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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진보연대 계간지


2003.1-2.3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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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위기 : 세계체계적인 그리고 지역적인 양상들 (2)

지오반니 아리기 | 뉴욕주립대 사회학과
아프리카 위기의 세계체계적 맥락

첫 번째 질문에 대한 훌륭한 해답들 중 하나는 1970년대에 세계 자본주의를 덮친 위기의 본질, 그리고 위기에 대한 헤게모니적 권력 즉 미국의 대응에서 찾을 수 있다. 1970년대의 세계적 위기는 동시에 이윤율과 정당성(legitimacy)의 위기였다. 이윤율의 위기는 주되게는, 일반적인 기업들 특히 공업 회사들에 대한 경쟁적 압력이 범세계적으로 강화된 탓인데, 이는 1950년대~60년대 들어 세계 무역 및 생산이 크게 증가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정당성의 위기는 이윤율의 위기로부터 발생했다. 이같은 팽창으로 인해 더욱 희소해지는 인적, 물적 자원을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면서, 1950년대~60년대에 무역과 생산의 범세계적 확장을 개시·유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정책 및 이데올로기 ― 일반적인 용법에 따르자면 이른바 케인즈주의 ― 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반(反)-생산적이게 되었다. 그러나 정당성의 위기는 제3세계에서 공산주의의 도전을 봉쇄하기 위해 미국이 의존했던 강제력의 사회적, 경제적 비용이 증가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위기에 대한 미국의 최초의 대응 ― 베트남전 철수와 중국에 대한 개방, 그러나 국내외 차원에서 케인즈주의의 지속적 고수 ― 은 그것을 악화시킬 뿐이었고, 미국의 권력과 위신의 급격한 추락을 막을 수 없었다. 이러한 추락과 불가분이었던 것은, 미국 헤게모니 아래서 개시된 '발전 프로젝트(development project)' ― 필립 맥마이클의 용어 ― 의 성과에 대한 광범한 각성(특히 아프리카에서 두드러진다)이었다. 이것은 제3세계에서 경제적 조건들의 악화에 기인하는 문제가 아니다. 처음에 세계적 위기가 제3세계의 경제적 전망들을 향상시킬 것처럼 보였을 때, 여기에 아프리카의 국가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1970년대 초반, 제3세계 지역의 교역 조건 ― 특히, 하지만 배타적이진 않게, 산유국들에게 ― 은 향상되었다. 게다가, 제1세계 국가들에서 이윤율의 위기는, 서구 은행들과 '영외'(領外)의 금융시장들에 정기적으로 위탁되었던 석유 수익들의 인플레와 결합되어, 과잉 유동자본을 창출했다. 다음으로, 이러한 과잉 유동자본은 제2세계와 제3세계 국가들 ― 아프리카 국가들 또한 포함된다 ― 게 매우 유리한 조건의 대부자본 형태로 재순환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 초반 남아시아를 제외한 모든 제3세계 지역들의 지위가 향상되었다(<표 Ⅱ> 참고). 그러나 바로 이 시기는, 제3세계 국가들이 더 이상 '발전 프로젝트'를 견딜 수 없게 된 나머지, 새로운 국제경제질서(NIEO)의 설립을 통해 세계적 정치경제로의 통합 조건을 재협상하려 했던 때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적어도 세 가지 분명한 이유들이 존재한다.
첫째, 최고의 경제 성과를 보이던 제3세계 지역들에서조차, 경제적 진보가 탈식민화와 일반화된 산업화 혹은 근대화가 불러일으킨 기대치에 훨씬 못 미쳤다는 것. <표 Ⅳ>와 <표 Ⅴ>가 보여주듯이, 제1세계와 비교해볼 때, 모든 제3세계 지역들의 산업화의 정도(GDP에서 제조업 비율로 계측된) 및 도시화의 정도(전체 인구에서 비농촌인구 비율로 계측된)는 1인당 GNP 성장 정도에 비해 훨씬 높다. 바꿔 말하자면, 제3세계 국가들은 점증하는 산업화와 도시화의 사회적 비용을 경제적인 이득 ― 제1세계 국가들의 역사적 경험에 기초하여 거둬들일 수 있다고 예상하였던 ― 없이 감내했던 것이다.

<표 Ⅳ> '세계적' 평균 대비 지역 GDP에서 제조업 백분율


자료: <표 Ⅰ>과 같음.
(*) 표시 지역은 중국을 포함.

<표 Ⅴ> '세계적' 평균 대비 지역 비농업인구 백분율


자료: <표 Ⅰ>과 같음.
(*) 표시 지역은 중국을 포함.

'발전 프로젝트'가 위기에 처한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와 연관되는데, 경제성장이 제3세계의 빈곤을 경감하는 데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찍이 1970년에 세계은행의 총재였던 로버트 맥나마라(R. McNamara)는, 저소득국가에서 높은 GNP 성장률의 달성이 유아 사망률의 '상승', 예상수명의 '하락', 문맹률의 '확대', 실업의 '토착화와 증가', 그리고 소득과 부의 분배의 '심각한 왜곡' 등의 문제를 남겼음을 인정했다. 1970년대의 대부분 기간 동안, 제3세계 국가들의 소득이 절대적으로·상대적으로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국가 인민들의 복지는 느린 속도로 향상됐거나 아예 제자리걸음이었다.
마지막으로, 제1세계와 비교해 볼 때 제3세계 지역들 혹은 최소한 몇몇 지역들의 경제적 지위의 향상이, 널리 인지된 정치 권력 차원에서 세계적 균형의 이동 ―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 포르투갈의 아프리카에서의 패배, 1973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겪은 곤란들, 그리고 사회주의 중국의 UN 안보리 가입 등에 뒤이어 발생한 ― 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다. 제1차, 2차 오일쇼크는 부분적으로 권력의 세계적 균형에서 인지된 변화의 효과이자 동시에 원인이었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자본의 남-북 흐름이 증가한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NIEO에 대한 제3세계의 요구는 이렇게 진행 중이던 자원의 재분배를 확대함과 동시에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
1980년에 아프리카 국가원수들이 서명한 라고스 계획은 여전히 미국 헤게모니의 위기로부터 나타난 제3세계 정부들의 세력화라는 관점을 표현했다. 그러나 그 계획은 또한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상황들을 반영했다. 이러한 상황들은 부분적으로 세계 무역과 생산의 경기후퇴의 효과였는데, [이는] 1975년 이후 대부분의 비산유국 제3세계 국가들의 무역조건을 악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권력과 위신의 지속적인 추락에 맞서 미국이 취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대응이었다. 이러한 추락은 1970년대 후반 이란혁명, 석유가격의 가파른 상승,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그리고 미국 달러의 신인도에 대한 새롭고도 심각한 위기에 이르러 그 절정에 달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카터 행정부의 말년 ― 레이건 하에서는 더욱 결의에 차 ― 에 미국의 정책에 대담한 변화가 발생했던 것이다.
군사적으로, 미국 정부는 베트남전의 패인이 된 지상전 따위를 회피하기 시작했고, 대신 대리전(니카라과, 앙골라, 아프가니스탄)을 치루거나, 상징에 불과한 가치들을 둘러싸고 대단치 않은 적들과 대치하거나(그레나다, 파나마), 혹은 하이테크 전쟁기계가 절대적 우위를 점하는 공중폭격(리비아)을 진행했다. 동시에, 미국은 소련과의 군비경쟁의 단계적 확대에 박차를 가해, 후자가 감당할 수 없는 정도로까지 나아갔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미국 정부가 경제 정책들을 수정 ― 화폐공급의 급격한 긴축, 높은 금리, 부유층에 대한 감세, 자본주의 기업 활동에 대한 잠재적으로 무제한적 자유 등 ― 하기 시작했다는 점인데, 이는 국내적인 뉴딜의 유산 뿐만 아니라 특히 1949년 트루만이 명목상 발주한 빈국을 위한 페어딜(Fair Deal) 유산까지 청산한 것이었다. 이같은 일련의 정책들을 통해서, 미국 정부는 전세계의 자본과 공격적인 경쟁을 시작하고, 그리고 국제수지에서 점증하는 무역 및 자본 거래 적자에 자금을 조달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으로써 전세계적으로 실질 금리의 급격한 상승과, 세계적인 자본 흐름의 방향에 거대한 역전을 야기하였다.
그래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세계 자본유동성과 직접투자의 주요한 원천이었던 미국이, 1980년대에 세계의 주요 채무국이자 동시에 해외자본의 대규모 수령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경제적] 역전의 규모는 국제수지에서 자본 거래의 변화로부터 측정될 수 있다. […]
이것은 역사적인 비율의 역전인데, 즉 세계 전역으로부터 자본을 추출할 수 있는, 이례적이고, 절대적인 동시에 상대적인, 미국 정치경제의 역량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것은 북아메리카의 경제적 번영에서의 동시대적 역전 및 제3세계 지역의 경제적 번영에 있어서의 분기의 유일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으로의 자본 흐름의 방향전환은 북아메리카의 유효수요와 투자 모두를 팽창시켰고, 반면에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을 수축시켰다. 동시에, 이러한 방향전환으로 인해 미국은 무역수지 상의 거대한 적자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북아메리카의 기업들로서는 생산해 봐야 이윤을 남길 수 없게 된 제품들을 수입하자는 팽창하는 수요를 창출했었다. 경쟁압력이 제조업 분야에서 특히 격렬해지면서, 이러한 수입상품들은 농업분야보다는 산업분야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러한 상반된 효과들은 세계의 지역들을 두 개의 집단으로 분할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저렴한 제조업 상품들에 대한 북아메리카의 수요 팽창의 몫을 다툼에 있어 강한 우위를 갖고 있던 지역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지역들은 자본 흐름의 방향전환으로부터 혜택을 받는 경향이 있었는데, 왜냐하면 국제수지의 향상이 세계금융시장에서 미국과 경쟁할 필요를 경감시켰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역사적이고 지리적인 이유들 때문에, 북아메리카의 수요 팽창에 따른 몫을 다투는 경쟁에서 거의 우위를 갖지 못한 지역들이 존재했다. 이러한 지역들은 국제수지 상의 곤란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들은 세계금융시장에서 미국과 경쟁하는 가망없는 위치로 내몰렸다. 내가 볼 때 이러한 사실들은 197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1980년대에 완전히 고착된 제3세계 지역들의 번영의 분기의 일차적 원인인 것 같다.
이차적이긴 하지만 그 분기의 중요한 원인은 군사 및 금융의 영역들에서 미국의 정책들의 변화에 수반되었던 이른바 워싱턴 컨센서스의 등장이다 ― 존 토예(John Toye)는 매우 적절하게도 그것을 발전이론 안에서의 '반혁명'이라고 일컬었다. 버그 리포트와 아프리카에 관한 일련의 세계은행 보고서들, 뿐만 아니라 NPE까지도, 이러한 반혁명의 결정체였다. 지난 30년간의 발전친화적 체제는 공식적으로 청산되었고 제3세계 국가들은 전혀 다른 게임의 규칙에 따라 행동할 것을 권유받았다 ― 즉, 세계시장의 격렬한 경쟁이라는 삭풍에 자신들의 국가경제를 개방할 것, 그리고 자본주의적 기업의 운동과 활동에 자신들의 사법권 내에서 가능한만큼 거대한 자유를 창출하기 위해 여타 국가들 및 제1세계 국가들과 경쟁할 것. 특히 아프리카에서, 이러한 '구조조정'이라는 새로운 전략은 불신받는 국가주의적 모델 ― 지난 30년간 우세하였던 ― 에 대한 해독제로서 제시되었다. 실제에서, 그 치료는 종종 질병보다도 더욱 나쁜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지만, 발전이라는 자신들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음에도, 새로운 전략은 미국으로의 자본 흐름의 방향전환에 따라 세계적 규모에서 창출된 축적의 새로운 조건에 관한 자신들의 경제학을 수용하도록 제3세계 국가들을 설득하는데 (부지불식간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워싱턴 콘센서스는 제3세계 지역들의 번영의 분기를 강화하는데 기여하였던 것이다.


비교 관점에서 본 아프리카의 위기

그러나, 왜 동아시아 ― 그리고, 그보다 덜하지만, 남아시아 ― 가 이러한 조건들 하에서 라틴 아메리카에 비해, 그리고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비해 더욱 발전하였는가? 적어도 그 해답의 일부는 바로, 1970년대 동안, 동아시아에 비해 라틴 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해외 자본에 더욱 종속적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미국으로의 자본 흐름의 방향전환이 추진력을 얻음에 따라, 이러한 종속은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1982년 멕시코의 채무불이행 사태로 인해 이전의 [발전] 방식이 이제 어떻게 실행불가능하게 되었는지가 극적으로 드러나자, 1970년대에 제3세계 국가들(그리고 특히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경험했던 자본의 '홍수'는 1980년대의 갑작스런 '가뭄'으로 전환됐다. 아프리카의 경우, 말 그대로 사막의 가뭄(Sahelian drought)은 사태를 심각하게 악화시켰다. 그렇지만 우리는 멕시코 식의 위기가 사막의 가뭄 이전에 아프리카를 강타했고, 연이은 자연재해와 인재(人災)에 대처할 수 있는 역량을 심각할 정도로 감소시켰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과거 해외자본에 대한 거대한 종속은, 1980년 무렵 발생한 세계-경제 환경들의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 라틴 아메리카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남아시아나 동아시아에 비해 보다 취약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줄 것이다. 그렇지만, 왜, 새로운 환경 하에서,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1980년대 이전보다 더욱 훌륭한 경제적 발전을 달성했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또한 라틴 아메리카 및 특히 아프리카의 붕괴와 비교할 때, 남아시아와 동아시아가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세계적 맥락의 변화가 왜 제3세계 지역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균등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지역들을 종별적인 식민지 이전 시대, 식민지 시대, 식민지 이후 시대들의 유산들 ― 상이한 변화 대처 역량들을 부여했던 ― 을 갖는 지리-역사적 '개별성들'(individuals)로 관찰해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말이 쉽지 실제로 하는 건 [쉽지 않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아프리카의 정치경제에 대한 우리의 에세이들[{아프리카의 정치경제론}]의 주된 약점들 중 하나는,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가, 여타 제3세계 지역들이 물려받은 것들과 비교할 때, 식민지 이전 시대 그리고 식민지 시대로부터 물려받은 천연 자원에 대해서도, 정치-경제적 형세들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3세계 지역들 간의 관계가 확연하게 비-경쟁적이었던 시기, 그러니까 대략 1970년대 초반에도, 이러한 상대적인 유산들이 물론 중요하긴 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처럼 [제 3세계 지역들 간의] 관계가 압도적이고 점증적으로 경쟁적이게 되었던 때보다는 아니었다. 여기에서는 나에게 더욱 익숙한 지역인 동아시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 우리의 분석의 대상이 되는 시기에 각각 최상/최악의 경제 행위자였던 ― 두 지역에 대한 몇 가지 논의들을 통해서 요점을 분명히 하는 데 그칠 것이다. 세 가지 구별되지만 밀접하게 연관된 질문들: 노동, 기업가 정신, 그리고 국가-경제 및 민족-경제의 형성.
저발전된 지역의 특징은 '무제한적인 노동력의 공급'이라는 아더 루이스(Arthur Lewis)의 고전적인 주장은 아프리카에는 결코 실제로 들어맞지 않았고, 이 지역의 노동력은 언제나 공급부족 상태였다. 식민지 이전시기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서양 세계와의 주요 상호작용―총기류의 수입과 노예들의 수출―는 그러한 교류 이전에 존재하였을 천연자원에 대한 노동력의 구조적 결핍을 분명히 악화시켰다. 에릭 울프(Eric Wolf)가 지적했듯이, 심지어 노예 무역이 개시되기 전에도, '아프리카는 … 인구가 급증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 희귀한 요소는 … 땅이 아니라 노동력이었다.' 직·간접적으로 노예들의 포획과 수출과 연관되었던, 계속된 인구감소와 생산활동의 와해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역들에서 식민지 시기까지 지속되었던 낮은 인구밀도와 소규모 지역시장이라는 유산을 남겼다.
식민주의 하에서 노동력 공급은 확실히 확대되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천연자원에 대한 착취가 증대함에 따라 노동력 수요도 증가했다. 대규모의 잉여인구는, 공식부문들에서 얻을 수 있는 [고용]조건으로 쉽게 직업을 구할 수 있었던, 도시 지역에서 종종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조건들은 노동인구 중 사적·공적 고용주들이 자신들의 기업조직에 안정적인 방식으로 통합하기 위해 선택한 소수에게만 유효했다 ― 즉, 그것은 '내부 노동시장'의 조건들이었다. 이 부문에서 노동력의 잉여가 분명 존재했을지라도, 일반적이고 지속적으로 수요 부족에 시달리던 '외부' 노동시장의 공급을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조건들 하에서만 그랬다.
탈(脫)식민화 기간 및 그 후, 노동력의 심각한 결핍은 일부는 1970년대 중반까지 활발하게 남아있던 아프리카의 천연자원에 대한 수요에 의해, 그리고 다른 일부는 새롭게 독립된 국가들의 근대화·산업화의 노력들에 의해 재생산되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구조적인 노동력 결핍이 노동력 잉여로 돌아선 것은 1980년대의 몰락 이후였다. 도시의 '내부노동시장'의 붕괴와 도시-농촌 간의 소득 격차의 감소세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하라 이남 국가들에서 1980년대에 이주민들이 급증했다는 점에서 이는 분명하다. 아프리카 도시들의 경우 연간 6-7%의 성장률을 보였고, 농촌지역과 비교해서 오직 2% 정도 앞설 뿐이었음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완전히 대조적으로, 식민지 이전과 식민지 시기로부터 동아시아는 다른 어떤 제3세계 지역들에 비해 루이스의 이념형에 보다 근접한 저발전의 조건을 물려받았다―확실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중동 또는 북아메리카에 비해 훨씬, 그리고 최소한 남아시아만큼 말이다. 동아시아의 구조적인 천연자원 대비 노동력의 풍부함은 다양한 기원들을 갖는다. 부분적으로, 그 지역에서 쌀농사라는 물질문화가 지배적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부분적으로, 16-17세기 서양세계와의 상업 및 여타 교역이 증가함에 따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인구 폭발'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부분적으로, 전통적인 산업들에서 노동집약적 기술들의 퇴화와 점진적인 포기에 기인하였는데, 그것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유럽중심적 세계 체계의 구조들 내로 그 지역이 통합됨에 따라 촉진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 그 지역에서 천연자원 대비 저렴한 노동력의 구조적 풍부함은 서양의 산업화에서 전형적이었던 자본집약적, 자원집약적 기술들을 발전시키려는 노력에 일반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유지되었다. 노동력 잉여가 흡수되기 시작한 것은 그러한 노력들이 더욱 노동집약적이게 되고 더욱 성공적이었던 198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그러나, 비교적으로 말하자면, 동아시아의 노동력의 잉여는 제3세계 지역들 중 가장 풍부했다. 특히, 중국에서, 일관된 경제성장은 팽창의 중심으로의 이주하는 흐름―절대적 숫자에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의 유사한 과정들을 훨씬 능가하였던―의 격화와 관련되었다.
이 첫 번째 차이점이 결정적인데, 왜냐하면 1980년대 제3세계 지역들 간의 경쟁의 격화라는 조건에서 풍부하고, 유연한, 그리고 저렴한 노동력 공급은 새로운 정세의 비용들을 감내하기보다는 이익들을 거두려는 국가의 역량에 있어서 주요한 결정요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그 지역 내에서 자본축적을 위한 노동력 공급을 동원할 수 있는, 이를 통해 세계 시장과 세계적 유동성에서 자신의 몫을 확대하려는 토착적인 기업가 계층의 존재였다. 동아시아에게는 행운일 것이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게는 불운일 것인데, 과거 식민지 및 식민지 이전 시기로부터 물려받은 지역의 기업가 자원들의 불일치는 동아시아에게 훨씬 호의적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사실상, 동아시아의 자질은 진정 예외적이었다. 그 지역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광범한 기업 네트워크들은 해외의 화교들로부터 배태된 것들이었다. 이것은 지난 수세기 동안 지역을 지배해온 네트워크였다; 19세기 후반기 동안, 제국주의를 방패 삼아 성장했던 서양과 일본의 라이벌들에 의해 퇴색될 때까지, 이는 계속 유지되었다. 2차 세계대전 후, 경제적 민족주의의 확산은 동아시아의 모든 부류의 초민족적 기업가들이 확장되는 것을 억제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종 온실과 같은 방식으로 민족적 수준에서 새로운 기업가 계층의 형성을 유도했다. 게다가, 천연자원 대비 구조적 노동력의 풍부함은 무역과 산업에서 그러한 계층의 등장을 위한 호의적인 환경을 지속적으로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신구(新舊) 기업가 계층들이 지역적인 노동력 공급을 국경 내외에서 동원하여 이윤을 낼 수 있었던 엄청난 기회들은 정확히 1970년대의 위기와 그것에 대한 미국의 대응이 풍부하고 유연하며 저렴한 노동력 공급을 제조업 생산품들에 대한 미국의 확장된 수요의 몫을 둘러싼 경쟁에서 강력한 지렛대로 전환해 냈을 때 도래했다.
이와 같은 어떤 것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관찰되지 않았다. 지속적으로, 지역의 천연자원 대비 노동력의 구조적 결핍은 무역과 산업에서 기업가 계층의 부상과 재생산에 대해 불우한 환경을 만들었다. 식민지 이전 시기에, 노예 무역은 곧장 노동력과 기업가의 결핍 모두를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부족한 기업가 자원을, 프레드릭 레인(Frederic Lane)의 용어를 빌자면, '보호-생산 산업'('protection-producing industry')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식민지 시기에는, 보호-생산 활동들이 식민지 행정부서들과 군대들에게 인수되었는데, 무역과 생산에서 기업가적 기능들은 외국인들에 의해 지배적으로 수행되었다―사실상 아프리카인들은 종종 기업운영으로부터 제외되었다. 베이츠(Bates)가 지적했듯이, '전체 아프리카의 토착민들은 빠르게, 활발하게, 그리고 능숙하게 식민지 시장들을 위한 제품 쪽으로 선회했'고, 토착 농업사회들의 구성원들은 심지어 사적 소유권의 대의를 옹호해야만 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지역의 자본주의의 주요한 행위자들 ― 식민지 권력의 정부들 ― 은 '공동'(communal) 소유권을 지지하고 강화함으로써 종종 이러한 경향들을 방해했다.
독립 후, 경제적 민족주의 ― 자본주의적이든 반(反)자본주의적이든 간에 ― 는 새로운 아프리카 기업인들의 수를 보충하지 않고 대다수의 비-아프리카 소기업들을 쫓아 버렸다. 이 때문에 1970년대 후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초기의 경쟁적인 투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이는 아프리카의 유연하고 저렴한 노동력 공급의 구조적 결핍 때문 뿐 아니라, 설사 유연하고 저렴한 과잉노동력이 존재했다손 치더라도 이윤을 창출할 수 있도록 그것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지역 기업가 계층이 희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80년대의 몰락 이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 나타난 유연하고 저렴한 노동력 잉여의 엄청난 풍부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토착 기업가 계급의 성장에 보다 호의적인 환경을 창출하지는, 좀더 두고봐야 할 것이다. 당분간, 국내 시장들 내의 날카로운 축소를 자극함에 따라, 그러한 몰락은 그러한 발전의 전망을 향상시키기보다는 악화시켰다.
결국, 이러한 동아시아의 경쟁적 유리함과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불리함은 국가-형성과 민족-경제적 통합의 범위들에서 물려받은 각각의 매우 상이한 유산들에 의해 합성된 것이다. 널리 알려진 통념과는 달리, 18세기 전(全)기간 동안 동아시아는 유럽을 포함한 세계 어느 지역들 보다 앞서 있었는데, 이는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그 다음 세기 동안, 이러한 초기의 우세는 국가들과 민족경제들의 중국 중심적 체계가 유럽 중심적 체계의 구조 내부로 종속적으로 통합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 중심적 체계의 역사적 유산들을 제거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양 체계의 구조들 간의 이종교배의 과정을 유도하였다. 즉, 2차 세계대전 후 (그리고 특히 1970년대의 위기 이후), 자본 축적의 특히 유리한 조건들이 창출한 결과였다.
동아시아와 첨예하게 대조적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식민지 이전 그리고 식민지 시기로부터 생존가능한 민족경제들 또는 강건한 민족국가들의 건설을 위한 여지를 거의 제공하지 않는 정치경제적 형세를 물려받았다. 모든 난점들에 대항하여 이러한 것들을 구축하려는 시도들은 독립 당시에 그들이 향유하였던 상당한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에, 마흐무드 맘다니(Mahmood Mamdani)가 강조했듯이, 아프리카 민족주의자들의 핵심적인 의제는 세가지 기본적 과업들로 압축될 수 있다: '시민 사회의 탈인종화(deracializing), 토착적 권위의 탈종족화(detribalizing), 그리고 불균등한 국제관계라는 맥락에서 경제의 발전'. 모든 정치적 신념 중에서 민족주의 체제는 시민사회의 탈인종화에 있어서는 장족의 발전을 거뒀지만, 농촌 권력(rural power)의 탈종족화에 대해서는 거의 해결한 것이 없다. 맘다니의 관점에서, 이것은 '왜 탈인종화는 유지될 수 없었으며 왜 발전이 완전히 실패하였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 논문이 전개하는 주장에 따르자면, 만약 아프리카 국가들이 탈종족화에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아마 경제적으로 실패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만약 그들이 생존가능한 민족국가들을 창출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지배계급들이 식민주의로부터 물려받은 사회구조를 탈종족화할 필요가 있었다는 사실은 1970년대의 세계적 위기와 그에 대한 미국의 대응 때문에 창출된 격렬하게 경쟁적인 환경에서 또 다른 취약점을 구성했다.
우리는 두 지역의 발전 잠재력 사이의 불일치는 위기 이전에, 미국이 냉전 초기 단계에 자신의 동아시아 동맹국들에게 부여한 특혜 조치에 의해, 확대되었다라는 점을 추가해야만 한다. 많은 연구자들이 강조했듯이, 이러한 특혜 조치는 그 지역의 경제적 르네상스의 '이륙'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가 지적했듯이, 한국전쟁은 '일본의 마샬플랜'으로서 기능했다. 전쟁물자조달은 '일본이 자신의 세계를 향해 산업적으로 쇄도하도록' 하였다. 1950-70년의 20년 동안, 미국은 일본에 연평균 5억 달러를 원조하였다. 남한과 대만에 대한 원조는 더욱 액수가 컸다. ...
게다가 동등하게 중요한 것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정도까지, 동아시아 국가들의 보호주의, 국가 개입주의, 그리고 심지어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의 배제를 묵인하면서, 미국이 자신의 동아시아 동맹국들의 수출품들에 대해 미국 국내시장에 대한 특권적인 접근을 허용하였다는 점이다. 1970년대의 세계적 경제위기가 개시되자, 냉전은 다가올 다음 20년간의 경쟁적 투쟁에서 동아시아가 성공할 기회들 그리고 아프리카가 실패할 기회들을 더욱 증대시켰다.


'불운'과 '올바른 통치'

이러한 분석에 따르면, 워싱턴 컨센서스―그리고 대부분의 국가발전 이론들의 변용들―의 교의들과 반대로, 시공간을 초월한 그 자체 '긍정적인' 혹은 '부정적인' 정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지역에서 긍정적인 것이 같은 시기 다른 지역에서는 부정적일 수 있고, 혹은 시기가 다르다면 같은 지역에서도 그럴 것이다. 흥미롭게도, 세계은행의 경제학자인 윌리엄 이스털리(William Easterly)는, 상이한 전제들로부터 출발하여 최근에 매우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스털리는 1990년대 초반 '올바른 정책이냐 행운이냐?: 국가의 경제 성과와 일시적 충격'이라는 제목의 공동연구를 발표했는데, 여기서 개별 국가들의 경제성장은 그 정부들이 같은 정책을 계속 추구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매우 다양하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훌륭한 경제 성장은 '올바른 정책들' 보다는 '행운'에 달려 있다고 보여진다는 것이다. 최근의 논문에서, 이스털리는 이러한 주장을 가일층 전개하여, 1980년 이후 발전중인 국가들의 분명한 '정책변수들의 개선'―다시 말해, 워싱턴 컨센서스의 의제에 대한 더한 집착―이, 개선과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경제 상황의 심각한 악화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제시하였다; 그 국가들의 1인당 소득 증가율의 평균값은 1960-79년간 2.5%였던 것이 1980-98년간 0%로 하락하였다.
이스털리는 워싱턴 콘센서스에 의해 지지되는 정책들의 장점들에 대해 분명하게 질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러한 정책들이 약속한 것들의 실패에 대하여 그가 제공하는 두 가지 주요 설명들은, 워싱턴 콘센서스의 포교자들이 유지하고 있는 그 정책들이 '올바르다'라는 생각에 대해 어떤 완벽한 관점에서 통렬한 비판을 구성한다. 첫째, 그는 그들이 수확체감에 종속되어 있다라고 제안하고 있다: 즉, 그 정책들을 특정 국가에 의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추구될 때, 또는 점증하는 수의 국가들에 의해 동시에 추구될 때, 그러한 정책들은 '좋은' 결과들을 산출하기를 멈춘다. 두 번째, 그리고 이스털리의 견해에서 보다 중요한 설명은 바로 '세계적인 금리의 상승, 발전도상국가들에서 외채부담의 증가, 산업 세계에서 경기후퇴, 숙련-편향(skill-bias)의 기술적 변화 등과 같은 범세계적인 요인들이 아마도 발전국가들의 경기침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아프리카 국가들을 위해 정식화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목적에서 보자면 이러한 이중적 설명에서 분명한 사실은 버그 보고서와 NPE에 의해 제시된 것이라기 보다는 라고스 계획의 기저에 깔려 있는 아프리카 위기에 대한 진단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그 설명은, 만약 그것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아프리카 지배계급들의 '나쁜' 정책들과 '허약한' 통치력은 아프리카 위기의 주요한 원인들이라면서 세계은행과 NPE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할 때, 그것의 공백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다. 오히려 그것은, 라고스 플랜의 조인국가들이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처럼, 아프리카의 위기가 세계 경제의 전적으로 구조적이고 정세적인 과정들로부터 주로 기인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세계경제의 구조적 과정들이 이스털리의 첫 번째 설명과 대략 일치하는데, 바람직한 속성들 ― 국부, 복지 그리고 권력 등과 같은 ― 과 결합된 정책들과 행위들은 아마도, 그리고 종종, [자본의] '구성의 문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다. 그러한 일반화는 자칫하면 자신의 원래 목표들을 잠식하게 되는 경쟁을 유발할 수 있다. 반대로, 세계경제의 정세적 과정들은 이스털리의 두 번째 설명과 일치한다. 왜냐하면 중요한 구조적 과정들이 1970년대의 세계적 위기를 해결해나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1980년 무렵 세계-체계 환경들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일차적으로 그것에 대한 미국의 대응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결과는, 다른 무엇보다도, 범세계적인 금리 상승의 유발, 세계적인 경기후퇴의 심화, 그리고 제3세계 국가들의 외채부담의 증가와 같은 반작용이었다. 워싱턴 콘센서스의 대리인들에 의해 장려된 '정책변수의 개선'은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이러한 변화들의 부정적인 영향에 대응하는데 아무런 소용도 없었고, 미국의 권력과 부를 다시 팽창하게 하는 경향을 강화할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러한 가능성은 현재 <뉴욕타임즈>의 칼럼들에서조차 환영받고 있다. 이 신문의 기고자인 요셉 칸(Joseph Kahn)은 최근에 멕시코 몬트레이에서 열린 금융과 발전에 관한 UN 국제회의를 보도하였다:

아마도 중국을 제외하면, 범세계적인 시장개방의 추세로부터 가장 분명하게 혜택을 얻을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나라는 미국이다. 미국으로의 엄청난 자본 유입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저축한 것 이상으로 소비할 수 있게 하며, 그들이 수출하는 것보다 많이 수입할 수 있게 한다. '세계화의 추세는 잉여자본이 주변부 국가들로부터 중심국가, 즉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라고, 조지 소로스는 말했다. 그는 몬트레이 회의에 참석하여 금융 발전을 위해, 특히 사적 자본의 증발에 대비하여 270억 달러의 풀을 만들자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지도자들에게 설득하려 하였다. … '미국 정부의 견해는 시장은 언제나 옳다는 것이다'라고 소로스씨는 말했다. '나의 견해는 시장은 거의 언제나 옳지 않다는 것이고, 그들은 제대로 규제되어야 한다'.

이른바 세계화의 희생자들이라면, 무엇보다도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인민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시장은 거의 언제나 옳지 않고, 따라서 그들은 올바르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문제는 몇몇 국가들 또는 지역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시장이 작동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고, 반대로 다른 국가/지역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 비용들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힘은 크게 보아 이스털리와 그의 공저자들이 '행운'이라고 말한 것과 일치한다. 본 논문에서 발전된 관점에서 보자면, 사실상 어느 때이건 나타나는 행운과 불운은 한 국가 또는 한 지역의 위치들이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세계 체계 내부의 구조적이고 정세적인 과정들과 관련되는 특정한 역사적 유산들에 깊은 근원들을 갖는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것을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아프리카의 비극은 진정 엄청난 불운들 때문이다―즉, 1970년대의 위기에 대한 미국의 대응으로 인해 격렬하게 경쟁적으로 변모한 세계적 환경에서 엄청나게 불리한 조건을 갖게 한 식민지 이전 그리고 식민지의 유산들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계정세의 변화에 대한 미국의 책임들이나, 새로운 조건들에서 경쟁할 수 있는 역량을 거의 갖추지 못하고 있는 아프리카의 불운이나, 둘 다 모두 자신들의 권력을 통해 1980년대의 몰락이 더욱 심화되지 않도록 그리고 그 몰락의 재앙인 사회적 결과들을 경감하는 데 실패했던 아프리카 지배계급들을 면죄해주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내가 보기에, 세 가지 가장 분명한 실패들에 대해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첫째, 아프리카의 지배집단들이 1980년대 그 지역의 경제적 몰락을 촉진시켰던 [세계-]체계의 환경들의 변화를 막아낼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 지역의 이전 경제성장 패턴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보다 현실주의적이었다면 그들은 그 몰락을 완화할 수 있었다. 이는 더욱 거대한 억제로 나아갔어야 했다―단지 확실한 소비 진작뿐만 아니라, 특히, 체계적 상황의 변화에 관한 그 지역의 취약성을 확대했던 외채의 추정수준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러한 점에서, 집단적 자급자족이라는 라고스 플랜의 요청은 올바른 목표였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너무 늦게 나왔고, 결국 아무런 행동도 독려할 수 없었다.
둘째, 일단 변화가 발생하였고, 아마도 세계은행에 의해 제시된 조건들에 따라 외채[상환일정]을 재조정하는 것보다 채무 불이행이 타격이 적었을 수도 있다. 단기적으로, 그 몰락은 더욱 심각했겠지만, 워싱턴 콘센서스의 대리인들에 의해 부과된 '올바른 정책들'의 해악의 장기적인 영향들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UNPAAERD는 처음부터 아프리카에게는 나쁜 계약이었다―무엇보다도, 일단 아프리카 국가들은 계약을 지켰지만 부유한 국가들과 그들의 대리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아프리카의 지배 집단들이 1980년대의 경제몰락을 대체하거나 완화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의 시민들의 복지에 대한 경제몰락의 영향을 완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국부(國富)와 국가 복지 사이의 관계라는 쟁점을 제시한다. 지난 반세기 이상, 1인당 GNP로 측정된, 세계적인 부의 위계구조가 상당히 안정적이라는 점은 점점 분명해지고 있다. 이는 거의 예외가 없는데, 저소득 국가들은 계속 가난하게 되는 경향이 있고, 고소득 국가들의 경우 계속 부유하게 되는 경향이 있으며, 중간소득 국가들의 경우는 양자 사이에 위치한다. 동시에, 또한 [부의 위계구조에서] 각각의 층 내에서 상이한 국가들의 시민들이 향유하는 복지 수준(다양한 사회지표들로 계측된)에 확연한 편차들이 존재한다는 점도 명백해지고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가들이 세계적인 부의 위계구조에서 민족 경제를 향상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기는 하지만, 각자의 빈곤 혹은 부의 수준이 어떻든지 간에 그 국가의 시민들의 복지를 증가(또는 감소)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항상 존재한다. 아프리카의 맥락에서 보면, 아마도 맘다니가 지지하는 탈종족화와 같은 것은 다른 어떤 전략보다도 거대한 결과들을 낳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부분의 아프리카 지배 집단들은 아마도 권력에 있다는 것 말고는 한 일이 거의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들이 미국을 포함하여, 여타 국가들과 지역들의 지배 집단들에 비해 무엇이 그리고 얼마나 부족했는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만약 우리가 부와 권력의 차이들을 고려한다면, [더군다나] 그들이 한 일은 상대적으로 더 적은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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