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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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주간웹소식지


제 244호 | 2004.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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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판결 이후

-신자유주의 정치의 한계와 위기

사회진보연대
지배권력 간의 난타전이 계속되고 있다. 탄핵 사태와 총선 이후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이 의회 과반수를 차지하고 '상생의 정치'가 거론되면서 정국이 비교적 안정될 것처럼 예상했던 주류적 견해는 완전한 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 과거사 청산에 관한 여야간의 공방부터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싼 갈등, 국가 정체성 논란, 성장우선론 vs 분배론 등으로 갈등과 반목을 거듭하고 있는 양당의 대결 구도는 한반도 남녘이 한국전쟁이후 가장 치열한 이념논쟁에 접어든 듯한 착시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지배권력 간의 이념대결은 행정수도 '위헌' 판결로 인하여 입법부와 사법부,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갈등까지 비화되더니 이제는 총리와 한나라당의 일개 말싸움으로 국회 일정 파행까지 치달아 정국은 가히 파국이 되었다. 진정 이념의 투사들이요 신념의 강자들이다.

정책/이념/색깔 논쟁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처럼 노무현 정권 등장이후 -입법부의 장악에도 불구하고-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갈등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도대체 '왜' 이러한 논란과 갈등이 반복되고 있는가?
애초에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을 승인하는데 있어서는 양 당 체제로 나눠져 있는 지배세력간에 이견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지배권력 간의 헤게모니 다툼은 오늘날의 구조적 위기를 지연시키는 프로그램에 불과한 신자유주의를 누가 유능하고 효과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일 뿐이다. 남한 경제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에 편입/종속된 상황에서 90년대 이전과 같은 (민족)국민국가 단위의 발전전망 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어떠한 정책도 대중의 삶, 구조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없다.
이제 위기에 대한 처방전을 낼 수 없는 지배계급에게 대중의 견고하고 안정적인 지지는 요원한 일이 되었으며 다만 누가 일시적으로 대중을 좀 더 동원하는데 성공하는가라는 문제로 지배 정치가 전화한다. 2002년 겨울 이 게임에서 승리자였던 노무현은 집권 이후에도 정권의 생존을 위해서 중단 없는 개혁과 그를 지탱할 실질적인(관리 가능한) '동원력'을 필요로 했다. 집권 초 노무현이 꾸준히 추진했던 정치개혁이나 '재신임', '탄핵'과 같은 도박도 모두 '동원과 지속'에 무게 중심이 실렸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도박은 일시적인 효과를 창출하였고 입법부의 교체라는 쾌거를 달성했지만 도박은 도박일 뿐이며 환각제는 환각제일 뿐이다. 현실에서 아무런 변화도 창출할 수 없는 노무현의 카드들은 유통기한이 대단히 짧을 수밖에 없으며 바로 여기서 보수주의의 역공이 가능한 공간이 창출된다.
그러나 보수주의 세력이 답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 역시 신자유주의적 경제전망을 공유하는 터에 뾰쪽한 수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런 이유로 정치는 점점 답이 없는 수렁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경제 위기의 진실을 두고 이전과 같은 형태로 통치할 수 없는 지배세력이 상호간의 난타전을 통해서 위기를 호도하는 시나리오가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지배질서의 위기를 봉합하기 위하여서 서로간의 아무런 차이도 없는 이들 간의 외형적으로는 대단히 격렬한 정쟁이 치루어 지는 것이다. 즉 종래의 정치는 간데없는 정치의 위기인 것이다.
이제 모든 정책은 동원을 위해서 제시되거나 역설적으로 모든 정책이 개혁으로 포장되기에 이르는 쇼쇼쇼다. 쇼에는 사회 경제적인 영역들의 이슈는 당연히도 철저히 배제되며 외형적으로 안정적인 양당체제간의 허구적이지만 선명한 듯한 차이가 드러나는 의제들이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이 의제들에는 명쾌한 우선순위조차 없이 정쟁의 도구로서 얼마나 실용성을 띄는가, 얼마나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가로 서열이 정해진다. 소위 4대 개혁 입법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기에 개혁의 성격은 당연히 공허할 뿐이다. 개혁의 내용은 비록 그간 민중의 요구를 불충분하게나마 대변하고 있는 것들이지만 정치적 반대세력을 공격하기 위해 활용된다. 그렇기에 설사 달성된다 하더라도 반공발전주의 국가 노선의 잔재로 인해 지체된 정치-행정-사법구조의 혁신 정도를 목적하는 것일 따름이다. 주인공들은 모두 사생결단을 할 태세지만 각각의 이슈들은 놀랍게도 1-2달을 넘기지 못하고 다른 의제로 교체된다. 이는 이념논쟁이 실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덧붙여 이 정치 쇼에서 필수적으로 출현하는 또 하나의 집단은 NGO와 미디어집단이다.
결국 이 정치 쇼의 유일한 임무는 대중의 분노를 왜곡하여 폭발시키거나 질식시킴으로서 대중의 정치에 대한 냉소를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정책개혁/의제를 둘러싼 갈등 역시 무정형적이며 이는 정치 자체를 불확실성의 공간으로 밀어 넣는다.

행정수도 이전의 문제

최근 논란의 초점이 되었던 행정수도 이전 역시 태생적으로 동원을 위한 정책과 궤를 같이 한다. 애시 당초 지역균형-분권발전이라는 것은 현재의 구조에서 진정 레토릭일 뿐이다. 우선 오늘날의 지역 경제 파탄의 원인을 되물어 볼 필요가 있다. 남한의 지역간 격차는 60년대 군사독재개발 시대 이후 경부선을 축으로 추진된 수출지향의 산업구조(수도권과 영남)와 저곡가 정책이(호남) 맞물려서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역 차는 IMF이후 수도권/비수도권 구도로 재구조화되고 있다. 금융, 법률을 중심으로 한 각종 서비스와 통신, 교통이 확보된 초-민족화된 '글로벌 시티'만을 요구하고 있는 금융적 세계질서는 민족국가 내부의 분할을 가져온다. 글로벌 시티가 될 수 없는 모든 (비-수도권) 지역은 특정한 기능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기형적 경제구조를 강요당하게 된다. 정권은 지역 분권화, 자치 등을 외치지만 실상으로는 통치를 포기한 것에 진배 없으며 지자체들에게 남은 선택은 지역경제의 사활을 걸고 자 지역에 투자개발을 유치하는 것이다. 투자 유치를 위한 마케팅은 더욱 참혹한데 각종 특구 열풍이나 기업도시 계획들에서 볼 수 있듯이 각종 법적, 정책적 규제들은 지역경제 활성화의 미명아래 철폐된다. 게다가 선택된 쇼케이스 지역도 정작 개발 이익이 지역민에게 돌아가기보다는 '서울 사람이 내려와서 서울 사람이 일하고 살며 이익을 챙겨갈 뿐'이기에 지역균형발전과 하등 무관하다. 지역 경제에 돌아가는 것은 강화된 노동조건 하에서 소규모의 고용효과와 식음료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부수적인 수익, 그리고 지자체의 일정한 세수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몇 몇 지역이 선택받겠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쇼 케이스에 불과하며 지역 불균형은 되레 심화될 뿐이다.
노무현의 행정수도 이전 空約은 금융세계화에 종속된 경제체제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지역균형발전이라는 구호를 통해 대중의 박탈감, 소외감을 자극하여 충청권에서의 지지로 이끌어내고자 한 것이지 지역균형발전은 애초에 관심사항도 국가의 명운을 건 사업계획도 아니었다.

헌재 판결의 의미: 국가기구의 응집력 부재와 정치의 사법화

금번 행정수도 위헌 판결은 국가기구간의 응집력 부재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사안이며, 지배정치의 위기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다. 근대 이후 형식적인 삼권의 분립과는 별개로 삼부의 역할이 시기와 지역에 따라 조금씩 재조정되어왔다. (물론 애초에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에 기초한 사상이 아니며 오히려 왕과 귀족 인민의 갈등 속에서 귀족을 보호하려던 사고의 산물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조정의 핵심은 대부분 내각제와 대통령제 등으로 드러난 입법부와 행정부간의 위상과 관련된 문제였다.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 질서가 일반화된 이후 행정부의 입법부에 대한 우위가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제 금융세계화에 편입한 개별 국가들의 입법부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축소되고 있으며, 일정한 제약 하에서만 그 권리가 인정된다. 입법부는 행정부와 각종 국제기구에 의하여 정해진 입법방향을 선전하고 의결하는 보조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대중의 분노와 열망을 조작 봉합하는 공간으로 기능할 뿐이다. 올 봄 정치개혁 논의에서 불거져 나왔던 정책정당, 원내정당은 이를 가장 잘 표현한 아이콘이다.
한데 이번 행정수도 위헌 판결의 경우 의회 내부의 갈등과 의회와 행정부의 갈등에 사법부의 적극주의가 더해져 충돌을 야기했다. 행정부의 입법부에 대한 정책적 논리의 우위가 확보되고 행정부가 스스로 대중을 동원하는 구조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헌법재판소로 상징되는 사법부의 법적 논리가 불안정한 행정부의 논리와 충돌한 것이다. 이는 지배계급 내부의 정치적 응집력이 부재한 상황을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헌재의 판결은 그러나 단순히 국가기구 내부의 응집력 부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목할 것은 지배분파간의 갈등/대립에서 누구도 헤게모니를 얻거나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하는 현상이 상시화 되고 그 종국적인 해결을 법을 통해서 얻는 경향이다. 일상적인 정치세력간의 갈등이나 의견대립 일반이 헌법재판소를 통해서야만 해결되는 현상은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세력 일반이 새로운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데 실패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지배세력이 안정적이었다면 탄핵과 행정수도 문제가 헌법재판소까지 갈 이유는 하등 없었다. 이러한 법치주의의 소환을 후진적인 한국사회의 정상화로 파악해서는 결코 안 된다. 대중의 정치적 대표의 원리로 운영되는 의회의 지위가 하락하고 기술적 관리적 지식으로 무장한 행정부의 우위가 확실한 상황에서 물리적 권위적 힘을 갖는 사법부로 권력의 중심이 최종적으로 이동된다는 것은 민중의 정치적 해결능력을 봉쇄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남한의 사법부는 철저한 관료재판으로서 아직까지도 인민의 최소한의 참여(배심제)도 허용하지 않고 있는 철저히 '임명'된 자들로 이루어진 조직이다. 헌법재판소 역시 억압적 국가기구에 불과하거늘 그 위상 강화는 결국 민중에 의한 해법이 봉쇄되고 사법에 의한 위로부터의 심판이 강화되는 것은 폭력적 장면이다.

정치의 위기에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력은 구조적 위기를 구원할 수 없고 동시에 기존의 형태로서 정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 노무현의 불안정한 반민중적 개혁은 지속될 것이며 외적으로 격렬한 상태의 의회 내부의 갈등은 반복될 것이다. 실상 양당의 태생이 근본적으로 모두 보수-반공주의이자 (한민당, 공화당) 친미파일 뿐인데다가 그 차이는 미디어와 NGO 및 지식인 집단을 활용한 스타일의 정치에 의존할 정도로 빈약하다. 의회 내부의 갈등은 결과적으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피지배계급의 의제를 압도하는 역할을 하게 될 뿐이다. 결국 신자유주의의 정치의 위기란 피할 수 없는 구조적 상시적인 위기에 대응하여 (안정적인 지지를 획득하는 것은 포기한 채) 우선 이를 지배세력간의 무능/교체를 통하여 책임을 전가하는 한편 정책의제들의 끊임없는 생산 동원함으로서 대중의 열망을 사안별로 쟁점들을 분할하거나 배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간의 갈등을 기존의 보수/자유-진보의 낡은 관념으로 인식한다면 대중운동이 사태를 적합하게 해결하기 위한 대중의 정치적 공간은 봉쇄된다.
그렇다면 운동진영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실마리를 찾기 위해서는 우선 정치의 위기, 정치의 실종현상이 노무현 정권 이후 반복되어 출현해왔다는 점에서 그동안의 운동 진영의 대응이 한계적이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재의 정세에서 기존 '지배정치의 위기'가 드러난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노동자 민중운동의 활성화, 급진화라는 '기회'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태를 냉정하게 직시한다면 민중운동 진영은 국가기구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자신의 의제를 설정하기보다는 선점(합의)당해오며 지배 정치의 위기에 편입되어왔다. 4대 입법에 대한 운동진영의 대응에서 보여지듯이 운동진영이 자신의 과제를 위로부터 부여받거나 혹은 정당을 통한 입법, 직접적인 교섭 등의 형태로 해결하는 경향은 결과적으로 민중운동 역시 현재의 정치의 위기를 폭로하고 드러내기보다는 공명하는 역할, 관리된 변화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정치로는 대중에게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가진 세력으로 각인될 수 없다. 오히려 민중의 심판. 정치 역시 곤란에 빠진 셈인데 이는 기존의 국가내부의 정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이 지점을 넘어서지 못했기에 그동안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외적으로는 격렬한 형태로 벌어지고 시기시기 구조적 위기가 폭로된 '열린 정세'를 형성하고도 종국에는 국가기구에 의하여 분할-포섭되어 핵심적인 쟁점들이 부차화 되거나 소멸되는 혹은 기존의 정치에 위탁하여 끝나는 일이 다반사였던 것이며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노무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만약 민중운동 진영이 응집력을 상실한 채 계속 국가기구들과의 갈등/교섭을 통해서 민중의 요구가 가지는 고유의 '보편성'을 포기하고 일부의 '특수성'에 그치는 투쟁에 머무르거나 불확실하게 나열(당)한 요구들만 표출한다면 이는 지배정치의 위기를 심화하는데 함께 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배정치 그 자체와 정치의 위기에 대한 전면적인 비판이지 지배정치의 틈새를 메워 줄 수 있는 또 다른 (진보)정치가 아니며, 대중운동을 통한 봉기이지 사법/입법을 통한 문제해결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위기 국면에서의 운동은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대안이 있는 것처럼 선전하면서 지배세력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형태로서는 더 나아갈 수 없다. 관건은 누구도 대답을 갖지 못한 구조적 위기를 그 자체로 발본적으로 드러내어 대중 스스로 운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을 형성하는 봉기적 관점의 정치를 만들어 가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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