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2호 | 2007.11.20
신자유주의 부패 커넥션을 타격하자
삼성 비자금 정국과 사회운동의 올바른 방향
삼성, 부패한 왕의 귀환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불거진 삼성그룹의 불법 비자금 조성 및 로비 의혹 수사를 위한 특검법이 발의되고, 여론을 의식한 검찰도 서둘러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겠다고 나섰다. 현재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2005년 말 ‘X파일’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삼성이라는 주인공, 부패비리로 얼룩진 정경유착의 폭로와 민주노동당과 일부 시민단체가 중심이 된 특검제 도입 요구, 재계, 언론, 법조계의 반발과 정치권의 물타기라는 시놉시스... 결국 2005년 X파일 정국은 이건희의 8천억 원 사회헌납 약속으로 유야무야 되었다. 과연 엔딩마저 반복될 것인가?
이번 정국의 잠재적 폭발력은 2005년 이상이다. 삼성 고위직 출신인 내부고발자의 신빙성 있는 증거에 청와대 전 비서관의 폭로까지 가세하며 ‘의혹’이 ‘사실’임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들도 마냥 ‘모르쇠’로 일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잠재적 폭발력만으로 정‧경‧관을 아우르는 두터운 지배세력의 연합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정치권들은 대선 득표를 위해 이번 정국을 타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활용하려 할 뿐 적당한 수준에서 문제를 봉합하고 삼성을 살리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며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지리한 공방 속에 한국경제에서 삼성이 차지하고 있는 막대한 비중을 내세운 ‘삼성 살리기’ 현실론이 힘을 얻을 것이다.
반부패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삼성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행보는 ‘누가 더 부패한가?’를 중심으로 한 정치공방이 주를 이루어지고 있다. 범여권이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이나 이회창 후보의 차떼기 전력을 문제삼으며 반부패연대로 지지율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은 청와대의 당선축하금 수수 의혹을 제기하며 범여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부정부패 파헤쳐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되겠다”며 유일한 반부패 세력을 자임하고 나서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쟁점을 통해 친일/수구보수와 개혁세력을, 비정규직 쟁점을 통해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부당 대립시켰다.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은 민주주의 쟁점을 전도하며 김대중 정권 5년으로 이미 파탄난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부패세력 vs 반부패세력’이라는 식의 규정은 이러한 부당대립의 효과를 그대로 답습한다.
‘부패세력 vs 반부패세력’이라는 대립은 삼성 문제를 불법 비자금의 조성과 정․관에 대한 뇌물수수의 문제로 축소시킨다. 오늘날 삼성과 관련된 문제는 ‘부패’라는 쟁점을 이미 초과한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문제나 분식회계, 이후 경영권 승계의 완성과 지주회사로의 전환 시나리오는 (다른 기업들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남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낱낱이 드러낸다. 무자비한 노동탄압과 주식 가치 극대화를 바탕으로 한 엄청난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지원 받은 구조조정 자금을 빼돌리거나 주가조작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사기 행각이 일반화되고, 신종 투기사업의 사업자 선정 이권을 둘러싼 로비와 뇌물 공여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정‧관계의 고위급 인사들이 결탁하여 비리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정치자금을 모으고, 이렇게 형성된 유착관계는 또 다른 이권에 개입하여 비리행각을 벌이는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반복되는 자본과 정권의 부패비리 커넥션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적극적인 추진 속에 부패의 사슬이 정‧경‧관의 공생관계로 구조화되어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특정 세력의 도덕성을 꼬집어 지지율 몇 % 올리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구조화된 부패/비리를 폭로하고 대중의 분노를 조직하는 것이다.
재벌개혁론의 반민중성
현 정세에서의 사회운동의 대응은 불법로비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시작으로 삼성이라는 재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황제식 경영과 족벌 체제를 해체하는 이른바 ‘재벌개혁’은 민중의 요구가 아니다. 애초 정경유착에 대한 고발과 재벌해체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1980년대 폭압적인 파쇼 정권에 대한 비판과 민중을 수탈하는 독점자본의 권력을 해체함으로써 남한 자본주의 구조를 변혁한다는 맥락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이러한 변혁적 맥락은 사장되고, 재벌개혁은 주식시장에서의 투명성과 신용도를 제고하기 위한 부정부패 근절과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중심부 금융시장에서 요구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기업을 만들려는 신자유주의적 의제로 탈바꿈되었다.
현재 삼성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고 있는 민주노동당과 참여연대 등은 각기 조금 다른 재벌개혁론을 가지고 있지만 둘 다 재벌의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시각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참여연대의 부집행위원장 홍성태 교수는 최근 프레시안 기사에서 현재의 투쟁 목표가 “전근대적 총수체제를 폐지해서 전근대적인 삼성 재벌이 세계적인 삼성그룹으로 진정 거듭나는데” 초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심상정 의원이 제시한 단계적 재벌개혁론이 유력한 대안으로 회자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는 순환출자를 금지하여 재벌을 개별 기업으로 해체한 후 최종적으로 국민연금기금으로 대기업 지분을 확보하여 공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 삼성의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는 어떤 식으로든 변할 수밖에 없다. 삼성이 다양한 형태의 지주회사로의 전환 시나리오들을 검토하면서 유리한 제도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백방으로 기울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만약 민주노동당의 주장대로 순환출자가 당장 금지된다면 비용이 들기는 하겠지만 삼성은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가속화 할 것이 분명하다. 지주회사로의 전환은 삼성이 보다 주식가치의 극대화, 주주이윤의 극대화에 적합한 기업의 형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윤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고 심지어 기존 주주들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LG나 CJ의 경우 지주회사 전환 이후 오히려 최대주주의 지배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더구나 심상정 의원의 주장처럼 이러한 조치가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한 과도기적 조치일 수도 없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소유의 사회화’란 단지 기업의 소유 주체를 확대하거나 변경하자는 것일 뿐 소유관계가 생산관계에 행사하고 있는 배타적 권력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사회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건희가 주식을 소유하건, 노동자가 주식을 소유하건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주식을 소유하건 게임의 룰은 바뀌지 않는다.
특검이 떡검을 넘어설 수 있는가
민주노동당은 대통합민주신당, 창조한국당과 함께 14일 특검법을 발의했다. 또한 한국진보연대,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은 ‘삼성불법비자금 진상규명을 위한 종교인·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구성하여 ‘특검제 도입’과 ‘삼성 개혁’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만도 벌써 4번째 제기된 특검은 마치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양 권력형 비리, 정경 유착의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마다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특검’이라는 사법적 해결방식이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며, 운동 진영이 취할 수단인가? 민주노동당은 ‘X-파일’ 때와는 달리 삼성 고위직 출신의 내부 고발이며, 엄청난 양의 증거가 합법적으로 취득되었기에 특검을 통해 실체를 규명하고 국민의 행동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진보정치 347호). 그러나 문제는 특검제 자체다. 이번 정기국회 회기인 23일 안에 통과조차 불투명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지배계급이 총체적으로 연루된 부패비리를 사법적 수단을 통해 규명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매우 순진한 생각에 불과하다. 국가기관은 현재의 지배-착취구조를 전제한 상태에서 법 논리 내에서의 ‘일탈’을 규제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구조화된 부패 사슬과 총체적인 모순은 내버려 둔 채,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개별 기업과 특정 세력의 ‘불법 행위’로 문제를 축소시킨다. 이런 식의 전문가적이고 사법적인 해결방식은 사회적 갈등과 위기의 원인을 설명하고 새로운 정치이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기업과 특정 세력이라는 ‘공공의 적’을 발명/악마화하면서 문제에 대한 발본적인 사고 자체를 차단한다. 이러한 인민주의 통치 방식은 결국 정치의 공간에서 민중들의 능동적 개입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면서 정서적 대리만족에 머물게 해 지배세력에 종속된 수동적 존재로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차례 비판한 바 있다.
반부패연대가 아니라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삼성과 BBK 문제가 대선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총체적인 비리와 반민중적 속성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의혹들이 지배세력의 이전투구의 도구로 활용될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에 파열구를 내는 대중투쟁을 촉발시킬 것인가, 우리는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우선 각종 불법적 로비로 연결되어 있는 삼성과 정부, 정치권의 비리 커넥션에 대한 타격에서 돈 거래의 결과가 결국 대기업과 자본소유자들의 이윤 추구만을 위한 민생파탄을 불러 왔을 뿐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지배 연합에 대한 타격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부패vs반부패의 구도를 신자유주의vs반신자유주의의 구도로 전환시켜야 한다.
황제식 경영과 재벌의 지배구조를 해체하는 이른바 ‘재벌개혁’ 주장은 결코 민중적 요구가 아니다. 금융화를 통한 자본소유자들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 대기업들의 행태를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민중의 입장에서는 소유의 비합리성이 아니라 소유의 독재가 문제인 것이다.
또한 사회운동은 특검법 도입을 위한 의회 내에서의 공방을 중심으로 지배세력을 압박하는 것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반민중적 재벌타도를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삼성의 노조건설 탄압과 극심한 노동착취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해온 노동자들이 주요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투쟁을 더욱 활성화 시키고 연대를 확대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다. 또한 12월 1일로 예정되어 있는 2차 범국민 행동의 날을 비롯하여, 민중생존권을 파탄 내 온 타락한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에 대한 준엄한 민중의 심판을 내리는 완강한 투쟁을 시급히 조직해야 한다.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선언으로 불거진 삼성그룹의 불법 비자금 조성 및 로비 의혹 수사를 위한 특검법이 발의되고, 여론을 의식한 검찰도 서둘러 특별수사본부를 구성해 강도 높은 수사를 벌이겠다고 나섰다. 현재의 상황은 여러 면에서 2005년 말 ‘X파일’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삼성이라는 주인공, 부패비리로 얼룩진 정경유착의 폭로와 민주노동당과 일부 시민단체가 중심이 된 특검제 도입 요구, 재계, 언론, 법조계의 반발과 정치권의 물타기라는 시놉시스... 결국 2005년 X파일 정국은 이건희의 8천억 원 사회헌납 약속으로 유야무야 되었다. 과연 엔딩마저 반복될 것인가?
이번 정국의 잠재적 폭발력은 2005년 이상이다. 삼성 고위직 출신인 내부고발자의 신빙성 있는 증거에 청와대 전 비서관의 폭로까지 가세하며 ‘의혹’이 ‘사실’임이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들도 마냥 ‘모르쇠’로 일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러한 잠재적 폭발력만으로 정‧경‧관을 아우르는 두터운 지배세력의 연합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정치권들은 대선 득표를 위해 이번 정국을 타세력에 대한 공격으로 활용하려 할 뿐 적당한 수준에서 문제를 봉합하고 삼성을 살리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며 법의 테두리 내에서 이루어지는 지리한 공방 속에 한국경제에서 삼성이 차지하고 있는 막대한 비중을 내세운 ‘삼성 살리기’ 현실론이 힘을 얻을 것이다.
반부패 구도를 넘어서야 한다
삼성 문제를 둘러싼 정치권의 행보는 ‘누가 더 부패한가?’를 중심으로 한 정치공방이 주를 이루어지고 있다. 범여권이 이명박 후보의 BBK 의혹이나 이회창 후보의 차떼기 전력을 문제삼으며 반부패연대로 지지율 뒤집기를 시도하고 있는 반면 한나라당은 청와대의 당선축하금 수수 의혹을 제기하며 범여권의 발목을 잡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부정부패 파헤쳐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되겠다”며 유일한 반부패 세력을 자임하고 나서고 있다.
노무현 정권은 ‘과거사 청산’이라는 쟁점을 통해 친일/수구보수와 개혁세력을, 비정규직 쟁점을 통해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부당 대립시켰다. 이를 통해 신자유주의 개혁세력은 민주주의 쟁점을 전도하며 김대중 정권 5년으로 이미 파탄난 신자유주의 개혁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해왔다. ‘부패세력 vs 반부패세력’이라는 식의 규정은 이러한 부당대립의 효과를 그대로 답습한다.
‘부패세력 vs 반부패세력’이라는 대립은 삼성 문제를 불법 비자금의 조성과 정․관에 대한 뇌물수수의 문제로 축소시킨다. 오늘날 삼성과 관련된 문제는 ‘부패’라는 쟁점을 이미 초과한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문제나 분식회계, 이후 경영권 승계의 완성과 지주회사로의 전환 시나리오는 (다른 기업들과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남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낱낱이 드러낸다. 무자비한 노동탄압과 주식 가치 극대화를 바탕으로 한 엄청난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신자유주의 금융화가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지원 받은 구조조정 자금을 빼돌리거나 주가조작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사기 행각이 일반화되고, 신종 투기사업의 사업자 선정 이권을 둘러싼 로비와 뇌물 공여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정‧관계의 고위급 인사들이 결탁하여 비리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정치자금을 모으고, 이렇게 형성된 유착관계는 또 다른 이권에 개입하여 비리행각을 벌이는 토대가 되었다. 오늘날 반복되는 자본과 정권의 부패비리 커넥션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적극적인 추진 속에 부패의 사슬이 정‧경‧관의 공생관계로 구조화되어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특정 세력의 도덕성을 꼬집어 지지율 몇 % 올리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구조화된 부패/비리를 폭로하고 대중의 분노를 조직하는 것이다.
재벌개혁론의 반민중성
현 정세에서의 사회운동의 대응은 불법로비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시작으로 삼성이라는 재벌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부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황제식 경영과 족벌 체제를 해체하는 이른바 ‘재벌개혁’은 민중의 요구가 아니다. 애초 정경유착에 대한 고발과 재벌해체에 대한 민중의 요구는 1980년대 폭압적인 파쇼 정권에 대한 비판과 민중을 수탈하는 독점자본의 권력을 해체함으로써 남한 자본주의 구조를 변혁한다는 맥락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며 이러한 변혁적 맥락은 사장되고, 재벌개혁은 주식시장에서의 투명성과 신용도를 제고하기 위한 부정부패 근절과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중심부 금융시장에서 요구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기업을 만들려는 신자유주의적 의제로 탈바꿈되었다.
현재 삼성에 대한 공격을 주도하고 있는 민주노동당과 참여연대 등은 각기 조금 다른 재벌개혁론을 가지고 있지만 둘 다 재벌의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시각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참여연대의 부집행위원장 홍성태 교수는 최근 프레시안 기사에서 현재의 투쟁 목표가 “전근대적 총수체제를 폐지해서 전근대적인 삼성 재벌이 세계적인 삼성그룹으로 진정 거듭나는데” 초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한편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심상정 의원이 제시한 단계적 재벌개혁론이 유력한 대안으로 회자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는 순환출자를 금지하여 재벌을 개별 기업으로 해체한 후 최종적으로 국민연금기금으로 대기업 지분을 확보하여 공적 개입을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미 삼성의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로 이어지는 순환출자구조는 어떤 식으로든 변할 수밖에 없다. 삼성이 다양한 형태의 지주회사로의 전환 시나리오들을 검토하면서 유리한 제도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백방으로 기울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만약 민주노동당의 주장대로 순환출자가 당장 금지된다면 비용이 들기는 하겠지만 삼성은 지주회사로의 전환을 가속화 할 것이 분명하다. 지주회사로의 전환은 삼성이 보다 주식가치의 극대화, 주주이윤의 극대화에 적합한 기업의 형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이윤의 극대화를 목표로 하는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는 더욱 심각해 질 것이고 심지어 기존 주주들의 지배력은 더욱 강화될 수도 있다.(LG나 CJ의 경우 지주회사 전환 이후 오히려 최대주주의 지배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더구나 심상정 의원의 주장처럼 이러한 조치가 자본주의를 변혁하기 위한 과도기적 조치일 수도 없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소유의 사회화’란 단지 기업의 소유 주체를 확대하거나 변경하자는 것일 뿐 소유관계가 생산관계에 행사하고 있는 배타적 권력을 문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적 ‘사회화’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건희가 주식을 소유하건, 노동자가 주식을 소유하건 국민연금관리공단이 주식을 소유하건 게임의 룰은 바뀌지 않는다.
특검이 떡검을 넘어설 수 있는가
민주노동당은 대통합민주신당, 창조한국당과 함께 14일 특검법을 발의했다. 또한 한국진보연대,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은 ‘삼성불법비자금 진상규명을 위한 종교인·시민사회단체 연석회의’를 구성하여 ‘특검제 도입’과 ‘삼성 개혁’등을 주장하고 나섰다. 노무현 정권 들어서만도 벌써 4번째 제기된 특검은 마치 전가의 보도라도 되는 양 권력형 비리, 정경 유착의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마다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특검’이라는 사법적 해결방식이 과연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며, 운동 진영이 취할 수단인가? 민주노동당은 ‘X-파일’ 때와는 달리 삼성 고위직 출신의 내부 고발이며, 엄청난 양의 증거가 합법적으로 취득되었기에 특검을 통해 실체를 규명하고 국민의 행동을 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진보정치 347호). 그러나 문제는 특검제 자체다. 이번 정기국회 회기인 23일 안에 통과조차 불투명하다는 사실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지배계급이 총체적으로 연루된 부패비리를 사법적 수단을 통해 규명하고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은 매우 순진한 생각에 불과하다. 국가기관은 현재의 지배-착취구조를 전제한 상태에서 법 논리 내에서의 ‘일탈’을 규제할 뿐이다. 그리고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화의 구조화된 부패 사슬과 총체적인 모순은 내버려 둔 채,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개별 기업과 특정 세력의 ‘불법 행위’로 문제를 축소시킨다. 이런 식의 전문가적이고 사법적인 해결방식은 사회적 갈등과 위기의 원인을 설명하고 새로운 정치이념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패한 기업과 특정 세력이라는 ‘공공의 적’을 발명/악마화하면서 문제에 대한 발본적인 사고 자체를 차단한다. 이러한 인민주의 통치 방식은 결국 정치의 공간에서 민중들의 능동적 개입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면서 정서적 대리만족에 머물게 해 지배세력에 종속된 수동적 존재로 만들 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러 차례 비판한 바 있다.
반부패연대가 아니라 반신자유주의 전선으로!
삼성과 BBK 문제가 대선 정국을 뒤흔들고 있다. 신자유주의 지배세력의 총체적인 비리와 반민중적 속성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는 의혹들이 지배세력의 이전투구의 도구로 활용될 것인가 아니면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에 파열구를 내는 대중투쟁을 촉발시킬 것인가, 우리는 그 갈림길에 서 있다.
우선 각종 불법적 로비로 연결되어 있는 삼성과 정부, 정치권의 비리 커넥션에 대한 타격에서 돈 거래의 결과가 결국 대기업과 자본소유자들의 이윤 추구만을 위한 민생파탄을 불러 왔을 뿐이라는 점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지배 연합에 대한 타격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통해 부패vs반부패의 구도를 신자유주의vs반신자유주의의 구도로 전환시켜야 한다.
황제식 경영과 재벌의 지배구조를 해체하는 이른바 ‘재벌개혁’ 주장은 결코 민중적 요구가 아니다. 금융화를 통한 자본소유자들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 대기업들의 행태를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민중의 입장에서는 소유의 비합리성이 아니라 소유의 독재가 문제인 것이다.
또한 사회운동은 특검법 도입을 위한 의회 내에서의 공방을 중심으로 지배세력을 압박하는 것에만 집중해서는 안 된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반민중적 재벌타도를 요구하는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을 만들어야 한다. 삼성의 노조건설 탄압과 극심한 노동착취에 맞서 끈질기게 투쟁해온 노동자들이 주요한 주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의 투쟁을 더욱 활성화 시키고 연대를 확대하는 것이 주요한 과제다. 또한 12월 1일로 예정되어 있는 2차 범국민 행동의 날을 비롯하여, 민중생존권을 파탄 내 온 타락한 신자유주의 지배연합에 대한 준엄한 민중의 심판을 내리는 완강한 투쟁을 시급히 조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