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그리고 올 한 해 각 쟁점이 중요하게 두드러졌다.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 결정 시기가 다가올 때마다 인플레이션과 고용 및 경기 상황을 두고 통화 긴축이 이어질지에 전 세계가 관심을 기울였다. 중국은 상반기 민간소비와 투자의 회복세가 저조한 가운데, 비구이위안으로 대표되는 주요 부동산 개발 회사의 파산 위험에 대한 우려가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은 상반기 경기가 하강했다가 하반기에는 회복될 것이라는 연초의 전망과 달리, 부진한 수출과 저조한 성장률이 하반기까지 이어졌고 그로 인한 ‘세수 펑크’ 문제가 불거졌다.
2023년이 마무리되는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올해와 마찬가지로 2024년에도 세계경제의 핵심 위협은 1970년대식 스태그플레이션과 2008년식 부채위기가 결합할 가능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인플레이션 위협이 상존한 가운데 고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전반적으로 가계·기업의 부채와 정부의 재정에 부담이 가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각국의 경제 상황에 따라 고금리 기조 장기화에 따른 파급효과의 편차가 커지고 있는데, 한국 경제의 경우 인플레이션, 재정위기, 부채위기 모두에서 상당히 취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 세계 경제 전망
1) 인플레이션 전망
그러나 여전히 인플레이션이 불편하게 높은 수준에서 고착화되는 ‘끈적한 인플레이션’(sticky inflation)에 대한 우려가 남아 있다. 즉 지금까지의 인플레이션 감축이 공급망 회복과 서비스업 회복의 영향으로 다소 순조롭게 진행되었다면, 앞으로는 높은 금리 수준에 따른 경제의 취약성이 커지는 한편 지정학적 불안과 근원물가의 경직적인 흐름으로 인해 인플레이션 감축 과정이 순탄치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작년 세계 주요국 인플레이션 고점은 2022년 6월 미국 9.1%, 7월 한국 6.3%, 10월 유로 지역 및 영국 각각 10.6%, 11.1%, 2023년 1월 일본 4.3%였고, 최근 인플레이션 수준은 영국 6.7%, 유로 지역 4.3%, 미국과 한국이 3.7%, 일본 3.2%다. 지난해 엄청난 인플레이션과 비교해보면 올해 주요국 대부분의 인플레이션은 4%대로 내려온 모양새지만, 여전히 기존 중앙은행의 물가 목표인 2%를 현저하게 상회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 3분기 이후 인플레이션 둔화 흐름이 제약되고 있는데, 그 원인은 국가별로 다른 모습을 보인다. 유로 지역은 에너지 가격 상승을 반영하는 공급충격의 이차효과와 함께 서비스 부문에서 높은 수준의 임금 상승이 이어지면서 인플레이션 둔화 흐름이 가장 크게 제약되고 있다. 게다가 제조업 부진이 지속되고 금리 인상의 영향이 본격화되면서 경제성장률은 올해 0.8%, 내년 1.3%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유로 지역의 경우 인플레이션율은 더 높고 성장률 둔화는 더 심하다는 점에서 스태그플레이션의 강도가 더 강하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공급충격에 따른 효과는 대부분 완화되었지만, 견조한 고용 상황과 수요 회복으로 서비스 물가의 상승률이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은 수요가 부진한 가운데 서비스 물가 상승 압력이 약화하고 있지만, 원자재 등 비용상승압력의 파급효과가 지속되면서 3분기 들어 소비자물가가 상승하는 추세로 돌아서기도 했다. 이러한 차이에 따라 주요 기관들은 향후 물가상승률이 중앙은행의 정책목표인 2%에 도달하는 시점을 미국 2026년, 유로 지역 2025년 하반기, 한국 2025년 상반기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 연준의 기준금리가 적어도 2024년까지는 현재 수준에서 이어지리라는 전망이 우세해지고 있다. 그 파급효과는 각국의 경제 상황에 따라 편차가 클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인플레이션의 위협이 여전한 가운데 금리 인상의 여파가 부채위기와 재정위기의 가능성을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주요 선진국에서 공공부채와 민간부채 수준이 매우 높은 가운데 신흥국의 부채 증가 속도가 매우 빠르다. 금리 인하에 대한 전망이 아직 불투명한 상황에서, 이러한 부채 부담은 민간의 경제활동을 저해하고 정부의 경제정책에 제약을 가하면서 세계 경제 전반의 침체를 추동하고 있다. 즉, 이른바 ‘중·고금리-고부채-중물가’ 시대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IMF는 10월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에서 “세계 경제의 회복세는 절뚝거리고 있고 편차가 커지고 있다”고 진단하면서, 세계 경제의 주요 위험요인으로 ▲ 여전한 인플레이션 고착화 우려 ▲ 선진국 경제의 회복세 둔화 ▲ 통화긴축의 장기화에 따른 각국의 재정위기(특히 미국의 재정위기)와 부채위기(특히 중국의 부동산 위기)를 지적하고 있다.2) 연착륙 기대와 재정위기 우려가 엇갈리는 미국 경제
이렇게 미국 경제가 양호한 흐름을 보인 데에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빠르게 회복된 고용과 초과저축에 기반한 민간소비 회복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다. 먼저 고용을 살펴보면, 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비농업고용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예를 들어 2023년 1월 비농업고용 증가 51.7만 명 중 레저·숙박업이 12.8만 명, 전문·기업서비스가 8.2만 명, 보건의료가 5.8만 명을 차지했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 직후인 2020년 3월부터 2021년 4월까지는 노동력이 초과공급 상태였으나,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약 550만 명의 초과수요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노동력 공급 측면에서는 노동시장 참가율 하락과 노동인구 증가율 둔화가 주요 요인으로 꼽히는데, 특히 팬데믹 이후 고령자 은퇴 등으로 인해 노동시장 참가율이 2023년 1월 기준 62.4%로, 팬데믹 이전인 2020년 2월 63.4% 수준을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수요 측면에서는 취업자 수 증가보다는 공석 일자리 수의 급증이 눈에 띈다(실업자당 공석 일자리 비율이 1.9배에 이른다). 이는 임금소득과 실질구매력 개선으로 이어져 소비 회복세를 뒷받침했다. 이와 함께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제약되었던 소비와 정부의 이전지출에 기인한 초과저축이 민간소비의 재원으로 활용되었는데, 연준의 추정에 따르면 2021년 하반기 이후 약 1조 달러 내외의 초과저축이 소비지출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내년에는 미국 경제 역시 금리 인상의 영향이 시차를 두고 누적되는 한편 그간 견조한 소비 회복을 뒷받침한 요인들이 사라지면서 성장세가 점차 둔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IMF는 서비스 부문 회복이 거의 완료되는 가운데 지속적인 제조업 둔화와 함께 서비스업도 점차 둔화하고 있으며 노동시장과 경제 활력이 이완될 것으로 본다. 한편 8월 현재 가계저축률이 3.9%로 팬데믹 이전 수준을 하회하면서 초과저축이 점차 소진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남은 초과저축의 약 60%를 소득 상위 20%가 보유하고 있으며, 상위 20% 이하의 초과저축은 올해 말까지 소진될 것으로 평가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 역시, 실업률이 낮기는 하지만 지난해 창출된 일자리의 상당수가 파트타임 일자리였고 그나마 그 증가세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으며 제조업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 경제의 고용 상황이 향후 악화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연준의 고금리 정책이 장기화되면서 가계, 기업, 정부의 총수요가 감소할 것이므로 미국 경제의 연착륙 전망은 여전히 낙관적인 견해라고 평가한다.
나아가 미국의 재정위기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2020년 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올해 9월까지 미국의 국가 부채는 23조 달러에서 33조 달러로 3년 반 만에 약 10조 달러가 늘었다. 미국 재무부에 따르면, 2023 회계연도(2022년 10월~2023년 9월) 재정적자 규모가 2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2023 회계연도에 부담한 국채 이자 비용이 1년 전보다 23% 늘어난 8793억 달러로 집계된다. 이는 연간 전체 예산의 15%에 달한다. 미 의회예산국(CBO)은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이 앞으로 현재 100% 수준에서 2053년에는 180~250% 수준까지 치솟을 것으로 전망했다. 국제신용평가사 피치는 향후 3년간 미국의 재정건전성이 악화하고 정치 양극화로 인해 ‘거버넌스가 부식’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지난 8월 미국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강등했다.
이에 따라 올해 하반기부터 미국의 장기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는 추세를 보였다. 시중금리의 기준이 되는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는 연초 3.5% 수준이었다가 10월 말에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7월 이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5%에 도달한 뒤 현재까지 4.5% 수준에 이르고 있다. 장기 국채 금리가 급등한 데에는 연준의 고금리 정책이 장기화될 것이라는 전망과 미국 정부의 재정적자에 대한 우려가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전 뉴욕 연방은행 총재 윌리엄 더들리는 지난 7월 시점에서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올해 4.5%까지 치솟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가 제시한 근거는 세 가지였다. 첫째, 실질 중립금리가 0.5%에서 1%로 상승했을 수 있다. 둘째,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되면서 향후 10년 평균 인플레이션이 연준의 정책 목표인 2%를 웃도는 2.5%가 될 가능성이 있다. 셋째, 미국의 재정적자 문제와 연준의 긴축정책이 장기화되면서 기간 프리미엄이 1%에 도달할 수 있다. (즉 10년물 국채 금리 4.5% = 실질 중립금리 1%+장기 기대인플레이션 2.5%+기간 프리미엄 1%)
달리 말해, 이러한 장기금리 상승은 미국 경제가 연착륙할 수 있다는 낙관적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플레이션 고착화와 재정위기에 대한 비관적 우려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미국의 장기 국채 금리 상승은 글로벌 금리와 시중금리 상승을 촉발해 세계 경제의 수요와 성장세 둔화에 영향을 미치고, 경제 기초가 취약한 국가의 신용위험을 부각할 수 있다.
지난 가을호 글 「미국 경제, 장기침체와 부채위기의 정치적 함의」는 최근 서머스와 블랑샤르 사이에서 벌어진 장기침체 논쟁을 소개하면서, “만약 잠재산출량 성장세도 계속 하락하고 실제 경제성장률은 여전히 그에도 못 미치는 상태에 있으나, 정부지출이 과대하고도 비생산적이며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높은 이자율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이러한 상황을 부르는 이름은 그 악명 높은 스태그플레이션”이라는 함의를 발견할 수 있다고 정리한 바 있다. 2024년을 앞둔 현재 시점에서도 아직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이 종료되지 않았고 세계적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게다가 올해 미국 경제에서 급격한 서비스 부문 회복과 견조한 소비 회복이라는 요인을 한 꺼풀 들어내 보면, 여전히 장기침체와 스태그플레이션의 위협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3) 코로나19와 부채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중국 경제
지난해 12월 중국 정부가 ‘제로 코로나 정책’을 폐기하면서, 주요국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나타난 것과 비슷하게 중국 역시 민간 소비 회복에 주로 기반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중국의 상반기 경제성장률은 5.5%였는데, 이는 중국 정부의 목표치인 5%는 넘지만, 주요 기관들의 예상치인 7% 안팎보다는 저조한 것이었다.
그런데 성장의 내용 측면에서 보면, 민간부문은 여전히 위축된 상태에서 국유부문이 성장을 떠받쳤다. 소비는 4월 지난해의 기저효과로 잠깐 두 자릿수 증가세(18.4%)를 보였다가 6월에는 다시 3% 증가하는 데 그쳤다. 특히 여행이나 외식과 같은 서비스 수요에 비해 자동차, 전자제품, 가구와 같은 내구재 수요의 회복이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고정자산투자의 경우 국유기업은 8.1% 증가한 반면, 민간기업은 0.2% 감소했다. 수익성 지표인 공업기업 이익 증가율(1~5월, 전년 동기 대비)은 국유기업이 -17.7%, 민간기업이 -21.3%로 나타났다.
이러한 민간부문의 회복세 부진을 반영하여 중국 경제에는 세계적 인플레이션 추세와 달리 디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올해 상반기 소비자물가는 수요부진과 생산자물가 하락세 지속의 영향으로 전년동기대비 0.7% 상승했고, 생산자물가지수는 부동산 경기 부진과 과잉생산의 영향으로 오히려 3.1% 하락했다. 이러한 물가 하락 현상은 대외적 요인을 고려하더라도 중국 국내 경기회복 부진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올해 중국 경제의 회복 부진이 두드러지면서 중국의 부상이 이제 정점에 다다랐다는 이른바 ‘중국 피크론’이 다시금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피터슨국제연구소소장 아담 포젠은 8월 2일 포린어페어스에 ‘중국의 경제기적은 끝났다’는 글을 기고했다. 그는 길게 보면 2015년, 짧게 보면 중국 정부가 강력한 코로나19 방역정책을 펼친 2020년부터 중국 경제에서 민간 부문의 활력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가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확장한 2015년부터 현재까지 저축률이 급증했고, 민간 부문 내구재 소비는 약 1/3 감소했으며, 민간 투자는 약 2/3 감소했다. 그리고 포젠은 이것이 중국 정부가 방역정책을 철회한 이후에도 경제가 다시 살아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라고 주장한다.
즉, 포젠은 중국 정부의 극단적인 봉쇄정책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주제들이 이전과 달리 일상적인 경제활동에 권위주의 정권이 언제든 자의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는 불확실성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따라 투자보다는 저축과 유동성 자산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를 중국의 ‘경제적 롱 코비드’ 현상이라고 지칭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이 단기적인 민간 투자 축소를 넘어, 중국이 국가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응하도록 만들고, 그에 따라 생산성 발전을 더욱 저해함으로써, 중국 경제를 장기적인 저성장에 빠뜨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중국 경제의 장기궤도에 관한 연구들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 경제 역시 급속한 이윤율과 경제성장률 하락을 경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중국 경제의 급속한 이윤율 하락은 국유기업과 같은 비효율적 제도로 인해 발생한 자본생산성의 하락과, 저렴한 노동력이 고갈되면서 나타난 이윤압박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이렇게 본다면 ‘피크 차이나’는 사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경제성장 둔화를 새로운 정상 상태로 인정한 ‘신창타이’가 제기된 10년 전으로 소급할 수 있을 것이다.
급속한 성장둔화를 마주한 중국공산당은 경제안보를 포괄하는 국내안보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국가의 경제적 역할을 다시 강조하며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했다. 또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 경제의 회복은 사실상 대규모 부채에 기반한 투자에 의해 추동되었다. 2010년 이후 GDP에서 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40%를 훨씬 넘고 있으며, 정부와 민간(특히 기업)에 대한 금융기관의 대출금은 2007년 말 경상 GDP의 139%에서 2022년 말 297%로 급등했다. 특히 부동산 시장이 건설부문의 성장동력, 토지 판매를 통한 지방정부의 수입원, 민간의 투자처라는 3중적 기능을 수행하며 부채에 의존하는 경제성장의 핵심 부문이 되었다.
현재 중국 경제가 마주하고 있는 여러 문제와 한계들은 부채에 의존하는 경제성장의 부작용에서 기인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2021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부동산 개발기업의 부채위기와 금융불안에 대한 우려가 대표적이다. 중국 부동산 개발기업의 부채위기는 부동산 시장 위축과 중국 정부의 재무건전성 규제가 부동산 업계의 과다 차입 구조와 결합하면서 발생했다.
부동산 개발기업은 차입으로 자산을 외형적으로 확장하는 데 치중했고, 주택 구매자가 주택이 완성되기 전에 대금을 미리 완납하는 관행에 따라 납부한 금액을 다른 지역의 토지를 매입하거나 계열사를 확장하는 데 사용했다. 이는 주택가격이 상승하는 상황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면서 유동성 위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동산 시장은 본래 산업화와 도시화로 부동산 장기수요가 증가하는 선순환 과정을 따라 확대되어 왔으나, 점차 도시화가 성숙단계에 접어들고,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주택가격이 폭증하면서 2021년을 기점으로 투자와 판매 모두 부진하고 있다. (중국의 주택가격은 2021년 7월을 정점으로 하락하기 시작해 최근에는 2019년 초 수준에 이르렀다. 부동산 투자는 2022년에 이어 2023년에도 약 10% 감소했다.)
여기에 2020년 8월 시진핑 주석이 집값 거품을 잡기 위해 ‘3개의 레드라인’(삼도홍선)이라는 대출 제한 규정을 시행한 것도 부동산 개발기업의 유동성 위기에 영향을 미쳤다. 삼도홍선(三道红线)은 ▲ 선수금을 제외한 부채비율이 총자산 대비 70% 이상 ▲ 자기자본 대비 순부채 비율이 100% 이상 ▲ 단기부채가 현금보유액 이상이라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부동산 개발기업이 이 기준에 하나 해당하면 신규 대출 한도를 10%, 둘 해당하면 20% 제한하며, 셋 모두 해당하면 신규 대출을 금지하는 규제 조치다. 이에 따라 지난 3년간 중국 3대 부동산 건설사 그룹인 헝다(恒大, Evergrande), 완커(万科, Vanke), 비구이위안(碧桂園, Country Garden) 모두 채무 불이행 이슈가 제기된 가운데, 50개 이상의 개발기업이 부도를 냈고 상위 50개 기업 중 34개가 달러 채권 이자를 상환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중국 지방정부의 재정과 부채 문제 역시 심각하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경기부양을 위한 확장적 정책기조를 유지하면서 지출이 급증한 가운데, 부동산 시장 침체로 인해 지방정부 세입의 약 40%를 차지하는 토지사용권 매각 수입이 크게 감소하고 지방정부자금조달기구(LGFV)의 채무 부담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지방정부는 작년 역대 최대적자(11.6조 위안)를 기록한 가운데 채권 발행에 따른 연간 이자 부담이 2022년 1.3조 달러에서 2023년에는 1.55조 달러 내외로 약 22% 급증하여 재정압박이 가중되고 있다. 이에 따라 중국 지방정부의 부채 규모는 대략 40조 위안(GDP 대비 32%) 수준으로 2019년에 비해 19조 위안 증가했다. 특히 지방정부의 인프라 투자 자금조달창구 역할을 담당하는 LGFV의 부채(GDP 대비 53% 추정)를 포함할 경우 부채 규모와 그 증가 속도가 엄청난 수준이다.
다만 주택 부문에 대한 일반 금융기관의 직접적인 노출이 제한적이고 중앙정부의 재정여력이 아직 충분하다는 점에서, 현재 시점에서 중국 경제가 부동산 부문의 부실로 급격한 금융위기나 경기침체를 겪을 가능성이 높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동산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투자에 의존하는 경제성장이 한계에 다다르고 기업과 정부에 누적된 부채가 투자와 경제정책에 커다란 제약으로 작용하면서 앞으로 중국 경제가 저성장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에는 이견의 여지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IMF는 앞서 언급한 10월 세계경제전망에서, 세계경제의 위험요인 중 하나로 중국의 부동산 위기를 지적하면서 중국 경제가 신용주도형 부동산 성장 모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2024년 역시 단기적인 경기침체보다는 중장기적으로 성장을 제약하는 요인의 영향을 받으며 경제성장률이 올해보다 0.8% 하락한 4.2%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다. 3. 한국 경제 전망
상반기 수출 부진은 부동산 시장 하방 압력과 결합해, 정부 세입이 당초 예상보다 격감하는 이른바 ‘세수 펑크’로 이어졌다. 이는 지난해에 비해 정부지출 규모를 삭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인세와 양도소득세가 격감하면서 세입이 더욱 줄어든 데 따른 것이다. 재정 완충이 약화하는 이러한 추세는 내년까지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국은행은 지난 1월 이후 기준금리를 3.5%로 유지하고 있지만, 미국 장기금리의 상승 추세에 따라 시장금리는 조금씩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여전히 부동산PF 대출 부실 위험이 잠재적으로 존재한 가운데 가계와 기업의 부채 부담이 무거운 상황에서, 1년 정도 이어지고 있는 고금리 기조가 앞으로 더 장기화할 때 부채위기의 가능성과 경기에 미치는 부담이 더욱 커질 것이다. 이에 따라 ‘물가냐 부채냐’라는 딜레마를 놓고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둘러싼 논쟁이 계속해서 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1) 장기화하는 내수와 투자의 부진
2024년에는 수출과 설비투자 회복에 대한 기대를 바탕으로 경제성장률이 2.2%일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건설투자는 주택부문 건설 수주 위축을 반영해 1% 감소하고, 민간소비는 금리 인상의 여파로 가계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지고 대외 여건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1.8% 증가하는 데 그쳐 회복세가 부진할 것으로 전망된다. KDI는 이에 더해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의 확대로 국제유가가 급등하거나 중국의 부동산경기가 급락할 경우를 내년 경제 전망의 위험요인으로 지적했다.
인플레이션은 이러한 내수 둔화의 영향이 반영되면서 하락 흐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따라 올해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5%, 근원물가 상승률은 3.4% 수준으로 예상된다. 2024년에도 이러한 수요 둔화의 영향으로 하락세가 이어져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6%, 근원물가 상승률은 2.4% 수준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현재까지 식료품물가 상승률이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크게 웃돌고 있으며, 여전히 전쟁과 이상기후 등으로 인한 물가상승 압력 요인이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플레이션 위협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용은 지표상(3/4분기 계절조정)으로는 고용률이 62.6%, 실업률이 2.6%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상대적으로 양호한’ 모습을 보였다. 한국은행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기회복 과정에서 고용률이 빠르게 상승하고 실업률은 빠르게 하락하는 ‘고용 호조 성장’ 현상의 원인으로 ▲ 대면 서비스업의 빠른 회복 ▲ 근로시간 감소 ▲ 여성 고용의 큰 폭 증가 ▲ 노동 비축을 제시한다. 즉, 사회적 거리두기로 큰 충격을 받았던 대면 서비스업이 빠르게 회복하면서 여성을 중심으로 취업자가 증가한 한편, 기업이 기존 취업자의 고용을 유지하는 경향을 보이면서 고용 지표가 양호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 취업자 수 증감을 자세히 살펴보면, 제조업과 건설업 취업자 수는 계속해서 감소했다. 서비스업 취업자 수는 큰 폭으로 증가했지만, 그 증가세는 점차 완만해지고 있다. KDI는 30대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이 상승했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이는 해당 연령대에서 자녀가 있는 여성 비중이 감소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30대 여성 경제활동참가율의 상승은 현재 시점에서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고용률을 유지하는 핵심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으나(다른 하나의 요인은 고령층 취업자 수의 증가다), 그 이면에는 저출산 현상의 심화와 산업별 양극화라는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내년에는 제조업과 건설업의 부진이 지속되는 가운데 서비스업 회복세가 둔화하면서, 취업자 증가 수는 올해 32만 명에서 내년 21만 명으로 증가 폭이 감소하고 실업률은 2.7%에서 3.0%로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2) 약화하는 정부의 재정완충 여력
정부는 이러한 대규모의 세수결손에 대해 (국채 발행이 아니라) 세계잉여금 4조 원과 외국환평형기금(외평기금) 등 기금 여유재원 24조 원을 활용하고, 일부는 사업 집행을 하지 않거나 지자체·교육청의 재원을 활용해 보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국채 발행을 회피하더라도 환율 방어에 써야 할 외평기금을 세수결손에 사용하는 것은 통상적이지 않고, 외평기금은 결국 외평기금채권으로 조성되기 때문에 또 다른 빚을 내는 ‘돌려막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또한 정부 사업 축소와 지자체·교육청에서의 지출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사회적 논란이 불가피할 것이다.
문제는 내년에도 세수 회복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게다가 정부지출 증가율을 억제하더라도 여전히 재정적자와 국가채무 수준이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2024년에 예산안의 총지출 증가율은 2005년 이후 최저인 2.8%로 편성되었으나 총수입 증가율이 2.2% 감소(전년대비 13.6조원 감소한 612.1조 원)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관리재정수지 적자(GDP 대비 3.9%)와 국가채무(GDP 대비 51.0%) 수준은 더욱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3) ‘부채함정’에 빠진 한국 경제
IMF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한국의 GDP 대비 민간부채 비율은 281.7%였다. 2017년과 비교하면 5년 만에 42.8%p가 늘었는데, 이는 조사대상 국가 중 가장 큰 증가폭이었다. 민간부채의 증가를 주도한 것은 가계부채였는데,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17년 92.0%에서 지난해 108.1%로 올랐다. 전 세계에서 가계부채가 GDP보다 많은 국가는 한국이 유일하다. 가계부채 급증의 원인으로는 코로나19 시기 부동산 시장과 증권 시장에서의 이른바 ‘빚투’와 사회적 거리두기로 손실을 입은 자영업자의 생계형 대출이 지적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상반기까지는 기준금리가 인상되고 부동산 시장이 침체하면서 전체 가계대출 규모가 다소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그러나 올해 상반기 들어 주택가격이 상승세로 돌아서자, 4월부터는 주택담보대출을 중심으로 다시 가계부채 증가세가 지속되고 있다. 특히 10월에는 6조 3천억 원 증가해 지난 2021년 9월 이후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이러한 추세에 대해 한국은행은 지난 10월 19일 발표한 통화정책방향에서 인플레이션의 위협이 여전한 가운데 가계부채의 증가 흐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에 따르면, 가계부채의 급증은 주택담보대출이 대폭 늘어난 것이 주요 원인이라는 점에서 단기적으로 건전성 위기가 도래할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경기순환에서 부동산 시장의 활력에 대한 의존성이 커지고, 자산 불평등이 심화되며, 고금리에 따른 이자부담이 커지면서 소비가 위축되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계부채와 함께 기업부채도 경고등이 켜진 상태다. 기업부채 역시 코로나19 위기를 지나며 757조 원 급증했는데, 대부분 대출(600조 5천억 원)과 채권 발행(119조 7천억 원)으로 불어났다. 이에 따라 한국 비(非)금융 기업의 부채 비율은 2019년 101.3%에서 올해 3분기 126.1%로 높아져 홍콩과 중국에 이어 세 번째를 기록했고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부채 비율(108.6%)을 넘어섰다. 또한 이는 작년 3분기와 비교해 5.7%p, 올해 2분기와 비교해 5.2%p 증가한 것으로,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는 최근 상황에서도 오히려 기업부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지난해 하반기 ‘레고랜드 사태’로 촉발된 회사채 시장의 경색으로 인해 기업이 회사채 발행보다 대출을 확대하는 것으로 대응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그런데 이를 감안하더라도, 올해 설비투자가 부진한 상황에서 기업부채가 급증했다는 것은 늘어난 기업부채가 대부분 투자보다는 당장의 생존을 위한 자금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가계부채와 마찬가지로 기업부채 역시 현재 시점에서 단기적인 채무불이행과 재무건전성 문제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할 가능성이 크지는 않은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한계기업을 비롯한 취약부문을 중심으로 부채 부담이 커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대출 규모 측면에서 볼 때 대기업 대출은 200조 원 대에서 크게 상승하지는 않은 반면, 중소법인과 개인사업자 대출이 급증했다. 또한 기업의 이자지급능력은 약화하고 연체율과 부도 증가율이 상승하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기업의 이자지급능력을 나타내는 이자보상배율(영업이익/총이자비용)은 수익성 저하와 시장금리 상승 영향으로 2021년 8.7배에서 2022년 5.1배로 하락했다. 이자보상배율이 1보다 낮은 취약기업 비중 역시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상승했다.(2021년 말 47.8%, 2022년 말 49.2%) 연체율은 2021년 이후 계속해서 상승해 올해 2분기 0.37%를 기록했고, 올해 10월까지 부도 증가율은 전년 대비 약 40%에 이른다.
한국의 경제 규모 대비 민간부채의 규모가 지나치게 크다는 지적은 2000년대 이후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이미 부채가 막대한 규모로 쌓여 있는 상황에서 코로나19 위기 시기에 이어 최근 금리 인상 시기에도 다른 주요국과 비교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부채가 증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시점에서 단기적으로 건전성 위기가 도래할 가능성은 낮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지만, 고금리가 장기화하면서 취약성 증가의 징후가 뚜렷해지고 있다. 게다가 빠르게 누증되고 있는 부채 부담은 민간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키면서 단기적 경기뿐만 아니라 장기성장세를 제약하는 핵심 요인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부채가 성장의 발목을 잡는 이른바 ‘부채 함정’에 한국 경제가 빠졌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4. 결론
이러한 상황에서 부르주아 경제학계에서는 세계경제가 앞으로 인플레이션이 일단락되면서 세계 금융위기 이후의 2010년대와 같은 저금리·저물가·저성장의 장기침체로 복귀할 것인가 아니면 부채위기와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될 것인가를 둘러싼 장기침체 논쟁이 재개되고 있다. 지난 가을호 특집 「미국 경제, 장기침체와 부채위기의 정치적 함의」에서는 이러한 논쟁을 마르크스주의의 정상상태(定常狀態, stationary state) 이론의 관점에서 종합해보면 “수익성 있는 기술 진보의 어려움 → 고정자본 투자수익률 하락 → 만성적인 수요부족과 이력현상에 따른 장기침체”라는 그림을 얻을 수 있으며, 이러한 위기 메커니즘이 결국 국가의 재정위기와 부채위기로 나타난다고 강조했다.
장기침체와 부채위기는 정치위기와도 맞물려 있다. 특히 미국의 재정적자가 지속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이 커지는 것과 동시에,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가 미국 경제와 세계 경제의 안정성에 위험을 더하고 있다는 우려가 계속해서 커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세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며 심화해온 미국의 인민주의와 정치적 양극화가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2024년은 미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주요 선거 일정이 예정되어 있다. 고물가와 고금리가 장기화하고 세계적 불안정성이 증대하는 가운데 포퓰리즘과 정치가 경제를 휘두르는 ‘폴리이코노미’ 현상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대선과 ‘트럼프의 귀환’이 대표적이다.
한국경제는 2020년대 장기침체와 부채위기라는 전망의 표본이 되고 있다. 올해 한국경제는 코로나19 위기로부터 회복하는 과정에서 잠시 가려져 있었던 문제, 즉 반도체 수출과 부동산 경기에 대한 의존성과 급증한 민간과 정부의 부채로 인한 문제가 본격적으로 표면화되었다. 또한 한국경제의 장기저성장, 즉 잠재성장률 하락에 대한 경고음은 더욱 커지고 있다. OECD가 추정한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올해 1.9%, 내년 1.7%로 처음으로 1%대로 하락했다. 지난해 경제 정세 전망 「장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라는 쟁점으로 살펴본 세계경제」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국의 잠재성장률이 하락하는 주요 원인은 인구감소와 고령화 그리고 생산성 정체다.
장기침체와 잠재성장률 하락에 대해 부르주아 경제학은 노동·연금·교육 개혁과 같은 구조개혁을 주문한다. 그러나 정상상태에 근접할수록 누구도 보편적 이익을 위해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양보하지 않으려 하며, 사회의 경쟁과 갈등은 증폭되고, 정부와 국가로 불만과 요구가 집중된다. 최근 한국 역시 통화정책을 둘러싸고 ‘물가냐 부채냐’라는 쟁점이, 재정정책을 둘러싸고 ‘확장이냐 긴축이냐’라는 쟁점이 격화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경제의 장기침체와 구조적 위기에 대한 대안은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지 못하다. 오히려 다가오는 총선을 앞두고 집권여당과 야당을 막론하고 포퓰리즘 정치가 득세하고 있다. 사회운동은 이러한 포퓰리즘 정치에 맞서 역량을 축적하고 자본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한다. ●
바이든 행정부는 세계정세를 국제적 표준을 둘러싼 국가자본주의와 민간자본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정과 권위독재정의 경쟁으로 특징지으면서, 전략적 경쟁을 경제·안보·가치를 포함하는 장기간의 체제 경쟁으로 한층 심화했다. 또한 트럼프 행정부 시기 훼손되었던 규칙 기반의 다자적 질서와 동맹 질서를 복원하면서 양국의 경쟁은 양자적 차원을 넘어 세계적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중국은 지난해 10월 시진핑 집권 3기를 공식화한 20차 당대회에서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 노선을 변함없이 이어갈 것임을 재차 강조했다.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행보를 볼 때, ‘전략적 경쟁’은 적어도 2020년대에 지속해서 세계정세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사회운동은 이렇게 변화하고 있는 정세를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할 것인가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먼저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강화와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전략적 경쟁의 형성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재정립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전략적 경쟁의 특징을 짚고, 그에 대응하는 중국의 쌍순환 전략의 내용을 정리해본다. 마지막으로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이른바 ‘반도체 전쟁’의 경과를 살펴보고 전략적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갖는 의미를 짚어본다.1. 미중관계의 결정적 변곡점, 2008년 세계금융위기
1) ‘국진민퇴’와 ‘군민융합’: 중국 국가자본주의의 강화
미국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는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를 가장 잘 설명하는 용어가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중국을 국가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특징으로 ▲ 경제에서 민간과 공공 부문이 6:4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 ▲ 금융자산의 85~90%가 국유기구에 의해 통제된다는 점, ▲ 국가와 당이 국유기업을 직접 통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민간부문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 ▲ 경제에 있어 정부의 큰 역할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합의가 있다는 점을 제시한다.
나아가 중국공산당이 중국 경제의 기본 방향을 설정하는 기존의 역할을 넘어 구체적인 정책까지 집행하고 감독하는 경향에 주목해, 중국의 경제체제를 ‘당-국가 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관점도 있다. 이러한 관점은 특히 중국 국가자본과 당 조직이 민간기업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막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이른바 ‘대조타’(大操舵, Grand Steerage)에 주목한다. 이에 따르면, 최근 중국에서는 국가자본이 국유자산관리공사와 산업인도기금을 통해 민간기업 지분에 대규모로 참여하고 있고, 민간기업과 외국인 투자기업 내에 당 조직 설립을 강제하고 있다. 베리 노튼에 따르면, 산업인도기금의 규모는 2018년 1.34조 달러로 중국 GDP의 10%에 이른다. 또한 2018년 현재 민간기업의 48%가 공산당 조직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진민퇴’(國進民退)로도 일컫는 이러한 중국 당-국가 자본주의의 출현 또는 국가 자본주의의 강화는 세계금융위기를 전후로 후진타오 주석 집권기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후진타오 정부는 경제성장 일변도에서 벗어나 균형발전과 질적성장을 이루겠다는 경제정책 기조를 내세웠으나, 2008년 금융위기에 대응하고 경제성장률을 유지하기 위해 4조 위안에 이르는 재정지출과 함께 무제한적인 유동성 공급을 시행했다. 또한 국유기업과 국유은행을 동원한 대규모 투자를 감행했다. 중국은 2009년 GDP의 33.4%에 달하는 국유기업 주도의 고정자본투자를 통해 2010년 10.8%의 경제성장률을 달성함으로써 금융위기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과잉투자가 극대화되었고, 국유기업의 수익성 하락과 부채율 상승이라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또한 이 시기 대부분의 투자가 거대한 인프라 건설 사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이때부터 대규모 건설 부문을 중심으로 하는 중국 경제의 투자 의존성이 구조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부동산 가격 급등과 불평등 증대라는 사회문제 역시 심화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산업생산량이나 생산요소 투입을 늘려 급속한 성장을 끌어내는 방식이, 이제는 중국 경제가 성장 속도가 둔화하는 ‘신창타이’(新常態, New Normal)에 진입하는 것을 가속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기술혁신과 제도개혁을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발굴하지 못하면 중국 경제가 중진국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2013년 집권한 시진핑 주석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유자본(주로 에너지, 건설 부문)의 해외진출 전략으로서 ‘일대일로’와, 첨단산업 중심의 기술적 도약을 위한 전략으로서 ‘중국제조2025’ 계획을 추진했다. 먼저 ‘일대일로’ 전략은 중국의 막대한 외환준비금과 대규모 과잉자본을 활용해 중국 경제를 지지할 세계적 공급망을 확립하는 한편, 중국식 국가자본주의를 하나의 모형으로 확립하고 세계화하려는 시도를 상징한다. 일대일로 전략에 따라, 중국의 국유기업은 국가와 당의 지침을 받아서 주로 부채가 누적된 주변부 국가를 목표로 기반시설을 건설하고 해외 영업을 수행하고 있다. 2022년 12월 현재 80개의 중앙정부 국유기업이 138개 국가 및 지역에서 4700개 이상의 일대일로 건설 프로젝트에 투자하거나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제조2025’ 계획은 중국의 제조업을 노동·자원집약형 산업에서 기술집약형 산업으로 도약시키려는 산업고도화 전략이다. 이를 위해 ▲ 정부 주도의 R&D 프로그램과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 활성화, ▲ 반도체, AI, 신에너지 자동차 분야 등 보조금 확대, ▲ 해외투자 진출과 적극적인 인수·합병을 통한 기술 노하우와 브랜드 획득을 장려한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또한 이후 2018년에 갱신된 ‘중국제조2025’ 계획은 13차 5개년 규획(2016~2020)과 14차 5개년 규획(2021~2025)의 일부로서 2049년까지 3단계에 걸쳐서 핵심기술에서 세계적인 지배력을 획득한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과거의 산업정책과 달리, ‘중국제조2025’ 계획은 산업·기술·생산물의 우선순위에 대한 포괄적이고 세부적인 설명이 제시되었고, ‘자급목표’라는 형태로 국내에서 개발된 기술의 점유율 목표가 제시되었다. 또한 ‘군민융합’(军民融合)이라는 표어에서 드러나듯 군사 부문과 민간 부문의 혁신 역량을 통합함으로써 군사용 기술이 상업용 기술 개발로 파생될 수 있도록 하고, 역으로 상업 기술을 활용하여 첨단기술 기반의 군사 능력을 향상하는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에 따라 산업과 안보가 결합되고, 국가자본과 당이 주도하여 민간자본도 참여시킨 대규모 국가기금이 투자에 활용되면서 당-국가-민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국제조2025’ 계획은 ‘강군몽’(强軍夢)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시진핑 주석은 2013년 집권과 함께 중화민족의 부흥이라는 ‘중국몽’(中國夢)을 제시했고, 2015년부터는 그 핵심으로 ‘강군몽’을 강조하며 군사 현대화를 추진했다. 이는 ‘적극적 방어전략’으로서 반(反)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의 고도화와 첨단무기를 바탕으로 한 국지전쟁 전략을 골자로 하는데, 여기에는 첨단반도체 기술이 필수적이다. 이에 따라 2019년 말까지 약 1.5조 달러 규모의 정부 주도 산업발전기금이 파운드리 기업인 SMIC와 같은 전략부문에 투입되었다. 2) 중국에 대한 미국과 유럽연합의 인식 변화
중국의 첨단기술 확보를 위한 전략은 미국과의 극심한 무역갈등을 초래했는데, 핵심 쟁점 중 하나는 중국의 불공정한 기술이전 문제였다. 예를 들어 중국의 산업 스파이가 직접 기술을 탈취하거나 외국 기업 직원에게 뇌물을 제공해 영업 비밀을 도용하고, 외국 기업을 인수합병 해 기술을 이전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중국에 외국기업이 투자할 때 중국 기업과의 합작회사 설립을 강제하고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관행도 문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지식재산권 문제로 중국 법인을 상대로 한 미국 기업의 소송이 급증하였고, 미국 기업들은 미국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다.
특히 ‘중국제조2025’ 계획이 발표된 이후, 미국은 이 계획이 단순한 산업정책을 넘어선 중국 국가안보 전략의 핵심이라고 인식하고 중국의 첨단기술 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 반도체 기업을 인수하려는 중국 반도체 기업의 시도에 여러 번 제동이 걸렸다. 2015년 중국 칭화유니그룹이 마이크론을 인수하려다 미국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의 반대로 실패한 일이 대표적 사례다. 2016년에는 오바마 행정부가 처음으로 중국의 통신 장비회사 ZTE에 대한 수출 규제조치를 발동하였다. 이러한 규제조치는 트럼프 행정부에서 본격화되었고,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후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한편 미국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더해, 매년 증가하는 대중 무역적자가 미국 제조업의 쇠퇴와 일자리 축소 그리고 그에 따른 여러 사회적 문제의 주요 원인이라는 인식이 확산하였다. 미국의 대중 무역적자는 중국이 2001년 WTO에 가입한 이후 빠르게 증가했고, 이러한 추세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2000년과 2017년을 비교하면, 대중 무역수지 적자는 820억 달러에서 3357억 달러로 네 배 증가했고, 전체적자 대비 중국의 비중이 22%에서 60.8%로 세 배 가까이 상승했다.
미국은 이렇게 대중 무역불균형이 심화한 원인으로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지적하기 시작했다. 즉 중국이 자유주의적 국제질서의 유지와 발전에 필요한 비용과 역할을 분담하지 않고 그 혜택만을 일방적으로 편취한 결과 무역불균형이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2018년 3월 발표한 국별 무역장벽보고서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으로 ▲ 중국의 기술이전 요구, ▲ 지적재산권 보호 미비, ▲ 중국 시장에서 외국인 투자자에 대한 투자 제한 등 차별적 대우, ▲ 중국 정부의 부가세 환급정책과 보조금 지원 등 비관세장벽을 명시했다. 미국 정부는 이후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을 지적할 때마다 이러한 항목을 반복해서 제시하고 있다. 보고서는 또한 중국의 기술이전과 ‘중국제조2025’ 계획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도 명시했다.
유럽연합 역시 중국이 국가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할 목적으로 하는 기술이전을 더 이상 순수한 경제적 상호 이득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보고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2016년 이중용도(dual use) 품목에 대한 수출통제를 규정한 입법을 채택했고, 2019년 3월 역내 외국인직접투자 심사를 강화했다. 또한 유럽연합은 2019년 전략전망(Strategic Outlook)에서 중국에 대한 외교노선의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유럽은 여전히 중국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경제적·체제적 경쟁자로 규정했다. 또한 중국이 글로벌 행위자이자 선도적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에 더 큰 책임감과 호혜성을 보이고 개방성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유럽연합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에 따른 비시장적 관행을 시정하는 문제에 대해 미국과 행보를 같이 하고 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2016년 유럽연합이 WTO에서 중국에 시장경제지위(MES) 부여를 거절한 것이다. 2001년 중국이 WTO에 가입할 당시, 가입 의정서 15조는 “중국기업이 시장경제 조건으로 운용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반덤핑 절차에서 중국을 비시장경제로 취급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이 규정은 15년이 지나면 만료되는 것이었지만, 2016년 12월 유럽연합과 미국은 중국에 대한 시장경제지위 부여를 거부하면서 그 근거로 각각 ‘시장왜곡’과 ‘시장지향조건’을 들었다.
이후 2018년 5월 미국, 유럽연합, 일본은 중국의 시장경제 지위 부여와 관련해 산업보조금 규칙의 개정, 기술이전 정책과 관행에 대한 공동성명, 그리고 시장경제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7개 조건을 담은 ‘시장지향조건에 관한 공동성명’을 채택했다. 공동성명은 중국을 시장경제로 인정할 수 없는 중대한 이유 중 하나로 국유기업의 시장 장악을 명시했고, 중국 공공기구와 국유기업 그리고 정부의 시장 왜곡 행위 개선을 위해 공동 대응할 것을 밝혔다. 시장경제국가로 인정받기 위한 7개 조건에는 기업의 자유로운 가격결정권, 투자결정권, 요소(자본, 노동, 기술 및 기타 요소) 가격의 시장 결정, 기업의 자율적 자본 배분 결정, 독립적 회계 등 국제기준에 부합한 회계, 기업법·파산법·사유재산법 준수, 기업의 의사결정에 있어 정부의 간섭이 없을 것이 포함되었다.
나아가 미국과 유럽연합은 2021년 9월 무역과 기술 분야에서 협력하고 중국의 비시장적·비민주적 행위에 공동으로 대응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무역기술위원회’(TTC)를 출범했다. TTC 공동성명은 민주주의 가치를 증진하는 방향에서 글로벌 차원의 기술과 무역 영역에서 협력하고 ‘비시장경제’의 불공정한 무역관행과 정책으로부터 기업과 국민을 보호하겠다는 방향을 밝혔다.
그러면서 6대 협력 분야로 ▲ 국가 안보 관련 분야에 대한 투자 심사, ▲ 이중 용도 분야 수출 규제, ▲ 인공지능 기술 남용 대응, ▲ 반도체 공급사슬 재조정, ▲ 비시장적인 무역 왜곡 정책 대응, ▲ 민간기업을 포함하는 모든 이해당사자 참여를 제시했다. 부속서와 10대 실무그룹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민군융합 정책을 통한 기술 획득 전략을 경계하며, 인공지능이 사회 감시 체제 작동에 남용되는 것에 반대하고, 비시장경제가 기술이전 강요와 지식재산 절도·국유기업 우대·강제노동 정책 등을 추구하는 것에 대응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TTC가 직간접적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3) 소결
그러나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식 경제모델에 대한 회의가 확산하는 동시에 시진핑 주석 취임 이후 중국이 국가자본주의 성장 전략을 ‘중국몽’으로 일반화하고 중국식 경제모델로 부각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정치적·경제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중국의 변화는 국유자본의 팽창적 해외진출 전략으로서 일대일로와 상위 가치사슬로 도약하고 강군몽을 이루기 위한 군민융합을 내세운 중국제조2025 계획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드러났다. 이러한 변화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에 중국이 자유무역 질서에 깊이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이를 악용해 배타적인 민족적 이익을 강화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확산시켰다. 또한 중국이 점차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기보다는 중국식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는 한편 국제질서를 교란하고 있다는 비관적 전망이 우세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의식은 중국의 불공정 무역관행에 대응하는 국내적 조치와 국제적 공조로 이어졌다.
미국에서는 특히 미중 무역불균형을 포함한 세계적 무역불균형이 부각되면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대규모 무역흑자가 미국 제조업의 위기와 그에 따른 사회적 문제의 원인이라는 인식이 확산했다. 이러한 인식은 경제민족주의를 앞세운 인민주의와 탈세계화 요구를 등에 업은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중국과 무역분쟁을 벌이는 하나의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2. ‘무역분쟁’에서 ‘전략적 경쟁’으로
1)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분쟁
이러한 대중국 전략의 전환은 트럼프 행정부 시기부터 본격화되었다.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국가안보전략 2017」은 지역 차원의 전략 중 첫째로 ‘인도-태평양 지역’을 다루면서 중국의 영향력 확대가 미국의 국익을 침해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2019년 미국 의회가 국방수권법에서 중국에 관한 포괄적인 전략을 수립할 것을 요구한 데 부응하여, 트럼프 대통령의 백악관이 2020년 5월 발표한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접근」은 미국과 중국이 경제·가치·안보 측면에서 ‘전략적 경쟁 상태’에 있다는 점을 명시했다. 2020년 국방수권법 역시 중국을 전략적 경쟁자로 규정하고 ‘인도-태평양 전략’을 실행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들에 예산을 배정했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국내의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하는 상황에서도,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의회가 초당적 합의를 도출한 것이었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는 효과적인 경쟁전략을 채택하지 못하고 중국과의 무역분쟁에 몰두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불공정 무역행위’를 근거로 무역법 301조에 따라 2018년 7월 이후 네 차례에 걸쳐 전체 대중 수입 중 약 3분의 2 이상에 해당하는 품목, 3600억 달러 규모의 중국산 제품에 최대 25%의 추가관세를 부과했다. 이에 중국 역시 추가관세 조치로 맞대응함으로써 본격적인 미중 ‘무역분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무역적자는 금융세계화와 달러 환류메커니즘이라는 구조적 요인으로 인한 것이기에, 무역적자 감축 자체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단기적이고 협소한 시도였다. 게다가 그 수단으로 활용한 관세전쟁은 미국의 소비자와 생산자에게 오히려 해를 가할 뿐 실제 무역수지를 개선하는 효과도 분명하지 않았다. 2018년 무역분쟁 이후 양국의 무역에서 상대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하락했고, 특히 미국의 대중국 수입 비중은 2017년 21.9%에서 2022년 상반기 17.3%로 하락했다. 그렇지만 미국의 대중국 전체 무역 규모와 무역적자 규모는 2019년과 2020년 감소했다가 2021년부터 다시 증가하기 시작하여 2022년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게다가 트럼프의 무역분쟁은 미국 우선주의를 추구하면서, 그간 미국이 강조해 온 ‘규칙에 기반한 세계질서’라는 원칙을 스스로 파괴했다. 나아가 2017년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라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철강과 알루미늄 수입에 부과한 관세와 무역법 201조에 따라 산업보호를 이유로 태양광과 세탁기에 발동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연합과 같은 전통적 동맹국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또한 WTO 상소기구를 사실상 기능정지 상태로 만들고 본래 미국이 주도했던 TPP에서 탈퇴하는 등 다자적 국제협력의 기반을 무너뜨렸다.2)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경쟁
바이든 행정부의 전략적 경쟁 구상에는 2020년 발생한 코로나19 대유행이 큰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략적 경쟁을 한층 심화했다. 먼저 미중갈등의 성격을 무역분쟁에서 체제경쟁으로 확고히 바꿔놓았다. 트럼프 행정부 시기 미국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국내적으로도 큰 피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 우선주의를 고수하고 세계보건기구(WHO)를 탈퇴하며 미국 주도의 세계질서라는 원칙을 스스로 저버리고 지구적 문제에 대응하는 데 명백한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냈다. 중국은 국가 주도의 강력한 봉쇄정책인 ‘제로 코로나’ 정책으로 빠르게 코로나 종식에 성공했다고 선언하는 한편, 이를 자국 체제의 우월성으로 내세웠다.
코로나19 대유행은 또한 글로벌 공급망 문제를 국가안보상의 과제로 부각했다. 대유행 초기에는 일부 국가가 다자적 협력보다는 마스크를 포함한 의료용품에 대한 수출금지 조치를 시행하는 보호주의적 움직임을 강화하면서 글로벌 의료공급망이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러한 우려는 이후 백신 개발과 보급을 둘러싸고 반복되었다. 2020년 하반기에는 세계적으로 반도체 공급 부족 현상이 나타났는데, 특히 미국은 차량용 반도체의 병목 현상이 심화하여 완성차 생산에 큰 지장이 생기면서 글로벌 공급망 교란의 피해를 절감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민간자본주의의 중추가 되는 중산층을 복원하고, 코로나19에 대한 국제적 공동대응을 수행하며, 중국에 대한 세계적·지역적 대응을 강화하는 다양한 대내외적 정책을 종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바이든 행정부의 인식은 백악관이 2021년 3월 발표한 국가안보전략잠정지침 「미국의 우위/장점을 쇄신하자」에 집약되어 있다. 잠정지침은 세계의 안보 상황이 자유주의·민주정과 권위주의·독재정이라는 정치이념과 체제 경쟁이라는 특징을 보이며, 따라서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중심으로 동지적인 동맹국·협력국과의 협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잠정지침은 코로나19 대유행과 같은 세계적 의제의 등장으로 인해 국가안보전략에서 대내정책과 대외정책의 구별과 국가안보·경제안보·보건안보·환경안보와 같은 전통적 구별이 무의미해지고 있으므로 이를 통합적으로 조정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바이든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전략과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양자간 무역분쟁을 넘어서 체제와 가치 그리고 종합적인 안보를 둘러싼 경쟁으로 좀 더 명확하게 규정하려 한다. 즉 바이든 행정부에서 다시 정립된 전략적 경쟁은 국제적 표준을 둘러싼 국가자본주의와 민간자본주의 그리고 자유민주정과 권위독재정의 경쟁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코로나19와 기후변화에 대한 공동대응, 일대일로로 대표되는 ‘중국특색의 개발협력’에 대응할 수 있는 대안적인 기반시설 구축계획, 5G와 인공지능 등 첨단기술과 관련된 국제적 표준을 설정하는 문제가 포함된다.
또한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국내외 공급망의 구조적 취약성이 미국의 경제 및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에 따라, 글로벌 스탠더드 재건의 핵심으로 (중국이 아닌)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공급망의 구축’(Supply America)를 강조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 직후 ‘미국 공급망’ 행정명령에 서명하면서 4대 핵심품목(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등 핵심광물, 의약품)과 6대 주요 산업(국방, 보건, ICT, 에너지, 운송, 농업)의 공급망을 점검하고 위험을 해소하기 위한 방안을 범정부적으로 도출할 것을 촉구했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4대 핵심 품목에 대한 공급망 취약점과 대응방안이 포함된 100일 공급망 검토보고서가 작성되었다.
공급망 강화를 위한 대응방안의 핵심은 대내정책과 대외정책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대내적으로는 국내로 생산시설을 돌아오게 하는 ‘리쇼어링’(reshoring) 정책과 투자 지원을 통해 전략 부문의 미국 내 제조 역량을 중장기적으로 재건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 2022년 반도체 및 첨단기술 생태계 육성에 총 2800억 달러를 투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반도체 칩과 과학법’과 전기자동차 배터리 부문의 보조금 정책이 포함된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입법했다. 한편 두 법안에는 공통으로 보조금 지급 조건에 중국을 비롯한 ‘우려 국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하는 규정이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미국에 반도체 시설을 건립하여 보조금을 받으면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에 따라 10년간 중국 같은 우려 국가에 반도체 시설을 투자하는 데 제한을 받게 되며, 전기차 보조금을 받기 위해서는 해외의 우려 국가에서 추출, 제조, 재활용된 광물이 배터리에 일정 비율 이하로만 들어가야 한다.
대외적으로는 동맹국과의 공급망 협력을 강화하는 ‘프렌드쇼어링’(friend-shoring) 정책으로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미국과 체제와 가치를 공유하는 동맹국·협력국과의 다자간 협력이 대외정책의 핵심 과제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바이든 행정부에서 구체적으로 가시화된 계획 중 하나가 바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라고 할 수 있다.
IPEF는 2021년 10월 동아시아정상회의(EAS)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처음 제안한 이후, 2022년 5월 23일 공식 출범하여 현재 미국을 비롯해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인도와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7개국(브루나이·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베트남)과 피지가 참여하고 있다. IPEF는 시장개방을 핵심으로 하는 기존의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나 자유무역협정(FTA) 방식의 경제통합은 아니면서도, 행정협정이라는 형태로 무역, 공급망, 인프라 및 청정에너지와 탈탄소화, 조세와 반부패를 망라하는 다양한 영역에서 일정하게 구속력 있는 합의와 약속을 맺는 경제협력체를 표방한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역시 신뢰할 수 있는 공급망 구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해 IPEF가 공식 출범한 이후 올해 5월 27일 공급망 협정이 네 개 부문 중 가장 먼저 타결되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공급망 협정의 핵심 내용으로는 ▲ 공급망 위기 극복을 위한 정부 간 공조기구인 ‘위기대응네트워크’ 구축, ▲ 평상시 공급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불필요한 조치를 자제하는 한편 공급선 다변화를 위한 투자 확대와 공동 연구개발 노력을 위한 ‘공급망 위원회’ 설치, ▲ 공급망 안정화에 필수적인 숙련 노동자 육성과 노동권 개선 노력을 위한 ‘노사정 자문기구’ 구성이 담겼다.
바이든 행정부는 나머지 무역, 청정경제, 공정경제 부문의 협정도 마무리하여, 올해 11월로 예정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IPEF 최종 타결을 발표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에도 바이든 행정부는 2021년 12월 반권위주의, 부패 척결, 인권 증진을 의제로 하는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한편, 미국·인도·일본·호주 4개국의 안보협의체인 쿼드와 같은 다자협력의 틀을 활용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중 경쟁은 양국의 무역분쟁을 넘어, 첨단기술, 공급망, 기반시설 투자와 같은 주제를 포함하는 지역 차원의 체제 경쟁적 성격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3) 쌍순환: 전략적 경쟁에 대한 중국의 대응
쌍순환 전략은 대내적으로 내수를 키우고 활성화해 국내경제(국내대순환)를 최대한 발전시키고, 대외적으로 수출과 개혁개방을 지속하며 세계경제와의 선순환(국내·국제 순환)을 상호 촉진한다는 새로운 발전전략이다. 즉, 미중 갈등의 심화와 장기화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이 거대한 내수시장을 활용하여 자체적으로 선순환할 수 있는 경제체제를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국내대순환의 측면에서는 핵심 원천기술을 자주화하고, 산업구조 고도화를 통해 공급망을 강화하며, 소비와 투자를 촉진해 내수를 활성화할 것을 강조했다. 국내·국제 순환과 관련해서는 핵심 부품과 원자재의 안정적 공급을 추구하는 한편 대내외 무역 규범을 일체화할 것을 강조했다.
그런데 소비 촉진을 통한 내수 활성화를 위해서는 가계의 소비역량 확대가 필요하다. 그러려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당히 강한 중국 가계의 저축성향을 약화할 필요가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16년 중국의 총저축률은 세계 평균보다 약 20%p 높은 46%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가계저축률이 절반 정도를 차지하며 세계 평균에 비해 높은 편이다. 이렇게 중국 가계의 저축성향이 강한 이유로는 사회안전망 부족과 큰 소득 격차가 지적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지속하는 가운데 사회보장제도를 정비하고 소득 불평등을 개선해야 하지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정치적 안정을 우선순위에 두고 관련한 개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있다. 2021년 제시된 ‘공동부유’ 전략 역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소득재분배를 강화하는 정책이라기보다는, 알리바바와 같은 민간 빅테크 플랫폼 기업을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이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국유기업이 주도하는 첨단산업 육성에 보조를 맞추도록 하려는 구상에 가깝다.
결국 쌍순환의 내수 확대 노력은 가계 저축률 감소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시 투자 확대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 다만 부동산 부채와 과잉투자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세계금융위기 이후처럼 대규모 기반시설과 부동산 건설투자가 중심이 되기보다는, 기술적 자립자강을 위한 첨단산업의 기술혁신과 기반시설 확충을 위한 투자가 중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첨단산업의 기술혁신과 관련해서 중국 정부는 2021년 원천기술 확보를 위한 기초연구비를 전년대비 10.6% 늘리고, 반도체 분야를 전략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대규모 기금인 ‘국가반도체산업투자기금’(国家集成电路产业投资基金, 빅펀드)을 조성했다. 14차 5개년 규획은 특히 반도체를 국가안보의 핵심 영역으로 규정하고, 그중에서도 반도체 설계(EDA), 소재, 첨단메모리와 차세대 전력 반도체(SiC, GaN)의 발전을 강조했다. 기반시설 확충과 관련해서는 2020년 중국 국가발전개혁위원회가 7대 신형 기반시설에 대해 2025년까지 총 10조 위안 규모의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신형 기반시설은 디지털 전환과 신산업에 중심인데, 세부적으로 4개의 정보통신망(5G 기지국, 산업 인터넷, 데이터센터, 인공지능)과 2개의 에너지망(특고압 송전설비, 전기차 충전시설) 그리고 고속철도 교통망으로 구성된다.
시진핑의 세 번째 집권을 확정한 자리이기도 했던 2022년 10월 중국공산당 20차 전국대표대회에서도, 중국공산당은 쌍순환 전략을 재차 강조한 가운데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를 위한 전략 중 하나로 과학기술과 교육을 강조하는 ‘과교흥국’ 전략을 별도의 장으로 내세웠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당 중앙이 과학기술 작업에 대해 통일적으로 영도할 수 있도록 신형거국체제를 강화할 것이라고 밝힌 점이다. 거국체제란 정부가 국가의 자원을 모아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체제를 의미하는데, 현재 중국이 직면한 새로운 도전, 즉 ‘조임목’(choke point)에 해당하는 관건 핵심기술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다하겠다는 것이다. 이어 2023년 3월 양회(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와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도 중국 정부는 ‘발전과 안보의 균형’을 강조하며 미국의 견제에 대응하기 위한 과학기술 자립, 공급망 안정, 신형거국체제 구축 등 경제안보 전략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내세웠다.4) 소결
중국의 쌍순환 전략은 미국의 전략적 경쟁에 맞서 대내적으로 첨단산업과 전략산업 분야의 자립자강을 추구하고 이에 적합한 기반시설을 확충하면서 자체적인 공급안전망을 확보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긴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중국의 전략은 대외적으로 국내대순환과 국제순환의 상호 촉진이라는 측면에서 주변국과의 협력을 확대하며 중국의 제도와 규정을 국제규범에 맞추어가는 방향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시진핑과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계속해서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현대화와 다른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 현대화를 강조하고 국가자본주의에 기초한 내적 체제 공고화에 힘쓰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중국의 전략이 규칙에 기반을 둔 ‘제2의 개혁개방’으로 이어지기보다는 국내공급망의 자급화에 집중하며 이른바 ‘홍색공급망’의 강화로 이어질 가능성도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은 반도체로 대표되는 첨단기술 영역에서 두드러지고 있다.3. 전략적 경쟁의 최근 쟁점: ‘반도체 전쟁’
1) 미국의 대중 반도체 산업 제재
또 하나 좀 더 중요한 이유는 반도체가 거의 모든 현대 산업과 군사 체계에 필요한 대표적인 이중용도 품목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이 미국과 상이한 가치와 체제를 추구한다는 사실은 해당 기술을 어떤 목적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체제경쟁이라는 성격을 더한다. 이에 따라 반도체를 비롯한 첨단기술은 경제·안보 복합체(nexus)로 묘사되기도 한다. 앞서 살펴본 대로 중국이 반도체 국산화율을 제고하고 글로벌 공급사슬에서 상위로 진입하며 강군몽을 실현하기 위한 계획으로 ‘중국제조2025’을 제시한 이후,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우려가 커지면서 반도체 공급망에서 중국 위험을 줄이기 위한 일련의 경제안보 정책이 다각도로 제출되었다.
미국은 오바마 행정부 말기 중국 ZTE의 통신장비 수입을 규제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를 거치며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수출통제와 투자제한 조치를 강화해왔다. 미국에서 중국산 통신장비에 대한 우려는 미중 관계가 악화되기 이전부터 비교적 일찍 제기되었다. 미 의회는 2012년 중국산 통신장비의 안보 위협을 지적하면서 정부 조달에서 중국산 장비를 배제할 것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고, 2018년 8월에는 초당적인 지지 하에 정부 기관의 중국산 통신장비 조달을 금지하는 국방수권법을 제정했다. 나아가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군민융합을 명시적으로 비판하며 2019년 화웨이를 수출통제리스트에 올렸고, 이어 2020년에는 두 차례에 걸친 제재를 통해 화웨이에 대한 반도체 수출을 사실상 전면 금지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산업 제재는 점차 첨단반도체 기술을 표적으로 하여 ‘마당은 좁게, 담장은 높게’ 하는 방식으로 강화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의 최대 파운드리 기업인 SMIC와 D램 제조 기업인 푸젠진화를 수출통제리스트에 올리고 첨단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장비의 수출을 규제했다. 또한 2018년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기업 ASML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산하고 있는 최첨단 극자외선 노광장비(EUV)를 중국 기업에 판매할 수 있도록 네덜란드 정부가 허가하자, 트럼프 행정부는 네덜란드 정부와 협상을 벌였고 이후 네덜란드 정부가 ASML의 대중 수출 면허를 갱신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2021년 4월 출범 이후 발표한 첫 수출통제리스트에 중국의 슈퍼컴퓨터 회사 7개를 포함한 데 이어, 2022년 10월에는 중국의 반도체 기업에 첨단반도체 장비 판매를 금지하고 AI와 슈퍼컴퓨터에 사용되는 반도체에 대한 수출을 제한하는 새로운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했다. 이 조치는 먼저 미국 기업이 특정 수준 이상 반도체를 생산하는 중국 기업에 첨단반도체 제조 장비를 판매할 경우 별도의 허가를 받도록 했다. 특히 중국 내 생산시설을 중국 기업이 소유한 경우 ‘거부 추정 원칙’을 적용해 수출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올해 초에는 일본과 네덜란드가 이 수출통제 조치에 동참하기로 합의했다. 세부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은 니콘과 도쿄 일렉트론이 7월부터 23종의 반도체 제조 장비를 중국으로 수출하는 것을 제한하기로 했고, 네덜란드는 ASML이 생산하는 심자외선(DUV) 노광장비의 중국 수출 승인 요구조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발표할 예정이라는 입장을 6월 말에 밝혔다. 중국의 반도체 장비 수입에서 일본에 대한 의존도가 37.2%에 달하는 한편 노광장비가 중국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취약한 분야라는 점에서, 일본과 네덜란드의 수출통제 조치는 중국의 첨단반도체 자립화 시도에 큰 영향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고성능 AI와 슈퍼컴퓨터용 반도체 칩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에는 화웨이에 부과되었던 제재와 마찬가지로 ‘해외직접생산규칙’이 적용되어, 미국의 기술을 사용했을 경우 제3국 기업이 만든 칩 역시 수출을 금지하도록 했다. 미 상무부는 중국이 첨단반도체, AI, 슈퍼컴퓨터 기술을 대량살상무기와 첨단무기 시스템을 생산하고 인권을 유린하는 데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수출통제 조치를 시행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미국이 반도체와 관련해 개별 기업이 아닌 특정 기술을 기준으로 중국을 겨냥해 고강도의 수출통제 조치를 부과한 것은 이 10월 수출통제 조치가 처음이다. CSIS는 이 조치가 두 가지 측면에서 이전의 대중국 무역·기술 정책과 완전히 다르다고 분석했다. 첫째, 새로운 정책은 최종 사용자와 관련이 있는지와 관계없이 중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 둘째, 이전의 정책이 중국의 기술 진보를 허용하되 속도를 제한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정책은 중국이 특정 수준 이상의 최첨단 기술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제한한다.
바이든 행정부는 또한 중국의 첨단반도체 산업에 대한 투자 제한 조치도 강화했다. 2021년 6월에는 중국의 군 관련 반도체 기업에 대해 직·간접 주식투자 금지를 발표했고, 올해 8월에는 ‘우려 국가의 특정 국가안보 기술·제품에 대한 미국 투자 대응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내년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이는 이 조치에 따르면, 사모펀드와 벤처캐피털 등 미국 자본이 우려 대상 국가로 지정된 중국·홍콩·마카오의 첨단반도체, 양자 정보 기술, AI 시스템 3개 분야에 투자할 때 재무부의 허가를 받도록 해 사실상 투자가 금지된다. 2) 중국의 반도체 자립화 전략
중국 정부는 2014년 ‘국가 집적회로 산업 발전 추진 강요’에서 처음으로 반도체를 전략산업으로 규정하고, 2015년 ‘중국제조2025’ 계획에서 2030년까지 반도체 국산화율을 75%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 2014년 200억 달러 규모의 1기 국가반도체산업투자기금(빅펀드)을 설립했다. 빅펀드는 지방정부, 금융기관, 민간기업과 국유기업이 참여하는 한편, 기존의 보조금과 결합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될 방향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1기 빅펀드는 반도체 제조 능력 확대에 중점을 두고 23개 기업의 70개 프로젝트에 투자되었다. 분야별로 보면 제조 67%, 설계 17%, 후공정 10%, 장비 및 소재가 6%를 차지했다.
이후 군민융합을 내세운 ‘중국제조2025’에 대한 각국의 우려가 커지는 한편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촉발되어 중국의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제재가 본격화되면서, 중국의 반도체 국산화 전략은 한층 더 국가안보적 성격을 강화했다. 2019년 설립된 2기 빅펀드는 자금 규모가 훨씬 더 커졌을 뿐만 아니라, 1기에서는 없었던 통신, AI 반도체, 차세대 전력 반도체 분야에 대한 투자를 강조했다. 나아가 중국은 해당 분야 혁신기업에 대한 자금 조달을 지원하고 미국 자본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2019년 상하이증권거래소에 중국식 나스닥이라고 할 수 있는 ‘커촹반’(科創板)을 개설했다. 커창봔은 중국의 주요 기술기업이 홍콩이나 미국 증시에 상장하는 관행을 끊고자 시진핑 주석의 지시로 추진된 정보기술 주식 전문 거래소다. 커촹반은 상장 절차와 규정을 간소화한 주식발행 등록제로 운영되어 반도체 기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중요 통로로 성장했다.
이러한 흐름은 앞서 살펴본 대로 2021년 14차 5개년 규획에서 종합되었다. 14차 5개년 규획은 반도체 분야를 국가안보의 핵심 분야이자 전략육성 분야 중 하나로 선정하고, 중국의 약점이 되는 반도체 설계 소프트웨어, 고순도 소재, 주요 제조장비와 기술, 첨단메모리 기술, 차세대 반도체를 개발할 것을 명시했다. 또한 쌍순환 전략의 일환으로 자국의 거대한 반도체 소비시장을 활용해 독자적인 반도체 산업생태계와 공급망을 구축하겠다는 방향 역시 제시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점은 지난 7월 중국 정부가 갈륨과 게르마늄 관련 품목에 대해 상무부 허가 없이 수출을 금지하는 방안을 담은 수출통제 조치를 발표한 것이다. 이 조치는 일차적으로는 최근 확대된 미국의 반도체 수출통제에 대한 보복 조치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중국의 첨단산업 공급망 내재화 전략과도 맞닿아 있다. 갈륨은 최근 중국이 육성하는 차세대 반도체 중 하나인 질화갈륨(GaN) 반도체의 핵심 재료로, 전 세계 매장량 가운데 중국이 80~85%를 점하고 있다. 차세대 반도체 분야는 기존의 실리콘 기반 반도체에 비해 고급 노광장비가 필요하지 않으며, 5G와 전기차에 주로 사용되기 때문에 중국 내수시장에서 향후 많은 수요가 존재할 것이므로 중국 정부는 관련 공급망을 구축하려 하고 있다.
종합해 보면, 중국은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의 제재가 집중되고 있는 첨단반도체 영역에서 장기적인 국가 전략으로 반도체 설계, 제조 장비, 소재에 대한 자체적인 기술 역량을 개발하려 하고 있다. 또한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중국이 경쟁력을 갖춘 중저위 분야를 발판 삼아 독자적인 반도체 공급망과 산업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방향을 명확히 하고 있다. 3) 소결
이에 대한 중국의 반도체 굴기 전략은 기본적으로 미국의 전략에 비대칭적인 조건에서 수립되었고 점차 제재가 강화됨에 따라 수세적인 대응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대규모 투자와 지원을 통해 일부 소재와 장비 그리고 범용 반도체를 중심으로 자급률을 높이고는 있지만, 첨단반도체를 포함하는 자체적인 산업생태계와 공급망을 온전히 구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칭화유니그룹의 파산에서 볼 수 있듯, 국가 주도 투자에 의존하며 수익성 하락과 부채위기가 나타나는 중국 경제의 한계가 반도체 굴기에서도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장기적으로 자본시장과 기술 규범의 분리가 강화될수록 중국의 반도체 생태계는 혁신의 한계가 두드러질 것이며, 결과적으로 ‘적당히 작동하는 반도체와 인공지능에 기반하여 글로벌 서비스 플랫폼과 분리된 채 작동하는 권위주의적 체계’에 머무를 수 있다는 부정적 전망 역시 제기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반도체 전쟁’이 기술과 군사안보 경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가치와 체제를 지향하는 기술규범과 제도를 형성할 것인가를 둘러싼 체제경쟁의 성격을 포함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를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기술이 경제, 군사, 사회 전반이 작동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면서, 이를 조직하는 원리와 제도 역시 중요해진 것이다. 중국의 인터넷 관리·통제 제도인 ‘만리방화벽’과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한 감시 시스템이 권위주의적 디지털 기술 모델로 확산하면서 우려와 비판이 증대하는 가운데, 그러한 모델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첨단반도체 기술에 중국이 접근하는 것을 제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제사회에서 커지고 있다.4. 결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특히 미중 무역불균형을 강조하며, 2018년부터 무역분쟁이라는 형태로 양국 간의 대결을 폭발시켰다. 이후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양국의 대결은 무역분쟁을 넘어 정치·경제·보건의료를 아우르는 전략적 경쟁의 성격으로 심화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를 자유주의·민주정과 권위주의·독재정의 대결로 특징짓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내세우며 동맹국·협력국과의 다자적인 규칙 기반 질서 재정립과 공급망 협력을 강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은 시진핑 주석과 중국공산당을 중심으로 권력을 더욱 집중하는 한편 경제에서도 국가와 당의 역할을 심화하고 쌍순환 전략으로 대표되는 중국 특색의 현대화와 자립자강의 길을 내세우고 있다.
이렇게 본격화된 미중 전략적 경쟁의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간 많은 분석이 제기되어왔다. 과거 미국과 소련의 냉전처럼 미국을 비롯한 서방 진영과 중국을 비롯한 반서방 진영이 뚜렷하게 분리되는 ‘신냉전’으로 보는 견해나, 도전자 국가로 부상한 중국과 기존 패권 국가인 미국 간의 헤게모니 경쟁으로 보는 견해가 대표적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국제적 표준을 둘러싸고 어떤 자본주의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가를 둘러싼 경쟁이라는 점에서 과거 냉전 시기와 마찬가지로 체제 경쟁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다. 하지만 전략적 경쟁은 세계 경제가 긴밀히 상호 연결된 가운데, 특히 중국이 세계 경제에 깊이 통합된 가운데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적·인적 교류가 막힌 봉쇄정책을 기본으로 했던 과거의 냉전과는 다르다. 최근 경제와 안보 결합의 최전선에 놓인 이른바 ‘반도체 전쟁’에서 첨단반도체 산업의 일부 영역을 중심으로 중국에 대한 미국과 동맹국의 수출통제와 공급망 분리 조치가 비교적 두드러지고 있지만, 이 역시 중국 반도체 산업 전반에 대한 탈동조화(decoupling)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요 7개국(G7)은 지난 5월 정상회담에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의 성격을 탈동조화가 아닌 ‘위험억제’(de-risking)로 명확히 규정했다. 즉 “탈동조화가 아닌 위험억제와 다변화에 기초하여 경제 복원력과 경제안보를 위한 구체적 조치를 조율”하기로 합의하고 공급망 분야에서 과도한 중국 의존을 줄여나가는 동시에, “중국과 솔직하게 관여하고 우려를 직접 표명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중국과 건설적이고 지속가능한 관계를 구축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것이다. 또한 미국은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가 강화되면서 중국이 미국의 경제·가치·안보에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이에 대비하는 한편, 트럼프 행정부 시기 침식되었던 자유주의적인 규칙 기반 국제질서를 복원하고 재편하려 하고 있다. 이 점에서 전략적 경쟁은 분명히 관여정책의 완전한 폐기나 봉쇄정책으로의 복귀를 지향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관여정책이 작동할 수 있는 조건을 새롭게 창출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한편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경쟁은 진정한 의미에서 헤게모니 경쟁이라고 보기 어렵다. 헤게모니는 단순히 힘에 의한 패권이 아니라 제도적, 문화적 지도력을 바탕으로 동의를 끌어냄으로써 유지되는 지배 질서를 의미한다. 세계금융위기와 코로나19 대유행을 거치며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는 가운데, 중국 특색의 현대화와 신형대국관계를 내세우는 중국은 그러한 의미의 헤게모니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중국은 중국몽의 실현을 추구하면서 ‘중국제조2025’ 계획에서 드러나듯 다양한 비시장적 수단을 활용해 첨단기술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부국과 강병을 연계하고 있고, 일대일로 계획에서 드러나듯 대외지원을 필요로 하는 주변국을 목표로 해외에서 기반시설과 공급망을 확충하려 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은 국제질서에서 규칙 기반의 다자주의적 질서를 존중하기보다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양자적 관계를 확대하며 자국의 패권적 지도력을 강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한편, 어떤 국가가 새롭게 헤게모니 국가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대안적이고 안정적인 축적체계를 갖춰야 한다. 그러나 중국의 국가자본주의 모델이 대안적 체제가 될 수 있는지 역시 의심스럽다. 세계금융위기 이후 중국의 부상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커졌지만, 동시에 중국 경제가 중진국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제시되었다. 이는 중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인 대규모 저임금 노동력 투입과 자본 투입에 의한 성장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이에 중국은 민간부문에 대한 당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국유부문이 장악하고 있는 핵심 경제부문에 자원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대규모 투자를 앞세운 일부 국유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만, GDP의 약 25%를 차지하는 부동산 부문의 거대한 부채 문제와 국유기업의 낮은 생산성 문제가 잠재적 위험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잠재적 위험은 최근 부동산 부문의 부채위기와 민간 투자의 감소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말 중국 정부가 ‘제로 코로나’ 정책을 포기하면서 중국 경제가 반등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았지만, 현재 시점에서 볼 때 전반적인 성장세가 둔화하는 가운데 부동산 부문의 부채위기가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대유행 시기를 거치며 중국의 저축률이 다시 증가하는 가운데 민간 소비와 투자가 상당히 저조하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중국은 민간 부문의 활력이 떨어질수록 정부의 재정 투입과 국유부문의 투자에 의존할 가능성이 큰데, 이는 수익성 악화와 부채위기 심화로 대표되는 중국 경제의 모순을 더욱 응축하는 방향이 될 것이다.
20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를 강화해 온 중국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정치적·군사적 위협을 증대할 뿐만 아니라, 장기 저성장에 빠진 세계경제의 불안정성을 심화하고 위기관리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무역분쟁과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안정적이고 개방된 시장과 같은 세계적 공공재(public goods)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다자적 국제질서를 훼손하고 민족주의에 기반한 보호주의를 강화하는 공공악(public bads)을 제공하면서 ‘G 마이너스 2’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남겼다. 이후 바이든 행정부 들어서 다자적 동맹질서를 복원해 중국에 공동으로 대응하려는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이 한층 심화하는 가운데, 중국은 계속해서 ‘제2의 개혁개방’보다는 당 지도부로 권력을 집중하며 중국 특색의 현대화와 자립자강 노선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세계적 위기에 대한 공조와 협력이 들어설 수 있는 자리를 좁히면서, 2020년대의 세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하나의 ‘초거대 위협’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