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정책대의원 대회,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하다
지난 8월 22-23일 개최된 민주노총 정책대의원 대회(이하 정책대대) ‘유회’ 이후 위원장 사퇴와 철회, 지도집행력 및 운영체계 개편 등 일련의 논란은 이번 정책대대 평가가 과거 여느 대대 평가와 달라야 함을 시사한다. 지난 일련의 과정은 민주노총 혁신의 전망을 제시하고 이를 조직 내에서 민주적·집단적 총의를 모아내는 지도집행 역량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중장기 발전을 위한 전략의 부재, 민주적 토론문화의 결핍, 조직 내부 이견과 갈등 조정 기능의 상실 등 민주노총을 둘러싼 주체적 여건을 정확히 평가하고 극복해야 한다.
정책대대 파행 이후 민주노총 내부의 무기력과 혼란을 일소하고 향후 민주노조 운동의 혁신과 발전에 관한 논의를 다시 열어가기를 바라며, 10.12 민주노총 중앙위를 앞둔 지금 정책대대 평가에 관해 몇 가지 의견을 밝힌다.
체계적인 전략과 조직 전체를 아우르는 논의의 부재
노동운동의 중장기 발전전략을 제대로 토론하려면,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이론적·정책적 기반이 필요하다.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시장·노동과정 변화와 노동자운동의 상태,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바탕으로 전략 투쟁, 조직 강화, 조직 확대, 정치방침, 조직 운영 방안 등이 체계적으로 토론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번 정책대대는 ‘지난 20년간 민주노총 운동을 평가하고 새로운 20년을 설계한다’는 당초의 취지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했다.
우선 정책대대 준비 과정에서 조직 전반을 아우르는 집단적 논의를 충분히 조직하지 못했다. 정책대대 기획단 회의가 2016년 1~7월간 7차례 진행되고 가맹산하조직 전략·기획위원으로 구성된 전략위원회가 4~8월 간 4차례 개최되고 6월부터 현장토론이 진행되었지만 전조직적인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 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밝히고 논의를 이끌어가야 할 집행부는 전략을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단적으로, 정책대대의 내용을 기초하기 위한 사전 작업으로서 민주노총 전략위원회 자문단 보고서가 2016년 제8차 중집(2016.3.31)에서 사실상 폐기되었다. 이후 논의는 장기 발전 전략이라기보다는 2016-17년 중기 전략투쟁과 산별노조·지역본부 강화방안, 정치 방침, 전략조직화 등 주요 의제별 쟁점을 중심으로 토론되었다. 이마저도 충분히 토론되지 못했는데, 전략위원회에서의 논의가 각 의제에 대한 최소수준의 합의안을 마련하고, 산별․지역본부 담당자들의 의견을 실무적으로 조정하는 것에 그쳤기 때문이다.
부차화된 노동운동 혁신의 쟁점들
노동운동의 발전 전망에 대한 공통의 지반이 약한 상태에서 의제별․쟁점별로 토론하게 되면, 당장 산별지역본부나 제 현장 의견그룹의 이해관계가 걸린 쟁점이 유일한 사안인 것처럼 핵심 화두로 떠오르게 된다. ‘정치방침’ 논의가 대표적이다.
이런 사정을 반영이라도 하듯 정책대대에서도 토론은 정치방침 논의에 집중되었다. 조직혁신전략 각론으로 각각 ‘전략투쟁과 의제’, ‘조직강화’, ‘조직확대’, ‘정치전략’ 등 4가지 의제가 제시되었지만 ‘전략투쟁과 의제’만 그나마 좀 토론되었을 뿐, 조직 강화 방안이나 조직 확대 방안에 대해서는 토론이 순식간에 종결되었다. 노조운동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쟁점들이 초라하게 논의된 것이다.
사실 애초 ‘중장기 전략사업’을 위한 각론이었지만 실제 제출된 안은 그에 미달하는 수준이기도 했다. ‘전략투쟁과 의제’는 중차대한 과제지만, 2017년 전략투쟁(총파업)을 어떻게 하자는 수준에서 논의되었을 뿐, 정작 그것을 이루기 위해 조직 내부에서 무엇을 혁신하고,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에 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담지 못했다. ‘조직확대’의 경우 전략조직화 사업에 대한 평가에 기반을 두어 조직화사업을 위한 안정적인 체계 강화와 시스템 구축에 초점을 맞춰 구체적으로 제출되긴 했지만 이 안건은 안타깝게도 토론도 못했다.
평가와 반성, 책임성이 결여된 정치방침 논의
주지하는 것처럼 이번 정책대대에서 논란이 된 것은 정치방침이었다. 2012년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방침 철회 이후, 민주노총은 정치방침 논의에 거리를 두어왔다. 현장의 무기력과 불신을 일소하고 민주노총 운동의 진전을 위해 정치방침 논의를 재개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여기에는 많은 노력과 주의가 필요하다. 민주노동당의 분당과 뒤이은 통합진보당 사태와 함께 좌초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실험에 대해 민주노총 스스로가 책임 있게 평가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정책대대 전 과정에서 정치방침 논의는 지난 역사에 대한 평가와 반성,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재개하기 위한 필수 조건들에 대해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고 대단히 협소한 쟁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말았다. 노동조합 운동의 정치활동 방향이 어때야 하는지 밝히고, 진보정당운동 실패의 원인은 무엇이고 그 교훈은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표방하며 새로운 정당운동을 추진할 것인지, 정당운동과 노조운동이 상호 접점을 못 찾고 있는 상태에서 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당면한 의견그룹 간 갈등 문제는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지 등 방안을 찾았어야 했는데, 이를 충분히 밝히지 못한 것이다.
민주노총이 즉각 정당건설에 착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들은 2017년 대선과 2018년 지자체 선거 등 당면 정치 일정을 고려한 채 성찰과 혁신 없는 실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2012년 이후 각개약진하고 있는 제 정당·의견그룹들은 민주노총의 정치 방침 논의를 누가 주도하는지, 정당 건설 논의가 기존 정당구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유불리를 따지기 시작했다. 정치방침 논의에 의견그룹은 있었지만 민주노총은 없었던 셈이다. 그 결과 ‘차기 정대에서 진보정당 추진여부를 논의’하겠다는 <1안>과 ‘추진위를 구성하고 차기 정대에서 로드맵을 논의’하겠다는 <2안>이 상정되었다. 직전 개최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집행부와 산별대표자들은 서로의 이견조정에 실패했는데, 이 순간 대대 파행은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집행부는 정책대대를 불과 한 달 앞둔 시점까지 정치방침에 관한 분명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고, 정책대대 준비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의결주문의 형태로 정치방침(안)을 제시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일 대대에서는 집행부가 제출한 <1안>을 지지하는 발언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집행부를 지지하는 주요 의견그룹들마저도 ‘1, 2안 둘 다 민주노총 주도하에 진보대통합정당을 건설하겠다는 점에서 다를 바 없으니 의결 주문을 폐기하자’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집행부는 정치방침 의사진행 과정에서 다양한 이견을 조정하고 원활하게 의안을 처리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정책대대는 끝내 유회되고 말았다.
2016년 정책대대 실패의 교훈
‘20년을 바라보는 노동운동의 중장기 발전전략’, 포부는 원대했지만 정책대대가 소기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아쉽게 마무리된 이유에 대해 좀 더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이번 정책대대 유회는 정치방침을 둘러싼 몇몇 정파들의 갈등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니다. 민주노총 혁신 동인 자체가 취약한 상태고, 이를 이끌어 나가야 할 지도역량마저도 취약한 상태라는 점을 확인해 둘 필요가 있다.
지금 민주노총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을 뿐, 정치적 대표성은커녕 변화된 노동시장에서 다수의 노동자층도 대변하고 있지도 못하고 있다. 노조로서 최소 기능, 조합원 자기 방어도 급급한 상태다. 이러한 현장의 침체와 무기력을 쇄신할 구체적 로드맵 없이 민주노총이 ‘전략’을 수립하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변화와 혁신을 가져오기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 정책대대 평가는 정책대대 파행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민주노총의 객관적 상태와 주체적 여건에 대한 진단, 그리고 민주노조 운동을 책임지는 우리 모두에 대한 겸허한 성찰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우선 민주노총의 정치적·조직적 단결과 혁신을 이끌어나갈 지도집행력 제고 방안을 모두가 함께 모색해야 한다. 그리고 갈등의 핵이 되었던 정치방침 논의는, 민주노총 지도집행력의 재구축과 함께, 정당운동과 노조운동의 연대를 도모하는 방식으로, 민주노총의 계급대표성을 구축하고 정치사회운동의 구심점을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다시 토론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계급대표성을 제고할 수 있는 투쟁, 즉 노동자 내부의 단결력을 제고할 수 있는 공동 투쟁과 잘 설계된 전략조직화 사업, 그리고 이상을 추진할 수 있는 민주노총 내부의 자원 확보 방안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혁신 방안을 진척시킬 힘이 생긴다.
2017년 정기 대의원대회에서는 이번 정책대대의 실패를 딛고 민주노조 운동의 변화와 발전 전략을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2016년 10월 5일
사회진보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