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라이프 의사회의 낙태반대운동과 이명박 정부의 저출산 정책에 반대한다 산부인과 불법 낙태 근절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프로라이프의사회는 2월 3일, 불법 낙태혐의가 포착된 병원 세 곳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다음 날 서울중앙지검은 프로라이프의사회가 고발한 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2008년 12월에 출범한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사랑하는 산부인과의사들 모임)는 2009년 10월 낙태근절운동을 개시하면서 12월 초 타과 의사와 일반인도 참여하는 낙태근절운동본부를 설립하고 12월 말에는 프로라이프의사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이들은 태아 생명 보호를 모토로 걸고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과 출산, 육아를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는 낙태시술을 하지 않고도 걱정없이 소신껏 병원운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료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낙태근절운동을 벌이고 있다. 프로라이프의사회는 올해 1월 1일부터 낙태 시술 병원을 제보받기 시작했으며 정부 또한 불법 낙태 시술 의료기관에 대해서 강력한 단속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작년 11월 말 대통령 직속기관인 미래기획위원회의 ‘제1차 저출산대응전략회의’에 참석하여 낙태 문제 해결을 촉구했으며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낙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전재희 복지부 장관도 앞으로 낙태를 단속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최근의 낙태 고발과 이에 대한 적극적 수사는 프로라이프의사회의 강력한 의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몸과 출산을 여성이 말하지 못하는 현실 그런데 문제는 태아의 생명 존중이라는 슬로건에 여성의 존재는 삭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낙태근절 운동에서 여성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설계하는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아이 낳는 기계’이거나 원치 않는 임신 시 생명을 빼앗는 범죄자, 살인자로 등장하고 있다. 여성들이 현재 처한 현실에서 그녀들의 필요와 요구에 봉사해야 할 의사들이 무슨 권리로 여성들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임신과 출산에 대해 통제하려 하는가. 여성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는 귀를 막은 채 의사들은 지식과 권위를 남용하며 여성들의 삶에 대한 선택과 권리에 메스를 들이대려 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국가는 ‘저출산 대책’을 빙자하여 낙태반대 운동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필요한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상황과 요구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낙태=범죄’, ‘낙태=살인’이라는 구도 하에서는 여성들이 왜 낙태를 하게 되는지,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성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여성이 아무리 낙태를 둘러싼 자신의 얘기를 하더라도 ‘범죄, 살인의 경위’를 설명하는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 자체가 여성들에게 매우 폭력적이다. 진정 낙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면 생명을 잉태하는 주체로서의 여성, 낙태를 결정하는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때서야 낙태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그 공간에서 비로소 우리는 낙태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권리로서 여성의 재생산과 그 권리가 보장되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현재는 권리라는 쟁점 자체가 들어설 수 없는 상황이다. 여성들의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우선 그 권리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지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프로라이프의사회와 정부는 낙태 단속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미국의 신보수주의, 한국의 프로라이프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출산을 장려하고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자는 구호 아래 진행되는 낙태 근절 운동은 미국의 신보수주의 운동과 내용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1973년 미 연방대법원은 ‘로우 대 웨이드’ 사건에서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결정하는 것은 미국인의 사생활 권리에 속한다는 논리에 근거해 낙태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낙태를 합법화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에 처음 나타난 친가족 운동은 페미니즘에 의해 이미 획득된 낙태권을 문제 삼으면서 이를 제한하려는 프로라이프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낙태권에 대한 공격을 시발점으로 가족, 성욕, 재생산에 대하여 페미니즘이 정치화했던 의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친가족 운동은 레이건, 부시 시대에 대중적인 토대를 확립하였고 영국의 대처 정부도 이런 방향으로 수렴되었다. 미국에서 친가족 운동으로 결집한 우파는 공화당의 정책을 반페미니즘, 반동성애, 반낙태로 전환시켰다. 클린턴은 1992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친가족 정책에 반대했지만 선거 이후 클린턴 역시 가족의 가치를 옹호했다. 영국의 블레어 수상 또한 가족을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공언하였다. 이러한 친가족적 흐름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약화되는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개별 가족에 전가하려는 흐름에 다름 아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사회적 안정은 행복한 가족에 달려있고 가족의 행복은 자기희생적인 여성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의 슬로건을 내걸고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는 1997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실질 가족임금 삭감, 여성노동의 주변화(저임금의 불안정한 노동), 가사, 양육노동의 여성 전가로 여성의 출혈판매가 강요되었다. 이는 출산율 저하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더해 ‘프로라이프’ 운동은 당장 아이까지 더 낳으라고 하고 있다. 미국의 친가족 정책이든 한국의 프로라이프 운동이든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적 위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여성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은 동일하다. 국가 인구조절 정책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몸 이제까지 국가가 낙태를 용인하다가 이제와서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여성의 재생산을 인구조절 정책의 대상이자 도구라는 관점을 견지한 채 인구조절정책을 출산억제에서 출산장려로 기조를 전환한 것이다. 여성이 출산을 할지 말지 결정할 권리는 국가정책에 종속되었으며 여성의 몸은 국가의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인구가 많으면 피임을 위한 난관수술이나 자궁 내 장치로, 인구가 적으면 ‘강제적 임신과 출산’으로 국가의 개입과 규제의 대상이 되어왔다. 낙태의 법적 지위는(명문상 의미 뿐 아니라 실질적 의미를 포함해서) 국가의 출산정책과 조우해왔다. 한국에서는 일본의 지배하에 일본 형법이 들어오면서 1912년 낙태에 대한 처벌 규정이 처음 생기게 되었는데 당시 일본형법은 기독교 윤리관에 기초한 19세기 근대국가의 형법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47년 해방 직후 산아제한 분위기와 전쟁 후 인구증가가 공익이라는 생각이 공존하면서 낙태죄를 유지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 있다가 1953년 해방 이후 최초 형법에 낙태죄가 유지되었다. 1961년에는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가족계획이 처음 채택되었다. 국가는 가족계획사업 10개년 계획 하에 인구증가율을 감소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가족계획에 대한 지도와 교육사업 및 지원사업을 실시했다. 국민들이 이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인구증가 억제에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1962년 이래 낙태 시술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정부는 인구증가 억제를 위해 ‘월경조절술’이라는 이름으로 낙태 시술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로써 한국에서 낙태 시술이 크게 성행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가족계획사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낙태의 일부합법화를 시도하는데 1973년 모자보건법은 동법 제8조에서 낙태시술 허용사유를 확대하면서 법적 완화가 이루어진다. 이후 정부는 1976년, 1982년, 1985년 합법적인 인공임신중절 사유를 확장하려고 하지만 종교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이를 추진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출산율은 1960년 6.0명이던 것이 1970년에는 4.53, 1983년에는 인구대치수준인 2.1명으로 감소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1980년대 후반 피임도구의 무료공급을 중지하였고 1996년 출산억제정책을 인구자질 향상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1999년 출산율은 1.5명, 2001년에는 1.30명, 2002년 1.17명으로 더욱 낮아졌다. 정부는 2003년 보건복지부 주도하에 저출산·고령사회 대책안을 서둘러 마련하였고, 2005년, 2006년에 걸쳐 저출산, 고령화에 대응하는 정책들이 생산되었다. 이명박 정부가 2008년에 세운 대통령직속기관인 미래기획위원회는 작년 11월 저출산 종합대책으로 불법 낙태 단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런 정책 변화를 보면 낙태의 문제가 태아의 생명존중을 위해 일관되게 제기되었다기 보다는 인구조절의 맥락에 따라 출산억제정책 시에는 묵인했다가 출산장려정책 시에는 처벌을 강화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출산정책은 변해왔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출산정책 속에 여성의 재생산권리는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의 인구조절정책은 여성의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력 재생산을 관리하기 위해 여성의 재생산을 통제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한국 자본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노동력의 양적, 질적 관리를 위해 여성의 몸은 수도꼭지 조절하듯 피임 아니면 임신을 강요받았다. 사상 초유의 출산율 저하는 노동자들이 더 낮은 임금, 더 긴 노동시간, 더 힘든 노동강도를 향해 밑바닥으로 출혈경쟁을 해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무관하지 않다. 이것을 무시한 채 국가와 사회는 여성의 몸을 착취하면서 더 강력하게 노동력 재생산 관리를 시도하려 하고 있다. 낙태의 음성화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세계보건기구는 낙태합법화 여부보다는 성교육의 부재, 피임법에 대한 무지, 부성애 결핍, 통합적 건강보호체계의 미비 등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이 낙태시술 빈도를 높이는 주요 요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나라 여성의 연간 낙태율은 이는 1000명당 평균 29.8명으로 미국(21.1명)이나 영국(17.8명)보다 높지만 미국이나 영국은 한국보다 더 포괄적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또 카톨릭 전통이 강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낙태를 다른 대륙보다 엄격하게 처벌하고 현재까지도 사회적 금기로 여기지만 유럽이나 미국 등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들보다 낙태시술 빈도가 오히려 더 높다. 더군다나 낙태가 불법화된 국가들의 경우 다른 나라로 가서 낙태 시술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낙태 빈도가 낮다고 해서 믿을 만한 것도 아니다. 낙태 접근권을 제한하는 것은 낙태를 줄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미 낙태시술을 원하는 여성이 시술병원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출산을 택하지 않는 여성들은 낙태시술을 하기 위해 더욱 음성화된 경로를 찾아 위험한 시술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루마니아에서는 낙태가 불법화되기 시작한 1965년부터 1984년까지 100,000건의 출산 당 모성사망률이 21건에서 128건으로 증가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낙태가 합법화되면서 1970~1976년 사이 5,000건의 낙태 당 사망률이 30에서 5로 줄었다. 낙태의 법적 지위는 여성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명문상 낙태가 불법이지만 고발이나 처벌이 드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합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167개국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낙태의 법적 허용범위가 1) ‘여성의 생명이 위급할 때만’ 2) ‘1의 경우 + 여성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해로울 때’ 3) ‘2의 경우 + 강간이나 근친상간일 경우’까지인 경우 안전하지 않은 낙태는 여성 1000명 당 23~25건이었고 낙태 허용범위가 4) ‘3의 경우 + 태아 기형인 경우‘인 경우 10으로 감소했고 5) ‘4의 경우 +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6) ‘5의 경우 + 산모의 요청에 따라’인 경우에는 0~2건으로 급감했다. 또 165개국을 대상으로 했을 때 낙태 시술로 인한 산모 사망은 낙태 허용 범위가 1, 2, 3, 4인 경우 각각 10만 건의 출산 당 각각 34, 55, 30, 10을 나타냈고 낙태허용범위가 5) 사회경제적 요인, 6) 여성의 요청에 따라 확대되었을 경우 낙태시술로 인한 모성사망은 각각 0, 1로 감소했다. 낙태 시술 자체는 훈련된 전문인에 의해 시행되었을 때는 비교적 안전한 시술이지만 훈련된 전문가에 의한 시술일지라도 합병증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음성적으로 비전문인이 임의로 시행할 경우 합병증은 매우 심각할 수 있다. 낙태는 다량의 출혈이나 쇼크, 자궁 내 감염, 불임 등을 야기할 수 있으며 질 열상, 자궁 천공 등의 생식기 손상 뿐 아니라 방광이나 장에 손상을 줄 수도 있다. 낙태시술을 하는 의료기관, 의료인에 대한 단속과 처벌이 강화되면 여성들의 낙태접근권은 심각한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억지로, 고통스럽게 지속하거나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지 모른다. 그리고 목숨을 거는 경우는 주로 안전한 시술을 위해 고비용을 부담하거나 외국으로 원정 낙태를 갈 수 없는 빈곤여성들이 될 것이다. 일례로 멕시코 페미니스트들은 공공연히 “부유층 여성들은 낙태하고 빈곤층 여성들은 죽는다”는 말을 했는데 이 말은 부유층 여성들은 비밀스런 낙태나 외국에서의 낙태에 고비용을 들여 사회적 금기를 비껴갈 수 있는 반면 빈곤층 여서들은 위험한 자가 인공낙태를 시도함으로써 출혈이 발생해 사망에 이르는 것을 비유한 것이었다. 권리로서의 여성의 재생산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근절운동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들은 낙태 근절을 위해 미혼모와 사생아, 기형아와 장애아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 제거, 공공 및 사설 보육시설의 확충, 직장 내 임산부와 워킹맘에 대한 처우 개선, 청소년 임신의 경우 남성의 책임 문제, 대국민 성교육과 피임교육 및 낙태 폐해 교육, 생명경시 풍조와 개인주의 제고 등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모든 해결책은 ‘여성이 임신을 하면 무조건 출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 관련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고 여성은 임신되면 출산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모성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성을 누릴 권리 혹은 모성을 거부할 권리 피임을 아무리 철저히 하더라도 피임실패의 확률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임신을 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 낙태에 대한 접근권은 반드시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임신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성은(주로 이성관계) 여성에게 위험하고 두려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모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관계가 부정되는 조건에 놓이게 된다. 이것이 정확하게 낙태반대론의 결론이다(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정 무서우면 정숙하게 살면 된다’는 것이다. 즉 ‘아이 낳을 생각 없으면 섹스하지 마라’ 내지는 ‘즐기는 여성은 당연히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여성에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역할을 강요하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의 맥락 하에 있다. 낙태접근권에 대한 제한은 따라서 여성의 몸에 대한 규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규제이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존재라는 규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러한 역할규정을 거부할 수 있다. 여성들은 모성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성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이때 성의 위험(성폭력, 임신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또한 성관계로부터 철수할 자유도 있다. 많은 여성들이 성을 즐기기 위해 남성과는 달리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많은 경우 원치 않는 성관계를 거부하지 못한다. 이는 곧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재생산 권리를 위한 조건으로서 피임 접근권과 양육서비스의 사회화 프로라이프의사회 뿐 아니라 국가정책연구기관이나 학자들도 낙태를 예방하기 위한 주요 방안으로 피임교육과 피임도구의 공급 그리고 출산과 양육을 지원하는 사회적 시스템 마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안의 목적이 ‘낙태를 근절하는 것’이 되어서는 여성들의 재생산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다양한 피임방법들에 대한 접근권은 낙태 근절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기 위한 도구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피임이 접근되지 않는다면 여성들의 피임은 도리어 남성의 욕구에 봉사하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낙태 합법화 또한 남성이 더 손쉽게 여성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이탈리아의 일부 여성운동의 입장이기도 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통제하기 위해 피임과 임신에 대한 지식과 자원을 제공하는 데 봉사해야지 프로라이프의사회처럼 여성들의 재생산권 자체를 통제해선 안 된다. 의사가 종교적 이유 등으로 낙태시술을 거부할 권리를 인정할 수 있지만 여성의 통제권이라는 전제하에서 피임이든 출산이든 여성의 고유한 권리는 사회적으로 안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또 여성들은 또한 어떤 방식으로 피임을 할 것인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콘돔의 피임 성공률은 현실적으로 70%밖에 되지 않지만 콘돔 사용에는 부작용이 거의 없다. 반면 피임 성공률이 95% 이상인 것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경구 피임약이나 자궁 내 장치등은 여러 가지 부작용이 많아 여성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여성들이 자신이 언제 어떻게 어머니가 될지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회적 체계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 ‘낙태를 근절하기 위해’ 사회적 인프라를 갖추는 것이라면 ‘여성들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출산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양육서비스를 사회화하는 것은 현재 여성들이 아이를 양육하기 어려운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출산을 선택하기 어려운 것과 달리 여성이 원할 경우 출산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 여성이 낙태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하자 낙태를 둘러싼 운동들은 대개 생명권(프로라이프) 대 선택권(프로초이스)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이는 핵심적인 갈등을 나타내는 것이기는 하나 이 대립은 여성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 태아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던 여성도 막상 원하지 않은 임신을 하거나 출산을 하기 어려운 조건에서 임신을 하게 되었을 경우 낙태를 고려하게 되며 낙태를 하는 여성이 온전히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즉 낙태를 고려하는 여성에게 생명권과 선택권에 대한 고민은 중첩되어 나타나며 결과적으로 하나를 선택하게 될지라도 그 선택 자체가 부당한 경우가 많다. 노동이 불안정해지고 사회안전망이 무너지며 양육의 책임을 개인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이 태아의 생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는 쉽지 않다. 또 성관계는 결혼의 틀 밖에서 자유롭게 이뤄지면서 결혼의 틀을 벗어난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는 사회적 낙인이 있는 상황에서 미혼 여성이 태아의 생명에 대해 고민하기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에게 낙태는 지금 현실에서 절박한 것이다. 여성의 삶과 태아의 생명이 본질적으로 대립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와 같이 출산과 양육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여성의 삶을 너무 힘들게 만드는 조건 자체가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삶을 대립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물론 조건 자체가 완화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에게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을 하라고 강요할 수 없으며, 어느 순간에는 태아의 존재가 여성 자신에게 대립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오히려 고민해야 할 지점은 그 대립을 최소한 하는 것이며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여성 자신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 충분한 숙고와 통제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 여성이 재생산권리를 갖는 것이 관건이다. 여성의 출산이 선택 가능한 것이 되는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고, 여성이 자신의 재생산권리에 대해 스스로 목소리 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태아에 대한 철학적, 윤리적 고민을 시작할 수 있으며 자신이 진정 어머니가 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성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978년 노르웨이에서 낙태의 허용 범위가 ‘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양육이 어려운 경우’에서 ‘여성이 요청할 경우’로 확대된 이후 여성들은 그 이전보다 ‘낙태를 선택하는데 더 많은 고민이 되고 더 선택하기 어려워졌다’고 말한다. 이는 당시 노르웨이의 태아생명옹호론자들이 낙태의 허용범위를 그렇게까지 확대하면 여성들이 너무 쉽게 낙태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과는 정반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성들의 목소리로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 스스로 여성의 권리를 이해하고 쟁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여성들의 몸에 대한 통제권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사회구조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요구해야 한다. 안전하고 저렴한 낙태 시술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라! 의무가 아닌 권리로서 피임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라! 양육 서비스를 시장화하지 말고 공적으로 사회화하라! 여성의 재생산권 없는 저출산 정책 중단하라! [%=박스1%]
102주년 세계 여성의 날 소책자 2010년 3.8 투쟁의 날, 여성운동의 과제 세계 여성의 날 소개(콜론타이) [토론]낙태와 여성의 재생산 권리 [소개]세계여성행진
낙태 단속 처벌 중단하라! 산부인과 불법 낙태 근절 운동에 앞장서고 있는 프로라이프의사회는 2월 3일, 불법 낙태혐의가 포착된 병원 3곳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고발했다. 다음 날부터 서울중앙지검은 프로라이프의사회가 산부인과 3곳을 고발한 사건에 대해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2008년 12월에 출범한 진오비(진정으로 산부인과를 사랑하는 산부인과의사들 모임)는 2009년 10월 낙태근절운동을 개시하면서 12월 초 타과 의사와 일반인도 참여하는 낙태근절운동본부를 설립하고 12월 말에는 프로라이프의사회로 명칭을 바꿨다. 이들은 태아 생명 보호를 명분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임신과 출산, 육아를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할 수 있는 사회토양을 만들어 주어야 하며, 산부인과 의사들에게는 낙태시술을 하지 않고도 걱정없이 소신껏 병원운영을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의료환경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낙태근절운동을 벌이고 있다. 프로라이프의사회는 올해 1월 1일부터 낙태 시술 병원을 제보받기 시작했으며 정부 또한 불법 낙태 시술 의료기관에 대해서 강력한 단속을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프로라이프 의사회는 작년 11월 말 대통령 직속기관인 미래기획위원회의 ‘제1차 저출산대응전략회의’에 참석하여 낙태 문제 해결을 촉구했으며 이에 이명박 대통령은 낙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전재희 복지부 장관도 앞으로 낙태를 단속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최근의 낙태 고발과 이에 대한 적극적 수사는 프로라이프의사회의 강력한 의지와 이를 뒷받침하는 정부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여성의 몸과 출산을 여성이 말하지 못하는 현실 그런데 문제는 태아의 생명 존중이라는 담론 속에 여성의 존재는 삭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낙태근절 운동에서 여성은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설계하는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아이 낳는 기계’이거나 원치 않는 임신 시 생명을 빼앗는 범죄자, 살인자로 등장하고 있다. 여성들이 현재 처한 현실에서 그녀들의 필요와 요구에 봉사해야 할 의사들이 무슨 권리로 여성들의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임신과 출산에 대해 통제하려 하는가. 여성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는 귀를 가로막은 채 의사들은 권위를 남용하며 여성들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과 권리에 메스를 들이대고 있다. 정부는 ‘저출산 대책’을 빙자하여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현재 필요한 것은 여성들이 자신의 상황과 요구에 대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다. ‘낙태=범죄’, ‘낙태=살인’이라는 구도 하에서는 여성들이 왜 낙태를 하게 되는지,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여성들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여성이 아무리 낙태를 둘러싼 자신의 얘기를 하더라도 ‘범죄, 살인의 경위’를 설명하는 것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 자체가 여성들에게 매우 폭력적이다. 진정 낙태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려면 생명을 잉태하는 주체로서의 여성, 낙태를 결정하는 주체로서의 여성들이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때서야 낙태를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게 된다. 그 공간에서 비로소 우리는 낙태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권리로서의 여성의 재생산과 그 권리가 보장되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현재는 권리라는 쟁점 자체가 들어설 수 없는 상황이다. 여성들의 권리를 말하기 이전에 우선 그 권리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지형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프로라이프의사회는 낙태 단속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미국의 신보수주의, 한국의 프로라이프 저출산 고령화 시대에 출산을 장려하고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자는 구호 아래 진행되는 낙태 근절 운동은 미국의 신보수주의 운동과 내용적으로 매우 흡사하다. 1973년 미 연방대법원은 ‘로우 대 웨이드’ 사건에서 여성이 아이를 낳을지 결정하는 것은 미국인의 사생활 권리에 속한다는 논리에 근거해 낙태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고 판결을 내림으로써 낙태를 합법화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에 처음 나타난 친가족 운동은 페미니즘에 의해 이미 획득된 낙태권을 문제 삼으면서 이를 제한하려는 프로라이프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낙태권에 대한 공격을 시발점으로 가족, 성욕, 재생산에 대하여 페미니즘이 정치화했던 의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친가족 운동은 레이건, 부시 시대에 대중적인 토대를 확립하였고 영국의 대처 정부도 이런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친가족 운동으로 결집한 우파는 공화당의 정책을 반페미니즘, 반동성애, 반낙태로 전환시켰다. 클린턴은 1992년 대선에서 공화당의 친가족 정책에 반대했지만 선거 이후 클린턴 역시 가족의 가치를 옹호했다. 영국의 블레어 수상 또한 가족을 강화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공언하였다. 이러한 친가족적 흐름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약화되는 사회안전망의 역할을 개별 가족에 전가하려는 흐름에 다름 아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사회적 안정은 행복한 가족에 달려있고 가족의 행복은 자기희생적인 여성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의 슬로건을 내걸고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는 1997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본격화되면서 실질 가족임금 삭감, 여성노동의 주변화(저임금의 불안정한 노동), 가사, 양육노동의 여성 전가로 여성의 출혈판매가 강요되었다. 이는 출산율 저하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더해 ‘프로라이프’ 운동은 당장 아이까지 더 낳으라고 하고 있다. 미국의 친가족 정책이든 한국의 프로라이프 운동이든 신자유주의로 인한 사회적 위기의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여성들의 권리를 억압하는 것은 동일하다. 국가 인구조절 정책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몸 이제까지 국가가 낙태를 용인하다가 최근에 단속을 강화하는 것은 여성의 재생산을 인구조절 정책의 대상이자 도구라는 관점을 견지한 채 인구조절정책을 출산억제에서 출산장려로 기조를 전환한 것이다. 즉 현재 낙태를 단속하고 처벌하는 상황, 출산정책이 변화해온 역사는 여성이 몸과 출산의 통제의 주체로 나타나지 않은 채 진행되고 있다. 여성들의 몸은 역사적으로 국가 발전의 논리에 포섭되어왔다. 여성이 출산을 할지 말지 결정할 권리는 국가정책에 종속되었으며 여성의 몸은 국가의 발전이라는 명목 하에 인구가 많으면 피임을 위한 난관수술이나 자궁 내 장치로, 인구가 적으면 ‘강제적 임신과 출산’으로 국가의 개입과 규제의 대상이 되어왔다. 낙태의 법적 지위는(명문상 의미 뿐 아니라 실질적 의미를 포함해서) 국가의 출산정책과 조우해왔다. 1961년 인구정책의 일환으로 가족계획이 처음 채택되었다. 국가는 가족계획사업 10개년 계획 하에 인구증가율을 감소시키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가족계획에 대한 지도와 교육사업 및 지원사업을 실시했다. 국민들이 이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인구증가 억제에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1962년 이래 낙태 시술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정부는 인구증가 억제를 위해 ‘월경조절술’이라는 이름으로 낙태 시술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이로써 한국에서 낙태 시술이 크게 성행하게 된 것이다. 정부는 가족계획사업을 더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낙태의 일부합법화를 시도하는데 1973년 모자보건법은 동법 제8조에서 낙태시술 허용사유를 확대하면서 법적 완화가 이루어진다. 이후 정부는 1976년, 1982년, 1985년 합법적인 인공임신중절 사유를 확장하려고 하지만 종교계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이를 추진하지 못했다. 그런데 출산율이 1970년 4.53이던 것이 1983년에는 인구대치수준인 2.1명으로 감소하자 정부는 1980년대 후반 피임도구의 무료공급을 중지하였고 1996년 출산억제정책을 인구자질 향상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1999년 출산율은 1.5명, 2002년 1.17명으로 더욱 낮아졌고 정부는 2003년 저출산 고령사회 대책안을 서둘러 마련하였다. 2005년, 2006년에 걸쳐 저출산, 고령화에 대응하는 정책들이 생산되었고 이명박 정부가 2008년에 세운 대통령직속기관인 미래기획위원회는 작년 11월 저출산 종합대책으로 불법 낙태 단속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즉, 한국 정부는 낙태를 인구조절의 필요에 따라 출산억제정책 시에는 묵인했다가 출산장려정책 시에는 처벌을 강화해왔다. 이렇게 출산정책은 변해왔지만 변하지 않는 것은 출산정책 속에 여성의 재생산권리는 고려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국가의 인구조절정책은 노동력 재생산을 관리하기 위해 여성의 재생산을 통제하는 것으로 일관해왔다. 노동력의 양적, 질적 관리를 위해 여성의 몸은 수도꼭지 조절하듯 피임 아니면 임신을 강요받았다. 사상 초유의 출산율 저하는 노동자들이 더 낮은 임금, 더 긴 노동시간, 더 힘든 노동 강도를 향해 밑바닥으로 출혈경쟁을 해야 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무관하지 않다. 낙태의 음성화가 여성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 세계보건기구는 낙태합법화 여부보다는 성교육의 부재, 피임법에 대한 무지, 부성애 결핍, 통합적 건강보호체계의 미비 등과 같은 다양한 요인들이 낙태시술 빈도를 높이는 주요 요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한국 여성의 연간 낙태율은 1,000명당 29.8명으로 미국(21.1명)이나 영국(17.8명)보다 높지만 미국이나 영국은 한국보다 더 포괄적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또 가톨릭 전통이 강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낙태를 다른 대륙보다 엄격하게 처벌하고 현재까지도 사회적 금기로 여기지만 유럽이나 미국 등 낙태를 허용하는 국가들보다 낙태시술 빈도가 오히려 더 높다. 더군다나 낙태가 불법화된 국가들의 경우 다른 나라로 가서 낙태 시술을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낙태 빈도가 낮다고 해서 믿을 만한 것도 아니다. 낙태 접근권을 제한하는 것은 낙태를 줄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미 낙태시술을 원하는 여성이 시술병원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데 출산을 택하지 않는 여성들은 낙태시술을 하기 위해 더욱 음성화된 경로를 찾아 위험한 시술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루마니아에서는 낙태가 불법화되기 시작한 1965년부터 1984년까지 출산 10만 건 당 모성사망률이 21건에서 128건으로 증가했다. 한편 미국에서는 낙태가 합법화되면서 1970~76년 사이 낙태 5,000건 당 사망률이 30에서 5로 줄었다. 낙태의 법적 지위는 여성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한국 같은 경우 명문상 낙태가 불법이지만 고발이나 처벌이 드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합법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167개국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낙태의 법적 허용범위가 ①‘여성의 생명이 위급할 때만’, ②‘1의 경우+여성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에 해로울 때’, ③‘2의 경우 +강간이나 근친상간일 경우’까지인 경우 안전하지 않은 낙태는 여성 1000명 당 23~25건이었고 낙태 허용범위가 ④‘3의 경우+태아 기형인 경우‘인 경우 10으로 감소했고, ⑤‘4의 경우+사회경제적 요인으로 인해‘, ⑥‘5의 경우+산모의 요청에 따라‘인 경우에는 0~2건으로 급감했다. 또 165개국을 대상으로 했을 때 낙태 시술로 인한 산모 사망은 낙태 허용 범위가 1,2,3,4인 경우 각각 출산10만 건 당 각각 34, 55, 30, 10을 나타냈고 낙태허용범위가 ⑤사회경제적 요인, ⑥여성의 요청에 따라 확대되었을 경우 낙태시술로 인한 모성사망은 각각 0, 1로 감소했다. 비전문인이 낙태시술을 할 경우에 합병증은 매우 심각할 수 있다. 낙태는 다량의 출혈이나 쇼크, 자궁 내 감염, 불임 등을 야기할 수 있으며 질 열상, 자궁 천공 등의 생식기 손상뿐만 아니라 방광이나 장에 손상을 줄 수 있다. 낙태시술을 하는 의료기관, 의료인에 대한 단속과 처벌이 강화되면 여성들의 낙태접근권은 심각한 제한을 받을 수 있다. 이로 인해 여성들은 원하지 않는 임신을 억지로, 고통스럽게 지속하거나 원하지 않는 임신을 중단하기 위해 목숨이라도 걸어야 할지 모른다. 특히 원정 낙태를 할 수 없는 빈곤여성의 경우 음성적인 시술에 의한 위험에 크게 노출될 것이다. 권리로서의 여성의 재생산 프로라이프의사회의 낙태근절운동에서 여성의 몸에 대한 권리는 들어설 여지가 없다. 이들은 낙태 근절을 위해 미혼모와 사생아, 기형아와 장애아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 제거, 공공 및 사설 보육시설의 확충, 직장 내 임산부와 워킹맘에 대한 처우 개선, 청소년 임신의 경우 남성의 책임 문제, 대국민 성교육과 피임교육 및 낙태 폐해 교육, 생명경시 풍조와 개인주의 제고 등 다양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지만 이 모든 해결책은 ‘여성이 임신을 하면 무조건 출산을 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 관련해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설계할 여지는 어디에도 없고 여성은 임신되면 출산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존재로 설정되어 있다. 1) 의무가 아닌 권리로서의 성과 모성 여성이 원하지 않는 출산을 중단할 수단으로서 낙태에 대한 접근권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임신을 원하지 않는 상황에서 성은(주로 이성관계) 여성에게 위험하고 두려운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즉 모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관계가 부정된다. 이것이 바로 낙태반대론의 결론이다. ‘아이를 낳을 생각 없으면 섹스하지 마라’ 내지는 ‘즐기는 여성은 당연히 그에 따르는 책임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여성에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역할을 강요하는 성별분업 이데올로기의 맥락 하에 있다. 낙태접근권에 대한 제한은 따라서 여성의 몸에 대한 규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역할에 대한 규제이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키워야 하는 존재라는 규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그러한 역할규정을 거부할 수 있다. 여성들은 모성을 전제로 하지 않은 성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이때 성의 위험(성폭력, 임신 등)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가 있다. 또한 성관계로부터 철수할 자유도 있다. 많은 여성들이 성을 즐기기 위해 남성과는 달리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많은 경우 원치 않는 성관계를 거부하지 못한다. 이는 곧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 재생산 권리를 위한 조건으로서 피임 접근권과 양육서비스의 사회화 프로라이프의사회 뿐 아니라 국가정책연구기관이나 학자들도 낙태를 예방하기 위한 주요 방안으로 피임교육과 피임도구의 공급 그리고 출산과 양육을 지원하는 사회적 시스템 마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안의 목적이 ‘낙태를 근절하는 것’이 되어서는 여성들의 재생산 권리를 보장할 수 없다. 다양한 피임방법들에 대한 접근권은 낙태 근절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성들이 자신의 몸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기 위한 도구라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여성의 재생산권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피임이 접근되지 않는다면 여성들의 피임은 도리어 남성의 욕구에 봉사하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여성들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통제하기 위해 피임과 임신에 대한 지식과 자원을 제공하는데 봉사해야지 프로라이프의사회처럼 여성들의 재생산권 자체를 통제해선 안 된다. 의사가 종교적 이유 등으로 낙태시술을 거부할 권리를 인정할 수 있지만 여성의 통제권이라는 전제하에서 피임이든 출산이든 여성의 고유한 권리는 사회적으로 안전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또 여성들은 또한 어떤 방식으로 피임을 할 것인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또 여성들이 자신이 언제 어떻게 어머니가 될지 선택이 가능하도록 사회적 지원 시스템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낙태근절에 초점을 맞춘다면 사회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진 상황에서 여성은 무조건 출산을 해야 한다는 논리로 귀결될 수 있다. 양육서비스를 사회화하는 것은 여성이 원할 경우 출산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 반대, 즉 여성이 낙태를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몸과 재생산에 대한 권리를 이야기하자 노동이 불안정해지고 사회안전망이 무너지며 양육의 책임을 개인이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상황에서 여성이 출산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다. 또 성관계는 결혼의 틀 밖에서 이뤄지면서 결혼의 틀을 벗어난 임신과 출산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있는 상황에서 미혼 여성이 출산을 선택하기 어려운 것도 마찬가지다. 그녀들에게 낙태는 지금 현실에서 절박한 것이다. 즉 현재 여성은 낙태에 관해 선택이나 고민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여성의 출산이 선택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 형성되고 여성이 자신의 재생산권리에 대해 스스로 목소리 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태아에 대한 철학적, 윤리적 고민을 시작할 수 있으며 자신이 진정 어머니가 되고 싶은지 그렇지 않은지 성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78년 노르웨이에서 낙태의 허용 범위가 ‘여성이 요청할 경우’로 확대된 이후 여성들이 그 이전보다 낙태를 선택하는데 더 많이 숙고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노르웨이의 태아생명옹호론자들이 낙태의 허용범위를 확대하면 여성들이 너무 쉽게 낙태를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것과는 정반대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여성들의 목소리로 여성의 몸과 재생산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는 여성 스스로 여성의 권리를 이해하고 쟁취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몸과 재생산에 대한 여성의 통제권이 보장되는 사회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요구해야 한다. 안전하고 저렴한 낙태 시술에 대한 접근권을 보장하라! 안전한 피임에 대한 보편적 접근권을 보장하라! 양육 서비스를 시장화하지 말고 공적으로 사회화하라! 여성의 재생산권 없는 저출산 정책 중단하라!
여성노동자를 민주노총 혁신의 주체로 세우자 민주노총은 페미니즘을 수용하고 여성의 요구와 권리의 실현을 자신의 과제로 삼고 있는가? 1997년 여성위원회가 출범하고 할당제, 반성폭력 규약과 같은 제도적 장치들이 마련되어 온 12년의 과정에서 민주노총은 조금씩이나마 페미니즘적으로 개조되고 있는가? 여성사업은 확대 강화되고 있는가? 지난해 발생한 민주노총 임원 성폭력 사건과 그 처리 과정은 여성 문제에 관해서 민주노총이 여전히도 답보상태에 있음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 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논란이 될 때마다 민주노총과 노동조합이 페미니즘에 입각해 혁신되어야 한다는 주문이 잇달았지만, 지금까지 크게 나아진 것은 없다. 성폭력 사건이 아니더라도 여성노동자 조직률,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투쟁에 대한 태도, 민주노총의 여성관련 요구 등 여러 지표들에서 민주노총의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과 활동이 긍정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럼에도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논란이 되어야 여성 문제에 대한 주의가 환기되고 그마저도 늘 흐지부지되는 현실은 민주노총이 여전히 여성노동자의 요구와 권리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노동조합에서 여성 배제와 차별이라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를 바꾸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제안된 할당제나 반성폭력 규약은 여성사업과 운동의 강화로 이어지지 못한 채 제도만 남아있는 형국이다. 무엇보다 여성조합원들이 여성위원회를 자신의 운동조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여성사업이 자신의 요구와 문제를 담아서 해결하는 사업이라 느끼지 못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사업의 부문화, 부차화는 당연한 결과다. 여성사업 강화라는 과제는 단지 부문으로서 여성사업을 강화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민주노총에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을 확산하고 민주노총 운동을 페미니즘적으로 개조하려는 노력을 전면적으로 강화하는 것으로 사고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현재 민주노총 여성사업의 현황을 진단하고 이후 과제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민주노총 여성사업 현황과 진단 여성위원회 구성과 사업 현황 민주노총의 여성사업은 흔히 여성위원회의 사업으로 이해된다. 민주노총 여성위원회는 여성 담당 부위원장(여성위원장), 사무총국의 여성사업 담당자, 산별연맹 또는 산별노조와 지역본부의 여성위원장이나 여성사업 담당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산별연맹과 산별노조, 지역본부의 여성위원장과 여성사업 담당자가 공석이거나 겸직인 경우가 많아 실제 여성위원회 결합도는 그리 높지 않다. 최근 여성위원회 사업은 대체로 조직사업, 정책사업, 교육사업, 연대사업 등 기본 사업과 정기적인 대중사업인 ‘3ㆍ8 세계 여성의 날’ 사업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직사업은 주로 여성위원회 골간을 확대 강화하기 위한 사업으로, 지역조직과 가맹산하조직과의 간담회를 통해 여성사업의 중요성을 알리고 사업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공감대를 높이기 위한 사업이다. 간담회에서는 인력을 확충하기 어려운 재정 구조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항상 제기되곤 한다. 이는 여성사업의 중요성이 당위적인 수준에서 인정되지만 실제로는 중요한 위상을 획득하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객관적으로 재정의 어려움도 존재하지만, 여성사업이 노조 전체의 사업이고 남녀 조합원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과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부문으로 축소되는 상황에서 여성위원회와 여성사업의 확대 강화에 대한 적극적인 동의와 결의가 나오기는 상당히 어렵다. 정책사업은 여성의 고용과 임금 차별, 보육과 모성권, 적극적 차별시정 조치, 할당제, 성폭력과 성희롱, 건강권 등 여성에 관한 다양한 의제를 포괄하고 있다. 언급된 의제들은 물론 여성조합원들의 현실에서 비롯된 것들이지만, 실제 사업은 주로 연구프로젝트, 토론회, 설명회로 진행된다. 여성위원회의 정책이란 여성조합원들의 요구, 민주노총의 여성 문제에 대한 요구다. 그러나 이런 요구가 외부의 전문가나 연구자들의 작업을 통해 정리되고 있으며, 실제 사업계획과 맞물리지 못하면서 민주노총의 입장, 여론전을 위한 정책에 그치고 있다. 여성조합원들의 요구로 자리 잡고 운동으로 만들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책과 요구가 민주노총의 노선, 투쟁방향에 적합한지, 여성조합원들의 현실과 요구에 부합하는지 확인할 수 없게 된다. 교육사업으로는 민주노총 내 여성사업 현황, 여성노동 관련 법률과 쟁점, 여성학 기본 등을 다루는 내용으로 여성노동교실이나 성평등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 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참여자를 확대하려는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교육내용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못하고 그때그때 외부 강사들을 섭외하는 일회성 교육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교육내용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뿐만 아니라 참여자 확대 노력에도 불구하고 참여자들은 여전히 여성사업 담당자나 여성 간부들로 한정된다. 현 시기 총연맹 여성위원회가 교육사업을 진행하는 목표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텐데, 전 조직적인 교육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 내용 선정과 그에 따른 교안 마련, 강사단 구축을 통해 지역본부, 산별연맹과 산별노조에서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교육을 시행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할당제, 여성의 대표성을 강화했는가 노조 내 여성의 대표성을 제고하기 위한 방안으로 민주노총은 2004년부터 임원과 대의원, 중앙위원에 대한 30% 여성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다. 할당제 시행으로 2002년 10%에 그치던 여성임원 비율이 2007년 33.3%로 증가하면서 의사결정기구에 여성 참여 비율의 양적 증가를 낳았다. 그러나 할당제를 통해 하려고 했던 여성사업의 강화나 여성노동자의 조직률 제고, 조직 내 여성의 요구 반영과 같은 과제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실에서 많은 조직이 할당 수만큼 여성위원을 선출하지 못하여 미선출(공석)로 처리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할당제가 여성조합원들을 활동가 간부로 육성하는 것에 기여하고 있는가, 할당제를 통해 선출된 여성간부가 여성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할당제를 둘러싼 여러 평가의 지점 중에 가장 우선적인 것은 과연 할당제가 제고하려 했던 여성 대표성의 실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여성임원이나 간부 비율이 증가한 것만으로 여성 대표성이 강화되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여성할당제를 통해 여성대표를 선출하는 근거는 바로 여성조합원의 존재와 요구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조합원들은 민주노총의 주체로 인식되지 못하고 있으며, 여성들의 집단적인 요구도 분명하게 조직되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할당제를 통해 선출된 여성 간부는 여성조합원들을 대표한다기보다는 개인으로 인식될 뿐이다. 여성대표로 선출되었으나 대표할 여성의 요구와 집단적 주체성이 부재한 현실은 한편에서는 여성위원회, 여성대표의 기반을 더욱 취약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에서는 여성대표들의 활동이 개인의 성향, 정파 등을 근거로 진행되는 것을 제어할 수 없게 한다. 결국 여성들이 민주노총 운동과 조합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주체로 남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 여성들이 노조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처해있는 현실을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통해 집단적인 요구를 마련하기 위한 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여성 의제, 어떻게 다뤄지는가 민주노총이 다루고 있는 여성 의제는 여성의 고용과 임금에서부터 여성 노동 관련 법, 출산 및 육아와 같은 모성권과 재생산 노동, 직장 내 성희롱, 여성의 건강권 등 매우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한 의제들이 어떤 기조로, 또 어떤 방식으로 다뤄지는가를 진단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여성 의제가 여성만의 사항으로 국한되면서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 전체 노동자의 조건과 민주노총의 운동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여성들의 일자리를 특징짓는 비정규직, 최저임금과 같은 사안은 민주노총 전체의 과제로 다뤄지기는 하지만 여성을 저임금, 유연한 일자리에 집중시키는 고유한 성별분업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이에 비해 여성의 고용과 임금에 관한 고유한 쟁점은 주로 차별시정이나 적극적 조치의 문제로 인식된다. 여성의 고용과 임금의 일반적 조건인 저임금, 비정규직에 맞서는 투쟁이 여성노동자의 노동권을 쟁취하고 성별분업에 맞서는 투쟁임과 동시에 민주노총 전체 노동자들의 고용과 임금 조건을 방어하는 투쟁으로 제기되어야 하며 여성의 요구가 보편적인 요구로 인식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여성 의제에 관한 일관된 기조를 세우지 못하고, 여성들에게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실용적이고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정부의 일 가정 양립 정책에 대한 태도다. 정부가 추진하는 일 가정 양립 정책은 여성인력을 활용하기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것으로, 여성의 일자리 확대를 통한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율 제고와 출산 및 보육 지원을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럴 듯해 보이는 이 정책의 목표는 저출산을 위시한 재생산의 위기를 관리하고 저임금 여성 노동력을 창출하는 것이다. 실제 정부 여성 정책은 여성이 재생산 노동에 대한 일차적 책임자라는 성별분업의 구조를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여성에 대한 출산과 보육에 대한 지원이 다른 여성의 열악한 사회서비스 일자리로 나타나는 것은 이 정책이 초래하는 당연한 귀결이다. 정부 정책의 목표와 문제점에 대한 분명한 비판을 제기하지 못한 채, 출산과 육아에 대한 지원이 확대되는 것은 좋다는 식으로 정책을 수용하는 것은 여러 문제를 낳을 수 있다. 우선 민주노총이 가사와 재생산 노동에 대한 여성의 의무를 강화하는 정책을 받아들이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이 문제다. 양육을 비롯한 재생산 노동은 여성이 가족 안에서 책임질 것이 아니라 사회가 책임져야 한다. 두 번째로 민주노총이 제시하는 여성 관련 단체협약안의 대부분이 정부가 제시하는 출산, 육아 지원정책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어쨌든 정부는 여성의 재생산 노동 관련 지원을 확대하고 있으며, 이를 무비판적으로 단체협약안에 그대로 넣다보니 민주노총 차원의 여성 단체협약안에 대한 별도의 고민이 필요 없게 된다. 결국 이는 여성조합원들의 정확한 현실을 반영할 수 없는데, 특히 최근 대다수 여성노동자가 고용상의 지위로 출산, 육아 휴직은커녕 노동권조차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반성폭력 운동 지금까지 민주노총의 반성폭력 운동은 규약에 따른 사건 처리와 성폭력 예방교육이라는 두 축에서 진행되었다. 2003년 <성폭력 폭언 폭행 금지 및 처벌 규정>이 제정되었다. 이는 운동사회 내 반성폭력 운동이 제기해 온 문제의식을 수용한 것이었다. 물리적, 신체적 성폭력뿐만 아니라 여성억압 구조와 문화에서 기인한 여성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성폭력 규정으로 포괄하였고, 피해자 중심주의, 2차 가해와 같은 개념을 받아들였다. 규약 제정은 성폭력 사건이 피해자와 가해자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며, 공동체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과정을 동반하면서 조직이 성폭력 사건 해결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그러나 규약이 제정되면서 오히려 민주노총 내 여성 배제와 차별을 비판하고 변화를 촉구하기 위한 논의도 일단락되었고, 이후에는 발생한 사건의 처리가 반성폭력 운동의 주요 활동이 되었다. 발생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논란에 대응하면서 성폭력 규정과 처리의 원칙, 피해자의 권리를 조직 내에서 인식시키는 것이 반성폭력 운동의 주요 과제였다. 지난해 발생한 민주노총 임원의 성폭력 사건과 그 처리 과정은 민주노총 내 반성폭력 운동을 심각하게 평가해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성폭력 사건은 그동안 펼쳐진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성폭력이 여성의 권리를 침해하고 자율성을 제약하는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이 민주노총 내에서 생겨났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던져주었다. 이후 사건 처리 과정에서 드러난 여러 문제점은 성폭력 사건의 올바른 처리를 중심으로 펼쳐져 왔던 반성폭력 운동이 최소한 사건 처리 원칙과 방식조차 조직에 안착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낳았다. 현재는 성평등미래위원회 내 반성폭력팀을 중심으로 그동안 펼쳐진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평가와 이후 대안적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대체로 사건 처리 중심의 반성폭력 운동이 한계에 부딪혔고 이를 넘어서 민주노총의 활동과 문화의 혁신을 실현하는 반성폭력 운동이 필요하다는 합의는 존재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규약 상의 성폭력 규정, 처리 과정, 피해자 중심주의나 2차 가해와 같은 개념 등을 좀 더 명확히 명문화하여 사건 처리의 원칙과 매뉴얼을 정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구체적인 사건을 다루는 방식 이전에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여성에 대한 인식과 문화를 바꾸는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대안 모색의 기본 전제는 민주노총 내에 성폭력과 그 바탕에 놓인 여성 차별, 억압, 배제의 문제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고 이를 바꿔야 한다는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과 합의를 만들기 위한 일상적인 여성사업, 여성위원회의 역할이 포괄적으로 고민되어야 한다. 성평등미래위원회와 여성위원회 여성위원회의 구성도 매우 취약하고 여성조합원들의 힘을 모으고 이를 바탕으로 여성위원회가 민주노총 내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노동조합의 페미니즘적 개조를 선도하지 못하고 여성사업이 계속 부차화, 부문화되는 상황에서 여성위원회의 역할과 위상도 매우 모호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민주노총 임원 성폭력 사건은 여성위원회의 역할과 위상에 대한 회의를 더욱 증폭시키는 계기였다. 실제 사건이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외부 전문가를 포함한 진상규명특별위원회를 꾸리기까지 여성위원회는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전교조 내 2차 가해자들의 징계 불복과 재심 과정에서 민주노총과 전교조의 사건 처리에 관한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여성위원회는 페미니즘, 여성의 권리에 입각하여 사태를 평가하고 입장을 정리할 수도 없었다. 여성위원회가 정파 구도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페미니즘에 대한 관점이 명확하지도 못하며, 제대로 사업을 진행하기도 어렵다는 회의가 제기되었다. 결국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진상규명특별위원회의 권고를 따라 성평등미래위원회를 한시적 기구로 설치하여 민주노총 혁신방안을 마련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민주노총의 페미니즘적 혁신의 주체가 기존에 민주노총 내에서 여성을 대표하고 여성사업을 추진한다는 여성위원회가 아니라 성평등미래위원회로 결정된 것이다. 현재 성평등미래위원회는 민주노총의 성평등 혁신 방안을 내기 위한 중장기사업팀, 그간 민주노총의 반성폭력 운동을 평가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반성폭력팀으로 구성되어 논의가 진행되고 있으며, 구체적인 사업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따라 민주노총 성평등 강사단 양성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임원 성폭력 사건이 민주노총 여성사업을 가장 크게 규정하고 있는 현재의 조건이나, 산하가맹조직의 임원들과 외부 전문가를 포괄한 위원장 직속 위원회로서 성평등미래위원회의 위상을 고려했을 때 성평등미래위원회의 권한과 영향력은 여성위원회에 비해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평등미래위원회와 여성위원회를 둘러싼 논의가 촉발되고 있다. 여성위원회를 성평등미래위원회로 대체하자는 의견도 있고, 양자를 같이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고, 여성위원회를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현재 조건 상 성평등미래위원회가 여성위원회를 대체하는 것이 손쉬운 해법처럼 보일 수 있다. 성평등미래위원회를 상설 기구로 유지한다고 했을 때 그 역할과 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새롭게 논의될 문제겠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고려해야 할 문제가 있다. 즉 민주노총을 페미니즘적으로 개조하고 혁신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다. 민주노총에 여성 문제를 제기하고, 여성의 요구를 보편적인 운동의 과제로 제기할 수 있는 주체는 바로 여성조합원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요구를 집단적으로 묶어내고 대표하는 단위가 여성위원회다. 이런 기층의 힘이 없다면 민주노총의 페미니즘적 개조는 불가능한 일이다. 성평등 의제를 민주노총의 외부에서 아무리 많이 들여오고 강제할 조항이나 구조를 만든다고 해도 조직 내에서 이를 추동할 주체와 힘이 없다면 성과를 보기 힘들다. 임원 성폭력 사건이라는 정세적 조건이 사라졌을 때, 기층의 주체 없이 성평등미래위원회의 권한과 위상이 지금처럼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성노동자의 현실과 민주노총 운동 얼마 전 여성부는 여성에게 적합한 일자리와 근무 환경을 마련하기 위해 여건에 따라 근무 시간과 형태를 조절할 수 있는 유연근무제도(일명 퍼플잡) 도입을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내년 초 시간제 근무 공무원 제도를 시범 도입하고, 민간 기업의 유연근무제 도입 촉진을 위해 법령 정비와 인사노무 관리 매뉴얼 개발에 나선다고 한다. 이를 받아 정부는 유연근무제도를 공공 부문으로 확대 시행하겠다는 방안을 내놓았다. 유연근무제도뿐만 아니라 몇 년 전부터 여성의 일자리를 둘러싼 여러 제도가 마련되고 있다. 그런데 분리직군제나 무기계약, 사회서비스 일자리, 유연근무제도 등 여성의 일자리를 제도화하는 기본 전제는 노동신축화다. 그 일차적 대상은 가장 조직이 안 되어 있고 힘이 없는 여성노동자들이지만, 결국 전체 노동자가 대상이다. 비정규직 확대, 노동자 집단간 격차의 확대라는 조건에서 민주노총은 노동신축화에 맞서고 노동자 내부의 단결을 강화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이 여성들을 유연한 저임금 노동에 고착시키는 여러 정책과 제도에 대응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라는 논리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단결이라는 과제로 환원되지 않는 가족의 문제가 놓여있다. 여성들이 가사를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풀타임 근무보다는 파트타임이 적합하다는 논리는 많은 노동자들도 공유하고 있는 남성생계부양자-여성가사담당자 모델을 기반으로 한다. 가족임금을 매개로 한 남성생계부양자-여성가사담당자 모델은 완전히 실현된 적도 없거니와, 최근 현실에 적합하지도 않다. 저임금, 불안정한 일자리라도 필요하다는 여성들의 요구는 가계 소득을 보전하려는 노동자 가족의 요구다. 정권과 자본은 이러한 요구를 바탕으로 오히려 여성노동자에 대한 착취와 여성의 가족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고, 노동자 내부의 분할을 확대하고, 노동신축화를 달성하려는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지금까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운동의 과제로 사고한 적이 없다. 오히려 가족을 매개로 한 성별분업과 여성의 재생산 노동에 대한 책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여성노동자의 저임금, 불안정한 노동조건은 여성노동권이 제약되는 고유한 구조로 파악하기보다는 비정규직 일반의 문제로 사고한다. 민주노총의 페미니즘적 개조와 혁신이 필수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여성의 노동을 부차화하고 현재 가족의 성별분업 구조와 여성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한 여성들의 저임금, 불안정 노동에 맞서는 투쟁은 민주노총의 중심 과제가 될 수도 없고 여성노동자들이 민주노총 운동의 일주체로 설 수도 없다. 또한 출산, 양육에 대한 지원으로 여성에게 모성과 재생산 노동을 강요하고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여성을 착취하는 공세에 대응할 수 없다. 나아가 노동자 내부의 단결을 강화해야 하는 민주노총의 과제를 이룰 수도 없다. 민주노총의 페미니즘적 혁신과 여성사업 강화를 위한 과제 여성노동자 조직화 민주노총을 페미니즘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주체로서 여성노동자의 조직화는 언제나 중요한 과제다. 무엇보다 여성의 조직률이 워낙 낮은 상황에서 이를 높이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일이다. 더불어 미조직 노동자의 다수가 여성이라는 점에서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 조직화라는 측면에서도 여성노동자 조직화의 중요성은 배가된다. 비정규직, 미조직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노동자 대다수는 노동조건과 임금이 매우 열악하고, 해고나 여타의 권리 침해에 대응조차 할 수 없거나 노동자성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무권리 상태에 놓여있다. 민주노총이 이런 무권리 상태의 여성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방어함으로써,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자신의 노동과 삶에 의미를 가지는 조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조직화 과정은 남성생계부양자-여성가사담당자라는 이데올로기와 현실이 여성을 어떻게 노동시장에서 배제하거나 활용하는지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여성권과 페미니즘을 민주노총의 과제로 받아들일 필요성을 실천적으로 제기한다는 의미가 있다. 더불어 이미 조직된 여성조합원과 새롭게 조직되는 여성노동자들을 민주노총 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한 조직화 과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 활동의 주체로서 자신의 이념을 정립할 수 있는 교육과 학습의 기회가 보장되어야 한다. 여성해방운동의 역사, 페미니즘 이론, 여성의 권리와 같은 페미니즘 관련 교육뿐만 아니라 노동자운동의 역사, 노동자의 권리, 노동조합 활동, 정세를 포괄하는 교육사업이 필요하다. 또한 여성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의 활동과 정치적 실천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의 여성요구: 여성의 노동권 쟁취와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 민주노총은 여성조합원의 요구에 기초해 사회적인 여성억압의 문제를 제기하고 이에 맞서는 투쟁을 조직해야 한다. 현재 민주노총에서 여성관련 요구가 강제성을 가지는 조항으로 사업화되는 경우는 기업별, 산별 수준의 여성 관련 단체협약이다. 그러나 많은 사업장에서 여성 관련 단체협약은 가장 먼저 양보할 수 있는 사항으로 치부된다. 또한 실제 여성노동자 대다수는 해고 위협과 같은 고용상의 실제조건 때문에 단체협약이 있어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사업장 수준의 요구를 넘어서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일반적 현실을 반영한 요구안을 민주노총 차원에서 제시하고 대사회적인 영향력을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요구안은 정부가 제시하는 여성관련 정책들을 사안별로 유불리를 따져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노동권 쟁취와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라는 일관된 방향에서, 남녀 모든 조합원의 작업장, 가족, 노조의 활동과 구조, 그 안에서 여성들의 현실에 기초하여 구성되어야 한다. 여성들로부터 나오는 여성의 힘: 여성위원회 현재 여성사업 담당 부문, 여성 간부들의 사업 단위로 인식되고 있는 여성위원회를 여성조합원의 힘을 바탕으로 한 여성들의 자율적인 조직으로 강화해야 한다. 여성위원회는 사회적인 여성억압의 문제가 제기될 때, 또 이러한 문제가 노조 내에서 표출됐을 때 이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과 방안을 모색하고 이를 전체 민주노총 운동의 과제로 제시하는 기구로 강화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여성위원회는 여성조합원과 접촉면을 확대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배제, 차별을 감축시키기 위한 문화 혁신 발생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처리를 넘어서 여성 차별적, 억압적 구조와 문화를 개조하기 위한 다차원적 노력이 모색되어야 한다. 여성의 권리, 페미니즘에 대한 전 조직적인 교육 과정을 마련하고 진행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산하가맹조직에 여성억압적 문화를 점검할 수 있는 정기적인 토론을 안착시킴으로써 여성 문제를 일상적으로 교육할 수 있는 사업이 마련되어야 한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는 여성문제를 이론화하고 그것을 운동을 통해 현실화하려 했던 탁월한 여성이었다. 엘러너 마르크스는 영국 노동자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에이블링과의 관계에서 고통을 받고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그녀는 사랑으로 인한 고통으로 자신의 길을 충분히 펴지 못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훌륭한 이론가이자 혁명가로서 사회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지만 여성으로서 많은 심적 고통을 겪었다. 그녀 역시 엘러너처럼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가려고 했고 그것을 개인이 극복할 문제로 보았다. 클라라 체트킨은 산업에서 여성의 역할과 노동조건을 강조하고 여성노동자 조직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조건과 가족, 재생산노동 등 여성에 고유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여성 혁명가들이 겼었던 갈등과 어려움은 콜론타이에 의해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새로운 이론으로 제시된다. 콜론타이는 앞선 여성혁명가들이 여성으로서의 고통에 굴복하거나 여성으로서의 문제를 개인적으로 극복하려 했던 것과는 달리 그것을 이론화, 체계화하려고 시도했다. 그녀는 여성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환원하지 않고 사회적 맥락에서 분석하고 여성문제의 해결을 혁명의 과제로 제기했다. 이런 면에서 콜론타이는 탁월했다. 물론 콜론타이가 그런 문제의식을 제기한 데는 당시 소비에트라는 새로운 사회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할 수 있었던, 혁명이라는 조건이 있었기에 가능한 측면도 있었다. 혁명 전야, 주체적 여성으로 성장 꼬마 소녀, 슈라(1872~1888) 슈라(콜론타이의 아명)는 1872년 4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 알렉산드라 도몬토비치는 핀란드 상인의 딸이었다. 그녀는 첫 남편 므라빈스키와 헤어지고 육군 대령인 미하일 도몬토비치와 살았는데 이혼하기도 전에 도몬토비치의 딸을 낳았다. 도몬토비치는 우크라이나의 오랜 지주 가문의 귀족출신이었으며 이후에는 장군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육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덕분에 슈라는 일곱 살이 되기 전에 영어와 불어, 독일어를 깨칠 수 있었으며 교양 있는 여성들을 존경하도록 배웠다. 슈라는 아버지로부터 정의감을 배웠고 어머니로부터는 저항감을 배웠다. 그녀의 아버지가 불가리아 정당에서 자유주의파에 가담한 것으로 인해 정치적 탄압을 받을 때 슈라는 분노했다. 한번은 보수주의자로 알려진 손님이 집에 왔을 때 담배 갑을 건네주길 거부하여 부모님을 당황하게 한 일도 있었다. 슈라는 일반사회규범을 따르지 않는 아이였고 그녀는 이를 어린 나이에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남들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엄마 속을 많이 썩였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구하고 전제군주를 쫓아내고 민중들을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영웅’이 되는 꿈을 꾸었다. 어린 시절 슈라의 스승은 언니 제니아의 가정교사였던 마리아 스트라호바였다. 그녀는 급진적인 정치적 견해를 가진 독립적인 여성의 전형으로 스트라호바는 활동적인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슈라를 여성 혁명가들의 세계에 좀 더 가까이 가게 해 주었다. 1881년 소피아 페롭스카야라는 여성이 지도한 테러리스트 그룹이 짜르를 암살한 사건은 콜론타이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콜론타이의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국왕을 시해한 여성에게 동정심을 느낄 뿐이었지만 슈라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도 급진적 여성들의 진실된 군대가 전제군정을 끌어내리기 위해 남성동지들과 함께 투쟁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블라디미르와의 우울한 관계(1888~1896) 1888년 슈라는 젊은 여성 알렉산드라가 되었고 마리아 스트라호바의 교육을 받은 후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사랑과 교육은 알렉산드라의 관심 영역에서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첫사랑은 그녀가 흠모하던 사람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살을 함으로써 끝났다. 그녀는 페미니스트들의 요구에 의해 1878년 정부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마련한 여성을 위한 대학수준의 교육 프로그램을 받길 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어머니는 그곳의 급진적 분위기를 염려하여 그녀의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녀는 대신 사립 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폴란드의 정치적 망명가의 아들이었던 그녀의 먼 친척 블라디미르 콜론타이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슈라의 어머니는 자신의 비전통적인 행적에도 불구하고 슈라가 가난한 청년과 결혼하려는 것에 반대했다. 슈라의 아버지는 블라디미르가 독서나 진지한 대화에 관심이 없고 슈라와 정신적 친밀감이 없다는 점에서 결혼에 반대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서둘러 알렉산드라를 유럽으로 보냈고 그곳에서 그녀는 마르크스주의를 접하게 된다. 슈라는 결혼을 허락해주지 않으면 집을 나가겠다고 선언해 결국 부모의 동의를 얻었고 러시아로 돌아와 1893년 블라디미르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혼 생활에 만족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정치활동에 대한 책임과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열정은 엔지니어였던 그녀의 남편의 이해와 직업과 충돌하게 되었다. 그녀는 후에 “남편을 사랑했지만 주부와 아내로서의 행복한 생활이 나에겐 하나의 새장이 되어버렸다”고 고백했다. 슈라는 가장 친한 친구 조야 샤두르스카야의 독립적인 생활에 자극을 받았다. 당시 조야는 1893년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로 와서 이들 신혼부부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슈라는 그녀의 자유와 그녀 주위의 연주회와 강연과 학생들의 모임을 부러워했다. 슈라는 곧 남편과 단둘이 저녁시간을 보내는 것을 그만두고 조야와 함께 독서하고 토론하게 되었다. 그들은 함께 러시아의 ‘두꺼운 잡지들’ 속에서 1890년대 러시아 인텔리겐차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논의되고 있던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을 읽고 토론하였다. 블라디미르가 공학도들과 함께 수학 문제를 풀 때면 조야와 슈라는 그들을 시사적인 사회, 경제 문제들에 대한 토론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블라디미르는 곧잘 웃어 넘겨 버리거나 “조용히, 조용히.당신은 아이를 재워야 하오”라는 말로 토론을 망쳤다. 슈라는 사랑받기를 원했지만 자신에 대한 성취욕구 또한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그녀의 관심사를 공유해보려는 시도는 실망스러운 결과로 끝났다. 블라디미르는 이미 그녀에게 방해스러운 존재였다. 조야는 콜론타이에게 가정 일을 유모에게 맡기고 글을 쓰라고 충고해주었지만 문을 잠그고 일을 시작해도 어린 아이가 넘어져서 울고 엄마를 찾을 때 달려 나와 무슨 일인가 살펴보지 않을 수 없어 도무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그녀는 단편 소설을 썼는데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던 여인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남편을 버리고 애인과 결합한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은 남자들의 자유와 대조되는 여성들의 이중적 규범을 타파하려는 콜론타이의 최초의 시도들 가운데 하나였는데 이 소설을 잡지사에 보냈을 때 잡지사에서는 문학이 아닌 선전문을 써 보냈다는 평과 함께 반려해 보냈다. 블라디미르는 편집자가 아마도 중년 여인보다는 젊고 예쁜 여주인공을 좋아하는 모양이라며 아내를 놀려댔다. 잡지사의 거절에 상처받고, 남편의 경박한 농담에 화가 난 콜론타이는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마르크스주의에 입문(1896~1898) 아내와 어머니를 넘어선 자아를 찾고 있던 콜론타이는 노동계급의 절박한 경제적 상황과 접촉할 기회를 갖게 된다. 1896년 남편과 그의 동료, 그리고 조야와 함께 나르바를 여행했을 때 12,000명의 남녀직공을 고용하고 있는 거대한 직물 공장 통풍 시설을 개선하는 기술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 공장에는 기혼과 미혼 노동자들의 침대가 뒤섞여 빽빽이 들어차 있었고, 그 침대 사이사이에 많은 어린아이들이 울거나 놀고 있었다. 콜론타이는 그녀의 아들 또래의 한 조그마한 아이에게 관심이 쏠렸는데 그 아이는 조용히 누워 죽어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콜론타이가 그 아이들을 돌보는 듯한 늙은 여자에게 아이가 죽어있다고 하자 늙은 여자는 이런 일은 흔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누군가가 그 아이를 치웠다. 바라크에서의 전율, 그날의 광경과 악취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고 후에 콜론타이는 말한다. 이 일로 그녀는 통풍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자들이 계획을 세우는 일보다도 경제 체제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크론호름에서의 충격적인 사건으로 콜론타이는 여성해방을 주장하는 소설을 쓰는 대신 마르크스주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마리아 스트라호바는 콜론타이에게 의미있는 활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그녀에게 노동자들의 야간학교에 교육자료를 공급하는 이동 박물관의 업무에 참여하도록 권했다. 여기에서 콜론타이는 베라 멘진스카야와 뤼드밀라 멘진스카야, 엘레나 스타소바와 같은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만났다. 어느 날 엘레나 스타소바가 콜론타이에게 어떤 모임에 참석해달라고 했을 때 콜론타이는 처음으로 비합법적인 회합을 접할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그녀가 요구받은 것은 그녀가 부유한 사람들과 친분이 많다는 이유로 단순히 돈을 조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콜론타이는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진정으로 의미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엘레나 스타소바는 콜론타이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조직에 헌신하는 것만큼 유용한 것이 없다고 충고했다. 하지만 그런 말은 그녀에게 열등감을 불러일으킬 뿐이었다. 엘레나 스타소바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페테르부르크 위원회의 창설 요원이었지만 그녀는 스스로에게 한계를 설정하고 그녀의 생애를 이차적이고 비이론적인 임무에 기꺼이 바쳤다. 반면에 콜론타이는 스스로에게 자기 한계를 허용할 수는 없었으며 탁월해지기를 갈망했다. 콜론타이는 이론적 인물, 생산적인 사상의 저술가가 되기 위해 공부하기로 결심한다. 취리히에서의 유학생활(1899~1905) 1899년 그녀는 취리히 대학에 가서 자신이 읽었던 책의 저자인 경제학자 하인리히 헤르크너에게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기로 결심한다. 그곳에서는 남편과의 갈등에서 벗어나 학생으로서 자유롭게 생활하면서 러시아에서는 금지되어 있는 많은 저작들을 읽을 수 있었다. 콜론타이의 아버지는 딸의 계획이 불만스러웠지만 재정적 지원과 감정적 지지를 아끼지 않았다. 어린 아들 미샤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행복하게 지낼 것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콜론타이는 결코 취리히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콜론타이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페테르부르크를 떠난 기차에서 5살 난 아들의 조그맣고 따뜻한 손이 어른거리고, 자신을 떠나보낸 남편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매 역 마다 열차를 갈아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것은 진정으로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스스로를 진정시키면서 두 통의 편지를 썼다. 하나는 남편에게 그녀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왜 그녀가 가족을 떠나면서까지 노동계급과 여성의 권리를 위한 싸움 속으로 뛰어들게 됐는지 조야에게 밝히는 것이었다. 블라디미르 콜론타이는 아내가 결혼생활을 버리고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혼란스런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블라디미르는 그가 표현했듯, 아내가 ‘남자들의 세계’인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시각에서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전통적인 아내의 역할에 만족해야만 했던 것이다. 80세의 노인이 되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콜론타이는 블라디미르에게 입힌 고통을 상기하는 것은 언제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쓰고 있다. 콜론타이는 그녀의 모성애를 만족시키는 것과 ‘남자들의 세계’에서 ‘커다란 업적’을 성취해야 한다는, 두 가지의 양립될 수 없는 욕구의 균형을 잡으려고 애썼지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중년에 “사랑, 결혼, 가족 등 모든 것이 부차적이고 순간적이 것이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아들에 대한 그녀의 헌신과 아들과 떨어져 있는 아픔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다. 그녀는 또 미샤가 자기를 이해해 줄까를 걱정하며 우울해 하기도 했다. 콜론타이는 어머니로서의 여성의 역할을 고려하지 않는 운동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 혁명과 여성운동에 뛰어들다 혁명가로 데뷔(1905) 1896년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섬유노동자 4만 명이 하루 14~15시간 노동에 반대하는 파업을 시작한 것을 기점으로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의 발단이 된 ‘피의 일요일’까지 러시아 군대에 의해 무자비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수많은 파업이 발생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소비에트와 노동조합을 탄생시켰다. 콜론타이는 1905년의 전환점이 될 때까지 유럽과 러시아를 오가며 지냈다. 그녀는 카우츠키, 플레하노프,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론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에 이끌렸다. 그녀는 자유주의적 친구들과 이념적 그룹을 형성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네브스키 지역에서 노동자들에게 불법 사회주의 선전물을 배포했다. 1904년에 콜론타이는 빠르게 급진주의적이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콜론타이가 이후에 집중한 여성해방에 대한 관심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 독일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한 서점에서 <공산주의자 선언>을 통해 마르크스를 발견했다. 이는 빠르게 그녀의 얕고 감정적이었던 인민주의를 대체했고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그녀는 많은 청년들이 그랬듯이 지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콜론타이가 혁명가로 ‘세례’를 받게 된 것은 짜르 니콜라스 2세에게 청원을 하려는 평화적인 수백 명의 노동자들을 향해 짜르 정부의 군대가 총살을 자행했던 1905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이었다. 지역의 사회민주주의 위원회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콜론타이는 동궁을 향해 행진하는 데 참여했고 거기서 서늘한 장면을 목격했다. 이 경험은 그녀를 전업 혁명가로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선전물을 배포하고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연락책을 제공했으며 책자를 만들고 기금을 마련하고 위원회에서 회계를 담당하였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불법 공장 모임에서 콜론타이는 민중지도자로 데뷔를 하게 된다. 그녀의 음악적이고 열정적인 목소리와 깔끔하게 손질한 외모는 산업지대 빈민가의 거친 프롤레타리아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여성운동에 첫걸음(1905) 당시 러시아에서 페미니즘이 태동된 지는 50년이 되었지만 대부분은 자선, 반성매매 활동, 교육을 위한 투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러시아 전국 규모의 여성운동 조직은 러시아여성상호자선회로 1895년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러시아의 페미니스트들을 단합시키고자 했지만 명확하게 비정치적이었다. 그 와중에 여성투표권에 대한 요구로 두 개의 새로운 페미니스트 조직이 탄생했다. 여성평등을 위한 동맹(1905~08)과 여성진보당(1905~17)이었다. 이들은 모두 여성투표권의 쟁취를 목표로 했다. 그 중에서도 ‘여성평등을 위한 동맹’은 가장 전투적이었는데 이들은 노동자계급 여성에 대한 동정심이 있었고 개혁과 여성권리를 위한 “모든 여성”의 투쟁에 그들을 조직하길 원했다. 콜론타이가 페미니즘에 처음 발을 내딛게 된 것은 1905년 4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여성평등을 위한 동맹‘의 총회 개회식이었다. 1905년 혁명 초기 선거권 획득을 위해 결합한 모스크바의 전문직업 여성들과 지식층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창설된 ‘동맹’은 사회주의자들처럼 급진적 사회개혁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고, 사회주의 대열에서 여성들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콜론타이는 이런 부르주아 여성들의 활동에 위기의식을 느꼈다. 콜론타이는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서는 자본주의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비계급적인” 페미니즘에 반대하며 여성노동자들이 사회민주당에 가입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에 함께 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녀는 적은 수의 여성하인들, 여성숙련공, 여성섬유노동자 등에게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여성문제에 대해 교육을 함으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와 사회주의와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완전히 분석해내지 못했다. 그녀의 주요 입장은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이 ‘노동계급의 생활과는 관계없다는 점’에서 그것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해방을 위해 그녀에게 제시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통해 완전한 여성 해방도 이룰 수 있다고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어거스트 베벨의 <사회주의와 여성>(1883)은 여성들이 불가피하게 생산활동에 참여하게 되고 경제적 자립을 하게 되는 과정과 사회주의 미래에서의 여성들의 밝은 전망을 묘사함으로써 그런 공백들을 채워주었다. 클라라 체트킨은 1889년 비사회주의적인, ‘모든 여성의’ “부르주아”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여성노동자들을 “프롤레타리아 여성운동”으로 조직하여 자본주의 철폐를 향한 행진에 남성노동자들과 함께 할 것, 그리고 모성 보호와 같은 여성노동자의 문제들에 대해 선전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여성운동의 모호함을 제거하였다. 콜론타이는 1906년까지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적 문헌들을 잘 알지 못했으므로 여성운동에서 그녀의 첫걸음은 시험적이고 임의적이었다.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과의 대결 1905년 혁명 이후, 1906~07년 동안 노동조합은 놀랄 만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1907년 힘을 재집결한 정부의 재공세를 물리칠 만큼 세력이 공고하지 못했다. 1907~1911년 반동기 동안 활동가들은 클럽, 협동조합, 문화단체 등에서 활동하면서 노동조합이 부활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회복되기를 기다렸다. 이 시기에 콜론타이는 1908년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를 썼고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과 대결하며 활발히 활동했다. 1908년 부르주아 여성들은 ‘전 러시아 여성대회’를 개최하는데 콜론타이는 이에 파견할 노동자 여성대표단을 구성할 것을 당에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내 남성혁명가들과 이견과 갈등을 유발되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굽히지 않고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라는 팜플렛을 작성하고 대표단을 이끌고 대회에 참석했다. 노동자계급의 대표 1,000여 명이 모인 대회에서 수배 중이었던 콜론타이를 대신해 바르바라 볼코바는 콜론타이의 연설문을 읽었다.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에서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이 여성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엄중하게 경고했다.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의 요구가 아무리 급진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들의 계급적 지위 때문에 여성해방에 필수적인 현재의 경제사회적인 구조의 근본적인 변혁을 위해 싸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해방론자들이 “현존하는 계급 사회의 틀 안에서 평등을 구하고”, “이미 존재하는 특권들에 도전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싸운다”고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비판은 당시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의 운동이 노동자 여성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바가 없었고 여성해방론이 자유주의와 결합함으로써 사회주의 진영 내에서 여성의제를 부차화시키는 정세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여러 한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기초>는 여성운동으로서 초기 투표권 운동의 제한적 관점을 넓히는 데 기여했다. 유럽에서의 망명생활 콜론타이가 여성대회에 참여하여 여성해방론자들과 심각한 공방이 이어져 그녀의 소재가 경찰에 탐지되었다. 그녀는 구속되고 감옥에서 몇 년을 보내기보다 러시아를 떠나기로 했다. 그녀는 1908년에서 1914년까지 독일에서, 1914년부터 1917년까지는 스톡홀름에서 망명생활을 했다. 콜론타이는 유럽에서의 황폐하고 쓸쓸한 10년 간의 망명 기간 동안 공허함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콜론타이는 유럽에 있는 동안 중년의 (결혼한) 경제이론가인 P.P.마슬로브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후에 그녀가 회고하듯이 그것은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지적 욕망과 활동가로서의 결의를 존중받고 관심을 받고 싶어했지만 마슬로브는 혼외의 성적인 모험을 원할 뿐이었다. 수번의 만남과 기차역에서의 쓰라린 이별 후에 콜론타이는 마슬로브와의 관계를 끝내고 당의 전업 정치선동가로 돌아가게 된다. 마슬로브는 가족과 아이들에게로 돌아간다. 이런 경험들과 성적관계에 대한 생각들은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썼던 여러 개의 글로 나타났다. 그녀는 정신분석에 관심있는 마르크스주의자인 그레테 마이젤-헤스의 글을 읽게 되었다. 콜론타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1) 결혼은 부부간의 불일치를 허용하지 않았고 많은 경우 애정의 침식으로 끝난다. 2) 매춘은 더 심하다. 콜론타이는 “(매춘은) 사랑을 질식하게 한다. (매춘의) 에로스는 황금빛 날개를 더럽히게 될까 하는 두려움 속에 날아간다”고 썼다. 마지막으로 3) 대안적인 자유결합 또한 부적절했다. 왜냐면 그것은 대개 “위대한 사랑”이라는 형식을 띠었는데 그것은 파트너 모두의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특히 여성의 자존감을 훼손시키는 고통스럽고 소비적이며 비극적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런 세가지 형식의 성적 삶을 살아가는 현대 여성들은 반대로 그녀들의 “사랑의 역할”을 통해 “사랑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성적 우정으로서, 서로를 유폐시키거나 소멸시키지 않으면서도 주의깊고 서로를 인지하며 서로에게 민감하고 세심한 관계였다. 그녀 스스로를 “신여성”이라고 부르며 그녀는 “감정보다는 자기절제, 복종과 정체불명의 인간성보다는 자유와 독립의 가치 인정, ‘사랑받는 이’의 고립된 성질에 몰두하고 골몰하기보다는 개인성을 인정하도록”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그녀는 “남성의 그림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여성”이 되어야만 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국제사회주의가 붕괴되자 콜론타이는 멘셰비키 경향의 유보적 자세를 청산하고 1915년 여름, 레닌과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콜론타이는 볼셰비키로서 레닌의 반전 국제주의 슬로건을 생생한 호소로 바꾸어 곳곳에서 연설을 했고 그해 9월 미국으로 건너가 4개월 동안 4개 국어로 123회의 강연과 연설을 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로서 여성운동을 전개 볼셰비키 중앙위원으로 선출(1917) 1907년에서 1911년까지 노동자운동의 침체기가 지나고 1911년 다시 노동자 파업이 증가하기 시작하고 러시아 도시지역에서 다시금 폭발적인 파업투쟁이 일어났다. 그러던 중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이는 혁명의 열기에 찬물이 끼얹었다. 1914년 세계대전 발발 이후 노동자계급은 전쟁이라는 비상사태에서 굴복했다. 그러나 노동자운동의 정체는 오래가지 않아 1915년 다시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 1916년 초에는 전쟁중지와 같은 정치적 요구까지 나타났다. 1914년 전쟁 발발 후 페트로그라드는 국방장비의 3분의 2를 생산하는 러시아 군수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6년 말~1917년 초 임금은 상승했지만 작업조건은 열악해지고 노동강도는 강화되었으며 노동시간이 연장되었다. 이에 따라 산업재해가 증가했지만 노동자들이 문제를 제기하면 전선으로 보내지거나 체포 또는 해고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혁명은 예기치 않게 도래했다. 1917년 2월 23일(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에 여성들이 시위를 하면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3월 3일 니콜라이 2세는 이런 봉기의 물결에 밀려 퇴위에 동의했다. 8월 31일 전국 소비에트 헤게모니를 장악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을 대표하는 정부, 대영지의 몰수, 산업상의 노동자관리 도입 등을 골자로 하는 볼셰비키 결의안을 처음으로 통과시켰다. 그해 10월 25일 전러시아소비에트 대회에서는 소비에트 전체 대의원의 60%가 볼셰비키였다. 이어 10월 26일 2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에서 볼셰비키만으로 구성된 인민위원회가 결성되고 이로써 볼셰비키 정부가 권력을 장악하게 된다. 이렇게 볼셰비키의 권력이 막강해지는 가운데 콜론타이는 1917년 8월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전체 위원 중에서 여성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출되었고, 스탈린과 스베르들로프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았다. 그것은 여러 정황적 요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녀가 혁명적 연설가로서의 탁월함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은 콜론타이를 재능 있는 선동가로서만 보지 않고, 비록 일시적이나마 이론가로서 인정을 했다. 이것은 10월 이론적 문서인 ‘최중요 임무’에 관한 당강령 초안 작업을 위한 위원회에 레닌, 트로츠키, 부하린, 케메네프, 소콜니코프와 함께 콜론타이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남자들의 세계에서 중요 인물로 인정받은 후 콜론타이는 여성의 것으로 분류되는 일들을 회피해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여성해방에 대한 신념을 지속적으로 실천해나갔다. “새로운 계층들을 분리시키고 후진 부분에서 새로운 주도권을 각성시켜라”라는 레닌의 지시는 콜론타이에게 여성들을 대상으로 작업하라는 명령으로 해석되었다. 콜론타이는 ‘프라우다’에 실은 최초의 논설 중 하나에서 임시정부의 남자들은 빵을 달라는 시위와 요구로써 2월 혁명을 점화시켰던 노동계급의 여성들에게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비판했다. 콜론타이는 여성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위원회나 담당부서를 설치해야 한다고 1906년 이래로 수없이 제안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계획은 진척되지 않았다. 레닌의 명령은 분리주의에 대한 혐의 때문인지 콜론타이의 계획과 조화가 되지 못했다. 그렇지만 콜론타이는 끊임없이 병사부인과 여성노동자들을 흡수해나갔다. 1917년 봄, 콜론타이는 세탁부들의 파업을 지도하도록 파견되었다. 사설세탁소에서 극악한 노동조건에 시달리던 세탁부들은 처음에는 본질적인 경제적인 요구를 했지만 콜론타이의 지도 아래 전쟁에 반대하고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볼셰비키들의 결의를 찬성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여성운동은 콜론타이가 원했던 중앙화된 기구를 갖지는 못했지만 대신 잡지 ‘라보트니차(여성노동자)’를 복간했다. ‘라보트니차’의 편집인들은 실업과 같은 시사적인 문제들, 여성들을 괴롭게 하는 높은 생계비와 전쟁의 관계 등을 기재하여 반전과 국제주의의 깃발 아래 여성노동자들은 대중 시위를 벌이라고 호소했다. 집회는 ‘라보트니차’의 예상을 뛰어넘어 수천의 군중이 운집했다. 1917년 10월 초가 되어 볼셰비키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반대해왔던 당내 여성사업 전담 기관을 설치하는 데 동의했다. 그것은 1910년 이래 러시아 노동여성의 혁명적 잠재력이 보다 명백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들은 공장노동자이거나 파업참가자라할지라도 ‘여자’는 동지로서 진지한 대우를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1917년의 역경 속에서 볼셰비키가 깨닫게 된 것은 노동계급여성을 조직하려는 ‘라보트니차’ 그룹, 특히 ‘콜론타이’의 잠재력이었다. 10월에 페트로그라드의 공장과 상점을 연결하는 조직망이 발전해 가는 가운데 ‘라보트니차’의 편집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의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콜론타이는 중앙위원회 앞에서 비당원 여성노동자들이 볼셰비키를 따라 결집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1917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제1차 전 러시아 여성대회가 열렸고 여기에는 공장, 노동조합, 당 조직의 8만 명 여성을 대표하여 500명의 대표단이 참석했다. 이 대회에서 콜론타이는 <가족과 공산주의>를 발표했다. 콜론타이는 러시아 여성들에게 1)혁명과 더불어 남성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는 새로운 인생의 가능성에 대해 마음을 열어야 하며, 2)이혼에 대한 권리로서 “새로운 자유”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주문한다. 또 3)낡은 가족의 유형은 그 종말을 보이고 있으며 4)가정생활이란 여성들을 종속적으로 묶어두며 집단적 사회의 발전을 방해하는 자본주의 국가의 가장 핵심적이자 강제적인 사회적 제도다, 5)집단이 가족을 대체하게 될 것이며, 6)노동자들의 국가는 두 평등한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을 필요로 한다고 호소했다. 콜론타이는 가사노동과 자녀양육의 사회화를 통해 여성의 출산과 생산적인 노동이 결합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정부는 여성의 결혼 여부를 떠나 생계를 보장해야 하며 공동체 양육으로 여성들로 하여금 출산의 부담에서 벗어나 모성의 즐거움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성보호소와 탁아소가 보장된다면 여성들은 더 이상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었다. 그녀는 또한 아이들이 가족이라는 경계를 넘어 동료애, 연대 상호부조, 집단생활에서의 헌신을 배워 공동체에 대한 책임과 협동을 습득하길 원했다. 그리고 여성들이 자기 자식만의 어머니가 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모든 자식에게도 어머니가 될 것을 촉구했다. 그녀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적토대인 가족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다. 이는 모두 여성해방을 위한 여성의 사회적 노동과 경제적 독립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소비에트연방공화국 후생성인민위원으로 임명 1917년 11~12월 총선거에서 볼셰비키는 병사 표의 42%와 노동자 표의 과반수를 얻었지만 제헌의회의 과반수를 차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를 옹호하는 시위대에게 볼셰비키 병사들이 총격을 하는 암울한 분위기에서 제헌의회가 개최되었다. 볼셰비키가 제헌의회 측에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라고 했지만 제헌의회가 끝내 받아들이지 않자 이들은 제헌의회를 폐쇄해버린다. 이와 동시에 개최된 3차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는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여기서 콜론타이는 공화국의 후생성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인민위원회는 임시정부와의 차별성을 보여주기 위해 1918년 1월 평화, 토지, 노동자 생산관리, 이혼 등에 관한 116개의 포고령을 발표한다. 콜론타이는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자들이 경시했던 어머니로서의 여성을 보호할 방책을 강구하였다. 1918년의 소비에트 가족헌장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지만 콜론타이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부분 반영하고 있다. 출산전후의 휴가를 보장하는 법률은 노동여성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규정 중의 하나였다. 가족헌장은 정부 부담의 아동보호 및 인민들이 무관심한 친지들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는 ‘질병과 노후에 대한 보험조항’, 그리고 입양의 금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입양 금지 조항은 입양아가 아동노동에 대한 농민들의 착취를 은폐하는 데 이용되는 것에 대한 우려와 고아들이 쁘띠 부르주아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동보호소에서 보다 더 잘 양육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콜론타이의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녀가 부유한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을 퇴역군인들을 위한 병원으로 급격하게 탈바꿈하려고 하자 이에 수도승들은 그녀를 바빌론의 창녀라고 부르며 저항하였고 볼셰비키의 복지부가 만든 어린이 보호소를 불태웠다. 수병과 병사들이 인민위원회로 몰려와 그들이 전선에 나가있는 동안 그들의 사랑하는 딸들을 모성보호소에서 맡아달라고 콜론타이에게 애원했지만 보호소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시설이 부족했던 아동보호소는 곧 황량한 장소로 변했고 어머니들은 아이들을 그런 한심한 상태에 맡기려 하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혁명이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원조가 전무한 상태 속에서 좌절했다. 그러나 그녀는 혁명을 구하려는 필사적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1918년 전시 공산주의 시기, 소비에트 여성정책을 주도 1918년 여름, 반볼셰비키 백군 대 볼셰비키 적군 사이 내전이 발생한다. 내전으로 인해 30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티푸스, 천연두, 이질 등의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내전은 경제를 황폐화시켰고 산업은 거의 정체상태에 빠졌다. 1917년 이후 기계마손, 공급차질, 노동강도 약화 등으로 인해 공업생산성이 하락하고 대중의 삶은 피폐해졌다. 소비에트 여성정책 주도 콜론타이는 권력에 있어서는 아니지만 정치적 활동에 있어서는 내전 중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혁명정부에서 여성관련 정책들은 대부분 콜론타이에 의해 주도되었고 레닌은 이를 지지,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당시 콜론타이는 ‘여자 레닌’으로 불리며 소비에트 정부와 적극적 공조를 펼쳤다. 소비에트 정부는 가장 먼저 가족법을 새로운 소비에트 여성상에 맞도록 제정하였다. 1918년 정부는 교회의 결혼에 대한 영향력을 제거하고 여성이 자신의 성이나 남편의 성을 선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사생아도 적자와 같은 법적 권리를 갖도록 하는 가족법을 공표했다. 이 법은 남편과 아내의 법적 신분이 동등함을 명시하고 부인이 획득한 재산에 대해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또 이혼의 자유를 보장하고 이혼 후에는 남편이 자녀 부양비를 아내에게 지급하도록 조치하였다. 1918년 10월 새로운 가족법에 근거하여 여성에 대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18년 가족법 제정은 가족제도가 쇠퇴할 미래를 대비하는 콜론타이와 같은 급진론자들과 가족을 강화하려는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긴장상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회적 가족에 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개별가족이 자식을 부양할 책임, 교육과 양육의 책임 등이 규정되었다. 1920년 낙태가 합법화 되지만 이데올로기적 이유가 아닌 기아와 내전 속 불가피한 비상조치였다. 볼셰비키정부의 정책은 그 미사여구와는 반대로 처음부터 콜론타이의 입장에 따라 핵가족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제노텔의 건설과 활동(1919~1921) 콜론타이는 후생성과 제노텔을 통해 여성해방론을 현실화시키려고 했다. 1918년 12월 레닌의 적극적인 지지로 아르망, 콜론타이, 니꼴라예바가 주축이 되어 개최한 ‘제1차 전 러시아 여성노동자, 농민대회’에는 10월 혁명 이후 최초의 전국규모의 대회로 1천여 명의 노동자계급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 대회 이후 여성해방을 위한 전국적인 여성조직을 결성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었고 기존 여성국을 중앙위원회 사무국 산하의 여성부로 전환시켜 소비에트 여성사업 전담기구인 제노텔로 승격시킨다. 제노텔은 콜론타이가 오래 전부터 구상하고 설립하기 원했던 것이었다. 여성문제를 전담하는 정치기구를 따로 두어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콜론타이를 배제하고 당 통제가 가능했던 아르망을 초대 국장으로 임명했다(1919-1920). 아르망이 있는 동안 제노텔은 콜론타이의 구상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여성의 문제를 주도적으로 제기하기보다는 백군과의 내전기간 동안 적국에서 선전선동 활동을 하거나 군인들에게 보낼 물자를 만들고 부상군을 치료하는 일 등에 여성인력을 동원하는 기구로 전락한 것이다. 제노텔이 여성노동자들을 동원하는 데 그치는 것에 불만이었던 콜론타이는 1920년 제노텔의 대표로 임명되면서 제노텔의 자율성 문제를 거론한다. 그녀는 제노텔이 전체 노동자 운동의 하나이며 서로 불가분의 것이라는 입장에서 자율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제노텔이 당 사업에 여성을 동원하기 위한 하부조직이 아님을 강조했다. 콜론타이의 이러한 입장은 제노텔 회의에서 채택되었으나 이는 당 지도에 순응하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당내에서는 콜론타이의 견해를 경계했다. 노동자반대파(1920~1922) 1920년대 초반 트로츠키의 ‘노동군’ 계획은 동원해제하기로 되어있는 적군 병사들을 주요 공공작업장과 공업체에 배치하여 군사적 규율에 따라 노동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노조가 국가에 통합되어 국가의 관리를 받고 국가 계획에 따라 노동자를 훈련, 교육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선봉대의 임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 3월 9차 당대회에서 이에 반대한 것이 ‘노동자 반대파’였고 이것이 노동자 반대파의 시초였다.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 조직을 군사화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의 선봉그룹을 만든다는 트로츠키의 구상을 권위주의적이라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의견이 처음부터 노동자 반대파와 의견이 합치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1920~21년의 겨울 동안 그녀는 노동자 반대파가 자신의 항의를 전달할 수 있는 적합한 매개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운동에 가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지도자가 되었다. 극도로 불안한 사회경제적인 상황에서 레닌은 권력의 문제보다 생산성의 문제를 더 절박하게 생각했다. 이에 콜론타이는 레닌이 생산력 향상에만 몰두한 나머지 새로운 체제에서 노동자들이 어떻게 생산과정과 경영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레닌 동지는 생산성 향상을 위해 노동조합에 경영권을 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생산성 향상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노동자는 혁명을 수행했음에도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아무런 수단도 갖지 못하였다. 노동자는 사소한 임무나 수행하는 도구로 전락하였다”고 비판했다. 1921년 3월 10일 제10차 당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크론슈타트 수병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중앙집권적인 당의 통제를 요구하는 분위기가 강화되었다. 제10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는 노동자반대파의 입장을 ‘아나코-생디칼리즘’으로 매도했다. 이로써 콜론타이의 정치적 생명도 타격을 입게 된다. 콜론타이는 노동자 반대파 내에서 운동이론가로의 역할을 자임하며 단순히 노조의 문제가 아닌 소비에트 사회의 근본적인 병폐에 대해 말하며, 날카롭게 노조에 대한 분석을 했다. 당시 자율적 노동자조직이 붕괴되고 내전을 거치면서 생산성이 극도로 저하된 상황에서 노동자 반대파의 이상과 프로그램이 실행 가능했는가는 또 다른 문제지만 노동자 반대파와 콜론타이의 문제제기는 혁명정신의 원칙을 상기하는 것이었다. 제노텔의 위기와 해체(1921~1930) 내전을 겪으면서 생산성이 하락하고 대중들의 생활이 비참해짐에 따라 민중봉기가 점증했다. 이런 위기에 직면하여 당은 전시 공산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정책을 도입할 필요성을 느꼈다. 1921년 봄부터 레닌에 의해 진행된 ‘신경제정책’은 여성노동자의 대량실업사태를 초래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과 취업차별 철폐의 원칙이 무너지고 여성노동자 우선해고가 진행되었다. 제노텔의 대중기반이었던 여성노동자들의 실업은 제노텔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노텔은 해고 범위 결정에 대표자 참석과 실업자에 대한 기술 교육 실시를 당에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콜론타이는 1920년 10월 제노텔 조직자 회의에서 ‘제노텔의 임무는 당의 과업을 대중에게 알리는 것보다 어떤 영역이든 여성문제가 제기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주도권을 쥐고 할동하는 것’이라는 강령을 채택했다. 이는 당과의 갈등을 불러일으켰고 당은 콜론타이를 제노텔에서 해임시키고 골루베바로 교체했다. 그러나 골루베바는 콜론타이와 의견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23년 12차 당 대회에서 골루베바와 콜론타이의 주장을 ‘여성의 일상생활을 개선한다는 기치 아래 남녀의 공통 과제인 계급투쟁으로부터 여성을 멀어지게 하는 여권론적인 일탈’로 규정하고 제노텔에 대한 모든 논의를 종결시키기로 한다. 결국 여성해방을 위한 콜론타이의 원대한 프로그램은 내전과 경제적 위기로 실현되지 못했다. 콜론타이의 ‘새로운 도덕’ 콜론타이는 <새로운 도덕과 노동계급>(1918)에서 전통적 결혼관계를 논박하고 이 관계를 갖지 않고 살 수 있는 ‘새로운 여성’을 묘사하며 가족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완성시켰다. 그녀는 ‘성적인 면에서 유연성을 가진 덜 안정된 결혼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적합하다’라고 주장했다. 개인적인 부부나 가족의 연계성이 강하면 강할수록 노동자의 연대는 약해질 것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업이 위기에 처했을 때 가족 보존을 위해 자본을 빼돌리는 자본가처럼 파업 중에 가족의 보존을 위해 일을 하는 파업파괴자가 있다는 것이다. “이전의 가족관계가 몰락하는 공동체 내에서는 두 명의 동등한 노동자간에 ‘애정과 동지의식’에 기초한 새롭고도 자유로운 결혼관계가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 새로운 도덕은 당내에서 격렬한 반대와 비난에 직면하였다. 콜론타이의 이론은 소련에서 공동체 생활의 기초를 제공하기보다는 정치적 방해물로 간주되었다. 콜론타이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계급과 국가, 종교의 소멸과 더불어 부르주아 가족제도 역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은 가족을 대체하기보다는 노동자 어머니를 위한 가사노동의 사회적 대체를 구상하는 정도였다. 여성들에게 결혼의 문제가 그들의 종속상태를 가장 분명하게 하는 출발점임을 인식하지 못한 레닌은 1918년 독일 노동자들이 결혼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다루려는 토론회를 구성했다는 말을 듣고 통탄한다. 한편 부하린은 <공산주의의 기초> 중 당 프로그램의 설명에서 종교, 국가, 은행, 금융제도는 소멸될 것이나 가족은 가사와 육아를 제외하고는 손상되지 않고 보전될 것이라 보았다. 볼셰비키는 핵가족의 붕괴를 바라지 않았다. 이는 결혼이 여성에게 최고의 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 콜론타이 견해와는 일치하지 않았다. 날개달린 에로스 콜론타이는 여전히 전통적인 생활을 하는 볼셰비키들을 놀랍게 하는 여성이었다. 46세의 콜론타이는 1917~1918년 29세의 혁명 해군인 파벨 디벤코와 혼인등록을 하지 않은 결혼생활을 했다. 콜론타이가 디벤코의 육체적 매력과 혁명적 에너지에 이끌렸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그와의 관계를 결혼을 통해 신성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그의 설득으로 인해 결혼을 하게 되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콜론타이의 이런 결혼에 불만이었다. 레닌은 한번은 “연애가 정치와 뒤섞이는 여성은 신뢰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하였고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이 커플에 대해 거친 농담을 던지기도 하였다. 디벤코와의 결혼생활이 5년이 된 즈음 디벤코는 한 젊은 여성과 사랑에 빠져 있었다. 결국 그들의 결혼은 불행으로 끝났다. 콜론타이는 다시 한번 혁명적 정치와 혁명적 사랑을 결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깨달았다. 그 불행의 상처는 콜론타이로 하여금 애인인 동시에 공산주의자인 남성들과 여성들 사이의 감정, 의사소통, 그리고 신뢰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하였다. 만약 그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면 왜 그들은 진정으로 동료가 되지 못하는가, 콜론타이는 반문하였다. 노동자 반대파 활동과 제노텔에서 당과 마찰을 빚는 활동으로 인해 쫓겨나고 디벤코와도 헤어짐으로써 1922년은 그녀의 정치생명 뿐 아니라 감정적으로도 최저점이었다. 거칠고 고통스러운 나날들 속에서도 그녀는 페미니스트로서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혁명이후(1918~1923) 시기 동안 성에 관한 글을 썼는데 이 당시 글은 교육받지 못한 여성과 남성, 그리고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당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여성의 종속을 토대로 한 과거의 결혼관습을 거부하면서 두 평등한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결합으로서 새로운 소비에트적 남녀결합의 이상형으로서 “동지애적 결합”을 제시했다. 1860년대 이미 많은 인텔리겐차들이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그녀는 비합법적 결합도 합법적 결합만큼이나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국가가 결혼제도 안이든 밖이든 태어난 아이들을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날개달린 에로스의 길을 열자: 젊은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1923)에서 그녀는 성에 대해 통속적이고 생리적이며 “물질적인” 이론들에 반대하면서 친구이면서도 동지인 파트너에 대한 정제된 열정과 숙려를 전제로 하는 “날개달린 에로스”라는 그녀 고유의 개념을 발전시키게 된다. 그녀가 사랑에 대한 대안적 관점을 제시한 것은 사회주의에서 이전의 부르주아 계급의 사랑과 결혼을 대체할 노동자계급에 알맞은 사랑의 방식을 제안하기 위한 것이었다. <날개달린 에로스>에서 콜론타이는 사랑이 단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대 사회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구성되었음을 지적한다. “사랑은 절대 사랑하는 두 당사자들만의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사랑은 한 집단에 가치 있는 요소들을 결합하게 해준다. 역사적인 발전의 각각 단계들에서 사회는 어떤 조건 하에서 사랑이 ‘적합한지’(즉 주어진 사회의 집단적 이익에 부합하는지) 혹은 죄악시되는지(주어진 사회의 업무에 반하는지) 정의하는 규범들을 마련했었다는 사실로부터 이는 명확해진다.” 이를테면 봉건제 하에서 정신적 사랑과 영주의 부인이나 여왕에 대한 동경은 귀족 계급의 이해에 봉사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 가족의 기반은 부에 대한 공동소유보다 자본의 축적을 위한 것으로 부의 축적에 공통의 이해가 달려있는 가족 구성원들은 강력한 감정적, 심리적 유대로 묶이게 되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도덕은 에로스의 자유를 단호하게 제한하며 법적으로 혼인한 부부에게만 오직 협조적이다. 이들의 사랑은 서로에 대한 배타적 소유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결혼 외부에서 남성은 성적 관계를 돈으로 사거나(성매매) 은밀한 간음을 통해 성욕을 해결하게 된다. 반면 여성의 성욕은 무시된다. 그러나 콜론타이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의 도덕은 어떤 공식화되어 있는 사랑의 형식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단지 성적 본능이 아니라 동지애에 대한 다면적인 경험을 추구한다. 이는 다음의 원리에 입각하는 것이다. 1)관계에 있어서의 평등(남성이기주의와 여성 개인에 대한 노예적 억압의 종식), 2)타인의 권리와 타인의 마음과 영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부르주아 문화에 의해 고무되는 소유 관념과 달리), 3)동지적 감성, 사랑하는 이의 내적 움직임을 이해하고 들을 수 있는 능력(부르주아 문화는 오로지 여성에게만 이를 요구한다). 그러나 레닌은 콜론타이의 ‘자유로운 남녀 결합’ 사상이 소비에트 젊은이들에게 도덕적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판했다. 콜론타이의 자유결합에 대한 레닌의 비판은 여성관의 차이에서 발생하는데 레닌은 여성을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한 자녀의 재생산과 교육을 담당하는 존재로 설정했다. 자녀를 공산주의 재원으로 양육하는 이러한 노동자-어머니 모델은 70년 간 소비에트 국가의 여성상으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여성관에 의하면 소비에트 여성들은 남편과 자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제노텔에서 제거되고 노르웨이로 추방된 일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레닌은 죽고 스탈린과의 평화적인 관계로 그녀는 쉴리아프니코프와 디벤코를 포함한 그녀의 동지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간 숙청을 피할 수 있었다. 이후에 그녀는 스웨덴의 왕립의회에서 소비에트 연합을 대표하도록 임부를 부여받는다. 그녀는 첫 여성 외교관(스웨덴)으로서 마지막 활동을 장식했다. 그녀는 러시아로 돌아와서 은퇴생활을 하며 글을 쓰다가 1952년 모스코바에서 생을 다했다. 콜론타이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에 사회적 기초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사와 양육의 문제, 낙태, 성매매, 남성에 대한 경제적, 심리적 의존 등 여성에게 고유한 여러 문제들이 사회경제적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여성이 2차 노동력으로 착취되는 문제, 재생산노동을 위해 착취되는 문제들이 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를 이룬다. 콜론타이는 여성문제의 사회적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사회가 근본적으로 변혁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그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 여성들이 갖는 이해는 부르주아 여성의 그것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콜론타이는 자본주의가 철폐되면 자동적으로 여성해방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여성의 문제를 사회경제적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족제도가 변혁되지 않고는 여성이 자유로워질 수 없으며, 새로운 사회는 그런 변화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가족을 대체하는 대안적인 관계를 제시했던 것이다. 그것이 기존 가족의 근간을 이루는 배타적 관계, 결혼관계 내에서만 긍정되는 관계가 아닌 공동체적인 동지애적 사랑이다. 콜론타이에게 노동력 착취의 문제와 가족, 사랑의 문제, 이 두 가지 측면이 콜론타이의 사상의 근거가 된다. 첫 번째 측면에서 여성이 가족에서 불평등한 위치를 차지하고 여성이 감정적으로 남성에 의존하게 되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존재였고 이로 인해 여성은 공적인 일을 하더라도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콜론타이는 경제적으로 독립적이며 감정적으로도 남성에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인 여성으로서 ‘신여성’이라는 모델을 제시했다. 그런데 신여성 모델이 가능하려면 가사, 육아가 사회화되어야 했다. 여성 개인, 혹은 개별 가족이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책임지는 시스템이 필요했고 콜론타이는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 분투했다. 두 번째 측면에서 콜론타이는 끊임없이 노동자 대중들에게 가족의 약화와 새로운 관계가 필요함을 호소했다. 콜론타이가 말했던 육아의 사회화는 단지 공공 탁아소에 아이를 맡기는 것을 넘어 여성들이 자식에 대한 배타적 사랑을 넘어 내 아이 네 아이 할 것 없이 공동체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즉 자식에 대한 소유 관념을 철폐하는 것이었다. 콜론타이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르주아 가족제도 안에서 형성되는 사랑의 개념을 깰 것을 요구한다.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적 조건은 여성해방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개념화한 것이 기존의 서로에 대한 소유 관념에 얽혀 있던 ‘날개 없는 에로스’를 버리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 간의 동지애적 사랑을 추구하는 ‘날개달린 에로스’였다. 그것은 여성의 역할이 남성을 보조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으며 독립적인 운동의 주체로 나설 수 있는 공동체적 관계를 포함하는 것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여성과 남성 모두의 변화를 요구한다. 유념할 점은 콜론타이가 제시한 동지애적 사랑이 ‘혁명의 주체로서 노동자들이 추구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동지애적 사랑이 노동자들의 주체화 과정과 결합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날개달린 에로스‘를 노동자운동의 관점과 유리시켜 사고하는 것은 콜론타이의 사상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그녀가 제안한 것은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와 문화적 변화의 동시적 진행이었다. 또 그녀의 사상에서 여성 고유의 문제는 여성의 사회경제적 문제와 분리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성권과 노동권의 결합이라는 문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여성문제를 제기하고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을 결합하려 했던 그녀의 관점은 탁월한 것이었다. 참정권 운동을 위시로 부르주아 여성해방론이 노동자 여성들의 이해에 복무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며 노동자운동 내에서 페미니즘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여성들을 아래로부터 조직함으로써 여성문제를 알려내려 했던 그녀의 노력은 현재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자신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서 감정적 늪에 빠지지 않고 그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고민하려 했던 그녀의 노력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이는 단순히 여성 스스로 ‘이성적이 되자’거나 ‘감정을 억제하자’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이 운동의 한 주체로 살면서 부딪히게 되는 문제들을 둘러싼 사회구조적 요인들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꿔나가기 위한 집단의 실천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콜론타이는 아들에 대한 사랑, 연인에 대한 사랑으로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문제를 개인적 감정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그러한 문제의 사회적 맥락을 분석하여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성장하기 위한 토대를 만들고자 했다. 돌봄 노동의 사회화를 혁명의 과제로 제기하고 새로운 사랑의 형태, 방식을 제안한 것이 그런 것들이다. 그녀의 사상을 현재적 관점에서 적극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일 것이다.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현대가족 이야기』 노동자 운동이 다시 서야할 곳 ‘97년 IMF 경제위기 이후’ 한국 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대대적인 정리해고, 구조조정은 고용불안을 확산시켰다. 저임금, 불안정한 고용상태의 비정규직 증가는 청년 세대의 절망을 낳았고 안정된 고용에 대한 열망이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구조조정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는 정규직 노동조합은 정부와 자본이 붙여놓은 ‘이기주의’라는 딱지를 떼버리지 못하고 있다. 신축화 , 사유화가 최선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세대와 계층을 막론하고 한국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가 되고 있는 지금, 상황이 이리 되도록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에 대해 『사라진 정치의 장소들』,『현대가족 이야기』는 대표적인 제조업 공장인 울산 현대자동차 사례에 비추어 민주노조 운동의 실패를 평가한다.『사라진 정치의 장소들』은 엘리트 중심의 노동자 문화, 노동자 정체성의 변화, 물량의 논리가 현장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과 가상화되는 파업들을 다루며 ‘민주노조’ 정치양식을 분석한다. 이 책의 저자들은 기존의 파업이 조합원들이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활동가가 재생산되는 ‘노동자의 학교’로서 역할을 했다면 현재 파업은 사측과의 협상을 위한 물리력 동원으로서의 역할만 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이를 ‘파업의 가상화’라는 개념으로 정리한다. 다음으로,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이 몰성적(sex-blind)이었음을 비판하며 가족임금의 신화, 가족중심성의 문제를 짚는다. 『현대가족이야기』는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 가족의 삶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보여준다. 특징적인 것은 현재 ‘전업주부’의 삶에 생애사적으로 접근하면서 페미니즘은 물론이고 현대자본과 노동조합의 적대, 지역(공동체)에서의 삶, 노동운동의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그래서 두 책이 주는 결론은 다른 듯 유사하다. 그것은 노동자운동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변화한 자본의 전략을 적절히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 실리주의와 조합주의에 빠져 자본이 만들어 낸 게임의 룰에서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는 점, 노동조합은 엘리트 활동가만의 조직이 되어 현장에 군림하고 노동자 대중의 신뢰를 잃어 ‘민주노조’라는 말조차 무색해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현실이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노동운동, 바로 그 민주노조운동의 시효소멸을 증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책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노동운동 혁신’의 과제를 부여잡고 2010년을 맞이하는 노동자운동이 다시 시작해야 하는 장소가 무지개 넘어 어딘가라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로운 이념과 가치로 재구성되어야 하는 곳은 바로 여기라고 말한다는 것, 그걸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민주노조 운동의 시효소멸 과거 민주노조운동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이었고 우리 사회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민주노조운동은 국가의 노동배제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에 저항하는 사회민주화 투쟁이자, 인간해방과 평등세상을 추구하던 해방의 운동이었다. 그리고 공장, 지역, 가족, 학교 등의 공간을 노동자 투쟁의 역사적 장소, 노동자 정치의 현장으로 구성한 정치양식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위 문민정부가 들어서 형식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민주노총이 합법화되고,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민주노조운동의 유효성은 점차 상실되기에 이른다. ‘고용안정’의 배타적 강조 유효성 상실의 첫 번째 근거는 민주노조 운동이 내세우던 노조 민주화, 노동해방의 가치를 ‘고용안정’이 대체한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갑작스러운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이러한 변화는 전국적인 노-사 대리전이었던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투쟁에서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인정하던 순간이 계기가 되었다고 지목된다. 1990년대 내내 현대 자동차는 사측의 신경영전략과 노조 간의 현장권력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곤 했다. 하지만 현장 자체는 여전히 민주노조의 가치가 사측의 노사협력적 가치와 경쟁하던 정치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1998년 ‘정리해고자는 단 한 명도 받아들일 수 없다’던 지도부가, 함께 투쟁하던 남성 노동자와 여성노동자 277명의 정리해고에 합의하면서 조합원 개개인에게는 그 무엇보다 ‘고용안정’ 논리가 우위에 서게 된다. ‘불황으로 물량이 감소하고, 물량이 감소하니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사측의 논리에 노조가 무릎 꿇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대 자동차 조합원들은 불황과 해고의 불안으로 고용주와 노조 모두에 이중몰입(혹은 충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 잘릴지 모르니 돈벌이가 될 때 쎄 빠지게 벌기’ 위해 조합원 개개인은 더욱 잔업, 특근에 매달리게 되었다. 이러한 고용불안은 잔업, 특근으로 가능한 ‘상대적 고임금’과 함께 현대자동차 조합원과 그 가족의 정체성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현대자동차 노동자 부인의 인터뷰를 보면 정체성 혼란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남편 월급으로 먹고 싶은 것을 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내가 뭔가를 하고 싶을 때 바로바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간정도”는 된다고 생각하고, 빈부차가 거의 없는 동질화된 집단거주지에서 “기죽을 일도,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지만” 98년 명예퇴직을 하면서 퇴직금과 위로금을 받고 떠나 “잘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며 중산층과 구별되는 자신들의 계층적 지위를 실감하게 된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은 생활비를 최소화하고, 저축액수를 늘리고, 각종 보험에 가입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자녀교육을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두게 된다. 이렇게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불안을 대비하는 동안 노조는 아무런 비전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다. ‘불황이면 물량이 감소하고, 물량이 감소하면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는 자본의 논리에서 한 치의 벗어남이 없이 ‘물량 감소=구조조정’이라는 등식에 충실하게 물량확보에만 열을 올린다. 그리고 이는 조합원의 요구이니 노동조합에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자위하는 것에 그친다. 노동자의 최우선 가치가 변하고, 노조 역시 다른 전략을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파업’ 역시 더 이상 ‘노동자의 학교’일 수가 없다. 비전 없는 노조가 이끄는 파업은 사측과 협상하기 위한 물리력 동원 이상이 될 수 없고, 조합원들의 파업 참여도 형식적으로 관리되는 수준에 머문다. 그나마도 특근처리가 되어야 파업에 참가하는 정도이니 투쟁이 ‘속전속결’로 끝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설상가상으로 노동조합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간다. 2000년 현대자동차 지도부는 노동비용 삭감을 위해 노동현장의 신축성을 높이기 원했던 사측의 요구를 수용하며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정을 보장하는 ‘완전고용 합의서’를 체결한 것이다. 차별받고 억압받던 노동자가 부르짖었던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가치가, 그 가치의 구현이자 상징이었던 노동조합 스스로에 의해 훼손된 것이다. 노동조합은 더 이상 민주노조운동의 보루가 아니라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 고용안정의 방패막이가 될 수 있는 상대적 고임금의 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상징되고 민주노조운동의 정신은 현장에서 화석화되고 말았다. 물론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들은, 같은 노동이지만 더 낮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비정규 노동자들에 대해 ‘동등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같은 노동자로서 조건 없이 연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당장 자신의 고용불안 앞에서 비정규직과 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현대자동차 현장 활동가가 말한 대로 ‘당시에 노조가 정리해고를 끝까지 반대하고 나섰다면... 조합원들은 정리해고를 끝까지 반대하고 갔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조합원들은 그렇게 순응하는 방법을 배웠다.’ 이런 순응의 방식은 노조에 대한 불신과 노동자 계급의 분열, 노동자 개개인의 파편화로 이어졌다.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부재 두 번째로는 민주노조 운동이 자본의 남녀 노동자 분할 - 통제전략을 바로 보지 못했거나 실리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페미니즘 전략의 부재를 들 수 있다. 1998년 정리해고 투쟁에서 144명의 여성노동자 전원 정리해고에 합의한 사건은 노조가 남성노동자-부양자, 여성노동자-피부양자 혹은 생계 보조자로 가정하는 자본의 남녀 노동자 분할 - 통제 전략에 실천적으로 동조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실제로 ‘현모양처’를 만들기 위해 회사가 진행하는 조합원 부인 대상 교육은 그 내용이 노조의 활동을 방해하지는 않는다는 이유로 노조가 방관해왔다. 조합원 설문조사를 보면 절반이 넘는 응답자가 ‘결혼한 여성은 남편과 자녀를 중심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여 다수의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을 아내이자 어머니로 유폐하려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회사가 진행하는 각종 교육과 매체는 자본이 바라는 이데올로기와 논리를 주입하는 일상적 통로로서 ‘고생하는’ 남편, ‘훌륭한’ 아버지, ‘대견한’ 아들의 이미지를 노동자에게 주입한다. 좋은 가장되기, 자기 계발교육, 부부감성교육, 재태크 교육 등을 통해 생계부양자이자 고용불안에 처한 ‘회사인’으로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발적으로 노후를 대비하는 ‘노동하는 주체’로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불가능한 가족임금 실현을 위해 끊임없이 고강도 장시간 노동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 부인인 여성 역시 ‘행복한 가정 만들기’, ‘공장 견학’ 프로그램 참여 등을 통해 ‘내조’의 내용과 형식을 배우게 된다. 여성으로 하여금 ‘가정에서 큰 불만 없이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의 교육에 충실하여’ 남성의 노동력을 효과적이고 안정적으로 재생산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가사 전담자로서의 여성의 자기 인식은 노동시장에서 자신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따라서 저임금의 노동인 것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실제로 교육에 참여한 여성들의 평가를 보면 회사의 전략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먹히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교육이 초기 노조비판, 경영현황, 판매기법 등에서 ‘교양특강’이라는 형태로 바뀌다 보니 참여를 꺼리던 여성들은 ‘노느니 뭐해’ 하며 참여하게 되었고 “회사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고, 이렇게 큰 회사 덕택에 별 그거 없이 산다고 고마운 마음도 생겼”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 가서 남편 내조 잘하고 자식 교육과 건강에 더 신경써야 겠다”는 다짐이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회사 교육 참여에는 사측의 동원전략도 한 몫 한다. 초청장을 남편 노동자를 통해서 부인에게 전달한 뒤, 교육 참여에서 초청장을 수거하는 것이다. 이렇게 확인이 되다보니 회사에 찍힐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남편이나 부인이나 매한가지다. 초청장을 주는 남편이나 받는 부인이나 ‘노느니 뭐해’라며 참가로 마음이 기울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회사는 노동자와 그 가족에게 친기업적인 정서를 심어주고, 중산층을 지향하는 남성 생계부양 가족 형태와 가족 중심성을 강화하면서 남녀 모두의 노동권을 축소하려 해왔다. 그리고 이에 대응했어야 하는 노동조합, 민주노조운동은 자본이 만들어 놓은 계층 피라미드에서 여성의 노동권을 은폐하고 억압하는 데 암묵적으로 동조해왔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이 자신의 역할을 남성 노동자들의 노동권 방어로 한정하며 상대적 특권에 안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본의 공격은 다시 그들에게 향하고 있다. ‘노동의 여성화’라는 말처럼 자신이 의도적으로 방기했던 여성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불안정한 노동조건이 전체 노동시장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민주노조운동을 파괴하고, 끊임없이 노동비용을 삭감하려 하는 자본의 공격은 저임금 노동자의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들의 이익만 챙기려고 하는 ‘정규직 고임금 노동자’라는 칼날을 벼려 민주노조를 향해 겨누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공동체주의 훼손 세 번째는 노동자 거주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투쟁의 해방구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던 ‘민주노조’운동의 공동체주의가 훼손되었다는 점이다. 과거 현대자동차 조합원들은 구 시가지인 양정동에서 노동자 거주 밀집지역을 형성하고 살았다. 그러나 이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새롭게 형성된 중형 아파트 단지로 이동하면서 노동자 공동체 거주 지역은 파편화되고 조합원을 비롯한 조합원 가족들 간의 네트워크는 상실되었다. 공동육아, 공동투쟁, 정보교류, 상호 토론이 이루어지던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앉을 의자도 없이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는” 공돌이 인생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노동자와 전업주부는 자녀의 계층상승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며 좀 더 학군 좋은 곳으로, 더 잘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목돈이 들더라도 해외유학에 열을 올린다. 그리고 이를 위해 남편은 잔업, 특근에 부인은 남편 건강, 자식 교육의 최전방에 나서고 있다. 민주노조의 공동체적 가치가 사라진 곳에 노동몰입, 중산층 지향성이 뿌리를 내리면서 노동조합 역시 기본적인 노조 활동 이외의 지역 차원의 집단적 실천은 엄두도 못 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방범활동, 경로당 자원 봉사 활동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조합원들이 동네 일에 관심 없다. 회사, 노조도 지역 기여도 거의 없다....” 노동조합과 조합원이 지역 공동체에 개입하지 못하고 각자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동안 현대자동차를 상징하는 빨간 조끼에 대한 울산 지역의 거부감은 시기와 원망 섞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지역의 부정적 시선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상대적 고임금’인 현대 자동차 노동자들이야 파업을 하면 임금이 인상되고 노동조건이 개선되겠지만 현대차 하청업체, 협력업체는 부도위기에 빠지고 해당 기업 노동자는 생계의 위험에 처하는 일이 지역 내에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정갑득 후보뿐만 아니라 현대자동차 노조 전체가 지난 18년 역사에서 협력업체 노동자들을 위해 연대한 적이 없다.” 2005년 울산 북구 재보궐 선거에서 지역 비정규직이 정규직 출신 정갑득 후보에 대해 보인 반응이다. 이 말은 사내하청을 제도화한 정갑득 전 위원장에 대한 비판이자, 정갑득으로 대표되는 정규직 노조에 대한 지역 비정규직의 비판이기도 하다. 18년 역사에서 협력업체와 연대한 적이 없다는 표현의 진위 여부를 떠나서 같은 노동자로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그와 같은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현대자동차 노조에 대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지역의 인식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게 해준다. ‘민주노조운동’ 가치의 재구성 지역과 공장, 가족이 자본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분화되고 파편화되었다고 해서, 노동자 정치가 가능한 공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정치가 가능한 공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비가시적인 것일 뿐이다. 자본과 노동이 교차하고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희망과 불안의 모순에 노출되는 그 현장을 포착하고 비판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곳이 노동자 정치의 장소가 될 수 있다. 과거 민주노조 운동이 회사, 민족, 국가라는 공동체의 통합된 이미지와 그 재현을 깨뜨려 인간해방, 노동해방의 가치를 통해 공장, 지역, 가족, 학교를 ‘정치의 장소’로 재구성했던 것처럼 새로운 노동자운동 역시 신자유주의와 가부장제, 경쟁과 착취, 억압으로 보이지 않게 된 장소들을 새롭게 구성해 나갈 수 있다. 물량과 고용안정의 논리를 부수고 노동자 단결의 가치를 복원할 때, 고용 시간에 귀속된 일상을 깨고 지역의 비정규직, 여성, 이주노동자, 실업, 빈곤층과 연대해 나갈 수 있을 때, 여성을 착취ㆍ주변화하고 결국엔 남성에게도 굴레가 되는 가족임금과 성별분업, 가족중심성을 비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노동자 정치의 공간이 형성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노조운동’의 정치 양식이 시효소멸 했을 지라도 정치의 공간을 발견하고 재구성하려 했던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적 긴장을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다. 더 멀리 더 높이 뛰려면 움츠려 긴장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긴장하다 주저앉지만 않으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