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사회화와 노동

사회진보연대 주간웹소식지


제 150호 | 2002.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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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시기 올바른 투쟁방향을 수립하기 위하여

편집부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 민중운동의 내적 변화는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앞서 우리가 대선 투쟁 본부를 제안했듯이, 대통령선거는 누가 무어라 해도 지난 5년 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를 놓고 비판의 주도권을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롭게 청와대에 들어설 정권이 지금 대중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그래서 어떻게 구조조정을 하려는 지를 놓고 과학적인 분석과 이에 근거한 비판의 자리가 마련되어야 한다.
이에 앞서 우리는 이 자리에서 오늘날 계급투쟁의 양상과 대중운동의 현실이 무엇인지, 왜 전선 재구축이 민중운동의 최우선 과제인지를 규명할 것이다. 계급투쟁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방기하는 것은 민중운동의 올바른 투쟁방향 수립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가 처한 대중운동의 현실은 지배계급의 집요한 반격에 따른 대중의 분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대중운동의 분화는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지금 정세의 과제가 왜 전선의 재구축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2002년 대선 투쟁의 목표가 왜 민중운동진영의 전국적 투쟁 거점을 확보하는데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987년 이후 계급투쟁의 전개양상


1987년 노동자 대 투쟁 이후 지배계급의 반격은 집요했다. 경제위기로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3당 합당으로 구조조정을 추진할 정치적 힘을 채비하고. 무노동 무임금을 앞세워 노동조합의 전투성(파업투쟁)과 부분적인 실리(임금상승)를 사회의 공적으로 몰아붙였다. 중소기업은 세계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의 여파에서 살아남지 못한 채 파산하거나 과거에도 그랬듯 대기업에 하청 계열화되는데, 이때 상당수 노동조합은 자연 소멸하거나, 두려움에 주저하는 조합원의 이탈을 겪는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계열화된 산업질서에 조응하여 광범위한 하청업무를 대행하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한다. 한편, 대기업의 경우 하청계열화로 구조조정의 위기를 지연시키면서, 기업문화 개선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가며 노동자들을 사내질서로 흡수하고, 팀 체계를 앞세워 개별노동자들을 새로운 노동과정으로 재조직한다. 대기업 노동조합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기업 노동자들 대다수를 조합원으로 확보한데다 다른 노동조합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에 발언력을 잃지는 않았다. 이 같은 현상은 금융과 언론으로 대변되는 사무직 노동조합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 사이에 노동조건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적 발언력에서조차 차이가 벌어진 것이다.
경기침체는 멈추지 않았고, 산업 재편은 계속되었다. 경력을 가진 사람도, 사무직 노동자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 점점 늘어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력직과 사무직에서 명퇴, 조퇴가 확산되고 있었다. 남한 발전주의가 안겨준 유일한 혜택-종신고용 전통마저 사라지고 만 것이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는 이런 민중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한국전쟁 이후) 남한 최초의 전국적 총파업이었지만 조직된 규모에 비해 결과는 너무도 초라했다. 정리해고 법제화는 2년 유예되었을 뿐이었고, 겨우 민주노총 합법화와 복수노조 인정이라는 결과를 얻었을 뿐이었다. 늘어나는 기업파산 앞에서 노동자들의 일자리 보장이 설득력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로 비쳤다. 1998년, 총파업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노사정위원회에서 양 노총 지도자들은 결국 정리해고 법제화에 합의하고 만다. 2001년에는 복수노조인정마저 한국노총의 노사정 합의로 5년간 유예되고 만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노동조합이 당연히 자신의 권익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노동자, 농민, 여성: 멈추지 않는 분열과 자기파괴


혜택을 앞세운 구조조정이 아니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정치적 조건을 활용하려 들었다. IMF 외환위기와 정권교체라는 정치 조건은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기업구조조정은 사회의 공적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구조조정에 앞서 그들은 노동자는 물론 심지어 기업주까지 한몫으로 싸잡아 사회의 공적으로 만들었다. 이 상황에서 구조조정에 맞선 개별기업 노동자들의 저항은 상당부분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고, 기업과 해당사업장을 넘는 연대투쟁은 점점 더 곤란해졌다. 모든 투쟁은 IMF 이후 더욱 고립되었고, 노동자들은 시간이 가면 갈수록 계급으로 단결하는 노동자로서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였다.
해고와 임시채용의 격렬한 반복은 이제 정규직 노동자, 대기업 노동자의 사회적 지위마저 위협했다. 이젠 누구도 평생직장을 믿지 않는다. 모든 노동자들은 자신을 보호할 법적인 장치는 물론이거니와 조직적인 힘조차 없다고 믿고 있다. 유효한 방어수단이 없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 한 몫 잡아두어야 했고, 고용만 보장되면 노동조건의 후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후퇴하는 단체협약에 개별 노조는 서명하였고, 허구적인 것을 알고도 고용보장에 만족할 도리밖에 없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더욱 궁지에 몰렸다. 노동조합 결성조차 어려웠고, 설사 결성했다 치더라도 사업장내로 진입하는 것조차 불가능했기 때문에 투쟁의 양상은 몹시 격렬하고도 별다른 성과 없이 흩어지는 것을 반복해야 했다. 심지어 정규직과 임시직 사이에 서로 배제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지경에 이른다. 투쟁이 고립되면 될수록 노동자들은 개별화되었다.

저임금 저곡가 정책에 따라 미국의 잉여 농산물을 수입하고, 농가소득보존이 곤란해지면서 노동력이 도시로 유입되는 식으로 농촌사회는 이미 거의 해체되고 난 뒤였다. 격렬한 농민들의 저항으로 UR 협상에서 쌀만큼은 10년 동안 관세화를 유예한다는 협정을 맺긴 했지만, 농산물 완전 개방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여겨졌다. 쌀을 제외한 대부분의 농작물이 개방된 데다가, 그나마 국제경쟁력을 갖춘답시고 정부가 진행한 농업구조조정은 경쟁력이 있다고 알려진 몇 가지 농산물 제작에 저리의 농가보조금이 몰리는 바람에 농산물 가격 폭락을 거들기만 할 뿐이어서 농가부채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늘어만 났다. 도시와 농촌의 소득격차는 늘어나기만 했고, 계속되는 농정 실패는 농업문제에 대한 국민적 회의감을 야기했으며, 농민을 달랜다는 농지규제 완화는 농민들의 농업 포기를 부채질 할 뿐이었다. 언론조차 외면하는 농촌문제는 이제 농촌만의 문제였고, 농가소득보존의 논리만이 휑하니 남아 노령화된 농촌사회의 농민을 더욱 초라하게 할 뿐이었다.

점점 불안정해지는 삶으로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조차 곤란하게 되자 무엇보다 가족단위의 생계부터 어려워졌다. 경제위기에 따른 정부재정위기와 교육과정의 변화까지 초래하고만 노동력 재생산 방식의 변화는 가계 유지비를 높였다. 아내-여성을 필두로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생계유지와 재생산 비용 증가 분을 감당하기 위해 생업에 뛰어들게 되나, 노동시장에서 성별·연령별 구조적 불평등으로 여성과 청소년은 극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 했다. 각기 흩어진 작업장과 가족의 거리는 가족구성원들 사이의 유대감을 해체시켰고, 급기야 개별적 생존이 강요되면서 가족은 역사적 사명이 다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인간·가족·사회의 재생산이 개별적으로는 불가능한데다, 국가가 이를 책임질 수 있는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여성은 가정 유지의 책임을 다시 짊어져야 했고,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열악한 노동조건과 밀려있는 가사노동·보살핌노동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려야 했다. 성차별에 고용불안까지 겹쳐 노동조건 개선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데다, 고달픈 노동으로 가사노동·보살핌 노동은 하루하루 밀리고 말았다. 각종 가전제품과 사설 보육 서비스, 금융상품만이 대안인양 기다리고 있어 이를 외면할 수도 없었다. 가계 유지비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이 상황은 여성을 더더욱 극악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이제 가족 구성원 모두가 가족 단위의 생존과 개인의 생존 사이의 대립을 겪으면서, 상황을 회피하거나, 짓눌린 채 체념하고 마는 양극단의 방식을 택하게 된다. 여기에 여성 신체의 특정부위가 여성의 인격을 대신하면서, 여성에 대한 성적 비하와 직·간접적인 폭력은 위험수위를 넘나들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국가에 의해 체계적으로 보증되고 있음에도, 오히려 사적인 차원으로 제한되고, 국가권력과 남성이 저지르는 성적 비하는 개별적인 사안과 피해자의 문제로만 남았다.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척 제한된 것이고, 제한된 만큼 곧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 되돌려졌을 뿐이다.


대중운동의 분열, 운동노선의 분화


1987년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위로부터 해체되고, 90년대내내 노동자대중은 세계적으로 진행된 산업 구조조정의 물결에 맞서 제대로된 대응을 조직하지 못하였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노동자, 농민, 여성은 너무도 오랜 기간 분열과 자기파괴를 겪었다. 오늘날 대중 운동의 분열과 고착화는 이를 반영한다.
1990년 정권의 극심한 탄압과 산업구조조정 속에서 중고기업의 몰락으로 상당수의 노동자가이 노동조합을 이탈(전노협은 절반 가까이)하였다. 이미 법·제도적 한계로 노동조합의 조직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노동법 개정이 노동운동의 주 관심영역이 되었을 때다. 흔히 중간층을 대변한다고 알려진 여론은 노동운동의 격렬한 파업에 등을 돌렸고, 많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중간층의 이탈과 법·제도적 한계로 인한 노동조합 투쟁의 곤란함을 호소하던 터라 조합원 감소에 대한 즉각적인 조치로 국민의 여론을 등질지도 모르는 과격한 투쟁은 제한하려 들었고, 법·제도 개선, 대 국민 여론 전에 심혈을 기울였다. 더구나 개발독재시기 저임금으로나마 고용 자체는 상대적으로 보장된 탓에 노동자들의 관심사는 기업내부로 제한되는 경향이 있었다. 비공식부문 노동자나 실업자 문제가 노동자들의 주요관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역차원에서 불거진 쟁점에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이로 인해 빈민 운동을 위시해서 지역운동과 벌이는 연계는 상층연대로만 머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리고 이런 현실에 기대어 노동조합 지도부는 지역별 노조보다 산별노조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은 노동조합을 아우르는 전체 대중운동의 지도그룹을 형성하는데 끝내 실패하고 만다. 이를 기점으로 선거투쟁이란 곧 합법적 정치영역의 진출을 위한 투쟁으로 기억된다. 1993년 기업별 노조의 공통과제인 노동법개정을 위해 국제적 압력을 가하려 했던 ILO 공대위가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이미 사무직과 대기업 노동조합을 각각 대표하던 업종회의와 연대회의가 전체 민주노조운동을 주도하던 때였다. 이렇게 결성된 전노대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민주노총 1기 지도부 결성의 토양이 되었다. 민주노총 1기 지도부는 중간층에 대한 노동자의 헤게모니, 사회개혁(법-제도개선) 투쟁, 민주노총과 양립하는 진보정당 건설들을 전면에 내건다.
80년대 후반에 이미 제조업에서 보여지는 노동의 불안정화로 남성의 노동조건이 하락하게 되고, 여성 노동자들이 많이 있던 제조업 사업장 역시 경기후퇴로 아예 문을 닫게 된다. 남성 노동조건의 동반하락으로 제조업에서 여성이 재 진입할 수 있는 일자리는 사라지고, 서비스업종의 요청이 과잉되면서 제조업의 여성노동력은 서비스업종으로 이동하게 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대기업 노동조합의 역할은 과대평가되고,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주변에 머물게 된다. 1990년대에 즈음하여 주부노동력은 급증하고 제조업 여성노동자들은 급감하는데 이런 현실에서 여성노동운동은 관심을 다변화하였다. 이때부터 사무직·서비스업의 여성노동자들의 이해가 여성노동운동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고, 주부노동자의 사회적 진출을 보장하기 위한 모성보호와 양육서비스의 확보를 주요한 쟁점으로 삼았다. 비정규직의 다수를 차지하는 여성노동자들과 이들에 대한 차별철폐를 내걸며, 여성노동력의 활용과 그에 따른 산업조직개편의 긍정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1999년 독자적인 조합노선을 걷게 된다.
한편, 가족을 유지하는데 국가의 지원이 전무하고, 모든 것이 가족 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떠넘겨진 상황에서 여성운동은 가족법내 성불평등조항을 주된 쟁점으로 자신을 조직하는데, 이는 거의 대부분 미국식 핵가족 모델에 조응하지 못하는 낙후된 법률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급격한 민주화바람과 함께 부분적으로나마 제도개선이 달성되면서 가족법 개정 투쟁은 일단락 된다. 하지만, 이처럼 몇 가지 성불평등 조항을 중심으로 법-제도개선 투쟁을 벌이던 여성운동의 전통은 성폭력, 성 매매 등 기존 여성운동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이르러서는 더욱 확대된다. 여성이슈와 단일 사안의 해결에만 집중하면서 더더욱 법-제도 개선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농촌사회를 기반으로 벌이는 농민들의 투쟁은 두말할 것도 없다. 농업의 다원성과 그에 따른 식량주권을 전면에 내걸고는 있지만, 내·외곽에서 몰아 치는 농가 소득보존 논리 앞에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운동의 암중모색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이처럼 대중운동 모두가 겪고 있는 노선분화와 불투명한 미래는 곧, 대중 투쟁의 고립으로 이어졌다. 더구나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임시적인 처방책에 불과해서 어떤 정치세력도 이념과 미래를 제시하며 체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없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내재된 고유한 한계로 인해 긍정적인 방식보다 부정적인 방식으로 구조개혁을 선도할 수밖에 없고, 구조조정은 대상(특히 노동자, 농민, 여성)을 고립시켜 적의에 바탕을 둔 사회적 공론을 등에 업고 강제로 구조조정을 강행하는 방식을 선호하였다. 이로 인해 저항 주체는 연대의 기회마저 빼앗기고, 개별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린다. 오늘날 수없이 많은 대책위가 난립하는 것은 사실 이의 반영일 뿐이다. 그리하여 노동자민중은 격렬한 저항을 통해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그것이 신자유주의 정책, 나아가 자본주의의 위기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 나가지 못하고 되려, 국제 신용평가기관에 의해 상대적으로 노사가 안정되었다는 평가를 받는 비극이 재현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배 정치의 위기와 2002년 대통령 선거: 민중운동진영의 전국적 투쟁 거점을 확보하라


우리는 지난 몇년동안 수 차례에 걸쳐 지배계급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제휴세력으로서 386세대와 시민운동으로 불리는 자유주의자들을 파트너로 삼아왔음을 지적해 왔다.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정치개혁이 온갖 금융비리로 주요한 의제에 상정되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햇볕정책마저 미국 정치지형의 불안정성으로 좌초하게 되자 오히려 (완전고용을 보장했던) 군부독재시절을 전후한 퇴행적인 쟁점이 대중을 선도하는 지경에 이르면서, 이들은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음(개혁세력의 붕괴)을 지적한 바 있다. 사실, 이후 정국은 어떤 정치변수(비리폭로)가 집권의 향배를 결정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안개정국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정치집단도 뾰족한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온갖 잡다한 정치 세력의 합종연횡과 해산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어느 누구도 대중에 대해 완전한 지도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점에서, 대중에 대한 지루한 헤게모니 쟁탈전이 계속된다는 점에서 이는 명백히 지배계급의 위기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 깊숙이 개입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들이 위기를 자초한 이유가 무엇인지(바로, DJ 정권이 정권교체를 빙자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전면에 내세우고는 민주주의를 향한 대중의 열망을 배신하고 대중의 삶을 벼랑끝으로 내몰아 저들에게 예속된 삶을 선택하도록 몰아 붙이다가 여의치 못하여 궁지에 빠져버린 것), 이들이 위기에 맞서 무엇을 조직하려는지(바로,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할 것 없이 민중의 피와 땀을 가로채고, 기생적인 금융생활자의 영광으로 위기를 지연시켜서 자신들만의 영속적 지배를 공고히 하려는 지배세력들의 한판 굿을 벌리려는 것)을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배계급의 정치적 위기가 곧바로 인민대중의 정치적 기회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노동자, 농민, 여성 모두 개별화된 채 존재하고 있다. 대중조직의 정치노선은 분화되고 있으며, 나아가 포괄 대중에 대한 대중조직의 정치적 헤게모니조차 상실되고 있다. 물론 우리는 대중운동을 혁신하려는 기운이 곳곳에서 꿈틀거리고 있다는 사실과도 마주하고 있다. 공동 투쟁을 통해 대중들이 직접 연대를 실현하려는 노력에서 상설적인 공동투쟁체를 건설하려는 노력까지, 당-노조 차원으로만 제한되지 않고, 직장과 가족을 넘어 지역과 부문을 아우르려는 노력까지, 이 모든 것들이 대중운동의 한 자락을 이루고 있음 또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중의 공동 투쟁 경험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사실이고, 더군다나 2002년 대통령 선거 이후 새로운 지배권력이 들어섰을 때 전체 민중운동 진영이 이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연합적인 질서가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노동자, 농민, 여성이 바로 이런 연합적인 질서를 만드는데 있어 정치적 조건을 바꾸고, 공동투쟁의 기회를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부도덕한 정권을 대신하여 들어설 반동적 정권에 맞설 수 있는 전국적 투쟁 거점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은 이 속에서 대중운동 혁신의 거점을 확보하고, 대중운동 혁신의 흐름이 서로 실천적으로 연대하도록 하는 것이다. 곧,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민중운동의 과제는 전선의 복구와 투쟁-저항주체의 형성과 이들의 연대를 통한 대중투쟁체 건설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대선 시기를 관통하는 공동의 투쟁대오를 강조하며, (진보정당으로) 제한되지 않는 대중의 정치적 투쟁체, 대중의 선거 투쟁체 건설을 제안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범추를 넘어 내년도 공동투쟁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고자 진보진영 대통령 후보 경선과 민중운동진영의 단일 대응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중운동 지도부 교체가 대중운동의 혁신을 대신할 노릇이 못되듯, 민중운동 좌파진영의 우선 결집 혹은 입지변화가 민중운동의 혁신과 질서재편을 대신할 노릇이 못된다. 민중운동의 혁신은 노동자, 농민, 여성 대중투쟁주체의 형성을 뜻하는 것이며, 실천적인 연대를 꾀하면서 대중운동의 혁신을 주도하는 것이다. 대중운동을 좌익적으로 강화하고자 하는 세력들의 결집은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될 뿐이다. SO-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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