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정상회담,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답을 찾기 어렵다
- 2차 북미정상회담에 부쳐
‘스몰딜’, 결국 ‘노딜’로 끝나다
‘하노이 회담’이 ‘하노이 선언’ 없이 끝났다. 2월 27~28일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은 아무런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1차 북미정상회담 이후 2차 회담까지 8개월이 흐르는 동안, 첫 정상회담 전 트럼프 미 대통령이 호언했던 ‘일괄타결을 통한 신속한 비핵화’는 사실상 진척되지 않았다. 6월 ‘싱가포르 선언’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북미 간 명확한 정의 합의도, 북한의 비핵화 스케줄도 명시하지 않자 많은 이들이 이면 합의를 기대했으나 그러한 것은 없었다. 2018년 연내 종전선언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서울 답방도 수차례 언급되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2019년 2월, 정상회담을 3주 앞두고 회담 날짜가 확정되고서야 북미 간 본격적인 의제 협상도 시작되었으나 북한 비핵화와 미국의 상응 조치에 관한 이견은 쉽사리 좁혀지지 않았다. 1차 정상회담이 회담 직전까지 고위급 실무협상을 진행했음에도 두루뭉술한 결과를 낸 것처럼, 2차 북미정상회담도 협상의 핵심은 양국 정상간 ‘탑다운’ 식 ‘담판’에 맡겨졌다.
회담 결렬의 배경에는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본질적 문제는 이번 회담은 실질적 의미가 약한 ‘스몰딜’과 양국 정상의 담판 형식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쉽게 ‘노딜’이 되어버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정상회담 직전 북미 간 사전 합의에 대한 유력한 추측은 ‘영변 핵시설 해체·종전선언(혹은 평화선언)의 교환, 상호 연락사무소 설치, 한국전쟁 미군 유해 송환’ 정도의 안이었다. 그러나 영변 핵시설 해체의 의미에 대해 미국 내 주류 여론은 회의적이다. 영변 핵시설은 과거 북한 핵개발의 산실이기는 하였으나, 현재는 노후한 시설에 불과하며 북한의 현재 핵 프로그램의 주축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축은 28일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의 카드였다고 밝힌, 현재 대외에 공개되지 않은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이 제공하겠다는 종전선언도 일종의 ‘빈 깡통’으로 볼 수 있다. 정전협정을 대체하는 평화협정으로서 명실상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선언적’ 성격이 강하다. 종전선언이라는 것은 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 국제조약이 아니고 구속력이 없기에 언제라도 되돌릴 수 있다. (평화선언은 종전선언보다도 더욱 의미를 축소한 것.) 즉 이번 회담에서 주고 받기로 했던 것들은 실질적인 의미가 크다기보다는, 양측이 협상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표방하는 계기 정도였던 것이다.
실질적인 비핵화 프로세스가 진행되어야 한다
2월 28일 밤,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은 기자회견을 열어 회담에서 북한 측은 영변 핵단지 전체 폐기에 대한 상응조치로 2016년부터 취한 UN 안전보장이사회 대북 제재 중 민생에 관련된 것만 5개를 해제 요구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하노이회담에서 언급된 대로 다른 핵시설들이 있는 상황에서 영변 폐기가 결정적인 비핵화 조치라고 하기는 어렵다. 5개 제재 해제는 사실상 경제 제재 전면 해제 요구와 다르지 않다. 2016~2017년 북 핵·미사일 실험에 따른 5개 제재 조치는 무기 관련 이전 제재와 달리 북한 주요 수출품의 수출 금지, 원유 수입량 제한 등 핵심적 경제 제재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북한이 핵시설 일부 폐기를 약속하되 핵 능력 자체는 그대로 보유하면서 핵 관련 제재의 전면 해제를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핵 동결·실질적 핵보유국 상태에서 경제 제재 해제와 안전 보장을 얻어내는 것이 북한 정권의 궁극적 목표라는 의심이 커질 수 있다. 그러나 결렬로 끝난 이번 회담 결과가 보여주듯 이는 지극히 실현되기 어려울 뿐더러 따라서 매우 위험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먼저 트럼프 행정부가 그런 안을 받기가 매우 어렵다. 미국 여론, 미국 의회 상황이라는 현실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북한의 부분적 핵군축·핵동결 수준에서 대북제재를 완화하는 정책도 미국 내에서 수용되기가 쉽지 않다. 그럴 경우 그 다음 단계로 협상을 진전시킬 수 있는 미국 측의 카드가 소진되기 때문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을 두고 엉터리 협상보다는 ‘노딜’이 나았다는 현재 미국 내 여론은 앞으로의 북미대화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빈 깡통 주고 받기’ 식 이벤트나 ‘노딜’을 거듭하지 않으려면, 비핵화 로드맵과 대북 제재 해제를 양측이 불가분의 관계로 받아들여야만 협상이 진척될 수 있다. 그렇다면 협상 진척을 위한 비핵화 의제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제기된 협상의제를 고려해 볼 때 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국외 반출과 해체, 나아가 비밀 우라늄 농축시설을 포함해 북한 핵 시설 일체에 대한 신고와 검증 프로세스에 대한 로드맵이 될 수밖에 없어 보인다. 그런데 ICBM 문제의 경우 북한의 핵무기 능력(파괴력, 경량화 등등)이 실제 미국에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가 드러나게 되고, 핵 신고의 경우 역시 북한 핵 능력의 기반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보기에 다음 단계는 영변 핵시설 (일부) 폐기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를 북한 정권이 실행할 의사가 없다면 협상이 더 진척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객관적 현실이 비핵화의 실질적 진입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북미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는 여전히 평행선
회담 결렬에 따른 북한 정권의 정치적 부담은 매우 크다. 경제제재가 북한에 미치는 영향은 심대한데, 북한의 2018년 중국 수출은 전년도에 비해 87% 줄고, 수입은 33% 감소했다. 북한의 무역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사실상 수출·수입길이 막힌 것이다. 2018년 한국은행은 2017년 북한의 실질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을 –3.5%로 추정해 발표했는데, 1997년(-6.5%)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북한이 종전선언보다도 제재 완화에 사활을 거는 이유가 있다. 북한 매체들은 최고지도자의 행보를 뒤늦게 내부에 알려왔던 그간의 보도 관행과 달리 김정은 위원장의 평양 출발 소식과 하노이 도착 소식 등을 신속하게 보도하며 주민들의 기대감을 키워왔다. 그런데 김정은 위원장이 ‘빈손’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리용호 외무상은 기자회견에서 영변 핵시설 폐기와 5건의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해제를 맞바꾸자는 제안은 “현 단계에 우리가 내짚을 수 있는 가장 큰 보폭의 비핵화 조치”, “앞으로 미국 측이 협상을 다시 제기해오는 경우에도 우리 방안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 대한 거친 비난을 자제하며 추후 대화의 여지를 열어놓았지만, 당분간은 영변 핵 폐기가 북한이 최대로 내놓을 안이라고 선을 그은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에는 상대적으로 타격이 적다. 미국 내에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에서 차라리 도움이 된 판단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소식에 미 공화당, 민주당 양당 주요 의원이 모두 “나쁜 합의보다 낫다”며 ‘초당적 찬사’를 보낸 것은 미국 의회 내 상황을 극명히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모든 대북제재는 유지될 것이지만 ‘북한 주민들의 생계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제재를 더 강화하지는 않을 것이고, ‘너무 비싼’ 한미군사훈련을 오래 전에 포기했다고 밝혔다. 또한 대화 국면 자체가 종결된 것은 아니며 계속 대북 협상을 이어가겠다고 했다. 당장 대북 압력을 대폭 강화하지는 않고 트럼프식 ‘전략적 인내’를 이어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 조치의 실질적 진전 없이는, ‘전략적 인내’ 속에서 회담이라는 이벤트가 간간히 진행될 뿐 실제 큰 변화가 없는 국면이 오래갈 수 있다.
비핵화 문제 우회한 문재인 정부의 ‘신한반도 평화경제시대’는 환상
한편 2차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직후인 3월 1일, 문재인 대통령은 삼일절 100주년 행사에서 우리가 주도하는 ‘신한반도 평화경제시대’로 통일을 준비하겠다고 선언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 방안도 미국과 다시 한 번 협의하겠다고 밝혔다. 바로 전날만 해도 북미정상회담의 결렬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청와대는 크게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김정은 위원장 방남을 계기로 한 일련의 정치 이벤트와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 반등 기회, 나아가 남북 경협 확대를 바탕으로 한 ‘신한반도 체제’ 구상에 큰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미정상회담을 앞둔 지난 19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화통화로 UN·미국 차원의 대북제재 완화가 어렵다면 남한 주도로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운영을 재개할 수 있게 하라고 요청한 바 있다. 그러나 결국 하노이 회담이 제재 해제 문제를 둘러싼 이견으로 합의 무산으로 끝난 상황에서, 하루 만에 기존에 하던 주장들을 그대로 반복한 것이다. 현 상황의 무거움과 북미 간 합의 창출에 기여하는데 실패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가 않는다. 범여권 이데올로그들 또한 북미정상회담 실패의 원인을 일본의 개입이나 존 볼턴 미 국가안보보좌관의 탓으로 돌리고, UN 대북제재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정권이 남북경제협력 사업을 지속적으로 밀어붙일 것만을 주문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맹목은 한반도 평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북미 대화 국면을 둘러싸고 문재인 정권과 일부 통일운동 진영의 움직임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바는 사실상 북한의 비핵화가 없이도 한반도 평화체제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환상을 유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실질적 핵보유국 인정을 포기하지 않은 북한 정권의 입장을 사실상 대변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동시에, 북한 정권에도 영향을 미쳐 북미 대화 과정에서 오판을 이끌어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마치 핵동결·핵군축 수준에서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하는 것처럼 대외적으로 비쳐지고 있다. 지난해 10월 문재인 대통령은 유럽을 순방하며 대북제재 완화의 필요성을 주장했으나, 유럽 정상들은 오히려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고 비가역적인 비핵화’를 시행할 경우에 제재 완화가 가능하다고 반응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의 이러한 외교정책을 일종의 ‘민족자주’ 정책으로 볼 수는 없다. 한반도 비핵화와 동아시아 군사긴장 완화가 실현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족’ 정서에 근거한 ‘평화의 봄’ 공세를 펼치는 것은 한반도 민중을 기만하는 것이다. 북한의 핵보유를 용인하면서 북한·중국·러시아의 협력관계를 두둔하는 듯한 태도는 동아시아 지역의 군비증강·군사갈등을 심화시키며 공멸의 위험성을 높일 뿐이다.
북한의 핵 무력 완성이 한반도 정세변화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북한이 북미관계를 주도하고 있다는 일부 통일운동 진영의 정세분석은, ‘조국통일’이라는 기치 하에 남북미대화에 호의적인 문재인 정권을 극우 야당의 공격으로부터 대중적으로 방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민중운동의 객관적 현실 인식이 중요하다
‘스몰딜’조차 되지 못하고 끝난 북미정상회담 결과는 한반도의 평화를 염원하는 민중들에게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 의지가 시험대에 오르는 것을 북미 대화 과정에서 영영 피할 수는 없었다. 민중운동은 영변 핵시설 폐기에 더한 ‘+α’가 쟁점이 되어 이미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뒤에도 “영변을 완전 폐기하면 북한 비핵화는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든다”고 현실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며 금강산 관광·개성공단 재개를 거듭해서 주장하는 문재인 정권과 같은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
상황은 지금보다 더 악화될 수도 있다. 2017년 극에 치달았던 한반도 전쟁위기를 기억하자. 민중운동은 당장의 ‘남북교류’에 일희일비하고, 한반도 평화 정착 이후에 논해야 할 ‘새로운 한반도 체제’에 미리 들뜰 것이 아니라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확고한 계획을 내놓아야 한다. 그 길은 “남과 북이 우리 민족끼리 힘 모으면” 될 것이라는 주관적 희망만으로는 이후의 북미협상도 공전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