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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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주간웹소식지


제 146호 | 200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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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주한미군의 '여중생 압사 사건' 재판권 이양 불가 방침을 강력히 규탄한다

사회진보연대

오늘, 주한미군에 의해 다시 살해당하다

주한미군은 8월 7일 궤도차량 여중생 사망사건과 관련, 재판권을 넘겨달라는 남한 정부의 요청을 거부키로 결정했다고 통보해 왔다. 법무부는 공무집행 중 사건에 대한 재판권 이양의 전례가 없고 이미 사건 관련자들을 기소한 상태라는 점 등 이유를 들어 재판권을 넘겨주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내용의 공문을 그대로 반복할 뿐이었다.
2002년 6월13일, 훈련 중이던 미군의 장갑차는 두 소녀를 무참히 짓밟았다. 월드컵 열기로 온 나라가 들썩거릴 때였고 사태의 확장을 바라지 않던 미군과 정부 양측은 속전속결로 조사를 종결짓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사건이 발생한지 불과 6일만에 한미합동수사 결과가 발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미군범죄가 언제나 그렇듯 성의 없게 진행된 현장 브리핑은 유가족을 비롯한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사건 당사자인 운전병과 교전병의 진술이 서로 엇갈려 의혹은 더욱 증폭되었다. 게다가 남한 검찰에 피의자들이 출두했지만 언론에 사전 통보했다는 이유로 조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미군에 대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고 여론에 압도된 정부는 미군에 재판권을 포기할 것을 권고하였다. 물론 우리 정부가 미군 측에 엄청난 무언가를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어이없게 죽음을 맞은 두 소녀의 죽음의 경위와 과실여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조사하고 피의자인 미군을 조사하기 위해 미군 측의 재판권을 포기해줄 것을 요구했을 따름이다. 시간이 흘렀고 혹시나 기대했던 우리에게 돌아온 그들의 답변은 역시나 "NO"였다.
그리고 우리는 남한 정부의 무능과 주한미군의 뻔뻔함에 오늘, 다시 한 번 살해당했다.


57년 간의 미군범죄와 예속적인 주둔군지위협정(SOFA)

미군범죄는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 여중생 장갑차 압사사건은 주한미군 범죄라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남한 땅에 그들이 발을 들인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미군범죄는 끊이지 않았고, 피해자의 억울함과는 대조적으로 가해자인 미군은 더욱 떳떳하게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그 빈도가 줄어들고는 있다지만 극악무도한 미군범죄는 달라지지 않았고 사건을 조사하고 처벌을 하는 과정에서 미군이 보이는 거만한 모습은 매 한 가지이다.
'주한미군범죄근절 운동본부'가 최근 공개한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국내 미군 범죄는 2000년 311건, 2001년 376건에 이른다. 그러나 우리가 재판권을 행사한 경우는 2000년 23건(7.3%), 2001년 26건(6.9%)에 불과하다. SOFA가 개정되기 전인 1990년 미군 범죄(942건 발생)에 대해 재판권을 행사한 경우가 0.8%에 그친 데 비하면 그나마 많이 진전된 듯 하지만 우리처럼 미군이 주둔 중인 독일이나 일본 등에 비하면 조족지혈인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은 한미간 '주둔군지위협정(SOFA)'이 턱없이 불평등하기 때문이다. 1966년 7월, 한미 상호 방위 조약에 의거해 체결된 SOFA는 91년 2월과 2001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개정되기는 했지만 불평등 조항은 여전히 살아있다. 이번 여중생 사건처럼 주한미군이 '공무중 범죄'라고 주장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무조건 미군측이 1차적 재판관할권을 갖도록 되어 있으며 미군범죄자의 신병을 인도받을 수 있는 것도 살인, 강제성폭행 등 12개 중대범죄로 한정되어 있다. 결국 우리 정부는 주권 국가라면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속지주의(屬地主義)를 사실상 포기한 셈이었고 주한미군에 대한 형사처벌은 요원할 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불평등한 SOFA 개정'만으로 사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불평등한 남한과 미국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청산하지 않는 이상 재판권 이양의 문제, SOFA 개정의 문제는 '언 발에 오줌을 누는 격'에 불과하다. 수도 서울 한 복판에 미국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양국의 평등한 관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불평등한 조약은 양국의 협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미군에게 위협이 되는 저항이 남한에서 조직되고 현재 그들의 전략으로 그들의 지배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이 있을 때에만 미군범죄도, 불평등한 관계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이태원 외국인전용클럽 여종업원 살해, 매향리 사격장, 독극물 한강 방류 등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투쟁은, 따라서 각각의 사안별로 진행되어서는 다분히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주한미군 철수 없는 어떠한 대책도 핵심을 비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국의 동북아시아 군사전략과 주한미군의 의미

부시정부의 군사정책에는 클린턴 정부의 대전제(냉전 이후의 미국에게 심각한 적수는 사실 존재하지 않다는 전제)가 여전히 반영되고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냉전이 붕괴된 이후 10여 년이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안보환경의 변화가 반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동과 극동에서의 동시 전쟁 승리 전략(WIN-AND-WIN)에 대한 미국내의 비판자들은 이라크와 북한이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윈-앤-윈 전략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발생하는 '우발적 ' 사태에 대해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기동성과 신축성을 제공하는 방향으로 재조정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중국-대만 분쟁, 인도네시아에서의 내부 갈등의 분출, 난사군도에서의 충돌 등을 염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50년대 이후 미국의 동아시아 군사전략의 초점이 동북아시아 지역(특히 소련과 북한)에 맞추어져 있었다면, 이제 미국은 중동-인도-동남아-대만-남한-일본에 걸치는 포괄적인 군사벨트 형성에 주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미국은 동아시아 지역에 이미 전진배치된 군사기지를 탄력적으로 운영하는 한편, 새로운 군사기지의 창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바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안정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미국에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미국-일본-남한 3각 군사동맹의 공고화이다. 이를 위해 미국은 일본이 평화헌법을 개정하는 것, 즉 자위대를 정규군화하고, 일본 영토 밖에서 미국과의 공동군사작전을 펼치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물론 이는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며, 1978년의 미일 방위가이드라인 및 1998년 신 방위가이드라인 등을 통해 드러난 바와 같이, 미국의 매우 일관된 방침이었다.
북한의 군사력 약화에 따라 윈-앤-윈 전략이 과도하며 불필요하다는 평가를 내린 부시정권이지만, 주한미군과 관련해서는 이미 접근권이 보장된 '준'항구적인 미군기지를 완전히 폐쇄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또한 남한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게 되면, 일본에서의 완전 철수 요구도 동시에 커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미국이 염두에 둔 대 동아시아 군사벨트의 일환이자, 한반도에서의 영향력 보전을 위해 미군의 주둔은 필수적이라고 그들은 주장한다. 한술 더떠 미국은 한-일 양국에 미군이 동시 주둔한다는 방침은 한반도 통일 이후에도 지속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모으고 있다.


주한미군 주둔을 바라는 것은 남한의 지배계급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과연 누가 주한미군을 여전히 남한 땅에 두려고 하는가'하는 점이다. 단지 미국이 동북아의 지배질서를 안착화 시키는 차원에서, 혹은 북한 견제의 용이함을 위해 남아있다는 것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남한 정부가 여중생 압사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주권국가로서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져버리며 부분적인 해결로 이 문제를 미봉하려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당시의 일이다. 남한 전쟁 이후 철수하려는 미군을 붙잡은 것은 오히려 남한 지배계급이었고 이들은 안보를 이유로 주한미군 주둔을 영구화하려 했다. 여기에는 당장 북이 남한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도모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북한은 10년 간의 경제위기로 군사력 증강이 어려운 상황이었고 반면 남한의 경우 지속적으로 군사력을 증강해왔다. 또한 한-미-일 공조체제를 공고화함으로써 냉전체제 해소 이후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헤게모니는 재강화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북의 군사력에 대항하기 위해 미군의 남한 주둔은 불가피하다는 주장은, 따라서 근거가 희박하며 오히려 미국의 패권전략에 조응함과 동시에 군부의 안보논리를 수용한 결과일 따름이다.
결국 국민의 혈세로 충당되는 엄청난 액수의 주한미군 주둔 비용과 반인륜적인 미군범죄는 결국 주한미군주둔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치부하는 남한 지배세력에 의해 방조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오늘의 분노를 모아 주한미군 철거투쟁, 반미-반제국주의 투쟁으로

이 모든 면에서 볼 때, 주한미군철거는 다만 미국 군대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의미를 초과한다. 주한미군 철거투쟁은 한반도의 긴장을 그들의 이익에 부합하게 조성하고 있는 미제국주의와 남한 지배계급에 대한 저항과 투쟁을 의미한다.
현재 미군의 군사적 분포를 살펴보면 금융세계화에 따른 포섭과 배제의 논리가 그대로 관철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타국의 원조가 필요한 지역, 분쟁이 끊이지 않는 제3세계에 대한 군사적 원조,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전략지역과 신흥시장을 중심으로 미군의 군사적 패권이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유래 없이 강고해진 미군의 군사적 헤게모니는, 사실상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임과 동시에 미제국주의가 마침내 봉착한 정당성의 위기의 이면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야기하는 세계적 분할과 경제적 불안정성, 빈곤의 확산에 대한 전세계 피억압 민중들의 분노를 군사력으로 억누르려는 미국의 전략은 결국 스스로의 무덤을 팔 뿐이다.
여중생 압살 사건으로 촉발된 민중들의 투쟁은, 주한미군 철거와 미국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전략을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것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오늘의 분노는 단지 오늘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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