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화와 노동

사회진보연대 주간웹소식지


제 242호 | 2004.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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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등급제 논란과 교육 불평등

-자본주의의 폭로된 진실과 형식적 은폐

사회진보연대
소문으로 나돌던 고교등급제가 실제로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전교조를 비롯한 교육운동 단체들은 고교등급제는 학생 개인의 능력보다 부모의 소득과 사회적 지위, 지역이 우선시되는 "출신성분제도"에 다름 아니라며 강력히 비판했다. 사실 고교등급제는 "모든 개인에게 교육의 기회는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대중교육의 보편적인 관념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사건이었다. 물론 '기회의 평등'이라는 원칙이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철저하게 서열화 되어있는 남한의 대학구조 하에서 상위권 대학 진학은 신분상승 혹은 최소한 안정적인 일자리라는 생각이 여전하고, 따라서 대학입시를 둘러싼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이 치열한 경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학생 개인의 능력과 학교교육보다는 사교육 경쟁을 치러낼 수 있는 부모의 경제력에 달려있다는 점은 이미 다 알려진 이야기다. 그럼에도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는 희망은 '기회 평등'의 원칙을 방어하는 강력한 믿음이었고, 고교평준화로 대표되는 남한 대중교육이 가지는 최소한의 명분이었다. 고교등급제 시행은 현실에서 나타나는 무수한 불평등과 분할에 따른 갈등을 축소, 봉합하는 바로 그 지점을 흔드는 것이고, 따라서 논란은 그리 간단치 않다.

'3불(不) 정책' 폐지 vs 존속

고교등급제를 계기로 촉발된 논쟁은 이제 남한 중등교육 전반을 둘러싼 논쟁으로 번지고 있다. 상위권 대학들을 위시로 한 축에서는 '3불 정책(고교등급제, 본고사, 기여입학제 금지)'으로 대변되는 입시 상의 규제를 풀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교육부는 이에 대해 오히려 '3불 정책'을 법제화하겠다고 맞서고 있다. 이러한 대립은 (형식상) 평준화된 중등교육과 철저하게 서열화된 고등교육(대학)의 모순적 결합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그리고 당연히도 여기에는 노동시장에서 요구하는 노동력 재생산 문제가 결부되어 있다.
노동의 불안정화, 유연화가 심화되면서 대학에 요구되는 노동력 재생산 메커니즘에도 변화가 요구된다. 초민족적 지배 엘리트 양성과 유연화된 노동시장에 적응하는 노동력 배출이 구분되고, 이는 서열화된 대학구조에 투영된다. 하지만 평준화를 유지하고 있는 중등교육 체계는 이런 메커니즘과 계속해서 갈등을 일으켜왔다. 엘리트 양성을 중심으로 하는 상위권 대학들이 음성적인 고교등급제를 시행했다는 사실은 이런 갈등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이를 계기로 지배 세력은 노동의 유연화 - 대학의 서열화에 부합하는 중등교육의 서열화를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은 이미 고교간 학력차 등에서 드러났듯이 실내용에서는 평준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최소한 이를 반영할 수 있는 대학입시 제도를 허용하거나 나아가 평준화를 폐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이미 대학들에게 많은 자율권을 줬고, 3불 정책만은 포기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맞선다. 대학들이 부여된 자율권 하에서 다양한 전형방법을 개발할 노력은 게을리 한 채, 정부의 규제만을 탓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와 정부가 그동안 대학 구조조정을 통해 노동의 유연화 - 대학의 서열화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해왔던 점을 상기할 때, 정부의 3불 정책 고수 입장이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음은 분명하다. 지금까지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이 추진해 온 교육정책을 살펴보면 특목고, 영재학교, 자립형 사립고 등의 다양한 학교형태를 추진했거나 하는 중이다. 이런 과정에서 중등교육의 실질적인 불평등은 공고해졌다. 대입 제도에서도 이런 실질적 불평등을 반영할 수 있는 기회는 대학의 자율권이라는 명목 하에 계속해서 확대되었다. 이는 현재 고교등급제의 발단을 마련해 준 2002학년도부터 시행된 입시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02학년도부터 시행된 입시제도에서는 수시와 정시를 나누고, 방식도 일반전형과 특별전형으로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대학별로 전형자료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을 넓혀 주었다.

정부의 평준화 입장이 은폐하는 것

그럼에도 정부가 평준화와 3불 정책을 고수하는 것은 이것이 교육 불평등을 은폐하는 핵심적인 이데올로기 장치이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평준화는 기회의 평등이라는 틀 하에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불평등과 차별을 은폐한다. 누구나 자신이 노력하면 좋은 대학을 나와 신분상승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에서 진행된 대학의 재편과 노동의 유연화 속에서 이는 한낱 꿈일 뿐이다. 이는 정부가 추진해온 교육개혁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1980년대 이후 남한에서 대학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나서 현재는 재수생을 포함한 대학의 입학자 수가 고등학교 졸업생의 수보다 많아지는 상황이 되었다.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는 상황이 되었지만, 대학입시 경쟁은 날로 치열해졌고, 사교육은 더욱 비대해지는 기형적인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 기인한다. 하나는 대학교육이 보편화된 상황에서 대학을 졸업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는 노동시장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노동의 유연화가 심화되면서 점차 취업 일자리의 질이 하락하는 경향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철저하게 서열화된 남한의 대학구조는 노동시장에 반영되어 대학의 서열과 졸업 후 노동시장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사실상 일치한다. 따라서 안정적인 일자리가 줄어들고 일자리의 질이 하락할수록 상위 대학을 진학하려는 경쟁은 심화된다.
이런 상황에서 추진된 교육 개혁은 대학의 서열화는 그대로 둔 채, 이를 자본의 요구에 맞춰 합리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대학의 서열화는 다양화, 특성화,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경쟁과 포섭의 논리 속에 재편되었다. 이런 재편은 대학을 연구중심대학(대학원 중심)과 교육중심대학(학부 중심)으로 이원화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있는 상위권 대학들은 초민족적 자본의 요구에 부합하는 지식(법학, 경영학, 행정학, 의학, 생명공학 등)을 생산하는 대학원 중심대학으로 전화한다. 대학원 과정을 통해 고급 두뇌인력을 양성, 배출하고, 이것은 곧 대학의 국제경쟁력과 직결된다. 반면 일반 대학들은 유연화된 노동시장에 적응할 수 있는 노동력 배출을 목표로 학부 교육 중심 대학으로 전화한다. 이 과정에서 일반 대학들은 열악한 재정지원, 정원 미달 등으로 허덕이며, 살아남기 위해 기업과 자본에서 요구하는 노동력 배출에 사활을 건다.
이런 상황은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할과 경쟁을 심화한다. 불안정한 노동이 일반화되고 삶의 위기가 심화될수록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여 엘리트 재생산 구조에 편입하고자 하는 대중의 열망은 커진다. 불안정한 노동은 자본의 요구에서 출발한 것이고, 따라서 이로부터 노동자계급 내부의 분할과 경쟁도 생기는 것이지만, 형식적 평등은 이를 교육의 문제, 교육에서의 개인의 학력 문제로 환원한다. 3불 정책 및 고교평준화를 고수하겠다는 노무현 정권은 결코 대학의 서열화를 문제 삼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부추기고 있다. 게다가 노동시장 유연화는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는 핵심 정책 중 하나다. 그들이 말하는 평준화가 교육 불평등을 은폐하는 핵심적인 기제일 뿐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교등급제가 폭로한 진실

어느 기자는 칼럼에서 "명문 사립대가 의도했든 않았든, 고교 등급제는 한국의 상류사회를 재생산해 내는 교육적 메커니즘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확인시켜 준다"고 지적했다. 사회 경제적 엘리트의 자녀들은 수능이나 내신 성적이 몇 점 낮더라도, '촌구석' 학생들보다 앞으로 사회 경제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훨씬 높고, 대학이 참고하는 것도 바로 이 점이라는 것이다.
이제 초민족적 자본이 요구하는 고급 두뇌인력, 엘리트를 양성하는 것은 학부의 몫이 아니다. 대학원 혹은 나아가 해외유학(특히 미국으로의 유학)이 보증해야 하는 것이다. 좀 더 많은 학생들이 전문적인 대학원에 진학하여 대학원의 발전을 도모해야 하고, 유학 등의 과정을 거쳐 국제적인 활동 반경을 갖는 엘리트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대학의 경쟁력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에게 중요한 것은 학생의 성적보다 이 과정을 안정적으로 밟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따라서 학생선발에서 고려되어야 할 부분은 대학원과 유학의 과정을 부양할 수 있는 경제력이고, 이후 안정적으로 지배 엘리트 계층에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길러졌느냐이다. 게다가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가 일정 수준 이상인 집안의 자녀들은 사교육으로 중무장한데다가, 좋은 고등학교(강남의 고교, 특목고 등) 출신이므로 기초적인 학력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고교등급제, 본고사, 기여입학제는 이런 자격을 갖춘 학생을 선발하기에 용이한 제도다.
결국 고교등급제는 중등교육의 형식적 평등이 얼마나 왜소한 것인지를 폭로한 사건이다. 이미 중등교육은 부모의 경제력과 사회적 지위라는 실질적인 불평등에 의해 구조화되었다. 물론 이를 더욱 강화하고 부추기는 것은 서열화된 대학과 신자유주의 시대에 적합한 노동력을 바라는 자본이다. 이번 고교등급제 사건을 통해 실제로 남한 사회는 철저한 계급사회라는 점이 폭로되었다는 것을 그나마 유익하다고 위안을 삼아야 하나 싶다.

고교등급제 금지를 넘어 교육 불평등 타파로!

노동의 유연화와 이에 조응하는 대학의 서열화 구조가 남아있는 한 이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정부가 이미 허울만 남아버린 평준화를 고집한다고 해도 갈등이 봉합될 뿐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노동자계급에게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갈등이 지속되어 교육의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이 벌어져도 지배 엘리트들은 조기유학 등을 통해 자신들의 재생산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 문제가 지배세력의 요구대로 중등교육의 평준화 폐지로 나아간다면, 대중들이 직면하게 될 경쟁과 내부 분할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신분상승의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뛰어넘는 투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자본의 요구에 따라 재편되는 대학교육을 그것으로부터 끊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는 대학의 서열화 철폐, 노동의 유연화 저지와 맞닿아있는 문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본의 이윤추구 목적에 따라 선별된 지식을 습득하게 되는 것, 지식의 획득이 경제적 성공에 연결되는 것과 단절해야 한다. 결국 지식 자체가 대중에게 돌려지고 이를 통해 대중의 집단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성공과 지배를 위한 요구가 아니라 지식 자체를 대중의 권리로 인식해야 한다. 지식은 상품도 신분상승의 도구도 아닌, 대중이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그에 입각하여 스스로의 삶을 통치할 수 있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대학의 평준화와 교육의 불평등을 타파하는 것은 이를 위한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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