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러 주도의 우크라이나 휴전협상에 부쳐
전선 현황과 휴전협상 동향
우크라이나와 연대하는 사회운동
우크라이나 민중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미국과 세계를 심각한 위기로 몰아넣을 ‘미국 우선주의’ 정책
트럼프의 ‘관세전쟁’이 미국과 세계에 끼칠 해악
대규모 이민자 추방의 위험성
국제사회에 충격을 준 트럼프의 영토 확장 발언
사회운동은 트럼프주의의 확산에 맞서야 한다
2024년 미국 대선 이후 정치 전망
2024년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압승을 거두며 귀환했다. 상하원 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승리하며, 트럼프와 공화당은 연방정부의 삼부를 장악하게 됐다. (연방대법원은 이미 보수 성향의 대법관이 우세한 상태였다. 대법관 9명 중 보수 성향이 6명, 그중 트럼프가 임명한 이가 3명이다.) 이에 따따라,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입법적, 사법적 견제가 1기 때보다 약해질 것이다.
대선 결과를 뒷받침한 것은 트럼프와 트럼프주의를 향한 대중적 지지의 확산이다. 2016년 대선에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 운동이 조직된 이래, 현재에 이르러 가장 다양한 트럼프 지지자 연합이 구축됐다는 평가가 많다. 전통적으로 민주당 지지세가 높았던 지역과 인구집단 대부분에서 2020년 대비 트럼프 지지율이 상승했다. 저소득층, 고졸 이하, 유색인종, 여성 유권자가 트럼프 지지 쪽으로 이동했으며, 트럼프 지지율이 오르지 않은 집단은 백인, 대졸 이상, 부유한 유권자뿐이었다. (선거 결과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2024년 미국 대선 분석”, 《사회운동포커스》, 2024년 11월 18일을 보라.)
공화당의 정치전략가 패트릭 루피니는 2023년 저서 『인민의 당: 다인종의 인민주의적 연합이 공화당을 재편하다』에서 이번 대선의 집단별 지지율 변화를 예측함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는 민주당이 20세기 중반에 구축한 ‘뉴딜 연합’이 점차 와해되며,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30년 동안 민주당과 공화당의 지지층이 뒤바뀌어 왔음을 묘사한다. 민주당이 소득과 교육 수준이 높은 집단에 의존하는 당이 된 반면, 공화당은 저소득, 낮은 교육 수준의 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번 대선은 경제, 이민, ‘정치적 올바름’의 3대 쟁점에 관하여, 유권자가 민주당과 바이든 행정부를 심판하는 선거였다는 게 미국 정론지의 중론이다. (3대 쟁점에 관한 트럼프와 해리스의 입장 역시 앞서 언급한 《사회운동포커스》 글을 보라.) 특히 높은 물가수준에 고통받은 저소득·중산층이 인종·성별을 막론하고 변화를 바라며 트럼프를 찍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루피니는 이러한 일시적 심판 여론의 배경에, 양당의 주요 강점이 변화해 온 흐름이 있었다고 짚는다. 민주당이 계급 문제가 아니라 사회문화적 이슈에만 집중하는 정당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반면 루피니는 ‘트럼프’의 공화당이 미국 노동자계급에 기반한 ‘새로운 뉴딜 연합’을 구축하며 과거 민주당의 위치를 점하게 됐다고 주장한다.
2024년 미국 대선의 성격이 이러하다면, 향후 4년의 전망을 관통하는 첫 번째 주요 문제는 트럼프 2기 행정부가 과연 변화를 바라는 노동자계급의 열망을 충족할 수 있는가이겠다. 20세기 중반의 ‘뉴딜 연합’은 미국 자본주의의 고도성장기 가운데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미국 경제가 성장의 한계에 도달한 시점이다. ‘미국 우선주의’라 불리는 트럼프주의 정책이 과연 장기불황 속에서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해결하고, 제조업을 부활시켜 고도성장기로의 회귀를 이뤄낼 수 있을까? 사회진보연대는 여러 글에서 ‘아니오’라 답한 바 있다.
진정한 문제는 그다음이다. 트럼프주의 운동은 2기 행정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중선동으로 이번 대선에서 이룬 유권자 연합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1기 때는 트럼프 행정부의 실패를 민주당과 ‘딥 스테이트’의 저항 탓으로 돌리며 지지자의 불만을 재생산했다. 그런데 2기 행정부는 1기 때보다 트럼프주의 정책을 더 쉽게 밀어붙일 수 있으리라는 예측이 많다. 그런데 이렇게 트럼프주의 정책을 강력히 관철했음에도 미국 노동자계급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트럼프주의 운동은 어떤 식의 논리로 선동하며 지지자를 규합하려 할 것인가? 트럼프주의는 어떤 식으로 진화할 것인가? 이 문제 역시 향후 4년의 정치 전망에서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지점이다.
마지막으로, 민주당이 향후 의회나 행정부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인가도 문제다. 민주당은 이번 대선에서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트럼프는 절대 안 된다’라는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웠던 캠페인이 실패한 후 지도부가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당내 ‘정치적 올바름’ 지지층과 버니 샌더스 지지층이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갈등하는 형국이다. 민주당이 트럼프주의를 이기려면 민주주의 수호를 넘어, 경제, 이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이번 대선의 3대 쟁점 관련 입장 변화가 필요해 보인다. 민주당이 과연 혁신할 수 있을 것인지, 한다면 그 방향성은 어떠할 것인지도 주요한 문제다.
글은 이 세 가지 주요 지점을 살피는 데 필요한 정보와 분석을 제시하며, 인민주의 정권이 미국의 경제, 정치와 대중운동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전망하고자 한다. 1.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첫 인선과 정책 방향성
이번 인수위원회의 상임고문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는 인선의 원칙으로 “정당하게 선출된 대통령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꼽았다. 대통령을 ‘가르치려’ 들만한,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자는 배제하겠다는 뜻이다. 한편, 지난 8년간 트럼프주의 운동이 발전하며 젊은 트럼프주의자 정치인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들은 주로 미디어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 결과 내각과 참모진에 행정 경험이 없거나 적은 ‘외부자’, 심지어는 부적격자가 다수 선택됐다. 장관 및 장관급 직책 지명자 24명의 평균 연령은 54.7세이며 40대가 8명이다. 여러모로 ‘파격’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가장 논란이 많은 인사는 국방부장관 지명자 피트 헤그세스다. 그는 폭스뉴스의 군사 부문 해설자이자 전직 군인(소령)으로, 군 복무 경험은 있지만 국방부와 같은 대규모 조직을 관리한 경험이 없다. 오히려 폭스뉴스에서 군대 내 ‘딥 스테이트’ 세력을 청소해야 한다는 주장을 해왔던 것이 인선의 주요 이유라는 게 중론이다. 법무부장관 지명자 팸 본디도 그러하다. 그녀는 플로리다 주 법무장관 경력이 있긴 하나 연방 법무부 수준의 관련 경험은 거의 없다. 트럼프를 탄핵으로부터 방어한 것, 2020년 대선 부정선거론을 주창해 왔던 것, 이 측면에서 법무부 개혁을 주장한 것이 인선의 주요 이유로 지적된다. 이외에 교육부장관 지명자 린다 맥마흔도 트럼프 1기 때 중소기업청장 경험은 있지만 교육 관련 경험은 전무한데, 트럼프와의 사적 친분으로 지명됐다. 교통부장관 지명자 숀 더피 역시 교통 관련 지식과 경험이 없으며, 폭스뉴스 진행자였다는 이유로 지명됐다. 농업부장관 지명자 브룩 롤린스도 관련 경험보다는, 트럼프주의 싱크탱크인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의 수장으로, 공무원을 해임으로부터 보호하는 조항의 철폐를 주장한 것이 인선의 주요 이유였다.
이렇게 2기 행정부 첫 인선이 트럼프주의자 일색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의외로 서로 모순되는 다양한 입장을 조금이나마 포괄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에 따르면, 선별된 인사 가운데 세 가지 파벌과 기타 소수 경향을 식별할 수 있다. 가장 주요한 첫 번째 파벌은 정부 내 ‘딥 스테이트’라 불리는 관료층을 제거하고, 국가기구가 트럼프의 뜻대로 움직이도록 도울, 인민주의적 경향의 집단이다. 앞 문단에서 설명한 인물들 이외에도 국가정보국장 지명자 털시 개버드, 연방수사국(FBI)장 지명자 캐시 파텔, 중앙정보국(CIA)장 존 랫클리프를 비롯해, 트럼프가 선택한 인사의 다수가 자신이 맡은 기구를 ‘혁파’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두 번째 파벌은 트럼프주의 정책이 경제에 유발할 부정적 효과로부터 주가 하락이나 부채위기를 관리하려는 집단이다. 재무부장관 지명자 스콧 베센트나 국가경제위원장 내정자 케빈 헤셋이 이를 대표한다. 트럼프가 재무부장관에 보호무역주의자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대신 베센트를 지명한 것이 의외라는 평이 많다. 베센트는 관세정책을 수용하지만, 경제적 충격을 피하려면 관세를 점진적으로 부과할 필요가 있다고 발언한 바 있기 때문이다. 헤셋은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과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의 경제 고문을 맡았던 보수주의자다. 인민주의적 경제정책에 대한 재계의 우려를 얼마간 반영하겠다는 인선으로 보이는데, 이 파벌은 향후 트럼프주의자와 충돌할 소지가 있다.
세 번째 파벌은 연방정부 규모 축소와 규제 철폐를 지향하는 집단이다. 국가에너지회의 의장 겸 내무부장관 지명자 더그 버검, 정부 효율성부 수장으로 지명된 일론 머스크와 비벡 라마스와미가 이를 대표한다. 이 경향은 연방정부를 공격한다는 점에서 첫 번째 파벌과 연결된 것처럼 보이나, 주요 인사가 트럼프주의 운동에 이질적인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첫 번째 파벌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인선된 것일 수 있다.
이 세 명의 인사는 모두 기업가이자 억만장자로,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파벌의 ‘정치적’ 동기와 달리, 이들에게는 기업 활동에 대한 규제 철폐 등 ‘경제적’ 동기가 주요해 보이며, 이는 ‘거대기업’이나 ‘빅테크’를 종종 공격대상으로 삼는 트럼프주의 운동과 갈등할 수 있다. 이 파벌의 권위가 전적으로 트럼프로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갈등의 소지가 될 수 있다.
이외에 하나의 파벌은 못 되는 소수 경향으로, 노동부장관으로 지명된 로리 차베스-드레머가 대표하는 입장이 있다. 그녀는 팀스터스 조합원 가정 출신으로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리를 옹호해 왔다. 그녀의 인선은 연방정부의 규제를 철폐하고 지출을 축소하려는 경향에 맞서 노동계의 의견을 반영하려는 뜻으로 보인다.
한편, 국경 강화와 미등록이민자 추방을 지지하는 강경파가 내각 및 관련 직위에 다수 지명됐다. 그런데 이런 정책 지지의 수준을 넘어서, 백악관 부비서실장 내정자 스티븐 밀러와 같은 극단적 종족주의자가 인선에 포함됐다는 점도 주목할 수 있다.
대외정책 측면에서 인선을 보면, 대중국 강경파가 주로 선택된 가운데, 1기 때와 비교하여 전반적으로 고립주의자의 비중이 더 커졌다. 특히, 트럼프는 이번 2기 인선에서 1기 때의 마이크 폼페이오나 니키 헤일리 같은 자는 배제하겠다고 선언했다. 미국 패권을 위해 세계 각지에 적극 개입하자는 우월주의론은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대신 ‘중국 때리기’에 집중하자는 우선순위론자가 대외정책을 주도하는 가운데, 국제관계에 관심을 끄자는 자제론자와 함께 가는 모양새다. (트럼프주의 안에서 두 경향의 관계에 관해서는 이 글의 4절에서 좀 더 살피겠다. 또한, 미국 대외정책에 관한 구체적 전망은 이번 호 김진영의 글을 보라.)
가령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지명된 마이클 왈츠의 경우, 과거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철군을 반대하고, 우크라이나에 상당한 군사적 지원 제공을 옹호하는 등 개입을 중시했으나, 올해 초에는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 법안에 반대하고, 미국의 자원을 우크라이나보다 인도-태평양 지역에 할당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우선순위론으로 선회했다. 국가안보부보좌관으로 지명된 알렉스 웡 역시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억제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동맹을 신장하고 미국의 군사적 존재를 강화하며, 인프라 투자와 다각화된 무역 관계를 촉진하는 경제적 지원책으로 중국의 대안을 제공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무부장관 지명자 마르코 루비오 역시 중국이 미국의 (전략적 경쟁 대상을 넘어) “실존적 위협”이라 발언한 바 있다.
정리하면, 2기 첫 인선에서 트럼프주의적 성향이 1기 때보다 더 짙어졌다. 다만, 정책 방향성 수준에서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남아 있다. 경제정책에서는 레이건 이래 보수파의 ‘공급주도 경제학’ 즉 감세, 긴축, 규제 완화 기조와, 인민주의적 반세계화 기조 즉 관세, 이민자 감축·추방, 산업 부흥과 자립, 사회보장 옹호의 기조가 혼재한 상태다. 정치제도 측면에서도, 경제적 효율성을 위해 연방정부 규모와 권한 축소를 주장하는 보수주의적 작은 정부론이 있는 반면, 국민선거로 뽑힌 대통령의 무제한적 권한 확대를 옹호하며, 선출되지 않은 관료층을 공격하는 인민주의적 접근이 있다. 대외정책에서는 ‘미국 우선주의’의 틀 하에 대중 강경론과 고립주의가 함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취임 첫날인 2025년 1월 20일에 곧바로 수많은 행정명령을 발동하겠다고 공언했다. 미등록이민자 추방, 국경장벽 건설 재개, (이민 절차를 밟는 동안) ‘멕시코 잔류’ 정책, 출생 시민권 제도 폐지, 멕시코·캐나다·중국에 관세 부과, 전기자동차 의무화 종료, 파리 기후협정 탈퇴, 세계보건기구(WHO) 탈퇴, 군대 내 트랜스젠더 복무 금지 등을 언급했다. 준비가 덜 됐던 1기 때와 달리, 첫날부터 트럼프주의 정책을 밀어붙이겠다는 태세다. 그러나 이 정책이 미국인의 삶을 정말 개선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절과 3절에서 경제정책과 정치제도 측면으로 나누어, 이 문제를 깊이 살펴보겠다.2. 트럼프주의 정책은 어떻게 미국 경제에 해를 끼칠 것인가
사회진보연대는 여러 글에서 트럼프주의 정책이 세계뿐 아니라 미국에도 손해를 끼칠 것이라 지적해왔다. 진보주의자들은 트럼프의 경제정책에서 감세와 긴축, 연방정부 규모 축소라는, 레이건 이래의 공급중시 경제학을 주로 비판해왔다. 그런데 여기에 ‘미국 우선주의’로 명명되는 인민주의적 정책들이 더해지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로 요약되는 미국 경제의 현 상태, ‘감세와 관세의 결합’을 핵심으로 한 트럼프주의 경제정책의 내용에 관해서는 지난 호와 이번 호의 임지섭 글을 보라.)
이 글에서는 트럼프주의 정책이 경제 원리상 미국 경제에 어떤 식으로 해를 끼칠 것인지를 주로 설명하겠다.1) 관세정책
트럼프는 제조업 부흥을 내세워 철강이나 알루미늄과 품목에 관세를 부과할 가능성이 큰데, 이는 중간재 가격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 상품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중간재의 가격 상승은 미국 내 제조업체의 생산 비용을 증가시키고, 이는 사업 축소, 폐업, 그리고 고용 축소로 이어질 수 있다. 경제학자 옵스펠트에 따르면, 2018~19년 무역전쟁 당시에도 중간재 수입 의존도가 제조업 고용 축소의 주요 요인으로 작동했다. 이는 외국 기업과의 경쟁 감소로 인한 미미한 고용 증가 효과를 압도했다.
나아가, 관세로 인한 외국의 보복 조치와 미국 제품에 대한 수요 감소는 미국의 수출 산업에도 타격을 줄 것이다. 결과적으로 무역적자는 개선되지 않거나 오히려 악화할 가능성이 있으며, 그저 무역량만 줄어든 상태로 귀결될 수 있다. 미국 의회예산국(CBO)은 2018~19년 무역전쟁 당시 관세가 2020년까지 미국 경제 규모를 0.3% 감소시켰다고 추정했다.
한편, 트럼프는 감세를 관세로 보완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관세정책이 초기에는 세수 증가를 가져올 수 있으나, 소비자들이 대체품을 찾아 수입이 감소하거나, 물가 상승으로 소비 자체를 줄이면, 기대했던 세수 효과도 제한적일 것이다. 앞서 본 기업의 폐업 같은 요인으로도 세수가 감소할 수 있다. 관세정책으로 인한 세수 부족과 비용 증가는 미국의 연방 적자를 악화해, 장기적으로 재정 관리의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는 트럼프식 보호무역주의가 미국 경제의 거시경제적 불확실성을 증가시켜 기업과 소비자 모두에게 지속적인 두려움과 불안을 조성한다는 점이다. 대표적 사례는 최근 트럼프가 과거에 본인이 체결했던 무역협정을 어기고, 캐나다산 물품에 25%, 멕시코산 물품에 3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협박한 일이다. 한국 입장에서는, 바이든 행정부 시절 도입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에 따라 미국에 투자했던 기업들이 약속받은 보조금을 받지 못할 처지가 됐다. 미국 내부에서도 트럼프의 규범 무시와 변덕 탓에 가계와 기업이 처한 환경이 계속 바뀔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는 투자와 소비 활동을 위축해 장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심각하게 저해할 수 있다. 2) 이민정책
특히 농업, 건설업, 숙박업과 같이 이민자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는 산업이나 지역은 심각한 인력 부족을 겪을 것이고, 여기서 시민권자인 노동자의 임금이 상승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생산성 상승에 의한 임금 상승이 아니며, 반대로 생산성에 악영향을 주어 기업이 자동화로 전환하거나 사업 규모를 축소하도록 유도한다. 이는 경제성장을 둔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민자 추방은 다른 한편, 소비 활동의 위축으로 이어져 경제에 추가적인 타격을 줄 수 있다. 이민자는 노동력 제공자일 뿐 아니라, 소비자이기도 하다. 이들의 소비 감소는 관련 산업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치며, 세수 감소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또 다른 연구는 대규모 추방을 실시할 시 3년 내 GDP가 3% 감소하는 마이너스성장과 1.5%의 소비자물가지수 상승이 발생할 것으로 예측했다. 트럼프가 공언한 만큼 이민자를 줄이진 못할 것이라는, 덜 비관적인 전망도 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이민의 여러 경로를 따져볼 때, 트럼프가 강경한 이민정책을 실행할 경우 순이민이 어떻게 변동할지 예측한다. 이에 따르면, 이민자 수는 2025년에 65만 명 순감소하겠지만, 2026년에는 12만 명 순감소하고, 2027년부터는 다시 순증가 할 것이다. 즉 트럼프의 급진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는 이민자 수가 다시 증가하리라는 예측이다. 이에 따라, 브루킹스연구소는 2024년 대비 2025년 경제성장률이 0.4%P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성장이 재개되리라 예측한다.
정리하면, 트럼프주의적 이민정책은 특정 산업과 지역의 노동자 임금을 상승시킬 수는 있으나, 이는 생산성 상승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자동화나 사업 규모 축소 등의 대응이 발생할 것이다. 게다가, 경제 전반적으로는 노동공급 감소와 생산성 저하로 인한 마이너스 성장과 인플레이션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정책은 다수의 노동자에게 오히려 손해로 돌아올 것이다.3) 산업정책
제조업에 관하여, 트럼프는 특별경제구역 설립하고, 세금과 규제 완화로 투자를 유도하며, 국내 제조기업의 법인세를 15%로 인하하는 “Made in America” 세제를 도입하고, 자동차 등 특정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멕시코산 자동차에 100% 이상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방안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성공 가능성도 낮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 제조업 고용 감소의 주된 원인은 국제무역이나 불공정한 무역협정 탓이 아니라 자동화, 생산성 상승, 서비스업 비중 상승과 같은 구조적 변화다. 이러한 추세는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과거에 농업이 그러했듯, 제조업에서도 자본투입과 기술진보로 생산성이 상승하고 상품 가격이 하락했지만, 상품 수요가 그만큼 증가하지 않으면서 제조업 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감소했다. 역사적으로 미국의 제조업 고용 감소는 1960년대에 시작됐는데, 이때는 미국 경제에서 국제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다. 이 감소 추세는 무역흑자를 유지해 온 독일, 일본, 싱가포르, 한국, 중국에서도 나타난다. 즉 세계화와 무역적자가 제조업 고용 감소의 주된 원인이라는 트럼프주의의 가정은 틀렸다.
무역 장벽 강화나 세금 인하, 보조금 지급 같은 산업정책으로 이런 구조적 추세를 역전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도 옳지 않다. 실제로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산업정책과 이를 일부 계승한 바이든 행정부의 산업정책 모두 제조업 고용을 증가시키지 못했던 건 매한가지였다. 트럼프 1기 행정부는 관세 및 규제 완화를 통해 제조업 부흥을 시도했지만, 팬데믹 이전에도 제조업 성장세는 둔화했다. 초기 2년 동안 제조업 일자리는 소폭 증가했으나, 2019년에는 감소세로 돌아섰고, 팬데믹 기간 14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바이든 행정부는 정부 지원과 인프라 투자(인플레이션 감축법, CHIPS법 등)를 통해 제조업 회복을 추진했다. 팬데믹 이후 회복세를 이어가며 초기 2년 동안 제조업 일자리가 많이 증가했으나, 임기 후반에는 증가세가 둔화했다. 결국 코로나 이전의 고용을 회복하는 수준에 그쳤다. 이 회복 탓에 바이든 행정부 시기 제조업 고용이 증가한 것은 맞으나, 장기추세에서 이탈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2023년에 미국 노동부는 향후 10년 동안에도 이전과 변함없이 제조업 고용 비중이 하락할 것으로 전망했다. 제조업은 여전히 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더는 과거처럼 저숙련 노동자에게 거대한 고용 기회를 제공하는 주요 원천일 수 없다. 전문가 대다수가 변화한 현실에 발맞춰 새로운 기술과 산업을 발전시키고, 교육을 통해 숙련된 노동력을 육성하는 방향성을 제안하는 이유이다.
나아가, 불확실성을 조장하는 트럼프의 협상전략 탓에, 미국 내외의 기업들이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하는 각종 유인책을 신뢰하고 투자할지도 의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인프라 투자 및 일자리법’(IIJA)의 남은 지원금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편향적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이 법의 시한은 2026년까지다.) 바이든 행정부는 공화당 우세 지역이든 민주당 우세 지역이든 가리지 않고 실제 필요에 맞춰 지원금을 배분했지만, 트럼프는 자신의 정치적 선호에 따라 자금을 쓸 위험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마치 중국에서 공산당과의 연줄이 기업의 이익에 중요하다는 점을 이용해 당과 국가가 기업을 쥐락펴락하는 것처럼 말이다.
정리하면, 대통령이나 행정부의 산업정책이 특정 기업이나 부문의 발전에 영향은 줄 수 있겠으나, 그 성장을 좌우할 수는 없다. 더 넓고 복잡하며 구조적인 요인들이 경제를 작동시키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럼프의 산업정책은 정치적 선호에 따라 편향적이고 변덕스러울 것이며, 이는 기업 활동의 불확실성을 증대하리라는 우려가 크다.4) 긴축정책
트럼프는 이번 대선에서 사회보장급여와 팁에 대한 과세를 완전히 면제하고, 주 및 지방세의 공제 한도를 확대하며, 1기 때 통과했던 세금 감면 및 일자리법(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인하)을 연장하고, 국내 제조업체에만 법인세율을 15%로 추가 인하하겠다고 공언했다. 문제는 연방정부의 재정적자가 이미 심각하다는 점이다. 올해 이는 미국 GDP의 약 6.5%였으며, 연방 부채의 GDP 대비 비율은 100%에 달했다. 트럼프의 감세정책은 단기적으로는 기업 가치와 주가를 높이겠으나, 장기적으로는 재정적자를 증가시켜 부채위기를 심화하고, 이는 인플레이션 압력을 발생시킨다. 법인세율 인하가 투자와 경제성장을 촉진하더라도, 연방 예산을 크게 조정해야 부채 비율을 안정화할 수 있다.
트럼프 당선인은 정부효율성부를 설치하고 기업가 일론 머스크와 비벡 라마스와미를 수장으로 임명했다. 머스크는 400개가 넘는 연방 기관의 수를 99개로 줄이고, 연방 지출을 30%(약 2조 달러) 이상 삭감하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는 이러한 목표를 2026년 7월 4일(독립선언 250주년)까지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부효율성부의 권한, 목표의 실현 가능성, 두 인사의 자격 여부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정부효율성부는 연방정부 외부에서 운영되는 비공식적 기구이며, 연방 예산 결정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 즉 백악관 예산실과 협력하여 대통령에게 예산안과 관련된 자문을 하는 기구에 불과하다. 미국에서 연방정부의 지출을 결정하는 곳은 의회다. 연방 예산 삭감은 복잡한 정치적 제도적 문제이다. 의회에서 공화당이 다수이고, 트럼프의 사당이 된 공화당이 민주당과의 협의를 무시하고 힘으로 밀어붙이는 성향이 있지만, 그럼에도 2조 달러 이상의 대규모 삭감안, 그것도 법적 권한이 없는 이들이 낸 안을 일방적으로 통과시키는 건 정치적 부담이 매우 크다. 공약한 바와 달리, 머스크와 라마스와미가 작성한 안을 단기간에 관철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트럼프는 대통령의 행정권을 행사해, 의회가 승인한 자금을 동결하거나 지출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삭감안을 실행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대통령이 안을 관철하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포즌은 이런 방식이 예산 결정 절차와 재정 관리의 불확실성을 증가시킬 것이라 비판한다. 대통령 마음대로 재정계획을 변동할 수 있게 된다면, 미국 국채 보유의 리스크가 증가할 것이고 금리가 오를 것이다. 이는 부채위기를 더 악화시킬 것이다.
재정 삭감의 실현 가능성도 문제다. 현재 연방 지출의 약 3분의 1은 노년층 대상 메디케어와 사회보장제도 같은 의무적 프로그램에 할당되며, 13%는 국방비로 사용된다. 앞의 프로그램은 대중적 지지도가 높고, 트럼프도 대선에서 이를 삭감하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안보를 강화하겠다는 트럼프의 공약상 국방비도 삭감하기 어렵다. 10%는 정부 부채 이자 지급에 할당되는데, 이를 줄이는 것은 채무 불이행과 같은 심각한 경제적 위험을 초래할 것이다. 남은 40%의 예산은 내각 기관, 재향군인 혜택, 저소득층 및 장애인을 위한 의료 서비스(메디케이드) 등에 사용된다. 이 부문에서 2조 달러를 삭감하려면 대규모 서비스 축소가 필요하다. 트럼프는 연방 의료 개입을 축소하는 대신 주 정부의 자율성을 강화하겠다고 했으나, 상당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연방 공무원 수를 줄이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지만, 공무원 대다수가 국방부, 재향군인부, 국토안보부에 소속되어 있어 그 감축은 정부의 핵심 기능에 지장을 줄 수 있다. 이미 연방정부는 수십 년 동안 핵심 부분을 제외하고는 공무원을 감축하고 계약업체에 더 많이 의존하는 방식으로 변모해왔다. 더 이상의 공무원 감축은 어렵거나, 유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가령 라마스와미는 교육부 폐지를 주장했으나, 교육부는 연방정부 직원의 0.2%만을 고용하고 있어 재정적으로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전에도 공화당 행정부든 민주당 행정부든 관계없이 정부지출을 줄이려 시도해왔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1982년에 레이건 대통령의 그레이스 위원회는 2,478개의 개혁안을 제안했으나 대부분 실행되지 못했다. 1990년대 클린턴 대통령은 인터넷 기술의 도움으로 국가성과평가를 도입해 30만 개 이상의 공공 일자리를 줄였으나, 유의미한 규모의 재정 삭감은 아니었다. 이 사례들은 연방정부의 효율성 강화를 위한 노력이 실질적인 변화를 이루기 어려운 복잡한 과제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머스크나 라마스와미가 이를 수행하기에 적합한 인물인지 의문이다. 이들이 연방정부의 복잡한 구조와 예산 절차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 이상적인 목표만 내세우며 접근한다는 비판이 많다. 관련 경험과 전문성이 부족한 ‘외부자’의 자격 논란이 여기서도 있는 셈이다. 이런 상당한 노력을 요구하는 일을 기업가로 일하는 와중에 추가로 수행할 수 있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게다가 소유한 기업이 연방정부와 계약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 충돌의 문제도 있다.
결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규모 재정 긴축을 실제로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앞선 정책들을 실행하면서 재정지출을 삭감하지 못한다면,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가 더 심화할 것이다. 즉 관세, 이민, 감세정책을 더는 추구하지 않거나,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감수하거나의 딜레마에 처하게 될 것이다.5) 통화정책
6) 소결
트럼프가 ‘거래’를 잘한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에게 있어 거래란 양측이 이익을 교환하는 ‘협상’이 아니라, 강한 쪽이 약한 쪽을 겁박하여 일방적으로 이익을 취하며 상대를 망하게 만드는 행위를 뜻한다. 윈-윈(win-win) 게임이 아니라, 윈-루즈(win-lose) 게임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 사례 등에서 살펴봤듯, 타국을 위협해 자신에게 유리한 협정을 체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조차 번복하며 더 유리하게 바꿔야 한다고 협박하는 식이다. 포즌은 이를 “미치광이 경제학”(madman economics)이라 표현한다. 자신의 일방적 선호에 따라 말을 계속 바꾸며 약속과 규칙을 파괴하는 게 트럼프 방식의 핵심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관점에서, 트럼프주의는 자본주의 경제를 구성하는 주체들의 자유로운 경제행위를 존중하는 보수주의보다는, 미국인의 이익과 정치적 의지에 따라 정부가 경제활동을 좌지우지해야 한다고 보는 인민주의에 가깝다고 평할 수 있다. 그 경제정책에는 감세, 긴축, 규제 완화 같은 보수주의적 요소도 있지만, ‘미국 우선주의’의 핵심인 관세, 이민, 산업정책을 볼 때 인민주의적 요소가 더 강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트럼프주의 정책이 미국 경제의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심화할뿐더러, 보다 근본적으로는 경제활동의 불확실성을 가중한다는 점이다. 이는 기업과 소비자가 언제든 정부의 결정에 따라 가격이 오르거나 자원 접근이 제한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느끼게 만들어, 민간의 경제활동을 위축시킨다.
이는 트럼프주의가 추구하는 윈-루즈 게임이 모두가 패배하는 루즈-루즈(lose-lose) 게임으로 귀결될 것임을 의미한다. 포즌은 “미치광이 경제학”으로 얻는 단기적 이익보다 불확실성을 조성함으로써 발생하는 거시경제적 비용이 훨씬 클 것이라 예상한다. 지금과 같이 경제활동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경제주체의 신뢰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트럼프 아젠다의 근본적 결함이다. 이는 지난 반세기 동안 미국 주요 정당 양쪽이 추구했던 어떤 경제 프로그램과도 급진적으로 다르다.”3. 트럼프주의는 어떤 식으로 행정부를 운영할 것인가
1) 단일행정부론의 등장 배경
실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이르는 미국 행정부 개혁의 역사가 중요했다. 개혁의 주요 대상은 앤드루 잭슨 대통령(1829~1837년 재임)이 도입한 ‘엽관제’의 폐해였다. 이는 의회의 정당이 행정부에 깊숙이 관여해 그 운영을 좌우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대통령의 역할을 정당의 ‘보스’이자 전리품 배분자에 불과하도록 만들었다. 20세기 초에 진보주의자는 연방정부의 행정 역량을 확대하고, 정당으로부터 독립성(비당파성)을 확보하며,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을 높이는 개혁을 이뤄냈다. 이는 대통령 1인의 권력보다는, 행정부의 집단적 권력 강화를 지향했다. 그 결과, 행정부는 정치적 중립성, 행정 역량과 전문지식을 토대로 (외부 정당이 아닌) 내부 부처 간 조율을 통해 운영되며, 대통령은 정당으로부터 독립한, 행정부 내의 조정자이자 결정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이 개혁이 연방정부의 과도한 권력 확대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며, 보수주의자는 의회나 주(州), 궁극적으로는 민간의 자율성을 옹호했다. 그런데 1970년대 말부터 일부 보수적 법률가가 ‘약한 행정부냐 강한 행정부냐’의 전통적 논쟁과는 다른 맥락에서 단일행정부론을 제기한다. 계기는 닉슨 대통령 탄핵과 하야로 이어진 워터게이트 사건이었다. 이 스캔들은 ‘딥 스로트’(Deep Throat, ‘깊은 목소리’)라 불린, 행정부 내부고발자가 언론에 증언과 증거를 제공하며 터졌다. 또한, 법무부 산하의 특검이 대통령에게 증거를 제출하라고 명령할 권한이 있는가에 관한 소송에서, 연방대법원은 보수 성향 법관을 포함하여 만장일치로 ‘법의 지배’가 대통령의 특권에 우선한다고 판결했다. 이때 닉슨을 옹호했던 일부 법률가가 헌법 제2조 제1항을 근거로, 내부고발자의 행위나 연방대법원이 지지한 특검 명령이 위헌이라 주장했다.2) 트럼프주의가 제시한 단일행정부론의 내용
이론적으로, 트럼프의 단일행정부론은 보수주의적 ‘약한 행정부론’과 자유주의 내지는 진보주의적 ‘강한 행정부론’ 둘 다 비판한다. ‘약한 행정부론’은 권력 분립의 원리에 따라, 연방 행정부보다 의회나 주(州) 권력, 궁극적으로는 민간 영역이 우위에 서야 한다고 본다. 행정부는 민간 주체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실행하는 곳일 뿐이다. 반면 단일행정부론은 민주주의를 대통령 선거로 환원하며, 국민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이 다수의 민의를 대표하므로 그의 권력이 무제한으로 강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정부는 민간의 기업이나 시민단체의 요구에 얽매여선 안 된다. 한편 ‘강한 행정부론’은 행정부 권력 강화의 토대를 비당파적 독립성과 행정 역량, 전문지식으로 삼으나, 단일행정부론은 이것이 투표로 선출되지 않은 비민주적 권력이라고 비판하며, 크게 약화해야 한다고 본다. 행정부 내의 모든 인사와 행위는, 국민투표로 당선된 대통령의 뜻을 그대로 따라야만 한다.
정리하면, 단일행정부론은 행정부가 약해야 하냐 강해야 하냐라는 전통적 쟁점 대신, ‘깊이’(depth) 대 ‘단일성’(unity)이라는 새로운 구도를 제시한다. ‘딥 스테이트’, 즉 국가가 ‘깊다’는 주장은 두 가지 함의를 갖는다. 첫째, 행정부가 민간의 요구에 종속되어 있다. 둘째, 행정부 내 독립된 기구와 관료들의 층이 두텁다. 이 둘을 합치면, ‘거대기업과 좌파 세계화주의자에게 포섭된 관료층이 국가기구 내 깊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완성된다. 따라서 행정부는 대통령이 대표하는 다수의 의지에 복종하며, 민간의 여러 요구에 휘둘리지 않고 뜻을 관철하는 ‘단일성’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이는 미국보다 과거 사회주의권 국가에서 더 익숙한 사고방식이다. 단일행정부론은 자유주의는 물론, 민간의 자율성과 ‘법의 지배’를 옹호하는 보수주의와도 대립하는 인민주의적 주장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3)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운영 방식
(1) 행정부 내 부처 간 조율 과정에 따른 의사결정 무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친 행정부 개혁에 따라 원칙으로 자리 잡은 정치적 중립성, 전문성 기반, 부처 간 조율을 통한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는 대통령실이다. 대통령실은 대통령과 부처 간 조정 과정의 매개로, 정책 결정에 관한 모든 정보를 대통령에게 제공하고, 각 선택지의 장단점을 제시하여 최종 결정을 도우며, 결정된 안이 관련 부처와 기관에 신속히 전달되도록 돕는다. 이런 정치과정이 누적된, 집단적 지혜와 권력의 산실 중 하나가 대통령실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다. 국가안전보장법은 이 기구의 목적을 안보와 대외정책에 관해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것이라 규정한다. 회의는 관련 각 부처의 장으로 구성되며, 대통령이 임명한 국가안보보좌관이 주재한다.
트럼프가 처음 지명한 국가안보보좌관이 취임 전 러시아 대사와의 접촉 문제로 사임한 후, 경험과 전문성을 갖춘 맥매스터 장군이 임명됐다. 그는 “우리가 대통령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선택지”라며, 부처 간 조율 과정에서 도출된 각 선택지의 “장단점”을 제시하는 전통적 방식을 따랐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 방식을 혐오했다. 그는 NSC가 할 일은 대통령의 생각을 무조건 옹호하고 관철하는 것이라 여겼고, 보좌관이나 장관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조언받는’ 느낌이 들면 상당한 불쾌감을 표출했다. 계속된 충돌로 맥매스터가 사임한 후, 트럼프는 공화당 내 전통적 보수주의자를 의식해 볼턴을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볼턴은 조지 W. 부시의 외교정책을 대표하는 정체성과 사명감이 있었고, 트럼프가 탈레반을 초청해 아프가니스탄 미군 철수 계획을 조율한 일을 두고 다투다가 해임됐다.
트럼프의 다음 국가안보보좌관은 변호사 출신으로 대외정책 관련 경험이 없던 로버트 오브라이언이었다. 우려가 매우 컸으나, 트럼프의 시각에서 무능함은 오히려 장점이었다. “제가 모든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그는 일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브라이언은 NSC를 “트럼프 대통령의 최신 트위터 메시지가 담긴 출력물을 배포하며 시작”했다.
이런 운영 방식은 심각한 결과를 낳았다. 가령 오브라이언은 시리아에서 미군을 갑작스럽게 철수하겠다는 대통령의 결정을 그저 따랐다. 이 과정에서 NSC의 검토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런 행동의 예상 결과에 대한 논의도 없었다. 이는 시리아, 터키, 러시아, 쿠르드족, 이슬람국가(IS)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얽힌 불안정한 지역을 혼란에 빠뜨렸다.
또한, 오브라이언은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살해한 탈레반 전투원들에게 현상금을 제공하고 있다는 보고를 축소해, 트럼프가 불쾌하게 여길만한 정보 자체를 차단했다. 나아가, 오브라이언은 대통령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원으로 여겨져 왔던 NSC 직원을 3분의 1로 감축했다. “NSC가 자신을 방해하려는 딥 스테이트 관료들로 가득 차 있다”는 트럼프의 주장에 따라서 말이다.
트럼프는 상원의 동의를 얻어 임명토록 법으로 규정된 행정부 인사에 대해 직무대행을 적극 활용해 상원의 인준을 회피했다. 실제로 트럼프 1기 행정부는 그 어느 행정부보다 공석과 대행이 많았다.
국가정보국장 임명 문제가 대표 사례다. 트럼프는 처음에 전문성을 갖춘 댄 코츠를 임명했으나, 이후 국가정보국이 러시아의 2016년 대선 개입 의혹을 조사하자 트럼프는 그를 해임하고 충성파 존 랫클리프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그런데 랫클리프가 자격 문제로 상원의 인준을 받지 못하자, 트럼프는 정보당국 경험이 없었던 당시 독일 대사 리처드 그레넬을 직무대행으로 임명했다. 그레넬은 트럼프의 사법 리스크 제거를 위해 국가정보국을 “대청소”했다. 부국장을 비롯한 기존 관료를 축출하여 정보국의 역량을 파괴하고, 조사계획을 방해하며, 정보기관의 중립성을 훼손했다. 이는 트럼프가 상원 인준이 필요 없는 직무대행을 활용해 정부 기관을 파괴하는 데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이후 트럼프는 랫클리프를 국가정보국장으로 재지명했고, 상원은 그레넬의 횡포를 막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그를 인준할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트럼프 2기에서 그레넬은 북한을 포함한 특별임무 담당 특사로 임명됐다.)
트럼프는 자신의 정책에 적극 동의하는 관료조차, 그 관료가 ‘규칙’을 준수한다는 이유로 숙청하기도 했다. 미국 시민권 및 이민서비스국(USCIS) 국장 프랜시스 시스나를 해임하고 직무대행을 활용한 것이 그 사례다. 시스나는 이민자 자녀를 가족으로부터 분리하는 ‘무관용’ 정책, 이민 사기를 조사하는 ‘귀화 취소 태스크포스’ 설립, 복지 혜택을 사용할 가능성이 높은 이민자의 영주권 접근을 제한하는 ‘공적 부조 규정’ 도입 등 매우 강경한 이민정책을 제안하고 실행했다. 그러나 그는 USCIS 직원들을 타지에 발령하여, 영주권 신청 및 귀화의 행정절차를 지연시키라는 백악관의 지시에 머뭇거렸다는 이유로 해임됐다. 이후 트럼프는 무자격자 켄 쿠치넬리를 편법으로 직무대행에 임명하여, 지시를 관철하도록 했다.
행정부 내에서 정치적 독립성이 가장 요구되는 곳은 법 집행 관련 기구다. 트럼프는 이들을 특히 집요하게 공격하며, 단일행정부론을 주장했다.
러시아의 2016년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연방수사국(FBI)의 조사와 특검을 트럼프가 방해했던 방식에 주목할 수 있다. 당시 트럼프는 법무부와 FBI의 관련자를 해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것이 법적으로 수사 방해에 해당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단일행정부론자는 “최고 법 집행관인 대통령의 모든 행동은 헌법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방해 행위가 될 수 없다. 대통령이 스스로를 방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그들은 “최고 행정관의 동기를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는 대통령의 헌법적 특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라 주장했다. 헌법 제2조 제1항을 근거로, 행정권의 원천인 대통령의 모든 행위가 정당화되며, 하위 행정기관이 대통령을 수사하는 것 자체가 위헌이라고 해석한 셈이다.
트럼프는 윌리엄 바를 법무부장관에 새로 임명했고, 바는 FBI의 조사 책임자들을 해임했을 뿐만 아니라, 대국민 담화로 그들을 “딥 스테이트의 얼굴”로 낙인찍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더 잘 안다고 여기며, 자신이 국민의 수호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오만한] 생각은 관료로서 다수의 의지를 초월하여 자기 뜻을 관철하려는 모습으로 쉽게 변질됩니다.” 바는 대통령이 아니라 법무부가 수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사팀을 꾸려 “내부에 숨어 있는 적”을 색출해 해임했다.
행정부에 대한 감독에서 중요한, 내부고발자 보호 및 감사관 관련 제도를 공격한 것에도 주목할 수 있다. 의회는 행정부를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모든 활동을 일일이 감사할 수는 없기에, 공무원제도개혁법의 내부고발자 보호 조항과 감사관법을 제정했다. 이는 행정부 내의 위법행위를 직원이 감사관에게 보고하도록 보장하고, 감사관은 이를 의무적으로 의회에 전하도록 하였다. 트럼프 1기 때, 이 제도에 따른 내부고발은 대통령 탄핵소추로 이어졌다.
2019년 트럼프 대통령은 의회가 승인한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적 원조를 보류했는데, 중앙정보국(CIA)의 한 직원이 트럼프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의 전화 통화 내용을 감사관에게 보고하며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터졌다. 트럼프가 지원 보류를 해제하는 대신, 우크라이나 당국이 민주당의 유력 대선주자 바이든의 아들을 조사하라는 거래를 시도했다는 게 고발의 내용이었다. 대통령의 자금 보류 권한을 이용하여 동맹국을 국내정치적 목적으로 강압하고, 미국 선거에 개입시킨 것이 선거법 위반이라는 혐의가 제기됐고, 이것이 탄핵 사유가 됐다.
트럼프는 내부고발을 은폐하려 했다. 대통령에게 법률 자문을 제공하는 부서인 법무부 산하 법률고문실은 단일행정부론에 근거하여, 행정부의 그 누구도 대통령을 조사하거나 고발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고문실은 이런 이유로 감사관법이 위헌이라 주장하며, 고발 내용은 행정부 내에서 처리되어야 한다면서 앳킨슨 법무부 감사관이 의회에 보고하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러나 감사관은 양심에 따라 의회에 내부고발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렸고, 의회가 소환장을 발부하며 고발 내용이 바깥으로 드러날 수 있었다.
그러자 트럼프와 대통령실은 국민을 향해 내부고발자가 ‘딥 스테이트’와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그 신뢰성을 실추시키려 했다. “이 사건은 딥 스테이트, 언론, 그리고 의회 내 민주당이 기밀 정보를 유출하며 우리의 국가안보를 손상하고 있는 또 다른 사례입니다.” 대통령실의 스티븐 밀러는 내부고발자를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약화하려는 파괴 공작원”이라고 비난했다. 한편, 대가성 거래 시도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되려 그게 왜 문제냐고 설파했다. 대통령실 비서실장 대행 멀베이니는 국민투표로 선출된 대통령의 모든 행위는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받아들이세요. 원래 대외정책은 정치적 영향을 받는 겁니다. 이는 선거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대통령실 법률 고문 시폴론도 행정권 사용에 대한 대통령의 책임은 의회가 아니라 유권자에게 지는 것이라 강조하며, 하원 민주당의 “민주주의적 절차를 뒤집으려는 위헌적 시도”를 규탄했다. 대통령실은 “경력 관료들 사이에서 나온, 소위 ‘부처 간 합의’라는 것으로 대통령의 동기가 부당함을 증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외정책을 지지하며, 워싱턴 기득권이 선호하는 정책을 지속하는 것을 거부한 수천만 미국 시민을 모욕한다”고 발표했다.
두 가지 탄핵 사유(대통령의 권한을 남용하여 외국을 국내 선거에 개입시킨 것, 감사관이 의회에 보고하지 못하도록 방해한 것)에 대한 트럼프의 공식 서면 답변은 단일행정부론의 논리를 명확히 표현했다. “첫 번째 탄핵 사유에서, 하원은 헌법 제2조에 따른 대통령의 외교정책 결정권을 탈취하려고 시도했다. 두 번째 탄핵 사유에서, 하원은 행정부의 헌법적 특권 행사를 통제하고 처벌하려 하면서, 제헌자들이 설계한 견제와 균형 체제를 파괴하려 했다. 하원은 헌법 제2조가 ‘미국 대통령’에게 전적으로 부여한 ‘행정권’을 약화하려 했다. (...) 대통령 유죄 판결은 헌법 구조상 특히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모든 유권자가 참여하는 유일한 국가적 선거에서 민주적으로 표현된 국민의 의사를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상원은 탄핵안을 기각했다. 이후 앳킨슨 감사관을 비롯하여 의회에서 증언했던 행정부 인사들은 모두 해임됐다. 행정부 내부고발자와 감사관을 통한 감시제도가 작동하여 대통령 탄핵소추로 이어졌지만, 탄핵안이 기각된 이후 더는 기능하기 어렵게 됐다.
마지막으로 지식과 전문성 기반의 행정부 운영을 향한 공격을 살펴보자. 가장 황당한 사례는 2019년 허리케인 도리안 예보 사건이다. 국립기상청 버밍엄 지부가 그 경로상에 있는 주(州)들의 목록을 예보했는데, 직후 트럼프가 트윗으로 도리안의 예상 경로를 써 올리며, 기상청 예보가 언급한 주들에 앨러바마 주를 추가했다. 실수였겠지만, 트럼프는 ‘잘못 썼다’고 넘어가면 될 일을 충격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는 백악관 집무실에서 앨러바마 주를 더하여 수정된 예보 지도를 발표하며, 버밍엄 지부가 대통령에게 도전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기상청을 관할하는 상무부는 버밍엄 지부의 예보가 부정확하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냈고, 한 고위 관계자는 “그 예보는 앨러바마 주민의 안전에 대한 우려보다는, 대통령을 난처하게 만들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다행히 버밍엄 지부 직원은 누구도 해고되지 않았다. 기상청은 그 중립성과 전문성이 공공안전에 필수적이라는 이유에서, 공무원제도개혁법의 공무원 보호 조항을 적용받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태는 대통령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대한 트럼프의 불쾌감이 국민의 안전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 환경보호청(EPA)은 특히 과학 기반 의사결정을 중시하는 기관으로, 그 결정은 연구 보고서에 기초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규제들을 만드는 곳이기 때문이다. 트럼프가 1기 때 그 수장으로 임명한 스콧 프루잇은 과학의 권위를 공격했다. (2기 환경보호청장 지명자 리 젤딘도 자신의 목적은 환경보호청의 해체라 밝혔다.) 그는 “비밀 과학의 시대는 끝났다”며, 연구 보고서와 관련된 모든 데이터를 공개해야 한다는 규정을 제안했다. 이는 환자 정보와 같이 개인정보 보호 문제에 걸리는 데이터가 있다는 점을 이용, 과학자들이 진실을 왜곡하기 때문에 정보 공개를 꺼린다는 인식을 확산하기 위함이었다.
가장 극적이고 심각했던 사례는 트럼프 1기 말의 코로나 사태 대응이었다. 팬데믹 이전부터 이미 트럼프 행정부는 전염병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주요 기관과 체계를 약화해 왔다. 이는 발발 초기 대응 역량을 저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위기 초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보건복지부와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전문가들의 과학적 경고를 “과장”이라 치부했다. 그는 바이러스가 “기적처럼 사라질 것”이라 주장했다. 이런 위기 상황에 필요한 대통령의 행정권 행사가 정작 코로나 사태 때는 없었다. 가령 식약청(FDA)은 민간 기업에서 개발한 검사에 대해 느린 승인 절차를 유지했고, 발병 규모와 속도를 예측할 중요한 초기 시간을 허비했다. 보건 관련 부처 회의에서 광범위한 봉쇄, 사회적 거리 두기, 경제 활동 중단 등이 논의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자, 트럼프는 CDC와 언론사 간의 전통적 정보 제공 지침을 폐기하고, 직원들에게 침묵하라고 지시했다. 중요한 정보를 국민에게 은폐하려 한 셈이다.
대중의 불안감이 커지자, 결국 부통령 마이크 펜스가 이끄는 태스크포스가 꾸려져, 전문가와 과학 기반의 대응을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들이 주도권을 잡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그는 곧바로 펜스를 대신해 태스크포스의 일일 브리핑과 기자회견에 출연하여, 의료 전문가의 발언에 끼어들며 방해했다. 가령 CDC 관료가 마스크 착용을 권고하면, 트럼프가 “저는 안 하기로 했습니다”고 발언하는 식이다. 트럼프는 종종 검증되지 않은 ‘기적의 치료법’을 제시하기도 했다. 가령 독성이 있는 소독제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 소독제는 바이러스를 1분 만에 제거합니다. 1분 만에요. 그렇다면 이렇게, 주사로 혹은 입을 청소하듯 치료할 방법이 있겠죠?” 이에 소독제 제조업체들은 제품을 섭취하지 말라는 경고를 발표했다.4) 소결
이런 주장을 실현하려 했던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여러 행태를 보면 알 수 있듯, 이는 미국인의 삶을 보호하는 정부의 역량을 훼손하여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어떤 조언도 들을 필요가 없이 ‘모든 것을 아는’ 대통령이 전부 결정하며, 그 뜻을 거스르는 자는 제거한다는 기조가 2기 행정부에서 얼마나 더 강해질지, 이것이 미국과 세계의 인민에게 얼마나 큰 악영향을 미칠지 심히 우려된다.
절의 서두에 소개한 책의 저자들은 단일행정부론과 같은 주장을 법적으로만 다퉈선 안 된다고 말한다. ‘법의 지배’를 대통령의 특권보다 우선했던 과거 보수 성향 대법관들과 달리, 특히 트럼프가 임명한 보수 성향 대법관들은 단일행정부론을 수용하기 때문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법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공백이 있다. 실제로 트럼프 1기 때 행정부 내의 저항자들은 단지 법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헌정을 지키겠다는 양심에 따라 해임될 위험성을 무릅쓰고 행동에 나섰다. 즉 공직자의 정치 문화가 중요하다.
정치 문화의 측면에서, 사회운동이 주목해야 할 층위는 정치인과 관료 수준보다는 대중운동 수준이겠다. 상술했듯, 소수 법률가의 주장에 불과했던 단일행정부론이 행정부를 뒤흔드는 수준까지 발전한 것은 트럼프주의 운동의 공이다. 사회운동은 더 아래의 층위에서, 트럼프주의 대중운동과 정치적, 사상적으로 대결해야 한다.4. 트럼프주의는 더욱 급진화할 것인가
과연 2기 행정부 하에서도 이 매커니즘이 잘 작동할 수 있을까? 1기 때의 실책은 주로 세계화주의자와 ‘딥 스테이트’의 방해 탓으로 돌리며 넘어갔지만, 트럼프주의 정책을 훨씬 쉽게 밀어붙일 수 있는 조건에 있는 2기 행정부의 실패도 그렇게 선동할 수 있을까? 이번 대선을 거치며 트럼프 지지자 연합은 어느 때보다 더 넓어졌지만, 그만큼 원심력이 강해져 내파할 위험성이 커지지 않았는가? 트럼프주의자는 어떤 식으로 확대된 지지층을 단결하고 급진화하려 할 것인가? 이번 절에서는 최근 트럼프주의 운동의 양상을 좀 더 깊이 살피며, 이러한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1) 소셜미디어 플랫폼과 인플루언서 기반의 운동
대선 직후의 조사에 따르면, 30세 미만 성인의 10분의 4가 뉴스를 인플루언서로부터 정기적으로 얻는다고 답했다. (조사는 ‘인플루언서’를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사건과 공공이슈에 관한 게시물을 정기적으로 올리는, 구독자 10만 명 이상의 개인 혹은 집단으로 정의한다.) 뉴스를 인플루언서로부터 정기적으로 얻는다고 답한 성인의 65%는 자신이 사건과 이슈를 이해하는 데 인플루언서가 도움을 주었다고 답했으며, 71%는 그 내용이 다른 뉴스와는 다르다고 답했다. 공화당 지지자 중 자신이 더 우파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민주당 지지자 중 자신이 더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 즉 양극에 있는 사람일수록, 인플루언서가 사건과 이슈 이해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며, 인플루언서의 생각에 동의한다고 답한 비율이 높았다. 매체별로는, 틱톡을 제외한 나머지 4개 플랫폼(X,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에서 보수 성향의 인플루언서가 진보성향보다 더 많았다. 한편, 주류 매체와 비주류 매체 간 비교 조사에서는 성인의 24%가 비주류 매체로부터 정치뉴스를 얻는다고 답했는데, 이 비율은 공화당 지지자의 경우 36%, 민주당 지지자의 경우 13%로 갈렸다.
5대 소셜미디어 플랫폼, 2기 행정부 인사를 다수 배출한 폭스뉴스 계열과 더불어 최근 폭증한 트럼프주의 채널들은 새롭고 젊은 트럼프주의자 정치인을 육성하는 공간이 되고 있다. 2기 정부효율성부 수장으로 임명된 비벡 라마스와미(85년생)는 2023년에 정계에 진출해 틱톡커로 큰 인기를 얻었다. 지난 호 글에서 소개한 터닝포인트USA의 지도자 찰리 커크(93년생)는 본인도 인플루언서인 데다가, 그가 조직한 플랫폼에 속한 안나 파울리나 루나(89년생)를 하원의원에 당선시키기도 했다. 이외에 이 플랫폼 출신으로는 캔디스 오웬스(89년생)가 유명하다. 한편 데일리와이어(DailyWire) 계열도 있는데, 벤 샤피로(84년생)나 마이클 놀즈(90년생)의 팟캐스트 프로그램은 트럼프주의자인 공화당 의원이라면 꼭 출연해야 하는 곳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트럼프주의 운동에서 정치인이 SNS를 적극 활용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정치 인플루언서 활동을 중심으로 정계에 입문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다. 2) 트럼프주의 운동의 네 가지 층위
가장 표면에는, 이번 대선의 3대 쟁점이기도 했던 경제, 이민, ‘정치적 올바름’을 두고, 민주당이나 좌파를 규탄하는 차원이 있다.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를 뽑은 유권자의 다수가 이 정도 수준에서 그를 지지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통계는 앞서 언급한 공개강좌와 사회운동포커스 글을 참고하라.) 이 수준의 지지층은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문제 해결에 실패할 경우 지지를 철회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민주당과 좌파에 대한 반감이 강하기에, 3대 쟁점과 관련한 이들의 정책적 혁신 여부에 따라 그 불만이 향후 어디로 수렴될지가 갈릴 것이다. 따라서, 사회운동은 물가, 국경위기, 범죄, 마약, 인종·성별·성 정체성 등의 문제에 대한 분석과 해법을 갖고서, 트럼프 행정부와 다툴 필요가 있다.
(2) ‘미국 우선주의’ 노선과 트럼프주의 정책을 추구
두 번째 층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려면 반(反)세계화 노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류다. 즉 위의 층위보다 더 깊은 수준에서, 향후 미국 정치가 ‘미국 우선’을 주요 기치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여론이다. 여기서 트럼프주의자의 비약이 있는데, 어떤 이론이나 분석에 근거하기보다는, 첫 번째 층위의 문제들과 관련된 현상을 묘사하다가 ‘그러므로 트럼프주의 노선이 옳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그 사이 공백을 쟁점화할 필요가 있다. 먼저는 2절에서 썼듯 보호무역주의가 미국인에게 더 손해를 끼칠 위험성을 인식시켜야 하며, 관련하여 자본주의 경제 원리와 그 아래에서 미국 경제의 쇠락 원인을 분석하고, 경제 구조를 어찌할 것인지를 논할 필요가 있겠다.
(3) 정체성 위기에 맞서 정신적 가치와 공동체를 강조
세 번째 층위는 상당히 철학적인데, ‘정체성 위기’를 강조하며 이에 맞서려면 삶의 근본 가치를 되찾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층위는 매우 중요한데, 젊은 트럼프주의자가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첫 번째 층위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하는 ‘문화전쟁’ 차원의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 현실로부터의 고통을 묘사하다가, 이로부터 우리가 ‘길을 잃었다’는 감각을 느끼며, 그 분노와 허무함의 굴레 속에서 탈출하려면 삶의 목적을 현실 세계의 대상이 아니라 어떤 정신적 가치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넘어간다. 이로부터 다시, 미국인들이 어떤 ‘정체성’을 회복한 공동체를 건설한다면, 현실의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경제 등의 문제를 ‘정체성 복원’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에, 먼저는 이 층위의 논의를 다시 위의 두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싸움이 필요하다. 다른 한편으로, 아래의 네 번째 층위로 내려가서 역사와 이념에 관한 더 근본적인 수준의 논쟁을 할 수도 있겠다. 세 번째 층위가 추상적인 것은, 그 배경에 있는 네 번째 층위를 숨기고 이야기하는 탓이다. 아래의 내용을 보면, 젊은 트럼프주의자가 말하는 게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상당히 위험한 함의가 있기에, 따로 다루겠다.3) 트럼프주의의 급진화: 인민주의를 차용한 전통주의
이는 인류의 역사가 네 단계를 거쳐 ‘퇴보’했다는 역사철학에서 출발한다. 가장 먼 옛날 ‘성직자’의 시대가 있었다. 이때 인류는 정신적 지도자의 영도 하에 현실을 초월한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그때에는 어떤 근심도 없었고, 모두가 도덕적인 삶을 영위했다. 그러나 인류가 타락하여 ‘군인’의 시대가 열렸다. 이때는 군사적 지도자 아래 ‘현세의 명예’를 추구했다. 그러나 뒤의 시대에 비하면 명예를 추구한 것은 그나마 숭고한 행위였다. 인류는 더욱 타락하여 ‘상인’의 시대가 열린다. 이때는 부자의 지배 아래 ‘현세의 물질적 이익’을 추구했다. 최종적으로 ‘노예’의 시대가 도래했다. 이는 위계질서가 무너지고, 삶의 목적이 사라져 그저 ‘육체적 욕구’만을 따라 살아가는 때다. 전통주의자가 보기에는 동일한 목적, 가치와 위계질서는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배넌은 상인의 시대를 자본주의, 노예의 시대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에 대응했다.
이런 역사철학은 종말론으로 이어진다. 노예의 시대는 말세다.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 지금의 시대가 완전히 파괴되고 나면, 새롭게 성직자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이 내용이 중요한데, 말세에서 전통주의자의 정치적 목표를 ‘문명의 파괴’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세계가 멸망해야, 그 폐허 위에서 성직자의 시대가 탄생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전통주의 사상의 내용인데, 배넌은 이런 ‘구식’ 전통주의의 숙명론적 한계를, 인민주의를 도입하여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파괴 이후에 어떻게 탄생이 이루어지는지, 누가 어떤 운동으로 이를 이루는지에 대한 내용이 없다면, 전통주의자가 수행하는 ‘파괴’는 수동적 행위에 머문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괴와 탄생의 주체를 노예의 시대 안에서 찾아야 한다.
배넌은 이 시대의 인류가 ‘가짜’ 지배계급과 이들에게 억압당하고 세뇌당한 인민으로 나뉜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지배계급은 ‘지도’를 하지 않기에 ‘가짜’다. 그들은 공동체가 쫓아야 할 목적과 위계질서를 제시하지 않고, ‘자유와 평등, 다원성’이라는 미명 아래 그 누구도 다른 누구를 영도할 수 없는 상태를 만들어 놨다. 따라서 문명 파괴란 그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유와 평등, 다원성’이라는 ‘현대성’을 공격하는 것이며, 그 세뇌에서 벗어나려 하는 인민이 주체가 되어 ‘파괴와 탄생’을 이끌어야 한다. 배넌은 그 가능성을 트럼프주의 운동에서 발견했다.
이런 맥락에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조언자 알렉산드르 두긴과 배넌의 대담에 주목할 수 있다. 두긴 역시 전통주의자로, 미국이 ‘자유와 평등, 다원성’이라는 현대적 가치를 세계에 퍼뜨리는 악이며, 따라서 이에 대항하는 러시아, 중국, 이란 등이 ‘파괴와 탄생’의 주체라 보았다. 이 나라들은 그런 거짓된 관념으로 세계를 통합하려 하지 않으며, 각자의 위계질서와 공동체주의에 입각한 ‘다극화’ 시대를 열어 전통주의적 이상으로 나아갈 것이다. 반면 배넌은 두긴에게 미국이 러시아의 적이 아니라는 점을 설득하려 했다. 미국 내부에서 트럼프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배넌은 미국의 인민과 러시아가 연합하여 미국의 가짜 지배계급을 몰아내고, 동시에 중국에도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국은 겉보기에는 권위주의 국가로 보이지만, 실은 세계화주의에 빠져 현대문명을 유지하는 주요 역할(‘세계의 공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푸틴이 정교회를 수호하는 것과 달리, 시진핑과 중국공산당은 물질적 탐욕에 빠져 영적인 가치를 무시한다. 이는 전통주의에 부합하지 않는다. 배넌은 이런 이유로 두긴에게 러시아가 중국과 함께 가선 안 된다고 충고했다.
배넌이 트럼프주의 운동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지지하나, 그 자체로 괜찮다고 보는 건 아니라는 점에도 주의해야 한다. 트럼프주의가 네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때, 배넌의 입장에서 앞의 세 층위는 맨 마지막의 전통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해야 한다.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조차도 도구에 불과하다. 배넌은 세계화된 자본주의 경제로 인한 고통, 지배계급에 대한 불만, ‘자유와 평등, 다원성’과 같은 거짓 관념에 대한 혐오가 전통주의로 급진화될 수 있도록, 지배계급이 미국 인민에게 건 ‘세뇌’를 풀 사상운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봤다.
그는 지금의 여러 트럼프주의 플랫폼의 효시라 할 수 있는 브라이트바트뉴스를 창립하고 2016년 대선에 개입하며 세밀하게 논리를 짰다. 그 핵심은, 현실의 각종 문제에 대한 불만을 ‘반(反)세계화’와 ‘정체성 복원’을 매개로 하여, ‘영적으로 지도되는 고립된 공동체를 건설해 도덕을 회복한다’는 사상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특히 2020년대에 트럼프주의 운동에 들어온 젊은 세대가 밟아나가고 셈이다. 이런 극단주의의 확산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4) 소결
특히 최근에 부상한 젊은 트럼프주의자를 중심으로 트럼프주의 운동을 급진화하려는 시도에 주목해야 한다. 물론 이들은 대부분 세 번째 층위의 ‘정체성 정치’에 머물러 있지만, 그 배경에는 인민주의 운동을 매개로 현대화를 부정하고 권위주의적 신정(神政)을 부활시키려는 전통주의 운동이 있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네 번째 분파의 핵심 인물인 배넌은 이런 목적에서 트럼프조차 하나의 도구로 여긴다. 트럼프는 미국 인민을 트럼프주의 운동으로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탓에 급진화에서는 미온적인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추후 젊은 급진파가 트럼프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도록 대비하고 있다.
사회운동은 한편으로는 논쟁의 장을 위쪽 층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즉 관념적 논의로 빠지지 말고, 불만의 원천인 현실의 문제에 관해 분석하고, 트럼프주의 정책이 왜 이를 해결할 수 없는지 납득시키고, 다른 해법은 무엇인지 제시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특히 비관주의가 강한 젊은 세대를 정신적으로 위로하며 삶의 가치와 정체성을 찾자는 세 번째 층위의 이야기 배경에 전통주의가 있음을 드러내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현대의 보편적 가치가 ‘거짓 관념’이 아님을 주장하며 네 번째 층위와 대결해야 한다.5. 미국 민주당과 진보세력은 혁신할 수 있을까
우선 대선 패배에 대한 지도부의 평가를 보면, 민주당 전국위원회(DNC) 의장 제이미 해리슨은 패배의 규모를 축소하려 노력하며, 외부 요인을 주로 탓했다. 그는 전국 투표에서 트럼프가 해리스에 근소하게 앞섰을 뿐이며, 그의 득표율이 50%를 넘지 못했고, 현직 정당이 대부분 패배한 2024년 선거의 세계적 추세가 영향을 주었으므로, 그런 흐름을 고려하면 민주당이 나름 선전했다고 평가했다.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코로나 이후 경제난과 중도 후보 교체로 해리스 캠페인에 충분한 시간이 없었던 점을 패배 요인으로 꼽았다. 해리스 후보는 승복 연설에서 지지자들에게 미국의 이상을 위해 계속 싸워나갈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경제 이슈와 관련하여, 민주당이 노동자계급을 소홀히 해온 응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버니 샌더스 민주당 상원의원과 그 지지자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샌더스는 “민주당이 노동자계급을 외면해 온 것도 놀랍지 않고, 노동자계급이 민주당을 외면하게 된 것도 당연하다”며, 이 문제가 백인 노동자뿐만 아니라 히스패닉과 흑인 노동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했다. 또한, 민주당 내의 “거대 자본 이익의 대변자와 고액 연봉의 자문가들”을 비판하며, 이들이 대다수 미국인이 직면한 경제적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보았다. 샌더스는 소득 및 부의 불평등, 실질임금 정체, 의료서비스 보장 부재와 같은 문제들이 대중의 불만을 악화했다고 말하며, 민주당이 이런 문제를 중심으로 노동자계급과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민주당이 과거 20세기 중반에 추구했던 전략으로 왜 회귀할 수 없는가다. 당시는 노동조합 조직률 상승과 선거에서 노동조합과 민주당의 연계 강화로 민주당이 안정적으로 선거에서 승리했고, 60년대 민권운동에 힘입어 유권자 연합을 확대했다. 그러나 경제호황이 끝나면서 노동조합운동이 힘을 잃었고, 더는 그런 전략을 추구할 수 없게 되면서, 경제구조의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동시에 사회문화적 이슈에서 진보적 입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민주당이 변모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옛날처럼 재분배, 임금과 복지 확대를 외치면 된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
이런 맥락에서, 샌더스 지지자들이 트럼프주의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앞서 언급한, 팟캐스트 채널 ‘Joe Rogan Experience’의 조 로건이 샌더스 지지자에서 트럼프 지지자로 변모한 대표적 사례다. 또 SNS에서 유명한 샌더스 지지자인 준 라파인(유튜브 채널명 ‘Shoe0nHead’)은 대선 직후 ‘민주당의 몰락’이라는 제목의 영상에서, 이번 대선을 “포퓰리즘의 승리”로 규정하며, 샌더스 지지자인 자신도 그런 맥락에서 해리스가 아니라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그녀는 민주당이 문화전쟁에 골몰해 경제와 노동자계급을 버렸으며, 트럼프도 부자 기업가와 붙어 포퓰리즘을 배신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포퓰리즘의 대표자 공백”(populist vacuum)을 채우는 것은 밴스이지, 민주당은 아닐 것으로 전망했다. 요컨대 좌파 포퓰리즘의 관점에서 보기에, 트럼프주의가 더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 있기에 이를 지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경제 이슈와 구조를 논하면서, 불황이라는 조건을 고려하면서도 동시에 인민주의적 방식이 아닌, 계급적 대안을 형성할 수 있느냐가 혁신의 핵심이겠다. 특히 이민 문제에서 노동자운동이 계급적 대안을 낼 수 있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코로나 사태 이후 경제위기 상황과 이민 폭증이 겹치면서, 특히 건설업과 같은 업종에서 히스패닉 노동자 내부의 갈등이 격화했고, 트럼프 캠페인이 ‘합법’ 이민자 대 ‘불법’ 이민자 구도를 부각하며 히스패닉의 표를 얻었다. (관련한 상세한 설명은 앞서 언급한 공개강좌와 사회운동포커스 글을 보라.)
이에 대해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들처럼 히스패닉이 ‘백인을 선망’하여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인종차별주의에 물들었다고 규탄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당 내 진보적 이민 옹호단체가 왼쪽으로 치우친 대안이 히스패닉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 주장한 것이 실제 히스패닉의 생각과 달랐다는 지적이 있다. 히스패닉 노동자 내부 경쟁이 격화된 부문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이 단결할 수 있는 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필요할 것이다. 특히 민주당 일각에서 이번 대선에서 해리스가 당선되지 못한 것을 미국 유권자가 인종차별주의·성차별주의에 물들어 ‘흑인·아시안 여성’을 거부했다는 식으로 설명하며 모두를 공격하고 있는데, 이는 민주당과 진보세력이 트럼프주의로부터 표를 되찾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재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과거 60년대 민권운동과 달리, 소수자에게도 보편적 권리를 인정하라는 운동이라기보다는 ‘각자가 자기가 규정한 정체성에 따라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자유가 있다’는 식에 가깝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2021년에 발표한 ‘성 정체성 또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 금지 및 대응에 관한 행정명령’ 관련 논란이 이를 보여준다. 관련 청문회에서 민주당 의원들은 ‘남성도 자신이 여성이라 생각한다면 여성 화장실이나 탈의실에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라고 했는데, 이런 개인 단위의 권리 옹호는 보편적 권리 개념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특히 2010년대 중반부터 문화전쟁이 격화하면서, 민주당은 사회문화적 이슈에서 급격히 좌경화됐으며, 이것이 평균적 유권자와 거리감을 초래하고 그들의 지지를 잃게 했다. 인종차별주의를 말하지만, 정작 흑인이나 히스패닉 유권자에게도 공감을 얻지 못했다. 2024년 대선의 결과를 고려할 때, 문화전쟁과 관련된 입장의 수정이 필요해 보인다.6. 결론
이번 선거가 경제, 이민, ‘정치적 올바름’ 이슈를 두고 바이든 행정부, 나아가 기존 엘리트를 심판한 선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기대와 달리, 이에 대한 트럼프주의의 대안은 미국 인민의 삶을 개선할 수 없을 것이다. 트럼프주의 경제정책은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가중하고, 트럼프의 뜻에 따라 경제를 좌우하게 하며, 거시경제의 불안정성을 높이며, 경제성장에 악영향을 줄 것이다.
정부 운영에서 트럼프주의는 단일행정부론을 내세우며 행정부 역량과 기능을 파괴함으로써 국민의 안전을 위협할 것이다. 대중운동 수준에서, 트럼프주의를 급진화하려는 시도는 현실 문제에 대한 인식과 논의를 가로막고, 정신적 지도자 아래 공동체로 단결하자는 전통주의를 확산하며, 권위주의와 인민주의를 결합할 것이다. 이는 독재로 나아가는 길을 열 것이며, 미국과 세계의 안녕을 크게 위협할 것이다.
사회운동은 이 흐름에 맞서 싸워야 한다. 현실의 문제와 경제구조를 두고, 인민주의적이지 않으면서도 노동자계급을 단결할 대안을 제시하는 협로를 걸어야 한다. 또한, 트럼프주의에 맞서 자유와 평등, 헌정주의의 정신을 지켜야 한다. ●
끝나지 않을 혼란의 시대
트럼프주의의 중요한 축 가운데는 반(反)이민과 같은 국내 정책만이 아니라, 냉전 종식 이후 미국 주류 정치권의 “전쟁광, 세계주의자, 네오콘 기득권”이 미국을 세계 각지의 불필요한 전쟁 지원으로 몰고 가 국력을 소진했다는 정세인식이 있다. 아무리 선거에서는 대개 대외정책보다 국내정책이 더 중요한 결정 요인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정세인식 또한 대중운동과 선거를 통해 적지 않은 미국 인민의 동의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 인민이 ‘세계의 경찰’로서 미국의 역할을 다시금 거부한 것이다.
다만 일각에서 말하는 것처럼 미국 패권이 이미 붕괴하였다고 말하기에는 이르다. 과거에 비해 현재 미국의 국력이 줄어들었을 뿐, 미국의 종합적인 국력은 여전히 다른 국가들을 압도한다. 미국이 과거와 같은 패권을 유지할 수 있냐 없냐와 별개로, 대외적으로는 국제연합(UN) 헌장을 위반하여 3년째 침략전쟁을 벌이고 대내적으로는 연방 예산의 절반을 원자재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는 물론이고, 여전히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의 1/6에도 못 미치는 상태에서 급격한 저출산 고령화와 총인구 감소, 경기침체와 경제성장률 둔화에 부딪힌 중국이 미국 패권을 조만간 대체할 것이란 주장은 현실과 거리가 멀다.
즉, 앞으로 찾아올 ‘미국 없는 세계’는 미국이 쇠망하고 패권국이 교체됨에 따라 찾아온 것이라기보다는, 트럼프를 선택한 미국 인민의 결정에 따른 결과다. 예컨대, 바이든 행정부의 대외정책을 ‘패권 없는 리더십’이라고 명명한 《포린 어페어스》 기사는 바이든 행정부가 친이스라엘 편향, 핵군축 공약의 포기, 트럼프의 무역 보호주의 계승과 같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직접적 군사행동이나 오만한 패권적 행태 없이도 외교와 국제적 제도(세계보건기구, 파리기후협정 복귀 등), 격자식 다자주의 틀(쿼드, 오커스, 한미일동맹 강화 등)을 통해 오바마가 주창했던 ‘아시아로의 회귀’를 실질적으로 달성하고 대중국 억제력을 효과적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미국이 패권을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않더라도, 여전히 전후 세계체제를 설계한 주요 강대국으로서 미국의 위치와 중국, 러시아에 비해 국제사회의 수용성이 높은 소프트파워를 활용하여 국제질서를 주도하는 것도 가능한 길이라는 이야기다. 그러나 적어도 트럼프의 미국은 그 길을 탐색하는 쪽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은 트럼프의 귀환이 국제 정세에 줄 충격을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및 중동 상황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다음으로, 이러한 사건들과도 연관이 깊은 2025년 한반도 정세를 전망한다. 마지막으로 트럼프 2기 행정부 시기 미중관계 전망을 확인한다.
결론을 먼저 언급하자면, 진행 중인 전쟁들은 휴전 또는 종전 합의에 이르더라도 언제든 다시 깨지거나 더 큰 혼란과 전쟁으로 돌아올 수 있는 불안요소들을 남길 것이다. 트럼프와 그의 참모들은 중국 견제에 집중하기 위해 유럽과 아시아에서 힘을 빼겠다고 하지만, 관세 부과와 같은 단기적이고 리스크가 큰 조치 이상의 전략이 부재한 미국과 이에 맞서 미국을 압도하거나 새로운 국제질서를 창출할 역량이 없는 중국의 조합은 지난 호 특집 <트럼프 포퓰리즘 분석>이 전망한 ‘G 마이너스 2’의 세계를 의미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에도 기회라기보다는 위험요소일 것이다.1.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아무도 트럼프를 막을 수 없다’
대선 결과가 나온 직후부터 드러난 인선이 그러하다. 트럼프는 대외전략의 핵심인 국무장관,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각각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과 마이크 왈츠 하원의원을 지명했다. 둘 다 대중, 대북 강경론자로 알려졌고, 개입주의적 면모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이미 우크라이나 전쟁을 비롯한 주요 사안에서 트럼프의 입장을 수용하여 말을 바꿔왔다. 하워드 러트닉 인수팀 공동위원장이 ‘대통령 및 정책에 대한 충성도 및 충실도’를 인사원칙으로 꼽고, 트럼프의 장남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합법적으로 선출된 대통령보다 자신이 더 잘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 인물로 내각을 구성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듯,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는 정책 담당자보다 트럼프 본인의 판단이 더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국방장관, 국가정보국장 지명은 훨씬 논란이 되었다. 국방장관으로 지명된 피트 헤그세스는 “좌파들이 애국자들을 사방에서 포위해 살해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거나 십자군 전쟁의 구호를 문신으로 새기는 등 극단주의자 의혹을 받고 있다. 미국 정보기관을 총괄하는 국가정보국장으로 지명된 털시 개버드 하원의원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뒤 “우크라이나에 미국이 자금을 댄 생화학 무기 실험실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시리아 내전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화학무기를 사용한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만나고 “그는 미국의 적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등의 행보로 공화당 내에서도 논란 대상이다. 트럼프는 주프랑스대사와 아랍·중동문제 고문에는 자기 사돈들을 지명하기도 했다.
즉, 트럼프 2기 행정부에는 소신이나 원칙에 따라 트럼프의 즉흥적 판단과 ‘거래적 접근’을 막을 이가 없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에 따라 미국 외교안보 정책의 불확실성은 급격히 커졌고, 주요 사안에서도 다양한 가능성이 열렸다.2. 우크라이나 전쟁, 한반도식 분단으로?
1) 트럼프 캠프의 구상
『미국 우선, 러시아, 우크라이나』의 결론은 “푸틴의 침략이 세계의 안정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를 유지하고 푸틴이 전쟁의 책임을 지지 않는 결과가 나면 이란, 중국과 같은 다른 불량 국가들이 더욱 대담해질 것이라는 주장의 문제점은, [우크라이나에 불리해진 전선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이미 그러한 결과를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과 다른 나토 지도자들은 푸틴에게 평화회담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기 위해 우크라이나에 나토 가입을 장기간 연기하는 것을 제안해야 하며, 대러 제재 일부 완화도 검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크라이나에는 영토 회복은 무력이 아니라 외교로 이뤄져야 하지만, 적어도 푸틴이 퇴임하기 전까지는 그런 외교적 돌파구조차 없을 것임을 납득시켜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내용은 언론을 통해 흘러나온 트럼프의 종전 구상, 즉 △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를 인정한 상태에서의 휴전 합의(‘한반도식 분단’) △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유보 합의 △ 미국 대신 유럽 국가들이 휴전협정 준수·비무장지대 감시와 일치한다. (12월 현재, 유럽 국가들이 휴전 뒤 우크라이나 주둔을 논의 중이라는 비공식 보도들이 있다.)2) 2024년 우크라이나 전황과 각국의 반응
2023년 여름의 반격 작전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뒤로, 2024년에도 우크라이나가 교착 상태 속 수세에 있는 상황이 이어졌다. 전쟁 장기화로 사기가 떨어지며 병력 동원에 어려움도 겪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는 우크라이나 검찰이 올해 1∼10월 동안 직무에서 이탈한 자국 군인 약 6만 명을 기소한 사실을 보도했다. 북한군 파병이 방증하듯 러시아도 병력 동원 문제를 겪고 있으나, 인구가 우크라이나보다 훨씬 더 많다. 여기에 최소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북한군까지 10월부터 가세했다.
우크라이나군은 2024년 8월에 개시한 쿠르스크 진격으로 러시아 영토 내 점령지를 만들었지만, 12월 현재 절반 이상을 러시아가 탈환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크라이나의 쿠르스크 진격은 러시아군이 주둔한 다른 전선에 크게 영향을 주거나, 러시아 내 여론에 심각한 파장을 미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휴전협상 시 러시아와 점령지 맞교환을 논의할 대상은 될 수 있다.
휴전협상을 통한 조기종전을 내세운 트럼프의 당선이 확정된 뒤로, 우크라이나, 러시아 양측 모두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협상 조건을 만들기 위해 전투가 과열되었다. 12월 5일 영국 국방부 정보당국은 올해 11월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중 가장 많은 러시아 사상자(추정 45680명)가 발생한 달이었으며, 직전 달인 10월이 그다음으로 많은 사상자(추정 41980명)를 보였다고 보고했다. 러시아가 전쟁 2년차부터 ‘고기 분쇄기’ 인해전술을 채택한 결과 러시아군 사상자는 전쟁 2년차, 3년차로 갈 때마다 급증했으며, 미국 대선을 앞두고 올해 9월부터 가파르게 증가하여 11월에는 러시아군 사상자가 하루 평균 1500명 이상이라고 설명했다. 북한군의 파병은 이와 같이 포탄 공급뿐만 아니라 인원 충원도 러시아에 절실한 상황에서 합의된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당선 이후로 대인지뢰, 고속기동포병로켓시스템(HIMARS, 하이마스)용 탄약 등 여러 우크라이나 지원 패키지를 발표하였으나, 이것들이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전에 전부 우크라이나에 전달되는 것은 시간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많다. 마이크 존슨 미국 하원의장은 2025년은 새 대통령의 몫이므로, 바이든 행정부가 요청한 내년도 우크라이나 지원안(240억 달러 규모)을 투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2월 3일 나토 외교장관 회의를 앞두고 바이든 행정부와 유럽 각국에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초청을 결정해달라고 촉구했으나, 나토 지도부는 우크라이나의 가입 문제보다 군사지원 논의를 우선하겠다는 입장을 반복했다. 트럼프의 구상 역시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우크라이나가 핵무기를 전면 폐기하는 대신 러시아, 미국, 영국이 우크라이나의 안전보장과 영토 존중을 약속한 1994년 부다페스트 안전보장 각서를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전쟁 개입으로 무참히 깼음에도, 안전보장을 약속했던 국가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아 결국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면 침공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우크라이나의 인식이다. 따라서 가입국이 공격받으면 다른 가입국들이 ‘자동개입’한다는 조항이 포함된 나토와 같은 확실한 안전보장이 없는 한, 어떠한 휴전도 러시아가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침략할 기회를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란 우려가 전쟁 초기부터 제기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점령지를 자국 영토로 편입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을 향한 더 큰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느냐는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정황은 많다. 한 예로, 12월 초 벨라루스 정부는 러시아와 합동 군사훈련 센터 세 곳을 설립할 계획을 밝혔다. 한 곳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동부와 국경을 맞댄 벨라루스 흐로드노 지방에, 한 곳은 폴란드, 리투아니아 서부와 국경을 맞대며 발트해를 끼고 있는 러시아 역외영토 칼리닌그라드에, 한 곳은 러시아 서부 니즈니 노보고로드에 지을 예정이다.
따라서 트럼프 행정부가 구상하는 종전안을 우크라이나가 받아들일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젤렌스키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더라도, 조급한 휴전협상은 우크라이나 정치 내에 상당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러시아의 개입 논란 속에 치러진 10월 총선 뒤, 친러정당 총리가 EU 가입 절차를 4년 동안 중단한다고 발표하여 대규모 시위가 진행 중인 이웃나라 조지아가 그 예다.
그러나 당장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내 점령지를 대폭 확대하거나 전쟁의 양상을 크게 뒤바꾸기는 어렵다는 사실을 푸틴이 모를 리는 없다. 적어도 구소련 내지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구상에도 전열 정비 없이 지금의 소모전을 지속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푸틴 정부의 강경 정책을 대변하는 역할을 해 온 측근 콘스탄틴 말로페예프의 인터뷰를 통해 푸틴의 의도를 예측해볼 수 있다. 말로페예프는 《파이낸셜 타임스》 인터뷰에서, 푸틴은 켈로그가 제안한 트럼프의 평화 계획을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말로페예프는 트럼프가 미국의 장거리 무기 공급 결정을 철회하고, 젤렌스키 대통령을 축출한 다음, 푸틴과 만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핵심이익의 일부로 인정하고, 중동 갈등을 비롯 “세계 질서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를 볼 경우에만, 푸틴 정부가 트럼프의 계획을 “장기적 평화”의 기반으로 볼 것이라고 덧붙였다. 말로페예프는 미국이 우크라이나 지원 철회를 거부하면 러시아가 전술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즉, 공약대로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접근할 트럼프에게, 푸틴은 많은 것을 요구하며 거래에 나설 수 있다. 푸틴은 전쟁 초기부터 서방의 대러 제재 해제,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포기와 비무장화·중립화,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를 의미하는 ‘비(非)나치화’ 등을 언급해왔다. 트럼프가 구상하는 유럽 군대의 우크라이나 주둔도 푸틴이 달가워할 안은 아니다. 말로페예프가 러시아는 ‘여유’가 있다는 식의 메시지를 던지는 동시에 핵 위협을 가한 것은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가기 위함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11월 27일 러시아 국영통신 《리아 노보스티》에 따르면,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32개월 만에 최저치로 폭락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에는 달러당 75~80루블이었는데, 27일에는 120루블을 넘긴 것이다. 지난 21일, 미국이 러시아와 유럽 국가 간 천연가스 거래 결제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 은행을 제재 명단에 포함한 탓이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 압력에 지난달 기준금리를 이미 연 21%까지 올렸으나, 루블 가치 하락은 수입품 가격을 더욱 올려 인플레이션을 악화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천연자원 수출에 의존하는 러시아 경제가 얼마나 취약한지 보여준다.
그럼에도 푸틴 정권을 위협할 수준의 국내 저항이 없는 상태에서, 러시아 정부는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태세를 취하고 있다. 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역대 최대 규모(13조 5000억 루블, 약 192조 원)의 국방비 예산안(올해 대비 25% 이상 인상, 2025년 전체 정부 지출의 32.5%)을 승인했다. 12월 16일,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러시아 국방장관은 2025년 러시아군의 목표는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루한스크, 헤르손, 자포리자 지역을 완전히 점령하는 것이며, 러시아 국방부는 향후 10년 안에 유럽에서 나토와 군사적으로 충돌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시나리오에 대비해야 한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협상이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을 경우, 트럼프가 기조를 급변경하여 오히려 우크라이나에 바이든 행정부보다 더 치명적인 무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그 경우 미국도 지금까지의 유럽처럼 러시아의 확전과 핵 공격 위협을 받을 것이다. 이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그렇다고 푸틴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트럼프가 선뜻 선택하진 못할 것이다. 이와 같이 협상을 통한 조기 종전은 생각보다 어려울 수 있다.
한편 러시아의 핵 위협은 어느 때보다 거세지고 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사거리 약 300km의 에이태큼스로 러시아 본토를 공격하도록 허가하자 그 직후인 11월 19일, 북한의 2022년 핵무력법령과 유사하게, 핵 사용 문턱을 크게 낮춘 핵 교리 개정안을 발표했다. △ 비핵국가 우크라이나가 재래식 공격을 하더라도 그것이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은 것이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지원국 양자를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음 △ 러시아와 동맹국(벨라루스)에 대한 미사일·항공기·무인기(드론) 공격이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정보가 있으면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음을 명시했다. 개정안은 우크라이나가 서방 국가들의 지원을 받고 있고, 러시아 영토 내에서 교전을 벌이는 현 상황에서 사실상 언제든 핵 사용을 가능하게 한 셈이다. (기존 안은 핵무기를 보유한 교전당사국만 핵 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러시아가 핵 공격을 받거나 전면전 상황에서 적의 지상군이 모스크바를 위협할 때 등 ‘국가 존립이 위협받는 경우’에 한정해 핵 보복을 허용했다.)
11월 21일에 러시아는 다탄두 각개목표설정 재돌입 비행체(MIRV)를 장착한 극초음속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오레시니크’에 재래식 탄두를 실어 우크라이나를 공격했다. (‘오레시니크’란 개암나무를 뜻한다. 미사일이 대기권에 재진입하면서 다수의 탄두가 흩어지는 것을 열매가 잔뜩 달린 개암나무에 비유한 것이다.) 이는 냉전 시기 개발된 MIRV의 첫 실전 사용 사례다. 본래 MIRV는, 핵미사일 수를 제한했던 미소 전략무기제한협정(START)를 우회하여 핵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즉, 다음에는 이 미사일에 핵탄두를 실을 수도 있다는 위협을 가한 것이다.
유럽 각국의 불안정한 정치, 경제 상황도 과연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얼마나 지원할 수 있을지에 관한 우려를 더한다. 주요국 중 정치권이 가장 안정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원 기조를 유지하는 나라는 독일이다. 사회민주당의 올라프 숄츠 현 총리는, 내년 2월 조기 총선이 결정된 상황임에도 12월 2일 키이우를 방문해 “필요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의 편에 설 것”이라며 6억 5천만 유로(약 1조 원)의 무기 지원을 약속했다. 총선 여론조사에서 선두를 달리는 기독민주당 대표 프리드리히 메르츠는 “푸틴에게 24시간 안에 전쟁을 끝내라고 요구하겠다”며, 푸틴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크라이나에 독일의 ‘타우러스’ 장거리 미사일로 러시아 영토를 공격하게끔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유럽연합의 실질적 구심점 역할을 했던 때처럼 독일의 영향력을 다시 구축할 만한 정치인은 안 보인다는 것이 중론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 상황이 너무나 좋지 않다. 영국은 올해 7월 총선에서 정권을 탈환한 노동당이 앞선 보수당 정부와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지원 의지를 보였으나, 7월 말~8월 초 전국적으로 ‘이민 반대’, ‘무슬림 반대’를 내세운 극우 폭동이 발생했다. 이 상황에 증세를 하지 않겠다는 총선 공약을 정부가 파기한 것이 겹쳐, 8월 말부터 국정 운영에 대한 부정평가가 51%에 달했다. 노동당의 총선 압승 요인이 정책에 대한 동의보다는, 영국 경제의 장기 저성장과 보수당 장기 집권에 대한 피로였기에 쉽게 지지율 급락이 나타났다고 평가된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트럼프 1기 때부터 ‘유럽군 창설’, ‘유럽에 프랑스의 핵우산 제공’ 등을 언급했고, 서방 정상 중 가장 먼저 우크라이나 파병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야심이 유럽 내에서 신뢰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올해 프랑스의 정치위기가 심각해졌다.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 여당 르네상스(구 앙 마르슈)가 참패하자(득표율 15.2%)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를 발표했다. 6월 30일 총선 1차 투표에서 국민연합(RN)이 프랑스 극우정당 최초로 1위(득표율 33.2%)를 차지하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과반 득표자가 없는 지역구에서 치르는 2차 투표에서는 극우정당 집권을 막기 위한 대규모 후보 단일화로 RN이 3위로 밀려났다.
총선에서 최종적으로 좌파연합이 1위를 차지했음에도 마크롱 대통령이 우파 성향의 공화당 소속 미셸 바르니에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새 내각은 시작부터 불안정했다. 결국 2025년 예산안 문제로 좌파연합과 RN이 함께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하고 통과시켜 12월 4일 바르니에 내각이 붕괴했다. 프랑스에서 내각 불신임안이 통과된 것은 1962년 이후 처음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정해진 임기까지 대통령직을 지키겠다고 밝혔으나, 야권은 대통령 사퇴와 조기 대선을 압박하고 있다.
한편 트럼프주의와 유사하게, 유럽으로 이민자가 유입되는 것에 반대하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포함한 대외개입과 각국의 주권을 넘어선 EU 차원의 정책에 반발하는 세력도 유럽 각국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6월 유럽의회 선거에서는 극우정당의 의석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으나, 독일 청년층에서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득표율이 크게 늘어났고 프랑스, 이탈리아에서 각각 RN, 이탈리아형제들(Fdl)이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미국과 달리 유럽에는 러시아의 팽창 의지가 ‘실존적 위협’이고, 우크라이나 지원을 넘어서 유럽 자체의 방어가 진정한 문제다. 12월 8일 트럼프는 유럽의 나토 회원국들이 더 많은 비용을 내지 않으면 “당연히” 나토 탈퇴를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는 실제 탈퇴 의사라기보다는 나토 회원국을 압박하는 수사라는 해석이 많지만, 미국의 가장 중요한 동맹인 나토마저 철저히 ‘거래’ 관점에서 보는 트럼프의 행태는 많은 불협화음을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 CSIS의 빅터 차 석좌는 트럼프가 △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보고 있는지, △ 국방비에 국내총생산(GDP)의 3% 이상을 지출하는지에 따라 동맹국 및 파트너들을 평가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 두 조건을 만족하는, 다시 말해 트럼프가 완전히 만족할 만한 동맹국은 유럽 내에 라트비아밖에 없다. (미국의 아시아 내 동맹과 파트너 중에도 이 두 기준을 모두 만족하는 국가는 없다. 한국, 일본, 대만은 두 기준 중 하나도 만족하지 못한다.)
7월 1일 국제문제 전문지 《포린 폴리시》가 기획한 “유럽이 미국 이후의 미래에 대비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상토론에서 폴란드 외무장관 라도슬라프 시코르스키는 각국 군대를 통합하는 유럽통합군 창설은 실현 가능성이 낮으므로 대신 EU 예산으로 최소 5000명 규모의 연합 신속대응군을 창설할 것을 촉구했고, 미국의 정치 변동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마크롱이 이야기하는) 유럽의 ‘전략적 자율성’을 추구하기보다는, EU-나토 간 ‘전략적 조화’를 추진하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럽은 이 정도의 계획조차도 추진하지 않고 있다.3) 소결: 우크라이나의 미래가 중요하다
트럼프의 ‘거래’와 유럽의 무력함으로 우크라이나에서 한반도식 분단이 이뤄진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 것인가? 트럼프와 평화운동 일각이 공유하는 태도, 즉 ‘반전’을 표방하며 러시아 점령지를 인정하는 식으로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결하자는 입장은 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 침략전쟁을 일으켜서 점령한 땅이 그대로 사실상 침략국의 영토로 인정되는 현실은 군비증강을 부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독일과 일본의 재무장, ‘중립국’ 핀란드와 스웨덴의 나토 가입, 대호황을 맞은 세계 방산 산업이 이를 증명한다. 적어도 푸틴 정권이 무너지지 않는 한, 러시아의 야욕이 우크라이나에서 그칠 리 없다는 의혹도 불식될 리 없다. 서방이 나치 독일을 달래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일부를 할양한 일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2차 세계대전 발발을 막지 못했듯, 푸틴의 러시아를 회유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큰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주장도 계속되고 있다.
올해 초 퇴임한 차이잉원 전 대만 총통은 11월 23일, 단기적으로는 미국이 대만보다도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고, 이를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크라이나의 승리는 [중국의 대만 침략을 포함하여] 세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장래의 침략을 가장 효과적으로 억제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크라이나 전쟁의 결과는 단지 일국이 감내할 문제가 아니라 세계 전체에 여파를 미친다. “이미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켈로그의 주장은 트럼프의 귀환을 통해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왜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어떠한 후속 대응을 하냐에 따라, 이 전쟁이 세계에 남길 결과는 여전히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구체적인 미래가 관건이다. 분단과 휴전이 결코 온전한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불안정한 평화가 정치위기를 낳는다는 것은 한반도의 역사가 증명한다. 휴전협상은 우크라이나 민중의 선택을 존중하며, 러시아의 재침략에 대한 우크라이나인의 정당한 우려를 고려하고, 이를 불식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을 포함해야 한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주권이라는 쟁점이 있다. 휴전이 이루어진다면, 국제사회는 러시아를 억제하는 동시에 우크라이나가 경제와 국방력을 재건하고, 우크라이나 민중 다수의 바람대로 정치 문화와 제도를 유럽연합과 통합해나가도록 도울 수 있다. 우크라이나 사회운동은 우크라이나의 외채 탕감을 포함하여, 전후 우크라이나의 재건을 위한 국제사회의 지원을 호소해왔다. 반대로 냉전 시기 핀란드처럼, 우크라이나가 중립을 선언하되 실제로는 러시아의 세력권에 들어가 내정을 간섭받도록 종용하여 러시아를 ‘달래려’ 할 수도 있다. 후자의 방식은 우크라이나의 비무장화·중립화·‘비나치화’라는 푸틴의 요구를 정확히 반영한다. 여기에서 국제사회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전쟁의 지속 여부와 별개로 세계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3. 이스라엘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1) 하마스, 헤즈볼라, 이란에 막대한 타격을 입힌 이스라엘
12월 현재 상황은, 이스라엘이 생존한 자국민 인질 전원의 귀환을 제외하고는 당초 목표 상당수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하마스의 지도력이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스라엘은 7월 31일, 하마스 최고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예를 암살하고 그 뒤를 이은 야히야 신와르도 10월 16일 사살했다. (신와르는 2023년 10월 7일 공격의 기획자로 알려졌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눈엣가시였던 레바논의 무장정파이자 정당인 헤즈볼라도 크게 약화했다. 9월 27일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헤즈볼라를 32년 간 지도해온 하산 나스랄라가 사망하고, 10월 3일 나스랄라의 후계자인 하셈 사피에딘도 사살되며 헤즈볼라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은 멈추지 않았고, 대헤즈볼라 작전을 명목으로 레바논 곳곳을 공습했다. 레바논 보건부는 이로 인한 사망자가 최소 3645명이 넘는다고 밝혔다.
10월 1일, 이란이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위한 보복 차원에서 이스라엘 전역을 탄도미사일 200여 발로 공격했다. 이에 같은 달 26일, 이스라엘은 이란 수도 테헤란 외곽 군 기지, 미사일 생산시설, S-300 미사일 방공포대와 레이더 등을 공습했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은 이 공습으로 테헤란의 방공망이 무너져 이란이 단기간에 보복하지 못할 것이라는 미국, 이스라엘 당국자들의 판단을 보도했다. 국가 지도부와 핵 시설 등을 이스라엘의 재공격 위협에 노출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12월 현재까지 이란은 별다른 반격을 하지 않았다.2) 이스라엘-헤즈볼라 휴전과 시리아 내전의 종결
이스라엘-헤즈볼라 휴전협정은 세부 사항이 모호하고, 이를 감시하기로 한 국제 감시·관리 위원회도 체계화되지 않았다. 휴전 시작 직후부터 양측은 서로 합의 위반을 주장하며 공격을 주고받고 있다. 그러나 양측 모두 60일 내에 휴전을 완전히 파기할 동기는 크지 않다.
이스라엘 측에서 헤즈볼라와의 휴전 다음의 과제는 하마스가 붙잡은 인질 귀환과 휴전 협상이다. 트럼프는 자신이 취임할 2025년 1월 20일 전까지 가자지구에서 전쟁을 정리하라는 메시지를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자에 보냈다. 12월 들어 미국과 이스라엘,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언론들은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60일 휴전 협상 논의가 진전 중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휴전 협의 때도 전투와 민간인 희생이 계속됐듯, 휴전을 앞두고 전투가 더 격화될 가능성이 있다. 12월 6일에도 이스라엘군의 공습과 총격으로 가자지구 북부 카말 아드완 병원 안팎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가자지구 보건부는 10월 26일~11월 25일 동안에도 팔레스타인인이 하루 평균 42명, 총 1230명 사망했다고 밝혔다. 이는 6개월 전과 큰 차이 없는 수치다.
양측이 얼마나 진심으로 휴전을 추구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헤즈볼라와 달리 하마스는 협상 카드로 사용할 이스라엘인 인질을 잡고 있다. 이스라엘 내에는 이번 기회에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의 전망을 완전히 파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트럼프 당선 직후, 베잘렐 스모트리 이스라엘 재무장관은 “팔레스타인 국가 수립이 이스라엘의 존재를 위협할 것이라는 데에 넓은 공감대가 있다”며 재무부와 국방부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가 통치하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등에 설치된] 정착촌에 이스라엘 주권을 적용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시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밝혔다.
한편, 이스라엘-헤즈볼라 휴전의 영향으로 13년 넘게 지속된 시리아 내전에서 반군이 승리하여 중동 정세에 다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의 뒷배인 러시아와 이란이 모두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개입하며, 힘의 공백이 생긴 상태에서 알아사드 정권과 협력하던 헤즈볼라까지 이스라엘과 휴전하자, 그 직후 수니파 이슬람주의 무장조직 ‘하야트 타흐리르 알샴’(HTS)이 파죽지세로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로 진격했다. HTS는 본래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에서 파생된 조직이나, 2016년 알카에다와 연계를 끊고 지하디즘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뒤 상대적으로 온건한 이슬람주의를 내세웠다. 12월 8일, 반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여 무려 53년간 지속한 알아사드 가문의 철권통치가 종식되었다.
정권을 넘겨받은 HTS는 히잡 착용 강요 금지, 언론의 자유와 인신의 자유 보장, 포용적 정책 등을 선언했다. UN, 미국 등이 HTS를 테러 집단으로 지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이다. UN, 아랍 8개국, 미국 등 국제사회는 시리아 내전의 재발을 막기 위해 HTS에 다양한 정치·사회 세력 포용과 폭력 배격을 주문했다.
이스라엘은 트럼프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시리아의 혼란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시리아 반군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자마자, 이스라엘군은 1974년 정전협정 이후 처음으로 시리아 국경을 넘어 골란고원 내 시리아군 기지를 점령했다. 네타냐후 총리는 골란고원의 영원한 영유권을 선언하고, 골란고원 내 이스라엘인 인구를 2배로 늘리는 안을 승인했다. 이스라엘군은 13일까지 시리아 전역을 480여 번 공습하여 시리아군의 핵심 전략 자산을 80% 가량 파괴했고, 방공 시스템의 86%를 제거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새 시리아 정권을 무장해제했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 영공 제공권을 확보하여 이란이 시리아를 통해 레바논의 헤즈볼라에 무기를 공급하는 보급로를 차단했다. 나아가 향후 이스라엘이 이란 핵시설 공격을 감행하기도 쉬워졌다. (HTS는 이스라엘의 시리아 공습을 규탄했으나, 현재는 분쟁을 원치 않으며 재건이 우선순위라고 밝혔다.)
반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해온 러시아와 이란은 체면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타격을 입었다. 푸틴의 시리아 내전 개입은 러시아 국민들에게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을 복원한 일로 여겨졌다. 알아사드 정권과 계약하여, 러시아가 아프리카에 개입할 기반이 되는 흐메이밈 공군기지, 러시아군이 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 시리아 서부 해안 타르투스 해군기지를 49년간 임차한 전략적 성과도 거뒀다. 그러나 러시아는 알아사드 정권이 HTS의 진격을 막는 데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고, 정권이 무너지자 시리아 내 군사기지에서 철수하고 있다.
수니파가 다수인 시리아의 시아파 알아사드 정권을 같은 시아파로서 지원해온 이란도 중동 내 시아파 맹주로서 위상에 손상을 입었다. 게다가 반이란 성향인 HTS의 비협조와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 헤즈볼라, 예멘 후티 반군, 이라크 민병대 등을 지원할 시리아 내 보급로를 잃었다. 외신들은 시리아 야권이 입수한 문서를 통해 시리아의 대이란 채무가 500억 달러(71조 7천 300억 원)에 달한다고 밝히며, 이란이 시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잃었을 뿐 아니라 막대한 채권을 회수하기 힘든 상태에 처했다고 보도했다.3) 트럼프는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을 지원할 것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트럼프가 당선되자 네타냐후 정부는 크게 환영했다. 트럼프 1기는 ‘역대 미국 정부 중 가장 친이스라엘 정부’를 자임했다. 1947년 UN의 팔레스타인 분할안은 종교적, 정치적 상징성이 큰 예루살렘을 어느 쪽도 아닌 UN이 관할하는 특별지역으로 두었으나, 트럼프 1기 행정부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하고 미 대사관을 그곳으로 이전했다. 또한, 국제사회 대다수의 입장과 이전까지 미국의 공식 입장과도 어긋나게,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휴전협정에 반하는 이스라엘의 골란고원 영유권 주장을 인정했다. 반대로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워싱턴 DC의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무소를 폐쇄하고, UN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 자금 지원을 중단하는 등 압박해왔다. 이번 대선 뒤 트럼프가 차기 주이스라엘 대사로 지명한 마이크 허커비도 “팔레스타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온 대표적인 친이스라엘 인사로, 이스라엘의 서안지구 합병 구상을 지지한다.
미국 대선에서 국내 사안이 중점이었기에, 트럼프의 중동 관련 공약은 “이스라엘과 함께 중동의 평화를 되찾겠다”는 선언 정도로, 구체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트럼프는 이란에 대한 초강경 기조를 공유하는 네타냐후 정권을 지원할 의지를 밝혀왔다. 트럼프는 1기 때도 이란 핵 합의를 파기하고,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암살하는 등 강경한 반이란 기조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올해 11월 미국 검찰이 트럼프를 암살하려던 이란 혁명수비대의 계획을 적발했다고 밝히면서, 트럼프 2기가 개인적 원한에 따라 이란에 더욱 공격적인 태도를 취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대이란 제재를 강화하고 이란의 석유 수출을 옥죄는 ‘최대 압박’의 재현이 예상된다.
나아가 12월 13일 《월스트리트 저널》은 트럼프 정권 인수팀 안에서 이란 핵시설 공습 옵션이 진지하게 고려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란의 핵 능력은 위협적으로 강화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공격과 알아사드 정권 붕괴로 이란이 타격을 입은 지금이 적기라는 의견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또한 이란이 핵무장 능력을 완전히 갖추기 전에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해왔다. (이스라엘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핵무장을 막기 위해 해당 국가의 핵 시설을 폭격한 바 있다.) 트럼프도 대선 기간에 이스라엘이 이란 핵 시설을 공격해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중동에서 미국의 직접 개입을 축소하겠다는 트럼프의 기조를 고려하면, 향후 이란 핵시설 공격을 실행한다 해도 미국이 직접 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의 작전을 미국이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4) 소결: 네타냐후와 트럼프는 중동의 평화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간 이스라엘은 하마스와 전투를 벌여오며 그 지도부 수십 명을 살해했음에도 하마스를 궤멸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극단적 폭력이야말로 하마스를 성장시키는 양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중동은 역내 갈등과 행위자가 많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스라엘-헤즈볼라 휴전이 급작스런 시리아 내전 종결로 이어졌듯, 하나의 사건이 생각지 못한 사태로 비화하거나,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세력이 다시 세를 키워 나타나는 일이 반복되어 왔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중동 정책이 네타냐후 정권과 트럼프 2기에 의해 다시 한번 반팔레스타인, 반이란 기조로 뭉쳐졌다. 이 기조의 단기적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 중동의 진정한 평화 정착과 거리가 멀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트럼프 1기의 중동 정책 중 가장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던 아브라함 협정(이스라엘과 아랍권 국가들의 외교 관계 수립)은 팔레스타인의 고립을 전제했고, 결국 하마스의 10월 7일 공격으로 이어졌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직접 충돌을 자제해 왔지만, 대이란 제재가 강화되거나 핵시설에 공격이 이뤄지면 핵무기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트럼프 2기 중동 정책은 4년 뒤, 지금보다 더 위태로운 중동 정세를 낳을 수 있다.
한편,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고 UN 대북제재 대상인 북한과 협력함으로써 UN을 무력화시켰는데, 또 다른 상임이사국인 미국 역시 바이든 행정부가 안보리 회의에서 이스라엘을 비호하며, ‘규칙 기반 세계질서’를 내세우는 미국이 실제로는 자국의 이해에 따라 ‘이중기준’을 적용한다는 비판이 크게 일어났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즉각 휴전을 촉구하는 UN 안보리 결의안은 올해 3월에야 미국이 거부권 행사를 포기하여 처음으로 통과됐다.) 세계질서의 유지에 관심 없는 모습을 보여준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에는 미국의 이러한 행보가 심화할 수 있다. 4. 트럼프의 귀환과 한반도
1) 북미 톱다운 대화가 돌아올 것인가?
트럼프 쪽에서도 북한과의 대화 의지를 드러냈다. 11월 26일 《로이터》는 트럼프의 정권 인수팀이 김 위원장과의 직접 대화 추진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도 12월 12일 《타임》지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각각 또는 둘 다 끝나면 우리[트럼프와 김정은]는 [협상장에] 앉을 것”이라고 밝혔다. 14일에는 측근인 리처드 그레넬 전 주독일 대사를 북한 등을 담당하는 특별임무 대사로 지명했다.
미국 대선 직후에는, 미국 국내 현안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무역갈등,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 등 숱한 국제 사안을 고려하면 적어도 2025년 내에 북미협상이 시작될 가능성이 낮다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 북한도 단기적으로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활용하여 러시아와 군사협력을 통해 핵능력을 제고할 것으로 점쳐졌다. 그러나 예측하기 어려운 트럼프의 행보를 고려하면, 양측의 의지가 있으니 북미협상이 조기에 재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온다. 예컨대,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이나 중동 문제에서 생각만큼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오히려 서둘러 북미대화를 개시하려 할 수도 있다.
다만, 트럼프 임기 내에 북미대화가 진행되더라도 그것이 실질적인 합의를 낳을지는 별개의 문제다. 10월 발표된 통일연구원 연구총서 『2025년 북핵 쟁점: 군축·군비통제 담론 대응 중심으로』는 북미 양측의 목표가 상이하고 타협의 여지가 적기에 북미협상은 결실을 내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북한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NPT 상의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것이나, 이는 NPT 체제를 심각히 손상시킬 것이므로 미국이 받아줄 수 없다. 중국, 러시아를 견제해야 하는 미국이 북한과 상호 핵군축을 하겠다고 나설 리가 만무한 상황에서, 미국이 제공할 수 있는 대북 안보 인센티브는 주한미군 규모를 줄이거나 바이든 행정부 당시의 한미 ‘워싱턴 선언’을 파기하는 것 이상이 되기 어렵다. 여기에 대북제재 일부 완화를 더하더라도, 북한이 이에 만족해 완전한 비핵화를 전제한 핵능력 규제에 동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9월 13일 북한의 보도는 우라늄 농축시설의 핵심인 원심분리기와 핵물질 생산시설로 추정되는 장비들을 최초로 공개했다. 과거 영변 우라늄농축시설을 방문했던 지그프리드 헤커 박사 등 전문가들은 바로 이곳이, 2019년 북미정상회담 결렬(‘하노이 노딜’) 당시 트럼프가 영변 핵시설과 함께 폐기할 것을 요구했으나 김 위원장이 거절했던 강선 핵시설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즉, 북한의 강선 핵시설 공개는 영변 핵시설 폐기만으로는 주요 대북제재를 해제할 만큼의 북한 핵능력 해체가 되지 않는다는 당시 트럼프 측 주장을 사후적으로 입증한다. 2) 북러 군사협력은 2025년에도 계속될 것인가?
심화하는 북러협력은 한반도 비핵화의 걸림돌이다. 러시아가 UN 대북제재위원회 전문가 패널 임기 연장에 거부권을 행사하여, 올해 4월 30일 대북제재위가 사실상 해체되었다. 9월 26일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북한에 대한 ‘비핵화’ 용어 사용은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북러정상회담 이후 러시아가 제공한 인공위성 기술 덕에 북한이 군사정찰위성 ‘만리경 1호’ 발사에 성공했다고 추정되는데, 이처럼 러시아는 기술 이전으로 북한의 핵, 미사일 고도화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외화 수입이나 경제협력보다도 이러한 군사기술 이전이 북한이 러시아로부터 얻고자 한 핵심이익으로 보인다.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UN 안보리 제재 대상인 북한과 군사협력까지 하게 된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실용적 필요 때문이나, 전쟁이 끝나더라도 러시아 입장에서 북한의 전략적 가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내부 담론을 소개한 한국개발연구원(KDI) 《북한경제리뷰》 기사에 따르면, 다수의 러시아 정책 전문가는 우크라아나 전쟁이 끝난 후에도 러시아와 서방의 관계 회복이 수십 년은 어려울 수 있으며, 2023년 캠프 데이비드 합의와 같은 한미일동맹 강화에 대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북한과 협력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현대적 무기 제공이나 군사기술 이전과 같이 가치와 리스크가 매우 높은 대북지원을 해야 하냐에 관해서는, 러시아 전문가들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개 상황, 동북아 안보 지형에 대한 러시아의 전략적 인식, 북한에 대한 신뢰도 등을 고려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보다 우선적으로 북한에 개입해온 중국의 입장, 한미일동맹 강화의 빌미가 될 가능성, 러시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를 잃을지 모르는 위험성 등도 쟁점이다.
그러나 러시아 안팎에서 여러 현실적 근거를 이유로 “1961년 북소동맹조약의 부활”(푸틴의 표현)인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조약 체결이나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가능성을 낮게 평가했음에도, 푸틴과 김정은은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이와 같이 두 정상이 세간의 예상을 뛰어넘는 심화된 군사협력, 예를 들어 푸틴이 11월에 언급한 북러 합동군사훈련뿐만 아니라 러시아 핵잠수함의 원산항 기항, 북러 방공망 통합 등에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 기사의 결론이다. 3) 정치적 공백 상태에 빠진 한미일동맹
바이든 행정부가 떠난 뒤에는 한국과 일본이 이러한 한미일 협력 기조를 함께 압박하자는 구상이었으나, 같은 달 사도광산 추도식이 한국의 보이콧과 일본의 단독 진행으로 파행을 보였듯 한일의 긴밀한 공동행보에는 장애물이 많다. 일본 자민당 정권은 비자금 스캔들과 물가상승 등으로 인해 낮은 지지율로 고전하다, 신임 이시바 시게루 총리가 중의원 해산과 10월 27일 조기 총선이라는 승부수를 띄웠으나, 자민당과 연립 여당 공명당의 단독 과반이 15년 만에 붕괴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시바 총리는 한일관계에서 유화적인 입장으로 알려졌지만, 당내 장악력이 약하며 트럼프와 조기 회동을 성사하지 못하는 등 외교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부인 아베 아키에,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 등이 트럼프를 만나 리스크 줄이기에 나섰다.
무엇보다도 12월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시도 이후로 한국 외교는 사실상 불능 상태에 빠졌다. 바이든 행정부는 계엄 시도를 거세게 비판하며 윤 대통령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고, 이시바 총리는 2025년 1월 예정됐던 방한을 취소했다. 탄핵소추안 가결 뒤에도 헌법재판관 공석 인선에서부터 여야가 마찰을 빚고, 윤 대통령이 수사를 늦추며 법리 다툼을 준비하는 형국이라 이러한 공백이 최소 몇 달은 지속할 것이다. 비상계엄 시도가 트럼프 진영과 북한에 준 영향은 아직 불명이다. 트럼프는 당선 직후 윤 대통령과 첫 통화에서 미국 조선업에 한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으나, 계엄 시도 이후 한국 관련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그는 12월 16일 대선 이후 첫 기자회견에서 중국, 일본, 북한에 관한 생각을 밝혔으나 한국은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북한은 대내로나 대외로나 침묵을 지키다 11일에야 《노동신문》을 통해 북한 주민에게 남한의 계엄 소식을 알렸다.
탄핵 인용과 조기 정권 교체의 가능성이 커진 상황에서, 현 제1야당 더불어민주당이 집권하게 된다면 한국 외교안보정책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민주당은 1차 탄핵소추안에까지 윤석열 정부의 “북한과 중국, 러시아 적대시”, “일본 중심의 기이한 외교정책” 비판을 포함했다. 특히 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이재명 대표는 후쿠시마 핵오염수 방류 반대운동을 주도하며 반일 행보를 보였고, 대만 문제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발언으로 논란이 되었으며(“중국에도 셰셰, 대만에도 셰셰”), 북한 방문을 위한 불법 대북송금 재판의 당사자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민주당 진영과 보수세력 모두 트럼프 2기를 자신들의 기존 입장을 관철하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 민주당의 한반도 및 동아시아 정책은 트럼프주의 정책과 공감대가 많은, 소위 ‘국익론’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12월 9일 《월스트리트 저널》 인터뷰가 한 예다. 이 대표는 한국 정부의 우크라이나 지원을 비판하며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을 목표하는 것을 칭찬하고, 자신이 ‘현실주의자·실용주의자’라는 점에서 ‘한국의 트럼프’로 불리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조선일보》와 국민의힘 일각 등 보수층은 트럼프 1기 때와 마찬가지로, 트럼프의 집권을 오히려 미국 전술핵무기의 남한 재배치나 한미원자력협정 개정을 통한 기본적 핵능력 확보 계기로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5. 트럼프 2기 미중관계 전망
1) 트럼프는 과연 중국과 ‘전략적 경쟁’을 할 것인가?
중국에 대한 보호주의적 관세, 투자 제한, 제재 강화 등 일방적이면서 동시에 WTO 같은 틀보다는 직접적 방식으로 미중 간 경제적 상호작용을 줄이고자 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국정책 또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심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질서를 교란하는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 자유주의적 다자간 국제질서를 재편한다는 목표를 기각하고, 오히려 미국이 국제질서 교란에 앞장서는 셈이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전쟁 전망은 이번 호에 실린 임지섭의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세계경제」가 자세히 다룬다.) 역설적으로 이는 과연 미국의 협소한 ‘국익’에 도움이 되는지조차 의문인데, 수입관세에 따라 미국 소비자와 생산자가 입는 피해, 중국의 보복관세에 따른 피해, 국제협력의 기반을 무너뜨린 데 따른 피해가 미국에 돌아오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번 호에 실린 정성진의 「트럼프 인민주의 정권은 미국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보라.)
가치(이데올로기)와 안보 측면에서도 유효한 전략은 잘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주의자들이 가치 중심의 개입주의를 뜻하는 ‘윌슨주의적 세계주의’를 혐오하듯, 가치를 축으로 한 세계 전략은 이들의 구상일 수 없다.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이라는 꿈’(‘중국몽’)을 중화민족이 아닌 이들이 함께 꿀 수 없듯, 트럼프주의의 ‘미국 우선주의’나 ‘미국 예외주의’는 다른 나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기도 하다. 동맹국, 파트너들과 다양한 연합을 통한 대중국 포위와 같은 종합적인 전략은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안보 전략도 ‘힘을 통한 평화’라는 명목 하에 미국 내 군수산업을 확대하여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선에서 제시된다. 한국과 일본, 유럽 등 동맹국과의 관계를 거래로 치환하고 미국이 언제든 철수할 수 있다고 위협하는 것이나, 중국에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유럽과 중동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은 근시안적 행보라는 비판은 공화당 진영 안에서도 나온다. 2) 중국은 미국을 대체할 수 있는가
더구나 세계 차원의 패권국으로 서기 위해서는 국력 이상의 요소들이 필요하다. 세계 경제와 무역, 금융 질서를 주도해야 하며, 이념 등 소프트파워도 키워야 한다. 영미 패권 교체기의 미국에 비교하면 중국은 이 모든 것이 크게 부족하다. 미국이 만들어낸 브레튼우즈 체제와 세계무역기구(WTO)를 대체할 만한 틀을 만들어왔다기보다는, 그동안 현존 틀을 이용하고 교란한 것에 가깝다. 제3세계 개발도상국에 막대한 투자를 했으나, 이는 지원대상국의 자본주의 발전에 성공한 전후 미국의 마셜 플랜, 일본, 한국 지원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다르다. 오히려 ‘일대일로’ 사업은 개발도상국의 디폴트와 반정부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중국식 권위주의와 디지털 감시 기술은 일부 권위주의 국가에 영향을 주고 있으나, 설령 중국 경제가 지금보다 더 비약적으로 성장하더라도 민주주의가 정착한 세계 국가 다수는 중국식 권위주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중국식 권위주의를 떠받치는 논거는 인류 전반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성이 아니라, ‘중화민족’의,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민주주의’라는 특수성에 기초한다.
주변국과의 관계에서도, 상대국을 동등한 대상으로 존중하지 않는, 중국 주도의 지역 질서 관념이 드러난다. 2010년 7월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 ASEAN) 외교장관회의 당시 양제츠 중국 외교부장이 “중국은 대국이고, 다른 나라는 소국이다. 이것이 현실이다”라고 발언한 것이 상징적이다. 한국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2016년 천하이 중국 외교부 아주국 부국장이 사드 배치 문제를 두고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느냐”라고 발언한 일, 2021년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정의용 외교장관에게 “옳고 그름을 파악해 올바른 입장을 견지하라”고 훈계한 일, 2023년 이재명 대표와 회동에서 싱하이밍 주한중국대사가 “중국 인민이 시진핑 주석님의 지도하에 중국몽이란 위대한 꿈을 이루려는 확고한 의지도 모르며 중국의 패배를 베팅하는 이들은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위협성 발언을 한 일이 그렇다. 그때마다 이런 논지는 개인의 발언에 그치지 않고 중국 국영매체에서도 드러냈으며, 한국 사회에서 논란이 됐다.
지금 중국이 미국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중국 정부도 알고 있다. 이것이 애초 대만 문제가 부각된 이유다. 중국공산당의 통치와 중국 인민의 정치적 자유 억압을 정당화했던 경제성장이 둔화하자, 시진핑 정권은 민족주의적 역사관에서 비롯된 영토적 완전성 추구를 국가적 목표로 세우면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중화민족주의의 강화로 인한 2016년 ‘쯔위 사과 사건’,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 진압 등은 대만 민중의 마음을 돌려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양안 통일’이 불가능한 지형을 만들었다. 쯔위 사건은 2016년 대만 총통선거 전날에 일어났고, 그 결과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후보가 압승했다. 중국이 내세우는 공식 양안통일 방안인 ‘일국양제’가 홍콩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본 대만의 여론은 80% 이상이 일국양제 통일에 반대하고 있다.
심화하는 정치위기, 경제위기로 인해 올해 세계 곳곳에서 다수의 집권세력이 실각한 것과 달리, 대만에서는 민주진보당이 3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이 또한 민진당의 국내 정책 요인보다는 대만의 주권, 민주주의, 자유를 지키겠다는 기조에 힘입은 것으로 분석된다. 성균관대 성균중국연구소 『2024년 대만 선거 특별리포트』는 대만에서 친중 여론이 몰락하면서, 전통적인 선거 구도 자체가 변화했다고 설명한다. 친중 정당이었던 국민당조차 중국과 아무 연관이 없는 본성인 출신 허우여우이를 대선 후보로 택했다. 허우는 중국의 바람과 달리, ‘하나의 중국’에 대한 최소한의 동의를 의미하는 ‘92 컨센서스’ 수용을 선언하지 않았다. 중국은 총통선거 기간에 군사훈련을 통한 압박뿐만 아니라 중국 푸젠성과 대만을 묶어 통합적인 경제발전을 추진하는 계획을 발표하였으나, 대만 여론은 중국 자본의 유입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홍콩의 사례를 들며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대만 수복’을 실행할 방도가 무력밖에 남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세계 패권 경쟁에서도, 지금이 중국이 국력 저하가 더 뚜렷해지기 전에 위험한 도박에 나설 수 있는 시기라는 점에서 더욱 우려된다. 결코 객관적 조건이 자국에 유리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국력의 정점을 지난 후발 국가가 ‘기회의 창이 닫히기 전에’ 전쟁을 감행한 사례로 이미 1차 세계대전의 독일, 태평양전쟁의 일본이 있다.
다행히 2024년 중국의 움직임은 대내외 모두 ‘상황 관리’에 들어갔다는 인상을 준다. 올해 중국은 중러정상회담과 브릭스 정상회의에 참석했으나, 세계 질서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러시아와 북한의 행보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기보다는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왔다. 북중러 간에 한미일동맹에 맞선다는 공통의 기반이 사라지지는 않겠으나,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 냉각을 숨기지 않았다. 김정은 위원장과 시진핑 주석이 함께 산책한 것을 기념해 설치했던 ‘발자국 동판’을 철거하고, 중국 내 북한 노동자 전원에게 일시 귀국을 통보하고, 북한행 화물 검색과 통제를 대폭 강화했다. 또한 북중수교 75주년임에도 북한 전승절 행사에 불참했다. 시 주석은 북한군의 러시아 파병 뒤 “불에 기름을 붓지 않고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조속히 완화해야 한다”며 북러협력 가속화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반면 한국, 일본과는 한중일정상회의 등 고위급 교류를 재개하고, 한국의 주장을 수용하여 공동선언에 ‘한반도 비핵화’를 포함하고(이에 북한 외무성은 ‘난폭한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다), 무비자 관광을 개방하는 등 관계 관리에 나섰다.
중국의 이러한 행보는 현재 중국의 위치에 대한 신중한 판단에 따른 것일 수 있다. ‘전랑외교’와 ‘일대일로’ 같은 기존의 공격적 행보는 각국의 반발을 불러왔다. ‘잃을 것이 없는’ 북한, 러시아에 비해 중국은 훨씬 많은 나라와 경제 관계로 얽혀있고 대외 무역 의존도도 높다. 경제구조가 취약하고 경제규모에도 한계가 있는 북러와의 경제협력은 이를 대체하지 못한다. 중국이 미국 주도 세계질서를 대놓고 깨거나 대체하려 시도하기보다는, 이를 활용하여 영향력과 국력을 최대한 키우는 전략을 취해온 것의 연장선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대만이라는 ‘핵심이익’과 관련한 문제는 예외가 될 수 있다.) 예측하기 힘든 트럼프 2기에 대해서도 선제적으로 나서기보다는 미국의 정책에 대응하며, 트럼프가 유발한 국제사회의 혼란에 개입하는 식으로 움직일 것으로 보인다.
2024년 중국 경제성장률이 정부 목표치에 미달할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올해 발표된 경제 정책은 중국 경제의 ‘시한폭탄’으로 꼽히는 지방정부 재정건전성과 부채 문제를 관리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청년 실업률이 2023년 6월 21.3%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자, 중국 정부는 국제노동기구(ILO) 기준과 달리 대학 재학생을 실업률 통계에서 제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 변경에도 올해 8월 청년 실업률이 18.8%를 기록했다. 이와 같이 경제 위기가 가중되고 중국 인민의 불만이 쌓이는 현실 또한 대외정책 완화에 고려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중국은 대미 군사력 열세를 가장 빠르게 메울 수 있는 부분인 핵전력 강화에 있어서는 공세적이다. 2023년 말까지 핵탄두 500개, 2030년까지 1천 개를 목표로 핵 보유량을 늘리고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숫자를 2000년 대비 4배까지 늘리고, 극초음속 미사일과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전력을 개량하기로 했다. ICBM·SLBM·전략폭격기라는 핵 3축 체계의 현대화를 이뤄 대미 핵 보복 능력을 높이고 인도-태평양 지역에 대한 핵 작전 능력을 확대하는 구상이다. 6. 우리가 견지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먼저, ‘미국 없는 세계’가 그 자체로 진보한 세상일 것이라는 기대는 안이하다. ‘하나의 세계’를 실현하려는 각고의 노력 없이는, 마치 서로마 제국의 붕괴 직후 유럽처럼, 세계대전 후의 다자주의적 질서와 탈냉전 이후 세계화의 순기능, 즉 정보의 자유로운 교류를 통한 인류 공동의 발전이 후퇴하고 정치적 불안성이 커지는 세계가 올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특히 전후 세계질서의 위기가 한반도 민중에게 의미하는 바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열강의 식민지 확보 경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으로, 1945년 이후 성립한 세계질서는 명목상으로 모든 민족국가의 주권과 평등을 명시하였고, 강대국들의 무력행사를 공동으로 통제하는 집단안보 체계를 갖추었다. 한반도 민중과 같은 약소민족의 해방과 번영은 이러한 전후 세계질서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러한 질서가 흔들릴 때에도 한국이 주변 강대국들과 이전과 같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은 환상이다.
마지막으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의 충격이 잊힌 지금, 세계 핵 확산 통제 체제는 위협받고 각국은 핵전력 강화와 핵정책의 공격적 수정에 돌입해 있다. 적어도 인류 절멸의 핵전쟁만큼은 막아내기 위한 핵무기 전면 철폐 운동이 냉전 종식 후 어느 때보다도 긴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