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87호 | 2012.11.09
패권주의를 청산할 통합지도부를 세우자
2012 전국노동자대회에 부쳐
‘직선제 유예에 관한 규약 개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김영훈 위원장이 사퇴했다. 임기 내에 직선제 실시를 결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준비 부족으로 무산된 데 대해 집행부가 책임을 지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김영훈 집행부가 물러나야 할 이유가 단지 직선제 무산 때문인가. 아니다.
위원장도, 정치세력화도 없는 노동자대회
이번 노동자대회의 슬로건 중 하나는 ‘진보적 정권교체’다. 사실상 문재인-안철수 단일화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뜻이다.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이 대선 후보로 출마한 1997년 이래 조직적 결의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해온 민주노총으로서는 커다란 퇴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나.
2010년 들어선 김영훈 집행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종일관 ‘반 MB 연대’를 선거방침으로 삼아왔다. 민주당과 연합하면 지방선거와 총선에서 진보정당이 약진할 수 있고, 또 대선에서 ‘진보·민주세력’이 집권할 수 있다는 정세 판단에 따른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레 민주노총이 요구하는 노동 의제가 잘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민주노총의 선거방침은 물론 구 민주노동당 당권파, 그러니까 현 통합진보당 잔류 세력의 정치노선을 추종한 결과였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지도부는 2011년에 당 강령을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에서 ‘진보적 민주주의’로 교체한 뒤, ‘노무현의 삶과 참여정부 계승’을 목표로 창당한 국민참여당과 합당했다. 국민참여당과 통합한 마당에 민주당과의 연합을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통진당과 함께 침몰한 민주노총
김영훈 집행부는 ‘통진당을 진보정당으로 볼 수 없다’는 조직 내부의 강력한 반대를 묵살하고 지난 총선에서 통진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밀어붙였다. 또 통진당이 야권연대를 통해 단일화한 민주당 후보를 연대후보로 지지하는 투표방침도 밀어붙였다.
그러나 ‘반 MB 연대’는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급기야 통진당 부정경선 시비가 불거져 나왔다. 한동안 모든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통진당 추문은 진보진영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런데도 집행부는 통진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데에만 100일을 잡아먹었다. 그 사이 조합원들의 사기는 땅바닥에 떨어졌고 현장의 분노는 하늘을 뚫었다.
가을 들어 집행부가 ‘새로운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민주노총 특별위원회’를 꾸린다는 소식에 약간의 희망도 생겼다. 그러나 새정치특위의 대선방침안은 ‘정권교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여전히 야권연대를 대선 전술의 주요한 축으로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문제를 지녔다. 게다가 이정희 후보를 출마시키기로 결정한 통진당 지지 세력의 내부적 반발도 거셌다. 결국 새정치특위의 독자후보 전술은 최종 폐기되고 ‘진보적 정권교체’만 남았다.
‘뻥파업’ 끝에 투쟁계획도 세우지 못한 민주노총
통진당 사태 후폭풍 속에서 민주노총은 공언했던 8월 정치총파업마저 흐지부지 마무리했다. 그에 따라 ‘정리해고 철폐, 비정규직 철폐, 노동악법 재개정’ 등 현 시기 노동자들의 핵심적인 요구를 바탕으로 한 투쟁계획마저 사그라졌다. 이번만은 반드시 총파업을 성사시키겠다며 지역과 현장에서 땀 흘린 간부와 활동가들의 노고는 또 다시 배신당했다.
뿐만 아니다. 9월 들어 쌍용차 회계조작 및 부당 정리해고, 유성·KEC·SJM 등 주요 금속 사업장에 대한 노조파괴 공작, 현대차 사내하청 불법파견 등 현안 투쟁이 호기를 맞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민주노총의 깃발을 볼 수는 없었다. 민주노조의 근간을 치고 들어와 경제위기 고통을 전가하려는 정권과 자본가들의 공세에 비추어볼 때 민주노조의 구심으로서 민주노총의 역할은 너무도 미미했다.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기까지는 민주노총 집행부가 현장의 요구와 실력을 바탕으로 정부와 자본에 맞서 투쟁전선을 구축하기보다는 ‘반 MB 연대’를 통한 제도적 환경 개선에만 골몰한 책임이 크다. 김영훈 집행부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역행하여 민주노총을 통진당 스캔들의 공범으로 전락시킨 책임, 조합원을 무원칙한 야권연대의 들러리로 세운 책임, 이를 둘러싼 조직 내부의 갈등을 조장하여 지도력을 붕괴시킨 책임을 지고 뼈를 깎는 자기비판을 수행해야 한다.
원칙 있는 통합지도부를 구축하자
현재 민주노총은 난파 상태에 처해 있다. 경제위기가 심화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바로 서지 못한다면 노동자 민중의 삶과 노동이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다. 민주노총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갈팡질팡할 경우 2013년 들어설 새로운 정권에 맞설 투쟁 태세조차 갖추지 못한 채 표류할 우려가 크다.
현 김영훈 집행부에 대한 철저한 평가를 통해 민주노조의 원칙에 충실하고 풍부한 투쟁경험을 갖춘 통합적 지도부를 구성해야 한다. 현재 민주노총 내 정파 간 견해 차이가 상당히 큰 상황에서, 통합적 지도력을 구축하지 못한다면 어떤 지도부라도 정파 간 세력구도 속에서 안정적으로 사업을 집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대정부·대자본 투쟁에서 제대로 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현장 투쟁도 후퇴하고 혁신 노력도 성과를 만들어 내기 어려울 것이다.
한편, 민주노총의 개탄스러운 현실을 이유로 제3노총을 건설하자는 주장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분할은 그 자체로 노동자 단결을 저해하므로 바람직하지 않을뿐더러, 현재 시점에서 좌파노총을 분리 건설할 현실적인 동력도 부재하다. 지금은 민주노총을 혁신할 때지 민주노총을 뛰쳐나갈 때가 아니다.
근본적인 혁신으로 민주노조를 재건하자
집행부를 바꾼다고 민주노총이 바로 서는 것은 물론 아니다. 민주노조 운동에 헌신해온 이들의 힘을 모아 민주노총을 근본적으로 쇄신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존 정파구도를 넘어 무너진 현장을 복원하고 민주노조 운동을 강화하는 데 동의하는 활동가들이 지역·산업별로 새롭게 결집해야 한다. 기존의 정파나 의견그룹들이 관성화된 자신의 노조 활동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스스로 혁신하지 않고서는 단 한 걸음도 전진하기 힘들다.
경제위기 하 정권과 자본의 위기 전가 전략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구체적인 전술을 수립하자. 그리하여 현장에서 민주노조의 힘을 키우고 전국적인 투쟁전선을 세우자. 이를 통해 선배 열사들이 염원한 노동해방과 평등사회를 향한 민주노총으로 거듭나자. 이것이 전태일 열사의 죽음을 기리는 올바른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