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69호 | 2010.04.14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첫 걸음인가, 무너지는 NPT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인가
오바마 정부의 2010년 핵태세검토 보고서 분석
지난 4월 6일 미국 오바마 정부의 2010년 <핵태세검토 보고서>(NPR)가 발표되었다. NPR은 발간시점에서 향후 5-10년간 유지될 미국 핵정책과 전략 수립, 목표 능력과 전력태세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미국의 핵무기전략과 핵억지력, 비확산, 핵군축 등 핵에 관련된 기본 입장이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초강대국 미국의 핵태세검토가 전 세계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이번 NPR이 주목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표방한 ‘핵 없는 세계’를 위해 미국이 실제 어떠한 태도 변화를 보이는지를 알 수 있는 첫 판단점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프라하 선언과 미국-러시아의 <새로운 전략무기감축협정>(신START), 핵안보정상회의, 그리고 <핵비확산조약(NPT) 평가회의>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핵 군축과 평화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달리 이번 NPR의 내용이 그리 혁신적이라 평가하기는 힘들다. ‘핵 선제 공격’ 옵션의 유지나, 강력한 차단 조치, 미사일 방어망 유지 등, ‘핵 없는 세계’를 위한 변화라기보다는 오히려 NPT 체제의 이완과 이로 인한 이탈 세력(북한, 이란 등)을 관리하면서 NPT 체제를 유지하려는 제스처에 가깝다.
2010년 NPR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냉전 이후 미국의 NPR 발표는 1994년과 2002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이번 NPR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NPR에서 ‘핵심 계획’으로 설정한 핵 확산과 핵 테러리즘의 차단이다. 이를 위해 IAEA의 안전조치를 강화하고 에너지부의 비확산 프로그램 예산을 27억 달러까지 증액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핵 물질 밀수의 탐지/차단 능력을 강화하고, 대량살상무기를 확보/사용하려는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거나 허용하는 행위자에게 분명한 책임을 물을 것을 요청한다.
둘째, 미국의 전략에서 핵무기의 역할 축소다. 핵 비확산 의무를 준수하는 비핵보유국들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을 명시했으며, 의무를 준수하지 않는 국가들에 대한 핵 선제 공격 옵션을 유지했다.
셋째, 전략적 억지력과 안정성 유지다. 미-러의 신START 등으로 인한 핵전력 축소를 대체하기 위해 ‘3원 전략 핵전력’(전략 폭격기, 지상 발사 핵무기, 잠수함 발사 핵무기)을 유지하고, 미사일 방어나 재래식 장거리 타격 능력을 제한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
넷째, 지역 방어와 미국의 동맹국이나 파트너 국가들에 대한 보장 강화다. 이를 위해 재래식 전력, 지역 미사일 방어망, 대 WMD 능력 향상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핵심 지역의 안보를 위해 핵 옵션을 유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무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핵실험을 중단하고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CTBT)를 비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청한다. 새로운 핵탄두 개발 역시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첫 걸음?
이번 발표가 이른바 ‘핵선제공격 독트린’을 밝혔던 부시 정부의 NPR에 비해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지난 해 4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프라하 선언부터 미-러의 신START 체결, 4월 12-13일에 진행되는 핵안보정상회의, 5월 8차 NPT 평가회의 등으로 이어지며 핵 군축과 비확산 계획에 탄력을 줄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들도 보인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갖기엔 이번 NPR의 내용이 그리 고무적이지는 않다.
우선 ‘소극적 안전보장’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자. ‘소극적 안전보장’은 핵보유국들이 비보유국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보장이다. NPT에 가입한 많은 국가들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핵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소극적 안전보장의 명문화나 별도의 국제 협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핵보유국들은 NPT 의무 준수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에 ‘소극적 안전보장’은 오래도록 갈등적 쟁점이 되어왔다. 이런 이유로 이번 NPR 발표 후 나온 언론 보도들이 대부분 ‘소극적 안전보장’에 관한 명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그동안 미국이 취해 왔던 태도를 바꾼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이후 예정된 ‘핵안보정상회의’와 ’‘NPT 평가회의’를 겨냥한 ‘명분 쌓기’일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오랫동안 소극적 안전보장을 요구해 온 비보유국들을 NPT 체제에 묶어 두기 위한 유인책인 것이다. 실제 미국은 1978년 제1차 군축특별총회, 1995년 NPT 연장회의 등을 앞두고 소극적 안전보장에 대해 상징적 수준의 선언을 했지만, 구체적 형태로 추진한 바는 없다. 이는 미국이 ‘핵무기 선제 사용' 정책을 포기하지 않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한된 조건’ 내에서 ‘핵무기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간 미국이 고수해온 입장이다.
둘째, 이번 NPR이 핵심 계획으로 지목한 ‘핵 확산과 핵 테러리즘의 차단’을 보자. 앞서 언급한 대로 이번 NPR은 핵 물질 밀수의 탐지/차단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런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수출통제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들 수 있는데(이 밖에도 확산 차단 조치에는 IAEA의 안전조치 강화, 방어적 조치로서 '미사일방어체제(MD)'도 포함된다. 신START 체결에도 불구하고 이번 NPR에서 미사일 방어망 계획을 제한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핵기술 관련 물품은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수출할 수 있다는 소극적 개념으로서의 수출통제보다는 적극적인 ‘반확산 체제’로서의 PSI가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PSI는 핵무기나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배나 비행기가 이동하는 것을 참여국들이 공동으로 차단(정선, 검색, 압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한반도를 예로 생각해보면, 북한 선박을 검색/압류하는 조치가 정치적 긴장을 높이고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 미국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난 해까지 한국 정부가 PSI 정식 참여가 아닌 옵저버 자격을 유지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단순한 의혹만으로 해당국의 승인 없이 제3국이 공해상의 선박을 차단하는 것은 국제법(유엔해양법 협약 87조 ‘자유항행원칙’, 동 협약 17/19/23조 ‘무해통항권’) 위반이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차단 조치’의 강화는 군사적 긴장감을 한층 높이게 될 것이다.
거기다 ‘대량살상무기를 확보/사용하려는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거나 허용하는 어떠한 국가, 테러리스트, 비국가 행위자에게도 분명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내용은 향후 미국에 의해 진행되는 전쟁과 학살, 민중에 대한 무차별 폭력으로서 ‘제재 조치’를 지속하겠다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셋째, 핵전력 축소에 대한 미국의 대응 전략을 보자. 이번 NPR은 신START 아래서도 장거리 폭격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등의 ‘3원 전략 핵전력’은 유지하며, 미국의 미사일 방어와 재래식 장거리 타격 능력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신START를 통해 미국과 러시아는 보유하고 있는 전략탄두를 1,500-1,675개 수준으로 감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2012년을 목표 시한으로 설정하고 있는 <전략공격무기감축협정>(SORT)에 제시된 감축 목표(1,700-2,200개)와 비교했을 때 그리 큰 수치는 아니다. 진전은 있지만 아직까지 너무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야할 것은, 감축 대상의 탄두 계산 방식에 따라 실제 핵전력의 축소 규모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협정의 세부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아 확인이 필요한 부분인데, 전략공격무기감축협정에서와 같이 ‘실전배치된 핵탄두’만을 계산하는 방식이라면, 운반체에서 분리하여 보관한 핵탄두는 감축 핵탄두로 계산된다. 다시 말해 유사시에 신속 배치할 수 있는 능력만 확보한다면, 사실상 단 한 개의 핵탄두의 ‘폐기’ 없이도 목표치 달성이 가능해진다. 덧붙여 미사일 방어망의 지속적인 추진과 재래식 전력의 증강 가능성 또한 열어두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향후 미국이 실제로 핵군축을 수행할지 불투명하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이번 NPR은 애초 2009년 12월에서 2010년 1월 사이에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방부가 처음 제출했던 안에는 핵전력 축소 계획이 아예 빠져있었을 정도로, 핵군축에 대한 미국 내 보수세력의 반발이 심해 논란을 거듭하며 몇 차례 연기되다 4개월이 지나서야 발표되었다. 내용 역시 ‘핵 없는 세계’라는 선언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서 절충을 이룬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2010년 NPR 발표의 배경
이번에 발표된 NPR이 놓여있는 조건을 살펴보는 것은 NPR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번 NPR 발표는 5월에 예정된 8차 'NPT 평가회의'를 앞두고 진행되었다. NPT 조약은 발효 5년이 되는 해부터 평가회의를 통해 각 조항별 이행을 점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NPT 당사국들이 1975년부터 매 5년마다 핵 비확산 의무, 핵군축, 그리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등 조약의 주요 구성요소별 이행 상황과 조약 이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 대해서 검토하는 것이 NPT 평가회의다. 그러나 핵보유국들의 이행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채 비보유국들의 비확산 의무만 강조되면서 비보유국들의 불만은 높아져 왔다.
2005년 열린 7차 NPT 평가회의에서 비보유국들의 불만이 극적으로 터져 나왔다. 비보유국들은 지난 1995년과 2000년 NPT 평가회의에서 마련된 핵 군축 약속을 핵보유국가들이 이행할 것을 요구했고, 이란을 비롯한 비동맹 국가들을 중심으로 ‘소극적 안전보장’의 명시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면서 2000년 평가회의에서 제출된 13단계 핵군축 프로그램의 이행을 위한 강제적 후속조치마저 거부했다. 결국 회의 개막 후 의제 설정도 못한 채 10여일을 허비하다 핵군축, 핵비확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등 3개 의제에 대한 분야별 합의를 시도했으나 참여국간 첨예한 입장 차이로 협상을 포기하게 되었다.
핵보유국의 ‘핵무기 감축 의무’와 비보유국의 ‘비확산 의무’는 NPT 체제의 두 축이다. 2005년 7차 평가회의의 파행 후 ‘NPT 무용론’이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는 결국 원자력을 무기화하려는 의도의 방증이다)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과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다른 비보유국들의 이탈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자극을 해소하고 강력한 비확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에 필수적인 과제가 된다. 결국 이완된 NPT 체제를 추스르기 위해 그동안 비보유국들이 주장해 온 내용을 상징적 수준에서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핵 없는 세계는 핵이 없어야 가능하다!
강력한 타격 능력의 유지, 강제력을 띤 차단 조치의 실행은 결코 핵무기 확산을 막을 수 없다. 1971년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온 국민이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폭탄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처럼, 지금과 같은 절대적 전력 차이는 수많은 국가들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멸의 무기 개발 경쟁에 뛰어들게 만드는 유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동맹국들이 자행하고 있는 학살과 이에 대항한 테러, 그리고 이어지는 보복 공격과 또 다른 테러라는 죽음의 사슬처럼, 절멸의 공포가 가져다주는 것은 결코 평화가 아니다. 냉전 시기 3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팽배했던 유럽에서 전쟁을 막은 것은 미국의 미사일이 아니라, 미사일 배치를 막아낸 평화운동의 힘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동어반복이지만 ‘핵 없는 세계’는 핵이 ‘없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핵 자체를 폐기하지 않고서는 핵 확산을 차단할 수 없다. 이는 결국 압도적 핵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핵보유국들의 적극적인 군축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절멸의 공포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절멸의 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자위력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결국 절멸의 공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출발점임을 말한다.
이명박 정부의 ‘원전 세일즈’나, 테러 대응만을 논의하는 정상회의가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은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일 뿐이다. 인류 전체의 생명을 담보로 위태롭게 지속되고 있는 죽음의 레이스를 멈추기 위한 민중의 교류와 연대의 확장이 필요하다. 오는 5월 3일부터 UN본부에서 진행되는 8차 NPT 평가회의를 계기로 전 세계 반핵평화활동가들이 뉴욕에 모인다. 이들과 함께 미국의 핵 정책의 문제점을 알려내고, 민중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힘찬 움직임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
이번 NPR이 주목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표방한 ‘핵 없는 세계’를 위해 미국이 실제 어떠한 태도 변화를 보이는지를 알 수 있는 첫 판단점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프라하 선언과 미국-러시아의 <새로운 전략무기감축협정>(신START), 핵안보정상회의, 그리고 <핵비확산조약(NPT) 평가회의>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핵 군축과 평화에 대한 기대는 점점 커져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달리 이번 NPR의 내용이 그리 혁신적이라 평가하기는 힘들다. ‘핵 선제 공격’ 옵션의 유지나, 강력한 차단 조치, 미사일 방어망 유지 등, ‘핵 없는 세계’를 위한 변화라기보다는 오히려 NPT 체제의 이완과 이로 인한 이탈 세력(북한, 이란 등)을 관리하면서 NPT 체제를 유지하려는 제스처에 가깝다.
2010년 NPR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나
냉전 이후 미국의 NPR 발표는 1994년과 2002년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이번 NPR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번 NPR에서 ‘핵심 계획’으로 설정한 핵 확산과 핵 테러리즘의 차단이다. 이를 위해 IAEA의 안전조치를 강화하고 에너지부의 비확산 프로그램 예산을 27억 달러까지 증액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핵 물질 밀수의 탐지/차단 능력을 강화하고, 대량살상무기를 확보/사용하려는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거나 허용하는 행위자에게 분명한 책임을 물을 것을 요청한다.
둘째, 미국의 전략에서 핵무기의 역할 축소다. 핵 비확산 의무를 준수하는 비핵보유국들에 대한 ‘소극적 안전보장’을 명시했으며, 의무를 준수하지 않는 국가들에 대한 핵 선제 공격 옵션을 유지했다.
셋째, 전략적 억지력과 안정성 유지다. 미-러의 신START 등으로 인한 핵전력 축소를 대체하기 위해 ‘3원 전략 핵전력’(전략 폭격기, 지상 발사 핵무기, 잠수함 발사 핵무기)을 유지하고, 미사일 방어나 재래식 장거리 타격 능력을 제한하지 않을 것을 요청한다.
넷째, 지역 방어와 미국의 동맹국이나 파트너 국가들에 대한 보장 강화다. 이를 위해 재래식 전력, 지역 미사일 방어망, 대 WMD 능력 향상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을 요청한다. 또한 핵심 지역의 안보를 위해 핵 옵션을 유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무기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핵실험을 중단하고 <포괄적 핵실험 금지 조약>(CTBT)를 비준하기 위해 노력할 것을 요청한다. 새로운 핵탄두 개발 역시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첫 걸음?
이번 발표가 이른바 ‘핵선제공격 독트린’을 밝혔던 부시 정부의 NPR에 비해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다는 평가도 있다. 또한 지난 해 4월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프라하 선언부터 미-러의 신START 체결, 4월 12-13일에 진행되는 핵안보정상회의, 5월 8차 NPT 평가회의 등으로 이어지며 핵 군축과 비확산 계획에 탄력을 줄 것이라는 기대 섞인 전망들도 보인다. 그러나 이런 기대를 갖기엔 이번 NPR의 내용이 그리 고무적이지는 않다.
우선 ‘소극적 안전보장’에 관한 내용을 살펴보자. ‘소극적 안전보장’은 핵보유국들이 비보유국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보장이다. NPT에 가입한 많은 국가들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는 대신 핵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소극적 안전보장의 명문화나 별도의 국제 협약 체결을 요구했으나, 핵보유국들은 NPT 의무 준수 여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해왔기 때문에 ‘소극적 안전보장’은 오래도록 갈등적 쟁점이 되어왔다. 이런 이유로 이번 NPR 발표 후 나온 언론 보도들이 대부분 ‘소극적 안전보장’에 관한 명시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그동안 미국이 취해 왔던 태도를 바꾼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이후 예정된 ‘핵안보정상회의’와 ’‘NPT 평가회의’를 겨냥한 ‘명분 쌓기’일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오랫동안 소극적 안전보장을 요구해 온 비보유국들을 NPT 체제에 묶어 두기 위한 유인책인 것이다. 실제 미국은 1978년 제1차 군축특별총회, 1995년 NPT 연장회의 등을 앞두고 소극적 안전보장에 대해 상징적 수준의 선언을 했지만, 구체적 형태로 추진한 바는 없다. 이는 미국이 ‘핵무기 선제 사용' 정책을 포기하지 않은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제한된 조건’ 내에서 ‘핵무기 선제 공격을 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간 미국이 고수해온 입장이다.
둘째, 이번 NPR이 핵심 계획으로 지목한 ‘핵 확산과 핵 테러리즘의 차단’을 보자. 앞서 언급한 대로 이번 NPR은 핵 물질 밀수의 탐지/차단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런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수출통제와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을 들 수 있는데(이 밖에도 확산 차단 조치에는 IAEA의 안전조치 강화, 방어적 조치로서 '미사일방어체제(MD)'도 포함된다. 신START 체결에도 불구하고 이번 NPR에서 미사일 방어망 계획을 제한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핵기술 관련 물품은 정부의 승인을 얻어야 수출할 수 있다는 소극적 개념으로서의 수출통제보다는 적극적인 ‘반확산 체제’로서의 PSI가 강조되고 있는 상황이다. PSI는 핵무기나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실은 것으로 의심되는 배나 비행기가 이동하는 것을 참여국들이 공동으로 차단(정선, 검색, 압류)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그러나 한반도를 예로 생각해보면, 북한 선박을 검색/압류하는 조치가 정치적 긴장을 높이고 남북관계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매우 크다. 미국의 강력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지난 해까지 한국 정부가 PSI 정식 참여가 아닌 옵저버 자격을 유지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단순한 의혹만으로 해당국의 승인 없이 제3국이 공해상의 선박을 차단하는 것은 국제법(유엔해양법 협약 87조 ‘자유항행원칙’, 동 협약 17/19/23조 ‘무해통항권’) 위반이라는 점을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차단 조치’의 강화는 군사적 긴장감을 한층 높이게 될 것이다.
거기다 ‘대량살상무기를 확보/사용하려는 테러리스트를 지원하거나 허용하는 어떠한 국가, 테러리스트, 비국가 행위자에게도 분명한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내용은 향후 미국에 의해 진행되는 전쟁과 학살, 민중에 대한 무차별 폭력으로서 ‘제재 조치’를 지속하겠다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셋째, 핵전력 축소에 대한 미국의 대응 전략을 보자. 이번 NPR은 신START 아래서도 장거리 폭격기와 대륙간 탄도미사일,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 등의 ‘3원 전략 핵전력’은 유지하며, 미국의 미사일 방어와 재래식 장거리 타격 능력을 제한하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신START를 통해 미국과 러시아는 보유하고 있는 전략탄두를 1,500-1,675개 수준으로 감축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는 2012년을 목표 시한으로 설정하고 있는 <전략공격무기감축협정>(SORT)에 제시된 감축 목표(1,700-2,200개)와 비교했을 때 그리 큰 수치는 아니다. 진전은 있지만 아직까지 너무 많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가야할 것은, 감축 대상의 탄두 계산 방식에 따라 실제 핵전력의 축소 규모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이번 협정의 세부 내용이 잘 알려지지 않아 확인이 필요한 부분인데, 전략공격무기감축협정에서와 같이 ‘실전배치된 핵탄두’만을 계산하는 방식이라면, 운반체에서 분리하여 보관한 핵탄두는 감축 핵탄두로 계산된다. 다시 말해 유사시에 신속 배치할 수 있는 능력만 확보한다면, 사실상 단 한 개의 핵탄두의 ‘폐기’ 없이도 목표치 달성이 가능해진다. 덧붙여 미사일 방어망의 지속적인 추진과 재래식 전력의 증강 가능성 또한 열어두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향후 미국이 실제로 핵군축을 수행할지 불투명하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이번 NPR은 애초 2009년 12월에서 2010년 1월 사이에 발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국방부가 처음 제출했던 안에는 핵전력 축소 계획이 아예 빠져있었을 정도로, 핵군축에 대한 미국 내 보수세력의 반발이 심해 논란을 거듭하며 몇 차례 연기되다 4개월이 지나서야 발표되었다. 내용 역시 ‘핵 없는 세계’라는 선언에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에서 절충을 이룬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2010년 NPR 발표의 배경
이번에 발표된 NPR이 놓여있는 조건을 살펴보는 것은 NPR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이번 NPR 발표는 5월에 예정된 8차 'NPT 평가회의'를 앞두고 진행되었다. NPT 조약은 발효 5년이 되는 해부터 평가회의를 통해 각 조항별 이행을 점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NPT 당사국들이 1975년부터 매 5년마다 핵 비확산 의무, 핵군축, 그리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등 조약의 주요 구성요소별 이행 상황과 조약 이행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에 대해서 검토하는 것이 NPT 평가회의다. 그러나 핵보유국들의 이행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채 비보유국들의 비확산 의무만 강조되면서 비보유국들의 불만은 높아져 왔다.
2005년 열린 7차 NPT 평가회의에서 비보유국들의 불만이 극적으로 터져 나왔다. 비보유국들은 지난 1995년과 2000년 NPT 평가회의에서 마련된 핵 군축 약속을 핵보유국가들이 이행할 것을 요구했고, 이란을 비롯한 비동맹 국가들을 중심으로 ‘소극적 안전보장’의 명시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면서 2000년 평가회의에서 제출된 13단계 핵군축 프로그램의 이행을 위한 강제적 후속조치마저 거부했다. 결국 회의 개막 후 의제 설정도 못한 채 10여일을 허비하다 핵군축, 핵비확산,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등 3개 의제에 대한 분야별 합의를 시도했으나 참여국간 첨예한 입장 차이로 협상을 포기하게 되었다.
핵보유국의 ‘핵무기 감축 의무’와 비보유국의 ‘비확산 의무’는 NPT 체제의 두 축이다. 2005년 7차 평가회의의 파행 후 ‘NPT 무용론’이 나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는 결국 원자력을 무기화하려는 의도의 방증이다)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과 이란의 핵 프로그램은 다른 비보유국들의 이탈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자극을 해소하고 강력한 비확산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미국에 필수적인 과제가 된다. 결국 이완된 NPT 체제를 추스르기 위해 그동안 비보유국들이 주장해 온 내용을 상징적 수준에서 수용하는 제스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핵 없는 세계는 핵이 없어야 가능하다!
강력한 타격 능력의 유지, 강제력을 띤 차단 조치의 실행은 결코 핵무기 확산을 막을 수 없다. 1971년 인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온 국민이 풀만 먹는 한이 있더라도 핵폭탄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파키스탄의 부토 총리처럼, 지금과 같은 절대적 전력 차이는 수많은 국가들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절멸의 무기 개발 경쟁에 뛰어들게 만드는 유인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미국과 동맹국들이 자행하고 있는 학살과 이에 대항한 테러, 그리고 이어지는 보복 공격과 또 다른 테러라는 죽음의 사슬처럼, 절멸의 공포가 가져다주는 것은 결코 평화가 아니다. 냉전 시기 3차 세계대전의 기운이 팽배했던 유럽에서 전쟁을 막은 것은 미국의 미사일이 아니라, 미사일 배치를 막아낸 평화운동의 힘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동어반복이지만 ‘핵 없는 세계’는 핵이 ‘없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핵 자체를 폐기하지 않고서는 핵 확산을 차단할 수 없다. 이는 결국 압도적 핵전력을 유지하고 있는 핵보유국들의 적극적인 군축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절멸의 공포에서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절멸의 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자위력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결국 절멸의 공포를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출발점임을 말한다.
이명박 정부의 ‘원전 세일즈’나, 테러 대응만을 논의하는 정상회의가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은 또 다른 비극의 씨앗일 뿐이다. 인류 전체의 생명을 담보로 위태롭게 지속되고 있는 죽음의 레이스를 멈추기 위한 민중의 교류와 연대의 확장이 필요하다. 오는 5월 3일부터 UN본부에서 진행되는 8차 NPT 평가회의를 계기로 전 세계 반핵평화활동가들이 뉴욕에 모인다. 이들과 함께 미국의 핵 정책의 문제점을 알려내고, 민중의 대안을 모색하기 위한 힘찬 움직임을 만들어가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