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9~20일 진행된 민주노총 성평등 강사단 캠프 자료집입니다. 캠프에서 진행된 강연은 아래와 같습니다. 성폭력과 여성의 권리(정지영 |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장) 오늘날 한국에서 여성의 삶, 노동, 가족(김정은 |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차장) 그 밖에 교안 작성법, 강사 훈련법 등의 내용이 첨부되어있습니다.
11월 19~20일 진행된 민주노총 성평등 강사단 캠프 자료집입니다.
캠프에서 진행된 강연은 아래와 같습니다.
성폭력과 여성의 권리(정지영 |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장)
오늘날 한국에서 여성의 삶, 노동, 가족(김정은 | 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차장)
그 밖에 교안 작성법, 강사 훈련법 등의 내용이 첨부되어있습니다.
독일 사회주의 운동과 세계 여성노동자 운동의 헌신적 지도자 클라라 체트킨(Clara Zetkin, 1857.7.5.~1933.6.20.)은 ‘세계 여성의 날’을 최초로 제안한 독일의 혁명가로 매년 3월 8일이면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된다. 세계 여성의 날은 1910년 2차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에서 제안되었고 1911년 처음 개최되었다. 첫 세계 여성의 날 행사에서 세계 각국 여성노동자들은 무장한 경찰에 맞서 대규모 투쟁을 벌여 여성노동자의 힘을 확인시켰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시작도 세계 여성의 날에 즈음한 여성들의 횃불로부터였다. 매년 3월 우리는 현재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며 이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한다. 그 때마다 우리는 오늘에 되살아나는 클라라 체트킨을 만난다. 이번 연재에서는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지도자 클라라 체트킨의 삶 가운데 노동조합과 당의 헌신적 조직가로서, 세계 여성노동자 운동의 지도자로서, 수정주의 노선과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한 평화주의자, 국제주의자로서의 모습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사회변혁과 여성해방을 결합시키려 한 혁명가의 삶으로부터 오늘날 우리의 나아갈 바를 고민하기 위해서다. 클라라 체트킨은 76년에 이르는 일생의 대부분을 사회주의 이념의 실현, 여성운동의 건설과 확산을 위해 헌신했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 격정적 투사로 살았던 긴 세월에 비해 그녀의 삶과 고민을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다만 그녀의 수많은 연설과 기고, 편지의 내용이 책으로 남아있고, 그녀가 편집장이었던 잡지 『평등』을 통해서 일부를 접할 수 있다. 그녀의 일생이 길고 치열했던만큼 먼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함께 그녀의 일생을 짧게 살펴보고 그 중에서 주목할 만한 몇 가지 장면으로 다시 들어가보자. 식지 않는 이상과 열정을 가진 혁명가 클라라 체트킨 클라라 체트킨이 혁명운동에 헌신했던 당시는 독일이 영국의 세계적 헤게모니와 경쟁하며 산업과 무역을 발전시키고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던 시기다. 급격한 산업의 발전은 독일 사회민주당(SPD,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 이하 독일사민당)과 자유노동조합의 급격한 성장 배경이 되었다. 독일사민당은 1914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사회주의 정당이었고, 자유노동조합 또한 유럽 최대의 노동조합으로 성장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까지에 이르는 고도의 경제 성장에서 여성노동자의 산업 부문 진출도 급격히 증가했다. 독일의 여성 대중 조직화는 독일사민당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급격히 성장했다. 1908년 이전까지는 여성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어 있었고,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법 하에서 사회주의 운동도 많은 탄압을 받았지만 사회주의 여성들의 운동은 성장했다. 독일의 여성운동은 사회 경제적 조건의 급격한 변화 속에서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변화함에 따라 구시대적 여성억압을 타파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의지로부터, 그리고 여성 노동자를 사회주의 혁명에 동원하기 위한 독일사민당의 필요로부터 시작되고 조직되었다. 사회주의 여성노동자운동은 당시 상당한 전통을 가지고 있던 부르주아 여권운동의 대중적 영향을 능가해 20만에 이르는 여성들을 당과 노조로 조직했다.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 노동자들을 여기에 동참시키고 여성 문제를 제기하는 데 열정적인 활동을 벌였다. 특히 그녀는 여성 억압의 원인을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적 분석에서부터 도출하고 마르크스주의와 여성운동을 결합시키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 활동가로 평가되고 있다. 나아가 그녀는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를 창설하고 세계 여성의 날을 제안, 조직하는 등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국제적 확산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러나 이내 독일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제국주의 정책 하에 수정주의가 등장하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독일사민당은 분열한다. 체트킨은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에 합류하고 독일 공산당 창설에 동참했다. 이들은 독일사민당이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로의 이행이라는 수정주의를 수용하고, 국제주의적 이상을 기각하고 제국주의 전쟁에 찬성해 민족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는 데 맞서 격렬한 투쟁을 벌였다. 1918년과 1919년 독일 노동자들의 혁명적 봉기가 독일사민당과 군대에 의해 패배한 후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잔혹하게 암살당했다. 다행히 죽음을 피할 수 있었던 체트킨은 그 후 1919년 결성된 독일공산당(KPD, Kommunistische partei Deutschlands)의 중앙위원회에서 일하며 로자와 칼의 이상을 이어가고자 했다. 1920년 이후 그녀는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멤버로 러시아와 베를린을 오가며 활동을 벌인다. 코민테른의 서기 활동과 병마로 인해 소련에 머무르면서 그녀는 국제적색원조(MOPR, International Red Help)라는 조직을 지도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인종차별에 의해 살인혐의를 뒤집어쓰고 사형당할 위기에 처한 스코츠보로 흑인 청년들을 구제하기 위해 국제적 지원을 조직했던 일은 그 대표적 활동이다. 그녀의 마지막 투쟁은 파시즘과 맞섰던 것이다. 그녀는 1932년 독일 연방의회 개원사를 하러 나서서 파시즘에 맞설 노동자계급의 연합전선을 건설하자고 연설했다. 당시 연방의회 제 1당이었던 나치스 의원들 앞에서 파시즘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연설을 한 것이다. 70대 중반 클라라 체트킨의 목소리는 그녀가 일생동안 그랬던 것처럼 두려움 없이 당당했다. 그녀는 1933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활동에 헌신했다. 이렇게 짧게 살펴보아도 혁명과 전쟁의 시대 한 가운데에서 한 치도 비켜서지 않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그녀를 느낄 수 있다. 이제 클라라 체트킨의 탄생과 성장, 그리고 그녀 삶의 중대한 시점들로 다시 돌아가보자. 클라라 아이스너의 탄생과 사회주의자로의 성장 우리가 기억하는 여성 혁명가들 대부분이 그렇듯 클라라 체트킨 또한 교육받은 여성이었다. 클라라 아이스너(Clara Eissner)는 1857년 섬유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마을 뷔데라우에서 오르간 연주자인 아버지 고트프리드 아이스너와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신봉했던 어머니 조세핀 비탈레 사이에 태어났다. 어머니 조세핀은 교육받은 여성으로 뷔데라우에서 여성들을 위한 교육 협회를 설립하기도 했고, 종교제도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해 남편과 대립하기도 했다. 조세핀은 클라라가 평생 동안 여성의 권리에 대해 관심을 갖고 헌신하게 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클라라의 부모는 교육을 위해 1872년 라이프찌히로 이사해 곤궁한 생활을 했다. 당시 여성은 김나지움에 입학할 수 없었지만 명석했던 클라라는 반슈타이버대학 사범학교에 무료로 입학했다. 이는 여성에게 허용된 당대 최상의 교육과정이었고, 교육받은 여성들이 가질 수 있는 직업은 대개 교사였다. 대학에서 그녀는 아우구스테 슈미트, 루이제 오토 등을 스승으로 만나 여성 권리 운동에 대한 의지를 높였고 사회주의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때 배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는 그녀가 나중에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활약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한 클라라는 러시아 망명학생그룹과 인연을 맺고 독일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모임에 참석해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등 사회주의자들과 만났다. 그녀는 이후 스승들뿐 아니라 가족과도 인연을 끊고 마르크스주의를 더욱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때 만난 새로운 스승 오십 체트킨(Ossip Zetkin)은 러시아 망명자로, 후에 그녀와 사실혼 관계로 10년을 함께 한다. 그는 목수 일을 하며 혁명 활동을 하고, 모임이 끝난 후 클라라에게 과학적 사회주의를 강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클라라는 오십과 함께 노동자들에게 강의도 할 수 있게 되었다. 1878년 중반에 클라라는 독일사회민주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조직적으로 활동하지만, 여성의 정치 활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원이 될 수는 없었다. 같은 해에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자법이 통과되자 그녀는 당과 추방된 지도자들을 위해 자금을 모으며 비합법 활동을 벌였다. 1880년 오십 또한 체포되어 독일에서 추방당하자 그녀는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 스위스 취리히로 옮겨가며 당 중앙조직을 재건하고 당 문헌을 독일에 배포하는 활동을 했다. 1882년 파리로 가서 오십과 함께 살며 두 아들 막심과 콘스탄틴을 낳았는데, 독일 시민권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파리에서의 삶은 무척 고단했다. 추방당한 사회주의자들은 직업을 구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둘은 집필, 번역 작업을 했고 클라라는 주부, 어머니, 가정교사로도 일했다. 하지만 수입은 적었고, 심지어 1885년에는 입고 있는 옷 외에 아무 것도 없이 거리로 내쫓기기도 했다. 그녀는 가사와 양육, 생계를 책임지는 열악한 일상 속에서도 정치활동에 참여하며 파리의 사회주의 노동 여성들을 결집시키는데 힘썼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고단한 삶으로 두 사람 다 건강이 나빠졌다. 클라라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하지만 오십은 이로 인해 1889년 세상을 떠나게 된다.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국제적 지도자로 1886년 가난과 과로로 건강이 악화되어 잠시 독일로 돌아간 클라라는 라이프찌히의 비밀회합에서 첫 연설을 하게 된다. 서른 즈음에 하게 된 첫 연설에서 그녀는 운동에서 증대하고 있는 여성들의 역할, 그리고 아우구스트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라는 책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망명 생활에 관한 이야기와 여성문제를 다룬 연설은 대단히 인기를 끌어서 다른 그룹들에서도 요청이 쇄도했다. 몇 개월에 걸친 독일에서의 활동 후 파리로 돌아가 1889년에 오십이 사망하기까지 클라라는 가사일과 간호에 전력을 다했다. 오십의 죽음은 큰 충격이었지만, 그녀는 이내 수습하고 1889년 개최된 제2인터내셔널 창립대회 준비 조직위원회에 참가했다. 그녀는 베를린 노동여성 대표로 대회에 참가하도록 결정되었는데, 당시 대회에 참석하는 19개국 대표 400명 중 여성은 클라라를 포함해 8명이었다고 한다. 이 후 수 년 동안 인터내셔널의 서기로 활동하면서 그녀는 노동조합 운동과 당 운동에서 수많은 역할을 했다. 그녀는 제본공 노동조합 실행위원으로 활동했고, 브러쉬공, 의류, 목제공, 손장갑 제조공 등의 노동조합과 몇 개의 남부 노동조합에도 관여했다. 재단사 및 재봉사노동조합에서도 활동했다. 또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 최초의 여성 당 집행부로 활약했다. 1908년까지는 공식적으로 당원이 될 수 없었지만, 대신 별도의 여성 집회에서 여성들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다. 체트킨은 1892년 초부터 매년 모든 당 대회에 여성협의회 대표로 파견되도록 선출되었고 1895년에는 당 최상위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었다. 여성의 정치참여가 인정된 후 1909년에는 교육부를 책임지는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되었다. 노조와 당에서 그녀의 활동은 주로 독일 전역의 당 지부를 찾아다니는 연설자 역할을 비롯해 전단 작성과 배포, 해고되거나 파업 중인 노동자 지원, 그리고 민족이나 국제적인 차원의 노동조합 대회 계획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조직하기 위한 그녀와 여성 지도자들의 활동은 많은 성과를 낳았다. 한편 클라라 체트킨은 1891년부터 25년 간 여성 잡지『평등』의 편집장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재정적 어려움과 내용에 대한 비판 속에서도 25년 가까이 『평등』을 지켰다. 1902년 『평등』은 독일 사민당의 공식 기관지가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국제적 기구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1917년 클라라 체트킨은 적극적인 반전 활동으로 『평등』 편집진에서 제명된다. 그녀가 했던 많은 연설과 『평등』의 원고를 통해 여성문제에 대한 그녀의 분석과 입장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독일사민당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 독일사민당은 미조직된 여성들을 당과 노조에 동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미조직 여성들이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에서 우익적으로 동원되거나 남성 노동자와 경쟁하도록 활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대다수 남성들은 여성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훔친다’고 생각했지만 사민당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진출은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라고 보았다. 이에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 당 중앙과 지역 지도자들의 활발한 지원이 이어졌다. 당시 독일의 여성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미숙련 노동자로 남성들도 조직되지 않은 부문에서 일했다. 여성들은 농업, 가내 노동, 목화 산업, 미숙련 직물 제조업 등에 집중되어 지리적으로 분산되어 있었고,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따라서 교섭력도 없고 손쉽게 대체되었기 때문에 안정적인 조직이 어려웠다. 그래서 독일사민당으로 조직된 여성 당원들은 대개 당원의 아내인 주부였다고 한다. 한편 여성들은 투표권과 정치적 참여의 권리가 없었고, 교회의 영향을 많이 받아 대다수 여성들이 독일사민당을 불경시했다. 또한 일부 조직된 여성들은 노조와 당에 만연한 성차별주의에 밀려나기도 했다. 독일사민당이 여성 노동자 조직화에 많은 역량을 쏟은 것은 사실이지만, 사회주의로 조직된 여성의 이상적 모델은 남편의 높은 이상 추구에 헌신하는 희생적인 아내였다. 사회변혁에서 여성문제의 공백은 1910년대에 독일사민당과 자유노조연합이 20만여 여성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눈부신 성과를 달성했음에도 이 후 그 성과가 유실된 것에서 드러난다. 여성문제에 대한 독일사민당과 독일 노동자운동의 공백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이 가졌던 여러 공백 중 일부다.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직접적 영향 하에 세계 최대 규모의 당과 노조를 건설하고 엄청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았음에도 수정주의와 민족주의를 수용하는 실용주의적 노선을 택한다. 독일 사민당과 노조 운동은 1870년대 독일이 통일과 함께 중화학 공업 중심의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고 영국 자본주의가 유력한 경쟁자로 등장하는 상황에서 성장했다. 산업사회로의 급속한 이행은 대규모 노동력의 이동을 필요로 했다. 출신지역이나 인종, 종교, 직업, 숙련도에서 노동자간 이질성이 심화되었고 그 중에서도 여성은 전형적인 미숙련 노동자였다. 하지만 당시 독일의 노동자운동은 숙련공들을 중심으로 성장했고 노동자들의 가장 빈곤화된 집단에 대한 조직화에는 언제나 어려움을 겪었다. 독일 사민당이 여성문제를 사회주의 운동에 여성 노동자를 동원하는 문제로 기계적으로 인식했던 것은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대중적, 이론적 토대를 그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산업의 발달은 자본가들의 산업별 조직화에도 토대가 되었고, 노동자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자본의 대응도 강력해졌다. 또한 성장하는 산업은 필연적으로 더 큰 시장을 요구했고 제국적 팽창을 자극했다. 노동자운동 진압을 위한 강력한 국가 개입과 제국주의 정책 하에서 독일 노동자운동은 상대적으로 고임금 노동자들의 숙련과 지위를 방어하려는 실용적 성격을 띠면서 민족주의에 포섭되었다. 여성문제에 대한 독일 사회주의 운동의 공백은 클라라 체트킨을 비롯해 당시 여성 지도자들도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였다. 동원의 관점에서 이루어진 운동은 변혁운동과 여성운동의 기계적 결합에서 오는 수많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성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알리고 그녀들을 조직했던 사회주의 여성들의 활동은 여성문제에 관한 이론을 진척시킬 대중적 토대를 마련했다. 여성문제에 대한 클라라 체트킨의 입장 “… 오늘날 그토록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여성노동의 유해한 결과는 일단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소멸함으로써만 사라질 수 있다.” 1889년 파리, 2인터내셔널에서의 연설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일, 파리에서 개최된 2인터내셔널에서 클라라 체트킨은 ‘여성노동 철폐 주장을 비판’하는 연설을 했다.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에 대한 그녀의 분석을 최초로 제시한 연설이었다. 당시 남성들은 일하는 여성들은 타락했고, 그들에 의해 남성의 임금이 압박받기 때문에 여성들은 가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남성노동자와 경쟁해 임금을 떨어뜨리는 것은 여성의 노동 그 자체가 아니며, 남성노동을 더욱 철저히 착취하기 위해 값싼 여성노동을 이용하는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주장했다. 산업 발전 과정에서 싼 값의 여성노동과 생산수단의 개선은 여성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증가시켰고, 여성 노동자의 유입은 남녀 노동자 간의 경쟁과 분열을 불러왔다. 체트킨은 여성의 임금이 낮은 것은 그들이 노조로 뭉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남녀 노동자 전체의 이해관계에서 볼 때 여성노동자를 노동조합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가장 긴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의 노동은 여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이므로, 여성 노동자들은 사회주의 기치 하에서 남성과 동맹함으로써만 자신의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체트킨의 연설은 파리 대회에서 민족의 차별 없이 남녀 노동자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요구를 원칙으로 채택하도록 하는 성과를 낳았다. 한편, 당시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에는 반대했다. 노동계급의 일반적 이상과 여성의 이상을 분리시키지 않기 위하여 임신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특별한 보호조치를 반대했다. 그녀는 자기 해방을 향한 싸움에서 여성들이 투사가 되는 데는 남성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 보호조치에 관한 당시의 입장은 당시 여권주의 운동에 대한 방어 측면도 고려되었겠지만 그녀가 아직 여성 억압의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을 시사한다. 모성을 부정하고 여성이 남성과는 다른 사회적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하지 않는 절대적 평등이란 개념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중에 체트킨은 입장을 정정해 여성노동자에 대한 ‘보호법’을 옹호한다. 노동 여성들에 대한 법률적 보호는, 여성들이 열악한 노동으로 인해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여성의 진정한 노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여성은 어머니로서 가지는 특별한 기능과 더불어 취약한 사회적 지위 때문에 많은 위험에 처한다. 그 때문에 여성이 노동으로부터 철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여성노동자에게는 특별한 보호가 필요하다고 입장을 정정한 것이다. 이러한 체트킨의 입장 변화는 엥겔스를 필두로 한 당시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같은 것이었다. 보호입법을 통해 여성 노동자의 취약한 조직화를 보완하고 가내노동을 금지시키는 동시에 부르주아 여권주의와의 분리 선을 명확히 그으려는 맥락이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보호입법을 주장하면서 여성 노동권 요구를 철회한 것은 아니지만, 국가를 여성노동의 취약성을 보완하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보호입법의 옹호는 운동 주체로서 여성의 자율성을 부정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여성노동의 계속적인 증가와 그 결과라는 관점에서 볼 때, …… 남성노동자들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관심을 여성노동자들에게 기울이지 않는다면 노동운동은 자살을 범하게 될 것이다.” 『평등』, 슈투트가르트, 1894년 11월 1일 클라라 체트킨을 비롯한 사회주의 여성들은 전국 순회강연, 클럽, 교육 집회, 위원회 등을 통해 여성 대중에게 다가갔다. 여성노동자들에게 접근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 때문에 그녀들은 노동계급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조사하는 데 많은 정력과 시간을 쏟았다. 체트킨은 독일 여성 노동자 현황을 발표하면서 여성노동자 조직화가 어려운 원인과 조직화를 위한 과제를 제시했다. 먼저 여성 조직화가 어려운 것은 1) 여성들이 미숙련 노동, 가내 산업에서 대다수 일하고 있다는 점, 2) 집과 공장에서 이중의 부담을 지고 있기에 시간이 없다는 점이 주요한 이유라고 보았다. 또 하나 중요하게 지적한 것은 3) 여성들의 정서적 상태였다. 여성들 대부분은 자기 일을 결혼 전의 일시적 노동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체념, 유대감의 결핍, 소심함, 공장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 나서기를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경제적 관계의 변화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여성들이 가족과 사회에서의 종속적 역할에서 비롯된 나약함과 의존성을 스스로 극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그녀는 강조했다. 즉 여성들을 조직할 때는 그녀들의 오래된 조건과 경험에 따른 특성을 고려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조사 보고를 통해 체트킨은 남성 노동자들의 변화를 함께 주문했다. 여성노동자들이 동등하게 노조로 조직되기 위해서는 남성들이 여성노동자들을 유혹할 수 있는 여성으로 보기를 멈추어야 하며, 성적 목적으로 여성들을 괴롭히기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했다. 여성들을 조직하는 것은 노동자운동에서 광범위한 대중을 포함시키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동등한 동지로 고려하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여성들이 당과 노조 활동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참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1908년 여성의 정치 참여가 합법화되면서 기존의 여성 조직들은 대부분 당으로 통합되었다. 여성 조직의 제도적 자율성에 대한 요구도 있었지만, 여성의 분리주의를 거부하며 완전한 통합에 찬성하는 입장이 다수였다. 여성의 정치참여 합법화로 여성당원이 급증했지만, 여성협의회의 활동은 당으로의 통합 이후 여러 제약에 직면했다. 여성들 중 오직 한 명이 집행위원회에서 인정될 수 있었고, 남성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대표로 여성을 선출하지 않았다. 또 독일사민당의 남성들이 아내나 딸을 당원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결의사항은 약화되었다. 통합 이후 여성들은 아동노동위원회와 복지정책 영역을 장악하고 확대했는데, 이러한 외연적 확장은 오히려 여성운동의 보편적 전망을 제한했다. 1908년 이전에는 위원회 활동이 여성 조직화의 주요 경로이자 정치 참여를 고무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통합 이후 여성들의 활동이 여기에만 제한된 것은 1908년 이전의 여성운동과 변혁운동이 결합하기 어려웠던 것이 단지 법적 제약 때문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회주의 여성들 또한 이 분야를 여성들의 특수한 문제로 인식하는데 머물러 스스로의 전망을 제한하는 한계를 보였다. 노조운동에서도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당시 노동자운동의 인식은 조합비 책정에서도 드러난다. 대다수의 노조들은 성별에 따라 조합비를 달리 책정했는데, 여성들의 조합비가 적게 책정된 것은 그만큼 여성의 노동이 저평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여성 지도자들은 여성노동력에 대한 가치 평가를 높이는 중요한 조치로 여성의 조합비 인상을 주장하기도 했다. 체트킨은 당 내에서 남성들의 반여성적 편견과 싸웠다. 여성들이 여성 차별에 항의할 때 남성 지도자들은 항상 농담으로 어수선한 분위기를 만들어 넘겨버리려 했다. 체트킨은 여성의 문제제기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은 “혁명적 이론과 결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은 실행위원회에 참석할 여성 대표 자리에서 체트킨을 끌어내렸고, 새로 선출된 루이제 찌츠는 여성조직들을 당으로 완전히 통합하고 여성운동의 입장을 당의 결정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혁운동에서 여성해방이 갖는 의미와 여성문제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의 부재로 당과 노조에서 여성운동은 후퇴하고 있었다. 반면 체트킨의 여성문제에 대한 인식은 발전하고 있었다. 초기 체트킨과 여성 지도자들은 여성문제를 경제적인 관점에서만 인식해 여성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자본주의 철폐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체트킨은 여성을 상류계급, 부르주아 계급, 노동계급으로 분류하고 가족 내 여성억압의 문제는 주로 상류, 중류계급 여성과 관련된 문제로 보았다. 또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여성도 생산 활동을 함께 했기 때문에 여성문제는 드러나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인식하면서 재생산과 가족 등 여성의 고유한 문제로 고민을 확장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평등』이 가정주부와 어머니인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보충판을 제공하게 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 전까지 『평등』은 조직된 여성들에 대한 교육과 선동을 가장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보충판에서는 어머니들이 이타심과 계급연대감정을 불어넣고 어린이들의 독립적 사고력을 발전시킬 것을 제안하고 있다. 또 어린이들에게 과학과 기술, 생물학, 문화인류학에 대한 글을 제공하고, 노동의 존엄성을 강조했다. 1903년 경 11,000부가 배포되던 『평등』은 1914년에 이르러 125,000부로 증가했고 분량도 12 페이지에서 24 페이지로 늘어났다. “여성선거권 …… 그것은 우리에게 ‘목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최후 목표를 위한 싸움의 한 단계로서 여성 선거권을 쟁취하고자 한다.” 1907. 8. 18. 베를린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의 연설 여성 참정권 투쟁에 있어서도 클라라 체트킨은 국제적 기여를 했다. 1908년 코펜하겐에서 결정된 세계 여성의 날 제정도 여성참정권 요구를 주 내용으로 했다. 1907년 7월 체트킨은 최초의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를 창설하고 슈투트가르트에서 단결력을 과시했다.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의 결의를 바탕으로 그녀는 1907년 베를린 국제사회주의자 대회에서 각국 사회주의 운동이 여성의 보통선거권 쟁취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동의안이 채택되었다. 그녀는 여성의 발전과 활동을 제약하는 사회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있어 선거권 쟁취 운동이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지 않는다는 입장을 명확히 밝혔다. 왜냐하면 선거권이 여성 억압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선거권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남녀 간에 발생하는 사회적 갈등들에 맞서 싸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다는 의미에서 부분적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 계급의 참정권 투쟁은 선거권의 쟁취를 ‘목표’로 삼는 부르주아 여성의 운동과는 명확히 다르며 최후 목표를 위한 싸움의 한 단계, 무기로서 여성 선거권을 쟁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이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고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위해 싸우는 주체가 되면서 여성들은 오랜 세월 당연하게 생각했던 정치적 무능력에 대해 스스로 불평등하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 전개되었던 참정권 운동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딜레마에 빠졌다. 소유 계급 여성들에게 국한되는 여성 투표권 운동을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남성에게 국한되는 보편적 투표권을 지지할 것인가. 체트킨은 여성 노동자들이 변혁 운동에 굳건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본적 권리로 선거권을 사고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선거권 운동은 제한된 여성선거권이나 단계적 확대 계획 같은 절충안이 아니라 모든 선거권 투쟁을 여성 선거권 쟁취투쟁으로, 즉 보편적 선거권 쟁취라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입각한 투쟁이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그녀는 투쟁이 이 원칙에 충실하면 할수록 더욱 더 철저하게 광범위한 남녀 노동자 대중을 흔들어 깨울 것이며, 이 과정에서 당장 선거권을 쟁취하지 못하더라도 이 행동들 자체가 미래의 승리를 위한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체트킨은 여성선거권 쟁취 투쟁에서 사회주의진영이 더 넓은 근거와 설득력 있는 목표, 신뢰를 얻는다면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강화하고 부르주아 계급의 반목을 초래하는 것이 가능하리라고 보았다.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 “억누를 수 없는 수백만의 함성이 터져나와야 한다. 살인을 중지하라! 파괴를 중지하라! 인민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전쟁을 종식하라! 평화! 평화! 영원한 평화를!” 『평등』, 슈투트가르트, 1914, 11,7. 검열관에 의해 삭제됨. 당내에서의 갈등은 여성 조직의 독립성과 영향력 문제로 국한되지 않았다. 체트킨은 독일사민당의 수정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일에서도 정력적인 활동을 벌였다. 급속한 경제 성장과 민족적,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 하에서 독일사민당 지도부는 선거 승리를 사회주의로의 통로로 암암리에 인정하면서 계급투쟁에 대한 신념을 포기해가고 있었다. 체트킨은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베른슈타인과 당의 수정주의에 맞서 싸웠다. 체트킨은 당의 교육요원으로 로자를 임명하도록 하고, 마르크스주의 이론이 더 많은 중점을 차지하도록 애썼다. 또한 노동자들의 파업과 러시아 혁명을 지지하는 캠페인을 전 독일로 확산시키면서 의회주의가 아닌 노동자의 자발성과 힘을 더욱 강조할 것을 촉구했다. 제국주의에 대한 당의 수정주의적 해석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소유는 원칙적으로 반대해야 할 죄악이 아니라 개량할 수 있는 혼재된 축복이라는 주장에까지 이르렀다. 체트킨은 군사력 유지와 확대에 대해 부르주아 정당들과 똑같은 이해관계를 주장하는 자들을 강력히 비판했다. 1911년 예나 당대회에서는 로자와 함께 전쟁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한 대중행동 결의를 요구했다. 이 안은 일부 수용되었지만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는 관철되지 못했고, 이후 독일의 대외 정책에 대해 독일사민당은 행동하지 않았다. 독일 민족의 단결이라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와 군국주의의 결합은 독일사민당과 노동자들을 애국주의로 흡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노조와 기업가 단체는 전쟁 중 모든 노동쟁의를 중지하는 ‘성내 평화’에 합의하고, 제국의회는 전쟁채권 발행을 승인했다. 독일사민당은 전쟁 중에 다른 정당과의 투쟁이나 반정부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체트킨은 8월 14일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전쟁채권 발행에 찬성하는 표를 던졌을 때 공개적으로 당의 입장을 비난한 최초의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체트킨은 『평등』에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계속해서 표명했다. 당의 검열로 잡지에 검은 공백이 늘어가는 만큼 『평등』은 전쟁에 반대하는 여성들의 국제적 기구로 인정받게 되었다. 체트킨은 당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1915년 스위스 베른에서 ‘불법적으로’ 국제 여성노동자 회의를 조직했다. 이 회의는 전쟁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반대 입장을 최초로 조직적으로 표명했다. 이 비합법적 활동 때문에 그녀는 체포되어 넉 달 동안 보호감금조치를 당했고, 이후 1917년 5월 『평등』 편집진에서 제명당했다. 1917년 체트킨은 독일사민당을 떠나 독립사회민주당(USPD)으로 이적하고, 1918년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 프란쯔 메링 등과 함께 스파르타쿠스단에 합류했다. 1918년 경 독일의 패전이 확실시 되자 독일 내부에서 많은 균열이 발생했다. 하지만 러시아와 같은 혁명으로 나아가지는 못했고 1920년까지에 이르는 노동자들의 봉기는 잇따라 실패하고 결국 독일사민당과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었다. 독립사회민주당도 전쟁 후 분열했고 체트킨은 많은 이들을 이끌고 스파르타쿠스단의 후신인 독일공산당(KPD)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지속되는 혼란의 원흉으로 지목된 로자와 리프크네히트가 정부에 의해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당시 멀리 있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체트킨은 충격 속에서도 로자의 모든 정신적 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로자와 리프크네히트의 삶을 기리는 원고를 『라이프찌히 인민신문』에 실었다. 둘의 죽음 이후 로자는 독일공산당 내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 전 세대 지도자로서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첫 국회부터 마지막까지 독일공산당원으로서 연방의회의 의석을 유지했다. 하지만 독일에서 그녀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봄 코민테른 실행위원회의 여성서기로 임명된 그녀는 서기 활동과 건강 문제로 소련과 베를린을 오가다가 점차 소련에 정착하게 된다. 60세가 넘은 그녀는 소련에서 국제노동계급운동에 헌신하고 인종주의와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쳤다. 1932년 체트킨은 시력 상실과 질병, 그리고 나치의 살해위협을 무릅쓰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8월 30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개원사에서 최고령자로서 명예의장이 된 그녀는 연단에 등장해 파시즘을 격렬하게 공격하는 연설을 했다. 연단 앞에는 당시 의회의 제 1당이던 나치스의 의원들이 앉아 있었다. 75세의 이 투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파시즘을 물리치기 위한 모든 노동자 계급의 연합전선을 형성하자’고 외쳤다. 1933년 1월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했고, 체트킨은 소련으로 돌아가 6월 22일에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직전에 그녀가 남긴 최후의 저작은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하는 근로인민들』이라는 원고였다. 질병으로 인해 완성할 수는 없었던 이 원고에는 제 1차 세계전쟁 동안의 반전운동, 전쟁이 전체 인민에게 미친 영향, 소련에 대항하는 전쟁을 개시하려는 자본주의 국가와 이에 대한 소련의 정책에 대한 분석을 담고 있다. 또 전쟁의 시기에 처참했던 여성들의 삶도 담았다. 체트킨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민족 간의 평화는 언제나 노동계급의 이익’이라고 반복해서 주장하며, 노동자들이 어떤 주저함도 없이 제국주의 전쟁에 저항하는 투쟁에 모든 힘을 쏟을 것을 촉구했다. “십자가를 지고 고통을 참는 자가 아닌, 어리석은 노예가 아닌, 굳건하게 투쟁하는 여성으로부터 강력한 남녀 투사의 세대가 자라난다. …… 우리 머리 속의 강인한 사고와 가슴 속의 뜨거운 소망을 먹고 자란 아이들, …… 우리를 능가할 훌륭한 남녀 투사들이 바로 우리의 뼈로부터 자라날 것임을 확신한다.” 『1907. 8. 18 국제사회주의자대회』, 베를린 클라라 체트킨의 삶은 견결한 혁명가의 삶 그 자체다. 그녀가 사회주의와 페미니즘에 있어 뛰어난 이론가로 주목받는 것은 아니지만, 최초로 여성 억압에 대한 분석에서 마르크스적 분석을 결합하고자 했고 거대한 여성 노동자 대중의 조직화를 이끈 조직가로서 그녀는 언제나 타협과 맞서 싸운 투사였다. 여성 문제나 당의 이념과 전략을 둘러싼 논쟁에서 그녀의 주장은 이론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지 않다. 또 그녀 삶의 개인적 고뇌나 기쁨을 담은 기록도 별로 없어서 가족과 사랑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찾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여성의 해방은 자본주의의 철폐를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가능하다’는 그녀의 주장을 통해 그녀를 그저 여성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체트킨이 경제적 조건의 변화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여성문제에 대해 충분히 이론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과 여성상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 하에서 엘러너와 로자 등 탁월한 여성 사회주의자들도 여성으로서의 삶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것을 상기한다면, 체트킨의 주장과 실천들에 대한 평가 또한 당대 여성들의 삶, 여성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상황에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여성해방과 사회변혁에 있어서 체트킨의 입장도 넓게는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의 여성 대중 조직화 전략이 갖는 의의와 한계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독일 사회주의 운동은 여성들을 동원할 필요성에 의해 광범위한 조직화를 실행했고 이는 사회주의 운동이 여성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여성 문제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과 실천의 부재는 여성 대중의 눈부신 조직화에도 불구하고 그에 상응하는 이론적, 조직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체트킨도 처음에는 부르주아 여성운동의 영향력으로부터 노동 여성들을 분리시키기 위해 계급의식을 강조했다. 그러나 한편 여성 문제를 둘러싼 당내에서의 갈등, 여성의 주체적 성장을 가로막는 가족 문제 등을 차차 인식하면서 고민을 확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수정주의와 전쟁에 맞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전력을 다했던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인민의 보편적 해방’에 대한 그녀의 신념은 여성문제에서도 마찬가지로 치열했다. 클라라 체트킨은 직접 여성 대중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부딪힌 문제들로부터 새로운 여성운동의 필요성을 후세대가 고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분리주의적 여권운동도 아니고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여성 동원에 그치는 것도 아닌, 사회변혁운동과 여성운동이 도구적으로 결합하는 것도 아닌 새로운 여성운동. 변혁운동으로서의 보편성과 여성문제의 독자성이 결합되는 새로운 여성운동을 고민할 가능성이 클라라 체트킨이 헌신한 대중적 여성운동으로부터 열릴 수 있었다. 앞서 연재했던 엘러너와 로자에게 사랑과 가족, 여성문제의 고유한 쟁점들이 그녀들 개인의 과제로만 남았었다면 체트킨은 그 문제들을 사회변혁의 과제와 결합시킬 수 있는 대중적 여성운동의 경험을 마련한 것이다. 이러한 체트킨의 성과가 사랑, 결혼, 가족, 여성 억압에 대해 이론화하고 새로운 사회상을 그렸던 콜론타이의 획기적 시도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으로 클라라 체트킨의 삶에서 인상적 요소였던 투철한 의지와 헌신을 다시 생각해 본다. 가족과 사회에서의 종속적 지위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여성 스스로의 의지와 헌신, 의식화 노력에 대한 강조는 그녀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남편을 간호하고 아이들을 키우고 생계를 부양했고, 남편 사후에는 적극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로서의 정치적 역할도 고스란히 해낸 여성이다. 이 과정을 통해 스스로 혁명가가 된 경험이 노동 여성들의 조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신자유주의는 전체 노동자의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단결을 저해하는 유연한 노동력으로서 여성을 활용하고,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로 인한 사회적 위기는 가족과 여성의 역할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노동자운동과 여성운동의 통합적 전망을 밝히는 일이 시급한 지금, 우리에게 클라라 체트킨과 같은 의지와 헌신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살아있다는 증거: 또 다른 세상을 꿈꾸다 작년 이맘 때 즈음 활동공간을 옮겼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면서, 그리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쏟아지는 일거리에 파묻혀 허우적대면서, 정신없이 지내다보니까 어느새 겨울-봄-여름이 가고 다시 가을이 와 있다. 계절이 한 바퀴 돌아갈 동안 나는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생각이 많아지는 요즈음이다. 집회나 회원모임에 빠지기 일쑤이고, 회원게시판에 글 한줄 남길 여유도 없이 살다보니 종종 주변 사람들로부터 “잘 살아 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면 나는 나 자신에게 다시 물어본다. “당신, 살아있는가?” 잘 살고 있는지, 아니면 마지못해 살고 있는지, 나의 경우는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는 말을 상기함으로써 그것을 가늠해보곤 한다. 이 말에 대한 설렘이 남아있다면 너는 살아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너는 죽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기면서. 다행스럽게도 나는 또 다른 세상을 여전히도 꿈꾸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또 다른 세상, 특히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 여성억압의 제반조건들이 분쇄되고 여/남이 새로운 관계를 맺어 더욱 자유로워지는 그런 사회를, 여/전/히/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가본 적 없는 세상을 우리는 어떻게 현실로 만들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이 쉽지 않음을 뼈저리게 깨달아가고 있는 요즈음이기에, 살아있음을 확인함과 동시에 괴로움과 때로는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는 요즈음이다. 쉽게 이루어질 꿈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꾼다는 것이 이토록 지난하고 외로운 일일 줄이야….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사회진보연대와 함께 걸어온 길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에 대한 꿈은 가깝게는 2003년에서부터 시작된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에서는 여성억압이 남녀의 적대관계 및 남녀불평등에 기인한다기보다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가부장적 젠더관계가 재생산되는 구조에서 비롯된다고 여기고, 그것의 핵심적 장소이자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의 ‘가족’에 주목한다. 그리고 ‘가족제도의 사회화’를 일찍이 주장했던 콜론타이와 같은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역사적 유산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통해 여성해방 이론을 재정립해나간다. 당시 여성위원회 세미나에 함께했던 나는 내 인식 속의 ‘여성억압’에 드리워져 있었던 추상적 정념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비로소 그 실체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성해방을 위한 사상적 무기를 벼리는 속에서 만난 콜론타이의 삶을 들여다보며, 그녀가 간 길에서 더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후세대인 우리가 그녀를 정당하게 기억하는 방법이자 그녀에게서 꿈을 빚진 우리가 응당 지녀야 할 역사적 몫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당시는 또한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 처절하게 전개되어가기 시작한 때이기도 했다. 1997년 말 IMF 경제위기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는 노동력 재생산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가족구조 해체와 편부모 가족의 증가,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 등은 여성의 노동력 재생산 부담을 가중시켰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저임금 노동력인 여성을 노동시장에 동원하기 위해 각종 재생산 노동을 최저가격으로 제공할 필요를 낳았다. 2003년 겨울을 뜨거웠던 계절로 기억하게 해준 서울대병원 간병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중심에 놓여있었다. 간호사 등이 해야 할 의료 행위와 어머니 등이 해야 할(것으로 여겨지는)돌봄의 행위 그 중간의 빈 부분을 하루 24시간 노동에 일당 5만 원이라는 열악한 대우를 받으며 메우던 간병인. 노동자로 취급되지도 못하였던 그녀들이 세상에 목소리를 내게 된 계기는 서울대병원 간병인 무료소개소가 폐지됨에 따른 고용불안과 생존의 위협이었다. 서울대병원은 ‘간병’이라는 영역의 시장화에 따른 사용자 책임을 덜기 위해 병원이 직접 운영하던 소개소를 유료업체로 넘겼고, 이 과정에서 간병인 여성노동자들이 저항하게 되면서 우리는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깊이를 더해나가는 소중한 계기를 얻게 되었다.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는 ‘간병인 문제 해결 및 공공병원으로서 서울대병원 제자리찾기 공동대책위원회’를 함께 꾸리고 간병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지지함과 동시에 간병제도의 사회화,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확산시키는 실천을 전개하였다. 이때 학생의 신분으로 투쟁에 동참했던 나는 처절하게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당위적으로 연대하는 것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노동자로 병원 안에서 24시간 일하는 ‘간병인’의 존재를 사회적으로 알려냄으로써 그녀들의 노동의 의미를 재평가하고 ‘재생산 노동의 사회화’에 대한 문제의식을 심화시켜나가는 값진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대개의 공대위가 현안이 해결되면 해소되기 마련이었던데 반해, 간병인 공대위는 간병노동자들이 치열한 싸움 끝에 비로소 2004년 봄에 ‘노동조합이 운영하는 무료소개소’를 통해 서울대병원으로 복귀하게 되는 성과를 이룬 후에도 해소하지 않고 간병노조를 정책적, 조직적으로 지원한다. 또 2005년 노무현정권이 저출산 고령화 대책 하에서 제출한 노인수발보험제도(현재의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본격시행을 앞두게 되자 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노무현 정부가 “이제는 국가가 효도를 하겠습니다”라면서 야심차게 추진한 ‘노인수발보험제도’는 노인을 비롯한 요양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돌봄의 영역을 본격적으로 시장화하겠다는 정부와 자본의 전략의 발로라는 점에서, 이제까지 우리가 요구해왔던 간병제도의 사회화와는 정반대의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즉 신자유주의 시대 가족과 여성이 더 이상 책임지기 어려워진 재생산의 영역을 시장화함으로써 가족을 기능적으로 보완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기에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담론에 민주노총을 비롯한 운동진영조차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되어있던 상황에서 이러한 비판적 문제의식이 간병인 공대위 참여단위를 중심으로 그나마 공유될 수 있었던 것은 오랜 기간 간병투쟁에 밀착 지원하면서 ‘재생산 영역의 사회화’라는 문제의식을 주체들과 나누려했던 사회진보연대(여성위원회)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학생운동을 정리하고 사회운동의 첫 발을 내딛고 있던 나에게 있어, 우리의 선도적 문제제기가 오랜 기간의 헌신을 매개로 하여 일련의 실천으로 발전해나갔던 이시기의 경험은 운동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있다. 문제제기를 넘어서 한판 싸움을 벌이자: 재생산의 사회화인가 재생산의 시장화인가 ‘노인수발보험제도’이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로 이름이 고쳐져 추진되어나가는 것과 동시에 2006년부터는 가족을 둘러싼 지배계급의 전략이 본격화되기에 이르렀다. 보건복지부와 여성가족부가 함께 추진한 ‘보호자 없는 병동’시범사업과,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이라는 장밋빛 슬로건이 동반된 ‘사회서비스바우처 사업’등이 그것이다. ‘보호자 없는 병동’사업은 몇 개의 병원사업장을 모델로 가족간병이 필요 없는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얼핏 보면 간병제도화가 비로소 실현되어 여성들이 가족간병의 부담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제도의 수혜자는 누구이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는 누구인지를 따져보면 제도의 모순적 면모가 선명히 드러난다. 최저임금에 준하는 열악한 임금, 혼자서 여러 명의 환자를 돌봐야 하는 높은 노동 강도, 파견노동자라는 불안정한 고용조건 하에서 간병인 노동자들이 신음하는 가운데 몇몇 여성들만이 가족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가족제도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서비스 바우처 사업’은 보육, 간병, 방과 후 활동, 장애인 활동보조인 서비스, 노인 돌봄 등 그동안 가족이 책임져 왔던 재생산 영역을 사회서비스로 가시화하고 바우처 방식으로 사업화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대표적으로 노인돌보미, 장애인활동보조인, 산모·신생아돌보미라는 노동자군이 양산되었다. 정부에서는 이를 두고 취약계층과 중고령 여성에게 적합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이라고 선전하였지만, 직업여성의 가사노동에의 해방과 기존의 전업주부들의 일자리 창출이라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꾀한다는 정부의 사업 목적에서도 노골적으로 드러나듯이, 이는 재생산의 위기를 다시금 여성노동력의 유연한 활용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는 전략에 다름 아니었다. 이에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하여 간병제도의 사회화 등을 요구해왔던 운동단위들이 결집하여 ‘사회서비스 공대위’을 꾸려서 이동 시간조차 노동시간으로 보장받지 못한 채 이 집, 저 집을 전전해야하는 시간제 시급제의 불안정한 일자리의 양산에 불과한 사회서비스 일자리 창출 사업의 기만을 밝혀내는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노동자 민중의 재생산과정을 노동시장의 유연한 활용을 극대화하는 전략 내에 종속시키고자 하는 시도에 맞서 재생산의 사회화의 문제의식을 확대해나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누구와 함께 싸울 것인가? 재생산 영역의 사회화냐, 아니면 시장화냐? ‘가족’을 둘러싼 상반된 전략이 부딪치는 가운데 이제는 문제의식을 선도적으로 제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가족’을 둘러싼 저들의 전략과 우리의 전략이 경합을 벌이며 한판 싸움을 치뤄야 하는 때임은 분명한데, 그 싸움에 나설 해당주체들은 여전히도 문건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에 사회서비스 공대위는 지역사업을 통해 해당 주체들과 직접 만남을 시도해보고자 했다. 그러나 애초 느슨한 공대위의 틀거리로 조직화사업을 목표했다는 것 자체가 한계적이었을 뿐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분당이라는 악조건과 맞물리면서 지역운동 단위들이 합력을 내지 못하게 된 연유 등으로 인해 사회서비스 공대위의 시도는 아쉽게도 문제의식의 제기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다. 요양보호사와 함께 한 1년 사회서비스 공대위의 지역사업을 마지막으로 나는 2008년이 저물어갈 무렵 요양보호사와 동고동락할 수 있는 곳으로 활동의 공간을 옮기게 되었다. 요양보호사는 2008년 7월부터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이 시행됨에 따라 생겨난 직군으로 50-60대 여성노동자들이 주를 이루며 간병인으로 일을 했던 경력을 가진 이들이 상당수를 점한다. ‘요양보호사’라는 직업이 생긴다는 소식에 간병인 노동자들은 처음에는 이제야 우리도 족보를 찾는다며 (간병인 노동자들은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처지를 스스로 ‘족보 없는 노동자’라고 불렀다.) 굉장히 기뻐했다. 열악한 간병인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국가가 인정한 자격증을 가지고 요양기관의 직접고용 하에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으며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신분상승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수십만 원의 학원비와 240시간 교육을 이수하는 동안 벌이를 포기하는 것까지 감수하며 앞 다투어 요양보호사 학원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요양보호사 교육기관들이 장삿속을 차릴 요량으로 수요를 아랑곳하지 않고 요양보호사를 배출함에 따라 제도 시행 1년 만에 애초 필요인력의 열배가 넘는 50만 명의 요양보호사가 양산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지역에서는 서비스를 받는 노인의 수보다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지닌 인구가 더 많게 되어버린 웃지 못할 상황까지 발생하고 있다. “‘요양보호사’과 같은 사회서비스 일자리야말로 경기한파에 가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중고령 여성들에게 적합한 일자리”라는 달콤한 선전으로 수많은 이들을 유료학원으로 발걸음하게 만들고서는, 정작 자격을 취득하고서도 취업이 막막한 절망적인 상태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또한 마찬가지로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장기요양기관들의 출혈적인 경쟁 속에서 요양보호사는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불안정한 신세로 전락하고 있다. 말이 좋아 요양보호사지 이건 일용직에 불과하다는 한탄이 도처에서 들려온다. 식모살이를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는 통곡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기본적인 생활이 전혀 보장되지 않는 낮은 임금, 언제 일이 없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노동조건, 인력기준이 턱없이 낮음으로 인한 높은 노동 강도, 그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감내하며 비인격적 대우를 감수해야 하는 불안정한 위치, 근로기준법 및 최저임금법이 무시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환경, 노인복지는 뒷전이고 영리추구가 목적이 된 본말전도의 요양현장 속에서 겪게 되는 양심의 고통…. 노인요양기관 설립 및 운영에 있어서 민간기업의 자유로운 경쟁을 보장함으로써 시장을 형성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신자유주의 정권의 야심찬 계획 속에서 만들어진 요양보호사 일자리는 결국 요양보호사에 대한 착취와 노인들에 대한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실망한 이들은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고서도 다시금 병원간병으로 발걸음을 돌리기도 하고(공식노동에서 비공식노동으로의 역행이라니, 이 얼마나 부실한 제도인지!), 큰 용기를 내어 어렵사리 딴 자격증을 그저 장롱 속에 넣어두고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양현장을 개척해나가면서 부당한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요양제도 개선의 주역을 자처하는 이들이 있다. 어쨌거나 제도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요양보호사이니만큼,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노인요양의 시장화가 가져온 폐해가 사회문제로 거론되고 있는 시점이다. “언제나 일손이 모자라서 전전긍긍하고, 어르신들을 충분히 돌봐드리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인력이 부족하니 어르신들이 그저 얌전히 누워계시기만을 바라게 됩니다. 어르신들이 최대한 잘 움직이시면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요양보호사의 일일 텐데…. 안타까울 뿐입니다.” 2009.3.28, <전국요양보호사대회-요양보호사 이야기> 중에서. 가끔 “요양보호사 일을 하게 되니 뭐가 좋으세요?”라고 몇몇 친한 요양보호사분들에게 물어보기도 한다. 이토록 열악한 조건에서 꿋꿋이 일을 해나가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하고 그 동력이 무엇일지 궁금하기도 해서다. 돌아오는 답변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 나이에 내 일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소중하다”, “이제는 가족이나 자식들이 노인들을 뒷바라지하기 어려운 시대가 아니냐, 누구라도 그 일을 대신 하긴 해야 하는데 우리 같은 직업이 생겨 얼마나 다행이냐”, “나도 나이가 들면 이 제도의 혜택을 받아야 할 텐데 그때 고생하지 않으려면 제도개선이 하루라도 빨리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이 일을 쉽게 관둘 수가 없다.” 요양보호사, 아직은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노동자들이지만 이들의 절실함과 현명함, 그리고 강인함이 존재하는 한 희망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만 이들이 가족의 기능을 보완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첨병의 역할에 그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신자유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재생산 영역의 사회화, 즉 가족이 덜 필요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우리 모두의 노력이라는 사실을 모순의 중심에서 알려나가는 주체로 거듭나게 될 지는 아직 남은 과제다. 이 과제를 잘 풀어나가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그동안 가족이 담당해왔던 기능이 여성노동력을 유연하게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전되는 것이 지금의 암울한 시대를 헤쳐나갈 해법이 결코 아니라, 가족을 구성하지 않고서도 생존할 수 있는 사회가 우리에게 보장되는 것만이 진정한 대안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는 사실이 요양보호사를 비롯한 투쟁의 주체들과 공유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그/녀들이 현재의 열악한 조건에서 자신의 발로 현장에서 설 수 있도록 최대한의 지원과 관심과 연대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여전히도 꿈을 꾸기 위해, 여전히도 살아가기 위해 고작 1년인데도 퍽이나 지쳐있는 나를 발견하면서, 여전히도 꿈을 꾸기 위해, 그리고 여전히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생각이 많아지는 요즈음이다. 우선적으로 외롭지 않아야 하겠다.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꾼다는 것이 가져다주는 괴로움과 좌절감은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말로 해소될 수 있기에…. 그동안 사회진보연대 여성위원회와 함께 꿔온 꿈을 더욱더 많은 이들과 함께 꾸는 꿈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절실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또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은 말에 여전히도 가슴이 뜨거울 수 있는 나, 그리고 우리를 계속 만나고 싶다.
다른 세상을 향한 꿈 “내 이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사회질서다. 그것을 추구하면서,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이름으로 나는 언젠가 증오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188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17세의 로자가 친구들과 사진을 나눠가지며 뒷면에 남긴 글귀이다. 그녀는 함께 했던 학창시절을 추억하며 누군가의 부인이자 어머니로 살아갈 것을 꿈꾸는 소녀들 가운데서 범상치 않은 고백을 하고 있다. 폴란드에 살고 있는 유태인 여성으로서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학교인 바르샤바 제2 여자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녀가 이러한 꿈을 품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러시아 짜르 제국의 통치아래 있던 폴란드는 어떠한 비판적 행위도 반역으로 간주되었고 정치활동 역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만일 짜르의 비밀경찰 오흐라나에 적발되기라도 한다면 시베리아 강제노역에 처해지거나 요새의 지하 감옥으로 사라지고 때로는 교수형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럼에도 폴란드의 젊은이들은 민족 억압의 문제에 분노하고 비합법 노동운동과 접촉하면서 사회비판적인 인식을 키워가고 있었다. 로자 역시 비합법 학생조직에 가담해 금서였던 <공산당 선언> 등을 읽으며 다른 세상을 꿈꿨다. 그리고 졸업 후 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조직인 프롤레타리아 당의 비밀 세포조직을 위해 일했다. 그녀는 활동을 하면서 식민지에서 태어난 유태인, 더구나 장애를 가진 여성이라는 굴레에 속박되지 않는 삶은 억압과 착취 받는 자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는 길에서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을 굳혀갔다. 그러한 확신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세상에 기여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발전해 그녀를 스위스를 향해 떠나게 한다. 동지이자 연인 취리히는 온갖 나라로부터 온 망명자들로 넘쳐나고 있었고, 취리히일반대학은 남녀 차별 없이 입학할 수 있었다. 1889년 넬켄가에 있는 뤼베크의 집에 방을 구한 로자는 곧 취리히 대학에 등록했다. 로자는 동료 학생들과 추운 다락방에 모여서 밤늦게까지 뜨거운 토론을 나누고는 했다. 그곳에서 로자는 폴란드 빌나에서 온 청년 레온 그로소프스키를 만나게 된다. 로자의 연인이자 동지가 될 청년 레오 요기헤스가 가명으로 자신을 소개한 것이다. 로자는 학교 동료들의 소문을 통해 레오를 주목했다. 전설적인 활동에 대한 이야기와 비밀스러움이 그의 뒤를 따라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오는 러시아령 폴란드 출신의 유태인으로서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혁명에 헌신하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졌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마치기도 전에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비합 지하활동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는 이러한 활동으로 체포되어 구금되었다가 군대로 징집명령이 떨어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빌나를 탈출하여 취리히로 왔다. 그는 철두철미하고 과묵했으며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활동하였으나 동료들로부터 권위적이고 오만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그런 레오 역시도 로자에게 매료되었는데, 자신에게 없는 능력을 그녀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자는 지적이고 언변이 유창했으며 뛰어난 문장력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타인과 대화를 즐기는 성격에다 매력과 열정을 통해 청중을 사로잡는 재능까지 있었다. 레오는 그녀와 함께라면 불패의 조직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레오의 직감은 적중했다. 식민지 폴란드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로자와 레오는 <스프라바 로보니차>라는 잡지를 발간하고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을 창당했다. 레오는 당의 숨은 두뇌로서 지도력을 발휘했고 로자는 열정적인 연설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활약했다. 그 결과 민족주의적 노선을 추구하던 폴란드 사회당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893년 8월 취리히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3차 총회에서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은 공식 정당으로 승인되었다. 뤼베크 박사, 베를린을 정복하다 1898년 취리히에서 박사학위를 마친 로자는 베를린에 도착한다. 그러나 당시 독일에서 외국인이 정치활동을 하는데 제약이 많았다. 로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위스에서 하숙하던 뤼베크 가의 아들과 위장결혼을 해 독일 국적을 취득한다. 이제 거침없이 그녀의 능력을 발휘하는 일만 남은 것이다. 그녀의 데뷔무대는 슐레지엔 북부 지역의 선거였다. 로자는 뛰어난 연설가로서의 실력을 발휘해 독일사회민주당에 큰 성과를 안겨주었다. 그 성과는 독일에 오기 전부터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던 로자의 존재감을 사민당 내에서 다시금 부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곧이어 로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로서 존경받던 베른슈타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른바 수정주의 논쟁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역사에 로자의 이름이 길이 남게 될 사건이 시작된 것이다. 논쟁의 발단은 자본주의 붕괴의 필연성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현실에서 적합성을 가지는가라는 의구심에서 시작되었다. 1890년대 후반에 영국은 이윤율 하락을 상쇄하기 위해 금융을 팽창시켜 일시적 호황을 누렸고, 유럽 대륙에서는 중상주의적 산업화가 진전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임무>(1899)에서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물질적 조건은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론을 뛰어넘으며 대불황의 시대는 종결되었고 붕괴이론도 오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주식시장을 통해 부가 공평히 분배되고 실질임금도 상승하고 있으니 궁핍화 경향은 역전된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생산의 점진적인 사회화로 인해 일시적인 과잉생산과 과소소비에 기인하는 위기도 덜 빈번하고 덜 파괴적이라고 생각했다. 자본주의가 안정적이며 지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수정주의자들의 인식은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폐기하고 적극적인 의회주의를 채택해야 한다는 실천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베른슈타인이 당의 기본입장을 심대하게 위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사민당은 이렇다한 대응도 못하고 기존의 입장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입장이 마르크스에 대한 근원적 부정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1899)를 출간해 그를 논박했다. 그리고 이후에 그녀는 <자본축적>(1913)을 쓰면서 자신의 이론을 보다 체계화했다. 로자는 시장의 무정부성으로 인한 부문 간의 불비례는 주기적 경기순환을 낳지만, 그것을 성공적으로 통제할 수 있더라도 자본주의는 과소소비라는 장기적 경향에 의해 궁극적인 붕괴에 도달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구조적인 소비부족을 해결할 수 있는 제3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환경을 항상 필요로 한다. 제국주의 팽창의 원인이 여기서 비롯된다. 그러나 모든 비자본주의 사회들이 제국주의를 통해 자본주의로 전환되면 자본주의의 붕괴는 하나의 논리적 필연성이 된다. 이처럼 로자는 경기순환상의 위기로 환원될 수 없는 구조적 위기가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파국적 위기가 사회주의 이행의 출발점이 될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자생주의에 입각한 실천만이 사회주의로의 길을 보장함을 주장하면서 의회주의를 비판하였다. 이 같은 로자의 문제의식은 수정주의자들이 영국헤게모니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금융적 팽창이 야기한 일시적 호황을 자본주의의 질적 변화로 인식하여 구조적 위기를 부정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녀는 영국헤게모니 붕괴와 유럽 자본주의의 일반적 붕괴 경향에 부합하는 분석을 시도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붕괴가 제국주의적 충돌이라는 역사적 과정을 통해 진행될 것이라는 점 또한 역사적으로 타당한 분석이었다. 수정주의 논쟁은 격렬했으며 로자는 순식간에 유명인사가 되었다. 게다가 독일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사회민주당 전당대회의 대의원 자격을 획득하고, <작센노동자신문> 편집장 자리를 제안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단시간 안에 독일 사민당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손꼽히게 된 로자의 출현은 혜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오세요 죠죠 로자와 레오는 역할분담을 하고 있었다. 레오는 공식적인 위치에 나서지 않은 채 지도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로자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레오는 로자의 스승으로서 그녀의 활동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독일에서 예상치 못하게 빠른 속도로 로자는 성장해 버렸고 그는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사실 로자가 공적인 영역에서 영향력을 획득하는 것은 그가 바라던 일이었다. 그녀를 독일로 보내 독일사민당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제적 영향력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레오도 로자의 성장과 성공을 바라보면서 자랑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것이라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점차 로자는 하나에서 열까지 가르치려는 태도를 고수하는 그의 태도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순간순간 그보다 자신이 더 적확한 판단을 하고 있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레오는 그녀가 자신을 떠나버릴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렸고 자부심이 뒤흔들리는 상황에서 통제의 고삐를 더 죄려했다. 하지만 상황이 역전될 수는 없었다. 1900년에 레오는 폴란드 당을 재건하고 베를린에 당 지도부를 건설하기 위해 독일로 간다. 치슈카라는 가명을 쓰며 열정적으로 과업에 매진한 결과 폴란드 대도시에서 파괴된 그룹들을 소생시키고 당 지하 세포조직 확립을 짧은 시간 안에 이뤄낸다. 이러한 성과를 계기로 치슈카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는데 젊은 세대들은 그 가명이 로자의 새로운 필명이 아닐까 추측할 정도였다. 레오의 정체를 감추는 지하활동의 공적이 로자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그녀 없이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둘의 관계구도가 변화하면서 갈등을 빚고 있었으나 로자는 ‘죠죠’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연인이 베를린에 와서 함께 살기를 끊임없이 바라면서 이렇게 편지했다. “우리는 참으로 서로를 필요로 해요! 정말이에요. 다른 어떤 커플도 서로가 서로를 통해 한 ‘인간’이 된다는 삶의 과제를 우리만큼 절실히 느끼지 못할 거예요.” 그녀는 당시 결혼 전 사랑이 비밀과 치욕으로만 가능했음에도 부르주아적 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공동의 삶의 형태를 찾고자 했다. 비록 새로운 세상을 세우는 일이 먼 미래의 것이라도 개인적인 영역에서는 새로운 관계가 이뤄지길 원했다. 그것은 대등한 개인들의 결합이었다.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둘 다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안락한 가정을 꾸리고 함께 살고자 했다. 그리고 독일사민당 동료들이 부르주아적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신 역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레오는 가까이 있길 바라는 로자의 갈망을 줏대 없는 모습으로 치부해버리곤 해서 로자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부르주아적인 가정생활을 꿈꾸는 그 무엇도 그는 이미 10년 전 빌나에 벗어던지고 떠나왔다. 부르주아적 삶은 도망, 망명, 체포,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직업적 혁명가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혁명 시대의 사랑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제국 도처에서 총파업이 일어났으며 러시아령 폴란드까지 퍼져나갔다.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 당원은 1년 전만 해도 천 명 정도의 규모였으나 삽시간에 3만 명으로 늘어났다. 레오는 혁명의 최전선에 서기 위해 베를린에서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인 코라코프로 달려갔다. 그는 공식적인 역할을 맡지는 않았지만 실질적인 당 수뇌부로서 당의 활동을 지도했다. 로자는 베를린에 남아 폴란드와 독일의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자금을 조달했다. 망명자들과 밀사들이 그녀의 집을 끊임없이 거쳐 갔다. 이렇게 격무에 시달리던 그녀가 늑막염으로 몸져눕게 되면서 그녀는 둘 사이 관계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했다. 로자는 두 사람의 대등한 동반자 관계라는 것은 자신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자는 레오가 그녀와 떨어져 자율적인 활동을 하고 멀리서 그가 요구하는 것을 조달하는 그녀에게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더 나은 삶을 바랬고 정열적이었던 로자는 곁에서 다정하게 애정을 표하는 연인이 필요했다. 이에 로자는 25세 청년과 연애를 시작했다. 숨기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던 로자는 레오에게 사실을 털어놓았다. 레오는 충격으로 거의 무너져 내릴 지경이었다. 로자는 그의 충격이 크다는 사실을 확인하자마자 청년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레오가 자신에 대한 애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서로가 사랑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여전히 그가 그녀를 필요로 하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둘의 관계는 예전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해 10월 레오는 오토 엥겔만이라는 가명으로 바르샤바로 갔고, 로자는 독일사민당 기관지 <전진> 편집국의 정치적 지도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혁명에 대해 보도하기보다는 직접 현장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결국 로자는 안나 마취케라는 사민당 당원의 신분증을 가지고 바르샤바로 떠난다. 그들은 같은 하숙집에 머물면서 많은 일들을 해냈다. 신문 <체르보니 스탄다르>를 발행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의 새로운 강령을 작성했으며 당 활동을 지도했다. 이후 로자는 당시가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비밀활동능력과 지도력을 겸비한 레오와 예리한 지성과 문장력을 가진 로자의 능력은 각각 빛을 발했다. 그들은 위대한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동지이자 연인으로서 서로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혁명은 절정기를 지나 패배로 돌아서고 있었고, 그들을 향한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었다. 결국 1906년 3월 독일로 귀환을 준비하던 중 로자와 레오는 체포되었다. 동지들은 시청 감방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을 탈옥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둘은 요새 구금형이나 시베리아 강제노역, 어쩌면 사형까지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탈옥 계획을 실행하기 하루 전에 파비악 형무소로 이송되었고, 다시 바르샤바 요새의 제 10성루에 이감되었다. 구출계획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독일사민당 역시 로자를 구출하는 데 적극적이어서 그녀가 병세가 위중하여 요양이 필요하다는 소견을 받아내기 위해 관리를 매수하고 보석금을 지불하였다. 바르샤바 당국 역시도 로자가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으며 매우 저명한 인사여서 외교 분쟁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반면 레오는 러시아인으로서 탈영병이었고 매우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보석금으로도 석방되지 않았다. 그는 요새에 남게 되고 로자는 요양을 명목으로 핀란드로 망명했다. 실제로 로자는 위와 간에 생긴 병과 신경쇠약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로자는 요양지에서 혁명에 뛰어들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대중파업과 당, 노동조합>을 썼다. 로자는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레오가 없는 삶에 적응해가고 있었으며, 관계를 정리하기 원했다. 그 무렵 로자는 클라라 체트킨의 아들, 스물한 살의 코스챠와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시베리아 강제노역을 구형받고 가까스로 탈출한 레오가 돌아왔을 때 관계가 끝났음을 알렸다. 2년 전과 달리 그는 분노로 제정신이 아니었으며 로자를 괴롭혔다. 심지어 권총을 보이며 그녀와 그녀의 정부 그리고 자신을 쏘겠다고 협박했다. 로자도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권총을 마련해 두었다. 이처럼 둘의 관계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공동의 업무는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은 1907년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대회에 폴란드-리투아니아왕국 사회민주당 대표단으로 함께 참석했다. 로자와 레오는 혁명이 어떻게 지도되어야 하며 러시아당의 역할은 무엇이고 마르크스주의를 현재 상황에 적용하는 방법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을 공동으로 구상하고, 로자가 대표로 연설하였다. 세 사람의 관계를 둘러싼 격정과 흥분은 무서운 속도로, 마치 회전목마처럼 상승과 하강을 거듭했다. 이를 계기로 코스챠가 로자를 떠나게 되고 레오와의 관계는 정상적인 동지의 수준으로 돌아왔다. 마지막 투쟁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해 8월 독일사민당은 전쟁예산을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모든 사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레닌은 독일군 사령부가 조작한 것이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인터내셔널에서 지도적인 위치에 있던 독일사민당의 배신은 제2인터내셔널이 붕괴되었음을 선언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자본주의의 안정적 발전에 기초하여 의회주의를 통한 사회주의 이행을 암암리에 받아들이고 있던 독일사민당으로서는 어찌 보면 일관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의회주의를 이행의 정치적 수단으로 공고화하면서 국제주의적 세계혁명은 기각되고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화되었다. 더불어 세기 전환기 유럽 자본주의의 특수성과 제국주의의 필연적 연관성을 간과했다. 제국주의를 국내 정치 세력관계의 변화에 의해 일시적으로 나타난 정책으로 보았다. 따라서 정치 세력관계의 역전을 통해 제국주의적 팽창에 소요되는 자본을 국내 산업에 대한 투자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자 역시 독일사민당의 배신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곧바로 전시공채 재결의안 투표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칼 리프크네히트 등의 동지들을 규합해서 전쟁에 반대하고 독일사민당에 대항하는 느슨한 연합체로 스파르타쿠스단을 결성했다. 그녀는 자본주의 붕괴경향이 제국주의 열강 간 전쟁의 필연성으로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자본주의 체계의 붕괴를 나타내는 동시에 혁명의 계기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갈림길에 서있는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을 촉구했다. 반전투쟁을 앞장서서 이끌던 로자는 1915년에서 1916년까지 투옥되었다. 1913년 프랑크푸르트 집회에서 “만약 우리들이 프랑스나 그 밖의 나라의 형제를 살해하라고 명령받는다면 단호히 ‘하지 않겠다’라고 답해야 합니다”라는 연설을 했다는 이유였다. 그녀는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반전투쟁을 지도하고 <사회민주당의 위기>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이 무서운 광란과 지옥에서 온 피투성이의 유령은 독일, 프랑스, 영국 및 러시아의 노동자들이 마침내 발광하는 흥분 속에서 깨어나 정답게 손을 잡고, 제국주의 귀신들의 축제를 노동자의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몰아낼 때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출소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16년 메이데이 날 베를린에서 격렬한 반전투쟁을 벌이다가 칼 리프크네히트가 체포되고 로자 역시 1918년까지 보호구금을 당한다. 지도부가 대거 검거되자 로자는 레오에게 스파르타쿠스단의 지도를 맡겼다. 그는 스파르타쿠스단에 비밀활동 방법을 익혀주었고, 단기간에 지하조직 체계를 만드는 등 활약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로자는 이에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10월 혁명의 의미와 독일 사민당이 취해야할 입장, 독일 혁명의 전망에 대해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레오와 로자는 먼 거리를 뛰어넘어 이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녀는 러시아혁명이 사회주의의 명예를 되살린 것으로, 독일사민당이 취하고 있던 의회주의 전략을 보기 좋게 극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볼셰비키혁명을 방어하려면 무엇보다도 세계의 노동자들, 특히 독일 노동자계급이 혁명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이를 독려하기 위해 러시아혁명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독일 혁명세력들은 볼셰비키의 정치적 조치를 비판 없이 절대화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에 이를 경계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로자는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통해 토지문제와 민족자결 문제에 대한 볼셰비키의 정책방향은 반혁명세력에 동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로자는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인 계급독재를 전면화하지 않고 소수의 독재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 로자는 인민대중들이 능동적이고 제한받지 않는 민주주의를 통해 정치적으로 훈련되고 교육되어 각성되어야만 혁명의 길이 열리고 사회주의가 우뚝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이러한 생각은 독일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된 스파르타쿠스단의 혁명강령에도 반영된다. 1918년 10월 독일 해군본부가 8만 명의 목숨이 달린 북해항전을 결행하려고 하자, 킬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전국적인 노동자들의 파업과 병사들의 항명이 이어졌고 노동자병사평의회가 곳곳에서 생겨났다. 이에 황제가 퇴위하고 독일의 실질적인 권한을 노동자병사평의회가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병사평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독일사민당은 혁명을 진압하고 헌법제정을 위한 국민의회를 구성하여 국가를 의회주의적 공화국으로 확정하려 했다. 결국 그해 12월 전국노동자병사평의회 총회에서 독일사민당의 뜻대로 1월에 국민의회를 구성하기 위한 선거를 진행한다고 결정되었고, 이에 대해 로자는 평의회의 정치적 자살이라고 비판했다. 스파르타쿠스단은 혁명을 볼셰비키처럼 단기적인 봉기를 통해서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노동자 대중에 대한 교육과 조직 그리고 실질적인 혁명 과정에 대중이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직은 정치권력을 장악할 만한 때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베를린에서 1919년 1월 봉기가 발생했지만 군대가 노동자들을 진압했다. 농촌지역 역시도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투쟁이 확대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이미 1918년 12월에 리프크네히트와 로자를 살해하라는 현수막이 등장했다. 정부는 혼란과 굶주림, 지속되는 불안의 책임이 스파르타쿠스단에게 있으며 이들이 독일을 볼셰비즘에 내맡기려 한다고 악선동 했다. 1월 15일 민병대가 리프크네히트와 로자를 찾아냈다. 그들은 그녀를 근위기병대 저격병 사단본부로 끌고가 팝스트 대위가 심문을 하고 노스케와 협의해 처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날 밤 로자는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맞아 의식을 잃고 있다가 포겔 중위가 쏜 총을 맞고 강물에 던져졌다. 레오는 체포되었다가 다시 풀려났지만 로자의 소식을 접하고 거의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로자를 잃은 것을, 나는 극복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1919년 2월 12일 <스탄타르>에 주목을 끄는 기사가 났다. 레오가 로자의 죽음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해 폭로한 것이었다. 이 기사는 여론을 동요시켰고 결국 당국은 정식 조사를 벌이고 재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레오가 로자에게 해준 마지막 봉사였다. 그러나 대가가 그의 목숨이었다. 1919년 3월 10일 레오는 체포되어 그날로 살해되었다. 양쪽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양쪽에서 타들어가는 양초처럼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 그녀가 남긴 말처럼 로자는 점점 밝게 빛나면서 더욱 더 빠르게 사라져 가는 양초처럼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 사회주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하고 지적인 여성으로 평가받았고, 혁명을 향한 신념을 끝가지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혁명가로 기억되고 있다. 이처럼 대단한 혁명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로자 역시 같은 시대 여성혁명가들이 처했던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활동 주 무대였던 독일에서 당시 남성들은 여성이 회합에 참석하거나 정치 클럽에 가입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여성이 조직에서 보조적인 역할에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발적인 논쟁을 일으키는 로자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더군다나 로자가 외국인이고 유태인이고 장애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더 많은 멸시와 배척을 감당해야만 했다. 화려한 그녀의 명성 뒤에 고통스러움과 외로움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았음에도 로자는 여성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다면 여성과 남성 모두가 해방될 것이기 때문에 계급투쟁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 전반이 여성문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고 여성문제는 여성노동자 조직화 관점에서 투표권 운동과 결합하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여성운동 역시 1세대 페미니즘의 전성기였으나 여성의 고유한 억압에 관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제기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지형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로자는 여성문제의 고유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의 문제와 여성억압을 연관시키기 어려웠다. 그래서 사랑에 있어서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줬던 로자가 한편으로는 안정된 가정을 끊임없이 갈구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지배적인 가족형태의 문제를 인식하고 도전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것인데 로자 같이 탁월한 여성도 그 때문에 평생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금 우리에게는 엘러너나 로자와 같은 여성 사회주의자들의 삶이 보여주는 교훈이 있다. 또 콜론타이 이후에 결혼, 가족, 여성억압에 대해 사회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론화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몫이다.
19세기 영국의 사회주의혁명가 엘러너 마르크스, 그녀를 기억하는 법 [%=박스1%] “나는 엘러너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노동자 사랑과 진심을 기억합니다. 엘러너만큼 사회주의 진영에서 노동자를 위해 수고한 사람은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 영국 노동조합의 제임스 모슬리 엘러너 마르크스를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알고 있다 해도 흔히 칼 마르크스의 딸이라거나 비극적으로 죽은 여성으로 그녀를 기억한다. 이것이 로자 룩셈부르크, 알렉산드리아 콜론타이, 클라라 체트킨 등 여성사회주의자들이 이름을 남긴 것과는 다른 점이다. 아마도 그녀의 독립적 활동보다는 아버지인 마르크스의 이름과 엘러너의 극적인 죽음의 무게가 더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영국 사회주의를 이야기 할 때 엘러너는 빠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녀는 마르크스의 동료이자 정통성 있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했고, 마르크스 사후에도 일관되게 노동자운동에 헌신했다. 또 당시 여성의 삶과 사랑에 변화와 자유가 필요함을 깨닫고 실천했다. 그런데도 엘러너는 영국 사회주의 운동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 엘러너뿐만 아니라 대다수 여성혁명가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가려진 삶을 드러내 기억해야 한다. 특히 여성 혁명가가 겪는 결혼, 가족, 사랑, 출산이 남성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는 여성이 운동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이렇게 여성혁명가를 되살리는 것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그리고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탄생할 많은 여성혁명가의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생애는 단편적이지 않아서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 상황과 관계, 내면의 심리 등을 입체적으로 고려할 때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따라서 엘러너에게도 많은 이름을 붙이며 시작하려고 한다. 마르크스의 막내 딸, 19세기 영국 노동자운동에 헌신적으로 기여한 마르크스주의자, 뛰어난 연극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켰던 배우이자 기획가, 자유로운 사랑을 꿈꿨지만 결국 그 사랑 속에 파묻혀버린 여성. 적어도 이런 이름들을 다 기억할 때 엘러너 마르크스의 삶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랑스러운 꼬마 정치가의 탄생과 성장 “물론 어제는 『뉴욕 트리뷴』에 기고할 원고를 쓸 수 없었소. 오늘도 쓸 수 없고, 어쩌면 내일도, 앞으로 한동안 쓰지 못할 것 같소. 왜냐하면 어제 아침 6시부터 7시 사이에 아내가 또 한 명의 나그네에게 마르크스라는 성을 물려줬기 때문이라오. 유감스럽지만 아무리 봐도 여자아이인 듯싶소.” 엘러너는 1855년 1월 16일 런던에서 칼 마르크스와 예니 폰 베스트팔렌의 여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아들 둘과 딸 하나를 잃은 마르크스는 남자 상속자를 낳지 못했다는 생각에 깊은 실의에 빠졌다. 그러나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딸 엘러너가 자신을 똑 닮았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찾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투시(엘러너의 애칭)가 바로 나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엘러너를 죽은 아들과 동일시해 사내아이처럼 키웠다. 어느 정도 성장한 엘러너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첫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마르크스의 가정에서 식사 시간과 차 시간에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갖가지 의견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게다가 마르크스는 엘러너의 학습을 지도하는 데 엄청난 힘을 쏟았고, 그녀 역시 정치 공부에 놀라운 의욕을 보여주었다. 아래의 재미있는 일화는 어린 시절 그녀의 영특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엘러너는 여덟 살 때 만나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숙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할아버지가 위대한 정치가라는 이야기를 아빠에게서 귀가 따갑도록 들었어요. 그러니 우린 반드시 의견이 일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폴란드가 어떻게 될 건지,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나는 이 용감하고 사랑스런 폴란드인을 위해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싶거든요.” 이렇게 맹랑한 꼬마인 엘러너는 “아브라함 링컨이 전쟁에 관해 내 조언을 매우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갖기에 이르렀고, 결국 미국 대통령에게 긴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아버지 마르크스는 매번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엘러너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여행을 하거나 집회에 참가하여 국제사회주의의 많은 지도자들과 만났다. 독일 사회주의자 리프크네히트가 평생 그녀의 친구였고, 프리드리히 엥겔스 역시 엘러너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이러한 일상적인 만남은 살아있는 정치교육이었다. 또 그녀의 어머니 예니와 가정부였던 헬레네 데무트, 아일랜드 태생의 공장 소녀 리지 번즈는 여성인 엘러너의 역할 모델이었다. 이 세 명은 통찰력 있는 지성과 정치력을 갖고 있었고, 자기희생적이었다. 이런 특성은 엘러너의 성장에 영향을 준다. 엘러너의 정치력은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더욱 단련된다. 1871년 3월 파리코뮌은 마르크스 집안 전체에 극심한 충격을 주었다. “자본가 계급과 그 국가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파리의 시민들과 함께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고. 결과가 어떠하든 간에 세계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새로운 출발점에 도달한 것 같아 무척 흥분되오”라고 쿠겔만에게 쓴 마르크스의 편지에는 새 시대에 대한 기대감이 묻어 있다. 1848년 혁명 이후 처음으로 마르크스는 혁명적 정치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었다. 엘러너 역시 마르크스의 비서 활동을 하며 코뮌에서 강한 영향을 받는다. 런던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그녀는 마르크스 집의 문을 두드리는 파리 망명객들 덕에 코뮌에 대한 관심을 지속한다. 한편 이 시기 처음으로 엘러너와 마르크스가 대립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망명가 중 한 사람인 리사가레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리사가레는 엘러너보다 나이가 두 배나 많은 34세의 저널리스트로 코뮌에 참가했었다. 그는 마르크스의 집을 드나들며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지니고 있던 개인주의의 면모를 벗을 수 없었다.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그들의 관계에 반대했다. 정치적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진 것도 미래도 없음이 분명한 망명가와 자신의 딸이 교제하는 것이 탐탐치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엘러너는 리사가레와 실질적인 약혼관계를 9년 동안 이어간다. 리사가레와의 관계로 생긴 갈등과 반항은 엘러너가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독립을 찾으려는 최초의 시도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마르크스와 엘러너의 갈등은 격렬하게 드러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난 뒤 결국 마르크스는 둘의 관계를 인정한다. 하지만 리사가레와의 9년간의 관계는 조용하게 끝나고, 엘러너는 1884년에 에이블링을 만난다. 에이블링과 만남 1881년 12월 2일 엘러너의 어머니 예니가 간암에 걸려 죽는다. 아내의 투병으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마르크스도 몸져 눕는다. 미완의 『자본』을 완성하기 위해 건강을 되찾으려 노력했던 그는 결국 15개월 후 아내 예니를 뒤따랐다. 그 때부터 엘러너는 진정으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한다. 남겨진 유산으로 그녀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으나 정신적으로 혹독할 정도로 외로웠다. 그녀가 에드워드 에이블링 박사를 친구로 만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84년 여름 엘러너는 자신의 나머지 생애의 동반자이자 끊임없이 그녀를 지치게 했던 에이블링과 사실혼 관계를 시작한다. 엘러너는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사회주의에 대해 의견이 같았다. 연극을 사랑했고 돈에 구애받지 않았다. 내 아버지도 그를 좋아했다. 우리는 능률적으로 협동할 수 있었다.” 둘 사이의 친화력은 즉각적이었고 강력했다. 육체적으로, 영적으로, 지적으로 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던 에이블링은 어린 시절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과 신경성 질환에 시달려온 엘러너에게 활력을 주었다. 에이블링은 사회주의자이며 자유사상가로 무신론자였다. 에이블링은 당시 영국의 지적 주류 중 하나였던 정교(政敎) 분리주의 운동에 가담해 국교를 공격하며 사회복지를 강조하고, 사상의 자유를 주장했기 때문에 영국 사회주의 확산에 촉진제 역할을 했다. 에이블링의 이러한 활동과 사상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따라서 엘러너에게 에이블링과의 사랑은 자신의 구원뿐 아니라 아버지가 평생을 바친 위대한 사상에 대한 헌신이었다. 하지만 에이블링이 엘러너에게 기쁨과 환희만을 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느끼게 했고, 끊임없는 감정노동과 희생을 쏟아 붓게 만들었다. 애당초 엘러너와의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에이블링에게는 부인이 있었다. 에이블링의 부인은 이혼을 원하지 않았다. 엘러너의 자유로워 보이는 이 결혼은 전통적 결혼보다 더 억압적이고 불행한 것이었다. 게다가 에이블링에 대한 평판은 끔찍했다. 당시 사람들이 남긴 그에 대한 기록에는 그의 도덕적 타락, 재정적 낭비, 무책임함, 알코올 중독, 방탕한 여자관계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둘의 관계를 마르크스의 ‘성실하고 착한 딸’과 ‘악명 높은 방탕아’의 결혼이라 부르며 경악했다. 엘러너는 에이블링과의 결혼으로 자유와 활력을 얻었지만, 주변의 동료들이 떠나갔으며 둘의 관계는 종종 운동의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엘러너는 에이블링을 떠날 수 없었고 에이블링을 만난 후 그녀의 활동은 항상 그와 함께였다. 에이블링은 엘러너의 삶에 압도적인 영향을 끼친 두 남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물론 다른 한 명은 그녀의 아버지 마르크스다. 사회민주주의연맹의 결성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1880년대 후반 들어 변모하기 시작한다. 1878년 리프크네히트에게 보낸 마르크스의 편지에 그 비판이 담겨 있다. “영국의 노동자 계급은 매우 미약하기는 하지만, 1848년 이후 부패한 시기를 겪으며 타락해갔고 마침내 자본가들이 만든 위대한 자유당의 맹목적인 꼬리, 즉 그들의 노예가 되기를 소망할 정도로 타락해 버렸다.” 이 무렵 인터내셔널의 영국인 멤버들도 차츰 자유주의로 이전한다. 또 숙련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조합도 1871년 제정한 조합법으로 법적 지위를 획득하자 더 이상 국제조직에 관심을 갖지 않기에 이른다. 엘러너는 “정치적인 운동은 이제 완전히 끝났습니다”며 절망을 토로한다. 한편 1880년대 들어 중간계급 출신의 지식인들이 급진주의 조직을 만든다.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던 헨리 메이어스 힌드먼은 영국에서 최초로 사회주의적 정치조직을 만든다. 힌드먼은 칼 히르쉬를 통해 몇 차례 마르크스를 만났다. 그는 과거의 차티스트 운동가와 급진적 클럽들을 결합해 혁명조직을 만들려는 계획에 마르크스가 주목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힌드먼을 ‘자기도취적’인 ‘약한 그릇’으로 평가했고 엘러너도 이에 동의했다. 힌드먼은 1881년 6월 스스로 사회주의 단체임을 자임하는 민주연합(훗날 사회민주주의연맹)을 결성한다. 이 민주연합은 영국 사회주의 발전의 초석이자 당시 사회주의 세력들의 결집체였다. 하지만 정치적 이유와 힌드먼에 대한 불신으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주요 발기인이 되기를 계속 거부했다. 이런 감정은 힌드먼이 마르크스의 『자본』을 요약한 자신의 저서 『만인을 위한 영국』을 발간하며 더욱 심화된다. 마르크스는 중산층 민주주의자가 주축인 당을 위한 강령과 힌드먼이 인용한 자본주의적 착취에 관한 자신의 이론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는다. 그뿐만 아니라 『자본』을 주요하게 인용하고도 저자를 밝히지 않은 점은 마르크스의 분노하게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엘러너의 불신과는 상관없이 민주연합은 혁명적 사회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부상한다. 이 때문에 엘러너는 에이블링과 함께 민주연합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접촉을 시도한다. 1884년 사회민주주의연맹으로 개칭한 민주연합의 4차 연차대회에서 엘러너와 에이블링은 집행부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연합에서 탈퇴한다. 힌드먼이 마르크스주의 인터내셔널의 부활에 반대함으로 써 입장 차이와 감정적 갈등이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또 연합의 이념이 점차 의회주의로 변모되고 힌드먼의 고압적 태도 역시 변하지 않으면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혁신을 위한 사회주의자동맹 건설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너무 부족했으며, 지금으로서는 힌드먼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엥겔스와 협의한 후 개인의 사조직으로 전락한 사회민주주의연맹을 버리고, 보다 혁신적이며 사회주의적인 새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1884년 엘러너와 에이블링은 윌리엄 모리스, 벨 포트 맥스 등과 함께 사회민주주의연맹에서 탈퇴하여 사회주의자동맹이라는 독자 조직을 만들었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연맹이 물들어 있는 기회주의, 개혁주의, 의회주의를 공격했다. 그리고 혁명적 국제 사회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삼았다. 엘러너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자동맹에 참가하고 있었으므로 동맹은 국제적인 명성과 신뢰를 얻었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단체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회원이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아 전국 조직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들은 교육, 조직 활동, 당내 민주주의를 3대 활동 강령으로 채택했으며, 특히 교육을 중시 여겼다. 대학가의 강연과 민중을 위한 무료 예술을 제공했고 여성 문제에도 앞장섰다. 특히 엘러너는 여성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우리들 여성은 이제 분노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죄악과 사악함을 깨끗이 지워 버리기 위해 대홍수가 - 가령 그것이 피의 홍수가 될지언정 - 필요한 것이다. 여성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 의무는 사회를 혁명하려는 자들을 돕는 것뿐이다.” 엘러너는 모든 여성문제의 근원이 성 지배에서 시작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자본주의에서 결혼이 상거래의 일종이며, 여성에게 그러한 결혼은 매춘보다 나을 것이 없는 종속적 관계라 규정했다. 따라서 그녀는 여성들이 사회가 부과한 여성적 관습을 깨고 새로운 여성상으로 나아갈 것을 설파했다. 사회주의 혁명시에도 애정과 존경, 지적 친근성, 생활의 균등이 이루어질 때만이 두 사람의 관계를 조화롭게 만들 것이라 보았다. 또 진보적 여성의 사상은 여성 참정권과 고등교육 같은 시민의 기본권뿐 아니라 사유재산 및 여성의 육체 또는 정신적인 특수한 문제, 그리고 전문 직종에 대한 관심 등 모든 일반적인 분야를 총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태생부터 분파주의에 휘말릴 위험이 있던 사회주의자동맹은 결국 실패한다. 평의회에 이미 많은 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침투해 있었으나 엘러너를 비롯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위험을 깨닫지 못했다. 더군다나 힌드먼의 독단적 행동에 혐오감을 느낀 동맹의 설립자들은 중앙집권적 통제를 통한 당의 통일을 모색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사회주의자동맹 내부의 주도권 쟁탈과 이념논쟁이 그치지 않았고, 동맹의 지도부는 점차 폭력행위에 열중하는 아나키스트들의 파벌집단으로 대체되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새로운 방도를 찾고자 했던 엘러너는 이러한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동맹에서 손을 떼고 다른 일에 헌신하기로 결심한다. 신노조주의에 대한 헌신 엘러너는 신노조주의에 기대를 걸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 당시 영국 노동자운동의 상황을 보자. 19세기 말에 영국의 노동자운동은 새로운 변화를 모색한다. 기존의 노조주의는 숙련 노동자들 주도하에 확립된 것으로 제도적으로 인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873~1896년 동안 유럽 전역은 대불황을 경험했고, 이에 자본은 기계화와 노동강도의 강화로 대응하며 노동자들 내부의 불안을 키우고,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려 했다. 숙련 노동자들은 방어적 전략에 입각해 고용주와 타협했지만 반숙련이나 미숙련 부문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왜냐하면 반숙련, 미숙련 노동자들이 숙련 노동자들과는 달리 노동조합에 속해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고용의 불안정성에 직면해야 했다. 따라서 기존의 노조주의가 더 이상 노동자들의 이익을 방어할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기존 노조를 통한 단체 협상보다는 직접행동에 대한 호소가 설득력을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숙련 노동자들은 보다 급진적 이념과 새로운 노조주의를 제시하며 스스로 조직하려는 주체적 조건을 만들었다. 영국에서 이러한 신노조주의는 1889년의 파업들을 계기로 폭발했다. 엘러너는 신노조주의의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지도적 인물이 된다. 동맹에서 활동하며 지칠 대로 지친 그녀가 새롭게 결심한 것은 영국의 노동자, 빈민들을 조직, 선동하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노동자들과 밀착한 운동을 하면서 지난 사회주의 정치활동에서 느끼지 못했던 만족감을 얻었다. 엘러너는 영국의 산업체제 속에 인간의 삶이 경멸당하고 있음을 보고 사회주의야말로 불평등과 비참함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굳게 믿었다. 1889년 3월 ‘브리튼 및 아일랜드 가스공업과 일반노동자의 전국조합’이 결성됨으로써 신노조주의 운동의 서막이 열렸다. 그리고 그 시작에 엘러너 역시 동참한다. 계급적 성격을 강조하는 선언 초안 작성에 참여했고, 당시 지도부인 윌 도운에게 읽기를 가르쳐주며 전반적 지식을 넓히는데 도움을 준다. 엘러너는 사려 깊은 행동과 조합원에 대한 헌신적인 행동 덕에 노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당시 1일 8시간 노동제를 요구한 가스 노동자들의 파업이 승리를 거두었고 연이어 런던 항만노동자의 대규모 파업이 시작되었다. 이어지는 강경파업과 예상 밖의 성공에 엥겔스 역시 감격해하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한다. “지난날의 무수한 시행착오와 분열을 딛고, 우리는 마침내 가장 미래지향적인 운동을 발견했다. 내 생애를 통해 이번 파업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을 진심으로 자랑스럽게 여기며, 또한 기쁘게 생각한다. 만약 마르크스가 살아서 자신의 눈으로 이런 광경을 봤더라면, 그는 나와 함께 지금 당장 축배를 들었을 것이다!” 한편 엘러너는 실버타운 고무공장 노동자들의 총파업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사람들의 생사가 걸려 있는 이 10주간, 나는 매일 그들과 함께 뒹굴며 비바람을 맞고 다녔다”라고 엘러너는 당시를 추억했다. 이 시기는 엘러너가 노동자들의 삶과 맞대며 사회주의 운동의 한가운데로 나아가는 시기였다. 그녀는 실버타운에 가스공조합 여성지부를 조직하고, 스스로 서기장으로 취임한다. 그녀는 여성노동자들의 조직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또 “여성들이 남성들 이상으로 분기해야 하며 당면한 임금인상을 위해 단결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사회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같은 계급의 남성들과 더불어 투쟁하게 될 미래에 대비하여 단결해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이어서 엘러너의 활약은 계속된다. “5월 4일이 지나면 영국의 운동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당신의 귀에도 엘러너의 활약에 대한 소문이 들릴 것입니다.” 소르게에게 보낸 편지에서 엥겔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5월 4일은 다름 아닌 영국에서의 첫 번째 메이데이였던 것이다. 8시간 노동준수 입법 요구와 법률 개입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약 30만 명에 이르는 사람이 모였고 역사상 유례없는 대성공을 이뤘다. 메이데이 시위로 엘러너는 노동자운동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사가 되었다. 5월 중순에는 가스공조합의 서기장으로 추대되고, 새로운 조합 규약은 대부분 엘러너의 의사에 따라 채택되었다. 규약에는 모든 노동자의 이해관계는 하나임을 강조하며 여성을 위한 평등임금에 관한 조항 및 노동자 계급의 생활향상을 위한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아가 엘러너와 에이블링은 새로운 기구인 ‘8시간 노동준수 입법을 위한 국제노동연맹’에 핵심이 되어 인터내셔널에서 영국 사회주의를 대표할 독자적인 노동당의 수립을 목표로 선전, 선동을 벌였다. 이렇게 1890년대 영국의 사회주의 운동이 활기를 띠며 엘러너의 활동도 빛을 발했다. 하지만 어김없이 국가와 자본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유지가 최대의 목표가 된다. 처음에 신노조주의가 가졌던 이념의 통일성, 혁명성은 점차 상실되어가고 엘러너가 공들였던 국제노동연맹 역시 붕괴되어 갔다. 게다가 1895년 엥겔스의 죽음 이후 마르크스주의 운동은 방황하게 된다. 제2인터내셔널이 쇠락의 길을 걷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탄생했다. 엘러너는 영국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수많은 정치적 논쟁 속에 지쳐갔다. 여성혁명가의 안타까운 죽음 엘러너가 절망에 빠진 것은 정치적 위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런던 극장가를 배회하던 에이블링에 대한 환멸 역시 늘어만 갔다. 사실 이 시기에 엘러너는 자신에게 닥친 일만으로도 벅차 에이블링에게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강연활동과 대영박물관에서의 조사, 국제 노동자대회 및 탄광노동자 대회 통역, 게다가 죽은 제니 언니의 아이들에 대한 걱정까지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하지만 에이블링은 엘러너를 신경쇠약 지경까지 몰고 갔다. 엘러너는 마지막까지 병든 에이블링을 간호하고 헌신을 쏟아 부었지만 결국 한 통의 편지는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다. 1898년 3월 31일 오전 그녀는 에이블링이 이미 오래전에 비밀리에 여배우와 혼인신고를 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엘러너는 그동안 에이블링과의 관계가 진실한 부부라 믿었고 친구들에게도 그렇게 주장하곤 했다. 친구들의 비난에도 연애는 형식일 뿐이라 변명했다. 하지만 순수한 사랑이라 믿었던 마음이 무참히 짓밟히자 그녀는 자신의 삶이 무의미해졌다고 느꼈다. 그녀는 에이블링과의 마지막 대화 후 죽음을 선택한다. 그리고 에이블링에게 짧은 편지를 남겼다. “내가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이여,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날 겁니다. 당신을 향한 나의 마지막 말은 이 길고도 슬픈 세월 내내 입술로 되뇐 말, 사랑이에요.” 많은 사람들이 엘러너의 죽음을 에이블링의 배신으로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시 엘러너는 노동자운동이 곤란함에 빠지면서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음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것이 에이블링의 배신이었던 만큼 그 지점에서 우리의 평가가 필요하다. 한 여성 혁명가의 생애가 사랑의 배신을 계기로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은 비극이다. 특히 여성들의 삶에 주목했고 여성해방에 관심을 쏟았던 엘러너의 죽음은 더욱 그러하다. 엘러너는 여성들이 부르주아적인 결혼과 사랑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입센의 『인형의 집』과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을 만났을 때도 그녀는 반가워하며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현실의 사랑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활력 있고 매력적이며 능동적이던 그녀가 왜 수동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함께 혁명운동에 동참하였으나 사랑과 결혼에서는 오롯이 엘러너 혼자일 때가 더 많았다. 그녀는 고독과 절망을 느낄 때에도 자유롭게 선택한 사랑이므로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유연애를 빌미삼아 무책임한 연애들을 정당화하며 성적 해방감을 만끽하던 에이블링과는 전혀 다른 점이다. 에이블링과의 관계에서 만족하지 못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더욱 사랑에 의존하고 충실했다. 결국 그녀의 견고했던 믿음이 깨지는 순간, 삶의 전부가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이런 그녀의 갈등과 절망을 이해해 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사회주의 운동의 이념으로는 그녀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었다. 또 함께 활동하던 사람들도 그녀의 문제를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은 그녀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엘러너를 기억하는 법 종종 여성들의 삶은 남성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설명된다. 엘러너 역시 마르크스의 딸, 에이블링으로 인해 죽음을 택한 비운의 여주인공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앞서 살펴봤듯이 엘러너에게는 무궁무진한 자신의 삶이 있었다. 영민한 판단과 예민한 감수성, 타인에 대한 헌신성, 운동에 대한 정열로 19세기 영국 사회주의 운동을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했던 엘러너 마르크스. 이제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엘러너가 가졌던 원칙과 입장, 노동자운동에 대한 헌신과 열정을 배우자. 그리고 엘러너가 살았던 당시 운동이 해결하지 못한 것을 넘어서자. 페미니즘과 결합한 사회운동으로 여성의 경험을 풀어낼 이념과 실천을 만드는 것이 지금 우리의 과제일 것이다. 그녀가 간 길,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후세대인 우리가 엘러너를 기억하는 법이 아닐까.
지난 3월 26일, 민주노총 서울본부가 주최한 "민주노총 성폭력 사건을 통해 본 민주노총 혁신 과제 - 노조 내 여성사업 방향 모색을 위해" 토론회 자료와 서기록입니다.토론회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시 : 2009년 3월 26일(목) 15시□ 장소 : 민주노총 서울본부 중회의실□ 주최 : 민주노총 서울본부사회 : 박승희(민주노총 서울본부 수석부본부장)발제 : 김정은(민주노총 서울본부 조직차장)패널토론 :- 강해현(공공노조 교선실장)- 김금숙(사무금융연맹 여성국장)- 박천석(공무원노조 마포지부 정책부장)cf. 총연맹 김정아 여성부장은 참석하기로 했었으나, 일정상 참석하지 못했고, 자료가 첨부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