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6호 | 2011.10.11
금융자본에 대한 분노, 문화운동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의 의의와 전망
미국 경제와 정치가 위기에 빠져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채 규모가 GDP 대비 100%에 가까우며 실업률이 9.1%로 여전히 높다. 청년 실업률은 25%로 훨씬 높다. 가계 부채 규모도 GDP의 90%며, 수많은 미국인들이 주택 압류로 집을 잃었다. 8월 연방정부 부채 한도 인상을 둘러싸고 정부-민주당과 공화당이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동안 미국인들은 무능한 정치인들을 불신하게 되었고 생활수준 하락에 낙심하였다. 무엇보다 수조 달러의 세금으로 부도덕한 금융시스템을 부양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민생고가 지속되고 있는 것에 대해 크게 분노하고 있다.
그 동안 일반 시민의 분노를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티파티였다. 티파티는 민주당, 세금, 사회복지나 소위 ‘큰 정부’의 문제를 꾸준히 규탄하면서 미국 정치지형을 우경화시켰다. 반면 그 동안 진보세력은 혼란을 겪으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진보세력은 지난 대선에서 변화를 약속한 오바마 후보의 선거운동에 힘을 쏟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과의 합의에 치중하면서 진보적 의제를 방기하자 무기력에 빠졌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청년들의 대중 투쟁이 발생했다. 놀랍게도 금융자본의 심장부인 월스트리트에서 말이다.
9월 17일부터 ’월스트리트 점거’(사실 점거가 아니라 월스트리트 인근 주코티 공원에 위치한 농성이다)는 금용기관과 기업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지난 3주 동안 이 투쟁은 활력이 강화되면서 100개 이상 도시로 확산됐다. 월스트리트 점거가 너무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커졌기 때문에 이제 언론이나 정치인, 기존 진보세력 그 누구도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진보세력들은 지금까지 경제위기에 대한 대중적 대응이 별로 없다가 드디어 누군가가 어떤 형태로든 대응을 시작한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거의 실제 모습과 이후 전망은 불투명하다.
누가 월스트리트 점거를 주도하고 있나?
많은 언론과 참가자에 따르면, 점거를 주도하는 세력은 없다. 지도부가 없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공식 지도부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점거가 시작되기 두 달 전부터 소규모 집단과 개별 활동가들이 이미 점거를 계획하고 준비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지금도 주코티 공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준비 과정은 7월 중순부터 시작됐다. 캐나다에 본부를 둔 국제 활동가 네트워크이자 소비절제주의와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인 ‘애드버스터’(Adbusters)가 평화로운 월스트리트 점거를 호소하는 광고를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에 실었다. 몇 주 후에 뉴욕에서 활동가들이 모여 세부계획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예산 삭감 반대 뉴욕시민’이라는 단체 회원들도 참석하였다. 이 단체는 지난 6월 3주간 진행된 뉴욕시청 앞 긴축 반대 농성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집트, 스페인, 그리스 등의 집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참석했다. 월스트리트 점거 활동가의 말에 의하면 이들이 투쟁 형식과 전술에 대해 중요한 조언을 했다고 한다. 회의 결과, 점거 투쟁의 실무 팀들이 만들어졌다. 8월 말에는 해커 활동가 집단인 ‘익명인’(Anonymous)도 결합해 회원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미국 전역에서 조직된 1천 여명의 사람들이 9월 17일 첫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뉴욕으로 모였다. 이들 대부분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조직된 사람이었다. 첫 집회 이후 기존 핵심 활동가들 외에 다양한 세력들이 합류했다. 직접행동 경험이 많은 무정부주의 경향의 동호인 단체 회원, 학생운동 경험이 조금 있거나 아예 없는 학생들, 노동/환경/지역사회 운동 경험이 있는 활동가들이었다. 실무 팀은 30개 이상으로 확대됐는데, 이들은 각각 식사, 청소, 기획, 집회 및 행동, 그리고 월스트리트 점거의 핵심 의사결정 체계인 오전, 오후 총회 등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의 정치적 지향은 무엇인가?
현재 월스트리트 점거를 주도하고 있는 비공식 지도자 중 많은 이들은 무정부주의를 지향한다. 애드버스터, 익명인 외에도 현재 주코티 공원에 천막을 친 동호인 단체들은 모두 무정부주의에 가깝다. 중앙집권 형태의 운영체계, 공식 지도부, 구체적인 강령을 반대하는 이들은 주코티 공원 농성장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 농성장은 개성과 자발적인 행동을 장려하며 수많은 개별 요구와 기질을 용인하는 축제의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예산 삭감 반대 뉴욕시민’은 무정부주의 조직은 아니지만 총회라는 개방적 운영체계를 처음으로 제안했다. 농성장에 있는 모든 참가자가 정기총회에 참여하여 누구라도 발언할 수 있고, 모든 내용은 합의제 방식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점들이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의 개방적 문화를 상징한다.
참가자 대부분도 무정부주의자는 아니다. 학자금 대출과 고용시장 축소로 고통 받고 있는 학생, 최근에 집이나 일자리를 잃어버린 부모 등, 지난 몇 년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일반 민중들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며 위계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사회변화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부정하는 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월스트리트 점거의 분권적 문화가 전통적인 활동가 조직보다 편하고 참여하기도 쉽다.
기업에 대한 분노, 문화운동
일반 미국인들은 생활수준 하락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며 금융기관과 기업을 탓한다. 투쟁의 축제 분위기와 더불어 광범위한 낙심과 분노 때문에 월스트리트 점거와 전국적으로 생긴 점거투쟁에 대한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 대오의 유일한 공식적 입장인 ‘월스트리트 점거 선언’은 이 분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하는 기업들이 현재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모였다. 기업들은 모기지 증서를 보유하지 않지만 우리의 집을 압류하고, 납세자의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기업 경영진에게 과도한 보너스를 주고, 사업장에 피부색, 성, 연령, 젠더정체성(gender identity), 성적 경향(sexual orientation) 등에 기반을 둔 차별을 영속시키고, 농업 독점을 통해서 농업 체계를 파괴하고, 감독 당국의 부주의로 식중독 발생을 방조하고, 동물학대로 이익을 보고,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노동권을 침해하고, 학비 융자로 학생을 인질로 잡아두고, 노동을 외주화시켜 보건의료와 임금을 삭감한다.”
선언문은 구체적 요구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부 개인 참가자들은 자신의 요구를 손으로 쓴 피켓(농성장에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자재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비공식 월스트리트 점거 사이트(공식 사이트는 없다), 블로그, 트위터 등으로 표현한다. 진보적 언론과 지식인은 이러한 모습에 주목하면서 월스트리트 점거 투쟁이 좀 더 진지한 성격을 지니려면 요구를 공식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일 많이 나오는 요구는 일반인에 대한 채무 면제다. 금융거래세 도입과 기업의 로비 활동을 제한할 선거법 개정 요구도 자주 등장한다. 참가자 일부는 생활임금과 교섭권 보장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 요구는 매우 드물다. 이는 월스트리트 점거 참가자들이 단결된 노동자계급의 입장이 아니라 박탈당한 개인의 입장에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월스트리트 점거의 비공식 지도자는 구체적 강령이나 공식적 요구를 일부러 피한다. 한 활동가는 요구를 내거는 순간 월스트리트 점거의 핵심 목표에 어긋난다고 설명한다. “공식 요구를 내는 것은 권력을 장악한 개인과 기관에게 무엇을 조금 다르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그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관 자체를 근본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축소판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 점거는 소수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미국 사회와 다른 형태의 공간을 창조하고 확대시킬 것 외에 사회변화를 위한 구체적 목표가 없다. 이 점에서 사회운동보다 문화운동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문화운동이라고 함은 주류 사회의 구체적인 변화를 목표하는 것보다 주류 사회에 상징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상징적 문화를 형성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이는 1960년대 히피운동과 유사한 흐름이다.
99%란?
월스트리트에서 자주 보이는 또 다른 문구는 ‘우리는 99%다’라는 것이다. 이 슬로건은 미국사회에 대한 참가자들의 공동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즉 1%만 이익을 보며 99%는 부담을 진다는 것이다. 이는 얼마 전까지 중산층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최근에 잔고가 바닥나고 (금융기관이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듯이) 구제를 못 받은 사람에게 특히 의미 있는 문장이다. 99%는 월스트리트 점거가 모든 일반 미국인을 대변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주코티 공원에서 다양한 입장과 다양한 사회적 계층이 대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참가자는 무척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젊고, 백인이다. 월스트리트 점거가 미국 전역, 심지어 유럽에서도 참가를 이끌었지만 뉴욕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이민자와 유색인의 관심을 대대적으로 끌지는 못했다. 이것은 이민자와 유색인 노동자들이 일이나 구직활동에 바빠 시간을 못 내거나 축제(또는 히피) 문화에 반감을 느껴서 그런 듯하다. 월스리트 점거는 분명 대항문화지만 백인 대항문화를 넘지 못한다. 또한 월스트리트 점거의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방식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다수 이민자와 유색인 노동자계급의 경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점거 참가자들이 얼마 전부터 겪게 된 문제들은 대부분 이민자와 유색인 노동자들이 훨씬 오래 전부터 경험했던 것들이고, 이들의 삶은 경제위기 하에서 백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 일부 유색인공동체 활동가는 99%라는 슬로건이 애초부터 미국 자본주의가 인종주의라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작동해온 사실과 오늘날 이민자와 유색인이 더 심한 착취와 더 많은 빚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월스트리트 점거의 의의와 전망
월스트리트 점거와 이것이 촉발한 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이는 경제위기 하에서 고통을 느끼는 일반인들이 티파티 외에 대안이 있다고 느끼게 한다. 오바마 정부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든 온건적 진보세력(자유주의)에게 일종의 대안을 제공하기도 한다. 불과 3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대안을 말이다. 또한 티파티가 공화당의 기반이 됐듯이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내년 선거 시기에 민주당에 긴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오바마를 다시 당선시키는 것이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이 강화되면 미국 정치문화가 좌선회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랬을 때 일자리 창출이나 일반인에 대한 구제조치가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보다 중요하게는 월스트리트 점거가 노동자운동이나 유색인공동체 급진적 단체들로 하여금 미국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도전하도록 하는 장기적인 대중운동의 가능성을 고무시켰다는 점이다.
공화당의 대통령 예비선거 후보인 미트 롬니는 주코티 공원 농성을 ‘계급전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 월스트리트 점거는 계급전쟁에 미달한다. 농성 중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본적인 정치 경제적 변화에 대한 생각이 없다. 그들의 불만은 부자의 탐욕에 대한 비판이다. 금융자유화와 불평등을 극단화하는 자본주의 체계나 인종적, 성적 위계를 통해서 착취를 강화하는 체계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월스트리트 점거의 분권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이며 자발적인 문화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투쟁형태라는 점도 분명하다. 아랍의 봄, 스페인과 그리스, 한국의 희망버스까지 비슷한 운동문화가 보인다. 월스트리트 점거는 미국의 문화답게 분권화 수준이 극단적이다. 이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지만, 월스트리트 점거가 문화운동에서 정치운동으로 전환될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미래를 예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점거 운동의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이와 같은 전환을 가로막고 있다. 첫째, 월스트리트를 조직한 활동가들은 애초 정치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둘째, 강령이나 구체적인 투쟁 목표와 요구를 도입하는 순간 투쟁의 활력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거에 공식 요구가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오랫동안 자신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해온 수많은 조직들이 자신의 요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뉴욕과 전국 각지에서 노동조합들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권을 사수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주택 압류에 저항하고 긴축정책에 반대하면서 많은 연대체들이 투쟁하고 있고, 공동체조직들은 이주자의 권리와 유색인 대상 경찰폭력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러한 기존 조직들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과 건설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 기존 조직들이 수행해온 활동을 갑자기 포기하고 ‘축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월스트리트 점거가 기존 조직들의 요구를 공식 요구로 채택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연대를 표현하고 호소하며 월스트리트 점거의 에너지를 빌려 자신들의 투쟁을 가시화하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노력이 이미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 참가자가 처음으로 대량 연행된 9월 29일 집회는 조지아주에서 사형을 당한 트로이 데이비스(흑인)를 추모하고 인종주의를 영속시키는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세력과 공동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10월 6일에 월스트리트 점거 세력과 반전 세력은 아프간전쟁 10주년을 규탄하기 위해서 워싱턴과 수많은 지역에서 힘을 합쳤다. 기존 진보조직과 노조들이 월스트리트 점거와 개방적으로 연대하는 방안을 찾아내고 역동적 에너지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월스트리트 점거는 단순한 문화운동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당장 미국 사회운동의 급진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침체에 빠져있던 미국 사회운동이 다시 활성화되는 하나의 계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최근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펼쳐진 투쟁에서 용기를 얻어 이제 월스트리트 점거와 같은 흐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10월 15일이 국제행동의 날로 지정되었고, 한국에서도 이날 예정되어 있던 ‘빈곤철폐의 날’과 한미FTA 반대 투쟁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무정형의 축제를 문화적으로 모방하는 것을 넘어 개방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제위기와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제기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그 동안 일반 시민의 분노를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티파티였다. 티파티는 민주당, 세금, 사회복지나 소위 ‘큰 정부’의 문제를 꾸준히 규탄하면서 미국 정치지형을 우경화시켰다. 반면 그 동안 진보세력은 혼란을 겪으면서 대안을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진보세력은 지난 대선에서 변화를 약속한 오바마 후보의 선거운동에 힘을 쏟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공화당과의 합의에 치중하면서 진보적 의제를 방기하자 무기력에 빠졌다. 그러던 중 갑작스레 청년들의 대중 투쟁이 발생했다. 놀랍게도 금융자본의 심장부인 월스트리트에서 말이다.
9월 17일부터 ’월스트리트 점거’(사실 점거가 아니라 월스트리트 인근 주코티 공원에 위치한 농성이다)는 금용기관과 기업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다. 지난 3주 동안 이 투쟁은 활력이 강화되면서 100개 이상 도시로 확산됐다. 월스트리트 점거가 너무 갑작스럽고 순식간에 커졌기 때문에 이제 언론이나 정치인, 기존 진보세력 그 누구도 이를 무시할 수 없다. 진보세력들은 지금까지 경제위기에 대한 대중적 대응이 별로 없다가 드디어 누군가가 어떤 형태로든 대응을 시작한 것에 대해 안도감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거의 실제 모습과 이후 전망은 불투명하다.
누가 월스트리트 점거를 주도하고 있나?
많은 언론과 참가자에 따르면, 점거를 주도하는 세력은 없다. 지도부가 없는 운동이라는 것이다. 공식 지도부가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점거가 시작되기 두 달 전부터 소규모 집단과 개별 활동가들이 이미 점거를 계획하고 준비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지금도 주코티 공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준비 과정은 7월 중순부터 시작됐다. 캐나다에 본부를 둔 국제 활동가 네트워크이자 소비절제주의와 생태주의를 표방하는 단체인 ‘애드버스터’(Adbusters)가 평화로운 월스트리트 점거를 호소하는 광고를 자신이 발간하는 잡지에 실었다. 몇 주 후에 뉴욕에서 활동가들이 모여 세부계획을 논의했다. 이 회의에는 ‘예산 삭감 반대 뉴욕시민’이라는 단체 회원들도 참석하였다. 이 단체는 지난 6월 3주간 진행된 뉴욕시청 앞 긴축 반대 농성을 조직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집트, 스페인, 그리스 등의 집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도 참석했다. 월스트리트 점거 활동가의 말에 의하면 이들이 투쟁 형식과 전술에 대해 중요한 조언을 했다고 한다. 회의 결과, 점거 투쟁의 실무 팀들이 만들어졌다. 8월 말에는 해커 활동가 집단인 ‘익명인’(Anonymous)도 결합해 회원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미국 전역에서 조직된 1천 여명의 사람들이 9월 17일 첫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서 뉴욕으로 모였다. 이들 대부분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조직된 사람이었다. 첫 집회 이후 기존 핵심 활동가들 외에 다양한 세력들이 합류했다. 직접행동 경험이 많은 무정부주의 경향의 동호인 단체 회원, 학생운동 경험이 조금 있거나 아예 없는 학생들, 노동/환경/지역사회 운동 경험이 있는 활동가들이었다. 실무 팀은 30개 이상으로 확대됐는데, 이들은 각각 식사, 청소, 기획, 집회 및 행동, 그리고 월스트리트 점거의 핵심 의사결정 체계인 오전, 오후 총회 등 다양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의 정치적 지향은 무엇인가?
현재 월스트리트 점거를 주도하고 있는 비공식 지도자 중 많은 이들은 무정부주의를 지향한다. 애드버스터, 익명인 외에도 현재 주코티 공원에 천막을 친 동호인 단체들은 모두 무정부주의에 가깝다. 중앙집권 형태의 운영체계, 공식 지도부, 구체적인 강령을 반대하는 이들은 주코티 공원 농성장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친다. 농성장은 개성과 자발적인 행동을 장려하며 수많은 개별 요구와 기질을 용인하는 축제의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예산 삭감 반대 뉴욕시민’은 무정부주의 조직은 아니지만 총회라는 개방적 운영체계를 처음으로 제안했다. 농성장에 있는 모든 참가자가 정기총회에 참여하여 누구라도 발언할 수 있고, 모든 내용은 합의제 방식으로 결정된다. 이러한 점들이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의 개방적 문화를 상징한다.
참가자 대부분도 무정부주의자는 아니다. 학자금 대출과 고용시장 축소로 고통 받고 있는 학생, 최근에 집이나 일자리를 잃어버린 부모 등, 지난 몇 년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은 일반 민중들이다. 개인주의를 표방하며 위계나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사회변화에 대한 보편적 이론을 부정하는 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에게는 월스트리트 점거의 분권적 문화가 전통적인 활동가 조직보다 편하고 참여하기도 쉽다.
기업에 대한 분노, 문화운동
일반 미국인들은 생활수준 하락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며 금융기관과 기업을 탓한다. 투쟁의 축제 분위기와 더불어 광범위한 낙심과 분노 때문에 월스트리트 점거와 전국적으로 생긴 점거투쟁에 대한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 대오의 유일한 공식적 입장인 ‘월스트리트 점거 선언’은 이 분노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보다 이윤을 먼저 생각하는 기업들이 현재 정부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아래와 같은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모였다. 기업들은 모기지 증서를 보유하지 않지만 우리의 집을 압류하고, 납세자의 구제금융을 받았지만 기업 경영진에게 과도한 보너스를 주고, 사업장에 피부색, 성, 연령, 젠더정체성(gender identity), 성적 경향(sexual orientation) 등에 기반을 둔 차별을 영속시키고, 농업 독점을 통해서 농업 체계를 파괴하고, 감독 당국의 부주의로 식중독 발생을 방조하고, 동물학대로 이익을 보고,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고, 노동권을 침해하고, 학비 융자로 학생을 인질로 잡아두고, 노동을 외주화시켜 보건의료와 임금을 삭감한다.”
선언문은 구체적 요구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부 개인 참가자들은 자신의 요구를 손으로 쓴 피켓(농성장에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자재가 항상 준비되어 있다), 비공식 월스트리트 점거 사이트(공식 사이트는 없다), 블로그, 트위터 등으로 표현한다. 진보적 언론과 지식인은 이러한 모습에 주목하면서 월스트리트 점거 투쟁이 좀 더 진지한 성격을 지니려면 요구를 공식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일 많이 나오는 요구는 일반인에 대한 채무 면제다. 금융거래세 도입과 기업의 로비 활동을 제한할 선거법 개정 요구도 자주 등장한다. 참가자 일부는 생활임금과 교섭권 보장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이 요구는 매우 드물다. 이는 월스트리트 점거 참가자들이 단결된 노동자계급의 입장이 아니라 박탈당한 개인의 입장에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듯하다.
월스트리트 점거의 비공식 지도자는 구체적 강령이나 공식적 요구를 일부러 피한다. 한 활동가는 요구를 내거는 순간 월스트리트 점거의 핵심 목표에 어긋난다고 설명한다. “공식 요구를 내는 것은 권력을 장악한 개인과 기관에게 무엇을 조금 다르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면 그들의 권력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기관 자체를 근본적인 문제로 보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회의 축소판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월스트리트 점거는 소수가 권력과 부를 독점하는 미국 사회와 다른 형태의 공간을 창조하고 확대시킬 것 외에 사회변화를 위한 구체적 목표가 없다. 이 점에서 사회운동보다 문화운동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문화운동이라고 함은 주류 사회의 구체적인 변화를 목표하는 것보다 주류 사회에 상징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상징적 문화를 형성하려는 경향을 의미한다. 이는 1960년대 히피운동과 유사한 흐름이다.
99%란?
월스트리트에서 자주 보이는 또 다른 문구는 ‘우리는 99%다’라는 것이다. 이 슬로건은 미국사회에 대한 참가자들의 공동 이해를 표현하는 것이다. 즉 1%만 이익을 보며 99%는 부담을 진다는 것이다. 이는 얼마 전까지 중산층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최근에 잔고가 바닥나고 (금융기관이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듯이) 구제를 못 받은 사람에게 특히 의미 있는 문장이다. 99%는 월스트리트 점거가 모든 일반 미국인을 대변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주코티 공원에서 다양한 입장과 다양한 사회적 계층이 대변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참가자는 무척 동질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젊고, 백인이다. 월스트리트 점거가 미국 전역, 심지어 유럽에서도 참가를 이끌었지만 뉴욕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이민자와 유색인의 관심을 대대적으로 끌지는 못했다. 이것은 이민자와 유색인 노동자들이 일이나 구직활동에 바빠 시간을 못 내거나 축제(또는 히피) 문화에 반감을 느껴서 그런 듯하다. 월스리트 점거는 분명 대항문화지만 백인 대항문화를 넘지 못한다. 또한 월스트리트 점거의 미국 사회에 대한 이해방식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다수 이민자와 유색인 노동자계급의 경험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점거 참가자들이 얼마 전부터 겪게 된 문제들은 대부분 이민자와 유색인 노동자들이 훨씬 오래 전부터 경험했던 것들이고, 이들의 삶은 경제위기 하에서 백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 일부 유색인공동체 활동가는 99%라는 슬로건이 애초부터 미국 자본주의가 인종주의라는 메커니즘을 통해서 작동해온 사실과 오늘날 이민자와 유색인이 더 심한 착취와 더 많은 빚에 시달리고 있는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월스트리트 점거의 의의와 전망
월스트리트 점거와 이것이 촉발한 운동은 여러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이는 경제위기 하에서 고통을 느끼는 일반인들이 티파티 외에 대안이 있다고 느끼게 한다. 오바마 정부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든 온건적 진보세력(자유주의)에게 일종의 대안을 제공하기도 한다. 불과 3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존재하지 않았던 대안을 말이다. 또한 티파티가 공화당의 기반이 됐듯이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은 내년 선거 시기에 민주당에 긴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오바마를 다시 당선시키는 것이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이 강화되면 미국 정치문화가 좌선회하는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랬을 때 일자리 창출이나 일반인에 대한 구제조치가 의회를 통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보다 중요하게는 월스트리트 점거가 노동자운동이나 유색인공동체 급진적 단체들로 하여금 미국 자본주의의 문제점에 도전하도록 하는 장기적인 대중운동의 가능성을 고무시켰다는 점이다.
공화당의 대통령 예비선거 후보인 미트 롬니는 주코티 공원 농성을 ‘계급전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분명 월스트리트 점거는 계급전쟁에 미달한다. 농성 중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근본적인 정치 경제적 변화에 대한 생각이 없다. 그들의 불만은 부자의 탐욕에 대한 비판이다. 금융자유화와 불평등을 극단화하는 자본주의 체계나 인종적, 성적 위계를 통해서 착취를 강화하는 체계에 대한 비판은 아니다.
월스트리트 점거의 분권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이며 자발적인 문화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의 젊은이들에게 매력적인 투쟁형태라는 점도 분명하다. 아랍의 봄, 스페인과 그리스, 한국의 희망버스까지 비슷한 운동문화가 보인다. 월스트리트 점거는 미국의 문화답게 분권화 수준이 극단적이다. 이 때문에 참여하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지만, 월스트리트 점거가 문화운동에서 정치운동으로 전환될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있다. 미래를 예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점거 운동의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이와 같은 전환을 가로막고 있다. 첫째, 월스트리트를 조직한 활동가들은 애초 정치활동을 계획한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둘째, 강령이나 구체적인 투쟁 목표와 요구를 도입하는 순간 투쟁의 활력이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월스트리트 점거에 공식 요구가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오랫동안 자신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해온 수많은 조직들이 자신의 요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뉴욕과 전국 각지에서 노동조합들은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노동권을 사수하기 위해서 싸우고 있다. 주택 압류에 저항하고 긴축정책에 반대하면서 많은 연대체들이 투쟁하고 있고, 공동체조직들은 이주자의 권리와 유색인 대상 경찰폭력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러한 기존 조직들은 월스트리트 점거 운동과 건설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지금까지 기존 조직들이 수행해온 활동을 갑자기 포기하고 ‘축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월스트리트 점거가 기존 조직들의 요구를 공식 요구로 채택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연대를 표현하고 호소하며 월스트리트 점거의 에너지를 빌려 자신들의 투쟁을 가시화하고 강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노력이 이미 부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월스트리트 점거 참가자가 처음으로 대량 연행된 9월 29일 집회는 조지아주에서 사형을 당한 트로이 데이비스(흑인)를 추모하고 인종주의를 영속시키는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세력과 공동으로 진행되기도 했다. 10월 6일에 월스트리트 점거 세력과 반전 세력은 아프간전쟁 10주년을 규탄하기 위해서 워싱턴과 수많은 지역에서 힘을 합쳤다. 기존 진보조직과 노조들이 월스트리트 점거와 개방적으로 연대하는 방안을 찾아내고 역동적 에너지를 끌어들일 수 있다면 월스트리트 점거는 단순한 문화운동을 넘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당장 미국 사회운동의 급진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침체에 빠져있던 미국 사회운동이 다시 활성화되는 하나의 계기라는 점은 분명하다.
최근 북아프리카와 유럽에서 펼쳐진 투쟁에서 용기를 얻어 이제 월스트리트 점거와 같은 흐름이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10월 15일이 국제행동의 날로 지정되었고, 한국에서도 이날 예정되어 있던 ‘빈곤철폐의 날’과 한미FTA 반대 투쟁을 그와 비슷한 방식으로 진행하자는 제안도 나오고 있다. 무정형의 축제를 문화적으로 모방하는 것을 넘어 개방성을 유지하면서도 경제위기와 자본주의의 근본적 모순을 제기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