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잠재성장률, 막대한 부채, 한계에 처한 수출 대기업
한국경제는 코로나19 위기를 기점으로 초저성장이 고착했다. 3%대의 경제성장률은 코로나19 위기를 거치며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고, 성장률과 잠재성장률 모두 2%대를 간신히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 들어 경제 상황이 심각하다는 신호가 곳곳에서 포착된다. 2024년 3분기 성장률이 0.1%가 나오면서 ‘상저하고’라는 말은 쏙 들어갔고, 모든 기관에서 2025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하향 수정했다.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으로 부정적 전망이 더욱 강해졌다. 이번 글에서는 2025년 경제 상황이 어떨 것인지를 살펴보고, 특히 트럼프 행정부 출범이 한국경제에 끼치는 영향을 따져본다.
다음으로, 장기적 관점에서 한국경제가 처한 객관적 현실이 어떠한가를 세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다룬다. 사실 현재 한국경제가 처한 조건은 아무리 잘해봐야 2%의 성장률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다. 다시 말해, 한 해마다의 단기적 경제 전망보다는, 한국 경제가 어떤 구조적 제약을 마주하고 있는가를 인식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래에서는 이를 잠재성장률, 부채, 수출 대기업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본다. 1. 2024년보다 더 안 좋아질 2025년
한국은행은 성장률을 1%대로 낮춘 이유를 “내수는 소비를 중심으로 완만한 회복세를 이어가겠지만, 수출 증가세가 예상보다 낮아질 것으로 전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에 더해 상·하원 모두 공화당이 다수를 점할 상황까지는 예상치 못했으며, 올해 3분기 때 수출 증가세가 낮아진 것이 일시적인 요인이 아니라 중국과의 경쟁 등 구조적인 요인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 부진한 내수, 빠르게 회복될 수 있을까?
설비투자의 경우 금리 인하로 자본조달이 좀 더 쉬워지기에, 투자심리가 회복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몇 가지 난관이 있다. 첫째, 금리가 인하되더라도 중소기업의 설비투자는 곧장 확대되지 않을 수 있다. 2024년 8월 대한상공회의소의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65.8%가 이자 부담이 줄어들 경우 가장 먼저 취할 조치로 “부채상환 등 재무구조 건전화”를 꼽았다. 둘째,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통상마찰을 줄이기 위해서 미국 현지 직접투자를 확대하고 우회 진출 경로 확보에 주력할수록 국내 투자가 줄어들 수 있다. 셋째,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가 강화되고 중국의 저가 상품 공급이 확대돼 수출 전망이 불투명해지면서 수출뿐만 아니라 설비투자 역시 회복이 늦어질 수 있다.
건설투자의 경우 2025년에도 부진할 예정이다. 연초 태영건설 워크아웃으로 가시화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에서 드러났듯 건설업의 부진은 심각하다. 주택 건설 인허가가 감소하는 추세고 착공이 들어간 곳도 대폭 줄었다. 게다가 악성 미분양이 증가하고 있고 내년도 정부의 사회간접자본 예산도 축소된 상황이다. 이에 건설경기가 IMF 경제위기 때보다 심한 수준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으며, 올해 9월까지 폐업을 신고한 종합건설사가 357개로 전년동기대비 21.42% 늘었다.
민간소비 부진에 관해 좀 더 살펴보자. 민간소비가 2025년 들어 소폭 증가할 것으로 보이지만, 과거 추세선에서 이탈한 것은 분명하다. [그림2]를 보면, 현재 민간소비는 코로나19 이전 추세에서 이탈한 것을 넘어, 금리 인상 이전의 예상추세에도 미달한 실정이다. 소비 악화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업종은 도소매업과 숙박·음식점업이며, 관련 업종 종사자인 판매직 감소 폭이 코로나19 시기에 버금갈 정도다. 요컨대, 코로나19로 타격받은 내수 서비스업이 다시 과거 추세로 회복하지 못한 채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주저앉아버린 형국이다.
고금리·고물가로 인한 민간소비 위축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한국의 민간소비 위축이 유독 심각한 데에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우선, 금리상승 손해층과 이득층을 나눴을 때, 손해층이 이득층에 비해 소비성향이 훨씬 높다. 즉, 소비 여력이 있는 3~40대 중산층이 대출로 주택을 구매해 ‘금리상승 손해층’인 경우가 많아 소비 위축이 강해진 것이다. (금리민감 자산보다 금리민감 부채를 더 많이 소유하고 유동성자산보다 비유동성자산이 많은 ‘금리상승 손해층’은 금리가 상승했을 때 손해를 본다. 반대의 경우는 ‘금리상승 이득층’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국내 주택담보대출에서 변동금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서, 체감 금리 상승 폭이 주요국에 비해 컸다. 2022년 4분기 주택담보대출 잔액에서 그 비중은 한국이 65.1%, 스웨덴 51.0%, 덴마크 35.8%, 영국 13.1%, 미국 6.1%다.
이에 더해, 민간소비 부진은 지난 20년간 이어진 고질적인 문제였다는 지적도 있다. 첫째, 잠재성장률이 2% 내외로 추정되는 상황에서 민간소비가 기본적으로 둔화할 수밖에 없으며, 둘째, GDP 대비 민간소비와 정부소비를 합한 총소비 비중은 대체로 동일한 상황에서 정부소비 비중이 지속해 확대되면서 민간소비 비중이 줄었고, 셋째, 소비재의 가격이 투자재나 수출품의 가격보다 빠르게 오르면서 실질 민간소비가 축소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현재 시점에서 잠재성장률보다 낮은 1%대 중반 정도가 실질민간소비의 추세적 증가율이다.
그러므로 2025년 이후 금리 인하 국면에서 내수가 곧바로 회복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다소 낙관적이다. 게다가 물가상승률은 낮아졌지만 이미 물가수준 자체가 높아 소비회복이 좀처럼 쉽지 않은 상황에다, 금리 인하조차도 예상보다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2) 금리 인하, 순조롭게 될까?
우선 금리 인상의 이유였던 인플레이션은 목표치에 수렴한 것으로 보인다. 물가상승률은 지난 10월 중 전년동월대비 1.3% 수준으로 낮아졌으며, 2025년도 역시 1.9%로 전망하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미국보다 금리를 훨씬 덜 올린 터라 한국의 금리 인하 강도는 미국에 비해 약할 수밖에 없기에 올해는 더는 금리 인하를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았다. 게다가 미 대선 이후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돌파하고 환율 변동성이 확대됨에 따라 금리를 인하하기에 더욱 곤란한 조건이었다. (환율이 상승하면 수입물가를 자극해 물가 인상 요인이 되며, 금리를 내리면 자본 유출로 환율이 오르는 경향이 있기에 환율이 오르는 상황에서 금리를 낮추기 어렵다.) 그런데도 한국은행이 두 달 연속 금리 인하를 결정했다는 것은 경제 상황을 그만큼 심각히 여기고 있다는 증거다. 11월 28일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이창용 총재는 “성장과 외환시장 안정 간의 상충 관계에 있어서 많은 고민과 논의”가 있었다고 밝혔다. 요컨대, 금융시장 불안정성이 확대되면 금리 인하 기조는 언제든 중단될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미국의 금리 인하가 예상보다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트럼프 정책으로 인해, 다시 고금리 정책으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마저 들린다. 트럼프 당선인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독립성 제한’을 지렛대 삼아 금리 인하를 압박하고 수출 활성화를 위해 약달러를 추구하지만, 시장의 반응은 정반대다. 금융시장은 트럼프의 정책이 고금리·강달러를 야기할 것임을 고려해 반응했다.
트럼프 정책대로 감세를 관세로 감당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해, 공약을 지키고자 한다면 지금보다도 더 많이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연방준비제도(FED)가 국채를 매입하는 과정에서 늘어난 유동성은 인플레이션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다. 또한, 이민 제한과 대중 관세 인상은 각각 임금 및 수입물가 상승으로 이어져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수 있다. 더불어 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전쟁의 불확실성, 보호무역주의에 따른 글로벌 교역 감소로 인해 안전자산인 달러가 선호되어 달러 강세를 유발할 수 있다. 이처럼 강달러 현상이 계속되면 원·달러 환율은 상승할 것이고 한국의 금리 인하는 점차 어려워질 것이다. 2. 다시 돌아온 트럼프 행정부, 한국경제에 끼칠 영향은?
또한 트럼프 당선이 금융시장에 주는 파급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당선 직후 한국 주식시장에서 자금이 급속히 빠지고 미국 증시에 돈이 몰리거나, 비트코인 시장 규모가 다시 확대되면서 금융시장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1) 앞뒤 안 가리는 트럼프식 관세전쟁
또한 자신이 체결한 협정조차 쉽게 무시하는 트럼프의 태도는 한미자유무역협정(FTA)도 무사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 트럼프 1기 행정부는 한국에 세이프가드 발동(긴급 수입제한 조치), 세탁기·철강제품 관세 부과, FTA재협상 요구 등 통상압력을 가했다. 한편,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가 작년에는 444억 달러, 올해도 500억 달러 이상으로 확대될 계획이라 트럼프 1기보다 더 강한 통상압력을 받을 것이다. 완성차의 미국 수출 비중은 최근 5년간 상승세다. 2023년 완성차의 미국 수출 비중은 45.5%, 전기차는 35.0%로 높은 수준이다. 무관세로 지금껏 큰 혜택을 입었던 한국 자동차 산업이 표적이 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의 관세 공약이 현실화될 경우 한국경제가 얼마큼 타격 받을지를 여러 기관이 예측한 자료에 따르면, 최악의 경우 성장률이 1.1%P 하락할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대중국 제재가 한국에 반사이익이 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실제로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중국산 대체 수요로 한국이 이익을 얻은 측면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동차·배터리·반도체·철강 등 현재 한국의 대미 주력 수출 품목은 이미 미국 수입시장 내 중국 비중이 낮은 상황이라 그 영향이 제한적이다.
게다가 한국 기업은 글로벌 생산설비의 15~20%가 중국에 있어 여전히 중국 공급업체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운영에 따른 위험도 더욱 커질 전망이다. 또한 미중 무역전쟁의 여파로 중국의 성장이 둔화하고 내수침체가 지속하면, 중국이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3국에 초저가 수출 공세를 할 우려가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의 수출 경쟁력에 타격을 줄 것이다. 즉 미국의 대중국 제재에 따른 반사이익은 없거나 있어도 미미할 것으로 보인다. 2) 자동차·반도체 산업, 보조금 물 건너가나?
물론 대다수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전면 백지화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한다. IRA 보조금을 받기 위해 타국 업체들이 공장을 지은 조지아·미시간·오하이오는 공화당 지지가 강한 공업지역이다. 또한, 반도체지원법(칩스법)은 초당적 지지가 있는 사안이다. 다만 행정부의 재량권이 커서, 보조금 지급조건을 까다롭게 하거나 의도적으로 지연하는 방식으로 IRA를 실질적으로 무효화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한국은 IRA 시행 후 미국에 가장 많은 투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나라 중 하나다. 지난 2년간 한국 기업이 발표한 투자 프로젝트는 총 37개로 투자 규모는 해외 기업이나 미 주정부와의 합작 투자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도 198억 4320만 달러에 달한다. 물론 미 대선이 다가오면서 불확실성이 커져 프로젝트가 지연되거나 중단되었다고 해도, 이미 매몰 비용이 상당하다. 게다가 보조금 지급이 까다로워지는 것도 문제지만, 애초의 중요한 투자 목적 중 하나였던 통상마찰 회피를 이루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 큰 문제다.3) 금융시장 리스크를 키우는 트럼프 트레이드
트럼프 트레이드는 고위험 투자에 몰두하는 개인투자자의 세태를 부채질한다. 사회진보연대는 코로나19를 거치며 주식소유자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현상에 대해 비판한 바 있다. 국내 주식시장은 개인투자자 비율이 비상식적으로 높고, 그중에서도 단기 시세차익을 노려 하루 안에 주식을 사고파는 당일 매매 비중이 절반 이상이다. 국내 주식시장이 빠르게 하락한 것도 개인투자자가 미국 주식시장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트럼프 트레이드에 힘입어 국내 투자자의 미국 주식 보관 금액이 11월 14일 현재 처음으로 1,000억 달러(약 140조 원)를 넘었다. 2022년 말만 해도 440억 달러 수준이었는데, 2년도 안 돼서 배 이상으로 뛴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코인 시장의 부활이다. 트럼프는 대선 과정에서 비트코인 2024년 콘퍼런스에 참석해 자신이 집권하면 미국 정부가 비트코인을 전략 자산으로 지정해 비축한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고, 얼마 뒤 “미국을 가상 화폐의 수도”로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미국 공화당의 폴 라이언 전 하원의장은 스테이블코인을 보급해서 미국의 부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었다.
트럼프가 당선되자 전 세계적으로 코인 시장에 자금이 다시 몰렸고, 그에 한국인이 가장 열광적으로 반응했다. 국내 5대 가상자산 거래소의 하루 거래대금이 코스피·코스닥 시장을 추월하는 일도 벌어졌다. 미국 성인 중에 5~10%가 코인을 보유하고 있어 트럼프의 공약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경우 성인의 코인 보유 비율이 20%가 족히 넘는다. 금융정보분석원에 따르면 2024년 상반기 기준으로 코인거래 이용자가 778만 명인데, 트럼프 당선 이후 이보다 더 급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블록체인 암호화폐는 결국 대응하는 가치 실체가 전혀 없기 때문에, 각종 금융상품 중에서 가장 변동성이 높으며 본질적으로 다단계 금융사기에 가깝다. 따라서 우연한 계기로 금융시스템 전반에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개인투자자의 투기적 행태는 이전부터 있어 왔지만, 트럼프 당선을 매개로 더욱 활개 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여야가 합심해 가상자산 과세 유예를 결정했는데, 인기영합주의적 정책을 추수하는 정치권도 이런 세태를 더욱 부추기고 있는 형국이다.
2025년 경제 정세를 좌우할 트럼프의 귀환은 분명 외부적 요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외부적 요인에 대응할 한국경제의 기초체력은 이미 바닥난 상태다. 지금부터는 한국경제의 취약성을 보여주는 세 가지 제약 조건에 대해 알아본다.3. 잠재성장률 하락: 초고령화·초저성장 사회라는 예견된 미래
이창용 총재는 한국은행 창립 74주년 기념사에서 ‘시끄러운 연구’를 통해 “통화정책뿐 아니라 구조개혁과 관련한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통화정책방향 결정 회의에서는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 잠재성장률이 몇십 년 뒤에는 거의 0% 수준으로 날아갈 그럴 위험”에 처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즉,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구조개혁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만큼 한국경제가 위기에 봉착했으며 이를 혁신하지 못한다면 이대로 가라앉아 버릴 것이라는 우려가 널리 확산하고 있다. (사회진보연대는 한국경제의 이러한 장기침체의 상황을 마르크스의 구조적 위기론 관점에서 이미 다룬 바 있다. 임필수, 「장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라는 쟁점으로 살펴본 세계경제」, 《계간 사회진보연대》 2022년 겨울호.)1) 현황: 빠른 속도로 하락하는 잠재성장률
잠재성장률은 기본적으로 생산함수를 통해 추정한다. 생산함수는 자본과 노동이라는 생산요소를 투입해 국민소득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한편, 자본과 노동을 제외하고 성장률에 기여하는 부분을 총요소생산성이라 부른다. 동일한 고정자본과 노동을 투입해도 국민소득이 더 높은 나라가 있는데, 이는 총요소생산성이 더 높기 때문이라는 논리다. 총요소생산성은 보통 GDP에서 생산요소(자본, 노동) 기여분을 차감하여 그 추세를 계산한다. 즉, 총요소생산성은 사후적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한국의 잠재성장률은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매우 가파르게 떨어지는 중이다.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것처럼, 급격하게 초저성장으로 진입한 셈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세계 주요국의 장기 1인당 잠재성장률을 추정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잠재 GDP 성장률은 2000~2007년 연간 3.8%에서 2007~2020년 2.8%, 2020~30년 1.9%, 2030~60년 0.8%로 급속히 떨어진다. 2020~30년까지는 OECD 평균인 1.3%보다 높지만, 2030~60년에는 OECD 평균인 1.1%와 G20 평균인 1.0%를 밑돌면서 회원국 중 가장 낮은 수치가 된다. 이는 각각 1.0%와 1.1%로 추정되는 미국이나 일본보다도 낮은 수준이다.
한국경제 성장률이 정점을 찍고 하락하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생산 요소별 장기 추이를 살펴보자. 1990년대 경제성장률 하락이 노동 투입 증가세 둔화에 기인했다면, 2000년대에는 자본투자 부진이 성장률 하락을 주도했다. 그런데 2010년대에는 생산성 증가세 둔화가 주된 원인으로 나타났다. 생산성 증가세가 둔화한다는 것은 아무리 자본과 노동력을 투입해도 성장이 한계에 봉착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한국경제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다. 생산성 증가세 둔화는 총요소생산성 증가율 하락으로 확인할 수 있는데, 2000년만 해도 2%씩 늘었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은 2008년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해 2022년 0.8%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최근에는 코로나19 위기가 잠재성장률 하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코로나19 위기가 포함된 2019~20년 중 잠재성장률 추정치는 2.2% 내외로, 기존 추정치였던 2.5~2.6%에 비해 0.3~0.4%P가량 낮아졌다. 코로나19 충격은 공급망 약화, 재택근무 확대에 따른 조정비용 증가, 서비스업 생산능력 저하 및 자원배분 비효율성 증대 등 총요소생산성 저하 경로를 통해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더불어 온라인 수업 확대에 따른 육아부담 증가, 대면서비스업 폐업으로 여성들의 경제활동참가율이 크게 하락하면서 노동 투입이 감소했고, 고령층의 비자발적 실업이 증가한 것도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했다. 엔데믹 시기 추세선을 다시 회복한 노동 투입과 달리, 생산성은 다시 회복하지 못하면서 잠재성장률을 더욱 낮춘 것으로 보인다.
2) 전망: 예견된 미래
한국의 생산가능인구(15~64세)가 2017년을 정점으로 감소하고 있고 노동시간 역시 감소하는 추세에서, 고용률의 획기적인 제고가 이뤄지지 않는 이상 노동 투입의 하락은 변수가 아닌 상수다. 노동 투입을 추산하는 방식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노동의 잠재성장률 기여도는 이미 마이너스이거나 곧 마이너스대로 진입한다. 즉, 노동은 단순재생산조차 이뤄지지 않으면서 성장에 악재로 작용하게 된다.
자본 투입의 경우 이윤율 하락과 함께 투자 증가율이 꾸준히 낮아지고 있으며 2040년대에는 그 증가율이 1% 정도로 낮아질 것으로 전망한다. 따라서 향후 경제성장은 총요소생산성의 기여도가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하느냐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대다수 전문가가 생산성 향상을 위한 대책으로 구조개혁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망은 어둡다. 저생산성은 세계적 기조로 선진국 역시 총요소생산성 증가율이 모두 낮다. 총요소생산성을 국제 비교한 자료에 따르면, 선진국의 총요소생산성 증가율 역시 한국과 대동소이한 수준이다. 한국은행에서 추산한 그래프를 보면(그림6), 심지어 구조개혁을 통해 생산성 향상에 성공하더라도 극적 반전을 꾀하기 어렵다. 게다가 구조개혁은 정치적으로 실현가능성이 작을 뿐만 아니라, 개혁을 어렵게 하는 구조적 요인도 존재한다. 바로 부채 문제다. 4. 부채 삼중고에 빠진 한국경제
1) 통화정책 전환의 발목을 잡은 가계부채
2024년 2~3분기부터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에 근접함에 따라, 금리 인하 시점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하반기 들어 ‘상저하고’라는 말이 무색하게 내수 부진이 여전한 가운데 수출 역시 예상보다 부진하면서,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한은을 압박하는 모양새가 조성됐다. 2024년 6월 성태윤 대통령실 정책실장의 “통화정책을 유연히 가져가야 한다”는 발언을 시작으로, 7월에는 “금리는 내려갈 방향밖에 없다”는 한덕수 국무총리의 언급이 있었으며, KDI 역시 8월에 금리를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8월 통화정책방향 결정 회의에서 한은은 금리를 동결했고, 이에 대해 대통령실이 공개적으로 “아쉽다”는 의견 표명을 하는 이례적인 일이 발생했다.
금리 인하의 발목을 잡은 것은 바로 막대한 가계부채였다. 6월 말 기준 가계신용 잔액은 거의 1천 900조 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는 2002년 4분기부터 관련 통계를 공표한 이래로 역대 최대치다. 스트레스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도입 시기가 미뤄짐에 따라 수도권 아파트 가격이 다시 증가세로 전환하는 시점에 금리 인하가 이뤄질 경우 간신히 축소하고 있는 가계부채가 다시 확대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간 한은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섣부른 금리 인하가 부동산 가격상승으로 연결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총재가 직접 기준금리가 예전 0.5% 수준으로 빠르게 내려가지 않을 것이므로 “영끌했을 때 부담이 적을 거로 생각하면 안 된다”며 강하게 경고를 하기도 했다. 한은 입장에선 내수부진에 대응해 성급하게 금리를 인하했다간 가계부채가 더 확대될 수 있고, 부채가 확대되면 금융위기에 취약해지기에 쉽사리 금리를 낮출 수 없었다. (물가안정과 완전고용이 통화정책의 양대 목표인 연준과 달리, 한국은행의 경우 물가안정이 일차 목표이며 2011년 한국은행법 개정 이후 금융안정 책무를 명시적으로 부여받았다.)
IMF가 2023년에 발표한 『2023 한국 연례협의 보고서』에 따르면,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00%를 초과하는 나라 중에서 코로나19 이전 기준인 2019년보다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상승한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그림7 위). 게다가, 다른 나라와 달리 한국은 DSR이 꾸준하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그림7 아래). 게다가 연체율도 2022년 2분기 말 0.56%에서 2024년 1분기 말 0.98%로 상승했다. 특히, 소득 하위 30%에 속하거나 3개 이상 금융기관에 채무가 있는 다중 채무자(취약차주)의 경우 연체율이 2024년 1분기 말 현재 9.97%에 이른다.
이렇게 한국의 가계부채 규모가 확대한 원인으로는 보통 세 가지가 지적된다. 첫째,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행에서 높은 수익성과 안정성을 기대하며 가계대출을 대폭 늘렸고, 이후 은행 대출에서 가계대출 비중은 기업대출 비중을 항상 상회했다. 둘째, 한국의 경우 대출 관행이 주요국에 비해 완화적이다. 대부분의 대출이 DSR에 포함되는 주요국과는 달리, 한국은 전세자금이나 중도금 대출 등 상당수의 대출이 DSR 적용을 받지 않고 있다. 셋째, 저금리 기조가 장기화하면서 부동산 시장에 유동성이 공급되었고, 전세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에 더해, 최근에는 정책대출과 집값 상승의 악순환이 원인으로 지적된다. 공적보증은 2015년 229조에서 2023년 701조로 증가했고, 공적보증 중에서도 주택담보대출 비중이 같은 기간 35.8%에서 65.9%로 상승했다.
나아가, 가계부채 증가와 부동산 가격상승은 악순환을 형성하게 된다. 우선 높은 담보자산 가치를 보유한 고소득층이 더 많은 부채를 통해 순자산을 증가시킴에 따라 자산 불평등이 확대된다. 이렇게 되면 저소득층에 대해 대출을 촉진하려는 정치적 압력이 발생하여 가계부채 증가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가계부채의 상승은 비효율적인 자원배분을 낳는다. 국내은행의 업종별 대출자산 비중을 보면 부동산과 임대업에 대한 대출 비중이 2012년 8%에서 2019년 12%로 늘어났지만, 제조업에 대한 대출 비중은 동 기간 중 23%에서 19%로 줄었다.
또한, 가계부채의 경제위기 위험성을 계랑 분석한 보고서에 따르면, 가계부채가 GDP 대비 80%를 넘는 시점부터는 경기침체 가능성을 단기적으로도 높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과거 50년간 34개국 데이터를 활용해 생산성 증대가 동반되지 않은 민간신용 증가는 궁극적으로 위기를 유발했다고 주장한다. 실제 일본의 거품경제 붕괴 직전과 미국의 2007년 금융위기 직전 모두 급속하게 가계부채가 증가했다. 일본의 경우 GDP 대비 70%, 미국의 경우 GDP 100%가 고점이었다. 현재 GDP 대비 100%가 넘는 가계부채 규모에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이유다. 2) 고금리 시기에도 늘어나기만 한 기업부채
그런데 코로나19 종료 후 시작된 고금리 상황에서 대부분 나라의 기업부채 증가세가 주춤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은 오히려 증가세가 지속됐다는 점에서 특히 우려스럽다. 부채의 질 역시 악화했는데,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금리 수준이 높고 금리변동 위험에 쉽게 노출되는 비은행권·중소기업·단기대출이 확대됐다. 우선, 전체 기업대출에서 비은행권 대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2019년 말 25.7%에서 2023년 3분기 말 32.3%로 상승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새마을금고 등 상호금융의 기업대출이 2019년 말 대비 2023년 3분기 말 현재 140.9%로 대폭 증가해 비은행권 기업대출 증가세를 주도했다. 상호금융의 기업대출 증가에는 부동산 PF 대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2019년 말 이후 대기업 대출보다 중소법인과 개인사업자 대출 증가세가 더 높았다. 대기업은 대부분 은행권 대출을 중심으로 늘어났지만, 중소기업은 비은행권 대출이 전체 대출 증가 규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해 부채의 질이 더욱 악화했다. 게다가 2023년 3/4분기 말 현재, 만기가 1년 이내로 남은 단기대출이 은행권 기업대출의 67.0%를 차지한다. 이는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말에 비해 증가한 수치다. 단기대출 비중 역시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훨씬 크다. 이에 따라 연체율도 상승하는 추세다. [그림9]에서 확인할 수 있듯,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소기업·개인사업자와 비은행권 대출에서 연체율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기업부채가 악화하고 있다면 부채의 악순환이 초래되어 경제위기가 발발할 가능성은 없을까? 몇 가지 지표를 통해 현재 상황이 녹록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이자보상배율을 살펴보자. 영업이익을 이자 비용으로 나눈 이자보상배율이 1이면 번 돈으로 이자를 지불하고 나면 남는 돈이 없다는 의미인데, 심지어 1 미만인 위험기업의 차입금이 총차입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23년 상반기 기준 57.4%다(외환위기 당시 67.8%).
다음으로 차입금상환배율을 살펴보자. ‘총차입금’을 ‘세금이나 이자 및 감가상각비 차감 전 이익’으로 나눈 차입금상환배율이 5~6배를 넘어서는 경우 상환능력에 비해 차입금 규모가 과다한 것으로 평가하는데, 6배를 초과하는 기업의 차입금이 총차입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23년 상반기 기준 50.5%다(외환위기 당시 62.0%).
물론 현금흐름(flow)이 아니라 자본 규모(stock)로 봤을 때는 현재 상황이 외환위기에 비해 심각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최근에는 이익을 못 내고 있지만 그래도 그동안 벌어놓은 자산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자본 대비 부채비율이 200%를 넘는 경우 취약기업으로 분류하는데, 취약기업의 차입금이 총차입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외환위기 당시에는 84.3%였던 반면, 2023년 상반기에는 35.8%다.
최근 기업부채 증가의 상당 부분은 부동산 PF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코로나19 시기 전체 대출 증가 규모의 약 40% 정도를 부동산업과 건설업이 차지하고 있다. 부동산 PF의 경우 현재 구조조정에 들어간 상황이며, 현재로선 경제 전반의 시스템 위기로 전이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업부채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부동산 PF 외에도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했을 경우 경제가 쉽게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허약체질이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요컨대, 가계부채와 함께 기업부채 역시 한국경제에 큰 제약 조건으로 기능하고 있다.3) 급속한 정부부채 증가로 인한 제약
게다가 부채의 절대 규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부채의 증가 속도다. 만약 부채증가율이 명목 GDP 성장률보다 높다면, 빚이 늘어나는 속도가 수입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빠른 사실상의 ‘폰지 재정’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부부채를 걱정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 시기 코로나19 국면을 거치며 한국의 국가채무(D1)가 빠른 속도로 증가했는데, 국가채무 연평균 증가율이 10.1%에 달해 명목 GDP 연평균 성장률 3.67%를 크게 웃돌았다.
2017년 GDP 대비 정부부채(D2) 비율 역시 5년 만에 40.1%에서 54.1%로 14%P 높아졌다. 같은 기간 IMF가 분류하는 선진국 35개국의 정부 부채비율은 5.5%P 증가했으니, 한국의 부채 증가 속도가 선진국의 2.5배 가량 빨랐다는 의미다. 선진국의 정부부채 비율은 2020년 정점을 찍은 후 2021년, 2022년에 다소 하락한 데 반해, 한국은 계속해서 상승세를 보이는 중이다. 기업부채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시기 확대한 부채 규모를 고금리 시기에 조금도 조정하지 못한 것이다. 인구구조가 전환되는 상황에서 이 추세는 계속될 것이다. 국회예산정책처는 GDP 대비 국가채무(D1) 비율이 2040년이 되면 100.7%, 2060년이 되면 161.0%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또한, 부채의 질적 하락도 우려된다. 국가채무는 금융성 채무와 적자성 채무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금융성 채무는 융자금, 외화자산 등 대응 자산이 존재하여 이를 기반으로 발생한 채무를 나타내며, 대응 자산이 있으니 유사시 별도의 재원 조성 없이도 상환할 수 있다. 반면 적자성 채무는 대응 자산이 없고 상환할 때 조세수입 등 별도의 재원 조성이 필요한 채무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산가치가 급변하는 상황에서는 금융성 채무도 안전하지 않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적자성 채무의 비중이 높아지면 국가채무가 질적으로 악화했다고 판단한다. 한국은 2011년부터 2021년까지 적자성 채무의 비중이 49.2%에서 61.6%로 총 12.4%P 증가했다는 점에서, 국가부채의 질적 하락이 눈에 띈다.
게다가 암묵적인 지급보증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시장에서 평가되는 공공부문 부채(D3)로까지 범위를 확장하면, 그 규모는 세계 최고 수준에 달한다. 한국의 비금융 공기업 부채 규모는 GDP 대비 20%가 넘어, 33개 비교 대상국의 평균(12.8%)보다 크게 높고, 공공부문 부채가 극히 높은 일본(17.2%)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나아가, 최근 10년간 크게 확대한 정책금융, 즉, 산업은행, 주택도시공사 등 사실상 정부의 정책을 대행하는 금융공기업에서 발생하는 부채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2019년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금융공기업 부채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금융공기업의 부채가 ‘공공부문 부채’(D3)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금융기관의 특성상 부채 규모가 비금융기관보다 높은 경향이 있고, 이를 일반적인 정부나 비금융기관의 부채와 동등한 선에서 비교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다. 물론 금융공기업의 부채는 보수적으로 담보 가치를 인정하기에 정부의 부담으로 전이될 가능성은 크지 않으나, 그중 일부만 국가 부담으로 전이되더라도 재정에 부담이 가해진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경기 부진이 이어지면서 2년째 세수 결손이 발생했다. 지난해 세수 결손 규모가 역대 최대인 56조 4천억 원이었고, 올해도 29조 6천억 원의 세수 펑크가 예상된다. 법인세와 소득세를 중심으로 세수가 대폭 줄었는데, 2022년 103.6조가 걷혔던 법인세가 2023년 80.4조(예산 105조), 2022년 128.7조가 걷혔던 소득세가 2023년 115.8조(예산 131.9조) 걷히면서 2023년 세수 결손 규모가 커졌다. 올해 역시 법인세와 소득세가 예상보다 감소할 것으로 보이는데, 법인세가 63.2조(예산 77.7조)가 걷힐 것으로 보이며 소득세는 117.4조(예산 125.8조) 걷힐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는 수입이 줄어든다고 해서 가계처럼 곧바로 지출을 줄이긴 어렵다. 결국 기금을 끌어 쓰는 것도 한계에 봉착할 것인데, 그러면 추가로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방대해진 국채 규모를 추가로 늘리는 데는 제약이 존재한다. 우선 고금리로 인해 이자 부담이 증가했다. 2020년 국고채 평균 조달 금리가 1.38%인데 반해, 2023년은 3.57%에 이른다. 또한, 총발행량 중 차환 발행 비중이 증가하는 한편, 순발행 비중은 2020년 66.1%, 2021년 66.8%, 2022년 57.7%, 2023년 37.1%, 2024년 31.5%로 감소하고 있다.
차환 발행은 채권 만기가 다 돼서 갚아야 하거나 조기상환을 위해 다시 채권을 발행하는 것으로, 쉽게 말해 돌려막기다. 개인에 비유하자면, 월급은 계속 줄어드는데 이미 빚이 많은 상태에서 돌려막기를 위해 추가로 빌리는 데에도 비용이 증가하고 있는 셈이다. 5. 수출 대기업은 한계에 도달 중
1) 수출로 먹고살기 어려워지고 있다
한국의 수출은 2017년을 정점으로 하여, 이후 성장세가 주요국 수출 성장세를 밑돌며 정체하고 있다. 이는 한국의 수출구조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지난 10여 년의 추이를 봤을 때 지금까지 무역흑자에 크게 기여했던 휴대폰·디스플레이·선박·자동차 수출이 상당 기간 둔화 흐름을 보이고 있다. 휴대폰·디스플레이 수출은 생산기지 해외 이전, 중국업체와의 경쟁으로 감소하고 있고, 선박은 과거의 공급과잉 여파가 이어졌으며, 자동차도 해외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정체 흐름을 보였다.
한국의 수출을 제약하는 외적 요인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중국과의 경쟁이다. 이렇게 국내 수출입 구조가 변화하는 와중에 중국의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자급률도 올라, 앞으로 대중 수출이 점차 어려워질 전망이다. 중국 수입시장에서 한국 점유율은 2000년 이래로 꾸준히 축소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무선통신기기, 디스플레이의 경우 중국업체의 기술력 향상과 저가 전략으로 인해, 2021년 수출금액이 2015년 대비 무선통신기기는 40%, 디스플레이는 26%까지 축소했다. 중국의 기술 발전으로 한국의 중국산 중간재 수입도 증가하면서 2023년부터는 대중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섰다.
실제로 중국산 저가 철강재 유입으로 철강 대기업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최근 실적 악화에 시달리고 있는 포스코는 영업이익이 전년동기대비 39.8% 감소했으며, 수익성 개선을 위해 포항제철소의 몇몇 공장을 폐쇄했다. 현대제철 역시 같은 이유로 공장 폐쇄를 추진 중이다. 자동차 수출의 경우 철강 기업만큼은 아니더라도 중국의 공격적인 전기차 시장 장악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현대·기아차의 경우 전기차 판매량이 올해 상반기 17.6%P 감소했으나, 하이브리드차의 약진으로 전기차 수출 부진을 보완해 올해 1~3분기 판매량이 2.2%P 감소에 그쳤다. 그러나 문제는 앞으로인데, 이미 유럽, 아세안에서 중국 전기차 수출이 급격히 늘어난 상태다.
이외에, 미국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동차는 장기적으로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하려는 추세다. 또한, 최근 엔저의 장기화로 일본과 수출경합도가 높은 석유제품, 자동차·부품, 선박, 반도체 등 한국 5대 수출품목 모두 상대적 경쟁력이 저하되고 있다. 이처럼, 첨단 IT 품목을 제외한 대부분 수출산업이 하방 압력을 받고 있다. 대외적 조건을 고려했을 때, 이런 상황은 앞으로도 지속할 것으로 보인다.2) 삼성전자 위기론
사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서 선두를 달릴 수 있었던 비법은 간단했다. 1980년대 실리콘밸리는 메모리 칩 분야에서 일본의 국제적 경쟁에 맞서기 위해 훨씬 더 저렴한 공급원을 찾아내는 동시에 미국의 연구개발 노력을 범용 D램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제품에 집중하고자 했다. 이에 이미 미국과 일본에서 만든 칩의 조립과 패키징을 아웃소싱하고 있던 한국이 그 적임자가 되었다. 삼성은 정부 지원을 등에 업고 거대 자금을 투여해 시장을 장악했다. 막대한 고정자본 투자가 필요한 반도체 생산에서 시장을 독식하는 데에는 대규모 자금 조달이 쉬운 재벌구조가 유리하게 작용했다.
최근 메모리 반도체 업계의 상황은 삼성전자의 위치가 바뀌었을 뿐 1980년대의 양상과 똑같다. D램을 대량 생산하는 삼성의 자리를 중국이 꿰차려 하는 가운데, 삼성이 기술력 격차를 극복하지 못하며 대만의 TSMC가 범용 메모리반도체를 제외한 첨단 반도체 시장을 장악한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 최대 메모리 기업인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는 중국 정부의 보조금에 힘입어 범용 메모리 반도체를 반값에 판매하는 덤핑전략으로 전세계 D램 생산량의 10%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삼성전자 메모리 반도체를 전량 수입하던 중국 전자 업계가 자국 회사의 반도체를 쓰기 시작하면서 삼성의 시장 점유율이 빠르게 줄고 있다. 이에 삼성은 메모리 반도체의 사업성을 우려하면서 시스템 반도체 생산에 박차를 가하며 TSMC와의 위탁 생산(파운드리) 경쟁에 뛰어들었지만, 기술력 격차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는 미세공정으로 갈수록 기술개발비용과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과거에는 삼성과 TSMC도 비슷한 공정 수율(생산품 대비 정상품의 비율)을 보였지만, 이제는 격차가 10% 이상 벌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미중갈등과 디커플링에 취약하다. 삼성전자는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선진국에서 장비용 부품을 수입하여 반도체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하고, 그렇게 생산한 반도체를 중국에서 후공정을 거쳐 판매해 왔다. 반도체 장비와 부품은 일본을 비롯한 선진국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은 한편, 생산할 반도체를 수출할 시장은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향후에 2017년과 같은 세계적인 반도체 호황기가 다시 돌아오더라도, 삼성전자가 그 호황을 누릴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3) 재벌체제의 결함 때문
하지만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며 그룹 내 총수일가의 지배구조를 확고히 하는 것이 제1 목표인 재벌기업에서 그런 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실제 분사에 관한 얘기가 안팎으로 들려오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파운드리 사업부의 분사 가능성을 일축했다. 이처럼 지배력 확보를 위해 비효율적인 사업구조를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 재벌체제의 가장 큰 결함이다. 그 결과 수익성이 무시된다. 실제 스마트폰의 경우, 삼성전자 매출액이 애플의 5분의 1정도 밖에 되지 않고 영업이익률도 3배나 차이 난다. 반도체 사업에서도, TSMC가 삼성전자보다 매출액도 크고 2023년 기준으로 영업이익률은 세 배나 높다. 2024년에는 이러한 격차가 더욱 확대될 예정이다. 삼성전자가 겉으로 보기에는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을 자랑하며 경쟁기업과 1, 2위를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수익률은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 것이다.
삼성을 정점으로 하는 수출 대기업이 한계에 봉착한 현 상황은 한국경제의 앞날을 불투명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나 재벌체제는 소수의 총수 일가가 초래한 위험을 주주와 노동자, 나아가 IMF 외환위기 때처럼 국가 경제의 시스템적 위험으로까지 확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한국의 경제구조에 큰 제약으로 작용한다. 6. 나가며: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이런 상황에서 대중의 분노는 어떻게 귀결될까? 미국에서 고물가로 인한 대중의 공분은 트럼프주의에 불을 지폈다. 그 저변에는 세계화의 여파로 제조업이 쇠퇴하면서 일자리를 잃었던 인민의 설움이 있었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로, 성장이 멈추고 생활 수준의 하락이 시작되면 대중의 분노가 어디선가 분출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문제의 원인을 누군가의 음모나 탓으로 돌리며 그 분노가 엉뚱한 곳으로 향하게 되면 사태는 더욱 악화할 것이다.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선 객관적 현실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운동은 정치권의 인기영합적인 정책 비판할 수 있어야 하고, 경제의 객관적 제약 조건을 무시해선 안 된다. 그리고 대중의 분노를 부채질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 분노를 더 나은 사회를 조직하는 데 보탬이 될 수 있도록 전환해야 한다. ●
1. 세계경제 전망: 정책 전환과 세 가지 위협1) 인플레이션 완화와 통화정책 전환
먼저 인플레이션 전망을 살펴보자. 올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2022년부터 이어진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은 점차 휴전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지배적인 평가다. 세계경제의 헤드라인 인플레이션(전년 대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022년 3분기에 9.4%로 정점에 도달한 뒤, 2023년 6.7%로 하락한 데 이어 올해는 5.8%, 내년인 2025년에는 4.3%로 하락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해 전망과 비교할 때, 선진국은 신흥국이나 개발도상국보다 더 빨리 인플레이션율이 중앙은행의 정책목표인 2%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예를 들어 유럽(유로존)은 빠르면 2025년 초, 미국은 2025년 말에 인플레이션율이 2%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세계적인 인플레이션율의 급등은 코로나19 대유행에 이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망이 붕괴하고 원자재 가격이 급등한 데다, 대유행 시기 급격한 완화적 통화정책을 시행한 이후 회복기에 강력한 수요 증가와 견조한 고용 상황이라는 요인이 결합하여 발생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급 차질이 점차 완화되고 각국 중앙은행이 강력한 통화 긴축 정책을 펼치자, 인플레이션은 급격한 경기침체나 성장률 하락 없이 어느 정도 진정될 수 있었다. 이를 반영해, 올해와 내년에도 세계경제 성장률은 3.2%로 회복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경기순환 불균형이 완화하면서 실제 경제성장률과 잠재 경제성장률이 점차 일치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다만,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격차, 나아가 각국 간의 편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 미국은 성장률과 고용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인플레이션을 안정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반면, 유럽은 인플레이션 안정세는 명확하지만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올해와 내년에도 1% 내외의 저성장을 이어갈 전망이다. 특히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유럽경제 회복세는 서비스 부문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산업 부문은 여전히 회복세가 저조하여, 독일과 같은 제조업 중심 국가의 경기 침체가 두드러지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가 3.1% 상승하며 1982년 이래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2.6%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일본 정부는 임금인상을 장려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하는 한편, 기준금리를 3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0.1%에서 0.25%까지 인상했다. 2013년 디플레이션과 장기침체 탈출을 위해 대규모 양적완화와 마이너스 금리정책을 펼쳤던 ‘아베노믹스’ 기조가 변화하고 있다. 한편, 개발도상국은 여전히 대규모 생산 감소와 통화정책의 불안정이 지속하면서 높은 수준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다. 나아가 많은 나라에서 인구 고령화나 생산성 저하와 같은 구조적 요인으로 인해 잠재성장률이 하락하고 있다.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은 하반기로 넘어가면서부터, 통화정책 기조를 전환해 기준금리를 인하하기 시작했다. 이는 인플레이션율 하락과 함께, 경기 침체로 전환될 것이라는 우려를 반영한 것이었다. 유럽 중앙은행은 올해 6월 0.25%p 인하한 데 이어 9월 0.6%p, 10월 0.25%p 인하하여, 12월 초 현재 기준금리는 3.4%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올해 9월과 11월에 기준금리를 각각 0.5%p, 0.25%p 인하한 데 이어 12월에도 0.25%p 추가 인하해 기준금리는 4.25~4.5%다.
다만 지난해에 전망했던 대로, 주요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전환은 서서히 이루어졌다. 내년에도 금리 인하 속도는 빠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미국은 2025년 4분기까지 약 0.5%p 추가 인하하여 4.0% 내외의 기준금리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인플레이션의 완화에도 불구하고 세계경제에 드리우는 위협의 증대를 반영하는 것이다.2) 세계경제에 드리우는 세 가지 위협
무엇보다, 새로운 팬데믹, 기상이변,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 공급망이 붕괴하거나 원자재 가격이 급등해 물가 상승과 생산량 감소가 동시에 발생하는 충격이 다시 발생할 가능성이 남아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 30년간 상품가격 변동의 세계적인 동조화가 심화했다.
특히, 산업 원자재 가격 변동에서 공통 요인(세계적 요인)의 역할이 상당히 증가했고, 이러한 추세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발생한 2020년 이후 더욱 뚜렷해졌다. 예를 들어, 지난 4년간 에너지 가격 변동의 41.7%, 비금속(卑金屬, base metal) 가격 변동의 61.4%를 공통 요인이 설명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팬데믹이나 분쟁과 같은 요인이 각 원자재 시장에 미치는 충격이, 전반적인 원자재 가격의 동반 상승으로 쉽게 이어져 다시금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규칙 기반 세계질서의 후퇴와 트럼프의 귀환이다. 2007~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국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한편, 강군몽을 이루기 위해 군민융합을 내세우며 ‘중국제조2025’ 계획을 추진했다. 이에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자유주의 국가는 중국이 자유무역 질서에 깊이 편입되어 있으면서도 불공정한 기술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이를 악용해 배타적인 민족적 이익을 강화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나아가, 미국에서는 중국의 대규모 무역흑자와 이를 가능케 하는 세계 무역질서가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제조업의 위기와 각종 사회적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고 주장한 트럼프가 광범위한 탈세계화 정서를 등에 업고 2016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국제문제에서 양자 간 거래를 선호하는 한편 다자간 규칙 기반 세계질서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2017년 세계무역기구(WTO)의 상소기구 위원 선임을 미국이 거부하면서 2019년부터 그 기능이 정지된 것을 들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이어가되 트럼프 행정부 시기에 훼손된 규칙 기반의 다자적 질서와 동맹 질서를 복원하고자 했다. 다만 WTO 분쟁 조정 기능이 여전히 사실상 정지 상태인 가운데, 인도·태평양 지역 국가들과 무역·노동·디지털 경제 표준 정립, 공급망 회복력 제고, 청정에너지 발전과 인프라 구축을 위한 경제협력체인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를 발족했지만, 아직 뚜렷한 활동과 성과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다른 한편, 바이든 행정부는 통상정책 주요 의제 중 하나로 ‘노동자 중심 무역정책’을 제기하면서 인권·노동권과 무역을 연계해 독자적인 규제와 제재를 강화했는데, 여기에 중국이 강하게 반발했다. 나아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미국과 유럽연합을 비롯한 G7이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가하면서 국제 질서의 분절화는 더욱 심화했다. 러시아와 중국은 이러한 서방의 제재가 오히려 국제법에 반하는 일방적 조치라고 반발하고 있는데, 이는 올해 브릭스(BRICS)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카잔 선언에 그대로 담겼다. (브릭스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룬다.)
요컨대, 2020년대는 세계적 수준의 상호의존성과 모순은 여전히 심화하고 있지만 대안세계화의 가능성은 요원한 상황에서, 기존의 신자유주의 규칙 기반 세계질서에 대한 미국의 후퇴와 러시아·중국의 교란·도전이 중첩되어 무질서와 불확실성이 증대하고 있는 정세라고 할 수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 블록 간 무역량보다 블록 내 무역량이 늘어나고 있고, 많은 국가가 일방적인 보호주의 정책을 강화하는 추세가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곧바로 급속한 탈세계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공급망의 복원력을 떨어뜨리고 불확실성을 증대하는 문제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2025년 트럼프의 복귀는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할 것이다.
셋째, 장기저성장 시대에 가중되는 재정위기와 부채위기다. 코로나19 대유행과 경제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재정적자와 부채를 크게 늘렸다. 이후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이 이어진 가운데서도 공공부채는 여전히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올해 유엔 무역개발회의(UNCTAD)가 발표한 ‘부채 세계’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세계 전체의 공공부채 규모는 2022년 대비 5.7% 늘어난 97조 달러(약 13경 원)다.
보고서는 특히 세계경제의 부진하고 불균등한 성장으로 인해 선진국보다 개발도상국에서 두 배 빠른 속도로 부채가 증가하고 있다고 우려한다. 전체 부채 규모에서 개발도상국의 부채 규모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의 16%에서 빠르게 커져 2023년 30%(약 29조 달러)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보고서는 많은 개발도상국이 빚을 갚는 것과 국민을 위한 의료·복지·교육에 투자하는 것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고 지적한다.
한편, IMF는 개발도상국뿐만 아니라 세계경제의 중심인 미국과 중국의 부채위기가 지속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점 역시 강조한다. 양국 모두 현재까지 쌓인 절대적인 부채 규모가 이미 막대할 뿐만 아니라, 고금리로 인해 이자 부담이 급격하게 늘어나는 가운데 여전히 대규모 재정적자를 유지하거나 오히려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부채위기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룬다.) 여기에 더해, 주요국 중앙은행이 통화정책을 전환하는 과정에서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급격히 확대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 지난 8월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 정책에서 금리 인상 정책으로 선회한 가운데 미국이 금리를 인하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해지자, 일본 금융기관에서 저금리로 엔화를 빌린 뒤 이를 달러로 바꾸어 미국 금융시장에 투자하는 이른바 ‘앤 캐리 트레이드’ 자금이 대규모로 빠져나가 미국 증시가 폭락하고 환율이 급변하는 일이 있었다. IMF는 이러한 세계 금융시장 변동성의 확대가 금융 여건을 긴축하면서 부채위기를 강화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나아가, 장기저성장 시대에 가중되는 부채위기는 역으로 투자와 성장을 저해하고 금융시장 불안을 자극하는 악순환을 그린다고도 지적한다. 결국, 부채위기가 2020년대 세계경제에 중대한 기저질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2. 미국경제: 트럼프주의의 불확실성과 가중되는 구조적 위기
1) 견조한 거시경제 지표에 가려진 양극화
다만 전년 대비 소비자물가상승률(CPI)을 기준으로 보면, 여전히 인플레이션 완화 속도가 둔화하고 물가 수준이 고착할 우려를 떨칠 수 없다. CPI는 올해 10월 2.6%로 나타났는데, 특히 근원 CPI가 전달보다 0.3%p 오른 3.3%로 나타났다.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근원 상품 물가상승률은 0%에 근접했지만 근원 서비스 물가상승률과 주거비 인플레이션이 약 4%여서, 서비스 물가와 주거비 상승이 인플레이션 대부분을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업률은 지난해 말 3.9%에서 소폭 상승한 4.1%인 가운데, 내년에도 비슷한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비스 부문을 중심으로 이어지던 취업자 수 증가세가 대폭 축소하고, 그간 민간소비 회복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던 초과저축이 대부분 고갈되면서, 전체적인 경기는 둔화하는 방향일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연준은 미국의 실질 경제성장률이 2024~27년에 연간 2.0% 수준에서 이어질 것으로 예측한다.
그런데 이렇게 비교적 견조한 거시경제 지표와 달리, 미국인의 여론은 전반적으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고 인식하는 ‘바이브세션’(vibecession) 현상이 올해 내내 두드러졌다. 예를 들어, 지난 6월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인의 56%가 미국이 경기 침체에 빠졌다고 답변했고, 72%가 인플레이션율이 상승하고 있다고 답변했으며, 58%가 바이든 행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해 경제가 악화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경제 상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하반기 미국 대통령 선거와 상하원 선거가 트럼프와 공화당의 승리로 귀결된 주요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마이클 로버츠는 이러한 현상이 미국경제 내의 양극화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첫째, 거시경제가 성장하고 금융시장이 호황이지만, 일반 미국 가계는 그렇지 못하다. 무엇보다 물가상승률과 물가 수준을 구별해야 하는데, 가계가 체감하는 인플레이션은 ‘물가 상승 속도’보다는 ‘물가 수준’의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바이든 행정부가 취임한 2021년 1월의 소비자물가지수를 100이라고 할 때, 최근의 소비자물가지수는 120으로 20% 상승했으며, 특히 필수구매 항목에 해당하는 에너지(41%), 교통(40%), 주거(22%), 식료품(21%)의 가격 수준이 두드러지게 상승했다. 요컨대, 기본 생필품 물가 수준의 대폭 상승이 인플레이션율의 하락을 압도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이런 가운데 소득과 부의 불평등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한다. 2022년에 미국인 상위 1%가 전체 개인 소득의 20.8%와 전체 개인 부의 35%를 소유한 반면, 하위 50%는 각각 10.3%와 1.5%만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 자본 내 격차 역시 심화하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된 500대 기업 가운데 7대 주요 기술 기업(알파벳, 아마존, 애플, 메타, 마이크로소프트, 엔비디아, 테슬라)의 연간 수익성장률은 2023년에 58%였고 2024년에는 20.8%일 것으로 전망되는 반면, 나머지 493개 기업의 연간 수익성장률은 2023년에는 오히려 2% 감소했고 2024년에는 6.7%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고금리 정책이 장기화하는 가운데서도 기업 시가총액을 총실물자본 구입 가격으로 나눈 ‘토빈의 Q’가 올해 1월 1.48로 역사적 고점을 기록할 만큼 미국 주식시장 열광이 계속되고 있다(역사적 평균은 0.83). 이렇게 미국 기업 주식이 실제 자산 가치보다 훨씬 높게 평가되는 현상 역시 거의 전적으로 7대 주요 기술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비금융 기업 부문과 중소기업은 수익 감소와 높은 이자율로 인한 비용 증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 중소기업의 약 37%가 지난 3개월 동안 수익이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세계 금융위기 시기인 2009년과 비슷한 수치다. 나아가 미국 비금융 기업 부문의 부채 규모는 2021년 GDP 대비 약 0.95%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한 뒤 2023년 말에도 약 0.75% 수준이다. 2025년까지 만기가 도래하는 기업 부채의 규모가 1.8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평균 이자율은 2024년에 4.3%에서 2025년 4.5%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2) 돌아온 트럼프 경제정책의 불확실성
지난 가을호 글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트럼프 경제정책의 위험성」에서 살펴보았듯,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를 앞세우며 추진하고자 하는 경제정책의 핵심은 ‘감세와 관세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행정명령을 통해, 이번 선거로 상원과 하원의 다수당이 된 공화당은 입법을 통해 감세정책과 관세정책을 취임 직후부터 빠르게 추진할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된다.
무엇보다 공화당은 트럼프 당선인이 내년 1월 취임한 뒤 100일 이내에 감세 법안을 연장하는 입법을 속도감 있게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2017년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에 입법된 ‘감세와 일자리법’(TCJA)은 최고 법인세율을 35%에서 21%로 내리고 개인 소득세 최고세율을 39.6%에서 37%로 내리는 것이 골자였다. 이 법안의 개인 소득세율 인하 항목은 내년에 만료될 예정인데, 공화당은 이를 연장하는 한편 최고 법인세율을 트럼프 공약에 따라 15%까지 낮추는 입법안을 빠르게 처리하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으로 관세정책 전망을 살펴보자. 트럼프는 대선 기간에 미국 우선주의라는 기치 아래 ▲ 미국 제조업 부흥 ▲ 무역적자 축소 ▲ 중국과의 경쟁에서 우위 확보라는 세 가지 목표를 위해 관세를 중심으로 하는 보호무역 조치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공약했다. 구체적으로는 모든 국가를 상대로 10%p의 관세를 추가로 부과하는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대국이 미국 상품에 부과하는 관세와 동일한 관세율을 상대국 수입 상품에 부과하는 상호주의 관세, 그리고 중국에 대한 60%에 이르는 고율의 관세를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11월 25일에 트럼프 당선인은 내년 1월 20일 취임 첫날부터 멕시코와 캐나다에서 수입하는 모든 상품에 25%의 관세를 부과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두 나라에서 미국으로 들어오는 마약(특히 펜타닐)과 불법 이민자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이러한 관세를 유지할 것이며, 중국에 대해서도 중국에서 생산돼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유입되는 펜타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모든 중국산 상품에 10%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했다. 이와 함께 그는 자신의 관세 확대 정책을 지지하는 하워드 러트닉과 스콧 베센트를 각각 2기 행정부의 상무부 장관과 재무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특히 트럼프 당선인은 러트닉을 상무부 장관으로 지명하면서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대한 직접적 책임을 맡으면서 관세 및 무역 의제를 이끌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에 따라 대통령의 행정명령과 함께 상무부와 USTR이 실제로 어느 정도 속도와 강도로 관세정책을 추진할 것인지에 주목해야 한다.
공화당 역시 상호주의 관세법 제정을 비롯해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정책을 입법화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알려졌다. 다만 수출에 민감한 주 출신 의원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극단적인 관세정책에 대한 당내 이견이 있어서, 감세 입법과 비교할 때 관세 입법의 속도는 빠르지 않을 수 있다는 전망도 있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중국을 비롯한 대미 무역수지 흑자국을 상대로 하여 행정명령을 통해 구체적인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1기 행정부 시기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시행하거나 협상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할 것은 분명하다. 이에 따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정책이 미국의 무역과 국제질서에 미치는 영향은 1기 행정부나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비해 훨씬 커질 가능성이 높다.
한편, 산업정책에서는 급격한 방향 전환의 가능성이 비교적 크지 않다는 전망이다. 트럼프는 바이든 행정부의 친환경 에너지 정책이 ‘신종 녹색 사기’이며 화석연료 채굴과 사용을 억제해 에너지 가격을 올려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입법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관련 기금을 회수하고 화석연료 채굴과 관련한 규제를 대폭 완화할 것이라고 공약했다. 다만 트럼프 행정부와 공화당이 인플레이션감축법을 완전히 축소하거나 폐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공화당 지지가 강한 지역 중 인플레이션감축법을 통해 태양광·풍력 발전이나 전기차에 지급되는 보조금의 혜택을 받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입법된 ‘반도체와 과학법’(CHIPS Act)에 따른 반도체 보조금 역시, 공화당과 민주당의 초당적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이를 완전히 무효로 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3) 스태그플레이션과 부채위기 결합의 가능성
미국 책임있는 연방 예산위원회(CRFB)는, 트럼프의 공약이 시행되면 미국의 재정적자가 향후 10년간 최대 15조 5천억 달러 증가할 것이고, 장기 국채금리가 상승해 순이자 지급액도 1조 달러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역사적으로 장기 국채금리는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1%p 상승할 때 약 2~3bp(1bp는 0.01%p) 상승하는데, 한국은행은 트럼프의 공약이 향후 10년간 장기 국채금리를 43bp 상승시키는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장기 국채금리의 상승은 다시 부채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악순환을 만든다. 이에 따라, CRFB는 GDP 대비 정부 부채 비율이 현재 97%(전체 국가 부채 규모는 36조 달러)에서 2035년 최대 161%까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추정했다.
트럼프는 감세정책으로 인한 세입 감소를 앞서 언급한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 관세나 대중국 고율 관세와 같은 관세정책으로 메울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관세 규모는 연간 약 800억 달러(전체 세입의 약 2%) 수준이며, 트럼프가 제안하는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 관세법을 시행하더라도 관세 규모는 최대 2천2백억 달러에 그칠 것으로 추산된다. 트럼프의 주장과 달리, 관세 인상을 통한 세입 증가액은 감세정책으로 인한 세입 감소액보다 훨씬 적기 때문에, 관세정책으로 재정적자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할 대규모 관세정책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높이고, 그에 따라 금리 상승 압력을 높여 부채위기를 가중할 것이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 관세가 시행되면 미국의 소비자물가가 1.8%p~3.6%p 상승할 것으로 추정하고, 특히 상대국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 물가 상승 압력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았다. (한편, 경제정책의 영역은 아니지만, 트럼프가 대선 시기 공언한 대규모 이민자 추방 계획 역시 미국경제에 노동력 공급 충격을 가해 인플레이션 상승과 경제성장률 하락이 결합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야기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로 인한 물가 상승 압력은 연준의 금리 인하를 가로막아 고금리를 장기화하는 효과를 미칠 것이다.
향후 3년간 미국의 경제성장률이 2.0%에 수렴할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물가상승률과 이자율이 경제성장률을 상회하고, 지속 불가능한 재정적자와 이자 지출 부담이 확대하며 부채위기가 가중하는 상황은 미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보여줄 따름이다. 여기에 더해 현재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저금리·저물가 상황에서 고용 없는 회복이 문제였던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와 다른 정세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세와 관세의 결합으로 대표되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경제정책은 정책결정의 불확실성을 증대하는 한편,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가중함으로써 미국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더욱 심화할 것이다.3. 중국 경제: 성장 둔화에 대응하는 국가자본주의 강화
1) 장기화하는 부동산 부문 침체와 내수 부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내수가 둔화하면서 소비와 투자의 성장기여도가 큰 폭으로 축소하는 가운데 순수출이 성장률을 그나마 뒷받침하고 있다. 소매판매는 전년동기대비 1분기에 4.7% 증가했으나, 2분기와 3분기에 각각 2.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소비의 성장기여도 역시 1분기 3.9%p에서 2분기 2.2%p와 3분기 1.3%p로 계속해서 하락했다.
투자 역시 부동산투자가 부진하고 인프라투자 증가세가 둔화하면서 3분기에 3.4% 증가하는 데 그쳤고, 성장기여도 역시 1.3%p로 하락했다. 특히 첨단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정책지원 덕에 국유기업 투자는 7%대를 유지했지만, 민간투자는 2분기 0.1% 성장하는 데 그쳤고 3분기에는 –0.2%를 기록했다. 수출 확대 역시 국내 수요가 부진하면서, 낮은 가격으로 수출 물량을 확대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요컨대, 지난해에 이어 계속해서 민간부문이 위축된 상태에서 국유 부문이 중국 경제의 성장을 떠받치고 있다.
이러한 경기둔화에 대응하기 위해 중국 정부는 하반기 들어서 연달아 경기부양 정책을 발표했다. 9월 24일에는 중국 인민은행을 비롯한 주요 금융부처 기자간담회에서 통화정책을 완화하고 부동산 시장과 주식시장 부양을 위한 정책 계획을 발표했다. 먼저 은행 지급준비율을 50bp 인하(10월에 25bp 추가 인하)하고 단기 정책금리인 7일물 역레포 금리도 1.7%에서 1.5%로 인하해 완화적 통화정책 기조를 이어갔다. 또한 부동산 대출우대금리를 50bp 인하하고 지방 국유기업의 주택 매입 대출 지원을 확대했다. 그리고 자격을 갖춘 증권사·펀드·보험사가 자산을 담보로 인민은행에서 국채나 중앙은행 어음과 같은 유동성 자산을 확보해 주식 보유를 확대할 수 있도록 하는 5천억 위안 규모의 스왑 프로그램(SFISF)을 개시했다.
이어 10월 8일과 12일에는 발전개혁위원회가 내년도 예산을 2천억 위안 조기 할당하여 올해 10월 말까지 ‘양중’(兩重, 국가 중대 전략과 안전·안보 관련 중점 분야) 건설 프로젝트와 정부 투자 계획 실행을 촉진하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경기부양 정책을 발표했으며, 재정부 역시 국채 발행을 대폭 늘려 지방정부 부채를 감축하고 부동산 시장을 안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이후 11월 8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는 지방정부 부채한도를 6조 위안 확대하고 4조 위안의 지방정부 특수채를 발행해 음성부채를 양성화하는 데 지원하겠다고 결정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 정부가 이번 하반기에 발표한 경기부양 정책은 이전 시기와 달리 직접적인 대규모 재정투여보다는, 완화적인 통화정책과 정부 투자 확대를 통해 간접적으로 수요를 촉진하는 한편 지방정부 부채를 관리하는 안정화 정책에 가깝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전체 세입의 약 20%를 차지하는 토지매각수입이 3년 연속 크게 줄면서 대규모 확장적 재정정책을 펼칠 여력이 줄어든 가운데, 향후 경기부양을 위해서라도 지방정부의 재정건전성과 부채위기를 관리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를 위해 국채를 대규모로 발행하겠다고 밝힌 만큼, 중국 경제는 계속해서 부채에 의존하며 중앙정부로 부담을 집중하는 경로로 나아갈 것으로 보인다.2) 집중통일영도 체제와 국가자본주의 강화
중국공산당은 개혁·개방 이후 10년 주기로 3중전회에서 장기 정책방향을 담은 「결정」을 발표했는데, 이번 3중전회에서는 「중공중앙의 진일보한 전면적 개혁 심화 및 중국식 현대화 추진에 관한 결정」을 발표했다. 대내적으로는 부동산 부문 침체로 인한 지방정부 부채위기와 내수 부진에 대응하고 대외적으로는 미중 전략적 경쟁 심화에 대처하기 위해, 국가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하고 경제 전반에 대한 당의 통제와 관리를 심화하겠다는 것이 그 요지였다. 이를 시진핑 집권 1기인 2013년 18기 3중전회의 「결정」과 비교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번 「결정」에서는 2035년까지 높은 수준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전면적으로 구축하겠다는 기본 목표 아래 △ 새로운 질적 생산력 제고 △ 국유자본 집중 강화 △ 공급망과 안보 강화 △ 부동산 개혁 △ 당의 집중통일영도 강화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먼저, 시진핑 주석이 직접 강조한 ‘새로운 질적 생산력’은 8대 전략산업인 차세대 정보기술, 인공지능, 항공우주, 신에너지, 신소재, 첨단장비, 바이오의약 및 양자기술에 국가자원과 정부투자를 집중하고 이를 지역별로 특화하겠다는 것이 요지다. 아울러 이러한 전략적 신흥산업과 국가·경제안보의 핵심 분야에 대한 국유자본의 집중을 강조했다. 이는 국유자본이 통제하는 영역을 자연독점 산업으로 국한했던 2013년 18기 3중전회와 비교할 때, 국가전략에서 국유자본의 중요성을 더욱 증대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유자본 중심의 산업고도화를 통해, 중국이 취약한 반도체와 산업 소프트웨어 부문의 공급망 안전성과 경제안보를 강화하며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 심화에 대응하려는 것이다.
한편, 이번 「결정」에서 부동산 개혁을 거시경제나 금융개혁의 영역이 아니라 민생 부분의 사회보장제도 개혁 영역에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주택 과잉 공급과 주택 수요의 구조적 축소를 감안해, 이전과 같이 부동산 개발투자에 지원하기보다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중 주택을 매입하여 보장성 임대주택으로 활용하는 새로운 부동산 발전 방식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아울러 부동산 부문 침체로 두드러진 지방정부의 부채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부동산세와 도시토지사용세 입법화를 추진하고 국세인 소비세 징수권한을 지방정부로 이관해 지방정부의 세입을 늘리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개혁 과정에서 당 중앙의 결정이 모든 지역과 부서에서 효과적으로 시행되도록 중앙의 집중통일영도를 강조했다. 지난 2022년 1중전회에서 당 헌장에 추가된 ‘집중통일영도’는 기존 중국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를 대체하여 시진핑 총서기를 중심으로 하는 1인 지도체제를 의미함과 동시에, 국가 전반에 대한 당의 직접적 관리와 통제 강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국공산당은 지난해 당내에 중앙과학기술위원회를 신설해 기존에 국무원 산하의 과학기술부가 수행하던 과학기술정책을 통솔하도록 했다. 요컨대, 성장동력 소진과 미국과의 전략적 경쟁 심화를 마주한 중국은, 국가자본주의와 당 중심의 통치를 오히려 더욱 강화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3) 미국의 탈동조화와 중국의 위험억제
다른 경제정책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국정책 역시 그 속도와 강도가 얼마나 될지 현재로서 확언하긴 어렵지만, 동맹국 간 공조나 다자적 규칙 기반 질서가 아닌 일방적이고 양자적인 방식으로 미국과 중국 간의 경제적 상호작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은 관세 부과, 투자 제한, 중국 기업에 대한 제재 강화라는 방식으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최근 트럼프 당선인은 중국에서 멕시코를 거쳐 미국으로 유입되는 펜타닐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모든 중국산 상품에 10%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는 조치를 취임 첫날부터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러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대중국정책은 2010년대 중반부터 공화당과 민주당 양당의 초당적 합의로 이어진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심화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로부터 ‘이탈’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본래 전략적 경쟁은 좁은 의미에서 중국을 견제하고 미국의 현실적 이익을 증대한다는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국가자본주의와 권위주의 체제를 강화하며 국제질서를 교란하려는 흐름에 대응하여 자유주의적 다자간 국제질서를 재편한다는 측면도 있다.
그런 점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 관세 조치와 투자 제한을 심화하면서도 무역·노동·환경·디지털 분야에서 다자적인 규칙 기반의 질서를 재구축하고자 했다. 그런데 트럼프 캠프와 최근 공화당의 대중국정책에서는 후자의 문제의식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미국 우선주의를 고수하며 스스로 규칙 기반 세계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
그렇다면 중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대중국정책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중국은 기본적으로 트럼프 행정부 정책의 속도와 강도에 따라 대응할 것으로 보인다. 먼저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에 벌어진 무역 분쟁처럼, 미국의 관세 부과에 맞대응하여 관세를 부과하거나, 미국 기업에 대한 비관세 장벽을 강화하거나, 위안화 환율을 절하하는 보복 조처를 할 수 있다. 다만, 스위스 투자은행 UBS의 중국 수석 경제학자 왕타오는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대담에서, 이번에는 중국이 곧바로 보복관세나 환율 절하로 강력히 대응하기보다는, 내수를 증대하고 수출을 다변화하는 전략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한다.
그에 따르면, 이는 중국이 여전히 세계경제와의 통합을 유지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국은 대내적으로 내수를 키우고 대외적으로 세계경제와의 통합을 강화하면서도 미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와 위험을 축소하는 ‘쌍순환’ 전략을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등장과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2020년대 주요 전략으로 본격화했는데, 트럼프 2기 행정부의 등장으로 이를 더욱 가속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러한 중국의 대응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가 중국의 미 국채 투자 잔액 감소다. 중국의 미 국채 투자 잔액은 올해 6월 약 7천8백억 달러로, 3년 전인 2021년과 비교할 때 26.5% 감소했다. 이에 따라 중국의 전체 외환보유액 중 미 국채가 차지하는 비중도 2021년 31.7%에서 역대 최저 수준인 22.6%로 하락했다.
여기에는 경제적 요인과 정치적 요인이 함께 작용했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이 2010년대부터 외환보유 다변화 정책을 추진하며 외환보유액 중 달러화 비중을 2010년 65%에서 2024년 52%로, 점진적으로 축소했다. 그런 가운데 2015년 대규모 자본유출 시기와 최근 3년간 환율 절하 압력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 국채 매도가 두드러졌다. 정치적으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것에 대응해 미국이 러시아에 전방위적인 금융제재를 시행하는 것을 보고, 중국에서는 미 국채 보유가 중국의 경제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경계감이 고조되었다. 미중갈등이 지속되면서 중국의 미 국채 보유 축소 역시 점진적으로 이어질 전망인데, 미중관계에 대한 중국식 위험억제 전략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4. 브레튼우즈 체제 80년과 브릭스의 미래
1) 전후 국제질서의 위기와 브릭스의 부상
브레튼우즈 체제는 1944년 미국의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고정환율제를 중심으로 재건된 국제통화체제를 말한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이렇게 재형성한 국제통화체제를 위협하는 각국의 자의적 통화가치 변동과 보호무역주의를 방지하기 위해, 참여국이 경제 규모와 무역 규모에 비례해 출연금을 내고 국제수지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금을 지원하는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성장을 지원하는 다자개발은행인 세계은행(WB)을 설립하고, 규칙에 기반을 둔 자유무역 질서를 확립하고자 향후 세계무역기구(WTO)로 발전하는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맺었다. 1973년 미국이 금 태환을 정지하면서 고정환율제가 변동환율제로 전환되었지만, 탈냉전 이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가 확대되면서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자유무역과 금융질서는 큰 틀에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 이후 2020년대 들어 미중 전략적 경쟁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국제질서에서 이탈하면서, 탈냉전 이후 신자유주의가 내세웠던 규칙 기반의 다자간 질서와 공동지배가 분절화되고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심화하고 있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경제위기와 이어진 세계적 고물가·고금리 상황에서 선진국과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로 지칭되는 개발도상국 사이의 격차가 확대되는 가운데, 각국이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면서 전후 국제질서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한계와 모순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회운동 일각에서는 다자주의를 내세우며 외연을 확장하기 시작한 브릭스가 전후 국제질서와 미국 헤게모니를 대체하는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세계 인구의 약 44%와 세계 명목 GDP의 26%를 차지하는 브릭스 회원국이 미국의 달러 패권과 국제통화체제를 비판하며 진정으로 평등과 호혜에 기반한 주권국가 간의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논지다.
그러나 브릭스가 대안적 세계질서를 구축할 수 있는지 또는 적어도 여러 국가가 주도권을 나눠갖는 다극세계의 한 축으로 발전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려면, 브릭스가 달러를 대체하는 국제통화체제를 구축하는지, 그러한 국제통화체제를 재생산하는 무역질서와 금융질서를 어떻게 구축하는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각국 사이의 상품·서비스, 자본, 노동의 이동과 교환을 완전히 단절할 것이 아니라면, 어떤 형태와 원리로 국가 간 체계를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구상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브릭스는 어떤 원리와 구상을 제시하고 있는지를 최근 브릭스 정상회의의 주요 논의 내용을 살펴보며 파악해보자.2) 16차 브릭스 정상회의와 카잔 선언
카잔 선언에서 세계경제 또는 국제질서에 관련된 핵심은 다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 다자주의를 지지하며 신흥 개발도상국의 대표성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유엔과 브레튼우즈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일방적이고 국제법에 반하는 경제제재와 2차 제재를 해제할 것을 촉구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와 중국의 불공정 무역행위와 신장위구르 탄압에 대한 미국과 서방의 제재를 겨냥한 것이다.
둘째, 브릭스 회원국 간의 경제와 금융 협력을 증진하자고 선언했다. 경제협력에서는 천연자원과 식량 주요 생산국이 모인 브릭스 내에 별도의 거래 플랫폼을 구축하자는 제안이 담겼다. 금융 부문에서는 포용적이고 공정한 국제금융제도가 필요하다면서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에 대당하는 신개발은행(NDB)을 새로운 브릭스 투자 플랫폼으로서 발전시키자는 제안과 브릭스 국가 간 자국통화 결제 시스템 구축을 추진하자는 제안이 담겼다.
종합해보면, 현재 시점에서 브릭스는 달러를 대체하는 대안적 국제통화제도나 금융체계를 구축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번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의장국인 러시아가 미국의 달러 패권을 비판하며 브릭스 단일통화나 암호화폐 사용을 추진할 것이라는 예측도 있었지만, 카잔 선언에 그러한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브릭스가 세계 금융위기 직후인 2011년 3차 정상회의에서 ‘탈달러’를 선언하며 여신·공여협정을 체결해 브릭스 간에 돈을 빌려줄 때 달러가 아닌 각국 통화를 사용하기로 합의한 이후 1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발적이고 구속력 없는 브릭스 국경 간 자국 통화 결제 시스템을 구축해 보자는 정도의 제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는 브릭스가 유럽연합과 같은 화폐동맹을 구축한다거나 나아가 대안적 국제통화제도를 추구한다기보다는, 미국과 서방의 금융제재를 회피하거나 달러를 우회할 수 있는 결제 수단을 모색하는 데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역 역시, 새로운 무역질서를 구축한다거나, 관세동맹을 추진해 브릭스만의 경제블록을 형성하고 있다고 평가하기 어렵다. 오히려 브릭스 회원국인 브라질과 인도를 비롯해 올해 브릭스 파트너국으로 참여한 튀르키예·태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베트남 등은 최근 중국에 대한 무역장벽을 강화하는 조치를 추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브라질은 지난해 9월 중국산 전기차 면세 혜택을 종료하고 3년에 걸쳐 관세를 35%까지 인상하기로 한 데 이어 올해 4월에는 중국산 저가 철강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1년간 기존 10%대에서 25%로 인상하기로 했다. 인도는 지난해 9월과 올해 1월 각각 중국산 철강과 알루미늄 합금 로드 휠에 대한 반덤핑 관세 부과를 5년 연장했다. 튀르키예는 지난해 중국산 전기자동차에 40%의 추가 관세를 부과한 데 이어, 올해 6월에는 이를 모든 중국산 자동차에 확대 적용했다. 태국은 올해 7월 전자상거래를 통한 중국산 저가 수입품 유입을 저지하기 위해 1500밧 이하 수입품에 7% 부가가치세를 부과한 데 이어, 8월에는 중국산 합금 열연코일에 대해 30.91%의 반덤핑 관세를 부과했다. 이 외에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은 중국산 철강 일부 품목에 대한 반덤핑 조사에 착수했고, 인도네시아는 중국산 수입 직물에 최대 200%의 관세를 부과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는 앞서 살펴보았듯 중국이 내수가 부진하고 미국에 대한 수출의존도를 줄이는 과정에서 신흥국으로 저가의 수출 물량이 쏠리는 것에 대한 대응이다. 결국 브릭스 역시 회원국 간의 자유무역을 확대하거나 블록 경제를 형성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에 대한 무역장벽을 강화하며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의 확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것이다.
정의로운 발전을 내세우며 글로벌 사우스를 포용하겠다는 브릭스의 구상 역시 미래가 불투명하다. 개발도상국의 부채위기가 심각한 가운데 브릭스 국가의 출연금으로 세운 신개발은행이 비교적 주목받고 있지만, 브릭스 전체 경제 규모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국이 경제성장의 한계를 마주한 상황에서, 브릭스가 각국의 부채위기를 해결하며 경제성장을 이루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크다. 오히려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서 드러난 중국식 ‘부채의 덫’ 문제, 즉 상환 능력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에 대규모 투자자금을 지원하고 이를 갚지 못하면 자원이나 시설 운영권을 가져가는 문제가 반복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렇게 볼 때, 브릭스 회원국 간의 경제와 금융 협력이 갖는 실제적 의미는,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미국과 서방의 전방위적 제재를 받는 러시아가 이를 우회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길을 미국과 서방에 비판적인 신흥국과 함께 모색해 보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브릭스의 등장과 외연 확장은 분명히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한계와 모순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브릭스의 중심인 러시아가 전후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고 중국이 이를 사실상 묵인하는 오늘날 국제정세를 고려하면, 브릭스가 이념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대안세계화 내지는 대안적 세계질서에 가까운 미래를 보여줄 것인지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5. 결론
이렇게 세계경제가 마주한 위협은 뚜렷한 가운데, 내년 1월로 다가온 트럼프 대통령의 복귀는 미국경제를 비롯한 세계경제에 거대한 불확실성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구호 아래 추진할 관세정책과 감세정책의 결합은, 아직은 그 수준과 속도가 어느 정도일지는 불확실하지만, 미국경제의 인플레이션 압력과 부채위기를 가중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분명하다. 게다가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통화정책에 직간접적인 개입을 시도할 경우, 불확실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다.
나아가, 트럼프와 트럼프주의자가 제시하는 미국의 대외경제정책으로 인해 길게는 2차 세계전쟁 이후, 짧게는 1990년대 탈냉전과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시대에 미국이 주도했던 규칙 기반 다자적 질서가 최종적으로 후퇴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된다. 금융세계화는 지속되지만 기존 국제질서에 대한 러시아의 교란과 중국의 도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제 미국이 먼저 기존 국제질서로부터 퇴각하거나 오히려 교란하면서, 국제공조를 통한 관리와 조정의 여지가 더욱 축소하고 경계에서의 분쟁과 혼란이 증대하리라는 것이다. 중국이 권위주의와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가운데,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을 넘어 전략적 탈동조화를 추구하고 다자적 질서 수립이 아닌 일방적이고 불확실성이 높은 거래에 몰두한다면, 세계는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대국이 ‘공공악’(public bads)을 제공하는 ‘G 마이너스 2’의 시대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리 없는 금융세계화와 불안전성 심화의 시대를 곧바로 미국 헤게모니를 대체하는 대안적 세계가 도래하는 시대라고 여기기 어렵다는 것이다. 사회운동 일각에서는 브릭스가 주도하는 다극질서가 미국이 주도하는 일극질서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단계에서 브릭스는 현실적으로 새로운 국제 통화·금융 질서나 무역 질서를 구축할 의지나 역량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올해 카잔 정상회의에서 논의된 브릭스 회원국 간의 경제와 금융 협력은 미국과 서방의 제재와 달러 결제를 우회하거나 회피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 보려는 정도일 따름이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명확하게 드러나듯 러시아가 주권과 영토의 완결성을 내세우며 전후 국제질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서고 중국이 이를 사실상 묵인하는 가운데, 이들이 주도하는 브릭스가 그리는 다극질서라는 미래가 과연 진정으로 평등과 호혜에 기반한 대안적 세계질서일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오랫동안 사회진보연대는 사회운동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를 비판하면서도, ‘반세계화’가 아니라 국제적 노동기준 형성이나 금융거래과세와 같은 요구를 매개로 노동자운동의 사회적 역량을 강화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사회운동이 오늘날 국제정세에서 대안세계를 모색하고자 한다면, 그 첫걸음은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와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트럼프주의와 다극질서가 제기하는 위협을 직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원한의 정치와 우파식 행동주의, 헌정 파괴
미국 대선이 두 달 남았다. 글을 쓰는 시점에서 해리스 후보가 트럼프를 근소하게 앞선다는 관측이 많다. (8월 30일 기준 뉴욕타임스의 여론조사에서 해리스와 트럼프의 지지율은 49% 대 45%인데 다른 기관의 수치도 대부분 이와 유사하다.) 물론 아직 시간이 꽤 남았기에 누가 당선될지 예측할 수는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트럼프가 당선되든 안 되든 골칫거리가 되리라는 점이다.
트럼프가 당선될 시 발생할 문제는 이후 임지섭의 「더욱 강해져서 돌아온 트럼프 경제정책의 위험성」과 김진영의 「미국 공화당의 변화와 트럼프의 귀환이 열 ‘미국 없는 세계’」에서 다룰 것이다. 그가 낙선한다면, 2021년에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를 일으켰던 것처럼 또다시 대선 결과에 불복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올해 이미 여러 번 대선에 관한 음모론을 제기했다. 가령 자신에 우호적인 소셜미디어인 트루스소셜(Truth Social)에서, 그는 민주당이 불법 이민자를 이용해 선거를 왜곡하고 있다거나, 정부가 선거에 간섭하고 있다는 주장을 지지자에게 설파해왔다. “[민주당이] 수백만 명의 불법 이민자를 범람시키고 … 우편 투표를 합법화하며, 서명 검증과 시민권 증명 요구사항을 없애도록 주(州) 투표법을 변경하려 한다”, “법무부와 FBI가 민주당의 2024년 대선 캠페인을 운영하고 있다”, “[자신이 기소된 사건의] 파니 윌리스 검사는 … 2024년 대통령 선거에 간섭하는 음모를 꾸몄다”와 같이 말이다.
트럼프가 이외에도 결함이 많은 인물이라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그는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이를 기록하는 작업이 존재할 정도이다.) 처음 후보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을 이미 한 번 했으며, 그 와중에 의회에서 탄핵 소추를 두 번이나 당했고, 재선에 실패했으며, 지금도 여러 재판에 걸려 있는 이런 인물이 세 번 연속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는 현실은 의아하다. 이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에 대한 지지가 여전히 강하게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2016년에 일본 아사히신문의 미국 특파원 가나리 류이치는 트럼프 돌풍을 취재하며 ‘어째서 트럼프인가?’라는 문제에 답하고자 했다. 8년이 지난 지금, 어째서 트럼프주의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고 지금까지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글은 두 가지 요인에 주목한다. 먼저는 아래로부터의 트럼프주의 운동이다. 글은 2016년 대선을 계기로 출현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 이하 MAGA로 줄임) 운동의 참여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특히 러스트벨트의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들이 어떤 불만을 품고 있는지, 왜 트럼프를 지지하는지 살핀다. 나아가 트럼프주의 운동이 그러한 불만을 조직하는 방식을 검토하며 트럼프 지지자들의 정신세계를 설명하고, 그런 토대 위에서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졌음을 확인할 것이다. 두 번째 요인은 트럼프주의가 일으킨 미국 정치제도 차원의 변화다. 특히 트럼프 행정부 시기가 중요하다. 이때 공화당이 트럼프주의 정당으로 변모했고, 대통령 트럼프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장악하려 했다. 한편 트럼프 개인을 넘어 트럼프주의자 지식인 집단의 세력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트럼프주의의 영향력이 확산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글은 마지막으로, 이런 현실의 심각성을 인식하며 생각해볼 지점들을 제시할 것이다.1. 이른바 ‘개탄스러운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1) 트럼프 돌풍의 주역은 백인 노동자계급?
다만 당시 출구조사 결과를 두고 ‘백인 노동자계급’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응답자의 연령, 성별, 인종, 소득, 학력은 조사됐지만, 직업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저소득이 곧 노동자임을 뜻하진 않는다.) 어쨌든 이 변수들 중 소득, 인종, 학력을 기준으로 2004년부터 2016년까지 대선 출구조사 자료를 대조하면 아래와 같다.
소득별로 보면, 2016년에도 과거 대선들과 마찬가지로 하층에서는 민주당 지지율, 상층에서는 공화당 지지율이 더 높았다. 다만 12년 대비 16년에서 하층에서 공화당 지지율 상승, 반대로 상층에서 민주당 지지율 상승이 돋보인다. 인종별로 보면, 전통적으로 백인과 이외 인종 간 지지정당 차이가 유지됐으나, 12년 대비 16년에 모든 인종에서 비슷하게 공화당 지지율이 증가했다는 점에서, 인종이 지지율 변동의 중요한 요인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2012년에서 2016년 사이의 지지율 변화의 정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백인 내에서 교육수준 차이였다. 2012년과 비교했을 때,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의 공화당 지지율이 치솟았던 반면, 대학 학위가 있는 백인의 민주당 지지율이 상승해 공화당 지지율에 근접했다.
정리하면, 2012년과 비교했을 때 2016년에 민주당에서 공화당 지지로 이동한 주요 집단은 소득수준이 낮은 집단과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 집단이었다. 반대로 소득수준이 높은 집단과 대학 학위가 있는 백인 집단에서는 2012년과 비교해 2016년에 민주당 지지율이 상승했다. 양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이 2016년 대선을 계기로 변화한 것이다.2) 러스트벨트 노동자들의 목소리
이들은 주로 대도시가 아닌 지방의, 은퇴한 고령 노동자층과 실직하거나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일자리로 몰린 청년·중년 노동차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가나리는 이들을 ‘몰락하는 중류계급’이라 표현했는데, 몇 명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오랫동안 노동조합원으로 활동하며 줄곧 민주당을 지지했고 당 지구위원도 역임한, 전직 제철소 노동자 조셉 슈로딘(2016년 당시 62세)의 이야기다. 그는 러스트벨트와 같은 지역이 겪은 일자리 변화를 설명한다.
“이 주변의 블루칼라는 다들 민주당을 지지했었는데, 미국은 자유무역에서 연패하고 있고 제조업도 멕시코로 나가버렸어. 여기에 남아 있는 건 월마트와 K마트로, 딴 나라의 제품을 파는 일뿐이지. 나는 현역 시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일급으로 200달러(약 22만 4천원)는 받았어. 근데 지금 서비스업 종사자는 기껏해야 시급으로 12달러(약 1만 3천 원)를 받지. 그 돈으로 젊은이가 생활할 수 있을 리 없잖아? … 대학을 졸업할 때 이미 10만 달러(약 1억 1천만 원)의 빚을 지고 있는데, 만족스러운 일자리조차 찾을 수 없다니, 어떻게 된 건지! 난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돈을 벌었는데. … 이제 정당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 미국을 강력하게 재건하기 위해서는 트럼프 같은 사업가가 필요해.”
다음은 청년 여성 데이나 카즈맥(당시 38세)의 이야기다. 그녀는 어머니가 점장으로 일하던 식당에 취직해 함께 일했다.
“2012년 10월에 제가 일하던 가게가 폐점 위기에 빠졌어요. 트럭 교통량이 격감한 게 이유였어요. 제가 일하기 시작했던 1990년대부터 이미 제철소가 차례로 폐쇄되면서 손님도 조금씩 줄기 시작했어요. 16년간이나 근무했던 식당이 문을 닫으면서 엄마랑 같이 동시에 실업자가 됐어요. … 근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고등학교 때 친구의 40%가 이미 마을을 떠났더라고요. 이 직업 저 직업을 전전하는 애도 많았어요. … 여기서 젊은이가 밝은 미래를 그리는 건 어려운 일이에요. 겨우 남아 있는 제철소에서 일자리를 구한다면 좋겠지만 그것 외에 일자리라고는 음식점하고, 소매점하고, 병원뿐이니깐요. … 그래서 지금도 카페하고 바에서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일하고 있는 거에요. 임금이 싸니까 아무래도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죠. 흔히 말하는 워킹푸어(working poor)에요.”
가나리는 지방의 청년·중년층 사이에 확산하는 마약 문제의 심각성도 지적한다. 미국 내 다른 인종 및 연령층은 의료 발전의 영향으로 사망률이 낮아지고 있는 데 반해, 예외적으로 미국 백인 남성(45~54세)의 사망률만 높아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언급하면서 말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졸 이하 중년 백인의 사망률이 눈에 띄게 상승했는데, 원인은 질병이 아닌 자살과 약물 남용이었다. 앞서 데이나 씨의 남동생도 그 사례다. 그는 2008년에 제철소가 폐쇄되면서 실직한 후 4년 뒤 33살 나이에 헤로인 중독으로 사망했다. 실의에 빠져있었던 데이나를 다시 일으킨 것은 트럼프의 연설이었다.
“솔직히 말해 동생이 죽기 전까지는 정치에 관심이 전혀 없었어요. … 투표조차 해본 적이 없어요. 그랬던 제가 트럼프를 응원하는 데 나선 거예요.”
펜스 공장의 노동자 로니 리카도나(당시 38세)는 이주민 가정 3세대로 트럼프의 인종차별적 발언에 거부감을 느낀다. 게다가 항공관제사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레이건 정권 때 해고당한 후 앞으로 공화당을 찍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 그도 트럼프를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내가 근무하는 펜스 공장은 전 세계에서 쇠파이프랑 철관을 수입해. 놀랍지 않아? 예전에 이 일대는 세계 유수의 철 생산지였었는데 지금은 인도, 중국, 이탈리아에서 수입을 한다니까. 이 도시는 지역 경제가 붕괴한 ‘쇠락한 도시’야. … 여기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어. 꼼짝도 못 한 채 성장 가능성이 없는 일을 하고 있어. … [공화당을 찍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지만] 지금의 생활, 그리고 도시를 생각하면 이번에는 트럼프를 찍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오바마하고는 정반대로 품위가 없어. 하지만 생각하는 바를 솔직하게 말하지. … 그 녀석은 상대가 권위 있는 사람이라도 기죽지 않고 맞받아치는 카우보이야. 엘리트가 지배하는 워싱턴을 부수기 위해서는 그 정도는 되는 꼴통이 필요해.”
고등학교 졸업 후 자동자 관련 공장 12곳을 옮기며 일했고, 최근 근무했던 자동차 부품 공장이 폐쇄되며 해고된 레트 로(당시 51세)는 이렇게 말했다.
“난 별다른 큰 걸 바라는 게 아냐. 성실하게 일하면 평범하게 살 수 있던 예전의 미국으로 회복시켜주길 바랄 뿐이지. … [기업들은] 미국 노동자를 생각하지 않게 됐어. 주주 이익의 최대화를 위해 노동자를 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해외로 이전해. 그리고 그런 기업이 대통령 선거 후보에게 거액의 헌금을 갖다 바치지. 그 돈을 받는 정치인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건 트럼프뿐이야.”
본래 미국은 성실하게 일하면 평범하게 살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은 반대로 누군가는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 ‘공평하지 않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가령 전직 보안관대리 데이비드 에이(당시 52세)는 이렇게 말했다.
“대략 10~15년 전부터 민주당은 노동자한테서 긁어모은 돈을, 사실은 일할 수 있는데 일하려고 하지 않는 놈들에게 나눠주는 정당으로 바뀌었어. 돈을 노동자 계급에게 지불케 하는 정당이 된 거야. … 불법 이민자와 일하지 않는 놈들의 생활비를 우리가 지불하고 있다는 건 사실 다들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어. 문제라는 것은 알았지만 우리에게 여유가 있어서 생활에 별다른 영향이 없었을 때는 그냥 방치했었지. 그런데 수입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고, 더는 예전 같은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많은 중류계급이 ‘더는 남의 생활비까진 지불하지 못하겠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어. …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한계에 달하려는 시점에 트럼프가 등장한 거야. 우리가 생각하던 것을 한 번에 대통령 선거의 중심 테마로 부상시켜주었어. 그것만으로도 트럼프에게 감사해.”
뒤의 3절에서 공화당 유권자의 이념적 구성을 보겠지만, 러스트벨트의 트럼프 지지자들의 목소리가 공화당 지지자 전부의 견해는 아니다. 허나 ‘열심히 일하면 잘 살 수 있다’라는 순리가 이제는 지나간 유물이 되어버렸다는 허무감과 세계화, 국제무역과 금융, 엘리트, 불법 이민자, 마약 등에 대한 반감이 트럼프 열풍과 MAGA 운동의 근원에 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불만과 분노 위에서, 노동자들은 기존 엘리트 정치인과는 다른 트럼프를 지지하게 됐다.3) 소결
2. 트럼프 행정부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트럼프주의는 어떻게 강해졌는가?
재임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수행하기보다는 ‘운동을 주재하는’ 활동가처럼 행동했다. “다른 대통령들은 선거 캠페인 차량에서 백악관으로 넘어오면, 국가를 통합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트럼프는 워싱턴에 처음 도착한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정치적 싸움을 즐기는 듯 했다. 그는 뉴스 미디어부터 자신의 행정부 내부의 구성원들, 양당의 선출된 공직자들, 외국 국가 원수에 이르기까지 식별된 적들의 긴 목록을 비판하는 데 대통령의 메가폰을 사용했다. 대통령으로서 보낸 2만6천 개가 넘는 트윗은 그의 생각을 광범위한 이슈에 대해 솔직하고 실시간으로 제공했다.”
트럼프는 재임 기간 4년 동안 집회에 158회 참석했는데, 이는 역대 대통령 중 이례적으로 높은 수치다. 158회는 취임 후 집회 10회, 2018년 중간선거 집회 46회, 2020년 이전의 선거운동 집회 5회, 공화당 예비선거운동 관련 28회, 2020년 선거운동 집회 66회, 선거 후 집회 3회로 구성됐다. 주로 트럼프 자신이나 공화당과 관련된 각종 단체가 연 집회에 연사로 참여하는 식이었다.
트럼프가 참석한 수많은 집회, 나아가 MAGA 운동의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혹자는 “대통령으로서 트럼프의 과제가 ‘지지자들을 끊임없이 분노 상태에 두는 것’”이라 설명했다. 어떻게 이를 실현할 수 있었는가? 먼저 그런 집회와 운동 속에서 발전한 ‘감정적-도덕적 틀’을 설명한 후, 지지자들이 이를 확대재생산하는 방식을 살펴보겠다. 핵심적으로, 그 운동은 1960~70년대 흑인운동이나 여성운동으로부터 “역사적으로 소외된 집단에 대한 인권 수사학”, 일회적인 분노를 영구화하여 대중을 주체화하는 방법론을 차용했다. 1) 트럼프주의의 ‘감정적-도덕적 틀’
① 청중이 각자 느끼는 특정한 고통, 부정적 감정을 사회화하며 공적인 것으로 전환한다. “우리의 도심지에서 빈곤에 갇힌 어머니와 아이들, 나라 곳곳에 무덤처럼 흩어져 있는 녹슨 공장들, 젊고 아름다운 학생들을 지식 없이 내버려 두는 교육 시스템, 너무나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우리의 실현되지 않은 잠재력을 훔쳐 간 범죄, 갱단, 마약. 이 미국의 참상은 지금 여기서 끝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국민(nation)이고, 그들의 고통은 우리의 고통입니다. 그들의 꿈은 우리의 꿈이며, 그들의 성공은 우리의 성공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의 마음, 하나의 집, 하나의 영광스러운 운명을 공유합니다.”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 중 가장 취약한 누군가의 사례를 언급하면서도, 그 구체적 고통과 분노를 보다 일반적인 개념으로 전환시켜, 가령 자신이 실직한 광부가 아닐지라도 그 감정에 강렬히 이입할 수 있게 한다. 이는 지지자들 사이의 여러 차이(계층 등)를 삭제하여 ‘우리’를 형성하는 효과가 있다.
타인의 상처에 수반되는 분노를 공유하는 것이 ‘국민’이라 지칭되는 정치적 공동체의 토대가 된다. 즉 여기서 ‘국민’이란 “공유된 트라우마에 의해 통합된 집단”을 뜻한다. 트럼프는 미국을 “버려진 공장과 부식된 기반시설의 잔해로 뒤덮인 묵시론적 황무지 … 범죄조직, 불법 이민자, 외국 경쟁자들로 이루어진 외부세력에 사로잡혀 모욕당하는 곳”으로 묘사하며, 국민을 “불만을 품고, 원한을 가지며, 불공정하게 대우받고, 무력하며, 경제적 불운과 통제할 수 없는 세계적 요인 탓에 모욕당했다고 생각하는 특정한 문화적 인물”로 좁혀서 규정한다.
② 공유된 고통과 분노를 도덕적이며 정당한 것으로 추켜올린다. 거꾸로 말해, 이를 느끼지 못하고 ‘상처받은 이’를 비판하는 인물은 부도덕적이고 악한 자다. 이렇게 감정의 공유를 통해 일회적 고통과 분노를 도덕적 선악 관념으로 잇는 것을 “피해자 의식”이라 부를 수 있다. ‘국민’은 훌륭하며 덕성이 있기에, 악한 자들로부터 공격받는다. 가령 2018년에 트럼프가 연방대법관으로 지명한 브렛 캐버노가 성폭력 혐의로 고발당하자, 집회에서 트럼프는 그를 고발한 여성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 여자는 완벽한 인간, 훌륭한 아버지, 훌륭한 남편에게 가장 끔찍한 혐의를 제기했습니다. … 한 남자의 삶이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의 아내도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그의 딸들, 아름답고 놀라운 젊은 아이들이... 그들은 사람들을 파괴하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정말로 악한 사람들입니다.” 상술했듯 자기 지지자의 특정한 고통을 공유하면서도 구체적 상황으로부터 분리하여 도덕적인 것(‘훌륭함’)으로 전환시킨 후, 이를 공격하는 행위를 악(惡)으로 판단하며 “집단적 선(善)을 전도”시킨다.
③ 악한 자들에 대한 복수의 권리와 투쟁을 주장한다. 즉 도덕성에 기초하여 폭력을 정당화한다. 가령 트럼프는 이민 문제를 논하며, 자신의 행정부가 범죄조직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하나하나씩 불법 갱단원, 마약 딜러, 도둑, 강도, 범죄자, 살인자들을 찾아내고 있습니다. … 마약으로 우리 공동체를 오염시키고 무고한 젊은이들, 이 아름다운 젊은이들을 노리는 포식자들과 범죄자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안전한 피난처를 찾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피에 굶주린 범죄조직을 해체하고 파괴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칠게 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자신과 지지자에게 가해진 상처에 대한 보복을 요구하며, 나아가 피해를 입은 사람의 복수를 올바른 행위로 승격시킨다. 사소한 모욕과 상처라도 응징적 폭력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④ 그러나 ‘적’은 너무나 거대하고 추상적이다. 트럼프가 열거하는 외부의 적은 다양하며 정체를 알 수 없다. “오랫동안 세계를 지배해 온 부패한 세계화주의자 통치계급”, “엘리트”, “좌익적 혐오자”(‘정치적 올바름’을 말하는 자), “딥스테이트 급진주의자”(딥스테이트란 미국 정부 깊숙히 사익을 추구하는 지배계급이 숨어 있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기득권층의 동료”, “가짜뉴스의 동맹”, “MS-13”(갱단 이름), “이민자”, “중국”, “이슬람 테러리스트”, “이들에게 인질로 잡혀 있는 민주당” 등 말이다. 결국은 민주당이 그들의 대표자이나, 그 배후에 일관되지 않은 온갖 집단이 암약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두 가지 결론으로 이어진다.
첫째, 적들의 행위는 음모적이며 비민주적이다. “유권자들에 반(反)하여 자기들만의 비밀 의제를 추진하는, 선출되지 않은 딥스테이트 요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다.” “그들은 모든 공정성, 품위, 그리고 정당한 절차의 개념을 위반한다.” 그렇기에 상술했듯, 이들에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맞설 수 없으며 폭력적 투쟁이 필요하다.
둘째, 그럼에도 적이 은밀하고 강력하기에, ‘국민’의 투쟁은 영원히 승리할 수 없다. “복수, 증오, 악의, 질투는 종종 명확한 대상에 대해 형성되며, 특정 이념적으로 유도된 행동에 의해 충족될 수 있다.” 따라서 “해결불가능한 적”을 상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장벽을 제시함으로써, 감정적 긴장상태를 유지한다. “악을 치유하길 원하지 않는다. 악은 단지 비판의 구실일 뿐이다.” 힐러리 클린턴을 정말로 감옥에 넣는다면 ‘그녀를 감옥에 보내라!’라고 더는 외칠 수 없게 될 것이다. 트럼프는 집회에서 청중의 분노를 일정 정도 해소하지만, 다시금 더욱 거대한 적에게 겪은 패배와 굴욕의 경험을 공유하며 만족감을 사라지게 하고, 새로운 분노의 저수지를 구축한다. ①로 돌아가는 것이다.
트럼프는 이렇게 “정권을 잡았음에도 지지자들의 ‘정치적 유배’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대통령직 첫 2년 동안 입법, 행정, 사법부 모두에서 보수파가 다수였음에도, 트럼프는 일관되게 자신과 지지자들을 연약하고 불안정한 소수자로 묘사했다.”
이러한 감정적-도덕적 틀 위에서 트럼프는 자신이야말로 ‘국민’의 고통과 분노를 가장 잘 공감하며 대변하여 투쟁할 수 있는 인물이라 주장했다. “매일 아침 저는 이 나라 전역에서 제가 만난 무시당하고, 소외되고, 버려진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로 결심합니다. 나는 해고된 공장 노동자들과 끔찍하고 불공정한 무역 협정에 짓밟힌 공동체들을 방문했습니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잊혀진 남성과 여성들입니다. 열심히 일하지만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당신들의 목소리입니다!”
트럼프는 자신이 음모적 지배계급에 포섭되지 않은, 자수성가한 부자이며 독립된 권력을 갖고 있기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탓에 자신은 적들의 최우선 표적이 되었다. “이민 문제에 관해서 … 여러분이 ‘그거 정말 끔찍하다’라고 생각하더라도, 누가 여러분의 말을 들어주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적]이 저를 대하는 방식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공격받습니다. 저보다 더 많이 공격받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는 우리나라를 위해 가장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지만, 언론은 저를 나쁘게 보도할 것입니다.” 자신이 ‘우리’를 대표하기에 공격받으며, 자신에 대한 공격은 곧 ‘우리’에 대한 공격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④에서 봤듯, 트럼프는 적의 공격이 너무 거대하며 자신의 힘이 모자라기에 자신에게 더 큰 지지와 권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대선 승리 후 “저는 비열한 힐러리 클린턴을 상대할 특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비열한 클린턴을 이겼습니다”라며 만족감을 드러냈지만, 그녀의 범죄를 조사하라는 요구가 무시당하는 상황을 언급하며 “그녀가 어떻게 무사히 빠져나가고 있는지를 보십시오”라고 허탈감을 표현했다. 대통령의 권한에 대한 견제가 복수에 해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말이다. “가장 슬픈 것은, 내가 미국의 대통령이기 때문에 법무부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나는 FBI에 관여해서는 안 됩니다. …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점이 정말 답답합니다.” 요컨대 법치와 권력분립의 원리 대신, 적들에게 복수할 수단으로서 대통령 권력의 무제한적 강화를 요구한다.2) MAGA 운동에서 ‘피해자 의식’의 훈련
MAGA 운동의 참여자는 전통적인 인권운동의 행동방식(가령 불복종운동)을 차용하여 자신에 대한 비난을 ‘피해자 의식’으로 전환한다.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클로비스노스 고등학교는 학생이 MAGA 상징물을 착용하지 못하게 했는데, MAGA 운동가들은 학교의 이런 조치가 학생의 기본권 침해라고 주장한다. “아이들은 빨간 MAGA 모자를 쓸 용기를 가졌기 때문에 표적이 되었다.” “좌파는 당신이 원하는 무엇이든 입을 권리를 빼앗으려 한다.” 심지어 여성운동이 해왔던 말을 빌리기도 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말하는] 당신이 강간을 당한 여성에게 ‘저런 치마를 입고 있으면 당연히 그럴 만하지’라는 말을 한다면 어떨까 상상해보라. 이는 말도 안 되는 것이다.” MAGA 상징물을 착용한 사람들이 상점과 식당에서 서비스를 거부당한 사례에 대해, 과거 흑인운동이 흑인이 겪는 일상적 차별을 증언했던 방식을 모방하기도 한다. “나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 그저 친구들과 커피를 즐기며 앉아 있었다. … 그런데 직원들이 테이블을 둘러싸고 손가락질하며, [MAGA] 모자가 벗겨질 정도로 머리를 세게 때리겠다고 위협했다.” “만약 오바마의 ‘HOPE’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향한 반발이 있었다면, 진보주의자들이 뭐라고 말했을지 상상해보라.”
트럼프 지지자는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며, 그 과정에서 자신이 진보주의자로부터 굴욕당한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며 주체화한다. 특히 2020년 대선 이후 이런 경향은 더욱 심해졌고,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에서 기이하게 드러났다. 가령 공화당의 폴 고사르 하원의원은 의사당 하원 회의실로 침입하려다가 경찰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애쉴리 배빗을 “처형당했다”라고 표현했다. 다른 한 시위자는 소셜미디어에 널리 유포된 비디오에서 자신이 최루탄을 맞았다고 호소하며 어떻게 이런 ‘탄압’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분노했다.
2016년 대선에서 트럼프 행정부에 이르는 시기에 미투 운동과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이 잇따라 일어났음을 상기하자. 이들과 대립하고 그 행동방식을 모방하며 MAGA 운동이 발전했다. 이렇게 2010년대 후반 ‘문화전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미국 유권자의 정치적 양극화가 매우 심해졌다.3) 정치적 양극화와 엇갈린 트럼프 행정부 평가
공화당과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의 직무 수행뿐만 아니라 그 개인에 대해서도 극심히 분열됐다. 2019년 설문 조사에서, 공화당원 중 적어도 4분의 3이 대통령의 발언이 때때로 또는 자주 희망적이거나, 즐겁거나, 정보를 제공하거나, 행복하거나, 자랑스럽게 느끼게 했다고 답했다. 반면, 민주당원은 더 큰 비율로 대통령의 발언이 때때로 또는 자주 그들을 우려하게 하거나, 지치게 하거나, 화나게 하거나, 모욕감을 주거나, 혼란스럽게 했다고 답했다.
정치적 가치와 이슈에 대해서도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간의 견해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열 가지 주제에 관한 설문에서 공화당원과 민주당원 간 응답의 격차는 1994년에 15%였던 반면 2017년에는 36%로 벌어졌다. 특히 인종, 성별, 고등교육에 관한 견해가 그러했다. 가령 2015년에서 2017년 사이에 대학교가 미국의 상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응답한 공화당원의 비율이 37%에서 58%로 상승한 반면, 민주당원의 약 70%는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답했다. 트럼프 대통령 재임 기간에 공화당원과 민주당원이 동의한 몇 안 되는 사항 중 하나는 그들이 동일한 사실을 공유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2019년 조사에서 미국인의 73%가 공화당과 민주당 유권자가 정강·정책뿐 아니라 ‘기본적인 사실’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고 답했다. 그 원인은 가짜뉴스와 잘못된 정보인데, 2019년에 미국인의 절반은 이것이 미국의 심각한 문제라 답했다.
특히 정권에 위기를 가하고 지지율을 낮춘 코로나-19 사태에 관해 트럼프가 확산시킨 음모론이 2020년 대선에 큰 역할을 했다. 트럼프는 이른바 ‘큐어넌(QAnon) 음모론’을 지지하고 퍼뜨렸다. 이는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인 엘리트가 대중을 통제하고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의로 만들어진 생물학적 무기라는 주장이다. 이 음모론의 지지자들은 특히 민주당과 같은 특정 정치세력이 바이러스를 통해 정부의 통제를 강화하고 경제를 재편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믿었다. 그들은 코로나 백신에 대해서도 부정적 시각을 견지했다. 백신이 인간의 건강을 해치거나, 인구를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고 여기면서 말이다.
2020년 4월, 미국 성인의 64%가 팬데믹에 대한 날조된 뉴스와 정보를 최소한 어느 정도 보았다고 답했으며, 49%는 이러한 오보가 발병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에 관해 큰 혼란을 야기했다고 답했다. 2020년 9월에 미국인의 거의 절반(47%)이 이른바 ‘큐어넌 음모론’에 대해 들어봤다고 답했으며, 이 47% 중 대다수는 트럼프가 그 음모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답했다. 대선 직후 2020년 11월 중순에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성인 10명 중 6명이 날조된 뉴스와 정보가 선거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다고 답했다.
물론 음모론의 최고봉은 대선조작설이었다. 트럼프는 투표일 약 3개월 전인 2020년 8월에 “이 선거에서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거가 조작되는 경우뿐이다”라고 경고했다. 투표일 직후 그는 백악관에서 (밤늦게까지 투표 집계가 일반적임에도) 밤늦게 집계된 투표용지가 의심스럽다고 연설했다. “이것은 미국 대중에 대한 사기이다. … 우리는 이 선거에서 승리할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 우리는 선거에서 이겼다. … 모든 투표가 중단되어야 한다.” 선거인단이 바이든을 차기 대통령으로 공식 선출한 후에도 트럼프는 결과가 뒤집혀야 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이 가짜 선거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공화당원들이여, 움직여라!” 결국 이에 호응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 도둑질을 멈춰라!’(Stop the Steal)라는 구호를 외치며 국회의사당을 무단으로 점거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 초유의 사태에 관해서도 여론이 심히 갈렸다는 점이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2021년 1월 즉 의사당 점거 사태 직후에 공화당 지지자의 46%는 트럼프가 그 사태에 책임이 ‘전혀 없다’고 답했으며, 34%는 ‘일부 있다’고 답했다. 반면 민주당 지지자의 81%는 트럼프가 그 사태에 책임이 ‘매우 많다’고 답했다. 특히 2020년 대선에서 실은 트럼프가 이겼다고 답한 사람일수록 점거 사태에 트럼프의 책임이 없다고 답하는 비중이 높았다. 대선에서 트럼프가 ‘확실히 승리했다’라고 답한 공화당원의 82%와 ‘아마도 승리했다’라고 답한 공화당원의 63%는 점거 사태에 관해 트럼프의 책임이 ‘전혀 없다’라고 답했다. 심지어 사태 후 거의 1년이 지난 2021년 말의 조사에서도 공화당원의 3분의 2는 바이든이 합법적으로 선출되었다고 믿지 않았다. 게다가 63%의 공화당원은 사태 당시 트럼프를 비판했던 공화당 정치인을 용납할 수 없다고 답했다. 증거가 부족함에도 트럼프 지지자들은 ‘선거가 도둑질당했고 트럼프가 승리했다’는 생각을 견지한 것이다. 4) 소결
3. 트럼프는 공화당을 비롯한 정치제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1) 공화당의 트럼프주의 정당화
오바마가 승리했던 2008년 대선을 계기로, 미국 유권자의 인종 구성 변화 추세상 백인의 지지에 의존하는 공화당이 서서히 소멸할 것이라는 관측이 확산했다. 공화당 지도부는 이에 대응하여 지지층을 다변화하려는 전략을 추구하려 했으나, 이 시도는 오바마 행정부가 들어선 직후 티파티 운동이 출현해 공화당원 사이에서 확산되며 무산됐다. 티파티 운동의 지향은 앞서 본 MAGA 운동과 약간 달랐다. 그 운동은 오바마 정부의 건강보험 개혁(오바마케어)에 맞서 작은 정부, 재정 건전성, 시장자유주의를 주창했다. 허나 엘리트 정치인보다는 당원 중심의 운동이면서 백인우월주의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티파티 운동은 MAGA 운동의 선례였다. “21세기 초 공화당 정치인들은 선거 패배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많은 공화당 지지자는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나라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나라 안에서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다.”
티파티 운동은 당에 대한 당원과 사회운동의 영향력을 강화했고, 공화당의 지지기반을 좀 더 반동적이고 인민주의적 방향으로 이동시켰으며, 테드 크루즈 등 전통적인 정치인 육성의 길을 밟지 않은 새로운 당 지도자들이 출현시켰다. 이는 MAGA 운동과 트럼프가 공화당에 침투하기 위한 길을 닦았다. 트럼프가 공화당 후보로 지명된 후 티파티 운동과 지도자는 상당 부분 트럼프주의 쪽으로 흡수되었다.
물론 티파티 운동세력의 공화당 진입이 2016년에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 위한 충분조건은 아니었다. 당시 민주당과 공화당을 대조해보면, 당 지도부의 분열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아래로부터의 운동이 강하더라도, 당의 고참 지도자들이 특정 후보를 일관되게 지지하면서 당원들을 이끌 수도 있었다. 가령 2016년에 민주당에서도 버니 샌더스 돌풍이 있었지만, 저명한 민주당 정치인들이 전부 힐러리를 지지함으로써 그 영향력을 약화시켰다. 반면 공화당 지도부의 경우, 처음에는 젭 부시를 밀려 했으나, 승리할 확신이 없는 가운데 일부가 마르코 루비오나 테드 크루즈를 지지하는 등 당원에게 주는 신호가 분산됐다. 이렇게 지도부가 분열한 가운데 공화당 역사상 가장 많은 17명이 경선 출마를 선언했고, 당 활동가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선호대로 행동할 자율성이 높아졌다. 아래로부터의 MAGA 운동과 트럼프가 공화당으로 치고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상황 덕이었다.
당선 이후 트럼프가 공화당과 상호작용한 방식은, 앞서 대통령직 수행에 대한 평가와 마찬가지로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전의 공화당 대통령들은 자기 정부에 대한 더 넓은 층의 지지를 창출하고자 당을 지배하려 하고 당에 자원을 투자하려 했다면,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더욱 강경한 방향으로 이끌고, 자신의 개인적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당을 변모시켰다.
먼저 트럼프는 ‘공포’를 통해 공화당원 및 의원들의 충성을 확보하고 반대파를 제거했다. 이전 당 지도자들은 설득이나 막후에서의 압박을 통해 자신을 따르게 했다면, 트럼프는 트위터라는 메가폰으로 MAGA 운동세력을 동원해 반대자들을 괴롭히는 데 집중했다. 민주당 상원의원 셰러드 브라운은 공화당 상원의원 동료들의 트럼프를 향한 충성심이 “두려움”에서 비롯했으며, 이 두려움은 충성스런 트럼프주의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당 내외 네트워크의 (특히 온라인을 통한) ‘24시간 지원’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했다. “그들은 트럼프가 ‘무기력한 젭’이나 ‘거짓말쟁이 테드’와 같은 별명을 붙일까, 또는 자신의 불충성에 대해 트위터에 올릴까 두려워한다. 혹은 최악의 경우 트럼프가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자신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기 위해 자신의 주에 올까 걱정한다. 그들은 이렇게 고민한다. ‘폭스뉴스 진행자들이 나를 공격할까?’,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들이 나를 공격할까?’, ‘트위터 트롤(troll)들이 나를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할까?’ 내 동료들은 이 모든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채찍’만 사용한 게 아니라 자신에 충성하는 자들에게 ‘당근’도 주었다. 이를 위해 트럼프와 그의 팀은 수십 개 주의 당조직을 체계적으로 재편했다. 트럼프 백악관 정치국장 빌 스테피언과 백악관 공보국장 저스틴 클락이 이끈 그 팀은 전국을 돌며 트럼프가 선호하는 후보가 주 당위원장 선거에서 승리하도록 개입했다. 그 결과 2019년 말까지 트럼프 충성파가 42개 주에서 위원장에 임명됐다. 트럼프와 그 팀이 주 당위원장을 목표로 삼은 이유는 이들이 대통령 후보 재지명에서 열쇠를 쥐고 있기 때문이다. 2020년 대선을 앞두고, 트럼프 팀은 주 당조직에 전국대회에 보낼 대의원 배정 계획을 변경하도록 지시했으며, 37개 주와 지역의 당조직이 이를 따랐다. 또한, 주 당위원장은 주 당조직의 모금 활동을 조율하고 지출 우선순위를 결정하며 특정 캠페인에 유급 직원을 지원하는 데 결정권이 있다. 트럼프는 이들을 통해 자기 뜻대로 당내 진급 경로를 형성하고, 선출직 공직에 대한 접근을 조정하며, 후보자들 간 경쟁을 관리하고, 자신에게 헌신적인 지지자들만 출마하도록 보장하며, 이들만이 당의 서비스와 지원을 받도록 하였다.
트럼프는 또한 상당한 자원을 당 활동가 육성에 투자했다. 2018년 선거에서 공화당이 하원을 잃은 후, 트럼프와 공화당 전국위원회는 공동 모금 활동으로 확보한 자금을 주 당위원회에 투입해 각종 선거를 지원하고 인력을 육성했다. 2019년 말까지 당은 2백만 명의 ‘자원봉사자 군대’와 이를 이끌 6만 명의 상급자를 훈련시키는 과정을 진행했다. 이 자원봉사자 군대는 풀뿌리 유권자 등록, 활동가 모집, 투표 독려 활동을 수행하며 트럼프의 지지층을 동원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에 대한 전례 없는 지배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트럼프가 자부하듯 1기 행정부 시기에 트럼프와 공화당은 “완벽한 연결”을 유지했는데, 트럼프에 대한 공화당 유권자의 지지율은 2017년, 2018년, 2019년에 각각 83%, 87%, 89%를 기록했다. 그는 당을 철저히 사조직화하고, 자신을 정치적으로 홍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트럼프는 2020년 재선 캠페인에 밀접하게 결합하는 “단일하고 효율적인 당조직”을 창출했다. 이는 오바마 대통령이 2012년 재선 캠페인에서 민주당과 다소 독립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것과 달랐다.
물론 트럼프 이전의 공화당 대통령들도 자신의 충성파를 당의 요직에 배치하고, 당의 운영을 장악하며, 당이 자신의 의제를 옹호하도록 요구했던 것은 마찬가지다. 공화당은 20세기 후반 대부분 의회와 주 정부 및 유권자 사이에서 소수당이었으며, 아이젠하워, 닉슨, 포드, 레이건, 부시 부자(父子)까지 공화당 대통령은 모두 공화당보다 인기가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공화당을 대통령의 정치적 브랜드를 더 잘 반영할 수 있도록 재편하는 것은 당의 세력을 확대하는 전략이기도 했다.
트럼프와 이전 공화당 대통령의 가장 큰 차이점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는 전략 자체였다. 이전 공화당 대통령들이 당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던 목적은, 자신의 정부에 대한 보다 넓은 층의 지지를 확보하고, 자신이 퇴임한 후에도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반영하고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공화당 다수파를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공화당을 수평적으로 다양화하여 더 넓은 범위의 유권자들과 관계를 맺기 위해 공화당을 활용하고 당에 투자했다. 이런 전략은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은 강화하나, 당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할 위험성이 있다. 범위를 넓히는 전략은 필연적으로 당내에서 새로운 후보들을 출현시키며, 그 새로운 후보들이 다시 더 넓은 범위의 새로운 유권자 집단을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대통령의 당 지배력이 차츰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트럼프는 수직적으로 자신의 지지기반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할 때 동질적인 지지자들의 수를 늘리는 전략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런 목적에서 당내 반대파를 제거하고, 당 지도부를 자신의 충성파로 채우며, 당의 자원을 자신의 강경 지지층에 투자하고, 그들의 열정을 동원하는 순환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이전 공화당 대통령들과 트럼프가 다른 점이었다. 그는 선임자들의 외연 확장 전략을 기반 동원 전략으로 대체함으로써, 대통령과 정당 간의 전례 없는 일치성을 달성했다.
트럼프의 이런 전략은 2020년 대선에서 확인할 수 있듯 재선을 달성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민주당 지지자나 부동층을 끌어오는 것보다 자신의 지지층이 한 명도 빠짐없이 투표할 수 있도록 강력히 동원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유권자 간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는 가운데 이는 영리한 전략일 수 있으나,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 1기 행정부에 실망한 공화당 지지자, 특히 대도시 지역의 고학력자 집단이 일부 민주당 쪽으로 이탈하면서 결국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다만 이를 단지 실패로만 볼 수는 없다. “전통적 기준 즉 대통령이 자신의 정책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능력의 측면에서 보자면 트럼프는 상당히 약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트럼프가 자신의 권위에 대한 더 근본적인 도전으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트럼프의 당 건설 노력은 … 그의 권력 남용과 의심스러운 판단에 대한 방어막을 제공했다.” “강화된 지지기반과 당 조직, 그리고 잠재적 반대자들이 당 지도부로부터 추방된 상황에서, 당의 집단성은 대통령의 거의 모든 행동을 지지하는 응원단, 변호자, 비판 없는 지지자들의 통일된 전선을 형성한다. 이는 트럼프의 더 무모하고 위험한 충동(가령 폭력 선동, 선거 결과의 정당성에 대한 의문 제기,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 위협 등)에 대한 당의 집단적 찬성을 제공한다. 달리 말해, … 그의 행동에 ‘민주적 정당성’의 외양을 부여한다. … [이는] 당파적 양극화를 악화시키고, 사람들이 트럼프의 행동을 오직 그런 [당파적] 관점에서만 보도록 부추겼으며, 그리하여 헌정 체계(constitutional system)의 약화를 초래했다.”
이는 2020년 대선 불복 사태에서 많은 공화당 하원의원이 트럼프의 선거 사기설을 지지했다는 점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살펴봤던 이 사태에 관한 공화당원의 태도에 더해, 공화당 의원의 다수도 적극적 지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침묵함으로써 트럼프의 행동을 묵인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이나 밋 롬니 상원의원은 민주적 과정과 선거 승자에 대한 존중을 촉구했음에도, 2020년 12월 11일까지 196명의 공화당 하원의원 중 126명이 선거 결과를 뒤집으려는 소송을 지지했다.2) 공화당원의 이념적 구성
① 온건파 기성세대(Moderate Establishment)
당원의 14%. 학력이 높고 부유함. 낙태나 동성 결혼과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온건하거나 심지어 진보적. 이민, 무역,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레이건-부시의 견해 지지. 반(反)트럼프.
② 전통적 보수주의자(Traditional Conservatives)
당원의 26%. 트럼프 이전 레이건-부시 시절 공화당의 핵심 지지층. 낙태나 동성 결혼에 반대하고, 친기업 및 세금 감면을 선호하는 구식의 경제적·사회적 보수주의자. 아래의 우파나 블루칼라 인민주의자와 달리, 레이건의 밝은 낙관주의를 어느 정도 유지함. 이 그룹의 32%만이 미국의 문제가 너무 심각하여 국가가 실패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답함. 친트럼프도 반트럼프도 아님.
③ 우파(Right Wing)
당원의 26%.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으며 노동자 계층임. 폭스뉴스와 뉴스맥스를 시청하고, 스스로를 ‘매우 보수적’이라 답하며, 복음주의자가 많은 비율을 차지. 미국이 재앙 직전에 있다고 믿음. 8년 전에 이 그룹은 티파티 지도자 크루즈와 트럼프 사이에서 나뉘어져 있었으나, 오늘날 대부분 트럼프를 중심으로 결집함.
④ 블루칼라 인민주의자(Blue Collar Populists)
당원의 12%. 주로 러스트벨트 출신으로, 대학 학위가 없는 백인이 대부분. 우파와 비교하여 사회적 이슈에 관해서는 온건함. 다수가 낙태와 동성 결혼을 지지하며, 단지 18%만이 자신을 ‘매우 보수적’이라 답함. 그러나 무역 등 경제 문제에 관하여서는 인민주의 성향. 인종과 이민 문제에 대해서도 보수적 견해를 가짐. 우파와 마찬가지로 트럼프를 강력히 지지함.
⑤ 자유지상주의 보수주의자(Libertarian Conservatives)
당원의 14%. 주로 서부와 중서부 출신의 보수주의자로 작은 정부와 고립주의 중시. 경제적 인민주의에 반대함. 사회적 이슈에 관해서는 온건함. 자유를 극단적으로 추구한다는 점에서 온건파 기성세대와 구분됨. 온건파 기성세대 다음으로 트럼프를 덜 지지함.
⑥ 신입 청년(Newcomers)
당원의 8%. 젊고, 다양한 배경을 가짐. 이 그룹의 59%만이 백인. 경제적 비관주의가 강함. 거의 90%가 경제가 나쁘다고 답하며, 나라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답함. 전통적인 의미의 보수주의자는 아니지만, 민주당과 ‘깨어있는’(woke) 좌파에 대한 반감이 큼.
이 6개 집단을 트럼프 지지율에 따라 나열하면, ③ 우파 > ④ 블루칼라 인민주의자 > ⑥ 신입 청년 = ② 전통적 보수주의자 > ⑤ 자유지상주의 보수주의자 > ① 온건파 기성세대 순이다. 좁게는 우파와 블루칼라 인민주의자의 연합(당원의 약 40%), 넓게는 신입 청년과 전통적 보수주의자까지 포함하는 연합(당원의 약 75%)이 트럼프의 지지층이라 할 수 있다. 레이건 이래 공화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에 트럼프를 매개로 진입한 새로운 집단은 ④ 블루칼라 인민주의자와 ⑥ 신입 청년이다. 이들의 유입되고 반대로 ① 온건파 기성세대가 공화당 지지를 점차 철회하면서, 1980년대부터 지속되어 온 공화당과 민주당의 구도가 변화했다고 평할 수 있다.
두 집단 중 블루칼라 인민주의자에 관해서는 앞에서 살펴봤으므로, ‘신입 청년’에 관해 설명을 보충하겠다. 청년층 사이에서 공화당 지지가 확산한 데는 특히 트럼프의 등장과 당선을 계기로 대학가에서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 이에 반대하는 경향 간의 ‘문화전쟁’이 극단으로 치달은 상황이 있었다. 관련하여 최근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청년단체 ‘터닝포인트 USA’(Turning Point USA, 이하 TPUSA)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단체는 2012년에 청년 활동가 찰리 커크(당시 19세)가 설립한 이래, 현재 미국 전역에 약 3,500개의 지부와 75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최대의 보수 성향 청년단체로 성장했다. TPUSA는 주로 대학생 및 젊은 세대를 대상으로 보수적 가치에 대한 지지를 확산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각 고등학교와 대학교 내 모임을 운영하고, 학생 행동 서밋(Student Action Summit)과 같은 대규모 컨퍼런스를 개최하며, 소셜미디어 캠페인을 전개한다.
활동의 초점은 ‘정치적 올바름’ 비판과 MAGA 이념의 확산이다. 앞서 MAGA 운동에서 살펴봤듯, TPUSA도 캠퍼스에서 좌파적 이념을 가진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보수적 견해가 배척당하거나 억압당하는 사례를 강조하며, 이를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검열’이라 주장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 이중 잣대를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며, 특히 그들이 보수적 목소리를 억압하면서도 자신들은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태도를 문제 삼는다. 소셜미디어에서 ‘예민한 자들에게 안전한 공간을!’(Safe Spaces Are For Snowflakes)과 같은 구호로 풍자하면서 말이다. (‘snowflake’는 ‘눈송이’라는 뜻인데, 사소한 행위나 말에 상처받고 불편해하는 ‘정치적 올바름’ 지지자를 유약하다고 비꼬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 TPUSA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더라도, 유튜브(Youtube)와 같은 동영상 플랫폼에서 육식을 비롯해 온갖 것들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회주의자’를 풍자하는 영상이 인기를 끄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TPUSA는 트럼프의 MAGA 이념, 특히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홍보해왔다. 찰리 커크 본인이 트럼프와 직접적인 교류가 있으며, 트럼프의 측근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트럼프도 TPUSA의 행사인 학생 행동 서밋에 연사로 여러 차례 참여하여 연설했다. 2020년 대선 때 TPUSA는 트럼프의 재선 캠페인에 적극 참여하며, 청년층의 트럼프 지지율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TPUSA는 트럼프의 대선 결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선거 부정 의혹을 제기하는 데도 목소리를 높였다.3) 2024년 공화당 정강
- 경제 및 규제
세금 인하와 정부 규제 축소를 통한 경제 성장 촉진. 또한, 자유시장 경제와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중요시, 중소기업의 성장 지원 정책 제안.
- 국가 안보
강력한 군사력 유지와 테러리즘에 대한 단호한 대응. 국경 보안 강화와 이민 제도 개혁을 통한 불법 이민을 감축.
- 건강보험
‘오바마케어’(Affordable Care Act) 폐지, 대신 개인의 선택을 존중하는 자유로운 시장 기반의 대안 제시.
- 사회적 이슈
낙태 반대, 전통적인 결혼 제도(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 지지, 종교의 자유 보호와 같은 보수적 사회 가치 옹호.
- 헌법적 가치
수정헌법 제2조(총기 소지의 권리) 보호, 연방정부의 권한 제한, 주권(州權) 강조 등 헌법적 원칙을 존중.
- 외교 정책
미국의 주권(主權)과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 정책 추구, 나토(NATO)와 같은 동맹 강화. 한편, 중국, 이란, 러시아와의 전략적 경쟁에서 미국의 우위 주장.
반면 2024년 미국 공화당의 정강은 MAGA 이념에 따라 미국의 핵심 가치와 강점을 복원하는 것을 강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경제
미국을 세계적인 에너지 생산국으로 만들고, 아웃소싱을 중단하며 미국 산업을 부흥시켜 제조업 강국으로 전환. 인플레이션 종식. 노동자를 위한 대규모 감세, 사회 보장 및 의료 보험을 삭감 반대. 모든 수입품에 관세 부과.
- 이민 및 국경 보안
국경 장벽 완성, 불법 이민자에 대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추방 작전 시행, 이민자의 범죄 확산 방지, 외국의 마약 카르텔 해체, 갱단 폭력 분쇄, 폭력 범죄자 수감.
- 국가 안보
미국에서 생산한 군수품으로 미국 전역에 광범위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 구축. 군의 강화와 현대화. 3차 세계대전 방지. 유럽과 중동의 평화 회복.
- 사회 정책
부적절한 인종적, 성적 혹은 정치적 내용을 강요하는 교육기관에 대한 연방 지원금 삭감. 대학에서 친(親)하마스 급진주의자 추방. 남성의 여성 스포츠 참여 금지.
- 정부 개혁 및 투표법
(트럼프에 대한 기소와 같이) 연방정부를 국민을 향한 무기로 삼는 일의 종식. 당일 투표, 유권자 신분증, 종이 투표, 시민권 증명으로 선거를 안전하게 보호.
경제 측면을 보면, 2016년 정강에서 작은 정부를 강조했던 것에 비해, 2024년 정강에는 감세와 규제 완화가 있지만 ‘노동자를 위한’이라는 표현을 달거나, 사회보장지출 유지를 비슷하게 강조한다. (그런데 뒤의 임지섭의 글에서 설명하겠지만, ‘노동자를 위한’이라는 표현은 근거가 없다.) 미국 내 제조업 일자리 증가, 에너지 자체 생산, 관세 부과는 2024년 정강에 새로 등장한 부분이다.
한편 2016년에 비해 2024년 정강은 (불법이민의 감축을 넘어) 이민자를 향한 공격을 주창하며(특히 투표법 부분), 사회문화적 이슈에서도 (보수적 가치의 옹호를 넘어) ‘정치적 올바름’을 몰아내자며 ‘문화전쟁’의 측면을 부각한다.
국방·외교 문제에서 2016년 정강이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더라도 ‘외교’를 통해서 이를 추구했다면, 2024년에는 ‘3차 세계대전을 방지하고 유럽과 중동의 평화를 회복하겠다’는 추상적 문구 외에 현안에 관한 구체적 서술이 없고, 대신에 군수품의 국내 생산과 자국 방어를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2024년 정강은 트럼프의 선거 사기설이나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를 공격한다는 주장을 반영했다. 종합해보면, 공화당 정강에서 트럼프주의의 색채가 훨씬 강해졌다고 할 수 있다.4) 의회와의 투쟁
정권 초기 대표적 사례는 ‘오바마케어’의 폐지 시도였다. 그러나 2017년에 공화당의 주도로 하원이 발의한 미국건강보험법(AHCA)은 문제가 많았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의회예산국(CBO)은 이 법안이 법률로 제정될 경우 발생할 예상 피해액을 제시했고, 이를 두고 공화당 내 의견 불일치가 발생했다. 결국 하원은 법안을 최종 표결에 부치지 않기로 결정했다. 트럼프는 협상을 중단한 후 표결을 강행하려 했으나, 강압적 전술은 법안 통과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후 공화당 의원 20명이 이탈했음에도, ‘오바마케어의 부분적 폐지’라 불린, 이전 법안의 수정된 형태가 하원을 통과했다. 그러나 공화당 상원의원 존 매케인이 반대 여론을 이끌며 이를 좌초시켰다.
정치경제학자 라인하르트는 공화당의 건강보험 개혁 시도를 “집단적 무지”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건강보험이 이렇게 복잡할 줄 몰랐다’라는 트럼프의 발언은 1990년대 클린턴 건강보험 개혁 계획의 실패와 2010년 오바마케어의 어려운 탄생 이후에도 그가 이러한 사실을 몰랐던 유일한 사람임을 보여준다.” 물론 트럼프는 정치 신인으로서 미숙할 수 있으며, “미숙함은 정보에 입각한 일관된 정책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에게서 “의회 의원들과의 협력, 세부 정책에 대한 관심 등 이러한 리더십 요소들은 결정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입법 실패를 한편으로는 민주당의 방해 탓으로 돌리며 “그들 모두가 문명화된다면” 민주당과 협상하겠다고 발언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실패로부터 “우리는 충성에 관해 많은 것을 배웠다”라는 교훈을 도출하며, 공화당 내 배신자를 공격했다.
2018년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민주당에 뺏기기 전까지 트럼프는 정책을 주도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으나, 그러한 무능함으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거의 유일하게 통과시킨 ‘세금 감면 및 일자리 법안’(TCJA)의 경우 트럼프의 성과라기보다, 레이건 이래 공화당의 숙원이었기에 공화당 의원들이 단결하여 통과시킨 것에 가까웠다. 물론 여기서도 트럼프는 법안에 반대 투표를 한 유일한 공화당 상원의원 밥 코커를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트럼프는 특유의 방식으로 정책 논쟁에 참여하지 않고 코커의 인격과 직업적 평판을 깎아내리는 데 집중하며, 그를 반복적으로 ‘작은 밥 코커’라고 부르고, ‘위대한 테네시 주에서 재선되지 못한 하찮은 상원의원 밥 코커가 이제는 감세와 싸울 것이라니 슬프다!’라고 트위터에 올렸다.” 이러한 압박에 밥 코커는 최종적으로는 찬성표를 던졌다.
유례없이 길었던, 2019년의 행정부 셧다운 사태도 트럼프와 의회의 갈등에서 비롯했다. 트럼프는 국경 장벽 건설에 대한 의회의 자금 지원을 요청했으나, 민주당이 다수가 된 하원에서 거절당했다. 그러자 그는 2018년 12월 11일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와 곧 하원의장이 될 펠로시 의원에게 공개적으로 정부를 셧다운하겠다고 협박했다. 트럼프는 자기는 셧다운의 결과에 개의치 않으며, 의회가 말을 들을 때까지 셧다운을 수년간 지속할 무한한 인내심이 있다며 오기를 부렸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우리나라의 안보 때문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며 의회를 우회할 권한을 사용하겠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이런 태도는 의회에서 민주당과 공화당 간의 협상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사태가 장기간 지속하며 결국 공화당 의원들 가운데서도 우려가 커졌고, 공화당 지도부가 개입하여 셧다운을 끝냈다. 슈머는 이 사태에 대해 “우리는 짜증 부리는 식으로 통치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역시나 유례가 없는 두 번의 탄핵 소추였다. 2019년의 첫 번째 탄핵은 같은 해에 트럼프가 우크라이나 정부에 정치적 조사를 요청한 사건과 관련 있다. 당시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에게 전화하여, 자신의 정치적 경쟁자인 조 바이든과 그의 아들 헌터 바이든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원조를 이 조사에 대한 대가로 사용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결국 그는 2019년 12월 18일 하원에서 두 가지 혐의로 탄핵 소추를 당했다. 첫째, 권력 남용. 트럼프는 외국 정부(우크라이나)로부터 정치적 이익을 얻고자 자신의 권한을 남용했다. 둘째, 의회 방해. 하원의 탄핵 조사 과정에서 증거 제출을 거부하고 증인 출석을 방해한 혐의가 있다. 공화당이 다수를 차지한 상원은 2020년 2월 5일에 이 탄핵을 심리하고, 첫 번째 혐의(권력 남용)에 대해 유죄 52대 무죄 48, 두 번째 혐의(의회 방해)에 대해 유죄 53대 무죄 47로 탄핵 무효 판결을 받았다. (상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려면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두 번째 탄핵은 2021년 1월 6일 국회의사당 점거 사태와 관련 있다. 이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와 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2021년 1월 13일, 트럼프는 하원에서 내란 선동 혐의로 탄핵되었다. 하원은 그가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폭력을 조장함으로써 내란을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상원은 2021년 2월 13일에 탄핵 심판을 열었지만, 트럼프를 유죄로 판결하기 위한 3분의 2(67명)의 찬성을 얻지 못해 무죄로 판결했다. 57명의 상원의원이 유죄에 찬성했지만, 43명의 의원이 무죄에 투표하여 최종적으로 탄핵 무효가 선고되었다.
두 번의 탄핵 시도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대통령은 상원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아 임기 중 파면되지 않았다. 허나 이 두 번의 탄핵은 미국 정치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남았다.5) 행정부와 사법부 장악 시도
행정부를 장악하려는 시도도 실패했으나, 트럼프는 재임 기간에 사법부를 재편하는 데 성공했다. 단 한 번의 임기 동안 그는 연방대법원에 3명의 대법관을, 연방항소법원에 54명의 판사를, 연방지방법원에 174명의 판사를 임명했다. 트럼프의 사법부 장악에서 보수적 법률가단체 연방주의자협회(Federalist Society)와 당시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맥코넬(Mitch McConnell)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트럼프는 2016년 5월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후 대법관 후보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이는 대통령 선거에서 유례없는 일이었다. 대통령 후보들은 종종 연방 사법부 특히 연방대법원에 지명할 인물의 유형에 대해 의견을 표명하긴 하나, 일반적으로 특정 인물을 지목하진 않는다. (가령 2016년에 힐러리 클린턴 후보는 “헌법상의 자유와 평등의 원칙을 보호하고, 정의의 저울이 개인이 아닌 기업과 특별 이익단체를 향하지 않도록 하며, 시민의 투표권을 보호할 판사를 선택하겠다”고 발언했다.) 2004년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조지 부시는 닉슨 이후 대부분의 공화당 후보와 유사하게 “엄격한 해석주의자를 선택하겠다”라고 발언했다.
트럼프의 대법관 후보자 명단을 작성한 것은 법률가단체 연방주의자협회였다. 이 단체는 스스로를 “법률 질서의 현재 상태에 관심 있는 보수주의자와 자유지상주의자들의 집단”이라 소개한다. 1980년대 초에 설립된 연방주의자협회는 법조계에 광범위하게 자리잡은 진보주의자들에 맞서 보수적 법률가들을 위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자 했다. 레이건 행정부 때 협회원들은 백악관 법률고문실과 법무부에서 일하며 연방 사법부 판사 선정에 관여했다. 부시 행정부는 연방법원 판사직을 선정하는 데서 전통적으로 관여해 왔던 미국변호사협회(ABA)를 배제하고 연방주의자협회와 협력했다. (아이젠하워에서 클린턴 행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변호사협회가 사전에 후보자 명단을 제공받아 그들에 대한 평가를 상원 사법위원회에 제출하는 절차를 거쳐왔다.) 오바마 대통령은 전통적 절차로 돌아갔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또다시 되돌린 것이다. 다만 이전 공화당 대통령과 달리, 트럼프는 후보자 명단을 선거 캠페인에서 대중에게 공개했다는 차이점이 있다. 트럼프의 이런 행동은 대선 캠페인에서 낙태, 동성결혼, 인종차별과 같은 문제에 관하여 공화당의 전통적 보수층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었다.
한편 트럼프가 취임하자마자 연방대법원 판사를 임명하는 기회를 얻었던 것은 미치 맥코넬 덕분이었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 말기에 보수 성향의 스칼리아 대법관이 사망하자, 그 공석은 오바마 대통령의 몫이 아니며, 2016년 대선에서 미국 국민이 그 임명을 결정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인 메릭 갈랜드 판사는 보수와 진보 양측에서 존경받는 인물로, 상원의 공화당 의원들로부터도 상당한 지지를 받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에도 맥코넬은 상원 공화당 간부회의를 열어 갈랜드와의 만남조차 거부하며 대법원의 공석을 유지했다. 반면, 트럼프 행정부 말기에 진보 성향의 긴즈버그 대법관이 사망하자, 2020년 대선이 두 달도 안 남은 시점에서 맥코넬은 그 임명은 2020년 대선의 승자가 아니라 트럼프 대통령의 몫이라 주장했다. 이는 2016년 때 그의 논리와 모순됐으나, 맥코넬은 2016년과 달리 상원과 백악관이 모두 공화당의 통제 하에 있으므로, 사실상 미국 국민이 공화당 대통령에게 긴즈버그의 후임자를 임명하라는 명확한 의사를 밝힌 셈이라고 강변했다.
맥코넬의 활약 덕에 트럼프 행정부는 연방대법관에 닐 고서치(2017년 임명), 브렛 캐버노(2018년 임명), 에이미 배럿(2020년 임명) 세 명을 임명할 수 있었다. 트럼프는 보통 자신의 성과에 대해 다른 사람과 공로를 나누는 성격이 아니지만, 맥코넬에 대해서만큼은 “[대법관] 자리가 비어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라고 감사함을 표했다.
그러나 이 대법관 임명 과정에는 문제가 많았다. 2017년 고서치 판사 인준 투표 이후 공화당은 상원 규칙을 변경하여, 2020년에 단 한 명의 민주당 표도 없이 배럿 판사를 임명했다. 민주당이 토론 종결을 막기 위해 44표를 모으자, 맥코넬은 상원의원들에게 대법관 지명자에 대한 투표에서 필리버스터를 제거하는 결의안을 표결에 부칠 것을 요청했고, 52명의 모든 공화당 상원의원은 맥코넬의 결의안을 지지하며 대법관 인준 투표에서 필리버스터를 제거했다. 이로써 상원을 장악한 당의 대통령은 소수당 의원들의 동의 없이 대법관을 임명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맥코넬은 트럼프 백악관 법률 고문실과 협력하여 연방항소법원 공석을 우선적으로 처리했다. 연방대법원이 연간 약 70건 정도의 사건만 처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연방항소법원은 사실상 연방법원 체계에서 대부분의 사건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가진다. (연방항소법원 13곳은 연방지방법원에서 판결된 사건 중 항소된 사건을 처리하며, 1년에 약 5만 건의 사건을 처리한다. 반면 최종 항소법원인 연방대법원은 1년에 약 7천 건의 청원을 받지만, 그중 중요한 70건만을 심리한다.) 이 중요성을 알고 트럼프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맥코넬은 특히 연방항소법원 후보자들을 신속하게 임명했다. 트럼프는 단 4년 만에 연방항소법원 판사 54명을 임명했는데, 오바마 정부가 8년 동안 임명한 연방항소법원 판사 수가 55명이었다.
또한, 맥코넬은 연방지방법원 판사 지명을 검토하는 시간을 단축하고자 상원 규칙을 변경했다. 2019년 4월, 민주당의 단 한 명의 지지도 받지 않은 채, 연방지방법원 후보에 대한 토론 시간을 최대 30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였다. 그리하여 상원이 연방항소법원 판사의 인준 절차를 좀 더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 맥코넬은 오바마 행정부 하에서는 임명 절차를 크게 지연시켰는데, 그리하여 트럼프가 취임했을 때 103개의 연방지방법원 공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2008년 오바마 행정부가 물려받은 54개의 공석의 거의 두 배였다. 이를 토대로 트럼프 대통령은 단 4년 만에 연방지방법원의 구성을 크게 재편했다. 그는 임기 동안 174명의 연방지방법원 판사를 임명했다. 이는 그의 임기 말까지 활동 중인 판사 전체의 28%에 해당한다.
트럼프의 사법부 장악은 장기적 효과를 줄 것으로 예상된다. 대통령 임기가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평생 임기로 연방법원에 종사하는 판사를 임명하는 것은 대통령이 퇴임 후에도 오랫동안 공공정책과 연방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트럼프 행정부가 상대적으로 젊은 인사들을 연방법원에 임명하는 데 주력했기에, 이들의 영향력은 특히 오래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가 임명한 연방항소법원 판사 54명의 평균 연령은 47세로, 오바마 대통령이 임명한 판사들보다 5년 이상 젊다. 만약 이들이 모두 68세까지 재직한다고 가정하면, 오바마가 임명한 판사들보다 총 270년을 더 근무하게 될 것이다. 트럼프주의가 법관들을 통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토대가 갖춰진 셈이다.
사법부 재편의 효과는 이미 나타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 때인 2022년 6월 24일에 연방대법원은 낙태권을 보장했던 과거 대법원 판결(로 대 웨이드 사건)을 뒤집었다. 여기서 트럼프 재임 기간에 임명된 고서치, 캐버노, 배럿 모두 로 대 웨이드 사건 판결을 뒤집는 데 찬성했다. ‘문화전쟁’에서 공화당의 입장을 사법적으로 관철한 것이다.
또한, 최근 연방대법원은 행정법을 둘러싼 주요 판결에서, 행정부가 시행한 조치가 심각하게 불합리하지 않다면 사법부가 이를 존중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1980년대 이래의 ‘쉐브론 원칙’(Chevron deference)을 뒤집고, 모호한 법령에 대해서는 판사가 최선의 해석을 결정할 책임을 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법과 그에 따른 행정조치에 대해 사법부의 심사와 개입을 강화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2024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된다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의회를 통해 바이든 행정부 시절 입법된 법들을 변경하거나 폐지하긴 쉽지 않더라도, 다양한 행정조치를 통해 의회를 우회하기 쉬울 것으로 전망할 수 있다.6) 트럼프주의 정책집단 형성
2021년에 헤리티지재단의 회장이 케빈 로버츠로 교체됐다. 로버츠 지도부는 재단이 보수주의 운동의 지적 엔진으로서 본래 임무를 되찾고, 보수주의의 목소리를 결집시켜 나라를 이끌 통합된 계획을 수립할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트럼프 시대 보수주의 운동의 성격 진화, 공화당의 지지기반과 우선순위 변화, 풀뿌리 운동의 부상과 새로운 소통수단(소셜미디어)의 확산에 발맞추어, 더욱 직접적인 정치적 행동주의를 추구할 것을 요청했다. 새 지도부는 의원들에게 더 큰 압력을 가하기 위한 로비 조직인 ‘헤리티지 액션’을 창설하고, 풀뿌리 운동과의 연계를 강화하며, 보다 공격적인 옹호 활동을 추구하겠다고 밝혔다.
정책의 방향성도 트럼프주의 쪽으로 조정했다. (전통적 보수주의가 중요시했던) 재정과 외교정책 문제보다 이민이나 교육, 문화 문제에 더욱 집중하고, 무역과 중국에 관하여 대중적인 보수적 견해를 대폭 수용하며, 자유시장과 세계화를 더 회의적인 시각에서 보고, 관세와 경제적 민족주의를 지지하겠다 밝혔다. 이러한 방향 전환 속에서, 특히 국방과 외교정책 분야에서 다수의 직원이 이탈했으며, 재단은 로버츠 지도부의 새로운 비전에 맞는 신입 직원으로 그들을 대체했다.
이러한 트럼프주의 플랫폼의 출현, 트럼프 개인을 넘어선 트럼프주의자 집단의 조직화 시도는, 트럼프 1기 때와 달리 2기 행정부에서는 트럼프주의를 관철하고자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7) 소결
트럼프는 재임 시절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공격하고 장악하려 시도했다. 다만 2018년 선거에서 민주당이 하원을 탈환했고, 기존 공화당 의원 중 일부가 트럼프에 반대하며 제동을 걸었다. 트럼프는 지지자를 동원한 협박으로 대응했으나, 의회를 완전히 굴복시키진 못했다. 행정명령으로 트럼프의 기조에 반대하는 직업공무원들을 대체하려 했던 시도도 실패했다. 그러나 상원 원내대표 맥코넬의 도움으로 트럼프는 연방 사법부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트럼프주의자들이 의회를 우회하여 사법심사를 통해 정책에 간섭할 가능성이 커졌다.
1기 행정부에서의 미숙함과 2020년 대선 패배를 계기로 트럼프주의 지식인을 육성하고 결집시켜 2기 행정부를 준비하려는 흐름이 있었다. 만약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가 승리한다면, 이미 공화당과 사법부가 정파적으로 구성된 상태에서, 이미 공언한 대로 행정부를 장악하는 명령을 다시 시도하고, 1기 때와 달리 준비된 트럼프주의자들을 정계에 진입시키며, 트럼프주의적인 2024년 공화당 정강을 관철할 힘을 갖출 수 있다. 4. 나가며
한편, 대선 결과를 떠나, 트럼프주의 이념과 운동이 계속 발전될 가능성을 생각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불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이를 자극하며 특정한 방향으로 수렴시키는 트럼프주의 운동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미국 유권자의 정치적 양극화는 매우 심각하며, 트럼프의 강경 지지층을 토대로 트럼프주의 정당이 되어버린 공화당이 존재한다. 이 기반 위에서 트럼프의 권력이 지속될뿐더러 (부통령 후보 밴스와 같은) 트럼프주의 정치인들이 부상하고 세력화하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그간 쌓아 올렸던 정치제도를 계속 변질시키려 시도할 것이다.
임지섭과 김진영의 글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2024년 공화당 정강에 나타난 트럼프주의 정책은 자본주의 경제의 작동 원리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조차 결여하고 있으며, 자유무역·자유기업에 기초하여 구축된 세계 질서를 1930년대의 무질서한 상태로 퇴보시킬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결함을 가진 그 정책들이 트럼프 지지자들의 삶을 진정으로 개선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트럼프주의자들은 기성 엘리트의 저항을 탓하나, 경제나 국가 간 관계 문제에 대한 분석 부재와 정치적 접근,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는 각종 장치를 깨고 입법·행정·사법의 삼권을 장악하려는 시도가 이를 곳은 대안적 세계가 아닌, 권위주의와 무질서의 세계다. 이는 미국 인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민의 안녕을 위협한다.
트럼프주의 정강의 모순과 결함을 비판해야 하나, 토론이 불가능한 그 지지자들의 심리상태도 분석해야 한다. 특히 트럼프주의 운동이 ‘정치적 올바름’ 운동과 같은 미국 좌파의 방식을 모방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각자의 구체적 불만과 분노를 동원하면서도, 이를 ‘피해자 의식’을 통해 현실과 유리된 도덕적인 선악의 문제로 치환하고, 거대한 힘을 가진 해결 불가능한 ‘적’을 상정하여 분노와 투쟁을 영속화하는 그 방식이, 트럼프 지지자들이 현실의 고난을 딛고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트럼프주의 정책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비판을 수용하지 않는 상태의 사람들에게 어떠한 메시지가 필요할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트럼프주의 대중운동에서부터 정치제도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현재의 미국, 나아가 세계는 매우 위험한 상태에 처해 있다. 이 글에서 서술한 각 층위의 문제들, 트럼프 지지자들의 구체적 불만들, 이를 모아내는 트럼프주의 운동의 방식, 극단적인 정치적 양극화, 현실 인식의 결여,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 경제나 외교 사안의 정치화, 의회의 무력화, 사법의 정치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여기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기에, 사회운동은 반드시 이 문제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1. 들어가며
지난해 발표한 2024년 경제전망 글 「연착륙 기대에 드리우는 장기침체와 부채위기의 그림자」에서 지적한 것처럼, 미국경제는 비교적 빠르게 인플레이션율이 하락하면서도 양호한 성장세와 고용 상황을 보였지만, 이미 높아진 물가수준이 고착하는 가운데 재정위기와 부채위기의 압력이 증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이낸셜타임스》는 미국 유권자의 58%가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에 불만이 있고, 오직 28%만이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이 미국경제에 도움 된다고 답변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특히 바이든 행정부 출범 직후인 2021년 대비 20% 상승한 높은 물가수준이 유권자에게 가장 큰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렇게 바이든 행정부의 경제정책과 미국의 경제 상황에 대한 여론의 부정적 평가는 트럼프 지지의 중요한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트럼프는 이번 대선을 앞두고 어떤 경제정책을 공약하고 있을까? 과연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시행할 경제정책은 2020년대 미국경제의 핵심 문제로 지적되는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해결할 수 있을까?
2016년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출범할 당시 과연 어떤 경제정책이 시행될지를 두고 전 세계적으로 많은 혼란과 불안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시행할 것으로 예상되는 경제정책은 비교적 명확하다. 트럼프 1기 행정부의 주요 인사가 참여한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의 ‘프로젝트 2025’ 보고서 『리더십의 사명: 보수의 약속』, 트럼프 캠프의 공약 ‘어젠다 47’, 공화당의 ‘2024년 정강정책’이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시행되어야 할 경제정책의 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아래에서는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 시행될 수 있는 경제정책을 대외정책과 국내정책으로 나누어 살펴보고, 그 함의와 평가를 정리해본다. 2. 미국과 세계를 1930년대로 되돌리는 대외경제정책
1) 무역정책: 관세로 무역적자 해소하기
트럼프 1기 행정부가 실제로 시행했던 주요 관세 조치는 두 가지다. 하나는 특정 수입품이 국가안보에 위협을 가할 경우 대통령이 해당 상품의 수입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1962년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해, 2018년 철강과 알루미늄에 각각 25%p와 10%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무역 상대국의 불공정한 관행에 대해 대통령이 무역협정을 철회하거나 관세나 수입 제한 조치를 부과할 수 있도록 하는 ‘1974년 무역법 301조’에 근거해, 중국 상품에 네 단계를 거처 7.5%p~25%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2018~19년에 전개된 중국과의 무역갈등이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무역과 대외정책 수단으로, 특히 중국을 대상으로 관세 조치를 계속해서 활용하고 있다. 2022년과 2023년에 걸쳐 동맹국인 유럽연합, 일본, 영국과 협의해, 트럼프 행정부 시기 부과되었던 철강과 알루미늄 추가 관세를 저율할당관세로 대체했을 뿐, 그 외의 관세 조치는 유지하고 있다. 특히 ‘1974년 무역법 301조’에 근거한 대중국 관세의 경우, 중국의 불공정 무역 관행을 시정하는 데 필요하다고 평가하며 유지하는 가운데, 올해 5월 14일에는 중국의 전기차(100%), 태양광 패널(50%), 철강·알루미늄(25%) 등 14개 품목에 대해 추가적인 관세를 내년부터 부과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런데 트럼프 행정부 2기의 관세정책은 그 대상과 범위가 이전보다 훨씬 확대될 전망이다. 트럼프 대선 캠프는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관세법 제정을 공약했다. 먼저 보편적 기본관세란, 미국으로 수입되는 모든 상품에 10%p의 추가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캠프의 공약이 구체적인 시행 조치까지 상술하진 않았기 때문에, 보편적 기본관세를 유럽연합이나 일본과 같은 동맹국이나, 한국과 같은 FTA 체결국에까지 적용할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였던 로버트 라이트하이저가 보편적 기본관세가 기존 수입상품에 부과되고 있는 관세에 추가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고, 트럼프 캠프가 미국 무역적자의 원인으로 한국, 일본, 유럽연합, 멕시코와 캐나다의 자동차와 부품을 지목했다는 점에서, 보편적 기본관세가 정말 ‘보편적’으로 부과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상호주의관세법은 상대국이 미국 상품에 부과하는 관세와 동일한 관세율을 상대국 수입 상품에 부과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의 무역정책 핵심 참모였던 피터 나바로는 ‘프로젝트 2025’ 보고서에서 세계무역기구(WTO) 최혜국대우 의무로 인해 모든 국가에 낮은 관세가 적용됨으로써 미국이 만성적인 무역적자를 보고 있다고 주장한다. 각 WTO 회원국은 어떤 회원국에 적용하는 가장 낮은 관세를 다른 모든 회원국에 적용해야 하지만, 상대국이 그것과 동일한 관세율로 맞춰야 하는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에 대한 관세의 경우, 최혜국대우 의무에 따라 미국은 2.5%인 반면 유럽연합은 10%, 중국은 15%, 브라질은 35%에 이르기 때문에 미국의 자동차산업이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나바로는 이어서 상호주의관세법을 통해 미국이 각 132개 무역 상대국과의 관세를 상호 같은 수준으로 맞추면, 미국의 무역적자가 전체 무역적자의 약 10% 정도인 58~63억 달러 감소하고 35~38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화당 역시 지난 7월 8일 채택한 2024년 정강정책에서 트럼프 캠프의 상호주의관세법 공약을 그대로 수용해 제안하고 있다.2) 대중국정책: ‘위험억제’에서 ‘전략적 탈동조화’로
‘프로젝트 2025’ 보고서는 중국을 전략적 동반자나 공정한 경쟁자가 아니라 ‘전체주의 적’으로 규정하며, 중국과의 경제적 관여를 종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한 라이트하이저 역시, 바이든 행정부의 ‘위험억제’(de-risking)가 아니라 중국과의 ‘전략적 탈동조화’(strategic decoupling)를 목표로 하는 경제정책과 무역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중국경제와의 강도 높은 단절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국익에 해가 되는 중국과의 교류를 중단하고, 안보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중용도기술 분야에서 모든 협력을 중단하며, 나아가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를 폐지하고 모든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인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국에 대한 최혜국대우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비교적 최근 제기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이후, 미국은 기존 사회주의권의 ‘비시장경제국’을 세계시장에 통합하는 과정에서 점차 이들 국가에 항구적 정상무역관계 지위를 부여하고 최혜국대우를 적용해 왔다. 2000년 중국, 2012년 러시아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2022년 바이든 행정부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계기로 러시아의 정상무역관계 지위를 철회하고 더 높은 관세율을 적용한 바 있는데, 중국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화당과 트럼프 진영의 인사를 중심으로 제기된 것이다. 트럼프 본인 역시 재선에 성공하면 중국의 항구적 정상무역관계를 철회하고 최대 60%에 이르는 고율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언급하기도 했다.3) ‘G 마이너스 2’의 세계로 이끌 트럼프의 대외경제정책
그러나 미국의 거대한 무역적자는 무역 상대국의 불공정한 관행보다는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 자체에서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다. 금융세계화와 미국경제는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지위에 기반한 동아시아 수출 달러 환류로 유지되고 있다. 동아시아 수출 달러 환류란, 동아시아가 생산한 상품을 미국에 수출해 벌어들인 달러를 미국 금융시장, 특히 미국 국채에 투자하는 메커니즘을 말한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 국가는 무역흑자를 바탕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미국은 금융적 지배를 누리는 한편 비교적 저렴한 물가로 소비할 수 있었다. 2010년대부터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격화하고 있지만, 동아시아 수출 달러 환류와 금융세계화는 여전히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
물론 금융세계화는 계급적 모순을 내포한 것이었다. 중심부의 금융자본가와 신흥국의 산업자본가가 수억 명의 신흥국 노동자를 착취하는 동맹을 맺은 셈이기 때문이다. 또한 미국 국내로 보면, 엄청난 이윤을 누린 초국적 금융자본의 성장과 가격경쟁력을 잃은 제조업이 해외로 떠나면서 일자리를 잃은 중산층의 몰락이 대비되었다. 트럼프는 금융세계화에 내재한 계급적 모순을 반세계화와 보호무역주의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1기 행정부에서 시행된 관세 조치는 무역적자를 감축하지도, 국내 투자와 일자리를 증가시키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다시금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관세를 핵심 정책 수단으로 내세우고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트럼프가 새롭게 제안하는 관세 조치가 무역에 미치는 대상과 규모가 트럼프 1기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에 비해 훨씬 크다는 점이다. 중국에 대한 고율의 관세를 포함해 트럼프가 제안하는 보편관세와 상호주의관세는 중국으로부터의 수입 4천억 달러를 포함해 약 3조 달러 이상의 미국 무역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중국과의 무역갈등이 영향을 미쳤던 무역 규모의 약 10배이고, 바이든 행정부에서 새롭게 부과하기로 한 대중국 관세의 약 150배에 달한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제안한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관세가 실제로 시행될 경우 나타날 교역효과를 전망한 분석을 [그림1]을 통해 살펴보자.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관세·중국에 대한 고율의 관세를 시행하는 각 시나리오에서, 미국의 수입액은 약 2551억 달러에서 최대 4997억 달러 감소하고, 수출액은 약 836억 달러에서 최대 1844억 달러 감소할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무역수지는 약 1715억 달러에서 최대 3153억 달러 개선될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 기준 미국의 전체 무역수지 적자 규모는 7734억 달러다)
이렇게 볼 때, 트럼프의 대규모 관세 조치는 미국의 수입을 상대적으로 더 많이 감소시켜 무역적자를 어느 정도 줄이는 것 자체는 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국은 그 대가로 경제성장 저하와 물가 상승이라는 막대한 거시경제적 비용을 치러야 할 것이다. 같은 분석에서, 보편적 기본관세를 시행할 경우 미국의 실질 GDP 성장률이 약 0.12%p에서 최대 0.36%p 감소하고, 상호주의관세를 시행할 경우 약 0.17%p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관세는 미국의 소비자물가를 1.8%p~3.6%p 상승시킬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상대국이 미국에 보복관세를 부과할 경우에는 물가상승 압력이 더욱 커질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2017년 이후 새롭게 부과된 관세가 미국 구매자(사실상 소비자)에게 모두 전가되었다는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그러면서 트럼프의 대규모 관세 제안이 실제로 시행될 경우, 연간 5천억 달러의 비용이 소비자에게 부과될 것으로 예측한다. 즉, 트럼프의 주장과 달리, 트럼프가 공약하는 대규모 관세 조치는 일부 국내 생산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경제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자극하고 소비자 부담을 증대하여 결과적으로 미국 노동자계급에 전체적인 해를 끼칠 것이다.
나아가, 트럼프의 급진적인 관세정책은 미국과 세계를 1930년대 또는 그 이전 시대로 되돌리려는 시도로 비판받고 있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와이스먼은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글에서, 트럼프의 관세정책이 1980년대 이후 공화당과 민주당이 합의했던 신자유주의적 거시경제 관리 정책에서 이탈하여, 관세와 보호무역에 집착했던 20세기 초의 공화당으로 퇴보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1차 세계전쟁과 2차 세계전쟁 사이에 의회 다수를 차지한 공화당이 1929년 대공황 이후 미국 산업과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입법한 ‘스무트-홀리 관세법’이 낳은 결과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스무트-홀리 관세법’은 2만여 개의 수입품에 평균 59%, 최고 400%의 관세를 부과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각국의 보복관세나 환율통제와 같은 보호무역주의를 추동하여 1930년대 대불황을 심화하고, 결과적으로 2차 세계전쟁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트럼프의 대외경제정책이 미국이 2차 세계전쟁 이후 형성한 규칙 기반의 세계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비판과 연결된다. 전후의 브레튼우즈 체제는 철저히 미국의 세계전략에 부합하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개방된 시장과 자유무역의 확대라는 일종의 ‘세계적 공공재’를 제공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로 각국 경제의 상호의존성이 더욱 심화하는 가운데, 세계 금융위기, 기후위기,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보건위기와 같이 국제협력이 아니면 해결의 실마리조차 찾을 수 없는 세계적 차원의 위기가 심화하고 있다. 이러한 정세에서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의 일방주의는 WTO 무력화와 파리기후협정 탈퇴에서 드러나듯 경제와 정치 모두에서 국제협력이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파괴한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 캠프와 헤리티지 재단의 ‘프로젝트 2025’ 보고서가 제기하는 대중국정책은 공화당과 민주당이 합의하는 ‘전략적 경쟁’으로부터 이탈하는 방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양당이 합의한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의 핵심은, 중국이 자유무역 질서에 편입되면서 점차 공정한 경쟁자이자 책임 있는 국제사회 일원으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관여정책의 기대가 깨졌음을 인정하는 가운데, 중국과의 경쟁을 대비하면서도 규칙 기반의 국제질서를 재정립하여 장기적으로 중국을 포섭할 수 있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가 제기하는 미국 우선주의와 일방주의는 동맹국·제휴국과의 공조나 연대마저 무역분쟁으로 훼손함으로써 규칙 기반의 다자적 국제질서 재정립이라는 목표에 완전히 반한다. 게다가, 최종적으로 중국과의 완전한 단절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분열을 오히려 심화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국과 중국이 세계에 공공선은커녕 혼란과 공공악을 제공하는 ‘G 마이너스 2’의 세계로 나아가는 길일 것이다.3.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심화하는 ‘부두 경제학’
1) 조세정책: 감세와 관세의 결합
트럼프의 감세 정책은 1980년대 레이건 대통령의 ‘레이거노믹스’에서 이어지는 공화당의 공급 주도 경제학을 따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공급 주도 경제학이란, 세율 인하를 통해 기업의 투자 확대를 유도하여 경제 전체의 총공급을 늘리고자 하는 경제정책을 말한다. 그런데 세율 인하가 실제로 투자 확대와 경제성장을 유발해 결과적으로 세입 역시 확충되는 효과를 일으키는, 이른바 ‘낙수효과’가 있는지는 논란이 많다. 대다수 경제학자는 조세 인하가 노동 공급과 저축을 증가시킨다는 논리 자체에는 동의할 수 있지만, 공급 주도 경제학이 그 영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한다고 비판한다. 루비니는 역사적이고 실증적으로 볼 때, 세율 인하가 실제로 산출량 수준과 성장률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었으며 전체 세수입 역시 증가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급 주도 경제학은 ‘부두 경제학’(voodoo economics)일 따름이라고 평가한다.
트럼프 1기 행정부 시기의 TCJA 역시 불과 몇 년 뒤 벌어진 코로나19 대유행과 인플레이션 국면으로 인해 실제 공급 측면의 효과가 있는지는 실증하기 어렵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러한 감세 정책이 재정적자를 심화한다는 점이다.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TCJA 발효 다음 해인 2018년 회계연도에 실제 징수된 세수액은 TCJA 입법 이전인 2017년 1월에 미국 의회예산국(CBO)이 예측한 세수액보다 2750억 달러 적었다. 경제가 성장했고 다른 정책 요인이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중 대부분을 TCJA로 인한 세수 감소로 볼 수 있다. 아울러 의회예산국은 TCJA를 연장하면 2033년까지 재정적자가 3조 5천억 달러 증가할 것으로 추산했다. 즉, 이미 미국의 재정위기와 부채위기가 ‘결정적인 선을 넘었다’는 경고의 목소리가 높은 상황에서, 트럼프의 감세 공약이 이를 더욱 가속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2023년 회계연도 기준으로 미국의 재정적자는 1조 7천억 달러로, GDP의 6.3%에 달했다. 정부의 재정적자는 기초재정수지 적자와 이자지출로 나눌 수 있다. 의회예산국의 향후 10년 예측에 따르면, 미국의 기초재정수지 적자는 평균 GDP의 2.1%가 될 것이다. 이는 사회보장과 건강보험 지출이 세입보다 훨씬 빠르게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 부채의 평균 명목 이자율이 2041년까지 명목 경제성장률을 초과하여, 순이자 지출액은 현재 GDP의 2.4%에서 2034년에는 3.9%로 증가할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 부채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인데, 현재 부채 총규모가 35조 달러로 GDP의 97%인 상황에서 2034년 116%로 증가할 것이다. 2054년에는 순이자 지출액과 부채규모가 GDP의 6.4%, 172%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연방정부의 재정위기와 부채위기가 심화하는 가운데, 트럼프 2기의 조세정책 공약에서 주목해야 하는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연방정부의 세입 기반을 소득세에서 관세로 바꾸겠다는 트럼프의 구상이다. 트럼프는 감세에서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 연방소득세를 폐지하고, 앞서 언급했던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관세나 대중국 고율 관세와 같은 관세로 이를 대체하겠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연방소득세를 폐지하고 관세로 이를 대체하겠다는 트럼프의 구상은 부두 경제학을 넘어 미국경제를 19세기로 되돌리겠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에 가깝다.
물론 이러한 트럼프의 구상이 그 자체로 완전히 실현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무엇보다 현실의 관세 규모가 소득세 규모에 훨씬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으로 관세 규모는 연간 약 800억 달러로 전체 세입의 약 2% 수준인 데 비해, 소득세 규모는 무려 2조 달러에 이른다. 트럼프가 제안한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관세법을 시행하더라도, 관세 규모는 최대 2천2백억 달러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따라서 관세로 소득세 전체를 대체하는 것은 말 그대로 불가능하다.
다만 연방정부의 세입에서 소득세 일부를 관세로 대체하는 감세와 관세의 결합은 1기 행정부에서도 일부분 시행된 바 있다. 철강·알루미늄 관세와 대중국 관세를 인상하는 한편, 2017년 TCJA로 법인세와 소득세를 인하한 것이다. 당시에는 관세와 감세의 결합 규모가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트럼프 2기 행정부에서는 그 규모가 더욱 커질 수 있다. 트럼프 캠프가 내년 만료될 예정인 TCJA의 개인소득세 감면을 의회 입법으로 연장하는 한편, 이로 인한 연방정부의 세입 감소를 보편적 기본관세·상호주의관세와 대중국 고율 관세로 채우겠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세와 관세의 결합은 재정위기를 심화할 뿐만 아니라, 조세부담의 역진성을 강화한다는 문제가 있다. 소득세 감면이 소득 증가에 미치는 영향은 소득 수준이 높은 계층일수록 큰 반면, 관세 인상이 소득 감소에 미치는 영향은 소득 수준이 낮은 계층일수록 크기 때문이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의 분석은 이를 잘 보여준다.
트럼프의 정책을 끝까지 밀어붙여 관세 수입을 7천8백억 달러 늘리고 소득세 수입을 그만큼 줄인다고 가정할 때, 소득 분위별로 세후소득이 얼마나 증감하는지를 살펴보자. [그림2]에 따르면, 소득 하위 5분위 가구는 소득세 감면으로 인한 세후소득 증가는 없으면서 관세 인상으로 인한 세후소득 감소는 8.5%에 이른다. 반면 상위 1분위 가구는 관세 인상으로 소득이 3.8% 감소하지만, 소득세 감면으로 6% 증가하여, 결과적으로 세후소득이 2.2% 순증가한다. 상위 1% 가구는 세후소득이 11.6% 순증가한다.
한편, 이보다 좀 더 현실성 있는 가정, 즉 대부분의 수입품에 20%의 관세를 부과하고 중국에 60%의 관세를 부과하면서 TCJA의 감세를 연장하는 경우에는 소득 분위별로 세후소득이 얼마나 증감하는지도 살펴볼 수 있다. [그림3]에 따르면, 모든 소득 분위 가구에서 세후소득이 역진적으로 순감소하는 가운데, 상위 1%의 세후소득만이 0.9% 순증가한다. 전형적인 미국 가구라고 할 수 있는 중간 분위의 세후소득은 2.7% 순감소하는데, 이는 중간 분위 가구가 트럼프가 시행할 관세정책으로 인해 연간 2600달러의 비용을 더 지출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역시, 전략적으로 표적화된 관세는 미국의 경제적·국제적 이익을 보호하는 주요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연방정부의 세입에서 관세 의존도를 높이는 것은 장기적으로 소득불평등 추세를 악화하고 거시경제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지적한다. 또한 20세기 이후 연방정부의 역할 증대와 소득재분배를 고려하여 형성된 누진적 소득세 제도를 19세기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퇴보적 시도라고 비판한다.2) 통화정책: 약달러와 저금리를 위한 연준 독립성 공격
트럼프가 달러 약세를 원하는 이유는, 현재 달러가 너무 고평가되어 대규모 무역적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로버트 라이트하이저의 믿음에 따른 것이다. 즉 달러가 중국, 일본, 유럽과 같은 무역 상대국의 통화보다 고평가된 ‘강달러’ 현상 때문에 미국의 수출품이 가격경쟁력을 잃게 되는 한편 수입품의 가격경쟁력은 높아져 수출은 감소하고 수입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달러 강세를 완화하기 위해 트럼프가 실제로 선택할 수 있는 유력한 수단은 금리 인하다. 그러나 중앙은행 통화정책의 목적은 무역적자 감축이 아니라 거시경제 관리, 즉 물가와 실업률의 안정이다. 따라서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는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달러 약세와 저금리를 관철하기 위해 연방준비제도의 독립성을 공격하는 개편을 시도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르면, 첫째, 트럼프는 기존의 제도를 존중하는 선에서 연방준비제도 의장과 부의장을 지명할 수 있다. 이 경우 현재 의장인 제롬 파월의 임기가 끝나는 2026년 5월이 기점이 될 수 있다. 둘째, 트럼프는 더 나아가 연방준비제도 의장·부의장의 임기가 만료되기 전에 이들을 일반 이사로 강등시키고 새로운 의장·부의장을 임명하려 할 수도 있다. 다만 그렇더라도 새 의장은 현직 이사 가운데에서 임명해야 하고, 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 위원 중 5명은 대통령이 임명하지 않는 준비은행의 총재이기 때문에 통화정책에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트럼프는 연방정부의 집행권을 오직 대통령에게만 부여하는 미국 헌법 제2조에 따르면 연방준비제도와 같은 독립 기관은 위헌이라는 보수적 법조계의 ‘단일행정부론’(unitary executive theory)을 활용해, 통화정책의 결정 권한을 대통령에게 넘기는 식으로 연방준비제도를 완전히 개편하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강달러로 인해 미국의 무역적자가 심화한다는 트럼프와 라이트하이저의 인식은 “무역과 경제에 대한 근시안적이고 17세기적인(중상주의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무역적자와 마찬가지로 강달러 현상 역시 기본적으로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 자체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과의 무역에서 달러를 벌어들인 국가는 다시 미국 국채에 투자하며, 세계 모든 금융기관은 안전 자산으로 달러 또는 달러와 언제든 교환 가능한 금융자산을 보유한다. 이러한 달러에 대한 세계적 수요는 경제위기일수록 ‘최후의 도피처’인 달러를 찾아 더욱 강해진다.
특히 최근의 강달러 현상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한 연방준비제도의 고금리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가 고착하는 2020년대의 거시경제 조건에서, 트럼프가 추진하는 관세 인상과 조세 인하의 결합은 인플레이션을 자극하는 한편 재정적자를 한층 심화해 금리 인상 압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만약 여기에 더해 트럼프가 달러 약세를 위해 통화정책 결정을 정치화하고 자의적으로 금리 인하를 추진한다면,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화할 것이고 중앙은행의 일관된 정책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어 거시경제 관리에 대혼란을 가져올 것이다.3) 에너지정책: 탈탄소에서 화석연료로의 복귀
먼저 트럼프 캠프는 바이든의 그린뉴딜 정책이 ‘산업과 일자리를 죽이는 친중반미 정책’이라고 비난한다. 특히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따라 전기차에 지급되는 보조금의 최대 수혜자가 중국이라고 주장하면서, 미국의 자동차산업과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전기차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한, 트럼프는 제조업 선진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저비용 에너지와 전력 생산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 화석연료 우위로의 ‘복귀’를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이를 위해 연방정부 토지에서 석유와 가스 시추를 허가하는 절차를 완화하고, 화석연료 생산 기업에 세금 감면 혜택을 제공하며, 화석연료 발전소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프로젝트 2025’ 보고서 역시 세계 최대 에너지 생산국인 미국의 에너지 위기는 과도한 녹색정책 때문이라고 지적하면서, 친환경·탈탄소 보조금을 대부분 축소하고 민간 에너지 부문에 대한 각종 정부 규제를 완화할 것을 제언한다.
아울러 트럼프는 적극적인 화석연료 시추 정책을 상징하는 “드릴 베이비 드릴”(Drill, baby, drill)을 연설에서 종종 활용하면서, 이를 통해 미국의 에너지 비용을 50% 절감하고 인플레이션을 감축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버냉키와 블랑샤르의 분석에 따르면, 실제로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미국의 인플레이션 국면에서 에너지 가격은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특히 2021년 4분기부터 2022년 2분기까지 인플레이션율이 최대 9%에 이르렀던 기간에 에너지 가격상승이 인플레이션의 가장 큰 기여분을 차지했고, 2022년 3분기에 인플레이션율이 3%대로 하락할 때 역시 에너지 가격 하락이 가장 큰 기여분을 차지했다. 이를 고려하면, 저비용 에너지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트럼프의 에너지 정책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무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곧바로 적극적인 화석연료 시추 정책이 실제로 트럼프가 공언하는 것만큼 미국의 에너지 가격을 낮출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브루킹스연구소는 무엇보다 미국의 시추량 변화가 석유의 세계시장 가격에 미치는 영향이 그리 크지 않다고 지적한다. 석유 가격이 하락하여 수익성이 떨어지면, 미국을 포함해 세계의 석유 생산자는 기본적으로 석유 생산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트럼프 행정부 1기 말기에 에너지 가격이 매우 낮았던 것은 미국 내 화석연료 시추량이 증가해서라기보다는 코로나19 대유행 기간에 이루어진 세계적인 경제 봉쇄의 영향이 더 크다고 본다.
그러면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의회를 통해 바이든 행정부 시기에 입법된 ‘인프라와 투자 및 일자리에 관한 법’(IIJA)이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바꾸거나 폐지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다양한 행정조치를 통해 의회를 우회하며 에너지 분야의 규제를 철회하기는 쉬울 것으로 전망한다. 이에 따르면, 최근 연방대법원은 행정법을 둘러싼 주요 판결에서, 행정부가 시행한 조치가 심각하게 불합리하지 않다면 사법부가 이를 존중하고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1980년대 이래의 ‘쉐브론 원칙’(Chevron deference)을 뒤집고, 중요한 경제적·정치적 결과에 대한 문제는 법률상 명시적인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중요문제원칙’(major questions doctrine)을 새롭게 제기하는 한편, 모호한 법령에 대해서는 판사가 최선의 해석을 결정할 책임을 진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는 입법과 그에 따르는 행정조치에 대한 사법부의 심사와 개입을 강화하는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환경 관련 법안과 그에 따른 행정조치는 이러한 연방대법원의 새로운 경향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환경 관련 법안은 종종 규제기관이 새로운 변화나 기술에 대응해 권한을 사용할 수 있도록 다소 넓고 모호하게 입법되는데, 트럼프 행정부가 이러한 환경 관련 법안의 모호성을 공격하며 기존의 규제를 완화하거나 폐지하는 데 있어 연방대법원의 새로운 경향이 사법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4. 결론
이제 트럼프는 한 발 더 나아가 더욱 강력한 관세조치와 중국경제와의 단절로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한다. 트럼프가 새롭게 제안하는 보편적 기본관세와 상호주의관세가 영향을 미칠 무역 규모는 트럼프 1기 행정부에서 중국과의 무역갈등이 영향을 미쳤던 무역 규모의 약 10배에 달하며, 적용 대상도 중국을 넘어 미국을 상대로 무역흑자를 내는 국가 전체로 확대될 수 있다. 국내에서 투자와 일자리를 늘리겠다며 시행하려는 감세정책 역시 1기 행정부 시기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트럼프는 최고 법인세율을 15%까지 인하하고 TCJA에 따른 소득세 감면을 연장하며, 궁극적으로는 연방정부의 세입기반을 누진적 소득세에서 관세로 대체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세와 감세의 결합을 유지하기 위해 통화정책 결정에 대통령이 개입할 수 있도록 중앙은행 제도를 개편하려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트럼프의 경제정책은 본질적으로 반(反)경제학 내지는 ‘부두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미국의 대규모 무역적자가 거시경제적 요인과 세계체계적 요인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무역적자를 단순히 수입액과 수출액의 차이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거시경제 관점에서 무역적자는 국내 투자의 증가에 비해 저축률이 낮거나, 소비가 저축보다 많을 때 발생한다. 저축을 초과하는 투자는 해외로부터 자본 유입으로 조달되며, 저축을 초과하는 소비는 해외로부터 수입으로 이어진다. 미국은 대표적인 자본수입국이자 과잉소비 경제인데, 이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달러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이 주도하는 금융세계화와 동아시아 달러 환류로 지탱된다. 관세와 같은 무역 장벽은 이러한 구조적 요인을 바꿀 수 없는데, 이런 점에서 트럼프의 경제정책은 금융세계화의 모순으로 인한 미국 대중의 불만을 외국 탓으로 돌리려는 것에 불과하다.
트럼프의 부두 경제학과 반세계화 정책은 금융세계화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국경제와 노동자계급에 해로운 결과를 낳는다. 특히 트럼프가 추진하는 관세와 감세의 결합이 2020년대 미국경제의 핵심 문제인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를 오히려 심화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규모 관세로 인한 비용 상승은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며, 대규모 감세는 소득불평등을 강화하고 연방정부의 세입기반을 약화해 재정위기를 악화한다. 나아가 약달러와 저금리라는 목적을 위해 통화정책 결정에 자의적으로 개입하려는 시도는 거시경제 관리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위협하며 불확실성과 경제적 혼란을 증대할 것이다.
나아가 트럼프 경제정책의 위험성은 미국경제의 혼란을 심화하는 것을 넘어 세계의 무질서를 심화한다는 데 있다. 트럼프가 제기하는 대중국정책은 중국에 대한 규제 강화와 더 강력한 경제적 단절만을 추구할 뿐, 규칙 기반의 다자적 국제질서를 재형성하자는 문제의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이 초당적으로 합의했던 중국과의 ‘전략적 경쟁’에서 점차 이탈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트럼프가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그리는 세계는 국가 간에 협력과 규칙을 쌓아가는 세계가 아니라, 양자 간의 힘에 의해 결정되는 세계다. 사회운동이 제기했던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대안은 반세계화가 아니라 대안세계화였음을 돌이켜본다면, 트럼프가 미국을 ‘G 마이너스 2’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한 축으로 세우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1기 행정부 시기와 비교할 때, 두 가지 차이점이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위험성을 더욱 강화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주의’가 훨씬 강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 상호주의관세법 입법, △ 중국에 대한 최혜국 대우 폐지, △ 대규모 감세, △ ‘사회주의적인 그린뉴딜 정책’ 폐지와 같은 트럼프 캠프의 ‘어젠다 47’을 대부분 수용한 2024년 공화당 정강정책과, 트럼프 충성파를 자처하는 밴스 부통령 후보의 부상이다. 트럼프 1기 행정부의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에서 불확실성을 그나마 제어했던 것은 의회였는데, 이는 민주당 외에도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를 견제하는 전통적 엘리트 정치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 공화당 자체가 트럼프화된 상황에서, 2기 트럼프 행정부의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이 별다른 견제 없이 시행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세계금융위기 이후 저금리와 저물가 상황에서 고용 없는 회복이 문제가 되었던 2010년대 후반과 달리, 현재는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고착된 인플레이션과 부채위기의 압력이 훨씬 강해진 정세라는 점이다. 이는 트럼프의 경제정책이 거시경제와 세계경제에 불러일으킬 혼란이 더 큰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은 다시 돌아온 트럼프의 위험성이 그가 그저 ‘괴상하다’(weird)라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
저성장 시대 감세 기조 옳지 않아, 집값 상승으로 이득 봤으면 세금도 내야, 주가부양 위한 상속세 인하는 본말이 전도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