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1호 | 2012.12.05
여성없는 여성대통령 논란
여성‘대통령’이 아니라 여성‘운동’이 필요하다
지난 11월 18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는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대선 슬로건으로 제시하면서, “가정을 지켜온 어머니의 마음 같은 섬세함과 강인함으로 (나라를) 반드시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슬로건은 선거전략적인 측면에서 박근혜 후보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진입장벽에 부딪히고 부당한 차별을 받아온 많은 여성들이 소위 금녀의 영역인 고위직에 여성이 진출하는 것 자체에 긍정성을 부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해보인다. 이 때문에 이번 슬로건이 특히 수도권 중산층 고학력 여성으로부터의 득표를 목표로 한다는 분석도 있다. 또한 여성의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것은 권위주의적인 기존 이미지를 불식시키는 효과도 가진다. 어쨌든 슬로건 발표 직후 박근혜 후보에 대한 여성층 지지율은 소폭 상승했다.
박근혜 후보의 일가정 양립 정책
그렇다면 박근혜 후보의 여성정책은 과연 여성에게 긍정적일까? 박근혜 후보의 6대 여성정책을 살펴보면,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활성화함과 동시에 출산을 장려하고 이를 지원하는 내용이 그 핵심을 차지한다. 1번부터 4번까지 정책은 모두 일가정 양립 및 출산장려·지원 정책이다. 이는 노무현·이명박 정부 시기 추진된 정책을 계승한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의 경제활동이 증가한 것은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결과이기도 하지만, 경제위기 상황에서 남성 가장이 받을 수 있는 임금만으로 생계유지가 어려워 맞벌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중요한 원인이다. 대부분 낮은 임금을 받는 여성노동자들은 오랜 시간 일할 수밖에 없고 또 이로 인한 가정 내 공백을 채울 공적 사회서비스가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저출산 현상도 동시에 나타났다.
문제의 원인이 경제위기, 여성노동자의 저임금과 고용불안, 그리고 부족한 공공서비스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가 제시한 정책은 핵심을 벗어나 있다. 고학력 여성의 정부 요직 진출, 저소득층 가구의 출산 부담 완화 같은 정책들은 여러 계층의 여성들이 겪는 고충을 개별적으로 지원하여 증상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둘 뿐이다. 문제의 원인은 그대로 둔 채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생색내기식 정책인 것이다.
또한 박근혜 후보는 여성의 경제활동 복귀를 위한 지원으로 직업훈련과 알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먼저 여성의 경력단절이 왜 발생하는지 그 원인부터 생각해봐야 한다. 여성노동자에게 당연히 보장되어야 할 출산휴가, 육아휴직은 여전히 소수 정규직을 제외하면 사용하기 어렵다. 임신을 하면 암묵적으로 퇴사를 종용받는 경우도 많다. 박 후보의 정책에는 그 동안 정부가 방관해온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빠져있다.
경력단절 이후 여성이 재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이유 역시 직업훈련과 알선이 부족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IMF 이후 전체 노동자의 고용률이 하락하고 비정규직 저임금 일자리가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여성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상대적으로 더욱 열악하다. 가령 여성노동자의 59.4%가 비정규직이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임금은 정규직 남성노동자의 약40%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정부와 기업이 여성은 일도 하고 가정도 보살펴야 한다는 이유로 단시간 비정규직 여성 일자리를 늘려왔기 때문이다. 또한 맞벌이가 필수가 되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성 가장이 생계를 부양한다는 편견으로 여성의 노동은 보충적인 것,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며 낮은 임금을 강요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급격히 증가한 보육, 간병 등 기혼 여성이 주로 일하는 사회서비스 일자리들이 대부분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였다는 사실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런 조건에서는 직업훈련과 알선을 해봤자 대부분 여성노동자들은 저임금 비정규직 일자리에 다시 고용될 뿐이다. 연령별 여성 고용현황을 살펴보면 40세 이전까지는 정규직이 비정규직 보다 많지만, 40세 이후로는 비정규직이 더 많고 특히 50세 이상부터는 취업할 수 있는 정규직 일자리 자체가 급격히 줄어든다. 이처럼 저임금과 고용불안을 감내하도록 구조화된 여성 노동시장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직업훈련과 알선이 아무리 확대되더라도 그 정책은 일부 고학력 여성의 경력단절을 완화하는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이다.
이처럼 박근혜 후보의 정책은 여성의 저임금과 고용불안, 낮은 노동조건, 공공서비스의 부족 등 핵심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여전히 여성에게 값싼 노동력이자 무급의 가사노동력으로서 이중의 부담을 지우면서 경제위기와 재생산의 위기를 지연시키는 수단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어려움이 있어도 어쨌든 가사와 양육은 여성이 모두 책임져야하고 경제성장을 위해 출산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하는 효과를 가진다.
박근혜 후보의 아동 성범죄 강경대응 정책
박근혜 후보는 줄곧 아동 및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에 대한 강경대응을 강조해왔는데, 최근 여성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이 확정됨에 따라 목소리를 더욱 높이고 있다. 지난 11월 20일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돈 크라이 마미> 시사회에 참석한 박근혜 후보는 아동 및 미성년자 대상 성범죄에 대해 “사형까지 포함해서 아주 강력한 엄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 그는 ‘2005년 한나라당 당대표 시절 전자발찌법을 통과시켰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이 외에도 박근혜 후보는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파괴범, 불량식품 등 4대 사회악 척결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와 같은 정책들은 사회안전과 관련된 정책들이지만, 동시에 (특히 자녀를 둔) 여성들과의 공감폭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마련된 여성정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범죄를 몇몇 ‘비정상적 개인’에 의해 발생하는 것으로 보고, 전자발찌, 신상공개, 화학적 거세 등 이들에 대해 감시와 처벌을 강화하는 것은 성범죄를 예방하는 데 한계적이다. 일반적으로 성폭력은 개인들 간의 갈등이나, 이상이 있는 사람의 일탈적 행동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성폭력은 술을 마시고 행한 실수, 좋아하는 마음을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한 일, 변태와 같이 비정상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 저지르는 범행 등으로 풀이되곤 한다. 최근 연이어 발생한 성범죄에 대한 반응에서도 이러한 접근방식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성범죄자들이 아동포르노를 즐겨봤다거나, 게임에 중독되었다거나, 대인 관계가 단절되었다는 등 그들의 비정상적인 특징을 범행의 원인으로 연결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방식이 성폭력과 성범죄의 원인을 제대로 진단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성폭력은 여성을 성욕 충족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회가 양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남성의 성문화 일반은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하기보다는 성적 대상으로 취급한다. 대중매체나 인터넷에서 여성의 노출 사진과 영상이 쏟아져 나오고, 섹시함을 강조한 광고를 통해 소비를 부추기는 행태가 일상화 되어있다. 또한 술시중을 드는 서비스부터, 노래방 도우미, 성매매까지 다양한 형태의 성산업이 대규모로 존재한다. 이처럼 여성을 쾌락의 수단으로 삼는 성문화에 익숙해진 남성들이 여성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성욕을 표출하면서 다양한 성폭력이 발생한다. 성범죄는 그러한 성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이다.
그런 점에서 성범죄에 대한 분노여론을 자신에 대한 지지여론으로 전환시키려는 박근혜 후보의 전략은 성범죄를 실질적으로 예방하는 길과는 거리가 멀다. 실질적인 성범죄 예방을 위해서는 여성억압적인 사회구조와 성차별적 인식을 바꿔나가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들이 사회적 문제를 변화시키는 주체로 나서 자신의 지역과 공동체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을 전개할 때 실질적인 변화는 가능하다. 특히 여성 스스로 자신의 권리를 쟁취하고 사회를 변화시키는 운동이 형성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안타까운 여성대통령 논쟁
안타깝게도 박근혜의 여성대통령 슬로건을 계기로 촉발된 논쟁 속에서도 역대 정부의 여성정책에 대한 반성, 진정 여성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성찰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박근혜 후보의 슬로건에 대해 민주통합당과 문재인 후보 측은 “출산과 보육에 대해 고민하는 삶을 살지 않은 박근혜 후보에게 여성성은 없다”, “박 후보는 생물학적으로 여성일 뿐”이라고 논평했다. 황상민 교수는 ‘결혼하고 애를 낳고 키워보지 않은 박 후보는 생식기만 여성이지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한 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혼과 출산을 하지 않으면 여성에 미달한다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다. 또한 박근혜가 분만대 위에서 박정희를 출산한 그림 <골든타임>은 더 큰 논란을 만들었다. 박근혜 처녀 논란 및 박근혜 출산설에 착안해 딸이 아버지를 낳는 장면을 그려넣은 이 그림은 정치적 풍자라기보다는 여성성에 대한 공격과 조롱이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민주통합당과 문재인 후보 측에 대해 “미혼여성에 대한 집단모독”이라고 반격했고, 나아가 김성주 새누리당 공동선대위원장은 박후보의 인생을 “국가와 결혼한 삶”이라고 주장하며 기묘한(?) 방법으로 박근혜 후보를 방어했다. 정말 어처구니없고 안타까운 논쟁 구도이다.
사실 박근혜 후보의 슬로건에 진정성이 있는지, 그의 정책이 여성의 권리 증진에 도움이 될 것인지는 그의 과거 정치행적과 현 정책을 두고 논쟁하면 될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의 결혼 및 출산 여부가 논란의 중심에 자리 잡은 현실은 여성과 여성정치인을 바라보는 기성 정치권의 시각이 어떠한지 잘 보여준다. 결혼과 출산은 여성의 선택의 문제이고, 또 결혼, 출산, 보육의 경험 여부 자체가 여성정치인으로서의 자질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라는 상식이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번에 박근혜 후보가 여성대통령 슬로건을 내세우게 된 데에는 지난 10여 년 간 민주당과 주류 여성운동을 중심으로 여성의 정치세력화를 추구하면서, 여성=부드러움, 여성=반부패, 여성의 정치진출=진보라는 등식을 강화해온 것도 일조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명숙 의원이 2006년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로 임명되자 여성단체들은 뜨겁게 환호했고 여성으로서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깨끗한 소통의 새로운 정치를 열 것이라 기대했다. 같은 맥락에서 민주통합당 여성 의원들은 이번 박근혜 여성대통령 슬로건과 관련 “박 후보는 여성 대통령의 덕목인 평등, 평화지향성, 반부패, 탈권위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논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등식은 현실과 맞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여성의 기존 성역할을 재생산한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박근혜 후보는 “국민이 여성을 대통령으로 선택한다는 것, 그 자체가 변화와 쇄신”이고,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민생을 챙기는 리더십”이 필요하며, 가정주부가 가계부를 쓰듯 “나라살림 가계부”를 공개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부당한 등식을 차용해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여성대통령 슬로건은 민주당과 주류 여성운동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빈곤과 차별을 확대하는 신자유주의에 맞서 대다수 여성노동자의 대중운동을 바탕으로 여성의 권리를 확대하기 위한 포괄적 운동전략 보다는 여성의 정치권 진입에 급급했던 여성운동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한편, 박근혜 후보와는 정반대로 문재인 후보는 대선 기간 내내 특전사 경력을 강조해왔다. 문재인 후보는 지난 11월 1일 강원 지역을 찾아 “군대도 안 간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이 수두룩한 정당이 어떻게 안보를 말할 수 있나”며 “나는 6.25전쟁 때 북한 체제가 싫어 피란 온 피란민의 아들이고 특전사 군복무로 국방의 의무를 다했다. 안보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후보가 바로나 문재인이라고 자부한다”고 말한 바 있다. 4.11 총선 당시 새누리당이 싹쓸이한 강원지역 그리고 남성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자신의 남성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여성성을 강조하는 박근혜 후보와 남성성을 강조하는 문재인 후보는 과거 지배 양당 간 논쟁구도를 뒤바꿔놓은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 후보의 행보는 기존 지지층으로부터 일정한 반발을 무릅쓰고 진행되는 것이다. 보수주의 세력 내에서는 여성의 정치참여를 곱지 않게 보는 시각이 있고, 자유주의 세력 내에는 문재인 후보의 행보를 씁쓸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있다. 그럼에도 두 후보가 이런 전략을 선택한 것은 양자 구도에서 어차피 자신에게 투표할 고정 지지층의 반발을 일정부분 무릅쓰더라도 상대방의 지지층을 흔들 전략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의 여성대통령론을 계기로 여성에 대한 많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지만 정작 여성의 삶의 개선과 권리의 확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빠져있다. 여성의 정치권 진입에 급급했던 기존 여성운동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여성의 빈곤과 차별을 확대하는 신자유주의에 맞선 포괄적인 운동전략을 만들어나가야 한다.그 과정에서 여성노동자가 직접 나서서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지역사회를 바꿔나가면서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