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화와 노동

사회진보연대 주간웹소식지


제 51호 | 2000.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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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문제가 끝났다고? -KDI 균형실업률 주장에 대한 반박

편집부

지난 6월 17일, 종묘공원에서 열린 '장기실업자를 위한 실업대책 수립촉구와 공공근로사업 축소반대를 위한 전국결의대회'에는 학생이나 사회단체의 참여가 거의 없었음에도 2000여명의 실업노동자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대규모 실업자 집회였다. IMF초기의 대량실업 사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못했던 실업노동자들이 경제회복기라는 지금에서 이렇게 대규모 전국집회를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직접적으로는 총선을 겨냥하여 공공근로 예산의 90% 가량을 상반기에 선심쓰듯 써버리고, 3/4분기에 와서는 예산을 이유로 공공근로 인원을 대폭 줄여버린 김대중정권의 치졸한 정책 집행이 도화선이 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정부가 위기극복을 위해 추진해온 구조조정과 긴축재정의 피해를 집중적으로 받으면서도 묵묵히 견뎌온 결과가 겨우 이런 것이냐는 쌓여 온 불만과 불신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사치품 소비가 급증하고, 물밀듯이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는 요즘, 노동시장에서 여전히 일거리는 가뭄에 콩나듯하고, 정부는 공공근로예산을 비롯한 실업예산을 반으로 줄여버려 실업노동자들은 그나마 근근히 먹고 살 방도조차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지난주에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는 3일 연속 '공공근로추경예산 삭감 반대' 집회가 있었다. 집회참석을 위해 대전에서 올라 온 한 실업노동자는 "누구는 공공근로를 하고 싶어서 하는가, 도대체 먹고 살 길이 없다"며 울분을 토했다. 이래저래 비인간적인 처우를 받는 공공근로이지만 그것이라도 없으면 도저히 다른 일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지난 7월 13일, 한국개발연구원(KDI) 유경준 박사는 "공공근로사업등 한시적 실업대책 덕분에 실제 실업률이 균형실업률을 밑돌고 있다"고 하면서 "공공근로사업 . 인턴제도 등으로 실제 실업률을 더 끌어내릴 경우 노동시장을 왜곡해 임금상승과 물가상승 폭이 훨씬 더 커지고, 이는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방해한다"고 주장했다. 다행히 작은 박스기사로 보도되었기 망정이지 눈에 띄게 보도되었다면 전국 수십만의 실업노동자들이 여의도가 아닌 한국개발연구원으로 달려갔을 만큼 현실을 무시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은 순전히 연구실 안에서 수학적으로 계산되는 결과에만 의존한 것이다. 임금과 물가가 실업률에 반비례한다는 필립스 곡선에 기초했다는 균형실업률 공식은, 현재 3.8% 실업자에 잡히지 않는 20여만명의 실망실업자(구직을 포기한 실업노동자)와 사실상의 실업상태에 놓여 한달에 10여일 남짓 일용노동에 종사하는 70여만명의 단시간 노동자, 그리고 700만명에 육박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단순히 통계상의 실업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규직 노동자들과 동일한 존재로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그의 주장은 적당한 선(?)의 실업자군이 존재해야만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물가상승을 낮출 수 있다는, 오로지 경제 수치를 위해 살아 있는 인간의 삶을 희생해야 한다는 경제성장주의자들의 논리인 것이다. 과연 한국의 노동자들 중에 자신과 가족이 인간다운 생존을 누릴 만큼 임금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경제활동인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최저생계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하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서울대 시설관리 노동자들처럼 하루 12시간씩 일하고 한달 겨우 40-50만원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기는커녕, 실업자들의 존재를 이 비인간적인 임금과 노동조건을 유지 존속시키는 기반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 정권과 자본과 경제성장주의자들의 논리인 것이다.
현재의 물가상승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누구인지는 세살 먹은 아이도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수백만원짜리 양주가 세관에 그득히 쌓여있고, 올 여름 해외여행은 비행기표가 매진상태에 이를 정도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실업자들이 공공근로.인턴제로 월 40-50만원 월급받아가는 것은 이들 부유층들의 과소비에 비하면 한강에 오줌 한자락 갈기는 정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최소한의 여유활동조차 가능하지 않은 것이 공공근로 노동자의 삶이다.
KDI의 이같은 주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내놓는 "비정규직 근로자의 증가는 세계적 추세이자 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불가피한 현상"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경제성장을 빌미로 노동자 민중들의 삶을 수탈해놓고서 그것이 마치 보편적.객관적 진리인양 복잡한 경제논리과 공식으로 치장하고 있는 것이다. 구조조정이 국민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재벌들의 자산이 불어나고 있을 때 구조조정의 고통을 전담한 민중들의 빚더미는 늘어나고 있었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사회보장제도가 거의 없는 한국사회에서 실업이란 단순히 일자리 없음을 넘어서 한 개인과 그 가족들의 생존 자체를 위협함과 동시에 세습적인 빈곤의 주된 원인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실업과 비정규직의 양산이 신자유주의 사회재편 즉 노동의 유연화를 통해 이윤을 계속 늘리려는 자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저질러 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실업과 비정규직의 증가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본에 의해 의도된 것에 다름아닌 것이다.

실업의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실업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위선적 주장은 실업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과 위험이 사라졌기를 바라는 '자본의 바램'일 뿐인 것이다. 실업의 문제는 증폭하고 있는 불안정 노동의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제 실업노동자와 파견·용역노동자, 임시·계약직 노동자, 위탁계약직 노동자 등 극도의 불안정한 노동조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투쟁으로 일어서고 있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동자들의 몸부림이 서서히, 그러나 거대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실업, 비정규직의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한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핵심적 과제로 부각되었다. 실업과 비정규직의 문제는 그것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제한하는 정책적 문제가 아니라 반드시 없애고 폐절시켜야 하는 사회진보의 장애물인 것이다. 실업이 끝났다고? 비정규직은 대세라고? 아니다. 이제 비로소 실업노동자들의 운동이 시작되고,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 불붙었을 뿐이다. 마침내 들불이 되어 세상을 뒤엎을 날을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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