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해마다 히로시마·나가사키를 번갈아가면서 본대회를 치른다. 올해는 나가사키에서 본대회가 열리는 해로, 일본 전역에서 온 5000여 명의 참가자가 나가사키 시에 모였다. 그만큼 나가사키에서의 일정은 밀도가 매우 높았다. 실제로는 8월 7일 개막총회와 청년집회, 8월 8일 주제별 분과회(워크숍)와 여성집회, 8월 9일 폐막총회와 피폭자 국제서명 거리캠페인의 순서로 일정이 진행되었지만, 내용의 흐름상 사회진보연대가 참가한 <비핵·평화 동북아시아와 운동의 역할> 워크숍을 먼저 소개하고 개막총회와 폐막총회, 청년대회와 여성대회 등 나머지 행사의 내용을 소개하겠다.
<비핵·평화 동북아시아와 운동의 역할> 워크숍
8월 8일에는 나가사키 시 각지에서 주제별 분과회(워크숍) 10개와 현장답사 프로그램 3개가 동시에 진행되었다. 분과회 주제는 ①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계를 향해 – 풀뿌리운동의 활동 ② 비핵·평화 동북아시아와 운동의 역할 ③ 탈핵·평화 기반 지자체 만들기 ④ 일본헌법 9조 수호를 통한 탈핵·평화 일본 만들기 ⑤ 피폭 경험을 세계에 알리고 계승하기 – 피폭자와의 연대 ⑥ 핵무기와 핵발전 ⑦ 군사비 삭감을 통한 평화와 인간다운 삶 ⑧ 반핵·평화의 문화 확장 ⑨ 청년포럼 – 피폭자 방문, 배움과 교류 ⑩ 영상으로 배우는 히로시마·나가사키였다. 현장답사 프로그램으로는 ① 사세보 미군기지 답사 ② 나가사키 원폭 건축물 및 기념비 방문 ③ 소년소녀 평화포럼이 있었다. 사회진보연대는 분과회② 비핵·평화 동북아시아와 운동의 역할에서 카와타 타다아키 일본원수협 전국상임이사, 조셉 거슨 미국 평화군축안보캠페인 대표와 함께 패널 발표를 맡았다. 분과회 제목은 ‘동북아시아’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발표와 질의응답의 대부분이 한반도 문제에 대한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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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는 한반도 비핵화와 동아시아 평화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동아시아의 핵 경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일 평화운동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주제로, 한일 평화운동이 양국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요구하면서 북한에도 과감한 비핵화 결단을 촉구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사드(THAAD) 철회 투쟁, 일본 평화헌법 개헌 반대 투쟁,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투쟁 등에 한일 평화운동이 지속적으로 연대하여 군비대결의 악순환이 아닌 선제적 군축 조치의 선순환을 만들어 내야 한다. 나아가 평화 확립만이 아닌, 민주주의와 노동권, 평등 확대에 있어서도 한일 사회운동 연대의 강화가 필요하다. 발표의 상세 내용은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로! - 원수폭금지2019년세계대회 참가기①>(http://www.pssp.org/bbs/view.php?board=focus&nid=7873&page=1)에서 참고할 수 있다.
카와타 타다아키 일본원수협 전국상임이사의 발표는 <판문점 회담 후 과제와 전망 – 일본은 헌법 9조에 맞는 대응을>이란 제목이었다. 우선 심각해지는 한일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침략과 식민지배 역사의 직시와 반성에 입각한 이성적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6월 30일 판문점 회담 이후로 2,3주 내에 재개될 것이라던 북미 실무회의가 8월까지도 전혀 진전이 없는 상황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카와타 상임이사는 북미대화 교착 상태를 깰 ‘2개의 열쇠’로 ① 비핵화와 평화의 일체화 ② 단계적 전진을 제시했다. 우선 영변 핵시설 영구적 폐기와 한국전쟁 종전선언이 교환되고, 북미대화가 진전되어 종전선언이 (미·중·남·북의) 평화협정으로 이어지면 동북아 정세의 대변화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 국무부가 북한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전진해야 하는 목표로 두고, 북한이 현재 계속하고 있는 우라늄 농축 활동 등을 중단시키는 핵 개발 동결안이나 대량 살상 무기 개발 프로그램의 동결안을 비핵화 협상의 최초 단계로 검토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시했다.
향후 정세에서 일본 평화운동의 역할은 아베 정권이 일본헌법 9조의 평화정신에 따른 대북정책을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아베 정권이 북한을 군사적·외교적으로 압박하는 것을 중단하고,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 등을 거론하기 전에) 조건 없는 북일대화를 통해 북일 국교 수립을 포함한 포괄적 교섭을 진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전 세계 160여 개 국이 북한과 국교가 있는 상황이다. 2002년 9월 17일의 <북일평양선언>에 명시된 “핵문제 및 미사일문제를 포함한 안보상의 여러 문제를 해결하겠다” “(북일)국교정상화 조기실현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 교섭을 재개한다. 일본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현안 문제에 대해 북한 측은 이러한 유감스러운 문제가 앞으로 발생하지 않도록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다”와 같은 내용을 이행해야 한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일본 정권이 1993년 8월 4일의 ‘고노 담화’(<위안부 관계 조사 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 관방 장관 담화>)와 1995년 8월 15일의 ‘무라야마 담화’(무라야마 총리 담화 <전후 50주년 종전 기념일을 맞아>)에 명시된 ‘위안부’ 문제와 식민지배 및 침략에 대한 사죄와 반성을 이어가야 한다고 촉구했다. 한국 지도자들과 시민들의 요구는 특별하거나 무리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정권과 정치인들이 이와 같은 과거 사죄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북미프로세스와 한일관계의 해결에 있어 한일 평화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발표를 마쳤다.
조셉 거슨 미국 평화군축안보캠페인 대표는 북미대화 진전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위한 미국 평화운동의 움직임을 소개했다. 이전에는 한반도 문제가 미국 평화운동의 중심 의제가 아니었지만, 2010년대를 경유하면서 제2의 한국 전쟁의 위협이 가시화되었다는 판단에 기존의 미국 평화 운동가들과 한국계 미국인들이 모여 한반도 문제에 대한 전국적 연대체 코리아피스네트워크(Korea Peace Network)가 창설되었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코리아피스네트워크는 미국과 북한이 레토릭과 전쟁 준비로 위기를 고조시키던 때에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고 미국, 한국, 일본은 북한의 정권 교체를 목적으로 하는 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고 경제 제재를 완화하는 ‘쌍중단’(freeze for a freeze)을 요구했다.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이후부터는 한국 전쟁 종전 선언과 특히 남북한 간의 신뢰 구축을 가로막는 경제 제재의 완화를 요구하면서, 그러면 북한이 호응하여 상응조치를 취할 것이라 기대했다.
현재는 로 칸나 하원의원이 발의한 공식적으로 한국전쟁을 종결하는 법안(H.Res.152)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과 의원 37명(2019년 8월 현재)이 지지를 보내고 있는데, 공동발의 의원의 수를 늘리려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레이스 멩 하원의원이 발의한, 한국계 미국인과 북한 내 가족들의 상봉을 추진하는 법안도 코리아피스네트워크가 함께 하고 있다.
한일관계와 한반도 비핵·평화에 대한 일본 활동가들의 질문들
패널 발표 뒤에는 장장 3시간가량 질의응답과 토론이 이어졌다. 세계대회 일정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해외 참가자들에도, 일본 패널들에게도 날카롭고 솔직한 질문을 던지면서 평화운동 내 쟁점들을 논의하고자 한 일본 청년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카와타 상임이사의 발표를 듣고 “발표에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비판이 너무 적고 무른 것 같은데요. 혹시 원수협에 북한의 핵과 장기적으로 공존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질문하거나, 피폭 경험을 공유하는 일본 피폭자 패널에게 “원폭 투하에 대해서 미국이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라고 할 수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한 조선인 피폭자에는 일본의 책임도 있는 것이고, 또 식민지배 역사 전반에서는 일본이 가해자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질문을 던지며 대답을 경청하는 일본 청년들을 보면서 이러한 청년들의 활동이 일본 평화운동에 새로운 활력이 되기를 기대했다.
이하 질의응답은 8월 8일 나가사키 분과회에서 일본 참가자들로부터 받은 질문과 사회진보연대의 대답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히로시마 일정에서도 비슷한 질의응답들이 있었는데, 내용이 겹치므로 여기에 합쳐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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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름조차 존재해서는 안 될 악, 핵무기
나가사키 대회에는 핵무기 폐기와 군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다양한 투쟁 주체들의 발언이 이어졌다. 히로시마 대회에 발언문을 보내 대독시킨 히로시마 시장과 달리, 타우에 토미히사 나가사키 시장이 나가사키 세계대회 개막총회에 직접 참여하여 “핵무기를 없앨 가장 큰 힘은 시민사회로부터 나온다. 피폭자 국제서명을 널리 확산시키자. 지금은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당사자가 생존해 있는 세대에서 그렇지 않은 세대로 넘어가고 있는 분기점이다. 핵무기의 무서움과 핵무기 없는 세계를 만드는 것의 중요성을 아이 세대에까지 제대로 전달하고 알리자”는 취지 발언을 해 인상 깊었다.
핵무기금지조약을 이미 비준·발효한 국가들에서도 세계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였다. 게오르게 빌헬름 갈호퍼 오스트리아 유럽통합외교부 공사(2018년 5월 8일 핵무기금지조약 발효), 메이렘 리베로 주일 쿠바 임시대리대사(2018년 1월 30일 발효), 멜바 프리아 주일 멕시코 대사(2018년 1월 16일 발효), 세이코 이시카와 주일 베네수엘라 대사(2018년 3월 27일 발효)가 참석하여 자국에서 어떻게 핵무기금지조약을 비준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비핵보유국들이 힘을 합쳐 핵보유국들에 핵무기 폐기를 강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재까지 주로 비동맹 운동에 포함되었던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 지역을 중심으로 20여 개 국이 핵무기금지조약을 발효한 가운데 유럽 국가 중 최초로 발효한 오스트리아의 사례나, 멕시코 헌법에는 “핵 기술은 오직 평화적 목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는 언급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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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전 세계 정부에 요구하는 피폭자 국제서명 운동 진행상황을 일본 내 각 지역, 주체, 단체별로 보고하는 가운데, 인도와 미국에서 받은 국제서명도 전달되었다. 현재까지 전 세계에서 수합된 서명은 3000만 명 이상에 달한다. <고등학생 1만인 국제서명> 캠페인을 진행하는 학생들은 무대에 올라 “피폭자의 증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세대”로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향한 운동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결의했다. 홋카이도, 도쿄, 오사카 등 일본 전역에서 히로시마를 향해 행진해온 ‘평화행진’ 팀도 무대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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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와 후쿠시마에서 온 참가자들은 지역의 투쟁을 소개했다. 새 미군기지인 헤노코 기지가 건설될 예정인 오키나와 현 나고 시의 전 시장이자 오키나와 현 나고 시 전 시장 겸 헤노코신기지건설반대올(All)-오키나와회의 공동대표인 이나미네 스스무 씨는 왜 신기지가 필요하며 왜 이 위치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일본 정부는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을 전혀 내놓지 못하면서, “헤노코가 유일하게 적합하다”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이 투쟁은 평화헌법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인권 문제, 환경 문제, 민주주의 문제이며 오키나와만이 아니라 일본 전역의 문제라는 발언에서 한국의 성주 소성리 사드 미사일 철거 투쟁이 떠올랐다. 오키나와에서 온 중학교 2학년 학생은 자신은 어패류 전문가가 되는 것이 꿈인데, 미군기지가 생기면 생태계가 파괴되어 지금 하고 있는 어패류 연구를 할 수 없게 된다고 호소했다. 오키나와 현 서남쪽의 미야코지마에 육상 자위대 부대를 배치하는 일본 정부의 계획도 규탄의 대상이 되었다. 섬 중심부에 500~600명 규모 부대와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어 주민들은 전쟁이 났을 때 가장 먼저 공격 대상이 될 것을 걱정하며 반대 투쟁을 벌이고 있다.
후쿠시마에서 온 여성들은 후쿠시마 어린이들의 건강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팀 활동을 시작했으며, 오염된 토양 문제 등에 대응하여 서명운동 등의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것을 소개했다. 작년 2월에 후쿠시마 제2원전이 폐쇄된 것은 2011년 사고 이후 지난 8년에 걸친 투쟁의 결과이며, ‘원전(原電)제로’를 이루는 날까지 계속 싸우겠다고 밝혔다. 전반적으로 여성대회나 그 외 행사에 참가한 여성들의 발언은 ‘어머니’로서 ‘아이들’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싸우겠다는 메시지가 두드러졌다.
대회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은 것은 한일 양국의 피폭자 증언이었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일정 전반에 피폭자들의 고통과 지난 70여 년 간 피폭자들이 이끌어 온 반핵·평화운동에 대한 깊은 존중이 깔려있었다.
나가사키 피폭자를 대표하여 나가사키 청년집회 간담회 패널을 맡은 다나카 테루미 씨는 13세 때 원폭 투하를 경험했다. 그러나 2차대전 종전 직후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미국이 일본에 가한 원폭 피해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증언했다. 1952년 미군정이 끝나고, 1954년 마샬 군도에서 진행된 미국의 핵실험에 일본 어부들이 피폭되는 사건이 있고서야, 즉 원폭 투하로부터 10년 가까이 흐른 뒤에야 피폭자들이 피해를 이야기하며 핵무기 금지와 미국의 배상 책임을 주장할 수 있었다. 다나카 씨는 피폭에 따른 건강 문제는 거의 겪지 않은 축에 속하지만, 패전 이후 상당 기간 지속되었던 일본의 절대적 빈곤 시기를 견디는 것 자체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원폭 투하로 무너진 나가사키는 특히 더 그러했다. 전쟁은 일순간의 고통이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고통이라는 것을 절절히 느끼고 살아왔으며 이러한 점을 반드시 후세에 전하고 싶다고 강조했다. “원폭 투하에 대해서 미국이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라고 할 수는 있지만 식민지배 역사 전반에서는 일본이 가해자가 아니냐”는 한 청년 참가자의 질문에 대해서는, “미국과 일본의 전쟁은 하지 말았어야 할 잘못으로, 시작은 작은 계기였지만 결국 엄청난 전쟁이 되었다는 점에서 ‘전쟁’이라는 것 자체의 무서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이나 미국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는다. 한일 관계에 대해서는 한국에 적대적이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고통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는 아베 정부가 반성해야 한다. 일본 시민들은 한반도와 다른 지역을 식민 지배하고 고통을 준 역사를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3년 전 ‘피폭자 국제서명’을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2020년 NPT 재검토회의 즈음하여 무언가 긍정적 프레임을 형성하는 정도를 기대하고 시작한 것인데, 바로 다음 해인 2017년 UN에서 핵무기금지조약이 채택되어 상상도 하지 못한 성과를 거두었다며, 자신이 죽기 전에 꼭 핵무기금지조약의 전 세계 발효를 실현시키고 싶다고 발언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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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폐막총회에서 나가사키 피폭자 요코야마 테루코 씨는 4세 때 겪은 원폭 투하 경험을 증언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피폭 사흘 후에야 겨우 방공호에서 아버지를 만났을 때에 아버지의 두 눈이 보라색으로 변해 있고 얼굴이 피범벅에 퉁퉁 부어있던 것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온 천지가 ‘죽음의 마을’이 되었다. 원폭 투하 후에 태어난 동생에게까지 건강 문제가 발생하여 입퇴원을 반복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도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요코야마 씨는 그런 고통을 인류가 다시 겪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원히, 나가사키가 인류 최후의 피폭지로 남도록 만들자”는 요코야마 씨의 발언이야말로 피해에 대한 보복이 아니라 문제의 근원을 제거하고자 하는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정신을 잘 나타내는 말이라고 느꼈다.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이규영 이사의 발언이 바로 이어졌다. 발언 도중 74년 전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시간인 오전 11시 2분이 되어, 약 1분간 모든 참가자가 묵념하며 기리기도 하였다. 이규영 이사는 어릴 적 히로시마에서 겪은 원폭 투하와, 그 날 이래로 아버지의 생사여부를 알지 못하는 사연을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유골조차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는 한을 언급하며 눈물을 흘릴 때 객석에서도 함께 탄식하는 이들이 많았다. 돈이 없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어머니는 부상을 입은 팔에서 벌레가 나올 정도로 상태가 악화되었다. 해방이 되자 가족들과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고향 사람들은 겉으로는 반겨주면서도 내심 피폭당한 이들을 꺼리는 눈치를 보였다. 피폭의 후유증도 평생 지속되었다. 한국인 피폭자들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과 원폭을 투하한 미국으로부터 사과를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국 시민을 보호해야 할 한국 정부로부터도 오랜 세월 동안 제대로 된 보호 조치를 받지 못했다. 이규영 이사는 핵무기는 그 이름조차 존재해서는 안 될 악으로, 모든 핵무기의 제조와 사용에 반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인 피폭자들은 앞으로 미국과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고, 고향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희생된 한국인 피폭자들의 위령비를 한국 국내에도 세우는 운동을 펼치겠다고 밝혔다.
‘나가사키로부터의 호소’와 ‘나가사키에서 전 세계 모든 국가 정부에 보내는 편지’를 참가자가 낭독하며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일정은 막을 내렸다. (이 두 글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글 아래에 첨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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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생각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보낸 시간 동안, 일본 평화운동에서 피폭자가 차지하는 엄청난 위상과 달리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 피폭자의 존재는 놀라울 만큼 비가시화되어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국의 원폭 투하에 의한 한국인 원폭피해자가 총 사망자 5만 명, (당시) 생존자 5만 명, 총 10만 명으로 추정된다. 말하자면 한국과 한국 시민도 피폭의 ‘당사자’인 것이다. 그러나 결코 적지 않은 규모의 피폭 생존자 중 대다수가 한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된 지원을 받지 못하며 살아왔다. 1945년으로부터 74년이 지난 2019년 4월에 처음으로 국가 차원의 원폭 피해자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되었으며, 원폭 2·3세 피해자에 대해서는 파악·지원이 전무하다.
한편 한국의 핵무기 보유에 대한 여론을 조사하면 늘 ‘찬성’이 과반수를 차지한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의 피폭자들이 겪은 고통을 안타까워하고 핵무기 사용은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한국인 피폭자들을 생각하면 안타깝긴 하지만 원폭 투하 자체는 불가피했다” “원폭 ‘피해’ 강조는 태평양전쟁 전범국인 일본이 과거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구실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 같다.
이러한 상황은 핵과 관련된 논의가 억압되어 온 역사에 기인한다. 한국 지배계급은 미국의 한반도 핵 정책(핵무기 배치, 핵 발전)을 시종일관 지지했으며 이에 반하는 논의는 차단했다. 반핵을 주장하는 것은 국가안보에 반하는 것이었고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의 문제는 의도적으로 금기시되었다. 일제를 패퇴시킨 원폭을 찬양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본 반핵운동과의 연대는커녕, 반핵운동의 성장 자체가 어려웠다.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나, 한국전쟁 당시 미국 트루먼 행정부와 이를 이은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대한 원폭 투하를 진지하게 고려했으며 이승만 전 대통령은 이를 “비장한 각오로 환영”했다. 북한과 중국에 대한 핵 위협은 한국전쟁 시기 내내 상수로 존재하고 있었다. 오키나와 미군기지에서 출격시킨 B-29 폭격기로 모의 한반도 핵공격 훈련, 일명 ‘허드슨 항구 작전’(Operation Hudson Harbor)이 실시되기도 했다. 한반도 핵공격이 현실화되었다면 한반도 민중과 자연이 엄청나게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태평양전쟁과 달리 원폭 투하가 오히려 미소 간의 핵전쟁을 포함한 전면 확전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핵공격이 결과적으로 실행되지 않은 것도 이에 대한 우려가 큰 이유였다.) 원폭 투하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그 후유증을 지금까지도 안고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한반도 핵공격이 실현되지 않은 데에는 일본을 포함한 세계 평화운동의 역할이 있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의 충격과,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냉전 속에서 오히려 핵 개발 경쟁이 심화되고 있는 현실에 맞서 세계 곳곳에서 반핵운동이 분출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3개월 전인 1950년 3월 19일, 세계평화위원회(World Peace Council)는 ‘스톡홀름 호소문’(Stockholm Appeal)을 채택하고 서명운동에 나섰다. 호소문은 ‘모든 핵무기 금지’를 요구하며 “어떤 나라든 핵무기를 선제 사용하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전범국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전 세계의 수많은 지식인과 세계 각국의 총 2억 명 이상이 서명했는데, 일본 평화운동 역시 서명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600만 명 이상이 서명했다. 이러한 운동이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게 하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미 국무장관을 맡았던 헨리 키신저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지적해 온 사실이다.
핵이라는 인류 절멸 무기의 등장, 그로 인해 (전 세계에서 일본 다음으로 많은 수의) 자국 시민들이 겪은 끔찍한 희생. 한국전쟁이라는 비극 속에서 현실화될 뻔한 한반도 본토 핵공격.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 전쟁위기. 이러한 역사를 가진 한국 사회가, 적어도 평화운동이 적극적으로 핵무기 반대와 피폭자와의 연대를 천명해오지 못한 사실은 우리 역사의 비극이자 모순이다. 우리의 시계는 이 지점에서 아직 1945년에 멈춰있다.
오늘날까지도 사회운동이 핵무기 숭배나 원폭이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주었다는 인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데에 안타까움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한 맹목은 한편에서는 보수진영의 ‘핵무장론’으로, 다른 한편에서는 (통일이 되면 북한의 핵무기가 곧 우리 민족의 핵무기라는 주장과 때때로 동반하여) 북한의 핵무기 개발·보유 옹호로 나타나고 있다. 두 진영은 정치적으로 극과 극에 있지만 핵에 있어서는 “한반도가 강대국들의 침략과 간섭의 역사를 더 겪지 않으려면 우리 민족도 핵무장을 포함하여 독자적 힘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상 완전히 같은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는 오래전부터 극우 지배세력과 일부 민족주의 운동 양자가 공유해온 것이다. 그리고 ‘북핵 문제’는 이를 강화시키고 증폭시키는 물질적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지형 속에서 한반도 비핵화, 나아가 동아시아 비핵지대 형성이라는 지향은 평화운동 안에서조차 쉽게 합의되지 못하고 있다.
미래는 어떠해야 하는가? 나는 우리의 미래는 ‘핵 없는 세상’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일단 말 그대로 한반도의 평화와 인류의 생존이 핵 없는 세상에 달려 있다. 둘째로, 우리 사회운동이 앞으로 가야 할 길도 핵 없는 세상을 실현하는 세계 평화운동에 동참하는 데에 있다.
남한도 북한도 일본도 미국도 핵무기금지조약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에 실감이 나지 않을 수 있지만, 변화는 분명히 일어나고 있다. 전 세계의 핵무기 철폐를 염원하는 세계 평화운동이 있었기에 핵 군축을 강제할 수 없었던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의 한계를 넘어 모든 핵무기를 금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탄생할 수 있었다. 8월의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9월 말인 지금까지 두 달 여가 지나는 동안에도, 보츠와나·도미니카·탄자니아·그레나다·레소토·세인트키츠 네비스·잠비아(9월 26일) 총 7개국이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했고 볼리비아(8월 6일), 카자흐스탄(8월 29일), 에콰도르(9월 25일), 방글라데시·라오스·몰디브·키리바티·트리디나드 토바고(9월 26일) 총 8개국이 발효까지 마쳤다. 핵무기금지조약이 UN 차원에서 발효되어 국제사회에 시행되려면 50개국 이상에서 발효되어야 하는데 현재 32개국에서 발효되어 18개국이 남았다.
물론 핵무기 공식보유국들(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과 실질적인 핵무기 보유국들(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 북한), 남한·일본 등 미국의 핵우산에 포함된 국가들이 핵무기금지조약을 보이콧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망이 밝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이 운동이 여기까지 왔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우리의 미래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69년 전의 스톡홀름 호소문 서명운동은 결국 핵무기 금지를 이뤄내지 못했다. 그러나 한반도에 핵무기가 사용되는 것을 막아내는, 애초에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핵 없는 세상을 지향하는 운동이 전 세계에서 펼쳐지는 것, 그 자체가 우리에게 좀 더 평화롭고 평등한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다.
핵 없는 세상을 향한 길에 동참하는 것은 우리 사회운동이 과거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계기 또한 될 수 있다. 아픈 역사를 잊어버리자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억압과 비극의 역사를 우리 역시 핵무기를 개발·보유함으로써 강대국들에 대항할 수 있다는 논리에 활용하는 것은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다. 과거에 얽매여, 과거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핵무기가 이미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수많은 한반도 민중을 희생시켰고,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항구적 위기 요인으로 작동해왔다는 역사를 직시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베네수엘라·베트남·쿠바 등 한반도와 유사하게 미국에 의한 개입을 당해 온 국가들이 이미 핵무기금지조약을 발효했다는 사실은 시사점을 준다.
마지막으로,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사실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것이지만, 전후 7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일본의 재무장화를 저지하고 국제적 핵무기 철폐 운동을 확대한 데에는 전쟁과 피폭의 쓰라린 과거를 바탕으로 “영원히 나가사키를 인류 최후의 피폭지로 남길 것”을 결의한 일본 평화운동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비핵·평화를 실현해가는 데에 한일 평화운동의 연대가 중요하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일갈등, 나아가 양국 간의 역사적 쟁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을 성찰하는 것 또한 필요할 것이다.
후쿠시마대학 교수인 사카모토라고 합니다. 국제회의 참가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환영의 인사를 말씀드립니다. 오늘 이 세션에서 도입 발언을 하신 여러 피폭자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피해가 얼마나 말로 다하기 어려운 고통이며, 지금까지 74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피해자들이 어떤 피해와 차별을 받아 왔는지, 핵무기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비인간적 것이라는 점 등을 다시 인식했습니다. 핵무기의 존재와 그 사용은 어떤 이유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생존과 핵무기는 결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지금 일본은 어떻게 국제 분쟁 속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일 없이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나라를 만들 것인지, 어떻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처럼 시민의 생명과 건강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을 때에 시민을 지키는 나라를 만들어낼 것인지, 결정짓는 분기점에 서 있습니다.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도쿄전력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로부터 8년 4개월 22일이 지났습니다. 후쿠시마 제1원전이 위치하고 있어 귀환곤란구역(歸還困難地域)이었던 후쿠시마현 후타바군 오쿠마마치에서 벌써 일부 피난 조치가 해제되었습니다. 인근의 후타바마치도 조만간 해제될 것 같습니다. 이들 지역은 방사선량이 여전히 매우 높은 상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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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조사에서도 이 두 지역 주민들의 답변은 “(원거주지로) 돌아가겠다”가 약 10%에 그쳤고, “판단이 어렵다”가 20%, “돌아가지 않겠다”가 70%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미 피난 조치가 해제된 지자체에서는 초중등학교가 수업을 재개했으나, 사고 전 수백 명의 학생이 있던 학교에 현재 다니는 학생의 수는 한 자리 수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재개해도 신규 입학자가 하나도 없어 다시 폐쇄하는 사태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아동 수의 감소로 인해 재해지 지자체는 존폐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일본 정부와 후쿠시마현 당국은 “(원거주지로) 귀환하는 것이 곧 (지역)부흥”이라고 하면서 귀환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피난 지시를 해제한 지역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개인이 책임져야 할 판단이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모두 ‘자발적 피난’”이라며 피난자의 수 파악조차 제대로 행하고 있지 않습니다. 피난민의 피난처 주거비 지원을 잇달아 중단하며, 피난처의 공영 주택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에게 2배~6배의 비용을 청구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생업과 수입을 잃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는 가운데 8년이 지나 정신적·경제적으로 내몰리고 있는 피난민들에게, 공공 교통시설·슈퍼마켓·의료기관·간병시설 등이 충분히 복구되지 않은 지역으로 돌아가라는 정책은 비인도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기 중 방사선량이나 토양에 함유된 방사능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합니다. 그러나 정부와 지자체는 토양 오염의 통계 조사를 실시하지도 공표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핵발전소 사고를 낸 도쿄 전력이, 배상 제도의 근간인 대체적 분쟁해결(ADR; Alternative Dispute Resolution. 법원 소송 이외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분쟁해결방식.)에 따른 피해자와의 화해를 거부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시민의 생명의 고귀함을 내버린 일본 정부는 국제적으로 지탄받아야 합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피난처와 원래의 거주지 양자의 이중주민등록을 인정하는 정책입니다. 이를 통해 어디에 거주하고 있어도 시민에게 경제적으로 안정적 지원을 제공하여 존엄성 있는 삶을 보장해야 합니다. 후쿠시마에서는 이러한 정책을 나라에 요구하며 핵발전소 사고 피해자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 전국적 지지를 보내주십시오. 여러분의 지지에 힘입어 개인의 존엄을 존중하는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한편 2017년 7월, 세계는 시민이 주도하는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바로 2017년 7월 7일 뉴욕에서 채택된 ‘핵무기금지조약’입니다.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이 조약 체결을 성사시킨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반핵 운동에 오랫동안 헌신해 온 세계 시민의 운동입니다. 원폭 투하 경험 국가로서 일본이 핵무기금지조약에 동참하는 것은 세계의 흐름을 크게 바꿀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핵무기금지조약을 한시라도 빨리 비준해야 합니다.
또한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2018년 4월 남북 대화가 성사된 이후 4차례 남북 대화가 있었고,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북미 정상의 직접 대화도 트럼프 미 대통령의 판문점 전격 방문까지 3차례에 이르렀습니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와 미국 항공모함 3척의 일본 배치 등을 겪으며 최고조로 높아지고 있던 긴장은 평화 대화 국면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중국과 러시아도 여기에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끌고 있는 한국의 문재인 정권은 시민들의 ‘촛불혁명’ 이후 탄생했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대화를 낳고 지탱하고 있는 것은 평화공존·핵무기 폐기를 바라는 각국의 광범위한 시민운동임을 누가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앉음으로써 일본 정부에 있어서 최대의 가상(假想) 적국이 사라지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한국이 반도체 기술을 북한에 유출시키고 있다고 하는 미확인 정보를 선전하며, 중국의 남중국해 진출을 구실로 한국과 중국을 가상 적국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일본이 미국이 주도하는 중동과 호르무즈해협 개입 연합에 참가할 가능성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아베 극우 정권이 노리는 것은 전 세계에서 전투와 무력행사가 가능한 나라로 일본을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 주도 연합군이 중동 지역에서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번 7월 말 참의원 선거에서, 평화헌법 개헌을 주장하는 세력(여당)은 의석을 잃어, 불과 4석 차이로 헌법 개정 발의를 실시하기 위해서 필요한 의석 2/3 선을 차지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아베 극우 정권의 헌법 개정 야망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과 야당의 공동투쟁의 결과이며, 일본 정치는 본격적인 야당 공동투쟁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아베 총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신의 임기 중에 개헌 발의를 하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두 번 다시 세상에서 그 누구도 핵무기의 참화를 겪게 하지 말자! 핵이 없는 새로운 세계를 위해 후쿠시마에서도 온 힘을 다하겠다는 결의로 발표를 마무리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수십 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킨 지 74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후 펼쳐진, 전 세계적인 핵 개발 경쟁의 신호탄이었을 뿐이었습니다. 정치가들은 핵을 정치적 위협의 수단으로 삼아왔습니다.
미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중국(공식 핵보유국 5개국)이 자국의 핵 프로그램에 지출해 온 돈을 합치면 대략 10조 달러 가량입니다. 이는 세계 다른 나라들의 수십 년 간의 예산을 합친 것에 필적합니다. 정치가들은 핵무기 개발·실험은 자국 시민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핵무기 개발과 실험의 희생자가 된 것은 바로 그 시민들입니다! 현재 이러한 핵실험 피해자들의 수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희생자들의 수에 육박할 만큼 늘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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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도 그러한 사례입니다. 핵무기용 플루토늄은 1940년대 중반 소련에서 최초로 생산되었습니다. 우랄 지방의 비밀 핵 도시, 첼랴빈스크-40의 마야크(Mayak) 핵 생산 시설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역주: 첼랴빈스크-40은 오늘날의 오조르스크 시다. 소련 핵무기 프로그램의 탄생지, 마야크 핵 시설을 위해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설립된 도시다. 그 존재 자체가 비밀로 붙여지고 주민의 유출입이 철저히 통제된 폐쇄 도시였다. 현재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를 능가하는, 지구상에서 가장 심하게 피폭된 지역 중 하나로 추정되어 ‘지구의 무덤’으로 불린다. 그러나 여전히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마야크 시설의 핵무기용 플루토늄 생산은 1987년 중단되었으나, 여전히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공장으로 가동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주위 주민의 건강과 생활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며, 극비리에 진행되었습니다. 방사성 액체 폐기물이 데차 강에 버려졌지만, 이 사실은 지역 주민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조상들이 수 천 년 동안 해온 것처럼, 소련 주민들과 가축들은 피폭 당한 강물을 마시고, 강에서 수영하고 낚시를 했습니다. 치명적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들이 사실상 소련 핵무기의 첫 희생자였습니다. 비밀 핵 시설에서는 사고가 연이어 발생했고 방사능 물질이 대기와 강으로 유출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모든 정보는 국가 기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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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사고는 1957년 9월 29일에 있었습니다. [역주: 키시팀 사고(Kyshtym disaster)를 가리킨다. 사고가 일어난 첼랴빈스크-40이 당시 비밀 도시였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도시인 키시팀의 이름을 빌렸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사고의 뒤를 이은, 역사상 3번째 수준의 핵 관련 사고로 추정되나 소련 정부의 은폐로 냉전 종식 이후에야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마야크 플루토늄 생산 시설에서 액체 고준위 폐기물 저장 탱크가 폭발하여, 2천만 퀴리(방사성 핵종의 방사능을 나타내는 특수 단위. 기호는 Ci.)의 방사능이 대기에 퍼졌습니다. 그 결과 2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이 오염되었습니다. 군인들과 어린 학생들이 사고로 인한 오염 수습에 투입되었습니다. 안전 기준이 준수되지 않아, 그들 중 상당수가 생명에 치명적인 수준으로 피폭되었습니다. 이 사고 이후 약 250개의 거주지가 이전되었습니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민간인 수만 50만 명 이상이며 이는 사고 수습에 투입된 군인들을 포함하지 않은 수입니다. 소련 시민을 지키겠다는 명목으로 만들어진 핵무기로 인해 우랄 지역의 소련 시민들이 수천 명 이상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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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가 처음 개발된 이래 수많은 핵 실험이 있었습니다. 소련은 비행기로 소련 영토 안에 40킬로톤(핵폭탄의 위력을 나타낼 때 쓰는 에너지의 단위. 참고로 히로시마에 투하된 핵폭탄의 위력은 13킬로톤 정도였다.)의 핵폭탄을 투하하는 핵 실험을 1954년 9월 14일 시행했습니다. 4만 5천 여 명의 군인과 만 여 명의 지역 주민이 이 실험에 피폭 당했습니다. 피폭으로 인한 건강 문제는 이들의 자식 세대에까지 이어졌습니다.
소련에서는 핵무기의 개발과 생산을 위해 10개의 비밀 핵 도시를 비롯한 인프라 투자들이 막대하게 이뤄졌습니다. 이후, 군사적 핵 프로그램에 들어간 엄청난 비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부 당국은 10개의 ‘민간 핵 도시’를 추가로 건설하고 그곳들에 핵발전소를 배치했습니다. 이에 따라 오로지 핵 관련 산업 밖에 존재하지 않는 20개의 도시에 150만 명이 살게 되었습니다. 이는 전체 인구의 1%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국가 엘리트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려 애썼습니다. 냉전이 종식된 뒤, 이들은 해외에 핵 관련 인프라를 건설하고 핵 기술을 수출하기 위한 로비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는 얼핏 보면 긍정적인 기술 협력으로, 군사적 대결의 대안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핀란드를 포함해 유럽·아시아·아프리카 각지에 지어졌거나 건설 계획 중인 핵발전소에 들어가는 러시아 VVER-1200 원자로는, 러시아 핵 잠수함과 핵발전소에서 사용한 핵연료를 재처리한 우라늄을 연료로 사용할 계획입니다. 이를 통해 러시아가 설계한 핵발전소에서 생산한 전기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러시아 군사프로그램에 투자하게 됩니다. 물론 이런 내막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또한 사용후 핵연료의 재처리는 방사성 액체 폐기물을 발생시킵니다. 이 방사성 액체 폐기물(연간 최대 2백만 세제곱미터)은 자연으로 배출되어 강과 함께 북극해와 북유럽으로 이동합니다. 그래서 북유럽의 다음 세대 주민들은 식탁에서 생선과 해산물의 형태로 방사성 물질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들은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은 국가들에 살고 있지만, 핵무기의 잠재적인 새 희생자들입니다.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핵 기술은 절대 ‘위험하고 군사적인 용도’와 ‘안전하고 평화적인 용도’로 나눠질 수 없는 문제입니다. 저는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 직후에 방사능 오염 지역을 방문한 연구팀의 일원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히로시마, 나가사키, 후쿠시마에 버금가는 참극이었습니다. 일본과 러시아에는 수십만 명의 핵 피해자들이 있습니다. 이제 더는 새로운 희생자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핵무기와 핵발전소가 없는 평화로운 미래로 함께 나아갑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