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법전에서 이름만 지우면 되나.
지난 10월 17일 열린우리당은 정책 의원총회를 열어 형법조항을 수정, 개조하여 '내란목적단체' 규정을 두기로 하는 것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방침을 당론으로 결정, 이번 회기 내 처리 의지를 밝혔다. 북한을 '반국가 단체'로 규정하거나 '찬양, 고무', '불고지죄' 등의 명목으로 56년간이나 무소불위의 칼날을 휘둘러온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그 자체로 의의가 있을 수 있으나 형법보완안을 살펴보면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을 법전에서 삭제하는 것 이상의 의지가 있는지 의문이 든다. "국토를 참절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고자 폭동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 또는 집단으로서 지휘통솔체제를 갖춘 단체를 구성하거나 이에 가입한 자" 또는 "예비, 음모한 자"에 대한 처단이라는 규정을 신설하겠다는 것은 사상, 결사 자유의 제한이라는 기존 국보법의 역할을 고스란히 형법으로 이전, 오히려 형법의 확대해석 여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한, 북한을 외국으로 규정해 적국규정의 해소라는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적대적인 외국은 적국이라 규정한다는 형법조항을 그대로 남겨놓아 북한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다 평가하기 힘들다.
국가보안법의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법전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이름을 지우는 것 뿐만 아니라, 국가권력이 안보와 권력유지의 명분으로 사회구성원에게 가할 수 있는 폭력의 여지를 제거하는 것, 식민지배와 군사독재를 온몸으로 수호해왔던 국가권력의 개인에 대한 인권탄압의 역사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지금의 국가보안법 폐지는 국가보안법이 국가안보와는 하등 상관 없는 것이었으며 식민지배의 정당화, 독재수호와 반공발전주의 관철의 도구였을 뿐이었다는 사회적 선언을 의미해야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를 말하고자 한다면 이 역사적 선언에 대한 책임을 갖고 전 사회적 동의지반을 얻기 위한 노력과 조건없는 전면폐지를 말해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기 위해서는.
여당의 국보폐지발언이 있은 후 보수수구세력은 그에 대한 위기감을 드러내며 결연한 사수의 의지를 보였다. 이러한 보수수구세력의 위기감과 그에 따른 결집은 국가보안법이 폐지되면 인공기가 휘날리고 적기가가 서울시내에 울려퍼질 것이라는 망상에서 비롯되기 보다는 점령과 식민지배를 일삼아온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반공발전주의를 내세워 한국사회를 휘둘러온 기존의 지배세력에 대한 역사적 평가의 균열이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안보위협의 원인을 북한에 돌리고 군사독재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을 반공발전주의의 이름으로 처단해왔던 대한민국에서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이란 "자유민주주의의 최후의 안전장치"이며, 자신들의 기득권의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은 단지 이들만의 최후 안전장치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전면폐지에는 쉽사리 동의하지 못하며 국가보안법의 안보기여도를 긍정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개폐논쟁이 이렇듯 수면 위로 떠오르기까지 수십년간 인권과 정치사상의 자유를 유린당해온 민중들의 끊임없는 증언과 투쟁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확장된 국가권력이 자의적으로 국민 개개인의 사상이념을 검열, 억압해서는 안된다는 국민적 의식의 확장이 있었다. 이러한 의식의 확장이 개정 내지는 폐지 입장의 근거로 작동하는 반면, 전면폐지가 선뜻 동의되기 힘든 조건은 여전히 안보위협의 최대 적으로서의 북한이라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보안법의 폐지는 바로 이 북한을 최대 위협존재로 간주하는 안보이데올로기의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의 국보폐지 의지는 안보불안의 원인을 북한에 돌리고 반공발전주의의 그늘아래 민중들을 통제해왔던 지난 56년간의 역사의 평가에 기반한 것인가. 낡은 시대의 유물은 칼집에 넣어 박물관에 보내기 위해서는 낡은 시대에 대한 평가가 필수적임은 당연한 일이다.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은 이념/사상 투쟁의 가능성을 인위적인 국토분단의 맹목적 전쟁으로 비화시켰으며, 그러한 국토 참절의 주범은 바로 미제국주의 세력이었다. 일제시대 치안유지법을 본따 만든 국가보안법은 그 태생이 바로 제국주의에 의한 한국사회 반공발전주의의 성공적 수행을 뒷받침하는 체제의 수호신이었던 셈이다. 달라진 시대라 함은 6.15 공동선언 이래 경협 등 남북교류가 점증하고 있다는 점이며, 그를 위해 국가보안법이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은 의미할 뿐이지, 미·일 제국주의에 대한 근본적 입장의 변화없이 한미일공조 체제를 유지하며 안보위협의 제일요소로 북한을 꼽는 정부의 관점이 변화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대북군사력 증강과 경제제재 등의 위협과 한편으로는 북한에 자본주의 질서로의 편입을 강요하고 포섭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현재의 미일동맹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의 북한의 안보위협이란 제국주의 동맹의 외압으로부터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방어적 의미를 띈다. 따라서, 제국주의 세력과 한국사회의 반공발전주의 성장의 과정에 대한 근본적 성찰 없는 지금의 국가보안법 폐지 논의는 한계적이다. 또한 사상, 결사의 자유를 사회불안요소 제거, 안보위협의 제거라는 차원에서 무지막지하게 억눌러온 지난 날의 역사를 계승하여 언제든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날카로운 검이 되어 돌아올 수 있다.
국가보안법 전면 폐지, 민중의 힘으로 이루자.
국가보안법을 과거의 법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과거에 대한 평가를 수행하는 책임있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한나라당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 최후의 안전장치"로서의 국가보안법은 노무현정부에게도 유효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의 무덤 앞에서 겉으로는 묵념을 하며 속으로는 부활을 부르는 이중성은 야당과의 상생, 여론수렴 등을 빌미로 또다른 괴물을 탄생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안보논리를 정점으로 하는 지금의 국보법 개폐논쟁은 국보법 폐지 투쟁의 역사적 의의를 왜곡하고 있다. 이 왜곡된 논쟁구도에 여전히 민중들의 정치사상은 검열당하고 있으며 진정한 안보불안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국가안보란 무엇인가라는 전사회적인 성찰을 가로막는 조건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한반도에서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와 반공발전주의의 역사를 청산하는 과정에 놓여야 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조건없이 전면 폐지되어야 한다.
2004.10.20 사회진보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