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7호 | 2008.04.22
인민주의 정치의 휘발성과 뉴타운의 폭발력
진보정당의 선거정치와 지역대중운동의 현실
4.9 총선으로 노무현과 386 판본의 ‘진보’가 보여준 무능력과 기만은 최종적인 심판을 받았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152석 대 한나라당의 121석의 비율은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 153석 대 통합민주당 81석으로 반전되었다. 그러나 의석수로 승리자와 패배자를 나누는 것만으로 이번 선거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겠는가? 이번 총선에서 투표를 하지 않은 유권자가 50%선을 돌파했다. 이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대개 정치의 ‘휘발성’은 선거과정에서 선거초기에 지지자들이 반대자로 돌아서고, 반대자들이 지지자로 돌아서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곧 정당 또는 후보자에 대한 지지가 쉽게 변한다는 것이다. 정당의 특정한 이념ㆍ노선에 대한 유권자의 안정적인 지지 성향이 해체되거나, 정당들간의 이념ㆍ노선의 차이가 소멸한다면 이러한 휘발성이 당연히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낮은 투표율, 매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시소놀이와 같은 정당지지율의 급등과 급락과 같은 현상은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정치의 휘발성, 곧 불안정성이 지극히 높아지고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현상은 일시적인 예외가 아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지역적 불균형, 기존 계급구성의 해체와 변화)을 반영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반복될 개연성이 높다.
반면 민중운동이 인민주의 정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 재편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대중운동의 토대가 극히 취약하다. 게다가 현재와 같은 양상의 민중운동의 정치적 분할은 새로운 운동경로를 창출하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운동 ‘자원’을 나누기 위한 경쟁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사회경제적 위기와 인민주의 정치토양, 민중운동의 경쟁과 축소재생산의 위기는 우리에게 정말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선거기법의 두 가지 전술
세계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는 미국은 새로운 ‘선거기법’의 창출에서도 단연 첨단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들의 선거책략, 여론조작수법은 선거캠프에 모이는 한국의 엘리트들 즉 정치학자, 여론조사전문가, 다종다양한 기술관료들을 통해 한국 정치에 직수입된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미국 정치에서 대별되는 두 가지 선거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2년 공화당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은 클린턴의 선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삼각형 만들기’다. 즉 삼각형 위의 정점에서 아래 밑변의 양 꼭지점(좌우)의 장점만 뽑아서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1980년대 미국 경제의 장기불황으로 인해 전통적인 정당(특히 민주당) 지지층이 해체되었고, 이는 레이건-부시의 격앙된 신보수주의의 장기집권에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이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을 향해, 극우-극좌를 배제하는 새로운 중도주의를 통해 안정된 정치환경과 경제성장을 약속함으로써 불가능해 보였던 선거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제3의 길’이라는 담론을 누구보다도 먼저 제시했던 클린턴이 실제로 새로운 정책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창조한 것이 있다면 새로운 말이고, 이러한 말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클린턴은 모든 일에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정치기법을 개발했다. 이는 그가 여론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에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선택한 정책 프로그램을 여론조사결과에 부합하도록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제 이러한 여론조작술은 미국정치에서 일반화되었다. 하나의 정책적 개념이 여론주도집단에게 잘 ‘판매’되지 않는다면 정책변화 없이도 다른 용어를 채택하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사회보장 사유화(민영화)’나 ‘핵무기 사용권’이 인기가 없으면 ‘개인계정’이나 ‘헌법적 선택권’이란 말을 쓰면 만사형통이다. 최근 부시는 부유층의 ‘상속세’나 ‘세금삭감’ 대신에 ‘사망세’나 ‘세금구제’라는 말로 정책 지지도를 끌어올렸다. (이것이 요즘 언론에서 부쩍 자주 언급하는 ‘정치의 프레임’이다.) 보통 정치학자들은 여론이 투입물이고 정책이 산출물이라고 가정하지만, 실제 정치과정에서는 그 정반대가 진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허구적인 중도주의가 전부는 아니었다. 2004년 총선에서 부시의 공화당이 보여준 격렬한 선거기법은 ‘탈동원화와 네거티브 전략’이었다. 전통적인 선거 전략은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유일한 방법이 후보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온건하게 제시해서 부동층의 환심을 사는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이러한 외부적 확대보다는 내부적 자기강화를 선택했다. 대다수의 대중이 특정 정당에 대한 안정적 지지층이 아닌 것이 현실인 마당에야 공화당을 지지할 가망성이 높은 특정집단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서는 더욱 명료한, 즉 극단적인 정치메시지를 전달하고(낙태 반대, 동성애 반대 등등), 나머지 집단에서 대해서는 탈동원화 전략을 적극 활용한다는 것이다. 즉 비방광고(네거티브 캠페인)나 추문을 통해 대중의 정치적 혐오를 확산시켜서 유권자의 선거 참여를 일반적으로 억제하거나, 상대방 후보를 선호할 것 같은 집단의 투표 참여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기법들은 현실 선거에서 종종 혼합되어 나타나며, 민주당과 공화당이 모두 이를 상황과 필요에 따라 활용하므로 지속적인 진동이 나타난다. (현재 미국대선에 공화당과 민주당 양자는 모두 허구적 중도주의로 다시 회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자 모두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클린턴 식의 정치기법뿐만 아니라, 공화당 식의 탈동원화/네거티브 전략 역시 강력한 여론조작기법을 동원해야 한다. 따라서 정당은 기층에서 충원되는 선거운동원이 아니라, 정치조작전문가들이나 기술관료 지배가 강화된다. 하지만 허구적 중도주의든 극단적 대결주의든 대중이 처해있는 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조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즉 대통령이나 의회 여당이 바뀐다고 사회경제적 위기가 극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가가 경제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치에 대한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위기와 여론조작 정치의 심화 속에서 정당의 대중적 토대는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그럴수록 더욱 더 강력한 여론조작에 의존해야 하는 악순환이 성립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부르주아 정당들이 보이는 강점과 그 이면의 결정적 약점이다. 부르주아 정당들은 점점 더 사상누각을 쌓고 있다.
한국 인민주의 정치의 승리자와 패배자
한국의 한나라당, 통합민주당은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과 정치경제적 조건이나 역사적 배경이 분명히 다르지만 여러 측면에서 유비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의 ‘미국화’로 인하여 유비는 그 이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특징적인 선거기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특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통합민주당의 전신인 노무현/열린우리당이 ‘좌파적’ 탈동원화/네거티브 전략을 적극 활용했다면, 현재 이명박/한나라당이 ‘우파적’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과거 노무현/열린우리당이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과거사 문제나 주택․교육 정책 등을 계기로 일종의 ‘문화전쟁’(이념논쟁)을 시도함으로써 386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한나라당 지지층을 ‘기득권=보수=강남’이라는 도식으로 도덕적으로 비난해서 그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억제하고자 했다. 반면 한국사회에서 대량빈곤이 오히려 확대되면서 노정권의 인기가 하락하자 주류언론은 노정권이 ‘소모적인 이념논쟁으로 국력을 낭비한다’는 함포사격을 가했고, 노정권은 거대한 역풍에 직면했다. 성공한 경영인이 이미지로 무장하고 ‘경제를 살리자’는 실용주의를 표방한 한나라당이 ‘우파적’ 중도주의로 기사회생한 것이다. 대선에서 이명박의 승리와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계기로 모든 언론은 앞 다투어 소모적인 이념갈등은 종말을 고했고, 이제야말로 선진국 진입을 위한 중도 실용주의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명박은 1960년대 한일회담 반대투쟁 경력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으나 역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는 그의 중도 실용주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꼭지점으로 적절한 수준에서 활용된다.)
이제 한국사회 부르주아 정단간의 경쟁에서는 정책이 중요한 변수가 아니고 정당간의 이념적 거리가 사실상 무의미하며, 이미지와 여론 조작과 같은 인민주의 정치행태가 지배적이다.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휘발성이 강한 대중조작적 선거기법에 더욱 의존하고 있고, 그들 역시 사상누각을 쌓고 있다. 누가 승리자인지, 패배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정치위기와 뉴타운의 폭발력
현재 각종 선거결과나 일상적인 여론조사 결과는 한국정치의 불안정성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번 선거결과 50% 이하로 떨어진 투표율은 너무나 명백한 증거다. 그것은 대중의 수동적 태도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소극적인 저항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한국사회의 지배정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지지율의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고 있으며, 이는 극히 낮은 투표율의 이면이다. 이와 더불어 이번 선거는 한국사회의 현실적 변화를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적 양상이 나타났다.
영호남은 여전히 강력한 지역주의의 보루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 성격은 크게 바뀌고 있다. 한때는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를 각각 보수적 지역주의와 저항적 지역주의로 분류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현재는 공통점이 더 많다. 즉 수도권의 거대도시화와 부의 집중에 대비된 상대적인 지역적 소외감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영남지역에서 박근혜의 무시무시한 괴력이 다시금 발휘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의 대중들에게 뚜렷한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나타난 박근혜 지지는 박근혜가 새로운 발전주의의 전망의 제시하지 못하고 과거의 전통 반공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생명력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영호남에서 뚜렷이 나타난 투표율 하락의 의미도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한국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점증은 이러한 지역적 불균형의 심화와 더불어 도시 내부의 변화와 조응한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번 총선을 두고 이른바 ‘아파트계층’이 서울지역의 투표결과를 결정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즉 선거구별로 아파트 밀집도가 높고, 특히 최근 아파트 가격이 많이 오른 지역일수록 한나라당 지지도가 비례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이다. 이미 강남, 송파, 서초지역이 한나라당의 초강세 우세지역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다가 강북지역과 신도시가 이러한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서울과 수도권 남부가 한나라당의 철옹성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파트계층’은 몇 개의 피라미드층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전문직 고소득자(전통적인 전문직과 신흥 골드칼라), 거액의 은행융자를 끼고 주택을 구입한 중하층 화이트칼라층, 연립주택이나 빌라 소유자 등. 피라미드의 상층부는 좀 더 높은 부동산 투자 수익을 기대하면서 부동산 관련 규제완화나 세금인하를 적극 지지하면서 상대적인 여유를 누릴 것다. 거액의 융자를 갚아야 하는 아파트소유자들은 주택가격이나 시장금리가 가계의 생사가 걸린 필사적인 문제일 것이다. 연립이나 다가구 주택 소유자들은 뉴타운이 추진되면 ‘지분쪼개기’를 통해 큰 소득을 얻으리라 기대할 것이다. 그들 사이에 처지의 차이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대박을 꿈구며 위를 보고 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부동산 투기의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현재 서울의 자가주택 소유자는 55% 수준이다.) 게다가 일부 무주택자들마저도 장기적 이해관계와 상반되더라도 뉴타운 개발에 따른 단기적 보상금을 노린다거나, 막연한 지역개발 욕구에 따라 ‘묻지마’로 편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도권의 대중심리가 금융화와 이에 조응하는 부동산투기에 포섭되면서 집단적 투기 심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들은 한나라당에 대한 안정적 지지층이라기보다는 부동산 개발ㆍ투기를 보장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층일 것이며, 종국적으로는 정치적 불안정성의 토양으로 기능할 것이다.
또한 한국사회의 자영업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자영업주가 600만 명에 이르며, 무급가족종사자가 150만 명에 이른다. 이는 전체 노동자의 35%이며, 이러한 수치는 미국의 7.6%, 대만의 28.4%보다 훨씬 높다.) 특히 이중에서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와 실업ㆍ반실업의 확산 와중에서 자가고용이나 가족무급노동에 의존하는 영세자영업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예컨대 현재 대형프렌차이즈의 소규모 지점 사장은 일종의 자가고용 노동자가 되고 있다), 이들이 체감경기에 극히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안정적인 정당지지 성향을 지니기보다는 선거시기 부동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도시의 노동자와 빈민은 아파트와 뉴타운개발 과정에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들이 실제로 도시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대형아파트 주변의 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 파편화된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생존과 생활의 불안정성 때문에 오히려 드러나지 않고 조직되거나 집단적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따라서 도시개발의 가장 큰 수혜층만이 집단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나머지는 정치적으로 배제된다. 진보신당의 어느 후보의 증언에 따르면, 지난 3월 강남구민회관에서는 <강남구 공동주택 입주자 협의회>란 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각 당 지역구 후보자들을 불러놓고 “종합부동산세 폐지를 공약하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이들의 응집력이 노동자와 도시빈민(실업)의 목소리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노정권의 기만과 실패는 진보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을 상실케 함으로써 이들을 더욱 위축시켰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지역적 불균형의 심화, 도시의 재편과 같은 변화는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민중운동은 이러한 변화에 조응하여 노동의 불안정, 대량빈곤과 실업에 대응하기 위한 지역적, 대중적 활동이 극히 미비하다. 지역운동단체라고는 민주노총 지역조직이나 농민회, 진보정당, NGO 성향의 시민단체가 전부인 경우가 적지 않다. 진보정당들의 경우도 민주노총 기반으로부터 선거자금 모금이나 운동원 조직에도 허덕이며, 일상적인 지역 대중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운동적 역량이 지극히 취약하다. 이러한 조건은 오히려 정당들이 대중운동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기존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의존에 머물게 한다.
진보정당의 선거정치와 지역대중운동
진보정당에서 선거를 전후한 시점에서 벌어지는 대립의 쟁점은 대개 선거기법, 전략에 집중된다. 앞의 구분 틀을 따르자면 ‘중도파로의 이동을 통한 외적 확대’냐, 아니면 ‘핵심지지층의 동원을 위한 자기강화’냐. 물론 대다수의 경우는 전자의 길을 선택한다. 정당의 규모가 성장하면서 여론접촉면이 확대되고, 여론조작 정치에 대한 적응도를 높이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의회 장악도를 높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핵심지지층의 동원은 기정사실로 간주되거나, 역시 선거기법 상의 문제로 접근된다. 정당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지지층’의 형성을 위한 대중적 조직망의 구축은 오히려 더 많은 돈과 사람이 필요한 비효율적 활동으로 간주되기가 쉽다. 또는 정당역량의 취약성 때문에 합리화된다. 따라서 선거를 중심에 두느냐 대중운동(사회운동)을 중심에 두느냐는 정당의 성격을 규정하는 현실적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은 5개 의석을 바탕으로, 의원단 역량, 정책역량, 대중조직역량 들에서 기존에 비해 크게 위축되기는 하겠으나 지난 시기 의회활동과 유사한 활동 패턴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민주노동당은 이른바 진보대연합을 다시 추진하면서 시민운동 조직, 인사들의 영입을 통해 중도로 이동을 모색 중이다. (이미 지난 시기 권영길 선본은 이러한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사회운동과 괴리된 원내활동이나 언론대응이 동일한 방식의 활동을 채택하는 지배정당들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전략이 될 수 있을 가망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한편 진보신당은 기존 진보신당에 참여하지 않았던 세력들을 포괄하는 정당의 재창당과 지역정당조직 구축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진보신당에 동참했던 일부의 경향은 민주노동당에 ‘남겨두고 온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이를 다시 챙기려는 데 활동의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는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나누기’ 위한 대립이라는 부정적 효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
게다가 현재 민주노총 지역본부 등의 사례를 보면 정파적 대립과 분할구도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한국진보연대 구축과정은 이러한 경향을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그 자체가 분열의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 정당운동의 분할구도가 가속화되면서 지역운동 수준의 분할도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예견되는 ‘복수노조’ 시대라는 객관적 요인이 이러한 분할에서 어떤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물론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들이 이러한 분할을 더욱 악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재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이 진보신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대립과정에서 기층에서의 실질적인 운동이 무기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금융화와 지역개발주의에 대항하는 우리의 이념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실천공간으로서 노동조합운동과 대중운동을 지역적, 전국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과제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있다.
대개 정치의 ‘휘발성’은 선거과정에서 선거초기에 지지자들이 반대자로 돌아서고, 반대자들이 지지자로 돌아서는 경우를 말한다. 이는 곧 정당 또는 후보자에 대한 지지가 쉽게 변한다는 것이다. 정당의 특정한 이념ㆍ노선에 대한 유권자의 안정적인 지지 성향이 해체되거나, 정당들간의 이념ㆍ노선의 차이가 소멸한다면 이러한 휘발성이 당연히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에서 나타난 낮은 투표율, 매 선거 때마다 나타나는 시소놀이와 같은 정당지지율의 급등과 급락과 같은 현상은 장기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정치의 휘발성, 곧 불안정성이 지극히 높아지고 있음을 뜻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현상은 일시적인 예외가 아니다. 이는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지역적 불균형, 기존 계급구성의 해체와 변화)을 반영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반복될 개연성이 높다.
반면 민중운동이 인민주의 정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한국사회 재편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대중운동의 토대가 극히 취약하다. 게다가 현재와 같은 양상의 민중운동의 정치적 분할은 새로운 운동경로를 창출하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운동 ‘자원’을 나누기 위한 경쟁으로 변질될 수도 있다. 사회경제적 위기와 인민주의 정치토양, 민중운동의 경쟁과 축소재생산의 위기는 우리에게 정말로 심각한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현대 선거기법의 두 가지 전술
세계자본주의를 이끌고 있는 미국은 새로운 ‘선거기법’의 창출에서도 단연 첨단의 면모를 보여준다. 그들의 선거책략, 여론조작수법은 선거캠프에 모이는 한국의 엘리트들 즉 정치학자, 여론조사전문가, 다종다양한 기술관료들을 통해 한국 정치에 직수입된다. 따라서 1990년대 이후 미국 정치에서 대별되는 두 가지 선거기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92년 공화당 장기집권에 종지부를 찍은 클린턴의 선거기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삼각형 만들기’다. 즉 삼각형 위의 정점에서 아래 밑변의 양 꼭지점(좌우)의 장점만 뽑아서 활용하면 된다는 것이다. 1980년대 미국 경제의 장기불황으로 인해 전통적인 정당(특히 민주당) 지지층이 해체되었고, 이는 레이건-부시의 격앙된 신보수주의의 장기집권에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러나 클린턴은 이에 신물이 난 유권자들을 향해, 극우-극좌를 배제하는 새로운 중도주의를 통해 안정된 정치환경과 경제성장을 약속함으로써 불가능해 보였던 선거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제3의 길’이라는 담론을 누구보다도 먼저 제시했던 클린턴이 실제로 새로운 정책을 창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창조한 것이 있다면 새로운 말이고, 이러한 말을 만들어내는 방법이었다. 클린턴은 모든 일에 여론조사에 의존하는 정치기법을 개발했다. 이는 그가 여론을 정확히 파악해서 그에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선택한 정책 프로그램을 여론조사결과에 부합하도록 포장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제 이러한 여론조작술은 미국정치에서 일반화되었다. 하나의 정책적 개념이 여론주도집단에게 잘 ‘판매’되지 않는다면 정책변화 없이도 다른 용어를 채택하기만 하면 된다. 예를 들어 ‘사회보장 사유화(민영화)’나 ‘핵무기 사용권’이 인기가 없으면 ‘개인계정’이나 ‘헌법적 선택권’이란 말을 쓰면 만사형통이다. 최근 부시는 부유층의 ‘상속세’나 ‘세금삭감’ 대신에 ‘사망세’나 ‘세금구제’라는 말로 정책 지지도를 끌어올렸다. (이것이 요즘 언론에서 부쩍 자주 언급하는 ‘정치의 프레임’이다.) 보통 정치학자들은 여론이 투입물이고 정책이 산출물이라고 가정하지만, 실제 정치과정에서는 그 정반대가 진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허구적인 중도주의가 전부는 아니었다. 2004년 총선에서 부시의 공화당이 보여준 격렬한 선거기법은 ‘탈동원화와 네거티브 전략’이었다. 전통적인 선거 전략은 더 많은 유권자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유일한 방법이 후보자가 자신의 메시지를 온건하게 제시해서 부동층의 환심을 사는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공화당은 이러한 외부적 확대보다는 내부적 자기강화를 선택했다. 대다수의 대중이 특정 정당에 대한 안정적 지지층이 아닌 것이 현실인 마당에야 공화당을 지지할 가망성이 높은 특정집단의 지지를 모으기 위해서는 더욱 명료한, 즉 극단적인 정치메시지를 전달하고(낙태 반대, 동성애 반대 등등), 나머지 집단에서 대해서는 탈동원화 전략을 적극 활용한다는 것이다. 즉 비방광고(네거티브 캠페인)나 추문을 통해 대중의 정치적 혐오를 확산시켜서 유권자의 선거 참여를 일반적으로 억제하거나, 상대방 후보를 선호할 것 같은 집단의 투표 참여를 억제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기법들은 현실 선거에서 종종 혼합되어 나타나며, 민주당과 공화당이 모두 이를 상황과 필요에 따라 활용하므로 지속적인 진동이 나타난다. (현재 미국대선에 공화당과 민주당 양자는 모두 허구적 중도주의로 다시 회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자 모두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클린턴 식의 정치기법뿐만 아니라, 공화당 식의 탈동원화/네거티브 전략 역시 강력한 여론조작기법을 동원해야 한다. 따라서 정당은 기층에서 충원되는 선거운동원이 아니라, 정치조작전문가들이나 기술관료 지배가 강화된다. 하지만 허구적 중도주의든 극단적 대결주의든 대중이 처해있는 사회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조건을 해결하지 못한다. 즉 대통령이나 의회 여당이 바뀐다고 사회경제적 위기가 극적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정치가가 경제위기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정치에 대한 환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회경제적 위기와 여론조작 정치의 심화 속에서 정당의 대중적 토대는 지속적으로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그럴수록 더욱 더 강력한 여론조작에 의존해야 하는 악순환이 성립된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부르주아 정당들이 보이는 강점과 그 이면의 결정적 약점이다. 부르주아 정당들은 점점 더 사상누각을 쌓고 있다.
한국 인민주의 정치의 승리자와 패배자
한국의 한나라당, 통합민주당은 미국의 공화당, 민주당과 정치경제적 조건이나 역사적 배경이 분명히 다르지만 여러 측면에서 유비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의 ‘미국화’로 인하여 유비는 그 이상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한 특징적인 선거기법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특이점이 존재한다. 바로 통합민주당의 전신인 노무현/열린우리당이 ‘좌파적’ 탈동원화/네거티브 전략을 적극 활용했다면, 현재 이명박/한나라당이 ‘우파적’ 중도주의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과거 노무현/열린우리당이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내세우며 과거사 문제나 주택․교육 정책 등을 계기로 일종의 ‘문화전쟁’(이념논쟁)을 시도함으로써 386 지지층을 결집시키고, 한나라당 지지층을 ‘기득권=보수=강남’이라는 도식으로 도덕적으로 비난해서 그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억제하고자 했다. 반면 한국사회에서 대량빈곤이 오히려 확대되면서 노정권의 인기가 하락하자 주류언론은 노정권이 ‘소모적인 이념논쟁으로 국력을 낭비한다’는 함포사격을 가했고, 노정권은 거대한 역풍에 직면했다. 성공한 경영인이 이미지로 무장하고 ‘경제를 살리자’는 실용주의를 표방한 한나라당이 ‘우파적’ 중도주의로 기사회생한 것이다. 대선에서 이명박의 승리와 이번 총선에서 한나라당의 승리를 계기로 모든 언론은 앞 다투어 소모적인 이념갈등은 종말을 고했고, 이제야말로 선진국 진입을 위한 중도 실용주의가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명박은 1960년대 한일회담 반대투쟁 경력을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으나 역으로 부정하지도 않는다. 이는 그의 중도 실용주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하나의 꼭지점으로 적절한 수준에서 활용된다.)
이제 한국사회 부르주아 정단간의 경쟁에서는 정책이 중요한 변수가 아니고 정당간의 이념적 거리가 사실상 무의미하며, 이미지와 여론 조작과 같은 인민주의 정치행태가 지배적이다.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휘발성이 강한 대중조작적 선거기법에 더욱 의존하고 있고, 그들 역시 사상누각을 쌓고 있다. 누가 승리자인지, 패배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가 중요하다.
정치위기와 뉴타운의 폭발력
현재 각종 선거결과나 일상적인 여론조사 결과는 한국정치의 불안정성이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이번 선거결과 50% 이하로 떨어진 투표율은 너무나 명백한 증거다. 그것은 대중의 수동적 태도가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소극적인 저항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도 있다.) 한국사회의 지배정당인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지지율의 급등과 급락을 반복하고 있으며, 이는 극히 낮은 투표율의 이면이다. 이와 더불어 이번 선거는 한국사회의 현실적 변화를 보여주는 몇 가지 특징적 양상이 나타났다.
영호남은 여전히 강력한 지역주의의 보루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 성격은 크게 바뀌고 있다. 한때는 영남과 호남의 지역주의를 각각 보수적 지역주의와 저항적 지역주의로 분류하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현재는 공통점이 더 많다. 즉 수도권의 거대도시화와 부의 집중에 대비된 상대적인 지역적 소외감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영남지역에서 박근혜의 무시무시한 괴력이 다시금 발휘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역의 대중들에게 뚜렷한 탈출구가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 나타난 박근혜 지지는 박근혜가 새로운 발전주의의 전망의 제시하지 못하고 과거의 전통 반공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그 생명력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영호남에서 뚜렷이 나타난 투표율 하락의 의미도 고려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한국사회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점증은 이러한 지역적 불균형의 심화와 더불어 도시 내부의 변화와 조응한다. 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번 총선을 두고 이른바 ‘아파트계층’이 서울지역의 투표결과를 결정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즉 선거구별로 아파트 밀집도가 높고, 특히 최근 아파트 가격이 많이 오른 지역일수록 한나라당 지지도가 비례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이다. 이미 강남, 송파, 서초지역이 한나라당의 초강세 우세지역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다가 강북지역과 신도시가 이러한 흐름에 동참함으로써 서울과 수도권 남부가 한나라당의 철옹성으로 재편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파트계층’은 몇 개의 피라미드층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전문직 고소득자(전통적인 전문직과 신흥 골드칼라), 거액의 은행융자를 끼고 주택을 구입한 중하층 화이트칼라층, 연립주택이나 빌라 소유자 등. 피라미드의 상층부는 좀 더 높은 부동산 투자 수익을 기대하면서 부동산 관련 규제완화나 세금인하를 적극 지지하면서 상대적인 여유를 누릴 것다. 거액의 융자를 갚아야 하는 아파트소유자들은 주택가격이나 시장금리가 가계의 생사가 걸린 필사적인 문제일 것이다. 연립이나 다가구 주택 소유자들은 뉴타운이 추진되면 ‘지분쪼개기’를 통해 큰 소득을 얻으리라 기대할 것이다. 그들 사이에 처지의 차이는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대박을 꿈구며 위를 보고 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부동산 투기의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현재 서울의 자가주택 소유자는 55% 수준이다.) 게다가 일부 무주택자들마저도 장기적 이해관계와 상반되더라도 뉴타운 개발에 따른 단기적 보상금을 노린다거나, 막연한 지역개발 욕구에 따라 ‘묻지마’로 편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수도권의 대중심리가 금융화와 이에 조응하는 부동산투기에 포섭되면서 집단적 투기 심성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들은 한나라당에 대한 안정적 지지층이라기보다는 부동산 개발ㆍ투기를 보장하는 정치세력에 대한 지지층일 것이며, 종국적으로는 정치적 불안정성의 토양으로 기능할 것이다.
또한 한국사회의 자영업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분석도 있다. (현재 자영업주가 600만 명에 이르며, 무급가족종사자가 150만 명에 이른다. 이는 전체 노동자의 35%이며, 이러한 수치는 미국의 7.6%, 대만의 28.4%보다 훨씬 높다.) 특히 이중에서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와 실업ㆍ반실업의 확산 와중에서 자가고용이나 가족무급노동에 의존하는 영세자영업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으며 (예컨대 현재 대형프렌차이즈의 소규모 지점 사장은 일종의 자가고용 노동자가 되고 있다), 이들이 체감경기에 극히 민감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이 안정적인 정당지지 성향을 지니기보다는 선거시기 부동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반면 도시의 노동자와 빈민은 아파트와 뉴타운개발 과정에서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들이 실제로 도시에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대형아파트 주변의 잘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 파편화된 형태로 존재하게 되었다. 그들은 생존과 생활의 불안정성 때문에 오히려 드러나지 않고 조직되거나 집단적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따라서 도시개발의 가장 큰 수혜층만이 집단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나머지는 정치적으로 배제된다. 진보신당의 어느 후보의 증언에 따르면, 지난 3월 강남구민회관에서는 <강남구 공동주택 입주자 협의회>란 단체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각 당 지역구 후보자들을 불러놓고 “종합부동산세 폐지를 공약하라”고 윽박질렀다고 한다. 이들의 응집력이 노동자와 도시빈민(실업)의 목소리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노정권의 기만과 실패는 진보에 대한 기대와 자신감을 상실케 함으로써 이들을 더욱 위축시켰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지역적 불균형의 심화, 도시의 재편과 같은 변화는 한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의 원천이 되고 있다. 그렇지만 민중운동은 이러한 변화에 조응하여 노동의 불안정, 대량빈곤과 실업에 대응하기 위한 지역적, 대중적 활동이 극히 미비하다. 지역운동단체라고는 민주노총 지역조직이나 농민회, 진보정당, NGO 성향의 시민단체가 전부인 경우가 적지 않다. 진보정당들의 경우도 민주노총 기반으로부터 선거자금 모금이나 운동원 조직에도 허덕이며, 일상적인 지역 대중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운동적 역량이 지극히 취약하다. 이러한 조건은 오히려 정당들이 대중운동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기존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의존에 머물게 한다.
진보정당의 선거정치와 지역대중운동
진보정당에서 선거를 전후한 시점에서 벌어지는 대립의 쟁점은 대개 선거기법, 전략에 집중된다. 앞의 구분 틀을 따르자면 ‘중도파로의 이동을 통한 외적 확대’냐, 아니면 ‘핵심지지층의 동원을 위한 자기강화’냐. 물론 대다수의 경우는 전자의 길을 선택한다. 정당의 규모가 성장하면서 여론접촉면이 확대되고, 여론조작 정치에 대한 적응도를 높이면서 이러한 방식으로 의회 장악도를 높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기 때문이다. 핵심지지층의 동원은 기정사실로 간주되거나, 역시 선거기법 상의 문제로 접근된다. 정당의 관점에서 볼 때 ‘새로운 지지층’의 형성을 위한 대중적 조직망의 구축은 오히려 더 많은 돈과 사람이 필요한 비효율적 활동으로 간주되기가 쉽다. 또는 정당역량의 취약성 때문에 합리화된다. 따라서 선거를 중심에 두느냐 대중운동(사회운동)을 중심에 두느냐는 정당의 성격을 규정하는 현실적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은 5개 의석을 바탕으로, 의원단 역량, 정책역량, 대중조직역량 들에서 기존에 비해 크게 위축되기는 하겠으나 지난 시기 의회활동과 유사한 활동 패턴을 드러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민주노동당은 이른바 진보대연합을 다시 추진하면서 시민운동 조직, 인사들의 영입을 통해 중도로 이동을 모색 중이다. (이미 지난 시기 권영길 선본은 이러한 방식을 선택했다) 하지만 사회운동과 괴리된 원내활동이나 언론대응이 동일한 방식의 활동을 채택하는 지배정당들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전략이 될 수 있을 가망성은 별로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한편 진보신당은 기존 진보신당에 참여하지 않았던 세력들을 포괄하는 정당의 재창당과 지역정당조직 구축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런데 진보신당에 동참했던 일부의 경향은 민주노동당에 ‘남겨두고 온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이를 다시 챙기려는 데 활동의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는 새로운 운동을 창출하기보다는 기존에 존재하는 것을 ‘나누기’ 위한 대립이라는 부정적 효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
게다가 현재 민주노총 지역본부 등의 사례를 보면 정파적 대립과 분할구도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으며, 한국진보연대 구축과정은 이러한 경향을 완화하기보다는 오히려 존재 그 자체가 분열의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 정당운동의 분할구도가 가속화되면서 지역운동 수준의 분할도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예견되는 ‘복수노조’ 시대라는 객관적 요인이 이러한 분할에서 어떤 기폭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예상이 곳곳에서 제기되고 있다. 물론 어떠한 구체적인 행동들이 이러한 분할을 더욱 악화시킬 것인지에 대한 정확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재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이 진보신당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대립과정에서 기층에서의 실질적인 운동이 무기력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당면한 과제는 금융화와 지역개발주의에 대항하는 우리의 이념과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실천공간으로서 노동조합운동과 대중운동을 지역적, 전국적으로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과제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