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이후로 영국 노동당은 유럽 중도좌파와 분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당은 선거결과나 조직의 측면에서 쇠퇴를 경험했으나, 처음부터 낡은 화석이라고 조롱을 받았던 코빈 지도부 하에서 악전고투 속에 전진하고 있다. 같은 기간 동안 프랑스나 독일의 자매 정당은 전례가 없는 저점을 향하며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노동당은 당원이 극적으로 증가하여 서유럽에서 최대 정당으로 등극했다. 노동당 지도자 제레미 코빈은 현재 차기 브리튼 총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코빈의 프로젝트는 수많은 장애물에 직면해 있고, 어쩌면 이를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브렉시트는 모든 정치의 영역을 혼란 속으로 밀어넣었고 노동당은 다음 선거에서 의회 다수를 달성하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연립정부의 파트너로서 가능성이 있는 자유민주당이나 스코틀랜드민족당(SNP)은 코빈 프로젝트를 멸종시키고자 할 수 있다.
이 글은 코빈 하에서 노동당의 내부적 변형이 얼마나 이뤄졌는지 검토할 것인데, 이는 노동당이 광범위한 성공을 거두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당 내에서 얼마나 득점을 했나? 코빈 지도부는 브리튼 미디어나 브렉시트라는 도전에 어떻게 대처했나?
아웃사이더
2015년 여름, 토리당(보수당)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후, 세 가지 요인이 상황을 변화시켰다. 첫째, (이를 정량적으로 측정하기는 어렵지만) 데이비드 캐머런과 조지 오스본의 긴축정책에 대한 분노가 높아졌는데 특히 경제적으로 취약한 청년층에서 그러했다. 이는 그리스와 스페인의 ‘광장운동’, 오큐파이라는 바람을 따라잡으며, 위기에 대한 더 급진적이고 평등주의적 해결책을 생각하는 분위기를 형성했다. 둘째, 에드 밀리반드가 노동당 지도부를 선출하는 방식을 개혁하려고 했는데, 이는 정당 엘리트에게 극적인 자살골이 되었다.
노동조합 유나이트는 지지하는 후보의 선출을 위해 노력해왔는데, 밀리반드는 당과 노동조합의 연계에 관한 보고서를 의뢰했다. <콜린스 보고서>는 노동조합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여러 조치를 촉구했는데, 지도부 선출을 위한 선거인단에서 노동조합이 1/3의 투표 지분을 철회하라는 조치도 포함되었다. 유나이트의 사무총장 렌 맥클루스키는 노동당 의회 대표의 역할 변화와 교환하여 이를 수용했다. 어떤 후보자도 원내노동당(PLP, Parliamentary Labour Party) 15%에 의해 지명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외하면, 노동당 의원들은 더 이상 지도부를 선출할 때 수문장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처음으로 노동당 지도부는 1인 1표로 선출되었다. 블레어주의 분파는 비당원도 3파운드의 돈을 내고 지지자로 등록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미국식 오픈 프라이머리 모델을 도입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제레미 코빈이 부상할 수 있는 조직적 전제조건이 구축되었다.
마지막으로 2015년 지도부 경선은 노동당 기득권층의 다면적인 취약성에 기인한 바 크다. 2015년 총선에서 밀리반드의 완패(캐머런 보수당의 330석 대 밀리반드 노동당 232석) 후, 당원, 지지자, 노동조합 모두 방향 변화를 요구했다. 스코틀랜드에서 노동당은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얻었는데, SNP는 독립과 긴축반대를 결합해서 완승을 거두었다.
2015년 지도부 선출방식은 코빈의 강점을 부각시켰다. 그는 열혈 웅변가는 아니었지만, 편안하게 연설을 했고, 참가자의 질문을 받았다. 그의 세련되지 않은 처신은 오히려 그의 자산이 되었다. 그의 캠페인은 비전통적 방식, 즉 대규모 공중집회, 소셜 미디어에 의존했다. 예상치 못하게도, 그는 거대 노동조합의 일부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유나이트 집행부는 코빈을 선호했다. 유니슨의 지지는 더 예상 밖이었는데, 지도부의 전술적 판단에 기인한 것이었다. 유니슨 지도부는 재선거를 앞두고 조합 내 좌파 활동가와 적대적 분위기를 조성하지 않으려 했다.)
뜨거운 시험대에 오르다
코빈 지도부의 첫 단계는 2015년 9월부터 시작되어 2017년 선거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언론, 노동당의 상근관리, 노동당 의원 다수는 코빈을 불법적인 권력찬탈자로 간주했다. 코빈이 자신의 적수를 그림자 내각에 제안하기로 한 결정은 그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전술적 판단이었다. 2015년 코빈의 위치가 매우 취약해서 그는 시리아 공습에 대해 그의 프론트 벤치 팀[영국 하원에서 앞쪽 좌석에 앉는 내각이나 그림자 내각]에게 자유투표하라고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사우스사이드(Southside)라고 불리는 빅토리아에 위치한 노동당 본부는 당 관리를 200명 이상 고용하고 있으나, 그에 비하여 지도부 사무실은 매우 소규모다. 즉 지도부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사우스사이드에 비해 매우 불균형적이다.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은 2016년 6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전 준비기간 동안 여론조사에서 보수당에 큰 차이로 우위를 지켰다. 국민투표 캠페인 동안, 코빈은 노동당이 ‘영국의 비판적 잔류’(critical Remain) 입장을 취하도록 이끌었고, 데이비드 캐머런이 주도하는 공식적 캠페인, ‘잔류할 때 더 강한 영국’(Stronger In)에 참여하라는 압력에 저항했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국민투표에서 노동당이 보수당과 공동으로 캠페인을 펼쳤지만,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볼 때, 코빈의 거부는 원칙적으로 올바랐고 합리적인 정치였다. 노동당의 ‘잔류하고 개혁하자’(Remain and Reform)는 구호는 기본적으로 모호성이 존재했다. 한편으로 ‘유럽연합에 남고 유럽연합의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해 다른 국가 정부와 협력하자’는 의미일 수 있다. (코빈은 그리스에 대한 유럽연합의 잔혹한 조치를 비판했다.) 그러나 그 슬로건은 더 제한적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유럽연합에 남아서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수행함으로써 유럽연합 규칙의 한계를 시험하자는 것이다.
노동당 지도부는 이러한 메시지를 가지고 상황을 뚫고 나가기 위해 투쟁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첫째, 언론은 캐머런과 보리스 존슨이 주도하는 보수주의 분파 라이벌 간 논쟁에 집중했고, 노동당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또한 잔류하자는 투표는 기능적으로 현상유지를 선호한다는 의미이므로, 코빈이 지난 해 노동당 선거 캠페인으로 분출된 봉기적 에너지에 다가가기를 어렵게 했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인 어려움은 당 내부 적대자들이 지속적으로 코빈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점이다. 노동당 우파는 잔류 측이 편안히 승리를 거두리라 예상하면서, 국민투표 캠페인을 분파적 목적을 위한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했고, 코빈의 노선이 실제로는 유럽연합을 떠나자는 주장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지각변동
국민투표는 의회가 요새화되면서 은폐되었던 정치의 균열을 드러냈다. 산업이 몰락하고 경제침체를 겪고 있는 지역(미드랜즈, 웨일스, 잉글랜드 북부)은 전통적으로 노동당이 강세를 보였지만, 떠나자고 표를 던졌다. 원내정당에 존재하는 코빈의 적수들은 그가 ‘교묘하게 국민투표 캠페인을 사보타지했다’고 주장하면서, 지도부 교체를 주장했다. 자세히 검증해보면, 이민이 나쁜 것이라고 말하기를 코빈이 거부했다는 것이 핵심적인 혐의였다. 즉 그들이 보기에 코빈은 너무 국제주의자였다. 그림자 내각의 10여 명이 사임했고, 노동당 의원들은 172 대 40으로 코빈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통과시켰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러한 사임은 코빈에게 축복이 되었고, 그는 자신의 그림자 내각 팀을 재조직했고, 더 젊은 의원들을 기용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극도로 파괴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코빈이 사임을 거부하자 적수들은 지도부 경선이라는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노동당 전국집행위원회(NEC)의 노동조합 대표 중 다수가 코빈을 지지했다. (유나이트와 유니슨 양자 모두 코빈의 재선출 캠페인을 지지했다. GMB와 USDAW는 코빈의 상대편 오언 스미스를 지지했다.) 지도부를 교체하려는 시도는 코빈 지지자들을 격분시켰다. 62: 38이 최종 결과였다. 하지만 그의 적수들이 사용한 초토화 전술은 노동당의 공적 위상에 거대한 피해를 입혔다.
2016-7년 겨울, 노동당에 대한 지지율이 끔직하게 하락했다. 코빈의 당내 적대자들은 지도부가 곧 내려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톰 왓슨은 자유민주당이 ‘브렉시트 거부자’라며 비난했으며, 노동당이 브리튼 인민의 민주적 의지를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2017년 2월, 리스본 조약 50조를 발동시키기 위한 의회 투표 이후, 노동당의 추카 우무나, 웨스 스티어링은 유럽연합을 떠나라는 분명한 선택을 민주주의자로서 준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기간 동안 노동당 우파는 코빈이 이른바 ‘하드 브렉시트’를 포용하려 하지 않는다고 반복적으로 공격했다. [하드 브렉시트란 영국이 EU를 탈퇴함에 있어 EU와 무역, 관세, 노동 정책 등 전분야에 걸쳐 맺었던 모든 동맹관계를 모두 정리하고 탈퇴하는 방식. 일정한 분담금을 내면서 단일시장 접근권만은 유지하는 ‘노르웨이 모델’ 같은 ‘소프트 브렉시트’가 아니라 완전한 분리를 뜻하는 것이다.] 2017년 초반, 코빈은 여전히 이주자가 너무 많다고 말하기를 거부했지만, 영국이 유럽연합을 떠날 때, 소프트 랜딩을 보장하는 최선의 길이라면, (법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사실상의 현상유지를 지지하겠다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러나 이민 문제에 관한 코빈의 모호한 입장은 그의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분수령이 된 선거
2017년 4월 테레사 메이는 조기선거를 요청했다. 보수당 지지율이 평균 18.5% 더 높았다. (이는 전 영국독립당(UKIP)의 지지가 쏠린 것이었다.) 가디언의 칼럼니스트들은 코빈의 사퇴를 주장했다. 선거결과는 정치평론가들을 당황스럽게 했다. 노동당 지지율은 30%에서 40%로 상승했다.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노동당의 상승이지, 보수당의 약화가 아니었다. 메이의 42% 득표율은 1987년 이후 보수당의 최고성적이었고, 평범한 상황이라면 편안하게 의회 다수파를 구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보수당이 13석을 상실했으므로, 북아일랜드의 극우 민주연합당에 의존해야 했다.
코빈의 선거전략 중 중핵은 사회민주적 정책에 대한 선언이었다. 즉 ‘다수를 위하여, 소수가 아니라’(For the Many, Not the Few). 이러한 선언은 정치적 관심사를 유럽연합과 영국의 관계라는 문제로부터 돌려놓았으며, ‘소프트 브렉시트’를 강조했다. 맨처스터 폭탄 테러에 대한 코빈의 대응은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고, 정권교체(regime change)를 위한 전쟁이 실패했고, 세계를 더 위험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연설은 여론에 반향을 일으켰고 비판적 토론을 위한 공간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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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고화
선거에서 코빈이 이룬 성취는 2019년 초반까지 이어진 공고화를 위한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그의 그림자 내각은 더 응집력 있고 지지도가 높은 팀으로 새롭게 구성되었다. (일반적인 패턴과 달리) 노동당의 프론트 라인 의원은 뒤에 앉아 있는 의원보다 더 좌파였다. 그렇지만 그림자 내각이 통일적으로 코빈파는 아니었고, 31명 중 오직 7명만이 캠페인 그룹(Campaign Group, 오랜 역사를 지닌 노동당의 좌파 코커스)에 속했다.
246명의 의원 중에서 152명은 2010년 이후에 의회에 입성한 사람들이며, 원내 노동당 중에는 이제 훨씬 더 젊고, 노동조합이나 지방정부라는 배경을 지닌 사람이 늘었다. 그렇지만 오직 19명만이 캠페인 그룹에 속하며, 이는 원내 노동당의 8%에 불과하다. 2015년, 2017년에 선출된 92명 중에서 오직 10명만이 좌파 코커스에 참가했다.
노동당 우파는 분파적 행동을 조정하는 여러 조직적 기구가 있다. 피터 만델슨이 이끄는 프로그레스(Progress)로부터, 덩치가 큰 브라운파 트리뷴(Tribune)에 이르기까지. 톰 왓슨은 퓨처 브리튼 그룹(Future Britain Group)을 결성함으로써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는 80명의 의원을 모았는데, 이는 원내 노동당의 1/3이다. 그렇지만, 토니 벤의 표현을 빌자면, 노동당 의원의 다수는 이정표라기보다는 풍향계다. 즉 바람에 따라 움직인다.
노동당 활동가들은 지구당이 의원 후보자를 다시 선택하도록 허용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요구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요구에 새로운 이름을 붙였는데, ‘공개선택’(open selection)이다. 2018년 노동당 대회는 이 문제를 피했다. 대회에서는 이 쟁점을 두고 당원과 노동조합 대표단 간 날카로운 대립이 발생했다. (유나이트의 간부는 노동당의 목표 선거구에서 자신이 선호하는 후보를 지명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활동했다.) 퇴색된 수정안은 현직 의원에 대해 도전하는 것을 더 용이하게 했지만, 지구당은 현직에 도전하는 네거티브 캠페인을 해야만 한다. (보수당의 절차는 더 단순하다. 지구당 집행부는 언제라도 현직 의원이 공식 후보로 재신청하도록 요구할 수 있으며, 이때 비밀투표가 적용된다.) 만약 당 활동가들이 투표가 발표되었을 때 발생하는 소동을 감당할 의지가 없다면, 원내 노동당의 정치적 색깔은 대체로 자기영속적일 것이다.
이에 반해, 코빈은 노동조합의 지원을 받으며 전국집행위원회와 당 기구에서 점진적으로 힘을 얻었다. 39석으로 구성되는 전국집행위원회는 상이한 기관의 담당자로 구성되는데, 그 중 네 자리는 노동당 그림자 내각에 배당된다. 지구당에는 9명의 대표가 배당된다. 2018년 9월, 코빈에 친화적인 명부가 직접 선출되는 9개의 자리를 모두 차지했다. 그래서 39개 중 21개가 좌파의 편에 들어왔다. 노동당과 제휴하는 노동조합은 전국집행위원회에서 최대의 단일집단이며, 당대회 대표단의 50%를 차지한다. 여기서 유나이트가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유나이티드 레프트(The United Left)라는 분파는 유나이트 집행부을 지배하며, 사무총장으로서 맥클루스키의 위치는 확고해 보인다. 사우스사이드에서는 유나이트의 제니 폼비가 사무총장이 되었다. 처음으로 노동당 본부가 코빈 지도부에 기본적 지원을 하게 되었다.
운동으로서의 정당?
노동당 당원은 새로운 지도부 하에서 극적으로 증가했다. 20만 명 미만에서 50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고, 정당의 재정상태가 건전했졌다. 코빈 지지자 중 가장 중요한 기구는 모멘텀(Momentum)으로, 벤 지지파였던 존 랜즈맨이 2015년 지도부 경선 당시 구성했다. 모멘텀은 현재 4만 명 이상의 회원을 지니고 있고, 이는 <노동당 민주주의를 위한 캠페인>, <노동당 대표위원회>, <붉은 노동당>과 같은 전통적인 노동당 좌파 기구를 훨씬 능가한다. 랜즈맨과 여타 지도자들은 새로운 조직이 당 내부 분파처럼 작동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회운동에 가까운 무언가가 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토론을 진행했다. 그 결과는 두 가지의 혼합이었다. 모멘텀은 고도로 전문적인 캠페인 기구로 등장했고, 당 내부 선거에서 좌파 명부에 대한 지지를 효과적으로 동원했다. (비록 명부가 작성되는 과정에서 거대한 논쟁이 촉발되기는 했지만.)
동시에 2016년 이후로 모멘텀은 ‘사상의 페스티벌’을 제도화했는데, 노동당 대회와 시기가 일치하는 ‘세계를 변혁하자’(The World Transformed)이다. 2-3일간 브리튼과 국제좌파의 연사를 세우고, 정치적 토론을 진행한다. 이는 노동당의 전통적 문화가 충족시키지 못하는 요구에 답하려는 노력이다. 더비, 브리스톨, 사우스햄튼 등 도시에서 지역별 행사도 진행되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즈의 기존 좌익 네트워크, 즉 <사회주의를 향한 캠페인>, <웨일즈 노동당 풀뿌리>는 모멘텀의 지역 지부가 되기로 했다. 전반적으로 코빈 지도부는 스코틀랜드 정치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미 2015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1석을 제외하고는 모든 의석을 잃었다. 코빈 지지자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 2014년 이후 스코틀랜드민족당이나 독립을 지지하는 좌파정당에 가입했다.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스코틀랜드는 24% 차이로 유럽연합 잔류를 선택했는데, 노동당은 탈퇴 투표를 수용해야 했으며, SNP는 잔류를 지지하는 캠페인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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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브렉시트 위기에서 노동당이 채택한 전술적 방책은 계속 변화했다. 그렇지만 그 기저에는 일련의 원칙이 존재했다. 노동당의 브렉시트 전략을 정확히 이해하면 어떻게 브리튼의 정치시스템이 현재 상태로 도달했는지 알 수 있다. 노동당의 투표 기반은 잔류와 탈퇴를 두고 대략 2:1로 나뉘어 있다. 노동당이 당선된 선거구는 2:1의 비율로 탈퇴에 더 많이 투표했다. 즉 149개의 노동당 당선 지역구가 탈퇴에 투표했고, 83개 지역구가 잔류에 투표했다. 선거캠페인 동안 여론조사에서 잔류 투표자의 다수는 국민투표 결과를 존중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를 탈퇴 유권자와 합치면, 68%가 (비록 미지근하더라도) 브리튼의 유럽연합 탈퇴를 지지하는 셈이다. 노동당 투표자의 오직 8%만이 노동당을 선택한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브렉시트를 꼽았다.
‘강경 잔류파’(Hard Remainers)는 브렉시트가 재앙을 낳을 것이므로 모든 대가를 치르고서도 대향해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연합을 탈퇴한다는 생각 그 자체는 정치적으로 쉽게 규정할 수 없었고, 그 결과는 이행 방식에 의존했다. 2016년에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동맹은 ‘강경’ 노선과 ‘온건’ 노선으로 구성되었다. 강경 탈퇴파와 온건 탈퇴파 사이의 틈을 벌리는 것은 좋은 전략이었고, 그 최종 결과는 노르웨이가 누리는 상태와 비슷한 것이었다. 즉 유럽연합을 탈퇴한다는 유권자의 선택을 존중하면서도, 일상의 혼란을 줄이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노선에서 협상은 아일랜드 국경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만약 노동당이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중화하면 국내 정치의제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는 반복되는 국민투표보다는 분명히 바람직했을 것이다. 국민투표가 반복되면 잔류파와 탈퇴파 간 파괴적 양극화를 연장하고 아마도 탈퇴파의 두 번째 승리를 낳았을지도 모른다.
2017년 선거는 코빈의 권위를 대단히 강화했지만, 노동당은 의회의 수렁 속으로 들어갔다. 메이는 조기선거라는 모험을 감행했으며, 그녀가 원하는 조건으로 브렉시트 합의를 협상할 수 있도록 다수파를 획득하고자 했다. 노동당은 그녀의 모험을 실패로 돌아가게 했다. 이제 그것이 너무 강경하다거나 온건하다고 생각하는 보수당의 반대세력은 모든 협상안을 부결시킬 수 있었다. 메이가 민주연합당에 의존한 사실도 불확실성을 높였다. 민주연합당은 탈퇴를 지지했지만, 그들의 최우선 관심사는 북아일랜드와 브리튼의 분리를 막는 것이었다.
메이를 위해 가장 현실적인 코스는 기대를 낮추고 제1야당에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그러나 메이는 ‘노딜이 나쁜 협상보다 낫다’라는 슬로건을 제시함으로써 화를 자초했다. 노동당의 브렉시트 강령에서 가장 큰 결점은 대자본이 관여해서 자신의 전통적인 정당(보수당)에 어떤 규율을 부여할 것이라는 암묵적 가정이었다. 하지만 브리튼의 자본가는 더 실용적인 접근법을 위해 어떤 술책을 부릴 능력이나 의지가 없었다. 2018년 여름, 메이는 이른바 백서 협상안(Chequer’s deal)을 중심으로 보수당의 단결을 꾀하려고 했으나, 강경파인 유럽연구그룹(ERG)은 그녀의 안을 조롱했고 보리스 존슨은 이에 항의하며 내각에서 사직했다. ERG는 최소한 100명의 의원을 동원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유럽연합 지도자들은 그녀의 청사진을 거부했다.
반면, 반(反)브렉시트 진영은 또다른 국민투표를 밀어붙이기 위해 노력했다. 피터 만델슨, 앨라스태어 캠벨과 같은 블레어 지지파들이 인민투표(People’s Vote, PV) 캠페인의 지도부를 장악했다. PV 지도부는 냉소적인 최대주의적 노선을 채택했는데, 노동당 지도부가 이를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다. 그들은 코빈 홀로 원내 노동당에 브렉시트에 친화적인 노선을 강제했다는 잘못된 생각을 불어넣었다. 만약 코빈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두 번째 국민투표가 가능했다고 주장한 셈이다.
이러한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톰 왓슨이나 추카 우무나와 같은 코빈의 내부 적대자들은 지도부를 잠식하기 위한 최선의 판단이라고 간주하면서 ‘강경 잔류파’ 노선을 채택했다. 그들은 국민투표 결과를 수용해야 한다는 그 이전 입장을 파쇄기 속에 집어 넣었다. 2018년 여름 노동당 대회는 타협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는 상이한 분파들의 관점을 종합해 균형을 맞추려고 시도한 것이었다. 즉 ‘모든 옵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데, 여기에는 메이의 협상안이 부결된 후 노동당이 총선을 강제할 수 없다면 ‘대중투표(public vote)를 위한 캠페인을 전개한다’는 옵션도 포함되었다.
난파
2018년 11월, 유럽이사회(회원국 정상회의)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의 협상담당 마이클 배니어와 메이가 타결했던 탈퇴합의를 지지했다. 메이의 마지막 안은 ERG가 보기에는 백서 계획보다 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끝이 언제인지 정해지지 않은 이행기간 동안 유럽사법재판소의 관장을 받아야 하며, 백스톱(안전장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탈퇴할 여지가 없었다. [백스톱이란 영국이 유럽연합(EU)를 탈퇴한 후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와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의 국경이 강화(하드보더·hard border)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한 조항이다. 양측의 자유로운 왕래와 통관을 보장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영국 전체를 EU 관세 동맹에 잔류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다.] 메이는 2019년까지 투표를 연기했다. 2019년 1월, 양 극단에 있는 토리 의원들은 민주연합당과 야당에 합류하여 전례가 없는 부결을 야기했다. (202대 432.) 코빈은 불신임안을 제기했으나, 민주연합당은 메이를 지지해서 불신임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2019년 2월 노동당 지도부는 더 구체적이며 달성 가능한 일련의 요구를 제출했다. 이는 ‘단일시장과 긴밀히 제휴’하기 위해 유럽연합과 ‘영구적이고 포괄적인 범UK 차원의 관세동맹’을 체결하며, ‘권리와 보호라는 측면에서 역동적으로 제휴함으로써 영국의 표준이 최소기준으로서의 유럽의 표준과 보조를 맞추어 변화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유럽연합 관리는 코빈의 계획과 협력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하지만 동시에 노동당 지도부는 브렉시트를 중단시키기 위해 싸우라는 강한 압력에 직면했다. 더 완강한 강경 잔류파의 도전은 자유민주당, 녹색당, SNP, 웨일스민족당(웨일스 독립 지지)로부터 나왔다. 코빈은 마지막 수단으로서 두 번째 국민투표라는 아이디어를 열어두지 않을 수 없다고 느꼈다. 이는 노동당이 소프트 브렉시트를 옹호한다는 분명한 입장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2019년 3월, 메이가 협상안을 통과시키려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도가 286 대 344로 실패를 거두었다. 의원들은 상이한 옵션을 두고 일련의 ‘의향 투표’를 진행했다. 코빈은 세 가지 안에 대해 찬성하라고 독려했다. 즉 △의회가 승인한 어떤 안이든가 ‘확정 대중투표’(confirmatory public vote)를 진행하자는 옵션, △유럽연합과의 관세동맹, △단일시장/관세동맹안(‘노르웨이 플러스’라고 불렸다). 하지만 노딜 브렉시트를 예방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50조 발동을 철회하도록 정부에 위임한다는 안에 대해서는 기권하라고 독려했다. 의회에서 어떤 안도 다수를 얻지 못했다. 의원들은 노딜에 반대하여 투표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나, 어떤 구체적 대안을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지는 않았다. 메이는 브렉시트 과정을 연장하도록 요청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유럽이사회는 새로운 브렉시트 데드라인을 2019년 10월 31일로 연장하기로 타협했다. 이는 UK가 5월 23일 유럽의회 선거에 참가한다는 의미였다.
브렉시트 문제는 코빈 프로젝트의 중핵이었던 국내 개혁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을 소진시켰다. 노동당은 브렉시트에 대한 타협안을 제시할 때 불편한 처지였다. 노르웨이 플러스가 메이의 합의안보다 더 선호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를 강하게 옹호한다면 이 안이 현상유지를 거의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편 코빈의 정책에 대한 끊임없는 내부의 공격은 그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러한 압력은 유럽선거에서 노동당에 반하는 결과를 낳았다. 투표권자의 37%만이 참여했는데, 선거에 참가한 사람만이 브렉시트에 대한 그들의 관점을 표출할 수 있었다. 탈퇴 지지파는 나이젤 패라지[영국독립당 출신 정치인]이 이끄는 새로운 브렉시트 당으로 이끌려갔는데, 그들은 30.5%의 득표율을 얻었다. 잔류파는 자유민주당과(거의 20%의 지지를 얻었다), 녹색당(12%에 조금 못 미쳤다)을 지지했다. 코빈의 소프트 브렉시트 안과 국내 정치문제로 관심을 돌리려는 노력은 아무런 견인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노동당은 3등을 했으나, 13.6%의 지지를 얻었을 뿐이다. 그 다음 날 메이는 사직을 발표했다.
노동당이 두 번째 국민투표를 지지하라는 요구는 더욱 강해졌다. 왓슨은 두 번째 국민투표를 지지할 뿐만 아니라, 모든 상황에서도 엄격하게 잔류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빈의 동맹자, 존 맥도넬, 다이안 애보트는 전략의 변화를 선호했다. 노동당의 프론트 벤치 는 두 번째 국민투표에 강경하게 반대했으나, 맥클루스키는 강경 잔류파로 돌연 이동했고, 스테판 키녹이나 루스 스미스와 같은 코빈의 적대자들도 두번째 국민투표가 민족주의 우파에세 선물을 주는 독약과 같은 생각이라고 맹렬히 비난했다.
소프트 브렉시트가 비현실적으로 보인다는 사실이 곧 두번째 국민투표가 더 달성되기 싶다는 의미는 아니다. 양자 모두 주된 장애물은 보수당과 의회에서의 세력관계다. 또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고 하더라도,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다. 동지와 적 모두, 선거에서 참패를 면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바람직하지도 않고 달성하기 더 용이하지도 않은 목표를 채택하라고 촉구하는 형국이다.
2019년 7월, 코빈은 노딜이나 보수당의 협상안에 대한 다른 대안이 없다면, 노동당이 유럽연합에 남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겠다고 발표했다. 다른 한편, 브렉시트 데드라인 이전에 노동당이 정부를 구성한다면, 노동당 자신의 패키지로 협상을 벌일 것이며, 합의안과 잔류 두 가지 안을 두고 투표에 붙이겠다고도 말했다. 이러한 새로운 노선은 작동할 수도 있지만, 문제는 코빈의 내부 적수들이 이를 허용할 것이냐는 것이다.
미래들
이러한 봉쇄상태에서 의사결정이 보수당의 기층 당원에게 이전되었다. 그들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점점 감소하고 있으며, 심지어 반동적인 집단으로 브렉시트 문제에 외골수로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이 영국의 차기 총리로 보리스 존슨을 선택했다.
새로운 지도자는 가을에 조기총선을 선택하여, 나이젤 패러지(브렉시트당)와 의석을 나누기 위한 합의를 도출할 수 있다. 다른 옵션은 노딜이라는 위협을 가하면서, 메이의 패키지를 약간 변경하여 브뤼셀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이다. 이럴 경우, 브렉시트 입법이 통과하려면 10월 31일을 지나 아마도 6개월은 연장되어야 하며, 이행기간은 몇 년으로 연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존슨은 2020년 봄에 브렉시트가 공식적으로 달성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다양한 요인이 이러한 아젠다를 좌초시킬 수 있다. 의회 내에서의 날카로운 대립, 아일랜드 정치 문제, 총리 자신의 무능력한 집행 등. 토리 반대파들이 불신임안 반대에 동참할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 속에서 노딜 안을 의회에 제출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는 조기총선에서 강경 브렉시트 연합을 달성하는 길을 창출하는 간접적인 경로다. 4-5개의 경쟁정당에다가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의 민족주의자들이 존재하므로, ‘상대적 다수 대표제’[소선거구제에서 최다득표자 1인이 당선되는 방식]는 좋게 말하면 변덕스럽고 나쁘게 말하면 무질서하다. 만약 존슨의 도박이 분명한 다수파 연합을 형성하지 못한다면, 민족연립정부를 수립하자는 왓슨의 주장이 작동할 수도 있다. 코빈이 1936년의 램지 맥도널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만약 노동당이 코빈 지도부 하에서 정부를 구성하지 못한다면, 이데올로기적 퇴각을 요구하는 압력이 강해질 것이다. 코빈 배후에서 동맹을 형성했던 집단(노동조합, 당원, 의원)은 해체될 것이다. 그렇지만 코빈이 총리가 되는 데 성공한다면 여러 가능성이 존재한다. 현재 의회 내 세력관계를 예측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지만, 의회 내 노동당이 더 크게 다수파를 모을수록 사보타지에 대응하기 용이할 것이다.
첫 번째 시나리오는 코빈 지도부가 보수당의 저항에 의해 황급히 퇴각하게 되는 시나리오다. 이는 그리스의 시리자와 유사한 경우다. 최근 수십 년간 동안 이와 같은 사례가 매우 많았다. 더 희망적인 예측은 현대의 매우 희귀한 사례로 개혁주의(개량주의) 정당이 실제로 개혁을 수행하는 것이다. 반(反)노동조합 법률들을 폐지하고, 공공소유를 확대하고, 더 진보적인 조세체계를 도입하는 등. 대처, 블레어로부터 캐머런, 메이, 존슨에 이르는 한 세대의 우파 헤게모니 이후, 사회민주주의의 부활한 판본은 (그 개혁이 아무리 협소했던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케인지안의 전성기의 개혁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일 것이다.
세 번째 시나리오는 1960-70년대 좌익을 움직였던 사상으로 ‘혁명적 개혁주의(개량주의)’다. 그 당시 좌익세력은 가장 성공한 노르딕 모델에서조차 사회민주주의적 규칙의 한계를 인식했고, 랄프 밀리반드, 안드레 고르, 니코스 플란차스와 같은 사상가들이 그러한 사상을 제기했다. 개혁은 전후 사민주의 정부를 넘어서는 것으로, 자본주의 권력의 뿌리에 실제적 일격을 가하고, 국가기구 내부에서 위기를 유발하며, 보수파 블록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 대중동원에 의존한다. 이러한 사상은 토니 벤을 지지하는 좌파에 영향을 주었는데, 그로부터 코빈과 맥노넬이 등장했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 이러한 가능성은 가장 낮아 보인다.
세 번째는 고사하고, 두 번째 시나리오를 실현하는 것도 노동당이 모든 장벽에 직면하게 할 것이다. (재무부, 영국은행, 내무부, 국방부, M15 등.) 몇몇 분산된 사례를 제외하면 노동조합은 한 세대 동안 주눅이 들었고, 노동당 노선의 오래된 악령이 남아 있으며, 코빈 배후에 있는 행동주의는 사회 전체로 확산되지 않았다. 만약 코빈이 다음 총선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가공할 만한 장애물을 타개하며 자신의 길을 열어나가야 할 것이다. <끝>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성사되도록 애쓰신 모든 분께 감사합니다. 영국 핵군축캠페인(CND;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을 대표하여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CND는 작년에 60주년을 맞았습니다. CND는 1958년 창립한 이래로 수십 년 간 핵무기에 대한 대중적 저항 행동을 다양하게 조직해 온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운동과 협력하면서, 우리는 영국과 세계의 정부들이 부분적 핵실험 금지 조약(PTBT; Partial Test Ban Treaty), 핵확산방지조약(NPT;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중거리 핵전력 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과 같은 중대한 합의에 이르게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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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영국 정부는 트라이던트(Trident) 미사일 시스템(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과 핵탄두, 핵잠수함)의 현대화 계획을 통과시켰습니다. 핵무기 반대 운동가이자 CND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한 제러미 코빈이 당 대표를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1야당인 영국 노동당은 이 트라이던트 현대화에 찬성하는 당론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국 정부는 핵무기금지조약(TPNW) 채택을 위한 협상을 보이콧하면서, 이 조약에 반대하기 위해 미국이 조직한 기자회견에 동참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를 묵과할 수 없습니다. CND는 이 문제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높이면서, 영국 정부와 모든 정당이 핵무기에 대해 입장을 새로, 제대로 정립할 때까지, 즉 일방적 군축 정책으로 선회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압박을 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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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D는 다양한 지역별 모임으로 구성된 풀뿌리 운동입니다. 그 중에는 특정 분야를 대표하는 모임도 있습니다. 한 예가 CND 기독교도 모임입니다. 이들은 최근에 개빈 윌리엄슨 전 국방장관이 기획한,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행사를 규탄하는 행동을 조직했습니다. 그 행사는 영국의 핵무기 시스템 보유 50주년을 기념하는, 국가 차원의 추수감사절 행사였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종교 장소 중 하나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열렸고, 윌리엄 왕자(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손자)가 여기에 참석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만 명을 죽일 수 있는 무기의 도입을 ‘축하’했습니다. CND 기독교도 모임의 주도로, 수백 명이 웨스트민스터 사원 앞에서 규탄 집회를 열고 죽은 사람처럼 길 위에 드러누웠습니다(‘die-in’ protest. 참가자들이 죽은 것처럼 시뮬레이션하는 항의 형태를 말한다). 이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희생자들을 기리는 행동이었습니다. 많은 언론들이 이 날의 광경을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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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9월)에 영국에서 열리는 DSEI(Defence and Security Equipment International은 영국 국방부와 국제통상부, 국방보안기구, 항공방위보안협회의 후원으로 격년 개최되는 영국 최대 규모의 무기 박람회다)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무기 박람회 중 하나입니다. DSEI에는 1600개 이상의 무기 생산업체가 참가하여 저격용 무기에서 탱크까지, 온갖 범위의 무기를 전시합니다. 이들은 심각한 인권 유린을 벌여온 나라들에 무기를 판매합니다. 이 박람회에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정권들의 대표들이 초대받았습니다. 또한 전기 충격기, 고문 장비, 집속탄(cluster bombs. 한 개의 폭탄 속에 또 다른 폭탄이 들어가 있는 폭탄을 말하며, 넓은 지형에서 다수의 인명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대표적 비인도적 무기)과 같이, 그 극악무도함 때문에 영국 국내에서 판매가 금지된 무기들이 DSEI에서 판매된 전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위법 행위에도 불구하고 영국 정부는 DSEI를 계속 후원하고 있습니다.
CND는 무기거래반대캠페인(CAAT; Campaign Against Arms Trade. 국제 무기 거래의 폐지를 목표로 하는 영국 기반의 캠페인 조직. 1974년에 여러 평화운동 단체들의 연대체로 시작했다.)을 비롯하여 여러 단체들과 함께, 올해 9월 4일에 ‘반핵의 날’(No Nuclear Day) 집회를 공동 주최할 것입니다. 이는 DSEI에 맞서 2주간 이어지는 ‘무기 박람회 저지 행동 주간’의 일환입니다.
12월에는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북아메리카와 유럽의 29개 회원 국가로 구성된 집단적 군사동맹 기구. 1949년 냉전 체제 하에서 소련 및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응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회원국 수장들이 런던에 모일 예정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도 참석할 것입니다. NATO 정상회의는 트럼프가 추구하는 핵 전쟁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조직하고, ‘핵 동맹으로서 NATO’의 기능이 강화되는 것은 국제적으로 긴장을 고조시킨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입니다. CND는 영국 및 국제 평화운동과 협력하여 런던에서 NATO 정상회의에 대응하는 시위를 조직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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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위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시민행동이 결정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1958년 첫 CND 모임에는 무려 5000명이 참가했지만, 현재 모임에서 제 또래 청년들을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참상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고, 냉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우리 세대에게 핵전쟁의 위협은 요원해 보이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트럼프의 핵 전쟁 준비 태세와 이란과의 관계 악화, 그리고 핵무기는 영국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신임 총리(보수당의 보리스 존슨)의 태도는 점점 더 깊은 우려를 낳고 있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이 역사를 공부하고 평화 운동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
시위가 마치 매주 으레 열리는 행사처럼 여겨지고, CND 로고(평화 기호. Peace symbol)가 패션 브랜드에 의해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핵전쟁의 위협은 지나간 시대의 문제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우리는 할 일이 매우 많습니다. 우리는 청년들의 에너지를 모아내야 하고, 베테랑 활동가들의 전략적 통찰력, 지식, 경험을 그들에게 전수하여 이를 새 세대의 역량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융통성 있는 접근 방식을 마련하고, 차이를 긍정하며,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CND 런던 지부는 청년 조직화라는 과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우리 조직의 구조를 단순화하고, 디지털 활용 기술을 가진 회원을 모집하며, 창조적인 워크숍과 대규모 캠페인을 통해 우리의 행사에 새로운 이들을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더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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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저는 잉글랜드 북부의 한 마을, 배로우-인-퍼네스를 방문했습니다. 바로 영국의 핵 미사일이 장착되는 뱅가드급(Vanguard class) 잠수함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현재 세계 4위 군수기업인 BAE 시스템스는 이 지역의 주요한 고용주이고, 사실상 이 마을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을 곳곳의 공공서비스에서 BAE Systems 로고를 발견할 때마다 소름이 끼쳤습니다. 영국 정부가 학교 시스템을 바꿔버려, 기업들은 이제 단순히 학교에 자금 ‘후원’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업 교재까지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군수기업이 후원하는 학교에서, 11세 어린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수중 무기를 디자인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들의 목록 써오기’ 같은 교재로 수업 받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전쟁과 무기는 정상적인 것이고, 사회에서 용인되는 요소이며, 일자리를 창출하고, 우리는 어떠한 충돌에도 군사적으로 대응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고 배우게 됩니다. 현 시스템에서 이런 식의 교육은 크게 문제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군사주의적 편견을 유포하는 교육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끝없는 전쟁에 대한 대안을 제공해야 하고, 청소년들이 다양한 정보와 관점을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저는 자주 학교 학생들, 청소년들과 함께 일하는데, 그러면서 이들과의 대화가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영향력을 느낍니다. CND의 교육 프로그램에는 해마다 영국 전역의 수 천 명의 학생들이 참여합니다. 우리의 평화교육 담당자들과 자원활동가들은 학교를 찾아가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교사들을 위한 교육을 하기도 하고, 모든 연령이 사용할 수 있는 교실 교육활동 패키지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핵무기와 평화 문제에 대한 지식을 제공함으로써 학생들이 이러한 중요한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합니다.
교육에 들인 노력이 효과적으로 작동하려면, 가족 전체가 이러한 토론에 참여하고 동의지반을 공유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핵무기 철폐가 일자리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부모들에게 공개적으로 이야기합니다. 노동조합은 이러한 상황에서 트라이던트 반대와 같이 평화를 위한 투쟁과, 군수기업의 업종 전환을 통한 일자리 유지 둘 다를 요구할 수 있는 조직입니다. 2017년, 영국노총(Trade Union Congress)은 노동당에 국가 산업 전략의 차원에서 군수사업의 업종 전환 문제를 다루는 기관을 설치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트라이던트를 폐기해야 하는 근거는 분명합니다. 자녀 세대가 핵 전쟁으로 절멸할 위험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무기 현대화에 들어갈 2050억 파운드를 아껴 이 예산을 모두를 위한 교육 및 보건의료에 투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연히 부모들에게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가 단결해야 하는 필요성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각자 지닌 기술을 활용하여 운동에 기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시민행동이란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는 눈에 보이는 작업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런던 거리에서는 이미 매주 시위가 벌어지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투쟁 방법의 효과에 대해 점점 회의적이 되고 있습니다. 가시적인 대규모 행동을 조직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의 뿌리와 가지를 사회 곳곳에 널리 퍼뜨리는 것도 필요합니다. 즉 정보를 공유하고 동료, 학생, 부모, 정치인들과 함께 우리의 견해를 토론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집회를 진행하거나, 뉴스레터를 공유하거나, 전단지를 디자인하거나, 신문에 글을 쓰거나, 학교에서 연설을 하거나, 웹사이트를 만들거나, 지역 선전전을 하는, 다양한 방식으로 평화운동을 지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집단적 힘을 조화롭게 하나로 묶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러한 접근을 통해 운동은 성장하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도달하며, 더 큰 대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함께 하면, 우리는 성공할 것입니다.
제가 미국의 상황에 대해서 할 이야기 중에 여기 계신 여러분이 모르실 만한 것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미국이라는 국가는 노예제도와 대량학살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국내외에서 폭력을 계속 자행해왔습니다. 미국은 전 세계 70개 이상의 국가와 지역에 800개 이상의 군사기지를 두고 있으며, 이러한 기지의 존재는 미국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또 다른 형태입니다.
미국은 항상 폭력적이고 군국주의적인 나라였지만, 트럼프 행정부 하에서 평화를 향한 우리의 길은 훨씬 더 많은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백인 우월주의와 우익 이데올로기가 명백히 부상하고 있으며, 미국 정부가 전 세계에 공격성을 드러내고 기존의 조약을 무시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한 가지 사안에만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렵습니다. 기후 위기, 미국 남부 국경 위기, 성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공격, 그리고 이란과의 전쟁 위기. 이것들은 우리가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야 하는 긴급한 과제들 중 일부일 뿐입니다. 트럼프는 변덕스럽고 혐오스러운 행동으로 우리의 힘을 빼놓으려 하지만, 우리는 지칠 줄 모릅니다. 우리의 싸움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시작된 것이고, 그가 퇴임한 후에도 계속될 것입니다.
평화행동 뉴욕 주 지부는 미국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이는 끝없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이란과 전쟁에 돌입하는 것을 미리 막고, 예멘이 겪고 있는 세계 최악의 인도주의적 위기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을 중단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물론 핵무기를 철폐하기 위한 노력도 늘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해 공동체에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교육 자료를 만들고, 정치인들과 접촉하고, 시위를 조직하고, 선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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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청년의 참여입니다. 평화행동은 현재 뉴욕 주 전역에, 제가 긴밀히 협력하고 있는 20개의 대학 캠퍼스 지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생들에게 캠퍼스 내에서 평화를 옹호하고 더 많은 동료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필요한 교육, 자원, 도구들을 제공합니다. 저와 함께 일하는 학생들은 미국 국내의 사회 정의 투쟁과 국제 평화 문제를 연결 지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는 평화 운동이 성장하고 확장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우리가 항상 집중하는 작업은 미국의 외교 정책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모아내는 것입니다. 피폭자들이 이끌어 온 반핵 운동에 연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항상 미국이 만든 전쟁과 폭력의 희생자들의 투쟁에 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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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운동을 확대해 나가기 위해서는 관련된 다른 사회운동들과 강한 연대관계를 계속 구축해야 합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논리로 우리의 운동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것만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서서 행동으로 다른 운동들을 지원해야 합니다.
뉴욕 시에서는 2020년 NPT 재검토회의 대응과 뉴욕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개최의 준비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플로우셰어스 여성 이니셔티브를 통해 받은 보조금으로 새로운 캠퍼스 조직화 사업도 진행 중입니다. 이 보조금 덕분에 우리는 학생들을 평화행동의 연례 학생대회에 초대해 집중적인 반핵 교육을 실시하고, 학생들이 이 교육 내용을 동료들에게 다시 전달할 수 있는 캠퍼스별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개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일본의 피폭자들이 주도하여 전 세계의 핵무기 폐기를 촉구하는) 피폭자 국제서명 운동의 확대, 핵무기 선제공격 금지 입법 추진1), 그리고 ICAN이 진행하는 각 도시별 ‘비핵 선언’2), ‘위기 직전에 벗어나기’ 캠페인(Back from the Brink Campaign)3), ‘돈을 옮기자’ 캠페인 (Move the Money Campaign New York City)4) 같은 시 차원의 지역 운동을 포함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에는 핵무기금지조약(TPNW)5)에 대한 대중적 교육이 많이 필요합니다. 미국이 핵무기금지조약에 참여하지 않았고, 주류 언론이 이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핵무기금지조약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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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앞에는 큰 과제들이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사회운동의 단결과 우리의 집단적인 힘으로, 언젠가는 평화롭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히로시마에 도착한 첫 날, 해외 참가자들을 모아놓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앞으로의 일정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해외 연대 사업이라면 이전에도 몇 번 가보았지만 이렇게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필리핀, 베트남, 네팔, 인도, 스페인, 노르웨이 등등 세계 각지에서 모인 활동가들과 한 자리에서 만날 상황은 없었기 때문이다. 올해 세계대회에는 일본을 제외하고 총 21개국 84명의 국제 활동가가 참가했다. 이들과 1주일간의 일정을 함께 하면서, 서로의 활동에 대해 알아가고 감상을 나눈 것만으로도 이번 대회 참가는 인생에서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아무리 먼 나라의 소식도 어렵지 않게 인터넷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요즘 세상이다. 그렇지만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와는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경험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과의 만남이 상호 이해와 시야 확장에 기여하는 바는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마운 두 사람이 있다. 바로 나에게 히로시마에 있는 동안 숙소를 제공해준 홈스테이 호스트, 오카 사츠미 씨와, 오카 씨 댁에 함께 묵은 영국 CND(핵군축캠페인;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 런던 지부 한나 켐프-웰치 부지부장이다. 어떤 단체에 속한 활동가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핵무기를 없애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뭐라도 하고 싶어서” 세계대회 참가자 홈스테이 호스트로 자원했다는 오카 씨는 무척 친절했을 뿐만 아니라, 손자 손녀를 포함하여 인근에 사는 전 가족 구성원을 불러서 소개시키며 매일 저녁 우리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 덕분에 활동가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본 시민들의 생각을 듣고,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악화되는 현 상황 속에서도 한일 시민 사이에서는 따뜻한 호의가 오갈 수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CND와 영국 노동당에서 활동하는 한나와 일주일간의 일정 내내 한국과 영국의 여러 국내 정세에 대한 의견, 비슷한 나이 또래의 청년 여성 활동가로서 겪는 비슷한 고민들, 일본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처음 참가한 해외 참가자로서의 감상 등을 나눈 덕분에 이번 일정으로부터 더욱 풍부한 고민을 얻어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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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셋은 첫 날 밤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본적인 자기소개를 하고, 세계대회에 온 소감을 이야기하고, 각국의 현안에 대한 설명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오카 씨가 최근 한일관계와 반일 불매운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런 이유로 일본 활동가들과의 연대 사업을 취소한 한국 활동가들도 있다고 들었다는 말도 조심스레 덧붙였다. 나 역시 일본 시민들이 이 사안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한국 시민들이 보이콧 재팬 운동을 벌이고 있는 것에 대해 일본 시민들은 과연 어떻게 느낄까? 내가 원래 세계대회에 초청된 목적은 한반도 비핵화와 동아시아 평화에 대해 발표하는 것이었지만,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이후의 일정에서 이 주제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것을 첫 날부터 느끼게 되었다.
일단 오카 씨와 한나에게는 역사 문제는 장기적으로 한일 시민들이 함께 풀어갈 문제지만, 일본 보이콧 운동은 한일민중을 대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반대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러한 생각은 일본에 도착하기 전에도 하고 있던 것이지만, 일본에서의 시간은 이러한 판단을 확신하게 했다. 이 대화 이후의 일이고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나를 전혀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한국인이라서 싫다”는 반응을 들은 일이 있다. 이러한 경험은 실제로 맞부딪히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매우 기분이 나쁘다. 과거 식민 지배국 국민의 입장과 식민지 국민 입장을 완전히 동일선상에 놓기는 어렵겠지만, ‘미움 받는 느낌’은 서로가 감정을 터놓고 신뢰를 만들어 가는 데에 크나큰 장애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식민지배 시기의 만행을 부정하고 일본이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을 추진하는 아베 정권을 규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미 일본 문화 전반에 대한 거부와 검열로 비화된 현실은 이러한 의미에서 크게 우려된다.
물론 감정이라는 것은 간단치 않다. 나도 직접 만나는 경험을 쌓기 이전에는, 한반도의 운명을 좌지우지해온 소위 '강대국' 사람들에 대해 뭔가 못미더움을 떨치기가 어려웠었다.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미 대사관 앞에서 피케팅을 하고 아베 정권의 평화헌법 개헌 야욕을 규탄하는 발언을 하는 나날 속에서, ‘미국과 일본에도 군사주의를 규탄하고 역사를 반성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하기는 하지만 감이 잘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명제였다. 그러나 2년 전부터 미국 평화운동가들과 교류·연대 사업을 여러 차례 진행하면서 느낀 바가 많다. 가장 중요한 깨달음은 계급과 인종과 이념의 문제를 제쳐놓고 추상적인 '미국인' '일본인' '서구 백인' 같은 덩어리로 묶어놓고 판단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이라는 우리의 지향을 차치하고서라도 실제로 현실에 별로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 역시 이번 일본 방문을 통해 더욱 확고해졌다.
히로시마 국제회의 보고
8월 3일부터는 일정이 빡빡하게 진행되었다. 3일부터 5일까지는 원수폭금지세계대회 국제회의 기간이었다. 국제회의에서는 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피해와 고통: 핵무기의 비인도성; 피폭자의 투쟁 ② 핵무기 금지와 철폐에 대한 시민과 평화운동의 역할 – 피폭 75주년, 2020년 과제와 전망 ③ 핵무기 철폐를 위한 협력과 연대 – 전쟁 반대, 평화 확립, 핵발전 반대, 환경과 인권 보호를 위한 운동, 이 세 가지 주제를 가지고 총회와 워크숍을 진행했다. 사회진보연대는 3일 총회 두 번째 세션 <핵무기 금지와 철폐에 대한 시민과 평화운동의 역할 – 피폭 75주년, 2020년 과제와 전망> 토론회에서 미국 평화군축안보캠페인(Campaign for Peace Disarmament and Common Security) 조셉 거슨 대표, 영국 핵군축캠페인(CND; 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의 한나 켐프-웰치 런던 지부 부지부장, 일본 원수협 야스이 마사카즈 사무국장과 함께 발표 패널을 맡았다. 8월 5일 저녁 열린 부대행사 <시민과 해외대표의 교류>에서도 한나 켐프-웰치, 미국 평화행동(Peace Action) 뉴욕 주 지부의 에밀리 루비노, 필리핀 DAKILA의 니턀릴라 사울로, 일본 민주청년동맹 히로나카 타카에 히로시마 지부장과 발표 패널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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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한국의 원폭피해당사자 증언과 피폭의 무서움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의 보고를 듣는 것으로 히로시마 국제회의가 시작되었다. 이후 3일 간 일본 활동가들이 일본과 한국 및 전 세계 피폭자의 고통에 연대를 밝히며 핵무기 폐기 촉구 피폭자 국제서명 운동, 2020년도 NPT재검토회의에서 핵무기금지조약(TPNW; Treaty on the Prohibition of Nuclear Weapons)의 비준을 촉구하는 활동을 세계적 차원으로 벌일 것을 결의하는 가운데, 세계 각국에서 온 활동가들이 자국 내에서의 반핵·평화운동의 현황과 쟁점,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 전 세계의 핵무기 철폐와 연결될 수 있을지 밝히는 발표와 발언들이 이어졌다. 여기에서는 3일 간의 다양한 발표와 토론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들을 소개한다. 언급한 발표들은 발표자의 동의하에, 각각 발표문 전문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사회운동포커스로 소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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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수협의 야스이 마사카즈 사무국장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75주년, 핵확산금지조약(NPT; Treaty on the Non-Proliferation of Nuclear Weapons) 발효 50주년을 맞는 내년 2020년을 맞아 ‘핵무기 없는 세계’를 실현하자고 호소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2017년 7월 UN총회에서 핵무기금지조약이 채택되었으나, 핵보유국들은 이 조약을 반대하고 있을뿐더러 핵무기의 실제적 사용을 준비하고 있다. 미 트럼프 행정부가 작년 발표한 ‘핵태세검토보고서’(NPR)에는 핵무기의 소형화·현대화를 통해 핵무기의 실전 사용 준비 태세를 갖춰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 푸틴 정부 역시 신형 핵무기를 개발하고 전술 핵무기의 선제 사용 태세를 갖추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 간의 중거리핵전력조약(INF; Intermediate-Range Nuclear Forces Treaty)은 폐기 위기에 처했다.
이와 같이 동아시아의 핵경쟁 위기가 대두되는 상황에서 원수협은 전 세계의 모든 정부가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하고 핵무기를 철폐할 것을 요구하는 ‘피폭자 국제서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년 간 600만 명의 서명을 추가로 받아 총 1000만 명에 달하고 있다. 2020년까지 국제서명을 확대해나가 모든 핵무기를 철폐시키는 것은 피폭의 아픔과 평화헌법을 지닌 일본 평화운동의 책무라고 밝혔다. 이 외에도 오키나와 헤노코 신기지 건설 중지, 후텐마 기지 반환, 아키타 현·야마구치 현에 배치 논의되고 있는 지상배치형 미사일 요격 시스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 도입 반대 투쟁 등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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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평화군축안보캠페인의 조셉 거슨과 평화행동의 에밀리 루비노는 세계 정치와 핵 군비 경쟁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국가인 미국의 활동가로서, 미국이 이라크·아프가니스탄·이란·예멘 등지에서 벌이고 있는 군사적 개입을 중단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만 아니라 각국 활동가들이 2020년 뉴욕에서 열리는 NPT재검토회의에 대응하여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추진하는데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이를 위해 다양한 미국 내 단체들이 세계의 평화운동과 협력하여, 내년에 최초로 뉴욕에서 ‘원수폭금지세계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상황을 공유하였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의 영향력이 동아시아로 확대되기 전에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해 원자폭탄을 실전에 사용하여 셀 수 없이 많은 희생자를 낳았음에도, 여전히 역사를 직시하기를 거부하면서 새로운 핵무기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또한 2020년 NPT재검토회의(5년마다 개최)는 이미 평균 82세에 접어든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기회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2020년 미국 뉴욕에서 원수폭금지세계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상당한 상징성을 갖게 될 것이다.
러시아 핀란드만남부해안의회 회장(the Public Council of the South Coast of the Gulf of Finland) 올렉 보드로프는 체르노빌 참사 직후 조사를 위해 파견되기도 했던 소련 과학자 출신으로서, 소련에서의 핵실험들이 낳은 민간인 피폭과 환경오염의 참극에 대해 증언했다. 실험들은 비밀리에 진행되어 인근 지역 주민이 전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규모로 피폭당하기도 하였으며, 1957년 9월 29일 마야크(Mayak)의 플루토늄 생산 공장에서 액체 고준위 핵폐기물 보관 탱크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사고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피폭 피해자만 50여 만 명에 달했다. 사고의 수습 과정에는 군인들뿐만 아니라 청소년들까지 동원되었다. 그는 핵 개발은 절대 ‘위험하고 군사적인 용도’와 ‘안전하고 평화적인 용도’로 나눠질 수 없는 문제라고 강조했다. 보드로프의 발표를 듣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핵 개발이라고 해서 정당하다거나 자본주의 국가의 핵 개발보다 문제가 적다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에 언급한 조셉 거슨, 에밀리 루비노, 올렉 보드로프를 포함하여 이 대회에 참여하는 미국과 러시아의 활동가들은 특별히 공동 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반세기 이상의 냉전과 핵 군비 경쟁을 주도했고, 현재도 합쳐서 전 세계 핵무기의 90%를 보유하고 있는 두 나라의 활동가들이 뜻을 모았다는 점에서 인상 깊었다. 이들은 핵무기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 속에서 미국과 러시아 양국이 각각 북한·이란과 크림반도에 가하는 핵 위협을 중단하고, 미중갈등과 북한·이란 핵 위기 등의 불안정한 세계 정세가 핵전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 방안으로 위기에 놓인 유럽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 Treaty on Conventional Armed Forces in Europe)과 중거리핵전력조약을 갱신하고 2021년에 종료될 예정인 미러 간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 New Strategic Arms Reduction Treaty)을 연장할 것과. 중국을 포함한 새로운 핵 군축 협정 체결, 중동·동북아시아 비핵지대화 등을 제안했다. 그러나 선언문이 발표되던 바로 그 날, 미국과 러시아 정부는 1987년 체결한 중거리핵전력조약을 끝내 폐기했다. 이로서 미러 간 우발적 핵전쟁 발발의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30여 년 간 금지되었던 단거리·중거리 지상 발사 핵미사일의 생산·실험이 다시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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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핵군축캠페인의 한나 켐프-웰치는 영국 정부가 추진하는 트라이던트(Trident) 미사일 시스템(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과 핵탄두, 핵잠수함)의 현대화 계획을 비판하며, 평생 핵무기 반대론자로 활동하며 핵군축캠페인의 부의장을 역임하기도 한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대표를 맡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제1야당인 노동당 의원의 다수가 여기에 찬성한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언급했다. 영국 정부는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에도 반대했는데, 핵군축캠페인은 이를 묵과할 수 없으며 영국 정부와 모든 정당이 일방적 군축 정책으로 선회하도록 지속적으로 압박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CND는 올해 12월 런던에서 열릴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서 트럼프 미 대통령이 NATO의 핵 공유 정책을 강화하는 것을 저지하는 유럽 차원의 저항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정치 시위 조직뿐만 아니라 풀뿌리 평화운동의 확대가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교육과 노동조합을 통한 조직화를 설명했다. 현재 군수기업들이 영국 교육 시스템에 끼치는 영향은 매우 큰데, 한 예로 세계 4위 군수기업 BAE 시스템스가 후원하는 학교에서는 11세 학생들에게 ‘수중 무기를 디자인하기 위해 고려해야 할 것들의 목록 써오기’ 같은 것을 시킨다. 이런 식으로 학생들이 전쟁과 무기에 익숙해지는 것을 막아내기 위해, 어린 학생들을 위한 평화교육을 확대하는 것이 절실하다. 교육이 효과적이려면 학생들의 가족들에게도 동의지반을 넓히는 것이 필요하다. 핵무기 철폐 요구가 군수산업에서 일하는 부모들의 일자리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노동조합은 이러한 상황에서 트라이던트 반대와 같이 평화를 위한 투쟁과 군수기업의 업종 전환을 통한 일자리 유지 둘 다를 요구할 수 있는 조직이다. 2017년, 영국노총(Trade Union Congress)은 노동당에 국가 산업 전략의 차원에서 군수사업의 업종 전환 문제를 다루는 기관을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후쿠시마대학교 행정정책학과의 사카모토 메구미 교수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8년이 지난 현재 후쿠시마 이재민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였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 인근 지역에 사고 이후 내려진 대피령을 해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들은 여전히 방사능 수치가 대단히 높은, ‘귀환하기 부적당한’ 지역으로 분류된다. 이 때문에 귀환 의사를 밝히는 주민의 비율은 10% 남짓 밖에 되지 않는다. 지자체들이 초등학교·중학교 수업을 무리하게 재개했다가, 등록한 학생이 채 10명도 되지 않아 다시 학교 문을 닫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이와 같이 극심한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처한 사고 지역 지자체들과 일본 중앙 정부의 선택은 이재민들을 비난하고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들을 ‘자발적 피난민’으로 부르며, 이들이 타 지역으로 이동하여 방사능 오염에서 벗어나는 것을 돕기 위해 지급되던 특별 주거 수당을 끊었다. 대피령이 해제된 뒤에도 귀환하지 않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니 개인이 책임지라는 것이다. 이재민들에게 배정되었던 공공 주택의 임대료를 2배~6배 가량 인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쿠시마 이재민들은 여전히 사고와 갑작스러운 타 지역 이주로 인한 정신적·경제적 어려움을 크게 겪고 있다. 방사능 피폭을 차치하고서라도, 현재 사고 지역의 공공교통, 상업·유통망, 의료·복지 인프라가 거의 복구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 거주 지역으로 돌아가서 살래야 살 수가 없다.
사회진보연대의 발표는 한반도 비핵화와 동아시아 평화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며, 동아시아의 핵 경쟁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일 평화운동의 협력이 중요하다는 주제였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이 한반도 평화정세를 견인하고 있다는 주장을 하지만, 실상은 1991년의 한반도비핵화선언과 2005년의 9·19 공동성명을 근거로 평화운동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뿐만 아니라 미군 핵전력의 한반도 배치, 일본의 핵연료 재처리, 한국 우익들의 핵무기 개발 주장 등을 비판할 수 있었다. 장기적으로 북한의 핵 보유와 함께 가는 동아시아 비핵·평화의 전망은 불가능하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대접하면 일본과 남한도 핵 개발 쪽으로 끌려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배와 미국의 군사주의적 개입을 겪어왔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북한, 혹은 남한의 (핵)군비증강을 옹호할 수는 없다. 핵무기를 개발·보유함으로써 강대국의 핵독점과 핵위협을 억지하고 궁극적으로 ‘전 세계 비핵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핵무기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선도적으로 핵무기 금지를 선언하고 강대국의 핵군축 노력을 압박해야 한다. 2017년 7월 UN에서 채택된 핵무기금지조약(TPNW)은, 핵에 반대하는 국가의 시민들이 핵보유국들에게 핵군축을 압박하는 틀이 될 수 있다. 한일 평화운동은 양국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요구하면서, 북한에도 과감한 비핵화 결단을 촉구해야 한다.
핵전쟁 위기를 막기 위한 노력은 ‘핵무기’ 그 자체를 철폐하는 것에 그칠 수 없다는 것도 중요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한국, 일본. 미국 3자 군사동맹과 무기 체계를 철폐하는 것까지 나아가야 한다. 한 예로, 현재 한국 성주 소성리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되어 있는 사드(THAAD, 종말단계 고고도 지역방어) 미사일 시스템은 핵미사일을 요격하는 데 초점을 맞춘 무기체계로, 한국-일본(일본의 교가미사키에도 사드 레이더가 배치되어 있다)-대만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동아시아 미사일방어망(Missile Defense, MD)의 일환이다. 사드를 한반도에 배치한 것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상정하고 ‘승리하는 핵전쟁’을 준비하겠다는 확고한 의사 표현이다. 나아가 ‘완벽한’ 방어체계 개발은 항상 공격적·선제적 핵무기 정책과 쌍을 이뤄왔다는 점에서 그 위험성을 알 수 있다.
미국은 이와 같이 동아시아 동맹국의 군사화를 강력하게 추동하는데, 이는 주변국들 역시 이에 대응하게 하여 항구적인 군사비 경쟁을 촉발한다. 현재로서는 ‘대규모 한미군사훈련 중단과 북핵·미사일 실험 중단’(Freeze for freeze)의 모멘텀을 유지하면서, 동아시아를 둘러싼 모든 적대적 군사행위와 군비증강을 막아내는 것이 절실하다. 사드(THAAD) 철회 투쟁, 일본 평화헌법 개헌 반대 투쟁, 오키나와 미군기지 반대 투쟁 등에 한일 평화운동이 지속적으로 연대하여 군비대결의 악순환이 아닌 선제적 군축 조치의 선순환을 만들어 내야 한다.
한일 사회운동은 지속적으로 연대를 해왔으나, 2010년대의 급변하는 정세에 대한 공동대응은 아직 부족하다. 한반도 핵전쟁 위기와 세계 최대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 동아시아 각국의 군비경쟁이라는 현실에 공동으로 대응해나가는 것은 세계적 차원에서의 핵무기 철폐와 평화 구축에서도 매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나아가 평화 확립만이 아닌, 민주주의와 노동권, 평등 확대에 있어서도 한일 사회운동 연대의 강화가 필요하다.
원래 제출한 발표문은 위의 내용이 중심이었지만, 전날 밤 오카 씨와 한 이야기가 생각나 발표를 시작하기 전에 몇 마디를 덧붙였다. “준비한 발표를 시작하기 전에 일본의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는 일본 보이콧 운동이나, 문재인 정부의 호전적인 한일관계 대응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지금의 한일관계 악화 국면을 한일 시민이 어떻게 해결해 나갈 지에 대해서 앞으로의 일정 동안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회 참가자들이 이 말에 반응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때를 시작으로 이후 일본 활동가들과 공식행사 및 사석에서 한일관계에 대해 많은 토론을 나누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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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국제회의는 3일에 걸친 토론을 종합한 <국제회의 선언>의 채택을 끝으로 8월 5일에 막을 내렸다. <국제회의 선언>의 한국어 번역본을 맨 아래에 첨부했다. 히로시마 국제회의의 주된 테마와 결의 사항을 확인할 수 있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의 발표와 질의응답에 대해서는 원수폭금지2019년세계대회 참가기②에서 다시 다룹니다.)
8.6. 히로시마 데이
74년 전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 8월 6일에는 해 뜰 무렵부터 일정이 시작되었다. 6일 오전에는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히로시마 시 차원의 공식 기념행사가 있어, 아베 신조 일본 총리를 비롯한 정부 고위 관료들도 참석했다. 덕분에 지금까지 살면서 우리나라 대통령도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는데 아베 총리의 발언을 듣게 되었다.
기념식 자체는 지자체장 발언, 정부 발언, 추모 발언, 합창, 어린이 발언, 헌화 등 공식 기념식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릴 순서대로 진행되었지만, 인상 깊었던 것은 그 내용이다. 보통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공식 행사라고 하면, 첨예한 쟁점들은 밀려나고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내용 위주로 짜이기 십상이다. 그러나 총리도 참석한 히로시마 데이 기념식에서 히로시마 시장과 시민들은 “일본 정부가 미국의 핵우산에 의존하며, 핵무기금지조약에 불참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날카롭게 비판하며, “일본도 하루 빨리 조약에 서명하고 비준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일전에도 ‘피폭자 국제서명’에 일본 전체 지자체 중 70% 이상이 지자체 수장 명의로 참여했으며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조인 및 비준을 요구하는 지자체 결의도 전체 지자체의 20% 이상이 참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신기해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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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결은 이 날 오후 열린 히로시마 데이 집회와, 이후 나가사키에서의 본대회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해마다 히로시마·나가사키를 번갈아가면서 본대회를 치르는데, 올해는 나가사키에서 본대회가 열리는 해였다. 올해는 히로시마 대회에 1300여 명, 나가사키 대회에 5000여 명이 참가했다.) 원수협이 주최한 히로시마 데이 집회에 모여든, 최북단 홋카이도에서부터 최남단 오키나와까지 전국 각지의 모든 시와 현에서 튼튼한 풀뿌리 운동을 일구고 있는 참가자들을 보면서 전후 이래 긴 역사를 지켜온 일본 평화운동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동아시아 지역이 핵 군비 경쟁과 상호 갈등으로 빠져들고 있는 오늘날, 전쟁 위기에 맞서 미래를 함께 지켜나갈 수 있는 든든한 방파제를 만난 것 같아 참으로 기뻤다. “내가 겪은 것과 같은 일을 인류가 다시는 겪어서는 안 됩니다. 내 생전에 핵 없는 세상을 보고 죽고 싶습니다.”라고 외치는 피폭자들, “피폭자 분들이 살아 계신 동안에 그 경험을 최대한 듣겠습니다. 이후에 이 비극을 잊지 않고 미래로 전하는 것이 저희의 몫입니다.”라고 말하는 청소년들, 각 지역에서 모아온 피폭자 국제서명 개수와 평화 투쟁(이지스 어쇼어 반대 등)을 보고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보며, 한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이들과 함께 하는 운동을 만들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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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일정은 히로시마 평화공원과 원폭 돔을 둘러싼 모토야스 강에 종이 등을 띄우는 행사였다. 대회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평범한 히로시마 시민들의 모습이 많이 보였다. 나도 “한반도의 비핵·평화를!”이라고 적은 등을 세계대회에서 사귄 해외 활동가 친구들, 홈스테이 중인 오카 씨 가족들과 함께 띄웠다. 히로시마에서의 마지막 밤, 강물을 따라 흘러 내려가는 종이 등들을 보면서, 히로시마 피폭자들의 생전에는 어렵더라도 언젠가는 꼭 핵무기 없는 세계를 실현시키겠다는 다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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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의 참상을 잊지 않은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
히로시마에서 보낸 시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보다 히로시마라는 도시 그 자체였다. 인류 최초로 핵폭탄 투하의 참화를 겪고 초토화되었던 도시는, 74년이 지난 지금 일본 내에서도 인구 순위 10위권에 드는, 백 만 명이 넘는 시민이 사는 아름다운 도시로 완전히 재건되었다. 그러나 히로시마는 핵무기의 참상을 잊지 않았다. 히로시마 시 어디에서나 쉽게 피폭자의 고통과 핵 없는 세계에 대한 염원을 상징하는 종이학(折り鶴, 오리즈루)을 볼 수 있었다. 도시의 한가운데에 평화기념공원이 위치하고, 원폭 돔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원폭 돔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히로시마 시의 대표적인 번화가 혼도리 상점가가 있다. 폭심지(爆心地, Ground Zero)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위에 빌딩들이 들어서 있지만, 바로 옆의 오리즈루 타워에는 그날의 아픔을 안내하는 전시가 마련되어 있다. 히로시마 시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오리즈루 타워는 그 이름과 테마 자체가 종이학으로, 원폭의 아픔을 상징하는 명소이지만, 한편으로는 히로시마 시민들이 편하게 휴식을 취하러 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열리는 기간에는 대회 참가자뿐만 아니라 참가하는 시민들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의 각양각색의 단체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히로시마를 찾았다. 히로시마 시민들은 평화공원으로 모여 기념행사에 참여하고, 망자들을 기리며 꽃을 바치고, 저녁에는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을 담아 평화공원을 둘러싼 강물에 등을 띄워 보낸다. 이렇게 히로시마에서 과거는 잊히지 않고,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있다.
핵무기의 참상을 잊지 않은 평화의 도시, 히로시마에서 마음 한 구석의 무거움을 느꼈다. 한국갤럽이 2017년 9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우리나라도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60%가 “찬성”, 35%가 “반대”라는 결과가 나왔다. 일본의 경우 그 비율은 10% 미만인데, 2차례 원폭 투하의 비극을 겪은 일본 사회와 굳이 비교하지 않더라도 한국 사회는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서 매우 둔감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이 오늘날 북한의 핵무기를 둘러싼 한국 사회운동 내 논쟁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북핵의 존재는 한국의 핵무장 필요성을 옹호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일제의 항복과 직접적인 인과 관계로 연결시키는 관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배로부터의 해방이 준 환희와, 인류 역사에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원폭의 참극은 구별되어야 한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자리 잡은 ‘한국인 원폭희생자 위령비’가 보여주듯, 핵무기는 국적을 따지지 않고 목숨을 앗아갔다. 당시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사망한 조선인의 수는 2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전체 희생자의 무려 10%에 달한다. 원폭의 책임은 미국과 일본으로 돌릴 수 있더라도, 이와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감히 말하건대 인류 가운데 그 누구도 핵 공격을 ‘받아도 싸지’ 않다. 이미 세계 곳곳에 너무나 많은 핵무기가 존재해 한 번의 충돌도 인류 전체의 절멸로 이어질 수 있는 오늘날에는 더더욱 그렇다.
거리에서 핵 없는 세계를 향한 캠페인을 펼치는 일본 시민들과 히로시마 시의 풍경들로 글을 마친다.
반일 민족주의가 발화점을 넘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만, 무언가 다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지난 20세기 한국과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인식을 총체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겠으나, 일단 이번 글에서는 이번 사태의 직접적 발단이 된 한일청구권협정과 민간/개인청구권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지난 7월 11일 글에서는 이 문제를 자세히 언급하지는 않았으므로, 이번 기회에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박정희 정부와 ‘민간청구권 보상’
기실 피징용자 보상 문제의 기본 방향은 민주당 장면 정부가 진행하던 한일교섭에서 그 틀이 잡혔다. (5·16 군사쿠데타 직전인 1960년 5월 10일 한일교섭) 이때 한국 측은 보상대상으로서 생존자, 부상자, 사망자, 행방불명자, 군인군속을 포함한 피징용자 전반으로 범위를 확대했으며, 이 보상은 “피징용자의 정신적, 육체적 고통에 대한 보상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일본 측은 “피해자 개인에 대한 일본정부의 보상을 말하는가”라고 질문했고, 한국 측은 “국가로서 청구하며 개인보상에 대해서는 한국 국내에서 조치하겠다”고 답변했다. 즉 정부가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포함하는) 개인 보상금을 받아서 국내에서 이를 집행하겠다는 기본 틀이 이미 장면정부 당시 설정되었다는 뜻이다.
실제 한일청구권협정을 타결한 박정희 정부는 1965년 12월 <청구권자금의 운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제출했다. 1966년 1월 박정희 대통령은 연두교서에서 1970년대까지 국민소득을 배가시키고 이를 위해 청구권자금을 공평하게 사용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민간청구권 문제를 어떻게 다루겠다는 언급은 전혀 없었다. 야당이 이에 문제제기하면서, 결국 1966년 2월에 공포된 법은 “민간청구권 보상에 관한 (…) 필요한 사항은 따로 법률로 정한다”고만 명기했다. 1967년 두 번째로 대선에 나선 박정희 대통령은 재선되면 곧 보상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1971년 1월에 이르러서야 <대일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이 역시 증거자료 수집을 위한 법률이었고, 보상을 언제, 어떻게 하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이때 신고대상 중에는 피징용자와 관련된 것은 △우편저금, 진체저금, 우편연금(곧 피징용자의 미수금)과 △군인·군속·노무자로 소집·징용되어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한 자라는 항목이었다.
결국 박정희 정부에서 1975년부터 2년에 걸쳐 보상금이 지급되었으나, 여러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일단 신고기간이 너무 짧았고 확실한 증거서류를 구비한 신고만 접수했다. 또한 이 기간에 지급 청구를 하지 않은 경우, 그 청구권이 소멸하였다고 간주했다. 그 결과, 예를 들어 인명관계 신고수리가 8,910명이었는데, 한일교섭 당시 박정희 정부가 사망자를 77,603명으로 제시했던 것에 비해서 너무 적은 수치였다. 또한 보상액수도 너무 적은 것이 아니냐는 논란도 컸다. 전반적으로 보아, 어떤 이유든 간에 박정희 정부가 피해실태를 철저히 조사할 의사나, 보상할 의사가 크게 부족하지 않았냐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와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
노무현 정부는 2004년 2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입법했고, 여러 과정을 거쳐, 2007년 12월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그 과정에서 총리 자문기구로 구성된 <민관공동위원회>의 2005년의 검토 결과, “청구권협정을 통하여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불은 (…) 강제동원 피해보상 문제 해결 성격의 자금 등이 포괄적으로 감안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는 결론은 지난 글에서 이미 인용한 바 있다.)
그 1조는 이 법이 “국가가 태평양 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와 그 유족 등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위로금 등을 지급함으로써 이들의 고통을 치유하고 국민화합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명시했다. 그렇다면 왜 보상금(또는 위자료)이 아니라 ‘위로금’이라는 표현을 썼는가? 이는 한국정부가 이미 1975년에 시행한 보상으로 인해, 정부의 법적 보상 의무는 없지만, 그 보상이 불완전, 불충분하였다는 것을 정부가 인정하여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이에 대해 위로금 또는 지원을 보충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즉 기존 보상을 보충하는 인도적 지원으로, 보상의 성격을 담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의 법적 보상은 아니라는 복잡한 논리 구조를 동반했다.
그렇다면 2007년의 ‘지원’은 1975년과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신고자 수가 크게 늘어나 22만 건 이상의 신고를 접수해, 11만 건에 대해 지원이 이뤄졌다. (현재까지 대략 6,000억 원 이상의 지원금이 지급되었다.) △사망자뿐 아니라, 생존자, 부상자, 미수금 피해자를 지원대상에 포함시켰다. (생존자는 위로금 2,000만 원, 부상자는 위로금 1,000만 원, 생존자에게는 연간 80만 원의 의료지원. 미수금은 1엔당 2,000원으로 환산) △ 유족범위가 후순위 유족인 형제, 자매로 확대되었다. △정부의 적극적 조사로 피해자의 입증 책임이 경감되었다.
노무현 정부 ‘희생자 지원’의 이면
그렇다면, 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만사형통이었는가? 그렇다고 말할 수없는 논란도 동반되었다. 첫 번째,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다. 왜 이런 일이 있었나? 애초 정부와 국회 행정자치위가 합의한 원안은 생존자에 대한 지원으로 매년 50만 원의 의료지원금을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열린우리당 장복심 의원이 생존자에게 500만 원의 위로금을 추가 지급하라는 내용의 수정안을 본회의에 제출하여 통과된 결과, 결국 노무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다. 당시 정부 당국자는 거부권 행사의 이유로, 수천억 원대의 추가예산이 투입되어야 하며, 특히 생환 후 사망한 분들과 형평성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실제 생환 후 사망자의 유족에게도 위로금을 지급할 경우, 재정투입이 조 단위로 증가할 수 있었다.) 하지만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는 노무현 정부의 거부권 행사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그 후, 생존자 위로금은 다시 삭제되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2월에야 다시 법안이 통과되었다.
또 하나의 논란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 문제였다. (국내 징용에는 ‘일반징용’과 이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의 ‘현원징용’이 포함된다. 현원징용은 조선총독부가 중점산업으로 인정한 공장의 현직노동자를 고용장에서 그대로 징용하는 방식이다. 즉 기존 공장에서 계속 일하되 이직이나 퇴사가 금지되는 셈이다. 여기에 연간 연인원 수백만 명에 이르는 근로보국대나, 징용령 이전 시기부터 존재하던 ‘관 알선’ 노동자도 포함된다.)
일본의 수출규제가 불거진 이후로, 최근이라고 말할 수 있는 2019년 7월 11일에도 서울행정법원은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가 외교부장관을 상대로 보상을 지급하라며 낸 소송을 각하했다. 이미 2011년 2월 헌법재판소는 국내 강제동원 피해자 지원을 제외하는 게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국가가 강제동원 진상규명법을 제정해 국내 강제동원자들도 진상을 파악하고 피해자로 지정해 희생을 기리는 조치를 한 점 등을 고려하면 국가의 지원이 충분하지 못하더라도 전적으로 부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2005년 <한일수교회담 문서공개 등 대책기획단>은 국내 동원을 지원대상에서 제외했는데, 그 근거는 △국내강제동원은 연인원 650만 명으로 대상자 수가 너무 많아 정부의 재원에 문제가 있다는 점. △한일협상 당시 일본에 요구한 보상범위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사실 여기서 제시한 두 가지 쟁점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2007년의 지원법의 불가피성을 재확인하든, 아니면 그 미흡함을 인정하고 새로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든 무언가 판단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역대 한국정부가 취한 조치들에 대해서는 판단을 미룬 채, 모든 문제를 일본 측에 미루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지 숙고해야 한다.
스스로 되돌아보자
일본 지식인계에서 일본 자신에 대한 비판과 자성을 촉구하며 사회운동의 흐름을 형성하려고 노력한다면, 현 시점에 한국에서도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한국인들은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의 절규를 시종일관 외면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보자. 한국 정부와 한국인은 무엇을 했던가.
2007년 <태평양전쟁 전후 국외 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될 당시, 우리는 이 법률 제정의 역사적 함의에 대해 명확히 인식했던가. 다시 말해, 1975년의 보상 이후에 한국 정부가 추가적인 지원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배경을 우리는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인가. 당시 법률제정 이면에도 다양한 논란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그만큼 우리는 그 문제들을 올바르게 다루기 위한 논의가 필요했다. 만약 2007년 지원책에도 미흡한 측면이 있다고 인식한다면, 우리는 이를 뒷받침할 만한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새로운 합의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전제되어야, 현재의 한일 갈등을 파해하는 외교적 합의점의 도출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