행동의 주체가 되어 힘을 모으자. SO-L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