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무엇을 성찰해야 하나?
소위 ‘내란음모’ 사태를 바라보는 시각
정권과 우파의 ‘종북’ 딱지 붙이기 마녀사냥이 연일 무차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진보=통합진보당=종북이라는 부당전제를 깔고 있는 이데올로기 공세의 노림수는 분명해 보인다. 종북과 폭력의 이미지로 얼룩진 통합진보당이라는 ‘약한 고리’를 타격하여 진보의 정당성과 도덕성을 허물어뜨리려는 것이다. 일종의 광기라 칭할 수밖에 없는 오늘의 상황에서 그나마 ‘애정 어린’ 비판을 찾는다면 진보가 ‘낡은 소영웅주의적 정신병’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전향한 청산주의자들의 고해성사 정도일 것이다.
진보의 위기 대응 태도
공안당국의 물리적 탄압에 뒤이은 이러한 여론의 십자포화 속에서 진보는 궁지에 처한 듯하다. 한편에 ‘자신은 위기와 무관하다’는 정의당의 기회주의적 태도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위기의 원인은 외부의 탄압에 있다’는 통합진보당의 자기변호론적 태도가 있을 텐데, 둘 다 지금의 위기를 타개해나가기 위한 적절한 방법은 아니다. 전자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면, 후자는 통합진보당의 위기가 진보라는 표상 자체의 위기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민주당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논리를 동원하여 ‘진보정당’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정의당은 논외로 하자. 통합진보당의 태도는 내란음모 ‘조작’을 둘러싼 장기간의 공방을 통해 일부 법률적 승리와 내부 결속의 강화라는 성과로 귀결될지는 몰라도, 진보의 정치적 승리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중운동이 정권의 공안탄압과 우파의 여론공세에 맞서 함께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과정에서 뼈를 깎는 자성을 통해 추락한 진보의 표상을 새롭게 재구성하지 못한다면 대중의 신뢰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이때 ‘나는 통합진보당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손쉬운 방법이지만,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통합진보당이 기층 대중운동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관건은 이들과의 분리가 아니라 민중운동의 많은 부분을 점한 민족해방 이념과 노선에 대해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토론하는 것이다.
평화주의적 행동수단이었나
이를 위해 오늘의 사태를 야기한 복합적 요인들을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반기부터 연달아 발생하는 통합진보당을 포함한 통일운동 진영에 대한 정권의 공안탄압을 동아시아·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정세 속에서 보수세력의 대응이라는 큰 틀에서 파악할 수 있어야, 여기서 나타나는 이석기 의원 등의 정세인식이나 전략전술의 문제점을 북한 사회주의 건설의 곤란과 대남전략의 변화 추이에 조응하는 민족해방 이념·노선의 모순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안당국이 공개한 5월 회합 녹취록에 따르면, 이석기 의원 등은 북미간의 첨예한 군사적 대치 구도를 ‘불의의 전쟁’과 ‘정의의 전쟁’이라는 구도로 파악하면서 북한의 핵무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북미 대결 구도에서 북한의 핵무장이 평화협정 체결의 지렛대라는 이들의 정세인식은 역관계에 대한 오판일 뿐더러 핵전쟁의 특성에 대해 맹목적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위험하다. 또 이들은 주요 시설에 대한 타격을 은밀히 수행하는 것을 ‘유사시’ 행동지침으로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회운동이 채택하는 반전평화의 보편적 행동수단이 될 수 없다.
이는 세간에서 흔히 조롱하듯이 ‘시대착오적’이라거나 또는 단지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다. 평화운동의 역사 또는 사회주의의 전통에서 전쟁을 방지하거나 중단시키기 위한 최선의 행동으로 채택되었던 대중적 반전시위나 총파업이 아니라 일종의 군사주의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들이 ‘유사시’에 남한의 대중운동에 기초한 전술이 아니라 북한의 군사적 역량을 지지·보족한다는 관념에 기초한 전술을 고려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처럼 현재 한반도 정세를 미 제국주의의 ‘불의의 전쟁’과 북한 사회주의의 ‘정의의 전쟁’이라는 구도로 분석하고 군사주의에 입각한 전술방침을 수립하는 것은 비단 몇몇 특정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민족해방 계열 전반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전략적 관념이다. 따라서 민족해방 노선의 역사적 모순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민족해방 노선은 진지한 검토 대상이 되어야 하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북한이 평화공존론을 채택한 이래 남한의 민족민주 운동은 ‘사회주의 조국’으로서 북한을 보위하는 역할로 그 지위를 설정한다. 이러한 시도는 통일혁명당, 인혁당재건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시도로 이어지고, 이는 1985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계승된다. 1980년대 북한은 1970년대 이후 평화정착 및 남북합작방식의 통일론을 재확인하면서 그 전제조건으로서 민주자주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이에 조응하여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성격논쟁을 거치며 ‘식민지반봉건/반자본주의사회론-민주자주정부론-완전연방제론’으로서 민족해방 노선이 정립된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1990년대에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는 와중에 경제위기와 함께 에너지·식량위기가 발생하면서 북한경제는 붕괴한다. 경제위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선군정치가 출현하고, 극단화된 스탈린주의로서 수령론을 핵심으로 하는 김일성주의는 부자세습이라는 형태로 재생산된다. 2000년대 들어 북한의 대외전략은 ▲북미수교를 통한 안전보장의 획득 ▲북일수교를 통한 경제적 지원의 획득 ▲남북관계의 안정화(2국가 2체제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러나 한미일 삼각동맹의 압박 속에 본격적인 핵무장을 추진한다.
1990년대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북한 사회주의의 고립, 그리고 통일운동의 분열 등 주객관적 정세의 변화 속에서 민족해방 진영은 전략의 동요를 겪으며 조직적으로도 이완된다. 그러던 중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체결되자 민족해방 진영은 이를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로 규정하고 민족민주전선 재편을 주장한다. 남한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의 이면에 다르지 않은 ‘햇볕정책’이 추진되고 북한에서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협상의 지렛대로 ‘핵무장’이 추진되는 정세 속에서, 민족해방 진영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남한의 점진적 개혁을 통해 이를 보완한다는 취지에서 기존의 민족민주전선론을 다시 정식화한 것이다. 과거 민족해방 진영의 전략이 민족민주전선체에 기초한 민자정-연방제라는 단계론적 변혁·통일론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 민족민주정당에 기초해서 민자정-(낮은 단계의)연방제로 이행한다는 이들의 조직노선 변화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진로였다. 이후 민족해방 진영은 민주노동당 조직적 입당, 자주민주통일 전국현장조직 건설, 전국민중연대-통일연대 건설로 민족민주전선 재편을 현실화한다.
한반도의 위기, 민중운동의 위기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위기와 대화가 반복되는 교착 국면에서 북한은 협상의 지렛대로서 핵·미사일 역량을 점차 제고한다.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대응하여 미국은 군사적 압박, 경제적 제재, 외교적 고립을 통해 대북 봉쇄를 강화하였고, 이는 현재 오바마 정부의 ‘은근한 무시’와 ‘전략적 인내’ 정책기조에 반영되고 있다. 금융위기·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의 ‘태평양으로의 선회’에 따라 한미동맹 및 미일동맹도 점점 호전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는 미국과 ‘글로벌 파트너십’을 체결하며 하위 파트너로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난 상반기 한반도에서는 한미동맹 대 북한의 군사적 대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첨예하게 펼쳐졌다. 전략폭격기 B-52, 스텔스폭격기 B-2, 핵잠수함 샤이엔을 동원한 한미동맹의 대북 핵위협 속에서 북한도 ‘정전협정 백지화,’ ‘핵 선제 타격권 행사,’ ‘남북불가침합의 무효,’ ‘남북 관계 전시상황 돌입’ 등으로 맞섰다.
이런 ‘비상한’ 정세에서, 남한의 민족해방 진영은 북한의 핵무장을 대미 협상수단 또는 자위수단으로서 인정하거나 평화협정 체결의 결정적인 지렛대라며 옹호했다. 그러나 인류의 절멸을 예고하는 핵전쟁에서 ‘불의의 전쟁’과 ‘정의의 전쟁’의 구별은 애당초 무의미하다. 대신 평화라는 이상에 따라 사회운동은 ‘일방적 군비 축소’와 ‘군사동맹 폐기’와 같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채택해야 마땅하다.
북한의 핵무장이 북한 사회주의 건설의 곤란을 반증한다면, 그에 조응하는 남한 민족해방 진영의 핵무장 옹호는 역설적이게도 남한 사회변혁 전망의 빈곤을 반증한다. 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장악한 민족해방 진영은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한 뒤 국민참여당과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을 결성했다. 야권연대나 연립정부 참여를 통해 민주자주정부를 수립한다는 민족민주전선론에 따른 결과였다. 정당운동뿐만 아니라 대중조직과 연대체 수준에서 공히 민족민주전선을 강화한다는 이러한 민족해방 진영의 ‘10년의 전망’은 민주노동당의 분열 외에도 민주노총의 정파적 갈등, 전국민중연대의 해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민족해방 진영의 주류로 부상한 ‘경기동부연합’ 또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모습은 민족해방 노선의 모순이 극적으로 표출된 한 사례일 뿐이다.
사태에 대한 반성
다시 말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비단 통합진보당에 대한 공안탄압으로부터 발생하는 위기가 아니라 진보의 표상, 그러니까 민중운동의 이념과 노선에 대한 대중적 불신으로부터 발생하는 위기다. 따라서 공안탄압에 맞선 공동 행동뿐만 아니라 이념과 노선을 성찰하고 혁신하기 위한 공동 토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민족주의가 아니라 평화주의로서 국제주의를 이념으로 채택하는 것, 모종의 전략적 관념을 전제한 민족민주전선론을 정정하고 남한 사회변혁의 새로운 전망을 사고하는 것, 민중운동의 분열과 갈등을 유발한 조직노선을 반성하고 단결과 혁신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혁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위기를 부정하는 것은 위기를 지연하는 것일 뿐, 사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뼈아픈 일이지만 오류를 인정하고 모순을 작동시킬 때 비로소 위기는 해결될 것이다.
진보의 위기 대응 태도
공안당국의 물리적 탄압에 뒤이은 이러한 여론의 십자포화 속에서 진보는 궁지에 처한 듯하다. 한편에 ‘자신은 위기와 무관하다’는 정의당의 기회주의적 태도가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위기의 원인은 외부의 탄압에 있다’는 통합진보당의 자기변호론적 태도가 있을 텐데, 둘 다 지금의 위기를 타개해나가기 위한 적절한 방법은 아니다. 전자가 자신의 알리바이를 입증하기 위해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는’ 우를 범하고 있다면, 후자는 통합진보당의 위기가 진보라는 표상 자체의 위기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에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민주당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논리를 동원하여 ‘진보정당’임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정의당은 논외로 하자. 통합진보당의 태도는 내란음모 ‘조작’을 둘러싼 장기간의 공방을 통해 일부 법률적 승리와 내부 결속의 강화라는 성과로 귀결될지는 몰라도, 진보의 정치적 승리로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민중운동이 정권의 공안탄압과 우파의 여론공세에 맞서 함께 싸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 과정에서 뼈를 깎는 자성을 통해 추락한 진보의 표상을 새롭게 재구성하지 못한다면 대중의 신뢰는 회복되지 못할 것이다. 이때 ‘나는 통합진보당이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손쉬운 방법이지만, 올바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통합진보당이 기층 대중운동과 연계되어 있기 때문인데, 따라서 관건은 이들과의 분리가 아니라 민중운동의 많은 부분을 점한 민족해방 이념과 노선에 대해 합리적으로 비판하고 토론하는 것이다.
평화주의적 행동수단이었나
이를 위해 오늘의 사태를 야기한 복합적 요인들을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상반기부터 연달아 발생하는 통합진보당을 포함한 통일운동 진영에 대한 정권의 공안탄압을 동아시아·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정세 속에서 보수세력의 대응이라는 큰 틀에서 파악할 수 있어야, 여기서 나타나는 이석기 의원 등의 정세인식이나 전략전술의 문제점을 북한 사회주의 건설의 곤란과 대남전략의 변화 추이에 조응하는 민족해방 이념·노선의 모순이라는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안당국이 공개한 5월 회합 녹취록에 따르면, 이석기 의원 등은 북미간의 첨예한 군사적 대치 구도를 ‘불의의 전쟁’과 ‘정의의 전쟁’이라는 구도로 파악하면서 북한의 핵무장을 정당화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은 북미 대결 구도에서 북한의 핵무장이 평화협정 체결의 지렛대라는 이들의 정세인식은 역관계에 대한 오판일 뿐더러 핵전쟁의 특성에 대해 맹목적이라는 점에서 지극히 위험하다. 또 이들은 주요 시설에 대한 타격을 은밀히 수행하는 것을 ‘유사시’ 행동지침으로 고려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사회운동이 채택하는 반전평화의 보편적 행동수단이 될 수 없다.
이는 세간에서 흔히 조롱하듯이 ‘시대착오적’이라거나 또는 단지 ‘폭력적’이어서가 아니다. 평화운동의 역사 또는 사회주의의 전통에서 전쟁을 방지하거나 중단시키기 위한 최선의 행동으로 채택되었던 대중적 반전시위나 총파업이 아니라 일종의 군사주의를 모방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이들이 ‘유사시’에 남한의 대중운동에 기초한 전술이 아니라 북한의 군사적 역량을 지지·보족한다는 관념에 기초한 전술을 고려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처럼 현재 한반도 정세를 미 제국주의의 ‘불의의 전쟁’과 북한 사회주의의 ‘정의의 전쟁’이라는 구도로 분석하고 군사주의에 입각한 전술방침을 수립하는 것은 비단 몇몇 특정인의 문제라기보다는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민족해방 계열 전반이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전략적 관념이다. 따라서 민족해방 노선의 역사적 모순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 민족해방 노선은 진지한 검토 대상이 되어야 하나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을 계기로 북한이 평화공존론을 채택한 이래 남한의 민족민주 운동은 ‘사회주의 조국’으로서 북한을 보위하는 역할로 그 지위를 설정한다. 이러한 시도는 통일혁명당, 인혁당재건위, 남조선민족해방전선의 시도로 이어지고, 이는 1985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계승된다. 1980년대 북한은 1970년대 이후 평화정착 및 남북합작방식의 통일론을 재확인하면서 그 전제조건으로서 민주자주정부 수립을 주장한다. 이에 조응하여 1980년대 중후반 한국사회성격논쟁을 거치며 ‘식민지반봉건/반자본주의사회론-민주자주정부론-완전연방제론’으로서 민족해방 노선이 정립된다.
그러나 탈냉전 이후 1990년대에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는 와중에 경제위기와 함께 에너지·식량위기가 발생하면서 북한경제는 붕괴한다. 경제위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선군정치가 출현하고, 극단화된 스탈린주의로서 수령론을 핵심으로 하는 김일성주의는 부자세습이라는 형태로 재생산된다. 2000년대 들어 북한의 대외전략은 ▲북미수교를 통한 안전보장의 획득 ▲북일수교를 통한 경제적 지원의 획득 ▲남북관계의 안정화(2국가 2체제 또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초점을 맞추는데, 그러나 한미일 삼각동맹의 압박 속에 본격적인 핵무장을 추진한다.
1990년대 이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북한 사회주의의 고립, 그리고 통일운동의 분열 등 주객관적 정세의 변화 속에서 민족해방 진영은 전략의 동요를 겪으며 조직적으로도 이완된다. 그러던 중 김대중 정부에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이 체결되자 민족해방 진영은 이를 ‘조국통일의 대사변기’로 규정하고 민족민주전선 재편을 주장한다. 남한에서는 신자유주의적 정책개혁의 이면에 다르지 않은 ‘햇볕정책’이 추진되고 북한에서는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협상의 지렛대로 ‘핵무장’이 추진되는 정세 속에서, 민족해방 진영은 북한의 안전을 보장하고 남한의 점진적 개혁을 통해 이를 보완한다는 취지에서 기존의 민족민주전선론을 다시 정식화한 것이다. 과거 민족해방 진영의 전략이 민족민주전선체에 기초한 민자정-연방제라는 단계론적 변혁·통일론이었다면, 2000년대 이후 민족민주정당에 기초해서 민자정-(낮은 단계의)연방제로 이행한다는 이들의 조직노선 변화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진로였다. 이후 민족해방 진영은 민주노동당 조직적 입당, 자주민주통일 전국현장조직 건설, 전국민중연대-통일연대 건설로 민족민주전선 재편을 현실화한다.
한반도의 위기, 민중운동의 위기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위기와 대화가 반복되는 교착 국면에서 북한은 협상의 지렛대로서 핵·미사일 역량을 점차 제고한다. 북한의 ‘벼랑끝 전술’에 대응하여 미국은 군사적 압박, 경제적 제재, 외교적 고립을 통해 대북 봉쇄를 강화하였고, 이는 현재 오바마 정부의 ‘은근한 무시’와 ‘전략적 인내’ 정책기조에 반영되고 있다. 금융위기·경제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미국의 ‘태평양으로의 선회’에 따라 한미동맹 및 미일동맹도 점점 호전적으로 재편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 이어 박근혜 정부는 미국과 ‘글로벌 파트너십’을 체결하며 하위 파트너로서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지난 상반기 한반도에서는 한미동맹 대 북한의 군사적 대결이 그 어느 때보다도 첨예하게 펼쳐졌다. 전략폭격기 B-52, 스텔스폭격기 B-2, 핵잠수함 샤이엔을 동원한 한미동맹의 대북 핵위협 속에서 북한도 ‘정전협정 백지화,’ ‘핵 선제 타격권 행사,’ ‘남북불가침합의 무효,’ ‘남북 관계 전시상황 돌입’ 등으로 맞섰다.
이런 ‘비상한’ 정세에서, 남한의 민족해방 진영은 북한의 핵무장을 대미 협상수단 또는 자위수단으로서 인정하거나 평화협정 체결의 결정적인 지렛대라며 옹호했다. 그러나 인류의 절멸을 예고하는 핵전쟁에서 ‘불의의 전쟁’과 ‘정의의 전쟁’의 구별은 애당초 무의미하다. 대신 평화라는 이상에 따라 사회운동은 ‘일방적 군비 축소’와 ‘군사동맹 폐기’와 같은 ‘적극적 평화주의’를 자신의 이념으로 채택해야 마땅하다.
북한의 핵무장이 북한 사회주의 건설의 곤란을 반증한다면, 그에 조응하는 남한 민족해방 진영의 핵무장 옹호는 역설적이게도 남한 사회변혁 전망의 빈곤을 반증한다. 민주노동당의 당권을 장악한 민족해방 진영은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하고 ‘진보적 민주주의’를 채택한 뒤 국민참여당과 합당하여 통합진보당을 결성했다. 야권연대나 연립정부 참여를 통해 민주자주정부를 수립한다는 민족민주전선론에 따른 결과였다. 정당운동뿐만 아니라 대중조직과 연대체 수준에서 공히 민족민주전선을 강화한다는 이러한 민족해방 진영의 ‘10년의 전망’은 민주노동당의 분열 외에도 민주노총의 정파적 갈등, 전국민중연대의 해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과정에서 민족해방 진영의 주류로 부상한 ‘경기동부연합’ 또는 통합진보당 당권파의 모습은 민족해방 노선의 모순이 극적으로 표출된 한 사례일 뿐이다.
사태에 대한 반성
다시 말하지만, 현재의 위기는 비단 통합진보당에 대한 공안탄압으로부터 발생하는 위기가 아니라 진보의 표상, 그러니까 민중운동의 이념과 노선에 대한 대중적 불신으로부터 발생하는 위기다. 따라서 공안탄압에 맞선 공동 행동뿐만 아니라 이념과 노선을 성찰하고 혁신하기 위한 공동 토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민족주의가 아니라 평화주의로서 국제주의를 이념으로 채택하는 것, 모종의 전략적 관념을 전제한 민족민주전선론을 정정하고 남한 사회변혁의 새로운 전망을 사고하는 것, 민중운동의 분열과 갈등을 유발한 조직노선을 반성하고 단결과 혁신의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혁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위기를 부정하는 것은 위기를 지연하는 것일 뿐, 사태를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뼈아픈 일이지만 오류를 인정하고 모순을 작동시킬 때 비로소 위기는 해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