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10년 4월 16일 오후 3시 장소: 사회진보연대 회의실 사회: 이소형 사회진보연대 조직국장 참석: 박윤기 장애인 활동보조인, 심선혜 공공노조 서울경인지부 보육분회 분회장, 차승희 공공노조 의료연대 서울지부 간병분회 사무장 정리: 방민희 사회진보연대 노동위원 지금까지 여성이 가정 내에서 무급으로 수행해 온 돌봄노동이 사회서비스란 이름으로 정부 정책화되고 제도화되고 있다. 노인장기요양제도는 올해로 2년째로 접어들고 있으며 장애인장기요양제도와 간병의 제도화가 시범 시행되고 있다. 서울시는 ‘서울형 어린이집’을 늘려가는 추세다. 심지어 한나라당도 무상보육이 중요하다고 열변한다. 그동안 열심히 누군가를 보살피고 돌보고 간호했지만 ‘사랑’과 ‘헌신’이라는 미명 아래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간주되어왔던 여성의 노동이 사회적으로 드러난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다양한 제도에는 돌봄을 받아야 하는 사람과, 그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의 권리가 삭제되어 있다. 사회서비스가 저출산 고령화 사회의 위기 대응책으로, 경제위기 상황에서 일자리 창출 정책으로 제도화되면서 신자유주의가 야기한 재생산 위기의 부담이 다시 노동자 민중에게 떠넘겨지고 있다. 일자리 창출, 사회서비스 시장 육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정부 정책은 여성노동이 하찮고 부차적이라는 기존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한다. 제도의 취지가 시장 육성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돌봄노동자의 노동권을 보장하지도 못하면서 저임금의 고된 노동을 강요하고 있다. 돌봄노동과 사회서비스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일방적인 전략에 맞서는 것이 시급하다. 이를 위해 돌봄노동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돌봄노동 문제를 제기할 투쟁 주체의 조직화에서부터 출발할 것을 제안한다. 생산과 재생산을 나누고, 재생산을 사적인 영역으로 구분하여 여성에게 떠맡기며 평가절하했던 역사와 단절해야 한다. 돌봄노동의 가치가 인정받고, 돌봄노동자의 노동권이 보장받고, 돌봄노동과 관련된 제도는 보편적인 권리로 인정되어야 한다. 지금과 같이 마구잡이로 시장에 내맡기는 방식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국가 책임을 강화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이번 <사회운동>에서는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개최했던 ‘돌봄노동자 희망대회’의 후속사업으로 각 분야의 돌봄노동자를 초청하여 돌봄노동의 현황과 운동과제를 살펴보았다. 이번 좌담에서는 돌봄노동자의 현실을 널리 알리고 돌봄노동자들 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확인했다. 하지만 향후 노동자 운동에서 돌봄노동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고, 주요한 투쟁 과제로 만드는 것은 여전히 숙제로 남는다. 돌봄노동의 의미와 가치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확장하고, 새로운 주체들을 조직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주요 과제가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한 논의는 이후 <사회운동>에 소개할 예정이다. 본문의 각주는 이해를 돕기 위해서 정리자가 추가한 것이다. * * * 사회자: 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 날을 맞아 개최된 <돌봄노동자 희망대회>에서 요양보호사, 간병노동자, 활동보조인, 보육교사들은 돌봄노동의 현실을 폭로하고, 돌봄노동의 사회화를 요구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사회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돌봄노동을 가족과 여성에게 떠넘겨온 사회적 인식과 정부정책을 비판하고, 돌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사회적 책임이 필요함을 알리는 첫 발걸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를 위해서는 돌봄노동자들의 노동권 보장이 중요한 문제임을 알릴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첫 발걸음을 시작으로 미래를 돌보는 사람들인 돌봄노동자들의 현황을 알리고 이후 투쟁을 결의하자는 의미에서 돌봄노동자 좌담회를 기획하였습니다. 돌봄노동의 의미. 내가 하는 노동, 왜 소중한가? 사회자: 자신이 하고 있는 노동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일인지 평소 느끼신 바나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선혜: 그동안은 어린이집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만 생각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돌봄노동’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 전에는 일을 할 때 기술적인 부분이나 일을 잘 해서 인정받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면, 돌봄노동을 알게 된 이후로는 철학이 생긴 것 같아요.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이 있듯이 요람, 즉 인생의 초기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 그 아이들에게 돌봄을 제공한다는 점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책임감도 더 커졌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보니까 나의 노동조건, 내 컨디션이 돌봄의 질을 크게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누적되는 스트레스가 아이들 때문이 아닌데 아이들을 대할 때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돌봄의 가치를 알게 된 이후에는 이것이 나 혼자의 문제거나, 아이들에게 풀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원인을 찾아내고 그것을 해결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돌봄을 하는 행위를 노동으로 인정으로 받고, 그 가치가 인정받아야지 돌봄의 질도 높아지고, 나 혼자 죄책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낀거죠. 그래서 노동조건을 개선하라는 요구도 더욱 당당하게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박윤기: 장애인활동보조 일을 시작할 때는 사실 불쌍하다, 안쓰럽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러면서 비장애인인 내가 좀 더 장애인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생각이 컸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해보니, ‘장애인도 사람이다’, ‘장애인도 인간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다 되어서 대입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분을 만나기도 했는데, 나랑 똑같구나, 단지 장애가 장애일 뿐 ‘장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활동보조의 의미도 그런 것 같습니다. 장애인이 동등한 인간으로 설 수 있는 데 보조를 하는 것이지요. 차승희: 아까 보육이 요람이라면 우리는 무덤 쪽이지요(웃음). 어딘가 아파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는 사람이 병원에 와서 우리의 간병을 통해 회복을 해나가는 과정을 보고, 큰 보람을 느낍니다. 우리는 제3의 의료진이라는 이야기를 해요. 그만큼 간병은 꼭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거지요. 그래서 돌봄이라는 단어와 의미가 참 좋아요. 의지가 있는데 본의 아니게 혼자서 움직일 수 없거나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간병인들의 돌봄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정부의 사회서비스 정책에 대한 비판 사회자: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돌봄노동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이런 돌봄노동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책임이 매우 중요할 것 같습니다. 특히 요즘 저출산 고령화 시대, 경제위기 시대라며 수많은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은 돌봄의 가치를 높이고 사회적인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현재 시범 시행되고 있는 장애인 장기요양제도, 공보육을 강화한다는 서울형 어린이 집, 간병의 제도화에 대해 각 당사자들이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주세요. 심선혜: 서울시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서울형 어린이집’ 포스터 아시죠? 할아버지가 여자아이를 안고 웃고 있는 사진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울시에서 정말 보육에 신경을 쓰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게 서울형 어린이집입니다. 저출산 위기와 연관되어 보육의 중요성이 많이 강조됩니다. 저도 그런 고민을 합니다. 아이를 대책 없이 막 낳으라는 것보다는 있는 아이들을 잘 돌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있는 어린이집은 대부분 민간 어린이집입니다. 서울 같은 경우에 100개 중 10개만 국공립이고 90개는 민간이라고 보면 됩니다. 부모들은 질 좋은 국공립 어린이집을 선호하지만, 서울시에서는 갑자기 국공립을 만들 수 없는 노릇이니 민간어린이집을 국공립수준으로 높이겠다고 서울형 어린이집이라는 걸 만들고 재정을 투여하고 있습니다. 재정 투여는 저렴한 보육료와 보육교사의 인건비 지원이 핵심인데요, 이는 환영할 만한 일이긴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재정지원만으로 질이 향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돈 몇 푼 지원이 바로 질 향상으로 연관 되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떻게 운영하는가, 즉 관리감독과 문제의 원인 해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을 먹이고 씻기고 기본적인 습관을 익히게 하는 등 교사들이 하루에 정말 많은 일을 하는데, 그 일들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린이집이 시설장의 독단적인 운영에 좌지우지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서울형 어린이집은 회계 투명화와 CCTV를 다는 것으로 이를 해결하려 합니다. 회계 투명화야 필요합니다. 그런데 CCTV가 안심보육에 도움이 되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동과 교사의 인권침해는 차치하고서라도, CCTV를 달아서 감시한다고 해서 교사 1인이 수많은 아이들을 돌보느라 발생하게 되는 안전사고가 방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력확충과 같은 근본적인 해결방안보다는 손쉽고 빠르고 자극적인 방법, 그리고 오히려 교사들의 스트레스를 높여 보육의 질을 떨어뜨리게 하는 방법을 도입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결국 보육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정책이 보육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승희: 간병제도화는 간병인들의 염원이었습니다. 간병노동자는 특수고용 노동자라서 24시간이라는 초유의 장시간노동에 최저임금도 못 받는 신세입니다. 심지어 밥을 사먹는 것도 부담이 되어 집에서 밥을 얼려 싸와서 병원 복도나 배선실, 혹은 환자 곁에서 눈치 보면서 녹여먹는 정도입니다.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를 해도 밥은 기본적으로 시켜주는데, 우리는 그나마도 해결이 안 됩니다. 환자를 보다가 감염이 되고 다치더라도 간병인은 법적으로 노동자가 아니라서 산재예방은커녕 산재처리조차 안 되는 열악한 조건에 처해있습니다. 병원에서 필수적인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로 인정 못 받는 문제, 이건 병원만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간병제도의 사회화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에서는 간병을 제도화를 한다면서 MRI와 같이 비급여화하고 오히려 민간보험을 도입하겠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환자들도 보험 얼마짜리에 들었는지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서비스가 달라지고, 간병인들의 임금도 낮아지는 것이 민간보험 도입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대안으로 간병인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건강보험에 간병을 포함시켜서 급여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박윤기: 현재 장애인장기요양제도 시범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 시범사업이 그대로 시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장애인장기요양제도의 핵심이 시장화이기 때문에 활동보조인의 노동조건은 더욱 열악해 질 것이라 걱정이 큽니다. 노동자성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중에 개인 사업자로 등록하라고 할까봐 염려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수입도 일정하지 않고, 4대 보험의 혜택도 그림의 떡입니다. 실업급여나 퇴직금을 실제로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현재 중개기관에서 25%의 중개수수료를 떼고 있는데 시장자율화가 되면, 센터나 중개기관은 수수료를 올리겠지요? 그러면 저임금 문제는 더 심각해집니다. 또 이용자 수와 이용자들의 사용시간에 비해 활동보조인들이 넘쳐나고 있는 현실인데, 정부의 시장화 속에서 취업 경쟁 때문에 우리 권리는 이야기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하에서 일을 하는 요양보호사도 마찬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제도가 시장화되는 상황에서 장애인 요양 서비스의 질은 당연히 하락할 것입니다. 돌봄노동자들의 노동 조건 실태 사회자: 보육, 간병, 장애인과 관련한 정부 정책의 문제에 대해 말씀해주셨습니다. 정부는 복지를 증진시키는 것이 정책 취지라 밝혔지만, 반대로 제도를 민간영역에 맡기고 시장화해 국가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지적이었습니다. 결국 아이, 노인, 환자, 장애인이 돌봄 서비스를 온전히 받지 못하고 돌봄의 질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돌봄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악화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현재 노동조건은 어떤지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심선혜: 하도 어린이집 사고로 분쟁이 심해서, CCTV를 설치하는 것까지는 보육교사들이 수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IP-TV 생중계 시스템까지 도입하고 있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동의를 하고나서 추진해야 하는 문제인데, 오히려 이거 안 해서 우리 어린이집이 서울형 어린이집 심사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할 거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일거수일투족을 다 내보이는 것에 신경이 쓰여서 어떻게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겠습니까. 또 시간도 문제예요. 하루 종일 교사가 하는 일을 쭉 뽑아봤더니 기본 10시간이 넘어갑니다. 우리가 8시간 노동을 기본이라고 하지만, 어린이집은 12시간 열려있기 때문에 10시간 이상 일하는 것은 기본이고, 토요일에도 일하고 밤샘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이들을 온전한 정신으로 돌볼 수 있겠습니까. 일하는 시간뿐만이 아니라 일하는 형태도 노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어린이들을 돌보느라 앉았다 일어났다, 들었다 놨다하고 아파도 쉬지 못하고 웃으면서 일해야 해서 정신도 지치고, 급하게 밥을 먹느라 속도 망가지죠. 노동건강연대와 실태조사 한 결과 우울증 지수가 자살수위를 훨씬 웃돌게 나왔습니다. 제대로 된 보육을 할 수 있는 환경은 최소한 만들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이러한 요구를 하면 자꾸 교육자로서의 사명감과 헌신만 강요합니다. 교사당 아이수도 문제입니다. 연령대별로 교사당 아이수가 만 0세 1:3, 만 1세 1:5, 만 2세 1:7 등으로 정해져있습니다. 이건 최대정원이었는데 최근에는 최소정원이 되어 여기에서 더 돌보라고 요구받고 있어요. 아이들을 대체 어떻게 생각하는건지, 아이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으니까, 그렇게 많은 아이들을 한꺼번에 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혼자서 세 쌍둥이 볼 수 있습니까? 본다 해도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한데, 보육교사면 다 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인간으로 본다면 교사 대 아동 비율을 대폭 줄여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상호작용이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 아이들에게 소리 지르지 말고 제대로 보라는 것은 매우 모순된 요구입니다. 차승희: 간병인들은 시간당 2500원이라는 저임금으로 보통 하루 24시간 일합니다. 법적으로 노동자로 인정되지 않아 최저임금과 8시간 노동을 보장 받지 못합니다. 잠도 제대로 못자면서 하루 온종일 일을 하니 대부분의 간병노동자들이 근골격계질환이나, 안구건조증, 위장장애 등의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산재적용도 못 받고 있어요. 병원에서 감염환자를 돌보다가 병이 옮아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노동권 보장, 최저임금, 산재적용, 8시간 노동시간 준수가 시급한 과제입니다. 노동시간뿐만 아니라 수면시간도 보장 받아야합니다. 잠을 못자는 고통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아니면 알지 못하죠. 밤새 환자를 주무르라는 보호자들이 있는데, 그 지시에 따랐다가 병원신세를 지게 된 간병인들도 적지 않습니다. 이처럼 간병인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돈 주고 산 사람’이라고 인식되어 보이지 않는 족쇄에 묶여 있습니다.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환자를 돌보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받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1:1로 환자를 돌보는 경우가 아닌, 요양시설이나 병원에서의 공동간병의 경우 한 명의 간병인이 정말 많은 환자들을 돌봐야 합니다. 야간에는 위 아래층을 왔다 갔다하며 혼자서 20명 넘는 환자를 돌봐야 하기도 해요. 이는 간병노동자의 노동강도 문제뿐만 아니라 환자 생명의 문제와도 직결되는 매우 위험한 노동조건이지요. 간병제도화가 된다면 제대로 된 인력기준이 세워져야 합니다. 박윤기: 우리도 장애인 대 활동보조인 비율 1:1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사실 저는 반대했습니다. 건장한 신체의 장애인 같은 경우 혼자서 돌보기 어렵습니다. 필요한 경우에 한 사람 더 붙이면 안 되냐 요구를 해도 법적으로 그렇게 안 된다고 합니다. 현재 활동보조인들이 늘어서 일이 없는 사람들이 있는데도 말이죠. 요양보호사도 혼자서 노인을 돌보니 우리 활동보조인도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활동보조인은 이렇게 늘어났는데도 불구하고 혼자서 감당이 안 되는 장애인을 혼자서 돌봐야 하는 거죠. 활동보조인의 경우 장애인 이동시 활동보조인과 함께 오지 않은 다른 장애인까지 돌봐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장애인들이 정부에게 받은 시간이 적기 때문에 활동보조인을 못 쓰는 거죠. 또 시급제도 문제입니다. 좀 전에 말했듯이 장애인들이 사용할 수 있는 활동보조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보니 활동보조인이 장애인과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임금이 들쭉날쭉합니다. 만약 한 달 내내 연결이 되지 않으면 한 달 수입이 없는 거지요. 게다가 이용자 장애인이나 센터의 마음에 안 드는 활동보조인의 경우에는 아예 일을 못 받습니다. 이렇게 생활을 불안정하게 하는 시급제가 아니라, 활동보조인들이 안정된 조건에서 책임감 있게 일 할 수 있도록 월급제를 도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동시간도 노동시간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강원도 정선에 사는 활동보조인의 경우 이동시 왕복 7시간이 걸린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일하는 시간보다 이동하는 시간이 더 많고, 임금은 임금대로 적은데 그나마 서울이야 사정이 상대적으로 낫다고 쳐도 지방 같은 곳은 서비스가 안정적으로 제공될 수 없는 것이지요. 돌봄노동자들의 조직 현황과 활동 사회자: 저출산 고령화 시대라고 호들갑 떨며 정부가 내놓은 각종 돌봄 정책이 잘못된 것이라면, 새로운 대안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안을 만드는 주체는 우선 돌봄노동자들이 되어야겠지요. 주현숙 감독 영화 제목이기도 한데, ‘미래를 돌보는 사람들’이 바로 돌봄노동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전국의 돌봄노동자 수에 비해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고 투쟁의 의지를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 돌봄노동자들의 조직 상황이나 조직화 관련해서 평소 갖고 계신 고민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심선혜: 서울의 보육교사가 3만 3천 명입니다. 이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일을 하면서도 함께 뭉쳐서 목소리를 내려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왜 그럴까, 왜 참고만 살까, 생각해보면 보육교사의 꿈은 훗날 원장이 되는 거니까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 만성피로에 찌들어있어서 자기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거나, 단 한번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아이들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만 익숙해져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우리가 변화를 원한다면 함께 모여야 합니다. 그동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면 이제는 그런 방식만으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린이집을 직접 찾아다니는 등 보육교사들을 직접 만나는 계기들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리고 보육 정책 관련해서 정부를 상대하는 싸움도 멈출 수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보육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입니다. 지금의 보육의 틀을 완전히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나라당까지 무상교육을 들고 나오는 아이러니한 상황인데, 단순히 보육료를 지원하는 차원이 아니라 보육시설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게 요구하려고 합니다. 보육교사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반영되는 채널을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보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게 하는 요구를 해나가고자 합니다. 보육정책위원회 참가를 해서 보육조례를 만드는 것에 우리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다면 제대로 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하나는 시설보육에 갇히지 않는 보육 전반의 문제, 예를 들어 아이돌보미 서비스를 제기하는 것도 고민 중입니다. 보육노동자의 권리가 제대로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정에 파견이 되었을 때, 가사일까지 도맡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또 보육교사가 아이를 돌보고 교육할 때 지도와 협조가 필요한데, 무조건 한 사람에게 집에 가서 알아서 아이를 돌보라는 식이 되면 안 됩니다. 차승희: 간병인과 요양보호사가 함께 모이는 자리를 적극적으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육도 힘쓰고 있어요. 우리가 단순히 돈 벌러 온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우리 스스로 적극적으로 개선해나가고 있다는 점을 함께 알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렇게 개개인의 의식을 모아서 집단적으로 문제해결을 해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각종 토론회를 통해 우리의 문제를 대외적으로 알리는 데도 힘쓰고 있습니다. 보건복지부, 노동부도 찾아다니면서 제도 개선을 요구하고도 있습니다. 박윤기: 지금 ‘활동보조인 권리 찾기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인활동보조서비스의 경우 현재 장애인자립생활지원센터에서 중개기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적인 운동단체라고 이름이 나있는 곳에서도 활동보조인의 권리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 고민이 됩니다. 우리는 활동보조인도, 중개기관도 함께 잘해보자는 생각인데 이러한 우리의 생각이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활동보조인이 함께 모여서 우리의 권리를 찾아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권리 찾기 모임을 점점 확장하면서 활동보조인의 권리를 대변할 조직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돌봄노동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자: 국가와 사회가 공적으로 책임져야 할 역할을 가족, 그중에서도 특히 여성에게 떠넘겼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를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성의 노동을 아무나 할 수 있는, 비숙련 노동으로 여겼던 사회적 인식은 저임금의 불안정한 여성일자리를 늘려왔습니다. 또 이는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열악하게 만들었지요. 돌봄노동자의 노동조건과 돌봄노동의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이것은 여성의 일’이라는 인식도 해소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차승희: 고민 고민하다 보면 결국 거기에 결론이 닿습니다. 우리 여성들이 먼저 깨어야 하고, 우리의 목소리가 제대로 사회에 반영이 될 수 있도록 되어야 할 것입니다. 돌봄노동이 여성만의 일로 여겨지는 우리사회의 인식의 틀을 바꾸려면 돌봄노동자들 모두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심선혜: 돌봄을 사적인 영역으로 볼 것이냐, 공적인 영역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는 이데올로기 차원의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아이를 돌보고 노인과 환자를 돌보는 일은 가정에서 책임져야 하고 국가는 일부 지원만 하면 되는 일로 여겨지면 여성은 이러한 조건에서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을 것입니다. 일본의 경우 보육료를 지자체에 내고 지자체에서 보육시설을 관리합니다. 그러다보니 임금 수준이 높아서 남성들도 보육교사 일을 많이 합니다. 일본이 잘 사는 나라라서 가능한 문제라기보다, 돌봄을 공적인 영역으로 인정할 때 이것은 여자의 일이 아니라 사회의 일로, 제대로 된 가치평가를 받을 것입니다. 박윤기: 현행 복지제도 중 가장 큰 문제는 아직도 무료봉사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기부문화만 강요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책임을 회피하고 돌봄에 대해 희생과 봉사만 요구한다면 여성의 현실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이후 공동 투쟁 결의와 노동운동에 바라는 점 사회자: 돌봄노동자들의 연대와 공동 투쟁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2010년 3.8 돌봄노동자 희망대회의 경험을 발판으로 하반기에 돌봄노동자 대회를 개최해 공동 투쟁을 이어가면 어떨까요?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해주세요. 또 마지막으로 돌봄노동자들의 투쟁과 관련해서 기존의 노동운동에 바라는 바가 있으시면 덧붙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차승희: 그동안은 우리의 문제를 함께 고민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자꾸 만들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번의 행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문제의식을 계속하여 이어나가고 발전시켜 나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간병노동자들도 우리가 행동한 것이 어떠한 의미였는지 스스로 확인해나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선혜: 같은 돌봄 영역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만나지 않으면, 보육교사만의 문제로 국한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하고, 그런 기회가 돌봄노동의 범주에 있는 더 많은 노동자로 확대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8 여성의 날에 그나마 사회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소중하지만, 일 년에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연속성을 가지고 우리의 요구를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노동자 운동에 바라는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돌봄은 우리의 삶 전반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돌봄노동자의 노동조건이 개선될수록 노동자 전반의 삶의 질도 향상됩니다. 지금까지는 각자의 영역에서 일하는 노동자 정도로 인식하는 수준이었다면, 노동자 운동 전체가 우리 삶의 질을 바꾸는 근본적인 활동의 시작으로서 돌봄노동자의 행동에 함께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박윤기: 연대는 당연히 해야지요. 문제는 어떠한 방법으로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방법을 모색해봐야 할 것이고, 노동자 운동 관련해서는 돌봄노동 관련한 학습이나 인식의 기회를 늘려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노동자 운동이 새롭게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인식 하에 새롭게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좋겠습니다. 사회자: 많은 이야기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를 시작으로 돌봄노동의 중요성과 사회적 책임의 필요성이 더 많이 알려졌으면 합니다. 또 이를 위해 열악한 상황에서 일하고 있는 돌봄노동자들을 투쟁의 주체로 세우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두고 힘찬 발걸음을 시작했으면 합니다.
1970~80년 정세와 노동운동 노동자들에게 저임금과 빈곤을 강요하는 정부의 경제성장 정책, 자본가들의 조직적이고 폭력적인 탄압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한국의 노동운동은 1970년대에 접어들어 전환점을 맞이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었던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고 1970년대 노동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외국자본을 도입해 수출중심의 공업화를 추진했다. 한국경제는 베트남 전쟁, 중동 건설 붐에 편승해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채에 의존한 성장으로 경제는 외국에 종속되어 갔고, 한국이 세계경제의 일부분으로 편입됨에 따라 세계경제의 변화에 따라 한국도 큰 영향을 받게 됐다. 정부는 수출 기업체에게 금융지원, 면세혜택을 주어 독점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에 드는 비용이 모두 국민의 세금으로 메워졌기 때문에, 결국 노동자와 농민의 희생으로 재벌을 키운 셈이었다. 한국 기업들이 외국과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은 값싼 임금비용을 더 줄여서 가격 경쟁력을 가지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자의 임금은 매우 낮은 수준에서 유지되었고, 어디에서나 장시간의 고된 노동이 강요되었다. 노동법은 법전 속에 있을 뿐이었다.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환경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은 침묵하지만은 않았다. 1970년 165건이던 노동쟁의가 1971년에는 1656건으로 10배나 늘어났다. 1970년 11월의 전태일 열사 분신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971년 8월에는 도시 빈민들의 분노가 광주대단지사건으로 폭발하였다. 노동자와 민중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서 박정희 정부는 1971년 12월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하고, 1972년 10월 유신체제를 선포해 광폭한 군사독재를 한층 강화했다. 모든 민주화운동과 노동자운동은 사실상 금지되었다. 특히 외국자본의 한국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서 1970년 제정된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으로 외자기업에서 노동자의 기본권이 제한되었다. 1971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노동3권 중 단체행동권과 단체 교섭권이 전면적으로 제한됐다. 1979년 박정희의 암살로 유신체제가 막을 내렸지만 노동운동의 조건은 개선되지 않았다. 1980년 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 세력이 권력 장악을 시도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원 민주화, 병영집체훈련제도 폐지, 계엄령 해제, 언론자유 보장을 내건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사이 노동자의 쟁의도 급속하게 확대되고 격화되어갔다. 그러나 신군부는 5.17 계엄확대 이후 노동운동을 또다시 처참하게 짓밟았다. 신군부는 한국노총의 민주파를 제압하기 위해서 8월 21일 산별위원장 12명 사퇴, 지역지부 폐지를 골자로 한 ‘노동조합 정화지침’을 시행했다. 급기야 1980년 마지막 날 신군부는 기업별노조로의 전환, 제3자 개입 금지를 골자로 노동법을 개악했다. 김경숙과 YH 여성노동자들의 투쟁 1970년대 장시간의 노동과 생명을 위협하는 작업조건 속에서 최저생계비에 턱없이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일했던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저항했다. 1970년 11월 청계피복 노조가 결성되었고 1973년 신진자동차(나중에 대우가 인수), 원풍모방, 아세아자동차에서 노조 결성되었다. 한국모방 노조 민주화와 임단협 체결 투쟁, 동일방직 노조의 민주노조 사수 투쟁 등이 벌어졌다. YH노조의 김경숙(1958~1979)은 어린 나이부터 공장에서 일했다. 김경숙이 8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는 날품팔이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다. 김경숙은 겨우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졸업 전부터 공장에서 일을 해야 했다. 그녀는 ‘내가 못한 공부를 동생에게 가르쳐서 동생만은 성공할 수 있도록 하자’고 다짐하며 고향을 등지고 타향살이를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에 하청공장에 취직해 코피가 그치는 날이 없을 정도로 고되게 일했지만 임금체불에 시달렸다. 김경숙은 여러 공장을 옮겨 다나며 당시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을 체험했다. 젊은 나이에 학업을 이어가지 못하고 공장에서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하는 자신과 같은 어린 노동자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그녀는 몸은 병들더라도 마음은 상하지 않는 인간으로서 올바른 삶을 살자고 다짐하며 8년간 공장생활을 이어갔다. 김경숙은 1978년에 가발공장 YH무역에 입사했다. 임금이 조금 높았기 때문이다. 가발을 수출하는 YH무역은 노동자들에게 하루 16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강요했다. YH무역은 휴일도 없이 철야 노동을 강요하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물 마시는 것도 통제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경숙은 노동자의 지위와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이후 김경숙은 노조 대의원으로, 조직부 차장으로 선출되고 노조 소그룹의 장으로 활약했다. YH 노조는 민주노조를 건설한 후 잔업거부 운동과 일요일 연장 거부 투쟁으로 해고자 원직복직과 추석보너스를 타냈다. 또 노조는 부모 사망 시 5일간 주어지는 휴가를 여성노동자들에게 보장하지 않던 차별적인 관행을 개선했다. 김경숙은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노동자가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YH무역 경영진들은 노동조합의 힘이 커지자 회사 자금 빼돌린 후에 폐업 공고를 냈다. 이에 맞서 전 조합원이 폐업 반대 농성에 참여하며 5일 만에 정부와 사측으로부터 폐업철회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백일 만에 휴지조각이 됐다. 김경숙을 비롯한 조합원들은 1979년 8월 당시 야당이던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그녀들은 “공장폐쇄는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비인도적인 처사이고 몇 사람만을 위한 사기극”이라고 강조했다. 이들의 요구가 정치권을 비롯한 세간의 이목을 끌자, 투쟁이 확산될 것을 두려워한 경찰이 농성 이틀 만에 농성장에 난입했다. 김경숙은 경찰의 난입에 항의 하던 과정에서 완고하게 저항했다. 경찰의 진압 작전이 끝난 후 그녀는 건물 아래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경찰은 “김경숙은 작전개시 30분 전 스스로 투신했다”고 서둘러 사건을 수습했다. 그러나 30년 후, 김경숙의 사인은 경찰에 의한 타살로 밝혀졌다. 김경숙 열사의 짧은 삶은 ‘공순이’라고 무시당하며 ‘가족’과 ‘국가’의 이름 아래 고된 노동을 감내했던 여성노동자와 그녀들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영진과 구로공단 노동운동 신군부가 들어선 이후 1980년대에도 노동조합의 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1983년 정권의 유화조치 발표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은 더욱 고조됐다. 1980년대는 1970년대와는 달리 대공장 남성노동자가 운동의 전면에 등장하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민주노조 건설의 움직임이 특히 활발해졌다. 투쟁방식도 공장점거, 경찰과의 직접적인 대결로 발전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대우어패럴 간부 구속에 맞서 구로공단의 9개 노동조합이 7일간 폭발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박영진(1960~1986)은 구로동맹파업의 영향을 받고 구로지역 노동운동의 한복판에 서 있던 인물이었다. 가난한 소작농의 자식으로 태어난 박영진은 중학교 3년을 끝으로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와 행상을 하는 어머니 밑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박영진은 가난한 생계를 돕기 위해 신문팔이, 껌팔이, 구두닦이를 하며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다. 그는 1983년 시흥 소재의 마찌코바(영세작업장)에 취직해 노동자로서 삶을 시작했다. 평소 성실했던 박영진은 회사의 전화기 관리를 맡았다. 그러나 전화기를 담당한지 얼마 안 되어 전화요금이 10만 원이나 나왔고 사장은 책임을 물어 박영진의 월급에서 9만 원을 제해버렸다. 그가 전화국에 찾아가 시외전화 사용의 내막을 알아보니 대부분이 사장이 사용한 것이었다. 박용진은 결국 뺏긴 월급을 돌려받고 밀린 체불임금까지 받고 퇴사했다. 이 과정에서 박영진은 자본가의 교활하고 탐욕스런 속성과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1983년 초 배움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야학을 찾아간 박영진은 노동법과 노동운동, 노동자의 삶을 학습하면서 노동자의 현실을 체계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특히 전태일 열사의 삶을 듣고 198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1984년 구로에 있는 동일제강에 입사한 박영진은 노동자들에게 노동법을 알리며 그들을 조직했다. 친목회를 통해 노동법 교육팀을 꾸렸고 동료들의 믿음과 신뢰를 얻어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그러나 구청과 공권력은 합법적인 노조결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사측의 어용노조를 인정하고 민주노조의 서류는 반려시킨 것이다. 이후 박영진은 2개월 동안 구로지역 노동자들과 정치상황과 사상에 대해 학습한 후 1985년 악덕기업으로 소문난 신흥정밀(현 마이크로)에 취직했다. 이곳에서 박영진은 구로동맹파업을 목격하고 공동투쟁을 계획했으나 경찰과 사측의 공작으로 투쟁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1986년 3월 17일 박영진은 임금인상 파업을 주도하며 식당을 점거했다. 구사대와 경찰이 식당에 난입하고 박영진과 동료들을 옥상으로 올라가 투신과 분신을 경고하며 저항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살인적인 부당노동행위 철회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치며 분신했다. 경찰과 사측은 부모와 친척을 회유해 시신을 탈취하고 재빠르게 화장시켜 문제가 커지는 것을 막았다. 가난한 날품팔이의 영세업체 취직, 야학을 통한 의식화, 민주노조 건설,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진 박영진 열사의 삶은 1980년대 중반 구로공단 지역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대변한다. 성완희와 탄광 노동자들의 투쟁 성완희(1959~1988)는 1961년 아버지를 결핵으로, 어머니를 사고로 여의고 14살에 평화시장 봉제공장에 취직했다. 당시 평화시장에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의 여파가 남아있었다. 성완희는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들으면 노동자 의식을 조금씩 깨닫게 됐다. 1986년 10월 태백에 있는 강원탄광에 입사한 성완희는 막장광부로 일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물결은 강원도 탄광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해 7월 7일 어룡광업소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투쟁을 시작으로 16일 동해광업소, 18일 한보탄광 통보광업소, 26일 한성광업소 등 거의 모든 광업소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다. 성완희는 1987년 10월 강원탄광 파업에 앞장서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강원탄광 노동자들은 헌신적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 투쟁에 나선 성완희를 절대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그를 눈에 가시로 여겼던 강원탄광은 작업 중 다리를 다친 성완희를 무단결근으로 해고했다. 이에 맞서 동료 노동자들과 성완희는 복직을 요구하며 작업거부에 나섰다. 회사는 사태 무마를 위해 성완희를 조합원 자격이 없는 청원경찰로 복직시키고 동료들을 해고시키는 기만적인 작태를 보였다. 이러한 사측의 분열과 탄압에 대해 성완희와 해고노동자들은 강원탄광 우정회를 결성하고 강력한 복직투쟁을 전개했다. 노동부와 지노위에서 복직판정, 복직명령을 받았지만 사측은 이를 거부했다. 성완희는 노조사무실에서 동료들과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사측이 각목을 들고 들어오려고 하자 성완희는 온 몸에 휘발유를 뿌리며 “인권탄압 중단하라” “광산쟁이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라며 외치고 분신했다. 그는 화염에 휩싸여 아스팔트에 쓰러져서도 “강원탄광에 민주노조를 건설해 달라”고 부탁했다. 성완희의 분신 이후 태백, 도계, 고한, 사북 등 강원남부 탄광노동자들과 시민들은 열사의 유해를 모시고 장례투쟁을 전개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지역마다 민주노조 쟁취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조직적인 투쟁이 벌어졌다. 1989-90년 탄광 노동운동의 마지막 불꽃이 타올랐다. 열사들의 삶에 새겨진 1970-80년대 한국 노동운동 김경숙, 박영진, 성완희 열사의 삶은 1970-80년대 한국 노동자의 평범한 자화상일 수도 있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가족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서 일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가혹한 현실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측과 정권의 갖은 탄압을 겪으면서 노동자의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의 중요성을 깨닫고 노동조합의 결성과 투쟁에 자신의 온몸을 바쳤기 때문이다. YH노조 투쟁, 구로공단 노동운동, 강원도 탄광노동자들의 투쟁까지 열사들의 발자국은 민주노조운동 역사에 남아있다.
● 세계경제 1. 아시아지역에서의 중국효과 - 향후 전망 2. 대마불사를 둘러싼 논의들 - 대마불사와 관련된 주요 논점 - 대마불사 문제 완화를 위한 방안 ● 국제정세 - 특이사항 없음 ● 국내경제 1. 최근 국내경기의 제약요인과 정책과제 - 국내 경기 제약 요인 - 정책과제 2. 국내 가계부채, 대비책 필요하다 - 영국의 가계부채 급증과 경제 불안 현상 - 국내 가계부채 급증에 대한 시사점 3. 증가하는 가계부채 문제 ● 국내정세 1. 5+4협의의 전과정과 주요쟁점 - 시기별 흐름 - 주요 쟁점별 정리 ● 노동 1. 총연맹 - 민주노총 2010년 사업계획 확정 - 민주노총 임원 현장 순회 및 지방선거 대응 2. 금속 - 한진중공업 울산공장, 전 직원 전환배치 추진 - 현재자동차 전주공장 위원회의 정규/비정규 연대투쟁 - 금속노조 경주지역본부의 지역전면연대파업 - 캐리어 에러컨 지회, 광주노동청 앞 농성투쟁 3. 공공 - 공무원 노조 출범식 강행 4. 기타 - 새희망노동연대 출범 ● 여성 1. 낙태 관련 - 보건복지부 - 국회토론회 “낙태, 합법적 허용범위는?” - 일다 ‘낙태죄 폐지할 시기에 한국에서는 고발이라니...’ - 프로라이프 의사회
[기획] 3.8 여성의 날과 여성운동의 과제 2010년 여성운동의 과제 | 방민희 낙태 단속이 아니라 여성의 재생산권리를 이야기할 때다 | 최윤정
여성의 노동과 재생산 권리 쟁취를 위하여! 여성 고용과 일자리, 출산에 관한 사회적 관심이 급증하고 있다. 불안정한 여성 일자리와 저출산 문제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최근 그 심각성을 더하는 지표들이 잇따르고 있다. 올해 1월 여성실업자수와 실업률이 1999년 중반 이후 최악을 기록했으며(실업자 21만4천 명 증가, 실업률 76.2% 증가), 2009년 ‘세계인구현황보고서’에서 한국은 합계출산율 1.22명으로 세계 최저수준이다. 저출산-고령화의 심각성으로 인해 사회적 위기감이 조성되며 여성 문제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그러나 분석과 해결책 대부분이 정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관점 속에 다뤄지며, 오히려 여성에 대한 공격과 통제의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 2010년 정부는 ‘여성에게 적합한’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고용부문의 주요 과제라고 밝혔다. 부담 없이 경제활동에 참가할 수 있도록 기존의 일 가정 양립정책을 현실화하고, 안정적 양육을 위해 노동 시간을 줄이는 유연근무제(퍼플잡)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출산 장려 정책을 펴는 한편, 불법낙태 단속을 강화하여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보면 정부가 적극적으로 여성들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용은 오히려 정부와 자본의 필요에 따라 여성인력을 활용하면서도 저출산 현상을 극복하려는 것에 가깝다. 일과 가정을 모두 책임져야 한다는 강요 속에 더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려야 하고, 임신했을 경우에도 상황과 조건은 관계없이 무조건 아이를 낳아야 할 판이다. 여성의 일자리와 재생산 문제는 전체 민중의 일자리와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문제지만, 이명박 정부의 불도저식 탄압에 위축된 노동자운동은 적극적으로 맞불을 놓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서’ 라며 내놓은 정책들이 ‘누구’의 ‘어떤 위기’를 ‘어떤 기회’로 바꾼다는 것인지, 그 대안이 여성과 노동자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대응은 어때야 하는지에 대한 토론과 실천이 필요하다. 여성에게 가중되는 이중부담, 일ㆍ가정 양립 정책 여성이 일과 가정의 이중부담을 요구받아 온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경제위기와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 일자리를 유연화시켜 불안정하더라도 여성고용을 늘리고, 시간을 조정해 일과 가정의 책임을 다시 여성에게 내맡기고, 둘째, 여성의 몸과 재생산과정에 대한 통제와 개입을 확대하면서 출산율을 늘리겠다는 것이다. 여성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출혈적인 노동과 부담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삶이 설계되어도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런 국가와 자본의 요구가 일 가정 양립정책에 반영되어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정부의 일 가정 양립정책의 기조는 ‘출산과 보육지원’에서 ‘노동시간의 유연성 제공’으로 변화했다. 이는 세계적 추세로 최근 유럽에서는 단시간 노동을 포함해 노동시간 운용을 유연하게 할 수 있는 고용형태를 포함한 노동시간 재배치정책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국도 유연근무제, 파트타임, 초과노동의 활용 등 유연화된 노동 형태를 일 가정 균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확산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노동자가 자의로 타의로 직장에서 퇴출되는 것을 최소화하는 대신 더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리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여성의 교육기회가 확대되고 경제활동참가율이 증가하면서 결혼 이후에도 계속 취업하는 여성이 늘어났다. 일하면서 가정을 돌볼 수 있는 지원과 제도 마련은 여성의 요구가 되었다. 국가 차원에서도 여성을 직장으로 끌어내는 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서비스 유통 산업의 발달로 여성 인력 활용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정부와 자본의 이해관계 범위에서 여성의 요구는 1987년 남녀고용평등법 제정, 1991년 영유아보육법 제정 등으로 실현된다. 여성노동자들의 현실 조건을 간과함으로써 고용상의 평등과 영유아보육은 법 문구에 머물렀지만, 이때부터 여성의 일과 양육의 관계 문제가 등장했다. 1990년대 한국의 출산율이 급격하게 하락하고, 급기야 2005년 세계 최저출산율을 기록하며 일 가정 양립 논의는 새롭게 대두된다.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경제적 문제로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노동유연화가 추진되고 복지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여성의 이중부담을 ‘효과적’으로 조정하는 방식으로 일 가정 양립 논의가 이어진다. 현재에도 여전히 출산, 양육, 돌봄은 개별 가족 내에서 능력에 맞게 해결해야 할 일로 여겨지며, 그 역할을 하는 것이 엄마, 아내, 며느리, 할머니로 여성에게 일차적 책임이 있는 것은 변함없다. 즉 ‘여성이 직장을 그만두고 아이와 노인, 가정을 돌보느냐’와 ‘여성이 직장에 다니면서 아이와 노인 가정을 돌보느냐’의 두 가지 선택지만이 제시되어 왔다. 이렇게 여성이 경력단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원인에 대한 접근 없이 일 가정 양립은 여성이 처한 조건을 변화시킬 수 없다. 게다가 국가차원의 ‘우수인력’인 고학력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 재진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일 가정 양립 정책의 대상이 상대적으로 고임금의 안정적 일자리를 가진 여성에게 한정되었다. 일례로 산전후휴가나 육아휴직 의 제도적 기반은 어느 정도 갖춰진 편이고 그 제도를 활용하는 여성이 증가 추세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수의 여성 노동자는 고용보험 미가입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거나 승진과 인사에서의 불이익, 사업주의 눈치 등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이 대부분이지만 정부가 계속 일 가정 양립정책을 강조하는 것은, 유휴 여성인력을 값싸고 편리하게 이용하기 위해서다. 결국 정부는 일 가정 양립정책을 일하는 여성들의 요구라 포장하지만 대다수 여성의 현실을 반영하지 못할뿐더러, 여성이 저임금의 불안정한 일과 정부의 지원이 한계적인 상황에서의 가정을 모두 책임지게 사회적으로 강요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그리고 이런 강요는 최근 유연근무제 도입 추진의 배경과 정확히 부합한다. 유연근무제 도입이 낳을 문제점 지난 2월 18일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고용전략회의에서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원하고, 소수가 장시간 노동하는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유연근무제를 확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작년 말부터 여성부가 추진하겠다던 퍼플잡의 시행 계획을 대대적으로 공표한 것이다. 사무실에 출근하여 장시간 경직된 형태로 노동하던 것을 다양한 형태로 유연화하여, 노동자의 업무 효율성을 높이면서도 일과 가정생활을 양립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 정부안의 주요 내용이다. [표1] 5분야 9유형의 유연근무제 (표 생략. 첨부파일 참조.) 이명박 정부의 유연근무제의 도입, 여성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가? 이명박 정부의 유연근무제가 여성의 일자리 창출과 일 가정의 이중부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정부의 계획대로라면 일자리의 ‘수’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자리의 ‘질’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현재 대다수 여성이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에 종사하고 있으며, 정부가 2009년 경력단절여성을 지원코자 전국에 100여 개를 설립했던 여성새로일하기센터에서 창출된 일자리만 봐도 비숙련-저임금 일자리였다. 또 유연근무제를 적용할 업무를 비숙련의 분담 가능한 주변업무로 꼽고 있는 상황에서 여성 고용의 질적 향상은 전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남여 간의 임금격차는 여전히 크고, 여성의 빈곤과 저임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파트타임, 단시간 노동을 늘린다는 것은 오히려 여성의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뿐이다. 그렇다면 일 가정의 이중부담 해결의 문제는 어떠한가. 출산과 양육, 돌봄 노동이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는 현실, 이로 인해 집안일을 병행해야 하는 여성의 일은 부수적 소득이 되며 여성의 노동 자체가 평가 절하 받고 고용 조건도 하향한다는 현실, 개별 가구의 소득 수준에 따라 보육ㆍ교육ㆍ돌봄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는 범주가 달라진다는 현실이 바로 여성들이 겪는 문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런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의지는 없어 보인다. 출산과 양육, 가족 돌봄을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대신 사회서비스 시장을 활성화하고, 이를 수용하는 것은 개별 가정과 개별 여성의 능력에 맡기고 있다. 다만 어차피 여성이 가족 내에서 양육과 돌봄을 수행해야 하고, 일도 해야 하니 노동 시간을 줄이거나 유연화함으로써 일과 가정의 양립의 부담을 조율할 수 있게 ‘도와’줄 뿐이다. 결국 이명박 정부가 여성들에게 선심 쓰듯 내놓은 유연근무제는 여성의 역할과 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지 못할뿐더러 여성의 일자리를 더욱 불안정하게 할 것이다. 유연근무제가 전체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 유연근무제는 일차적으로 가사노동의 전담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하지만, 여성부에서 퍼플잡 도입을 밝혔을 당시부터 남성도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대상에 포함한다는 계획이었다. 유연한 일자리를 성별에 따른 실제 사용여부를 떠나 전체 노동자에게 적용하겠다는 함의가 중요하다. 정부가 추진하려는 유연근무제의 핵심은 현실의 노동자가 일과 가정을 양립하는 데 발생하는 어려움을 해소하기보다는 기존의 정규직 일자리를 쪼개 자릿수를 늘리는 데 있다. 또 노동시간과 장소는 유연화하되 시간활용도를 높여 집중적으로 생산량을 높이며, 노동통제를 통해 노동강도를 높이고자 한다. 정부가 말하는 생산성 제고와 고용 창출, 시간의 유연화의 의미는 한국의 단시간 노동 현황 속에 더욱 선명해진다. 세계적으로 단시간 노동이 늘어나는 추세고 한국 역시 단시간 노동 비율이 늘어나고 있다. 단시간 노동 확대를 주장하는 많은 연구자들이 단시간 노동을 열악한 일자리의 비정규직과 동일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2007년 기준 단시간 노동 형태를 보면 대다수의 단시간 노동은 단순노무, 숙박 및 음식업, 서비스업 등 비숙련-저임금 직종에서 비자발적으로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단시간 노동자의 70.2%가 여성으로 평균 53.1만 원의 임금을 받는다. 한편 최근 취업포털 인쿠르트가 직장인 1,07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다섯 명 중 한 명이 직장일 외 부업을 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직장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생활비 부족과 수입 감소로 부업을 할 수밖에 없는 투잡족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통계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임시직, 일용직의 경우 더욱 심각한 상황임을 예측해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정부는 단시간 노동자와 유연한 일자리를 더 만들겠다는 것이다. 공무원 시범시행은 본격적인 공공부문 구조조정의 신호탄 경력단절로 인한 여성인력(특히 고학력 여성)의 손실을 막고, 일자리 나누기를 통해 고용을 창출하겠다는 정부의 두 마리 토끼 잡기, 유연근무제는 올 하반기에 공무원부터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현재 여성 공무원들에게 유연근무제를 비롯한 일 가정 양립 정책이 시급한 것이 아니다. 공무원은 상대적으로 모성보호관련 법, 제도가 잘 구축되어 있는 편이다. 오히려 주변 분위기나 경력 유지의 문제로 제도가 갖춰져 있음에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이런 상황에 비추어보면 여성 공무원들에게 선심 쓰듯 내놓은 유연근무제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어 보인다. 정부는 먼저 「유연근무제 활성화 기본계획」을 마련하고, 여론수렴과 시범실시 등을 거쳐 확정한 뒤, 하반기부터 전 중앙행정기관과 지방자치단체에서 전면 시행에 들어갈 방침이다. 이를 이용해 공공부문의 방만한 경영을 타파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공공부문 구조조정, 공무원 노조 무력화가 손쉬워진다. 유연근무제 도입을 일 가정 양립에 적합한 고용형태 발굴과 일자리 늘리기란 말로 포장해 저항을 줄이면서 구조조정에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 결국 이명박 정부의 유연근무제도는 공무원들에게 일과 가정을 양립하게 해 준다는 빌미로 공공부문 일자리를 대폭 유연화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는 공공부문에서 노동조건과 고용의 질을 악화시키고 전체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낙태처벌과 출산강요.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어디에 저출산-고령화의 위기감에 대한 강조가 유연근무제처럼 여성과 전체 노동자에 대한 공격으로 다가오는 한편, 여성의 몸과 재생산 과정에 대한 통제와 개입으로도 드러나고 있다. 최근 보건복지부는 <불법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한 사회적 협의체>를 발족할 예정으로 의료계, 시민단체, 자선단체와 간담회를 진행했다. 보건복지부가 나서서 낙태예방 사회협의체라는 이름으로 논의를 시작한 것은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기인한다. 첫째,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심각해지며 여성의 출산에 국가가 직접적으로 관리, 통제에 나서고 있다. 둘째, 작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낙태고발운동을 시작한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보건복지부에 대한 압력이 작용했다. 대다수 사람들이 의아해할 정도로 급작스럽게 진행되고 있는 낙태에 대한 관심과 고발, 처벌 조치가 한국사회에 여성의 권리와 사회적 윤리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형성해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부정적이다. 프로라이프(pro-life)의사회의 낙태고발 운동 작년 <진정으로 산부인과를 사랑하는 의사들의 모임>이 시작한 낙태근절 선언운동을 광범위하게 확대한다는 취지로 프로라이프 의사회가 작년 12월에 발족했다. 이들의 주요 활동은 낙태 시술을 하는 병원에 대한 제보를 받고 고발하는 것, 정부에 대해 낙태 근절을 위한 처벌 강화를 촉구하는 것이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지난 2월 3일 낙태 시술 병원 세 곳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으며, 전국의 산부인과에 불법낙태시술 중단 촉구 경고 공문을 발송하고, 정부에게 5대 정책과제를 제시했다. 이러한 활동에 예상치 못한 파급효과가 발생하고 있다. 대다수 산부인과들은 고발을 우려하며 낙태시술을 중단하고 있고, 걸려오는 상담전화조차 피하고 있다. 각 포털 사이트의 질문 게시판에는 원하지 않게 임신을 했는데 요즘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산부인과에서 낙태수술을 받을 수 없다며 가능한 병원을 알려달라는 질문이 쏟아지고 있다.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낙태가 금지되어 있는 한국의 현행법상 많은 여성들이 원하지 않거나,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아이를 낳아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하루에 1000건이 넘는 ‘낙태공화국’의 오명을 벗어야 한다는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고발 운동은 하루에 1000여 명의 여성을 공포에 빠뜨리고 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그 이후 양육까지 재생산을 둘러싼 일련의 경험과 과정은 여성의 삶을 구성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이 출산을 결정할 때에는 자신의 육체적 심리적 상태와 출산, 양육, 직장, 사회적 관계 등을 모두 고려한다. 한편 여성의 출산과 재생산노동은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친다. 최근 저출산 문제나 일 가정 양립의 필요성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는 것이 일례다. 여성의 몸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이 개인과 가족, 사회에 대단히 중요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출산과 낙태, 재생산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없었다. 서구에서처럼 페미니즘 운동이 확장되거나 논쟁이 크게 일어난 적도 없어 낙태를 여성의 권리로 제기하는 운동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그렇다 보니 여성의 삶을 구성하는 재생산에 관한 문제는 개별 여성의 선택과 책임으로 넘겨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낙태를 고민하는 여성에게 ‘사랑으로 낳으세요. 태아의 생명은 소중하니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와도 어쩔 수 없이 전전긍긍하며 음성적 낙태나 다른 방안을 찾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낙태 불법화와 단속 처벌의 강화가 아닌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낙태를 불법화하고 단속과 처벌을 강화할 경우, 일명 낙태선박과 같은 것을 필요로 하는 여성이 늘어나게 될 수도 있다. 네덜란드의 낙태옹호단체 <위민온웨이브즈(Women on Waves)>는 낙태가 금지된 나라들을 찾아가 낙태선박에 여성을 태우고 공해에서 약물을 이용하여 낙태시술을 한다. 2001년부터 아일랜드, 포르투갈, 폴란드를 찾아가며 시작된 이들의 낙태선박은 아일랜드에 처음 갔을 당시 여성 200여명으로부터 ‘제발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한다. 이 단체의 대표 레베카 곰퍼러츠는 낙태를 반대하는 사람일지라도 인생에 한번쯤 ‘어쩔수 없는 때’가 있을지 모른다며, 그런 상황에 처한 여성의 결정권을 돕는 것이 자신의 목적이라고 말했다. 낙태선박 사례는 낙태를 철저히 금지하는 국가의 경우 낙태가 줄어들기 보다는 음성적으로 낙태시술을 하는 여성이 늘어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많은 연구에서 우려하고 있듯 낙태시술이 음성화되면 음성화될수록 산모의 건강이 위험하고, 생명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실제로 국제가족계획연맹(IPPF)은 해마다 7만 명이 불법 낙태로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산한다. 출산과 낙태는 여성의 신체적 심리적인 경험에 각인될 수밖에 없는 성질의 것이다. 특히 낙태의 경우 여성에게 신체적, 정신적 손상을 남기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따라서 태아와 산모의 생명을 배치되는 것으로 놓고, 낙태를 선택한 여성에게 태아의 생명을 운운하며 비난할 수 없다. 낙태의 음성화는 단순히 낙태 처벌을 강화할 경우 발생할 안 좋은 예가 아니다. 낙태의 음성화로 인해 여성의 권리가 축소되고 제한될 것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문제다. 낙태를 죄로 간주하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육체에서 자유로운 남성에 비해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성적 행위는 제한되고, 반면 책임은 온전히 여성 개인의 몫이 된다. 또 임신과 출산, 양육 등 재생산 과정을 여성 스스로 통제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은 여성의 권리를 제기할 수조차 없게 만든다. 즉 여성의 역할을 가족 내에 한정지은 사회적 인식과 구조에 맞서 싸울 수 없게 함으로써 여성들을 무기력하게 한다. 따라서 여성의 권리와 태아의 생명을 대립시키면서 하나를 선택하라는 강요가 아니라 출산과 재생산, 자신의 삶을 설계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 측면에서 낙태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 이미 한국 사회에서 낙태가 불법화되어 있음에도 낙태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즉 여성에게 원치 않는 성관계를 하지 않을 권리와 피임할 권리가 주어져 있는지, 여성이 출산을 강요당하는 것이 아니라 권리로써 주어져 있는지, 현재의 성규범과 결혼제도 속에서 미혼여성에게 출산이 가능한지, 기혼 여성일지라도 아이를 낳았을 경우 양육과 돌봄에 대해 사회적 지원은 어떠하고 자신의 삶을 구성해 갈 여건이 되는지에 대한 반문이 필요하다. 2010년 여성의 요구: 유연근무제 도입 반대와 재생산의 권리 쟁취 위기에 대한 접근과 해석, 대안이 정부와 자본의 관점이 아닌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쓰여야 한다. 신자유주의 하 저출산-고령화의 위기는 여성이 아이를 낳지 않아 국가 전반이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다. 경제위기가 만성화되면서 국가가 더 이상 실업을 해결하고, 고용을 안정화하며, 재생산 구조를 담보할 수 없는 무능력함에 빠진 것이 문제의 실체다. 그리고 국가가 이런 위기를 신자유주의 노동의 유연화와 여성의 재생산 권리에 대한 통제를 통해 은폐하고 지연하고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위기는 더 이상 지연될 수 없다. 이미 많은 여성들이 일을 하고 있음에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며, 아이의 출산, 양육과 교육을 위해서 빚을 져야 하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아이를 낳고 싶어도 쉽게 선택할 수 없다. 정부의 위기 지연을 위한 대안들이 여성에게 해답을 줄 수 없음은 자명하다. 여성이 가족 내 역할을 강요받고, 불안정 노동과 빈곤으로 내몰리고, 출산을 강요받지만 출산을 선택할 수 없는 여건이 악순환 되는 상황에서 악순환의 목록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새 판을 짜야 한다. 첫째, 여성을 비롯한 전체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유연근무제 도입을 막아야 한다. 이에 노동자들이 주체적으로 유연근무제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 필요한 것은 해고의 불안에 시달리지 않는 안정된 일자리다. 또 인간답게 살기위해 장시간 노동이 철폐되고 최저임금이 인상되어야 한다. 둘째, 여성에게 일과 가정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이중부담을 무한대로 감내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돌봄과 양육의 사회적 책임을 강화시켜야 한다.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사회서비스를 시장화하고, 지불 능력에 따라 서비스의 질이 달리 제공되는 것에 반대해야 한다. 돌봄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제고를 위해서는 돌봄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고 고용의 질을 높이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낙태 단속과 처벌 강화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구성하고자 하는 여성이 가져야할 인간의 권리는 국가나 자본, 사회적 간섭과 통제 속에 실현될 수 없다. 여성이 출산과 모성을 선택하거나 거부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어야 하고, 출산이 자신의 행복과 대립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현실의 조건이 이를 뒷받침해주는 사회적 인식, 구조가 필요하다. 현재 국가와 자본의 공격 속도에 비해 대응은 미미하다. 각개 고립, 분산적으로 부딪치다 깨지는 것이 아니라 전국적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운동이 약한 상황에서 경제위기와 저출산-고령화 현상이 심화되면 될수록 여성에 대한 폭력과 공격이 거세질 것이다. 신자유주의 개혁 세력의 공세 속에, 보수집단의 공격 속에 전전긍긍하다 끔찍한 폭력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서 다시금 여성의 노동에 대한 권리,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고 이것이 전체 노동자민중의 권리를 지켜내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2010년 한 해 여성 노동권 쟁취, 여성 재생산 권리 쟁취를 위하여 여성의 현실에 대한 폭로, 토론과 교육, 투쟁을 멈춤 없이 이어가자.
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반대운동과 이명박 정부의 저출산 정책에 반대한다 산부인과 불법 낙태 근절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프로라이프의사회는 2월 3일, 불법 낙태혐의가 포착된 병원 세 곳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다음 날 서울중앙지검은 프로라이프의사회가 고발한 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2008년 12월에 출범한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사랑하는 산부인과의사들 모임)는 2009년 10월 낙태근절운동을 개시하면서 12월 초 타과 의사와 일반인도 참여하는 낙태근절운동본부를 설립하고 12월 말에는 프로라이프의사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들은 태아 생명 보호를 모토로 걸고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과 출산, 육아를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는 낙태시술을 하지 않고도 걱정없이 소신껏 병원운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료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낙태근절운동을 벌이고 있다. 프로라이프의사회는 올해 1월 1일부터 낙태 시술 병원을 제보받기 시작했으며 정부 또한 불법 낙태 시술 의료기관에 대해서 강력한 단속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작년 11월 말 대통령 직속기관인 미래기획위원회의 ‘제1차 저출산대응전략회의’에 참석하여 낙태 문제 해결을 촉구했으며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낙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전재희 복지부 장관도 앞으로 낙태를 단속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최근의 낙태 고발과 이에 대한 적극적 수사는 프로라이프의사회의 강력한 의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몸과 출산을 여성이 말하지 못하는 현실 그런데 문제는 태아의 생명 존중이라는 슬로건에 여성의 존재는 삭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낙태근절 운동에서 여성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설계하는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아이 낳는 기계’이거나 원치 않는 임신 시 생명을 빼앗는 범죄자, 살인자로 등장하고 있다. 여성들이 현재 처한 현실에서 그녀들의 필요와 요구에 봉사해야 할 의사들이 무슨 권리로 여성들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임신과 출산에 대해 통제하려 하는가. 여성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는 귀를 막은 채 의사들은 지식과 권위를 남용하며 여성들의 삶에 대한 선택과 권리에 메스를 들이대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국가는 ‘저출산 대책’을 빙자하여 낙태반대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필요한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상황과 요구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낙태=범죄’, ‘낙태=살인’이라는 구도 하에서는 여성들이 왜 낙태를 하게 되는지,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성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여성이 아무리 낙태를 둘러싼 자신의 얘기를 하더라도 ‘범죄, 살인의 경위’를 설명하는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 자체가 여성들에게 매우 폭력적이다. 진정 낙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면 생명을 잉태하는 주체로서의 여성, 낙태를 결정하는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때서야 낙태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그 공간에서 비로소 우리는 낙태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권리로서 여성의 재생산과 그 권리가 보장되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현재는 권리라는 쟁점 자체가 들어설 수 없는 상황이다. 여성들의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우선 그 권리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지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프로라이프의사회와 정부는 낙태 단속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미국의 신보수주의, 한국의 프로라이프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출산을 장려하고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자는 구호 아래 진행되는 낙태 근절 운동은 미국의 신보수주의 운동과 내용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1973년 미 연방대법원은 ‘로우 대 웨이드’ 사건에서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결정하는 것은 미국인의 사생활 권리에 속한다는 논리에 근거해 낙태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낙태를 합법화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에 처음 나타난 친가족 운동은 페미니즘에 의해 이미 획득된 낙태권을 문제 삼으면서 이를 제한하려는 프로라이프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낙태권에 대한 공격을 시발점으로 가족, 성욕, 재생산에 대하여 페미니즘이 정치화했던 의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친가족 운동은 레이건, 부시 시대에 대중적인 토대를 확립하였고 영국의 대처 정부도 이런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미국에서 친가족 운동으로 결집한 우파는 공화당의 정책을 반페미니즘, 반동성애, 반낙태로 전환시켰다. 클린턴은 1992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친가족 정책에 반대했지만 선거 이후 클린턴 역시 가족의 가치를 옹호했다. 영국의 블레어 수상 또한 가족을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공언하였다. 이러한 친가족적 흐름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약화되는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개별 가족에 전가하려는 흐름에 다름 아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사회적 안정은 행복한 가족에 달려있고 가족의 행복은 자기희생적인 여성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의 슬로건을 내걸고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는 1997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실질 가족임금 삭감, 여성노동의 주변화(저임금의 불안정한 노동), 가사, 양육노동의 여성 전가로 여성의 출혈판매가 강요되었다. 이는 출산율 저하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더해 ‘프로라이프’ 운동은 당장 아이까지 더 낳으라고 하고 있다. 미국의 친가족 정책이든 한국의 프로라이프 운동이든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적 위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여성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은 동일하다. 국가 인구조절 정책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몸 이제까지 국가가 낙태를 용인하다가 이제와서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여성의 재생산을 인구조절 정책의 대상이자 도구라는 관점을 견지한 채 인구조절정책을 출산억제에서 출산장려로 기조를 전환한 것이다. 여성이 출산을 할지 말지 결정할 권리는 국가정책에 종속되었으며 여성의 몸은 국가의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인구가 많으면 피임을 위한 난관수술이나 자궁 내 장치로, 인구가 적으면 ‘강제적 임신과 출산’으로 국가의 개입과 규제의 대상이 되어왔다. 낙태의 법적 지위는(명문상 의미 뿐 아니라 실질적 의미를 포함해서) 국가의 출산정책과 조우해왔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지배하에 일본 형법이 들어오면서 1912년 낙태에 대한 처벌 규정이 처음 생기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형법은 기독교 윤리관에 기초한 19세기 근대국가의 형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47년 해방 직후 산아제한 분위기와 전쟁 후 인구증가가 공익이라는 생각이 공존하면서 낙태죄를 유지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 있다가 1953년 해방 이후 최초 형법에 낙태죄가 유지되었다. 1961년에는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가족계획이 처음 채택되었다. 국가는 가족계획사업 10개년 계획 하에 인구증가율을 감소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가족계획에 대한 지도와 교육사업 및 지원사업을 실시했다. 국민들이 이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인구증가 억제에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1962년 이래 낙태 시술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정부는 인구증가 억제를 위해 ‘월경조절술’이라는 이름으로 낙태 시술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로써 한국에서 낙태 시술이 크게 성행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가족계획사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낙태의 일부합법화를 시도하는데 1973년 모자보건법은 동법 제8조에서 낙태시술 허용사유를 확대하면서 법적 완화가 이루어진다. 이후 정부는 1976년, 1982년, 1985년 합법적인 인공임신중절 사유를 확장하려고 하지만 종교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이를 추진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출산율은 1960년 6.0명이던 것이 1970년에는 4.53, 1983년에는 인구대치수준인 2.1명으로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80년대 후반 피임도구의 무료공급을 중지하였고 1996년 출산억제정책을 인구자질 향상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1999년 출산율은 1.5명, 2001년에는 1.30명, 2002년 1.17명으로 더욱 낮아졌다. 정부는 2003년 보건복지부 주도하에 저출산·고령사회 대책안을 서둘러 마련하였고, 2005년, 2006년에 걸쳐 저출산, 고령화에 대응하는 정책들이 생산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에 세운 대통령직속기관인 미래기획위원회는 작년 11월 저출산 종합대책으로 불법 낙태 단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 변화를 보면 낙태의 문제가 태아의 생명존중을 위해 일관되게 제기되었다기 보다는 인구조절의 맥락에 따라 출산억제정책 시에는 묵인했다가 출산장려정책 시에는 처벌을 강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출산정책은 변해왔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출산정책 속에 여성의 재생산권리는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의 인구조절정책은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을 관리하기 위해 여성의 재생산을 통제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한국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노동력의 양적, 질적 관리를 위해 여성의 몸은 수도꼭지 조절하듯 피임 아니면 임신을 강요받았다. 사상 초유의 출산율 저하는 노동자들이 더 낮은 임금, 더 긴 노동시간, 더 힘든 노동강도를 향해 밑바닥으로 출혈경쟁을 해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을 무시한 채 국가와 사회는 여성의 몸을 착취하면서 더 강력하게 노동력 재생산 관리를 시도하려 하고 있다. 낙태의 음성화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세계보건기구는 낙태합법화 여부보다는 성교육의 부재, 피임법에 대한 무지, 부성애 결핍, 통합적 건강보호체계의 미비 등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이 낙태시술 빈도를 높이는 주요 요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나라 여성의 연간 낙태율은 이는 1000명당 평균 29.8명으로 미국(21.1명)이나 영국(17.8명)보다 높지만 미국이나 영국은 한국보다 더 포괄적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또 카톨릭 전통이 강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낙태를 다른 대륙보다 엄격하게 처벌하고 현재까지도 사회적 금기로 여기지만 유럽이나 미국 등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들보다 낙태시술 빈도가 오히려 더 높다. 더군다나 낙태가 불법화된 국가들의 경우 다른 나라로 가서 낙태 시술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낙태 빈도가 낮다고 해서 믿을 만한 것도 아니다. 낙태 접근권을 제한하는 것은 낙태를 줄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미 낙태시술을 원하는 여성이 시술병원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출산을 택하지 않는 여성들은 낙태시술을 하기 위해 더욱 음성화된 경로를 찾아 위험한 시술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루마니아에서는 낙태가 불법화되기 시작한 1965년부터 1984년까지 100,000건의 출산 당 모성사망률이 21건에서 128건으로 증가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낙태가 합법화되면서 1970~1976년 사이 5,000건의 낙태 당 사망률이 30에서 5로 줄었다. 낙태의 법적 지위는 여성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명문상 낙태가 불법이지만 고발이나 처벌이 드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합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167개국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낙태의 법적 허용범위가 1) ‘여성의 생명이 위급할 때만’ 2) ‘1의 경우 + 여성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해로울 때’ 3) ‘2의 경우 + 강간이나 근친상간일 경우’까지인 경우 안전하지 않은 낙태는 여성 1000명 당 23~25건이었고 낙태 허용범위가 4) ‘3의 경우 + 태아 기형인 경우‘인 경우 10으로 감소했고 5) ‘4의 경우 +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6) ‘5의 경우 + 산모의 요청에 따라’인 경우에는 0~2건으로 급감했다. 또 165개국을 대상으로 했을 때 낙태 시술로 인한 산모 사망은 낙태 허용 범위가 1, 2, 3, 4인 경우 각각 10만 건의 출산 당 각각 34, 55, 30, 10을 나타냈고 낙태허용범위가 5) 사회경제적 요인, 6) 여성의 요청에 따라 확대되었을 경우 낙태시술로 인한 모성사망은 각각 0, 1로 감소했다. 낙태 시술 자체는 훈련된 전문인에 의해 시행되었을 때는 비교적 안전한 시술이지만 훈련된 전문가에 의한 시술일지라도 합병증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음성적으로 비전문인이 임의로 시행할 경우 합병증은 매우 심각할 수 있다. 낙태는 다량의 출혈이나 쇼크, 자궁 내 감염, 불임 등을 야기할 수 있으며 질 열상, 자궁 천공 등의 생식기 손상 뿐 아니라 방광이나 장에 손상을 줄 수도 있다. 낙태시술을 하는 의료기관, 의료인에 대한 단속과 처벌이 강화되면 여성들의 낙태접근권은 심각한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억지로, 고통스럽게 지속하거나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목숨을 거는 경우는 주로 안전한 시술을 위해 고비용을 부담하거나 외국으로 원정 낙태를 갈 수 없는 빈곤여성들이 될 것이다. 일례로 멕시코 페미니스트들은 공공연히 “부유층 여성들은 낙태하고 빈곤층 여성들은 죽는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부유층 여성들은 비밀스런 낙태나 외국에서의 낙태에 고비용을 들여 사회적 금기를 비껴갈 수 있는 반면 빈곤층 여서들은 위험한 자가 인공낙태를 시도함으로써 출혈이 발생해 사망에 이르는 것을 비유한 것이었다. 권리로서의 여성의 재생산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근절운동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들은 낙태 근절을 위해 미혼모와 사생아, 기형아와 장애아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 제거, 공공 및 사설 보육시설의 확충, 직장 내 임산부와 워킹맘에 대한 처우 개선, 청소년 임신의 경우 남성의 책임 문제, 대국민 성교육과 피임교육 및 낙태 폐해 교육, 생명경시 풍조와 개인주의 제고 등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모든 해결책은 ‘여성이 임신을 하면 무조건 출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 관련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고 여성은 임신되면 출산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모성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성을 누릴 권리 혹은 모성을 거부할 권리 피임을 아무리 철저히 하더라도 피임실패의 확률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임신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낙태에 대한 접근권은 반드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임신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성은(주로 이성관계) 여성에게 위험하고 두려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모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관계가 부정되는 조건에 놓이게 된다. 이것이 정확하게 낙태반대론의 결론이다(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 무서우면 정숙하게 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아이 낳을 생각 없으면 섹스하지 마라’ 내지는 ‘즐기는 여성은 당연히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여성에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역할을 강요하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의 맥락 하에 있다. 낙태접근권에 대한 제한은 따라서 여성의 몸에 대한 규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규제이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존재라는 규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러한 역할규정을 거부할 수 있다. 여성들은 모성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성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이때 성의 위험(성폭력, 임신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또한 성관계로부터 철수할 자유도 있다. 많은 여성들이 성을 즐기기 위해 남성과는 달리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많은 경우 원치 않는 성관계를 거부하지 못한다. 이는 곧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재생산 권리를 위한 조건으로서 피임 접근권과 양육서비스의 사회화 프로라이프의사회 뿐 아니라 국가정책연구기관이나 학자들도 낙태를 예방하기 위한 주요 방안으로 피임교육과 피임도구의 공급 그리고 출산과 양육을 지원하는 사회적 시스템 마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안의 목적이 ‘낙태를 근절하는 것’이 되어서는 여성들의 재생산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다양한 피임방법들에 대한 접근권은 낙태 근절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기 위한 도구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피임이 접근되지 않는다면 여성들의 피임은 도리어 남성의 욕구에 봉사하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낙태 합법화 또한 남성이 더 손쉽게 여성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이탈리아의 일부 여성운동의 입장이기도 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통제하기 위해 피임과 임신에 대한 지식과 자원을 제공하는 데 봉사해야지 프로라이프의사회처럼 여성들의 재생산권 자체를 통제해선 안 된다. 의사가 종교적 이유 등으로 낙태시술을 거부할 권리를 인정할 수 있지만 여성의 통제권이라는 전제하에서 피임이든 출산이든 여성의 고유한 권리는 사회적으로 안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또 여성들은 또한 어떤 방식으로 피임을 할 것인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콘돔의 피임 성공률은 현실적으로 70%밖에 되지 않지만 콘돔 사용에는 부작용이 거의 없다. 반면 피임 성공률이 95% 이상인 것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경구 피임약이나 자궁 내 장치등은 여러 가지 부작용이 많아 여성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여성들이 자신이 언제 어떻게 어머니가 될지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회적 체계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낙태를 근절하기 위해’ 사회적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라면 ‘여성들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출산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양육서비스를 사회화하는 것은 현재 여성들이 아이를 양육하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출산을 선택하기 어려운 것과 달리 여성이 원할 경우 출산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여성이 낙태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하자 낙태를 둘러싼 운동들은 대개 생명권(프로라이프) 대 선택권(프로초이스)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는 핵심적인 갈등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나 이 대립은 여성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태아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던 여성도 막상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거나 출산을 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임신을 하게 되었을 경우 낙태를 고려하게 되며 낙태를 하는 여성이 온전히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즉 낙태를 고려하는 여성에게 생명권과 선택권에 대한 고민은 중첩되어 나타나며 결과적으로 하나를 선택하게 될지라도 그 선택 자체가 부당한 경우가 많다. 노동이 불안정해지고 사회안전망이 무너지며 양육의 책임을 개인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이 태아의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는 쉽지 않다. 또 성관계는 결혼의 틀 밖에서 자유롭게 이뤄지면서 결혼의 틀을 벗어난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는 사회적 낙인이 있는 상황에서 미혼 여성이 태아의 생명에 대해 고민하기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에게 낙태는 지금 현실에서 절박한 것이다. 여성의 삶과 태아의 생명이 본질적으로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와 같이 출산과 양육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여성의 삶을 너무 힘들게 만드는 조건 자체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삶을 대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조건 자체가 완화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에게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을 하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어느 순간에는 태아의 존재가 여성 자신에게 대립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고민해야 할 지점은 그 대립을 최소한 하는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성 자신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충분한 숙고와 통제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 여성이 재생산권리를 갖는 것이 관건이다. 여성의 출산이 선택 가능한 것이 되는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고, 여성이 자신의 재생산권리에 대해 스스로 목소리 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태아에 대한 철학적, 윤리적 고민을 시작할 수 있으며 자신이 진정 어머니가 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성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78년 노르웨이에서 낙태의 허용 범위가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양육이 어려운 경우’에서 ‘여성이 요청할 경우’로 확대된 이후 여성들은 그 이전보다 ‘낙태를 선택하는데 더 많은 고민이 되고 더 선택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 노르웨이의 태아생명옹호론자들이 낙태의 허용범위를 그렇게까지 확대하면 여성들이 너무 쉽게 낙태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과는 정반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성들의 목소리로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 스스로 여성의 권리를 이해하고 쟁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들의 몸에 대한 통제권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사회구조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요구해야 한다. 안전하고 저렴한 낙태 시술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라! 의무가 아닌 권리로서 피임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라! 양육 서비스를 시장화하지 말고 공적으로 사회화하라! 여성의 재생산권 없는 저출산 정책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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