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 간 핵 통제의 부재, 위기로 치닫고 있는 NPT 체제
2026년 동북아 정세분석은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맞추겠다. 첫째는 중국의 ‘2027년 대만 침공설’이다. 2020년대 초반부터 미국 조야의 저명한 인사들이 구체적으로 2027년을 짚으며 중국의 대만 무력침공 가능성을 언급했다. 2027년이 가까워지고 있는 만큼 그 가능성과 현재 상황을 살펴본다. 둘째는 중국의 급속한 핵무력 증강이다. 중국이 궁극적으로는 무슨 의도인지, 어떤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두 가지 문제에 관한 분석과 평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중국의 2027년 대만 침공설 2027년 이내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꼭 짚어 언급한 인사는 필립 데이비슨 미 인도태평양사령관이었다. 그는 2021년 3월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대만은 중국이 야심차게 노리는 정치군사적 목표고, 그 위협은 향후 6년 안에 분명해질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 후 이와 같은 맥락의 말이 여러 최고위 인사의 입을 통해 이어졌다. 예를 들어 2022년 10월 윌리엄 번스 중앙정보국 국장은 CBS 인터뷰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이 2027년까지 대만을 공격할 준비를 끝내라는 지시를 군에 내렸다”고 말했다. 2024년 3월 존 아퀼리노 인도 태평양사령관은 “모든 징후는 중국이 2027년까지 대만 침공 준비를 마치라는 지시를 이행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올해, 2025년 1월 인사청문회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 지명자도 (시기를 늦추기는 했지만) “중국의 계산에 극적인 변화가 없다면 향후 5년 안에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여러 최고위 인사가 지목했던 바로 그 2027년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중국이 군사력을 급격히 증강하며 대만 통일을 강조하게 된 배경이나, 무력에 의한 현상변경에 강력히 반대하는 대만인의 의지를 여러 차례 자세히 다루었다. 우리는 중국의 권위주의와 팽창주의가 대만 침공이라는 위험천만한 결론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경고하고자 했다. 이번 글에서는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에 관한 최근 분석, 특히 군사적 측면의 분석을 살펴보고, 그 함의를 도출하고자 한다. 1) 중국의 대만 점령은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시각 중국의 정치적 동기가 얼마나 강렬하든 간에, 미중 간의 종합적인 군사력 격차가 매우 크기 때문에 중국의 대만 점령은 군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시각도 많다. 중국의 국방비 지출은 국내총생산(GDP)의 1.5% 수준이고, 숨겨진 지출을 더해 2% 수준이라고 봐도 미국의 지출액에 비해 1/3 수준에 머문다. 해군력을 비교해 본다면 2024년 6월 현재 해군 함정 총톤수에서는 미국(360여만 톤)이 중국(155여만 톤)보다 2.3배 우월하다. 미국의 항공모함은 11척 모두 핵 추진이지만 중국의 3척은 재래식 추진이고 함재기 규모도 적고 운영능력이 크게 떨어진다. 미국이 보유한 69척의 잠수함은 모두 핵 추진이지만 중국이 보유한 71척의 잠수함은 16척만 핵 추진이다. 미국이 보유한 69척 중 55척이 공격형 잠수함(SSN), 14척이 탄도미사일 발사 잠수함(SSBN), 4척이 순항미사일 발사 잠수함(SSGN)이다. 또 미국은 미국 본토를 제외하고도 140여 국에 374개 군사기지를 확보해 운용하는 반면 중국은 해외 군사기지가 지부티 한 곳에 불과해 군사 보급 능력에서 큰 차이가 난다. 흥미롭게도 2025년 1월 25일 러시아 연방정부의 싱크탱크, 러시아국제문제위원회(RIAC)가 발표한 보고서 「중국 2049 미래학적 분석」은 중국이 공격적으로 해군력을 늘리고 있으나 미국과 20년 이상의 격차가 난다고 진단했다. 러시아와도 10년의 격차가 있다고 했다. (“러시아, 부풀려진 중 해군력”, 《서울경제》, 2025년 2월 2일.) 다만 중국이 핵 전력을 빠르게 늘리고 있어 2035년경에 미·러와 대등한 수준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봤는데, 중국의 핵전력 문제는 뒤에서 다시 다룬다. (1) 2023년 1월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워게임 분석 : 대만과 미국, 일본이 단호하게 대응하면 중국의 대만 점령은 불가능 그렇지만 종합적인 군사력 비교만으로 단기전의 결과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2023년 1월,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중국의 대만침공 워게임을 분석한 보고서, 『다음 전쟁의 첫 번째 전투』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미 국방부가 많은 워게임을 수행했지만 결과는 기밀이고 제한적 정보만 알려져 있다며, 국가안보 커뮤니티에 통찰력을 제공하고 광범위한 논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독자적으로 워게임을 수행하고 보고서를 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국내 언론에서도 “中, 대만 침공 성공 못해… 해군은 궤멸 美가 ‘워게임’ 해보니”(《조선일보》, 2023년 1월 9일), “중국의 대만 침공 워게임... 미-중 진영, 1만 명 이상씩 숨진다”(《한겨레》, 2023년 1월 12일)라는 제목으로 보도됐다. 언론에는 그 개요만 소개되었는데, 함의를 따져보기 위해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보고서가 가정하는 개전 초기 상황은 이렇다. 중국군이 개전 몇 시간 동안 막강한 화력으로 선제공격을 퍼부어 대만의 해·공군력 대부분을 파괴한다. 중국군은 곧바로 해군을 대대적으로 동원해 대만을 에워싸고 모든 해상로를 봉쇄한 뒤 지상병력을 대만 해안에 상륙시킨다. 또 공군 항공기들은 대규모 공수부대를 대만 해안선 너머 내륙 깊숙이 침투시킨다. 보고서는 대전략, 전략, 작전·전술 수준 각각에서 다음과 같이 표준 시나리오를 설정하고, 그와 다른 변형 시나리오를 제시하여, 총 24회의 워게임을 실행한다. [%=사진1%] [그림] 중국의 대만 침공에 따른 전쟁 시나리오 (자료출처: 《한겨레》) [%=사진2%] [그림] 워게임 개요를 보여주는 작전지도와 지상전투지도 (자료출처: CSIS) ■ 대전략: 정치적 의사결정 - 중국이 침공하며, 개전일을 결정한다. - 대만의 저항은 강력하다. - 미국은 자동으로 전쟁에 개입한다. * 변형: 미국이 참전하지 않아 대만이 고립된다. / 미국 폭격기의 참전이 개전 후 4일까지 지연된다. / 미국의 참전이 개전 후 14일까지 지연된다. - 미국은 대만에 사전에 주둔해 있지 않다. * 변형: 미국의 연안작전 해병연대가 사전에 배치되어 있다. - 일본은 미국이 자국 내 미군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허용한다. * 변형: 일본이 중립을 유지한다. - 일본 자위대는 중국이 일본 영토 내부를 공격하면 반격한다. * 변형: 일본 자위대가 개전일에 바로 참전한다. - 일본 자위대가 전쟁에 개입한 후에는 모든 작전에 참여한다. * 변형: 일본은 방어적 태세로 남는다. - 필리핀은 관여하지 않는다. * 변형: 필리핀이 군사기지를 제공한다. - 호주가 유일한 동맹/파트너로 관여한다. - 이 기회를 틈탄 다른 국가(예를 들어 북한)의 공격은 없다. * 변형: 미국은 동시적 위기를 감내해야 한다. ■ 전략: 전투서열, 동원, 교전규칙 (전투서열) - 중국: 변형 시나리오에서는 중국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이 증대한 경우와, 전술탄도미사일(단거리탄도미사일)을 유지하는 경우를 다룬다. - 대만: 변형 시나리오에서는 대만의 하푼미사일(대함 유도미사일) 보유량 증대가 지체되는 경우를 다룬다. - 미국: 변형 시나리오에서는 일부 잠수함이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를 다룬다. (동원) - 중국: 개전 30일 전 - 미국: 개전 14일 전 (즉 미국은 중국의 은밀한 침공 준비를 주시하며, 불확실성이 존재하지만 14일 전에 항모전단을 오키나와와 도쿄에 보내고, 괌에 폭격비행단을 배치한다.) * 변형: 미국은 개전일에 동원을 시작한다/미국은 무력시위를 하지 않는다. - 대만: 즉각적인 동원 * 변형: 대만은 대응이 지체되어 개전 후 4일까지는 무력하다. (교전규칙) - 미국, 일본 영토에 대한 중국의 공습은 승인된다. - 중국 본토에 대한 미국의 공습은 승인된다. * 변형: 미국은 중국 본토에 대한 공습은 승인하지 않는다. ■ 작전과 전술: 운영능력, 무기, 인프라 (작전 운영능력) - 중국 상륙군: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과 동일하다. * 변형: 중국 상륙군의 운영능력이 떨어진다. - 대만 지상군: 중국과 동일하다. * 변형: 대만 지상군의 운영능력이 떨어진다. - 중국 공군: 미군과 동일하다. * 변형: 중국 공군의 공대공 운영능력이 떨어진다. (무기효율성) - 미국 JASSM(삼군 공용 공대지 장거리 미사일)의 대함 타격 능력: 작동한다 * 변형: 작동하지 않는다. - 미국과 중국의 함정 방어능력: 기대치만큼 작동한다. * 변형: 기대치에 비해 미흡하다. - 위성공격무기와 사이버공격: 중간 정도의 효율성 - 5세대 항공기: 미국과 중국이 동등하다. * 변형: 미국의 5세대 전투기가 우월하다. (인프라) - 일본의 항공기 강화 격납고(HAS): 현행 프로그램 수준. * 변형: 일본 내 강화 격납고를 늘린다. - 일본 민간공항 사용: 군 부대당 오직 1개의 지역 민간공항만 사용할 수 있다. * 변형: 미국과 일본은 대규모 일본 공항들을 사용할 수 있다. [그림] 재즘(왼쪽)과 군산 강화격납고(오른쪽) 재즘(JASSM, Joint Air-to-Surface Standoff Missile, 삼군 공용 공대지 장거리 미사일)은 미 공군과 해군이 운용하는 자율형, 스텔스 기능을 갖춘 장거리 재래식 공대지 정밀 타격 미사일이다. 이 무기는 200해리(약 327km) 이상의 사거리에서 방어력이 높은 고정 또는 이동식 목표물을 파괴하도록 설계되었다. 길이 4.3m, 무게 1,022kg으로, 완전 자율형 ‘발사 후 망각’(Fire and Forget) 방식으로 운용된다. 태평양공군사령부는 2020년 7월 31일 제8전투비행단이 군산기지에서 강화격납고(HAS) 준공식을 개최한 사실을 공개했다. 이번에 구축된 HAS는 모두 20개동이다. 특히 HAS는 북한군의 미사일·화학무기 등 공격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된 것으로 알려졌다. 신형 격납고 건설에는 총 51개월이 걸렸고 전체 예산은 1억 2,500만 달러(약 1,480억 원)에 달한다. (자료출처: 《뉴스1》) 보고서는 24번의 워게임 결과를 ▲ 표준 시나리오 외에, ▲ (미국과 파트너에 유리한) 낙관적, ▲ (중국에 유리한) 비관적, ▲ 대만 고립, ▲ 라그나로크(즉 매우 비관적) 시나리오까지 총 다섯 가지 범주로 나눈다. ① 먼저, 표준 시나리오의 경우 상대적으로 신속하고 분명한 중국의 패배로 나타났다. 이는 대부분 중국군이 대만의 항구와 공항을 점령하기 전에 미국, 대만, 일본의 대함 미사일이 중국의 상륙선을 파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상륙함대의 최소 90%가 파괴되었고, 상륙한 중국 부대는 항구나 공항을 점령하거나 사용할 수 없어서 공중투하로만 보급을 받을 수 있었다. 14일간 지속된 전투 후 종료시점에 상륙한 부대는 3만 명 정도며 대만 영토의 7% 정도만 통제하는 데 머물렀다. 그렇지만, 표준 시나리오의 결과가 중국의 패배라고 하더라도 양측이 입는 손실은 심대하다. 짧은 전투기간을 고려하면 미국 공군의 손실은 베트남 전쟁 이후 최대이고, 미국 해군의 손실도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다. 일본도 열도에 걸쳐 있는 이착륙장이 공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대만의 인명, 인프라 피해는 막대하다. 중국의 손실도 충격적인데, 대규모 항공기와 사실상 함대 전체, 수천 명의 병력이 포함된다. 미국은 세 번의 표준 시나리오 워게임에서 168~372대의 전투항공기를 잃었는데, 대부분은 지상에서 파괴되었다. (따라서 미중 간의 공대공 능력은 워게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대만의 비행거리 내에 미국과 동맹국의 공군기지가 부족하여 소수의 기지에 전투항공기가 밀집해 있었고, 게다가 이들 기지에는 강화 격납고가 없었기 때문에 중국의 미사일은 미국, 대만, 일본의 항공기 다수를 파괴할 수 있었다. 미 해군은 2척의 항공모함과 7~20척의 주요 수상함(구축함과 순양함)을 잃는다. 이는 시나리오가 사전에 중국을 억지하려는 무력시위를 위해 두 척의 항공모함과 수상전투단(SAG)이 오키나와 주변의 취약한 위치에 배치하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또 현대 대함 미사일의 일제사격에 수상함이 취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상함의 미사일 방어가 매우 훌륭하게 작동하더라도 공격 미사일의 수가 너무 많아 방어용 무기고가 소진되어 요격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일본 해상자위대는 더욱 심각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는데, 모든 군사자산이 중국의 대함 미사일 시스템 사거리 내에 있기 때문이다. 종합하면, 미 공군과 해군의 막대한 피해는 중국의 집중적인 선제공격에 의한 것이다. [%=사진4%] [표] 시나리오 종료 시점에 대만 연안에 상륙한 중국군의 상황 (자료출처: CSIS) [%=사진5%] [표] 시나리오별 미국, 일본, 중국의 손실 (자료출처: CSIS) ② 다음으로, 미국과 그 파트너에게 유리한 낙관적인 시나리오에서도 동일한 결과, 즉 분명한 중국의 패배라는 결말이 나오지만 더 신속하고 사상자도 적다. 낙관적 시나리오 중 첫 번째는 ▲ 일본의 공항과 항구에 대한 미군의 접근권이 확대되고, ▲ 함선의 방어 효율성이 떨어지고, ▲ 중국의 미사일을 억제하고, ▲ (중국의 선제공격 전에) 괌에 폭격기와 항공모함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다고 가정했다. 두 번째는 ▲ 일본의 공항과 항구에 대한 접근권이 확대되고, ▲ 함선의 방어 효율성이 떨어진다는 가정 외에 ▲ 일본이 개전일 참전하며, ▲ 중국의 상륙 작전운영능력이 떨어지며, ▲ 미국의 5세대 항공기가 우월하며, ▲ 미국의 조종사 훈련이 우월하다는 가정을 추가했다. ③ 중국에게 유리한 비관적인 시나리오에서는 전투가 연장되는데, 그 결과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즉, ▲ 중국의 결과적인 패배, ▲ 중국이 피해를 입은 항구와 공항을 통제하는 가운데 이어지는 교착상태. 18번의 비관적인 워게임은 모두 JASSM-ER(JASSM의 사정거리 연장 개량형)이 대함 공격능력이 없다고 가정했다. 4번은 이러한 가정만 포함하고, 나머지 14번은 다음 중 최소한 3개의 비관적 가정을 추가했다. 즉, ▲ 미군의 동원이 지연된다, ▲ 미군의 참전이 늦어진다, ▲ 대만의 작전운영능력이 떨어진다, ▲ 대만이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한다, ▲ 미국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한다, ▲ 중국의 중거리마시일 수가 증가한다, ▲ 일본은 영토 내부가 공격 받더라도 공세적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④ 대만이 고립되는 시나리오에서는 중국군이 꾸준히 진군하여 대만 전역을 점령하여, 중국이 확실하게 승리를 거둔다. 보고서는 대만이 미국의 직접적인 지원 없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는지 탐구하기 위해 대만 고립 시나리오를 설계했다고 설명한다. 워게임 결과, 중국은 대만 남쪽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느리지만 꾸준히 전진하여, 10주만에 타이베이를 점령한다. 하지만 보고서는 워게임 결과가 교훈을 준다고 말한다. 대만이 싸울 의지가 있다면, 중국군이 주요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대만군과 장기간의 전투를 벌여야 하고, 이는 국제외교나 미국의 개입을 위한 시간을 벌어줄 것이라는 뜻이다. ⑤ 라그나로크 시나리오에 따르면, 미국의 공군력을 사전에 완전히 무력화할 때만 중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다. 보고서는 대만의 저항과 미국의 참전이 있더라도 중국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라그나로크, 즉 최악의 시나리오를 설계했다고 말한다. 중국이 승리를 거두려면 중국은 미국의 공군력, 즉 전투기와 폭격기를 완전히 무력화해야 한다. 먼저 전투기/공격기의 경우, 일본이 엄격히 중립을 유지하여 미군이 일본기지를 활용할 수 없다면 효과적으로 작전에 참여할 수 없다. 공중급유기와 괌 기지를 이용할 수 있으나, 괌 기지는 중국탄도미사일에 의해 파괴될 수 있고, 공중급유기도 요격에 노출될 수 있다. 폭격기의 경우, 중국이 무력화하기 어렵다. 중국 지상발사 미사일의 사거리를 벗어난 곳에 기반을 둘 수 있고, 여러 방향에서 접근하여 방어용 지대공 미사일의 사거리 밖에서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에 기반을 둔 전투기가 폭격기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미국 폭격기는 사정거리가 매우 긴 공대공 미사일을 보유한 중국 전투기에 취약할 수 있다. 미국의 공군력이 무력화된다는 라그나로크 시나리오 워게임에서는 중국군이 승리한다. 중국군이 상륙할 때 대만의 대함 순항미사일과 미군의 핵추진잠수함으로 큰 피해를 입으나 초기 전력의 2/3를 상륙시킬 수 있었다. 미국의 대규모 함대가 대만을 구제하기 위해 접근했으나, 공군력이 없는 상태에서 대부분 파괴된다. 보고서는 라그나로크 시나리오가 (중국군의 상륙을 저지하는) 대만 방어에서 일본이라는 기반과 대함 순항미사일의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결과에 따라 보고서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면 2026년 중국의 대만침공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첫째, 대만이 반드시 중국군에 격렬하게 저항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머지 조건은 소용없다. 둘째, 미국은 반드시 수일 내에,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적대행위에 대응해야 한다. 지연이나 어중간한 조치는 방어를 더 어렵게 하고, 미국 사상자를 늘리며, 중국이 대만 내에 확고부동한 점령지를 창출할 위험을 높인다. 셋째, 미국은 반드시 일본 내 자국 기지를 활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은 자국의 수많은 전투기와 공격기를 활용할 수 없다. 넷째, 미국은 반드시 충분한 수의 공중발사 장거리 대함미사일을 보유해야 한다. 보고서의 결론은 중국의 집중적인 선제공격으로 미국과 일본의 공군력과 해군력이 심대한 타격을 입더라도, 대만과 미국, 일본이 단호하게 대응한다면 중국에 대만에 대규모로 상륙하고 나아가 대만을 점령하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결말을 보여주는 것으로 읽혔다. 한편, 보고서가 한국에 관해 언급하는 대목은 많지 않다. 보고서는 한국이 중국의 힘을 우려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일본의 초점을 흐리려 할 목적으로 북한 지도부가 감행하는 (또는 중국이 배후에서 유도하는) 북한의 적대적 도발 행동도 걱정한다고 본다. 그래서 한국군은 대만에서의 무력충돌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 달리 말하면, 한국군은 언제나 기본적으로 북한군을 상대하는 게 주된 임무다. 다만 시나리오에서 미국은 한국에 배치된 미 공군 4개 비행대대 중에서 2개 대대를 (오키나와에 이동배치한 후) 대만에 투입하는데, 그래도 2개 대대는 북한 억지를 위한 목적으로 한국에 남겨둔다. (비행대대는 보통 12-24기의 비행기로 구성된다. 2023년 시점에 한국에 배치되었던 전투비행대대 1개는 24기의 전투기로 구성되었다.) (2) 2024년 1월 전략국제문제연구소 전문가 설문조사 : 중국이 대만을 격리·봉쇄할 수는 있어도 침공할 수는 없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는 워게임 결과를 발표하고 1년이 지난 후인 2024년 1월 22일, 이번에는 미국의 전문가 52명과 대만의 전문가 35명를 상대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분석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역시 국내 언론에 “중국, 대만 침공 역량은 아직... 봉쇄하면 대만 1~3개월 버틸 듯”(《한국일보》, 2024년 1월 23일)과 같은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보고서 발표 얼마 전인 1월 13일 16대 대만 총통선거에서 집권당인 민주진보당의 라이칭더 주석이 승리를 거두기도 했기 때문에 중국-대만 관계의 긴장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보고서가 더욱 주목을 받았다. 설문조사의 첫 번째 질문은 중국이 대만을 효과적으로 격리, 봉쇄, 침공할 역량을 현재 보유하고 있다고 보냐는 것이었다. 답은 대체로 ‘중국은 대만을 효과적으로 격리 또는 봉쇄할 수 있으나, 침공할 수는 없을 것’으로 나왔다. 여기서 격리(quarantine)는 비군사 행위자, 예를 들어 해안경비대, 해상민병대가 주도하며 ‘사법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상품의 유출입을 막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군사적 봉쇄에 비해서는 제한적이며, 예를 들어 세관검사라는 이름으로 일부 항구에서 운송을 제한하는 데 초점을 맞출 수 있다.) 반면 봉쇄(blockade)는 군대가 주도하는 다영역 활동으로, 상품의 유출입을 강력히 제한하며 군사적 활동을 전개하는 것을 말한다. 봉쇄 활동의 범위는 다양한데, 상선과 적대적 군사력의 차단부터 대만의 항구와 공항의 파괴에 이를 수 있다. [%=사진6%] 답변을 구체적으로 보면, 중국이 대만을 격리할 역량도 갖췄다고 평가한 이들은 미국 전문가의 91%와 대만 전문가의 63%였고, 봉쇄할 역량의 경우도 미국 전문가의 81%, 대만 전문가의 60%였다. 반면 중국이 대만을 효과적으로 침공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미국 전문가의 27%와 대만 전문가의 17%만이 긍정적으로 답했다. 또 다수의 전문가는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봉쇄할 능력이 있으나, 군사적 봉쇄만으로는 강제적 통일을 실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미국 60%, 대만 69%.) 군사적 봉쇄는 결국 확전, 침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거나, 대만의 항복을 강요하려면 침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다. 군사적 봉쇄만으로도 강제적 통일을 달성할 잠재력이 있다고 답한 전문가들도 (미국 35%, 대만 31%) 대만이 침공을 확실히 믿을 만큼 중국이 위협을 가해야 한다는 전제를 달았다. 화제를 돌려, 보고서는 앞으로 5년 내에 중국의 일차적 목표가 대만의 특정 행동이나 정책을 응징하고 변화를 강제하는 것이라면 (즉 즉각적인 강제적 통일이 아니라면) 어떤 수단을 택할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선택지는 ▲ 대만 외곽섬(금문도, 마조도) 격리, ▲ 대만 본섬 격리, ▲ 대만 외곽섬 강제 점령, ▲ 원거리 합동 봉쇄, ▲ 고강도 봉쇄, ▲ 대만침공으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미국 전문가는 외곽 섬 격리를 가장 많이 택했고(66%), 대만 전문가는 본섬 격리(71%)를 가장 많이 골랐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얼마나 신뢰하는가라는 질문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 미국 전문가는 무력침공의 경우 96%가 미국이 개입할 것이라고 완전히 또는 꽤 신뢰한다고 답했고, 46%가 완전히 신뢰한다고 답했다. 대만 전문가는 완전히 또는 꽤 신뢰한다는 73%이고, 완전히 신뢰한다는 49%였다. 보고서는 미국에 비해 대만 전문가가 신뢰도가 낮은 이유를 두 가지로 꼽았다. 첫째는 역사적으로 미국의 정책이 양안관계의 현상유지를 선호했고 따라서 대만을 언제나 무조건 지지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며, 둘째는 최근 중국이 미국의 정책에 관한 틀린 정보나 조작된 정보를 유포하기 때문이다. [%=사진7%] [그림] 봉쇄나 침공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라는 높은 신뢰가 존재한다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앞으로 5년 내에 이러한 시나리오가 발생한다면, 중국의 목표 달성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이 기꺼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이라고 얼마나 신뢰하는가? ” (자료출처: CSIS) 흥미로운 대목은 외곽 섬에 대한 중국의 격리나 강제적 점령에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것으로 보는 답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사실이다. (‘완전히’와 ‘꽤’를 합쳐서 격리는 미국 전문가 17%/대만 전문가 17%, 강제적 점령은 미국 전문가 29%/대만 전문가 35%.) 1979년에 제정된 미국의 대만관계법은 미국이 대만 지역 주민의 안보나 사회·경제 체제를 위태롭게 하는 강압적 수단에 저항할 능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규정하지만, 지리적 적용 범위에 금문도와 마조도를 포함하지 않았다. 따라서 외곽 섬들의 방어 문제에 관한 한 여전히 전략적 모호함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사진8%] [그림] 금문도, 마조도, 팽호도 금문도는 대만과의 거리는 약 210km에 달하지만 중국 대륙과의 거리는 불과 1.8km에 불과해 매우 가깝다. 마조도는 19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국 대륙과의 최단 거리는 약 9km다. (자료출처: 《뉴스메이커》) 이런 맥락에서 2024년 8월 14일, 미국 전쟁연구소와 기업연구소는 라이칭더 총통 취임 이후이자 미국 신임 대통령 취임 직전 시점인 6개월 내에 (즉 대만과 미국 각각이 정치적으로 불안정할 때) 중국이 금문도를 격리하는 조치를 실시하고 결국 강제적으로 장악하여 일국양제의 시범지역으로 삼는 가상 시나리오를 담은 보고서를 내기도 했다. 보고서가 경고한 일이 실제로 벌어지지는 않았으나 이와 같은 우려는 앞으로도 계속 제기될 것이다. 2) 미국 군사력에 틈이 있다는 시각 (1) 중국의 군사력 추격 전략국제문제연구소가 워게임 보고서를 발표했던 때와 같은 해인 2023년 8월, 미국 온라인 뉴스레터 《워존》은 해군정보국이 작성한 ‘중국 해군 대 미국 해군 전력 배치’라는 제목의 슬라이드 한 장을 공개했다. 슬라이드 오른쪽 위에 ‘기밀 아님’(unclassified)이라고 쓰여 있듯이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 폭로된 것은 아니지만, 단순명쾌한 이미지가 준 충격이 있었다. [%=사진9%] [그림] 2023년 미국 해군정보국이 작성한 ‘중국 해군 대 미국 해군 전력 배치’ 슬라이드를 설명해보자. 맨 위를 보면 2020년부터 2035년까지 5년마다 미 해군과 중국 해군의 주력함 전력을 비교한다. (주력함은 전투함, 잠수함, 기뢰전함, 대형상륙함, 대형 전투지원 보조함으로 정의한다.) 중국은 355척에서 475척으로 증가하는 반면, 미국은 296척에서 305~317척으로 증가하는 데 그쳐 격차가 더 커진다. 오른쪽의 그래프 중 위의 것은 주력함의 수를 표시한 것인데, 이미 2015년쯤에 중국이 수에서 앞지른 것이 보인다. 아래는 톤 수로 비교한 것인데, 미국이 2040년까지 톤 수에서는 여전히 앞서지만 중국이 꾸준히 추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실 더 강렬한 인상을 준 것은 ‘중국의 건조 능력’이었다. 중국 조선소의 건조 능력은 2,325만 톤인 반면, 미국은 10만 톤으로 중국이 미국의 232배다. 또 조선업 매출비중에서 해군이 차지하는 비중이 중국은 70% 수준인 반면, 미국은 95%로 추정한다는 설명도 있다. 미국 조선업이 거의 해군 발주에 의존할 만큼 쇠퇴했다는 뜻이다. 아래에는 추가적인 설명이 더 붙어 있다. “중국은 세계 조선업에서 큰 격차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은 세계 상업 조선시장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지만, 미국은 0.5% 미만이다. 중국에는 75개 이상의 ‘저명한’ 상업 조선사가 있고, 그 중 20개가 중국 해군의 건조프로그램에 참여한다. 50개 이상의 중국 드라이 도크는 항공모함을 물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다.” (중국해군의 수상함 생산업체들은 군수용과 상업용이 혼합되어 있으며, 이와 관련된 건조는 대부분 중국국영조선공사 시설에서 완료된다는 설명도 있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가 조선업 재건에 매우 큰 관심을 보이고, 한국 정부가 마스가(MASGA), 즉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를 제안한 이유를 엿볼 수 있다. [%=사진10%] [그림] 주요 국가 해군력 증가의 누적량 [%=사진11%] [그림] 미국과 중국의 시기별 전투함 건조 수 비교 반면 같은 기간에 건조된 미국의 신형 전투함은 25%에 불과하다. 그래서 중국 전투함의 평균 선체 연령은 14.9년인데 반해, 미국 전투함은 24.2년으로, 미국이 10년 정도 노후화되어 있다. 특히 잠수함의 경우는 수상함보다 훨씬 더 노후화되어 있는 상태다. 미국이 보유한 69척의 잠수함 중 2027년까지 퇴역하는 10척의 평균 선체연령은 38.2년이고, 2028년에 퇴역하는 4척의 평균 선체연령은 42.5년, 2029년 퇴역하는 1척은 39년이다. (핵추진 잠수함 원자로의 수명주기는 42년이다.) 미국은 신형잠수함 건조를 해군의 최우선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으나, 퇴역과 취역의 균형이 흐트러져 현행 69척에서 42척까지 줄어드는 기간을 피하기 어렵다. 반면 중국은 71척에서 76척으로 늘어나는데, 5척이 모두 핵추진 잠수함이다. 미국은 이를 만회하기 위해, 2021년 9월 바이든 미 대통령이 미국과 영국이 호주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지원한다면서, 오커스(AUKUS)의 창설을 발표했다. (오커스는 핵추진 잠수함과 관련된 필라1과 첨단군사기술 공동개발과 관련된 필라2로 구성된다.) 필라1의 핵심은 ▲ 2030년대 초반부터 미국이 버지니아급 공격형 핵잠수함(SSN) 3~5척을 호주에 판매하고, ▲ 2030년대 말까지 영국이 설계하고 건조한 1척의 공격형 핵잠수함을 호주에 양도하며, ▲ 2040년대 초반까지 영국의 지원으로 호주가 1척의 공격형 핵잠수함을 건조한다는 것이다. 트럼프 행정부로 교체되면서 오커스 계획이 중단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었으나 2025년 12월 4일 트럼프 행정부가 5개월간의 재검토 끝에 오커스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12월 8일 미국-호주 외교-국방 장관급 회의에서는 “호주가 미국의 잠수함 생산 능력 확장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로 10억 달러(약 1조5천억원)를 조만간 제공한다”라고 발표했다. 그렇더라도 오커스가 계획한 일정대로 추진될 수 있을지 여부가 불확실하며, 미국 입장에서 볼 때 상당 기간 전력 공백은 불가피해 보인다. 지난 아펙(APEC) 한미정상회담 다음 날, 10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이 핵추진 잠수함을 건조할 수 있도록 승인했다”고 밝혔는데, 서태평양에서 미국의 군사력 공백이라는 맥락에서 그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또 이는 미국이 일본의 핵추진 잠수함 보유도 지지할 수 있다는 강력한 암시이기도 하다. (2) 중국의 추격이 함의하는 바 이처럼 중국의 급속한 군사적 팽창과 이와 대비되는 미국의 군사적 틈을 고려할 때, 중국의 무력침공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는 시각도 있다. 그 논거를 살펴보자. 첫째, 전통적인 세력전 이론에 따르면 도전국의 해군력이 지배국의 80~120%까지 추격, 추월하는 군사력 전이가 발생했을 때 도전국은 전쟁에서 누가 이길지 불확실하므로 싸워볼 만하다고 판단하고 전쟁에 나선다. 반면 인정투쟁 이론에 따르면 지배국과 도전국의 상대적 격차가 크더라도 자국의 군사력 증강에 고무된 도전국이 선제공격을 시도할 수 있다. 특히 군사력을 추격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을수록 폭력적인 현상타파 욕구가 더 커질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05년 러일전쟁이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해군력을 증강한 1872년 당시 일본의 전투함 총 톤 수는 9,935톤으로 러시아 93,815톤의 1/10 수준이었다. 러일전쟁 직전 1903년 시점까지 일본은 23만여 톤으로 240% 증가했고, 러시아는 53만여 톤으로 78% 증가했다. 1872년에서 1903년까지 일본과 러시아의 절대적 격차는 더 커졌으나, 상대적 격차는 일본이 러시아의 약 19%에서 44%까지 추격했다. 또 러시아 해군은 북방, 발트, 흑태, 태평양, 카스피 5개함대로 구성되었는데, 러시아 태평양함대와 비교할 때 일본 해군이 우위를 점했다. 일본은 제물포, 블라디보스토크, 뤼순에 분산 배치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각개 격파하고 이후 증파될 발트함대를 함대함 결전을 통해 제압하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실제로 러일전쟁의 결과는 일본의 승리였다. 비유를 해보자면, 미국의 해군력이 여전히 압도적인 지표가 많으나 중국은 매우 빠른 속도로 군사력을 추격하고 있고 (어떤 지표에서는 중국이 앞서는 부분도 있다), 미국의 6개 함대는 세계 각지에 분산 배치되어 있다. 둘째, 앞서 CSIS 워게임에서 기본 시나리오의 경우에도 미중 양측은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미국은 전투항공기 270기, 전투함 17척(항공모함 2척과 주요 구축함, 순양함 등), 중국은 전투항공기 155기, 전투함 138척(상륙함 86척). 그렇지만 미국과 중국의 조선업 역량 비교에서 드러나듯이 손실된 전력을 복구하고 투사할 수 있는 회복탄력성(resilence)에서 미국이 오히려 뒤쳐져 중국이 빠른 시일 내에 재침공을 시도할 때, 불균형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3) 소결: ‘전쟁 이하의 강압’이 무력충돌로 번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나? 시진핑 주석이 20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 100주년을 맞아 행한 연설에서 나온 말, “외세가 (중국을) 괴롭히면 머리가 깨져 피 흘릴 것이다”(外勢欺負, 頭破血流; 외세기부 두파혈류)이 두고두고 강한 인상을 남겼다. 시진핑 주석이 중화민족의 부흥과 함께 대만 통일을 역사적 당위로 거듭 공개적으로 천명했기 때문에, 아무런 업적도 남기지 못한다면 감담해야 할 정치적 후과가 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따라서 2027년 21차 당 대회에서 시진핑 주석의 4연임이 결정되기 전에 모종의 행동이 있지 않겠냐는 예측이 따라온다. [%=사진12%] [표] 동중국해에서 중국 해공군과 미국 해군의 활동 비교 2022년을 기점으로 중국 인민해방군(PLA) 전투기와 함정의 동중국해 활동이 대폭 증가하고 있다. 2024년 전투기의 대만 해협 중간선,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 침범 횟수는 각각 2307회와 3705회다. 중국 함정의 대만 해협 중간선 침범도 급증하여, 2024년 2507회에 이르렀다. (자료출처: 김지용, 「중국의 해군력 증강과 대만 침공 가능성 분석」, 《국제지역연구》, 2025년.) 그 모종의 행동은 무엇일까. 2024년 1월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설문조사처럼 무력침공이 아닌 격리나 봉쇄가 될 것인가. 미국 스팀슨 센터가 2025년 9월에 낸 보고서, 『중국의 위협을 다시 생각한다: 왜 중국은 대만을 침공하지 않을 것 같은가』에서도 전면 침공이 아니라 ‘전쟁 미만의 강압’(coercion below war)이 현실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이 제시한 논거는 이렇다. 첫째, 중국 공산당은 군사적 행동의 실현 가능성을 좌우하는 중국 내부의 경제, 인구, 정치 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할 것이다. 먼저 경제 측면을 보면, 무력침공을 개시하면 공산당은 관심과 자원을 경제 문제 해결에서 대규모 군사작전으로 돌려야 한다. 그러나 여러 여론조사를 보면 중국 대중은 대만 통일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지보다 중국의 경제적 실적에 더 큰 관심이 있다. 현재 중국의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고려할 때 무력침공이 야기하는 위험부담은 공산당 통치에 직접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무력침공이 개시되면 대만해협과 말라카해협을 통해 중국 본토를 오가는 해상운송이 취약해진다. (2021년 수에즈운하 6일 봉쇄로 중국은 630억 달러의 GDP 손실을 입었다.) 덧붙여 경제제재와 비공식적 금수조치가 가해질 수 있고, 주요 작물의 수입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식량안보가 위협을 받아 대중의 지지가 취약해질 수 있다. 인구 측면을 보면, 중국은 인구고령화와 가족계획정책의 여파로 전투가능인구(17~35세)가 크게 감소했고, 현재 군인 대부분은 형제자매가 없다. 중국인이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혈통이 군인으로 동원되었다가 전쟁으로 사망하여 단절되는 비극보다 대만 통일이 더 중요하다고 설득할 수 있을까. 젊은층은 호전적 방안보다 평화적 견해를 더 선호한다. 정치 측면을 보면, 만약 무력침공에 의한 통일이 실패한다면 당의 정통성이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다. 단 한 명의 지도자에게 책임을 돌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정통성 문제는 세계 무대에서도 제기될 것인데, 중국의 국제적 평판을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제, 인구, 정치 측면을 고려할 때 전쟁을 막는 요인은 중국 외부가 아니라 중국 내부로부터 나오는 것일 수 있다. 둘째, 설령 중국이 대만을 군사적으로 점령한다고 하더라도 24만 명이 아니라 2,400만 명의 대만 주민이 남아 있다. 막대한 규모의 민간인 사상과 대만 기반시설 파괴는 중국의 대만 통치를 어렵게 할 것이다. ‘상처 뿐인 승리’를 한 중국은 군사적 공격을 받고 식량, 에너지, 디지털 기반시설을 박탈당한 2,400만 명의 대만인을 통치하는 데 극히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셋째, 중국공산당은 미국과의 갈등이 핵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 넷째, 대만의 지리적 현실을 보면 대만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작전은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복잡한 군사작전이 될 것이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이 대만해협을 건너 해안교두보를 확보하는 것만도 엄청난 난관이다. 그 다음 험준한 지형을 가로지르는 지상작전을 수행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대만은 중부산맥이 섬 전체 면적의 60%를 차지한다. 따라서 중국이 정치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시간 내에 대만을 점령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과거 사례를 보면,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일본 본토 침공을 위해 대만(포르모사)를 장악하는 ‘코즈웨이 작전’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작전상의 어려움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결국 포기하고 다른 목표물로 대체했다. 스팀슨 센터의 보고서는 중국 지도자들이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감당할 의향이 있다면 어쩌면 군사적 도전은 결국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핵과 정치 경제적 비용이라는 측면만 보더라도 무력침공은 비현실적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중국이 취할 수 있는 ‘전쟁 미만의 강압’은 무엇인가. ▲ 수출통제: 행정적인 방식을 통한 대만의 수출입에 대한 금지 또는 제한. 대만으로의 운송 지연을 노린 세관과 해상 법 집행. 중국 기업의 대(對)대만 핵심 품목 수출이나 투자 제한. (핵심 품목을 집적회로, 석탄, 원유로 단계적으로 확대.) 대만의 대중국 수출 차단. (농산물, 정제 구리, 니켈.) ▲ 해상격리/봉쇄: 외곽섬 해상 격리와 나아가 강력한 봉쇄. 대만 국제무역의 일부 또는 대부분 차단. 물·에너지·금융서비스 등 핵심기반시설에 대한 사이버공격, 해저케이블 공격. 대만 정치지도자와 국민에게 심리적 충격을 가하고, 대만이 해상 격리나 봉쇄를 뚫거나 해저케이블 근처에서 활동하는 의심스러운 중국 선박에 대응하기 위해 ‘선제공격’을 가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 징벌적 타격/작전: 봉쇄보다는 긴장을 고조시킬 수 있으나 전면침공보다는 수위가 낮은 조치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만 공군, 해군을 국제해역으로 유인하여 교전을 유도할 수 있다. 대만의 방공망이나 정치적으로 상징적인 목표물, 에너지 시설, 통신기반 시설을 겨냥한 공습을 단행할 수 있다. 외곽섬 하나 이상을 강제적으로 점령할 수 있다. ▲ 쿠데타/쿠드망(coup de main, 기습공격): 이 역시 강압외교보다는 현실성이 낮지만 전면적인 상륙작전보다는 현실적인 시나리오다. 중국 특수부대는 대만 정부청사를 장악하고 최고지도자를 생포하기 위한 작전을 시도하고, (실제든 상상이든) 대만 내 중국 지지자들의 쿠데타를 유도하고자 할 수 있다. 이는 여러모로 1968년 북한의 청와대 습격(이른바 ‘김신조 부대 사건’)과 유사할 수 있다. 스팀슨 센터의 보고서는 전면적인 무력침공보다는 더 개연성이 높은 분쟁 시나리오에 입각한 군사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주 빠른 시일 내에, 또는 다른 모든 ‘전쟁 미만의 강압’ 수단이 소진되기 전에 중국의 전면적 침공을 예상하기 어렵다는 잠정적 판단을 우리가 수용한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검토를 통해 몇 가지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시진핑 시대 중국의 급격한 군사력 증강과 중국이 (대만을 포함하여) 주변국에 행사하고 있는 ‘전쟁이 아닌’ 강압 캠페인은 밀접한 상호관계가 있다. 이를 두고 얼마 전까지는 ‘회색지대 전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또 중국 해군, 공군이 대만해협 중간선, 대만 방공식별구역(ADIZ)에서 과거와 달리 공격적인 행동방식을 보이는 모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둘째, 따라서 중국이 당장 즉각적인 전면 침공은 아니더라도 다양한 수준에서 전개될 수 있는 강압 캠페인의 수위를 앞으로 점점 더 높일 수 있다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은 2024년부터 금문도와 마조도 해역에서 자유롭게 법 집행과 순찰을 실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고, 그 후 이 섬들을 완전히 자국 영해에 통합하기 위해 법 집행, 군사, 경제, 법률 등 다양한 수단을 이미 동원하고 있다. 셋째, 이러한 중국의 강압 캠페인이 군사적 충돌의 불씨가 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있는가. 예들 들어 중국이 대만의 외곽섬을 군사적으로 봉쇄하거나 점령하려고 한다면, 대만이 이를 포기하지 않을 때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고 또 격화될 수 있고, 미국이 중국의 행동을 전쟁행위로 해석하여 개입할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 따라서 여전히 높은 긴장을 이어가고 있는 대만해협과 미중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필자는 2021년 대만 문제를 보는 기본 관점을 이렇게 쓴 바 있다. “대만에서 전개된 민주화와 사회경제적 개혁 요구는 궁극적으로 대만이 주권적 실체로 남아 있어야만 계속 진전할 수 있다. 대만이 주권적 실체가 아니라면, 주권이 외부에 종속된다면 시민들의 변화 요구를 직접적으로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민주주의와 주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2014년, 2019년 홍콩 시위를 보며, 중국이 말하는 일국양제가 대만인이 기대하는 수준의 민주주의와 주권에 대한 요구를 반영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직접적인 대만 독립선언은 아니더라도, 주권적 실체로서 대만의 지위를 지키려는 사회 저변의 흐름은 앞으로도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회운동의 관점에서 보면, 홍콩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흐름을 지지한다고 할 때, 대만에서 주권적 실체를 지키며 지속해서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사회운동의 흐름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또한 만약 이러한 흐름에 중국이 군사적 위협을 가한다면, 그러한 위협을 강하게 비판하지 않을 이유도 없을 것이다.” 여전히 이런 관점은 유효할 것이다. [박스기사] CSIS 워게임의 권고안 물론 CSIS 워게임은 중국의 선제공격이나 그 후 대응과정에서 겪는 타격을 줄이기 위한 정책권고도 빼놓지 않는다. 이를 도출하기 위해 먼저 보고서는 표준 시나리오와 변형 시나리오 간 차이를 낳는 변수 각각이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이를 그림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13%] 위에서 언급한 대만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나, 전투에 영향을 미치는 변수의 중요도를 고려하여 보고서는 정치·전략, 교리와 태세, 무기와 플랫폼 분야별로 다음과 같은 권고안을 제시한다. ■ 정치·전략 - 일본과의 외교 군사적 관계를 심화하는 데 우선권을 부여해야 한다. - 전쟁계획을 명확히 수립해야 한다: 군사계획은 위기상황에서 미국이 다른 국가의 영토에 연안작전 해병연대(MLR)나 육군 다영역작전부대(MDTF)를 미리 배치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듯하다. 그러나 호주와 일본을 제외하면 다른 국가는 미중 전쟁에 연루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중국은 미중이 발표한 세 번의 공동성명에 따라 대만 내 미군 주둔을 인정하지 않고 격렬하게 반응할 것이다. 따라서 미국 정부는 위기가 발생하기 전에 이에 관한 명확한 내부 합의를 도출해야 한다. - 대규모 사상자가 발생해도 작전을 지속할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절정기에 미국은 하루에 3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번 사례에서는 기본 시나리오의 경우 하루 140명이다. 2차 세계대전 때 300명이었다. 평화로운 환경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상황에 가까운 위험을 내포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 중국 본토를 타격하는 계획을 세우지 마라: 중국 본토에 대한 광범위한 공격은 핵전쟁의 위험을 고조시킨다. 기본 시나리오에서는 대만 공격에 직접 관련되는 항구와 공항에 대한 공격에 한정했다. - 대만 지상군을 강화해야 한다. 대만 해군과 공군은 비대칭전을 향해 전환해야 한다: 중국의 로켓, 공군, 해군의 힘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대만이 광범위한 대칭 능력을 유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고슴도치 전략’의 가치는 워게임에서 입증되었다. 예를 들어, 해안방어 순항미사일, 이동식 지대공미사일, 기뢰는 중국의 봉쇄에 대응하는 데 효과적이다. ■ 교리와 태세 - 일본과 괌의 공군기지 역량을 요새화하고 확대해야 한다. - 미 공군의 지상에서의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해 교리와 조달을 재구조화해야 한다. - 중국 본토 상공을 비행할 계획을 세우지 말아야 한다. - 연안작전 해병연대(MLR)나 육군 다영역작전부대(MDTF)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들 수의 제한을 두어야 한다. - 위기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전방배치는 취약성을 창출하므로 회피해야 한다: 전략가인 토마스 셀링이 말했듯이 “훌륭한 억지력은 훌륭한 표적이 될 수 있다.” 1941년 초, 미국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태평양 함대의 본거지를 하와이로 옮겼으나 그 결과는 비극적이었다. 마찬가지로, 중국과의 대결에서 미국의 전진배치는 중국의 선제공격을 유혹할 수 있다. ■ 무기와 플랫폼 - 더 작고, 더 생존가능한 함선으로 바꾸어야 한다. 불능상태가 된 함선과 다수의 침몰자를 구하기 위한 구조 메커니즘을 개발해야 한다. - 잠수함과 여타 해저 플랫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 원거리 대함무기 비축량을 충분히 조달해야 한다. - 극초음속 무기의 개발과 배치를 지속해야 하지만, 그것은 틈새 기능을 할 뿐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극초음속 무기는 비싸고 다수의 순항미사일을 대체할 수 없다. - 전투기보다 폭격기 부대를 우선 유지해야 한다. 즉,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권고안은 미일동맹의 강화, 대만군의 비대칭전력(고슴도치 전략) 전환에 초점을 맞춘다. 2. 중국의 핵무력 증강과 핵경쟁·핵전쟁의 위험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가 미중 워게임 보고서를 내고 난 얼마 후, 2023년 4월 18일, 《워싱턴 포스트》에는 “미중 경쟁, 실존 위험은 핵전쟁”이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다. “(공화당) 매파 정치인이나 미국의 대중 모두 핵전쟁 가능성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며 특히 “최악의 상황을 상정한 시나리오 역시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주장했다.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워게임도 핵무기 사용은 배제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국의 대만 침공이 핵전쟁으로 확전될 수 있을지, 그렇다면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누구라도 심각하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문제다. 먼저 중국의 급속한 핵무기 보유량 증대와 현대화 프로그램 문제부터 살펴보고, 그 다음 미국의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도 검토한다. 그 다음으로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핵전쟁 워게임 보고서의 제목 ‘아마겟돈’(종말의 날)에 담긴 뜻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1) 중국의 급속한 핵무기 보유량 증대와 현대화 프로그램 [%=사진14%] [표] 중국의 핵전력 (자료출처: 《핵과학자회보》) 《핵과학자회보》의 “중국의 핵무기, 2025”는 중국이 “9개 핵보유국 중 가장 빠르게 핵무기를 증강하고 있는 국가”이며 “핵확산금지조약(NPT) 당사국 중 유일하게 핵무기 보유량을 상당히 늘리고 있는 국가”라고 평가했다. 위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핵무기(핵탄두) 보유고는 2010년대 중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하여 2020년대에 급팽창했다. 그렇다면 2025년 현재 중국의 핵무기 보유고는 얼마나 될까. 《핵과학자회보》는 “중국의 핵전력 추정치는 핵 관련 정보 투명성이 높은 국가(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확실성이 더 크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2025년 중국의 핵탄두 수를 600개, 발사장치의 수를 804개(지상발사 탄도미사일 712기, 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 72기, 폭격기 20기)로 추정했다. 그 중에서도 최근 두드러지는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을 짚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중국은 2020~21년부터 간쑤성, 신장 동부, 내몽골에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용 대규모 격납고를 새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어떤 ICBM 기지보다 중국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해 있으며, 미국 순항미사일의 사정권 밖이다. 그리고 ICBM 연료를 액체에서 고체 기반으로 전환하여, 즉각적인 보복 능력을 높이고자 한다. 간쑤성, 신장 동부, 내몽골에 있는 320개의 격납고에다가 DF-5 용도의 48개 격납고를 합치면 현재 러시아가 운용하는 격납고 기반 ICBM 수를 넘어서며, 미국의 전체 ICBM 전력의 3/4에 해당한다. [%=사진15%] [그림] 중국의 대륙간탄도미사일 격납고 위치 왼쪽 상단부터 오른쪽 순으로 하미, 위먼, 위린이다. 중국은 2020~21년 이 세 곳에 대륙간탄도미사일 격납고를 새로 건설하기 시작했다. 간쑤성에 위치한 위먼은 2020년 3월 건설되기 시작했으며 격납고 개수는 120개다. 신장 동부 지역에 위치한 하미는 2021년 3월 건설되기 시작했고 격납고 개수는 110개다. 마지막으로 오르도스(내몽골) 지역에 위치한 위린은 격납고 90개 규모로 2021년 4~5월 건설되기 시작했다. 둘째, 괌과 동북아시아의 주요 미군기지(일본과 한국)는 물론, 러시아의 상당 부분과 인도 전역을 목표로 삼을 수 있는 중거리 미사일(DF-26)의 발사장치 수를 크게 늘렸다. DF-26의 사정거리는 4,000km다. 2018년 이후 DF-26 발사장치의 수는 18대에서 250대로 늘었고, 2024년 이후로 500대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런데 DF-26은 재래식 탄두와 핵탄두, 양자 모두 탑재할 수 있다. 이러한 이중역할 수행능력은 위기상황에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재래식 탄두를 탑재한 DF-26 발사 준비나 실제 발사는 핵무기 발사로 오인되어 상대편의 핵 보복이나 선제공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과 핵추진 잠수함 전력을 확대하고자 한다. 기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 JL-2를 대체하여 사거리가 1만km에 달하는 JL-3을 사용하면 중국 북부 해역에서 미국 북서부 지역을 타격할 수 있으며, JL-2와 달리 JL-3는 미사일 한 발당 다수의 탄두를 탑재할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중국은 094급을 대체하는 096급 핵추진 탄도미사일잠수함(SSBN)을 개발, 배치할 것으로 보인다. 넷째, 2018년 이후로 중국 공군은 전략폭격기의 개량, 개발을 진행 중이다. (로켓 전력이 향상되고 구형 중거리 폭격기가 핵전쟁 발생 시 효과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커지면서 중군 공군의 핵 임무는 2018년까지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다.) 현용 장거리폭격기를 개량한 H-6N은 최근 공중발사탄도미사일(ALBM)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특히 H-6N은 공중급유 능력이 추가되어 작전범위가 크게 늘어났다. 장기적으로 중국은 비행거리 10,000km 이상의 신형 H-20 스텔스 폭격기를 개발하여 H-6을 대체할 계획이다. 이로써 중국은 대륙간탄도미사일(지상기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해중기반), 전략폭격기(공중기반)로 구성되는 ‘핵전력 삼축체계’(nuclear triad)를 구축함으로써 핵무기 현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덧붙여 중국은 최근 수년간 신장위구르자치구에 있는 로프누르 핵실험장을 확장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지하 핵실험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중국이 지하 핵실험을 실제로 실행한다면 서명은 했으나 비준은 하지 않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에 따른 책임을 위반하는 일이 될 것이다. 2) 중국의 핵무기 보유, 앞으로는 얼마나 늘어날까 미 국방부의 2024년 보고서는 중국의 핵탄두 보유량이 2030년까지 1,000개를 넘어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에 앞서 미 국방부의 2022년 보고서는 2035년까지 약 1,5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할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사진16%] [그림] 중국의 핵보유고 예측 중국의 핵무기 비축량 증가 예측은 새롭게 건설되는 고체연료 대륙간탄도미사일용 격납고가 어떤 미사일로, 얼마나 채워지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출처: 미국과학자연맹) 그런데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중국의 신규 핵탄두 증가율을 적용했을 때 2030년 1,000개, 2035년 1,500개라는 수치가 나온다. 《핵과학자회보》는 이러한 예측에는 여러 불확실한 요소가 걸려 있다고 말한다. 즉, 중국은 ▲ 최종적으로 얼마나 많은 미사일 격납고를 건설할 것인가? ▲ 건설한 미사일 격납고 중에 얼마나 많이 실제 미사일을 채울 것인가? ▲ 각 미사일은 몇 개의 탄두를 탑재할 것인가? ▲ DF-26 중거리 탄도 미사일은 총 몇 대가 배치될 것이며, 그 중 몇 대가 핵탄두 탑재 임무를 수행할 것인가? ▲ 중국은 몇 척의 탄도미사일 잠수함을 배치할 것이며, 각 미사일은 몇 개의 탄두를 탑재할 것인가? ▲ 중국이 운용할 폭격기의 수와 각 폭격기가 탑재할 핵무기의 수는 얼마나 될까? ▲ 중국은 얼마나 핵분열성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국이 위먼(간쑤성), 하미(신장 동부), 위린(내몽골) 3개 지대에 새로 건설한 대륙간탄도미사일 격납고 총 320개를 2035년까지 3탄두 미사일로 꽉 채울 경우, 2035년 중국이 보유하게 될 핵탄두의 수를 1,500개로 예측한다. 만약 격납고 중 절반 즉 160개를 1탄두 미사일로 채울 경우는 800개 미만으로 예측한다. 앞으로, 중국의 핵 관련 정보를 앞으로 좀 더 폭넓게 수집한다면, 예측치도 좀 더 정확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3) 중국의 핵전력 증강 의도는 무엇인가: 핵무기 선제사용 옵션의 보유인가? 그렇다면 중국이 이처럼 2010년대 중반 이후 핵전력을 급격하게 팽창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곧 소개할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핵전쟁 워게임 보고서는 네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첫째, 중국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2차타격(second-strike) 능력을 유지하고자 한다. 2차타격 능력이란 적국으로부터 핵공격을 받은 후, 신속하게 핵으로 보복공격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중국은 미국의 정보·감시·정찰(ISR), 재래식 타격, 미사일방어 능력이 향상되면서, 중국의 2차타격 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되고 있다고 인식한다. 둘째, 중국의 강대국 지위와 시진핑 주석이 말하는 ‘신형 대국관계’를 뒷받침하려는 목적이 있다. 시 주석은 2015년 (제2포병부대에서 개편된) 인민해방군 로켓군(PLARF) 창설식에서 이 부대가 “우리나라의 강대국 지위를 뒷받침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켓군은 핵탄두를 포함하여 탄도미사일과 전술미사일을 운용한다.) 셋째, 대만 위급 상황에서 미국의 전술핵 사용을 억제하기 위한 것일 수 있다. 중국 지도부와 전략가들은 대만 분쟁 상황에서 전술핵 옵션을 검토하는 미국 내 논의가 늘어나고 있다고 인식한다. 하지만 미국의 분석가들은 역으로 질문한다. 중국은 첨단 핵기술을 보유하면, 대만 분쟁에서 미국의 개입을 억제하면서도 재래식 공격을 펼칠 수 있다고 믿는가? 넷째, 핵정책을 결정하는 중국 내 관료정치에 변화가 있었다. 전통적인 핵정책 전문가 집단에 비해 군부가 정책결정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커졌다. 시 주석은 핵 현대화를 막던 모든 제약을 없애며, 군부가 신속하게 핵 개발을 달성할 수 있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했다. 이는 군부 외부의 감시를 어렵게 했다. 게다가 중국 군부의 핵 개발은 상당 부분 대만 해협의 위기상황을 염두에 둔 것인데, 이는 미중 관계에 큰 함의를 지닌다. 한편 이와는 다른 각도의 분석도 있다. 협소한 군사적 관점이 아니라 지정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중국이 급속한 핵 증강이 추구하는 진정한 목적은 ‘아시아에서 미국 동맹 시스템의 해체’라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중국은 남중국해, 동중국해에서 회색지대 전략, 또는 ‘전쟁이 아닌’ 강압 캠페인을 동시다발적으로 펼치고 있다. 그 궁극적인 목적은 중국이 대륙적 고립을 피하고 태평양에서 미국의 동맹 시스템을 약화하거나 해소하는 것이다. 중국은 점점 더 정교해지는 핵무기가 파국적인 강대국 전쟁을 촉발하지 않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더 많은 지렛대를 제공한다고 본다. 실제로 중국의 군사이론가들은 현대적 핵무기를 두고, 지역사안에 외부의 개입을 막는 ‘카드’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다. 그들은 러시아의 핵 강압/핵협박(nuclear coercion) 때문에 나토가 우크라이나에 깊이 개입할 수 없었다고 보고, 중국의 핵무기도 비슷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따라서 중국이 핵타격능력을 점점 더 강화한다면, 미국과 동맹국들 사이의 틈을 파고들기 위해 ‘핵 선제 불사용’ 정책을 폐기하고 싶은 유혹을 점점 더 강하게 느낄 것이다. 《핵과학자회보》의 결론은 신중하다. “중국은 공식적으로 ‘핵 선제 불사용’ 정책을 유지하고 있으나, 어떤 경우에 중국이 핵 사용 명령을 내릴지는 불확실성과 모호함이 존재한다”. 그런데 《핵과학자회보》 역시 중국의 핵전력 현대화가 중국의 핵전략과 핵정책에 점진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동중국해와 남중국해, 대만에서 미국의 개입을 제한하는 ‘반개입’ 전략으로서 ‘핵무기’를 지렛대로 활용할 것이냐는 질문을 낳는다고 말한다. “구체적인 레드라인이 무엇이든 간에, 중국의 핵 선제 불사용 정책은 높은 문턱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지도부가 비핵 전력의 현대화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이 정책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시사한다.” “많은 전문가는 미국과 같은 군사 강대국과의 재래식 충돌에서 중국이 선제 핵공격을 통해 전략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시나리오는 극히 드물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대만을 둘러싼 군사적 충돌과 같이 이해관계가 중대한 상황에서는 중국과 미국 모두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선제공격을 포함한 핵무기 사용 옵션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미국의 핵전력 현황 이제 미국의 핵전력 현황을 보자. 아래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 미국이 보유한 핵탄두 수는 냉전 시대에 비하면 훨씬 적고, 2000년대 이후로도 감축이 있었지만, 2007년 이후의 감축 규모는 상대적으로 적다. 2017년 이후로는 거의 비슷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다. 2025년 1월 현재, 미국은 탄도미사일과 항공기에 탑재할 수 있는 핵탄두를 약 3,700개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보유한 핵탄두 다수는 실전 배치된 상태가 아니라 필요에 따라 미사일과 항공기에 탑재할 수 있도록 보관되어 있다. 현재 실전 배치된 핵탄두는 약 1,770개로 추산된다. 나머지 1,930개의 핵탄두는 기술적으로, 또는 지정학적으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비하여 이른바 ‘헷지’ 차원에서 보관 중이다. [%=사진17%] [그림] 1945~2024년 미국의 핵 보유량 2024년 7월 23일 미국 에너지부 산하 국가핵안보국(NNSA)이 발표한 기밀해제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이 2023년 9월을 기준으로 보유한 핵탄두는 3,748개다. 이는 핵무기 보유량이 정점에 달했던 1967년 말의 3만1,255개보다는 88% 감소한 규모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천명하고 재임기인 2009년부터 2017년 사이 핵무기 비축량을 공개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7년 취임 후 핵무기 보유량을 다시 기밀로 지정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첫 해에 오바마 행정부의 정책 기조를 따랐으나 2021년부터 2023까지는 공개 요청을 거부했다. 2024년 3,708개는 미국 과학자연맹의 추정치다. (자료출처: 미국과학자연맹) [%=사진18%] [표] 미국의 핵전력 DCA는 이중용도 항공기, LGM는 격납고 발사 지상공격 미사일, MIRV는 다탄두 각개목표설정 재돌입비행체, SERV는 안전강화형 재진입비행체를 뜻한다. 총 재고 5,177기는 총 보유량 3,700기에 해체 예정인 1,477기를 더한 것이다. (자료출처: 《핵과학자회보》) 미국의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은 ① 3대 핵전력의 고도화: △LGM-35A 센티넬 대륙간탄도미사일, △B-21 레이더 스텔스 폭격기, △콜롬비아급 잠수함 ② NC3(핵 지휘·통제·통신) 업그레이드, ③ 핵탄두 성능개량, ④ 핵무기 생산 인프라 개선으로 구성된다. 덧붙여 2026년 예산요구안을 보면 트럼프 행정부가 주안점을 두는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엿볼 수 있다. 특히 ▲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핵심 전략핵탄두 W93 개발 예산, ▲ (전술핵무기로 분류될 수 있는) 지하침투형 핵 중력폭탄 B-61-13 생산 예산, ▲ (역시 전술핵무기로 분류될 수 있는) 해상발사 핵순항미사일(SLCM-N) 개발 예산이 크게 늘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B-61-13, SLCM-N은 실전에서 사용가능한 핵무기를 추구하기 때문이다. 5) 대만을 무대로 미중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핵전쟁 워게임 중국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서, 특히 대만에서 강압을 위한 지렛대로서 핵무기를 활용한다는 사고가 점점 더 공공연해지고, 미국이 사용가능성을 고려하는 핵무기 개발, 생산을 이어간다면 정말로 우리는 핵전쟁의 발발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전략국제문제연구소의 2023년 1월 워게임 보고서가 핵무기 사용을 배제했기 때문에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의식했는지, 보고서의 저자들은 2년이 지나기 전인 2024년 12월 미중 핵전쟁 워게임을 다룬 보고서를 발표했다. 제목은 『아마겟돈에 직면하다: 워게임을 통해 드러난 대만 미중 충돌의 핵억지와 그 실패』 였다. 2023년 보고서와 달리, 어떤 이유에서인지 2024년 보고서는 국내 언론에 별로 소개되지 않았다. 워게임의 기본가정은 2023년에서 가져왔다. 중국이 30일 전에 동원에 착수하고, 미국은 그로부터 15일에 대응을 시작하고, 일본은 공격을 받지 않은 한 중립을 유지하되 미국이 일본 내 기지를 사용하는 것을 허용하고, 다른 적대세력이 기회주의적 공격을 하지 않는다. 다만 공격 연도는 2028년이다. 이전 프로젝트와 마찬가지로 85명의 게임 참가자들은 정부, 싱크탱크, 학계, 군 출신의 전문가였고, 워게임은 총 15회 진행되었다. 참가자들은 각각 미국, 일본, 중국팀에 속했는데, 가급적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작전목표를 달성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목표달성에 실패할 경우 국가적, 개인적 후과가 따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각 팀은 핵 태세, 핵무기 사용, 정치적 출구전략에 관한 최종결정권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국가지휘기구에 권고를 제시할 수 있었다. 통제팀이 국가지휘기구 역할을 하여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통제팀은 가능한 한 많은 경로를 탐색하기 위해 각 팀이 제안한 권고를 모두 수용했다고 한다. 15회에 걸친 워게임의 핵 사용을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사진19%] 핵공격의 유형은 목표물에 따라 ▲ 상대방의 도시·인구·인프라를 표적으로 삼는 ‘대(對)가치’ (countervalue) 공격, ▲ 상대방의 핵전력을 표적으로 삼는 ‘대(對)전력’(counterforce) 공격, ▲ 항만과 공군 기지, 지상군, 해상 함정 등을 표적으로 삼는, ‘작전 중인 재래식 전력’(operational conventional target) 공격으로 나눌 수 있다. 또 특수한 경우로 ▲ 상대방의 지휘통신망을 표적으로 삼는 고고도 전자기 펄스(HEMP) 공격이나 ▲ 비핵동맹국에 대한 공격도 있다. 필자는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대가치 공격을 ‘도시인구 공격’으로, 대전력 공격을 ‘핵전력 공격’으로 옮겼다. 결과를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총 15회의 워게임 중에서 핵무기가 사용된 경우가 10회, 사용되지 않은 경우가 5회다. -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결과는 중국의 단계적 철수 3회, 휴전 후 대만 내 중국의 영토 확보 1회, 미결 1회다. -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때 미국에 유리한 결과가 많은데, 2023년 워게임이 대체로, 초반에 중국이 기습공격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이 승기를 잡는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유일한 ‘휴전 후 중국의 대만 영토 확보’ 사례는 7회차로, 미국이 초반 손실에 충격을 받고 개전 1주일 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② 핵무기를 사용한 10회 중 중국이 선제사용한 경우가 9회, 미국이 선제사용한 경우가 1회다. - 미국이 선제사용한 단 한 번의 경우는 6회차로, 미국 팀이 초반 손실에 충격을 받고, ‘부활을 위한 도박’의 방편으로 중국의 핵전력을 공격대상으로 삼았다. 그렇더라도 이로 인해 중국에서 최소 1천만 명의 즉각적인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고, 방사선과 기타 원인으로 수 배에 달하는 추가 사망자도 생길 것이다. 미국 팀은 이로써 중국의 핵보복 능력과 의지를 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으나, 중국은 핵보복을 가해 미국에서도 수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결과 미국이 대만 내 중국의 영토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③ 중국이 핵무기를 선제사용한 9회 중에서 대만(경우에 따라 하와이 앞바다, 일본, 태평양)의 재래식전력을 목표로 삼은 경우가 6회, 고고도 전자기 펄스(HEMP) 공격으로 시작한 경우가 3회다. - 중국의 HEMP 공격은 전쟁 극초반이나, 중국이 위기상황이라고 판단한 후 이뤄졌다. 미국은 HEMP 공격을 받더라도 아무 대응을 하지 않거나, 동일하게 HEMP 공격을 가하거나, 재래식 작전을 계속했다. 따라서 HEMP 공격은 분쟁을 핵확전이나 출구로 몰고가는 데 중대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시나리오 4의 경우, 중국이 HEMP 공격 이후, 또 다시 대만 재래식전력에 대한 핵공격을 가했기 때문에 사태가 대화염으로 이어졌다.) ④ 결론적으로, 15회의 워게임 중 핵전쟁이 개시되는 가장 다수의 사례는 중국이 대만의 재래식전력을 목표물로 삼아 선제 핵공격을 가하는 여섯 번의 경우다. (시나리오 4도 포함한다면 일곱 번이다.) - 왜 그런가: 2023년 워게임 결과, 초반에 중국이 기습공격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이 승기를 잡는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중국팀 쪽이 ‘부활을 위한 도박’으로 핵무기 사용 옵션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 그렇다면 중국은 무엇을 목표물로 삼는가: 도시인구나 핵전력을 목표물로 삼기보다는, 재래식전력을 목표물로 삼았다. 재래식전력 중에서도 대만 지상군을 목표물로 삼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해상전력은 한 차례(10회차)뿐이었고, 일본을 목표로 삼은 경우도 한 차례(11회차)였다. 도시인구에 대한 공격에는 금기가 존재하고, 미국 핵전력에 대한 공격은 그 대상과 수단이 마땅치 않다. 해상전력은 이미 개전 초기에 대부분 파괴되었을 것이고, 남은 해상전력을 핵무기로 파괴하려면 정밀도가 매우 높아야 한다. 일본 군사기지에 대한 핵공격은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를 낳을 것이며 즉각적 핵보복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지만 대만 지상군에 대한 공격도 다수의 사상자를 낳는다. 대만 지상군에 대한 핵공격에 따른 군인 사상자는 17개 대대, 약 1만7천 명이고, 대만의 지형을 고려할 때 민간인 사망자는 8~35만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 중국의 핵공격 후 미국은 어떻게 대응했고, 어떤 결과를 낳았나: 핵으로 대응하지 않은 경우가 3회, 핵으로 대응한 경우가 3회였다. 먼저 핵으로 대응하지 않은 경우를 보면, 두 번은 즉각 또는 얼마간 재래식전쟁을 이어나간 후 철수했고, 대만 내 중국의 영토를 인정했다(9회차와 13회차). 또 한 번은 중국의 조기경보체계에 재래식공격을 가했으나 그러나 결국 전략핵교환, 대화염으로 이어졌다(10회차). 핵으로 대응한 경우를 보면, 2회차에서는 중국이 대만을 핵공격한 후 일본에 대해서도 핵공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하자 미국이 중국의 도시인구를 공격하는 식으로 대응했고, 전면적인 전략핵교환, 대화염이 발생했다. 5회차에서는 미국이 대만 내 중국의 상륙거점을 핵무기로 보복공격했고, 전쟁 이전 상태로 전쟁이 종결되었다. 물론 이는 대만의 막대한 피해를 수반했다. 11회차에서는 미국이 중국의 핵전력을 공격했고, 중국은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다시 공격하여 양국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중국이 대만 내 영토를 확보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보고서의 저자들이 말한 것처럼, 핵전쟁의 전개 양상을 탐구하기 위해 통제팀은 참가팀들이 제안한 권고를 모두 수용하여 가능한 한 핵전쟁의 다양한 경로를 탐색했다고 했다. 하지만 핵공격이 동반되는 ‘다양한 경로’는 사실 모두 엄청난 사망자와 막대한 피해를 동반했다. 그렇다면 보고서의 저자들은 어떤 결론을 도출하는가. “핵전쟁은 신뢰할 수 있는 방식으로 통제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핵 선제사용은 ‘부활을 위한 도박’의 방편으로 사용되었으나 진정 도박이었다. 어떤 경우는 도박이 성공했으나 다른 경우는 다른 어떤 결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끔찍한 파국이었다. “핵무기의 사용은 처음으로 핵무기를 사용한 팀조차 놀라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상대방의 행동을 추동할 것이라고 믿었던 요소는 작동하지 않았고, 개별 행위자의 신념과 배경이 상황의 구조만큼이나 결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적 요인은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또, “중국-대만 문제와 핵 문제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참여한 세 번의 워게임조차 [그들의 계산과 달리] 수억 명이 사망하는 전면적인 핵교환, 대화염으로 끝났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필자는 저자들의 결론을 ‘워게임 결과로부터 승리하는 핵전쟁의 일반적인 도식을 도출하려 하지 마라’라고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워게임 결과를 두고 ‘이런 조건에서 저런 방식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면 승리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보고서의 제목에 ‘아마겟돈(종말의 날)에 직면하다’, ‘핵억지의 실패’라는 표현이 들어간 것일 테다. 또한, 저자들은 핵전쟁이란 조건에서 ▲ (무력충돌이 벌어진다면) 완벽한 승리를 추구하며 상대방을 굴욕에 빠뜨리기보다는, 그래서 상대방이 핵공격을 감행할 극단적 상황을 연출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체면을 살려주고 일정하게 양보도 고려하는 ‘출구전략’을 항상 준비해야 하며, ▲ (무력충돌 이전부터) 핵 확전의 예측 불가능성에 관한 상호이해를 증진하기 위해 상대방과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덧붙여 저자들은 워게임 참가자들이 직면했던 어려움이 미국 핵무기의 양적 우위가 모자라서나, 획기적으로 새로운 핵탄두 투발수단(예를 들어 핵순항미사일)이 없어서 발생한 것이 전혀 아니라는 점도 강조한다. 이는 미국이 추진하는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의 적절성에 대한 의문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저자들이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반핵론자는 아니다. 저자들은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의 ‘과잉’이 더 긴요한 군사안보 프로그램의 공백을 야기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6) 소결: 강대국 간 핵 통제의 부재, 위기로 치닫고 있는 NPT 체제 세계가 점점 더 핵 무정부상태(nuclear anarchy)로 빠져들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중국은 가차없이 핵무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미국과의 핵통제 테이블을 거부한다. 미국과 러시아의 핵통제 협력은 이미 위기에 빠졌고,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핵위협을 반복함으로써 더욱 악화되었다. 미국은 이러한 흐름에 반응하여 핵태세를 수정하고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로서는 핵확산금지조약(NPT)이 무질서상태를 막기 위한 법적으로 구속력 있는 유일한 메커니즘이지만, 핵무기 국가의 행동, 비핵무기 국가의 환멸, 핵프로그램을 구축하려는 일부 국가들(대표적으로 이란. 다른 한편 일본, 한국, 사우디아라비아도 저울질 중이다)의 의도는 NPT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미국-러시아 간 뉴스타트 조약도 2026년 종료 이후 새로 갱신되지 않을 것이 거의 확실하다. 그렇다면 1972년 전략무기제한협정(SALT) 이후 처음으로 미국-러시아 간 핵 경쟁을 규제하는 어떤 협정도 없는 상황이 도래할 것아다. 트럼프 대통령은 두 번째 취임 직후인 2025년 1월 24일, 러시아, 중국과의 핵군축 협상을 두고 “우리는 비핵화(denuclearize)를 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데, 나는 그것이 매우 가능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그 후로도 이와 유사한 발언을 이어갔다. 아펙 정상회담 전인 10월 22일에도 시 주석과 “핵에 관해서도 거래를 맺을 가능성이 있다”며 ‘핵 군축’을 주요 의제로 삼을 수 있다는 뜻도 내비쳤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시 주석과 회담 직전,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다른 나라들(중국, 러시아, 북한)의 핵실험 프로그램 때문에 전쟁부에 우리도 동등한 수준에서 핵무기 실험을 시작하라고 지시했다”라는 글을 갑자기 올려 다시금 세상을 놀라게 했다. 트럼프 대통령, 푸틴 대통령, 시진핑 주석 시대에 미국, 러시아, 중국 간 의미 있는 핵통제/핵군축 대화의 시작을 기대하기가 결코 쉽지 않을 듯하다. 2026년은 11차 NPT 평가회의가 열리는 해이기도 하다. 냉전의 종결 이후, 다시금 핵무기 경쟁이 국제정치의 핵심적 이슈로 부상하고, 심지어 ‘2028년 핵전쟁 시나리오’마저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서 세계 사회운동은 토론과 적극적인 활동의 장을 함께 열어야 할 것이다. ●
다른 한편, 위 그림을 보면 이러한 중국의 군사력 추격, 추월은 특히 시진핑 주석 시기에 집중적으로 달성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 ‘주요 국가 해군력 증가의 누적량’을 보면, 중국의 경우 시진핑 1, 2기에 해당하는 2013~22년, 9년간 증강된 해군력이 1999~2022년 23년 증강된 해군력의 70%를 상회한다. 시진핑 지도부의 해양강국 건설이 허언이 아님이 수치로 드러난다. 또 그림 ‘미국과 중국의 시기별 전투함 건조 척수 비교’를 보면 시진핑 1~3기에 해당되는 2010년부터 2024년간 중국이 가장 많은 신형 전투함을 건조했고, 이들이 전체 전투함의 70%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 지은이: 애니 제이콥슨 출판사: 문학동네 출간일: 2025.3.17. 1. 고조하는 핵 위기 올해 9월, 원폭 80년과 해방 80년을 맞이하여 민주노총이 주최한 “기억을 계승하여 전쟁과 핵무기 없는 미래로!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이하 ‘증언대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알게 된 일본인 대학생 친구가 필자에게 언제부터 핵문제에 관심이 있었냐고 질문했다. 사실 한 번도 생각한 적 없는 질문이라 순간 당황했다. 지금은 너무 자연스럽게 핵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나, 돌이켜보면 핵문제에 관심이 없던 시기가 더 길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의 비극을 몰랐고,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교과서로 배운 필자로선 대화를 통해 언젠가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권 세력에 따라 북한과의 긴장 관계가 심화하기도 했지만, 핵전쟁은 책이나 영화에 나올법한 하나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문재인 정부 초기에는 곧 남북한이 통일될 거라며 철도 주식을 사는 지인도 있었다. 그러던 중 하노이에서 열린 2019년 북미정상회담이 ‘노딜’로 끝나면서 처음으로 북한 핵문제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북한 지도부가 미국의 비핵화 개념인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인정한 상징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 북미 간 관계는 심각하게 경색되었다. 북한은 자의적 판단으로 선제 핵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핵무력 정책을 변경했고, 70년 동안 유지하던 통일안을 폐기하고 남한을 적대국가로 규정했다. 아울러 남한과 일본을 타격할 수 있는 전술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다. 남한이 핵폭탄을 머리 위에 지고 살고 있음을 점차 깨달았다. 한반도 밖으로 시야를 넓히면 핵전쟁 위기가 더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 교리를 개정해, ‘핵보유국의 지원을 받는 비핵보유국’(즉 우크라이나)이 러시아를 공격하면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은 어떤 국가보다도 빠른 속도로 핵탄두를 늘리고 있다. 핵위협의 위험성을 알리는 미국 《핵과학자회보》는 2025년 현재 인류종말까지 89초밖에 남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2. 절멸의 무기로서 핵무기와 핵 억지론 아슬아슬한 국제정세의 현실 속에서 필자는 핵무기의 위험성을 공부하면서 진실로 핵무기를 철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사 안보 자료에 접근할 권한이 없고, 핵무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선동에 둘러싸여 있는 시민들은 핵무기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기 어렵지만,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폭자 1세와 그 영향 아래에 있는 2세의 증언을 통해 핵무기의 비인도성과 절멸성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나가사키를 인류의 마지막 피폭지로 만들기 위해 피폭 경험을 알리고 반핵 평화 여론을 모으고 있다. 올해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에서 열린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피폭 80년을 맞은 지금이야말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과 실상을 계승하고 확산함으로써 핵무기 철폐를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핵무기의 사용을 막고 핵무기를 철폐하기 위해서는 “핵 억지” 교리를 극복하는 것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핵 억지란 어마어마한 핵무기를 가지고 있으면 타국이 자국을 공격할 수 없다는 개념으로, 핵보유국과 핵우산 동맹을 형성한 국가의 안보 정책을 뒷받침하고 있다. 안보 위기가 심화할수록 핵 억지에 기초한 ‘힘에 의한 평화’를 주장하는 여론이 남한에서도 강해지고 있다. 그러나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주장처럼, 어떤 나라도 핵 억지력을 통해 자국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현실에서는 오판이나 오인 등으로 인해 핵무기 사용 직전까지 간 사례가 반복해서 발생했다. 오늘 소개할 책 『24분: 핵전쟁으로 인류가 종말하기까지』(이하 『24분』) 역시 핵무기의 절멸성과 핵 억지의 허구성을 주장한다. 반핵평화운동이 과거 사례를 바탕으로 핵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한다면, 『24분』은 미국 영토로 핵미사일이 발사된 직후의 순간이 어떤 모습일지에 관한 가상의 핵전쟁 시나리오를 그린다. 저자인 애니 제이콥슨은 대통령 자문위원, 각료, 핵무기 공학자, 과학자, 군인, 항공병, 특수요원, 비밀요원, 재난 관리 전문가, 정보 분석가, 공무원 등 수십년에 걸쳐 핵전쟁 시나리오를 연구해온 사람들과의 독점 인터뷰를 진행하여 수집한 기밀 정보를 바탕으로 합법적으로 알 수 있는 정보의 경계선 극단까지 독자를 안내한다. 핵 억지의 실패를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고, 21세기에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어떤 참상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운 우리들에게 경각심과 반핵평화운동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저자는 1부 <빌드업: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에서 핵무기 보유의 역사를 설명하며 오늘날의 국제 정세에서는 언제든 핵 총력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부 <첫 24분>은 북한의 화성-17 ICBM(대륙간탄도미사일)이 미국 안보의 핵심인 워싱턴D.C 펜타곤(미국 국방부 청사)을 향해 발사되고 나서 첫 24분간의 상황을, 3부 <이후의 24분>은 워싱턴D.C 상공에 핵폭탄이 투하되고 24분 동안 벌어지는 일을, 4부 <마지막 24분>은 미국이 북한의 핵폭탄 투하에 공세적으로 보복하는 상황을 포함한 24분을 서술한다. 핵전쟁의 전개 속도가 매우 빠르므로, 시나리오는 초 단위로 전개된다. 불행하게도 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지막 5부 <그 이후>에서는 핵전쟁이 종료된 후 벌어지는 암울한 미래, 즉 수십억 명이 사망하고 ‘핵 겨울’이 찾아온 지구의 모습을 설명한다. 저자의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맞이할 수도 있는 미래를 상상해보자. 3. 책 소개 1부. 빌드업: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1945년 8월과 달리 전체 핵무기 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고, 핵무기의 위력은 더욱 강해졌으며, 핵무기 보유국도 늘었다. 핵무기의 위력을 인지한 미국이 핵무기를 늘려가던 중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자,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보유·개발 경쟁이 가속화되었다. 1952년 미국은 수소폭탄으로 불리는 열핵폭탄을 발명했다. 열핵폭탄은 2단계 초대형 무기로, 핵폭탄 안에 핵폭탄이 들어있는 형태다. 실험을 통해 10.4메가톤의 열핵폭탄(히로시마에 투하한 원자폭탄의 700배 위력)이 섬 하나를 통째로 없앨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열핵폭탄은 수백 기씩, 수천 기씩 쌓여갔다. 1967년 미국의 핵 보유량은 3만 1,255기에 이르렀다. 단 한 기의 핵폭탄만으로 1천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다 보니, 오늘날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은 1960년보다 감소했다. 그러나 여전히 1,770기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고 그중 대다수는 당장이라도 발사할 수 있는 상태다. 전체 탄두의 개수는 5천 기가 넘는다. 러시아는 1,674기의 핵무기를 배치해두었는데, 그중 대다수가 당장이라도 발사할 수 있는 상태다. 게다가 수천 기를 비축하고 있어서 전체 보유량은 미국보다 많다. 현재 핵무기 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파키스탄, 인도, 이스라엘, 북한까지 총 9개국이다. (국제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핵무기 보유국은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중국 등 5개국이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 그다음 전쟁에 대비하여 최소 6억 명을 죽일 수 있는 핵 총력전을 준비했다. 바로 미 육군, 해군, 공군의 핵무기 작전 계획을 통합한 1960년 단일통합작전계획이다. 이는 소련을 상대로 한 선제 핵 공격·총력전 계획으로, 예상 사망자 수치에는 러시아의 동일 수준 반격으로 거의 확실하게 살해당할 약 1억 명의 미국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단일통합작전계획은 작전 계획 ‘아플랜(the Operational Plan, OPLAN)8010-12’로 이어졌는데, 이 계획은 러시아, 중국, 북한, 이란 등 네 개의 식별된 적을 겨냥하는 일단의 계획이다. 워싱턴에서 “소규모 핵전쟁 같은 건 없다”라는 말이 자주 반복되는 이유다. 『24분』은 이런 대량 학살 계획에 토대를 두고 있다. 2부. 첫 24분 이제 본격적으로 저자의 핵전쟁 시나리오와 마주해보자. 북한 시각으로 오전 4시 3분, 북한 평성에서 화성-17 ICBM이 발사된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인 ICBM은 대륙을 가로질러 표적지까지 핵무기를 운반하는 장거리 미사일이다. 화성-17 ICBM은 미국 본토 전역을 타격할 수 있다. 발사 후 10분도 채 되지 않아 미국 국방부 위성 체계의 경보가 울린다. 탄도미사일 발사, 경고! 이 시나리오의 심각성을 이해하려면, ICBM의 이동 속도와 추진 단계를 알아야 한다. ICBM이 막 발명된 1960년, 펜타곤의 수석 과학자 허브 요크의 연구에 따르면, 소련에서 ICBM을 발사하고 미국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26분 40초가 소요된다. 이는 비행-추진 단계(5분)-중간궤도 단계(20분)-종말 단계(100초)로 나뉜다. 첫 단계인 추진 단계는 5분간 지속된다. 미사일이 발사대에서 로켓 모터에 시동을 걸고 우주로 향하는 동력 비행을 마칠 때까지의 시간이다. 동력 비행이 끝나면 보통 800~1,100km 고도에서 탄두가 방출된다. 두 번째 단계인 중간궤도 단계는 20분간 지속된다. 방출된 탄두가 지구 주위로 호를 그리며 우주를 가로지른다. 마지막 단계인 종말 단계는 단 1.6분(100초)이다. 탄두가 지구 대기권에서 다시 들어올 때부터 핵무기가 표적지에서 폭발할 때까지다. 이 시나리오에서 화성-17 ICBM은 발사 후 33분 뒤, 미국의 펜타곤에 떨어진다. 여기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핵전쟁 시 공격에 대응할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는 점이다. 발사 후 3분 15초, 북한이 미국을 향해 공격용 미사일을 발사했음을 보고받은 미국 대통령은 겨우 6분 안에 어떤 핵무기를 발사해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미국의 핵전쟁 전략은 경보 시스템이 핵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기만 해도 미국이 물리적으로 핵 타격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상대국에 핵무기를 발사하는 ‘경보 즉시 발사’ 정책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핵무기 대부분을 발사 태세로 배치해둔 이유다. 하지만 경보 즉시 발사 정책이 정말로 인류에게 지혜로운 정책인지 물어야 한다. 미사일에 핵탄두가 탑재되어 있는지는 탄두가 터지기 전까지 알 수 없다. 상대의 패를 유추하고 자신의 패를 거는 도박과도 같은 불확실성이 핵전쟁을 지배한다. 이성적인 판단 역시 어렵다. 2025년에 개봉한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는 핵 공격이 임박했을 무렵 인간이 얼마나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지 보여준다. 원인 불명의 미사일 한 기가 미국 본토로 향하는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은 보복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항복하거나, 더 강도 높은 대응으로 전면적인 핵전쟁에서 우위를 점해야 한다. 만약 여러분이 대통령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선택은 단 6분 안에 해야 한다. 결국 불확실성과 비이성은 핵전쟁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도박과 달리 핵전쟁은 수십억 명의 목숨을 앗아간다는 점이다. 일단 당장 미사일을 방어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이 군사력 1위인 미국의 미사일 방어 프로그램이 우수하다고 생각하지만, 2017년 미국의 미사일 방어 실험 성공률은 고작 40퍼센트다. 미사일 요격은 “총알로 총알을 맞추는 것과 비슷하다”라고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미국의 요격체는 겨우 44기밖에 없어서 그마저도 아껴 써야 한다. 발사 후 9분 10초, 미국의 요격 미사일이 화성-17 ICBM을 막는 데 실패했다. 영화 <하우스 오브 다이너마이트>에서도 미국은 미사일 방어에 실패한다. 이제 화성-17 ICBM은 중간궤도 단계에 진입했다. 탄두는 위성 센서에 전혀 잡히지 않는 채로 지구 위 어느 지점의 고점으로 향하는 고속 궤도에 올라 날아간다. 이제 대통령이 행동해야 한다. 미국 대통령은 미국의 핵무기를 발사할 권한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으며, 군사 자문위원이나 미국 의회의 동의 없이 핵무기를 발사할 수 있다. 종종 미국 대통령의 핵가방을 다룬 기사를 확인할 수 있듯이, 대통령 옆에 서 있는 군사보좌관은 대통령의 비상 가방인 ‘풋볼’을 들고 있다. 풋볼 안에는 핵 공격 같은 비상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즉시 발효될 수 있는 행정명령과 메시지로 이뤄진 극비 서류가 있다. 그중에 하나는 ‘흑서’로, 사용해야 하는 핵무기, 타격해야 하는 표적지, 그 결과로 추산되는 사상자의 수가 적혀있다. 수십억 명의 목숨이 대통령 개인에게 달려 있고, 그가 언제든 핵무기를 발사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핵무기는 굉장히 위험하다. 우리는 핵전쟁 시 수십억 명의 운명과 인류의 미래가 극소수의 지도자에게 달렸음을 알아야 한다. 지금 당장 핵무기를 발사해야 한다는 전략사령본부 지휘관의 압박 속에서 갈등하는 사이 대통령은 비밀경호국의 특수 전술 부대원들에 이끌려 대통령 전용 헬리콥터인 마린 원을 타고 워싱턴DC 외부의 안전한 장소로 대피한다. 발사 후 16분, 저자는 북한의 두 번째 공격을 가정한다. 이는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탄도미사일인 SLBM 공격이다. 실제로 북한의 SLBM 개발 성공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저자는 2021년 북한이 일본 연안의 공해상으로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일 가능성이 높은 무언가를 발사한 사실을 바탕으로 북한의 SLBM 공격을 가정한다. ICBM의 별명이 ‘괴물’이라면, SLBM의 별명은 ‘종말의 시녀’다. 탐지하기 어려운 핵추진잠수함이 연안에 매우 가깝게 몰래 접근해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으므로 핵무기 발사부터 타격까지의 시간을 약 30분 혹은 그 이하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통령에게 핵 반격을 숙고할 시간이 단 6분간만 주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발사 후 21분, 우리는 핵전쟁에 ‘법이란 존재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광기 어린 통치자들은 전쟁법을 따르지 않는다. “승리하면 해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전쟁법에는 국가 간에 절대 원자로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협정이 있지만, 북한 SLBM에서 방출된 핵탄두가 캘리포니아주의 디아블로 캐니언 핵 발전소를 타격한다. 이는 캘리포니아주 에너지 관료들에게 ‘악마의 시나리오’라고 알려진 것이다. 핵미사일이 원자로를 공격하면 원자로 노심이 녹아 결과적으로 수천 년 동안 이어질 핵 재앙이 초래된다. 전직 맨해튼 프로젝트 소속 물리학자 랠프 E.랩은 원자로의 노심이 붕괴될 경우 “이렇게 녹은 잔해는 원자로 용기 밑바닥에 축적될 수 있으며 (중략) 거대한 크기의 녹아버린 방사능 덩어리는 (중략) 땅속으로 가라앉아 약 2년 동안 계속해서 크기를 늘려간다. 액화된 방사성 용암과 끓어오르는 불로 이루어진 지름 약 30미터의 뜨거운 구체가 형성되어 10년간 지속될 수 있다”라고 했다. 발사 후 23분, 대통령은 급하게 대피하느라 핵 공격이 현실이 되어서야 북한의 SLBM 공격을 보고받는다. 대통령은 압도적인 핵전력으로 북한을 압박하여 항복을 이끌어내기 위한 ‘핵 억지 복구’ 원칙에 기반하여 50기의 ICBM과 각기 4기의 핵탄두를 장착한 8기의 SLBM 발사를 지시한다. 미사일은 북한의 핵·대량살상무기 시설과 지도부, 그 외의 전쟁 유지 시설을 포함한 82개의 표적지를 향해 날아간다. 북한 사람 수백만 명을 핵탄두 폭격으로 살해하는 것이 북한 지도자가 수백만 명의 미국인을 더 죽이지 못하도록 막는 최선의 선택이라는 가정이 뒤따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핵 억지가 정말 복구될 수 있을까? 미국의 보복 공격을 우려할 수 있는 이성적인 지도자라면 미국을 공격할 수 있었을까? 이미 광기 어린 통치자의 선택으로 실패한 핵 억지는 쉽사리 복구되지 않을 것이다. 3부. 이후의 24분: 그라운드제로 이후의 24분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까? 『24분』은 평균적인 인간의 지성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핵무기의 위험성을 구체적인 상황과 과학적 사실에 기반해 설명한다. 이 시나리오를 통해 핵전쟁이 인류에게 얼마나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어떻게 한순간에 인류가 공들여 쌓아온 문명을 파괴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디아블로 캐니언 발전소가 그라운드 제로가 되면서 캘리포니아주 전력망이 붕괴한다. 약 390만 명에게 더는 전력을 공급할 수 없다. 이제 라디오나 TV로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달받을 수 없다. 핵폭탄은 지표면에서 폭발하여 지상 폭발보다 더 많은 양의 방사성 낙진을 만든다. 지름 1.6킬로미터의 거대한 불덩어리가 발전소 시설 전체를 집어삼킨다. 방사성 산불이 인근 산을 태우고 방사성 재가 공기를 가득 채운다. 차를 타고 대피하던 사람들은 교통이 마비되자 차에서 내려 달리기 시작한다. 반핵평화운동이 예고하고 경고했던 핵전쟁 비극의 시작이다. 발사 후 33분, 펜타곤이 그라운드 제로가 된다. 펜타곤을 타격한 1메가톤급 핵무기의 불덩어리는 정오의 태양보다 1천 배 더 밝다. 그 빛을 똑바로 본 사람은 누구나 눈이 먼다. 불덩어리는 1.7킬로미터로 늘어나 이 공간에 존재했던 사람과 사물은 모두 불타버린다. 1차 방사범위인 링1 내 건축물은 대체로 무너진다. 링1의 바깥쪽 테두리에서는 몇 안 되는 생존자들이 액화된 도로에 갇혀 불에 타들어간다. 수십 초가 흐르면서 불덩어리는 5킬로미터쯤 솟아오른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폐허와 불길에 갇힌다. 포토맥강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시신으로 꽉 막혔다. 링1의 사망률은 거의 100퍼센트다. 2차 방사 범위인 링2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의 대다수가 3도 화상으로 죽어가는 구역이다. 대형 화재로 방출된 에너지는 최초의 핵폭발보다 15~50배 강력하다. 이는 지름 1미터 크기의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화재 바깥에 있던 사람들을 빨아들일 만큼 강력한 바람을 동반한다. 폭탄의 전자기 펄스(EMP)가 전기를 끊어놓아 물 펌프도 작동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라운드 제로 주변의 260제곱킬로미터(혹은 그 이상) 범위 내 모든 것이 불에 탈 것이다. 공기 중의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이 생존자들을 위협한다. 현대인의 상식상, 재난이 일어나면 구조대원이 구하러 온다. 그러나 핵전쟁은 일반적인 재난이나 전쟁이 아니다. 『24분』은 시민들 스스로 알아서 생존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핵전쟁을 대비하는 임무를 맡은 미국의 연방재난관리청은 핵 공격이 발생했을 때 작전 계획의 지속성을 유지하기 위해 특정 정부 관료를 구하는 데 집중한다. 시민들을 구하고 싶어도 방사성 물질이나 화재 때문에 대원들이 핵폭발 지역 인근으로 갈 수 없다. 이미 구조대원들이 죽었을 수도 있다. 『24분』은 국가 간 긴장 관계와 안보 동맹관계 역시 놓치지 않는다. 핵전쟁이 미국과 북한만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핵전쟁은 러시아, 유럽, 한국 등으로 너무나 쉽게 확전될 수 있다. 아울러, 핵전쟁의 빠른 전개 속도와 정보의 불확실성, 국가 간 불신과 적개심, 지도자의 편집증은 확전을 부추긴다. 이미 러시아의 조기 경보 시스템은 미국이 북한을 향해 쏜 ICBM 50기와 SLBM 8기를 인지했다.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대통령과 통화하여 그 미사일은 북한을 향해 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확전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 대통령이 그 말을 믿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 본토 위로 미사일이 지나가는 상황에서 러시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미국 대통령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을까? 『24분』은 핵전쟁 시 미국 대통령마저 안전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시나리오에서 미국 대통령은 핵폭탄의 전자기 펄스 영향으로 헬리콥터가 추락하기 전에 낙하산을 타고 하강하다 실종된다. 미국 대통령에게 연락받지 못한 러시아 대통령은 이미 불쾌함을 표시했다. 햇빛을 로켓 배기가스로 잘못 보고하는 등 심각한 오류를 반복한다고 알려진 러시아 경보 시스템은 미국의 ICBM과 SLBM을 수백 개의 미사일과 탄두로 오해한다. 러시아는 나토 회원국의 각 기지에서 병사들이 전투 준비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토가 핵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받아들인다. 러시아는 미국과 동등한 수준의 핵무력을 갖추고 있으며 ‘경보 즉시 발사’와 같은 핵정책을 가지고 있다. 발사 후 45분, 국제사회가 러시아를 따돌린다는 편집증에 시달리던 러시아 대통령은 미국이 러시아를 공격했다고 생각하고, 1천 기의 ICBM을 미국으로 발사한다. 다소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정보의 오류, 이성적 판단의 어려움, 지도자 개인의 특징, 국제 관계, 러시아의 핵정책 등을 고려하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인다. 북한은 미국을 향해 또 하나의 미사일을 추가로 발사한다. 주한미군 기지의 군인들은 남한이 북한의 다음 표적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4부. 이후의 (마지막) 24분 마지막 24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핵전쟁은 최종적이다.” 러시아를 향한 미국의 공격, 북한의 82개 표적지를 향한 미국 미사일의 타격, 남한과 미국에 대한 북한의 공격, 미국과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공격이 24분 안에 빠르고 복잡하게 진행된다. 특정 시간대로 상황을 서술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일이 발생하고, 또 많은 이들이 죽는다. 미국 대통령이 실종되고 펜타곤이 그라운드 제로가 되면서 워싱턴 DC에 있던 대통령 계승자 명단 상위에 있는 5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리 워싱턴 DC에서 대피한 서열 6위 국방부 장관이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취임한다. 그가 취임하자마자 할 일은 대통령과 똑같이, 6분 내에 어떤 핵무기를 사용할지 정하는 일이다. 1천 기의 ICBM을 발사한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해 미국의 육해공 핵 삼위일체의 전력이 투입된다. 각 1기의 핵탄두를 장착한 400기의 ICBM을 발사하고(육상), 다수의 핵탄두를 장착한 SLBM을 여러 기 실은 핵무장 잠수함 14척(해상)과 다수의 핵탄두를 장착한 66기의 핵 탑재 폭격기(공중)를 출격시킨다. 핵탄두는 러시아의 대량살상무기 시설, 전쟁 유지 산업체, 지도부를 타격하기 위해 975개의 표적지로 향한다. 이 세 범주에 속하는 수많은 표적지는 인구밀도가 높은 러시아의 도시 지역에 있다. 종전에 발사한 미국의 미사일이 북한의 82개 표적지를 타격한다. 몇 분 전 워싱턴 DC에서 일어난 일이 북한에서 82번 일어난다. 그라운드 제로의 지름 5킬로미터 고리 안에 있던 모든 것이 타버린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이 과정에서 소각되고 거리 위에 녹아내리고 화재의 허리케인에 휩쓸려 들어간다. 미국 역시 법을 지키지 않고 핵 시설을 타격한다. 중국 단둥과 겨우 48킬로미터 떨어진 북한 서해에도 핵폭탄이 떨어지면서, 중국 시민 수십만 명이 갑자기 죽거나 다친다. 중국도 핵전쟁에 끼어들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수백만 명이 죽어가는 동안 백두산 지하 벙커에 있는 북한 최고지도자는 남한을 향한 공격을 명령한다. 2021년 국방정보국 분석가들은 “북한에 신경마비와 물집, 출혈, 질식을 일으키는 물질을 생산할 수 있는 화학전 프로그램이 있다”라고 경고했다. 화학무기를 실은 1만 기 이상의 발사체가 남한 곳곳을 타격한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남한 방어 프로그램의 능력도 뛰어나지 않다. 한 번에 몇 기의 미사일만 처리할 수 있는 THAAD(종말 단계 고고도 미사일 지역 방어 체계)는 1만 기에 이르는 공격 앞에서 무력하다. 이 시나리오에서 정점은 북한이 전자기 펄스(EMP) 공격을 위해 위성에 소형 핵탄두를 실어 궤도에 올린 뒤 미국 상공에서 핵탄두를 터뜨리는 일이다. (이를 ‘슈퍼-EMP’라고 한다.) 전직 미국 미사일 방어국 국장인 헨리 쿠퍼 대사는 미국 상공에서 고고도 전자기 펄스가 폭발할 경우 “미국의 전력망이 무기한 차단되어, 1년 안에 미국인의 최대 90퍼센트가 사망에 이를 수 있다”라고 두려움을 표명했다. 북한의 전자기 펄스 공격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은 2012년부터 주류적 인식이 되었다. 핵무기 공학자 오버그는 북한에 다녀온 뒤 슈퍼-EMP 공격이 실현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이를 ‘둠즈데이 시나리오’라고 불렀다. 실제로 2016년 2월, 북한은 소형 핵탄두를 실을 수 있는 유상하중을 가진 위성을 성공리에 발사했고, 위성은 미국 바로 위를 지나갈 수 있다. 합리적인 이성을 가진 지도자라면 슈퍼-EMP 공격을 하지 않을 수 있지만, 모든 지도자가 합리적이리라는 법은 없다. 이 시나리오는 이미 광기 어린 통치자 1인의 선택으로 핵 억지가 무너진 상황을 바탕으로 한다. 발사 후 55분, 북한이 미국 상공 480킬로미터 지점에서 슈퍼-EMP를 터뜨리며 둠즈데이 시나리오가 실현된다. 21세기 미국은 전기로 동력을 공급받고 마이크로프로세서 칩으로 설계된 복잡계다. 미국의 전력 공급망, 발전소, 발전기, 변전소, 고압 송전선, 배전선이 고장나고 망가진다. 가장 문제는 미국의 감시 제어 및 통제 시스템 ‘SCADA’(Supervisory Control And Data Acquisition)의 붕괴다. SCADA가 무너지며 수천 대의 지하철과 여객열차, 화물열차가 서로 충돌하거나 벽과 장벽을 들이박거나 탈선한다. 엘리베이터가 층 사이에 멈추거나 빠르게 지상으로 떨어져 박살난다. 위성이 제자리에서 벗어나 지구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미국에 남아있는 53기의 원자력 발전소는 이제 모두 예비 시스템으로 작동하여 시한을 두고 가동하기 시작한다. 조종 계통을 컴퓨터 전기 신호 장치로 바꾼 비행기들은 격렬하게 지상으로 향하고, 지상의 중요한 기간 설비 체계가 망가져 대규모 홍수가 발생한다. 인간의 배설물과 쓰레기, 시체 더미를 먹고 사는 벌레들이 들끓기까지 15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한편, 러시아의 SLBM이 미국과 유럽 전역의 나토 기지를 타격한다. 벨기에,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튀르키예 공군기지들이 사라진다. 그 외에도 저자는 파리, 베를린, 브뤼셀, 암스테르담, 로마, 앙카라, 아테네, 자그레브, 탈린, 티라나, 헬싱키, 스톡홀름, 오슬로, 키이우를 러시아가 표적지로 삼을 것이라 상정한다. 곧이어 1천 기의 러시아 핵탄두가 미국을 20분 동안 폭격한다. 핵무기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을 무위로 돌린다. “모두가 패배한다.” 5부. 이후의 24개월과 그 너머 핵전쟁이 세상의 종말이 될까? 필자는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2015)와 그 후속작인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2024)을 통해 핵전쟁 이후의 세상을 상상할 수 있었다. 두 영화는 핵전쟁으로 현대 문명이 멸망한 22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속 시민들은 굶주림에 고통받으며 깨끗한 물을 독점한 독재자 임모탄의 지배하에 살아간다. 임모탄을 비롯한 지배 세력은 방사능에 오염되어,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여성들을 가둬놓는다.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벌어지는 폭력 집단 간 전쟁을 전편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한편, 핵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은 ‘녹색의 땅’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24분』의 5부는 두 영화와 마찬가지로 핵전쟁 이후 사람들이 방사능에 오염되고, 환경오염으로 자원이 부족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시나리오를 읽어보면, 두 영화의 세계관은 희망적인 편에 가깝다.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은 사람이 있을지, 핵전쟁 이후에도 ‘녹색의 땅’이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만큼 대규모 핵 교환의 영향은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저자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근거로 최악의 시나리오인 ‘핵겨울’을 가정한다. 칼 세이건은 “핵 교환을 통해 10억 명이 넘는 사람이 즉시 죽을 것이다. 그리고 장기적인 결과는 훨씬 나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모든 도시와 숲의 오랜 화재에 따른 부산물로 약 1,500억 킬로그램의 재가 대류권 상부와 성층권으로 솟아오른다. 유럽, 러시아, 아시아 일부 지역도 마찬가지다. 이 검은 가루 같은 재가 햇빛을 막아, 지구에 가혹하고 긴 저온 현상이 이어진다. 지구는 ‘핵겨울’이라 불리는 새로운 공포로 접어든다.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은 염색체 손상, 실명, 불임, 난임을 겪으며 추위와 싸워야 한다. 강수량이 50퍼센트 줄어들면서 농업이 종말한다. 기를 것이 거의 남지 않아 농장 공동체를 시작할 수 없고, 영하의 기온이 작물을 망친다. 화재폭풍은 토양과 씨앗을 훼손시켰다. 사람들이 이제는 굶어죽기 시작한다. 화학 폐기물, 수백만 구의 녹아가는 시신, 석유와 가스에 오염되지 않은 물을 찾으려는 노력도 식량을 찾으려는 노력에 필적할 정도로 절박하다. 여러 달이 지난 후, 태양의 따뜻한 광선이 이제는 살인적인 자외선을 내리쬔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핵폭발과 이어지는 화재폭풍이 오존층의 절반 이상을 파괴한다. 따라서 핵전쟁 이후 15년이 지나면 오존층이 전 세계에서 최대 75퍼센트 사라질 수 있다. 빙하와 함께 시신이 녹으면서 뇌염과 광견병, 발진티푸스 등 곤충 매개 질병이 발병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다. 과연 그 속에서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 미래의 인류가 현재 인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핵 억지에 기반한 안보 정책을 유지하는 이상, 비이성적인 지도자의 우발적 선택으로 인해 핵폭탄이 언제 터질지 예측할 수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인류의 지속가능성을 질문할 수밖에 없다. 4. 우리가 만들 미래는 핵전쟁인가, 핵무기 없는 세상인가 『24분』은 현실이 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제시하면서,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미래가 무엇인지 물어보는 듯하다. 우리가 살아가고 싶은 세상은 핵전쟁으로 인류의 존속을 담보할 수 없는 미래인가? 핵무기를 완전히 철폐한 세상인가? 핵 억지가 허구적 믿음에 불과한 상황에서 핵무기는 그 자체로 인류에게 위협이며 적이다. 단호히 핵무기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핵무기 완전 철폐는 분명 어려운 일이다. 핵 강대국들이 핵무기를 현대화하고 전쟁에서 핵무기를 사용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남한에서도 자체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여론과 미국과의 핵우산 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강해지고 있다. 안보 정책과 핵무기 사용권이 소수의 지도자에게 달렸다는 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막막해 무력해지기도 쉽다. 하지만 핵무기를 통제하고 철폐하기 위한 세계 반핵평화운동과 국제사회의 노력 덕분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80년 동안 핵무기가 한 번도 실전에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냉전 시기 유럽의 핵군축운동은 비핵화지대 건설을 목표로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어 운동했고, 1987년 미국과 소련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하여 아시아와 유럽 전역에서 모든 중거리 및 단거리 미사일을 철수하고 폐기하게 했다. 일본의 반핵평화운동은 대대적으로 반핵여론을 조직하여 일본이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고, 생산하지 않으며, 반입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비핵 3원칙’을 약속하도록 만들었다. 일본의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는 핵 금기 확립에 크게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202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2021년 유엔에서는 핵무기금지조약(TPNW)이 발효되었다. 이 조약은 핵무기의 개발, 실험, 생산, 보유 및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최초의 국제법적 구속력이 있는 조약으로 의미가 상당히 크다.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다면 사회진보연대 소책자 『핵무기 없는 평화로운 세계로』 3부를 읽길 추천한다.) 2025년 현재 98개국이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하고 73개국이 비준했다. 그러나 핵무기를 보유한 9개국과 한국, 일본은 이 조약에 서명도, 비준도 하지 않고 있다. 1980년대 유럽 반핵평화운동이 “핵무기 없는 세상, 우리부터 시작하자”고 외친 것처럼, 미서명·미비준 국가들이 조약에 서명하고 비준하도록 각 나라의 시민들이 “우리부터 조약에 함께하자”고 정부를 압박해야 한다. 나아가, 핵무기는 한 국가만 해결해서 될 일이 아니기 때문에 국경을 뛰어넘는 국제 연대가 필요하다. 필자는 올해 9월 10일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기억을 계승하여 전쟁과 핵무기 없는 미래로!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와 다음날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 주최로 열린 ‘한·일 반핵평화 운동 교류회’에 참여했다. 국내 반핵평화여론 형성을 위해 한일 간 연대를 강화하고, 한국 반핵평화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일본 반핵평화운동의 사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핵무기를 일본의 식민지배를 끝낸 정의의 무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고,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근거로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문제를 일본이 자초한 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분명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는 비판받아 마땅하나, 이를 이유로 핵무기의 위험성에 관한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식민지배와 전쟁범죄를 반성하는 동시에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일본 반핵평화운동과의 교류는 분명 한국에서 반핵평화 여론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의 사회운동이 ‘비핵 일본 캠페인’ 사례를 참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핵 일본 캠페인은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캠페인으로, 피폭 증언과 함께 핵무기가 얼마나 비인도적인 무기인지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국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여론을 조성해오고 있다. 비핵 일본 캠페인은 현재 178만 명의 서명을 모으고, 전국의 지자체 41%가 일본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결의서를 채택하게 했다. 필자는 이로부터 우리도 노력하면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우선,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한국은 핵전쟁 위협에 극명하게 노출되어 있지만, 핵 문제에 관심도 적고 위기감도 약하다. 필자 역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핵무기의 위험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핵무기 개발과 보유에 찬성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올해 필자가 속한 노동조합에서 조합원 교육을 한 결과, ‘핵무기를 잘 몰라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핵무기의 위험성을 알고 난 후 핵무기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답변한 후기가 상당히 많았다. 비인도적 무기이자 인류 절멸의 무기로서 핵무기에 대한 정보를 널리 알린다면 핵무장 여론을 제어하고 반핵평화 여론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24분』의 시나리오 역시 활용할 수 있겠다. 1백만여 명의 시민이 속한 민주노총의 사회적 역할과 영향력이 상당하므로, 민주노총과 소속 노동조합에서부터 조합원 대상 핵무기 교육을 하고 피폭자 증언대회와 같은 교류 행사를 지속한다면 한국의 여론도 점차 변화할 수 있지 않을까?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한 세상이 아닌, 핵무기 없는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나씩 모색하고 실천해보자. ●
우크라이나 좌파 조직 ‘사회운동’(Sotsialnyi Rukh, SR) 미하일로 무스타핀(Mychajlo Mustafin)과의 인터뷰
역자해설
우크라이나를 배제한 미-러 주도 ‘우크라이나 평화안’의 현실
우크라이나 좌파의 현 사태에 대한 평가와 활동
전쟁의 현실과 좌파의 역할
전쟁이 4년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노동자들과 일반 국민이 직면한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인가요? “폭탄 아래에서도 일상이 계속된다”라는 자부심 뒤에 가려진 현실, 특히 필수 기반 시설 노동자와 국내 실향민이 겪는 구체적 어려움을 듣고 싶습니다.
'사회운동'은 집회와 선거 같은 전통적 정치 활동이 제한된 계엄령하에서도 법률·심리 지원부터 노동권 캠페인, 군인과 가족 지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계엄령이 사회보장 축소의 구실로 악용되는 상황에서, 좌파 조직의 활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내부적 도전: 신자유주의와 올리가르히 체제 대응
'사회운동'은 민영화, 규제 완화, 반노동 정책을 포함한 정부의 신자유주의 의제를 지속적으로 비판해 왔습니다. 전쟁 중에 정부의 경제 정책은 어떻게 변했고 '사회운동'은 어떻게 대응했습니까?
트럼프-푸틴 협상과 ‘정의로운 평화’의 조건
지난 3월 '사회운동'은 리야드 트럼프-푸틴 회담을 "침략자를 달래는 방식"이자 "강대국들의 세계 분할로의 회귀"라고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 후 앵커리지 회담을 거쳐 최근 위트코프 유출 사건까지, 미국-러시아 협상은 우크라이나에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그렇다면 '사회운동'이 생각하는 "정의롭고 지속 가능한 평화"의 필수 조건은 무엇인가요? 위트코프-드미트리예프 안이 "사기"라고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국제연대의 원칙과 과제
'사회운동'은 팔레스타인 민중과의 명확한 연대를 표명해 왔습니다. 우크라이나 지지 운동과 팔레스타인 지지 운동 사이에 연대가 부족한 현실을 어떻게 보십니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일관된 국제주의를 구축하기 위해 세계 좌파가 재평가하고 전환해야 할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지속 가능한 평화공존 방안을 구체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장기적 평화공존 방안 부재 속 이스라엘-하마스 휴전의 어두운 전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시민사회단체들의 평화공존 방안 노력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공존의 제도화를 위한 사회운동의 과제란?
<한·일 반핵평화운동 교류회> 지상중계
“한국과 일본이 핵무기금지조약에 참가하도록 함께 노력해나가자”
“모든 핵무기에 반대하며 국제연대를 넓혀나가자”
인류가 살아남는가 핵무기가 살아남는가, 우리에게 달렸다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⑨
나가사키 조선인/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제
《신문 아카하타(적기, 赤旗)》 인터뷰
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 세계집회
해외참가자 시내 선전전
나가사키 인권평화자료관
해외 참가자 송별파티
원폭 80년과 돌아온 핵 경쟁,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결의
지난 8월 3일부터 9일까지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대표적인 일본 반핵평화운동 단체인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이하 ‘원수협’) 주최로 2025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이하 ‘세계대회’)가 열렸다. 사회진보연대에서는 필자를 포함한 9명이 참가해 일본과 세계 각국의 반핵평화 활동가들과 교류했다. (원수폭은 핵무기의 주요 유형인 원자폭탄·수소폭탄을 뜻한다.) 이 글은 먼저 세계대회의 역사를 간략히 소개한 뒤, 원폭 투하 80년을 맞은 올해 대회의 주제를 설명하고 히로시마 국제회의와 주요 포럼·워크숍에서의 논의를 보고한다. 이어 이번 세계대회를 통해 국제 반핵평화운동이 무엇을 합의했고 어떠한 과제를 남겼는지 평가하고자 한다. 결론적으로 이번 대회는 전후 국제질서가 흔들리고 강대국 간 핵 군비경쟁이 재개된, 냉전 종식 이후 가장 위태로운 정세 속에서 ‘모든 핵무기 반대’와 ‘세계 시민의 국제연대’라는 원칙의 중요성을 다시금 확인한 장이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인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인류 최초의 실전용 핵무기인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투하되었다. 사흘 후인 9일, 나가사키에도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실전에 사용된 핵무기인 원자폭탄 ‘팻 맨’이 떨어졌다. 세계는 단 한 발의 폭탄이 도시 전체를 초토화하고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장면을 두 번이나 목격하며 충격에 빠졌다. 그러나 원폭 피해를 직접 경험한 일본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피폭자에 대한 편견, 차별이 만연했을 뿐만 아니라 미 군정청과 일본 정부가 원폭 문제의 공론화를 막았다. 그 결과 원폭 투하를 겪은 당사자들은 10년 가까이 숨죽이며 지내야 했다. 물론 전환의 조짐은 있었다. 1949년 파리와 프라하에서 개최된 ‘평화옹호세계대회’를 계기로 일본에서도 같은 대회가 열리고 일본평화위원회(당시 이름은 ‘일본평화를지키는모임’)가 발족했다. 1950년 3월부터 시작된 ‘스톡홀름 호소문’ 국제서명운동은 ‘모든 핵무기 금지’를 요구하며 “어떤 나라든 핵무기를 선제 사용하면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지른 전범국으로 간주하겠다”고 선언했다. 여기에 일본 시민 645만 명이 서명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피폭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다. 상황은 1954년 3월 1일, 미국이 태평양 비키니 환초에서 수소폭탄 ‘캐슬 브라보’ 실험을 실시하며 바뀌었다. 제5후쿠류마루호를 비롯한 일본 어선들이 피폭되자, 도쿄 스기나미구 주민들이 5월부터 ‘수소폭탄 금지 서명운동’(스기나미 호소문 운동)을 시작했고, 이는 곧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도 이를 계기로 자신의 경험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같은 해 8월에는 원수폭금지서명운동 전국협의회가 발족하여 전 국민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이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피해 문제 해결과 핵무기 철폐를 요구하는 반핵운동으로 발전했다. 전국적인 서명운동과 원수폭 금지 운동의 열기는 이듬해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1955년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에 맞춰 제1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가 히로시마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는 일본 46개 도도부현과 97개 전국 조직에서 2576명의 대표가 파견되었고, 대회 전체 참가자는 5천 명을 넘었다. 해외에서도 14개국 52명이 참석해 국제연대의 출발을 알렸다. 이어 같은 해 9월 19일, 일본 원수협이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당시 원수폭금지서명운동에 참여한 일본 시민은 3259만 명을 돌파했다. 1956년, 나가사키 원폭 투하일인 8월 9일에 개막한 제2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는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들의 전국 단체인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가 결성된 것이다(이하 ‘피단협’, 국제적으로는 일본어 발음에 따라 ‘히단쿄’로 불린다). 이후 피단협은 자신들이 직접 겪은 핵무기의 절멸적 파괴성과 비인도성을 세계에 증언하며, 7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이를 통해 핵무기 사용에 대한 국제적 금기를 만들고 UN 핵무기금지조약(TPNW)의 성립을 이끌어내는 데 기여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피단협은 202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 결성 선언 “세계에 보내는 인사” 제2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 2일차인 1956년 8월 10일, 나가사키에서 (필자 발췌 번역) 원폭으로부터 11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처음으로 이렇게 전국에서 모일 수 있었습니다. [원폭 투하의] 그 순간에 죽지 않았던 우리가 지금 드디어 일어나 모인 최초의 전국대회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흩어져 살아남은 우리들이, 더는 가만히 있지 않고 손을 잡고 일어서려고 모인 대회입니다. 우리가 일어설 용기를 얻은 것은 작년 8월의 세계대회 덕분입니다. (중략) 우리의 이 감사와 결의의 말은, 그 순간에 무참히 죽고, 또 그 뒤에 원폭증(原爆症)으로 잇달아 죽어 간 30만 명이 넘는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남편이나 아내의 목소리를 대신한 말로서 받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중략) 우리는 우리 자신을 구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의 체험을 통해 인류를 위기에서 구하겠다는 결의를 맹세합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 목소리를 모아 전 세계에 소리 높여 호소합니다. 인류는 우리의 희생과 고난을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파괴와 사멸의 방향으로 갈 우려가 있는 원자력을 결정적으로 인류의 행복과 번영의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한 유일한 소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오히려 수소폭탄 경쟁 시대에 접어들어, 위력이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자폭탄의 천 배인 수소폭탄의 실험까지 행해지고 있습니다. “멈춰달라”는 우리의 피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수폭 실험은 냉연(冷然)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원폭 투하 이래로 방사능 병의 무서움에 직면해 온 우리, 올해에만 하더라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여러 사람이 방사능 병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곁에서 본 우리가 공기와 물을 방사능으로 오염하는 수폭 실험을 어떻게 가만히 보고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떤 힘 앞에서도 더는 가만히 있지 않을 각오입니다. 우리는 마침내 모일 수 있었던 오늘 이 모임의 열기 속에서 뭔가 ‘부활’이라고 불러야 할 기분을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의 수난과 부활이 새로운 원자력 시대에 인류의 생명과 행복을 지키는 역할을 한다면, 우리는 ‘살아있어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감사와 결의를 피력하며, 이 대회로부터 전 세계에 보내는 인사를 드립니다. [상단] 1956년 8월 10일, 나가사키에서 열린 제2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피단협을 결성할 때의 모습. [사진 출처: 일본 《주고쿠신문》] [하단] 2024년 12월 10일,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참석한 피단협 대표단. 앞줄의 가장 왼쪽과 바로 그 뒤에 한복을 입은 2명은 피단협의 초청으로 시상식에 함께 한 한국인 피폭자 정원술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과 피폭 2세 이태재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회장이다. 현수막에는 “노 모어 히로시마, 노 모어 나가사키”라는 구호와 일본 반핵평화운동의 상징물인 종이학이 있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 매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열린 원수폭금지세계대회는, 세계 모든 핵무기의 철폐를 촉구하고 핵무기·핵실험 피해자와의 연대를 다짐하는 세계 반핵평화운동 세력이 결집하는 장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냉전 시기 현실 사회주의 진영의 핵무장은 세계 각국 좌파를 분열시켰고, 일본 반핵평화운동에도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1961년 제7회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서 “(이번 대회 이후) 핵실험을 재개하는 정부는 평화와 인도주의의 적으로 규정한다”는 결의를 채택한 직후, 소련은 8월 30일 핵실험을 재개했다. 이에 원수협 내부에서 사회당계와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계는 소련에 항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공산당계가 반대하면서 갈등이 생겼다. 1962년에는 세계대회 중에 소련이 핵실험을 강행해 대회가 혼란 속에 끝났고, 1963년에도 ‘부분적핵실험금지조약(PTBT)’ 지지를 둘러싸고 대회가 무산되었다. 공산당계는 이 조약이 후발 주자인 중국의 핵무기 개발을 제약한다고 반대했고, 사회주의 국가의 핵무장은 침략 방지를 위해 용인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내세워 논란이 되었다. 결국 1965년 사회당, 총평계가 원수협을 탈퇴해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원수금)’라는 별도의 조직을 창립했고, 세계대회도 양측이 따로 개최했다. 1973년, 미야모토 겐지 당시 일본공산당 위원장이 국회 기자회견에서 “중소대립에 의해, 사회주의 국가의 핵실험도 모두 방위를 위해 강요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앞으로는 사회주의 국가의 핵실험도 반대한다”고 밝혀, 공산당계가 태도를 전환했다. 이로써 1977년부터 1985년까지는 원수협과 원수금이 공동으로 원수폭금지세계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부터 조직 갈등이 불거져 이후 두 단체는 다시 각각 세계대회를 열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원수협 주최 대회에는 2007년, 2019년, 2020년(온라인), 2021년(온라인), 2025년에, 원수금 주최 대회에는 2007년, 2011년, 2012년, 2014년에 참가했다) 한편, 전국적 반핵평화 여론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7년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보유하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비핵3원칙’을 선언했다. 이 원칙은 1971년 중의원 결의로 채택되어 일본의 국가 정책으로 자리잡았다. 오늘날에도 일본에서 핵무기 철폐는 폭넓은 합의로 남아있다. 2025년 8월 현재,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지지하는 여론이 70% 이상이고, 전체 지자체의 40%가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비준을 요구하는 결의에 동참하고 있다. 특히, 올해 원폭 투하 80년을 맞아 원수협, 원수금, 피단협 세 단체는 7월 23일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모든 입장의 차이를 넘어 핵무기의 비인간성을 일본과 세계에서 호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본은 핵무기금지조약에 가입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해 일본 사회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 올해 세계대회의 공식 기조는 “피폭자와 함께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위해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만들자!”였다. 이번 대회는 피단협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직후의 대회였으며, 동시에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이의 피폭자가 참가할 수 있는 사실상 마지막 ‘0’주년 세계대회이기도 했다. 피폭 당시 10세 이상이었던 피폭자는 현재 90세가 넘으며, 피단협 회원의 평균 연령도 이미 86세에 이른다. 피폭자들은 지난 80년 동안 세계에서 핵무기가 다시 사용되지 않도록 일생을 바쳤다. 그러나, 핵무기의 참상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이들의 기억을 계승하고 ‘핵무기 없는 세계’라는 염원을 이어갈 책임은 세계대회 참가자를 비롯한 남은 이들에게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대회 전반에 걸쳐 강조되었고, 원폭 투하 80주년을 맞아 기획된 특별 프로그램 ‘피폭 체험의 계승과 미래’(같은 제목, 다른 내용으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각각 진행)는 피폭자의 증언과 피폭자 운동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다뤘다. 국제적으로는 이번 대회는 원폭 투하 80주년을 되새기는 것을 넘어 핵무기 위기의 심각성을 부각했다. 강대국의 핵 군비경쟁 재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핵 위협, 미국의 이란 핵시설 공격 등이 지적되었다. 미국 《핵과학자회보》(BAS)가 매년 발표하는 ‘지구종말시계’가 2025년 현재 자정 89초 전, 즉 역사상 가장 지구 종말에 근접한 시점에 있다는 사실이 자주 인용되었다. 이번 세계대회 선언문은 두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이념적으로는 “모든 핵무기와 핵 사용 위협 반대”라는 기준이다. 둘째, 운동적으로는 핵무기금지조약(TPNW, 2017년 UN총회 채택, 2021년 발효, 2025년 8월 현재 73개국 비준·94개국 서명)을 두고 국제 반핵평화운동이 공동 대응에 나서야 한다는 지침이다. 이에 따라 핵보유국에 핵군축을 요구하는 국제적 흐름을 조직하고, 올해 9월 UN총회, 2026년 4~5월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평가회의, 같은 해 11~12월의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회의로 결집하자는 계획이 제시되었다. 일본 국내에서는 올해 세계대회 준비 과정에서 ‘비핵일본 캠페인’이 전개되었다. 원수협은 2024년 초, ‘비키니 수폭 재해 70년으로부터 피폭 80년으로 - 비핵 일본을 목표로 하는 전국 캠페인’을 제안했다. 캠페인은 1954년 비키니 수소폭탄 실험 피폭과 원수폭 금지 서명운동의 70주년(2024년 3월 1일)부터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2025년 8월 말)까지 핵무기·핵실험 피해의 실상을 알리고 피폭자와의 연대를 강화하는 전국적 활동으로, 일본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참여를 촉구하는 서명운동을 포함했다. 세계대회 마지막 날에는 사회진보연대를 비롯한 해외 참가단도 나가사키 시내에서 서명 모집 활동에 동참했다. 원수협은 이와 같은 캠페인을 바탕으로, 일본 정부에 “미국과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과 북한에도 당당히 핵무기 전면 금지·철폐와 평화를 요구하고, 이를 위해 먼저 핵무기금지조약을 서명, 비준”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8월 9일 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 집회 무대에 서서, <일본 정부의 핵무기금지조약 가입을 요구하는 고교생 서명운동>의 현황을 보고하는 일본 고등학생들. 이들뿐만 아니라 세계대회 기간 동안 만난 일본 청년들은 “피폭자의 기억을 후대에 이어가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는 마음가짐을 계속해서 밝혔다. 원폭 투하 80주년을 맞아 열린 올해 원수협 주최 세계대회는 예년보다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 주최 측 추산에 따르면, 오프라인과 온라인을 합쳐 연인원 약 1만 3천 명이 참가했다. 일본 외 국가에서는 15개국 47개 단체, 4개 국제연대체, 6개 국제기구 및 정부 대표를 포함해 총 228명이 참가했다. 올해 대회도 피폭자가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잊지 않기 위해 세계 각지의 피폭자 대표들을 초청했다. 1945년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한국인 원폭피해자, 1954년 비키니 수소폭탄 실험에 피폭된 마셜제도 대표와 1966년 미 공군의 핵탄두 탑재 전략폭격기 추락 사고(팔로마레스 B-52 추락사고)로 피폭된 스페인 대표 등이 대표적이다. 11세에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겪은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 박정순 회원의 증언은 히로시마 국제회의와 특별 프로그램 ‘피폭 체험의 계승과 미래’의 중요한 순서로 배치됐다. 또한, 영국 핵군축캠페인(CND), 미국 평화행동(Peace Action), 평화재향군인회 등 저명한 반핵평화운동 단체들과 국제평화국(IPB), 국제여성평화자유연맹(WIDLF) 등 국제 평화운동 조직들이 함께했다. 특히 한국과 프랑스의 활동가가 대규모로 참가해 대회 기간 내내 주목받았다. 한국에서는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포럼평화공감, 한국여성단체연합, 민주노총,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사회진보연대, 노동자가여는평등의길,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청년한의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13개 단체에서 51명이 참가했다(세계대회 자료집에 실린 순서). 특히 민주노총은 최근 일본 전국노동조합총연합(전노련, 이하 ‘젠로렌’)과의 연대활동이 활발해진 가운데 양경수 위원장이 직접 참가했다. 민주노총이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같은 주요 산별노조를 포함하여 역대 최대 규모의 참가단(11명)을 꾸린 사실은 대회 전부터 일본 《평화신문》(일본평화위원회 발간)에 소개되어 큰 관심을 받았다. 사회진보연대도 처음으로 회원들의 참가 신청을 받아 9명의 참가단을 조직했다. 참가단은 규모 면에서도 컸던 데다가, 기념 티셔츠, 뱃지, 회원들의 자필 메시지를 담은 구호 현수막, 사회진보연대를 일본어·영어로 소개하는 엽서를 준비하고 세계대회의 여러 일정에 적극 참여해 대회 참가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사회진보연대 참가단은 8월 8일 나가사키에서 워크숍 <비핵평화의 일본과 아시아> 발표를 맡았고, 에서 패널리스트로 참여했다. 8월 9일에는 세계대회 참가 소감을 주제로 일본공산당 기관지 《신문 아카하타》(적기, 赤旗)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8월 9일 해외참가자 송별파티에서, 세계대회 참가 기념으로 맞춘 노란 티셔츠를 입고 회원들의 자필 메시지를 담은 구호 현수막을 든 사회진보연대 참가단과 민주노총, 금속노조, 공공운수노조, 평등의길 참가단의 모습. 오른쪽 현수막을 든 사람이 필자고, 필자 오른쪽이 일본 피단협의 다나카 테루미, 다나카 시게미츠 대표위원이다. 두 대표위원은 2024년 노벨평화상 시상식 무대에 피단협 대표로 섰다. 다나카 시게미츠 대표위원은 9월 10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에서 피폭 증언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는 평화운동 단체 ‘평화운동’(Mouvement de la Paix)과 프랑스노총(CGT, 노동총연맹)에서 각각 수십 명 이상이 참가해, 해외 참가국 가운데 최대 규모를 이뤘다. 프랑스 참가단은 유럽의 재무장 분위기 속에서 자국이 핵무력 증강에 나설 수 있다는 우려를 강하게 표명하고, 프랑스가 아프리카, 남태평양 등지에서 강행한 핵실험 피해자와 연대한다는 결의를 표현하기 위해 대규모로 참가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히로시마 국제회의 선언문 검토회의에도 참석해 관련한 문구를 제안하기도 했다. 각국의 외교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오스트리아, 멕시코, 이집트 외교관들과 독일 좌파당, 벨기에 노동당 소속 현직 유럽의회 의원들도 참가했다. 명사로서는 제레미 코빈 영국 노동당 전 대표이자 현 하원의원이 가장 큰 관심을 모았다(코빈은 CND 부의장도 겸하고 있다). 올해 세계대회의 또 다른 특징은 예년보다 각국 노동조합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민주노총과 프랑스노총 외에도 미국전기기계라디오노동조합(UE), 로스앤젤레스교원조합(UTLA), 스페인노동자위원회총연합(CCOO), 포르투갈노동총동맹(CGTP-IN)이 참가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노동조합은 올해 피단협을 초청해 증언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8월 5일 히로시마에서 열린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위한 국제 노동조합 포럼 ‘United As One’>(하나로 단결하자)에서는 평화와 핵무기 폐기를 위한 노동조합 운동의 역할을 공유하고, 각국의 실천과 국제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일본 내에서는 주로 전국노동조합총연합(젠로렌) 소속 조합원이 다수 참가했다. 사회진보연대 참가단은 그중 2019년 교류했던 생활협동조합노동조합연합회(생협노련) 참가단과 간담회를 진행했다. 히로시마 국제회의, 집회, 피폭자 증언 청취, 현장학습 등 세계대회 공식 일정과, 사회진보연대 참가단이 별도로 진행한 일본 시민 및 풀뿌리 운동 활동가들과의 교류, 견학 등에 대해서는 《사회운동포커스》에 연재한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에 자세히 담겨 있다. 또한 일부 발표문도 번역하여 소개했으므로 읽어보기를 바란다. 《사회운동포커스》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연재) ①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사회진보연대 참가단이 가다!: 히로시마 현립미술관 ‘전쟁과 미술, 미술과 평화’ 전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소개. ② 2025년,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토론과 모색: 8월 3일 히로시마 국제회의 논의 보고. ③ 피폭자의 경험을 미래로 계승하자: 히로시마 국제회의 선언문 채택과 히로시마 원폭 80주년 특별 행사 ‘피폭 체험의 계승과 미래’ 보고. ④ 최초의 피폭지 히로시마에서 핵무기 없는 세상을 말하다: 니노시마 섬 현장학습,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위한 국제 노동조합 포럼 ‘United As One’, 원폭 기념관 도보 투어 보고. ⑤ 피폭자의 목소리가 모토야스강에서 세계로, 널리 흘러가길 바라며: 히로시마 평화기념식 참관 일본 시민 인터뷰, 히로시마 원폭 투하 80주년 집회, 모토야스강 등불 띄우기 행사 보고. ⑥ 인류의 마지막 피폭지, 나가사키에서: 나가사키 원폭 80주년 특별 행사 ‘피폭 체험의 계승과 미래’, 일본 생협노련 간담회, 워크숍 <비핵평화의 일본과 아시아>, 긴급기획 <가자 주민 지원·비핵평화의 중동을>, 포럼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위해 – 정부 대표와 시민운동의 교류> 보고. ⑦ “우리가 있어서 80년간 핵무기가 사용되지 않았다” 나가사키 반핵평화운동가들의 이야기: Ring! Link! Zero 청년 심포지움, 나가사키 피폭 명소 현장학습, 나가사키현원수협·나가사키원폭피해자협의회 등 나가사키 반핵평화운동가 간담회 보고. ⑧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나가사키 원폭자료관 들여다보기: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과 나가사키 원폭자료관의 전시 소개와 감상 공유. ⑨ 핵무기 없는 세계, 지금부터 우리가 만들자!: 나가사키 조선인/한국인 희생자 위령제,《신문 아카하타》 인터뷰, 나가사키 원폭 투하 80주년 집회, 시내 선전전, 나가사키 인권평화자료관, 해외참가자 송별파티 보고. 《사회운동포커스》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발표문 ① 주최 측 기조 발언: 노구치 쿠니카즈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실행위원회 운영위원회 공동대표 ②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 박정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부산지부 회원 ③ 히로시마 국제회의 발표: 캐롤라인 루카스 영국 CND 부의장 ④ 히로시마 국제회의 발표: 마츠이 카즈오 킨키반핵의사간담회 “Don't Bank on the Bomb”(폭탄에 투자하지 말라) 프로젝트팀 사무국장 ⑤ 나가사키 워크숍 <비핵평화의 일본과 아시아> 발표: 김진영 사회진보연대 정책교육국장 여기에서는 8월 9일 세계대회 폐막식에서 발표된 ‘원수폭금지세계대회·국제회의 선언’ 최종안과 ‘나가사키의 호소’를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번 세계대회에서 합의된 정세 인식과 과제를 설명한다. 원수폭금지 2025년 세계대회·국제회의 선언 피폭 80년- 지금이야말로 결단과 행동을 미군이 히로시마(1945년 8월 6일)와 나가사키(8월 9일)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지 올해로 80년째다. 피폭 80년을 맞는 지금이야말로, 세계는 핵무기의 철폐를 결단하고 행동해야 한다. 히로시마에 모인 우리는, 핵무기가 남긴 절절한 참상을 재차 상기하며,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로의 길을 열기 위해 세계인에게 호소한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사용된 원자폭탄은 유례없는 파괴력과 방사선으로 두 도시를 순식간에 불태워 그해 말까지 21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것은 이 세상의 지옥이라고 불렸다. 지옥의 고통은 살아남은 자에게도 미쳤다. 피폭자들은 사랑하는 자를 잃은 깊은 슬픔과 함께 원폭 후유증에 시달리며 차별과 편견,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렸다. “지구의 어떤 땅에도, 이 비극을 결코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결의는 전후 정치의 출발점이었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게 준 전쟁의 참해로부터 미래 세대를 구하기’(UN헌장) 위해 창설된 국제연합(UN)은 총회 제1호 결의(1946년 1월 24일)에서 핵무기를 ‘국가의 군비에서 배제할 것’을 결정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의 핵 군비 확대 경쟁 심화와 반복된 핵전쟁 위기 속에서도 핵무기 사용 억제는 피폭자들의 증언과 이에 고무된 세계 시민들의 행동으로 지켜졌다. 일본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일본피단협)의 노벨평화상 수상은 그 역사적 공헌을 기리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다시 핵무기 사용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 특히, UN헌장을 짓밟는 무력행사나 대폭적인 군비 확대를 추진하는 나라들이 공공연하게 핵 무력 의존을 표명하는 문제는 중대하다. 우크라이나 침략을 계속하는 러시아의 핵 위협,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핵 관련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 미국 등 NATO(북대서양조약기구) 국가들의 ‘핵 억제력’ 강화와 핵무기 현대화, 핵 충돌 위험을 안고 있는 인도-파키스탄의 대립, 나아가 동아시아에서의 긴장과 핵 군비 확대 등 심각한 사태가 진행되고 있다. 핵무기는 안전보장에 불가결하다는 주장이 핵무기 보유 충동을 유발하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핵 사용을 막고 핵무기 철폐로 전진하는 데 핵 억지론의 극복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핵 억지는 핵 공격에 의한 파멸적 결말,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재현을 전제로 한 정책으로 인도적, 도의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다. 동시에 핵 억지 정책의 실패나 오작동은 국경을 초월한 파멸적 결말을 가져온다. 실제로 오산과 오인 등으로 인해 핵을 사용하기 직전에 이르는 사태가 반복되어 왔다. 핵 억지로 안전을 보장받을 나라는 없다. 이 비인도적이고 위험천만한 정책의 포기를 핵보유국과 그 동맹국에 강력히 촉구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위기를 극복하고 전진할 확실한 전망이 있다. 힘에 의한 자국의 이익 추구가 아니라 UN헌장에 기초한 질서의 재건이야말로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실현하는 길이다. ‘핵무기 없는 세계’를 목표로 하는 계획은, 그 중요한 일환이다. 핵무기를 불법화하고 그 활동을 포괄적으로 금지한 핵무기금지조약은 73개국이 비준하고 94개국이 서명한 국제적 규범이다. 이 조약을 만든, 피폭자를 선두로 하는 시민사회와 각국 정부의 공동행동이야말로 세계의 주류다. “UN헌장의 목적 및 원칙의 실현에 공헌할 것을 결의”(핵무기금지조약 전문)하며 만들어진 이 조약은, 이제 “격동의 시대에서 희망의 빛”(3차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회의 정치선언)이 되었다. 핵무기금지조약 지지 여론을 확산시켜 참가국을 확대하는 것이 급선무다. 잇단 전쟁이나 무력행사 등 힘에 의한 국익 추구를 허용해선 안 된다. UN헌장과 국제법에 근거한 평화를 요구하는 시민과 다수 국가의 목소리가 세계의 대세가 되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가 가자지구에서 벌이는 집단학살의 한시라도 빠른 정지와 항구적인 휴전, 팔레스타인 국가의 창설을 포함해 국제법과 UN결의에 근거한 팔레스타인 문제의 공정하고 평화적인 해결을 요구한다. 중동 비핵·비대량살상무기지대 창설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또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UN헌장과 국제법에 따라 종결시켜야 한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세계에서 비핵과 포섭의 해법이 권장되고 있다. 동아시아에서 긴장과 대립을 일으키는 문제 또한, ASEAN 인도태평양구상(AOIP) 추진을 비롯해 대화와 포섭, 외교로 해결해야 한다.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구축은 협상에 의해 일체적으로 추구되어야 한다. 막대한 군사비 증대를 막는 것은 평화와 삶을 지키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긴장과 대립을 심화시키는 차별과 분단, 배외주의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일본은 전쟁에서 피폭당한 유일한 나라인 동시에,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 위에서 만들어진 평화원칙을 헌법에 명기하는 나라이다. 피폭·전후 80년을 맞아, 일본의 국제적 책무는 어느 때보다 크다. 우리는 일본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참여와 피폭자에 대한 국가 보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운동에 연대한다. 일본이 ‘확장 억제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책정해 미군의 핵 사용을 논의하는 등, 미국의 핵전략에 깊이 가담하는 문제는 중대하다. 헌법에 근거한 평화외교를 요구하고, 군비확대와 미일 군사동맹 강화에 반대하는 일본의 운동은 아시아의 평화에 중요하게 공헌한다. 오키나와를 비롯한 미군 기지의 축소, 철거를 요구하는 싸움에 연대를 표명한다. 우리는 핵전쟁 저지와 핵무기 철폐를 요구하는 장대한 행동을 전개하자고 세계에 촉구한다. -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체험과 실상을 계승하고 널리 알리는 것을 운동의 중심으로 삼아, 핵무기 철폐를 공통 과제로 하는 행동을 세계 각지에서 다양하게 전개하자. 피폭자의 초빙도 포함해,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실상, 핵실험 피해의 실태를 널리 알리는 전략을 각국에서 추천하자. 이를 위해 각국 정부와 UN 조직에 지원을 호소한다. 모든 형태의 핵실험 정지를 요구하자. 피폭자와 핵실험 피해자에 대한 보상·지원을 실현하자. - 핵무기금지조약 참가를 요구하는 여론과 운동을 각국에서 발전시키자. 특히 핵보유국과 그 핵우산에 의존하는 나라에서의 여론과 운동이 중요하다. 피폭자와 핵실험 피해자의 지원, 환경 수복을 위한 노력(핵무기금지조약 제6, 7조)에 참여하고 협력하자. - 핵무기 철폐를 목표로 하는 각국 정부·UN과의 공동행동을 한층 더 발전시키자. 2026년에 열리는 NPT 평가회의에서 국제 공동행동을 할 것을 촉구한다. 이번 가을의 제80차 UN총회, 2026년의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회의를, 정부 조직과의 공동행동에서 중요한 이정표로 삼자. - UN헌장의 옹호를 내세워, 침략과 전쟁, 군비확대에 반대하고 평화와 군축을 요구하는 다양한 운동과 연대하여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흐름을 발전시키자. 고엽제 피해자 등 전쟁 피해자에 대한 보상·지원과 피해의 근절을 요구하자. 대립과 분단, 군비확대의 흐름을 전환시켜 인류가 직면한 여러 문제의 해결에 자원을 돌리자. 젠더 평등을 평화와 핵군축에 불가결한 과제로 삼자. 또한 환경과 기후위기, 빈곤과 불평등, 차별과 외국인 혐오, 인권, 민주주의 문제를 제기하는 운동들과 연대와 협력을 발전시키자. 2025년 8월 4일 원수폭금지 2025년 세계대회 - 히로시마 국제회의 원수폭금지 2025년 세계대회 - 나가사키 결의 ‘나가사키의 호소’ “아이가 폭풍에 날려 벽에 달라붙은 채 타버려, 아이의 모습이 새까맣게 벽에 붙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 일본 정부는 전쟁의 피해자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돕는 일을 하지 않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 핵무기는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핵무기란 무엇인가를, 그 결과의 비인도성을, 핵무기가 정말 잔인한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세계에 널리 알려, 핵무기를 사용하게 못하게 하고 없애나가는 운동으로 결집해 나갑시다.” <피폭 80년 나가사키의 괴로움>(2025년 8월 7일)에서 다나카 테루미 씨의 피폭 증언 피폭 80년의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모인 우리는, 피폭자들의 마음의 외침을 상기하며, 여기 나가사키에서 호소합니다. 핵무기를 완전히 폐기하기 위해 새로운 결의로 행동에 나설 것을! 러시아의 핵 위협, 미국과 NATO 국가들의 ‘핵 억제력’ 강화와 핵무기 현대화, 동아시아에서의 핵 군비 확대 움직임 등 세계가 핵전쟁 위험에 직면한 지금, 핵무기 사용과 위협을 결코 용납할 수 없습니다. 핵무기는 ‘안전보장’에 필수적이라는 ‘핵 억지’론은 결코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 격동의 시대에서 ‘희망의 빛’이 되고 있는 핵무기금지조약을 힘으로 삼아 ‘핵무기 없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로 가는 길을 개척해 나갑시다. UN헌장에 근거한 국제질서를 재건하고 강화하여 분단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확장억제 가이드라인’을 책정하거나 핵 사용도 상정한 모의훈련을 반복하는 등, 미국의 핵전략에 가담하는 일본 정부를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으로 이어지는 배외주의에는 단호하게 맞서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폭금지 2025년 세계대회 ‘국제회의 선언’을 지지하고 다음 행동에 나서도록 촉구합니다. 1)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일본피단협과 원수협, 원수금이 호소한 국민운동에 부응하고, 지금이야말로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 실상'을 널리 알려 핵무기의 비인도성을 고발해 나갑시다. 전국 각지에서 피폭 체험을 이야기하는 모임에 임해, 피폭자의 소원과 싸움의 역사를 이어서 알립시다. 원폭증 인정 제도의 근본적 개선과 원폭 피해에 대한 국가 보상을 실현합시다. 히로시마 ‘검은 비’의 피해자와 나가사키 ‘피폭 체험자’에 대한 전면 구제를 실현합시다. 세계 핵 피해자의 활동을 지원합시다.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 피해자와 연대합시다. 2) 모든 나라의 정부에 핵무기금지조약 지지와 참여를 요청합시다. 피폭자와 핵실험 피해자에 대한 지원, 오염 지역의 환경 수복 등 조약에 따른 활동에 협력합시다. 2026년 NPT 평가회의에서 국제 공동행동을 성공시키고, 핵무기금지조약 재검토 회의를 위해 각국 정부와 시민사회, 풀뿌리 운동의 공동행동을 더욱 발전시킵시다. 3) 전쟁에서 피폭당한 유일한 나라인 일본의 정부가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비준하도록 강하게 요구해, 서명운동이나 지자체 의견서 등의 운동을 한층 강화합시다. 핵 밀약 파기, 비핵3원칙 법제화를 요구합시다. 비핵고베방식을 지켜나갑시다. ['비핵고베방식'은 1975년 3월 고베시 의회가 핵무기를 적재한 군함의 고베항 입항을 거부한 결의에 따라, 고베항 입항 시 핵무기를 싣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요구하는 정책을 뜻한다] 4)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을 즉각 중지시키고 항구적 휴전을 요구합시다.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연대를 넓힙시다. ‘중동 비핵·비대량살상무기지대’ 창설을 실현합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UN헌장과 UN총회 결의에 따라 신속하게 종결합시다. 한반도, 남중국해, 대만을 둘러싼 동아시아의 긴장은 외교와 대화를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ASEAN 인도태평양 구상(AOIP)을 비롯 대화와 포섭을 통한 동아시아 평화 구축을 위해, 비핵과 평화를 일체로 한 학습과 대화, 행동을 발전시킵시다. 5) ‘적 기지 공격 능력’ 보유 등 대대적 군비 확대에 반대합시다. 전쟁법을 폐지합시다. ‘올(All) 오키나와’의 싸움에 연대해, 헤노코 신기지 건설의 중단, 후텐마 기지의 즉시 반환을 요구합시다. 규슈와 오키나와, 난세이 제도의 군사거점화에 반대합시다. 헌법 9조(평화헌법) 개헌을 저지합시다. 6) 핵발전소 제로, 기후위기 타개, 빈곤과 격차 극복, 군사비 절감과 생활·복지·교육 확충, 배외주의 반대, 선택적 부부별성 제도 도입 등 젠더평등, LGBT 권리 확대 촉구 운동 등 인간답게 살고 싶은 모든 사람과 손잡고 인간의 존엄과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장대한 공동행동을 만들어 나갑시다. 노 모어 히로시마. 노 모어 나가사키. 노 모어 히바쿠샤. 노 모어 워. 나가사키를 최후의 피폭지로! 2025년 8월 9일 원수폭금지 2025년 세계대회 - 나가사키 데이 집회 2025년 현재, 세계 각지에서 핵무기 사용 위협을 동반한 전쟁이 지속하는 데다 핵 군비경쟁이 재개돼, 냉전 종식 이후 전례 없이 핵전쟁 위기가 고조되고 있다는 인식은 앞의 두 문서뿐 아니라 대부분 참가자의 발표와 발언에서도 나타났다. 《사회운동포커스》에서 소개한 영국 CND의 발표처럼, 일부 참가자는 이러한 실태를 구체적으로 지적했다. 히로시마 국제회의 발표: 캐롤라인 루카스 영국 CND 부의장 “이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핵무기를 보유한 두 나라,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 남은 주요한 핵통제 조약은 2026년 2월이면 만료되는 신전략무기감축조약(New START)밖에 없습니다. 이 두 나라의 핵전력이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미 핵무기 현대화 프로그램을 확장하고 있습니다.” (1) UN헌장과 국제법, 다자간 협력에 기초한 국제질서의 복원 특히 세계대회 실행위원회는 1·2차 세계대전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거쳐 전후 국제질서의 핵심으로 자리 잡은 UN헌장과 핵무기 통제 체제가 현 정세에서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선언에 “UN헌장에 기초한 질서의 재건이야말로 세계의 평화와 안전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명시하며, 이를 해법으로 제시했다. 주최 측 기조 발언: 노구치 쿠니카즈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실행위원회 운영위원회 공동대표 “전쟁과 갈등을 해결하고 핵전쟁을 예방할 유일한 길은 모든 국가 정부가 UN헌장과 국제 인도주의법에 근거하여, 전쟁과 갈등의 평화적 해결, 무력 사용 위협과 사용의 금지, 핵무기의 금지와 철폐라는 원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뿐입니다.” 필자는 8월 8일 워크숍 발표에서 UN헌장에 기초한 국제질서 복원을 일차적 과제로 제시했다. 현재 러시아, 미국, 이스라엘 등은 자국 행위를 ‘서방 제국주의 반대’나 ‘생존권’이라는 명분으로 포장하며, 상대국의 행위를 알리바이로 삼아 세계 각국의 정치와 여론을 진영 논리에 포섭하고 분열시키고 있다. 그러나 UN헌장을 기준으로 보면, 핵무기 의존,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 타국 영토·주권 침해, 민간인 납치·살해, 일방적 자국 우선주의 등은 모두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UN헌장 위반 행위로서 세계평화를 위협한다. 따라서 세계 시민은 진영의 유불리를 떠나 이러한 모든 행위에 철저히 반대하는 여론을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 핵무기금지조약을 필두로 한 세계 핵 통제 강화 세계대회 선언은 흔들리는 국제질서 속에서도, 특히 극도의 절멸성과 비인도성을 지닌 핵무기에 대한 통제를 복원하여 핵전쟁을 예방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누차 언급되었듯, 핵무기금지조약이라는 대안이 존재한다는 점이 희망으로 제시되었으며, 핵 대결 대신 핵 금지를 세계 각국의 주류 담론으로 확립해야 한다는 과제가 제기되었다. 일본 원수협의 야스이 마사카즈 사무국장은 핵무기금지조약이 국제조약을 넘어, 국제적 운동으로서 갖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히로시마 국제회의 발표: 야스이 마사카즈 일본 원수협 사무국장 “올해 3월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회의는 이러한 선언을 채택했습니다. ‘핵무기금지조약은 외교를 촉진하고 다자주의를 강화하는 데 점점 더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핵무기금지조약은 이 험난한 시대의 등대다.’ 당사국회의는 핵무기금지조약이 이제 단순한 조약을 넘어선 의미가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이 조약은 핵무기에 대한 확고한 거부이며, 집단적인 행동의 힘을 보여주는 증거인 것입니다. 피폭자가 이끄는 시민사회, 그리고 세계 각국 정부의 협력은 핵무기금지조약을 세계의 주류적인 담론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한편, 각국이 오늘날 핵 군비 확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는 ‘핵 억지론’에 맞설 필요성도 다시 강조되었다. 핵 억지론은 세계 반핵평화운동이 핵전쟁 발발을 막았다는 사실을 왜곡하는 주장으로, 근본적으로 검증이나 반증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스웨덴평화중재협회 토마스 마그누손은 핵 우산 개념을 비판하며 “우산은 비를 막는 것이지 핵무기를 막을 수 없다”라는 구호를 제시했고, 미국 평화군축공동안보캠페인 의장 조셉 거슨은 “핵 억지론에 맞서는 논리를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금 당장 정치적 행동을 조직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또한, 사회진보연대는 제물을 바치면 자연재해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비과학적 믿음이 실제로 재해가 없었다는 이유만으로 진실이 되지 않듯, 핵 억지론 역시 검증이 불가능한 주장일 뿐임을 비유로 설명했으며, 이 내용은 《신문 아카하타》 8월 10일자에 실렸다. (3) 반핵평화운동의 범위 확장 및 기후 정의, 젠더 평등 운동 등 주요 사회운동과 반핵평화운동의 연대 반핵평화운동이 다루는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문제의식과 구체적 사례들도 세계대회에서 제기되었다. ‘핵무기 반대’는 세계 각지의 군비 확장과 갈등 고조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확장되어야 하며, ‘피폭자 연대’는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뿐 아니라 세계 각지의 핵실험과 핵발전 사고 피해자와의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히로시마 국제회의 세션 3에서는 핵무기 반대를 넘어 군사기지 반대 등 평화운동의 다양한 주제와, 에너지, 반빈곤, 인권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과의 연계를 다루는 발표들이 배치되었다. 특히 필자가 인상 깊게 본 발표는 베트남 대표단이 베트남전쟁 당시 고엽제(에이전트 오렌지, 다이옥신) 피해를 소개한 내용이었다. 베트남 정부는 화학무기의 끔찍함을 깊이 인식한 국가로서 NPT와 핵무기금지조약에 적극 참여하며 모든 핵무기 철폐를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이 대회장에 비치한 자료들은 미군이 사용한 고엽제가 베트남 사람들과 환경에 끼친, 극도로 비인도적이며 대를 이어 지속되는 피해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반핵평화운동의 범위 확장은 일본 내에서는 공식 ‘피폭자’(히바쿠샤)로 인정되는 범위를 넓히고, 피폭 당사자뿐 아니라 건강 문제나 생활고를 물려받은 2세, 3세에 대한 연대와 지원으로 나아가는 양상을 보인다. (자세한 현황은 세계대회 참가기② 「2025년, 세계 반핵평화운동의 토론과 모색」에 담았다.) 앞 부분에서 소개했듯, 일본 반핵평화운동의 초기에도 수소폭탄 실험 피폭자에 대한 연대가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 운동의 조직화로 이어진 바 있다. 한편, 일본 활동가들의 발언에서는 일본 정부의 공식 담론과 달리, 일본을 단순한 피해자로만 보지 않는 시각이 드러났다. 이들은 과거 전쟁과 한반도·대만 식민지배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반성하는 것을 전제로 한 역사 학습과 계승, 총체적 반전(反戰) 의식과 평화헌법(일본국 헌법 제9조) 수호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기후 정의, 젠더 평등 운동 등 다양한 사회운동과 반핵평화운동을 결합할 필요성도 세계대회 선언문과 ‘나가사키의 호소’ 결론에 명시되었다. 주요 일정에서는 관련 내용이 많지 않았지만, 세계대회 부대행사로 열린 ‘히로시마 핵무기반대여성포럼’에서는 여성 풀뿌리 평화운동의 실천이 강조되었고, 일부 워크숍에서는 기후위기와 에너지를 주제로 한 발표도 있었다. 이를 종합하면, 올해 세계대회가 도출한 과제는 다음과 같다. 이념적으로는 핵 억지론에 맞서 “모든 핵무기와 핵 사용 위협 반대”라는 원칙을 강화하고, 운동적으로는 핵무기금지조약을 중심으로 결집한 각국 반핵평화운동과 여타 사회운동 간 연대를 강화하며,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자에 대한 연대를 핵실험, 핵발전, 생화학무기 등 여타 대량살상무기 피해자와 전쟁 피해자까지 확장하는 것이다. 현 정세에 대한 발표와 토론에서는 핵 군비경쟁과 핵 사용 위협이 높아졌다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언급되었으나, 그 원인과 구체적 실태를 정세적으로 분석하는 논의는 부족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일반 언론과 전문가들조차 ‘미중 전략적 경쟁’이라는 개념을 활용하며, 현 국제정세를 ‘신냉전’으로 볼 수 있는지, 또는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지만, 세계대회에서는 ‘국제질서의 위기’ 이상의 심층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못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시진핑 시대 중국의 국가전략 변화와 급격한 핵무력 확대, 북러 군사협력 강화 등의 사안에도 불구하고, 주로 서구권 참가자들이 여전히 미국의 군사행동을 가장 중요한 정세적 요인으로 제기했다. 그렇다면 미국은 어떠한 정세 변화에 조응해서 움직이는 것인지, 바이든 행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일부 참가자의 발언은 미국이 20~21세기 내내 적국을 만들며 군사주의를 강화해왔다는 서사 속에서 “중국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라는 구호를 강조하는 것으로만 보였다. 그 연장선에서, ‘반미’라는 틀에 부합하는 중동 정세에 대해서는 서구 참가자들과 비교적 합의가 잘 이루어졌으나, 동유럽 정세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 국제회의 폐막식에서 선언 초안을 검토할 때, 한 스웨덴 활동가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러시아의 침공을 규탄하는 것뿐 아니라 미국과 NATO의 러시아 포위 정책도 지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세계대회 실행위원회 측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종결’이라는 원안을 고수했다. 반면,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과 미국의 이란 공습이 UN 헌장 및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표현을 넘어, 1967년 UN 안보리 결의를 포함한 팔레스타인의 자결권 관련 결의를 위반했다는 문구를 추가하자는 제안이 선언 최종안에 반영되었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은 불가분의 과정’이라는 문구가 포함되었다. 북러 군사협력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정세는 일본 참가자들과 필자를 포함한 한국 참가자들만이 자세히 다루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중동의 전쟁에 집중하다 보니, 최근 몇 년간 가장 빠르게 핵탄두 수를 늘린 중국의 핵 전략은 세계대회에서 충분히 논의되지 못했다. 이를 타 지역에 대한 관심이나 지식 부족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구 활동가들이 진영론에 따른 ‘역(逆)이중기준’을 보인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계 문제의 원인을 서방, 특히 미국의 잘못으로만 보고, 북중러의 군사적·정치적 위협이나 소위 ‘대항폭력’으로서 테러리즘의 위험은 과소평가하는 태도다. 이러한 ‘역이중기준’은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예를 들어,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의 좌파 활동가들은, 일부 서구 사회운동이 반서방 진영론에 빠져 러시아와 이란의 시리아 내전 개입을 무시하거나 지지하고, 러시아의 권위주의와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판하지 않는 행태가 시리아와 우크라이나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지적했다. (타라스 빌로우스, “자결권과 우크라이나 전쟁”, 《사회운동포커스》, 2022년 5월 20일) 필자는 여기에 더해, 이러한 태도로 과연 핵무기에 맞선 대중운동을 재건하고, 특히 청년층을 조직할 수 있을지 우려한다. 정세에 적합한 분석과 대응은 반핵평화운동을 넘어, 좌파 운동 전체에 대한 대중적 신뢰를 좌우하는 문제다. 9월 2일 천안문 망루에 나란히 선 북중러 정상의 모습은 세계 권위주의 정권들의 연대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현재진행형이다. 여기에 20세기 미국 주류 외교정책과는 크게 다른 트럼프주의의 부상이 겹친 상황에서, 이에 대한 분석이 부족하거나 “모든 것이 미국 탓”이라는 주장에 머문 채로 청년과 시민을 조직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회진보연대 참가단은 세계대회 중 이러한 평가와 대안에 관해 발언하기도 했다. 2025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참가기⑥: 인류의 마지막 피폭지, 나가사키에서 “사회진보연대 회원들은 동북아시아의 구체적 현실에 기초한 평화운동, 청년들을 포함한 다수 시민을 조직할 수 있는 평화운동이 필요하다는 맥락에서 발언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북러군사협력, 한국에 대한 실제 사용을 염두에 둔 북한의 전술핵무기 개발은 한국 사회에 큰 위협으로 다가왔고, 이로 인해 평화운동에 대한 청년들의 인식은 비관적인 반면 ‘핵 억지력’에 대한 요구는 커지는 현실을 소개했다. 이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평화운동이 변화한 현실을 잘 모르는 세력이나 반미국가는 비판하지 않는 세력으로 보이지 않게 기민하게 분석과 입장을 내야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하고 구체적인 평화 연대 방안을 제시하여 평화를 실제로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줘야 하며, 그런 매개를 찾기 위해 이번 세계대회에 왔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전제가 되는 것은 북한 핵무기를 포함한 일체의 핵무기에 대한 반대를 명확히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해야만 북핵에 대한 공포로 인해 한국의 ‘핵 억지력’ 확보로 쏠리는 여론을 바꿔낼 수 있다고 발언했다.” 예를 들어, 2019년 말부터 2020년 초 진행된 일본공산당 강령 개정 과정을 보자. 일본공산당은 중국공산당의 핵무기금지조약 거부, 동중국해·남중국해에서의 패권주의적 행동, 홍콩과 위구르에서의 인권 탄압 등을 근거로, 이전 강령에서 중국에 대해 “사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새로운 탐구가 개시되었다”고 평가한 부분을 삭제했고, “미국 패권주의 반대”라는 구절을 “어떠한 나라의 패권주의에도 반대”로 수정했다. 이에 관해 시이 가즈오 당시 일본공산당 위원장은 다음과 같이 해설했다. “중국의 대국주의·패권주의적 행동으로 인한 사회주의의 부정적 이미지가 일본공산당의 전진에 장애물이 된다는 사실에 대응해, 개정안이 오해와 편견을 풀고 일본공산당의 매력을 넓혀 가는데 큰 힘을 발휘할 것이 틀림없다. 중국의 대국주의·패권주의, 인권 침해에 대해 사실과 도리에 입각한 정면 비판이 세계에서도 약한 가운데, 일본공산당이 지금 중국의 잘못된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세계 평화와 진보로 나아가는 데 대의가 있는 대응이다.”(“지금의 싸움이 미래 사회를 준비한다”, 《신문 아카하타》, 2019년 11월 6일.) 상기했듯, 이념적으로는 “모든 핵무기 반대”라는 축, 운동적으로는 ‘핵무기금지조약’이라는 축을 2025년 하반기와 2026년 정세 대응의 지침으로 합의한 것은 이번 세계대회의 중대한 성과다. 일본과 국제 반핵평화운동 단체는 이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2026년 4~5월 NPT 평가회의와 11~12월 핵무기금지조약 당사국회의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논의를 이미 시작했으며, 한국 사회운동이 어떻게 동참할 것인지가 우리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명확한 합의점은 ‘역(逆)이중기준’이 국제 반핵평화운동 내 진영론적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제어하는 효과를 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핵무기는 절대로 안 된다”는 원칙을 강조하면, 핵 사용 위협을 일삼고 세계 핵무기의 절반가량을 보유한 러시아나, NPT 탈퇴 후 핵무장에 나선 북한을 ‘정당한 생존권 투쟁’이나 ‘다극화 주도 세력’으로 추켜세우는 주장은 암묵적으로 제약될 수밖에 없으며, 실제로 세계대회에서 그러한 주장은 나오지 않았다. 또한, 현상 변경을 꾀하는 무력 사용을 금지한 “UN헌장에 기초한 질서의 재건”을 해답으로 부각한 것도 같은 효과를 냈다. 결국, 세계대회에서 국제정세에 대한 구체적 토론이 제한됐던 것은 국제 반핵평화운동 내 시각차와 이견을 반영해 차이를 부각하기보다는 합의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한일연대라는 측면에서도 올해 세계대회의 의의는 컸다. 한반도 해방 80주년이기도 한 올해, 한국 참가단이 51명으로 역대 최대 규모였으며, 사회진보연대도 역대 최대 인원이 참가했다. 일본 원수협은 한국 활동가들의 세계대회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지난해와 올해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러한 한일연대는 이웃 국가 간 역사적·종교적 갈등이 심화되는 세계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필자는 8월 9일 워크숍 발표 마지막에, 우크라이나 전쟁에 반대하는 한일연대 사례와 함께, 재한 러시아 반전 활동가 이야기를 소개했다. 이 활동가는 한일연대를 보며 언젠가 러시아 시민도 침략을 반성하고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다시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고 했다. 이를 통해 필자는 역사적 원한과 대립을 치유하고, 더 평화롭고 공정한 세계를 지향하는 시민 주도의 관계 형성을 한일 시민이 세계에 보여주자고 촉구했다. 한국 참가자들에게 홈스테이를 제공하며 따뜻하게 환대해 준 미조우라 부부의 집에서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나가사키 피폭자이자 나가사키원폭피재자협의회 이사 미조우라 마사루 씨, 세 번째가 부인인 미조우라 리츠코 씨. 세계대회의 후속 사업으로 9월 한국에서 열린 행사들은 한일 반핵평화운동의 연대를 확장하는 기회가 되었다. 9월 10일에는 민주노총 주최로 ‘한국-일본 피폭자 증언대회’가 열렸다. 다나카 시게미츠 일본 피단협 대표위원, 이기열 한국원폭피해자협회 전 부회장, 심진태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이 피폭 경험을 증언했다. 이어 9월 11일에는 일본 원수협이 주최하고, 사회진보연대를 포함한 한국 13개 정당·사회운동단체가 후원한 ‘한·일 반핵평화운동 교류회’가 개최됐다. (자세한 내용은 《사회운동포커스》의 「원폭 투하 80년, 한·일 피폭자와 연대하는 한·일 사회운동」과 「한·일 반핵평화운동의 연대와 모색」을 보라.) 한국 사회에서는 그동안 원폭 투하가 한반도 해방으로 이어졌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고, 북한 핵무장에 맞서 한국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논의가 반핵평화운동을 향한 관심을 압도해 왔다. 이번 세계대회 참가 경험이 일본 반핵평화운동과 연대를 강화할 뿐만 아니라, 한국 내 반핵평화운동을 활성화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1.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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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25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주제와 현황
1)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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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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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025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논의
1) 현 정세에 대한 진단 합의
2) 과제 합의
4. 2025년 원수폭금지세계대회의 논의 평가
1) 한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패권주의, 권위주의, 군사주의를 명확히 비판하고, 이에 구별되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사회주의 운동과 반핵평화운동의 미래를 밝히는 길이라는 시각은 원수폭금지세계대회 주최 측도 공유한다.
2)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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