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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주간웹소식지


제 183호 | 200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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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는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일 뿐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개정안 국회 제출에 즈음하여

사회진보연대
호주제 폐지가 구체적인 입법일정에 올라섰다. 5월 27일 민주당 이미경 의원을 비롯한 여야 의원 52명의 발의로 호주제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민법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된 것이다. 지난 98년 여성운동계에서 '호주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이 결성된 이래 7년만의 일이다. 이에 발맞춰 '호주제폐지운동본부'는 같은 날, 의원 272명을 대상으로 호주제 폐지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해 '호주제 폐지 272'를 발족했다.
국회에 제출된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호주에 관한 정의와 남성우선으로 돼 있는 호주 승계순위 등 호주 관련 규정(현행 민법 778조, 779조)을 전면 삭제한 것이다. 또 자녀는 아버지의 성(性)과 본(本)을 따르도록 한 조항(781조)을 삭제하는 대신 부모 협의에 의해 부(父) 또는 모(母)의 성과 본을 따르거나 부모의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는 가정법원에 위임(865조 2항 신설)하도록 했다. 특히 개정안은 자녀의 성을 변경할 필요가 있는 경우는 부모 또는 자녀의 청구로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 가능하도록 해(865조 3항 신설) 이혼 또는 재혼한 부모의 자녀가 성을 바꿀 수 있는 길을 터 주었다.


호주제는 무엇인가

먼저 논의의 편의를 위해 호주-호적제도의 법률상의 위치와 그 의미를 알아보자.
호주제도는 민법상 가(家)를 규정함에 있어 '호주'를 중심으로 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제도로서, 민법 제4편(친족편)을 통칭한다. 그리고 그 절차법으로 호적법이 있다. 쉽게 말하면, 호주제도는 민법상 가족을 정의하는 기준이고, 호적제도는 그에 따른 신분증명제도이다.
현행 민법상 호주제도는 크게 분류하여 ①호주를 중심으로 한 가(家) 구성, ②호주권, ③호주승계에 관한 규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호주제 폐지는 호주의 폐지, 가(家) 개념의 변화, 호주승계 관련 규정 삭제를 포함한다.
호적제도는 민법상의 호주제도-가(家)제도가 규정하는 바에 따라 국민 각 개인의 모든 신분변동사항(출생, 혼인, 사망, 입양, 파양 등)을 시간별로 기록한 공문서로써, 사람의 신분을 증명하고 공증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다. 편제방식은 하나의 호적에 가족 모두의 신분변동사항이 기재되며, 편제의 기준은 '호주'이다. 즉 가족원 모두는 호주를 중심으로 하여 그 상호관계를 기재함으로써 그 지위가 명시된다. 이 때문에 가족 내 주종관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는 비판과 아울러 이혼, 재혼가구 등의 증가에 따른 현대사회의 다양한 가족형태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문제점이 지적되어 왔다.
만약 호주제도가 폐지될 경우에는 호주제도에 근거한 호적제도 역시 수정이 불가피한데, 호적의 편제기준과 편제범위를 어떻게 새로 정할 것이냐를 두고 논란이 되고 있다. 기존의 호적제도의 대안으로 크게 '가족부'와 '1인1적제'가 제기되고 있는데, 호주제 폐지 운동 내에서도 그 대안을 놓고 약간의 입장 차이가 존재한다. 이미경 의원 등이 국회에 발의한 호주제 폐지를 위한 민법개정안은 '가족부'안을 염두에 둔 것이다.


호주제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 호주제 논란과 호주제의 문제점

아직도 호주제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호주제가 우리 고유의 전통이며,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족이 와해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호주제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이 아니며 단지 일제가 식민지 통치의 목적으로 일본의 구민법을 강제 이식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이후 일본에서는 헌법과 조화될 수 없다는 이유로 폐기된 호주제가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탈을 쓰고 민법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현실은 민족사의 관점에서 볼 때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오히려 분명한 사실은 호주제 폐지가 우리의 가족제도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호주제가 가족을 파괴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호주제 폐지는 현실의 가족 상황에 대한 때늦은 법적 반영일 뿐이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
호주제 논란은 민법이 제정되기 이전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간 수차례의 가족법 개정을 통해 호주는 실제 권리와 의무를 대부분 삭제, 축소 당하면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그 상징성으로 말미암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성차별적 사고방식을 조장해 일상생활에서 종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사회구조를 형성하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 또한 현실의 다양한 가족형태들을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족법을 비롯한 각종 사회보장법에서 남녀평등을 실현하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
또 호주제에 따르면 호주가 사망하게될 경우 아들-미혼인 딸-처-어머니-며느리 순으로 호주승계가 이루어진다. 아들을 1순위로 하는 이러한 제도는 좁게는 가족 내에서, 넓게는 사회 전분야에서 남성이 모든 여성에 우선하도록 하는 여남관계의 불평등을 제도적으로 재생산해왔다. 이러한 여성의 차별과 가족 내에서 여성의 종속적 지위는 여성에게 가족이 더 이상 매력적인 것이 아니게 한다. 또한 아들을 낳아서 '대를 이어야'한다는 남아선호사상을 부추기고, 여아살인을 정당해왔다.
더욱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호주제가 현실의 피해들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이 어린애일 때 재혼했다. 하지만 법률상 지금의 아빠와 아이는 그저 동거인 관계일 뿐이다. 아이는 아빠 직장의 의료보험 혜택도 못 받고 세금공제 대상에서도 제외돼 있다. 혹시 아빠와 성이 다르다는 걸 아이가 알게 될까봐 병원에서는 통사정을 해서 아이의 성을 빼고 부르게 했으며, 아이가 그토록 원하는 통장 하나 만들어 주지 못했다. 나는 어린 아이에게 모든 것을 속여 왔지만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가 되자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도 아이에게 상황을 설명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를 유치원 동창이 전혀 없는 멀고 낯선 학교에 낯선 본래의 이름으로 입학시켰다. 성이 바뀌었다는 놀림만이라도 피하게 하려는 궁여지책이었다. 나는 이혼할 때 아이의 양육자이자 친권자로 법원에서 승인 받았지만 아이의 여권하나 만드는 일에도 호주인 전 남편의 동의가 필요했다. 이것이 법이 보장하는 양육권과 친권의 현실이다. 같은 처지에 있는 한 친구는 이민을 준비중이다. 이혼한 여성들은 호주제가 아니더라도 수많은 편견 및 시선과 싸워야 한다. 그들은 가정을 소중하게 생각했기에 전쟁터 같은 가정을 물려주지 않으려고 이혼을 감행했다. 방법이 없음을 알고 공문서를 위조해 아이의 출생신고를 다시 해볼까도 생각했다. 감옥에 갇힌다 해도 해결만 된다면, 아니 아이가 진실을 이해할 능력이 생길 때까지 상처를 유보해 줄 수만 있다면…. 이것이 죄라면 나를 감옥에 보내라. 그러나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들, 이미 이웃의 시선에 주눅 든 아이들에게 또다시 상처를 덧입히지 말라."(공지영, <성다른 두아이 내 상처>, 중앙일보 5월 21일자)


호주제 폐지는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일 뿐이다!

이런 이유에서 호주제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하며, 늦게나마 국회 일정에 들어선 지금의 호주제 폐지 흐름은 반갑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호주제 폐지는 여성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인정받고,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당연히 전제되었어야 할 출발점일 뿐이다.
호주제 폐지운동은 우리나라의 여성운동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남평등 사회를 목표로 40년 동안 지속된 이 운동의 성과로 대선때마다 호주제 폐지가 대선공약으로 제시되었지만, 유림(儒林) 등 보수주의자들의 반발로 지금까지 법제도화 시도는 번번이 좌절되어왔다. 그리고 지금 다시, 호주제 폐지 운동은 '가족의 위기와 해체'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정부의 제도적 모색의 필요성과 만나고 있다.
그런데 현재 호주제 폐지를 주장하는 운동 내에서 호적제의 대안을 두고 진행되고 있는 논란은 각 안들의 진보성을 놓고 갈라졌다기보다는, 유명무실화 됐지만 현존하는 피해들을 만들고 있는 호주제 폐지의 다급성 때문에 '무엇이 더 국민정서상 설득력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이 호적제도 개선에서 효율적인가'를 두고 논의가 집중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현재의 논의 속에 간과될 우려가 있는 현실들과 쟁점, 과제를 봐야 할 것이다.
우선, 현행 호적제도의 대안 논의를 정보인권의 측면에서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모든 국민에게 일정한 사항을 국가에 등록하도록 하는 국민등록제도는 신분등록제도(호주제)와 주거등록제도(주민등록제)로 구분할 수 있다. 신분등록제도는 민법관계의 규율이 주요한 목적이고, 주거등록제도는 행정적 통제와 복지수급의 원활함을 목적으로 하는 행정목적적 제도이다. 모든 대한민국 국민은 호적관계의 등록 외에 출생과 동시에 거주관계와 동거자에 관한 사항을 국가에 등록해야 한다. 주민등록은 개인에 관한 기록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개인별 주민등록표와 세대에 관한 기록을 통합하여 관리하는 세대별 주민등록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주민등록표에 의해 관리되는 개인정보는 140개 항복에 달한다. 즉 이미 호적제 이외에도 주민등록제에 의해 과도하게 개인의 정보가 국가의 의해 집적되고 통제되고 있고, 주민등록번호만 알면 방대한 정보의 공개도 용이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한번 제정된 법은 그 개정이나 폐지가 쉽지 않다는 것은 호주제 폐지 운동의 역사에서 확인되어왔던 점이다. 당장의 폐지의 다급함으로 국가의 과도한 통제와 인권의 침해를 용인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번 개정 민법안은 호주제가 전제한 전통적 가부장제 가족은 이미 많은 변화를 나타내며 핵가족이 우리가족의 전형을 이루고 있다는 인식에서 핵가족을 전제한 호적을 법제적 가족으로 제시하고 있다. 핵가족은 양성간에 이루어진 일부일처제 혼인관계에 기반한 부부와 그들의 자녀 또는 그들의 합법적으로 입양한 자녀들로 구성된 가족으로 개념화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핵가족의 전형적인 형태 또한 그 보편성을 잃어가며 다양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2대 가족의 형태는 1970년 70%에서 2000년 63.3%로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다. 이혼율은 이미 혼인수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있고 재혼도 점차 증가하고 있다. 또한 핵가족은 전형적인 부부와 미성년자로 구성된 가족이외 편부모가족, 부부가족, 일인가족, 재혼에 의한 복합가족, 부모와의 사별 또는 가출로 인한 미성년 가장가족, 모자가족(미혼모) 그리고 이외 이성간, 동성간의 동거가족 등으로 다양해졌다. 가족의 구성형태가 다양해짐으로 가족의 개념화와 정의를 내리기 불가능한 현실이다. 또한 제대로 된 사회보장체계가 구축되지 않았던 한국에서의 가족은 복지의 모든 기능을 담당하고 있었고, 가족 내에서 여성이 이를 전담해왔다. 특히 IMF위기 이후 사회전반의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은 이러한 부담을 더욱더 가족에게 전가함으로써 가족의 위기를 부추겨왔다.
그렇기 때문에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고민은 가족을 어떻게 법적·제도적으로 재규정할 것인가의 문제로 머물러서는 안된다. 한걸음 나아가 가족의 역할과 여남의 관계, 가족이라는 개념 하에 구축되었던 사회시스템의 전환을 위한 새로운 관점과 접합될 때 비로소 풍부한 의의를 획득할 것이다.
주제어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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