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기각 전과 후, 무엇이 바뀌었나?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시종일관 비장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그 골자는 총선 결과에 따른 정치적 세력관계를 고려한 현상유지였다. 이로써 국회 탄핵안 통과 이후 연쇄적으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들이 드디어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탄핵 사태를 거치며 한국 사회는 무엇이 바뀌었나?
한편 탄핵심판 이후의 사회 쟁점은 "성장이냐, 개혁이냐"로 이미 오래 전에 정해두었다는 듯, 모든 언론은 "노(盧)노믹스의 향방"이라는 문제를 꺼내 놓았다. 대통령은 개혁에 치중하겠다는 뉘앙스로 말함으로써 모든 호사가들이 내심 가장 기대했을 법한 화제를 제공했다. 이 역시 과거와 다른 정책전환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는 "상생의 정치"나 "경제 살리기"로 국면으로 변화했으니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또는 비정상 상태가 마무리되고 정상 상태가 재개되었으니 정상적인 투쟁이 가능하리라 생각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탄핵 기각 후, 무엇이 바뀌었나?
지난 5월 14일 "대통령이 법치와 준법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다할 때만 다른 국가기관이나 국민의 위헌, 위법 행위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끝맺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문이 발표되었다.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하고, 선거중립 의무의 위반에 더하여 중앙선관위의 결정에 유감을 표명한 행위가 헌법과 선거법을 위배한다고 "준엄히" 질타하는 내용이 강조되었다. 다만 파면결정을 내릴 정도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거나 국민의 신임을 결정적으로 저버린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므로 기각한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일부는 안도감을 드러냈고, 일부는 불만을 내비쳤지만, 어떤 정치세력도 심각한 이견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한 쪽에서는 탄핵안 발의를 강행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과를 거부하고 국회통과를 불사했던 사태치고는 고요한 결말이었다. 물론 지난 총선을 앞둔 정치 책략이라는 사실을 양쪽 모두 전혀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또한 언론에 비쳐진 국민 다수의 심정도 사태가 무언가 더 악화되지 않고, 모두가 수긍하는 방식으로 조속히 마무리된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지금까지 격렬하게 주장된 논리를 고대로 받아들였던 사람이라면 여전히 어리둥절한 구석이 있다. 무엇이 "헌정파괴"였고, 무엇이 "민주수호"였는가? 헌재는 하나의 국가기관인 의회의 운영과 판단은 다른 국가기관이 정당성을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며 탄핵소추의 적법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회 탄핵안 통과가 헌정파괴며 탄핵이 원천 무효라고 주장한 편이든, 아니면 헌재의 판결문이든 양쪽 논리의 충돌은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에 진지하게 문제를 계속 밀고 나가는 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일부의 헌법학자들만이 국회의 대통령 탄핵 관련 법률조항이 허술하여 비슷한 사태가 다시 반복될 여지가 있으므로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이번 사태는 법률의 허술함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고, 법률을 보완하면 다시는 발생할 수 없는 사태라는 결론만을 얻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탄핵 사태의 당사자들과 해결을 위해 지목된 모든 자들은 이해 관계는 원래부터 일치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미 존재하는 헌정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대통령과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모든 국가기구의 철칙이라는 헌재의 진술이나, 여야 정치세력이 말하는 "상생의 정치"는 그들의 일치점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태가 야기했던 논점은 탄핵안의 당사자들의 의도를 훨씬 뛰어넘는 지평 위에 있었다. 국가기구들간의 권력분점을 위한 모델이나 법률적 완벽성이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주의나 헌정이 누구에 의해, 무엇을 위해 구성되고 운영되는가의 문제가 잠시 지평 위로 떠올랐던 것이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 요건을 엄격하게 하자 따위의 문제는 부차적인 쟁점조차도 아닐 수 있었다. 국민발의나 국민소환 등을 통해 인민이 의회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수 있고, 정부, 법원과 같이 "선출되지 않은 자들"을 인민의 지배 아래 두는 방안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설립될 수 있다는 생각이 토론될 수 있었다.
물론, 애초에 "민주수호"를 외쳤던 세력이 이 문제를 실로 심각하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헌정파괴니 민주수호니 하며 그 명분을 이용했지만, 결국 원했던 것은 지배세력 내부의 주도 분파의 교체일 뿐이었다(민주화 이행이 아닌 "엘리뜨 이행"?). 그리고 또 하나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지배세력 내부의 어떤 분파도 서로에 대해 "동의에 의한 지배"라는 뜻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국가의 위기가 폭발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헌재 판결을 울타리 삼아서 마치 결과를 수긍하는 모습을 보일 뿐, 어떤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현상유지에 대한 동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다음 번의 폭발을 위한 시간 벌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성장인가, 분배인가"라는 의도된 논점
탄핵 기각 후 언론이 실시한 여론조사 항목 중 기막힌 내용은 "성장 우선인가, 개혁 우선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아무런 구체적인 문제와 결부되지 않은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강요하는 여론조사기관의 "용기"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러한 것이 "미디어 파률리즘"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다).
이러한 설문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단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짐작만 가능할 것이다. 전통적인 용어법을 따라 짐작해 보면, 투자촉진과 비용절감, 경제개방과 교육 효율화를 통해 무엇보다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남기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에서 아무런 몫도 없는 사람이나 집단을 위한 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인지 등등.
하지만 이러한 논점이 정부와 정당들의 진정한 쟁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총선 직후 열린 재경부와 열린우리당의 당정정책회의는 이헌재 부총리가 기존의 정책방향을 설명하고, 열린우리당 정책위원장이 "입법 활동으로 정부정책을 뒷받침한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총선을 바로 마친 정당이므로 무수한 새로운 말들을 쏟아 내었겠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정책전환도 심지어는 그를 위한 어떤 아이디어도 없었다. 아마도 그 회의의 그림은 현재의 정부와 국회, 정당의 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으로 꼽힐만하다. 최근 중국쇼크, 유가 상승, 미국의 금리 인상 등으로 세간에 떠도는 말들은 더 불어났겠지만, 그러한 그림에서 정부나 국회, 정당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다만 동일한 정책을 구사하더라도 "성장"이나 "개혁" 중 어떤 담론을 앞세우는 것이 더 낫겠냐는 인기투표일 뿐이다.
그래도 언론에서 말한 "개혁"이 지시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은밀히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바가 있다면, 정부의 기업인이나 언론인에 대한 "괴롭힘", 예를 들어 재벌 비자금 수사나 언론사 세무조사 따위일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개혁"으로 포장하고 싶어했던 바도 그것이었고, 재벌이나 언론사가 속을 썩었던 바도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사회구조의 "선진화"라고 떠벌려지는 이러한 문제들이 바로 지금 민중이 고통을 느끼고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 문제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다만 가진 자들에 대한 "숙정"이란 식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데에는 다소 관련이 있는 듯하다.
한편 현재의 "의도된" 논쟁 구도에 변형된 쟁점이 있다면 "성장을 통한 분배냐" 아니면 "분배를 통한 성장이냐"라는 것이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TV토론이나 미디어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내준 자리에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치 "분배를 통한 성장"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몹시 불행하게도, "분배가 성장의 견인차다"라는 식의 주장은 원래부터 아무런 이론적 근거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방식으로 역할을 나누는 것 자체가 의도적이다. 지배세력의 경제이론은 기업의 투자욕구 자극이나 경제의 개방성, 기술·교육 혁신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라고 가르칠 뿐, 분배와 경제성장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배세력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이론은 반대의 주장, 즉 그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해야하는가? 하지만 그러한 논리를 이어나가다 보면, 즉 분배의 개선을 통해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가 천년만년 지속되지 못할 이유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따라서, 지배세력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입장은 자본주의 체계 내부에서의 양적인 변화가 (분배 양의 변화를 포함하여) 자본주의 위기를 향한 경향을 바꿀 수 없다는 전혀 다른 관점의 분석을 제시하였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다만,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체계 자체의 변혁과 그것을 위한 운동이 그 출발점일 뿐이다.
이제 정상 상태로 복귀했는가?
사회진보연대는 탄핵국면을 거치며 "민주수호"의 구호와 격정이 오히려 민중운동의 황폐화로 귀결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는 물론 진실이지만, 사실 운동의 황폐화는 순전히 탄핵국면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체험할 수 있었던 현실이었다. 정치나 국가는 위기에 처해 있지만, 사회운동은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환상으로 판명나기 쉬운 일이다. 정치 위기는 법률적인 의미에서의 국가기구의 위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항상 동시적으로 가족, 학교, 종교기구, 그리고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위기가 동반된다. 국가가 포섭할 수 없는 집단이나 이슈에 대해 기존에 국가기구와 상대하던 사회운동도 무기력을 나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사회운동은 이념적이며 대중적인 운동 기관들을 형성하는데 계속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노동조합이나 정당이 대중적 정치토론의 장이거나 공동의 삶의 방식을 영유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지 못하고, 일시적인 동원이나 언제라도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잠정적인 대표부의 역할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번 탄핵사태와 같은 지배세력의 정치적 동원을 위한 책략에 대한 취약성의 원인을 제공한다.
한편 탄핵심판 이후의 사회 쟁점은 "성장이냐, 개혁이냐"로 이미 오래 전에 정해두었다는 듯, 모든 언론은 "노(盧)노믹스의 향방"이라는 문제를 꺼내 놓았다. 대통령은 개혁에 치중하겠다는 뉘앙스로 말함으로써 모든 호사가들이 내심 가장 기대했을 법한 화제를 제공했다. 이 역시 과거와 다른 정책전환을 의미하는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제는 "상생의 정치"나 "경제 살리기"로 국면으로 변화했으니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털어 버리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고, 또는 비정상 상태가 마무리되고 정상 상태가 재개되었으니 정상적인 투쟁이 가능하리라 생각할 수 있는지가 문제다.
탄핵 기각 후, 무엇이 바뀌었나?
지난 5월 14일 "대통령이 법치와 준법의 상징으로서 역할을 다할 때만 다른 국가기관이나 국민의 위헌, 위법 행위에 단호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끝맺은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결정문이 발표되었다. 대통령이 재신임 국민투표를 제안하고, 선거중립 의무의 위반에 더하여 중앙선관위의 결정에 유감을 표명한 행위가 헌법과 선거법을 위배한다고 "준엄히" 질타하는 내용이 강조되었다. 다만 파면결정을 내릴 정도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거나 국민의 신임을 결정적으로 저버린 것으로 간주할 수 없으므로 기각한다는 결론을 내놓았다.
일부는 안도감을 드러냈고, 일부는 불만을 내비쳤지만, 어떤 정치세력도 심각한 이견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한 쪽에서는 탄핵안 발의를 강행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과를 거부하고 국회통과를 불사했던 사태치고는 고요한 결말이었다. 물론 지난 총선을 앞둔 정치 책략이라는 사실을 양쪽 모두 전혀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한 사정은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또한 언론에 비쳐진 국민 다수의 심정도 사태가 무언가 더 악화되지 않고, 모두가 수긍하는 방식으로 조속히 마무리된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지금까지 격렬하게 주장된 논리를 고대로 받아들였던 사람이라면 여전히 어리둥절한 구석이 있다. 무엇이 "헌정파괴"였고, 무엇이 "민주수호"였는가? 헌재는 하나의 국가기관인 의회의 운영과 판단은 다른 국가기관이 정당성을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며 탄핵소추의 적법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삼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회 탄핵안 통과가 헌정파괴며 탄핵이 원천 무효라고 주장한 편이든, 아니면 헌재의 판결문이든 양쪽 논리의 충돌은 존재하지 않는가?
그러나 여기에 진지하게 문제를 계속 밀고 나가는 세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직 일부의 헌법학자들만이 국회의 대통령 탄핵 관련 법률조항이 허술하여 비슷한 사태가 다시 반복될 여지가 있으므로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들의 의견을 따른다면 이번 사태는 법률의 허술함 때문에 생긴 해프닝이고, 법률을 보완하면 다시는 발생할 수 없는 사태라는 결론만을 얻게 된다. 그렇지 않다면, 탄핵 사태의 당사자들과 해결을 위해 지목된 모든 자들은 이해 관계는 원래부터 일치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이미 존재하는 헌정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대통령과 헌법재판소를 비롯한 모든 국가기구의 철칙이라는 헌재의 진술이나, 여야 정치세력이 말하는 "상생의 정치"는 그들의 일치점을 가리킨다.
그러나 사태가 야기했던 논점은 탄핵안의 당사자들의 의도를 훨씬 뛰어넘는 지평 위에 있었다. 국가기구들간의 권력분점을 위한 모델이나 법률적 완벽성이 문제가 아니었다. 민주주의나 헌정이 누구에 의해, 무엇을 위해 구성되고 운영되는가의 문제가 잠시 지평 위로 떠올랐던 것이다. 국회의 대통령 탄핵 요건을 엄격하게 하자 따위의 문제는 부차적인 쟁점조차도 아닐 수 있었다. 국민발의나 국민소환 등을 통해 인민이 의회를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방안을 모색할 수 있고, 정부, 법원과 같이 "선출되지 않은 자들"을 인민의 지배 아래 두는 방안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설립될 수 있다는 생각이 토론될 수 있었다.
물론, 애초에 "민주수호"를 외쳤던 세력이 이 문제를 실로 심각하게 접근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헌정파괴니 민주수호니 하며 그 명분을 이용했지만, 결국 원했던 것은 지배세력 내부의 주도 분파의 교체일 뿐이었다(민주화 이행이 아닌 "엘리뜨 이행"?). 그리고 또 하나 분명히 드러난 사실은 지배세력 내부의 어떤 분파도 서로에 대해 "동의에 의한 지배"라는 뜻에서 헤게모니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국가의 위기가 폭발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헌재 판결을 울타리 삼아서 마치 결과를 수긍하는 모습을 보일 뿐, 어떤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아니다. 현상유지에 대한 동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다음 번의 폭발을 위한 시간 벌기나 다름없을 것이다.
"성장인가, 분배인가"라는 의도된 논점
탄핵 기각 후 언론이 실시한 여론조사 항목 중 기막힌 내용은 "성장 우선인가, 개혁 우선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아무런 구체적인 문제와 결부되지 않은 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질문을 하고 대답을 강요하는 여론조사기관의 "용기"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러한 것이 "미디어 파률리즘"의 가장 전형적인 사례다).
이러한 설문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단지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짐작만 가능할 것이다. 전통적인 용어법을 따라 짐작해 보면, 투자촉진과 비용절감, 경제개방과 교육 효율화를 통해 무엇보다 기업이 이윤을 많이 남기도록 할 것인지 아니면 사회에서 아무런 몫도 없는 사람이나 집단을 위한 사회정의를 실현할 것인지 등등.
하지만 이러한 논점이 정부와 정당들의 진정한 쟁점은 아니다. 예를 들어, 총선 직후 열린 재경부와 열린우리당의 당정정책회의는 이헌재 부총리가 기존의 정책방향을 설명하고, 열린우리당 정책위원장이 "입법 활동으로 정부정책을 뒷받침한다"고 말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총선을 바로 마친 정당이므로 무수한 새로운 말들을 쏟아 내었겠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정책전환도 심지어는 그를 위한 어떤 아이디어도 없었다. 아마도 그 회의의 그림은 현재의 정부와 국회, 정당의 관계를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순간으로 꼽힐만하다. 최근 중국쇼크, 유가 상승, 미국의 금리 인상 등으로 세간에 떠도는 말들은 더 불어났겠지만, 그러한 그림에서 정부나 국회, 정당의 역할은 본질적으로 동일할 것이다. 다만 동일한 정책을 구사하더라도 "성장"이나 "개혁" 중 어떤 담론을 앞세우는 것이 더 낫겠냐는 인기투표일 뿐이다.
그래도 언론에서 말한 "개혁"이 지시하는 바가 있다면 무엇이겠는가? 여기서 은밀히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바가 있다면, 정부의 기업인이나 언론인에 대한 "괴롭힘", 예를 들어 재벌 비자금 수사나 언론사 세무조사 따위일 것이다. 지금까지 정부가 "개혁"으로 포장하고 싶어했던 바도 그것이었고, 재벌이나 언론사가 속을 썩었던 바도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제, 사회구조의 "선진화"라고 떠벌려지는 이러한 문제들이 바로 지금 민중이 고통을 느끼고 해결책을 찾으려 하는 문제들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다만 가진 자들에 대한 "숙정"이란 식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데에는 다소 관련이 있는 듯하다.
한편 현재의 "의도된" 논쟁 구도에 변형된 쟁점이 있다면 "성장을 통한 분배냐" 아니면 "분배를 통한 성장이냐"라는 것이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TV토론이나 미디어에 구색을 맞추기 위해 내준 자리에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마치 "분배를 통한 성장"을 주장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한 분위기가 이미 조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몹시 불행하게도, "분배가 성장의 견인차다"라는 식의 주장은 원래부터 아무런 이론적 근거가 없는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방식으로 역할을 나누는 것 자체가 의도적이다. 지배세력의 경제이론은 기업의 투자욕구 자극이나 경제의 개방성, 기술·교육 혁신이 경제성장의 원동력이라고 가르칠 뿐, 분배와 경제성장의 관계를 실증적으로 분석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배세력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이론은 반대의 주장, 즉 그것을 실증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해야하는가? 하지만 그러한 논리를 이어나가다 보면, 즉 분배의 개선을 통해 성장을 달성할 수 있다면, 자본주의가 천년만년 지속되지 못할 이유가 없어지는 게 아닌가? 따라서, 지배세력의 경제학을 비판하는 입장은 자본주의 체계 내부에서의 양적인 변화가 (분배 양의 변화를 포함하여) 자본주의 위기를 향한 경향을 바꿀 수 없다는 전혀 다른 관점의 분석을 제시하였다. 물론 이러한 비판이 "사회정의"에 관한 문제를 주장할 수 없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다만, 경제적이며 정치적인 체계 자체의 변혁과 그것을 위한 운동이 그 출발점일 뿐이다.
이제 정상 상태로 복귀했는가?
사회진보연대는 탄핵국면을 거치며 "민주수호"의 구호와 격정이 오히려 민중운동의 황폐화로 귀결될 수 있음을 우려했다. 이러한 우려는 물론 진실이지만, 사실 운동의 황폐화는 순전히 탄핵국면에 기인한 것은 아니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체험할 수 있었던 현실이었다. 정치나 국가는 위기에 처해 있지만, 사회운동은 승승장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사실 환상으로 판명나기 쉬운 일이다. 정치 위기는 법률적인 의미에서의 국가기구의 위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항상 동시적으로 가족, 학교, 종교기구, 그리고 노동자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의 위기가 동반된다. 국가가 포섭할 수 없는 집단이나 이슈에 대해 기존에 국가기구와 상대하던 사회운동도 무기력을 나타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국의 사회운동은 이념적이며 대중적인 운동 기관들을 형성하는데 계속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다. 노동조합이나 정당이 대중적 정치토론의 장이거나 공동의 삶의 방식을 영유하는 공간으로 구성되지 못하고, 일시적인 동원이나 언제라도 지지를 철회할 수 있는 잠정적인 대표부의 역할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번 탄핵사태와 같은 지배세력의 정치적 동원을 위한 책략에 대한 취약성의 원인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