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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주간웹소식지


제 267호 | 2005.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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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사이’에서 한반도 평화를 논할 수 있겠는가?

6월 11일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에 부쳐

사회진보연대
급박하게 돌아가는 ‘6자 회담’의 향방

6월 6일 션 매코맥 미국무부 대변인이 북한이 뉴욕에서 가진 미국과의 실무급 접촉을 통해 6자 회담 복귀의사를 표명했다고 밝힘으로써 지난해 6월 이래로 중단되었던 6자 회담이 재개될지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물론 북한이 정확히 언제 복귀할 것인지는 밝히지 않았고 스콧 매클렐런 미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회담에서 미국의 제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종전의 태도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은 미국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장담할 수만은 없다. 게다가 당장 지난 5월 31일 미국은 뉴멕시코주에서 군산기지로 F-117 스텔스기 15대를 이전·완료함으로써 즉각적으로 미국이 북한에 대한 ‘선제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혐의를 불러일으켰다. F-117 스텔스기는 최첨단 전폭기로서 이라크전쟁에서도 공습에 동원되었는데, 이번에 한국에 배치된 전폭기는 무려 전체 F-117의 27%에 이를 만큼 상당한 규모이기 때문이다.
작년 6월 6자 회담에서 미국은 이른바 ‘HEU(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핵폐기(CVID) 원칙’을 완강하게 고수한 바 있다. 무엇보다 이번 ‘뉴욕 접촉’은 오는 11일로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루어진 것인 만큼 노무현 대통령의 방미 기간 동안 과연 어느 정도의 진전이 있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2기 부시 행정부의 출범 이후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의 ‘폭정의 전초기지’ 발언과, 출처가 불분명한 ‘북한 핵실험론’, ‘고위관리’의 ‘대북 제재 검토’ 등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한때 ‘6월 위기설’이 회자되었다. 이제 ‘북핵문제’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뉴욕의 북·미 접촉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한반도 평화를 위해 부시를 만나다?

청와대는 한·미 정상회담에서 “교착상태에 있는 ‘6자 회담 재개방안’을 모색하고 ‘한-미 동맹 강화’에 대한 협의를 위해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세 차례의 6자 회담과 마찬가지로 북핵문제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긴밀하게 공조할 것임을 의미한다. 게다가 6월 중순 일본의 고이즈미 수상과의 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음을 고려한다면 여전히 ‘한·미·일 대북공조’라는 구도는 6자 회담에서 북한을 압박, 내지 견인하는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을 과연 “한반도에서 전쟁만은 안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말에 부응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노무현 정권은 출범 이후 줄곧 변치 않는 ‘한·미 동맹’을 강조하고 있다. 이점에 대해서는 ‘말’ 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즉각 드러났는데, 2003년 미·영 연합군에 의한 이라크 침공과 점령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아가 3,000명에 달하는 한국군까지 파견했다. 게다가 용산 미군기지를 평택 미군기지로 대체하고자 현재 평택에서 농민들을 상대로 기만적이고 강제적인 토지수용을 시도하고 있다.
출범 이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보수적 언론으로부터 ‘자주적’이라고 지탄(?)받는 노무현 정권의 외교정책은 실제로는 전혀 상반된 모습인 것이다. 지난 3월 제기된 이래 내외적으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균형자론’조차 실제로는 한·미 동맹과 양립가능하고 심지어는 “미국의 지도력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상호번영과 안정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며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5월 12일 워싱턴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에서의 홍석현 주미대사의 발언)이나 “동북아의 ‘최후 균형자’는 미국”(6월 1일 PBC 라디오와의 통화에서 천영우 외교통상부 외교정책홍보실장의 발언)이라는 인식 등을 종합해보았을 때, 결국 ‘동북아 균형자론’이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현존하는 동북아시아의 군사안보 구조 안에서의 문제해결, 혹은 세계 최강의 군사대국인 미국의 지원 아래 이루어지는 ‘군비증강’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다름 아니다.
그렇지만 노무현의 이른바 ‘균형자론’은 비단 어제오늘 등장한 것이 아니라 지난 박정희 정권 이후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역대 정권들이 지니고 있던 대북정책의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바로 ‘교차승인’이란 쟁점이다.

현상의 변화를 추구하지 않는 ‘교차승인’의 한계

‘교차승인’이 처음 제기된 것은 베트남전 패배와 경제위기라는 조건 속에서 현실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미국의 유화책으로서 ‘데탕트’가 등장한 1970년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한반도와 관련하여 제기된 것이 ‘교차승인’이었는데, 이는 한반도에 독자적인 두 개의 국가가 있음을 인정하고 주변 국가들이 서로 상대방 진영의 국가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박정희 정권은 1973년 <6·23 선언>에서 “남북한 UN 동시가입”, “비적(非敵)성 공산국가와의 호혜평등에 입각한 문화개방”을 발표하게 된다. 미국의 키신저 국무장관은 1975년 UN 총회에서 이른바 ‘교차승인’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냉전이라는 대결구도 속에서 기존의 한미간 군사동맹, 즉 현존하는 안보구도의 변화 없는 ‘교차승인’이란 쉽게 현실화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1990년대 舊소련 및 동유럽의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급속하게 해체·몰락하면서 ‘교차승인’의 문제는 다시금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동유럽 국가들을 비롯하여 소련 및 중국과의 경제교류가 확대되더니 1989년 헝가리와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시작으로 소련 및 중국과는 각각 1990년과 1992년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이다.(이른바 ‘북방정책’)
그러나 북한은 처음에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획책하는 행위라며 거세게 반발하였다. 게다가 뒤이어 북핵문제가 국제적인 쟁점으로 불거지면서 남한과 미국이 대북 압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미국은 한·소 수교와 북·미 수교를 분리하고, 남한은 UN 단독가입 의사를 천명하는 모습에서 드러나듯 남한과 미국의 ‘교차승인’이란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갈등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변화 없는 교차승인이었고 언제라도 대북 압박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이 제시한 주한미군과 한반도에 배치된 미군 핵전력의 철수 및 남북한 군사력의 상호감축을 골자로 하는 해결방안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무시되었다. 하지만 당시 조건은 북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당시 북한은 정치적 고립과 경제위기라는 일대 위기상황에 내몰린 것이다. 대외무역의 파트너이자 1차 원료를 수입해오던 소련과 동유럽 등 현실사회주의 진영이 몰락·해체되면서 1990-94년 동안 소련·러시아와의 교역은 26억 달러에서 1억 달러 미만으로 급감했고 무역 총액 역시 47억 달러에서 23억 달러로 곤두박질쳤으며 1차 연료인 갈탄/무연탄, 석유확보에 심각한 어려움이 발생한 것이다. 북한은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현실적인 교차승인의 틀 내에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한다.(‘북·일 수교’를 천명한 북한 노동당, 일본 자민당·사회당의 공동성명, 1990.9.28)
이러한 가운데 1991년 체결된 <남북 기본합의서>는 남한과 북한이 서로의 존재를 사실상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한 같은 해 12월,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남북관계는 급진전되었다. 이듬해 김일성 주석은 『워싱턴 타임즈』誌와의 회견에서 북·미 수교에 대해 낙관적으로 전망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에 대한 기존의 강경한 요구(핵문제의 완전한 해결, 테러의 포기)를 재확인하고 1993-94년으로 접어들면서 팀스피리트 훈련의 재개, UN을 통한 대북 제재, 영변 선제공격계획 등을 검토하면서 한반도는 오히려 군사적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게 된다. 북·미 수교는 물론 북·일 수교의 가능성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미완의 교차승인 10년, 한·미 대북 공조 속에서의 햇볕정책

동아시아에서 북한이 사실상 고립되어 있는 가운데 1994년 6월 카터의 방북은 북핵문제로 고조된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국면이 대화국면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그 해 10월 제네바에서는 북·미 고위급 회담을 통해 결국 <제네바 기본 합의서>가 체결되는데 그 주된 내용은 북한이 영변의 원자로를 동결하고 핵비확산조약(NPT)에 규정된 전면사찰을 수용하는 대신 미국은 한국, 일본과 함께 경수로 건설 및 난방용 중유, 4억 달러의 장기채와 지급보증을 약속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네바 기본 합의서>에는 양국간 관계정상화를 명시함으로써 ‘교차승인’이 머지않아 현실화할 것으로 보였다.(2항, “양측은 정치적·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를 추구한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요구조건을 제시하거나 협상 당시와는 다른 태도를 보임으로써 북미관계 정상화에 미온적일 뿐 아니라 제반 합의사항들의 이행을 뒤로 미루는 모습을 보인다(<제네바 기본 합의서>를 둘러싼 미국 내의 논란과 북한 붕괴론 유포). 이러한 미국의 미봉책에 대해 북한은 1998년 미사일 발사실험 등의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미국을 협상의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가운데 1998년 ‘햇볕정책’을 주창하는 김대중 정권이 출범하고 1999년에는 <페리 보고서>를 통해 미국이 접촉정책(일명 ‘포용정책'(engagement policy))을 공식화함으로써 한반도의 정세는 다시 온기류를 타게 된다. <페리 보고서>는 <제네바 기본 합의서>에 규정한 북한의 의무를 이행하고 더불어 미사일의 실험 및 수출 중단을 주문하는 대가로 미국의 대북 경제제재 해제와 양국 외교관계 정상화를 제시하였다. 김대중 정권은 북한이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북·미 수교 및 북·일 수교를 지지할 의사를 분명히 하였다.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은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에 비해 좀더 분명한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큰 틀에서는 미국의 군사적 주도권과 남북교류를 문화·경제적 차원에 국한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한 판본에 다름 아니다(2000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비행기에서 내리는 김대중 대통령의 첫 번째 발언은 주한미군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라!). 이러한 역대 남한 정권들의 대북정책은 미국의 대북정책의 강도와 수위에 따라 동요하며 불안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과 공생하는 노무현 정권의 한반도 전략은 결국 어디로 갈 것인가?

2001년 부시 행정부의 출범과 9·11 테러를 거치며 등장한 미국의 선제공격 독트린과 예방전쟁 전략은 즉각 북·미 간의 제네바 합의를 무력화하기에 충분했다. 2002년 9월 미국의 켈리 국무부 차관보는 북한의 새로운 핵 프로그램에 대한 증거를 제시했고 북한은 10월부터 12월 동안 IAEA 사찰요원을 추방하고, 영변 원자로를 재가동하며 NPT를 탈퇴하는 등 1993년 당시 행동을 반복하였다. 펜타곤은 영변시설에 대한 ‘정밀 타격’(surgical strike) 계획을 부활시켰고 콘돌리사 라이스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맞춤형 봉쇄정책”을 언급하였다. 북한은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에서 이라크, 이란과 더불어 ‘악의 축’(exis of evil)으로 언급되기에 이르렀다. 9.11 이후 미국의 취하고 있는 반확산 정책, 즉 군사적 수단을 동원하여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저지한다는 전략은 이전 핵확산을 방지했던 비핵보유국에 대한 핵공격 금지 원칙을 무너뜨리며 비핵보유국에 대한 안전장치를 무력화하고 있다.
이러한 미국의 호전적인 언급 속에서 남한의 독자적인 북한과의 교류 및 관계개선 사업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남북정상회담 직후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이 예상되었으나 아직까지 실현되지 않고 있으며, 이번 평양에서 열리는 6·15 공동행사가 미국의 스텔스기 배치에 따라 축소된 규모로 치루어지는 모습에서도 미국의 대북정책에 종속된 남북관계의 불안정성과 동요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에서부터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대북정책의 ‘연속성’은 줄곧 군사·안보분야의 현상유지를 추구하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에 대해 어떠한 반대급부를 제공할 것인지가 불명확한 가운데 정세는 당장 전쟁의 발발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으로 치닫지 않더라도 계속 북한을 고립시키고 압박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시간끌기’라는 전략은 북한에게 유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리하게 전개될 것이다. 단기적으로 미국은 북한을 점차 약화시켜 붕괴에 이르게 한다는 시나리오를 결국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남한정권의 전략은 당초 미국을 한반도의 통일 이후에도 동반자 관계로 상정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를 근본적으로 바로잡고 나아가 한반도에서의 평화를 실현한다는 과제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노무현 정권의 ‘균형자론’이 한·미 동맹에 기반하고 있는 한 당분간 한반도의 위기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남한 사회운동의 과제: ‘그들’이 아니라 민중의 힘으로 한반도의 평화를 쟁취하자!

언론에 회자되는 한반도 위기, 그리고 북핵문제에 대한 남한 사회운동의 독자적인 입지는 그리 튼튼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미국과 함께 한반도의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남한 정권의 발상에 의존한다는 것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통해 전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발상 또한 ‘세력 균형론’에 입각한 사고방식으로서 그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할 뿐 아니라 ‘불량국가’를 비난하는 미국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에 미달하는 ‘대쌍논리’일 따름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전세계 민중들의 반핵운동을 통해 증명된 바, 핵무기는 그 어떠한 이유로도 평화에 대한 민중의 권리와 공존할 수 없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를 남한과 미국의 협상 테이블의 의제에 의존할 수는 없다. 지난 시기 강대국들 사이의 무차별적인 핵무기 개발에 맞서 그 위험성을 경고하고 결국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 이후 핵무기 사용을 금기시되었던 데는 일체의 핵무기에 대해 반대하는 반전운동, 평화운동의 성과가 결정적이었다. 따라서 남한의 사회운동 역시 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위로부터’ 주어진 선택지가 아니라 민중 스스로의 발언과 실천을 통해 대안적인 선택지를 만들어야 한다. 오늘날 이라크 파병과 평택 미군기지 이전에서 드러나는 정권의 대미종속적인 군사안보정책에 대한 비판, 선제공격과 예방전쟁의 첫 시험대인 미국의 이라크 침략전쟁과 점령에 대한 반대투쟁이 점점 중요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S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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