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여야의 악무한 대립을 끊어낼 것인가?
2004 총선은 그들의 위기를 증폭하고 있다.
정동영 의장은 현재 지역구 판세가 110대 110의 박빙이며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며 선대위원장에서 사퇴했다. 한겨레는 사뭇 비분강개한 어조로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안일하게 대처하여 차떼기 부패와 대결정치에 골몰한 한나라당에게 면죄부를 주게 생겼다며, 망국적인 “묻지마 지역주의”가 결국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고 질타하고 있다.
만약에 한나라당이 스스로 설정한 개헌저지선(100석)을 훨씬 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한겨레의 해석을 그대로 따라 망국적인 지역주의와 낡은 국민의식을 한탄해야 하는 것인가? 또는 열린우리당이 1당을 차지하게 되면, 정동영 의장이 말해온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으로 간주해야 되는가? 그리고 그들의 주장대로 거여(巨與) 또는 권력 단점이 순조로운 경제발전을 보장하리라 기대해야 하나?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또는 그들의 지지자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둘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어느 한편만이 지역주의인 것도 아니고, 또 다른 편만이 “글로벌 스탠다드”를 개혁의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여야 정당 모두가 이라크 파병문제는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정부의 입장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고, 검찰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건넨 재벌총수를 감옥에 보내지 않기로 한 것에는 침묵으로 환영 의사를 대신하고 있다. 서로 “아끼는 친구” 같지 않은가?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상생의 정치”를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지금도 사생결단의 싸움을 하고 있다. 왜 그런가?
망국적인 지역주의? - 거짓 희망을 조작하기 위한 지역주의의 동일한 과정
한겨레는 “심판 없는 지역주의 우려된다”는 사설에서 한나라당의 영남권 싹쓸이는 지역주의 탓이라고 밖에 해석할 길이 없고, 호남권에서 민주당의 재부상도 역시 그러하다고 규정하였다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높은 충청권만이 지역주의를 극복한 유일한 사례인가). 그러나 지역주의는 왜 재생산되고 있는가?
사실 노무현이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지역발전”이라는 희망을 조작하여 지역감정을 동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노무현은 호남 지역에선 DJ의 계승자로, TK에서는 YS 이후 이 지역을 대변할 지도자로 자임했고, 충청권에 대해서는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실리적 기대를 제시했다. 노무현의 등장은 지역주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안배하거나 조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역주의를 승인하거나 조작하는 것은 어떤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현재의 경제개혁이 낳은 지역경제의 파탄과 불균형에 따른 것이다. IMF 이후 지역산업의 공동화가 심화되었고, 주식■부동산 시장 팽창에 따라 자금의 역외 유출도 커져서, 대부분이 수도권으로 몰렸다. 지자체는 산업특화를 통해 투자를 유치하거나 소비■레저산업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바닥을 향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국회의원 출마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공약으로 내걸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 철회를 단지 “망국적 지역주의”, 또는 “지역주의=지역이기주의”라는 도식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실리적인 희망을 실현하거나 새롭게 조직하지 못한 결과를 반영한다. 이런 지반 위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민주당)이 격돌하고, 그 결과가 드러나는 동일한 과정이다.
"박근혜”? - 보수의 편에 선 개혁으로의 수렴?
물론, 박근혜는 박정희 시대의 향수나 지역주의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적인 의제에 대해 유연성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 사실이다. 전 청와대 수석비서관이었고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출신인 박세일을 선대위공동위원장으로 내세우거나, 지금까지의 한나라당 당론과 달리 “호주제 폐지”를 정책으로 삼겠다고 한 것이나, TV 광고에 김정일 위원장과 만난 장면을 삽입하려 했던 계획 등등은 중요한 사례다. 또한 “대한민국의 세 가지 상징은 현충원, 4.19묘지, 광주 5.18묘역이며, 나름의 정통성이 있고, 서로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연설도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의 문제는 생략한 교묘한 발언이다).
이는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세력이 선도하거나 독점하려 했던 의제들에 대해 선택적으로 유연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노선이 과거 이회창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이회창의 철저하게 엘리트주의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정치 행태에서 큰 강점이다.
물론 시도해보겠다는 의지와 반대로, 호주제 폐지 공약은 당 내 입장을 수렴하여 총선 이후에 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북한방문 영상도 기존 반공단체의 의견을 수렴했으나 결국 조금의 역풍도 있으면 안되겠다는 판단으로 중도 포기한 것도, 역시 중요한 대목이다. 남한의 보수세력이 마스크를 바꾸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디어-파퓰리즘을 향한 큰 방향은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는 이처럼 여러 얼굴을 지녔으므로, 여러 모로 유리한 점도 많을 것이다.
미디어 파퓰리즘? - 미디어가 정치를 제시한다.
모든 언론은 이번 선거가 “정책선거”의 상식적인 틀을 벗어났다고 앞다투어 지적하고 있다. 조선일보마저 “선거전이 막판까지 천박하고 표피적인 전술과 정치쇼로 일관하고 있다”며 울분에 찬 듯 주장하고 있다. 언론이 나서서 이번 선거가 “감성정치”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언론들이 그러한 흐름에 편승해 특정 정당 편들기에 골몰하고 있다고 서로 극한 패싸움을 펼치고 있다.
물론 각 정당들이 이념과 정책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특히 TV라는 막강한 매체를 중심으로 이미지 조작에 치중해 지지자들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이려는 행태를 미디어 파퓰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제 미디어가 정당의 역할을 대행한다는 사실이다. 곧 미디어가 위로부터 사회질서를 부과하기 위한 정책을 제시하고, 또한 전략이나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선호도를 조사해서 대처할 방법을 제시하고, 지지자들에게 어떤 상황에 대처할 담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현실 전체를 가리킨다. 어쩌면, 언론이 현재의 정당정치를 일관되게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역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일관된 노선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곧 정당정치를 완전히 대체하리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정당이 원내정당화를 지향한다는 것, 곧 기존의 대중 동원체계를 스스로 제거하고, 이를 전문가주의와 미디어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분명한 방향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개가 가능한 것은, 이미 어떤 정책들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와 세계 경제기구들이 제안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를 선도하는 경제, 사회정책은 세계 공통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이제 각 나라에서는 전문가들을 육성해 미디어와 정당이라는 기구를 통해 그것을 제안하고 실현하고 지지를 동원하는 체계를 작동하면 된다. 각론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세가 다른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대연합? - 거여는 아무런 정책전환도 준비할 수 없다.
현재 열린우리당은 어떤 정책전환도 예고하지 않고 있다. 단지 천재일우와도 같은 “탄핵심판론”에 기대 기사회생을 바라며, 정동영 의장과 386출신 초선의원이 농성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여가 되면 무슨 일을 하겠다는, 어떠한 포부에 찬 말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은 이미 집권 1년 만에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으로 내려간 과거를 어떻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노무현을 위기로 몰아넣었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이 낳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즉 사회 재건을 동반하는 안정적인 프로그램이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책, 즉 그들이 위로부터 부과하려는 사회의 질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희생하여 소수의 집단만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모순된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정치적 위기관리의 실패는 항상 내재한 것이고, 어떤 우발적인 문제로도 쉽게 전면화될 수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개혁프로그램과 미디어 파퓰리즘에 의존하는 여야정치는 특정한 이념과 정책에 바탕을 둔 안정된 지지연합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항상 지지율의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지만, 그 결과가 뚜렷한 정책전환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만성적 위기다. 그것은 “현직”, 즉 집권세력인 열린우리당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야정당의 어떤 시도도 단지 위기를 미래로 연장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여야의 악무한 대립은 연장된다. - 민중운동의 입지점은?
물론 IMF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행정부와 사법부로의 권력집중 현상은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식하겠다는 욕망의 표현만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 사회개혁을 신속하고 파괴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집권세력이 강력한 행정부와 사법부를 장악한 후 의회에서조차 세력을 크게 신장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안정적인 정국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노무현 정권 1년이 보여준 악순환이 더 큰 형태로 반복될 것인가?
지금까지 노무현 정권은 집권세력에게 모든 화살이 꽂히는 것을 분산하려고 모든 시도를 다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그의 발언이 대중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책이 원래부터 실현 불가능했다는 현실을 국가기구의 일부에게 떠넘기려는 시도였다면, “정규직 노동자 이기주의” 발언은 민중 생활의 위기를 노동자 대중 일부에게 전가하려는 의도였다. 집권과 정치적 위기관리를 위해 내놓은 거짓 약속이 파탄나면, 그것은 남의 탓이었던 셈이다. 이런 방식의 정치 행태는 의회에서 세력을 신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내기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야 간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고, 민중운동을 더욱 벼랑으로 몰아넣기 위한 전략을 동반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실은 대거 의회진출을 앞두고 있는 진보정당에게 큰 시련을 의미할 것이다. 어떤 국면들의 연속 속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꽃놀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기보다는, “차악”의 선택을 항상 강요당하는 고역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특정한 법률안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최근까지의 “노동법 개악”의 흐름처럼, 특정한 정책묶음의 교환을 선택하라는 상황이 인위적으로 조장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단적으로 최근 대통령 탄핵사태에 같이, 여야정당의 악무한적 대립에서 누구의 편에 설 것이냐는 선택을 강요당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어떤 편에도 설 수 없는, 그리하여 무대에서 조연자 역할에 머물라는 어정쩡한 위치를 강요당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번 탄핵사태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치였던 듯하다. “탄핵기각, 진보정치 실현”으로 요약되는 모호한 태도는 현재의 “진보야당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차악의 선택이나 “진보야당”의 모호한 입지점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직 사회운동들과의 밀접한 연대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현재의 지지율의 상승은 이러한 요구를 가리키고 있다). 진보정당이 “정책정당”을 표방하고자 한다면, 그 정책은 어떤 이론적 구축물에서 도출된 것이거나 위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부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투쟁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의미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한나라당이 스스로 설정한 개헌저지선(100석)을 훨씬 넘는 결과가 나온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한겨레의 해석을 그대로 따라 망국적인 지역주의와 낡은 국민의식을 한탄해야 하는 것인가? 또는 열린우리당이 1당을 차지하게 되면, 정동영 의장이 말해온 것처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으로 간주해야 되는가? 그리고 그들의 주장대로 거여(巨與) 또는 권력 단점이 순조로운 경제발전을 보장하리라 기대해야 하나?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또는 그들의 지지자들이 희망하는 것처럼 둘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먼 것은 아니다. 어느 한편만이 지역주의인 것도 아니고, 또 다른 편만이 “글로벌 스탠다드”를 개혁의 모범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지금, 여야 정당 모두가 이라크 파병문제는 미국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정부의 입장을 강력히 뒷받침하고 있고, 검찰이 거액의 정치자금을 건넨 재벌총수를 감옥에 보내지 않기로 한 것에는 침묵으로 환영 의사를 대신하고 있다. 서로 “아끼는 친구” 같지 않은가? 이렇게 본다면, 그들이 “상생의 정치”를 못할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지금도 사생결단의 싸움을 하고 있다. 왜 그런가?
망국적인 지역주의? - 거짓 희망을 조작하기 위한 지역주의의 동일한 과정
한겨레는 “심판 없는 지역주의 우려된다”는 사설에서 한나라당의 영남권 싹쓸이는 지역주의 탓이라고 밖에 해석할 길이 없고, 호남권에서 민주당의 재부상도 역시 그러하다고 규정하였다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높은 충청권만이 지역주의를 극복한 유일한 사례인가). 그러나 지역주의는 왜 재생산되고 있는가?
사실 노무현이 대선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지역발전”이라는 희망을 조작하여 지역감정을 동원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노무현은 호남 지역에선 DJ의 계승자로, TK에서는 YS 이후 이 지역을 대변할 지도자로 자임했고, 충청권에 대해서는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실리적 기대를 제시했다. 노무현의 등장은 지역주의를 무너뜨린 것이 아니라 안배하거나 조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지역주의를 승인하거나 조작하는 것은 어떤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다. 이는 현재의 경제개혁이 낳은 지역경제의 파탄과 불균형에 따른 것이다. IMF 이후 지역산업의 공동화가 심화되었고, 주식■부동산 시장 팽창에 따라 자금의 역외 유출도 커져서, 대부분이 수도권으로 몰렸다. 지자체는 산업특화를 통해 투자를 유치하거나 소비■레저산업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바닥을 향한 생존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국회의원 출마자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을 공약으로 내걸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그러므로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 철회를 단지 “망국적 지역주의”, 또는 “지역주의=지역이기주의”라는 도식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는 노무현 정권이 실리적인 희망을 실현하거나 새롭게 조직하지 못한 결과를 반영한다. 이런 지반 위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민주당)이 격돌하고, 그 결과가 드러나는 동일한 과정이다.
"박근혜”? - 보수의 편에 선 개혁으로의 수렴?
물론, 박근혜는 박정희 시대의 향수나 지역주의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나 쉽게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그가 정치적으로 여러 얼굴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적인 의제에 대해 유연성을 내세울 수 있다는 것도 포함하고 있는 사실이다. 전 청와대 수석비서관이었고 경실련 경제정의연구소 이사장 출신인 박세일을 선대위공동위원장으로 내세우거나, 지금까지의 한나라당 당론과 달리 “호주제 폐지”를 정책으로 삼겠다고 한 것이나, TV 광고에 김정일 위원장과 만난 장면을 삽입하려 했던 계획 등등은 중요한 사례다. 또한 “대한민국의 세 가지 상징은 현충원, 4.19묘지, 광주 5.18묘역이며, 나름의 정통성이 있고, 서로 존중하고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연설도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물론 박정희 정권의 문제는 생략한 교묘한 발언이다).
이는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세력이 선도하거나 독점하려 했던 의제들에 대해 선택적으로 유연하거나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노선이 과거 이회창의 그것과 크게 다른 것은 아니다. 다만 이회창의 철저하게 엘리트주의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정치 행태에서 큰 강점이다.
물론 시도해보겠다는 의지와 반대로, 호주제 폐지 공약은 당 내 입장을 수렴하여 총선 이후에 하겠다고 말한 것이나, 북한방문 영상도 기존 반공단체의 의견을 수렴했으나 결국 조금의 역풍도 있으면 안되겠다는 판단으로 중도 포기한 것도, 역시 중요한 대목이다. 남한의 보수세력이 마스크를 바꾸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디어-파퓰리즘을 향한 큰 방향은 열린우리당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그는 이처럼 여러 얼굴을 지녔으므로, 여러 모로 유리한 점도 많을 것이다.
미디어 파퓰리즘? - 미디어가 정치를 제시한다.
모든 언론은 이번 선거가 “정책선거”의 상식적인 틀을 벗어났다고 앞다투어 지적하고 있다. 조선일보마저 “선거전이 막판까지 천박하고 표피적인 전술과 정치쇼로 일관하고 있다”며 울분에 찬 듯 주장하고 있다. 언론이 나서서 이번 선거가 “감성정치”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언론들이 그러한 흐름에 편승해 특정 정당 편들기에 골몰하고 있다고 서로 극한 패싸움을 펼치고 있다.
물론 각 정당들이 이념과 정책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특히 TV라는 막강한 매체를 중심으로 이미지 조작에 치중해 지지자들을 일시적으로 끌어들이려는 행태를 미디어 파퓰리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이제 미디어가 정당의 역할을 대행한다는 사실이다. 곧 미디어가 위로부터 사회질서를 부과하기 위한 정책을 제시하고, 또한 전략이나 정책에 대한 “유권자”들의 선호도를 조사해서 대처할 방법을 제시하고, 지지자들에게 어떤 상황에 대처할 담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하는 현실 전체를 가리킨다. 어쩌면, 언론이 현재의 정당정치를 일관되게 비난하는 것은 그들의 역할을 돋보이게 하려는 일관된 노선일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실이 곧 정당정치를 완전히 대체하리라 말할 수 없다. 다만 정당이 원내정당화를 지향한다는 것, 곧 기존의 대중 동원체계를 스스로 제거하고, 이를 전문가주의와 미디어를 통해 해결해 나간다는 것은 분명한 방향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러한 방향으로의 전개가 가능한 것은, 이미 어떤 정책들이 누군가에 의해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와 세계 경제기구들이 제안하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시대를 선도하는 경제, 사회정책은 세계 공통으로 이미 주어진 것이다. 이제 각 나라에서는 전문가들을 육성해 미디어와 정당이라는 기구를 통해 그것을 제안하고 실현하고 지지를 동원하는 체계를 작동하면 된다. 각론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세가 다른 것은 결코 아니다.
민주대연합? - 거여는 아무런 정책전환도 준비할 수 없다.
현재 열린우리당은 어떤 정책전환도 예고하지 않고 있다. 단지 천재일우와도 같은 “탄핵심판론”에 기대 기사회생을 바라며, 정동영 의장과 386출신 초선의원이 농성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거여가 되면 무슨 일을 하겠다는, 어떠한 포부에 찬 말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은 이미 집권 1년 만에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바닥으로 내려간 과거를 어떻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노무현을 위기로 몰아넣었는가? 그것은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개혁이 낳은 사회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즉 사회 재건을 동반하는 안정적인 프로그램이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책, 즉 그들이 위로부터 부과하려는 사회의 질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희생하여 소수의 집단만이 이득을 얻을 수 있는 모순된 성격을 지녔다. 따라서 정치적 위기관리의 실패는 항상 내재한 것이고, 어떤 우발적인 문제로도 쉽게 전면화될 수 있다.
이처럼 신자유주의 개혁프로그램과 미디어 파퓰리즘에 의존하는 여야정치는 특정한 이념과 정책에 바탕을 둔 안정된 지지연합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항상 지지율의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지만, 그 결과가 뚜렷한 정책전환으로 나타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만성적 위기다. 그것은 “현직”, 즉 집권세력인 열린우리당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여야정당의 어떤 시도도 단지 위기를 미래로 연장시키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여야의 악무한 대립은 연장된다. - 민중운동의 입지점은?
물론 IMF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행정부와 사법부로의 권력집중 현상은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식하겠다는 욕망의 표현만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 사회개혁을 신속하고 파괴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효율적인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현재의 집권세력이 강력한 행정부와 사법부를 장악한 후 의회에서조차 세력을 크게 신장한다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안정적인 정국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노무현 정권 1년이 보여준 악순환이 더 큰 형태로 반복될 것인가?
지금까지 노무현 정권은 집권세력에게 모든 화살이 꽂히는 것을 분산하려고 모든 시도를 다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그의 발언이 대중인기에 영합하려는 정책이 원래부터 실현 불가능했다는 현실을 국가기구의 일부에게 떠넘기려는 시도였다면, “정규직 노동자 이기주의” 발언은 민중 생활의 위기를 노동자 대중 일부에게 전가하려는 의도였다. 집권과 정치적 위기관리를 위해 내놓은 거짓 약속이 파탄나면, 그것은 남의 탓이었던 셈이다. 이런 방식의 정치 행태는 의회에서 세력을 신장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내기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여야 간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키고, 민중운동을 더욱 벼랑으로 몰아넣기 위한 전략을 동반할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실은 대거 의회진출을 앞두고 있는 진보정당에게 큰 시련을 의미할 것이다. 어떤 국면들의 연속 속에서 “캐스팅보트”를 쥐고 꽃놀이를 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기보다는, “차악”의 선택을 항상 강요당하는 고역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특정한 법률안에 대한 선택의 문제는 아니다. 물론 최근까지의 “노동법 개악”의 흐름처럼, 특정한 정책묶음의 교환을 선택하라는 상황이 인위적으로 조장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단적으로 최근 대통령 탄핵사태에 같이, 여야정당의 악무한적 대립에서 누구의 편에 설 것이냐는 선택을 강요당할 수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어떤 편에도 설 수 없는, 그리하여 무대에서 조연자 역할에 머물라는 어정쩡한 위치를 강요당할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이번 탄핵사태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치였던 듯하다. “탄핵기각, 진보정치 실현”으로 요약되는 모호한 태도는 현재의 “진보야당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차악의 선택이나 “진보야당”의 모호한 입지점을 거부하고자 한다면, 이는 오직 사회운동들과의 밀접한 연대 속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현재의 지지율의 상승은 이러한 요구를 가리키고 있다). 진보정당이 “정책정당”을 표방하고자 한다면, 그 정책은 어떤 이론적 구축물에서 도출된 것이거나 위로부터 새로운 질서를 부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이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실현하고자 하는 투쟁을 강화한다는 목표를 의미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