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73호 | 2014.07.12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한국 정부는 진정 우려하나?
무력화된 일본 평화헌법, 눈앞에 다가온 한일군사동맹
2013년 7월 29일, 일본 아소 다로 부총리는 국가기본문제연구소가 주최한 한 강연에서 세계대전이전 나치 시절에 대해 설명하며 “독일 바이마르 헌법은 어느새 바뀌어 있었다. 아무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변했다. 그 수법을 배우면 어떤가”라고 말했다.
그 수법이란 1933년 독일 나치가 제정한 수권법(전권위임법이라고도 부른다)을 일컫는 것이었다. 수권법의 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로 그 내용은 이러했다. ‘독일의 법률은 행정부에 의해서도 제정될 수 있다’, ‘행정부는 헌법에서 정한 것과 다른 내용의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경우 입법 기관과의 합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등. 즉 헌법을 개정하지 않되 행정부가 전권을 행사하여 헌법을 무력화한 것이다.
따라서 아소의 말은 개헌을 당당히 내세워 국민의사를 묻고 대논쟁을 하는 정식 절차가 아니라 슬그머니 헌법의 핵심을 바꿔버리고,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 있는 식으로 하자는 뜻이었다. 불행히도 아소 다로의 말은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일본 우익의 단순한 ‘망언’ 해프닝이 아니었다. 2014년 7월 1일 일본 각의(국무회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결정문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평화헌법 해석개헌의 일본 현대사
일본의 ‘해석개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본 현대사는 곧 평화헌법(헌법 9조) 해석개헌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1946년에 수립된 일본 헌법은 9조에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치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자위대 보유, 미일동맹과 미군주둔은 끊임없는 해석개헌의 원천이 되었다.
1970년대 일본은 모든 국가가 가지고 있으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자위권’에 근거해 자위능력을 가지며, 평화헌법조차 이를 부정할 수 없다는 새로운 논리를 고안했다. 이 역시 헌법의 재해석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상의 헌법수정, 즉 해석개헌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72년 다나카 키쿠에이 내각은 “타국에 가해진 무력공격을 저지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고, 1981년 스즈키 젠코 내각도 같은 입장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런 집단적 자위권 금지 역시 자위권 행사로 나아가기 위한 겉치레였다.
악명 높은 매파 정치인 나카소네를 수반으로 하는 일본 정부는 1978년에 체결된 미일 방위지침(미일 가이드라인)에 따라 해상자위대가 서태평양에서 해상통로를 수비하기 위해 미국의 제7함대에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즉 소련 함대를 봉쇄하기 위해 세 군대의 해협을 일본이 담당하게 되는데 이는 1970년대에 고안된 ‘자위권’ 개념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방위지침의 법적 지위 문제가 실로 심각한 쟁점이었다. 방위지침이란 1960년 이래 활동하고 있던 미일 안보자문위원회의 하나의 실행위원회인 ‘방위협력을 위한 부속위원회’에 의해 수행되는 낮은 수준의 실행문서였다. 정식 국제조약이 아니므로 정부 대표에 의해 서명되지도 않았고 의회에서 비준을 거치지도 않았다. 그것은 단지 발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즉 행정부 위원회끼리 합의한 ‘지침’이 헌법을 능가하게 된 것이다.
냉전 해체 이후 한층 강화된 해석개헌 행보
나아가 일본은 냉전이 끝나자마자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모든 겉치레를 내던져버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일본 정부는 국제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해외파병금지’라는 선을 넘었다.
또한 1996년 클린턴 대통령과 하시모토 총리는 ‘미일안전보장공동선언’(신안보선언)을 발표했고, 이는 1997년 미일 방위지침 개정으로 이어졌다. 개정된 방위지침의 핵심 쟁점은 ‘주변사태’ 발생 시 미국과 일본이 합동작전을 펼치고 일본에서 병참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주변사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주변은 어디까지고 사태란 무엇인가, 주변에서 사태가 벌어졌다고 누가 판단하고 결정할 것인가?
이에 대해 지침은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다만 ‘주변사태는 일본의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 개념은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다’고 말할 뿐이었다.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는 말의 진의는 곧 북한, 대만해협뿐 아니라 미국이 요구한다면 세계 어느 곳이라도 일본의 군사개입이 있을 수 있다는 뜻으로 유추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모호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1999년에 일본 의회는 관련 법률인 주변사태법 제정안, 자위대법 개정안, 일미물품용역상호제공협정(ACSA) 개정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이제 일본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명시적으로 허용한다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자위대에 대한 모든 제약이 사라진다. 게다가 비핵 3원칙(핵무기 소유, 제조, 반입 금지)마저 사실상 껍데기일 뿐이지 않은가. 지금 당장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 것은 미국이 허용하지 않겠지만, 언제라도 핵무장이 가능한 상태에 있지 않으면 일본의 세계전략을 전개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우익의 확고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 정말 우려하고 있나?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7월 1일 한국 외교부는 “한반도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우리의 요청 및 동의가 없는 한 용인될 수 없다”며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한중 정상회담에선 외교안보수석을 통해 한국과 중국 정상이 “일본 정부가 자국민의 지지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정책을 지양하고 평화헌법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투명성있게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실제로 얼마나 ‘우려’하고 있을까? 한중 정상회담에 대한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분석가의 논평이 흥미롭다. 크리스토퍼 존슨이라는 이 분석가는 “한국 정부가 일본 집단적 자위권 이슈를 키우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이롭지 않다는 것을 유념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과 중국의 우려 표명이 공식문서인 공동서명이 아니라 외교안보수석의 브리핑을 통해 언급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한국 정부가 뭔가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한계가 어디인지 잘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우려 표명을 할 필요까지 없었다고 생각하고 한국정부에 어느 정도 불쾌감을 표현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한국이 그 정도까지는 할 수 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고 평했다. 요약하자면, 한국이 어느 정도 제스처를 취하는 것까지는 미국도 이해할 것이지만, 그 이상 뭘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한국 정부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평화헌법 해체를 오히려 촉진하는 한국정부
김영삼-김대중 정부 당시부터 본격화된 한일 군사협력은 공동의 적국에 대처하는 공동의 전략을 수립하고 정형화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군사협조의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고, 준 군사동맹 직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단적인 예로, 7월 11일 미국 7함대 소속 핵추진항공모함 조지워싱턴이 부산기지에 입항했다. 이는 7월 21~22일 한·미·일 수색구조훈련(SAREX)에 참가한다는 것이 명분이다. 무슨 수색구조훈련이기에 항공모함에 미사일요격능력을 갖춘 이지스 구축함까지 동원되나? 합참은 7월 16~21일 한미 양국 해군이 해상기동과 항공모함 호송, 대공 요격 훈련을 실시한 후, 21~22일 한미일 삼국이 ‘인도주의적’ 공동훈련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것이 향후 본격적인 한미일 공동훈련을 위한 사전포석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미일 삼국은 이미 2012년 여름, 한반도 인근 해역에서 퍼시픽 드래곤 군사훈련을 은밀하게 진행했다. 향후 미국이 재촉하는 것처럼 정보협정이 체결된다면 한일 군사관계는 군사협조의 완성 또는 준 군사동맹으로 돌입 단계에 도달한다.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은 이명박 정부 말기에 체결이 좌절되었으나, 다시금 한미일 국방장관은 2014년 5월 31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회담에서 군사정보 공유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실무적으로 제도화 방안을 논의할 워킹그룹을 가동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일본은 한국의 명실상부한 두 번째 군사우방국가가 된다. 이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사실상 용인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일군사협력을 강화하자는 한국 측 논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한 일본의 군사력 지원을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미사일방어망 능력뿐만 아니라 소해(기뢰제거) 능력, 잠수함 탐지능력 등 한국에 비해 월등한 자위대의 군사 능력을 활용할 방안을 계속 ‘발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앞장서서 일본 평화헌법 체제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한일군사협력을 강화하는 한국 측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 역사적 과오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일본 정부는 집단적 자위권 관련법(자위대법과 무력공격사태법, 국민보호법, 주변사태법,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 등) 10여 개를 2015년 상반기에 개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저지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할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그 수법이란 1933년 독일 나치가 제정한 수권법(전권위임법이라고도 부른다)을 일컫는 것이었다. 수권법의 정식 명칭은 ‘민족과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로 그 내용은 이러했다. ‘독일의 법률은 행정부에 의해서도 제정될 수 있다’, ‘행정부는 헌법에서 정한 것과 다른 내용의 법률을 제정할 수 있다’, ‘외국과 조약을 체결하는 경우 입법 기관과의 합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등. 즉 헌법을 개정하지 않되 행정부가 전권을 행사하여 헌법을 무력화한 것이다.
따라서 아소의 말은 개헌을 당당히 내세워 국민의사를 묻고 대논쟁을 하는 정식 절차가 아니라 슬그머니 헌법의 핵심을 바꿔버리고,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전혀 다른 세상이 되어 있는 식으로 하자는 뜻이었다. 불행히도 아소 다로의 말은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일본 우익의 단순한 ‘망언’ 해프닝이 아니었다. 2014년 7월 1일 일본 각의(국무회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허용하는 결정문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평화헌법 해석개헌의 일본 현대사
일본의 ‘해석개헌’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일본 현대사는 곧 평화헌법(헌법 9조) 해석개헌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1946년에 수립된 일본 헌법은 9조에서 “전쟁 및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 영구히 포기한다”, “이러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어떠한 전력도 보유하지 않는다”, “국가의 교전권 역시 인정치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자위대 보유, 미일동맹과 미군주둔은 끊임없는 해석개헌의 원천이 되었다.
1970년대 일본은 모든 국가가 가지고 있으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인 ‘자위권’에 근거해 자위능력을 가지며, 평화헌법조차 이를 부정할 수 없다는 새로운 논리를 고안했다. 이 역시 헌법의 재해석에 의해 이루어진 사실상의 헌법수정, 즉 해석개헌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1972년 다나카 키쿠에이 내각은 “타국에 가해진 무력공격을 저지하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헌법상 허용되지 않는다”고 밝혔고, 1981년 스즈키 젠코 내각도 같은 입장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런 집단적 자위권 금지 역시 자위권 행사로 나아가기 위한 겉치레였다.
악명 높은 매파 정치인 나카소네를 수반으로 하는 일본 정부는 1978년에 체결된 미일 방위지침(미일 가이드라인)에 따라 해상자위대가 서태평양에서 해상통로를 수비하기 위해 미국의 제7함대에 협조하기로 약속했다. 즉 소련 함대를 봉쇄하기 위해 세 군대의 해협을 일본이 담당하게 되는데 이는 1970년대에 고안된 ‘자위권’ 개념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방위지침의 법적 지위 문제가 실로 심각한 쟁점이었다. 방위지침이란 1960년 이래 활동하고 있던 미일 안보자문위원회의 하나의 실행위원회인 ‘방위협력을 위한 부속위원회’에 의해 수행되는 낮은 수준의 실행문서였다. 정식 국제조약이 아니므로 정부 대표에 의해 서명되지도 않았고 의회에서 비준을 거치지도 않았다. 그것은 단지 발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효력을 발휘했다. 즉 행정부 위원회끼리 합의한 ‘지침’이 헌법을 능가하게 된 것이다.
냉전 해체 이후 한층 강화된 해석개헌 행보
나아가 일본은 냉전이 끝나자마자 오히려 더 공격적으로 모든 겉치레를 내던져버리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일본 정부는 국제 평화유지활동(PKO)에 참여한다는 명분으로 ‘해외파병금지’라는 선을 넘었다.
또한 1996년 클린턴 대통령과 하시모토 총리는 ‘미일안전보장공동선언’(신안보선언)을 발표했고, 이는 1997년 미일 방위지침 개정으로 이어졌다. 개정된 방위지침의 핵심 쟁점은 ‘주변사태’ 발생 시 미국과 일본이 합동작전을 펼치고 일본에서 병참을 동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주변사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었다. 주변은 어디까지고 사태란 무엇인가, 주변에서 사태가 벌어졌다고 누가 판단하고 결정할 것인가?
이에 대해 지침은 아무런 답변도 없었다. 다만 ‘주변사태는 일본의 안보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그 개념은 지리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적인 것이다’고 말할 뿐이었다.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는 말의 진의는 곧 북한, 대만해협뿐 아니라 미국이 요구한다면 세계 어느 곳이라도 일본의 군사개입이 있을 수 있다는 뜻으로 유추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처럼 모호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1999년에 일본 의회는 관련 법률인 주변사태법 제정안, 자위대법 개정안, 일미물품용역상호제공협정(ACSA) 개정안을 통과시켜 버렸다.
이제 일본 정부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명시적으로 허용한다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자위대에 대한 모든 제약이 사라진다. 게다가 비핵 3원칙(핵무기 소유, 제조, 반입 금지)마저 사실상 껍데기일 뿐이지 않은가. 지금 당장 일본이 핵무장을 하는 것은 미국이 허용하지 않겠지만, 언제라도 핵무장이 가능한 상태에 있지 않으면 일본의 세계전략을 전개할 수 없다는 것이 일본 우익의 확고한 생각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 정말 우려하고 있나?
일본의 움직임에 대해 7월 1일 한국 외교부는 “한반도 안보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우리의 요청 및 동의가 없는 한 용인될 수 없다”며 기존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한중 정상회담에선 외교안보수석을 통해 한국과 중국 정상이 “일본 정부가 자국민의 지지도 충분히 받지 못하는 정책을 지양하고 평화헌법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투명성있게 추진해야 할 것이라는 데 공감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실제로 얼마나 ‘우려’하고 있을까? 한중 정상회담에 대한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분석가의 논평이 흥미롭다. 크리스토퍼 존슨이라는 이 분석가는 “한국 정부가 일본 집단적 자위권 이슈를 키우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이롭지 않다는 것을 유념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한국과 중국의 우려 표명이 공식문서인 공동서명이 아니라 외교안보수석의 브리핑을 통해 언급되었다는 점에 주목하며, “한국 정부가 뭔가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 한계가 어디인지 잘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한 “미국 정부는 한국 정부가 우려 표명을 할 필요까지 없었다고 생각하고 한국정부에 어느 정도 불쾌감을 표현할 수 있겠지만, 동시에 한국이 그 정도까지는 할 수 있다고 이해하기도 한다”고 평했다. 요약하자면, 한국이 어느 정도 제스처를 취하는 것까지는 미국도 이해할 것이지만, 그 이상 뭘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한국 정부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평화헌법 해체를 오히려 촉진하는 한국정부
김영삼-김대중 정부 당시부터 본격화된 한일 군사협력은 공동의 적국에 대처하는 공동의 전략을 수립하고 정형화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는 군사협조의 가장 높은 수준이라고 볼 수 있고, 준 군사동맹 직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단적인 예로, 7월 11일 미국 7함대 소속 핵추진항공모함 조지워싱턴이 부산기지에 입항했다. 이는 7월 21~22일 한·미·일 수색구조훈련(SAREX)에 참가한다는 것이 명분이다. 무슨 수색구조훈련이기에 항공모함에 미사일요격능력을 갖춘 이지스 구축함까지 동원되나? 합참은 7월 16~21일 한미 양국 해군이 해상기동과 항공모함 호송, 대공 요격 훈련을 실시한 후, 21~22일 한미일 삼국이 ‘인도주의적’ 공동훈련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것이 향후 본격적인 한미일 공동훈련을 위한 사전포석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한미일 삼국은 이미 2012년 여름, 한반도 인근 해역에서 퍼시픽 드래곤 군사훈련을 은밀하게 진행했다. 향후 미국이 재촉하는 것처럼 정보협정이 체결된다면 한일 군사관계는 군사협조의 완성 또는 준 군사동맹으로 돌입 단계에 도달한다.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은 이명박 정부 말기에 체결이 좌절되었으나, 다시금 한미일 국방장관은 2014년 5월 31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회담에서 군사정보 공유의 필요성에 공감하며 실무적으로 제도화 방안을 논의할 워킹그룹을 가동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이제 일본은 한국의 명실상부한 두 번째 군사우방국가가 된다. 이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사실상 용인하는 것이다.
게다가 한일군사협력을 강화하자는 한국 측 논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한반도 유사시를 대비한 일본의 군사력 지원을 필수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하고 있다. 미사일방어망 능력뿐만 아니라 소해(기뢰제거) 능력, 잠수함 탐지능력 등 한국에 비해 월등한 자위대의 군사 능력을 활용할 방안을 계속 ‘발견’하고 있다. 이는 한국이 앞장서서 일본 평화헌법 체제의 해체를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한일군사협력을 강화하는 한국 측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 역사적 과오를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일본 정부는 집단적 자위권 관련법(자위대법과 무력공격사태법, 국민보호법, 주변사태법,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협력법 등) 10여 개를 2015년 상반기에 개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저지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할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