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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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주간웹소식지


제 147호 | 200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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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주의는 미국의 초라함을 감출 수 없다

배제당'할' 자가 배제하는 역설?

사회진보연대
미국 일방주의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지난 11일, 미국은 미군에 대한 면책권 부여 등 보호장치 없이 국제형사재판소(이하 ICC) 회원국이 되는 국가에 대해 군사훈련과 무기장비 구입비 제공 등 일체의 군사 지원을 중단할 것임을 경고함으로써 자신의 일방주의적 외교노선의 극한을 보여주고 말았다.
미국은 포괄적 핵실험금지조약(CTBT) 의회 비준 거부(1999)에 이어 생화학무기 조약의 강화를 위한 런던회의를 중도에서 거부하고(2001.7), 불법소형무기의 국제 거래를 규제하려는 UN합의를 유일하게 거부하였으며 MD 구축을 위해 소련과의 ABM 조약을 탈퇴하더니(2001.12) 이제는 급기야 고문방지를 위한 유엔협약 체결마저 거부(미국은 특히 이 협약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국제기구의 고문현장 확인 절차'에 대해 지나친 내정간섭이라며 반대하고 있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입 국가에 교육, 직업, 결혼, 이혼, 보건 등 각 분야에서 여성차별 장벽을 없애도록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유엔 여성차별철폐 협약마저 '페미니즘에 대한 보수주의자들의 반격'에 굴복하여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 미군에 대한 ICC의 기소를 1년 간 면책한다는 결의안을 UN 안보리로부터 승인(2002.7)받음으로써 인권침해를 빌미로 타국에 대한 침략과 내정간섭을 일삼아온 미국은 스스로의 모순을 극적으로 드러낸 동시에 세계 패권을 유지하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표방한 셈이다.
우리는 이러한 미국의 군사적 헤게모니의 강화가 사실상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임과 동시에 미제국주의가 마침내 봉착한 정당성의 위기의 이면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 바 있다. 오늘 우리는 미헤게모니 위기의 징후들을 거듭 폭로함으로써 오늘날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민중들의 투쟁의 의미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타락한 제국, '외교적 탱크'를 몰고 ICC 법정마저 짓밟다

세계 각국의 인권조직과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ICC 설립운동은 1998년 로마에서 열린 외무장관 회담을 통해 ICC설립에 관한 로마조약을 제정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 조약에서 합의된 바에 따르면 ICC의 관할범죄는 (1) 집단살해죄(Genocide) (2)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 (3) 전쟁범죄(War crimes) (4) 침략범죄(The Crime of Aggression)이다. 이 가운데 그 정의가 후일로 미루어진 침략범죄를 제외하면 나머지 범죄들은 수사와 처벌에 지장이 없을 수준으로 상당히 구체적인 행위들이 열거되었다. 그밖에 관할권 문제에 대해서는 (a) 규정이 발효된 이후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b) 원칙적으로, 국내법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경우에 ICC가 개입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보충성의 원칙). 이는 로마조약에 따라 ICC는 세계 각국 정부의 서명과 비준을 거쳐 설치될 예정이었고, ICC 규정은 2002년 4월 60여개국의 가입에 의하여 7월부터 발효되기에 이르렀다.
물론 ICC는 현재와 같이 세계적인 수준에서 전개되는 폭력의 해결책이 되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많았다. 법의 이름으로 처벌할 권한만이 있고 법의 이름으로 용서할 권한이 없다거나, 다분히 밀로세비치와 같은 정치권력자들의 조직적 학살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만든 탓에, 9·11테러와 같은 경우에 적절한 대처가 어려울 수 있다. 많은 국가들은 정치적 색채가 농후한 사건에 대해 국제재판을 허용하는 것을 꺼리며 일부 국가는 ICC를 타국의 영역외 관할권을 확대하는 데 이용될 가능성에 대해 경계하기도 한다. 게다가 네 개의 범죄영역들이 상당히 포괄적이고, 그 중의 하나(침략범죄, The Crime of Aggression)는 제대로 규정된 것도 아니어서 재판관들의 재량이 매우 폭넓게 인정될 수밖에 없어 역으로 인권침해의 우려를 낳기도 한다. 가장 중요하게는 판결의 현실적 강제수단을 가지지 못한 무력한 재판소가 되거나 아니면 현실적 강제수단을 동원하려는 강대국들에게 법적 명분을 수여하는 재판소로 전락할 것이라는 등의 우려가 분명 존재한다. 실제로도 집단살해죄의 경우를 제외하면, 국가가 ICC 규정을 비준한다고 해서 ICC 규정상의 범죄에 대한 ICC의 물적 관할권을 자동적으로 수락한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 ICC규정상의 관할권행사 요건은 ICC가 특정시기의 특정한 분쟁이 아닌 장래에 세계적인 차원에서 발생할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하고 또한 각국이 자국의 주권행사에 제약을 받지 않으려는 점을 고려한 결과이다.
이러한 우려와 한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미국은 유엔회원국 가운데 139개국이 서명하고 이중 79개국이 비준한 ICC 출범을 위한 로마조약에 ICC의 기소대상이 되지 않도록 면책특권을 달라며 줄곧 비준을 거부해 왔다. 게다가 미국은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한 자국군에 대해서 ICC가 면책권을 부여하지 않을 경우 평화유지활동 연장에 거부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국가별 접촉을 통해 해외 주둔 미군에 대한 ICC의 면책특권을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해왔다.
결국 다각도로 진행된 미국의 압력에 UN은 굴복했고 지난 달 1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평화유지 활동에 나선 미군에 대해 ICC의 기소를 1년 간 면책한다는 결의안(1422호)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이날 승인된 결의안 1422호는 미국을 포함, ICC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에서 파견한 유엔 평화유지활동 요원에 대해서는 올해 7월1일을 기점으로 향후 12개월 간 ICC가 조사나 기소를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기서 '1년'이라 함은 UN 안보리 국가들의 체면을 살린 '립 서비스'일 뿐, 사실상 미국은 매년 ICC에 대한 미군 면책권의 시한을 연장하는 방법을 통해 사실상 항구적 면책권을 확보하려 할 것으로 예상된다(존 네그로폰테 미국 유엔대사는 "이 결의안은 1년 동안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이나 단순히 첫 단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랐는지 여기에 한 술 더 떠 미 국무부는 지난주 워싱턴 주재 외국 대사들을 초청, 지난달 1일자로 출범한 ICC의 존재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거듭 밝히고, 하원을 통과해 지난주 부시 대통령이 서명한 새 반(反)테러법에 근거해 ICC 가입 국가에 대한 군사지원을 중단할 수 있다고 통보했다. 급기야 미국은 지난 11일, 미군에 대한 면책권 부여 등 보호장치 없이 ICC 회원국이 되는 국가에 대해 군사훈련과 무기장비 구입비 제공 등 일체의 군사 지원을 중단할 것임을 '최종 경고'했다.
결국 "ICC는 세계평화와 안정을 위해 일하고있는 미국의 군사 민간 요원들에 대한 위협"이라는 럼즈펠드의 막가파식 주장은 관철되었고 전쟁범죄와 집단학살 등 반인류적 범죄를 유엔의 권위아래 독립 법원에서 처벌하자는 최초의 국제적 합의는 미국의 탱크에 짓밟힌 셈이다. 2차 대전 뒤의 뉘른베르크, 도쿄 전범재판을 비롯해 반인류적 범죄를 독자적 권위로 처벌하고 응징한 미국의 오만한 행보는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가.


전세계에 대한 테러의 합리화-ICC 면책특권의 의미

하원 공화당 원내총무 톰 딜레이(DeLay) 의원이 제안해 공화·민주 양당의 초당적 지지로 통과된 새 법안은 한국·일본·이스라엘·이집트·호주·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 등 긴밀한 동맹국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국가들에 군사지원을 조건으로 미군 보호장치를 강구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법안은 미군을 ICC 법정에 세우지 않도록 가능한 한 많은 국가들이 미국과 쌍무협정을 맺도록 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 새 법안은 또 미군이나 여타 미국인이 ICC에 구속될 경우 대통령이 군사력 사용 등 "필요하고 적절한 수단들"을 강구해 석방시킬 수 있도록 하는 권한도 부여하고 있다.
미국이 이토록 저열한 방법과 치졸한 근거를 동원해 면책특권을 부여받고자 하는 것은 UN 안보리가 대상범죄행위를 ICC에 회부하는 경우에는 범죄행위지 국가 또는 피고인의 국적국이 비당사국이거나 그 국가의 동의 없이도, ICC는 관할권을 가지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군사행동을 수행하던 미군이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 기소되어 ICC에서 재판 받을 가능성을 미연에 차단하고 '평화유지군'이라는 미명 하에 스스로의 패권적 군사행동을 고수하기 위한 술책인 것이다.
나아가 미국의 이 같은 방침은 분쟁을 진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군사력을 필요로 할 경우 국제기구의 기준이 아니라 미국의 기준에 따라 수행될 것임을 시사한 것에 다름 아니다. 미국이 금명간 선제공격을 정당화하는 군사독트린을 발표할 예정이라는 점에 비추어 ICC 면책특권의 본질은 미국의 선제공격을 사전에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미국-이라크 전쟁위기가 점차 기정 사실화되고 있다는 점, 아라파트를 배제한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평화안의 긴장이 전반적인 중동의 정치 위기를 낳고 있는 상황 등에 비추어 보았을 때 미국의 선제 공격 정당화 구상은 일촉즉발의 위기를 예고한다.
지난 달 말 무고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희생시킨 이스라엘의 공습을 ICC의 첫 전범재판 사례로 다뤄야 한다는 나세르 알 키드와 팔레스타인 대표의 주장이 국제사회로부터 신빙성을 얻어 가는 가운데, 더 이상 내세울 명분조차 희박한 자신의 '대 테러 전쟁'의 방해물을 걷어내고자 하는 미국의 강력한 의지를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는 대목인 것이다.


세계의 양극화와 분할·배제, 위계-서열화의 폭력성

그런데 현재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 내재된 모순과 폭력의 새로운 양태들을 포착하기 위해서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된다. UN안보리의 면책특권 결정이 있은 직후 "어떤 미국 시민이라도 ICC에 의해 억류하는 것을 미 정부가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던 존 네그로폰테 미국 유엔대사의 말을 곱씹어보며 미 패권전략에 내재한 폭력성의 다른 측면을 의식적으로 부각시켜야 한다.
일찍이 신자유주의를 위한 일종의 헤게모니 장치로서 '3자위원회'를 구성한 브레진스키는 "미국의 세계 일등적 지위는 여러 측면에서 이전의 제국을 연상시킨다. 과거의 제국은 속방과 조공국, 보호국과 식민지 등으로 이루어지는 서열구조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서열구조 외부의 세계는 대체로 야만 세계로 간주되었다. 이와 같은 용어는 물론 시대착오적인 것이지만, 오늘날 미국의 궤도 안에 든 국가를 묘사하는 데 전혀 부적합하다고만은 볼 수 없다"고 썼다. 유일 강국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체제와 그로부터 전략적으로 배제되고 관리되는 세계적 분할의 원리를 그는 충분히 서술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역설적이게도 미국이 봉착한 헤게모니의 위기를 시인한 셈이다.
본래 헤게모니가 구성되기 위해서는 개별 민족국가 스스로가 자신을 즉각적으로 보편적인 것으로 사고한다는 조건 하에서만 '인류를 구원하거나 그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거나 그들을 문명화시키는' 등의 임무를 떠맡을 수 있다. 따라서 헤게모니 국가는 자신의 개별성으로부터 모든 특수주의적인 성격 및 존재의 양식을 비워내고 그것을 보편주의적인 요소들(정의와 보편적인 인간적 형제애의 이상 등)로 채워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은 법인자본주의와 고도금융에 대한 뉴딜적 통제라는 토대 위에서 노동자와 중산층을 사로잡았던 '보통 사람의 위대한 사회'와 제3세계 민중에게 근대화를 약속했던 '진보를 위한 동맹'을 통해 20세기 이후 세계 헤게모니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는 '팍스 로마나' 시대, '나는 로마 시민이다'(Civis Romanus sum)에 비견되는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의 '아메리칸 드림'이 웅변했던 가치를 철저히 파탄냈고,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상징적 가치는 일방주의적 패권전략에 의해 그 정치적 정당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다. 그 결과 (특히 세계화라는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미국적임"을 선언하는 것은 기존과 같은 보편성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고립적으로 "선택된 민족"으로서 미국인(시민)이라는 세계적 시민과 非미국인이라는 세계적 신민(臣民)간의 분할과 배제, 양극화와 위계서열화를 스스로 조장하고 있다.
더욱이 미국은 9·11 테러를 경과하며 특정한 인종과 종교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는 '성전(聖戰)'이란 단어로 반테러전쟁을 묘사함으로써 이슬람과 아랍 인민에 대한 인종주의적 공격성을 드러내고 말았다. 결국 미헤게모니의 위기는 미국 스스로가 내세웠던 보편성의 위기라는 점에서 새로운 형태의 갈등을 잉태하고 있으며 인종주의와 같은 특수주의로 재전락할 가능성이 농후해졌다. 이로부터 파생되는 각종 물리적-이데올로기적(상징적) 폭력은 헤게모니의 위기를 재강화하기 위해 더욱 심화되어 재생산될 것이며 이 극단적인 폭력의 악순환은 결국 파국적 상황의 항존을 의미할 뿐이다.


미헤게모니의 정당성과 보편성의 위기는 세계 민중들의 투쟁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현재 미헤게모니의 쇠퇴 현상은 분명한 사실이다. 군사력의 절대적 우위와 금융력의 절대적 우위에 입각해 미국은 외형적으로 번영의 시기를 구가했고 새로운 생산영역의 개발도 선도하고 있지만, 반면 유럽이나 동아시아 등의 다른 경쟁지역이 이를 대체해 새로운 축적체제나 새로운 국가간체계의 형성을 주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직 현실화되지 못하고 있다.
20세기 초 기존의 영국 헤게모니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파시즘, 뉴딜, 사회주의라는 세 가지 대안적 길이 등장하였고 20세기 말 이후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는 20세기 초에 등장한 세 가지 대안적 길 중 뉴딜과 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길을 몰락시키면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와 마찬가지로 21세기 초에도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는 번갈아 가면서 위기 관리의 무능력을 노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국 주도의 위기 관리 전략에 그대로 노출된 세계의 민중들은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고통에 신음하고 있다.
결국 미헤게모니가 봉착한 보편성·정당성의 위기 속에서 견강부회 식으로 제출된 신자유주의적 금융세계화 전략이 양산하는 세계적 수준의 폭력에 맞서는 세계 민중들의 능동적인 투쟁만이 현재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미제국주의와 초민족화된 지배계급의 무능력은 이제 세계 민중의 역능으로 전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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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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