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浮游)하는 '사회적 대화(교섭)'논의, 노동자민중에게 과연 무엇인가?
부유(浮游)하는 '사회적 대화(교섭)'논의, 노동자민중에게 과연 무엇인가?
드디어 오늘, 자이툰부대가 이라크를 향해 파병되었다. 노무현 정권은 파병결정이 한미동맹과 이라크 재건을 위한 국익차원의 결정이었다고 말하며, 파병반대를 외치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결국 외면했다. 지난 7월 23일부터 민주노총위원장과 민주노동당대표, 각 단체 활동가들과 시민들은 파병반대 '범국민 10만 릴레이' 단식농성에 돌입하는 등 이라크파병철회를 위해 목숨 건 투쟁을 전개해왔다. 단식농성 중 쓰러진 민주노동당의 대표가 병문 온 청와대비서관을 통해 파병결정 재논의를 위한 대통령면담을 호소해도 대답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각 사회단체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파병반대 외침에 대해 아무런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 정권은 한편 올해 초부터 노사정협의기구에 민주노총을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광화문 열린시민공원 단식농성장의 민주노총 이수호위원장을 직접 찾아간 김대환 노동부 장관의 단식을 그만두고 몸을 아끼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이번 궤도연대공동파업과 LG정유노조에 대해 직권중재라는 구시대노동악법이라는 방침을 내린 것에 반발하여 7월 8일 노사정대표자회의마저 무기한 유보한 상태이다. 민주노총이 이번 임·단투 과정에서 내건 대정부 투쟁기조를 계속 유지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정부가 어떤 카드를 내밀지, 내민다면 어느 정도의 효과를 지닌 카드일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파병이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듯, 노동자운동도 이제는 '사회적 협의기구'에 참여해 '상생과 공존'을 위한 길을 가라고 강요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개혁 하에서 노동자민중의 의제를 갈라치기하고 , 노동자민중 내부를 분열시켜 포섭과 배제의 정치를 하고 있다.
부유(浮游)하는 '사회적 대화' 논의과정
노무현정권은 잘 알려져 있듯이, 참여민주주의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국정과제로 출범한 정권이다. 특히 현정권의 노사관계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기본적으로 금융자본에게 규제가 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재편(완화)하여, 자본투자(투기)를 자유화하고 노동유연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이 그 목표이다. 그러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구축하겠다고 나선 노무현 정권은 출범 첫 해, 노동자민중의 투쟁에 대하여 어김없이 구속과 손배가압류의 족쇄를 채웠으며, 노동자농민들의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이제 노무현 정권은 남한의 노동자운동을 대표한다는 민주노총에 올해 대정부투쟁에 있어 온건한 지도부가 등장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러한 판단과 동시에 구조조정 이후 노동조합의 계속된 투쟁의 패배에 따라 쌓여온 피로감과 패배주의에서 싹트고 있는 조합원들의 실리주의를 부추겨 그동안의 반쪽짜리 노사정기구를 개편한 남한의 대표적인 '노사정협의기구'를 만들려 하고 있다. 올해 새로이 등장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에 조응하여 산별노조 건설과 정책제도 개선을 명분으로 새로운 '노사정협의기구' 건설을 위해 '노사정 청와대회동'에 이어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참가해 왔다. 하지만 올해 임·단협 과정에서 노동조합에서 파업도 들어가기도 전 직권중재를 내리고, 예년과 같은 구속수배를 반복하는 등 정권이 노동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만큼 민주노총은 현 국면에서 '노사정대표자회의'의 지속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하다. 이는 "최근의 노동탄압은 노사정 대표자회의의 취지를 정면 부정하는 도발"이라고 규정한 뒤 "대화에는 대화로, 탄압에는 투쟁으로 맞설 것"이라는 발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사실 '사회적 대화'는 올해 지도부가 '새로운 노사정대화 체계 건설'을 명분으로 등장한 만큼, 공약이행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자의든 타의든 '노사정대표자희의'가 유보가 되었고, 따라서 8월 대의원대회에 상정하기로 한 '사회적 대화(교섭)' 지침 또한 순연할 것으로 보인다. 이 연기가 '사회적 대화' 형성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의 제스처에 불과한 것인지, '사회적 대화' 그 자체에 대하여 노사정이 화해할 수 없는 계급대립을 반영하는 '경고성' 발언인지는 좀더 두고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총 현 지도부가 '사회적 대화'에 무척 집착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이미 두 차례 진행된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노사정협의기구'의 성격을 갖고 있다. 노사정대표자회의는 각종 주요 노동사안에 대한 논의, 향후 건설될 '새로운 노사정협의기구'에 대한 위상과 역할을 결정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는 '노사정위 복귀'는 대의원 대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방침을 벗어난 행위에 진배없는 것이다. 또한 임·단협이 한창인 6, 7월에 각 연맹과 산하본부에 '사회적 대화'에 대한 논의를 주문하고 8월에 안건을 상정하려 했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번갯불에 콩구워 먹는 식으로 진행된 면이 있다. 물론 민주노총은 이전에도 노사정위 가입과 탈퇴를 반복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현재의 부유(浮游)가 민주노총이 걸어온 역사의 반복이라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
노동유연화 촉진의 통로, 노동자민중을 포섭/관리하는 노사정위원회
그렇다면 '기존의 노사정위원회'와 새롭게 재편될 '노사정협의기구'의 틀은 과연 다를 것인가? 더 설명할 필요없는 98년 노사정위원회는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시간근로제 합의를 통해 파견노동, 즉 중간착취를 합법화하는데 기여하고, 2000년 복수노조 금지조항 유예와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유예를 맞바꿔치기 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독자노조 건설을 어렵게 만들었다. 2001년에는 모성보호법이 개정되었지만, 그 혜택은 여성노동자, 그 중에서도 고용보험에 들어있는 40% 미만에게만 한정되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소외되었다. 2002년 들어서면서 노사정위원회 비정규직 특위에서는 비정규노동자의 범위와 통계 개선, 취약노동자 개념 도입, 노사정 참여기구 설치, 상담 및 고충처리방안, 사회보험제도의 부분적용 등이 노사정 합의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이는 이후 노사정위에서 왜곡된 비정규직 논의를 계속 진행되게 만드는 발판으로 작동하게 된다. 또한 2003년 특수형태근로종사자 특위에서는 특수고용노동자를 사용자와 노동자의 중간자적 위치로 보고 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유사근로자라는 개념을 통해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부정하고, 노동3권과 산재보험 등 사회보험 등을 선별적으로 적용하는 안을 내놓아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노사정위원회였다. 또한 최근에는 파견법 개정을 통해 파견업종을 전면확대하려는 의도까지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의 노사정위원회는 집단적 노사관계와 개별적 노사관계의 맞바꾸기(trade-off) 방식으로 노동자대중을 갈라치기하고 위계화시켰다. 이렇듯 노사정위원회는 노동법 개악을 통해 노동유연화를 관철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광풍에 그대로 노출된 노동자대중들을 위계화하여 비정규직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올해 2월에 노사정위원회에서 발표된 '2004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은 98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 이후 간만의 합의도출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하지만 '일자리만들기 사회협약'의 내용은 그 일자리 수가 1만 개든 10만 개든 상관없이 사회서비스 분야의 사회적 일자리에 1인당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으로 9-10개월간 지원한다는 것이 그 내용의 골자이다. 한마디로 유연화된 일자리, 비정규직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사회적 빈곤'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불안정노동의 확산을 정부 스스로 앞장서겠다는 것이 사회적 일자리 사업의 내용이다.
지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졌던 노사정위원회의 역할은 이처럼 자명했다.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추구한다며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지냈던 인사가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이 되어도 노사정위원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노총도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노사정위원회를 무조건 참가하는 방식을 경계하고 있는 듯 하다. "노사정위원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사회적 교섭기구에 대한 기본 인식에서부터 큰 변화가 필요하다. 기존 노사정위원회는 정부가 주도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기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잊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는 노사당사자가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적합한 교섭기구의 구성과 운영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적합한 교섭기구의 구성과 운영은 "첫째, 기구의 독립성이 강화되어야 하며 둘째, 논의의제를 확대하고 셋째, 합의사항 이행이 담보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논리이다.
현재 남한 노동자운동은 낮은 조합원 조직률에 지난 구조조정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배제로 얻을 것도 잃었다는 피해의식이 겹쳐, '여러 가지 점에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제약되고 있지만 노동계급과 조합원의 권익과 역량강화를 위해서 사회적 교섭기구를 활용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현재의 국면이 사회적 합의주의를 실현하기에는 충분히 제약적인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교섭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조합원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정규직 차별철폐나 빈곤해소라는 명분은 단지 치장에 불과했던 노사정합의의 역사가 언급되어야 한다. 현재 남한이 구조적 경제위기 국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온전한 실현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인정하고 있는 바다. 결국 이러한 조건에서 '사회적 대화(교섭)'틀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허구적 합의주의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노동자로 한정되어지는 특수한 노동자 계층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꼴이 될 것이다.
관리된 합의주의, 신자유주의의 관철을 위한 '사회적 합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사정 삼자기구는 사회적합의주의 모델의 핵심적인 제도이며, 형식적 틀에 관한 하나의 교섭안정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노사정위원회가 기만책이었다는 경험의 쓰라림으로 부유하고 있지만, 유명무실해진 노사정위원회를 대신하여 비슷한 삼자위원회가 제시된다면, 충분히 힘을 얻을 수 있다. 궤도공동투쟁이 책임있는 교섭 틀 내에서 논의되었다면, 현재와 같은 쓰라린 패배는 없었을 거라는 일부의 분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사회적 합의주의'의 실현이 가능하거나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사회적 합의주의'의 약화가 크게 회자되는 중에도 그 형식적 틀이 완전히 해체되는 데 이른 것은 아니고, 오히려 1980년대나 1990년대 몇몇 국가에서는 '사회협약'이 잇달아 체결됨에 따라 '사회적 합의주의' 부활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비슷한 형식적 틀이라 하더라도 그 틀 내에서 논의되고 협상되는 실내용은 충분히 다를 수 있다. 이른바 '경쟁력 향상을 위한 사회적 합의주의'가 그 실체인데, 예전에 자본 및 국가가 사회적 합의주의에 응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임금과 복지에 협상했던 것에 반하여, 현재의 '사회적 합의주의' 타협은 신자유주의적 '국가경쟁력(정확히 말하면 자본의 경쟁력)'을 어떻게 제고할 것인가가 우선적인 전제가 되는 것이다.
민주노조진영 내에서 이미 이러한 징후는 다분하다. 올해 임·단투 과정에서 선보인 '사회연대기금'은 노사정이 공동으로 기금을 출연하여, 비정규의 임금과 복지를 개선하고, 궁극적으로는 산업발전을 위한 공동연구기금으로 쓰자는 것이 그 내용이다. 특히 자동차 4사에서 제출한 '산업발전과 사회발전을 위한 사회공헌기금'은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노조와 자본이 힘을 합쳐, 산업발전을 이룩해보겠다는 소박한 발상을 담고 있다. 산업공동화에 따른 고용위협에 맞선 노동조합의 전략이 산업별 정책차원에서의 대응 차원으로 수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본의 금융세계화라는 현 국면에서 일국적 산업정책은 그 한계가 명백하다. 산업공동화 현상은 산업적 형태로 대응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닌, 초민족적 자본에 의한 '전지구적 차원의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라는 관점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한편 참여연대에서는 노사정과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경제사회위원회' 구성을 제안하고 있다. 또한 최근 공공연맹을 탈퇴한 KT를 중심으로 새로이 출범한 전국IT산업노조연맹은 '기존 연맹이 비정규직 중심의 활동으로 인하여 대사업장노조의 이익에 소홀했으니 이제는 직접 정보통신 정책에 개입해' 자신의 이익을 직접 챙기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에게 개혁의 정당성 이데올로기를 부여해 줄 것이며, 노조가 취하는 단위사업장과 조합원만의 이익을 방어하는 전략은 비정규직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는 관리된 합의주의 양상을 띌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계급형성적 노동자운동의 복구를 위해서는 좀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좌/우', '개량주의/반개량주의'의 낙인을 깨고, 새로운 '계급형성'에 주력하자.
새로운 '사회적 대화'는 '노정의 신뢰회복을 위하여 가시적인 조치가 선행' 된다던가, '노동조합의 역량이 강화되면 참가할 수 있다', 또는 '제대로 된 노사정위라면 참가할 수 있다'라는 '전술적(조건부) 참가론'이 좌/우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전술적 참가론은 그야말로 사회적 대화를 '교섭'틀의 확장으로 바라보는 실용적인 관점으로, 시기와 정세에 따라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고, 나올 수 있다는 시각이다. 새롭게 개편되던 아니든, 결국 현 국면에서 노사정위가 노동자민중에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이 극히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참가를 결정한다면 노동자운동은 그야말로 정권에 의한 관리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노사정위원회는 '교섭'틀의 확장으로 바라볼 수 없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작동시키는 핵심적인 기제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사회적 대화' 틀에 대한 각 단체, 현장을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각종 토론회를 통해 '사회적 대화' 틀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회적 합의주의의 허상에 대한 선전을 진행하는 등 '사회적 대화' 틀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진정 현재의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난 시기 노동자운동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세로부터 출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회적 교섭' 틀과 이에 따른 '사회적 합의주의' 논쟁 과정에서 불거지는 현재의 운동 위기 상황의 원인이 지도부 탓으로만 돌려진다면 안 될 것이다. 근본적인 혁신관점과 성찰이 전제된 실천만이 구래의 껍데기를 벗고 새로이 태어날 수 있다는 진실과 쓰러져 가는 계급운동을 복원하기 위한 길은 오직 '계급주체' 형성에 있다는 것을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대중이 함께하는 교육과 토론시간을 충분히 보장되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대중운동의 일진전을 위한 방안이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
드디어 오늘, 자이툰부대가 이라크를 향해 파병되었다. 노무현 정권은 파병결정이 한미동맹과 이라크 재건을 위한 국익차원의 결정이었다고 말하며, 파병반대를 외치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결국 외면했다. 지난 7월 23일부터 민주노총위원장과 민주노동당대표, 각 단체 활동가들과 시민들은 파병반대 '범국민 10만 릴레이' 단식농성에 돌입하는 등 이라크파병철회를 위해 목숨 건 투쟁을 전개해왔다. 단식농성 중 쓰러진 민주노동당의 대표가 병문 온 청와대비서관을 통해 파병결정 재논의를 위한 대통령면담을 호소해도 대답은 공허한 메아리뿐이었다.
각 사회단체 그리고 노동자민중의 파병반대 외침에 대해 아무런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파병을 강행한 노무현 정권은 한편 올해 초부터 노사정협의기구에 민주노총을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광화문 열린시민공원 단식농성장의 민주노총 이수호위원장을 직접 찾아간 김대환 노동부 장관의 단식을 그만두고 몸을 아끼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이번 궤도연대공동파업과 LG정유노조에 대해 직권중재라는 구시대노동악법이라는 방침을 내린 것에 반발하여 7월 8일 노사정대표자회의마저 무기한 유보한 상태이다. 민주노총이 이번 임·단투 과정에서 내건 대정부 투쟁기조를 계속 유지할지는 미지수이지만, 정부가 어떤 카드를 내밀지, 내민다면 어느 정도의 효과를 지닌 카드일지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파병이 국익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듯, 노동자운동도 이제는 '사회적 협의기구'에 참여해 '상생과 공존'을 위한 길을 가라고 강요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 개혁 하에서 노동자민중의 의제를 갈라치기하고 , 노동자민중 내부를 분열시켜 포섭과 배제의 정치를 하고 있다.
부유(浮游)하는 '사회적 대화' 논의과정
노무현정권은 잘 알려져 있듯이, 참여민주주의와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국정과제로 출범한 정권이다. 특히 현정권의 노사관계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는 기본적으로 금융자본에게 규제가 될 수 있는 법과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재편(완화)하여, 자본투자(투기)를 자유화하고 노동유연화를 가속화시키는 것이 그 목표이다. 그러나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구축하겠다고 나선 노무현 정권은 출범 첫 해, 노동자민중의 투쟁에 대하여 어김없이 구속과 손배가압류의 족쇄를 채웠으며, 노동자농민들의 많은 목숨을 앗아갔다.
이제 노무현 정권은 남한의 노동자운동을 대표한다는 민주노총에 올해 대정부투쟁에 있어 온건한 지도부가 등장했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 이러한 판단과 동시에 구조조정 이후 노동조합의 계속된 투쟁의 패배에 따라 쌓여온 피로감과 패배주의에서 싹트고 있는 조합원들의 실리주의를 부추겨 그동안의 반쪽짜리 노사정기구를 개편한 남한의 대표적인 '노사정협의기구'를 만들려 하고 있다. 올해 새로이 등장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에 조응하여 산별노조 건설과 정책제도 개선을 명분으로 새로운 '노사정협의기구' 건설을 위해 '노사정 청와대회동'에 이어 '노사정대표자회의'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참가해 왔다. 하지만 올해 임·단협 과정에서 노동조합에서 파업도 들어가기도 전 직권중재를 내리고, 예년과 같은 구속수배를 반복하는 등 정권이 노동자들의 분노를 사고 있는 만큼 민주노총은 현 국면에서 '노사정대표자회의'의 지속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듯 하다. 이는 "최근의 노동탄압은 노사정 대표자회의의 취지를 정면 부정하는 도발"이라고 규정한 뒤 "대화에는 대화로, 탄압에는 투쟁으로 맞설 것"이라는 발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사실 '사회적 대화'는 올해 지도부가 '새로운 노사정대화 체계 건설'을 명분으로 등장한 만큼, 공약이행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모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는 자의든 타의든 '노사정대표자희의'가 유보가 되었고, 따라서 8월 대의원대회에 상정하기로 한 '사회적 대화(교섭)' 지침 또한 순연할 것으로 보인다. 이 연기가 '사회적 대화' 형성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일보전진을 위한 이보후퇴'의 제스처에 불과한 것인지, '사회적 대화' 그 자체에 대하여 노사정이 화해할 수 없는 계급대립을 반영하는 '경고성' 발언인지는 좀더 두고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총 현 지도부가 '사회적 대화'에 무척 집착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이미 두 차례 진행된 '노사정대표자회의'는 '노사정협의기구'의 성격을 갖고 있다. 노사정대표자회의는 각종 주요 노동사안에 대한 논의, 향후 건설될 '새로운 노사정협의기구'에 대한 위상과 역할을 결정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는 '노사정위 복귀'는 대의원 대회의 결정에 따른다는 방침을 벗어난 행위에 진배없는 것이다. 또한 임·단협이 한창인 6, 7월에 각 연맹과 산하본부에 '사회적 대화'에 대한 논의를 주문하고 8월에 안건을 상정하려 했던 모습은 누가 보아도 번갯불에 콩구워 먹는 식으로 진행된 면이 있다. 물론 민주노총은 이전에도 노사정위 가입과 탈퇴를 반복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현재의 부유(浮游)가 민주노총이 걸어온 역사의 반복이라 하면 너무 과장된 말일까?
노동유연화 촉진의 통로, 노동자민중을 포섭/관리하는 노사정위원회
그렇다면 '기존의 노사정위원회'와 새롭게 재편될 '노사정협의기구'의 틀은 과연 다를 것인가? 더 설명할 필요없는 98년 노사정위원회는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시간근로제 합의를 통해 파견노동, 즉 중간착취를 합법화하는데 기여하고, 2000년 복수노조 금지조항 유예와 전임자 임금지급금지 유예를 맞바꿔치기 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독자노조 건설을 어렵게 만들었다. 2001년에는 모성보호법이 개정되었지만, 그 혜택은 여성노동자, 그 중에서도 고용보험에 들어있는 40% 미만에게만 한정되는 것이었고, 대부분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소외되었다. 2002년 들어서면서 노사정위원회 비정규직 특위에서는 비정규노동자의 범위와 통계 개선, 취약노동자 개념 도입, 노사정 참여기구 설치, 상담 및 고충처리방안, 사회보험제도의 부분적용 등이 노사정 합의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이는 이후 노사정위에서 왜곡된 비정규직 논의를 계속 진행되게 만드는 발판으로 작동하게 된다. 또한 2003년 특수형태근로종사자 특위에서는 특수고용노동자를 사용자와 노동자의 중간자적 위치로 보고 이를 조정하는 역할을 했다. 유사근로자라는 개념을 통해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을 부정하고, 노동3권과 산재보험 등 사회보험 등을 선별적으로 적용하는 안을 내놓아 노동자들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도 한 노사정위원회였다. 또한 최근에는 파견법 개정을 통해 파견업종을 전면확대하려는 의도까지 드러내고 있다.
그동안의 노사정위원회는 집단적 노사관계와 개별적 노사관계의 맞바꾸기(trade-off) 방식으로 노동자대중을 갈라치기하고 위계화시켰다. 이렇듯 노사정위원회는 노동법 개악을 통해 노동유연화를 관철하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광풍에 그대로 노출된 노동자대중들을 위계화하여 비정규직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올해 2월에 노사정위원회에서 발표된 '2004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은 98년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 이후 간만의 합의도출이라며 대대적으로 홍보되었다. 하지만 '일자리만들기 사회협약'의 내용은 그 일자리 수가 1만 개든 10만 개든 상관없이 사회서비스 분야의 사회적 일자리에 1인당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임금으로 9-10개월간 지원한다는 것이 그 내용의 골자이다. 한마디로 유연화된 일자리, 비정규직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사회적 빈곤'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불안정노동의 확산을 정부 스스로 앞장서겠다는 것이 사회적 일자리 사업의 내용이다.
지난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가졌던 노사정위원회의 역할은 이처럼 자명했다.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를 추구한다며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지냈던 인사가 노사정위원회 위원장이 되어도 노사정위원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민주노총도 다음과 같은 맥락에서 노사정위원회를 무조건 참가하는 방식을 경계하고 있는 듯 하다. "노사정위원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사회적 교섭기구에 대한 기본 인식에서부터 큰 변화가 필요하다. 기존 노사정위원회는 정부가 주도하면서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시키는 기구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도 잊지 않는다. "새로운 사회적 교섭기구는 노사당사자가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적합한 교섭기구의 구성과 운영이 필요하다". 그러면서 적합한 교섭기구의 구성과 운영은 "첫째, 기구의 독립성이 강화되어야 하며 둘째, 논의의제를 확대하고 셋째, 합의사항 이행이 담보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참으로 모순적이고 역설적인 논리이다.
현재 남한 노동자운동은 낮은 조합원 조직률에 지난 구조조정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배제로 얻을 것도 잃었다는 피해의식이 겹쳐, '여러 가지 점에서 사회적 합의주의가 제약되고 있지만 노동계급과 조합원의 권익과 역량강화를 위해서 사회적 교섭기구를 활용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현재의 국면이 사회적 합의주의를 실현하기에는 충분히 제약적인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교섭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조합원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비정규직 차별철폐나 빈곤해소라는 명분은 단지 치장에 불과했던 노사정합의의 역사가 언급되어야 한다. 현재 남한이 구조적 경제위기 국면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온전한 실현이 불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총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인정하고 있는 바다. 결국 이러한 조건에서 '사회적 대화(교섭)'틀을 추진하겠다는 것은 허구적 합의주의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대기업 정규직노동자로 한정되어지는 특수한 노동자 계층의 이해만을 대변하는 꼴이 될 것이다.
관리된 합의주의, 신자유주의의 관철을 위한 '사회적 합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사정 삼자기구는 사회적합의주의 모델의 핵심적인 제도이며, 형식적 틀에 관한 하나의 교섭안정화 전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노사정위원회가 기만책이었다는 경험의 쓰라림으로 부유하고 있지만, 유명무실해진 노사정위원회를 대신하여 비슷한 삼자위원회가 제시된다면, 충분히 힘을 얻을 수 있다. 궤도공동투쟁이 책임있는 교섭 틀 내에서 논의되었다면, 현재와 같은 쓰라린 패배는 없었을 거라는 일부의 분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한편 신자유주의 하에서도 '사회적 합의주의'의 실현이 가능하거나 불가능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신자유주의에 따른 '사회적 합의주의'의 약화가 크게 회자되는 중에도 그 형식적 틀이 완전히 해체되는 데 이른 것은 아니고, 오히려 1980년대나 1990년대 몇몇 국가에서는 '사회협약'이 잇달아 체결됨에 따라 '사회적 합의주의' 부활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비슷한 형식적 틀이라 하더라도 그 틀 내에서 논의되고 협상되는 실내용은 충분히 다를 수 있다. 이른바 '경쟁력 향상을 위한 사회적 합의주의'가 그 실체인데, 예전에 자본 및 국가가 사회적 합의주의에 응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임금과 복지에 협상했던 것에 반하여, 현재의 '사회적 합의주의' 타협은 신자유주의적 '국가경쟁력(정확히 말하면 자본의 경쟁력)'을 어떻게 제고할 것인가가 우선적인 전제가 되는 것이다.
민주노조진영 내에서 이미 이러한 징후는 다분하다. 올해 임·단투 과정에서 선보인 '사회연대기금'은 노사정이 공동으로 기금을 출연하여, 비정규의 임금과 복지를 개선하고, 궁극적으로는 산업발전을 위한 공동연구기금으로 쓰자는 것이 그 내용이다. 특히 자동차 4사에서 제출한 '산업발전과 사회발전을 위한 사회공헌기금'은 그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노조와 자본이 힘을 합쳐, 산업발전을 이룩해보겠다는 소박한 발상을 담고 있다. 산업공동화에 따른 고용위협에 맞선 노동조합의 전략이 산업별 정책차원에서의 대응 차원으로 수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본의 금융세계화라는 현 국면에서 일국적 산업정책은 그 한계가 명백하다. 산업공동화 현상은 산업적 형태로 대응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닌, 초민족적 자본에 의한 '전지구적 차원의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라는 관점을 명확히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한편 참여연대에서는 노사정과 시민단체가 참여하는 '경제사회위원회' 구성을 제안하고 있다. 또한 최근 공공연맹을 탈퇴한 KT를 중심으로 새로이 출범한 전국IT산업노조연맹은 '기존 연맹이 비정규직 중심의 활동으로 인하여 대사업장노조의 이익에 소홀했으니 이제는 직접 정보통신 정책에 개입해' 자신의 이익을 직접 챙기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것은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에게 개혁의 정당성 이데올로기를 부여해 줄 것이며, 노조가 취하는 단위사업장과 조합원만의 이익을 방어하는 전략은 비정규직을 희생시킬 수 밖에 없는 관리된 합의주의 양상을 띌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계급형성적 노동자운동의 복구를 위해서는 좀더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하다.
'좌/우', '개량주의/반개량주의'의 낙인을 깨고, 새로운 '계급형성'에 주력하자.
새로운 '사회적 대화'는 '노정의 신뢰회복을 위하여 가시적인 조치가 선행' 된다던가, '노동조합의 역량이 강화되면 참가할 수 있다', 또는 '제대로 된 노사정위라면 참가할 수 있다'라는 '전술적(조건부) 참가론'이 좌/우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전술적 참가론은 그야말로 사회적 대화를 '교섭'틀의 확장으로 바라보는 실용적인 관점으로, 시기와 정세에 따라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고, 나올 수 있다는 시각이다. 새롭게 개편되던 아니든, 결국 현 국면에서 노사정위가 노동자민중에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익이 극히 한정되어 있는 상황에서 참가를 결정한다면 노동자운동은 그야말로 정권에 의한 관리를 자초하게 될 것이다. 노사정위원회는 '교섭'틀의 확장으로 바라볼 수 없는 '사회적 합의주의'를 작동시키는 핵심적인 기제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사회적 대화' 틀에 대한 각 단체, 현장을 중심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각종 토론회를 통해 '사회적 대화' 틀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회적 합의주의의 허상에 대한 선전을 진행하는 등 '사회적 대화' 틀에 대한 대응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진정 현재의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난 시기 노동자운동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자세로부터 출발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사회적 교섭' 틀과 이에 따른 '사회적 합의주의' 논쟁 과정에서 불거지는 현재의 운동 위기 상황의 원인이 지도부 탓으로만 돌려진다면 안 될 것이다. 근본적인 혁신관점과 성찰이 전제된 실천만이 구래의 껍데기를 벗고 새로이 태어날 수 있다는 진실과 쓰러져 가는 계급운동을 복원하기 위한 길은 오직 '계급주체' 형성에 있다는 것을 민주노조운동진영은 되새겨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대중이 함께하는 교육과 토론시간을 충분히 보장되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노동자대중운동의 일진전을 위한 방안이 발굴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