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언 | 2016.11.11
박근혜 퇴진운동의 시대사적 과제는 무엇인가?
한국 경제의 불행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우리 국민에게 가한 정신적 충격은 가히 1997년 IMF 사태와 비견할 만하다. IMF 사태가 준 충격은 무엇이었나? 한국경제가 외형적 성장을 거듭하여 선진국경제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했지만, 그 속내를 보니 빛 좋은 개살구였다. 한마디로 빚더미 위에 이룩한 허울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한국이 OECD 가입국으로서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한 집단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보사태가 보여준 것처럼 정치권력은 오히려 금융권과 기업의 부실대출에 거간꾼 노릇을 했다. 결국 우리 사회는 감시와 견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한국의 단기부채 비율이 외환보유고의 세 배가 넘는 상황에서도. IMF 사태는 파산과 해고가 속출하며 국민에게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 경제가, 우리 사회가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냐는 비통함과 자괴감을 남겼다.
한국 민주주의의 불행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6년,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우리 국민에게 던진 충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의 정치가, 한국의 민주주의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냐'는 한탄일 것이다.
물론 우리 대통령 중에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 있냐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실망을 경험했다. 1990년대 이후만 보더라도, 김영삼-김현철, 김대중-홍삼(세 아들), 노무현-노건평, 이명박-이상득 등등. 마치 조선시대의 ‘세도정치’를 연상케 하는 대통령 친인척 비리사태가 정말 약속이라도 한 듯 터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번 사태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최순실 그룹의 ‘국정농단’이라고 규정한다. '농단'이란 높은 언덕을 뜻한다. 즉 공인이 아닌 사인 최순실이, 공인 대통령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혹이 얼마나 사실로 드러날 것이냐는 문제와는 별도로, 왜 국민이 이런 의혹을 갖게 되었냐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 의혹이 만연한가? 그 이유는 한마디로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이다. 대통령이 청와대 구중궁궐 속에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지낸다는 사실을 이미 온 국민이 알고 있던 마당에, 바뀌지 않는 행태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던 시점에 이번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IMF 사태와 마찬가지로 현 사태가 폭발할 때까지 이를 감시, 견제하는 집단이 없었다. 청와대, 새누리당 국회, 행정부와 검찰, 심지어 사법부까지 대통령 눈치 보기에 급급할 뿐, 누구도 대통령을 감시하거나 견제할 수 없었다.
책임성 없는 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권력의 ‘위임’이라는 원리 위에 작동한다. 국민이 직접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권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결정을 내릴 자를 선출하고 그에게 권력을 위임한다는 뜻이다. 이는 ‘인민주권’이라는 원칙에서 볼 때 심대한 결함이 있다. 가까운 예를 보면, 광우병 소고기 사태 당시, 국민의 95%가 정부 협상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이를 추진하는 게 ‘위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에게 그런 권한이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책임성’(책무성)이라는 또 다른 원리를 탄생시켰다. 이는 단지 공인으로서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즉 공직자가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권력을 행사할 때 국민의 요구를 심사숙고하고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책임성이라는 원리가 작동하는가? 이미 2013년 집권 직후부터 박근혜 정부가 기초연금부터 경제민주화까지, 이루 셀 수 없이 경제복지분야 대선공약을 차례차례 파기할 때, 어떤 책임성 있는 자세를 보였는가?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대패했을 때, 민심이 바뀐 이유로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따른 고용불안, 소극적인 청년실업대책, 부동산활성화정책에 대비되는 전세대란 등등이 꼽혔다. 하지만, 총선 후 대통령과 청와대는 정책기조를 수정하겠다는 의사를 조금이라도 비쳤던가?
정치적 의사결정과 권력행사가 국민으로부터 유리되어 공직자가 위임된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할 때 권력과 정치의 사유화가 발생한다. 즉 권력이 최고권력자 개인에게 집중되고, 의사결정이 최고권력자의 취향에 따라 좌우된다. 이럴 때 최순실 그룹과 같은 가신집단이 등장하여, 세도를 누리며 사익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경제와 책임성 없는 정치
하지만 오늘날 정치위기는 한국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세계 주요국에서는 기존 중도우파, 중도좌파 정당이 급격히 쇠락하고 새로운 극우정당이나 좌파정당이 동시에 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샌더스와 트럼프가 동시에 등장해 결국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프랑스에서는 르펜이 이끄는 극우 국민전선이 내년 대선서 최소한 1차에서는 1등을 할 가능성마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나?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동의 자유화로 국내자본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실업이 악화되거나, 해외투기자본이 들어와 이익을 거둬가는 반면, 초민족기업은 조세피난처로 돈을 빼돌린다. 반면 외국자본 유치라는 명분으로 노동권 보호는 악화되고 재정건전화라는 근거로 복지삭감이 단행된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는 중도정부는 국민의 크나큰 고통에 무심하다. 이 모든 게 결국 책임성 없는 정치로 현상된다.
한국이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기조가 지속되는 한 책임성 있는 민주주의란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안고 있다. 반면, 민주주의를 다시 작동시키지 않고서는 신자유주의 경제기조를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도 우리의 박근혜 퇴진 운동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정책의 변혁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우리 국민에게 가한 정신적 충격은 가히 1997년 IMF 사태와 비견할 만하다. IMF 사태가 준 충격은 무엇이었나? 한국경제가 외형적 성장을 거듭하여 선진국경제클럽이라는 OECD에 가입했지만, 그 속내를 보니 빛 좋은 개살구였다. 한마디로 빚더미 위에 이룩한 허울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한국이 OECD 가입국으로서는 20년 만에 처음으로 구제금융을 받는 지경이 올 수 있다고 경고한 집단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보사태가 보여준 것처럼 정치권력은 오히려 금융권과 기업의 부실대출에 거간꾼 노릇을 했다. 결국 우리 사회는 감시와 견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한국의 단기부채 비율이 외환보유고의 세 배가 넘는 상황에서도. IMF 사태는 파산과 해고가 속출하며 국민에게 경제적으로 큰 고통을 주었을 뿐 아니라, 우리 경제가, 우리 사회가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냐는 비통함과 자괴감을 남겼다.
한국 민주주의의 불행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2016년, 박근혜-최순실 사태가 우리 국민에게 던진 충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국의 정치가, 한국의 민주주의가 '고작 이 정도밖에 안 되냐'는 한탄일 것이다.
물론 우리 대통령 중에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친 대통령이 있냐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이미 충분히 실망을 경험했다. 1990년대 이후만 보더라도, 김영삼-김현철, 김대중-홍삼(세 아들), 노무현-노건평, 이명박-이상득 등등. 마치 조선시대의 ‘세도정치’를 연상케 하는 대통령 친인척 비리사태가 정말 약속이라도 한 듯 터지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이번 사태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는가?
많은 사람들은 이번 사태를 최순실 그룹의 ‘국정농단’이라고 규정한다. '농단'이란 높은 언덕을 뜻한다. 즉 공인이 아닌 사인 최순실이, 공인 대통령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혹이 얼마나 사실로 드러날 것이냐는 문제와는 별도로, 왜 국민이 이런 의혹을 갖게 되었냐는 문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 의혹이 만연한가? 그 이유는 한마디로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이다. 대통령이 청와대 구중궁궐 속에서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닫고 지낸다는 사실을 이미 온 국민이 알고 있던 마당에, 바뀌지 않는 행태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던 시점에 이번 사건이 터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IMF 사태와 마찬가지로 현 사태가 폭발할 때까지 이를 감시, 견제하는 집단이 없었다. 청와대, 새누리당 국회, 행정부와 검찰, 심지어 사법부까지 대통령 눈치 보기에 급급할 뿐, 누구도 대통령을 감시하거나 견제할 수 없었다.
책임성 없는 민주주의
대의제 민주주의는 권력의 ‘위임’이라는 원리 위에 작동한다. 국민이 직접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권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결정을 내릴 자를 선출하고 그에게 권력을 위임한다는 뜻이다. 이는 ‘인민주권’이라는 원칙에서 볼 때 심대한 결함이 있다. 가까운 예를 보면, 광우병 소고기 사태 당시, 국민의 95%가 정부 협상에 반대한다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이를 추진하는 게 ‘위법’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통령에게 그런 권한이 위임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책임성’(책무성)이라는 또 다른 원리를 탄생시켰다. 이는 단지 공인으로서 윤리적, 도덕적 책임을 말하는 게 아니다. 즉 공직자가 정치적 결정을 내리고 권력을 행사할 때 국민의 요구를 심사숙고하고 자신의 행위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는 책임성이라는 원리가 작동하는가? 이미 2013년 집권 직후부터 박근혜 정부가 기초연금부터 경제민주화까지, 이루 셀 수 없이 경제복지분야 대선공약을 차례차례 파기할 때, 어떤 책임성 있는 자세를 보였는가?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대패했을 때, 민심이 바뀐 이유로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따른 고용불안, 소극적인 청년실업대책, 부동산활성화정책에 대비되는 전세대란 등등이 꼽혔다. 하지만, 총선 후 대통령과 청와대는 정책기조를 수정하겠다는 의사를 조금이라도 비쳤던가?
정치적 의사결정과 권력행사가 국민으로부터 유리되어 공직자가 위임된 권력을 무제한적으로 행사할 때 권력과 정치의 사유화가 발생한다. 즉 권력이 최고권력자 개인에게 집중되고, 의사결정이 최고권력자의 취향에 따라 좌우된다. 이럴 때 최순실 그룹과 같은 가신집단이 등장하여, 세도를 누리며 사익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다.
신자유주의 경제와 책임성 없는 정치
하지만 오늘날 정치위기는 한국에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세계 주요국에서는 기존 중도우파, 중도좌파 정당이 급격히 쇠락하고 새로운 극우정당이나 좌파정당이 동시에 출현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샌더스와 트럼프가 동시에 등장해 결국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프랑스에서는 르펜이 이끄는 극우 국민전선이 내년 대선서 최소한 1차에서는 1등을 할 가능성마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발생하고 있나?
이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자본이동의 자유화로 국내자본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실업이 악화되거나, 해외투기자본이 들어와 이익을 거둬가는 반면, 초민족기업은 조세피난처로 돈을 빼돌린다. 반면 외국자본 유치라는 명분으로 노동권 보호는 악화되고 재정건전화라는 근거로 복지삭감이 단행된다. 하지만 글로벌 스탠다드를 외치는 중도정부는 국민의 크나큰 고통에 무심하다. 이 모든 게 결국 책임성 없는 정치로 현상된다.
한국이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자유주의 경제기조가 지속되는 한 책임성 있는 민주주의란 근본적인 불가능성을 안고 있다. 반면, 민주주의를 다시 작동시키지 않고서는 신자유주의 경제기조를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당연히도 우리의 박근혜 퇴진 운동은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정책의 변혁이라는 이중적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