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3 겨울. 1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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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주년 기념 회원 에세이

사회진보연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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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출발선에 서서 다짐한다

손승환
(공공운수노조 서울지역공공서비스지부 조직부장, 공공회원모임)

 

노동조합에서의 16년

2007년 8월 민주노총 서울본부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 7월 비정규직법 시행으로 홈에버, 뉴코아에서 해고된 노동자들의 투쟁이 전국을 달구고 있었다. 서울본부는 기륭전자, 코스콤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코오롱, 한국합섬, 테트라팩 등 정리해고로 상경 투쟁하는 노동자들의 공동투쟁을 만들었다. 나는 주체적인 입장을 가지고 활동을 했다기보다 열심히 참가하는 수준이었지만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사회진보연대에 가입하고 몇 개월 후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곧이어 사회운동포럼이 개최되었다. 사회운동의 여러 쟁점을 풍부하게 논의하는 자리라 활동 초년생인 내가 기준점 삼을만한 내용이 많았다. 대안세계화, 대안노조, 국제연대, 페미니즘, 반전평화 등 노동자운동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노동조합 활동에서 어떻게 풀어낼 수 있지 고민했다. 지역의 투쟁을 지원하고 미조직노동자를 조직하면서 지역 운동 강화를 주된 활동으로 삼았지만, 고민을 심화시키고 실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노동조합 활동만 열심히 하는 상근자의 위치에서 한 발 더 내딛는 것은 매년 반복된 과제였다.

2016년 비정규직, 여성, 고령노동자로 대표되는 미화노동자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2016년 당시 서경지부)로 활동공간을 옮겼다. 노조 이름보다 대학청소노동자 노조로 더 유명하고, 빨간 몸자보를 입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가방 속에 싸 온 간식을 나눠 먹으며 집회를 소풍처럼 즐기는 노동자들이 주인인 곳이었다. 투쟁지원과 지역연대운동이 중심이던 민주노총 서울본부 활동과는 달랐다. 대학의 미화, 보안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이라는 새로운 세상 속을 직접 뛰어다니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조합원들의 투쟁과 성공적인 집단교섭으로 동종업계의 노동자들보다 임금이 높아지고 고용이 안정됐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민주노조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된 고민이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임금을 비롯한 현장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쏟는 시간은 늘어나고, 운동의 방향을 고민하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하는 것은 즐겁고 보람된 일이지만 사회운동의 주체로 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이 맞는 현장 활동가들을 만나기도 했고 고민도 나누며 성장하기도 했지만, 노동조합 상근자로서의 헌신과 활동가로서의 발전을 함께 이루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사회진보연대에서의 16년

사회진보연대에 가입하고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시작한 2007년부터 지금까지 16년이 흘렀다. 사회진보연대가 있어서 지금까지 사회변혁의 수레바퀴를 함께 굴리는 것이 가능했다. 민주노총의 과제, 정치와 사회의 중요 의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조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모든 논의에서 의견이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입장을 다듬고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조직이 한 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친구와 선후배들이 노동조합이나 현장에 들어갔지만,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거나 다른 공간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그것이 마음의 부채가 되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덤덤한 성격이라 큰 굴곡 없이 활동해오고 있는 것이 장점일 수도 있지만, 단점이 되기도 했다. 조직의 주장을 강하게 펼치고 입장을 선전해야 했는데 돌아보면 많이 부족했었다.

나를 돌아보는 것과 함께 우리의 운동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2007년 연말 이명박 정부의 출범부터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10년 동안 노동자들의 삶은 쉽지 않았고, 민주노총의 투쟁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정권이 추구한 비지니스 프렌들리, 친미외교, 언론장악, 문화계 블랙리스트, 교육서열화 정책 등과 싸우며 반보수연합 흐름으로 빨려 들어갔다. 2010년 지방선거의 야권연대가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당선을 위해 뭉치면서 적의 적은 동지가 되었다. 2017년 문재인의 비정규직 제로선언이 중도 반단되고, 노동자들의 삶이 달라진 것은 없지만 여전히 모든 것을 보수정권 탓으로 돌리며 민주대연합이라는 굴레에 빠져있다.

촛불, 대일외교, 남북관계, 미중경쟁 구도 등에서 사회진보연대의 입장은 운동 진영 주류의 입장과 달랐다. 포퓰리즘으로 흐르는 민주당의 입장과 동화되는 반보수연합, 국제법과 협약보다 우선하는 민족주의, 민주주의의 훼손을 옹호하는 행태는 민중운동을 퇴행시킨다는 주장을 펼쳤다. 현장의 요구를 극대화하는 방식과 정권에게만 책임을 묻는 투쟁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운동 사회에서 아직 큰 변화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으나 사회진보연대가 아니면 못했을 주장이다. 토론이 닫혀버린 운동 사회에서 새로 변화를 만들어내려는 노력이었다.
 

기존의 관념을 엎는 것이 진보

지난 추석 연휴를 전후해 휴가를 내고 여행을 갔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이 목적이었다.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러닝과 등산을 좋아하기에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스페인에 가기 전에 파리 오르세미술관을 들러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보았다. 2015년 이후 두 번째 관람이었다. 첫 관람 때는 고흐, 고갱, 르누아르, 드가, 모네 등 이름을 들어 본 화가의 그림이어서 유럽을 대표하는 최고의 그림들이라고만 생각했다. 이번 관람 때는 오르세미술관과 관련된 책, 인상주의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미리 접하고 갔다. 인상파는 아카데미로 대표되는 프랑스 당대 미술 주류에 속하지 못했던 이단아로 취급되던 화가들이었다. 영웅, 신화, 종교를 주제로 그린 역사화를 최고로 여기는 주류 미술계에서 인상주의는 조롱거리였다. 그러나 예술을 보는 시각과 취향이 바뀌면서 점차 수용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공부하고 나니 어설프게나마 이해가 되었다. 진정한 내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에 해석된 것만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도 새삼 깨달았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부터 변화해야 한다고 한다. 변화란 흔히 활동가로서의 생활, 태도, 실천 등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란 정세를 읽고 그에 따른 행동과 실천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구시대의 사상에 매여 있어서도 안 되고, 새로운 주장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주저해서도 안 된다. 그랬던 적이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보수세력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 내 스스로를 검열했다. 대화 속에서 얼버무리거나 토론하기를 꺼렸다. 하지만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살롱전에 작품을 전시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화풍을 밀고 나간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며 나의 위치, 우리의 위치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당대의 주류가 영원한 진리가 되지 않은 사례는 무수하며, 용기를 가진 자들이 기존의 관념을 뒤엎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왔다.

유명한 산악인 헤르만 후버는 “등산가는 산의 법칙에 따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며, 언제나 배워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이다.“ 라는 말을 남겼다. 변화하는 등고와 기상을 대비해야 하며, 자만해서도 안 된다는 말일 것이다. 활동가 역시 운동의 법칙에 따라 행동해야 함은 물론이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변화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배워야 한다. 변화하는 정세를 읽지 못하고 관성에 갇혀서는 발전이 없다. 높은 산을 올라 본 사람들은 안다. 단련된 몸과 체력이 있으면 좀 더 수월하게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는 것을. 물론 의지도 중요하다. 그러나 의지 역시 준비한 이들이 가질 수 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도 준비가 필요하다.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사회진보연대

우리는 몇 년에 걸쳐 지난 투쟁 속에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았다. 아프지만 부족했던 점과 잘못된 점을 인정하면서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새로운 세대의 출현을 가로막는 386카르텔, 민주당과 연합한 의석에 발목 잡힌 진보정치의 한계를 비판했다. 왜곡된 혁명의 역사 속에서 현재 우리 사회를 유추하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그뿐만 아니라 회원들이 활동하는 공간에서도, 2023년 민주노총의 각급 선거에서도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실무를 열심히 하는 개별활동가에서 노동조합 운동을 책임지는 조직활동가로 거듭나기 위함이다.

기관지에 글을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 쓸 때마다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글의 소재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번에도 느꼈다. 무엇보다 어려운 이유는 나의 경험과 생각이 활자로 표현되면 다짐이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시기에 글을 쓰면서 여러 가지 다짐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 이 글을 다시 봤을 때 활자들이 책의 지면만 채운 것이 아니라 내 삶을 채운 흔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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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은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고 있을까?

임성우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 교육선전국장, 충북회원모임)

 
2011년 사회진보연대에 가입할 때 막연히 “세상이 정의로웠으면 좋겠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지?”라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세상이 정의로워지는 데 노동조합이 의미 있는 조직일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노동조합은 세상을 정의롭게 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랬으니까 지금까지 금속노조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겠지.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에서 활동한 지 12년이 됐다. 12년 동안 교육, 선전업무를 담당했다. 최근에 나는 과연 12년의 활동을 바탕으로 얼마나 발전했는지, 금속노조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사회진보연대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돌아보곤 한다. 매우 반성적으로.

처음 노조 활동을 시작할 때는 노조가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시작했다. 밖에서 바라봤던 노조는 언제나 가장 위력적으로 투쟁하고 세상을 바꾸는 존재였다. 하지만 안에 들어와서 바라본 노조는 조금 달랐다. 매년 우리 회사의 경영상황에 따라 우리 조합원의 처우를 개선하는 일이 가장 우선이다.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기대에 비하면 아쉬운 일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노조가 가능성 있는 집단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직도 내 사업장 일이 아니라도 옆 사업장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대하며 연대의식을 쌓아가고 있고, 미조직 노동자들을 만나며 누구나 노조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도록 애쓰고 있다. 노조가 회사 안에만 갇히지 않으려고 노력을 부단히 하고 있다. 

금속노조 신입 조합원들에게 금속노조 소개 교육을 할 때 나는 조합비 현황을 가지고 교육하곤 했다. 조합원들에게 ‘내가 내는 조합비가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를 설명하는 것이 우리 노조의 정체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마다 강조했던 조합비 사용 내역이 있다. 신분 보장기금, 장기투쟁 대책기금, 미조직기금 같은 특별기금이다. 신분 보장기금은 금속노조 조합원이 조합활동으로 징계, 해고, 벌금, 구속 등 불이익을 받게 될 경우 생계비, 벌금 등을 지원하는 기금이다. 장기투쟁 대책기금은 투쟁으로 6개월 이상 임금을 받지 못하는 조합원들에게 생계비를 지원하는 기금이다. 미조직기금은 아직 노조에 가입되지 않은 미조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금이다. 이런 기금을 설명하면서 “조합원 동지들이 매월 내는 조합비 중 일부를 차곡차곡 잘 모아서 이렇게 꼭 필요한 사업에, 절실히 지원이 필요한 조합원에게, 자본의 탄압으로 민주노조를 지키기 힘든 동지들에게, 아직 노조를 모르고 일터에서 최소한의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에게 지원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노조탄압을 받는 동지들에게 연대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미조직노동자들과 손잡는 것이다. 금속노조는 이런 활동을 하는 자랑스러운 조직이다.”라고 말한다. 금속노조는 연대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고, 우리 조합원뿐만 아니라 아직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모든 노동자에게도 먼저 다가가는 집단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이것이 금속노조의 정체성이라고 말이다.

민주노조 운동 혁신의 시작은 노조 스스로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세력으로 자각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노조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올리는 집단이 아니라 사회 전체적인 시야 속에서 사회를 바꿔나가는 집단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노조를 통해서 일터를 바꾸고 자기 삶도 바꿔나간다. 조금 더 나아가서 노조가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까지 인식을 넓히는 것이 내가 노조 활동을 하면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상적으로 매년 진행하는 임단협 교섭이라도 우리 노조의 요구안이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담아내고 싶었다. 기후위기, 산업전환 같은 사회적 대격변의 시기에 금속노조가 선도적으로 산업전환협약, 기후위기 대응 협약을 제시하고 노사 교섭을 통해 합의를 만들어냈다. 우리가 하는 투쟁이 나의 이익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이익이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 나아가서는 경제적 이익이 아니라 권리를 추구하는 집단이어야 한다는 의미까지도. 노조에서 12년 동안 교육활동을 하면서 조합원들이 노조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집단이라고 자부심을 느끼도록 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반성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민주노조 운동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의 이미지는 여전히 강경하게 투쟁하는 모습이다. 특히 민주노조 운동에 몰입해있는 활동가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이미지는 더 과격하다. 술 마시면서 하는 무용담들이 대개 그렇겠지만, 아직도 쇠파이프, 화염병이 민주노총의 존재 가치를 보여주는 소재로 얘기되는 현실은 씁쓸하다. 그때 민주노총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웠는지는 남지 않고, 얼마나 과격하게 싸웠는지만 무용담으로 남았다. 민주노총이 얼마나 노동권의 확장을 위해 투쟁했는지는 남지 않았다. 그 시절에는 어떤 요구가 노동자들의 절박한 요구였는지, 그걸 쟁취해서 한국사회의 노동권이 미약하게라도 확장됐다는 사실이 무용담으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노조가 우리 사회의 변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가 우리의 무용담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변화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가? 노동조합이 조합원들에게, 모든 노동자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 존재인지 되돌아봐야 한다. 노조가 사회를 변화시키는 세력으로 자각하는 일이 혁신의 시작이라면,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모습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것인지 던지는 메시지가 혁신의 내용일 것이다. ‘노동자는 하나다’라고 하지만 노동자가 하나로 단결하기 너무 어려운 조건이다. 원청 노동자와 하청 노동자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영세업체 노동자가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산업 간 격차, 업종 간 격차, 기업 규모별 격차, 고용형태별 격차, 성별 격차 등 노동자들을 갈라놓는 경계선이 너무 많다. 이렇게 노동자들을 갈라놓는 자본의 전략을 뛰어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자본에게 빼앗긴 것들을 되찾아오면 자동으로 우리 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사라질까? 우리가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고민이 없다면 자본의 전략을 뛰어넘는다 해도 여전히 우리 안의 격차는 그대로일 수밖에 없다. 모든 노동자의 노동조합이 되는 길은 우리 안의 격차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사회진보연대는 매번 나에게 자극을 주는 존재였다. 노동조합 활동에 젖어 들다 보면 매년 반복되는 사업에 익숙해진다. 중간중간 생기는 투쟁사업장, 신규사업장이 새로운 활력소가 되지만 해가 갈수록 반복되는 노조 활동에 의욕을 잃기도 하고 너무 익숙해져서 내가 노조활동을 통해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무뎌지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자극을 주는 건 언제나 사회진보연대였다. ‘네가 지금 그렇게 무뎌질 만큼 노동조합이 제대로 된 혁신의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해?’라는 질문을 하는 것 같다. 사회진보연대라는 조직은 ‘지금 노동조합은 세상을 정의롭게 바꿀 수 있는 조직인가?’ 라는 질문이 계속 내 안에서 맴돌게 만든다. 

사회진보연대는 나뿐만 아니라 노동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 전반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존재였다. 운동진영 전반이 당연하다고 관성적으로 생각하는 문제에도 다른 시각을 보여주었다. 운동진영 내부의 문제에 뼈아픈 비판도 주저하지 않았다. 나는 사회진보연대의 그런 역할이 좋았다. 사회진보연대가 운동진영에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는 그런 역할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극은 신선하고 수용 가능한 수준이어야 긍정적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 사회진보연대가 전달하는 자극이 신선한 자극이 될 수 있도록, 수용 가능한 자극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내가 함께해야 하는 활동이었다. 실제 노동조합과 지역에서 하는 고민이 반영되어서 사회진보연대의 주장이 의미 있고 신선한 자극이 되도록 만드는 역할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런 역할을 잘 해내진 못했다. 노동자의 격차를 줄여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노동조합, 사회변화를 만들어내는 노동조합이 되는 데에 나는 아직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 

나의 12년을 돌아보는 것은 결국 다시 새로운 결의를 하는 일이 된다. 지난 12년은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달려왔다. 지금은 조금 더 많은 기반을 가진 상태에서 출발한다. 맨몸으로 고생한다는 핑계를 앞세울 수 있는 시기는 한참 전에 지났다. 이제는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시기다. 10년이 지난 후 노동조합은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고 있을까? 나는 그 안에서 1인분의 역할은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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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박용진
(민주노총 강원지역본부 노동안전보건부장, 강원회원모임)

 
회원에세이 청탁을 받고서 들었던 생각은 이번 기회에 그동안 발간된 사회진보연대 기관지들을 훑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회진보연대가 걸어온 발자국을 따라 강원지역 회원으로서 나의 활동을 반추해 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최근 느끼는 약간의 혼란과 갑갑함이 어느 정도는 뚜렷해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담아서……. 그러나 역시 마감을 넘기고 하얀 모니터 화면을 뚫어지게 보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아무래도 의식의 흐름대로 쓰게 될 것 같다. 창립 25주년 특별 기념호라는 역사적인 지면에 깊은 사과의 말씀을 우선 드린다.

내가 사회진보연대에 가입한 것은 2010년쯤이지만, 사실 대학에 들어간 2001년부터 사회진보연대라는 조직은 나에게는 등대 같은 존재였다. 잘은 모르지만 내가 찾아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주는 존재여서다. 사회진보연대가 25년간 굳건하게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나도 ‘노선’이라는 것을 갖고, 고민하면서 여기까지 따라온 것 같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꽤 시니컬한 태도로 펑크와 하드코어를 듣고 실존주의 작가들의 책들을 뒤적이며 부조리한 세상에서 고독한 지식인이라도 된 마냥 눈을 이상하게 뜨고, 고개는 삐딱하게 하고 다녔다. 머리도 길렀다. 지금 보면 한숨밖에 안 나오는 스타일이었지만, 그런 거에 개의치 않는 태도가 중요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는 잘 몰랐지만, 제국주의적이고 천박한 자본주의에 맞선 역사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들에 대해서 나는 우호적이었다. 당시 6.15공동선언과 햇볕정책 등으로 한반도의 평화문제가 유례없는 국면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한국의 해방 전후사와 군사독재에 강한 비판의식이 있는 정도였다. 당시 나는 내가 소박하게나마 앙가주망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대우자동차 투쟁이 내 삶을 바꿔 놓았다. 시내 곳곳에서 화염이 솟아오르고, 벌거벗은 노동자들이 군홧발에 짓밟히고 방패와 쇠몽둥이에 두들겨 맞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의 소설은 아프리카의 굶어 죽는 아이들에게 빵 한 조각의 힘도 없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내 삶의 모순을 그대로 겨냥한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운동권이 되었다. 

언제는 그렇지 않았겠나 싶지만, 당시는 다양한 입장과 대안들이 난무하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실제 운동권들도 혼란 속에서 재편되던 시기였다. 새로운 세상에 이제 막 눈을 뜬 운동권 새내기로서 왕성한 수용력을 가졌던 나는 돌아보면 당시 크게 세 가지 지점에서 인식을 새롭게 했다.

첫째로 자본주의 정세가 변화했다는 점이다. 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갖는 것이기도 했는데,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했다. IMF 경제위기와 맞물려 구조조정이 전방위적으로 진행되고 노동자들의 생존권 사수 투쟁이 폭발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엄호하고 신자유주의의 실체와 구조조정에 대응하면서 거기에 따른 중장기적 운동전망을 수립해야 했다.

또, 국제관계의 변화와 한반도 정세가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남북관계의 변화와 실체를 인식했고, 9.11테러 이후 헤게모니국가로서 미국의 대외전략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남한의 자유주의의 변화와 정치와 민주주의를 둘러싼 표상, 제도들의 변화를 파악하고, 정치적 대안세력들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를 인식했다. 이를 통해 당시 소위 진보진영의 이니셔티브를 가져가고 있었던 386과 NGO 등을 포함한 역사적 재야운동에 대한 평가와 연대연합 전술의 변화 등이 논의되고 있었다. 이처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다양한 논쟁과 대안이 제출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나로서는 사회진보연대 기관지를 보면서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회진보연대는 신자유주의라는 변화한 정세를 다각적이고 입체적으로 분석하면서 기존의 운동노선에서 수정되어야 하는 지점과 확장할 지점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당면한 구조조정 분쇄 투쟁과 각종 생존권 사수 투쟁이 어떠한 전장과 국면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지 분석했다. 그러한 틀에서 국제관계와 한반도 문제, 그리고 386과 NGO, 그리고 변화한 NL-PD운동 세력들의 동맹 전술과 연대연합 등에 대한 비판과 정정을 시도했다.

당시 나에게는 그런 정도의 문제의식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우리는 여전히 자본주의라는 적과 마주해서 싸우고 있지만, 그 적과 싸우는 전장이 상당히 많이 달라져서 전략과 목표도 그것에 맞게 재편되어야 함을 느낀다. 이런 맥락에서 여전히 나는 사회진보연대의 관점과 접근이 좋고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정세 역시 객관적 분석을 통해 비판과 정정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자본주의 위기의 새로운 국면, 국제관계의 변화, 그리고 인민주의로 대변되는 정치의 변화와 대안운동의 표상과 세력의 재구축 등. 

학생운동을 끝내고 군 전역 후 2010년 여름, 사회진보연대에 가입했다. 당시 사회진보연대는 조직적으로 지역과 현장에 진출해 대안적인 노조운동을 통한 대안좌파의 형성을 추구했다. 나도 그러한 문제의식에 전적으로 공감했고 이미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라 출신(대학) 지역인 강원도의 노동운동으로 진출했다. 

강원도는 사회진보연대의 토대가 거의 없는 곳 중 하나였다. 당시 강원지역으로의 진출은 다른 지역과 달리 조직적인 전망과 구체적인 역량투여 계획에 따른 판단을 통해 이뤄졌다기보다, 학생운동을 하던 지역의 연장선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됐다. 강원대학교나 춘천교대 출신의 활동가에게 지역 진출의 문턱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현실적인 조건과 강원지역에서 사회진보연대 운동을 확장하고 싶다는 의지가 ‘조직적인 판단’에 앞섰던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대안적인 노조운동을 통한 대안좌파 형성’이라는 문제의식에는 강원 회원 모두의 공감대가 있었지만, 이를 위한 우리의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은 다소 부재했던 것 같다. 일단 진출 가능한 곳(교사, 민주노총 지역본부)으로의 이전이 초기 과제였고, 이후에는 해당 조직에서 안착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버렸던 것 같다. 

지역 노동자운동의 조건과 세력, 정세에 대한 분석과 판단을 토대로 어떠한 전술적, 조직적 계기를 통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서는 충분한 내용을 갖추지 못했다. 앞서 말한 대로 ‘진출’과 ‘안착’이라는 현실적인 과제 속에서 강원지역에서의 활동은 체계성과 목적의식성이 다소 부족했다. 

강원 회원모임은 조직적 전망과 계획을 구심으로 서로의 활동을 점검하고, 집행하는 체계를 만들지 못했다. 운동하는 조직으로 회원모임을 세워내지 못했고, 단순한 회원들의 모임 이상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물론, 여러 시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수년째 신규회원이 늘어나기보다는 이탈하는 회원이 늘어 얼마 되지 않던 회원 수도 많이 줄었다. 이 지면에서 이에 대한 세부적인 평가와 대책을 서술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많이 늦었지만, 우리 모임이 답해야 할 과제다. 사회진보연대 25주년이라는 계기를 통해 우리 모임 역시 회고와 전망의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강원 회원모임이 돌아봐야 할 것들도 많지만, 전망을 다시금 수립하기 위해서 몇 가지 중요한 쟁점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강원’‘지역’이라는 현실에 관한 연구다.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구’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한다. 강원은 전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낮고, 고령화와 지역소멸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지역이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 비해 제조업 사업장의 규모가 작고, 대부분의 일자리가 공공부문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거나 관광-서비스 계통에 집중된 산업구조다. 노조조직률도 낮고 사회운동단체들은 거의 없고, 심지어 시민단체조차 사라져가는 실정이라 10년 후 강원도가 온존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된다. 세계와 한국의 전망은 사회진보연대가 지속해서 그려나갈 테니, 강원모임은 10년 후 강원지역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바탕으로 ‘누구’와 ‘무엇’을 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물론, ‘과연 도모할 무언가가 있기는 한가’하는 의문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그리고 ‘민주노총 지역본부’라는 조직에 관한 연구와 판단도 필요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구’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아가야 한다. 민주노총 혹은 민주노조라는 역사적 존재와 2020년대 현실에 존재하는 실체 사이의 괴리는 지역으로 갈수록 크다고 생각한다. 산별조직과 지역본부-지부 조직 각각의 역할과 관계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들부터, 현실에 존재하는 산별 사업장들과 사실상 실체가 사라져가고 있는 지역지부의 실제 활동과 역량에 대해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그에 걸맞은 전망과 계획의 재수립이 필요하다고 본다. 아울러, ‘지역의 조직으로서 민주노총 지역본부-지부’라는 조직의 가능성과 역할에 대해서도.

물론, 그 진단의 중심에는 노동자 내부의 격차를 극복하고 단결을 강화해 나가는 것, 인민주의적 대안이 아닌, 새로운 사회를 이끌어갈 대안을 실현할 주인으로 성장 전화할 수 있는 프로세스로서의 노동조합, 혹은 노동자운동을 수립하기 위한 전망과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것이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민과 연구를 함께 해나갈 수 있는 사람들을 탐색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어쨌든 절망하지 않고, 계속하겠습니다. 
Viva, 사회진보연대!
 


✽ ✽ ✽

너와 우리에게

양문영
(직업환경의학과 의사, 보건의료 회원모임)

 
1. 한참 지하철을 타고 내린 곳은 인천이었다. 매일 지하철로 바다를 건너며 출퇴근을 했었는데. 그 전까지는 연이 없던 도시였다. 지금은 인천에 대해서 여러 색이 덧입혀진 기억을 갖게 되었다. 
가을바람은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예매한 배편을 발권했고 출발까지는 약간 시간이 있었다. 이렇게 시간 내서 올 수 있는데 이게 뭐 어려웠다고 그때는. 내려놓지 못할 생각을 이고 있었다.
 
@ 너에게 운동은 뭐야? 이따 전화해서 물어볼 거야. 고마워. 냅다 텔레그램을 남겼다. 그날의 일을 마무리하고 전화를 걸었다. 야 이 생각을 몇 시간째 했는지 몰라. 볼멘소리가 전화 너머로 튀어나왔다. 
“나는 사무처 동지들이나 노조에 있는 동지들처럼 지금 운동을 업으로 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일을 하는 게 아니면 운동을 한다고 스스로 얘기할 수는 없는 것 같아, 나는. 그러면 나한테 운동은 뭐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지만 우리 모임의 다수가 운동을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은데 엄격한 기준 아닌가. A의 말을 끊지 않고 적당히 추임새를 넣으며 이야기를 기다렸다. “회원활동을 하는 시간이 내 삶에서 주가 되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운동이 나한테 어떤 의미가 있나를 고민하다가. 내가 운동을 무엇에서 시작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일단은 제대로 된 정세 인식이 가장 먼저인 것 같거든. 언젠가 그걸 진짜 내 이념으로 만들고, 내 주변 사람들을 조직하는 그런 과정으로. 아직 조직에서 나오는 논의를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차지만. 그래도 나는 내 나름의 준비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 언젠가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도록. 사실 눈 살짝 감으면 아무것도 안 할 수 있잖아. 진짜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데……. 직장인 회원으로서 사회진보연대와 나는 어떤 관계여야 하는가를 좀 고민하게 되네. 운동이 내 삶에서 좀 더 큰 무언가가 되려면 어떤 과정이 더 필요할까.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어떤 걸 더 해볼 수 있을까, 그런 고민도 했어.”
아니 이 친구 정말 많은 고민을 했구먼. 몇 시간 전에 성의 없이 보낸 텔레그램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중간중간 생각을 다듬으며 통화에 공백이 생길 땐 고양이 울음소리가 음향을 채웠다. 
“삶이 바쁜 건 맞지만, 너무 내 스스로 변명인가 싶기도 하고. 누구든 삶이 안 바쁘겠냐고. 그래도 일단 (밀도 있게 운동하는)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으면 어느 순간 ‘아 맞다’, 이렇게 번뜩번뜩하고 정신 차려지는 순간들이 있으니까. 더 연결되어 있어야지, 하지만 연결되는 것만으로 내가 뭘 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만 머무르지는 말아야지, 이런 생각도 하고. 근데 막상 기관지 읽으려고 앉으면 집안일 할 게 너무 많은거야”
세 시간을 고민했다는 A는 꽤 뼈 때리는 말들을 남겼다. “야, 근데 이거 이름이 나가는 건 아니지?” 물론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사실은 누군지 알 사람은 다 알지 않을까, 라는 말을 삼켰다. 내게 질문을 받고 자기도 주변에 더 물어봤다고 했고 모은 말들을 들려줬다. 운동은 평생의 과제고, 지향이고, 하고 싶은 일인데, 한편으로는 운동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것에 대한 고민도 있더라고 덧붙였다. 사람마다 여러 삶의 조건과 시기가 있는 거라고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내 처지도 돌이켜보면서, 그들이 들려준 솔직한 말들이 고마웠다.
 
2. 너에게 운동이란 무엇이었을까? 유람선 2층에서 지나온 길을 따라 하얗게 이는 물보라를 보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인천대교와, 배 주변을 맴도는 갈매기들과, 바다. 너는 거의 쉬지 않고 활동을 이어갔다. 노동안전보건 분야에 있으면서, 많이 아팠으면서도 네가 있었던 곳의 노동환경을 나아지게 하는 데 힘을 보태며 기뻐하던 너.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학생 때 만났던 너를 생각한다. 여름마다 다녀오는 건강현장활동 얘기에 눈을 마냥 반짝이던 너. 성큼 건활에 나타나 새롭게 사귄 친구들 사이에서 한껏 웃던 너.
흡연은 2층 바깥에서만 해주세요. 슬프신 건 이해하지만, 다른 데서 담배 태우시면 정말 위험합니다. 유람선의 안내는 작년과는 달리 쓸데없는 광고 없이 드문드문 울렸다. 차례가 된 사람들은 1층으로 조심조심 내려갔고, 배는 한동안 머문 뒤 다시 움직였다. 작년에도 느꼈지만 여긴 갈매기가 참 많았다.  
 
@ “나한테 운동이란 뻔한 말만 될 것 같긴 한데. 옛날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거? 그런 거였다면. 요즘은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드는 거로 좀 바뀌긴 했는데. 직장에서 하는 일이 있다 보니 예전에 치열했던 것보다 요즘은 조금 다른 주제에 집중하고 있긴 하지만. 요즘엔 돌봄이라는 주제에 좀 더 집중하고 있는데 돌봄이 이루어지려면 일단 삶과 사회가 안정되어야 하니까. 서로 위험에 빠지지 않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그런 생각을 요새 많이 하는 것 같아. 이게 하나고, 다른 하나는 내 주변 사람들이 자존감을 갖고 더 안정되게 살 수 있었으면 하는 거. 그것도 사실 되게 어려우니까. 그거에 기여하고 싶다는 거.”
“너는 그런 게 힘들지 않아?” “그런 시기도 있었는데, 지금은 내 마음에 여유가 좀 더 생긴 것 같아. 옛날에는 뭔가 한 번에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어서 더 무거웠는데, 지금은 당장 이걸 하기 어렵다면 그 준비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준비하다 보면 언젠가 나도 더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의료연대 동지들도 너무 좋고 그래서 (회원교육) 과정도 하고 있지만. 이렇게 치열하게 고민하는 곳은 잘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요새는 되게 회원 교육받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  
B의 목소리는 단정하고 또렷했다. 흔들림을 알고 또 스스로의 방향을 다잡아가는 B의 음성엔 자신과 다른 사람을 지탱할 힘이 있었다. B에게 많이 의지했던 중요한 시간들이 떠올랐는데, 좋은 친구이자 동지인 B처럼, 나도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기를 바랐다.
 
3. 내내 짙은 향을 뿌리던 국화꽃을 던졌다. 힘껏 던졌으나 흔들리다 배 바로 앞에 떨어진 꽃을 보며 너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오랜만에 입에 걸린 그 이름은 낯설었다.
 
@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삶을 이어가기 위한 전제인 노동과 일터는 누군가에겐 너무나 혹독하다. 그 격차는 점점 더 벌어져만 가고, 나는 일터에서 단 하나의 사람도 위험해지지 않기를 바란다. 한편으로는 나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선배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노동안전 분야 사람들 성향이 있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경향이라는 건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아픔에 쉽게 공감하고 정당한 분노를 이어가는 사람들. 그 마음들을 잘 엮어내고 싶었고, 앞으로도 엮어내고 다독이고 같이 나아가고 싶다. 실력이 부족해서 이전 활동지에서 더 좋은 것들을 남기지는 못했더라도 아끼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다. 
 
4. 배가 땅에 닿았다. 배 앞에 내려온 방향을 한 번 더 보았다. 네가 꾸었을 꿈과 우리가 꾸는 꿈과, 너의 평온과 우리의 평온을 기도하며 발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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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MBTI는 IDTP?

김승곤
(전국플랜트건설노동조합 경인지부 수석부지부장, 건설회원모임)

 

저는 이념지향형 인간(IDTP)이 되고 싶었어요. 

(요즘 유행하는 MBTI에서는 사람들의 성격유형을 16가지로 분류하는데, 그 중 하나인 INTP를 패러디하여 IDTP(IDealogy-oriented TyPe)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다.)

어릴 때부터 뭔가 삶의 목표를 갈구했었는데, 그 목표가 이왕이면 보편적이고 영원한 것이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거든요. 처음엔 ‘사회적으로 도움이 되는 인간이면 좋겠다’ 정도였는데, 대학 때 마르크스주의를 알게 된 후 여기에 뭔가 찾을 것이 있겠다 싶어 기웃거리게 되었던 거죠. 

대학에 입학했을 때 진보적인 담론에 끌렸어요. 막연히 80년대 민주화 투쟁을 했던 선배들을 동경했었죠. 하지만 소련이니, 중공이니, 북한은 잘 몰랐어요. 어쨌든 망한 국가, 체제라고 생각했었어요. 당시 사회과학 세미나를 같이 했던 선배에게 이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네요. “선배,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말을 이야기했다는데요, 자본주의 체제 외에 다른 체제가 가능하겠어요?”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주워들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사회과학 학회에서 ‘역사과학’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고 그 개념에 반해버렸습니다. 이공계였던 저는 과학을 정말 좋아했어요. 근데 ‘역사 플러스 과학’이라니? 역사를 과학적으로 해석한다는 뚱딴지같은 소리가 무슨 뜻인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관련된 책을 하나 둘 읽어 봤는데, 제가 이해하기론 상당히 그럴듯했어요.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성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마음에 들었어요. 

근데 더 정확히 알려면 경제학을 공부해야겠더군요. 그래서 경제학을 공부하느라 저는 아직도 ‘역사과학’을 이해해 가는 중입니다. 
 

이념을 확인하기 위한 활동 : 일요회 세미나

역사과학은 말 그대로 역사를 과학적으로 해석한다는 뜻입니다. 이때 과학적이라는 의미는 ‘과학의 대상’으로서 자본주의(역사 일반이 아닌)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 대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인과관계’을 규명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 대상과 인과관계 분석이 논리적으로 합당하다면 자본주의의 미래도 어느 정도 예측해 볼 수 있게 되겠지요. 자본주의가 내부 모순에 의해 스스로 붕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주장인데, 이것이 타당하다면 다른 시스템을 기획하는 것이 합리적인 결론일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접근과 해석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단순히 주의, 주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경제학의 영역에서 논쟁도 하고 증명도 된다는 것 때문에 제 이념의 뿌리가 좀 더 탄탄해지는 느낌이었지요.

그래서 저는 주변에 회원들과 함께 경제학을 좀 더 깊이 공부하는 모임에 참여했습니다. 우리 모임은 평일에 다들 바빠 일요일에만 모였는데, 그래서 ‘일요회’가 되었지요.

일요회에서 여러 책을 봤지만, 특히 윤소영 선생님의 『현대경제학 비판』을 꼼꼼하게 완독했을 때 뿌듯함이 제일 컸습니다. 주류경제학을 이해해야 해서 『새뮤얼슨의 경제학』과 데이비드 웨일의 『경제성장론』도 읽었는데, 특히 경제성장론은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들이 많았습니다. “왜 어떤 국가는 부유하고 어떤 국가는 가난한가”라는 주제에 답하려는 치열한 시도들이 담겨있지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경제성장을 다루기 때문에 ‘역사과학’과의 논쟁지점이 많아요. 주류경제학이지만 꼭 검토해야 할 학문인 것 같습니다.

일요회가 2018년 여름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5년째 같이 하는 장기 모임이 되었습니다. 노조 활동이 어려울 때 이래저래 저로서는 마음을 의탁할 수 있는 좋은 곳이었습니다. 저에게 지적 자극을 주고 가르침을 주었던 회원 동지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활동 : 노동조합 조직국장?

그런데,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저에겐 여전히 어려운 부분입니다. 제가 노동조합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조합원들의 임금이 올라가는 것이 곧 마르크스주의는 아닐 것 같습니다. 노동자의 배타적 이익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노동자주의라고 해야겠지요. 노동자의 노동권이 모두의 보편적 권리가 되도록 하는 그런 운동과 투쟁은 무엇일까요? 마르크스주의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이념인지라 오늘의 내 활동이 당장 이념을 실천한다고 위안할 수는 없겠지요. 물론 동료들과 같이 노동하고 집회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습니다. 나를 신뢰해주시는 동료들도 늘어났고, 개인적으론 집회를 구성하고 연설하는 기술도 갈고 닦았지요. 어쩌면 실천을 위한 기술들은 익혔는데, 이 기술을 어떤 방향으로 사용해야 할지에 대해 의문이 듭니다.

정세는 지속적으로 변화합니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는 재생산됩니다. 하지만 역사과학의 분석에 따르면 재생산이 갈수록 삐걱거립니다. 이윤율이 하락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삐걱거리는 균열을 어떻게 포착하고 해석할 것인지를 놓고 이념논쟁이 붙습니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올바르게 파악했느냐는 것이지요. 때론 분명해 보이던 것이 아닌 것이 되기도 합니다. 운동권 내 왕따가 되기도 합니다. 결국 누가 옳았는지는 시간이 좀 지나고 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들이 회원들에게 상처도 주고 탈퇴를 하게도 했습니다. 모두에게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정파는 이념논쟁을 하지 않더군요. 이미 마르크스가 이론은 다 정리해 놓았고 이제는 실천만 하면 된다면서 말이지요. 그나마 마르크스를 들먹이는 누군가는 스탈린주의적 도식을 칠판에 장황하게 그리면서 ‘나보다 마르크스를 쉽게 이해하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라고 이야기하시더군요. 완성된 이론이 있으니 의심 없이 반제국주의, 반미투쟁 한길로 갈 수 있겠더군요. 

저는 오히려 우리가 논쟁하고 갈등하는 과정이 건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과 이론의 긴장, 해석의 긴장이 없다고 속인다면 운동은 활력을 잃을 것입니다. 이념논쟁이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는 중요한 활동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정성진 회원의 도움으로 베틀렘의 『소련에서의 계급투쟁』을 회원들과 같이 읽고 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하고 실현하려는 볼셰비키들의 노력을 보면서 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아시다시피 당시 볼셰비키들은 노동자운동을 극한으로 전진시켜 전례 없는 성과를 이룩했습니다. 그런데 볼셰비키도 노동자들도 자본주의 질서를 강화하는 실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큰 가르침입니다. 베틀렘은 계급투쟁을 기존의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생산관계 및 계급관계)를 재생산, 강화하는 실천과 약화, 변혁하는 실천 간의 투쟁으로 이해했으며 이를 근거로 러시아혁명을 해설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조직의 실천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혹은 가야 할까요? 우리 조직이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을 강화하고 있는지, 혹은 적어도 준비를 하고 있는지 같이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사회진보연대에 가입했던 십 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저는 이 세상을 진정으로 변화시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혼자서 마르크스주의를 실천할 순 없습니다. 조직과 함께 계급투쟁의 한길로 가야겠습니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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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25주년을 생각하며

안민지
(금속노조 총무국장, 금속회원모임)

 

사회진보연대와의 만남

‘노동운동을 하며 평생을 살아야겠다.’

학생운동 당시 했던 다짐이다. 2009년 쌍용자동차 점거 파업, 2010년 한진중공업 85크레인 농성 투쟁, 2012년 한진중공업 최강서 열사 투쟁까지.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강렬한 투쟁들은 금속노조 투쟁이었다. 기회가 닿는다면, 금속노조 운동에 헌신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5년간의 학생운동을 마무리하고 진출을 앞둔 시점, 사회진보연대 회원이 되었다. 부산지역에는 사회진보연대 회원이 소수였기에, 처음부터 사회진보연대를 충분히 겪을 수 있진 않았다. 그럼에도 어떤 운동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토론하고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내가 겪었던 사회진보연대

서울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2017년 지회 단위 활동을 정리하고 어떤 삶을 살지 고민하는 과정에서도, 활동하는 삶을 포기할 일이 없을 거라 확신했다. 개인 결의를 떠나, 논의를 이어갈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생활이었지만, 망설여지거나 두렵진 않았다. 출신이나, 현재 발 딛고 있는 물리적 공간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운동을 만들어 갈 것인가가 중요했을 뿐이다. 어떤 시기에는 단위조직 모임을 하기도 했고 어떤 시기에는 금속서울모임 회원이기도 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서히’라는 책읽기 모임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금속서울경기모임을 꾸려가고 있다. 가끔은 오랜 기간 활동의 결과로 지부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동지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여러 활동의 조건 속에서 각자 속한 모임과 공간이 다르더라도 결국 조직의 활동을 함께 만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혼자라고 생각했던 순간에, 서로 응원하고 지지해 준 동지들이 힘이 되었다.

어떠한 정세분석으로 무엇을 결의하고 어떻게 실천하며 살아갈 것인지, 부단히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되돌아보면, 사회진보연대의 강점은 회원 한 명 한 명의 발언이 충분히 보장된다는 것이다. 어떤 학습을 하든, 쟁점 토론을 하든, 사업계획과 평가를 하든 질문이나 의견을 낼 때 모두가 함께 집중하고 가다듬으면서 방향을 만들어 왔다.
 

청년이 된 사회진보연대를 생각하며

그런 사회진보연대가 25주년을 맞이한다. 내가 사회진보연대를 만난 것은 2014년이기에, 10년가량밖에 되지 않지만, 앞서 걸어온 선배들이 만들어 온 조직의 역사가 이어져 어느덧 청년이 되었다.

사회진보연대 활동이 늘 순탄하진 않았다. 조직적 내홍을 겪기도 했고, 여전히 여러 입장을 수립하고 지향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사회진보연대의 강점이라고 언급했던, 의견에 대한 발언권이 보장된다는 것에 대해 첨언하자면, 어떤 순간에는 발언은 보장되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느꼈던 때가 여러 순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명했다. 다수의 의견과 다를 때도 많았다. 문제제기성 의견을 낸 적도 꽤 있었다. 적극적으로 드라이브를 걸기도 했다. 어떨 때는 논의 자리에서 의견 표명을 넘어 주변 사람들에게 이견을 제기하며, 답답함을 호소한 적도 있었다.

지난한 논의와 과제 도출 과정이 이어져 그럼에도 그다음 한 발을 내디뎌 왔다. 조직에 대한 개입과 방향에 대한 제기를 끊임없이 이어가는 것은 회원으로서 조직을 포기하지 않는 노력이다. 그리고 내가 확인해온 사회진보연대는 적어도 그런 회원들의 노력을 받아 안으려 했다.

어릴 때는 조직이 늘 옳다고 생각했다. 혹은 조직이 나침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분투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엄혹한 정세 속에서 운동을 만드는 과정은 수없이 깎이고 부딪히는 과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변화를 모색할 때다. 지금부터 하는 시도들은 과거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이어야 한다. 남겼던 평가들을 반복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2023년 12월, 각 조직 단위들은 선거 대응에 집중하는 시기로 모두가 혁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혁신을 만들어 갈 주체로서, 서로 역할을 자임하며 치열하게 나아가자. 
 
사회진보연대 25주년을 축하합니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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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동행

이상욱
(공공운수노조 전략조직국장, 공공회원모임)

 

4년의 상근활동

10년. 사회진보연대 회원으로 함께한 시간이다. 물론 사회진보연대를 접하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학생운동 시기였다. 그때부터 쌓아온 이념과 노선에 대한 동의를 기반으로, 2014년 사회진보연대 서울지부 상근자를 시작하게 됐다. 

솔직히 첫 시작은 쉽지 않았다. 선후배, 또래 집단과 함께하는 학생운동과는 전혀 다른 구성이었다. 당시, 서울지부 회원모임 구성은 직장인, 대학원생, 노조활동가, 단체활동가 등으로 연령/직업/경험이 다양했다. 그렇다보니 회원모임을 하려면 상근자인 나는 문장 하나하나, 쟁점 별 설명을 꼼꼼하게 준비해가야 했다. 그만큼 질문이 많았고 긴장의 연속이었다. 이질적인 사회구성원이 사회진보연대 회원으로 모여, 입장을 통일하고 조율하는 과정이 어려웠지만 스스로에게 많은 배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노조활동에 필요한 자산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그렇게 서울지부 활동을 총 4년간 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일을 꼽자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진보적인 시민, 노동조합 간부·활동가와의 만남을 넓히고자 한 시도다. 특히, 정세강좌를 비롯하여 마르크스 저작선, 페미니즘, 한반도 정세와 통일정책 등을 주제로 사회운동학교를 진행하였다. 강의실을 가득 채운 강좌부터, 직접 강사로 교육을 진행한 강좌까지 애착이 많았던 프로그램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사회진보연대 소책자, 회원교육 교안 등으로 발간되어 결실을 맺었다. 

둘째, 노동조합 조직화를 지원하여 새로운 주체형성과 노조할 권리를 확장하는데 기여했던 활동이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의 조직과 투쟁을 꼽을 수 있다. 강남 서초구에 있는 삼성 사옥 앞에서 함께 싸우고, 밤마다 농성하며 무노조 삼성을 무너뜨린 기억이 강렬했다. 서울지부 회원들이 문화제로, 수박Day로 연대했던 순간도 마찬가지로 잊지 못할 기억이다. 아마 공공운수노조로 활동공간을 옮길 때, 전략조직팀을 지원하게 된 것도 그때의 좋았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여전히도 미조직 노동자를 만나고 노동조합의 첫 시작을 함께할 때마다 불안과 설렘이 담긴 두근거림을 느낀다.

덧붙여 이번 기회를 맞아, 서울지부를 함께 이끌었던 사무처 상근 동지들 그리고 여전히 활동을 이어나가는 서울지부 회원 동지들께 감사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순탄하지 않았다.

사회진보연대 상근 활동을 마무리하고, 노동조합으로 활동공간을 옮길 시점이 2018년이었다. 당시에는 사회진보연대 이념노선 재정립, 대중운동 평가 등을 둘러싸고 회원토론회가 여러 차례 열렸고 논쟁도 격렬했다. 물론 나는 당시 반성적 평가를 했던 내용들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평가를 거쳤기에 지금의 사회진보연대가 더 세밀한 정세분석과 현실인식 속에서 운동하고 있다고 본다.

다시 한 번 곱씹어보고자 한다. 학생운동 당시 광우병 투쟁, 사회진보연대 상근을 시작하자마자 마주한 비극인 세월호 참사, 매일 아침·주말마다 박근혜 퇴진투쟁에 쏟았던 시간들은 나의 활동에 매우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투쟁의 결과는 스스로에게 늘 물음표로 남았다. 반MB민주대연합,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통합진보당 추진, 보수정권 악마화, 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반복해서 겪었다. 반신자유주의 전선을 세우고자 했던 수년간의 노력은 어느새 민주 대 반민주, 차악선택, 더 나아가 의탁정치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진보연대 역시 “올바른 입장을 개진하고 대중운동을 함께 견인했으나 역량이 부족했다”라는 평가를 반복하는데 머물렀던 것 같다.

더욱이 2008~2009년 세계금융위기로, 더 이상 금융중심의 자본주의가 성장을 이끌 수 없는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는 것이 분명해진 시기였다. 자본주의 성장의 재개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 장기침체(장기저성장)로 접어든 것이다. 도돌이표처럼 투쟁의 결과를 민주당 세력이 흡수하고 정권교체 불쏘시개로 활용하는데, 노동자의 경쟁과 격차 심화, 불평등 문제는 확대되었다. 이러한 진단을 토대로, 우리는 이념 노선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내 활동의 대부분이었던 투쟁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과정이라 쉽지 않았지만 인정했고 다시 결의했다.

이러한 반성적 평가는 대안사회를 향한 주체와 노동자 단결의 조건을 어떻게 다시 형성할지를 고민하게 해주었다. 거기서 출발하여, 무엇보다 경제위기에 대한 노동조합의 대안 마련과 한국사회 지배세력에 대한 핵심적 비판을 다짐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던 것 같다. 누군가는 당시의 논쟁을 상처와 내홍이라 말하겠지만, 나에게는 치열한 논쟁이자 투쟁이었다. 그렇게 계간 사회진보연대 발간이 재개되고 “반보수전선인가 포퓰리즘 비판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격렬한 논쟁과 토론은 나에게 ‘나와 우리의 운동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매우 근본적인 물음에 답을 준 셈이다. 그렇게 노동조합에서 6년 동안, 부족했겠지만 민주노총의 여러 길 중에 하나를 만들어보고자 노력했다. 
 

진지하게 조심스럽게

나는 노조하기 어려운 노동자들을 만나는 것이 주된 활동이다. 노조 밖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어디를 가야 만날 수 있는지를 계속 고민한다. 그렇게 만난 노동자들에게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와 함께 하자고 설득해야 한다. 무엇보다 경청하고 많이 듣는 것이 우선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나는 단순하고 쉬운 답을 드리지는 않는다. 때론 명쾌한 답을 드릴 때도 있지만, 미조직 노동자의 삶에 내가 들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에 조심스럽다.

무엇보다 미조직사업을 통해서 만나는 시민과 비조합원으로부터 우리 노동운동과 노조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역할을 확인한다. 또한 간부·조합원분들과의 대화에서도 한국 사회를 보는 날카로운 시각을 배운다. 더욱 단순하고 쉬운 답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사회진보연대는 설명이 많다거나 어렵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왔다. 그럼에도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호흡하며 조합원과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의 대안, 한국사회의 변화를 함께 만들자고 다가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꼭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 노동조합을 하기 어려운 수많은 미조직 노동자에게 민주노총은 여전히 희망이 되어야 한다. 우리 내부를 꼭 돌아보고, 더 어렵고 더 열악한 곳으로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민주노총이 박수 받고, 노동조합 활동이 상식이 되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싶다.

무엇보다, 노동운동-민중운동은 한국사회를 불행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정권교체만을 위해 노동자-민중의 삶을 불쏘시개로 소모하는 민주당 세력과 반드시 결별해야 한다. 그리고 윤석열 정권과 단호히 맞서기 위해 우리의 태세를 돌아보았으면 한다. 어느 지점에서, 어떤 내용으로 민주노총이 윤석열 정권과 제대로 붙을 것인지를 찾아나갔으면 좋겠다. 물론 민주노총 활동가인 나 역시 치열하게 고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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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을 수 없는 이름

이다현
(인천회원모임)

 
‘사회진보연대와 나’에 대해서 진솔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사회진보연대 기관지에 실을 수 있을만한 내용으로 A4 용지 3매 분량을 쓰는 것이 가능한지 걱정이 앞서, 글을 쓰려고 시작한 순간부터 후회가 된다. 나의 진솔한 개인적인 이야기는 사회진보연대 이름으로 내놓기에는 부끄러운 내용이다.

오늘은 회사에서 내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며 너덜너덜해진 하루였다. 이전에도 긴 글을 쓸 때 벼랑 끝까지 내몰리는 경험을 많이 했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에서 나의 최대치를 한참 뛰어넘어 벌어지는 일들에 휩쓸렸다. 내가 왜 넋이 나가있는지 설명할 말도 찾기 힘든 와중에 하루 종일 사람들을 마주하고, 전화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나는 미친년이었다가 다정한 사람이었다가 했다. 그리고 너덜너덜한 하루의 끝에 ‘사회진보연대와 나’에 대해서 생각한다.

일상이 버거울 때는 사실상 나의 일상은 사회진보연대와 관련이 거의 없다. 사실은 뉴스 기사 한 줄도 잘 읽지 않는다. 10년 넘는 시간 동안 나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들이 나의 일상에서 사라졌다. 앞으로 남은 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생보다 훨씬 길 텐데, 사회운동과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 긴 세월을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기분이 든다. 사회운동을 하는 나와 완전히 단절되고 싶지 않은 마음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사회진보연대 회원으로 남아있는 것만으로 과연 단절되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사회진보연대는 내가 ‘나’로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소중한 곳이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드는 창구다. 우크라이나 전쟁, 변화하는 국제 질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만들어내는 정치지형 등 사회진보연대의 분석은 너무나 설득력이 있어서 귀하다. 시간을 내어서 공부하고, 토론할 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다. 

내가 이런 것들을 잊고 살아간다면 그게 ‘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사회진보연대는 여전히 놓을 수 없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오래도록 지속되어야 한다. 이 조직을 유지하고 이어가는데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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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연대를 구하자

표영민
(광전지부)

 

들어가며

얼마 전 ‘사회진보연대 25주년 에세이 작성’을 제안 받고, 막상 글을 써보려고 하니 잘 써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고, 제가 개인적으로 현장 활동 6년차를 맞이했지만 지금 이래저래 잘 안 풀리는 상황이라서입니다. 지금 조직 활동이건 현장 활동이건 제대로 못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무슨 글을 잘 풀어낼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쓰다 지우다 쓰다 지우다를 반복하다가 얼마 전 조직 회의에 참석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들 잘 하는 것 같아도 힘들어 하는 건 똑같구나, 각자 자신의 현장에서 힘든 이유도 다들 엇비슷하네.’

이런 생각이 문득 드니 에세이 주제가 잡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다른 회원 동지들처럼 정제된 단어와 분석적인 문장보단 좀 더 솔직히 터놓고 말할 수 있는 글을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현재 조직 내외적으로 겪는 감정과 곤란들을 ‘상황인식-원인분석-대안도출’이란 형식으로 쓰시는 회원들도 많으실 거고 그런 글도 정말 좋은 글이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좀 두서없이 보여도 술자리 푸념처럼 한번 던져보고 모두 터놓고 이야기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제 스타일대로 한번 써보자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생각보다 더 두서없이 쓰는 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현장 활동에 대한 부끄러운 고백

먼저 저의 현장 활동 상황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2017년 지역에서 규모가 어느 정도 있는 공장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했고, 3년 정도 비정규직노동조합(비정규직지회)의 간부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다 약 2년 전 현장라인에 한정해 대규모 정규직 전환이 있었고, 저도 정규직 전환 대상자에 포함되었습니다. 당시 대다수 조합원들이 ‘정규직 전환’만을 바라봤기 때문에 저도 큰 생각 없이 정규직 전환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노동조합과 현장 활동을 정규직 전환 이후에도 계속 이어나가자고 생각했고, 조직과도 그렇게 논의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처한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습니다. 정규직노동조합도 지역에서 역사가 오래된 민주노조였지만 기본적으로 10년, 20년 활동했던 활동가들이 자리 잡고 있어 진입장벽이 생각보다 높았습니다. 3년간 비정규직지회에서 활동했던 간부경력은 모두 초기화되었고 다시 처음부터 쌓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거기에 ‘이왕 이렇게 된 거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시작해보자’는 생각에 직무변경을 신청했고, 4년간 일했던 직무에서 새로운 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작년 1년 동안 ‘활동계획을 생각해보겠다, 기초부터 다시 쌓겠다, 새로운 직무에 적응하느라 힘들다’ 등등의 핑계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2년이란 시간이 지났을 때 저는 현장에서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이 문득 보였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뭘 해야 하지?’란 생각에 수많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다른 동지들에게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도 있었으며, 더 고백하자면 별의별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조직’의 강점과 현재의 곤란

그렇게 저는 2년 동안 하는 활동이 ‘조직’에 한정되었습니다.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활동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현장상황이 답답해서 조직 안으로 안주한다는 느낌도 지울 순 없지만, 그래도 각 산별현장 또는 사무처 동지들과 만나 답답함을 토로하고 뚜렷한 답은 없지만 같이 고민을 나눌 수 있다는 점에도 많은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가능한 범위에서 회원모임, 간담회, 토론회, 강연회 등에 참석하면서, 간간히 나오는 발언들과 대화를 통해 지금 많은 활동가들이 구체적 내용은 서로 다를지라도 저와 비슷한 고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간혹 느낍니다. 조직에서의 교류와 대화를 통해 나의 고민과 동지들의 고민을 나누고 공감하면서, ‘현재 나의 상황이 답답하지만 언젠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겠지’란 막연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희망을 가지고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어쩌면 ‘조직’이란 시스템의 가장 큰 강점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조직이 그런 ‘피난처’여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안식처’ 또한 결코 아닙니다. 현재 조직 상황 역시 내외적으로 곤란과 부침을 겪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실 겁니다. 아주 예전 어떤 선배가 술자리에서 ‘조직 생각만 하면 답답하다. 답이 안 보인다’고 고백한 것이 어렴풋 기억납니다. 어떤 분들에게 조직은 짐을 덜어주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짐을 더해 가는 곳일 수 있겠습니다. 때때로 저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으니까요. 

아주 간략하게 제가 느낀 현재 조직 상황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 사건들을 거치면서 조직의 규모는 계속 축소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회원들이 사회운동을 처음 접하고, 활동가로 결의하며 훈련할 수 있는 공간이었던 ‘학생행진’도 작년에 해소하였습니다. 물론 해소한다는 소식에 충격보단 ‘올 것이 왔구나’란 생각이 들었을 만큼 학생운동은 어려웠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다 조직이 ‘서서히 늙어 죽는 건 아닌가’란 걱정이 다른 회원들에게도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일부 노조 사무처 혹은 현장 활동가들이 조직의 정세분석과 입장을 대중단위에 표명하고 실천하는 것에 곤란을 겪고 있고, 또 그 ‘정세분석과 입장, 전술전략’에 대한 조직 내의 이견들도 많습니다. 

물론 이 글에서 현재 조직의 곤란에 대해 더 자세하게 작성하진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더욱 분석적이고 과감하게 글을 써야하기에 이 글의 취지엔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조직 내부의 곤란과 논쟁에 대해서 다른 자리에서 더 말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어떤 조직이나 정파든 곤란과 난관을 다들 겪고 있을 것이고 그 양상도 엇비슷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제가 위에 나열한 조직에 대한 생각들도 그리 새롭지도 않고, 회원이면 모르지도 않은 내용입니다. 저 역시 이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모르겠고, 저도 그렇지만 다들 지금 당장 눈앞에 놓은 문제들 때문에 일단 내일로 미뤄둘 것입니다. 허나 우리가 끝내 이 오래된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면 다가올 정세 속에 조직의 위기는 더욱 눈덩이처럼 커지지 않을까는 막연한 걱정만 있을 뿐입니다.
 

‘대중운동’이란 대원칙을 고수하며 나아가자

해답은 아니지만 사회진보연대가 25주년을 맞이하여 좀 더 초심으로 돌아가 볼 것을 조심스레 제안 드립니다. 저는 당시 학생이었지만 십 수 년 전 사회진보연대는 ‘지역과 현장으로의 진출’을 결의하였습니다. 그 말은 ‘지역과 현장에서의 대중운동’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운동’이란 개념을 학생운동에 발을 들이면서 선배들에게 처음 들었을 때, 꽤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전까지 ‘대중운동’에 대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가 변혁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가지고 활동을 하면 세상이 변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이 움직여야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들었을 때 무언가 큰 답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아주 예전, 한 선배가 학생운동에서 사회운동으로 진출할 때 고별사로 ‘지성의 명철함을 믿으며,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의 우위를 믿는다’는 루이 알튀세르의 유명한 문구를 인용했고, 그것이 참 멋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저 역시도 사회운동으로 진출할 때 후배들 앞에서 똑같이 인용했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회운동으로 진출한지 8년이란 시간이 지난 저는 ‘대중운동가’로 성장했을까요? 물론 이것은 동지들과 대중들이 후에 평가하겠지만, 제가 자기평가와 자기비판을 해보건대, 솔직히 저는 아직도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그렇게 성장하기 위해 목표와 방향을 가지고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조직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어려울수록 우리가 ‘대중운동’이란 대원칙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저는 60년대 일본 전공투의 슬로건 중 하나인 ‘연대를 구하되 고립을 두려워말자’는 슬로건은 예전에도 지금도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전공투운동이 몰락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스스로 고립되고 대중들이 외면하면서부터 몰락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제가 저의 방식대로 이 슬로건을 바꾼다면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대중으로부터) 연대를 구하자’로 바꾸고 싶습니다.

우리 역시 어쩌면 ‘고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 있습니다. 현재 정세는 계속 경고등이 켜지고 있습니다. 진전은 있었지만 여전히 여러 현장들에서 우리는 부침을 겪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대중운동’이란 당연하지만 어려운 대원칙을 지키면서, 각자의 현장과 자리에서 더욱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저와 동지들이 사회진보연대란 조직을 통해, 각자의 현장에서 원칙을 고수하고 각고의 노력을 통해 이 난관을 헤쳐 나가, 우리가 가슴 속 깊이 간직한 원대한 목표를 이루길 바란다고 사회진보연대 25주년 기념 자리를 통해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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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와 나? 10년도 넘었지만 아직 ...

이동규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서울지부 조직국장, 공공회원모임)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제가 사회진보연대 회원 활동을 하면서 한 게 뭐가 있나 싶기는 합니다. 회원 활동을 한 지는 꽤 되었지만 얼마나 큰 소속감을 가지고 있는지는 자신이 별로 없습니다. 10년 정도 낯을 가리고 있는데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르겠죠. 뭔가 잘 정리하기가 어렵지만, 사회진보연대, 노조 활동과 함께했던 고민을 조금 적어보려고 합니다.
제가 사회진보연대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역 활동을 하다가 노동조합에서 일하면서부터였고, 당시 제가 있던 지역에 회원이 적어 이렇다 할만한 회원 활동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면서 했었던 고민을 노조 활동을 하면서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그렇게 사회진보연대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처음으로 노동조합에서 상근을 시작했던 시기였고, 제가 있던 노동조합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사업장, 간접고용 사업장의 비정규직, 특히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직하고 투쟁했던 곳이었습니다. 그때는 세상 목표가 ‘비정규직 철폐’, ‘간접고용 철폐’였고, 그만큼 청소노동자로 대표되던 간접고용, 청소, 돌봄, 요양 등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의 처우는 너무나도 열악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열악합니다.)

당시 저희 회원들이 함께 활동했었던 서울지역 대학청소노동자 조직화와 파업투쟁이 저에게는 대단히 크게 보였습니다.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를 함께 조직하고, 매년 발생하는 고용불안과 이를 무기로 불합리한 조건을 내미는 용역업체, 원청에 공동 교섭과 공동 파업으로 맞선 투쟁이 최저임금 결정에도 영향을 주었던 의미 있는 투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걸 잘 해내지는 못했습니다. 사업장을 넘어선 지역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활동했었지만, 교섭, 파업 등 투쟁의 형식은 사업장별로 주로 진행되었습니다. 다양한 연대를 위해 노력했지만, 소규모 사업장의 현장 권력 구조, 조직화 등의 현실적인 문제가 노동조합을 만들더라도 그것을 이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이후 학교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교육공무직 노동자와 함께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교육공무직은 기존에는 학교회계직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학교장 채용이라는 조건에서 고용도 불안하고 처우도 열악했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고용불안, 열악한 처우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교육감 직선제, 그리고 진보교육감 시대를 만나면서 대거 조직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교육공무직 노동자들에 대한 교육감의 사용자성을 쟁취하는 결정적 성과를 이뤘습니다. (아직도 직종별로 고용이 불안한 노동자들은 존재합니다) 교육감과 교섭을 진행할 수 있게 되면서 조직화와 처우개선을 투쟁으로 쟁취할 수 있는 기반이 다져졌고 그 위에 ‘내 생에 가장 찬란한 날’ 파업투쟁과 함께 노동조합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제가 교육공무직에서 활동한 시기는 그 이후입니다. 지금의 교육공무직 본부가 있기까지 우리 회원들이 지역과 중앙에서 열심히 활동했고, 저는 그 노력 위에서 공공부문 비정규직 투쟁의 가운데서 활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교육공무직 본부는 지역별 처우개선을 넘어 전국적 임금체계를 가지고 교섭하고 투쟁할 수 있는 노동조합이 되었습니다. 물론 학교 안에서의 차별은 여전하고, 교육공무직이 수행하는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현장 또한 여전합니다. 앞으로 임금, 복무의 처우개선과 함께 교육공무직의 존재 가치를 더 알리고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투쟁을 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노동조합에 대한 여러 고민이 있습니다. 조합원들이 단결투쟁을 외치면서 동시에 나는 다른 직종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경우를 목격할 때 많은 생각이 듭니다. 교육공무직은 직종이 100개가 넘을 정도로 다양하며, 학교는 그 수많은 역할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의 노동과정을 모두가 잘 알기는 어렵습니다. 

교육청이 교육공무직 직종을 만들 때 기준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직종별로 처우도 제각각이었습니다. 그나마 노동조합을 만들고 투쟁하면서 지금까지 교육공무직의 임금체계들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직종 간의 여러 의견이 나오게 됩니다. 모두 같은 임금체계를 적용해야 하는가. 아니라면 노동자들 간에 수당, 복무 등의 다름을 어디까지 이해할 수 있을까. 누구의 노동이 더 어려운가. 더 가치 있는가. 교육공무직 본부가 15년 가까이 노동조합을 운영해오면서 가장 조심스럽고 또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전에 활동했던 노동조합은 사업장별 임금 격차는 있어도 사업장 내 임금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시간이 갈수록 이 부분이 더 어려운 고민이 되고 있습니다. 

오히려 초기에는 해고를 막기 위한 투쟁, 교육감 사용자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공통임금 쟁취를 위해 전체의 요구로 단결하는 것은 잘 되었습니다. 교육공무직 내부 임금 격차도 일부 줄어들면서 공통의 요구를 위해 단결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투쟁의 ‘가성비’가 떨어지고 그럴수록 내부의 격차에 더 주목하는 경향이 생기는 것 아닐까 생각하는데, 심지어 아주 가끔은 내 직종을 개선하기 위해 차이를 만드는 논리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구분 짓는 그것과 닮아있기도 합니다. 우리 내부의 격차가 줄어들고 노동자 간에 과도한 경쟁을 줄이면서 단결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현장에서는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남들보다 더 인정받기를 원하고 그 인정의 보상이 임금이라는 현실 또한 쉽게 지나치기 어렵습니다. 

조직이 성장하고 시간이 갈수록 다양한 이해관계, 갈등이 발생하게 되고, 그래서 시간이 갈수록 다양한 사람, 다양한 요구를 모아내는 역할이 정말 필요합니다. 노동조합의 시작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차별에 대한 분노지만, 조직의 운영은 분노로 할 수 없습니다. 그 분노가 계속 유지되기는 어렵고 오히려 분노가 내부로 향하거나 증오로 변한다면 조직의 성장이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내부 갈등을 잘 조율하고 하나의 방향으로 나가는 활동가, 간부,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최근에 많이 듭니다.

하지만 요즘 활동을 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토론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것 자체가 더욱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입장의 차이에 따라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따라, 때로는 인간관계에 따라 대화와 소통이 쉽거나 어렵거나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를 바꾸는 것은 소수의 사람이 한 번에 달성하기 어렵고, 자연과학, 물리법칙 같이 이론이 있으면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결국 사람의 일이입니다. 그래서 공동의 의사결정을 위한 민주적인 토론과 조율이 필요한데 서로 쉽게 단정 짓고 구분하는 경향이 강해진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이 각각의 투쟁이 아니라 큰 단결을 만들어내는 것, 사업장을 넘어서고 노동자 간 차별과 격차를 줄이는 조직과 투쟁, 그리고 민주적인 토론과 논의로 의사결정을 하는 것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알게 될수록 많은 고민이 듭니다. 어떻게 해야 가능한 것인지. 가끔은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말이죠.

이렇게 두서없이 썼지만 그래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답을 하지 못하는 것이 제 현실입니다. 많은 고민이 있지만, 또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상근자로 일하다 보면 더 넓게 보지 못하고 개인과 단위 중심으로 시야가 좁아져서 많은 시간과 노력을 노동조합의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단결은 사업장 내부에서, 연대는 일정상 참석하는 정도가 되고 있어 많이 부족하다고 반성하게 됩니다.

저는 이 활동을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매 순간 한계를 느끼고 있어서요. 할 수 있는 만큼은 열심히 해보려고 합니다. 세상은 변하고 사람도 변하고 정세에 맞게 해야 할 운동도 변하는데 사회진보연대의 활동과 제 활동도 그 모양에 맞게 투쟁하며 계속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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