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보연대 광주전남지부


2024 가을. 18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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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하고 평등한, 선거의 두 얼굴

『선거는 민주적인가』

고은영 | 조직국장

선거가 다가오면 거리에는 ‘민주주의의 꽃은 선거입니다’라는 표어가 어김없이 나붙는다. 투표는 민주 시민의 적극적인 권리 행사이자 책무로 떠들썩하게 소환되고, 연예인들은 SNS에 투표 인증샷을 경쾌하게 찍어 올린다. 선거일을 단순한 휴일 정도로 여기는 유권자의 태만에 대한 경고도 잦아진다. 부지런한 투표는 세상을 바꿀 힘 있는 수단이고, 높은 투표율은 선출된 대표를 견제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기대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돌연 준엄해진다. 여기서는 루소가 단골로 인용된다. “(영국인들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여기지만, 이는 큰 착각이다. 그들은 단지 선거일에만 자유로울 뿐이며, 다음날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투표에 갇히지 않는 인민의 의지를 거리의 정치, 광장 정치를 통해 표출하는 것이 된다. ‘세상을 바꾸자’, ‘불평등을 타파하자’와 같은 급진적 구호가 자주 등장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바꾸자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상반된 주장으로 보이지만, 사회운동 세력은 언제나 선거에 대한 엄청난 관심과 기대, 근본적 불신과 불만족을 동시에 드러내 왔다. 사실 선거라는 제도는 민주주의자에게 다소 혼란스러운 것이다. 선거를 통해 시민의 대표를 잘 선출할 수 있을지, 또한 그렇게 뽑힌 시민의 대표가 시민의 다양하고 가변적인 ‘뜻’에 얼마나 부합할 수 있으며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지. 민주주의(적 제도)의 민주성에 대한 약속은 항상 불확실했다. 이러한 모순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미로 속에 갇힌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거라는 제도와 대의제의 역사를 짚어보면서, 우리의 현실이 어떤 논리 속에서 만들어졌는지 규명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버나드 마넹의 <선거는 민주적인가> (1995년, 원제는 The Principles of Representative Government)는 고대 아테네에서부터 현재까지 민주정과 대의제의 여러 형태를 꼼꼼히 검토하고 비교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에 띈다. 원제를 직역하면 ‘대의 정부의 원칙들’인데, 마넹은 ▲ 주기적·반복적 선거 ▲ 대표의 부분적 독립성 ▲ 여론의 자유 ▲ 토론을 통한 심판·결정이라는 네 가지의 원칙 역시 도출한다. 그는 이 원칙들에 의해 결론적으로 선거가 “민주정·귀족정의 성격을 양면적으로 가진 혼합 정체(政體)”를 구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선거에 불평등하고 귀족주의적 측면이 있다는 그의 주장은 대의제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언뜻 기이하고도 낯선 주장이다. 19세기와 20세기 전 세계 노동자와 여성이 참정권을 요구하며 투쟁해 온 역사, 군사독재를 끝내고 직선제를 쟁취한 한국의 역사는 다름 아닌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열망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마넹은 ‘비민주적’인 세습과 ‘민주적’ 선거를 대립시키는 익숙한 구도 대신, 고대 아테네의 추첨과 선거를 대비시켜 사고할 것을 제안한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핵심은 ‘인민의 통치’를 가장 잘 구현하기 위해, 모든 평범한 아테네 시민이 통치와 복종(피통치)을 번갈아 가며 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체의 원칙을 위해, 관직에 대한 ‘추첨’은 가장 합당한 절차로 여겨졌다. 이에 비해 선거는 언제든 ‘(시민의 목소리를 능가할 만큼 특출난) 전문가들에 의한 통치’라는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과두적·귀족주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통치하고 복종할 기회’를 공정하고 평등하게 제공했던 아테네의 추첨제도는 시민혁명 이후 세워진 국가들(영국, 미국, 프랑스)에서 전혀 채택되지 않았다. 이러한 반전에 대해, 마넹은 매디슨과 시에예스 등 정치적 대의제를 확립한 인물이 모두 ‘소수의 시민이 직접 정부를 운영하는’ 민주정과, ‘대표성에 근거한’ 공화정을 대립시켰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히 매디슨은 ‘선택된 시민집단이라는 매개를 거치면서 대중의 견해가 정제되고 확대될 수 있으므로’ 대의제가 더 우월한 체제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민주정의 한 형태로 대의제를 당연하게 사고하는 것과 달리, 18세기의 대의제는 ‘탁월한 사람들의 지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민주정과는 한참 먼 아이디어였다.

그렇다고 마넹이 대의제를 버리고 추첨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마넹은 대의제가 ‘동의의 원칙’과 만나면서, 민주정적 아이디어와 결합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동의의 원칙이란, 권력의 원천과 정치적 구속의 근원을 동의나 피지배자의 의지에 두는 것으로, 로크를 포함한 모든 자연법 이론가가 공유한 신념이었다. 선거는 결과에 대한 시민의 동의를 지속해서 확인하는 것으로, 추첨에 대한 동의보다 훨씬 튼튼한 정치적 정당성을 제공했다. 당연히 이는 민주주의의 의미를 인민의 ‘통치’에서 ‘동의’로 축소하는 면도 있었지만, 어쨌든 구체제의 ‘세습’보다는 훨씬 나은 것이었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대의 ‘민주주의’는 점차 확장되었다. 참정권이 점차 확대되고, 대표에게 요구되었던 재산 자격 요건이 사라진 것이다. 인민의 의지를 표현하고 이를 대의제에 반영할 수 있도록 언론의 자유가 튼튼하게 확립된 것도, 초기의 귀족적 대의제가 민주정과 더욱 밀접하게 결합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넹은 이렇게 확장된 대의제의 역사적 변형을 ‘의회정치’, ‘정당 민주주의’, ‘청중 민주주의’라는 틀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각각에도 역시 고유한 민주주의적 취약성이 발견된다. 대의제의 네 가지 원칙이 현실에 맞추어 그 작동방식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네 가지 원칙과 관련한 내용은 본문에서 다룬다.) 따라서 마넹은 무조건 ‘좋았던 옛날’로의 회귀가 아니라, 오히려 대의제의 최소 원칙과 복잡한 조건을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현한다며 제도의 해체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 글에서는 마넹의 논지를 따라 ‘대의’가 갖는 민주주의와의 불가피한 갈등과 타협을 주요 테마로 하여, 앞서 요약한 대의제의 역사적 변형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한다. 이어서 21세기 대의제의 세계적 경향을 묘사하고, 결론으로 “선거가 민주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해 보려고 한다. 
 
 

1. 직접 민주주의와 교체의 원칙: 아테네의 추첨제도

 
통상 아테네의 민회에는 20세 이상 남성 시민 3만 명 중의 20%인 6천여 명이 참가해 다양한 토론을 나누고 중요한 조치와 법률을 의결했다. 아테네의 권력은 ‘추첨’이라는 방식을 통해 민회의 시민에게 위임되었다. 그런데 통념과는 달리,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민회에 ‘모든’ 권력을 위임한 것은 아니었다. 

우선 아테네 행정부를 구성했던 700명가량의 행정직 중에서 600명 정도는 제비뽑기를 통해 선발되었다. 이들의 임기는 1년으로, 연임은 금지되었다. 물론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추첨이 된 이의 자질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들은 임기가 끝나면 결산 보고서를 제출해야 했고, 임기 중에도 시민들이 그들을 불신임 투표에 부칠 수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의 제어 장치는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추첨 기계에는 ‘선출되기를 원하는 자들’의 이름이 들어갔기에, 자기 검열 효과도 있었다.

물론, 투표로 선출된 행정관들도 소수 존재했다. 업무 수행 능력이 중요한 직책인 장군과 최고 군사령관, 최고 재정담당관들이 여기에 속했다. 이들에게 연임 제한은 없었다. 날이 갈수록 민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가(웅변가)들이 이런 역할을 겸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이들은 정치 지도자, 즉 엘리트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부유층 가문들로부터 충원되었다. 이를 근거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역시 민주정적 성격과 귀족정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 혼합 정체이자 ‘균형 정체’라고 규정했다. 

행정관 선출뿐 아니라, 민회와 법정을 뒷받침했던 세 가지의 제도에도 추첨이 적용되었다. 첫째, 시민 대표 평의회인 ‘보울레’다. 평의회는 민회에서 토론할 의제를 준비하고, 결정된 사안을 실행하는 ‘가장 결정적인 통치체’였다. 민회에서 통과된 법령의 절반 정도는 사실 평의회가 제출한 법령을 비준하는 것이었다. 외국 사절 접견과 해상무역의 행정·군사 기능을 담당하고, 공공 업무를 포괄적으로 감시하는 일도 평의회에 속했다. 

두 번째는 ‘헬리아스타이’로, 배심 재판소를 말한다. 아테네에서는 법정이 열릴 때마다, 헬리아스타이 중 원하는 사람을 추첨하여 그날 필요한 재판관이나 배심원을 뽑았다. 배심원들은 하루 품삯의 절반 정도를 받았다. 이때 법정은 개인 사이의 논쟁이나 형사사건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비합법성 기소’를 다뤘다. 이는 민회에서 채택된 법률이나 법령에 대해 비합법성을 이유로 시민들이 기소하는 것을 말한다. 즉, 법정이 민회의 활동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가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비합법성 기소가 남발되지 않도록 하는 장치도 마련되어 있었다. 판결 전에 자신의 고발을 철회하거나, 법정에서 배심원들의 1/5 이하의 표를 얻게 되면 고소자는 벌금을 내야 했다. 

세 번째는 ‘노모테타이’로, 입법위원회를 말한다. 아테네에서는 매년 초 기존 법률들이 민회의 승인을 받기 위해 제출되었고, 누구든 시행 중인 법률을 거부하고 새로운 법안을 제안할 수 있었다. 효력이 없는 법률을 발견하거나, 법률끼리 상충할 때도 민회에 회부되었다. 이때, 민회는 해당 법률에 관한 판단을 노모테타이에 위임하여 최종적으로 결정하게끔 했는데, 노모테타이는 그날 출석한 헬리아스타이 중에서 추첨했다.

이처럼 민회가 아테네 인민의 직접 통치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인민의 통치 중 상당 부분은 평의회, 법정, 입법위원회를 통해 ‘수행’되었다. 따라서 직접 민주주의의 특징은 직접성이 아닌, 추첨이라는 그 충원 방식에 있었다. ‘민중은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위치를 번갈아 가며 차지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교체의 원칙이 그 근거가 됐다. 추첨제는 통치자가 ‘반드시 지배받는 사람의 처지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강력한 수단과 동기를 제공했기에, 좋은 정부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 요건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교체의 원칙은 우리에게 익숙한 ‘선거의 자유’와는 상충하는 것이다. 선거의 자유는 관직에 앉힐 사람을 자유롭게 뽑는다는 의미이지만, 누군가를 ‘다시 뽑을 자유’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충돌을 인지하고 있었던 아테네인들은 절박한 이유가 없는 한 정치적 기능은 비전문가가 수행해야 한다고 보고, 평의회 위원과 판사, 배심관, 행정관 대부분을 ‘일부러’ 보통 시민으로 충원할 것을 선택했다. 선거의 자유가 우위에 서면 정치 전문가가 개입할 것이고, 이는 그들에 의한 지배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이것이 민주정의 원칙과 충돌한다고 본 것이다. 많은 사람이 아테네의 제비뽑기가 괴상하다고 생각해, 여기에 어떤 종교적 의미가 숨어있지 않았을까 추측했다. 그렇지만 추첨제는 관직에 뽑힐 동일한 확률을 시민에게 광범위하게 제공하면서 그 나름의 체제 정당성을 갖춘 것이었다.
 
 

2. 탁월성의 원칙: 초기 대의제에서의 대표 자격

 
추첨제에 관한 또 다른 보편적인 오해는, 도시국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국가의 규모가 커졌으므로, 추첨은 ‘기술적으로’ 채택하기 어렵기 때문에 소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넹은 영국, 프랑스, 미국의 정치사상가들과 혁명가들이 추첨제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기술적 문제 때문이 아닌, 무엇이 옳은 정치체제인가에 대한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초기 대의제 정부는 ‘대표는 자신을 선출한 사람보다 사회적으로 (재산, 재능, 덕성이라는 측면에서) 탁월해야 한다’라는 아이디어, 즉 ‘탁월성의 원칙’하에서 세워졌다. 물론 인민에게는 ‘동의할 수 있는 권리’(참정권)가 주어진다는 전제가 따른다. 여기서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는 참정권이 재산 조건, 성별, 인종에 따른 구획을 벗어나 언제, 어떻게 확장되었느냐일 것이다. 반면 마넹에 따르면, ‘탁월성의 원칙’을 따라 피선거권자가 선거권자보다 우월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련의 규정, 제도, 부수적 조항들이 존재했다. 이런 공공연한 제약은 어떤 논리 속에서 만들어졌고, 또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거쳐 완화 또는 삭제되었을까?

우선 17, 18세기에 영국에서 하원의원을 뽑는 것은 지역 공동체의 ‘타고난’ 지도자를 예우하는 한 가지 방법이었다. 투표는 권력자 집단(또는 위계질서)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투표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후보는 지지자를 투표 장소까지 수송하고, 접대하는 엄청난 선거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자동으로 하원으로의 통로는 무척 제한됐다. 휘그파의 지도자 샤프츠베리가 1679년 만든 선거 개혁 법안에는 유권자의 자격으로 가옥을 소유할 것과 200파운드의 보수를 가질 것을 명시했는데, 그는 선출될 의원은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상류층 인사들 가운데 뽑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의 재산을 재산이 없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은 안전하지 않으며, 재산이 있는 독립적인 상태여야만 왕이 꾀하는 부패한 일에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논리는 여러 대의제 정부의 설립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했다. 

1789년 프랑스 제헌의회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납세 금액이 최소한 은화 1마르크(500일 임금과 맞먹는 금액)가 되는 사람’만이 국민의회 의원으로 피선될 수 있다는 법령을 포고했다. 이는 선거권을 가진 ‘능동적 시민’ 자격을 위해 3일 치에 해당하는 임금을 직접세로 납부하게 했던 (당시의 기준으로 광범위했던) 조치와 비교했을 때 매우 큰 제한이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1791년, 혁명의 급진화 위험이 고조되자 마침내 은화 마르크 조항은 폐기되었지만, 의회는 간접선거 투표인단의 세금 자격을 40일 간의 임금에 해당하도록 인상했다. 따라서 선거인단은 주로 부유한 계급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에 따라 당시 국민의회의 구성도 절반 이상을 변호사가 차지했다. 

이와 비교했을 때, 미국 제헌의회가 정한 하원의원의 자격은 다소 평등주의적으로 보인다. “연령이 25세에 미달하거나, 미합중국의 시민이 된 지 7년이 못 되었거나, 뽑혔을 당시 그가 선출된 주의 주민이 아닌 경우에는 누구도 하원의원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마넹은 <의사록>을 통해 제헌의회의 닫힌 문 뒤에서 대표의 자격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1787년 제헌의회의 세부 준비위원회는 매디슨의 제안에 따라 ‘입법부 의원에게 어떤 특정한 부동산 자격과 요건과 시민권을 요구하고, 청산되지 않은 구좌가 있거나 미합중국에 채무가 있는 사람을 실격시키는’ 조항을 만들 것을 압도적 찬성으로 채택했다. 대표가 경제적으로 충분히 독립적이어야 행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데다, 오직 재산소유자만이 재산권을 진지하게 사고할 것이란 생각은 그 당시에 통용되던 상식이었다.

따라서 쟁점은 ‘얼마큼의 재산 기준을 요구할 것이냐?’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조항은 결국 만들어지지 않았다. 누구도 북부와 남부, 그리고 서부의 저개발 농업 중심의 주와 부유한 동부의 상업 중심의 주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획일적인 재산 기준을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각 주의 대표 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하는 수 없이, 원칙적 이유가 아닌 정치적 이유로 인해, 회의에 출석한 대표들은 의도와는 정반대의 투표를 할 수밖에 없었고, 앞서 본 것처럼 예외적일 만큼 평등주의적인 대의제도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후, 미국 헌법 비준 과정에서 좀 더 중요한 논쟁은 ‘피선거인과 선거인 사이의 비율’에 전적으로 집중되었다. 반연방주의자들은 피선거인과 선거인에 대한 비율이 너무 낮아서 둘 간의 일체성 또는 유사성을 확보할 수 없다며 헌법에 반대했다. 선거구가 커질수록 특출난 사람이 선출될 가능성이 커지고, 여기서 부의 영향력이 증대될 것이란 논리였다. 극소수의 상인과 부유하고 야심에 찬 사람들만 기회를 잡고 중간계층과 농민이 배제된다면, 헌법은 ‘귀족정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에는 세습 귀족이 없으므로, 반연방주의자들은 법적으로 정의된 특권이 아닌, 부, 지위 또는 심지어 재능에 의해 주어진 사회적 우월성을 향유하는 사람들을 ‘자연 귀족’이라 규정했다. 이러한 주장은 직관에 근거한 매우 심오한 것이긴 했지만, 명확한 근거가 부족한 것이었다.

연방주의자들은 곧바로 날카롭게 반격했다. 매디슨은 우선 폭넓은 연방 참정권의 존재와, 헌법에 대표자의 재산이나 세금 자격 요건이 없다는 점을 들었다. 

“누가 연방 대표자들의 선거인이 되어야 하는가? 부자와 마찬가지로 가난한 사람도, 배운 사람과 마찬가지로 무식한 사람도, 탁월한 가문의 오만한 자손들과 마찬가지로 … 보잘것없는 사람도 선거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 누가 대중의 선택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국가의 존경과 확신을 받을 만한 장점이 있는 모든 시민이다. 부, 태생, 종교적 신념, 또는 직업 등의 조건이 판단을 구속하거나 국민의 의향을 좌절시켜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같은 주장이 대표와 대표되는 사람들 사이의 유사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대표가 그들의 선거인과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만, ‘잦은 선거’가 그들이 선거인단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줄 것이라며, ‘헌법은 대표가 국민의 신뢰를 배신하지 않도록 보장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모든 정치적 헌법의 목적은 첫째, 사회의 공공선을 분별할 수 있는 최상의 지혜, 추구할 수 있는 최상의 덕을 가진 사람을 통치자로 얻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그들이 계속 대중의 신뢰를 유지하는 한편, 그들의 덕성을 지키도록 하는 가장 효과적인 견제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 가장 효과적인 것은 그 임기를 제한해서 국민에 대한 적절한 책임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연방주의자인 해밀턴은, 헌법의 귀족적 특성과 관련한 반연방주의자들의 반대에 직면했을 때, ‘부유함’을 대표의 덕목으로 보고 강하게 옹호하기까지 했다. 

“공동체의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들을 면밀히 조사해 보십시오. 누구의 덕이 더 우세합니까? … 그들의 악행은 아마도 궁핍한 사람들의 그것보다는 국가의 번영에 더 이로울 것이며, 도덕적으로 덜 타락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매디슨과 연방주의 지도자들을 은밀한 재산 자격(광역 선거구)을 헌법에 도입해놓고도 선거의 자유를 옹호하는 ‘척’한, 위선적인 정치인들로 봐야 할까? 반대로, 피선거인에 대한 재산 자격이 헌법에 없다는 이유로, 연방주의자들을 정치적 평등의 순수한 옹호자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마넹은 1787년 미국 헌법 논쟁에서 승리한 대표성 개념이 인민과의 유사성이 아닌 탁월성의 원칙이었지만, 동시에 그렇게 구성된 정부는 공화주의적이며 민중적이라 주장한다. 국민이 대표를 선택하며, 반복되는 선거를 통해 대표가 그 책임을 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국의 헌법은 선거자에 대한 피선거권자의 우월성이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제약이 없어도 자연스레 달성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따라서 초기 대의제 정부는 민주정에 대한 기만도, 귀족정에 대한 부정도 아닌 복합적인 역사의 산물로써, 아슬아슬한 균형점 속에 세워졌다. 이후 이러한 대의제의 원형은 참정권의 광범위한 확대와 언론의 자유가 뿌리내리면서 점차 튼튼하고 다양하게 발전하게 된다. 
 
 

3. 대의 정부의 변형들: 의회정치, 정당 민주주의, 청중 민주주의

 
앞서 우리는 초기 대의 정부의 설립자들이 민중의 의지가 통치하는 체제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렇다고 대표의 결정이 유권자의 뜻과 아무 상관이 없는 체제를 만들려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대의제의 기준은 무엇인가? 또 ‘선택된 시민집단이라는 매개를 거치면서 대중의 견해가 정제되고 확대된다’(매디슨)라는 대의제의 메커니즘은 어떤 장치를 통해서 가능한 것일까? 
 
우선, 마넹은 대의제의 원칙을 아래 네 가지로 규정한다. 
 
①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선거를 통해 통치할 사람을 임명한다. (주기적·반복적 선거)
② 통치하는 사람의 정책 결정은 유권자들의 요구로부터 일정 정도 독립성을 가진다. (대표의 부분적 독립성)
③ 피통치자은 통치자의 통제에 종속되지 않고, 그들의 의사와 정치적 요구들을 표현할 수 있다. (여론의 자유)
④ 공공 결정은 토론을 거친다. (토론을 통한 심판·결정)

첫째, ‘주기적이고 반복적인 선거’를 통해 사람들은 거부를 표현하거나, 제안되었던 정책을 실현하도록 할 수 있다. 다만, 유권자가 통치자에게 특정 정책을 시행하도록 ‘강제’할 방법은 없다. 따라서, 유권자는 통치자가 자율적으로 발의한 안건을 사후에 평가하며, ‘회고적 판단’을 바탕으로 투표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둘째, ‘대표의 부분적 독립성’ 원칙은, 대의제가 대표에 대한 구속적 위임이나 임의적 해임 혹은 소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는 평의회 의원에 대한 ‘항시적 해임 제도’를 도입했던 파리코뮌의 구성 원리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즉, 대의제는 피통치자와 선출된 사람 간의 완전한 합일을 보장하는 체제가 아니다. 강령이나 공약을 내세울 수 있지만, 대표는 언제나 이러한 강령과 공약의 이행 여부를 결정할 자유를 갖는다. 따라서 대표는 유권자의 소망을 실행하지 않을 재량권을 가지고, 유권자 대다수가 선호하지 않을 정책이라도 현실로 옮길 수 있다. 

셋째, ‘여론의 자유’는 정부의 통제 밖에서 언제든지 정견을 형성할 수 있는 피통치자의 자유를 말하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의 필요 조건이 있다. 먼저, 피통치자는 정치적 정보를 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결정이 반드시 공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언제든지’ 정치적 의견을 표명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종교의 자유와 함께 언론, 출판, 집회, 청원의 권리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인 힘과 자기표현을 대체할 수 있지만, 여론의 자유는 이러한 ‘완전한’ 대체를 막는 역할을 한다. 

넷째, ‘토론을 통한 심판·결정’은 다양한 인구 집단에 의해 선출된 집합체(주로 의회)에서 설득을 통해 의견수렴을 하는 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토론을 거쳐 다수가 정당하다고 받아들이지 않는 한 어떤 조치도 공적 결정으로 인정될 수 없다. 여기서 유권자는 스스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대표가 이행한 정책의 ‘심사원’이 된다. 

마넹은 이러한 대의제의 원칙이 대의 정부의 다양한 변형 속에서도 일관되게 발현되었다고 주장한다. 다만 그 강조점은 조금씩 다르다. 대의 정부를 둘러싼 역사적 조건이 차츰 변화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부터 전 세계적으로 선거권이 대폭 확대되고 피선거권의 제약이 낮아지면서 자유주의적 ‘의회정치’는 변형되기 시작한다. 우선, 선거권의 확대는 ‘대중 정당’의 출현을 낳았다. 구속력 없는 선거 공약에 대해 불신했던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과는 달리, 대중 정당은 정강을 선거 경쟁의 주요한 도구로 삼았다. 따라서 이제 시민의 대표는 전투적 행동과 어떤 주장 또는 운동에 대한 헌신으로 정당의 최고 지위에 도달한 보통 시민들로 구성되기 시작했다. 사회적 지위, 생활 방식, 관심의 영역에서 대표와 유권자의 유사성이 증가했기 때문에, 좀 더 평등하고 민중적인 대의 정부가 탄생했다고 간주되었다.

그러나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확고해 보였던 정당 민주주의는 1970년대 이후 그 결정적 특징이었던 ‘유권자와 특정 정당·의회 대표 사이의 동일시’, ‘정강에 대한 선택’이 퇴색하면서 빠르게 힘을 잃었다. 마넹은 이후 현대적 대의 정부의 몇 가지 특징을 근거로 ‘청중 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유형에 대한 도식화를 시도한다. 따라서 아래에서는 ‘의회정치’, ‘정당 민주주의’, ‘청중 민주주의’ 세 유형을 마넹이 제시한 대의제의 원칙에 따라 비교한다. 각 유형의 특징을 비교해보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진 것인지, 그렇다면 대안은 무엇인지를 가늠하는데 좋은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의회정치

초기 대의 정부의 대표는 지역 사회(소선거구)의 명사였다. 이들이 유권자로부터 신임을 받는 것은 다른 대표와의 관계나 정치 조직과의 관계를 통해서가 아니라, 특정 지역이나 이익집단에 속해있으면서 성격, 부, 직업 덕분에 그 공동체에서 존경받았기 때문이다. 대표는 유권자의 대변인이 아니라, 그들의 ‘수탁자’로, 자신의 양심과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독립적으로 의회에서 투표했다. 이때 의회는 개인들의 의견 교환과 토론을 거치면서 다수의 동의를 구하고 합의하는 완전한 의미의 심의기관이었다.

고전적 의회정치의 전성기는 19세기 전반기로, 동시에 여러 사회운동(대표적으로 차티스트 운동)이 확산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운동은 시위, 탄원, 언론 운동 등을 조직했으나 의회 내 정당 구분과는 무관한 초의회적인 것으로, ‘여론의 자유’ 원칙은 여론과 의회 사이의 격차를 여지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즉, 상위의 의지(전체로서 의회의 의지)와 하위의 의지(거리에서, 탄원을 통해, 신문 칼럼에서 표현되는 의지)가 수평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는 군중이 거리에서 의회 ‘전체’와 대치하며, 사회 전반의 무질서와 폭력의 위험이 증가하게 될 가능성을 남겨두는 셈이었다. 따라서 언제든 의회 내부의 ‘담합’에 의해 대의 정부가 타락하게 될 취약성 역시 남아있었다. 
 

2) 정당 민주주의

19세기 말부터 엄청나게 확대된 선거인 수는, 예전처럼 유권자와 대표 사이의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불가능하게 했다. 이내 그 빈 자리를 대중 정당이 채우게 되었다. 정당 민주주의의 특징은 선거에서의 균열이 곧 계급 분할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특히 사민주의 정당의 경우, 엘리트가 아닌 ‘평범한 노동자’가 시민의 대표를 맡는다는 기대를 받았다.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 사민주의 정당이 강한 국가일수록, 정당에 대한 부동의 충성심이 만들어낸 가장 순수한 유형의 대의제가 발견되었다. 유권자에게 투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정체성과 운명의 문제’였다. 

그런데 로버트 미헬스는 독일 사민주의 정당들을 분석하며, 이러한 ‘일체감’에 대한 기대가 그릇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정당은 노동계급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에게 그 사회계급 내에서 상승할 기회를 제공했을 뿐이며, 그 결과 가장 유능하고 가장 박식한 노동자가 등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당에 등용된 노동자가 프티 부르주아와 같은 생활을 한다는 비난도 잊지 않았다) 이는 미국 헌법 비준 논쟁에서 등장했던 반연방주의자의 이상, 즉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유사성이라는 주제가 꾸준히 재등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헬스는 노동계급 정당은 ‘탈 노동자화된’ 새로운 엘리트가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의 권력은 행동주의와 조직 기술에 근거한 것이라 주장한다. 

정당 민주주의 시기의 대표는 더 이상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투표하기 어려워졌다. 자신의 선거에 도움을 줬던 정당에 구속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점은 사민주의가 강한 국가일수록 (영국을 제외하고) 통상적으로 비례대표제를 실행했기에, 의회에 압도적인 다수당이 창출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폭력적 대립과 내란의 가능성이 점증할 때마다, 다수파 진영은 소수파와의 타협, 협상, 연립 전략을 택하게 되었다. 이때 정당 지도부는 반대·동맹 세력과 타협하기 위해서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했고, 결국 자신을 지지한 유권자의 소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는 ‘대표의 독립성 원칙’이 대표자 개인에서 정당 지도부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의회에서의 투표는 강력한 당론에 따라 결정되었기에 의회 내에서 개별적으로 교환되는 주장과 상호 설득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토론에 의한 결정’ 원칙이 침해된 것으로 보고, 대의제의 위기를 논하는 많은 연구가 20세기 초에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마넹은 의회 내 토론은 사라졌지만, 정당 내 토론이 ‘토론에 의한 결정’ 원칙을 담보한다고 반박한다. 그는 의회 내 토론에 선행하여 정당 내부 토론에서 참여자가 진지하게 심의하고, 이런 토론을 밑거름으로 다수파·소수파 정당 지도자 사이에서의 토론 역시 고무된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다만 마넹은 이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당내 권력을 독점한 관료나 활동가가 내부 토론을 억압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만약 내부 토론 과정을 생략한 권위적, 비민주적 ‘사당’(私黨)이 대중 정당을 대체하게 된다면, 정당 민주주의는 왜곡될 수 밖에 없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끝으로 ‘여론의 자유’는 야당의 목소리로 표현되었다. 강력한 대중 정당은 투표 외에도 여론의 표현(시위, 탄원, 언론 운동)을 조직하기 때문에, 다양한 결사체와 언론이 정당 중의 하나와 연관된 것이 일반적이었다. 시민은 이러한 ‘당파적 언론’에 기대어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강화했다. 이제 여론은 의회 밖에서 의회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의회 ‘안에서’ 다양한 야당을 통한 반대 목소리로 구현되었다.
 

3) 청중 민주주의

한편, 연구자들은 1970년대부터 정치적 선호를 유권자의 사회, 경제, 문화적 특성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놓기 시작했다. 유권자가 점점 정강과 정당을 기준으로 투표하는 게 아니라 인물을 기준으로 투표하기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서 후보가 정당 조직의 중재 없이도 유권자와 직접 소통할 수 있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중매체를 통한 의사소통 기술에 능한 ‘미디어적 인물’이 후보로 등장했다. 새로운 엘리트의 출현이었다.

유권자 역시 변했다. 마넹은 이들이 선거 운동에서 제기되는 쟁점에 따라 ‘반응’하기 위해 투표하며, 이전 시기처럼 자신의 사회적·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투표하지 않는다고 봤다. 따라서 후보는 (과거에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던) 사회 내 각종 분열 지점을 발굴하여 관심을 유도하고, 여론조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선거에서 구체적인 의제 세팅에 관여한다는 것은, 대표가 (고전적 의회정치 시기처럼) 수탁자이자, ‘행위자’에 가깝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후보는 구체적인 정치적 제안이 아닌, 이미지에 기반한 애매모호한 슬로건으로 당선되었는데, 이는 대표의 부분적 독립성을 강화하는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과거에 시민에게 시위나 청원에 참여할 것을 요구했던 사람들은 활동가나 정당 조직원이었던 반면, 오늘날 여론의 표출을 유도하는 사람들은 사회과학 분야에서 교육받고, 영리를 목적으로 기업에 고용되었다. 이들이 수행하는 여론조사가 인민 의사의 비선거적 표현을 담당하면서, ‘여론의 자유’는 평화롭고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게다가 기술적, 경제적 이유로 당파적 언론이 쇠퇴하면서 오늘날 정당은 신문을 소유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확립된 언론의 중립성·비(非) 당파성은 교육 수준이 높은 부동층 유권자 사이의 토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유권자가 비당파적 언론을 통해 상호 대립하는 의견에 노출되면, 공공 토론이 이뤄지기 훨씬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사실 ‘청중 민주주의’의 민주성은 대중적 의사소통 통로(신문, 텔레비전 등)의 중립성, 비 당파성에 상당히 의존하는 것으로, 언제든 언론이 상업화, 당파화 된다면 ‘토론을 통한 결정’은 침해된다는 취약성이 있다.
 

4) 소결

마넹은 대중 정당의 활동가와 관료가 (자연)귀족을 대체했을 때, 통치자와 시민 간의 간극이 줄어드는 것처럼 보였지만, 오늘날 정치·언론 엘리트와 시민 간의 간극은 줄어들기는커녕 심화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또한, 사람들이 개인적 신뢰가 아닌 정강과 공약을 보고 정당에 투표하기를 선택했을 때, 시민에게 이전보다 많은 발언권이 부여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오늘날의 이미지 기반 정치는 이런 방향에 역행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앞서 본 것처럼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유사성’, 그리고 대표에 대한 유권자의 ‘구속’은 애초부터 대의제의 목표도, 성격도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취약했던 의회정치, 정당 민주주의와, 청중 민주주의의 민주성을 끝까지 보장해낸 것은 의회 내의 설득적 토론, 정당 내의 심의적 토론, 그리고 비당파적 언론을 매개로 한 공공 토론의 존재였다.

선거는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탁월한’ 사람들에게 공직을 제한하면서 인민의 평등주의적 열망을 가로막는다. 그렇지만 선거는 모든 시민에게 통치자를 임명하고 해임할 동등한 권리를 제공하며, ‘무엇이 엘리트를 구성하는지, 누가 엘리트에 속하는지를 규정하는지’를 전적으로 인민에게 남겨놓는다는 면에서 민주주의적이다. 다양한 대의 정부의 형태는 단일하지 않은 사상들과 경험이 뒤섞여 민주성과 비민주성의 양면을 모두 지닌 채 그 모습을 바꾼 ‘역사적 산물’이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선거는 민주적인가?’에서 ‘선거가 민주적이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가?’로 전환된다.
 
 

4. 결론

 
글을 마치기 전에, 마넹의 이러한 통찰은 1970년대 유럽 정치가 사민주의와 정당 민주주의로부터 빠르게 이탈하는 경향과, 대의제의 위기를 해석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책이 발간된 1995년으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 오늘날의 정치 현실을 ‘청중 민주주의’라는 틀로 여전히 해석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 따라온다. 결론부터 말하면, 청중 민주주의를 뒷받침하던 여러 원칙이 부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1990년대 이후 전 세계적으로 ‘정치가적 인민주의’가 발호했다. 이들은 양극화된 사회의 원한과 불만을 가시적인 ‘적’에게 돌리기 위해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여론을 조작했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의 미디어 재벌이었던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들 수 있다. TV 리얼리티 쇼를 통해 등장했으며, 트위터를 통해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특히 대선 개표 음모론으로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을 초래했던 2010년대의 트럼프 대통령 역시 같은 맥락에 있다. 마넹은 청중 민주주의에 ‘중립적·비당파적 언론’(정론지)이라는 희망을 가졌지만, 인민주의의 부상과 소셜미디어가 결합한 이후 ‘여론의 자유’ 원칙은 흔들리고 있다.

이에 더해 2020년대 한국의 경우, ‘선거 시장에서 새로운 유형의 엘리트의 출현과 수동적이고 청중화 된 대중’ 정도가 아니라, 더욱 극심한 질적 타락을 유권자의 모습에서 관찰할 수 있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강력한 팬덤 정치가 형성되어 최소한의 정당 내 토론조차 억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개딸’의 목적은 대중 정당을 ‘사당화’하는 것으로, 이들의 모습은 청중이 아닌 무대 위 배우에 더 가깝다. 혹자는 이러한 현상을 당원 민주주의의 한 모습이라 강변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특정 정치인 개인을 민중의 구원자로 설정하고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기 때문에 오히려 극단적 엘리트주의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의 민주주의적 역량이 감소했다고 보는 것이 더 설득적이다. 

앞서 대의 민주주의는 대표에게 ‘탁월성의 원칙’을 제시하는 대신, 주기적·반복적 선거, 여론의 자유, 토론을 통한 심판이라는 민주적 원칙으로 인민이 대표를 견제해 나가는 가변적인 ‘균형점’ 위에 서 있음을 확인했다. 그만큼 인민의 자기 통치를 실현하기 위한 길은 어떤 정합적 제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굉장히 어려운 좁은 길 위에 있으며, 인민의 민주주의를 향한 ‘역량’에 달린 일이다.

인민주의가 창궐하는 시대에 ‘민주주의자이기도 한’ 마르크스주의자가 견지해야 할 입장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혹자는 설득적 토론과 의원 개인의 양심에 따른 투표를 핵심으로 하는 고전적 의회정치로의 복귀를 주장한다. 또 다른 사람은 정강을 기반으로 세워져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고 중재했던 정당 민주주의로의 복귀를 주장하기도 한다.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언론을 통한 품격 있는 대중적 토론의 복귀를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좋았던 과거로의 복귀’라기보다, ▲ 의회 내 토론 ▲ 정당 내부 토론 ▲ 공적 언론을 통한 토론 중 무엇이라도 살려내기 위한 실천이 아닐까. 특히 ‘여론의 자유’와 ‘토론을 통한 결정’의 원칙이 다른 누구도 아닌 ‘대중의 동의에 의해’ 침식되고 있다는 면을 기억한다면, 자기 파괴적인 인민주의로부터 대의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한 노력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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